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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감수성 교육은 미래의 지속가능한 삶을 위한 길이다

이경한 전주교육대학교 교수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일상의 삶이 회복되지 않고 어려움에 처해 있다. 백신이 개발되고 있다는 소식들이 속속 발표되고 있으나 여전히 코로나19 바이러스는 현재진행형이며 공포의 대상임에 틀림없다. 인류에는 그동안 스페인 독감, 페스트 등의 크고 작은 역병들이 있었지만, 풍요의 시대에 인류에게 찾아온 세계적인 역병은 거의 처음이다. 인류세를 살아가고 있는 인간은 무한히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줄로 착각하였다. 우리는 부족할 것이 하나도 없을 것만 같았던 시대에 가장 무서운 공포와 맞닥뜨리고 있다. 인류가 코로나19로 인하여 비극적인 상황일 때, 아이러니하게도 환경은 전보다 더욱 활기차게 살아 숨 쉬는 역설을 맞이하고 있다. 인간의 활동이 주춤하거나 멈출 때, 생태계는 스스로 놀라울 정도로 복원할 수 있음을 경험하였다. 즉, 도시의 공기는 맑아지고, 하늘은 푸르러지고, 동물들은 귀환하고, 식생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이는 곧 환경에 대한 인간의 간섭이 극심했음을 눈으로 확인시켜 주고 있다. 인간의 가장 풍요로운 시대는 환경 파괴로부터 얻은 대가이다. 생태계를 파괴하여 얻어진 풍요를 누리는 사이 지구환경은 심각한 위기에 빠져들고 있다. 지금 코로나19는 인류에게 엄중한 경고를 하면서 동시에 인류에게 스스로 나아갈 길을 제시해주고 있다. 우리가 풍요라는 이름으로 누리는 무절제, 과잉소비와 생산, 자원의 남용 등은 지구환경에 악영향을 끼치고, 다시 우리에게 부메랑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인간이 생태계의 정점에 있으나 하위 생태계의 받침 속에서만 인간의 삶도 지탱될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날마다 지구는 뜨거워지는데, 우리는 이에 너무도 무감각하고 무지하다. 기후위기가 지금 우리의 대문 앞에 서서 우리의 삶과 지구환경을 위협하고 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이 소리를 깨닫고 있다. 깨어 있는 청소년들조차도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기후행동을 감행하고 있다. 지구환경을 보호하고 인간의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서는 생태감수성을 높여야 한다. 우리 세대가 아닌 미래세대의 지속가능한 삶을 담보하기 위하여 다시 생태 교육을 강조해야 한다. 그 시작은 인간이 생태계의 지배자가 아닌 생태계의 일부분이라는 점을 인정하는데 있다. 인간을 생태계의 일부로 분명하게 자리매김 하고 이를 인식시킬 필요가 있다. 이런 생태감수성을 가진 시민들은 전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한다. 글로컬 관점에서 생태계를 바라볼 때, 지구환경 문제를 거시적이면서 실천적인 측면에서 해결할 수 있다. 생태감수성은 환경이 있어 인간이 있다는 진리를 받아들인다. 인간과 환경을 분절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인 존재임을 이해한다. 이 평범한 지혜를 바탕으로 지금 세대와 미래세대가 인간과 환경이 공존하고 공생하는 길을 실천적으로 모색할 필요가 있다. 더 늦기 전에 지구환경 문제를 우리 자신의 문제로 바라보는 생태감수성을 가져야 하고, 이를 교육할 필요가 있다. 이런 생태감수성 교육이 인류를 지속가능한 삶의 세계로 이끌어 줄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더 늦기 전에 지구환경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지구환경은 우리 인류에게 멀지 않아 다양한 방식으로 그 책임을 물을 것이다. 그 때는 너무 늦다. 생태감수성을 가져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경한 전주교육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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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2.13 17:49

딱한 전북, 뭉쳐야 살아남는다

이성원 전 TBN 전북교통방송 사장 활주로에서 고추를 말릴지도 모른다 고추 대신 멸치 말리는 공항이 될 수 있다 부산 가덕도에 신공항을 추진하는데 대한 일부 야권 정치인들의 반응이다. 부산이 우리나라에서 서울에 이어 2번째로 큰 도시이고, 부산과 울산 경남지역에 800만 명의 인구가 몰려 산다는 점을 감안하면 발언 수위가 놀랍다. 무엇이 이러한 조롱을 가능케 했을까? 부산도 서울(수도권)에서 보면 한낱 시골동네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관념이 이들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실제로 고추를 말릴지 모른다고 처음 발언한 야당 국회의원은 우리나라 국책연구기관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던 사람이다. 자신이 그동안 접했던 각종 통계나 자료에 비춰보면 지방은 수도권에 비해 볼품없고 가치 없는 곳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수도권의 위력은 거세고 무섭다. 주위의 모든 것을 집어 삼키면서 하루가 다르게 몸집을 키워나간다. 괴물스럽다. 이런 상황에서 지방이 갈 길은 하나뿐이다. 덩치를 키우는 것이다. 여러 곳에서 이런 시도들이 싹트고 있다. 대구와 경북은 2022년 7월을 시한으로 대구?경북 특별자치도를 설치하려고 하고, 광주와 전남은 연방제 수준의 지방분권을 목표로 광주?전남 행정통합 논의를 위한 합의문을 썼다. 800만 명의 인구를 가진 부산?울산?경남은 김경수 지사의 주도로 동남권 메가시티 건설을 추진하려고 한다. 충청권에서도 최근 충북?충남?대전?세종 등 4개 시?도지사가 한 자리에 모여 메가시티 추진에 대해 합의했다. 수도권에 대응하여 국제경쟁력을 갖추고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적절히 대응하려면 함께 뭉쳐 덩치를 키우지 않고서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우리 전북은 사정이 딱하다. 다시 합칠 광역시도 없고, 인근 전남광주나 충청권과의 연대도 쉽지 않다. 연대가 이뤄진다 해도 제 몫을 받아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도내 자치단체 간의 관계도 매끄럽지는 않다. 종합경기장 개발방식을 둘러싼 전북도와 전주시의 오랜 갈등은 미봉합 상태이고, 전주시를 비롯한 14개 시군들은 서로 연대 협력해서 힘을 키우기보다는 따로따로 제 갈 길만 가고 있다. 항공대대나 예비군훈련장 이전 등 사안이 생길 때마다 대화와 타협으로 풀지 못하고 갈등과 몸살을 겪는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특례시만 해도 그렇다. 도내에서 가장 큰 도시로서 전주시가 특례시 지정을 희망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러나 특례시의 행재정적 특혜가 중앙정부로부터 얻어지는 것보다 전북도로부터 분리 독립함으로써 발생하는 지분이 많다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전주를 제외한 다른 시군의 사정이 더욱 나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전주시가 특례시가 되어 전북도로부터 분리 독립한다면, 군산시나 익산시가 똑같은 길을 꿈꾸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어쨌든 국회 행안위의 결정으로 전주시는 일부 행정적인 특혜(특례)는 몰라도 공식적인 특례시 지정은 어렵게 됐다. 전주시로서는 안타깝겠지만, 이제는 잊어버리고 좀 더 넓고 멀리 봤으면 좋겠다. 아프리카 속담에 빨리 가려면 혼자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우리는 지금 아프리카 사하라사막보다도 훨씬 사납고 험한 수도권이라는 괴물을 견뎌내야 한다. 빨리 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지방소멸을 피해 살아남느냐가 과제다. 지금처럼 각 시군이 쪼개져서 마이웨이 한다면 전북은 앞으로 수도권은 물론 다른 지역에게도 크게 밀릴 것이다. 도내 14개 시군의 맏형으로서 이제는 전주시가 전북도와 시군의 중재 가교역할도 하고 전북도를 도와서 각 지역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구심점 역할을 해줘야 한다. 전북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함께 뭉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 지금은 절체절명의 시기이다. /이성원 전 TBN 전북교통방송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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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2.06 17:50

