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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의 미술이야기] 군산예술의 전당, 이동근 작가 '자연에 물들다' 전

그림을 그리는데 뛰어난 테크니션인 이동근 작가의 그림은 아무래도 대중적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다. 그 작가가 고향 군산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너무나도 황홀한 사물의 묘사력에 모든 사람이 사진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겠다 싶은 정도이다. 그래서 전시장에 선 나도 극사실주의인가 초현실인가 헷갈리는 경우가 많아 오늘만은 깊게 감상 했다. 그림들은 워낙 표현력이 좋아 화면의 곳곳에 모두 초점을 맞추는 하이퍼 경향도 보였고, 상충된 두 개 이상의 사물을 한 곳에 몰아넣는 초현실 경향도 보였다. 제욱시스가 포도를 들고 있는 소년을 그렸다. 지나가는 새들이 소년이 들고 있는 포도가 너무도 실물 같아서 포도를 쪼아댔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새들이 포도가 너무나 실물을 닮았기에 포도를 쪼아댔는데 그 포도를 들고 있는 소년도 실물과 닮았더라면 새들은 소년이 무서워서 감히 그 소년의 손아귀에 있는 포도를 쫄 수 있었을까? 그림 속의 포도를 새가 쪼지 못하게 하는 방법은 포도를 소년처럼 그리거나 소년을 포도처럼 그리면 된다. 여기에서 포도를 소년처럼 그리는 것은 '무엇을' 그리려는 것이고, 소년을 포도처럼 그리는 것은 '어떻게' 그릴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어떻게'라는 방법론보다 '무엇을'이 현대성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서양미술사에서는 1841년을 기점으로 인물화의 기준이 바뀐다. 즉 카메라의 발명으로 사진기와 '어떻게'를 경쟁하는 것을 멈추고 '무엇을' 그릴 것인가에 치중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고전이 되었을 이론으로 작가를 헷갈리게 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다. '어떻게' 그릴 것이냐는 방법론도 깊어지면 참다운 현대예술이지 않을까? 그러다가 어느 날 본인이 각(覺)을 했을 때 그림이 바뀌지 않을까? 어떤 방법이 더 좋은 방법이라고는 아무도 결정할 수 없는 것이다. 미국이 제조하고 조작해 낸 바스키아의 그림만이 현대적이라고 해야 하나?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수십번 수백 번의 각(覺)을 하면서 인생의 행로를 결정해 간다. 그러는 중 본인의 생각에 따라 방법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타인들이 혹 인문학적인 내용이 조금 결여됐다라고 애써 흠을 잡더라도. 그의 그림에도 분명 철학이 있다. 작은 붓으로 터치를 잘게 썰어가는 각고의 과정에서 그는 선(禪)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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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7.24 18:13

[이승우의 미술이야기] 갤러리 숨, 고보연 작가 '정희의 일기' (하)

이 전에 내가 직접 본 것은 출산과 육아를 해야만 하는 여인의 숙명 같은 것을 보며 여인의 위대성이나 여인만이 할 수 있는 것들을 느꼈었다. 이번 전시에는 여인들이 어느 날 비싼 돈을 지불하고 어느 행사에 입었을 갖가지 옷을 주제로 해서 덧없는 세월이거나 또는 추억을 부활시키는 행위들을 연상할 수 있는 것들을 보여줬다. 작가는 본인의 노트에서 이렇게 밝힌다. "그렇다면 왜 여성의 옷인가? 그건 여성의 삶 때문이다. 결혼 전까지 대가족으로 살았던 나는 여성의 지난한 삶을 무수히도 많이 보았다. 그리고 여성의 몸이기에 겪는 임신과 출산, 육아로 특별한 시간을 보냈고 의미를 가졌다. 물론 삶의 고달픔과 즐거움이 반드시 여성만의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 주어지는 책무와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여성의 옷들을 가위로 성큼성큼 자르고 다시 말아서 연결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어지러이 개별적으로 흩어져 있는 여성의 고된 시간을 이어주는 행위로 가치를 갖는다. 여성은 여성들로 연대 됐고 가족이나 지인들과 연대 되었다. 그 연결의 행위는 그녀들의 삶을 보상하는 위로와 같은 것이었으면 좋겠다. 정희의 일기는 여성의 시간과 이어짐의 위로를 의미한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전시장 가득 머리를 땋듯 천을 꼬아 만든 입체물들이 길고 긴 행렬을 이루며 완성되었다. 이 작업을 조수 없이 혼자 했는지에 대한 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을 들으며 작업시간도 만만치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이 세상 여성들의 삶을 대변하는, 잘못 해석되고 전파된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정상적 의미의 페미니스트 중 고보연 작가가 ‘정희’로 대입되는 모든 여성을 대변하는 형식으로 기획된 전시였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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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7.17 17:20

[이승우의 미술이야기] 갤러리 숨, 고보연 작가 '정희의 일기' (상)

고보연은 설치작가이다. 설치란 평면 회화에서 프레임을 제거하고, 조각에서 받침대를 제거해 버린 것으로 이유가 있는 어떤 것을 전시장에 내놓고 전시장을 채우며 전시장까지 작품화하는 미술의 한 장르이다. 대개 설치는 행위의 결과물인 경우가 많은데 굳이 분류하자면 사진, 행위와 같이 현대미술의 중요한 분야이다. 설치미술은 오브제의 발견과 진화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설치미술의 역사는 원조 격인 1914년 마르셀 뒤샹의‘샘’으로 알고 있다.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되었을 변기를 가져다 뒤집어 놓고 'R mutt 1914'라는 사인을 해서 출품하여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술은 회화나 조각이라는 것이 당연하다고 굳어있는 일반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충격이었을 것이다. 한참 뒤로는 획의 작가, 그래서 공력에 비해 작품값이 너무 비싸다는 구설이 있었던 재일교포 이우환이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 몇 톤이나 되는 철판과 바위를 설치하고 ‘관계-항’이라 했던 것도 생각난다. 또 유명하면서도 일반적인 사람들의 예를 들자면 한때 대한민국의 자랑이었던 행위예술가 백남준이 TV로 탑을 쌓았던‘다다익선’도 있다. 또 백남준의 행위예술이라는 명목으로 백남준에 의해 그리스 조각 같은 몸매를 드러내고 첼로를 연주해야 했던 첼리스트 샬럿 무어만, 또 그와 함께 한 아파트에 살며 나중에 존 레넌과 폴 매카트니를 불화시켜 비틀스를 해체하는 데 일등 공신 노릇을 했던 존 레넌의 아내 오노 요코 등도 모두 설치미술의 짜릿함을 맛보았던 행위예술가들이다. 설치미술은 우리나라의 장승과 솟대에서도 그 유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지역에서 행위와 함께 설치하는 작가들이 몇 명 생각이 나는데 전문적으로 설치미술만으로 사람들의 시선과 마음을 훔치는 작가는 독일 유학파 작가인 고보연이 유일하다. 어느 때 나는 고보연 작가는 차라리 사진작가가 아닐까 생각했다. 현존하는 사람이나 사물의 외양을 찍는 사진작가가 아니라 애환이 많은 이 나라 여인들의 세월을 찍는 사진작가라는 생각을 했었고 어느 정도 맞는 말일 것이라는 생각에는 아직도 변함이 없다. 그래서 그쪽, 여인의 삶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 깊이 있고 밀도 높게 연구하는 것이 고보연 작가의 전시회마다 각기 다른 주제로 발표하는 표현을 보며 느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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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7.10 18:30

[이승우의 미술이야기] 오모크 갤러리, 박종갑 초대전 '만경'(하)

박종갑! 그가 이루고자 하는 글귀인가. 밑도 끝도 없이 엽서에 기록한 글귀가 눈에 띈다. 평중견기 정중견동(平中見奇 靜中見動)이 바로 그것이다. 즉 ‘평범한 가운데 기이함을 찾고, 정적인 가운데 움직임을 구한다’ 이다. 그림을 보고 반대편으로 나가니 아담한 정원의 잔디밭에 의자들이 놓여있고 재떨이까지 준비된 곳에 앉아서 담배에 불을 붙히고 있노라니 짧은 머리에 구릿빛의 얼굴인 무슨 운동 감독이나 될법한 사람이 나타났다. 작가가 관장이라 소개한다. 미술관장? 아닌 거 같은데? 외양으로도 느껴지는 카리스마는 운동 감독이어야 하는 데라는 생각은 여전했다. 옆자리에 앉아있었기에 '오모크(omoke)'의 뜻을 물으니 "꼭 만나야 할 사람"이라는 뜻이라며 남극의 펭귄 이야기를 한다. 펭귄은 수컷이 부화하는데, 부화할 때 바다로 떠나있던 암컷이 돌아와 새끼를 찾는 과정이라며 사전에는 없는 말이라 한다. 과연 없었다. 나중에는 대구의 코다리 집에서 뒷풀이하는데 나중에 합류한 울산 분 중 첼리스트 절세미인이 아내라는 울산의 라상덕 작가가 자기의 목걸이를 나한테 걸어주었고, 내가 왔다는 소리에 한달음에 달려온 대구의 서세승 작가를 반갑게 만나는 등의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나 갈 길이 바쁜 사람들은 아쉽지만, 도중에 일어서야 했다. 하루만 더 묵으라는 여러분들의 만류가 있었지만 나도 내일을 위해 정에 매달리지 않고 일어섰다. 오는 길에 운전을 해준 사람은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10여 년 이상의 유학을 하고 지금은 대학에서 강의한다는, 완주가 좋고 집값이 싸다는 이유로 눌러앉아 인연을 만났다는 김민경 작곡가와 그녀의 인연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니 자정이 넘어 있었다. 오는 길엔 그녀가 작곡했다는 온갖 장르의 음악을 들으면서 오다 보니 긴 시간임에도 지루함은 없었다. 그리고 중요했던 것은 김민경 작곡가와의 오늘의 만남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1~2년 전쯤에 내 강의를 들은 일이 있으니, 구면이라는 것이었다. 아무튼 ‘콧등에 바람을 쏘이러’ 갔던 그날의 여행은 보람 있었고 재미도 있었다. 자기의 전시지만 즐겁게 여행시켜 준 박종갑 작가는 현재 경희대 미대 학장으로 5년째 봉직하고 있으며 나와의 인연은 내가 중등에 있을 때, 그가 다닌 중학교의 교사였으니 이 또한 청출어람이다. 그의 아내 윤 대라는 역시 작가로 평소에는 명랑 쾌활하지만 그림 작업에 임할 때는 무섭도록 진지해지고 상상력이 풍부한 대라 궁의 마님이고 개인적으로 내가 "그림이 정말 좋다"라는 느낌이 드는 몇 안 되는 작가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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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7.03 17:38

