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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쳐야겠다.” 연개소문이 보낸 관리가 돌아갔을 때 김춘추가 김인문에게 말했다. 얼굴이 굳어져 있다. “내가 경솔했다. 저놈들은 백제하고 단단히 결속되어 있구나.” “아버님, 저를 인질로 두고 가시지요.” 김인문이 침착하게 말했지만 김춘추가 머리를 저었다. “그럴 필요도 없다. 저놈들은 우리를 어떻게 할 것인지 아직 결정하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조금전의 그놈을 보낸 것이다.” 김춘추가 옆쪽에 앉은 부사(副使) 김성준에게 말했다. “이보게. 자네와 나, 그리고 인문이하고 셋이 군관 셋만 데리고 빠져 나가기로 하세. 모두 하인으로 변장을 하고 하나씩 저택을 나가기로 하지.” “대문 밖에는 경비병도 없으니 지금 나가는 것이 좋습니다.” 무관(武官)인 김성준이 어깨를 부풀리며 말했다. “나머지 일행은 그대로 놔두지요. 알려지면 저놈들이 눈치를 챌 것입니다.” “안됐지만 하는 수 없지.”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김성준이 서둘러 방을 나갔다. 김춘추가 겉옷을 벗으면서 길게 숨을 뱉었다. “호구(虎口)에 들어왔다.” 잠시후에 영빈관을 하인 행색의 사내들이 하나씩 빠져나왔다. 영빈관 안팎으로 저택의 하인과 신라측 사신 일행이 뒤섞여서 붐비고 있었기 때문에 저택 하인 차림의 사내들이 나가는 것은 아무도 주의깊게 보지 않았다. 김춘추 일행이다. 김춘추도 두건을 눌러썼고 수염까지 깎아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연개소문의 저택 대문은 활짝 열려져서 하인과 군사들이 무리지어 오가고 있었는데 나가는 사람들은 검문하지 않는다. 무사히 대문을 나온 여섯은 곧 대로 옆길로 꺾어져서 모였다. “말을 사서 달려야 합니다.” 김성준이 눈을 치켜뜨고 말했다. “곧 발각이 될테니 그때는 도처에서 검문을 할 것입니다.” “이곳은 말이 흔합니다.” 군관 하나가 김성준에게 말했다. “먼저 남문 밖으로 나가 계시면 소인이 말을 사오지요.” “그것이 낫겠다. 우선 성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안전하다.” “올적에 보았더니 남문에서 10리쯤 떨어진 곳에 작은 개울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 개울가 주막에서 뵙지요.” “그럼 네가 말을 구해오너라.”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군관 하나가 나섰기 때문에 김춘추가 머리를 끄덕였다. “서둘러라.” 이제 김춘추 일행은 넷이 되어서 남문을 향해 발을 떼었다. 올적에도 남문으로 왔기 때문에 길은 안다. “대감, 저기 옷가게가 있습니다. 먼저 가시면 소인이 옷을 사 오지요.” 김성준이 거리 끝쪽의 옷가게를 보더니 말했다. “알았네. 먼저 가겠네.” 김성준이 떨어져 나가자 이제 일행은 김춘추 부자(父子)와 군관까지 셋이 남았다. 서둘러 걸으면서 김춘추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연개소문이 나를 잡으면 죽일 것이다.” 김인문은 대답하지 않았고 김춘추가 말을 이었다. “이곳에 온 소득은 있었다. 연개소문은 듣던대로 오만불손한 놈이었지만 고구려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구나.”
“어서 오시오.” 신라 사신 김춘추가 고구려의 4품(品) 대부사자 연백을 맞았다. 오전 사시(10시)경, 영빈관 안의 청에는 김춘추와 부사(副使) 둘이 관복 차림으로 기다리고 있다. 전갈을 받은 것이다. 대부사자 연백은 계백이다. 연개소문이 자신의 성(性)을 계백에게 붙여줘 이름까지 만들어 준것이다. 계백은 6품 대사자 전홍과 동행이다. 가볍게 목례만 한 계백이 김춘추의 앞에 앉았다. 두걸음 거리여서 숨소리도 들린다. 청 안에는 다섯 뿐이다. 김춘추는 옅게 웃음 띤 얼굴이었지만 몸이 굳어져 있다. 어젯밤 잠을 설쳤는지 눈의 흰창이 조금 흐려져 있다. 그때 계백이 입을 열었다. “대부사자 연백이 대막리지 전하의 명을 받고 몇가지 확인을 하려고 왔습니다.” “말씀하시오.” 김춘추가 똑바로 계백을 보았다. “내가 목숨을 내놓고 이곳에 온터인데 무엇을 숨기겠소? 어제 다 말씀드렸소.” “대감.” 먼저 부르고 난 계백이 김춘추를 보았다. “이번에 백제에게 대야주를 빼앗긴데다 신주(新州)까지 고구려에 반환하면 신라의 국력은 절반으로 깎이게 되오. 그것으로 왕국을 보존하실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인구 5백만에 군사 30만을 보유하고 있소. 백제를 제압 하기에는 충분한 전력(戰力)이오.” 계백의 계산으로는 인구 4백만에 군사 20만 정도가 남는다. 과장이다. 그러나 계백이 말머리를 돌렸다. “지난번에도 백제와 연합해서 고구려의 한수유역 영토를 공취한 후에 바로 백제를 배신하고 신주를 설치했지 않습니까? 이번에도 고구려와 연합했다가 고구려를 배신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번에는 내 아들을 인질로 데려왔지 않습니까?” 어깨를 편 김춘추의 눈빛이 강해졌다. “고구려는 등 뒤에 백제와 신라를 함께 두는 것이 이롭습니다. 전하께서도 알고 계실 것이오.” “백제는 대륙에도 22개의 담로가 있습니다.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대륙 진출의 야망을 품고 있지요. 3면이 바다에 막힌 이곳은 고향일 뿐이지요.” “허어, 백제인처럼 말씀 하시는군.” “고구려와 백제는 자주 소통을 했기 때문에 뜻이 같습니다.” “백제는 기습 공격에 뛰어나오.” 김춘추의 목소리에 열기가 띄워졌다. “이번에 신라 대야주를 강탈한 것처럼 백제 기동군이 평양성을 내습하지 않으리라고 보장할 수가 없을 것이오.” “대야주는 내부의 가야족이 호응해서 쉽게 무너진 것이 아닙니까?” “무슨말이오?” “우리가 듣기에 대야주는 가야국의 영토로 신라에 귀속되었지만 가야국 호족중에는 고관(高官)으로 오른 자는 김유신뿐이어서 호족들의 불만이 많았다는 것이오.” 김춘추는 숨만 들이켰고 계백의 말이 이어졌다. “이번에도 가야족 출신 성주와 하급관리들이 백제군에 호응해서 대야주가 쉽게 무너뜨린 것 아닙니까?” “잘 아시는군.” 얼굴을 일그러뜨린 김춘추가 외면하더니 뱉듯이 말했다. “그렇소. 거기에다 계백이라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백제 장수가 있었기 때문에 대야주를 잃었소.” 계백도 김춘추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리운 순간 숨을 들이켰다. 김춘추는 사위와 딸을 죽인 원수를 칭찬하고 있다. 그것을 직접 눈 앞에서 듣다니.
물러가 기다리라. 가타부타 대답을 안 하고 연개소문이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김춘추는 일어나야만 했다. 사신 일행이 청을 나갔을 때 연개소문이 단을 내려와 위쪽 평좌(平座)에 앉는다. 그리고는 계백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계백이 다가가 앉았을 때 연개소문이 막리지에게 지시해서 고관들을 물러가게 했다. 잠시 후에 청에는 연개소문과 측근 대신(大臣), 그리고 계백까지 7, 8명이 모여 앉았다. 이것이 연개소문의 성격이다. 격식에 구애받지 않고 병졸과 같이 길바닥에서 밥을 먹다가 칼을 5자루나 차고, 매고 계단 위의 용상에 앉아 거드름을 피운다. 연개소문이 측근 대신들에게 묻는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용이 제 발로 그물 안으로 들어왔다. 그때 막리지 양성덕이 대답했다. 양성덕은 남부대인(南部大人)으로 백제, 신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의 장(長)이다. 죽여야 합니다. 김춘추 저놈이 영민하고 담대하다는 소문이 났으나 이번에는 제가 제 꾀에 넘어간 경우올시다. 오만함 때문에 실수를 한 것이지요. 이때 죽여서 후환을 남기지 말아야 합니다. 맞습니다.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가 동의했다. 살려 보낼 이유가 없습니다. 여왕의 약조는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이고 김춘추는 아들이 많습니다. 죽입시다. 죽여서도 득 될 일이 없습니다. 그렇게 말한 자는 동부대인이며 막리지인 요영춘이다. 요영춘이 말을 이었다. 김춘추가 죽으면 진골 왕족 중 하나가 신라왕이 될 것입니다. 지금 김춘추는 사위인 김품석을 잃고 날개 하나를 잃은 새 꼴입니다. 김유신 하나만 남아있지요. 이때 김춘추를 품으면 신라를 배후에서 조롱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 연개소문이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고 계백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계백, 그대 생각은 어떤가? 전하, 저는 고구려 신하가 아닙니다. 쓴웃음을 지은 계백이 대답했지만 연개소문이 정색하고 말했다. 동맹국 장수의 견해를 말해보라. 예, 김춘추는 지금 다급합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적지에 올 만큼 다급한 것입니다. 옳지. 모두의 시선을 받은 계백이 말을 이었다. 김춘추는 전부터 왕의 재목이라고 안팎에 소문이 났습니다. 과연 용기와 과단성, 재치가 뛰어난 인물입니다. 계속하라. 지금 김춘추를 죽인다면 신라는 큰 손실이 될 것입니다. 차기 왕이 누가 되었건 김춘추만한 재목이 없을 테니까요. 죽여야겠군. 김춘추가 다급해서 경솔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밤에 죽이고 술을 마셔야겠다. 그때 계백이 시선을 내리면서 말했다. 김춘추도 지금쯤 후회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때 연개소문이 눈을 치켜뜨고 계백을 보았다. 계백, 그대가 김춘추를 만나보지 않겠는가? 고구려 관리로 위장하고 말이다. 계백의 시선을 받은 연개소문이 빙그레 웃었다. 내 측근으로 시국을 논하려고 왔다고 하면 김춘추가 온갖 요설을 쏟아놓을 것이다. 말이 많으면 실수가 따르는 법, 그대가 가서 듣고 오라. 연개소문의 시선이 옆쪽의 대사자 관직의 사내에게로 옮겨졌다. 너는 계백공을 안내하고 말을 거들어라. 김춘추하고 독대를 하다니, 이것을 절호의 기회라고 하는가? 그보다 연개소문의 용인술이 놀랍다. 변화무쌍하지 않는가?