혁신의 방향과 자세

한병성 전북대 명예교수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1993년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시작으로 삼성을 개혁, 오늘날 세계 브랜드가치 5위까지 오르게 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얼마 전 타계했다. 80년대 후반만 해도 아시아의 2류 업체였던 삼성전자, 싸고 질 낮다는 평가를 받아온 현실에 대한 강한 불만과 세계적으로 불어 닥치는 경영환경의 변화를 인식, 장기적인 안목으로 변화와 개혁을 외쳤던 이 회장이야말로 시대의 선구자다. 삼성처럼, 세대, 연령, 성별에 관계없이 우리도 변해야 한다. 변화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처한 처지를 이유로 변명이 받아드려 질 만큼 작금의 상황이 그리 녹녹하지 않다.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빠른 속도로 사회가 변하고 있다. 그러기에 각자 자신의 처지에 걸맞게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개성 있고 차별화된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변화의 주요 요인에는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보자. 먼저, 온난화에 따른 지구의 온도상승이다. 전문가들은 향후 지구 온도가 10℃이상 오를 것으로 예측하고 있어, 이에 따른 큰 변화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날 것이다. 둘째는 로봇 인공지능기술 발달이다. 이로 인한 일자리가 최대 80%는 격감할 것이다. 셋째는 코로나 이후 삶의 패러다임 변화를 생각할 수 있다. 사람 간 비대면이 일반화 되면서 외부와 단절된 개인주의가 만연될 것이다. 다음은 민족 간, 세대 간 빠른 이동에 따른 인류의 다양성 형성이다. 따라서 그간의 삶의 패턴에 큰 변화가 예상된다. 그리고 인구 변화다. 급속한 인구 감소로 산업인구의 감소가 심화될 것이다. 그렇다면 혁신해야 할 방향은 어디일까. 방향은 넓은 시각과 먼 미래로 향해 있어야 한다. 최첨단 과학의 결정판인 우주선(space shuttle)의 크기를 결정하는데 있어, 고려되었던 사항 중 하나가 미국의 기차 터널의 폭이었다고 한다. 부품을 기차로 수송하려면 터널 폭보다 커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터널 폭은 기차의 레일 폭이 결정적 요소가 되었다. 기차레일의 폭은 그럼 어떻게 정해졌을까. 이 폭은 두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의 폭이 기준이었다. 마차의 폭은 두 마리의 말 엉덩이를 합한 넓이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2500년 전 로마시대에 말 두 마리 엉덩이 폭이 오늘날 최 첨단과학의 결정체인 스페이스 셔틀의 크기를 결정 짖는데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꼴이 된다. 2500년 전 마차의 폭이 오늘날 최첨단 기술에 영향을 주었듯이, 오늘의 변화가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도 큰 영향력을 발휘 할 수 있다는 점을 마음에 새기고 변화의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 혁신에 임하는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지금의 나의 모든 것을 가능한 한 모두 버리는 자기 부정에서 부터 출발해야 한다. 철저한 자기 부정 없이는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갓 돌 지난 어린 아이의 행동에서 우리는 혁신에 임하는 자세를 배울 수 있다. 아이가 새로운 물건을 쥐려할 때면 기 가지고 놀았던 물건을 버리고 나서야 다른 것을 잡는다. 만약 이 아이가 두 가지 모두를 잡으려했다면 손이 작아 단 한 가지도 쥘 수 없었을 것이다. 아기의 이런 모습에서, 하나를 버리지 않고는 다른 것을 가질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된다. 혁신도 그렇다. 철저한 자기 부정 없이는 결코 얻을 수 없다. 혁신을 위한 서로간의 협력과 연대, 그리고 공생이 그 어느 때 보다 절실한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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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1.29 20:31