[이승우의 미술이야기] 오모크 갤러리, 박종갑 초대전 '만경'(상)

그들(박종갑, 윤대라부부)이 콧등에 바람이나 쏘이자며 나를 꼬여서 간 곳은 긴 터널 6~7개를 지나서 두 시간 반쯤 달려간 뒤에 나타난 경북 칠곡군이라는 생전 처음 가 본 동네였다. ‘목도리 도매’라는 큰 글씨가 세련되지 못하게 있는 다음 동네에 3층짜리 건물에 omoke 갤러리가 바로 목적지였다. 1층의 주차시설에서 내려 계단을 오르니 2층 입구에서 정면으로 단체 채팅방에서 영상으로 보았던 문제의 그림이 정면에 보였다. 224×1,464cm 크기의 그림은 우선 그 크기에 놀라고, 가까이 가서는 그 큰 화면을 신들린 듯 춤을 추는 그 붓놀림에 또 한 번 놀란다. 들으니 무박 2일에 완성했다 한다. 쉬었다가 다시 그릴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서 꼬박 밤을 새우고도 그 이튿날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아마 피카소가 부러워했다는 동양의 일필휘지의 심정이었나 보다. 만경강가에서 그렸지만, 만경강의 실경을 그린 것이 아니고 만경강이 보여주는 그 이미지를 다시 걸러내어 마음이 가는 대로 그려낸 것이었다. 이런 것을 진경산수라고 하고 의경 산수라고 한단다. 그림 중에는 한문을 추상화한 거 같은 문자 추상도 보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한글이었고 그가 스스로 명명하기를 사방서(四方書)라 했다 한다. 즉 본인이 선택한 글자를 사방에서 겹치게 쓰는 것이었다. 글씨를 사방에서 중첩해 쓸 때 조형을 생각해서 굵게 또는 가늘게 씀으로써 굵고 가는 선들의 변화가 일어나고 그것들이 모여 바람직한 조형으로 보였다. 아무튼 그는 종일토록 그림을 생각하고 모든 자연 현상과 사물을 보는 쪽쪽 그림으로의 대입을 생각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생각이 나면 에스키스를 하고 상자 속에 집어넣어 버리니 나중에는 그 상자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본인도 잊었다가 전시회가 다가오면 그 상자를 쏟아내어 그럴듯한 것은 골라내고 선택받은 쪽지는 본격적으로 작품화시키는 것이 지금까지 일관된 작업 과정이라고 한다. 또 그는 자신의 심상을 표현하기 위해 표현에 걸맞은 붓을 직접 만들어 사용한다고 한다. 얼마 전에도 차에 치여 죽은 청설모 한 마리를 길에서 주워 왔다며 마치 금은보화를 얻은 듯 기뻐한다. 야생의 동물이기에 더 좋은 털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 집에는 유난히 동물들이 많다. 그 집 마당에선 고양이와 토끼가 같이 놀고 염소가 아무렇게나 돌아다니는 풍경이었다. 생각해 보니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도 있겠지만 결국은 최대한 자연 상태를 유지한 그들의 털을 노리는 것으로 생각된다. 섬유질이 많은 풀로도 붓을 만들어 초필(草筆)이라 한다는 말도 처음 들었다, 오래전 일이지만 나에게도 직접 만들었다는 긴 붓과 함께 소나무 그을음으로 만들었다는 먹을 선물한 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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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6.26 17:39

[이승우의 미술이야기] 순창군 옥천골미술관, 김철수 초대전

순창군의 옥천골 미술관에서는 그 지역의 대표 원로작가인 김철수 초대전을 마련했다. 순창은 조그만 군 단위의 시골이면서도 제법 규모 있는 미술관을 몇 개씩 운영할 정도로 예향이다. 미술관들도 많이 알려져 인근 도시나 전국의 미술 인구들을 소화해 내서 지역경제에도 도움이 될 정도이다. 순창군의 용궐산과 무량산 사이에는 큰 계곡이 흐르고 진안군 백운면에서 시작하여 순창군을 비롯해, 인근의 군들을 휘돌아 대한해협까지 흘러가는 그 강을 우리는 재첩과 물이 맑기로 유명한 섬진강이라 부른다. 그 섬진강, 하늘길이라 불리는 수려한 강 언덕에는 몇 년 전에 귀향한 작가 김철수와 그의 아내 김인정 작가의 보금자리 겸 작업장이 있다. 작업실 한가운데는 덩치 큰 프레스기가 자리하고 있어 그들이거나 적어도 그들 중 하나는 판화를 하고 있다거나 과거에 했었다는 것을 무언중 말하고 있다. 김철수 작가는 오래전에 서양화 전공으로 학사를 하고 대부분의 화력을 서양화로 이름을 알린 뒤(전미회장 역임), 뒤늦게 대학원에서 판화를 전공했다. 그러나 순수 판화의 특성보다는 오히려 마티스 등에 더 심취하고, 회화의 판화성이나 판화의 회화성을 더 연구했었다. 그래서 그의 회화가 다색판화로 느껴지기도 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그는 전공을 살려 그때까지만 해도 판화에 대한 인식이 미비했던 이 지역의 중심지에 판화 공방을 열어 판화 보급에는 일등 공신이 되었다. 순창군은 행정적으로는 전북이지만 지형적으로나 문화적으로는 전남과 가까워서 그런지 순창이 낳은 불세출의 화가 고(故) 박남재 선생님도 초창기에는 고 오지호 화백의 인상주의풍의 영향을 받지 않았나 생각하게 하더니, 김철수 작가의 작품도 그 바탕이 고 임직순 화백의 무채색이 드문 화려한 색채의 향연이 어렴풋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판화 공부 때, 심취했던 마티스의 단순 명쾌함의 영향도 같이 융합되어 있는듯하다. 당시에는 촌놈이 그림으로 출세하려면 공모전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말도 있었기에 촌놈 중에 촌놈인 김철수 작가도 이미 중학교 2학년 때 시작한 유화로 고등학교 시절에는 조선대학교 전국 학생미술대회에서 최고상을 받고, 일반인들이 출품하는 전북미술대전에서 특선하는 등의 활약상을 보였다. 나중에는 전북미술대전 종합대상의 수상과 더불어 대한민국 미술대전까지 섭렵, 심사, 운영위원까지 했다. 그는 또 귀향민으로 동네 사람들과 자연스레 섞여 들어 수년째 마을 이장으로 봉사하고 있으며, 얼마 전부터인가는 이장 협의회의 회장에도 선출하게 됐다. 또 순창군의 예총 회장으로도 봉직하며 완전한 귀향도 이뤘다. 그 고장의 분위기가 그러해서인지 자연스럽게 그런 시골에도 미대 지망생들도 있어서 자기 작업실에서 그들에게 입시 미술 지도도 하고 있었다. 그의 중등 교사직 20여 년, 대학 겸임교수 20여 년의 경력은 결코 녹슬지 않았을 테니까. 그리고 그림의 모델들도 어렵게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동네 사람들이거나 지인들의 스냅사진을 찍듯이 가장 편안한 상태를 편하게 보이도록 그려,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노동자들이 내 그림을 보고 행복해 했으면 좋겠다"는 마티스의 말이 저절로 오버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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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6.19 18:24

