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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내에서 무소속 후보 절반이 단체장으로 당선됐다. 표현이 무소속 반란이지 실제는 예고된 결과였다. 민주당의 무원칙한 공천이 이 같은 결과를 낳았다. 그간 전북에서는 민주당 공천만 받으면 당선은 떼논 당상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팽배해 이번에도 국회의원들이 자기들 입맛대로 공천을 했던 것. 국회의원 스스로도 그 결과에 놀랐다. 정작 공천 칼자루를 쥐었던 국회의원들만 민심의 흐름을 읽지 못했다. 이미 민심은 새정치민주연합에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간 30년간 적폐가 선거 때 일순간에 폭발한 것이다.한 단체장은“무소속으로 당선돼 이제는 그들의 눈치 안 보고 오직 주민만을 위하는 행정을 펼 수 있게 됐다”고 무척 반겼다. 공천 받아 당선되면 공천권자인 국회의원한테 충성을 다해야 하므로 소신있게 일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하지만 단점도 만만치 않다. 단체장 스스로가 국가예산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 정당정치 구조하에서는 여든 야든 소속 정당이 있어야 국가예산 확보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역량이 뛰어난 단체장은 여야를 뛰어 넘어 국가예산을 잘 확보하지만 그렇지 못한 단체장은 힘들 수 밖에 없다. 단체장은 이 때문에 중앙정치권과 연결고리를 잘 맺기 위해 온갖 힘을 쏟는다.지금 전북 정치 구조가 야당 국회의원이 전부인데다 단체장 반절이 무소속이어서 국가예산 확보하기가 힘들다. 국회의원이나 단체장의 능력을 평가할 때 누가 더 많이 국가예산을 확보했느냐로 평가한다. 때로는 양측이 국가예산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공과를 놓고 볼썽 사나운 일도 생기지만 국비 확보하는 일에는 조건이 있을 수 없다. 무소속으로 당선된 단체장이 취임 2달이 돼가지만 아직도 국회의원과 보이지 않게 서먹거린다. 노골적으로 비난은 못해도 선거감정이 남아 있어 어정쩡한 태도를 취할 때가 많다.지금은 국회의원 선거가 20개월 밖에 안 남아 국회의원이 오히려 국가예산 확보에 더 급하다. 국회의원들은 한푼이라도 더 예산을 확보하는 것이 재선에 유리할 것으로 보고 발품도 많이 판다. 이런 상황속에서 무소속 단체장들이 세종시와 여의도를 들락거리며 정부 관계자를 상대로 한 예산 작업이 힘겨울 뿐이다. 무소속 단체장 중에는 중앙부처나 여의도를 가본 적이 없어 지리가 어두운 사람도 있다. 본인이 중앙에 가서 예산을 많이 확보했다고 자화자찬성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리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부처가서 문전박대 당해 홧김에 지인들 불러 소주잔 기울인 일도 허다하다. 표 먹고 사는 국회의원과 무소속 단체장은 결코 일희일비할 계제가 아니다. 백성일 상무이사 주필
명장 이순신은 사후에야 빛을 본 인물이다. 선조의 무능과 정쟁으로 7년 동안이나 일본의 침략에 시달린 조선을 구해낸 영웅이지만 상당 기간 조명 받지 못했다. 정조시대에 와서야 대접다운 대접을 받았다. 정조는 임진왜란 발발 200주년이 되는 1792년 이순신을 영의정으로 가증(加贈)했다. 또 이순신의 글들을 모아 ‘이충무공전서(全書)’를 편찬했다. 호남의 자긍심이 잘 드러난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란 표현도 이 전서에 들어 있다. 이순신에 대한 평가는 오히려 일본이 후하다.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 함대의 수장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1848∼1934)는 “나를 영국의 넬슨에 비교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이순신에 비교하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 했다. 산케이신문 기자 출신의 일본 국민작가인 시바 료타로도 이순신을 ‘세계 제일의 해장’이라 극찬했다고 이치백 전북향토문화연구회 회장은 전했다. 이순신의 존재는 조선에서 오랫동안 잊혀졌지만 오히려 헤이하치로나 시바 료타로 등 일본 측에서 그의 존경심이 계승됐다는 것이다. 성웅이 아닌 인간 이순신의 면모가 잘 드러나 있는 난중일기는 이야기(story telling) 보물창고다. 1597년 초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다가 가까스로 풀려나 한양∼경기∼충청∼전북∼전남 승주에 이르기까지 백의종군의 길을 떠나는 일정도 그런 경우다. 이중 전북구간의 행적이 관심을 끈다. “전주 남문 밖 이의신(李義臣)의 집에서 잤다. 판관(부시장) 박근이 보러왔다. 부윤(시장)도 대접했다. 기름 먹인 두꺼운 종이와 생강을 보내주었다. 이튿날 일찍 떠나 오원(관촌) 역에서 쉬고 아침도 먹었다. 조금 뒤 도사(부지사)가 왔다. 저물어 임실현에 이르렀다. 원(현감) 홍순각이 나왔다.”이의신은 덕수 이씨 신(臣)자 항렬로 보아 이순신의 친인척일 것이다. ‘남문 밖 이의신의 집’이 어느 곳쯤 될지 궁금하다. 이곳을 찾는다면 한옥마을과 연계한 좋은 스토리텔링 소재가 될 것이다. 나아가 삼례∼전주∼관촌∼임실∼남원에 이르는 ‘이순신의 백의종군 루트’를 발굴하는 것도 욕심 낼만 하다. 행정기관과 학계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댄다면 가능할 것이다. 모함 당해 고초를 겪고, 성치 않은 몸을 이끌며 백의종군한 이순신의 행로와 발자취는 역사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이경재 수석논설위원
만시지탄(晩時之歎)의 감이 없지 않지만! 예 어른들이 혀를 끌끌 차며 탄식으로 한숨짓던 말이 저절로 입 주위를 맴돈다. 청소년을 위한 국립 전통문화체험관 건립을 추진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서부터다. 전주 원도심 내에 연면적 5000㎡에 250명의 숙박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에 총 사업비 140억 원(부지 매입비 별도) 등 꽤 구체적인 내용이어서 더 기대가 된다. 조바심도 그만큼 더 크다. 이번 기회마저 놓치면 절대 안 되기에.애초 전통문화체험교육의 중심이 되겠다는 것은 전주가 전통문화도시를 선언하면서 표방한 5대 핵심전략사업 중 하나였다. 정부가 전주전통문화도시에 선뜻 손을 들어준 것도 국가가 해야 할 일을 준비가 잘 된 전주가 대신 해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문화관광부와 전주시가 공동으로 발주한 국토연구원 용역보고서에 분명하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우리의 역사를 모르고 전통문화에 낯설어 스스로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느끼지 못하는 청소년들, 이런 상황이 더욱 심각한 해외동포 자녀, 그리고 급증하고 있는 다문화가정. 이들에게 우리의 뿌리를 확인시켜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효율적인 방법이 바로 전통문화를 직접 체험케 하는 것이다. 