만경강에서 꿈꾸는 교육생태계

이미영 전북지역교육연구소 대표 깊어가는 가을, 해가 질 무렵에 바라본 만경강의 억새 바다는 장엄하였다. 만경강변에 서서 붉게 물들어가는 물억새 풍경을 바라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숨이 멎을 듯 산하의 아름다움을 느낄 것이다. 더구나 만경강에 기대어 삶을 이어온 전북도민이라면 어릴 적 추억 한 자락은 안고 있을 것이다. 익산(구 이리)에서 자란 필자도 학창시절, 이리와 백구를 잇는 목천포 다리가 있는 둑 안 논에서 모내기봉사를 했던 기억, 통학기차를 타고 춘포역(당시는 대장역)과 삼례를 지나며 차창으로 너른 들판과 만경강을 바라보며 대학을 다녔던 추억이 있다. 당시 춘포에 사는 선배로부터 어릴 적 보았다는 만경강 모래찜 풍경은 장관이었다고 얘기들은 것도 생각난다. 만경강은 오롯이 전북의 강이다. 완주군 동상면 밤샘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만경강은 고산천과 소양천, 전주천과 삼천천, 익산천, 탑천 등 지류와 합류하며 군산과 김제 사이의 넓은 하구를 통해 서해로 나간다. 조선시대에는 만경강을 사수라고 불렀는데 조선의 본향인 전주를 흐르는 강이라고 하여 중국 한고조 유방의 고향에 흐르는 강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만경강은 자유곡류하천으로 주위에 기름진 충적평야를 형성하여 전북지역을 최대의 곡창지대로 만들어주었다. 또한 전형적인 감조하천이었기에 밀물과 썰물에 따라 배가 드나드는 수운이 발달하기도 하였다. 춘포 봉개나루엔 많은 상선이 오갔고 삼례에도 고깃배들이 드나들었다. 삼례의 마을 이름인 해전리에서 당시 만경강의 조수기능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기름진 평야를 거느린 만경강은 일제의 야욕에 가장 먼저 수난을 당하는 처지가 된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본인들은 재빨리 전북에 들어와 대농장을 설립하기 시작하였다. 전주 동산농장, 춘포 호소카와농장, 서수 이엽사농장, 군산 불이흥업농장 등 수많은 일본인 농장이 설립되며 전북은 일제의 식량공급지로 전락되었다. 일제는 수탈한 쌀을 군산항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전국 최초 신작로인 전군도로를 1908년에 완공하고 1914년에는 이리와 전주를 연결하는 사설철도인 경편철도를 가설하였다. 또한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관개시설 공사를 대대적으로 벌이는데 바로 만경강의 직강공사와 대아댐 건설이다. 1922년 완공된 대아댐, 1925년 시작하여 1939년까지 진행되었던 만경강 직강공사에 동원된 수십만 명의 농민들의 고난은 어떠했을까 짐작해본다. 서수 이엽사농장의 농민들이 소작율 75%에 시달리다 항거했던 옥구농민항일항쟁을 보면 만경강은 일제시대 고율소작제에 착취당하던 농민들의 저항과 눈물의 강이기도 하다. 만경강을 짧게나마 살펴본 이유는 전북의 교육생태계를 생각해보기 위해서이다. 이제 교육의 방향은 학교와 지역이 연결되고, 마을의 역사와 자원이 교육과정에 편성되어 마을사람들이 교사로 결합되는 교육생태주의로 나아가고 있다. 교육생태주의 교육은 학생들의 삶의 공간인 지역과 학교가 연결되어 있기에 교과서만을 습득하는 지식이 아닌 살아있는 지식, 경쟁이 아닌 협동과 상호작용 관계를 통한 배움이 일어날 수 있다. 만경강은 바로 교육생태주의를 지향하는 교육 공간으로 가장 적합한 곳이다. 자유학년제나 현장체험학습기간에 전북의 아이들이 2박 3일간 만경강을 따라 걷는 상상을 해본다. 도민의 삶과 연결되어 있는 강, 역사와 문학의 현장, 생태 환경교육의 장, 만경강을 바라보며 건강한 교육생태계, 지역교육공동체를 꿈꾸는 이유이다. /이미영(전북지역교육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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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1.22 18:19

K-뉴딜을 전북의 것으로

이환주 남원시장 더민주 전북도당과 전북시장군수협의회에서 지난 2일 이례적으로 K-뉴딜 시장군수토론회를 개최했다. 필자는 이번 토론회에서 좌장으로 참여하면서, 전북 시장군수들의 K-뉴딜에 대한 현주소와 성공 가능성, 잠재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새로운 정권이 집권할 때마다 항상 새로운 아젠다를 탄생시켰다. 일례로, 노무현 정부 때는 혁신과 균형발전의 아젠다를, 이명박 정부 때에는 실용과 자원외교를, 박근혜 정부 땐 창조경제, 현 문재인 정부에서는 포스트 코로나 이후의 K-뉴딜을 탄생시켰다. K-뉴딜(한국판 뉴딜)이 무엇인가. 고용사회안전망 강화라는 바탕 위에 디지털그린지역균형 뉴딜을 통해 코로나19와 경제 위기를 빠르게 극복하고 선도국가로 도약하기 위한 정부의 핵심 정책 아닌가. 그래서인지 코로나 19라는 시대적 상황에 맞는 새로운 정책 논의 과정이 펼쳐지자 시장군수들은 이날 전북 K-뉴딜에 대한 발전 방안 등을 다양하게 제시했었다. 특히 K-뉴딜 정책이 정부가 165조를 투입, 그 중 47%인 75조를 5년간 지역에 지원, 지역균형발전을 위한 특별한 해결책이라는 점에서 열띤 토론을 이어갔다. K-뉴딜이 이렇게 주목받게 된 데에는 사실 코로나 사태가 주효했다. 항간에 도는 말처럼 코로나 19가 4차 산업혁명이 보낸 트로이 목마였으며, 현 정부에서 코로나 사태를 맞아 k-뉴딜로 AI, 빅 데이터 등 4차 산업혁명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현재 전북의 고민은 정부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인프라가 뒤쳐져 있는데다가 정부계획에 따른 공모방식으로는 경쟁력이 없어 지역 뉴딜 성공의 열쇠를 쉽사리 담보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우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러한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 지자체에서는 한국판 뉴딜을 선도하는 정부의 정책방향과 의도를 잘 파악, 선제적으로 준비해야한다. 무엇보다 지자체에서 경쟁력을 키우고 경험을 쌓기 위한 마중물을 붓는 것이 우선 필요하다. 다시 말해, 정부가 한국판 뉴딜 성공을 위해 지역균형 뉴딜을 추진하는 만큼, 정부의 확고한 의지, 사업과 예산을 담보삼아, 지속가능한 지역뉴딜재원의 형성방안과 인프라를 반드시 마련해야한다. 그런 뜻에서 전북에서는 지역발전이 가능하도록 유연적인 인프라를 최대한 구축하고, 자율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사업에 대해 사업비(우선 10억원)를 주고 이후 성과에 따라 사업비를 지원받는 방식을 갖춰야 한다는 의견 등이 토론회에서 도출됐다. 특히 이번 토론회에서 제시됐던 바와 같이 완주의 수소경제, 순창의 섬진강 프로젝트, 군산 RE100산단, 남원의 친환경전기열차, 김제시의 전기굴삭기 등 다양한 지역 뉴딜사업들을 제안하고 전북의 핵심 아젠다를 만들어 선제적으로 추진해 나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란 의견도 제시됐다. 나아가 이번 토론회처럼 정당에 관계없이 전북 정치권과 협력해 지방소도시로 이뤄져있는 여건, 인프라, 경쟁력을 넘어서 원 팀 구성에 의한 토탈 플레이를 펼치는 것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결론적으로 K-뉴딜이 선도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국가대전환 사업이자, 지역 균형발전을 위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국가발전 정책인 만큼, 전북에서는 이번 기회에 K-뉴딜을 전북의 것으로 선점하는데 힘써야할 것이다. 그래야만 전북이 K-뉴딜을 디딤돌 삼아, 일자리, 환경, 국가균형발전 등에 부합한 신성장동력 산업을 지속 발굴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대전환의 전기를 맞이할 수 있다. 미래 한국(지역)의 판을 설계하기 위한 지자체장들의 깊은 고민과 염원이 이번 토론회에서 그렇게 숙고됐었다. /이환주 남원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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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1.19 17:50