그때 연개소문이 다시 물었다. “그대의 사위 김품석이 싸우다 죽었다고 들었다. 사위를 죽인 적장의 이름을 아는가?” “예, 압니다.” 계백은 김품석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았다. 바로 세걸음 거리에 김춘추가 앉아있는 것이다. 그때 김춘추가 어깨를 펴고 대답했다. “백제 나솔 관등의 계백이라고 들었습니다.” “허, 그런가? 이름도 알고 있구만.” “예, 제 사위를 죽이고 대야성을 공취한 일등공(功)으로 한솔로 관등이 올랐다고도 들었습니다.” “신라는 첩자를 많이 보낸다고 들었는데 과연 그렇구나.” “황송합니다.” “그럼 그대가 목숨을 걸고 나를 찾아온 이유를 듣자.” “예, 대막리지 전하.” 어깨를 편 김춘추가 똑바로 연개소문을 올려다 보았다. “먼저 신라국 여왕께서 보내신 밀서를 올리겠습니다.” “밀서?” 되물은 연개소문이 보료에 팔을 기대면서 웃었다. “그대가 펴서 읽으라. 내가 고구려 고관들과 함께 듣겠다.” 그때 계백은 김춘추가 어깨를 잠깐 올렸다가 내리는 것을 보았다. 그러더니 뒤쪽 부사(副使)를 향해 손을 뻗었다. 밀서를 내놓으라는 표시다. 빠르다. 그리고 행동에 강단이 있다. 부사가 서둘러 붉은 두루마리 밀서를 건네자 김춘추가 매듭을 풀고 펼쳤다. 붉은색 비단에 금박을 입힌 글씨다. 곧 김춘추의 목소리가 청을 울렸다. “신라 여왕 덕만이 고구려 대막리지 전하께 글로써 인사와 함께 약조를 드리옵니다.” 김춘추가 잠깐 숨을 고르더니 계속했다. “신(臣) 덕만은 백제의 공격을 받아 사직을 보존하기 어려운 지경에 빠진 터라 다음과 같은 약조를 드리니 살피시어 신라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계백은 김춘추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보았다. 이것은 신하국(臣下國)으로 고구려를 왕국(王國)으로 모신다는 말이다. 그런데 김춘추의 목소리는 낭랑했고 어깨는 펴졌다. 옆모습만 보였으나 흰 얼굴은 상기되어 있다. 계백이 소리 줄여 숨을 뱉었다. 문득 의자대왕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의자대왕은 절대로 이렇게 못한다. 그때 김춘추가 다시 밀서를 읽는다. “백제에 사신을 보내시어 출병을 거두도록 해주시면 한수 유역의 신주(新州)를 당항성 한곳만 빼고 고구려에 반환토록 하겠습니다.” 계백도 연개소문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옮겨져 있는 것을 보았다. 얼굴에 옅은 웃음기까지 떠올라 있다. 계백에게 고구려의 4품 관등인 대부사자 관복을 입히고 청에 앉아 김춘추를 살펴보라고 권한 것이 연개소문이다. 백제에 대한 배려였지만 짓궂다. 김춘추의 목소리가 청을 울렸다. “고구려가 당과 싸울 적에 백제가 등을 치지 못하도록 신라는 후위 역할을 맡겠습니다. 그 증거로 김춘추의 아들 김인문을 고구려에 인질로 두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김춘추가 밀서를 내려놓았을 때 청 안이 조금 술렁거렸다. 인질이 있단 말인가? 연개소문도 눈을 가늘게 뜨고 이쪽을 내려다 본다. 계백의 시선이 김춘추 뒤쪽 부사(副使) 두 명에게 옮겨졌다. 하나는 젊다. 이자가 김춘추의 아들인가? 아들까지 데려왔단 말인가?
연개소문의 대저택 청 안, 오늘도 붉은색 계단 위의 보료에 기대앉은 연개소문의 위용은 왕 이상이다. 계단 아래쪽 청에는 고관들이 좌우로 갈라져서 마주보고 앉았는데 안쪽 계단 밑에서부터 관등 순(順)으로 청 입구 쪽까지 20여 줄이 되었으며 뒤쪽에도 대여섯이 앉아있는 터라 1백여 명의 고관이 마주보고 앉은 셈이다. 그러나 청 안은 숨소리도 나지 않는다. 화려한 금박, 은박 장식을 붙인 붉고, 누렇고, 푸른 관복, 청 안에는 붉은색 아름드리 기둥이 수십 개 늘어섰으며 벽과 천장에는 금박을 입힌 온갖 조각이 새겨졌다. 사방이 탁 트인 청은 넓어서 끝이 아득하게 보였지만 계단 위 용상에 앉은 연개소문의 숨소리도 끝 쪽까지 들린다. 소리가 기둥에 부딪쳐 사방으로 새지 않도록 건축되었기 때문이다. 그때 청 끝의 마당에 신라 사신 일행이 들어섰다. 안내해온 관리가 청으로 올라오기 전에 소리쳐 보고한다. “신라 사신 이찬 김춘추가 대고구려 대막리지 전하를 뵈오러 왔습니다!” 그것을 청 안의 집사부 대관이 받아서 다시 외친다. 그동안에 김춘추 일행은 청 아래쪽 계단에서 기다리고 있다. “신라 사신 이찬 김춘추가 대막리지 전하를 뵈오러 왔습니다!” 대관의 말을 들은 계단 밑의 전내부 막리지가 연개소문을 올려다보았다. 연개소문이 머리를 끄덕이자 막리지가 곧 대관에게 지시했다. “김춘추를 청에 오르도록 하라.” “예.” 대답한 대관이 청 아래의 관리에게 소리쳤다. “김춘추를 청에 오르도록 하라!” “예.” 그때서야 관리의 안내로 김춘추가 계단을 올라 청으로 들어선다. 김춘추 일행은 여섯. 신라 이찬 복장의 김춘추가 앞장을 섰고 부사(副使) 둘이 각각 비단으로 싼 상자를 두 손으로 받쳐 든 채 뒤를 따랐으며 셋은 보좌역으로 그 뒤를 따른다. 이윽고 김춘추가 좌우로 갈라 앉은 고구려 고관 사이를 지나 연개소문이 앉은 계단에서 10보 거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미리 관리로부터 지시를 받은 것이다. 그때 막리지가 연개소문에게 보고했다. “전하, 신라 이찬 김춘추가 왔소이다.” “그러냐?” 연개소문의 목소리가 처음 울렸다. 연개소문이 눈을 가늘게 뜨고 계단 아래쪽 10보 거리의 김춘추를 내려다보았다. “네가 김춘추냐?” “예, 전하.” 김춘추가 두 손을 모으고 연개소문을 올려다보았다. 무릎을 꿇은 채다. 시선이 마주치자 연개소문이 빙그레 웃었다. “네 여왕이 아직 처녀라던데, 내 측실로 데려올 생각은 없느냐?” “전하, 고구려, 신라의 동맹을 위해서라면 그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김춘추가 똑바로 연개소문을 보았다. 눈이 맑고 피부는 미끈하다. 곧은 콧날, 입술에는 옅은 웃음기까지 띄워져 있다. “흠.” 연개소문이 김춘추의 응답에 조금 감동을 받은 것 같다. 어깨를 부풀렸다가 내린 연개소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백제에게 대야주를 잃고 절박해졌구나. 네 사위가 대야군주 아니었느냐?” “예, 전하.” “사위와 딸이 모두 죽었지?” “예, 전하.” 계백은 김춘추가 심호흡을 하는 것을 보았다. 김춘추는 지금 계백의 바로 앞에 앉아있다. 계백이 옆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계백이 고구려 관리 복장으로 앉아있기 때문이다.