가장 명분이 뚜렷한 사업인데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3대문화관(소리, 부채, 완판본) 때문이다. 한옥마을 내에 인프라가 아직 열악한 상황이라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없지 않았다. 그 덕인지는 몰라도 한옥마을은 급격하게 활성화되었다. 그러나 전통문화도시의 명분은 꽤 엷어지고 말았다. 요즘 회자되는 위기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그래서이다. 이 사업이 더욱 반가운 것이. 위기를 극복할 튼튼한 동력이 되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든든한 구원투수를 아껴 둔 것이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사실 그 당시만 해도 명분은 확실했지만 그 전망은 불투명했다. 과연 수요가 있을까? 지금은? 수요가 무궁무진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수학여행이 대규모 명승지 관람에서 소규모 체험 중심으로 바뀌었다. 전주처럼 다양한 체험교육 프로그램을 갖춘 곳이 없다. 전국의 수학여행단만 유치해도 쉴 틈이 없을 것이다.다만 이런 주문은 덧붙이고 싶다. 수요에 현혹되지 말자는. 청소년들에게 한민족 고유의 정체성을 확인시켜주고 자부심을 고취한다는 명분에 더 충실하라는. 그래야 전통문화중심도시로 우뚝 설 수 있다. 더불어 그 수요도 지속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종민 객원논설위원
‘팔지 않는다. 빌려주지 않는다. 부수지 않는다.’ 일본 중부 나가노현에 있는 작은 마을 ‘쯔마고(妻籠)’이 내건 구호다. 쯔마고는 에도시대, 교토에서 도쿄를 잇는 나가센도(中山道)에 형성된 여관마을이다. 나가센도는 전체 길이가 530km에 이르는데, 그 사이에 역의 기능을 하는 69개의 마을이 만들어졌다. 자연히 사람들이 묵어갈 수 있는 여관이 마을마다 많이 생겨나게 되어 사람들은 이 마을들을 역참마을, 혹은 여관마을이라고 불렀다. 오랜 세월을 지나오면서 더러는 없어지고 더러는 옛 모습을 잃었지만, 이중 6개 마을이 ‘중요전통적건조물보존지구’로 지정되어있다. 그만큼 보존이 잘되어 있다는 증거다. 그중에서도 쯔마고는 최고로 꼽히는 마을이다. 1601년에 조성되었다고 하니 마을의 역사는 400년을 넘어선다. 한두 시간 돌아보면 족할 정도로 마을은 아주 작지만, 이 마을을 지켜낸 주민들의 열정이 예사롭지 않다. 그 결실은 마을의 역사를 온전히 만날 수 있는 마을자료관에도 있다. 자료관은 역이었던 ‘쯔마고혼진(妻籠宿本陳)’을 복원한 공간이다. 흑백사진이나 민속자료는 대부분 1960년대부터의 것이지만 마을의 오랜 역사는 영상을 비롯한 다양한 기록으로 만날 수 있다. 알려지기로는 쯔마고가 오늘의 모습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마을의 민속자료를 수집하던 ‘쯔마고를 사랑하는 모임’의 활동 덕분이다. 쯔마고 주민들은 1971년 ‘주민헌장’을 제정하고 ‘팔지 않고 빌려주지 않고 부수지 않는다’는 구호를 만들었다. 이 모임을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위원회의 역할도 흥미롭다. 식당위원회, 숙박위원회 등 찾아오는 관광객들을 위해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위원회가 있는가 하면, 건축물 보존을 위한 ‘통제위원회’나 행사와 축제를 관리하는 ‘문화위원회’도 있다. 주민 스스로 다양한 규약을 만들어 지키며 마을을 보존해낸 사례는 일본 안에서도 시민운동의 모범으로 꼽힌다. 일본 정부는 1976년 쯔마고를 보존지구로 지정했다. 일본의 첫 지정마을이다. 지정구역도 마을 공간 뿐 아니라 주변부를 포함시켜 그 넓이가 1,2454ha나 된다. 쯔마고는 1983년 보존재단을 설립해 더 적극적으로 마을 보존 활동을 해오고 있다. 지난 7월에 찾아간 작은 여관마을은 아름다웠다. 시간이 멈춘 듯, 에도시대 건축물이 이어지는 마을 곳곳에서는 쯔마고 주민들의 의지가 빛났다. 허투루 지나칠 수 없는 소중한 교훈을 얻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14일부터 4박5일 일정으로 우리나라를 다녀갔다. 교황의 세 번째 한국 방문이다. 요한 바오로 2세가1984년과 1989년 두 번 방한했다. 1984년에는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대회 및 순교복자 103위 시성식’이 열렸고, 1989년에는 ‘제44차 세계 성체대회’ 가 열렸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 방문은 아시아청년대회 참석을 겸해 이뤄졌다. 이번 방문은 시기적으로 절묘했다. 요즘 우리 사회는 혼란과 갈등이 유난히 많다. 화해와 치유의 메시지가 간절한 때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 세월호 참사 유족 등의 손을 일일이 잡으며 위로하고 사랑으로 다독였다.한없이 낮은 곳을 향하는 교황의 겸손한 자세가 뭇 사람들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끌었고, 방한 기간 중 그의 언행은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을 주었다. 교황의 한국 방문시 비춰지는 대한민국은 순교와 분단, 가난의 역사다. 그들은 한국 사회 곳곳 비틀리고 응어리진 곳을 어루만지고자 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4년 방한 당시 비행기에서 내려 땅바닥에 엎드려 입을 맞췄다. 그는 순교자의 땅이라고 말하며 목숨을 걸고 쌓아올린 한국 천주교 역사에 경의를 표했다. 이번 프란치스코 교황은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에 나와 있던 세월호 참사 유족들의 손을 일일이 잡으며 위로하는 등 고통 속에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먼저 챙겼다. 소형차와 KTX를 이용하고, 아이들 이마에 입을 맞추며 축복하는 그의 겸허한 모습에서 사람들은 낮은 곳을 챙기고, 청빈한 생활을 고집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진실된 면모를 볼 수 있었다. 그는 한반도 평화와 화해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영접 나온 박근혜 대통령에게 한반도 평화를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고 말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청와대 연설에서도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결과’”라고 강조했다. 프란치스코는 18일 오전 명동성당에서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를 집전한 뒤 한국을 떠났다. 이날 미사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 등 위로와 평화, 화해가 필요한 인사들이 대거 초청됐다. 교황은 이 자리에서 남북한을 향해 “죄지은 형제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평화의 메시지를 선포했다. 사랑이든 평화든 결국 상대방에 대한 용서와 화해가 전제될 때만 가능하다.