그린뉴딜과 숲속의 도시 만들기 프로젝트

윤충원 전북대학교 명예교수 최근 정부는 코로나19의 전 세계적 확산위기에 대응하고 국가경제의 재도약을 위해 디지털뉴딜과 그린뉴딜을 내용으로 한 이른바 한국판 뉴딜 추진계획을 발표하였다. 이는 전례 없이 대규모 재정이 투입되는 정부개입사업으로서 2025년까지 총 160조원을 투입하여 190만개의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것이다. 두 가지 뉴딜 중 더욱 주목되는 것은 그린뉴딜이다. 한마디로 그린뉴딜은 탄소중립을 지향하고 경제기반을 저탄소친환경으로 전환하겠다는 프로젝트다. 우리나라에서도 선진국들처럼 그린뉴딜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기후변화 위기에 대비한 대응책임과 동시에 이를 통해 녹색성장을 새로운 경제성장정책으로 삼겠다는 구체적 전략을 선언한 셈이다. 사실 정부가 발표한 그린뉴딜정책을 보면 크게 3분야 8개 과제로 구성되어 범위가 매우 넓다. 이 중에서 두 가지 분야를 보면 우선 도시공간생활인프라의 녹색전환분야에서는 그린리모델링 체제구축, 그린스마트스쿨 조성, 도시 숲 조성, 국토 및 해양생태계 회복, 깨끗하고 안전한 물관리체제 구축사업 등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저탄소분산형 에너지확산분야에서는 신재생에너지 확산 및 에너지 효율 극대화, 전기차수소차 등 그린모빌리티(운송수단) 확대가 주 내용이다. 이러한 사업들은 녹색성장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추진되어야 하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과제들이다. 다만 필자는 평소 도시 숲의 중요성을 강조해 온 사람으로서 도내 지자체 중 전주, 군산, 익산 등 6개 도시들은 물론 읍 단위까지 숲속의 도시 만들기 프로젝트를 지금보다 몇 배 더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점을 재차 강조하고 싶다.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도시 숲은 살기좋은 도시의 필수조건이다. 도시 전역에 꽉찬 나무와 숲은 다른 녹색프로젝트들과는 달리 주민의 주거환경을 아름답고 안락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인체에 해로운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줌과 동시에 산소를 발산해 줌으로서 주민들의 건강을 지켜 준다. 또한 도시 숲은 여름철의 열섬현상을 완화해 주고 풍치역할을 함으로써 자연재해를 예방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일석삼조 효과를 가져 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대부분의 도시들이 그렇듯이 도내 도시와 읍소재지와 같은 인구밀집지역을 보면 미국이나 유럽의 선진국들과는 달리 시멘트 건물들만 흉물처럼 들어 앉아 있을 뿐 나무와 숲이 적어 황량하기만 하다. 우리의 경우 땅이 좁아 쉽지 않은 점도 있지만 서방 선진국들의 경우를 보자. 예컨대 인구 70만 정도의 전주시와 같은 도시에는 덕진공원이나 종합경기장 크기의 공원이 시내 여기 저기 10개 이상 조성되어 있어 시민들이 울창한 숲속에서 일상생활을 즐기며 생활하고 있다. 거기다가 거리의 건물 역시 하나하나가 예술품이다. 여하 간에 전 세계적으로 심각해지는 대규모 해충발생과 코로나19와 같은 변종바이러스의 지속적인 출현, 가뭄과 물부족, 초대형 태풍의 빈번한 발생, 오염해역의 확대 등 모든 지구적 멸종위기의 주된 원인이 기후변화이고, 인간의 삶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는 상황인데도 우리가 그것을 머나 먼 장래의 일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지자체들은 인식을 확 바꾸고 그린뉴딜정책 중 중요한 부분인 도시 숲 조성프로젝트를 과감하게 추진해야 한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기업들의 적극적인 협조도 매우 중요하다. /윤충원 (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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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1.16 17:52

동학농민혁명은 시민운동의 효시이다

이경한 전주교육대학교 교수 우리는 코로나19를 경험하면서 시민의 성숙한 역량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확인하고 있다. 우리는 저마다 시민의 이름으로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시민사회를 이 땅에 건설하고 있다. 시민사회는 시민이 자율과 연대의 힘으로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만들어간다. 그렇지만 시민사회의 건설이 녹녹치만은 않아서, 우리의 역사는 시민이 주인이 되기 위한 몸부림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시민사회를 지향하기 위하여 시민사회의 핵심 역량인 자율, 연대, 그리고 참여를 통한 시민운동을 실천해오고 있다. 우리의 시민운동은 근대사회로 진입하려는 시기부터 일어났다. 조선말기 외세로 인한 국운쇠퇴와 극단적인 착취로 민심이 흉흉하던 시기에, 조선의 민중은 스스로 떨쳐 일어났다. 그 떨쳐 일어남의 시작이 동학농민혁명이다. 동학농민혁명은 민중들이 지배 권력과 외세에 당당히 맞섬으로 시작하였다. 수많은 민중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세상을 바꾸어보려 하였다. 조선팔도의 민중들이 함께 들불같이 일어나 온몸으로 사람이 곧 하늘임을 천명하고 그런 세상을 만들고자 일어섰다. 동학농민혁명은 시민사회의 핵심 역량인 자율과 연대와 참여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민중들은 스스로 일어나 자신의 권리를 찾고자 죽창을 들었고,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의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흰옷 입고 함께 연대하여 혁명의 대열로 나섰다. 그리고 민중들은 기꺼이 전라북도 고창 땅에서부터 정읍의 황토현을 넘어 파죽지세로 전주성을 점령하고 충청남도 공주의 우금치에 이르기까지 죽음을 마다 않고 혁명의 노정에 참여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의 민중들은 우리나라에서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 인간답게 살기 위하여 분연히 떨쳐 일어났다. 동학농민혁명군은 혁명의 정신을 자치로 승화시키기 위하여 집강소를 설치하였다. 집강소 자체는 지배이데올로기의 강령을 집행하던 봉건제도의 산물이지만, 동학농민혁명군은 이를 전라도 각 고을에서 주민의 자치기구로 운영하였다. 혁명군들은 집강소를 자치 행정기관으로 만들어 민중의 힘으로 지역사회에 새로운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생활 질서를 만들어나갔다. 집강소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실천이자 행동하는 저항으로 공생의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디딤돌이 되었다. 집강소를 통한 자치 경험은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의 씨앗이 되었고, 봉건사회를 넘어 새로운 세상으로의 변혁을 실현하도록 이끌어주었다. 동학농민혁명은 시민사회의 원초적인 원형질을 가지고 있다. 스스로 떨쳐 일어나서 함께 어깨를 맞대고 지배 권력의 폭압과 폭정을 제거하고 민중의 인간다운 삶을 찾아나서 이를 몸소 실행한 동학농민혁명에는 시민사회가 지향하는 원형질이 존재한다. 그러기에 시민교육에서는 동학농민혁명을 시민운동의 효시로 보고 있다. 지금 시민교육에서는 동학농민혁명이 우리에게 준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평등, 인간존중 그리고 자치의 정신을 이어받고 있다. 우리는 동학농민혁명이 낳은 혁명의 가치로 온 세계를 시민이 주인 되는 사회로 만들어가고 있다. 전라도 땅에서 시작한 동학농민혁명은 오늘날 시민사회에서 시민이 마땅히 지녀야 할 역량을 알려주기에 충분하다. 동학농민혁명은 시민으로서 길을 묻는 우리에게 이미 오래 전부터 그 길을 안내해주고 있다. /이경한 (전주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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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1.15 19:20