수렵 사흘째 되는 날 아침, 사신 일행과 식사를 마친 계백이 상을 물렸을 때 연개소문의 위사장 연가복이 서둘러 진막 안으로 들어왔다. 장군, 전하께서 급히 오시랍니다. 화청, 유만과 함께 앉아있던 계백이 긴장했다. 무슨 일이오? 연가복은 연개소문의 친척이다. 연씨 가계여서 뼈대가 굵고 칼을 3개나 찼다. 예, 신라의 김춘추가 국경을 넘어서 오고 있다고 합니다. 연가복의 수염투성이 얼굴에서 눈이 웃음을 띠고 있다. 사신으로 국경을 넘어온 것입니다. 사신으로? 예, 전하께서 그 일로 뵙자고 합니다. 계백이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따라 일어선 화청이 쓴웃음을 지었다. 고구려에 백제, 신라의 사신이 동시에 들어왔군요. 다급했기 때문이지요. 유만이 따라 웃었다. 뭐라고 말할지 뻔합니다. 계백은 서둘러 연가복을 따라 진막을 나왔다. 연개소문의 진막은 바로 옆쪽이다. 안으로 들어서자 측근 고관들과 함께 앉아있던 연개소문이 웃음 띤 얼굴로 맞는다. 위사장한테서 들었는가? 예, 전하. 김춘추가 남부(南部)고합성에 들어왔으니 사흘 후면 이곳에 닿을 거네. 어깨를 편 연개소문이 짧게 웃었다. 그놈이 다급했어. 허나 대담합니다, 전하. 앞쪽에 앉은 계백이 연개소문을 보았다. 차기 왕을 노리는 인물이 목숨을 걸고 적진에 단신으로 들어온 것 아닙니까? 적이지만 용기가 가상합니다. 칭찬인가? 예, 전하. 과연 그렇구나. 머리를 끄덕인 연개소문의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떠올라 있다. 계백, 김춘추가 뭐라고 말할지 예상이 되는가? 예, 전하. 말해보라. 백제가 신라의 명운을 끊게 되었으니 이제 고구려는 등 뒤로 강적을 맞게 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맞는 말이지. 주위가 조용해졌고 계백의 말이 이어졌다. 고구려 영토였던 한수 하류의 신주(新州)를 1백 년 만에 반환한다고 할 것입니다. 하긴 내버려두면 곧 백제에게 빼앗길 테니까. 고구려가 대륙 정벌을 하는 동안 신라는 백제를 견제하고 신하(臣下)국으로 조공을 바친다고도 할 것입니다. 여왕을 내 첩으로 준다는 말은 안할까? 연개소문이 정색하고 말했기 때문에 둘러앉은 고관들은 눈만 끔벅였다. 그때 계백이 쓴웃음을 지었다. 전하, 김춘추와 비담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시지요. 그렇군. 마침내 연개소문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이더니 둘러앉은 고관들을 보았다. 너희들도 들었느냐? 예, 전하. 고관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지난번 영류왕 건무를 참살했을 때 연희장에 모였던 고구려 5부대인(大人), 물론 서부대인 연개소문을 제외한 4부대인과 고관 전원을 죽였다. 그래서 모든 고관은 연개소문의 심복으로 심어진 셈이다. 고관들이 일제히 대답했을 때 연개소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신라 차기 왕(王)을 정해야 되겠구나. 자, 돌아가자.
그날 저녁, 황야에 수십개의 진막이 세워졌고 그 중앙에 위치한 대형 진막 안에서 10여명이 둘러앉아 저녘을 먹는다. 오늘 낮에 사냥한 노루와 멧돼지, 꿩과 토끼가 놓여졌고 그것을 안주로 술을 마시는 것이다. 연개소문의 좌우에는 세 아들이 앉았는데 남생(南生), 남건(南建), 남산(南産)이다. 그 옆에는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가 앉았고 심복 축조 셋에다 손님으로 계백과 화청, 유만이다. 술잔을 든 연개소문이 세 아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잘 들어라. 힘을 합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고구려와 백제가 연합하면 대륙의 패자(覇者)가 되겠지만 갈라지면 망한다. 알겠느냐?” “예, 아버님.” 세 아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남생(南生)이 장남이며 남건이 둘째, 남산이 셋째다. 세명 모두 체격이 큰 20대이며 모두 용맹한 무장(武將)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연개소문이 말을 이었다. “당은 신라를 부추켜 백제와 고구려의 대륙 진출을 방해해왔지만 이제야말로 기회가 왔다. 백제가 대야주를 공취함으로써 신라가 뒤를 칠 염려가 없을 때 우리는 대륙을 정벌한다.” 진막 안이 숙연해졌다. 광개토대왕, 장수왕에 이어서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집권 하에 기회를 잡은 것이다. 백제 또한 동성왕 시대에 대륙에 기반을 닦은 이후로 다시 기회를 맞게 되었다. 술좌석이 끝났을 때는 자시(12시) 무렵이다. “계백, 그대는 잠깐 남으라.” 모두 일어나 인사를 하고 진막을 나갈적에 연개소문이 계백에게 말했다. 잠시후에 진막 안에는 연개소문과 계백 둘이 남았다. 진막 기둥에 걸어놓은 기름등이 흔들리면서 연개소문의 얼굴에도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때 연개소문이 입을 열었다. “영웅 항우도 적토마와 함께 죽었고 한고조 유방 또한 죽어서 이미 흙이 되었네.” 숨을 들이켠 계백을 향해 연개소문이 빙그레 웃었다. “천하를 호령하던 황제도 언젠가는 말씻는 종과 똑같이 죽는다는 말이네.” 계백은 시선만 주었고 연개소문의 말이 이어졌다. “인간 수명처럼 권력도 끝이 있어, 무슨 말인지 아는가?” “알겠습니다, 전하.” “끝없는 욕심이 제 명을 재촉하고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는 법이지.” “....” “내가 건무를 죽여서 토막을 낸 것은 고구려를 다시 일으키겠다는 욕심이었어.” 어깨를 부풀린 연개소문의 두 눈이 번들거렸다. “그러나 내 한계는 알아. 무리한 욕심은 부리지 않겠다는 말이네.” 연개소문이 눈동자의 초점을 잡고 계백을 보았다. “내 아들 셋을 보았지?” “예, 전하.” “남생이 그대보다 세살 아래인 스물셋이고 남건이 스물하나, 남산이 스물이야.” 눈을 가늘게 뜬 연개소문이 말을 이었다. “세놈 다 용장(勇將)이지. 허나 멧돼지처럼 저돌적이고 욕심만 충천한 놈들이야. 일국(一國)을 다스리기는 커녕 1천명 군사나 지휘할 수 있는 놈들이지. 내가 그놈들 그릇을 알아.” “....” “내가 죽으면 세놈이 서로 싸울 거네, 나라가 어떻게 되건 권력을 가지려고 서로 죽이겠지.” “....” “측근, 또는 참모의 말 따위는 듣지도 않는 놈들이야. 내가 잘못 가르쳤어.” “....” “내가 죽기 전에 고구려와 백제를 통일시키고 싶다고 대왕께 전하게.” 계백이 숨만 들이켰을 때 연개소문의 말이 이어졌다. “고주몽의 아들 온조가 백제를 세웠다가 다시 아버지의 나라 고구려를 품에 안게 되는 것 아닌가? 난 내 아들놈들한테 고구려를, 이 대망(大望)을 맡기고 싶지가 않네.” 이것이 연개소문의 대답이다.
“당(唐)의 인구는 수(隨)의 전성기 때 인구의 삼분의 일 밖에 안 되네.” 말을 몰고 수렵장으로 들어서면서 연개소문이 소리치듯 말했다. 목소리도 큰데다 거침없는 성품이어서 들판에서도 멀리까지 퍼진다. 연개소문이 계백을 보았다. “백제의 주민은 7백만이 넘어. 그렇지 않은가?” “예, 전하.” “고구려도 7백만이야.” 계백이 알기로는 고구려는 650만이다. 백제는 7백보다 많은 720만이고 신라는 5백만쯤 되었다. 연개소문의 목소리가 들판을 울렸다. “고구려와 백제만 합해도 1400만이야. 지금 당은 1500만 정도다. 더구나 이민족이 섞인 집단이야.” “그렇습니다.” “고구려, 백제는 같은 왕조에서 분리된 형제국이다. 그렇지 않은가?” “예, 전하” 6백여년 전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 고주몽은 졸본부여왕의 둘째딸 소서노와 결혼하여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낳았다. 그 온조가 백제의 시조인 것이다. 연개소문이 입을 다물었기 때문에 황야에 잠깐 말굽소리만 울렸다. 지금 2백여기의 기마대가 황야를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연개소문의 시조(始祖)이야기는 부질없다. 6백여년 전의 세월이 흐르면서 고구려와 백제는 수많은 전쟁을 치렀다. 서로 왕까지 죽이고 배신을 한적도 한두번이 아니다. 다시 머리를 돌린 연개소문이 계백을 보았다. 눈이 깊은 우물같다. “백제 대왕이 사신으로 그대를 보낸 이유를 짐작하겠다.” 연개소문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그대가 대륙 서쪽의 백제령 담로에서 당군(唐軍)과 수없이 전투를 치렀지 않은가?” “네, 그렇습니다.” “전략을 상의하라는 것이겠지.” “네, 대왕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군(唐軍)의 전력은 어떤가?” “강합니다.” 연개소문의 시선을 받은 계백이 정색했다. “이세민은 군을 재정비하고 유능한 인재를 등용한데다 세금을 감면하고 부패한 관리를 숙청해서 인망이 높습니다.” “……” “현무문의 난을 일으켜 제 형제들과 그 자식들까지 몰사시킨 패륜을 선정으로 보상하려는 것 같습니다.” “무서운 놈이지.” “저와 함께 온 부사(副使) 나솔 화청이 한인으로 이연의 막장이었다가 백제에 투항한 인물입니다. 화청이 대막리지 전하께서 옛날 이연을 방문하신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뒤에 따라 오는가?” “부를까요?” “부르라.” 계백이 소리쳐 부르자 화청이 금방 다가와 마상에서 허리를 꺾어 군례를 했다. “늙었구나.” 화청을 본 연개소문이 대뜸 말하더니 묻는다. “태원에서 나를 보았느냐?” “그때 저는 검문소에 배치되어서 말씀만 들었습니다. 전하.” “그래도 인연이 기가 막히구나. 그후로 이연이 반란을 일으켰지?” “예, 전하. 고구려 서부대인의 자제분이 밀사로 오셔서 고구려군이 뒤를 밀어준다는 소문을 냈기 때문에 군사들이 모인 것입니다.” 그때 연개소문이 빙그레 웃었다. “이세민이 그런 소문을 냈겠지.” “예, 전하.” “내가 예상을 했다. 그래서 내가 태원유수 이연을 찾아간 것이니까.” 계백이 숨을 들이켰다. 그때 연개소문이 말을 이었다. “내가 반란을 종용한 셈이지. 이세민이 말려들었고.”