외국을 오갈 때마다 느끼는 점이지만 왜 전북에는 공항이 없을까. 제주도를 오갈 때 이용하는 군산공항은 우리 땅에 있지만 미군공항이다. 비행기가 이착륙 할 때마다 일정액의 공항사용료를 지불한다. 그간 민선 지사들마다 재임 중 공항을 건설하겠다고 의욕을 과시했다. 가장 가능했던 시기는 DJ정권 실세였던 유종근 전지사 때였다. 유 전지사는 김제공항을 건설하려고 부지까지 매입했었다. 하지만 김제가 지역구인 최규성 국회의원, 곽인희 전시장 지역유지 등 지역 주민들의 거센 반발로 김제공항건설사업이 유야무야됐다. 유지사는 김제 주민들한테 심지어 계란 세례까지 당했다.강현욱 전지사 때도 공항을 건설하겠다고 큰소리 빵빵 쳤지만 진척이 안 됐다. 공항건설 문제로 요란법석을 떨기는 김완주 전 지사 때가 제일 심했다. 지난 2008년 MB정권 때는 감사원이 김제공항의 사업성 부족을 이유로 사업을 중단시켰다. 전북도만 공항건설이 시급하다고 외쳐댔을 뿐 중앙정부는 별로였다. 그 당시 MB정권에 김지사가 밉보였기 때문에 대규모 SOC사업을 추진한다는 것은 연목구어나 다름 없었다. 2009년도에 MB가 군산공항을 확장해서 국제선을 취항시키는 게 맞지 않겠냐면서부터 김 지사가 다시 군산공항 확장으로 매달렸던 것. 김 지사는 그 이후 미군 측과 실무협의회를 두 차례 여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김 전지사는 정치권에서 그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 없이 혼자 외롭게 공항건설사업을 추진했다.그가 재임 중 가장 아쉬운 대목은 공항건설이었을 것이다. 그 아쉬움의 표현이 지난 6월11일 마지막 도의회에서 옛 김제공항 부지에 전북권 공항을 재추진하겠다고 말한 데서 속내가 묻어난다. 아쉬움과 실망이 컸던 그로서는 이 대목서 할 말이 많을 것이다.국가중추시설인 공항건설은 정치권이 총력을 펴야 가능하다. 그간 우리를 발목 잡은 사람들은 다름 아닌 광주와 전남 정치권이다. 지난 2007년에 개항한 무안국제공항이 전북권에 공항이 들어서면 항공수요가 줄어든다는 논리를 내세워 중앙정부에 대놓고 반대를 일삼았다. 청주공항 건설 때도 수도권과 가까워 항공수요가 없을 것이라며 반대를 해왔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항공 수요는 기업유치와 직결돼 있어 공항이 생기면 수요는 문제 될 게 없다. 지금 새만금에 한중경협단지가 조성되고 있어 빨리 새만금에 공항을 건설해야 한다. 그간 존재감이 없다고 핀잔 받아온 도내 출신 국회의원들이 임기를 마치기 전까지 송하진 지사와 협력해서 이 문제를 매듭짓지 못하면 다음은 아예 생각마라. 백성일 상무이사 주필
“‘공기 맑고 경치 좋은 곳을 사나흘 정도 걸으면 보약 한 재 먹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며,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라는 시구를 읊조리며 수많은 길을 걸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대한민국뿐 아니라 지구촌 곳곳에서 걷기 열풍, 슬로시티(slow city)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걷기의 달인’으로 불리는 신정일 걷기모임 이사장은 빠른 것에 익숙해진 세상에서 느리게 걸으면서 여러 사물을 만나게 되고, 결국 내가 나를 만나게 되는데 이것이 걷기의 매력이라고 극찬한다. 속도와 경쟁, 생산성이 강요되는 빠른 사회에서 벗어나려는 이들이 많다. 유유자적하며 느리고 여유 있게 사는데 가치를 둔다. 이런 시도가 슬로시티 운동이다. 6월말 현재 29개국 189개 도시가 슬로시티로 지정돼 있다. 우리나라 슬로시티는 ‘느려서 더 행복한 섬’ 증도(신안군)와 청산도(완도군) , 차 재배지로 세계 최초인 악양면(하동군), 한옥마을(전주시) 등 11곳이다. 애초 12곳이었지만 장흥군 유치면은 요건 불비로 탈락했고 증도는 지난 1일 재인증을 받아 회생했다. 국제슬로시티연맹은 인구와 환경, 유기농 생산과 소비, 전통음식과 문화 보존, 차량통행 제한 및 자전거 이용, 패스트푸드 추방 등 까다로운 가입조건을 규정해 놓고 있다. 문제는 내년 11월 재인증을 앞둔 전주 한옥마을이다. 한옥마을은 2010년 슬로시티로 지정됐지만 상업시설이 지정 때보다 3배 이상 늘어나는 등 급격한 상업화로 몸살을 앓고 있다. 700여채 중 366곳이 상업시설이니 한 집 건너 음식점, 커피숍, 전통찻집, 숙박시설 등인 셈이다. 고즈넉한 정취는 사라지고 기존의 자생적 문화인력들은 상업자본에 밀려났다. 한옥마을이 기왓장만 얹어져 있을뿐 패스트푸드로 도배된 상업시설로 채워져 있다면 신시가지나 다름 없고 생명력도 길지 못할 것이다. 슬로시티는 전통 보존, 지역주민 중심, 생태주의 등 3대 가치를 추구하면서 지속 가능한 발전을 모색한다. 그런데 이젠 이런 가치를 찾기가 어렵다. 슬로시티 재지정을 앞두고 고민이 많을 것이다. 그 여부를 떠나 한옥마을의 정체성 만큼은 회복돼야 한다. 그리고 한옥마을 같은 도시형 슬로시티는 특화된 인증기준을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증도나 청산도의 기준을 한옥마을에 적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경재 수석논설위원
피상적인 것도 변하고 심오한 것도 변한다/ 사람들의 사고방식도 변하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한다/ 세월이 지나면 기후도 변하고 양치기도 양떼를 바꾼다/ 그렇게 모든 것이 변하듯이 내가 변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아르헨티나 국민가수 메르세데스 소사의 모든 것은 변한다의 노랫말이다. 여린 연둣빛 봄이 짙푸른 녹음으로 변한 지 오래, 이제 곧 바람이 선선해지면 황금빛 들녘으로, 그리고 하얀 수의의 벌판으로 변해 갈 것이다. 때로는 그러한 변화에 의한 다양함이 무료함도 달래주고 힘겨운 현실에 희망을 갖게도 해준다. 내일이면 달라지리라는 기대가 없다면 팍팍한 사막길 같은 삶의 여정 어떻게 견뎌낼 수 있겠는가?그렇게 전주 한옥마을도 변했다. 한때 이곳은 부자들이 모여 살던, 전주에서 가장 잘 나가던 지역. 그러나 주거문화가 아파트 중심으로 변하면서 민원이 끊이질 않는 대표적 슬럼가로 급격히 쇠락해버린다. 그러다 한일월드컵 전후 지역혁신을 통해 고즈넉한 기와지붕의 가장 한국적인 마을로 주목을 받더니 이제는 연간 수백만의 관광객이 밀리는 명소로 탈바꿈을 했다. 요즘과 같은 무더위에도 태조로와 은행로, 골목골목까지 인산인해, 어깨를 펴고 걸을 수 없을 정도다. 10여년 사이 천지개벽을 한 것이다.이곳은 지금도 급하게 변해가고 있다. 그런데 이제 그 변화가 반갑지만은 않다. 