[이승우의 미술이야기] 기린미술관, 6인 그룹전

전주 기린 오피스텔 3층의 기린미술관에서는 지역 명문 전주고등학교에서 스승과 제자로 연을 맺었던 박종렬 미술관 대표가 얼마 전 하늘로 떠나신 고(故) 홍순무 교수를 기리기 위해 기획한 평소 홍 교수와 인연이 닿았던 5인의 화가를 같이 묶어 전시회를 마련했다. ‘예술로의 동행’ 전이 바로 그것이다. 참여 작가는 고(故) 홍순무, 이창규, 강남인, 이성제, 김세견, 최원 등 6인을 초대한 일종의 추모전이다. 전시는 2023년 5원 16일~6월 15까지이다. 대부분 고(故) 홍 교수가 전주 교육대학에 재직하기 전 전주고등학교 재직 시에 연을 맺었던 제자와 전주고 동문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고(故) 홍 교수는 생전에 매우 온화하고 다정다감했던 성격이었다. 특히 그림에는 매우 열정적이었다. 필자와도 재밌는 일화가 있었다. 당시에도 익산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전주에 사시는 홍 교수께서 자신의 화실 주소를 불러주며 무조건 지금 오라는 것이다. 무슨 일로 그러시나 하면서도 어른의 명령이기에 부랴부랴 운전해서 주소를 봐가며 겨우 찾아간 작업실은 매우 청결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당시에도 80세를 넘기신 노구를 움직여 가며 당신의 그림들을 하나씩 내 눈앞으로 옮기시는 것이었다. 당신의 제자인 대학교 교수가 이번에 미술관을 크게 만들었는데 창립전으로 초대전을 하게 되었다며 팸플릿에 게재할 서문을 쓰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시는 말씀을 새겨들어 가며 그림을 감상 분석하고 있는데 큰 미술관을 개관한다는 바로 당사자인 그 교수님이 작업실을 방문한 것이다. 고(故) 홍 교수가 팸플릿은 제작했느냐고 묻자 이미 제작했다는 대답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안 써도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래도 써" 하는 것이다. 지금처럼 나에게 주어진 지면도 없는데 쓰라고 해서 "팸플릿이 이미 나왔는데 어디에 사용하시려고요?" 반문했더니 팸플릿 속에 간지(間紙)로 넣을 테니 쓰라고 한다. 그래서 자존심이 약간 구겨진 나는 "선생님! 저는 간지 글은 못 써요"라고 했던 해프닝이 있었다. 그때의 그 교수님이 바로 지금의 기린미술관 대표 내지 회장인 박 교수이다. 부인을 관장으로 했으니 박 교수의 호칭이 애매하여 사람들이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니 이 호칭도 한번은 정리되어야 한다. 하는 일은 실질적인 큐레이팅이지만 그렇게 부르기엔 어쩔 수 없는 세월 때문에 너무 중후하고, 회장님이나 대표라고 부르기엔 너무 전문성이 떨어지고 해서, 평생 대학에서 교수직으로 봉직하였기에 그냥 "박 교수님"이라는 호칭이 가장 좋을 듯하다. 많이 들어봐서 익숙하기도 할 테고. 호칭 정리는 이만큼 해서 끝을 내고, 참여 화가 중 가장 연장자인 이창규 작가는 원광대 미대 학장직을 역임했던 경력이 말하듯 그림을 전문적으로 오래 한 경력의 소유자로 이번에도 종교에서나 느낄 수 있는 깊은 사유를 바탕으로 비구상 그림을 제작했다. 형체가 없는 사유를 눈으로 보이게 표현해야 하기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혹자들에겐 비구상이 어렵냐, 구상이 어렵냐는 논란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깊이 들어가면 쉬운 것이 없다. 강남인 작가는 지금까지 전시를 많이 하지 않았지만, 그의 하이퍼에 가까운 사실성은 이미 오래전부터 익히 사람들에게 알려졌었다. 이번 작품도 후학들을 놀라게 하기 충분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이성재 작가는 이 나라 전통 인장 주의의 맥락을 고수하며, 이 지역 서양 화단의 1세대이거나 1.5세대의 전통을 잇는 작가로 수많은 전시를 통해 이미 유명해진 작가여서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다. 김세견 작가의 수채화는 이미 교과서에 나와야 할 만큼의 경지에 있다. 평소 김세견 작가의 수채화는 깔끔하고 똑똑한 것으로 정평이 나있는데 이번에는 많은 변화를 줘 여러 가지 이야기를 그림에 도입한 인상이다. 인생 70세가 가까웠을 나이인데도 이들 중 가장 젊은 최원 작가는 젊은 날부터 지금까지 현대미술판에서 때론 흉내가 불가능한 섬세함으로, 때로는 재기발랄한 생각과 자유로운 붓질이거나, 부조에 가까운 양감 등으로 날카로움을 배제하는 등의 변화무쌍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보는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작가였다. 이들이 따로 또 같이 이루어 낸 하모니로 이번 전시는 매우 다채롭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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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6.12 17:06

[이승우의 미술이야기] 향교길 68 갤러리, 유대수 전

현재 이 지역에서 유일한 판화가로 활동하는 유대수 씨 전시회가 향교길 68 갤러리에서 다음 달 6일까지 전시된다. 필자는 사범대학 미술교육과를 졸업했음에도 비전공교수(소조)에게 판화를 배워 대학의 첫 강의로 판화 과목이 주어졌음에도 사양해야만 했다. 중등교사 시절, 그렇게 서보고 싶던 대학의 강단이었지만 배운 것이 확실하지 않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뒤 판화가 중등교육 과정이 있음에도 학생들을 가르치며 프레스를 작동하고 에칭 등을 경험했다. 그리고 중등 미술대회에 판화 부문도 지도하면서 32절 크기의 고무판이나마 칼맛을 알게 되었다. 전시장에 들어서니 '과연' 이었다. 칼맛이라기엔 너무 부드럽고 익숙한 붓의 터치 같은 칼맛 같지 않은 칼맛들이 마치 능숙한 화가의 비구상화처럼 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칼도 오래 쓰면 경지가 있나 보다. 전시 제목인 '산산수수(山山水水)'는 아마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는 큰 스님 성철의 말씀으로 짐작하나 그 뜻은 아직 작가의 변을 직접 들어보지 않아 더 오묘한 뜻이 있는지는 아직 오리무중이다. 다만 김삿갓이 금강산을 둘러보고 쓴 시에 나오는 구절에 산산수수처처기(水水山山處處奇)가 있어, 아는 것도 병인 양 잠깐 헷갈렸을 뿐이다. 작품을 보고 또 보고 하다 보니 작가의 엄청난 고집과 긍지를 느꼈다. 작가 자신이 스스로 정한 헌법 같은 아집이 많이 보인다. 절대로 이웃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의지,뭐라고 콕 집어 말하기에는 그렇지만 작품 곳곳에서 풍기는 냄새는 분명해, 좋게 말하면 개성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매너리즘으로 빠질 수도 있다는 우려도 함께 했다. 공개적으로 말하기엔 너무 상업적으로 생각되겠다. 또는 작가 본인에게는 실례일 수도 있으나, 작품을 하나라도 더 팔아야 하는 갤러리의 입장을 대표하는 조미진 관장의 말로는 지난 24일 하루에만 7점이 매매되었다 한다. 이러다가 이 지역에 판화 붐이 일어나지 않나 하는 기대도 함께한다. 예술품을 구매하는 것도 습관이기 때문에 장르를 넘어서 다른 장르를 하는 예술인들에게도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원화 1점뿐인 회화와 여러 장을 만들 수 있는 판화와는 조금 다르겠지만 "아무튼"이다. 판화에 착안한 화가들이 현대의 정교한 사진 기술을 차용하여 비쌀 수밖에 없는 원작은 한 점만 전시하고 거의 원작과 색채와 마티엘이 똑같은 사진 모작들을 같이 전시하기도 한다는 소식을 들은 일도 있다. 갤러리의 역할은 두말할 것도 없이 더 많은 홍보와 판매이다. 그러므로 작가와 갤러리에 그 수익이 돌아갈 때 비로소 작가는 다시 창작할 수 있는 재료를 얻을 수 있고, 갤러리도 경영난을 겪지 않기에 원활한 미술시장이 성립된다고 하겠다. 지금까지는 이런 미술시장이 이루어지지 않아 마치 먼 미래에나 존재할 것으로 생각하거나 살아 생전에 미술품을 사고팔며 대두되는 "돈"이라는 것이 속으로는 좋으면서도 입 밖으로 발설하면 속물 같다라는 입장에서 "나의 작품"과 돈을 같이 말하는 것은 내 예술의 숭고함을 해치는 것이라는 생각도 버려야 한다. 개인적으로 흥정도 불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여러 가지 문제점을 고려해 요즘은 그런 민망한 부분을 갤러리에서 대신 해주는 것이다. 돈이 천하다는 생각은 농자천부지대본 (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 말로만 떠들고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사상으로 돈을 천시했던 유교 사상에서의 영향 때문이다. 한때 일본인들이 유교의 원산지 중국보다 더 오래 깊이 신봉하는 유교사상때문에 한국은 더 이상 발전이 없으리라고 비웃음을 주었던 일이 있었다. 그래서 유교의 좋은 점, 이득 같은 것은 취하고, 현실적이지 못한 사상으로 이미 습관과 전통이 되어버린 것들은 빨리 버려야 함은 물론이다. 이같이 우리 예술인들부터 원활한 미술시장을 위해서는 생각을 개벽해야 한다. 아! 작품을 사고파는 행위의 정당성과 역할을 말하다가 잊을 뻔했다. 이 작품들은 나무결은 안보이지만 모두 목판화라 생각되고, 음각 기법과 양각 기법을 고루 병행하였는데 음각 기법을 더 많이 사용한 거 같다. 여러분이 도장을 파서 인주를 이용해 찍을 때 이름이 빨갛게 나오면 양각이고 이름은 하얗고 배경이 빨강이면 음각이다. "나도 판화가"라는 생각으로 사진말고 전시장에 가서 직접 살펴보며 감상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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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5.29 17:26

