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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 화백의 미술 이야기] 최석우 작가 ‘생명’

물에 거꾸로 비친 숲의 그림자와 햇빛을 영롱하게 반사하는 나뭇잎 마다마다는 뽀송뽀송하여 실제로 나무숲에 와있는 듯하거나, 일반인들의 솜씨가 아닌 전문 사진작가들이나 찍었음 직한 섬세함이 있어서, 그림 안에서는 나무들도 숨을 쉬고 있는 것처럼 생동감이 보인다. 그래서 처음으로 이런 그림들을 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사진 전시로 오해도 받게 된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지고 보면 잘 찍은 사진작가의 사진보다 더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이 그림들은 하이퍼 리얼리즘(hyper realism)의 작가 최석우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1840년대 다궤르의 사진기 발명은 미술계에는 큰 사건이었다. 인물화로 생계를 이어가던 화가들은 풍경화로 생계 수단을 바꿔야 했으며, 급기야는 카메라와의 경쟁을 피하려 인상주의 사상이나 기법까지 창조하였다. 이후 세월이 지나면서 다시 카메라라는 기계문명에 도전하기 위하여 하이퍼에 도전했다. 즉 초점이 하나인 카메라의 약점을 간파하고 수백수 천개의 초점을 만들어 카메라를 이기고자 했다. 그래서 하이퍼 리얼리즘의 또 다른 명칭은 샤프 포커스 리얼리즘 (sharp focus realism)이다. 즉 카메라가 초점 부분만 섬세하고 나머지 부분이 흐릿해지는 단점을 보완하여 수백 수천의 포커스를 한꺼번에 사용하여 사진보다 더 정확한 그림을 그리려는 것이었다. 진정한 하이퍼 리얼리스트들은 세계적으로, 물론 국내에서도 그리 많지 않다. 남보다 더 사실적으로 그리면 그냥 하이퍼 작가라 치부해버릴 따름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석우는 하이퍼의 진정한 의미를 정확히 알고 그리는 이 지역에서는 드문 진정한 하이퍼 리얼리스트라 느껴진다. 하지만 하이퍼 리얼리즘의 단점은 아무래도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조형 언어의 부족함이다. 작가의 가슴에 일고지는 색채나 형태의 자유로운 표현은 아무래도 대상에 충실하여야 하기 때문에 조금은 결여되기 마련이다. 날마다 그림이 그리고 싶고, 오로지 그림을 하는 시간만이 행복하다는 최석우의 전시 포스터를 보고 면 단위의 지역에 갤러리가 있다라는 사실에 놀라 큰 기대감을 안고 장애인 택시를 불러 전시장에 갔다. 그러나 "그러나"였다. 입구에선 내가 장애인 카드를 제시했음에도 일금 사천 원을 받았으니 일반인은 팔천 원인 가보다. 언덕이 너무 가팔라지게 이어져서 지체장애인인 나에게는 백두산 등반개념이었다. 2층 갤러리라는 곳에 가보니 그림이 있는 한쪽 면의 조명시설은 갤러리처럼 흉내는 냈는데 그 공간의 반대쪽이 전부 통유리로 되어있어 원래는 전시장 용도로 지어진 게 아니고 통유리 쪽에 있는 호수의 뷰를 이용한 상업적인 목적으로 설계된 건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건물이 여기저기 서 있는데, 통일감은 안보이고 어수선하다거나 미완성인 느낌이며, 승용차나 택시 아니면 가기 힘들 정도로 접근성도 안 좋아서 추천할만한 장소는 아니라는 판단이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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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1.16 16:41

[이승우 화백의 미술 이야기] 유승옥 작가 전시

오늘은 유승옥 전시를 보러 길을 나서려 아침 일찍 장애인 택시를 예약하고 전주의 청목미술 관에 도착하였더니 1층에서는 재불 작가 손석의 전시 준비가 한창이었다. 글로벌한 작가답게 흥미로운 것이 많아 글로 만들어져도 좋을 그림들이었으나 관심 있게만 둘러보고, 내 원래의 취지가 이 지역의 작가만 다루자는 것에 충실하기 위하여 유승옥 작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2층으로 자리를 옮겼다. 거의 추상회화이다. 사진을 찍으며 진지하게 한 바퀴를 돌았으나 아직 감이 안 잡힌다. 이 작가에 대해서는 사전 정보가 전무하니 더욱 작가의 의중을 짐작하기 어려워 또 한 번 둘러본다. 우선 원의 형태가 눈에 많이 띈다. 그러다가 2018년 10월에 있었던 전시의 팸플릿을 보고 그 원들이 달항아리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물론 다른 의미도 있겠으나 모름지기 내 편의를 위해서 그렇게 짐작을 하고 추리를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달항아리를 소재로 삼으면 그 주제를 위해서 질감을 묘사하는 흔적이 있어야 하고 명암과 음영률을 따지는 일루젼의 효과에 신경을 몰두하는 것이 달항아리 작가들의 일반적 시각인데 그런 객관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그것을 차용하여 자기의 주관만을 표출하고자 했음이 여실히 눈에 띈다. 말하자면 달항아리가 주체가 아니라 달항아리는 단지 작가의 주관을 표현하기 위하여 차용되어진 것이라고 보였다. 그가 나타내고자 하는 것들은 달항아리의 실체보다 차원이 높고 깊은 불성이었고, 만다라였으며, 거기에 연유한 인간애였다. 자기의 변을 강하게 어필하려다 보니 어쩌다 하모니즘 경향의 작품도 더러 보인다. 이런 마음은 작업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다들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해야 할 말은 많은데 한정된 공간에서의 욕심이었다. 여기에 지역의 선배로서 한 마디만 조언하겠다. 장욱진 선생이 하늘나라로 가셨을 때 이름 잊은 서울공대 교수가 무슨 신문인가에 산업만 찾고 고위 공직자나 정치가, 연예인들에게만 쏟아지는 이 나라의 분위기를 질타하는 긴 글을 본 적이 있다. 위대한 화가의 별세 소식에 인색한 미디어에 대하여 이 나라의 고급문화는 죽었다고, 그것도 공대 교수가 쓴 분통 터지는 글을 본 적이 있는 만큼 위대한 철학자이고 예술가인 장욱진 선생. 내 젊은 날, 선생이 일찍이 발표한 "강가의 아뜨리 에"라는 책을 읽으며 "이 글은 잉크를 찍어 쓴 게 아니고 넘쳐서 나오는 잉크로 썼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할 만큼 너무나 자연스럽게, 쉽게, 그러면서도 있는 감동을 모두 느끼게 쓰여졌던 책, 위대한 사상가였던 선생은 내가 아직도 말뿐이지 가끔 놓치고 있는 한 마디 "모든 것이 그렇겠지만 그림에 있어서도 보태기보다 빼는 것이 더 힘들다"는 말씀, 같이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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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1.09 18:15