너무 급격한 상업화로 본래의 정취, 정체성 모두 찾아볼 수 없게 변질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느리게 쉴 수 있는 공간을 꿈꾸었는데 시끌벅적한 장터로 변했다. 처음 기획할 때 서울의 인사동처럼 되어서는 안 되다고 강조를 했었는데 위대한 자본의 힘에 밀려 똑 그렇게 닮아가고 있다.다시 소사는 이렇게 노래한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멀리 있더라도/ 내 조국과 민족의 고통과 그에 대한 기억은/ 그리고 그들에 대한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어제 변한 것은 내일에도 변해야 한다/ 이 먼 땅에서 내가 변한 것처럼/ 변한다, 모든 것이 변한다/ 하지만 내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변화의 무상함에 속이 상할 때에는 특히 이런 노래가 격려가 된다. 모두 변한다지만 분명 변하지 않는 게 있다. 이 노래가 주는 감동이 그렇고 전통문화나 한옥마을에 대한 우리들의 사랑이 그렇다. 모두 변한다는 진리가 변하지 않듯 변화에 굴하지 않는 사랑만이 바람직한 변화를 견인할 수 있다! 이 또한 변할 수 없는 말씀으로 또 위로가 된다. 이종민 객원논설위원
군산시 미성동. 도시개발로 대단위 아파트가 들어서고 도로가 새롭게 나면서 온전한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10여년 전만해도 이 일대는 도시근교에서는 좀체 만나기 어려운 넓은 평야가 펼쳐졌다. ‘불이농촌’. 행정구역상 미성동이란 이름이 있지만 일제 강점기에 붙여진 이 들판의 이름이다. 옥구저수지를 끼고 앞뒤로 뻗어있던 들판은 넓이만도 3000ha. 일본의 식민정책이 절정에 이르렀던 1920년대, 토지 침탈을 위해 벌였던 간척사업으로 조성된 땅이다. 간척은 일본이 조선 토지침탈의 한 방법으로 추진했던 사업이다. 1920년대부터 왕성하게 추진한 일본의 간척사업은 30년대 중반에 이르러 ‘7만 정보에 이르는 땅’을 얻었다. 불이농촌과 김제 광활이 그 대표적 성과다. 특히 불이농촌은 일본에게 매우 상징적인 땅이었다. 당시 식량문제와 빈농구제 등 심각한 사회문제를 안고 있었던 일본이 해결방법으로 추진한 것이 이주정책. 식민지였던 조선은 일본인들을 이주시키는데 가장 적합한 대상이었으며 불이농촌은 일본인 이주정책의 상징적인 공간이었다. ‘불이농촌’을 간척한 불이흥업주식회사는 1920년 군산에서 4km 정도 떨어져 있는 이 일대의 간척사업을 시작했다. 바닷물이 닿는 갯벌이었지만 지형적 요소나 자연적 여건이 간척지로 개발하기에 천혜의 조건을 갖고 있었다. 당시 소요된 사업비는 224만 3000원. 사업을 시작한 3년 뒤인 1923년 마무리됐다. 이듬해부터 일본인 이주자들이 찾아들었다. 대부분이 일본의 하층민들이었다. 불이흥업주식회사는 직접모집의 형식으로 이민자들을 끌어들였지만 내무성을 거쳐 일본안의 각 부와 현에 의뢰하는 절차를 거쳤기 때문에 실제로는 일본 이민정책의 통로가 됐다. 이곳에 이주해온 일본인은 340여호. 1924년부터 26년까지 세 차례의 대단위 이주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주해온 일본인들은 출신지별로 마을을 이루어 불이농촌 안에 히로시마촌, 미나미사가촌, 나라촌, 나가사끼촌 등 일본 각 지역의 이름을 붙인 마을이 생겨났다. 소설가 조정래의 ‘아리랑’ 간척농지 이야기가 바로 이곳 ‘불이농촌’의 이야기다. 돌아보면 일제강점기, 일본의 조선침략 역사는 오래 되지 않은 과거다. 일제의 식민통치를 경험했던 세대가 같은 시대 안에서 호흡하고 있으니 ‘동시대’ 역사로 보는 것이 옳다. 그런데도 일제강점기 역사의 기록은 미미하고 흔적은 지워져 간다.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을 고민하는 일이 절실하다.
지난 4월16일 오전 8시 48분 무렵, 대형 여객선 세월호가 전남 진도군 조도면 병풍도 부근 해상에서 침몰했다. 사고 당일 날씨는 좋았다. 그저 평온한 아침이었다. 이 거대한 여객선이 침몰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느닷없이 배가 기울었고, 생때같은 단원고 학생 등 모두 294명이 사망했다. 아직까지 10명의 여객은 실종 상태에 있다. 벌써 사고 4개월이 됐다. 사고 원인은 비리종합선물세트였다. 급기야 사고 후 구조 등 조치에서 법 위반과 도덕적 해이가 심각한 것으로 드러난 해양경찰의 해체가 결정됐다. 경찰과 검찰은 세월호 관련 수사에 착수, 29명을 구속하는 등 모두 34명을 기소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세월호 사고의 정점에 있는 인물로 지목됐던 유병언 회장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면서 알맹이가 빠진 수사가 돼버렸다. 세월호 수사가 진행될수록 드러나는 관피아 등 구조적 비리 앞에서 국민들은 더욱 경악했다. 유족들은 진실 규명을 요구했다. 세월호 사고의 진실이 규명돼야 또 다른 참사를 막을 수 있다는 믿음에서다. 세월호특별법은 그렇게 시작됐다. 현행 법에 따른 경찰과 검찰의 수사를 거부한 것이다. 국가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심각한 수준이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 또한 비극이다.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의 협상은 처음부터 여의치 않았다. 양측의 입장 차가 너무 컸다. 하지만 지난 7일 여야 원내대표가 전격 합의했다. 서로 양보한 결과다. 그러나 후폭풍이 거세다. 유족은 물론 야당 내 강경파와 정치권 밖 강경 세력들이 재협상을 요구했다. 합의된 특별법에 진상조사위원회의 수사권과 기소권, 그리고 야당의 특검 추천권이 빠졌다는 것이다. 관철하라는 요구다. 새정치연합은 결국 재협상을 선언했다. 여야 합의는 뒤집혔다. 야당 등은 세월호 사고의 심각성을 안다면 여당이 재협상에 응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여당은 야당이 국회법에 따른 협상의 결과를 깨면 안된다고 선을 긋는다.여야는 기회있을 때마다 ‘국민만을 바라보고 가겠다’고 말한다. 국민없는 정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세월호특별법을 놓고 대치하는 형국을 보면 여야 정치인들에게 국민은 없다. 야당은 정치적 만회를 위해, 여당은 정권 안위만을 위해 싸운다. 퇴로가 없다. 합의점이 보이지 않는다. 양보없는 평화적 해결은 없다. 여야는 양보 카드를 내놓아라.