[이승우의 미술이야기] 익산예술의전당, 김중현 개인전

이 지역에서 그림을 가장 잘 그린다는 소문이 무성했던 입시 미술학원장 출신의 금강(錦江) 김중현 작가가 금강천리전(錦江天里展)을 익산예술의 전당 2층에 마련하였다. 본인의 작가 노트에 의하면 금강이 발원지부터 군산 하구에 이르기까지 약 400㎞에 이른다니 천릿길이 맞다. 그 천 리 길을 샅샅이 뒤져가며 돌아다녔을 작가의 정열에 찬 모습이 떠오른다. 그 수고에 걸맞게 이번에는 누가 봐도 크게 한번 터뜨리려고 아예 마음을 굳게 먹은 듯하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일단 화면의 크기에 압도된다. 150×450 크기의 작품들이 즐비하다. 20여 평의 아파트 작업실에서 제작했다 하니 감아진 화선지를 조금씩 펴가며 작업했을 그 모습이 내 경험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오른쪽에 화선지 두루마리를 왼쪽으로 펴가면서 그림을 그리고 그림이 마르면 다시 왼쪽을 말아가면서 작업을 했을 것이다. 더구나 큰 붓질도 아니고 세필로 보이는데 그림 한 장에 3일을 매달린단다. 화면의 큰 것에 비해 작은 색의 점들이 영롱하다. 색채학적으로는 그런 현상들이 색 주위에 있는 무채색의 검은 먹선 때문에 이루어진다. 그러나 뒤풀이 자리에 같이 앉았던 한국화과 김문철 교수의 견해는 조금 달랐다. 스밈 후의 발색이라서 그렇다는 것이다. 화선지는 어느 종이보다도 쉽게 깊이 스며들고 그 이후에는 발색이 아주 좋아진다는 처음 들어보는 논리를 들으며, 서양미술사에서 표현되었던 프레스코화가 생각났다. 프레스코 그림이란 그림을 그릴 부분에 먼저 젖은 회칠을 두껍게 하고 젖은 회가 마르기 전에 드로잉과 채색을 하므로 해서 물감이 깊게 스미게 하는 기법이다. 크리스천들의 집, 식탁 위에 하나씩은 걸려있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나, 43m나 되는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등은 모두 이런 기법으로 그려져 500~600년의 세월이 지났어도 아직 남아있는 것들이다. 술집에서 깨달은 화선지와 프레스코 그림의 연관성이다. 이는 동양화를 일도 모르는 절름발이 화가의 고백이기도 하다. 그때 그 동네 사람들은 동양의 채륜이 없었음에도 이미 다른 방법으로 스밈의 중요성을 찾았구나 하는 탄식 같은 것이 있었다. 그림을 보여주는 입장에서는 옷도 잘 입혀서 내보내야 하는데 그런 큰 작품은 매매가 안 될 때의 보관이라는 것이 현실의 문제여서 배접만 한 상태로 전시하니 보는 사람들이 감안하고 봐야 할 일이다. 2배 접이라고 하는데 생각과 달리 탄력이 있어 팽팽하기에 못으로 그림을 걸고 있는 장면을 보고 있었다. 이런 그림들을 실경산수라 하는데 실경산수의 대가 겸제처럼 시선은 부감으로 시선을 약간 위에서 처리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겸제의 금강전도는 시선이 높아 고 부감도라 하지만 금강의 그림은 그보다 시선이 낮아 저 부감도, 혹은 저 조감도로 나뉘고 불린다. 부감의 시선 처리는 동양화의 특성이다. 해 질 녁의 금강 주변의 황혼은 아프리카의 사진 풍경에서나 본 듯한 강렬함이 느껴지고, 먹으로만 그린 정자는 고즈넉하기만 해서 작가의 폭넓은 잠재력을 알 수 있었다. 앞서 말했듯 동양화, 또는 한국화에 대해선 해보지 않아서 화선지나 먹의 성질도 모르는 내가 봐도 울림이 있었기에 감히 서양화가의 눈과 입으로 이야기를 풀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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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5.22 17:55

[이승우의 미술이야기] 기린미술관, 이남석 초대전 ‘흐르는 것을 그린 세류 작가’전

대학에서 한국화를 전공한 이남석 한국 화가가 대학 때 전공에서 저 멀리 달아나서 대학 졸업 후의 삶의 현장에서 얻고 공부한 노동의 기억으로 전시회를 했다. 매번 말하지만, Fine Art를 전공한 졸업생들에게는 우선 갈 곳이 없다. 제 밥벌이는 해야 하는데 어디서 받아주는 곳이 없다. Useful Art를 전공한 사람들은 박봉이나마 그래도 취직할 곳이 있으니 대학 교육과정에서도 순수미술 계열을 더 이상 뽑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철학과 같은 계열보다 더 취직난을 겪는 곳이 순수미술 계열이다. 한때 장사가 된다 생각하여 입학생을 막무가내로 받았던 대학들도 이젠 순수계열의 입학생을 없애거나 인원을 줄였다. 그래서 미술은 학교 교육보다 차라리 도제교육으로 뒤돌아 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마저 드는 게 현실이다. 교육을 받을 곳이 점차 감소해 가기 때문이다. 작가 이남석은 이번이 개인전 18회째이다. 그의 나이가 다른 작가들에 비하면 많이 든 것은 아니지만 그 경력에는 미국 뉴욕에서 했던 글로벌한 것도 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는 젊은 시절을 노동판에서 인력사무소까지 개소할 정도로 보내면서도 지독하리만치 그림과의 끈을 절대 놓지 않았다. 차라리 "악착같이"라는 표현이 맞다. 그는 노동으로 지친 하루를 마치고도 결코 손에서 그림을 놓지 않았다. 그래서 노동판의 축적된 경험이 그림으로 표현된다. 일찍이 고 하반영 선생이 그의 그림을 보고 지어줬다는 "세류(世流)"라는 제목을 아직도 사용하고 있는데 선생님이 아무래도 이 고집불통의 사내에게 세상의 흐름대로 살라는 뜻으로 제목을 빙자하여 작가에게 사는 방법을 일깨우신 신의 한 수인 것 같다. 작품재료는 목재 화판에 타일 본드 접착제를 두툼하게 붙이고 그 위를 타일 쇠손으로 절대 날렵하지 않게 굵직굵직하게 긁어 마초 같은 마티에르 효과를 자유럽게 긁은 위에 채색한 작품들이 인상적이어서 마치 로댕 발자크상의 질감을 보는 듯 하다. 그의 옛 그림에서는 정체불명의 학의 형상들이 많이 등장했었는데, 경험의 축적으로 이루어진 오늘의 작업에 찬사를 보낸다. 그 외에는 스프레이 작업을 병행한 것 같은 산과 하늘을 그린 그림들과 천의 명암과 음영을 정밀하게 묘사한 무채색의 그림도 있었다. 그런데 작가의 허전함에서 진열된 여러 양상의 그림들을 보여 관개들이 혼란스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작가들의 공통된 마음이다. 우리 누구나 상화(商畵)가 아닌 진심으로 내 작업을 할 때, 한 가지 방법으로만 해도, 또는 그림이 너무 쉽게 그려져도 허전함과 함께 혹시 사기 치는 것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어 불필요한 것들을 보태 본 일이 있을 것이다. 또는 사람들에게 이런 것도 그릴 수 있다는 능력의 과시도 내재하는 그런 마음일 것이리라. 일반적으로 그림쟁이 모두가 갖는 두려움과 과시욕일 것이다. 매너리즘에 대한 극심한 혐오일 수도 있고. 그런 진실을 이번 전시회에서는 다 보여주었다. "아직 나는 학생이요 만"이라는 섬세하고 그래서 아직도 배우겠다는 겸손함까지 모두 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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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5.15 18:09

[이승우의 미술이야기] 교동미술관, 이경섭 전

자·타칭 지리산 작가인 이경섭 작가가 전주 한옥마을의 터줏대감 격인 교동미술관 1관에서 개인전을 마련했다. 그의 작업은 원래 갖출구(具)를 사용한 구상(具象)으로, 묘사 중심의 구상(構想)이 아니라 오히려 추상적(抽象的)개념이 많아서 반추상 (半抽象) 미술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순수 추상의 개념에서는 상당히 멀리 있는 관계로 오히려 구상화(構想畵)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그림에 담아내는 것이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올려진 구상화(具象畵)에 대한 인식이다. 구상화(構想畵)에선 사실적인 형태에 가려 이야기를 많이 전개할 수 없는 것도 구상화(具象畵)에서는 어느 정도 뭉개진 형태의 마디마디, 사이사이마다 화가가 원하는 이야기를 집어넣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추상화에선 나름의 어법 때문에, 구상화(構想畵)에선 사실성 때문에 하지 못하는 것을 구상화(具象畵)는 교묘하게 그사이를 파고들어 발생한 미술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그래서 구상화(構想畵)만큼 구상화(具象畵)도 일반 대중에게 어필하고 있다. 일반 대중은 도무지 알 수 없는 난해한 추상미술보다 자세하게 보면 하나씩 내가 기왕에 알고 있었던 것을 발견한다는 것에 큰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마치 "화가, 네놈들이 아무리 아는 체 잘난체해도 나도 알아냈거든"하는 심정에 다가가면 매입하려는 의도도 갖기 쉽다. 왜냐하면 ‘나’보다 세상 사람들이 조금 더 우매해 내가 돋보이고 싶은 의도를 내재한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번에 이경섭 작가가 마련한 전시회는 그런 아무런 의도도 없이, 마치 장자의 소요유(消遙遊)처럼 그저 자연과 아무렇지도 않을 사물에 손과 마음을 맡긴 듯하다. 그의 작가 노트를 한번 살펴보자. "걸어가다 보니 그림 그리는 일이 직업이 되어, 그림 그리는 일을 하면서 살고 있다. 행인지 불행인지~. / 지난 겨울을 버티면서 작업했던 자전적 이야기들을 이 봄에 내보낸다. / 불멸의 작품을 하리라 다짐했던 호기는 청춘의 미련과 함께 다 달아나 버리고 늙어가는가. 지금 덤덤한 일상이 편안하다"에서도 느껴지듯 욕심이나 야망 같은 것은 다 내려놓고 이제 자연이나 현실을 덤덤하게 보겠다는 경지가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림에서도 보이듯 어떤 그림에서도 "잘 그려야지"라는 강박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그려지는 대로, 어느 부분이 좀 내 맘과 달리 나왔어도 거기에는 또 다른 뜻이 생길 거라고 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싶은 대로 그렸다. 실경으로 그리고 싶으면 실경으로, 지금껏 이해하고 살아준 아내를 생각하면서는 그 애틋한 마음은 두 나무가 서로 엉켜있는 연리지(連理枝)로, 황량해진 내 마음은 또 그것대로, 욕심 없이 보이는 대로, 생각되는 대로 그리고 있었다. 거기에는 특별히 잘 그려야지 하는 욕심도 버린 것 같았다. 이렇게 말하자니, 개인적으로 이 작가를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나이깨나 훔친 그늘 공원의 점잖은 노인네로 여겨질 수 있으나, 이제 60대 중반을 갓 넘어선 팔팔한 청춘이 한 마디로 까불고 있기는 하나, 그것은 막걸릿집에서의 겉모습이었고, 그가 고독이라는 것을 느낄 때의 내면은 어느새 이렇게 성숙해 왔나 보다. 그러나 외로움은 혼자라고 느낄 때의 불행이고, 고독은 오히려 혼자 있을 때의 즐거움이라는 것도 알아주기를 바란다. 아무튼 얘깃거리가 많고, 또 스무고개까지 안 가고도 편안하게 간파되는 그림이 널려있는 전시장에서 일우가 즐겁기만 했다. 물론 전시장을 나올 때까지 작가의 심연 속에만 있을 진짜배기 그윽한 고독과 그리움은 알 길이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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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5.08 18:14