[이승우 화백의 미술 이야기] 이수아 작가의 첫 번째 개인전

그 계절이 다시 오면 수령 600살쯤 된다는 노란 은행잎들이 소복하게 마당에 쌓여 있을 전주 향교에 가는 길 초입 향교길 68번지. 이곳에는 그 번지를 그대로 살려서 더 멋져진 '향교길68'이라는 갤러리가 있다. 그곳에서는 풋풋한 젊은 작가 둘이서 각각 개인전을 하고 있었다. 먼저 들어서서 오른쪽의 공간에서는 전북대학교에서 석사 학위 과정에 있는 이수아 작가의 첫 번째 개인전이, 왼쪽의 공간에서는 젊은 조각가 김승주의 개인전이 열렸다. 먼저 이수아의 '( ) 새'전을 보면 대학을 중국에서 보낸 이수아가 겪은 외국 생활의 치열한 외로움에서 유발됐을 생각이 젊은이라는 생각이 안 들 정도로 심각하고도 절실하게 가감 없이 표현돼 있었다. 여기서 '새'는 날아다니는 새가 아니라 사이의 준말이니 '틈'을 뜻하는 의미다. 괄호와 괄호 사이의 절박한 틈을 표현하는 것이다. 일(생활, 작업, 외로움 등)과 일 사이의 완충된 공간과 시간의 틈, 사이에서 느꼈을 여유로움이라거나 반전을 꿈꾸는, 또는 회복하려는 귀중한 공간이나 시간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으리라. 멍 때리는 시간이라도 좋고, 그 시공간의 절실함이라도 좋다. 제작 방법을 유추해 보면 재료의 선택부터 시작했을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종이에서는 각이 잘 잡히기 때문에 틈을 만들려는 본인의 의지에 걸맞지 않다. 전공으로 많이 접해 왔던 한지의 물성을 깨닫고 한지를 바탕으로 먹물의 농도로 그러데이션을 준다거나 비슷한 유사색상으로 통일감을 줘 염색하고 접어 틈새를 만들었다. 그래서 틈새라는 단어, 즉 표현하고자 원했던 것을 사실적으로 이뤄냈다. 실제 나이보다 훨씬 노련하고 철학적인 명제를 훌륭하게 해낸 것으로 보인다. 그림이라는 것이 남보다 뛰어난 기능도 있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리움의 준말이기도 하기 때문에 철학적인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미술의 변화는 기능의 발달이 아니라 철학의 시대성에서 찾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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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1.02 18:04

[이승우 화백의 미술 이야기] 오미라 개인전 '안드로메다로 향한 꿈'

스무 살 남짓으로 보이는 소녀인데 그만한 딸을 두고 있는 소녀 같은 아줌마(그녀)가 전북도립미술관 분관인 서울인사아트 6층에서 오는 28일부터 내년 1월 3일까지 전시회를 갖는다. 동시에 며칠 전 본인의 책 <꽃들의 흉터>를 출간했다는 소식을 동시에 전해 왔다. 그림과 책을 동시에 준비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터인데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해낸 그녀가 못내 자랑스럽다. 아무리 시화(詩畵)가 한 단어이고 가무(歌舞)가 한 단어이기는 하나 요즘같이 철저한 분업사회에서 두 가지에 같이 힘을 쏟기가 쉽지는 않을 터이다. 한 마리 토끼도 잡기 어려운 판에 두 마리 토끼를 움켜쥐었으니 그 성취감이 얼마나 클까 하면서 대단하다는 생각뿐이다. 그녀는 먼저 여류화가다. 수원대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을 비롯하여 온고을전국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등의 엄청난 노력과 결실을 맺었다. 두 번째는 문인으로는 민중문학의 성격을 띤 전북문학회원으로 가입되어 있다. 그녀의 책을 읽다 보면 엄청난 수사력에 혀를 내밀 것이다. 우연히 <인스턴트 패밀리>라는 위탁 과정을 그린 미국 영화를 보는데 그 단어들을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10여 년 전부터 청소년 쉼터에서 케이(사회복지사)로 일하는데 그 과정에서 만난 격렬하고, 힘겹고, 억울하고, 막막하고, 막무가내이고, 불통하고, 절망하고, 불안하고, 냉혹하고, 위급하고, 감동하고, 울컥하고, 눈물이 나는 아이들과 같이 생활하며 그들과의 만남과 이별 등을 쓴 글들을 모아 책을 만들어 이번에 출간하게 된 것이다. 거기에다 전주시 덕진구 호성로 134에 있는 진흥더블파크 상가 203호에서 다빈치미술학원까지 운영하고 있으니 도대체 일인(1인) 몇 역인지 모르겠다. 화가로는 "오미라"라는 본명을 사용하지만 필명은 "오복이"로 표기할 때는 "오! 복이"로 표기하기도 하여 보는 사람에게 상큼함을 주기도 한다. 이 모두를 아울러서 바쁘게 열심히 살아가는 그녀에게 격려를 보낼 수밖에~. 오미라(오복이) 작가 전시 '안드로메다로 향한 꿈' 기간: 12월 28일 ∼ 내년 1월 3일 장소: 전북도립미술관 서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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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2.26 17:07

[이승우 화백의 미술 이야기] 윤철규 '그래도 희망은 있다'