이름값 다하는 지역균형 뉴딜 돼야

이성원 TBN 전북교통방송 사장 두 사람을 대상으로 게임을 한다. 서로 생명부지일 뿐만 아니라 다시 만날 가능성도 없다. 그냥 우연하게 비슷한 시간에 전주역 앞으로 지나다가 게임에 초대됐을 뿐이다. 우선 한 사람(제안자라고 하자)에게 10만원의 게임머니를 준다. 제안자는 다른 사람(응답자라고 하자)과 돈을 나누게 되는데, 이때 제안자는 응답자게에 나눠줄 금액을 단 한 차례만 제시할 수 있다. 응답자가 제시액에 동의하면 둘은 합의대로 금액을 나누고 게임은 끝난다. 응답자가 동의하지 않으면, 게임머니는 회수되고 두 사람 모두 단 한 푼도 받을 수 없다. 제안자는 응답자에게 과연 얼마를 제시했을까? 답은 평균 4만원~4만5000원 정도였다. 2만원 이하를 제시하면 응답자의 거절이 크게 늘었다. 사실 돈으로만 따지면 응답자가 제시액을 거절할 이유는 없다. 어차피 공돈(unexpected money)이다. 1만원만 받아도 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분배과정에서 공정을 염두에 뒀고, 공정하지 못한 대우를 받았다고 느끼는 응답자는 기꺼이 자신의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응징에 나섰다. 독일의 경제학자 베르너 귀트가 1982년에 고안한 최후통첩 게임의 내용이다. 최후통첩 게임이 유행하면서 변형된 최후통첩 게임이 잇달아 실험됐다. 그 중에는 1986년 대니얼 카너먼이 고안한 독재자 게임도 있다. 제안자가 일방적으로 나눠줄 금액을 결정하고 응답자는 이에 대한 거부권이 없다는 점만 빼면, 게임방식은 최후통첩 게임과 똑같다. 제안자는 단 1원만 나눠주고 나머지를 모두 가질 수도 있다. 그러면 실험에서는 얼마를 나눠줬을까? 평균 2만8000원 정도였다고 한다. 두 가지 게임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공정성의 기준이다. 상대를 의식하고 인정하는 관계에서는 6대 4를 넘어서서는 안 되며, 일방적인 독재권력 관계에서도 7대 3 정도의 비율은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우리나라는 수도권이 지방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수도권 독재 공화국이라고 할 만하다. 기업과 금융, 의료, 교육, 문화 등 거의 모든 분야의 70~80%이상이 실질적으로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 전체 국토면적의 12%에 불과한 좁은 땅에 인구의 50% 이상, 그 중에서도 특히 청년층이 몰려 산다. 수도권과 지방의 불균형 문제는 압축적인 경제성장 추진과정에서 나타난 고질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 때 추진한 지역살리기 3대 특별법 제정과 이에 따른 혁신도시 건설 정도를 빼고는 지금까지 이렇다 할 정책이 없었다. 혁신도시 마저도 이명박?박근혜 정부 10년간의 방해와 비협조로 제때 탄력을 받지 못했고, 관련기업 유치나 투자환경 등도 아직 미흡하다. 2차 공공기관이전도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한국판 뉴딜 사업의 거의 절반(47%)을 지역균형 뉴딜로 추진하기로 한 것은 환영할 만하다. 그럼에도 불안의 그림자는 있다. 지역균형 뉴딜이 수도권을 포함한 전국의 지역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지역의 여건과 경쟁력을 따진다면 기업과 정보, 재정력과 정치권력(국회의원 숫자의 절반)이 집중된 수도권이 디지털 뉴딜, 그린 뉴딜에 이어 지역균형 뉴딜까지 독차지할 가능성이 있다. 또 행정권역 중심으로 사업과 예산을 나눌 경우 도세(道勢)가 약한 전북으로서는 매우 불리하다. 이름만의 균형정책으로는 도저히 균형 근처에도 다가갈 수 없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낙후 지역을 무조건 최우선으로 배려해서 지금까지 누적된 불균형을 치유하고, 앞으로 불균형이 심화되지 않도록 예방하는, 이름값을 다하는 지역균형 정책이 돼야 한다. 이제는 수도권 집중 공화국의 오명을 벗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성원 전 TBN 전북교통방송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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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1.08 19:41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교육이 필요하다