[이승우의 미술이야기] 청목미술관, 이종만·이동근·오무균 '3인전'

이 지역에서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세 명의 화가가 모여 3인전을 가졌다. 자기 모여서 3인전을 갖게 된 것이 아니라 꽤 전통이 있다. 이 지역의 3인전을 오래된 순서로 보자면, 고(故) 하반영, 고(故) 박민평-유휴열의 3인전이 있었으나 두 분의 작고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고, 두 번째가 지금 말하려는 오무균, 이동근, 이종만의 3인전이며, 또 하나가 김두해, 이흥재, 선기현의 전시다. 오늘의 3인전은 특이하게도 같은 학교를 같이 졸업한 동기생들이 모였다는 것이다. 그것도 졸업한 지 20여 년이 지난 다음에야 결성되었다. 그들의 졸업 연도가 74년이고 98년에 결성했다 하니 얼핏 계산을 해보면 알 것이다. 학창 시절에는 프랑스의 르 살롱전을 비롯하여 많은 대회에서 큰 상들을 수상을 하는 그들이 못내 부러웠었다. 비겁한 변명이겠지만 그들의 지도교수는 빨리 경력을 쌓으라는 것이었고 나의 지도교수는 "네 그림을 누구의 눈에 맞춰 그리냐"면서 극구 말리셨으니, 나중에 교사가 되고도 처음 공모전을 할 때는 서신으로나마 허락받고 출품했었다. 그들의 전시장에 가서야 받아 본 팜플랫을 보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세 명이 모두 동기이다 보니 이름을 쓰는 순서를 나름 정했을 것이다. 가장 쉽고 공통으로 쓰는 방법이 가나다순인데 거꾸로 되어있다. 의도된 것이 아니라면 여기에서부터 비합리다. 하긴 합리적인 머리로 어찌 그림을 그리겠느냐만 처음 얼굴부터 이렇다. 가나다순이면 오 씨가 먼저고 ㅈ보다는 ㄷ이 앞서는데도 말이다. 일찍이 내가 쓴 글 중에, 당시 유행하던 드라마의 명동백작을 패러디하여 동문 백작이라는 별호를 써줘서 자, 타칭 동문 백작이 되어버린 오무균 작가는 몇십 년 전부터 갯벌을 주로 그렸는데 그의 마음처럼 따뜻하고 안정적인 수평 구도의 곳곳에 아직 남아있는 항변이 있듯 수직으로 박혀있는 말뚝을 그려 넣음으로써 세상에서 가장 견고하다는 수평, 수직 구도를 연출해 냈다. 그것은 그의 행동에서도 나타난다. 그 많은 술을 자주 마시면서도 절대 온화함을 잃지 않는 성격 때문에 자작이나 남작을 한꺼번에 뛰어넘어 단숨에 백작으로 벼락출세를 할 수 있었던 그가 아늑한 수평의 갯벌이라면, 어수선하고 시끄러운 막걸릿집에서 "저기요. 나도 말 좀 하게요."라고 치고 나오는 모습은 갯벌에 수직으로 박힌 말뚝 같다는 연상을 하니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종만 작가는 속필로 유명하다. 어느 화가에겐 붓질의 속도감이 아주 중요하다. 고(故) 최욱경 같은 추상 작가도 자기 키를 넘는 화면에 붓질의 속도를 나타내기 위해 캔버스에서 붓을 떼지 않고 사다리에서 뛰어 내린다. 그러나 이종만 작가를 속필이라고 한 것은 붓질의 속도도 그렇지만 이 전에 칠한 물감이 마르기 전에 그 위에 다시 다른 색으로 겹칠 해 그 혼색이 자연스럽게 표출되기도 하는데, 한번 시도해 봄 직한 기법이다. 그러나 쉽지는 않을 것이다. 혼색할 색과 색의 관계부터 끊임없는 시행착오에서 나왔을 것이니까. 이동근 작가는 앞서 말했듯이 학생 때 이미 상이란 상은 모조리 주워 담을 만큼의 인상주의 화풍의 대단한 실력자였다. 그가 수십 년 전 학생 때 그렸던 그림들이 아직 내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을 정도다. 그런 까닭으로 젊은 나이에 교수가 되었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도저히 믿기지 않는 스타일로 그림을 바꿔 그리기 시작했다. 한 사람의 작품이라고는 상상이 안 가는 정도여서 "저 그림이 동근이 그림 맞아?" 하면서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믿지 못할 때가 있었다. 이른바 ‘생명’ 시리즈다. 그 좋은 테크닉들을 한꺼번에 귀양보내고 마치 아동화 같은 구도와 색채로 일관한다. 그냥 아동화처럼 원색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어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엄청나게 세련된 색채를 사용해서 "과연"이라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의 그림을 멀리서 보노라니 자개 농의 문짝처럼 선명하고 캔버스에 놓인 물감 하나하나가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배경색을 무채색으로 눌러버린 효과일 것이다. 아마 교수직도 버리고 작업실도 정읍 시골로 옮겨 눈과 마음 모두 청정해졌나 보다. 한 번에 한 명씩 다뤄도 지면이 모자랄 이 엄청난 작가들을 3인전이라서 같이 묶어 이야기하는 결례를 저질러 버렸다. 많은 후학이 보고 가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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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5.01 17:57

[이승우의 미술이야기] 윤철규 작가의 ‘노랑 다시 봄’

전주시 서학동에 소재한 서학예술마을 도서관 전시실에서는 지금 윤철규 전이 열리고 있다. 그 건물의 입구가 따로 있을 텐데도 나는 그 조그만 전시실을 찾을 때마다 옆에 있는 교대부속초등학교의 주차장에 차를 놓고 들어갔기 때문에 정식 입구는 아직 모르고 있다. 주차장에서 아담한 전시실을 바라보며 걸어가자니 열어진 문 사이로 반가운 동료 여류화가들의 미소 띈 얼굴들이 보이고 그 뒤로는 작가의 반가운 그림들이 보였다. 우리나라 화가들 대부분이 생계형 화가이겠지만 윤철규 작가도 그중 하나이다. 따지고 보면 다른 선진국에 비해 미술품 유통이 잘되지 않는 지역작가로서 그래도 붓을 놓지 않고 그림에 매진한다는 것은 굉장히 용기 있는 행동이며, 어떻게 보면 대단한 자신감의 표출이다. 그림의 유통과는 관계없이 그림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답게 문명인의 삶을 영위해 가고 있는 것이어서 고도의 인문학 지대를 살아가는 사람임을 자각하고 있다. 유철규 작가는 좋은 소재를 찾아 명승지를 찾아다닌다거나, 고급스러운 소재를 다시 발견하려고 하지 않고, 억지스러운 소재를 찾아 억지로 뽐내려고도 하지 않는다. 주위에 흔히 있는 것들을 남보다 세련된 애정을 갖고 그려내는 것이다. 짜장면을 그리고 호빵과 라면을 그린다. 동네 강아지를 그리고 옆에 사는 꼬맹이를 그린다. 이제는 훌쩍 커버린 혼자 키우는 아들과 이제 연로해진 아버지를 그린다. 소줏잔을 털어 넣는 자신의 헝클어진 모습을 그린다. 언제든지 애정 그윽한 마음만 있으면 다가갈 수 있는 온갖 것들을 그린다. 동식물도 말이 없고 천진한 꼬맹이는 표현이 서툴다. 눈여겨보고 있자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윤 작가의 그림이다. 내 마음을 투영시키는데 상대가 너무 자아를 뽐내면 잘되지 않는다. 상대의 주관을 바라보기보다는 이미 객관화되어 아무 감흥도 일어나지 못할 대상을 즐겨 그린다. 그는 진정한 "만남"이 무엇인가를 깨우친 것이다. 서로의 주체가 각자 주체를 고집하면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주체가 주체의 주체를 버리고, 객체도 객체의 주체를 버렸을 때 비로소 진정한 만남은 가능하다. 윤철규 작가, 그는 만남마다 진정성을 원하는 것이다. 내가 전시장을 좀 늦게 찾은 탓에 각종 매체에 소개된 그의 그림들을 먼저 보며 왜 이렇게 그림들이 누르스름한가 하고 생각했다. 평소에 잘 쓰지 않았던 색들이 조금 생소했다. 그러나 직접 본 그의 그림에서의 노란색은 훨씬 변화에 의한 움직임이 많아서 지루하지 않았고 한마디로 델리케이트(delicate)했다. 그는 노랑을 희망이라 해석했다. 희망이 노랑이든 초록이든 간에 시빗거리는 되지 않았다. 그가 의도한 것이 희망이었으니까. 잠깐 웃는 일도 생겼다. 나보다 조금 먼저 와있던 여류화가 둘이 호빵 그림을 보며, "요것은 팥이 들어간 앙꼬 빵이고, 저것은 야채가 들어간 호빵이라며, 세상에서 제일 비싼 호빵일 것이라며 깔깔거렸다. 과연 다시 보니 그들 말이 맞았다. 그 미세한 표현까지를 담아냈던 것을 보며, 초현실주의 작가 마그리트가 그린 파이프란 그림이 생각났다. 누가 봐도 파이프를 그려 넣고, 그 밑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고 써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빵을 그린 사람은 마그리트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윤철규다. 윤철규의 그림이다. 다만 마그리트가 초현실이라는 예술론을 내세웠듯이 윤철규는 먹을 것에 대한 애정과 존경심을 내세웠다. 그리고 가장 본질적이고 원초적인 철학이나 예술론은 소박한 기본 명제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리라. 윤철규 그는 어려운 철학자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페스탈로치처럼 또는 자연주의 화가였던 토로처럼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한 애정으로 오늘도 붓을 드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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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4.24 17:55