중년의 사내들이 혼자서 짜장면을 우걱우걱 먹거나 술잔을 들고 있다. 하나같이 음침하고 흐릿하게 앉아 초점 없는 시선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거의 정신노동자이지만 현실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들이다. 프롤레타리아는 무산계급 또는 노동계급이라고도 한다. 정치상의 권력이나 병력의 의무도 없고 자식만 낳는 무산자라는 뜻에서 파생된 말이다. 그림 속의 한 사람, 평생을 교사로 살아온 단 한 사람은 기타를 연주하고 있어 그림에 나타난 유일한 부르주아로 존재한다. 생활이 안정되지만 결코 부자일 수 없는 교사직인데도 그에겐 밝은 원색으로 기타를 연주하는 모습을 표현하여 부러움까지 보인 것을 보면 그는 밝고 통쾌한 원색을 쓰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원색을 쓸 일이 별로 없는 것이다. 그의 주조색들은 거의 모두 탁색이다. 원색 옆에서 재롱을 떨며 원색을 더 원색답게 해야 하는 역할을 버리고 무채색에 가까운 탁색이 주조색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슬픔의 색이다. 자신도 모르게 즐겨 쓰는 슬픔의 색이다. 그림 속의 중년의 사내들은 집에 가면 누군가의 아버지이지만 이 땅의 소시민들이다. 이 땅의 소시민들은 어딘가에서 억울함에 통곡이라도 하고 싶지만 집에서는 아버지이기에 울음소리마저 참아야 한다. 울음을 참고 아이들에게만이라도 희망을 말한다. 아무 희망도 없는 중년의 사내가 습관처럼 희망은 있다고 항변한다. 그는 절규하고 있었다. 팸플릿 한쪽에다 "누구에게나 희망은 있겠죠? 그래도 희망을 품고 즐겁게 사시게요."라고 표기하면서 누군가 희망은 없다고 이야기하듯이 "그래도"라는 말로 은연 중의 심상을 드러냈다. 작가의 저변에 실패와 슬픔을 깔고 무심코 표현된 "그래도"이다. 최소한 자신의 아이에게만이라도 희망을 주고 싶은 희망이 없는 중년의 한 맺힌 희망이다. 외로움에 혼자 소주를 마시며, 혼자 국밥이나 짜장면 같은 서민의 싸디 싼 음식을 먹으면서도 "그래도" 희망은 있다고 우기는 이 눈물겨운 아이러니를 어쩔 것인가? 그의 그림 하나하나가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이었다. 그는 사실주의 작가이다. 모델을 닮게 그려 사실주의가 아니고 이 비참한 현실을 직시하는 능력이 무한해서 사실주의자다. 윤철규 작가 전시 '그래도 희망은 있다' 기간: 12월 15일 ∼ 12월 21일 장소: 우진문화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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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2.19 17:31

[이승우 화백의 미술 이야기] 대한민국남부현대미술협회 전북지회 영·호남 교류전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넓은 홀에서 전국 각지의 회원들 105명이 모여 미술제를 마련했다. 100여 명이 넘는 회원들이 전시회를 개최하다 보면 흔히 전시장 문제로 작품 크기를 제한한다. 하지만 전당은 넓어서 전혀 그런 걱정 없어 각자 자신이 역량을 발휘한 큰 작품을 출품해 쾌적한 전시를 할 수 있어서 보기에도 시원했다. 원래 남부현대미술제는 지금 생각해도 웃기고 슬픈 한국미술협회의 엄청난 부조리한 미술 행정 및 이사장 선거에 대한 반발심으로 1985년에 발족됐다. 당시에는 서울은 중앙, 서울 외의 모든 지역은 '지방'으로 통했다. 당시에 미술 세계에 지면이 있던 내가 쓰는 글에 서울 지역, 전주 지역이라는 말조차도 사람들은 생소해했다.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선거만 봐도 서울(중앙) 회원들은 스물대여섯의 젊은 작가들에게 선거권이 있었다. 서울 외의 모든 지역(지방) 회원들은 아무리 원로 작가에게도 선거권은 주어지지 않고 그 지역에서 선출된 대의원 몇 명에게만 선거권이 주어졌다. 당시에도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제도가 다른 모든 단체들의 비웃음 속에서도 한국미술협회에는 존재하고 있었다. 그때 전북의 전북현대작가회와 광주의 에포크 그룹을 동시 가입했던 고문 복철 교수와 이승우 화백 등 에포크와 부산 지역의 혁동인그룹 연립전을 통해 시야를 넓혔다. 이를 계기로 전북현대작가회와 에포크, 부산의 혁동인 그룹에 제주도의 관점 그룹까지 연립전을 가지며 태동됐다. 자기들이 좋아하는 중앙 미술이 우리 남부현대미술제를 흘깃거리게 하자는 것이었다. 다음에 대전과 대구의 작가들까지 모두 모여 중앙에 대한 지방의 반란으로 시작된 남부현대미술제가 1985년에 시작됐다. 2022에서 1985를 빼면 세월이 나온다. 이번 전시는 오로지 홍현철 회장과 임승한 사무국장의 노력으로 몇 년째 이루어져 새로운 전통을 마련해 가는 중요한 과정에 있다. 앞으로도 남부현대미술제의 탄생 배경을 잘 알아서 그 정신이 오래 계속되기를 바란다. 대한민국남부현대미술협회 전북지회 영·호남 교류전 기간: 12월 9일∼12월 15일 장소: 한국소리문화의전당 1층 전시장 주최·주관: 전라북도문화관광재단, 대한민국남부현대미술협회 전북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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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2.12 17:30

[이승우 화백의 미술 이야기] 미술과 사회 5

고전음악을 이해하고 즐기는 사람들은 많은 시간을 청각적인 훈련에 할애한 끝에 맛보는 축복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많이 보고 많이 느끼는 시각과 지각적인 훈련 끝에는 좋고 많은 공감대가 형성될 것이다. 이야기가 있거나 없거나 혹은 그림의 주제가 별스러운 것이 등장한다고 해도 그림이란 어차피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형태와 그 형태를 둘러싸고 있는 색채 이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화가의 창조적 상상력은 따뜻한 가슴으로 보는 작업이어야 하지만 때로는 차가운 지적 작업일 수도 있다. 특히 현대미술에서는 더욱 그러하며 그 그림과 그 시대의 요소를 생각해야 할 때에도 그렇다. 반복하지만 예술은 곧 시대적인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에게 현대미술이 무관심의 대상인 것 또한 사실이다.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원하던 공산주의 국가들에게선 퇴폐 예술이라서, 자유 진영에서조차 일반 대중의 무관심과 전통화가라 생각하는 사람들의 무지에서 나오는 악의에 찬 독설 또는 평론가들의 나태함이나 구매자들의 우매함 때문에 소외당하는 일이 빈번하다. 미술문화 형성의 기본이 화가, 전시공간, 비평가 그리고 홍보와 관객으로 형성되기 때문이며 여기서의 관객은 곧 구매권을 의미한다. 불행 중 다행스러운 일도 있어서 한때 자유의 천국이라는 미국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전위 화가들을 공산주의 동조자들로 내몰았을 때 당시의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현대미술관 25주년 축사에서 “미술의 자유는 기본적인 것이다. 이 땅의 자유의 뿌리 중의 하나”라고 변호한 일이 있다. 이렇듯 닫힌 사회가 아닌 열린 사회의 모든 예술은 궁핍과 통제의 공포로부터 해방될 때 더 다양한 창작에 의한 직접적 간접적 경험으로 우리의 문화를 축적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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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2.05 17:16