이미영 전북지역교육연구소 대표 아이들의 성장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또래들과의 놀이이다. 아이들은 친구들과 놀이를 통해서 사회화의 과정을 거치며 타인을 인식하고 자아정체성을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코로나19 시대에 아이들에게 원격교육, 비대면 생활이 일상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활은 친구, 이웃, 지역사회 속에서 인간관계를 맺고 자아정체성을 형성해가야 할 성장기 아이들에겐 적신호라서 걱정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가 헤쳐 나가야 할 과제는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 중앙대 김누리 교수의 인터뷰기사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자신의 독일 유학 중 수업 시간에 놀란 적이 있는데, 단테를 아느냐는 교수의 질문에 자신도 아는 단테의 신곡을 학생들 대다수가 모른다고 해서 의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독일학생들이 안다고 하는 것은 자신처럼 제목만 아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 대해서 읽어보고 살펴보고,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쳤을 정도가 되어야 안다고 표현한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고 했다. 생각하는 힘을 기르려면 깊이 호흡하고 사고하며, 되씹어볼 수 있는 교육 환경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러려면 가장 먼저 해볼 수 있는 것이 독서이다. 다독 위주, 상식위주, 자기만족적인 책읽기가 아니라 부모와 아이가 책을 선정해 같이 읽고 함께 얘기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성장기 아이들은 부모와의 대화시간이 매우 중요하다. 물론 학교에서 독서교육의 중요성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학교의 독서교육은 평가 체제, 대학입시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학부모의 평가 불신으로 인한 서술형 문제 출제의 어려움, 사교육비 문제와 교육양극화로 입시에서 서술형, 논술고사가 사라져가는 상황은 참으로 안타깝다. 일본은 이미 2013년부터 비판적 창의적 역량을 기르는 논술형 교육과정으로 IB(국제바칼로레아)를 공교육에 도입한 이후 현재 약 200여개 학교에 적용하고 있다. 창의성과 다양성을 준비해야 할 미래교육의 방향에서 보면 전국의 학생들이 동일한 EBS강의로 똑같이 학습하는 모습을 생각하면 답답하다. 생각하는 힘을 기르려면 단답형 정답만을 구하는 학습이 아닌 교사들의 다양한 교육내용과 방법을 학생 개인별 맞춤형으로 진행해야 한다. 따라서 열정을 가진 교사들이 학습콘텐츠를 개발하고 적용할 수 있는 디지털 행정지원과 교육풍토를 만들어야 한다. 생각하는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배움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는 교육이어야 한다. 자신의 삶과 연결된 생태적 교육으로 협동학습을 하면서 지식과 생각이 깊어지면 아이들은 학습 성취감과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학교에서 자신의 삶과 분리된 교과서 중심의 학습은 배움의 즐거움이 사라지고 삶의 만족도도 떨어진다. 2018년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 의하면 한국 학생들의 삶의 만족도는 71개 대상국가 중 65위로 최하위권이었다. 배움의 즐거움을 경험하지 못한 학생들은 격렬한 대입을 치르고 나면 손을 놓는다. 이러한 결과는 2013년 발표된 국제성인역량조사(PIAAC)에서 우리나라 성인들의 역량은 청년층(16~24세)에서는 평균보다 높으나 이후세대(25세~65세)에서는 OECD 평균이하로 떨어지고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격차가 커지는 결과로 나타났다. 미래사회에서 주체적으로 살아가려면 자기주도적인 평생학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배움의 즐거움을 느끼는 조용한 교육혁명,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교육을 더 이상 미루어서는 안 된다. /이미영(전북지역교육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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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0.25 16:26

미래교육은 교육공동체를 통한 공생교육에 있다

이경한 전주교육대학교 교수 코로나19로 인한 부정기적인 등교와 불규칙적인 가정 학습이 반복되면서 학생들이 학습의 리듬을 잃고 있다. 학부모 또한 불규칙적인 등교로 인한 자녀의 돌봄과 가정학습 문제로 매우 힘들어 하고 있다. 최근에 학교와 학부모 등이 겪은 교육 경험들은 미래사회에서는 학교만으로 미래교육을 감당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이는 곧 자연스럽게 학교와 지역공동체 간 협치의 중요성과 절실함을 보여주고 있다. 학교는 공교육의 틀을 넘어서 지역사회로의 확장을, 그리고 지역공동체는 지역의 울타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학교 밖 교육에도 책무성을 가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새로운 일상으로 고통을 겪기도 하지만, 우리가 공생하지 않으면 공영할 수 없다는 교훈도 배우고 있다. 미래교육의 최전선인 학교와 그 학교를 품고 있는 지역사회가 하나의 공동체로서 상호 공생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때론 학교와 지역사회가 협치의 주체와 그 책임 소재를 두고서 논란을 빚기도 하지만, 우리 모두가 그토록 아끼는 미래 세대를 위하여 더불어 교육하자는데 동의하고 있다. 요즘에는 교육자치와 지방자치가 만나서 마을교육공동체라는 이름으로 협치를 실천하고 있다. 학교와 지역사회가 교육공동체라는 이름으로 협치를 하는데 있어서, 그 기본정신은 한 아이를 기르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격언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제강점기 또는 전후 베이비붐 세대들의 학령기에 온 마을주민들이 나서서 자녀 교육을 위해 학교 부지를 내놓고 노동을 제공하며 마을에 학교를 세웠던 역사에서 그 정신을 찾을 수 있다. 이런 정신과 경험에서 미래교육의 지혜를 배우고, 이의 구체적인 실천이 학교와 지역사회가 협치를 통해서 이루려는 교육공동체이다. 학교와 지역사회는 상호 협치를 통하여 미래 세대들이 교육이 꼭 필요한 시기에 낙오되지 않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학교는 학생들의 역량을 기르는 장이고, 지역사회는 교육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이제는 상생을 넘어서 공생과 공영을 실현하는 교육 체제로서 학교와 지역사회의 역할과 책무성이 절대적으로 요구되고 있다. 미래교육을 위한 교육공동체를 구축하여 학교와 지역사회의 협치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학교 안과 밖을 중심으로 한 교육활동을 실행할 필요가 있다. 보통 협치는 학교의 정규 교육시간을 마친 후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학생들의 발달수준에 맞추어서 초등학생들은 학교의 시설을 중심으로, 그리고 중고등학생들은 학교 밖의 시설을 중심으로 교육공동체를 구축하여 교육활동을 실천할 필요가 있다. 교육자치와 지방자치가 일원화된 유럽 국가에서는 지역사회가 중심이 되어 학생들의 건강한 성장을 돕기 위한 방과후 센터를 많이 운영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학교는 교육을, 그리고 지역사회는 복지를 강조하면서 상호 협치를 수행하고 있다. 학교와 지역사회가 역할 분담을 통하여 교육공동체로서 협치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이를 위한 법적 근거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해당 부처별로 산발적으로 실시 중인 각종 활동들을 일원화 하여 교육 협치 사업을 체계적으로 운영할 필요가 있다. 학교와 지역사회가 하나가 되어 미래세대를 위한 교육공동체를 만들어서 공생 교육으로 나가는 길에 미래교육의 희망이 있음을 강조하고 싶다. /이경한 전주교육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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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0.18 15:44