다음날 오전 사시(10시) 무렵, 오늘은 백제 사신 일행과 평양성 위쪽 50리쯤 떨어진 수렵장에서 사냥을 가기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연개소문이 늦게 청에 나왔다. 오늘부터 사흘간 수렵장에서 머물 예정인 것이다. 백제 사신에 대한 고구려 최고통치자의 최상급 대접이다. 함께 사냥을 가서 같이 사흘을 지낸다는 경우는 부자(父子)간, 형제간보다 더 가깝다는 것을 의미한다. 청에 앉은 연개소문이 측근인 태대형 고준에게 물었다. “어젯밤 백제 사신들이 잘 지냈느냐?” “예, 다 잘 지냈습니다. 하오나…….” “하오나 뭐?” “계백공이 여자와 동침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연개소문의 눈썹이 솟아 올라갔다. “마음에 들지 않았단 말이냐?” “아닙니다, 전하.” “그러면?” “같이 침상에서 잤다고 합니다.” “답답하군. 그럼 동침한 것 아니냐?” “예.” “이놈이 답답한 놈이군.” 성질이 급한 연개소문이 눈을 흘겼다. “동침하지 않았다고 했지 않느냐!” 연개소문의 목소리가 청을 울렸다. 말주변이 없는 고준이 쩔쩔매었을 때 옆에 서있던 막리지 요영춘이 나섰다. “계백공이 여자하고 같은 침상에서 잤지만 상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허, 하초가 부실한가? 겉은 멀쩡한 무장이던데….” 연개소문의 이마에 금방 주름살이 만들어졌다. 그때 고준이 나섰다. “아닙니다. 그것 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전하.” “넌 답답하니까 입 다물어라.” 말을 막은 연개소문이 요영춘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 “예, 계백공이 여자한테 그랬다고 합니다. 내가 정혼을 약속한 여자가 있다. 그런데 그 여자하고 아직 밤을 같이 보내지도 않았는데 너를 품는다는 것이 도리에 어긋나는 것 같다. 그러니 같이 침상에서 자되 관계하지는 못하겠다.” 요영춘이 술술 말했을 때 연개소문은 다 듣고 나서도 한동안 눈만 끔뻑였다. 청안에 둘러앉은 무장, 고관들도 모두 입을 다물어서 숨소리도 나지 않는다. “허, 참.” 마침내 연개소문의 탄식이 청을 울렸다. “백제 무장의 인내심이 신(神)의 경지에 이르러있구나.” 연개소문이 말을 잇는다. “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도 그렇게는 못하겠다. 너희들 중에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못합니다.” 대번에 고준이 말했을 때 연개소문이 머리를 끄덕였다. “너야 당연히 못하겠지.” 모여 앉은 무장 고관들의 콧구멍이 벌름거리거나 어금니를 물어서 볼 근육이 단단해졌다. 모두 웃음을 참는 것이다. “정혼한 여자가 있는데 아직 관계를 못했다니, 이런 답답한 일이 있나? 여자가 병에 걸리기라도 했다는 거냐?” “아닙니다.” 어깨를 부풀린 고준이 나섰다. “이번에 대야성 싸움에서 죽은 신라의 투항무장 진궁의 딸이 바로 계백공의 부인이 됩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이냐?” “예, 다름이 아니고….” 이번에는 고준이 기를 쓰고 설명을 했고 연개소문은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 이윽고 고준의 설명이 끝났을 때 연개소문이 다시 탄복했다. “으음, 그래도 나는 참지 못했을 텐데 계백은 용사다.”
“바로 그분이 대막리지셨군요.” 영빈관으로 돌아오는 계백에게 다가온 부사(副使) 화청이 열에 뜬 목소리로 말했다. 영빈관은 연개소문 대저택 안이어서 사신 일행은 걸어가고 있다. “무슨 말이야?” 계백이 묻자 화청이 옆으로 다가와 걷는다. 이제는 얼굴까지 상기되어 있다. “한솔, 제가 태원유수 휘하 막장이었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랬지.” 이제는 부사(副使) 유만까지 옆으로 다가왔다. 화청이 말을 이었다. “저는 그때 성밖 검문소를 지키고 있었는데 유수한테 고구려 밀사가 왔다는 소문이 났습니다.” “밀사가?” “예, 밀사가 유수를 만나고 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소문이 났어?” 그때 화청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지금에야 내막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솔.” “무슨 말이야?” “그 밀사는 대막리지가 맞습니다.” “그런가?” “그런데 그 소문은 이세민이 일부러 퍼뜨린 것 같습니다.” 화청이 거침없이 말을 잇는다. “그 당시는 수(隨)의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가장 두려운 세력이 동북방의 고구려였지요. 양제의 대군을 두 번이나 몰사시킨 고구려가 쳐들어오면 반란군은 풍비박산이 될 것이었고 수는 단숨에 멸망한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거든요.” “그렇겠군.” “그런데 대막리지가 다녀가셨단 말입니다.” 화청의 얼굴에 다시 웃음이 떠올랐다. “어떤 소문이 난지 아십니까? 유수 이연의 뒤를 고구려 대군(大軍)이 밀어주기로 약속을 했다는 것입니다.” “아하.” “그러자 주저하던 장졸들도 이연, 이세민을 따르게 되었던 것이지요.” “과연.” “이세민이 소문을 퍼뜨린 것입니다.” “간교한 놈이 맞군요.” 유만이 그렇게 말했지만 계백은 숨만 들이켰다. 이세민의 빈틈없는 성품을 느꼈기 때문이다. 전시(戰時)에 맞는 군주가 있고 평시(平時)에 어울리는 군주가 있다고 했다. 이세민이 전시에 어울리는 군주다. 그날 밤 침소에 들었던 계백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침대 옆쪽에 여자 하나가 앉아있다가 일어섰기 때문이다. “누구냐?” 놀란 계백이 묻자 여자가 시선을 내린 채로 대답했다. “밤 시중을 들라는 분부를 받았습니다.” “이런.” 방안에는 양초를 여러개 켜 놓아서 여자의 자태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림자가 분명한 밤에는 여자의 모습이 더욱 선명해진다. 여자는 미색이다. 분홍빛 치마 저고리를 입었고 허리끈을 맨 허리는 잘록했지만 가슴과 엉덩이는 크다. 한동안 여자를 응시하던 계백이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반강이라고 합니다.” 고분고분 대답한 여자가 계백의 뒤로 가더니 겉옷을 벗겼다. 익숙한 태도다. 계백이 뒤에 선 여자에게 다시 물었다. “시중들 여자는 나한테만 왔느냐?” “아닙니다. 부사(副使), 사신 일행으로 온 군사까지 모두 여자가 갔습니다.” “어허.” 그러니 정사(正使)께서도 저를 그냥 보내지 마십시오.” 여자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띄워져 있다. 겉옷을 벗은 계백에게 여자가 헐렁한 침소 옷을 건네주면서 말했다. 이제 앞에서 본 여자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풀려 있다. “이곳은 고구려입니다. 고구려의 풍습을 따르시는 게 낫습니다.” 그때 계백이 얼굴을 펴고 웃었다. “고구려 여자들이 기가 세구나.”
그때 연개소문이 계백에게 말했다. 나는 등에 붙은 거머리를 떼어내야 하고 그대의 백제는 옆구리를 물려는 여우를 쳐야 되지 않겠는가? 예, 전하. 계백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연개소문은 당(唐)을 거머리로 비유했다. 엄청난 비하다. 어깨를 편 연개소문이 말을 이었다. 이제 백제가 신라 우측의 대야주 42개 성을 공취했으니 신라는 영토의 3할을 잃었다. 여왕의 안위도 위험해질 것이야. 계백의 시선을 받은 연개소문이 빙그레 웃었다. 상대등 비담이 차기를 노리고 있지만 김춘추가 만만한 놈이 아니야. 담로에서 성장한 계백은 신라 내부 사정에는 익숙하지 못하다. 계백은 듣기만 했고 연개소문이 말을 이었다. 비담 일파는 왕위나 노리는 가소로운 놈들이지만 김춘추는 신라를 이끌어갈 놈이야. 더구나 김유신과 피로 엮인 사이다. 두 놈이 신라의 기둥이지. 예, 전하. 그때 무관들이 다가와 연개소문과 계백 앞에 국그릇만한 술잔이 놓인 작은 상을 놓고 갔다. 술잔에는 술이 가득 담겨 있다. 계백공, 들라. 술잔을 든 연개소문이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나중에 마시고 나하고 그대하고 먼저 한잔씩 하자. 예, 전하. 연개소문이 벌컥이며 술을 마셨고 계백도 술잔을 들었다. 단숨에 잔을 비운 연개소문이 술잔을 내려놓더니 계백을 향해 웃었다. 내가 20여년 전 대륙을 유람했었는데 그때 태원유수 이연과 그의 아들 이세민을 만났었네. 계백이 숨을 들이켰다. 이연은 곧 당의 고조(高祖)이며 이세민은 지금의 당 태종이다. 연개소문이 말을 이었다. 이연은 고구려 막리지의 아들인 나를 융숭하게 대접했는데 이세민을 시켜 근처 명승지를 안내해 주었네. 계백의 표정을 본 연개소문이 빙그레 웃었다. 이세민이 한 말이 기억나네. 내가 천하의 영웅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이라고 하더군. 물론 내가 고구려인이라 듣기 좋게 한 말이겠지만 그때 이연은 수나라 태원유수였고 양제의 1, 2차 고구려 원정이 실패로 끝난 후였거든. 그렇군요. 이연은 이미 반심(反心)을 굳힌 터라 고구려 막리지의 아들인 나를 융숭하게 대접한 거야. 연개소문의 목소리가 청을 울렸다. 그때 이세민이 그랬어. 제가 아버지를 부추겨 난을 일으킬 테니 고구려는 등을 치지 말아달라고 말이네. 이세민이 말씀입니까? 그놈이 그때부터 반란의 주역이었어. 애비 이연은 이세민이 시키는 대로만 했고. 과연. 그러다 이연이 장남 건성을 태자로 세웠으니 이세민이 가만있겠는가? 현무문의 난을 일으켜 건성, 동생 원길의 자식들까지 몰사시켰지. 전하께서는 이세민과 그런 인연이 있으셨군요. 그런 이세민한테 개처럼 굽신거렸던 건무는 왕이 될 놈이 아니었어. 이세민이 내가 건무를 죽이고 사지를 고구려 전역에 보내 전시했다는 것을 들었을 거야. 정신이 번쩍 들었겠지. 나한테 두 손으로 술잔을 건네었던 그때를 떠올렸을 것이라고. 영웅이십니다. 백제와 고구려가 힘을 합치면 이세민이는 쥐구멍에다 대가리를 박을 거야. 그때 계백이 의자왕의 밀서를 꺼내 연개소문에게 내밀었다. 백제 대왕께서 당과의 결전에 백제도 군사를 내놓는다고 하셨습니다.