[이승우 화백의 미술 이야기] 이호철의 Dreaming전 2

그의 작업의 원천은 금세기 최고의 작가 중 하나라고 불리는 '변신'의 소설가 카프가가 당대에 나올 수 없는 소설이라 극찬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로부터 나왔다고 여긴다. 이 소설은 모두 알고 있는 내용이고, 이 소설이 무엇을 지향했는지 다 알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더 이상의 설명은 배제하겠다. 한때는 시대의 아픔을 '워커 속에 핀 꽃다발' 같은 작업으로 작가의 가슴에서 들끓는 분노를 있는 그대로 표출해서 보는 사람들에게 간장을 조리는 시원함을 느끼게 하는 것 등을 표현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작가는 많이 성숙해진 것인지 설명적인 분노보다는 분노를 해학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을 하는 것 같다. 그리고 삶이 있으면 죽음도 꼭 동행해야만 하는 인생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창작에 임하는 자세가 조금은 참된 방향으로 가고 있어 좋다. 이 모두 돈키호테와 산쵸, 그리고 로시난테를 깊어서 진지했던 마음으로 만난 덕분이리라. 조각이라는 인공물과 나뭇가지라는 자연물을 배치시키는 퍼포먼스적 작품도 그럴듯하고 삶과 죽음의 관계를 스스로 설정해 작품화시키는 것마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 즉 여느 작가들처럼 '어떻게'라는 방법부터가 아니고 먼저 '무엇을'부터 심사숙고하고 뒤에 '어떻게'를 이어가는 태도가 바람직한 예술가의 길이라는 것을 그가 알아챈 것으로 여겨진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가 깎아내려가는 조각가가 아니고 붙여 올라가는 소조가이기 때문에 작품마다 동으로 환치시켜 보관하는 것이 최상일 테지만, 아직 FRP와 혼합재료, 드라이 플라워 등을 사용해 표현 작업을 한다. 지금 그는 그리 젊은 나이가 아님에도 보존성보다는 실험정신에 더 충문한 것도 바람직하다. 나뭇가지나 말린 꽃 등 약품 처리로 보존성을 높였지만 그러면서도 기능면에서도 하자가 없으니 금상첨화다. 그러나 여기에서 작가 본인에게 쓸데없는 고통의 시간들이 혹 있을까 봐 꼭 한 마디는 해야겠다. "창조는 항상 서툴다"는 피카소의 말이다. 물론 피카소의 말이 모두 금과옥조는 아니지만 이론으로 학습한 것이 아니라 쉴 틈 없는 작업의 연속에서 나온 말이니 작업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세상에 존재한 일이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창조야말로 어디서도 본 듯하지 않으니 서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능, 흔히 말하는 기술은 그것을 연마하는 반복 과정에서 차차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미리 전전긍긍한다거나 좌절하지 말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만물을 창조하는 Big God이 아니고 다만 그분이 미처 못 만든 것을 찾아서 만드는 Small God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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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1.28 17:20

[이승우 화백의 미술 이야기] 이호철의 Dreaming전 1

청소부가 지나가기 직전의 거리 은행나무 가로수 밑에 잠깐 동안 쌓인 노란 은행잎도, 그 미련까지 아름다운데. 하물며 고풍스러운 향교의 옛 건물이 있는 마당에 가을 내내 쌓인 은행잎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넋을 놓을 만큼 놀라운 향교 앞 길에 있는 향교길68 갤러리와 팔복예술공장 전시실에서는 동시에 조각가 이호철의 'Dreaming' 전이 오픈됐다. 어제의 Dream이 아니라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는 뜻의 '-ing'를 지닌 Dream이고, 내일도 계속될 Dream이다. 조각가 이호철이 나 하고 부자지간임을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래서 쑥스러워 이호철전은 쓰지 않으려 다른 사람에게 부탁했었지만 지금도 내 마음에 부채로 남은 기억 때문에 그때의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다시 마음을 고쳐 먹었다. 그와 나는 원래 부자지간으로 만났었지만 어쩌다 보니 대학교에서는 사제지간으로 만나게 됐다. 시험이 있었고 채점을 하는 과정에서 분명히 A+로 여겨졌으나 표기 과정에서는 B+(본인은 지금까지도 B-라고 우기지만)로 했다. 제 자식에게 최고 점수를 주기에는 그때까지 남아 있던 유교사상을 버리지 못하고 딴에는 겸손하게 한다고 처리했던 것인데 결과는 너무 참혹했다. 줄곧 장학금으로 학비를 충당했던 그에게 장학금이 끊긴 것이다. 등록금도 안 주면서 아들의 일상을 망쳐버린 꼴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그는 다른 대학의 교수로 있던 고모에게 돈을 빌려 등록금을 냈으니 나에 대한 원망이 하늘을 찔렀을 것이다. 자신의 정당성을 폄훼 당해 억울했으니까.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고도 그때를 회상하며 "아빠 과목이라 매 시간마다 술냄새 맡아가며 튀는 침방울을 맞으면서도 맨 앞에 앉아 열심히 했고 시험도 기분좋게 봤는데 청천벽력이었다"는 비난을 고스란히 들어야 했다. 할 말이 없었다. 6∼70년대의 일본 사람들이 한국은 유교가 너무 성하고 오래가서 아직도 후진국이라 비웃었던 글이 생각났다. 그래서 그때 유교가 나라의 흥망만 가른 것이 아니고 부자지간 정의 흥망도 결정하는구나라는 생각까지 했던 일도 이젠 모두 추억이 됐다. 지금의 그는 그런 얼룩을 발판으로 자기의 주장을 펼칠 수 있는 작가로, 또는 최소한 비겁하거나 억울하지 않은 인간으로 살아왔다고 인정되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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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1.21 16:41

[이승우 화백의 미술 이야기] 미술과 사회 4

그러니 정치 부재, 혹은 없어서 더욱 좋을지도 모르는 정치적 상황 아래서 자연발생적으로 민중, 민족미술이 출현하여 다급하고도 결연한 목소리로 소위 제도권 미술의 문을 두드리고 윽박질러도 속이 좁은 사람인양 반응을 하지 못했다. 물론 그들의 이론을 전부 수용한다거나 같은 행동을 하자는 것은 분명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목소리에도 어느 정도는 반응을 했어야 했다. 그들의 출현은 분명 시대의 아픈 상황이었고 그들이 질타할만한 요소들이 제도권 미술에는 너무나 만연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창조적 상상력을 거세하려는 대학의 미술교육 현장을 질타에도 한 번쯤은 귀를 기울이고 반성을 하는 가운데 모색점을 찾는다거나 공감을 했어야 했고 한국미협의 부조리한 운영에 대한 것들에도 공감을 했어야 했다. 다시 말하자면 민중미술 역시 이 시대가 절실하게 요구한 시대적 상황이다. 그들의 이론에 부분적으로는 절대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고 너무나 비약된 논리나 극단적인 표현으로 갈 때만은 부정을 했어야 했다. 요약하면 긍정할 부분은 긍정하고 부정할 부분은 부정하여 모색할 점이 있으면 같이 모색을 하는 태도를 보였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본인에 대한 반성이다. 과거 민중미술 작가와 필전이 있었을 때의 반성이다. 현대미술을 감상할 때 특히 어려운 부분이 비구상성이나 작가의 논리성이 강할 때이다. 외부 대상이 있어서 비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막연한 이해의 대상이어서 극히 주관적이기 때문에 우리의 실존 세계와는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 보자. 우리가 손 훈련이 서툴러 손으로 그리지는 못하지만 머릿속으로는 척척 그려지는 대상이 있다. 벌거벗은 여인이라거나 빨간 사과, 초가지붕 위의 박 넝쿨 등은 구체적인 대상을 봤던 기억으로 하여 떠오르는 형체가 있지만 머릿속에서도 떠오르지 않는 꿈, 슬픔, 권태 좌절 등의 내 마음속에서만 가능한 추상명사는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또는 이야기의 전개가 전혀 없는 조형의 기본인 조화, 강조, 율동, 통일, 리듬 만으로만 전개되거나 이도 저도 뭉개버리고 철학적인 사고에 근거한 무조형성의 그림은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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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1.14 17:26