[이승우 화백의 미술 이야기] 류재현 작가의 ‘forest, breath of wind’ 초대전

류재현 작가의 전시가 기린미술관의 초대로 사설미술관으로서는 조금 긴 두 달간의 전시를 하고 있다. 기획하는 입장에선 그만큼의 가치가 인정됐나 보다. 류 작가는 초록색을 아주 많이 쓰고 잘 쓰는 까닭에 나에게 처음에는 "초롱이"로, 다음에는 다 큰 어른을 아명 비슷한 용어로 기억하면 안 되겠다 싶어, 그린 맨(Green Man)으로 각인되게 했다. Green을 녹색이나 초록색으로 번역하는 명칭도, White Horse Ass를 백마 엉덩이로 번역하거나 흰말 궁둥이로 말해도 같은 뜻이듯 상관이 없겠으나, 한문으로 표기해도 녹과 초록은 "록(녹)"자에다가 "풀 초"하나 덧붙였을 뿐인데, 그런데도 나는 초록이란 말이 더 정감이 간다. 아무래도 녹색은 색채학 이론서에서의 색상환이나 색 입체를 강의할 때나 쓰일 것 같은 딱딱함이 있고, 초록이라 하면 모든 녹색의 쓰임을 자유롭게 지칭하는 것으로, 이 인간 세상의 걸림 없는 자연을 느껴지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녹색은 매우 까다로운 색상이어서 다른 색과는 배타적이지만, 초록은 모든 색과 융합할 것 같은 생각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다. 그리고 내 착각이거나 선택적 오류라 하여도 좋다. 사실 그림이나 패션에서도 녹색은 소화하기가 힘든 색이다. 색상환에서는 분명히 중간색인데도 개성이 너무 강해서이다. 그래서 녹색은 보색잔상을 예방하여 의료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수술실의 수술복 말고는 패션의 색채로도 잘 사용되지 않으며, 주위에 무채색을 두어 인인접색과의 조화를 끌어내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초록은 자연에 있는 온갖 녹색을 연상하게 되어 자유롭겠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내 생각에는 주위와의 어울림 때문에 무채색으로 분리하면 녹색이라 해야 맞고, 녹색의 순색에 무채색을 혼합하여 명도와 채도의 변화로 변화무쌍을 일으키면 초록 같다는 선험적 관념이다. 이 녹색을 유사 색상의 배색으로, 혹은 명도와 채도로 무한하게 변화를 일으켜 초록을 만드는 것도 류 작가의 내공에 속한다고 느낀다. 이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인간의 관념일 뿐인 녹색의 초록색 화를 위해 노력했는지 알 수 있다. 말은 쉽지만, 그 과정은 치열한 경험의 축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시처럼 내가 불러주어 비로소 꽃이 된 것처럼 흔하디흔한 풍경들이 그의 캔버스에 내려앉아 꽃이 되었으리라. 거기에 치밀한 드로잉과 그 위를 덮는 섬세한 붓놀림의 상태로 만들어지는 것이 류재현 작가의 그림이라고 본다. 그리고 화면의 크기도 100호가 많았고, 그중에는 100호짜리 캔버스를 세로로 3개를 이어 붙이는 등이어서 노고가 돋보인다. 너나 내나 작가가 팔리지도 않을 대작을 계획하여 작업을 할 때는 자신의 역량을 스스로 가늠해 보는 것이랄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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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4.17 17:49

[이승우 화백의 미술 이야기] 최광석 작가의 ‘지금 만나는 복(福)’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귀가할 때면 꼭 지나야 할 길에 오일장이 섰는데, 어느 날 난 신기한 구경을 했다. 장바닥에 쭈그리고 앉은 남루한 옷차림의 남자가 뭉툭하고 넓적한 구둣주걱 같은 곳에 여러 가지 색깔을 각각 다른 곳에 묻히더니 글씨와 그림을 한 획으로 그리는 것이다. 기가 막히게 예뻤다. 미술대회에 출전이라도 하면 학교 앞인지 학교 울안이었는지도 모호한 작은 봉오리, 오메봉에 올라서 보면 보이는 것은 논(畓)뿐이어서, 선생님이 가르쳐 주었던 어찌어찌 녹색을 칠하고 그 위에 "ㅛ"의 형상을 몇 개 그려 넣어 그곳이 논임을 표시하는 것이 불만이었던 나는 그 거리 화가의 솜씨에 황홀감마저 느꼈었다. 나중에 미술 공부를 전문으로 하다가 알게 된 것은, 그 장바닥의 아저씨가 그렸던 것은 문자도(文字圖)였으며, 그 붓은 가죽 붓이었고, 그런 그림을 혁필화(革筆畵)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뜻글자인 한문 문화권에서만 표현될 수 있고. 어느 글자에는 어느 그림이 공식적으로 들어가야 하며(가령 孝의 경우에는 잉어, 죽순, 부채, 귤 등), 유교 문화권에서만 이루어지는 그림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주로 쓰이는 글자는 효, 제, 충, 신, 예, 의, 염, 치, 수, 복, 강, 령, 부, 귀, 다, 남으로 그리되기를 바라는 소원 내지 기도 같은 것이었다. 이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현대 서예가 겸 화가인 박방영 작가는 서예를 쓰는 중간에 무리 없이 형상을 집어넣어 쓰고 있으며, 이 지역에서는 문자도와는 별로 상관이 없지만 한문(漢文)의 날카로운 획(劃)의 곡선을 차용하여 조각하던 고 백철수 교수가 있었고, 현재는 자개를 오려서 그림에 부착하는 심홍재라는 퍼포먼서의 회화가 있고, 이 중에서도 가장 문자도와 혁필화에 영향을 받고 그 조형미를 살리면서도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최광석 교수가 있다. 그러하니 공식적으로 문자도를 표방하고 문자도에 심취, 그 효험까지를 현대적으로 해석하려는 작가는 최 작가가 유일무이하다 하겠다. 최 작가는 조선시대의 백수백복(百壽百福)이라는 문자도에서도 따로 복(福)만을 떼어내어 백복(百福)이 아니라 백만복(百萬福)을 기원하며 질리지도 않는지 "福"이라는 글자를 이용하여 문자와 문자를 둘러싼 배경의 회화적 표현에서 줄곧 현대화를 이루려 노력하고 있으며, 이상한 것은 이 열여섯 자 중에서도 유독 福 자에만 심취하고, 조선시대의 사람들처럼 그 영험까지를 믿고 있다는 것이다. 최 작가는 원래 동양화 전공으로 대학에 입학했으나(문자도를 선택한 이유가 될 수도), 당시 최대섭, 이건용, 박장년 등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현대미술 기수들인 교수들의 영향 때문인지 줄곧 그 판을 흘깃거렸고, 지역에서도 한참 선배 화가이며, 비록 학교는 다르지만, 문복철 교수 같은 현대미술의 쟁쟁한 분들이 있었기에, 거기에다 작가 본인의 성격이 호탕하고 솔직담백함에서 풍겨 나오는 파괴력마저 느껴지는 최 작가에게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의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파괴력이라는 단어에 이상한 생각이 있을지 몰라 한 마디 곁들인다. 여기에서의 파괴력은 솔직담백함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심이다. 책에서나 있을 법한 적당한 처세술이 아니라 사람 자체에서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솔직담백함은 인생을 적당히 타협하면서 사는 사람들에게 느껴지게 하는 두려운 감정을 파괴력으로 표현하였을 뿐이다. 아무튼 수없는 공모전 출품에서도 동양화가 아닌 현대미술 계열로 많은 수상 경력을 인정받아 약관의 나이 28살에 대학교수로 입신양명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학교에 있는 그의 작업실에는 수백 개가 넘는 크고 작은 福들이 얼크러져 있었다. 과연 지금은 조선시대가 아닌데, 종교의 다양함에 유교도 많이 밀려 이제는 사당의 시제와 가정의 제사 양식에만 약간 남아있는데 과연 이 다양한 관심사가 넘치는 세상에서 우리의 뿌리 깊은 전통 중 하나였던 문자도의 역할과 효능은 어떻게 생각될지 두고 볼 일이다. 요즘에도 민화라는 이름으로 다루어지기는 하지만 현대미술로서의 입장에서도 어떤 의미가 있는지 또한 궁금하다. 이래서 현대미술은 항상 실험적인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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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4.10 18:54

[이승우 화백의 미술 이야기] 이주리 작가의 ‘잔상’