입추와 말복이 지나선지 아침 저녁이 제법 서늘하다. 저녁이나 새벽녘에는 홑이불을 덮어야 할 정도로 살갗이 차갑다. 자연의 섭리는 어김이 없다. 민선 6기가 출범한지 한달여가 지났어도 뭔가 변해가고 있다는 걸 못 느낄 정도다. 도나 시군이 인사를 단행했지만 그 정도 갖고서는 변화가 감지 안 된다. 도는 산하기관장한테 9월말까지 사직서를 제출하도록 최종적으로 통첩한 상태다. 이 사실이 대상자에게 알려지면서 웃지 못할 일들이 들려온다. 정작 방을 빼야 할 사람이 누군지가 헷갈린다는 것. 자기 분수도 모른채 남들이 방을 안 빼 오히려 자기가 손해를 보고 있다는 깜깜히 기관장이 있다. 누가 구체적으로 알려 주질 않아 그럴 수도 있겠지만 너무 정무적 감각이 떨어진다는 생각이다. 일부는 내배째란식으로 오불관언으로 버티고 있다.김완주 전지사 때는 산하 기관장을 거의 몰아내다시피 했다. 담당 국장을 통해 방을 무작정 빼도록 압력을 가했다. 하루도 못 견딜 정도로 고통을 안겨줬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 산하기관장은 행복한 편이다. 오너가 바뀌었으면 임기가 남았어도 두말 할 것 없이 사의표시를 하는 게 맞다. 이 눈치 저 눈치 살필 겨를도 없다. 자신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옳은지는 본인들이 더 잘 알 것이다. 경선 때 이줄 저줄 선 사람은 말할 것 없고 김 전지사한테 충성을 다해 그 자리까지 오른 사람은 좌고우면 할 것 없이 방을 빼야 한다. 새 술은 그래서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이다. 지금 와서 미꾸라지 마냥 이 핑계 저 핑계 대가며 사의 표시를 안 하려고 버티는 사람은 문제가 있다. 도와 전주시는 성격이 다르다.지역도 똑같다. 지사가 바뀌었으면 지사가 일할 수 있도록 주변이 바꿔져야 한다. 관 주변을 에워싸는 사람들이 바꿔져야 한다. 김 전지사 때 활동했던 사람이 송하진 지사 때도 똑같이 그 연장선상에서 역할을 한다면 그건 문제가 있다. 스스로들 진퇴를 결정해야 한다. 지금 전북은 혁신이 필요하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인적쇄신이다. 김 전지사가 전주시장 때부터 도움을 받아온 분들은 쉬어야 맞다. 16년간이나 관 주변에서 자신의 입지를 세운 분들은 매너리즘에 젖어 있기 때문에 휴식이 필요하다. 이제는 임무교대 시간이 됐다. 아이디어는 있어도 코드가 맞질 않는다는 이유로 배척 당해온 사람들이 전면에 나서야 한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비주류를 당직 전면에 배치한 것처럼 전북에서도 각 부문별로 임무교대가 이뤄져야 한다. 노장청이 새롭게 조화를 이뤄야‘한국 속의 한국, 생동하는 전라북도’를 만들 수 있다. 백성일 상무이사 주필
세계적 관광지인 프랑스 파리와 리옹, 일본 요코하마와 고베, 중국의 상해 등은 야간 경관조명의 대표적인 도시들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서울과 부산 등 규모가 큰 도시들이 야관 경관조명 사업에 앞다퉈 공을 들이고 있다. 해안을 낀 부산이 앞서 가고 있다. 부산의 명물인 광안대교는 1만6000개의 LED 등으로 단장됐다. 사업비만 104억 원이 투입됐다. 해운대와 광안대교 등 아름다운 경관 조명을 자랑하는 부산은 프랑스 리옹과 홍콩 등 세계적인 도시들과 이젠 어깨를 나란히 한다. 야간 경관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체류형 관광지화함으로써 관광객 증가, 숙박업 성업 등 지역경제에 효자노릇을 하기 때문이다. 도시 이미지와 브랜드 가치 향상도 기대할 수 있다. 유명 조형물과 건축물은 랜드마크 역할도 한다. 어두운 거리를 밝히고 치안유지에도 효과가 있다. 눈으로 보고 즐기는 미적 가치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다. 이런 긍정적 효과 때문에 ‘국제조명도시연합’이란 단체도 발족돼 있다. 2001년 출범한 이 단체는 프랑스 리옹에 본부를 두고 회원도시 간 디자인과 경관 조명 분야의 협력체제 구축 등의 활동을 한다. 세계 66개 도시가 회원으로 가입해 있다. 전북혁신도시에도 야간 경관조명의 ‘명물’이 등장했다. 40년만에 서울을 떠나 전북혁신도시로 이전한 한국전기안전공사(KESCO)가 그 건축물이다. 지상 5층, 지하 1층의 웅장하고 멋진 신사옥은 전북의 상징물인 ‘북’과 원형 ‘우주선’을 형상화해 각각 소통과 도전의 뜻을 담았다. 이같은 독창적인 건물 외관이 야간에는 조명을 받아 하늘에 붕 뜬 우주선이 된다. 공사 사옥관리부의 박영준과장은 “전기료 때문에 조명 중단을 검토했지만 밤이면 어두운 지역인 데다 볼거리를 요구하는 민원이 많아 밤 10시까지 야간 경관조명을 하고 있다”고 했다. 지난 7월16일 개청한 KESCO는 경관견물의 본보기이자 전북혁신도시의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해 있다. 전북혁신도시에는 내년까지 12개 공공기관이 이전한다. 모두 내로라 하는 기관들이다. 혁신도시가 볼품 없는 사각형 건물들로 채워진다면 답답할 것 같다. 그런 건축물은 야간 경관조명의 효과도 기대하지 못할 것이다. 이전기관들이 KESCO처럼 미적 가치를 담았으면 한다. 특화된 관광상품이 될 수 있도록 혁신도시를 아름답게 디자인할 필요가 있다. 이경재 수석논설위원
일본의 전통문화도시 가나자와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당당한 아우라를 지닌 가나자와성(城)이다. 복원된 건물들을 이용해 각종 전시회가 열리고 성 안과 밖의 광장에서는 대형 음악회 등 시민들을 위한 행사들이 다채롭게 꾸려지고 있다. 성 앞쪽의 일본 3대 명원(名園)의 하나인 켄로쿠엔과 더불어 사람들이 가장 즐겨 찾는 곳으로, 진정어린 복원을 통해 관광명소로 거듭난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들에게 복원은 백년 후의 국보를 만드는 일이다. 단순히 끊긴 역사를 잇거나 볼거리 하나 추가하는 일이 아니다. 이 시대의 예지를 모아 다음 세대 국보가 될 만한 소중한 문화적 유산을 남기는 일이다. 단순한 경제살리기나 지역활성화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 일이다. 과거에만 연연하지 않고 미래 세대들이 지속적으로 기대 살 수 있는,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와 같은, 전통 하나 우뚝 세워가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복원은 전통의 창조다. 제대로 된 창조는 진정성 위에서만 가능하다. 제멋대로의 상상 정비나 상상 복원은 끼어들 틈이 없다. 가나자와성도 철저하게 고증된 것만 복원정비하고 있다. 예산규모에서도 그 진정성은 확인된다. 1996년부터의 1차 복원에 쓰인 경비가 252억엔, 토지매입비 112억엔을 뺀 순수 복원정비경비만 140억엔, 우리 돈으로 14조원. 2006년부터 10여년에 걸쳐 진행될 2차 복원 예산은 50억엔(5조원).