평양성, 대막리지 겸 대대로, 5부(部) 전대인의 수장(首長) 연개소문의 저택은 왕궁 못지않았다. 계백 일행이 대막리지 궁(宮)에 닿았을 때는 다음날 오후 술시(8시) 무렵, 주위는 어둠에 덮여 있었지만 저택은 휘황한 불빛을 내품고 있다. 활짝 열린 대문 좌우로 군사들이 도열해 섰고 횃불을 밝혀서 대낮같다. 백제 사신을 맞는 것이다. 장군 복장의 사내가 대문 앞에서 말에서 내리는 계백에게 다가왔다. “대막리지 전하의 명을 받고 백제 사신을 맞습니다. 장군 윤현입니다.” “백제 사신 계백입니다.” 인사를 나눈 계백이 부사(副 ) 화청과 유만을 소개했다. 연개소문의 대접은 융숭했다. 대문을 2개나 통과하는 동안 도열한 군사는 수백 명이다. 계백일행은 안쪽 영빈관으로 안내되어 여장을 풀었다. “내일 오전에 전하께서 부르실 것이다.” 윤현이 계백에게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그동안 여독을 푸시기 바랍니다.” 영빈관은 2층 건물로 방이 수십 개에 청이 딸려있고 시중드는 하녀만 수십 명이다. 불은 대낮같이 밝힌 청에서 진수성찬으로 저녁을 먹으면서 화청이 감동한 표정으로 계백에게 말했다. “고구려 대막리지의 위용이 왕보다 윗길이라고 하더니 과연 그렇군요.” 목소리를 낮춘 화청이 말을 이었다. “백제 입장으로는 건무가 왕이었을 때 보다 지금이 훨씬 유리하지요.” 영양왕 건무는 연개소문에 의해 죽임을 당한 후에 온 몸이 토막으로 잘려 전국에 전시되었던 것이다. 당(唐)에 굴종한 모습을 보인 벌이었다. 더구나 왕이 참석한 대연회장에 모인 고구려 고관 2백여 명을 모조리 참살한 것이다. 한 명도 살려주지 않았다. 연개소문의 잔학성은 곧 공포심과 함께 위압감으로 만방(萬邦)에 전파되었다. 당(唐) 조정에서는 고관뿐만이 아니라 황제까지도 연개소문의 이름이 나올 때는 서늘한 기운을 느낀다고 할 정도다. 다음날 오시(12시) 무렵, 계백과 화청, 유만이 관복을 갖춰 입고 연개소문이 좌청하고 있는 내궁의 대정청으로 들어섰다. 사방 2백자(60m)가 넘는 대정청에는 1백여 명의 고구려 고관들이 좌우로 나뉘어서 앉아있었는데 앞쪽에 붉은색 천이 깔린 계단 5개가 놓여졌고 그 뒤에 연개소문이 앉아있다. 왕보다도 더 위압적인 배치다. 안내역을 맡은 관리가 계단 10보쯤 앞에서 멈춰서더니 연개소문을 올려다보았다. 말했다. “대막리지 전하, 백제국 사신이 뵈러 왔습니다.” “그러냐?” 연개소문이 그렇게 말을 받았는데 목소리가 우렁찼다. 그 순간이다. 연개소문이 선뜻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계단을 내려왔다. 계백은 숨을 들이켰다. 연개소문은 소문대로 칼을 5자루나 차고 있다. 양쪽 허리에 2개씩, 그리고 등에도 비스듬히 한 자루를 매었다. 날렵하게 계단을 내려 온 연개소문이 계백의 세 걸음 앞으로 다가와 섰다. 두 눈을 치켜뜬 연개소문의 모습에서 위압감이 풍겨나왔다. 계백도 장신이지만 연개소문은 비슷한 체구다. 그때 연개소문이 말했다. “계백공인가?” “네, 대막리지 전하.” 계백이 두 손을 모으고 연개소문을 향해 절을 했다. “백제 대왕의 사신 계백입니다.” “잘 오셨어.” 머리를 끄덕인 연개소문이 그 자리에 앉으면서 계백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계백공, 거기 앉게. 뒤쪽 일행도 앉아.” “예, 전하.” 파격이다. 계백은 놀라 숨을 들이켰다가 곧 무릎을 꿇고 앉았다. 뒤쪽의 화청과 유만도 앉는다. 관리들이 서둘러 연개소문과 계백 일행에게 방석을 가져와 앉도록 했다. 이윽고 편하게 앉은 연개소문이 웃음 띤 얼굴로 계백을 보았다. “계백공, 그대가 가야군주 김품석의 목을 베었다고 들었다. 맞는가?” “예, 전하.” “장하다. 오랜만에 용사를 보게 되는구나.” 연개소문의 목소리가 대정청을 울렸다. “기습군 1천으로 내성에 진입했다지? 성안에는 2만 가까운 신라군이 있었다면서?” 연개소문의 두 눈이 번들거리고 있다. 이때 연개소문은 43세다. 김춘추와 동갑이다.
“소인은 아스카의 백제방(百濟方)에서 10년을 살았습니다.” 신주(新州)땅, 산비탈의 그늘에서 잠시 쉴때에 하도리가 계백에게 말했다. 오후 미시(2시) 무렵, 아침 일찍 항안성을 떠나 1백리쯤 북상한 것 같다. 아스카의 백제방 방주(方主)는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이다. 작년에 방주로 부임한 부여풍은 20세의 혈기왕성한 왕자다. 쪼그리고 앉은 하도리가 말을 이었다. “거기서 백제어를 익혔고 4년전에 극우 관직을 받고 본국 근무를 자원해서 항안성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하도리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하도리 또한 파란만장한 인생 같다. 화청이 한인(漢人)으로 투항한 무장이고 하도리는 왜인으로 귀화한 입장이다. 백제는 대륙에 속령인 ‘담로’를 설치하여 대륙 아랫쪽까지 영토를 넓힌 터라 다민족(多民族) 왕국이다. “네 왜 이름은 무엇이냐?” “예, 핫도리인데 백제어에 맞도록 하도리로 개명했습니다.” “무슨 하씨야?” “예, 물 하(河) 올시다.” “네가 물 하(河)씨 선조가 되겠구나.” “아래 하(下)를 썼다가 바꿨지요.” 옆에서 듣고 있던 하청과 사도부 장덕 유만까지 피식 웃었다. 하도리는 밝은 성품이다. 앉은키는 컸지만 선 키는 5자(150cm) 쯤 되었는데 상체가 크고 팔이 길어서 큰 원숭이 같다. 나이는 28세, 10살때 고아가 되어서 각지를 방황하다가 백제방에서 심부름꾼으로 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도리가 붙임성 있게 말했다. “한솔 나리의 명성을 들었다가 이렇게 모시게 되어서 광영이요.” “나는 전장(戰場)에서나 유용한 무장이야. 내 옆에 있으면 위험하다.” 계백의 눈 앞에 그동안 동고동락(同苦同樂)했다가 대야성 싸움에서 전사한 해준, 효성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 화청이 하도리에게 말했다. “내가 증인이야.” 화청이 주름진 얼굴을 펴고 웃었다. “전시(戰時)에 무능한 지휘관 휘하에 있는 것 만큼 불운한 무장은 없지, 난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 어렵다는 솔(率) 품급을 싸움 한번만에 따내었네.” “아, 그것참, 부러운 소리하시오.” 장덕 벼슬의 사도부 부사 유만이 혀를 찼기 때문에 계백도 웃었다. 그때 하도리가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말했다. “성주가 평양성까지 모시고 갔다가 오라고 했으니 광영이요.” 하도리는 정탐조 조장으로 기마군 10명을 이끌고 신주(新州)를 제 집 마당처럼 쏘다녔다고 했다. 그래서 어느 골짜기에 물고기가 많고 어느 들판에 짐승 잡는 덧이 설치되어 있는 것까지 다 알았다. 하도리는 기마군 둘을 이끌고 왔기 때문에 사신 일행은 총 25인이다. 하루만에 신주를 빠져나온 일행은 고구려 영토로 들어섰다. 고구려 국경 근처에 세워진 오금성에 전령을 보냈더니 금방 성주가 마중을 나왔다. “사신이 온다는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관복까지 차려입은 성주가 계백을 맞으면서 말했다. 대야성으로 찾아왔던 고구려 사신이 귀국해서 국경에 전령을 보낸 것이다. 저녁 유시(6시) 무렵, 사신 일행은 청에서 고구려 성주의 접대를 받는다. “평양성까지는 4백리 길이나 길이 잘 뚫렸으니 이틀이면 닿을 것입니다.” 옆쪽에 앉은 성주가 말했다. “조금전에 전령을 보냈습니다. 대막리지 전하께서는 내일 중에 사신으로 계백공이 오셨다는 것을 아시게 될 것이오.” 성주는 40대쯤으로 역시 무장(武將)이다.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대야주를 탈취하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축하드리오.” 술잔을 든 성주가 말했다. 동맹국의 승전을 축하하는 것이다. 따라서 술잔을 든 계백이 웃음 띤 얼굴로 답례했다. “성주께서도 대공을 세우시기를.”