우리도 뉴스 좀 보면서 살자

이성원 전 TBN 전북교통방송 사장 얼마 전에 전직 기자 몇 명이 만난 적이 있다. 오랫동안 기자생활을 한 사람들이다. 서로가 공통점을 발견하고선 적잖이 놀랐다. 뉴스를 안 본다는 것이었다. 누구 입에서 어떤 경위로 이 말이 처음 나왔는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대부분 비슷했다. 묘한 동질감과 당혹감을 동시에 느꼈다. 평생을 뉴스와 함께 뒹굴며 뉴스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뉴스를 안 본다는 것은 분명 뉴스거리이다. 뉴스 자체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는 핸드폰에서 제목을 확인하지만, 클릭은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같잖은 뉴스에 굳이 힘을 실어주지 않겠다는 소심한 소신이 바닥에 깔려 있다. 대부분 뉴스거리가 문제라는데 공감했다. 조국 전 장관 딸의 표창장이 1년 동안이나 온 나라를 그렇게 뒤흔들 만큼 중요한 이슈였단 말인가? 추미애 장관 아들의 군 휴가 문제가 21대 첫 정기국회 대정부질문을 온통 지배해야 핳만한 사안이었던가? 국정감사가 시작되기 이전, 많은 언론들이 추미애 장관의 아들 휴가문제, 북한에 의한 공무원 피살사건, 강경화 장관 남편의 미국방문 등이 국정감사의 주요 쟁점이 될 것이라고 전망(주문)했다. 과연 이들 사안이 코로나 방역과 경제문제, 양극화와 불평등 문제, 사법개혁, 기후위기, 국제외교 등을 뒷전으로 밀어낼 만큼 의미 있는 이슈란 말인가? 북한에 의한 공무원 피살만 중요하고 인천 라면형제의 비극에는 적당히 눈감아도 된단 말인가? 권력에 대한 감시와 견제는 언론 본연의 책무이다. 공직자와 그 가족의 법적, 도덕적 문제에 대한 검증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구석구석 쑤시고 바닥까지 닥닥 긁어서 사소한 것들까지 경쟁적으로 들춰내고 막장 드라마로 만드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흥신소 직원조차도 관심 갖지 않을 정도로 시시콜콜한 일들을 대단한 것인 양 떠벌리고 공격의 빌미로 삼는 것은 언론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할 짓이 아니다. 오죽하면 김정은이 준 풍산개 새끼, 연평도서 사람 물어(조선일보) 같은 뉴스가 나올까?(내용을 보면, 북한에서 보내온 풍산개 자견(子犬)이 산책 중에 다른 개와 싸움이 붙었고, 이를 뜯어말리는 과정에서 담당자의 손에 약간의 상처가 나서 보건소에서 치료받았다는 것이 전부이다) 뉴스거리 못지않게 뉴스를 다루는 방법도 역겹다. 팩트를 바탕으로 한 뉴스는 찾기 힘들고 의혹이나 가정법, 인용법, 심지어는 궁예의 관심법을 동원한 뉴스가 천지에 널려있다. ~아닐까?하는 의혹제기는 근거 없이 과도한 의심을 바탕으로 노골적인 증오와 적의를 드러낸다. ~이라면 식의 가정법은 사실을 악의적으로 왜곡해 엉뚱한 방향으로 시선을 유도한다. ~카더라는 인용문은 대부분 상식과 통념을 크게 벗어난 특이한 일부 사람들의 페이스북 내용만을 과도하게 옮기거나, 진위확인이 불가능한 SNS에 출처를 두고 있다.(한 시민, 한 회사원, 한 주부 등 우리나라에 한씨 성이 너무 만다는 지적도 있다) ~로 풀이 된다는 궁예의 관심법은 엉뚱한 흰소리로 팩트를 덮어 버린다. 언론의 정파성을 탓하려는 것은 아니다. 비판하고 공격하더라고 정책과 이슈를 놓고 제대로 싸워야 한다. 그래야 관심을 모으고 관객(독자)이 끌린다. 찌질하고 시답잖은 내용과 방법을 동원한 유치한 논쟁은 가뜩이나 땅에 떨어진 언론의 신뢰를 더욱 떨어뜨리고 독자들을 멀어지게 할 뿐이다. 언론이 개인(1인) 미디어와 경쟁하는(개인 미디어에 앞서지도 못하는) 시대에 우리는 뉴스를 잃었다. 우리에게 뉴스를 돌려달라. 제발 우리도 뉴스 좀 보면서 살자. /이성원 전 TBN 전북교통방송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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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0.11 17:39

어른이 없다

한병성 전북대 명예교수 지난 9월 2일 문화재청은 경남합천 해인사에 있는 고려 태조 왕건의 스승인 희랑대사 좌상을 보물에서 국보로 지정 예고했다. 실존한 고승의 모습을 재현한 유일한 조각 작품인 높이 82cm좌상은 10세기경 제작되었다. 삼베에 옻칠을 입혀 여러 겹을 겹쳐 만든 건칠기법으로 제작된 좌상의 인자한 눈빛, 엷은 미소를 띤 입술, 주름진 얼굴, 앙상하게 불거진 뼈대와 노쇠한 체구 등은 오랜 수도생활을 통해 득도의 경지에 오른 노승이 아닌, 긴 세월, 온갖 세상 풍파를 이겨내고 삶을 해탈한, 찾아가 어려움을 토로하면 따뜻하게 위로해줄 인자한 이웃집 할아버지를 떠올리게 한다. 후삼국 통일을 꿈꾸었던 태조 왕건은 귀신처럼 신묘한 백제군에 밀려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게 되자, 해인사에 머물던 희랑대사와 사제의 연을 맺는다. 이 후 스승의 도움에 힘입어 백제군을 물리친 왕건은 스승을 더욱 공경하고 받들기 위해 전답 500결을 시납함은 물론 스승의 거처인 해인사를 증수한다. 인류의 오랜 역사를 되돌아보면, 왕건처럼 위대한 스승을 만남으로 삶이 바뀌거나 또는 혼란스런 시대에 방황하는 민중에게 등불의 역할이 되어 주었던 어른들이 많았다. 사흘만 볼 수 있다면 하고 자신이 보고 싶은 것들을 상상한 작가 헬렌 켈러와 엔 설리반 선생의 만남이 그랬다. 해방말기, 혼란기에 도산 안창호 선생이 그러했고, 민주화 열기로 사회가 뜨거웠던 시절에 김수환 추기경이 그 예일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스승이 없다. 어른이 없다. 개탄스럽고 불행한 일이다. 가정이건 사회건 어른을 모시려하지 않는다. 어려움과 혼란을 잠재우고 새롭게 나아가기 위한 답을 어른들의 지혜로부터 얻을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어른을 부정하고, 인정하려 하지 않는 어리석음을 자초하고 있어 안타깝다. 구성원 간, 계층 간, 세대 간, 조직 간, 의견이 조율되지 못해 막대한 사회적 경비를 지출하고 있는 요즘 같은 때, 조정자 가 될, 등대가 될, 위로 자 가 될, 어른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럼 대체 어른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은 어른은 귀찮은 존재라는 생각 때문이 아닌가 싶다. 자신들 앞에 놓인 부정한 이득을 포기하라는 어른, 자신의 잘못된 모습이 반추되는 거울 같은 어른, 막 나가고 싶은 발 거름을 가로막는 어른이 있어 뜻대로만 할 수 없어 싫은 것이다. 다음은 인터넷이 문제다. 어느 때 씨를 뿌릴지, 추수를 할지 등 삶에 필요한 모든 정보가 선배들의 경험으로부터 얻어졌던 농경사회에서는 어른의 경험이 삶의 원천이요, 성공과 실패의 지렛대 역할을 했다. 그러나 요즘은 어떤가, 인터넷만 뒤적거리면 수많은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져 나온다. 어른의 경험을 여쭈어야하는 번거로운 절차를 생략해도 무방해졌다. 어른의 경험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부모의 경험은 값없어 보이고, 경험담을 들려주면 귀찮은 참견으로만 느껴지게 되었다. 부모는 눈앞에 닥친 어려운 경제만 지원해 주면 되는 증여자의 역할로 충분하다는 배금주의가 만연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시대에 요구되는 어른의 덕목에는 무엇이 있을까. 우선은 올바른 가치관과 신념을 소유하되, 진실해야 한다. 자신의 미숙함, 잘못을 시인함에 있어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 타인을 향한 사랑이 넘쳐나야 한다. 폭넓게 소통하되 적게 말하고 많이 들어야 한다. 먼저 답하지 않으며, 타인의 의견에 귀 기울이는 배려가 있어야 한다. 변화를 빠르고 바르게 읽고 적응할 줄 알아야 한다. 누구든 나이, 성별, 직분에 관계없이 어른이 될 수 있다. 항상 준비된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기에 늘 깨여 있으라고 신은 우리에게 주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병성 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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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0.04 19:07