[이승우 화백의 미술 이야기] 미술과 사회 3

길을 묻는 사람에게 약도를 그려 줄 수 있는 능력은 그 지역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이나 상식, 또는 경험 없이는 안 되는 이치와 같이 ‘나타난 것과 나타나게 하는 것’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 보자. 무엇이 어떻게 제시되었는가에 따라 ‘나타내게 하는 힘’은 무엇이고 ‘나타내어진 것’과의 관계는 어떠한 것인가를 알아보는 것이 곧 미술의 사회적인 역할에 접근하는 길이다. 우리나라의 단청이나 솟대, 혹은 지구 전역에 걸쳐 있는 이 지역의 수호상들 역시 어떠한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 상징성은 또한 그 사회의 생태와 정신을 통일하는 절대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집단을 이루는 사회는 향상 변한다. 무엇을 어떻게 원하느냐에 따라 비단 미술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변한다. 이에 대하여 칸딘스키는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에서 “모든 예술작품은 그 시대의 아이이며, 우리 감정의 어머니다. 말하자면 문화의 각 시대는 그 시대 고유의 예술을 만들어 내며 이것은 되풀이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거의 예술 원리를 되살리려는 노력은 기껏 사산아死産兒를 닮은 예술 작품을 만들어낼 뿐이다. 우리가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살고 느낀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그리스 조각의 원리를 따르는 사람은 형식의 유사성에 도달할 수는 있을 뿐이며 그런 작품은 언제까지나 자신의 영혼 없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 모방은 원숭이의 흉내일 뿐이다. 겉보기에 원숭이는 사람을 닮았다. 원숭이도 코 앞에 책을 펴고 앉아 생각에 잠긴 듯 책장을 넘길 수 있다. 그러나 그 행동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집트의 영혼불멸 사상은 아직도 불가사의한 피라미드를 남겼고 그리스의 수학적 합리적인 이성 미는 파르테논 신전을 남겼다. 세계 1차 대전 발발 전후의 세기말적 현상은 다다이즘을 남겼고, 과학만능주의는 미래주의를 남겼으며 역반응으로 초현실주의를 낳았다. 미국의 대중적 상황은 팝 아트를 잉태했고, 십자군 원정의 실패는 시민 계급을 형성시켰으며 급기야는 르네상스의 기운을 낳았다. 예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는 항상 시대가 요구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시대를 무시하고 아직도 구태의연한 표현으로 일관하는 화가나 그것을 요구하는 구매자가 많은 세상이다. 화가를 한낱 장인丈人으로 전락시키는 데도 불구하고 지나가는 행인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는 행위는 분명 비굴 이상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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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1.07 17:22

[이승우 화백의 미술 이야기] 미술과 사회 2

“예술가의 사명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인간을 미화하고 사회를 미화한다. 그런 진정한 예술가가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고 고마운 일”이라는 다소 예술의 사회성을 강조하는 글을 썼다. 예술도 여러 분야가 있듯이 사회도 각자가 지닌 재능이나 품격에 따른 여러 가지 직업이 있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이며 수직적인 두뇌를 가진 사람들이 선호하는 직업도 있고, 창조적이며 수평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가야 할 길도 있다. 농부, 정치가, 사업가, 법관, 의사, 화가도 그 집단 체제의 사회를 이루는 하나의 구성원이다. 집단 체제의 상황에 따라서 미술은 하나의 취미일 수도, 정치에 예속되는 기능일 수도, 또는 사치스러운 기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 즉 있어도 좋고 없어도 관계없는 경우라면 애초에 미술의 사회적 역할을 애써 논할 필요가 없는 것이리라. 집단을 이루어야 하는 사회에서는 생존 경쟁이 이루어진다. 생존 경쟁이란 상대적이어서 상대를 인정하는데서 비로소 각자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위치 확보를 하는 사회적인 개인 활동을 하게 된다. 비단 개인 활동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힘을 극대화시키기 위하여 계층 간의 구조적 동질성을 살려 소집단을 이루기도 하는 배타성 속에서 그 집단 속에서도 또한 개별성을 찾는 배타성을 같이 보이기도 한다. 인디언이나 흑인들이 얼굴에 이상한 색칠을 하여 자기 부족의 동질성을 표시한다거나 회사에서 유니폼을 입거나 그룹을 짓는 행위 역시 그러한 맥락의 동질성에 의한 상대적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이 특이성을 위해서는 사전에 만들어진 동질적 상징성이 있어야 피차간에 구별을 할 수 있으며, 이 상징을 기호로 만들어 내면과 외면의 동질성이나 상대적 구별성을 나타낸다. 예를 들자면 불은 빛과 열을 내재한 생의 활력소로 되어 있으며, 이런 관계로 태양은 만물을 소생시키는 힘의 상징이라 부르게 되고, 그 태양의 상징을 내재한 기호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집단 체제 사회에서 한 개체의 위치나 부족 간의 구별성을 두기 위한 외향적 표식은 결국 사회적 경험에서 초래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즉 상징은 집단 생활의 내적인 필연성에서 표출되는 것이라 볼 수 있고 동시에 사회적 경험을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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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0.31 16:36