사신 일행은 22명, 모두 말을 탔기 때문에 빠르다. 하루에 3백리를 목표로 삼고 1천리 거리인 평양성까지 나흘 일정으로 잡았으니 강행군이다. 둘째날에 일행은 백제령 동방(東方)을 지나 북방(北方)으로 들어섰다. 북방만 지나면 신라 신주(新州)를 통과해야 된다. 백제와 고구려 사이에 신라령이 가로막힌 셈이지만 허술하다. 그만큼 신라 전력(戰力)이 약해진 것 때문이기도 하고 면적이 넓어서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 계백의 옆에서 속보로 달리던 부사(副使) 화청이 생각 난 것처럼 입을 열었다. “한솔, 제가 20여년 전 태원유수 이연의 휘하 군관이었다면 믿으시겠소?” “이연?” 놀란 계백이 화청을 보았다. 화청은 49세, 장년이다. 20여년 전이라면 20대 초반이었을 것이다. 화청은 귀화한 한인이다. 그런데 이연이 누구인가? 이연은 당(唐)의 고조(高祖)를 말한다. 지금의 당황제 이세민은 이연의 아들이다. 계백의 시선을 받은 화청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연이 반란을 일으키자 소장은 태원을 탈출해서 동쪽의 백제령으로 피신했다가 내해(內海)를 건너 본국으로 온 것입니다.” “진양(晉陽)에서 이곳까지 먼길을 오셨구려.” “나는 이연의 모반을 수양제에게 밀고하려다가 발각이 되었소. 내 가족은 모두 이연에게 몰살당했소이다.” 계백은 숨을 들이켰다. 수양제(煬帝) 양광(陽廣)이 죽은 것은 20여년 전이다. 화청은 양제의 충신인 셈이다. 수(隨)는 3대 37년만에 태원유수 이연(李淵)에 의해 멸망되었는데 이연의 둘째 아들 세민(世民)의 공이 컸다. 그러나 이연은 태자 건성을 후계자로 삼았다. 건성은 이세민의 형이다. 결국 이세민은 형 건성과 5명의 아들, 동생 원길과 아들 5명까지 모두 죽이고 황제에 올랐으니 지금의 당태종이다.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형제 가족까지 몰사시키고 정권을 잡은 것이다. 이것이 현재의 당태종 이세민의 내력이다. 화청이 말을 이었다. “백제와 고구려가 힘을 합쳤다면 수나라 말기의 군웅할거시에 천하를 정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북쪽에서 고구려가, 동쪽의 백제령 담로에서 대륙으로 진군하면 반란군은 양국의 깃발 앞에 모였을 것이고 이연 또한 무릎을 꿇었겠지요.” 가능한 일이다. 수 문제(文帝)때 대륙을 평정한 최전성기 시절에 수(隨)의 인구는 890만호 4,600만이었다. 그러나 수십개 이민족을 합친 호구수인 것이다. 그러나 백제만으로도 69만호 720만 인구이며 고구려는 650만, 신라는 5백만이다. 백제와 고구려만 합쳐도 1400만이다. 단일민족으로 한족 다음의 세력인데다 최강연합군이 될 것이었다. 계백이 말에 박차를 넣으면서 말했다. “나솔, 아직 기회는 있소. 그래서 내가 지금 연개소문 공(公)에게 가는 것이 아니오?” 화청이 머리를 끄덕이더니 다시 말 배를 붙이듯이 다가와 달린다. 그날 저녁 북방(北方)소속의 항안성에 닿은 사신 일행은 성주의 접대를 받는다. 나솔 관등의 성주 국우재는 30대 중반쯤으로 무장(武將)이다. 국경 지방의 성주 대부분이 무관(武官)인 것이다. 이곳에서 국경까지는 30리 거리여서 매일 정찰대가 오가는 최전선 지역이다. 청에서 저녁을 함께 먹으면서 국우재가 말했다. “한솔, 내일 떠나실 때 신주(新州) 지리에 익숙한 무관을 안내역으로 붙여 드리지요.” 국우재는 사신 일행이 온다는 전령의 기별을 받고 안내역을 준비시킨 것이다. 계백이 머리를 끄덕이자 국우재가 머리를 돌려 둘러 앉은 무관 하나를 불렀다. “하도리, 인사드려라.” “옛!” 무릎 걸음으로 앞으로 나온 사내는 어깨가 넓고 팔이 길었다. 다부진 턱, 가늘지만 반짝이는 눈, 그때 국우재가 말했다. “귀화한 왜인으로 16품 극우 벼슬입니다.”
내실에 둘이 마주보고 앉았을 때 김춘추가 충혈된 눈을 치켜뜨고 말했다. “장군, 내가 고구려에 가야겠소.” “무슨 말씀이오?” 놀란 김유신이 상반신을 기울였다. 고구려와는 60여년 전 백제와 연합하여 한강 하류지역을 점령했을 때부터 원수지간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그 후에 신라는 동맹관계인 백제를 배신, 한강 하류지역을 탈취하고 신주(新州)를 세워 다시 백제와도 원수가 되었다. 더구나 빼앗긴 땅을 탈취하려는 백제하고는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聖王)을 전사시킴으로써 불구대천의 사이가 되어있다. 김춘추가 어깨를 부풀렸다가 내리면서 말했다. “고구려도 백제의 기세에 위협을 느끼고 있을 것이오. 더욱이 연개소문은 북진정책을 주장하는 호전적인 인간 아니오?” 김유신의 시선을 받은 김춘추가 열에 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제 신라는 영토의 3할을 잃었소. 고구려는 앞쪽의 당(唐)을 치려면 등 뒤에 도사리고 있는 범부터 제압해야 될 것이오.” “대감, 백제와 고구려는 동맹관계올시다.” “서로 필요했기 때문이지. 지금 연개소문은 백제가 부담이 되고 있을 겁니다.” “대감, 그러면 밀사를 골라 보내시지요.” “누가 가겠소?” 김춘추의 얼굴에 일그러진 웃음이 떠올랐다. “비담 일파가 골라준 밀사는 그저 다녀오는 시늉만 낼 것이오.” “하지만 위험합니다, 대감.” “장군이 신주 북방까지 올라가 주시면 나한테 도움이 되리다.” “그거야 얼마든지 해 드리지요. 하지만…” “내가 연개소문을 만나겠소.” 어깨를 편 김춘추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김유신을 보았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요. 비담 일당은 당황제에게 여왕을 비난하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있소. 이러다가 왕국이 망하게 되면 왕이 된들 무얼 하겠소?” “그 전에 죽임을 당하겠지요.” “이번 대야주 42개 성이 백제 수중에 들어갔으니 연개소문도 생각을 바꿀 것이오.” “대감, 차라리 소장이 가지요.” “아니오, 신라에는 장군이 필요하오.” 쓴웃음을 지은 김춘추가 말을 이었다. “나같은 왕족은 수십명이나 있지만 대장군은 그대 하나뿐이오.” “황공하오.” “장군이 국경에서 기다리고 있는 줄 알면 연개소문이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 할 것이오.” 그때 김유신이 긴 숨을 뱉었다. “대감의 용기는 무장(武將) 100여명보다 낫습니다.” “딸과 사위를 한꺼번에 잃은 분노가 그렇게 만들었소.” 김춘추가 뱉듯이 말하더니 외면했다. “왕국을 잃으면 성골, 진골이 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오?” 김유신은 이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시간에 계백이 의자왕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백제 사신으로 고구려로 떠나는 인사다. 의자왕은 계백과 부사(副 ) 유만, 화청을 밀실로 불렀는데 배석자는 성충과 윤충, 내신좌평 목부까지 셋뿐이다. 밀담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이번 대야주 공취로 연개소문이 우리에게 위협을 느낄지도 모른다,” 의자왕이 웃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오늘의 동맹이 내일 원수로 변하는 것이 어디 한두번이냐? 그러니 너는 이것을 연개소문에게 주어라.” 의자왕이 두루마리 밀서를 계백에게 내밀었다. 붉은 천에 금박 글씨로 쓴 왕의 친서다. “신라 신주(新州)를 공취하면 당항성만 백제가 차지하고 나머지 옛 고구려 영토는 고구려에 반환시키겠다는 밀서다.” 계백이 밀서를 두 손으로 받자 의자왕이 말을 이었다.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하면 당(唐)의 이가놈이 견딜 것 같으냐? 백제와 함께 북진하자고 해라.”