지역의 여류 중에서 층층시하의 여류, 선배와 후배들 틈에서도 이미 선명한 두각을 보인 작가, 이주리의 초대전이다. 이주리 작가는 이전에는 탄탄한 드로잉을 바탕으로 얼크러진 남자의 나신을 묘사하고 사실적인 채색을 하던 작가이다. 중국 상해의 무슨 미술관과 당시는 매우 놀라운 억대의 작품 매매가 성립되었기 때문에 더 유명세를 누렸다. 더구나 당시 약관의 나이 때문에 더욱 주목받았다. 독신인 작가라서 그림 속에 나타난 모델들이 전부 나체인데, 혹은 모델 한 사람만으로 저 어려운 포즈를 다 연출했을까, 아니면 모델은 여러 명일까 과연 ‘누굴까’, ‘누구들일까’ 라는 의문과 함께 점점 신비로운 작가로 전설화까지 되었던 기억이다. 실제로 ‘누구였다’고 지목되는 사람도 있었다. 당시 남자의 나신 군상들은 서로 얼크러져 모델의 어떤 포즈는 도저히 현실에선 어렵고 고통스럽기까지 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감상객에게 힘들다는 느낌도 주었었다. 여기에서 힘든 포즈에 대하여 한번 집고 가자. 그렇게까지 작가가 모델에게 힘든 포즈를 요구하는 까닭은 평소에 안 쓰는 근육까지를 포함하여 보이게 하는 운동감 때문이이다. 그 예로 그 유명한 로댕의 지옥문 위의 조각 ‘생각하는 사람’이다. 오른쪽 팔로 턱을 고이고 앉아있는 좌상인데, 그 턱을 고인 팔꿈치의 위치가 왼쪽 무릎 위인가 오른쪽 무릎 위인가? 오른쪽 무릎 위라면 편한 자세가 되겠지만 불행히도 ‘생각하는 사람’ 은 왼쪽 무릎 위에 오른 팔꿈치를 얹고 있다. 그만큼 몸을 많이 돌려 원상태로 회복하려는 동세(movement)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그러한 남자 나신, 근육의 표현 때문에 그녀는 비유조차 황송하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미켈란젤로를 연상한 일이 있다. 그 한참 뒤, 나와 함께 출품한 DMZ 전에서는 실로 오랜만에 그녀의 작품을 볼 수 있었다. 토끼 모양이라던 한반도 지도에 역시 나신을 구부리고 접어 구겨 넣어 관객들을 놀라게 한 적도 있었다. 그랬던 그녀의 이번 전시작품들인 ‘잔상’ 시리즈를 보고는 "아이쿠 깜짝이야"라는 마음이 덜컥 들었다. 보는 사람들에게 너무나 확실하고 명쾌해서 논리의 딱딱함마저 주던 인체의 드로잉은 자취를 감추고 에곤 실레처럼, 유려한 드로잉으로 변하면서 그 전부를 명확하지 않은 흐릿한 방법으로 처리했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 자신감 넘치는 선도 몇 개는 보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정말 잔상을 보는듯하게 모호하게 표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늙은이의 눈으로 보이는 것처럼 흐릿하게. 어떤 느낌도 함께 했느냐 하면 "이 작가에게도 노안이 왔고 그 노안까지를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작가 자신의 매너리즘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몸부림일 것이다. 새로운 시선에 대한 갈구일 것이다. 이에 대하여 작가의 변을 직접 들어보자. 나의 기우와는 달리 늙은이의 신체적 노후와 정신적 상태까지를 아우르는 글이 내 생각보다 훨씬 어른스럽다. 이런 일이 없었지만, 생각이 너무 좋아 작가의 말을 소개하겠다. 아아! 나에게만 홀로 세월이 덮친 게 아니라 그녀에게도 세월이 있어 나이를 먹어왔다. 그런데도 갑자기 칠리올라 칭케티의 Non Ho L'eta(나이도 어린데)라는 노래가 흥얼거려진다. 잔상(afterimage). 흐릿해진 시력과 함께 사물도 사람의 기억, 삶에 대한 생각마저도 모호해졌다. 어쩌면 같은데 같지 않을 수 있고, 다르지만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식의 애매함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다 사라진 것도 다 남아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어렴풋이 반짝이는 잔상들이 남아있다. 그것들은 감정의 변화에 따라 각기 다른 색과 모습으로 한데 어우러져 뭉클 트려 진 또 다른 형상을 보이고 경계 또한 흐트러진다. 사람과 사람, 과거와 미래, 현재의 삶과 죽음 사이에 서로에게 스며드는 관계성과 행복, 기쁨, 슬픔, 화남 등의 감정적 경계에 모호함, 생각의 충돌, 세상을 살아가며 자아를 찾기 위한 무수한 갈등 등의 혼재된 미묘한 차이에서 나는, 그들은⋯ 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의문을 품으며 각기 모습의 잔상을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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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4.03 17:55

[이승우 화백의 미술 이야기] 전혜령 작가의 '테라코타전'

아주 어릴 적에 읽은 소설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암굴왕이라고 했던 것도 같고 나중에 파리로 끝내 살아서 돌아와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된 소설의 주인공인 에드몽 당테스가 무인도에 있을 때, 아무 경험도 없었던 그가 우연히 진흙이 불에 구워지면 그릇으로 사용해도 전혀 부족함이 없이 딱딱해진다는 것을 발견하고 뛸 듯 기뻐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우연히, 정말 우연히 발견하는 그 기쁜 장면, 그 설렘을 알렉산드로 듀마가 어찌 그리 잘 표현하였는지 지금도 그 설명과 내 어린 시절이 겹치어 생각난다. 그것이 바로 테라코타이다. 라틴어나 이탈리아어로 초벌구이라는 뜻으로 흙을 한 번만 구워서라는 뜻이며 굳이 한자를 사용하자면 도기이다. 구워지는 온도 1300도를 기점으로 도기와 자기로 나뉘는데 그 둘을 합하여 도자기라 말한다. 테라코타는 1300도 이하에서 구워진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자기는 생활자기 등의 'Useful Art'에 속하고 테라코타는 조형성을 먼저 생각하는 'Fine Art'에 속하며, 더 분류하자면 조소에서의 소조 기법에 속한다. 미술관이 있는 3층을 가기 위해서는 두 개의 엘리베이터가 있다. 그런데 2관을 먼저 지나는 엘리베이터에 탑승하고 '류재현 전'을 관람하러 간 기린미술관 2관에서 열리고 있는 '테라코타 전'이 매우 흥미로웠다. 이 지역에서의 테라코타 작품은 대개 원광대 교수로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정년퇴직할 수 있었던 김모 교수의 천진한 어린아이들 상이, 또는 그보다 조금 후배되는 조희욱 작가 어린아이들의 형태가 일종의 유행처럼 만들어지고 유통되고 있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약간의 매너리즘의 지루함마저 있었는데 처음으로 보는 신선한 것들이었다. 최소한 이 지역에서는. 작품의 크기 때문에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다양한 몸짓은 볼 수 있었다. 더욱 재밌는 것은 대학에서의 전공이 서양화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흥미를 느꼈는지도 모른다. 이 지역에서 유명한 서양화가인 김성민 작가도 한 번의 개인 전시회를 테라코타전을 할애했기 때문이다. 페인터였던 김 작가는 조형만으로는 어쩐지 채우지 못할 허전함 때문이었는지 테라코타 위에 흑연을 칠하고 닦아내는 반복을 통하여 마치 철제 같은 이미지를 만들었다. 그런데 전혜령 작가도 채색하였기에 어디서 무엇을 하던 페인터로서의 욕망은 남아있는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테라코타의 흙색이 포근하여 좋은데도 굳이 표면을 가만두지 못하고 그 허전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사람의 공통점이 또 일치하는 것이 모두 독학이라는 것이며, 가마를 보고 나서 시작을 결심했다는 것이다. 한 가지 다른 점은 김 작가는 한 번의 외도 끝에 본업인 그리기로 돌아왔는데, 전 작가는 그 작업에의 매력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김 작가가 자기 내면의 울부짖음이었다면 전 작가는 이 사회를 상당히 객관적 시선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 내면의 이야기가 아니라 보다 객관적인 사회의 모든 희로애락을 보여주려는 시선의 방향이다. 수줍은 소녀, 생각하는 소녀, 모녀의 다정한 대화, 연인과 훈훈한 만남 등의 얘깃거리가 한가득이다. 여성의 눈으로 비로소 더 가능한 형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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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3.27 17:24

[이승우 화백의 미술 이야기] 유휴열 미술관- 2023년 제2회 아트 모악 '작은 그림 전'