[이승우 화백의 미술 이야기] 미술과 사회 1

‘25시’의 작가 게오르규의 내한 강의 중 “예술가는 잠수함 속의 토끼와 같다”는 말을 하였다. 무슨 말이느냐 하면 처음에 제작된 잠수함들은 바다 밑에서 잉여 산소의 계측기가 없는 까닭에 언제 산소가 없어질지를 몰라 그 대책으로 토끼를 같이 태우고 다녔다. 토끼는 산소가 희박해지면 일차적으로 먼저 증상을 보이기 때문에 산소를 채우러 수면으로 부상한다. 여기서 말하는 토끼는 곧 세상을 먼저 예측하는 예술가의 남다른 감각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김성곤 한국일보 논설위원은 ‘예술가들에게’라는 칼럼에서 “이제는 예술가 여러분에게 호소할 차례”라고 했다. 예술가밖에 기대할 데가 없다. 혈액 속에 세균이 득실거리는 패혈증의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악취에 둔감해진 코 썩은 후각을 가지고 아무도 번견(番犬)하지 못하는 세상이 우리의 것이다. 순수는 증류수처럼 실험실에서나 구할 수 있는 불순의 시대, 소독제로서의 알콜이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배신의 시대가 우리의 당대(當代)다. 비리가 윤리가 되었다. 믿을 것이 없다. 이 오염과 불신의 세태 속에서 지금 우리는 예술가 여러분을 믿어 보고 싶다. 지금까지는 모두가 정치 탓이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정치만 믿고 있을 것인가. 정치는 점점 무능력자가 되어간다. 정치의 약력(略歷)만으로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현대 문명사회의 다양한 분류(奔流)를 막을 수 없다. 정치가가 다 다스릴 수 있는 나라는 소국민(小國民)이요, 후진국이다. 진화된 나라는 이제 정치가로만 통치하지 못한다. 통치력의 분화시대이다. 예술가가 지배해야 할 영토가 있는 것이다. 에술은 이미 정치의 종속물이 아니다.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사람을 다스리는 일이다. 정치권력이 인성을 함양하는 것은 교육을 통해서지만 종교에 의탁하는 바가 컸다. 이제 정치가 관할하는 교육도 정교(正敎)가 분리된 종교도 우리 사회에 있어서 인간 형성의 영약(靈藥)이지 못하다. 오늘의 사회 현실이 증명한다. 예술이 나서야 할 때다. (중략) 예술가가 미(美)와 함께 인간의 혼을 존경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이유로든 미의 권위를 실추시켜서는 안되듯이 인간의 정신을 거역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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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0.24 17:48

[이승우 화백의 미술 이야기] 진짜보다 진짜 같은 가짜 3

그 그림은 물론 반 메헤렌의 위조품이었음은 물론이다. 얀 베르메르의 그림은 거의 위작이 불가능하다. 서양 미술 최초로 ‘푸앵틸레’라는 점묘법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위조가 불가능했을뿐더러 진주 귀걸이(귀고리)의 소녀는 현대의 최첨단 기술로도 복사해내지 못하는 것으로 유명한 만큼 위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일반적 통념이다. 그런데도 반 메헤렌은 그것을 위조하여 당시에 80억이나 되는 돈을 받고 팔았으니 손 솜씨도 대단하지만 그 뱃장도 알아 줄만 하다. 반 메헤렌은 그 그림을 위조하기 위하여 당시의 푸른색 울트라 마린을 얻으려고 진짜 푸른색을 나오는 광석인 라피스라 줄라를 곱게 갈아서 사용했다 하고 그런 위작품으로 많은 돈을 벌어 당시 암스테르담에 집을 50여 채나 소유했다 하니 요즘 말로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사람인 동시에 자기가 바로 베르메르라고 생각하고 산 것 같다. 원래 반 메헤렌은 화가였는데 젊은 화가의 그림은 팔리지 않아서 복수심으로 남의 그림을 위조하기 시작하여 경지에 오른 인물이다. 진짜 큰 일은 전쟁이 끝난 직후였다. 국보급 그림을 적국인 독일의 괴리에게 팔아넘긴 매국노를 찾아 처단하자는 국민들의 원성에 못 이겨 자신이 그린 그림임을 밝혔는데도 사람들과 법관들은 도무지 믿으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 법원은 전대미문의 방법을 고안해내고 실행했다. 즉 반 메헤렌이 직접 법정에 나와 증명하라는 판정을 받고 법정에서 그림을 그리는 진풍경의 실황이 있고 나서야 법관들과 시민들의 소요를 잠재울 수 있었던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베르메르의 작품은 진주 귀걸이(귀고리)를 포함하여 35점밖에 안 남아 있는다. 그런데 몇 년 전에 25x20cm의 작은 그림이 베르메르 작품인 것 같다고 했다. 이에 80년 만에 경매시장에 나왔는데 베르메르가 졸면서 그린 것 같다는 형편없는 평에도 불구하고 또 언제 다시 나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350억 원에 매매되었다. 이로써 베르메르의 작품은 이 지구상에 총 36점이 남아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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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0.17 17:21

[이승우 화백의 미술 이야기] 진짜보다 진짜 같은 가짜 2

이야기는 다시 이탈리아 르네상스로 돌아가자. 당시의 유명한 화가이자 건축가이며 다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 1511- 1574)의 기록에 의하면 고대 거장의 드로잉을 얼마나 완벽하게 그렸는지 도저히 원작과 구분할 수 없었다. 세월의 흔적을 입히기 위하여 종이를 연기에 쏘여 바랜 것처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종종 “원작을 보존해두고 대신 베껴 그린 그림을 되돌려 주기도 했다.”는 글을 남겼다. 미켈란제로가 피에타상을 만들고 성모의 옷깃에 “미켈란제로 피렌체 사람이 만들다.”라는 세계 최초의 사인을 남긴 것도 따지고 보면 위작자로서의 행위에 대한 반작용이었는지 모른다. 또 하나의 위대한 위작 화가는 자기 나라를 정복한 점령군의 2인자에게 80억의 거금을 받고 본인이 그린 가짜 그림을 팔아넘기고도 자기 나라에서 영웅 소리를 들었던 인물은 반 메헤렌이다. 평소 미술학도였던 아돌프 히틀러가 미술대학에 합격했더라면 젊어서 타계한 영원한 천재 에곤 쉴레의 1년 정도 후배가 되었을 것이다. 차라리 건축과에 응시하라는 심사위원의 말을 듣고 미술대학을 포기했던 히틀러가 찾은 곳은 군대였고 나중에 2차 대전의 원흉이 되었다. 그런 연고로 미술품에 각별한 관심이 있던 히틀러의 비서에게 어느 날 전장에 가있던 장교로부터 편지가 왔다. “동봉한 보고서는 총통 각하께 큰 기쁨을 드릴 것이라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도 기쁜 마음으로 총통 각하께서 전에 언급한 델프트의 얀 베르메르 그림이 로스챠일드 가에서 몰수한 작품들 중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알려드립니다.”라는 편지가 발견되었는데 그 그림은 바로 베르메르의 그림 천문학자였다. 진주 목걸이를 한 소녀로 유명한 베르메르의 작품은 당시에도 천문학적인 금액으로 소통되었는데 그 베르메르 그림을 몰수했다는 편지였다. 역시 베르메르의 그림 ‘간음한 여인과 그리스도’라는 작품을 위작인지도 모르고 나치의 2인자 괴링이 80억 원에 구입하여 자기 집 거실에 걸고 감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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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0.10 16:29