어떻게 죽었느냐? 김춘추가 묻자 무관이 엎드렸다. 백제 장수 계백이 베었다고 합니다. 무관은 15품 대오 벼슬의 하급 무장으로 가야성 내궁 경비를 맡았다가 성이 함락되자 성벽을 넘어 탈출했다는 것이다. 성이 함락되거나 아군이 참패했을 때, 특히 궤멸 상태가 되었을 때 현장 보고를 받기는 어렵다. 그것은 보고를 다 듣고 나서 너는 왜 도망쳤느냐는 심문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춘추는 대야성이 함락된 지 엿새 후에야 지금 보고를 받고 있다. 동경성(東京城) 안 김춘추의 저택은 웅장하다. 청 아래쪽의 마당은 넓어서 마술 시합을 할 수도 있다. 청의 기둥 옆에 선 김춘추가 무관을 내려다보았다. 주위에 둘러선 가솔, 이찬 김춘추를 만나러 온 문무관원들까지 수십 명이 숨을 죽이고 있다. 그 때 김춘추의 목소리가 마당으로 울렸다. 계백이라고? 예, 분명히 그렇게 들었습니다. 무관이 땀과 먼지로 얼룩진 얼굴을 들고 김춘추를 보았다. 백제 나솔 계백이 대야군주 김품석을 베었다라고 외침이 일어났습니다. . 저는 분이 나서 내성 안으로 들어가고자 했지만 백제군 수천 명이 진입한 상황이었습니다. . 그래도 칼을 들고 싸웠다가 곧 성주의 목이 창끝에 꿰어져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 그래서 죽기보다 보고를 해야겠다는 일념으로. 그, 내궁 마님은 어떻게 되었느냐? 김춘추의 목소리가 바짝 마른 느낌이 들었다. 다시 마당과 청에는 무거운 정적이 덮여졌다. 그 때 무관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김춘추를 올려다보았다. 뒤늦게 도망쳐 나온 군사들한테서 들었습니다만 내궁 마님은 칼로 가슴을 찔러 자결하셨다고 합니다. . 내궁을 점령한 계백이 마님의 목까지 베고 내궁에 불을 질렀다고 합니다. 으음. 김춘추가 갑자기 기둥에 어깨를 붙이면서 신음을 했다. 놀란 집사가 그쪽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가 멈췄다. 이놈들. 김춘추가 초점이 흐려진 눈으로 앞쪽을 응시하면서 말했다. 이 한(恨)을 꼭 풀 것이다. 그러더니 기둥에 등을 붙이고 서서 손을 저었다. 모두 물러가라. 그 때 마당 뒤쪽 문 앞에서 말굽소리가 들리더니 곧 서너 명의 무장이 들어섰다. 햇볕을 받은 갑옷이 번쩍였다. 앞장 선 무장은 김유신이다. 김유신의 어깨와 머리에도 먼지가 내려 앉아있다. 달려온 증거다. 대감, 들으셨습니까? 청에 선 김춘추를 보자 김유신이 소리쳐 묻는다. 마당에 서 있던 가솔, 관리들이 황급히 좌우로 갈라서서 길을 터준다. 김춘추가 눈의 초점을 잡고 김유신을 보더니 주르르 눈물을 쏟았다. 그렇소, 방금 듣고 있었소. 모두 내 불찰입니다. 청 앞에 선 김유신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김춘추를 보았다. 의자의 간계에 속았기 때문이오! 김유신의 목소리가 마당과 청을 울렸다. 이때 김유신은 49세, 김춘추는 43세이니 장년이다. 김춘추가 손등으로 눈물을 닦더니 기둥에서 등을 떼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김춘추가 휘청거리다가 김유신에게 말했다. 대감, 들어오시오. 상의 드릴일이 있소.
대야성에서 계백이 보낸 14품 좌군(佐軍) 벼슬의 아한이 칠봉성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신시 (4시) 무렵이다. 아한은 기마군 셋을 이끌고 왔는데 모두 땀과 먼지를 뒤집어써서 거지꼴이었다. 아한이 곧장 계백의 사택 마당으로 들어서자 덕조가 두 손을 내밀고 달려 나왔다. 그 뒤를 고화와 우덕, 그리고 종들이 따라 나와서 마당은 금방 사람으로 찼다. 아한은 계백의 위사대 조장(組長)이라 덕조와 아는 사이다. “좌군, 무슨 일이오?” 덕조가 긴장된 얼굴로 묻는다. 백제군이 대야성을 함락시켰고 대야주 42개 성을 공취해간다는 소문은 들었다. 승전보가 오가는 전령의 몇 마디 말로 전해지는 상황이다. 이곳 칠봉성은 전장(戰場)에서 멀 뿐만 아니라 사비도성과 대야성 사이에 위치해 있지도 않다. 그래서 소식이 늦는 편이다. 그때 아한이 소리쳐 말했다.“성주께서 대야성을 함락시킨 1등 공을 세우셨소. 그래서 대왕께서 한솔로 관등을 올려주셨소!” “만세!” 그 순간 두 손을 번쩍 쳐든 덕조가 소리쳤다. “천세! 내가 그렇게 되실 줄 알았어!” 와락 다가선 덕조가 어깨를 부풀리면서 물었다. “다들 무사하시오? 저기, 우리 아씨의…” 그때 호흡을 고른 아한의 시선이 고화에게로 옮겨졌다. “대아찬 나리는 전사하셨소.” 덕조는 입만 딱 벌렸고 고화는 아한에게 시선을 준 채로 굳어졌다.” “아이구머니!” 비명을 지르면서 주저앉은 것은 우덕이다. 땅바닥에 두 다리를 뻗은 채 주저앉아버린 우덕이 울부짖었다. “우리 아씨는 어쩌라고 가셨단 말인가!” 마당이 숙연해졌고 우덕의 외침이 이어졌다. “아씨를 살리시려고 나리께서 가셨구나!” “……” “아이고, 불쌍한 우리 나리!” 덕조도 숨을 멈춘 채 굳어졌고 아한은 물론이고 군사들도 석상처럼 말이 없다. 우덕의 외침이 마당을 다시 울린다. “아이고, 나리! 아씨께 말 한마디 못해주시고 저 먼 곳에서 가셨구나!” 그때 정신을 차린 아한이 품에서 기름종이에 싼 편지를 꺼내 고화에게 두 손으로 내밀었다. “아씨, 한솔께서 아씨께 드리는 편지올시다.” 방으로 돌아온 고화가 편지를 꺼내 펼쳤다. 밖에서는 우덕의 울음소리만 울릴 뿐 조용하다. 주인 계백이 대공(大功)을 세워 한솔로 승급이 되었지만 부인의 부친이 전사를 한 상황이다. 고화가 편지를 읽는다. “아버님이 돌아가실 때 내가 안고 있었소.” 편지를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버님이 날 올려다보시면서 힘껏 싸우다가 죽는다고 하시며 웃었소.” 고화의 눈동자가 흐려졌다. “내가 대아찬이라고 불렀더니 다르게 불러달라고 하셔서 장인어른이라고 불렀소.” 고화의 눈에서 처음으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러더니 나솔, 내 딸을 부탁하네, 하셔서 염려하지 마시고 떠나시라고 했소.” 고화가 짧게 흐느껴 울었다. “그랬더니 사위, 자네를 믿는다고 하시길래 내가 아버님이라고 부르면서 끌어안았소.” “아버지.” 고화가 편지를 쥐고 흐느꼈다. “아버님께 극락으로 가시라고 했더니 내가 안심하고 가겠다고 하십디다. 그래서 내가 고화를 아끼고 살겠다고 했고 그 말을 들으신 아버님이 고맙다고 하시며 웃으셨소.” 고화가 머리를 들었다. 편지는 그것으로 끝났다.
“예, 대왕.” 사신 소준관이 어깨를 펴고 의자왕을 보았다. 청에 모인 백제 무장, 관리들의 시선이 모여졌다. 이곳은 전장(戰場)이나 같다. 신라 서부의 요지(要地)로 영토의 3할을 차지하고 있던 대야주를 백제가 정벌한 상황이다. 의자왕이 사신을 이곳으로 오도록 허용한 이유도 대백제(大百濟)의 위용을 과시하려는 목적도 있다. 소준관이 입을 열었다. “대막리지께서 고구려와 백제의 동맹을 더욱 공고히 하고 신라와 당을 멸망시킬 계책을 논의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오, 과연.” 의자왕이 상반신을 기울이며 머리를 끄덕였다. 백제와 고구려는 동맹관계인 것이다. 의자왕이 생기 띈 얼굴로 소준관을 보았다. “과인도 적극 협력할 작정이야. 이제 그대도 보았다시피 신라 서방(西方)의 대야주가 백제령이 되었다. 42개 성을 공취했으니 신라는 왼쪽 팔을 잃어버린 병신 꼴이다.” “오, 적임자가 있지.” 의자왕이 정색하고 말을 이었다. “담로 연남군에서 당군(唐軍)과 여러 번 접전을 했고 본국으로 돌아와서 이번에 대공을 세운 무장이 있어.” 의자왕의 시선이 단하의 계백에게로 옮겨졌다. “한솔 계백이야.” 계백이 머리만 숙였을 때 의자왕이 말했다. “한솔, 네가 막리지와 함께 고구려에 가라.” “예, 대왕.” 의자왕의 목소리가 청을 울렸다. “대막리지의 제의에 적극 찬성이야. 과인도 진즉부터 그것을 논의하고 싶었지만 선왕(先王)이 소극적이었는데 잘 되었다.” “과연 명군(名君)이시오.” 50대의 소준관은 달변이었다. 바로 의자왕의 말 뒤를 잇는다. “따라서 대막리지께서는 계책을 논의할 백제 무장을 고구려로 보내주시기를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네가 대백제의 사신이다.” “예, 대왕.” “부사(副 )로 사도부 장덕 유만을 데려가도록 하고 무장(武將)은 누가 좋겠느냐?” “예, 나솔. 화청을 부장(副將)으로 삼고 싶습니다.” 한인(漢人) 출신의 투항무장 화청은 이번에 장덕에서 승진하여 6품급 나솔이 되었다. 의자왕이 머리를 끄덕였다. “좋다. 사흘 후에 막리지와 함께 떠나도록 하라. 나도 그동안에 대막리지께 보낼 밀서를 준비하겠다.” 그날 저녁, 계백은 의자왕의 침전으로 불려 갔다. 죽은 김품석이 사용하던 침전에는 의자왕과 병관좌평 성충, 성충의 동생이며 남방방령인 윤충, 내신좌평 목부까지 넷이 모여 있었다. 계백이 말석에 꿇어앉았을 때 의자왕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너를 고구려로 보내는 이유를 말해주마.” 계백이 숨을 죽였고 의자왕이 말을 이었다. “연개소문은 기(氣)가 센 무장이다. 당(唐)과의 결전을 두려워하지 않는데다 용병술과 지도력도 뛰어난 인물이다.” 의자왕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왕과 대신들까지 수백명을 한명도 살리지 않고 주살한 자야. 왕의 시체를 토막 내어서 전국에 떼어 보냈다던가? “…….” “네가 가서 대백제의 기(氣)를 보여라. 네 무용이 고구려에도 알려졌을테니 당당하게 연개소문에게 맞서서 전략을 논해라.” “예, 대왕.” “당(唐)과의 결전에 대백제도 군사를 내놓는다고 해라. 담로가 이미 널려있으니 고구려보다 대백제가 당의 영토에 우선권이 있지.” “예, 대왕.” 계백은 의자왕의 뜻을 알았다. 백제, 고구려 연합군은 당을 두조각으로 낸다. 신라는 염두에도 없다.