이미 이 지역뿐만이 아니라 보다 넓은 세상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유휴열 선생의 본가 및 작업실이 있던 한가한 시골의 그 마당 한쪽에 집을 증축하고 따님이 미술관을 만들어 운영해온 지도 몇 년 되었나 보다. 따님인 유가림 관장은 화가 아버지와 시인 어머니의 감성을 두루 이어받아 예술적 감각이나 예술인과의 인맥이 일반인에 비해 탁월해서인지 미술관 운영에 꼭 필요한 작가 선정 및 제반 큐레이팅을 도맡아 미술관을 운영해나가고 있다. 처음에 유휴열 선생이 시내권생활을 청산하고 그곳에 들어갔을 때는 그야말로 두메산골로의 낙향인 줄 알았는데, 주위에 도립미술관 등의 명소가 생기면서 두메산골의 이미지는 벗어났으나 아직도 시골 마을의 정취는 그대로인 곳이다. 여기에서 이 고장 유명 화가들의 작은 그림전이 있다기에 출품작가 중의 한 사람인 군산 류 작가의 차에 편승하여 다시 찾았다. 군데군데 유휴열 선생(서양화가)의 조각품이 자리한 마당을 보며 미술관 실내로 향했다. 요즘 그림 매매가 안 되어 가난한 화가들에 착안하여 작은 그림전이 기획된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림이 매매되었음을 알리는 빨간딱지가 여러 군데 붙어있어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도 빨간 딱지가 더 많기를 기대한다. 그래야 화가도 미술관도 재정에 도움이 될 것이다. 미술 문화의 융성에는 꼭 필요한 다섯 가지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한다. 우선 화가가 있어야 하는데 화가는 지천으로 깔려 있으니 됐고, 화가들이 작품을 보여줄 수 있는 공간, 즉 미술관이다. 세 번째 중요한 것이 홍보다. 아무리 좋은 전시회라도 몰라서 못 가면 꽝이다. 네 번째는 그 전시에 대한 평 글이다. 홍보와 평론이 겹치기도 하는데 추천할만한 방법이다. 다섯 번째가 관객권 형성인데 이 관객권은 즉 구매권이기도 해서 중요하다 하겠다. 이 다섯 가지 요건은 미술관 운영자에게는 선택적인 것이 아니라 필수적인 것으로 잘 숙지해야 할 것이다. 그림이 매매 되어야 화가부터 고루 재정적 축복이 이루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출품된 참여작가들의 면모를 보노라면 이 지역에서 낳고, 자라고, 같은 업종에 종사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여태 이름이 익숙지 않은 화가들도 있는 것으로 보아 작가를 선정하는 저변이 많이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기획 때마다 중복되는 화가는 항상 새로운 전시라는 측면에서는 많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명단은 가나다순으로 다음과 같다. 김부견, 김분임, 김수진, 김용석, 김용수, 김원, 김정미, 김주철, 김지우, 김철규, 김판묵, 노정희, 박현철, 백금자, 서수인, 서완호, 서혜연, 송영란, 송지호, 류인하, 류재현, 임수현, 오미숙, 윤완, 이윤경, 이일순, 이종만, 이철규, 이홍규, 장석수, 장영애, 전철수, 최계영, 최동순, 최분아, 최지영, 한은주 등 37명이다. 유휴열 미술관 시골풍의 정경과 함께 세련된 도회적 그림이 함께하는 곳이 힘들어 알리는 까닭은 많은 사람이 언제부터인가 유행인 말 "힐링"하기 딱 좋은 장소라는 것이다. 향기 높은 커피 한 잔도 더불어 즐길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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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3.20 16:32

[이승우 화백의 미술 이야기] 김철규 작가의 '파란에 새기다-인체풍경, 주름' 전

누구보다도 순수한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을 화가 장욱진 선생께서 일찍이 이런 뜻의 말씀이 있었다. 즉, 그림을 할 때 보태는 것도 중요하지만 빼는 것은 더 중요하다는 철학적이면서 우리들에는 꼭 필요한 말씀이었다. 작가는 그림을 그릴 때 언제 붓을 놓을지 몰라서 혹은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자꾸 그림을 매만진다. 대게는 아쉬운 부분을 더 손질하는데 이때 선생님의 말씀은 매우 중요하며, 빈 캔버스 앞에서 그림을 설계할 때부터 와 닿으리라 믿는다. 그래서 "지운다"와 "뺀다"의 차이를 생각한다. 지운다는 의미가 뺀다는 의미가 같은 것인지에 대하여 말이다. 왜냐하면 김철규 작가의 표현은 지우면서 완성돼가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조소 분야로 말하자면 밖에서부터 깎아내면서 완성되는 방법이기도 해서이다. 그는 작업을 할 때 이미 철저하게 계산된 형태를 바탕으로 물감을 중첩해 쌓은 뒤 건조한 다음에 정확한 형태를 근거로 샌드페이퍼로 지워가면서 완성을 해나가기 때문이다. 이제는 '주름작가'로 유명해졌지만, 나하고는 그와의 대학 시절에 인연이 있었던 것도 모르고 처음으로 그의 그림을 마주하고는 표현이 매우 상세한 민중 작가의 탄생인 줄 알았다. 왜냐하면 그가 표현해내는 작품마다 이 땅의 소외계층의 하나인 노인들의 주름진 얼굴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를 비롯한 사람들의 느낌으로 그 주름진 노인들의 얼굴을 보며 프롤레타리이아 계층의 애환을 고발하고 있다 믿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 그들이 생각하는 민중에게 파고들기 위해 가장 사실적인 방법으로 다가가기 때문이기도 했었기에, 같은 사고의 맥락인 줄 알았다. 그랬는데 이번에 가서 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것만이 목적이었다면 굳이 표현을 절제하고 단순화시킬 이유가 없었는데 이번 그림들은 보는 사람들이 더 깊이 생각하고 봐야, 혹은 김철규 작가의 그림에 대한 선지식이 있어야만 비로소 느끼게 될 주름이었다. 전시실에서 잠깐 나눈 대화에서도 사람들의 그런 느낌에 약간의 서운함을 느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가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일반 노인들의 주름을 통해 삶의 애환이나, 우리네 인생의 유한함을 그리고 싶었던 것이고, 그렇게 이해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이번 전시는 많이 생각하고 생략하여 표현된 그림들만 전시했다. 한마디로 현대미술의 특성 중의 하나라고나 해야 할 난해성이 가미되어 일반 대중성과는 많은 거리를 두었다. 뭐가 옳은 방법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의 약력을 보다가 그의 욕심의 단면을 보고 말았다. 어디에 써먹으려는지 바로 알게 되는 '조형 예술학 박사' 취득이다. 서글프다. 이놈의 나라에선 화가로 살기에 배가 고프니까. 그리고 그들은 신분만으로도 터무니없는 존경을 받아왔으니까. 그러나 이 일화는 알아두었으면 한다. 학위를 주는 권위 있는 자들이 피카소에게 학위를 주기 위해 최대한의 예의를 갖춰 피카소를 찾아가서 온 취지를 고했다. 그러자 피카소가 불같이 화를 내며 "이 지구상에서 어느 놈이 감히 이 피카소에게 학위를 준단 말이냐?". 이해를 돕기 위해 전 전시회의 그림 하나를 맨 위에 소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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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3.13 18:45

[이승우 화백의 미술 이야기] 송지호 작가의 '내 안의 행복 이야기'

언젠가부터 토끼를 주로 그리는 특정작가의 토끼 그림이 자주 눈에 띄었다. 올해가 토끼년이라기 자연스럽게 그 작가가 생각이 나고, 화랑 여러 곳에서 띠 전을 기획 발표한다는 소문을 접하면서도 그 토끼 작가에게는 "올해가 참 행복하겠다"는 지극히 단편적인 생각을 하며 송지호 그 작가와의 짧은 인연이 생각났다. 같은 고장에서 붓을 잡고 산다는 것 외에는 전공도 다르고 해서 적어도 내 기억에서는 일면식도 없었던 그가 무슨 인연이었는지 어느 날 술에 취한 나를 경사가 가파른 2층 내 작업실로 부축해준 일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많이 취해있었음에도 이 젊은 작가가 매우 극진하고 공손한 성격이나 전혀 흐트러짐이 없고 주관이 확실한 사람임을 그날의 만남으로 강하게 느꼈었다. 그것으로 개인적인 만남은 시작이자 끝이었으나 그가 그린 의인화된 토끼 그림은 도처에서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서양미술사에서는 토끼가 심심찮게 등장했는데 혹시 한국 미술사에서도 토끼를 일삼아 그리는 작가가 있었나 생각해봐도 그쪽은 무식해서인지 확실하게 떠오르는 작가도 없다. 혹시나 다산을 기원하는, 토끼가 달 속에서 방아를 찧는다는(달은 음이고 토끼는 양이니, 확실한 성 교섭의 행위) 설화에서 근거를 찾았냐고 생각해도 그런 음양의 이치를 생각하는 분위기가 아니어서 이해하기 난감하다가 이번 전시에 가서 어렵게 구한 그의 전시 도록에 수록된 작가의 변을 보고 나서야 작가의 뜻을 헤아리게 되었다. 토끼는 이 작가에게 신이 내려주신 딸을 상징하는 것이었고 그 딸을 보며, 딸과 "사탕 한 개로 딸아이의 웃음을 거래하는" 엄청난 행복을 표현하는 일종의 육아일기였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타인에게는 소소하게 보일지언정 본인에게만은 크나큰 행복감의 또 다른 이야기였음도, 소소한 일상을 따뜻한 언어로 만들 줄 아는 더할 나위 없이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였음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꽃바구니를 실은 자전거를 타고 있는 토끼, 막 꽃다발을 전하려는 수줍은 몸짓 등 그의 그림 속에서는 사랑과 행복만이 가득하다. 그런 마음을 표현하는 것들이기에 지치지도 않게 오랫동안 다양한 형태와 색깔로 표현될 수 있었음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딸과의 행복한 거래는 앞으로도 다양하게 지속해 이루어질 테니까. 그래서 송 작가의 그림에 나타난 다양하게 의인화된 토끼가 우화처럼 행복했었다는 것을 알고 난 뒤 내 마음에도 겨울을 녹이는 다사로운 햇빛이 비쳤다. 그리고 그가 작가의 변에서 인용한 "행복이란 내가 갖지 못한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을 즐기는 것이다"라는 흔히 들어봤음 직한 이 말도 더욱 절실해지고 "과연 나는"이라는 회한의 마음으로 가슴을 여미게 한다. 한마디로 봄날의 아련하게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쌀쌀한 날씨에서의 손수건처럼 좁은 양지가 주는 안도감처럼, 그런 행복한 그림이었다. 이 전시회의 제목인 '내 안의 행복한 이야기'는 진정한 작은 행복을 전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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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3.06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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