[이승우 화백의 미술 이야기] 진짜보다 진짜 같은 가짜 1

영화 <벤허>의 시사회에서 갑자기 기도하는 몸짓으로 “신이여! 제가 정말 이 영화를 만들었습니까?”라며 스스로 감격했다는 스위스 태생의 미국 영화감독 윌리암 와일러는 <벤허> 같이 스펙터클한 영화 말고도 로마의 휴일 같은 아기자기한 영화도 곧잘 만들었다. 이 와일러 감독이 미술품을 위조하고 탐정도 등장시키는 재밌는 영화 <Now To Steal Million>을 오드리 헵번과 피터 오툴 주연으로 만들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백만 달러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된 바 있다. 여기에서 오드리 헵번의 아버지가 미술품을 위조하는 사람인데 낡은 캔버스에서 먼지를 털어내며 고흐의 먼지라는 등의 호들갑을 떠는 것을 보며 미술품 위조자들도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는 그 아버지가 위조한 마담 세잔이 엄청난 가격으로 경매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우리나라에도 옛부터 ‘나까마’라는 사람들이 가지고 다니는 동양화는 거의 위장품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또 약 2000여 점을 위조한 영국의 톰 키팅도 위조 미술계의 큰 별이고 이름 잊은 모나리자를 6점을 위작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희대의 위작자는 여러분도 잘 아는 미켈란젤로였다. 10대 말에서 20대 초반에 주로 이루어진 그의 위작 행각은 교묘했다. 위작품을 만들고 땅 속에 묻어 세월의 흔적을 만든 ‘잠자는 에로스’라는 조각품을 당시 교황의 조카인 라파엘레 리아리요 추기경에게 팔아넘겼다. 여기서 잠깐, 땅을 파고 묻었다는 행위를 벤치마킹한 일본인이 있었으니 후지무라 신이치라는 일본의 아마추어 고고학자가 고작 3만여 년의 역사만이 존재하는 일본 땅에서 57만 년 전의 유물을 찾아냈다는 발표가 사기였음을 마이니치 카메라가 잡아낸 것이다. 본인이 땅에 묻고 발굴하는 모습이 만천하에 알려진 것이다. 일본에는 선사시대가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좀 더 역사적인 민족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선사시대의 유물을 땅에 묻었다가 다시 파는 쇼를 하다가 적발된 일이 2001년도에 있었으나 그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할복을 했다는 후속 기사는 없었다. 전 세계를 상대로 한 사기극이어서 지금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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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0.04 17:13

[이승우 화백의 미술 이야기] 미술사상 처음으로 법정에 간 화가와 평론가 2

두 번째 쟁점은 ‘무엇을 그렸느냐.’다. 풍경화라고는 하는데 “이것이 왜 풍경화냐?”, “어디를 그린 것이냐” 등의 질문이 있었다. 휘슬러는 대답한다. “이 풍경화는 크레몬 공원에서 벌어지는 불꽃놀이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어두운 공원을 배경으로 불꽃이 타오르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이어 또 비아냥거림의 목소리가 나온다. 어둠 속에 금물을 뿌렸던 이 그림을 보면서 “떨어지는 불꽃의 구성이나 색채, 세부적 표현들이 풍경화라기보다는 배열의 실험에 불과한 것”이라는 혹평에 다시 “이 그림은 검은색과 금색을 이용한 실험적인 작품으로 음악으로 치면 야상곡 같은 것”이라고 반박한다. 사실 음악은 가사 없이 느리고 빠르고, 높고 낮고, 길고 짧은 곡만 듣고 이해를 하는 사람들이 유독 미술에서만은 가사까지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길고 또 휘슬러가 안타까운 것은 같은 류의 그림을 그리던 터너에게는 아낌없이 찬사를 보내며 본인에게는 엄격한 고전의 풍경화의 원칙을 열거하는 것이다. 결국 재판은 휘슬리의 승소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휘슬리는 막대한 재판 비용으로 살던 집까지 팔아야 하는 가난뱅이의 삶으로 다시 돌아갔으며, 러스킨에게는 휘슬리에게 손해 배상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는데 금액은 1파닝(한화 10원)의 웃지 못할 것이었다. 이 재판으로 휘슬러는 파산하고 러스킨도 우리들 말로 쪽팔려서 옥스퍼드의 석좌교수 자리에서 퇴임하였다. 그러나 휘슬러는 나중에 이 불친절한 그림, 즉 야상곡을 800기니(한화 약 1억 2천만 원)에 팔 수 있었다. 누구의 승리인가를 따지기 전에 꼭 한 번은 꼭 있었어야 할 재판이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나? 여기에는 사진술의 발명도 큰 역할을 담당한다. 1839년에 발명된 다게레오 타이프로 거의 인물사진을 독식했기에 휘슬러는 잘 나가던 초상화가에서 다른 그림으로 전향을 해야 했고 풍경화를 그리는 과정에서 실험적으로 비구상까지를 실험하였으니 미술사에서는 이득인가 실인가는 여러분이 따져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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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9.26 16:32

[이승우 화백의 미술 이야기] 미술사상 처음으로 법정에 간 화가와 평론가 1

이 희귀한 사건은 1877년 영국에서 벌어진 사건인데 제임스 에빗 맥닐 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ller, 1834.07.14. - 1903.07.17.)라는 미국인 화가이며 당시 영국에서 활동하던 화가의 '검은색과 금색의 야상곡: 떨어지는 불꽃'이라는 작품 하나가 일으킨 세기의 재판이다. 이 그림을 보고 당시 옥스퍼드의 석좌교수이며 직접 풍경화를 그리기도 했던 권위의 화신인 예술평론가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02.08.-1900.01.20.)이 “나는 예나 지금이나 런던 토박이들의 매우 건방진 행동을 많이 겪어봤다. 그러나 대중의 면전에 물감 통을 던져놓고 200기니(한화 약 3000만 원)를 요구하는 어릿광대를 보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면서 휘슬러를 어릿광대에게 비유했다. 당시의 러스킨은 화가들의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의 한 마디에 화가의 그림 값이 달라지고 위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러스킨은 본인이 자연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여야 한다는 신념의 풍경화가이기도 했다. 당시의 휘슬러는 영국이라는 타국에서 ‘흰색 교향곡’이나 ‘회색과 검정의 조화 제1번’ 등의 초상화로 서서히 이름을 알려가는 40대의 화가였다. 갖은 고생 끝에 겨우 먹고는 살 수 있었지만, 하루아침에 어릿광대가 되어버린 휘슬러는 러스킨을 명예훼손으로 런던 법정에 고소하고 드디어 다윗과 골리앗의 전쟁은 시작되었다. 1877년 12월에 열린 이 재판의 첫 번째 논쟁은 그림을 얼마 만에 그렸냐는 것이었다 일을 한 시간의 장단에 따라 성실한 정도를 따지겠다는 것이다. 러스킨의 변호인은 최대한 기분 나쁘게 “당신은 야상곡을 해치우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나요?”라고 물었다. 순진한 휘슬러는 “하루요, 아니 그 이튿날도 손을 조금 봤으니까 이틀이요”라고 대답하자 “고작 이틀에 200기니?”라며 “자고로 돈은 일한 만큼만 벌어야지. 쉽게 그린 그림에 비싼 값을 받는 것은 사기꾼들이나 하는 짓”이라며 이제는 사기꾼으로 몰아가는 것이었다. 그제야 질문의 의도를 간파한 휘슬러는 “그것은 평생을 통하여 얻은 내 지식의 대가이고 평생을 키워 온 예술가의 감각”이라며 항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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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9.19 16:56