이 복원의 또 다른 의미는 밀폐의 공간을 주민들에게 돌려주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 있다. 16세기 말 축성 이래 이곳은 성주들만을 위한 금단의 땅. 명치시대에 병부성, 육군성이 들어서면서도 출입금지는 마찬가지. 가나자와대학이 들어서면서 일부에게만 해금됐다가 이 복원을 통해 온전한 시민공원으로 거듭난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사업을 통해 무형의 일본 전통목조공법을 되살릴 수 있었다는 점. 이처럼 큰 규모의 목조성곽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기둥과 대들보를 짜 맞춰 거대한 뼈대를 이루는, 일본 최고의 전통 대목 기술이 필요하다. 실제 복원된 건물 곳곳에 벽 투시공간을 마련해 내부구조까지 들여다 볼 수 있게 함으로써 전통목조공법의 산 교육장으로도 활용하고 있다. 복원은 과거로의 단순 회귀가 아니다. 미래로의 당찬 발걸음이다. 왜곡의 역사를 떨치고 스러져가는 전통문화를 되살리는 일이다. 전라감영 복원의 진정한 의미도 의당 여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종민 객원논설위원
판소리가 그렇게 좋은 소리인줄 몰랐어요. 듣다보니 그냥 푹 빠져서 끝까지 들었다니까요.며칠전 우연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판소리로 마음을 온전히 빼앗겼다는 친구가 있었다. 누구 소리인가 궁금했는데 김소희 명창이더라고요. 어떻게 그런 소리를 낼 수 있을까 놀라웠어요. 그 친구 덕분에 판소리 음반을 정리하다 박동진 명창(1916~2003)의 소리를 들었다. 선생은 작고하기 전까지 30여년동안 판소리 무대를 평정(?)해 가장 치열하게 판소리 대중화를 이끌었던 국악인이다. 문득 선생이 열망했던 판소리 대중화는 어디쯤 와있을까 궁금해졌다. 사실 문화의 국경이 허물어진지 오래, 모든 장르가 혼재된 문화충돌의 시대에서 우리 전통 문화를 자리 잡게 하려면 그만큼 치열한 과정을 겪을 수 밖에 없다. 그 치열한 노정을 기꺼이 선택한 명창. 그가 박동진 명창이다. 선생은 전통판소리를 굳건히 지키면서도 이 시대의 언어로 창작판소리를 만들어내는 일에 앞장섰다. 공주에서 태어난 선생은 열여섯 살에 집을 나와 전국의 이름난 소리꾼들을 찾아다니며 소리를 배웠다. 스승은 정정렬 유성준 조학진 박지홍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명창들. 그러나 스승으로부터 제자로 이어지는 정형화된 소리계보를 따르지 않고 스스로 독창적인 소리로 구축한 창조적 판소리를 개척했다. 판소리연구자들은 선생의 소리를 동편제나 서편제로 분류할 수 없고, 그렇다고 중고제로도 분류될 수 없는 독특한 경지의 소리라고 평했다. 선생이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68년, 흥부가 완창발표회를 통해서였다. 당시는 판소리가 거의 사라져가던 시기. 여섯 시간에 걸친 긴 시간동안 관객들을 전혀 지루하지 않게 어르고 웃기고 울리는 선생의 소리는 판소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1년이나 2년 단위로 완창회를 이어가면서 다섯 바탕을 모두 완창해낸 선생은 한편으로는 종교와 역사, 인물을 소재로 한 우리 시대의 창작판소리를 끊임없이 만들어 무대에 올렸다. 소리의 재창조 작업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겼던 까닭이다. 특유의 재담과 타고난 목, 지칠 줄 모르는 소리 공력으로 시대의 언어를 담아 관중을 호통치고 울리고 웃음을 주었던 선생의 무대에는 늘 관중이 몰렸다. 전통과 창조가 따로 가지 않는 무대의 미덕은 자연스럽게 관중을 끌어들여 감동시켰다. 오늘의 무대에서도 판소리 대중화 작업이 이어지고 있지만 현장은 아직 공허하다. 선생의 무대를 되돌아보면 그 이유가 분명해진다.
최근 불거진 육군 28사단 윤일병 구타 사망 사건이 세상을 뒤흔들고 있다. 한민구 국방장관이 대국민 사과를 했고, 권오성 육군참모총장은 사퇴했다. 박근혜 대통령도 일벌백계 의지를 밝혔다. 야당은 전임 김관진 국방장관 당시 일어난 사건이라며 청와대로 간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의 책임을 요구하고 있다. 이번 사건을 바라보는 국민들 마음은 착잡하다. 한 두 번도 아니고 너무 자주 터지는 군대 내 구타 사망사건, 총기 난사 사건 등은 아들을 군대에 보낸 부모 마음을 짓누르고 타들어가게 한다. 요즘같은 현실 속에서 ‘군대 보내고 싶지 않다’ ‘군대 간 아들 데려오고 싶다’고 울부짖는 부모 하소연을 누가 탓할까.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정전 상황 속에서 우리는 징병제도를 시행하고 있고, 성인이 된 남자는 군 복무의 의무를 지고 있다. 세계 어느 나라 못지 않게 우리 국민은 군 복무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남자라면 반드시 다녀와야 할 곳으로 당연시하고 있다. 신성한 군 복무에 임하는 아들들을 두고 누가 부모 마음을 쪼그라들게 만드는가.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윤일병은 비교적 군사 교육훈련 강도가 미약한 의무대에 배치됐다. 그러나 윤일병은 ‘악마의 구타’가 대물림 되는 지옥의 담장 위에 서 있었다. 그는 의무대 배치 후 선임병들의 끈질긴 구타에 시달렸고, 자신이 토해낸 오물을 강제로 먹이는 등 치떨리는 악마의 구타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희생됐다. 군 검찰은 조사 후 악마의 구타를 숨긴 채 상해치사죄로 기소했지만, 분노한 국민들은 살인죄 적용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 군은 사병들 사이에 벌어지는 구타 사건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소대장, 중대장 등 간부들은 사병들의 얼차려, 군기잡기 구타를 사실상 묵인하고 있다. 사병들 사이의 ‘쫄병 길들이기’가 잘 돼야 부대가 잘 돌아간다고 믿기 때문이다. 위계질서가 잘 잡혀야 조직을 제대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간부들의 이기적인 타성이 있다. 이런 조직은 결국 경쟁력을 잃기 마련이다. 쫄병 기죽이고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겠는가. 군은 이번 사건을 처리하며 몇가지 잘못을 저질렀다. 본질을 숨기고 책임을 면하고자 했다. 군 수뇌부가 진실로 ‘싸우면 꼭 승리하는 강병’을 원한다면, 사병을 진실로 사랑하는 간부 리더십을 길러야 한다. 끊임없는 간부 소양교육을 통해 ‘모든 간부의 덕장화’를 이뤄야 한다.