대야성에서 투항한 가야 출신 항장을 앞세워 백제군은 대야주의 성을 공략했다. 주성(州城)이 함락되고 군주 김품석이 살해된 상황인 것이다. 투항한 신라군만 1만여명이 되었으니 대야주의 41개 성은 대부분이 변변한 저항도 하지 못하고 함락되었다. 대야성이 함락된지 엿새만에 대야주 42개 성이 백제군(軍)의 수중에 들어온 것이다. 대야주에는 가야인 1백여만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거의 백제군에 저항하지 않았다. 대승이다. 대야성의 청에 앉은 의자왕이 도열한 신하들에게 말했다. 얼굴에 웃음이 떠올라있다. 부왕(父王)이 이루시지 못했던 대업(大業)을 이루었다. 기쁘다. 오전 사시(10시) 무렵이다. 청에는 항장(降將)들도 둘러서 있었는데 삼현성에서 진궁과 함께 벼슬을 살았던 신라 급벌찬 전택과 대야성 수문장 여준의 모습도 보였다. 이제 전택은 백제의 7품 장덕이 되었고 여준은 9품 고덕이다. 신라에서보다 두계단이나 승진을 한 것이다. 백제 장수들도 논공행상에 의해 승진을 했는데 계백은 6품 나솔에서 5품 한솔이 되었고 선봉장 협반은 한솔에서 4품 덕솔에 올랐다. 그러나 계백의 수하 무장 해준은 전사했고 고덕 효성도 죽었다. 의자는 죽은 무장들도 일일히 승급시켜 그 녹봉을 가족에게 넘기도록 했다. 사후 처리를 잘해야 장병이 죽기를 무릅쓰고 싸우는 것이다. 여러번 전장을 겪은 의자는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의자가 남방방령 윤충에게 말했다. 고구려 사신이 왔다니 이제 들라고 하게. 예. 대왕. 기다리고 있었던 윤충이 소리쳐 지시하자 곧 의례를 담당하는 사도부(司徒部) 부장(副長)이 청 밖에서 한무리의 관리들을 안내해 왔다. 고구려 사신들이다. 사신들은 사비도성을 거쳐 이곳 대야성까지 내려왔는데 모두 말을 달렸기 때문에 평양성에서 엿새가 걸렸다고 했다. 백제 대왕을 뵙습니다. 고구려 관복을 입었으나 급히 바꿔입은 흔적이 났다. 얼굴은 먼지가 끼어서 씻을 겨를도 없었던것처럼 보이는 사신이 소리쳐 말하고는 청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고구려 막리지, 태대형인 소준관이 인사드리오. 오, 막리지이신가? 의자왕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사신을 보았다. 막리지면 고구려의 5부(部) 대인(大人)격이며 태대형은 2품급으로 백제의 달솔급, 즉 장관급이다. 고위직 사신이다. 의자왕이 물었다. 그래, 고구려 대왕께서 보내셨는가? 아니올시다. 대왕. 어깨를 편 소준관이 의자왕을 보았다. 고구려의 대막리지이시며 대대로이시며 5부(部) 전(全)대인을 겸하고 계시는 연개소문 전하께서 보내셨습니다. 아아. 신음 같은 탄성을 뱉은 의자왕이 머리를 끄덕였다. 대막리지께서는 건녕하신가? 예, 대왕께 고구려와 백제의 동맹이 더욱 강고할 것이라는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소준관이 들고 있던 밀서를 두손으로 바치자 옆에 서 있던 사도부 부장이 받아 의자왕 아래쪽에 선 윤충에게 건네주었다. 의자왕이 소준관을 보았다. 당(唐)이 지금도 북변을 건드리는가? 전무가 처형된 후로 놀랐는지 잠잠합니다. 이때는 의자왕이 입을 다물었고 청안의 대신들이 술렁거렸다. 영류왕 건무를 처단하고 대신들을 모조리 살육한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연개소문은 영류왕의 동생 대양왕(大陽王)의 아들 보장(寶臧)을 왕으로 세웠지만 허수아비다. 소준관이 영류왕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고 현재의 왕을 언급하지도 않는 것이 그 증거다. 그때 소준관이 정색하고 의자왕을 보았다. 대왕, 대야주 정복을 경축드립니다. 고맙네. 사비도성에서 기다릴 것이지 이곳까지 급하게 내려온 이유가 있는가?
“비켜라!” 연개소문이 소리치자 무장들이 물러섰다. 뒤쪽의 비명과 외침은 어느덧 줄어들고 있다. 군사들의 살육이 끝나가고 있는 것이다. 연개소문이 다가서자 영류왕이 소리쳤다. “네, 이놈! 이 역적!” “너는 왕의 그릇이 아니다. 건무야!” 연개소문이 따라서 소리치고는 오른손에 쥔 칼을 치켜들었다. 그리고는 왼손의 칼을 영류왕 앞으로 던졌다. 칼이 쇳소리를 내면서 청 바닥에 떨어졌다. “건무, 칼을 집어라!” 연개소문이 소리치자 영류왕이 칼을 집어 들었다. “네 이놈, 연개소문.” “건무야, 날 죽이면 군사들을 물러가라고 하마.” 칼을 중단으로 겨눈 연개소문이 정색하고 소리쳤다. “자, 오너라!” 영류왕이 칼을 치켜들고 뛰었다. 거리는 세 발짝. 한 발짝을 뛰고 나서 두 발짝째는 추켜올렸던 칼로 연개소문의 머리통을 내리치면서 발을 디뎠다. 그 순간이다. “앗!” 영류왕의 입에서 외침이 터졌다. 30년 전, 수의 대군을 맞아 을지문덕과 함께 싸워서 물리친 건무(建武) 영류왕이다. 그러나 지금은 옛날의 건무가 아니다. 연개소문이 몸을 비틀면서 옆으로 후려친 칼이 영류왕의 배를 갈랐던 것이다. 그 순간 내려친 칼이 청 바닥을 때리면서 배가 갈라진 영류왕이 몸을 숙였다. 그때 칼을 치켜든 연개소문이 소리쳤다. “죽어라!” 연개소문의 칼이 영류왕의 목을 자 머리통이 떼어져 청 바닥에서 굴렀다. 영류왕 25년 10월이다. 그때는 이미 살육이 거의 그쳤고 청에는 도살된 2백여명의 고구려 고관들의 시체가 뒹굴고 있다. 서있는 군사는 모두 연개소문의 부하들이다. 고구려국 고관 대부분이 도살되었다. 살아남은 고관은 몇 명 되지 않는다. 이곳은 대야주 대야성, 의자대왕의 친위군이 도착했을 때는 계백과 선봉대장 협반이 대야성을 장악한 지 나흘 후였으니 빠른 기동이었다. 남방방령 윤충은 이틀 먼저 출발했지만 의자왕의 친위군보다 겨우 하루 먼저 대야성에 들어온 것이다. 대야성에는 백제 기마군 3만5천기가 운집해 있었기 때문에 2만기 정도는 성 밖에 진을 쳐야 했다. “장하다.” 이미 전령을 통해 내막을 상세히 보고받은 의자왕이 계백과 협반에게 말했다. “특히 계백이 대공을 세웠다.” “황공하오.” 계백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의자를 보았다. “대왕, 운이 따랐을 뿐입니다.” “그 운을 네가 만들지 않았느나?” 닷새 전만 해도 김품석이 앉았던 옥좌에 앉아 의자가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원인이 없는 운(運)은 없는 법이다.” 의자가 옥이 박힌 의자를 손바닥으로 쓸면서 말을 이었다. “김춘추의 딸은 제 손으로 자결을 했다니 지아비를 따라갔구나.” 김품석의 부인이며 김춘추의 딸 소연은 칼로 가슴을 찌르고 자결을 한 것이다. 그때 윤충이 말했다. “주성(主城)을 함락하고 군주(軍主)의 목을 베었지만 대야주에 42개 성이 있습니다. 서둘러야 될 것이오.” “그렇다. 사기가 꺾였겠지만 아직도 대야주에 수만의 군사가 남아 있다.” 머리를 끄덕인 의자가 지시했다. “가야주는 본래 가야국이었던 땅, 신라국에 죽기로 충성하지는 않을 것이다. 투항하면 지위를 보장하고 옛 가야국 호족은 능력에 따라 고위직에도 임명한다고 해라!” 신라는 골품제가 박혀 가야 출신 호족들을 박대해온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는 의자왕이다. 의자의 시선이 다시 계백에게 옮겨졌다. “계백, 이번 싸움에 가야족인 네 장인이 죽었느냐?” 의자가 진궁을 장인이라고 불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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