[이승우 화백의 미술 이야기] 그녀는 항상 엉덩이가 뜨겁다 - 뒤샹 2

1919년에 뒤샹은 파리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렸던 모나리자의 싸구려 복사판에 턱수염과 콧수염을 그려 넣었다. 이 행위는 원작 1점주의의의 고급화된 예술의 사대주의를 비웃으려는 행동이었으니 존경받는 예술작품에 대한 모독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냉소적인 면은 그 뒷면에서 더욱 고조된다. 즉 뒤샹은 자기가 수염을 그려넣은 복사판의 뒷면에 ‘이것은 1919년 파리에서 만들어진 L,H,O,O,Q라는 오리지널 복사판임을 증명함’이라고 써 넣었다. 그런데 이 L,H,O,O,Q를 프랑스어로 계속하여 읽으면 엘아쉬오오퀴(Elle a chaud au cul)로 발음되어 “그녀의 엉덩이는 항상 뜨겁다”라는 뜻이 된다. 이에 대하여 뒤샹은 “나는 슬픔을 띤 이 여자가 콧수염과 턱수염을 붙이면 대단히 남설적이 된다는 것을 알았는데, 이 사실은 다빈치의 동성애를 잘 말해주고 있다”고 회상했다. 어디 그 뿐인가. 나중에는 다른 복사판을 그냥 내걸고 ‘다시 수염을 깎은 모나리자’라는 것을 발표하여 마치 수염이 있는 모나리자가 원본이었던 것처럼 알려지게 하는 모독을 다시 가한다. 오늘날 퍼포먼스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벤트, 그 전으로 또 거스르면 해프닝이다. 해프닝이라는 행위를 맨 처음 시도하여 오늘날의 해프닝을 보편적으로 만든 사람, 피카소가 죽은 뒤 이 시대를 움직이는 최고의 화가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뒤샹 이후와 이전으로 나눌 만큼 그림의 영역을 한없이 많이 확장한 사람, 로젠버그 등에 의하여 네오다다 운동이 일어났을 때 “다다에 네오는 없다”라는 조용한 말로 다다의 일회성과 시대성을 이야기하며 조용히 체스를 두며 살았던 사람, 백남준의 행위를 이끌어낸 사람, 그는 진정한 불멸의 아웃사이더 사상가였다. 그의 작품 제목만 봐도 그가 어떤 사상가였는지를 알 수 있다. 자신을 풀이하기 싫다며 회화를 포기한 뒤샹의 작품 제목으로는 ‘게단을 내려오는 나부’, ‘처녀에서 신부로의 여행’, ‘급속한 니체에게 옆으로 잘린 왕과 왕녀’, ‘샘’, ‘독신자들에 의해서 발가벗겨진 신부’, ‘물의 낙하’, ‘조명등 글라스가 주어지면’ 등이 있다. 특히 ‘조명등 글라스가 주어지면’은 그때까지의 미술 영역에서는 기상천외할 열쇠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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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9.13 16:11

[이승우 화백의 미술 이야기] 그녀는 항상 엉덩이가 뜨겁다 - 뒤샹 1

1917년에 뉴욕에서 열린 앙데팡당전에는 R Mutt, 1917이라고 사인된 양변기 하나가 샘이라는 제목으로 출품되었다. 그것은 신성한(?) 예술 행위에 대한 모욕적인 사건이었으므로 너무나 당연하게 운영위원들에 의하여 철거되었다. 변기는 누구에 의해서 예술 작품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실용품이기 때문이다. 다만 뒤샹이 뭔가를 말하기 위하여 어느 하나를 선택했던 것뿐이다. 그러나 그 작품 하나가 그 자리에서 철거되었다고 해서 사건 그 자체마저 무마되고 잊힐 리가 있겠는가. 그것은 하나의 신호탄에 불과했을 뿐이다. 마르셀 뒤샹은 프랑스 출신의 화가로그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그를 정점으로 하는 일군의 예술 집단은 늘 엉뚱한 사건으로 기존 예술에 대하여 가급적 충격적인 방법으로 모욕과 파괴를 일삼았는데 우리는 그들을 다다이스트라 부른다. 고인 물은 이내 썩고, 안이함은 모든 기능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새로운 가치관을 위해서는 막혀있는 물꼬를 터야 했으며 당연하게 그 무기력에 대해 충격 요법을 가해야 할 것이다. 이는 단순하게 기존의 가치관에 대한 무목적의 파괴가 아니라 오히려 진실에 대한 갈증이고 위선과 권태에 대한 부정의 몸짓이며 가치관의 재발견을 위한 순교자적 행동이기도 하다. 기존의 의미를 부정하고 그 무의미함을 다시 부정함으로 해서 자신들의 행위마저 부정해 버린, 그러나 그 초토화된 폐허 위에서 다시 싹이 터올 새로운 창조를 예상한, 그리하여 중단됨으로써 영원히 존재할 수 있었던 예술 운동이 바로 다다이즘이었다. 일반적으로 예술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우겨도 예술이라고 말할 수 없는 비예술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부터 자신들의 행위는 절대 예술이 아니라는, 즉 반예술을 표방하고 나섰다. 자기들이 하는 짓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들은 예술을 부정한다는 의미의 또 하나의 철학을 만들어 낸 것이다. 여기에 참가한 문화의 테러리스트들 중에서도 두목 정도에 해당하는 뒤샹의 짓거리나 논리는 더욱 비상하기만 하다. 특히 지고한 미술이라 평가되는 작품에 대한 모욕적인 행위는 더욱 철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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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9.05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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