순천 곡성에서 출마해 49.4%를 얻어 당선된 이정현 전 청와대 홍보수석(56)이 전국적인 히어로가 됐다. 새누리당으로 공천 받아 지역주의 벽을 무너뜨리며 당선된 것은 호남에서 16년 만에 처음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복심으로 통할 정도로 신망이 두터운 이 의원은 선거운동 내내‘머슴론’을 내걸고 지역민에게 다가섰다. 18대 국회 때 비례대표 의원으로서 호남예산 지킴이로 활약하는 등 호남 발전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과 진정성에 지역민들이 마음을 활짝 열어 젖힌 것. 4전5기의 성공신화를 만들었다. 이 의원은 폐쇄적인 지역주의를 극복하는 아이콘으로 벌써부터 큰 활약이 기대된다.30년 가까이 민주당 정서로 살아온 도민들은 이 의원의 당선을 어떻게 느꼈을까. 새누리당 후보라도 진정성이 느껴지면 표를 줘 이제는 당선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수 있다. 지역주의가 깨지는 현상이 감지된다. 대구시장에 출마한 새정치연합의 김부겸 후보는 40.33%라는 값진 표를 얻었다. 특히 대구의 정치1번지라는 수성구에서 47.49%을 득표해 새누리당 권영진 당선자 득표율 49.93%에 거의 육박했다. 부산시장 선거에서는 야권단일 후보인 무소속 오거돈 후보가 새누리당 서병수 당선자에게 1.31% 차이까지 바짝 따라 붙었다. 도내서도 무소속 후보들이 기초단체장에 7명이나 당선돼 야당이면 막대기만 꽂아도 당선된다는 속설을 옛말로 만들었다. 과거와 사뭇 다른 분위기다.그간 지역주의 덫에 갇혔던 순천 곡성 주민들이 스스로 잘못된 정치구조라는 걸 깨닫고 과감하게 선거혁명을 일궈냈다. 이들은 이 의원을 통해 국가예산을 많이 확보해서 지역발전을 도모해 나갈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지방선거에서 나타난 무소속 돌풍의 불씨를 살려 가야 한다. 다음 총선 때 김부겸 후보가 대구에서 출마하면 금배지를 달 가능성이 높아졌다. 새누리당 텃밭인 부산에서도 지역감정이 깨지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멍청하게 민주당만 쳐다보고 있을 수는 없다. 실리를 챙기기 위한 전략적 투표를 해야 한다. 깜이 되는 새누리당 후보가 출마하면 한두 명이라도 당선시켜야 한다. 20대 총선이 20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전남의 이정현 의원처럼 지역감정을 극복 선거혁명을 전북에서 일궈낼 새누리당 후보가 나와야 한다. 정운천 전 농림식품부장관이나 박철곤 전 전기안전공사 사장이 눈에 띈다. 하지만 이들도 진정성이 부족하다. 도민들 가운데는 지역주의를 극복해야 살 수 있다고 새누리당에 표를 던지는 소신파가 20% 이상으로 많아졌다. 전북의 이정현을 찾아 금배지를 달아주자. 백성일 상무이사 주필
육당 최남선은 ‘조선상식’에서 서기제복(暑氣制伏)이라고 했다. 더운 기운(暑氣)을 제압하고 굴복(制伏)시킨다는 뜻이다. 무더위를 피하기만 할 게 아니라 정복하자는 뜻이겠다. 그러려면 체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영양가 많은 음식으로 복달임을 하는 까닭이다. 伏(복)자는 엎드리다, 굴복하다는 뜻이다. 伏을 파자하면 사람 人(인)변에 개 犬(견)이다. 사람 옆에 개가 엎드려 있으니 개는 사람에게 든든한 존재다. 그런 연유인지 복날엔 멍멍이의 희생이 컸다. 그런데 요즘엔 삼계탕을 많이 찾는다. 삼계탕은 계절에 관계 없이 누구나 즐겨 찾는 보양식의 지존이다. 닭고기는 단백질 함유랑이 높고 지방이 적어 소화가 잘 되는 음식이다. 삼계탕에 들어있는 인삼 대추 마늘도 더위를 이기는 영양소다. 최근엔 한방삼계탕, 전복삼계탕 등으로 진화하고 있다. 삼계탕은 재료도 중요하지만 뚝배기에 뜨겁게 끓여낼 때 제 맛이다.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음식 중의 하나도 삼계탕이다. 삼계탕의 원조로 불리는 서울 서소문의 한 삼계탕 집은 언제 가도 일본, 중국 관광객들로 가득하다. 닭 전문업체인 하림은 일본 홍콩 대만 호주 싱가폴 태국 등 6개국에 삼계탕을 수출하고 있다. 동남아에선 삼계탕 전문점을 직접 운영하기도 한다. 삼계탕이 식품위생 점검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미국에 이달부터 수출된다. 축산물의 미국 진출은 삼계탕이 처음이다. 2004년 가금류 가공제품의 수출을 미국에 요구한 지 10년만이다. 수출의 문이 열리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미국 식품안전조사국의 서면조사, 2008년 현장조사 및 보완 요구, 2010년 현장 재조사 및 보완 요구, 2012년 삼계탕의 대미 수출 법적 근거 마련, 올해 3월 26일 가금제품 수출국가 목록에 한국을 추가하는 내용의 법령 개정 등 복잡한 과정을 밟았다. 하림의 문경민 이사는 “수출업체는 전북의 하림과 경기도의 마니커 두 곳인데 하림은 연간 100만 달러 어치를 예상하고 있다”고 전했다. 삼계탕의 세계화는 다른 한식의 세계화에도 기여할 것이다. AI로 어려움을 겪는 농가들에게도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세계인들이 이열치열의 심오한 뜻을 알는지 모르겠다. 뚝배기에서 우려낸 뜨거운 음식을 땀 뻘뻘 흘리며 먹은 뒤 “어이, 시원하다”고 하는 그 느낌 말이다. 이경재 수석논설위원
역사(歷史)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追憶)이/ 있는 한 인간(人間)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신동엽 시인과는 대조적으로 서구모더니즘에 경도되어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김수영 시인은 우리의 역사와 전통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토로한 바 있다물론 여기서 시인이 더러운 역사와 전통을 그 자체로 좋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리라. 사회의 발전은 역사와 전통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의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 역사의 뿌리가 없으면 진정성도 없고 진실 없는 혼란만 가중될 뿐이다. 전통이 없으면 지붕위의 바이올리니스트처럼 위태롭다.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을 때 그 위에서 문화가 싹트고 그것을 넘어서려는 사랑도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역사와 전통을 아끼는 반동으로 잠시 주목을 받고 있는 전주지역에 어느새 불온한 역풍의 징후가 도저하다. 이제 그만큼 했으면 됐다는. 세상이 급변하고 있는데 아직도 전통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는, 한물 간줄 알았던 유행가 가락이 다시 들려오고 있다. 잘난 외국인 전문가들 모셔다 놓고 전통에 매달려야 하나? 새로운 흐름에 힘을 실어야 하나? 그들 듣기에는 해괴한 질문을 해대면서. 전통과 역사의 단절을 겪어보지 못한 그들에게는 현재 노는 물이 역사요 전통이다. 그러니 기왕의 노는 물을 새삼 챙길 필요가 없다. 전통에 연연하지 말라고 쉽게 권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창씨개명에까지 이른 철두철미한 일제식민통치와 미군정 반세기를 겪으면서 우리의 뿌리가 무엇인지 다 잊었고 잃어버렸다. 학문이나 공부에서도 성균관, 향교, 서원 그 어느 맥도 잇지 못했다. 아니 그곳이 무엇 하던 곳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이 땅의 학생이요 교사요 교수다. 음악이나 미술 분야도 마찬가지고 문학에서조차 그 전통이 개화기를 넘지 못한다. 농민혁명조차 쿠데타로 이어받지 않았던가? 그들의 고상한 조언을 액면 그대로 수용할 수 없는 까닭이다. 아직은 반동이 더 필요할 때다. 내 땅에 뿌리박은 거대한 뿌리의 전통을 확인할 때까지는. 그 뿌리의 기운을 조금이나마 빨아들일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될 때까지는, 그나마 전통문화의 명맥이라도 희미하게나마 확인할 수 있는 이 지역에서는 특히나 더. 그래야 그것을 터 삼아 혁신이든 창조든 융합이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종민 객원논설위원
오사카에 있는 동양도자미술관은 한·중·일 3국의 명품 도자기를 소장하고 있다. 미술관은 스미토모 그룹이 기증한 아타카컬렉션을 위해 1982년 11월 오사카시가 설립했다. 아타카컬렉션은 사업가였던 아타카 에이이치(安宅英一)가 평생 모았던 한국과 중국 도자기, 일본 근대미술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높은 안목을 자랑하는 수집가였던 아타카는 도자기만도 천여 점을 수집했는데, 이 중 793점이 한국도자기다. 신라토기부터 고려청자 조선백자 분청사기 등 종류도 다양하고 수준도 빼어나다. 아타카회장의 회사는 2차 오일쇼크를 견디지 못하고 파산했지만, 관리책임을 맡았던 스미토모 은행이 빚을 떠안으면서까지 아타카컬렉션을 오사카시에 기증해 흩어지는 불행을 막을 수 있었다.1999년, 이 미술관에 301점의 한국도자기가 더해졌다. 전주 출신 재일교포 이병창씨가 수집한 컬렉션이었다. 초대 오사카 총영사를 지냈던 그는 중국도자기 50점과 연구기금을 더해 소장하고 있던 컬렉션을 이곳에 기증했다. 덕분에 동양도자미술관은 한국도자기 연구의 거점으로도 명성을 높일 수 있게 됐다. 미술관은 3층에 ‘이병창 컬렉션’ 전시실을 따로 두었다. 고려시대의 청자상감모란문매병, 조선시대의 청화초화문호와 철사매조문호를 비롯해 걸작이 즐비하다. 조선 정조시대 대표적인 백자항아리로 꼽히는 ‘백자청화 동채 연꽃무늬 항아리’도 만날 수 있다. 며칠 전 동양도자미술관을 들러볼 기회가 있었다. 3년 전 지인으로부터 선물 받았던‘이병창컬렉션’ 도록으로 이미 감동 받았던 터였다. 눈과 마음은 기대 이상의 호사를 누렸다. 문득 우리 도자기가 왜 이곳에 기증되어야 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전시실 입구 인사말, ‘숙고 끝에 국외에서 한국문화유산을 발창하기 위해 귀한 컬렉션을 일본에 두기로 결심했으며 한일우호친선의 힘이 되고 재일 한국인의 지위향상을 뒷받침 할 것으로 확신한다’는 기증자의 뜻이나 ‘이러한 깊은 사려와 뜨거운 기대를 무겁게 받아들인다’는 미술관측의 답이 의미심장했다. 알려진 일화가 있다. 김영삼 정부 시절, 이병창씨는 국립박물관에 자신이 아끼던 백자를 기증했다. 그는 백자를 온도 습도를 맞춰 전시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당시 설비가 미흡한 박물관으로서는 쉽지 않은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가 다시 한국에 와 다시 백자를 보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병창컬렉션’이 도자미술관에 기증된 것은 그 후의 일이다.
5년 전 정부는 아파트 인동거리(동간거리)를 완화했다. 자치단체들은 아파트 건물 높이의 1배인 인동거리를 0.8∼0.6배까지 줄이는 조례를 제정했다. 인동거리 0.6배가 적용되면 100m높이의 아파트 동간 거리는 60m로 줄어든다. 줄어든 40m는 입주민들의 일조·프라이버시·조경을 침해한다. 반면 건설사 배를 채운다. 아파트 주민에게 건물 높이와 일조, 바람길은 중요하다. 인동거리가 짧아 주민 프라이버시가 침해되고, 채광이 부족하고, 바람이 솔솔 들지 않으면 가치가 떨어진다. 전주 서부신시가지에서 도청 건물은 고층이다. 그런데 내년이면 고층 축에 못낄 전망이다. 도청 앞 삼천변의 상업지구에서 42층, 36층 등 초고층 아파트들이 쑥쑥 올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최고 42층 주상복합 스카이타워는 5개 동으로 구성돼 있다. 아파트와 도청 사이에 공원이 있고, 삼천은 천혜의 공원이다. 남향으로 모악산이 쑥 들어온다. 아파트 코앞에는 음식점과 술집, 모텔이 즐비하다. 그런데 이 아파트의 동간거리는 불과 8m다. 아파트 동간거리로는 상식 이하다. 게다가 고층으로 지을 수 있다. 이게 가능한 것은 상업지구에 들어서는 건물은 공동주택의 인동거리 제한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상업지구 내 아파트 사업은 돈방석 사업인 셈이다. 아파트 숲 전주는 ‘고열의 도시’다. 전문가들은 아파트가 바람길을 막아 전주 열섬현상이 더 심각하다고 말한다. 1층을 필로티로 설계해 통풍이 원활하도록 해야 열섬현상을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전주시는 담당 부서 명칭을 ‘푸른도시조성과’로 만들어 부르고, 막대한 예산을 들여 백만그루 나무심기 사업도 벌였다. 그러나 요즘 전북도청 앞 상업지구에서 공사가 한창인 스타힐스, SK뷰, 힐스테이트, 아침도시, 스카이타워 등 고층아파트울타리를 보면, 전주시의 도시정책 수준이 의심스럽다. 앞뒤가 전혀 맞지 않고 믿을 수 없다. 청정한 도시 환경은 뒷전이고, 바닥난 전주시 곳간과 토목건설업자 금고만 생각한 행정이라는 생각이 강해진다. 상업지구에 들어서는 아파트는 돈덩어리다. 저층은 상가로 분양하고, 인동거리 제한없이 고층 아파트를 올려 분양한다. 돈 벌기가 이렇게 쉬울 수 없다. 누가 이렇게 만들어 주었는가. 이럴 바에야 도시개발하면서 용도는 뭐하러 미리 정하는가 싶다. 그때 그때 되는대로 용도를 정해 팔면 될 것을 말이다.
규제 풀어야 현대차 새만금투자 성공한다
금융사 전북 이전, 구체적 실행방안 제시하라
새만금 웅비의 상징 ‘현대차그룹’
전북은행장, 지역이해도 높은 내부 발탁을
전북 ‘금융중심지’, 이제 속도가 관건이다
‘뭉쳐야 산다’ 5극 3특 시대, 통합을 움직이는 힘은 결단과 책임이다.
이순신 장군의 사생활 엿보기
땅값 폭등한 완주지역 허가구역 묶어야
전북지사·전주시장 3선 출마 여부, 객관적 평가가 우선
‘공직자 줄서기’ 악습, 이번엔 뿌리 뽑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