코로나19 시대의 슬기로운 교육 방법

이미영 전북지역교육연구소 대표 요즘 교육계가 화들짝 놀라고 있다. 코로나19로 원격수업이 지속되면서 학생 간 학습격차가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교육부가 전국 초중고 교사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응답자의 약 80%가 학생 간 학습격차가 커졌다고 답했다. 이유로는 학생의 자기주도적 학습능력 차이와 학부모의 학습보조 여부를 꼽았다. 결국 부모의 보호와 지원 여부에 따라 아이들의 학습수준이 영향 받는 상황이다 보니 일터에 나가야 하는 부모들의 고통은 커질 수밖에 없다. 지난 1학기 기말고사를 치른 중고교에서는 중위권이 사라지고, 초등학교에서는 기초학력저하 문제가 심각하다고 교사들은 한숨을 쉬고 있다. 교육부와 각 시도교육청에서는 교실에 고성능 무선망, 실시간 쌍방향수업이 가능한 원격학습 플랫폼, 양질의 온라인학습 콘텐츠 등을 구축하겠다고 대책을 내놓았다. 교육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멘토 교사를 파견하여 취약계층 학생을 지원해주는 에듀테크 멘토링 사업도 제시하고 있다. 수많은 대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성장기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역시 교사와 학생이 만나는 대면교육 방식이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학습을 적정하게 병행하고 개인별 맞춤형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코로나19를 극복해나가면서 학교, 교사, 학부모, 멘토 교사의 대면 접촉 기반을 늘리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런 가운데 자치단체, 교육청, 학교, 마을이 협력하여 코로나 시대를 극복해가는 지역이 있어 소개한다. 경기도 시흥시와 시흥교육지원청은 마을과 함께 하는 학교수업과 학교로 찾아가는 마을교사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마을과 함께하는 학교수업은 마을교육자치회 공간이나 학생의 집에서 마을교사와 함께 하는 학교수업을 진행하는 것이다. 특히 비대면수업으로 인해 돌봄이 취약해진 아동은 마을교사와 학교복지사가 함께 가정을 방문해 돌봄을 하는 방식이다. 또 학교로 찾아가는 마을교사 사업은 학교교사와 마을교사가 함께 아이들의 기초학습과 온라인수업을 지원한다. 물론 시흥에서 이러한 사업이 가능해진 것은 그동안 자치단체와 교육청이 한 몸이 되어 혁신교육지구사업을 발전시키고, 마을교육공동체를 차근차근 구축해온 덕분이라 할 수 있다. 마을교육공동체는 아이들이 성장하는 삶의 현장이 교육공간으로 확장되어 지속가능한 교육생태계를 이루며 지역의 교육적 역량을 강화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사례는 학생들의 학습격차 해소를 위해 광주지역 일부 초등학교 교사들이 나서고 있는 교육활동 방식이다. 교사들은 온라인학습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학생의 가정을 방문하거나 개별적으로 학교에 등교하도록 해서 보충지도를 하는가 하면, 지역아동센터 등 지역사회와 연계한 상담활동을 지원하기도 한다. 도내에서도 이미 많은 교사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학생들의 학습 활동을 지원하고,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끝으로 교육부에 당부한다. 도시 과밀학급의 학급당 학생 수를 감축하고 법정교원수를 확보하여 오프라인수업을 늘려야 한다. 단기적으로는 실시간 쌍방향수업시스템 구축 등의 대책도 필요하지만 이것이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대책이다. 지금도 전교생이 60명 이하인 소규모학교는 매일 등교하여 대면수업을 하고 있다. 온라인 학교교육이 가정의 불안과 초조를 가중시키고 있고, 부모들은 아이들과의 관계마저 살얼음판이어서 힘들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코로나19시대, 지자체와 교육청, 교사와 학부모, 지역주민들이 머리를 맞대고 슬기로운 교육 방법을 찾아내야 할 때다. /이미영 전북지역교육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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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9.27 16:14

시민교육은 우리에게 다가온 미래교육이다

이경한 전주교육대학교 교수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하여 인류는 깊은 혼돈에 빠져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감염 자체도 문제지만, 이 문제를 대하는 입장의 차이로 국가 간 그리고 사회집단 사이에 많은 갈등이 발생하고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라는 괴물은 인류에게 공포와 함께 앞으로 나아갈 길을 묻고 있다. 우리에게 어떻게 더불어 살 것인가를 묻고, 그에 대한 현명한 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대책을 시민교육에서 찾을 수 있다. 앞으로도 인류는 코로나19 바이러스와 같은 사태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해 안이한 행태를 보인 감염자는 자신만이 아닌 타자, 더 나아가 공동체 전체에게 엄청난 고통을 줄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는 인류가 더불어 사는 지혜를 가질 필요가 있음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를 경험하면서 우리 모두가 함께 연대하고 함께 존중하지 않으면 인간은 너무도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적인 코로나19 바이러스만큼이나 우리 공동체 안에 꽈리를 틀고 있는 무지와 이기심도 싸워야 할 적임을 새삼 인식하였다. 우리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더불어 살아가도록 하는 시민교육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시민교육은 인류 공동체를 넘어서 환경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주체적인 삶을 지향하면서도 타자의 삶을 존중하도록 하는 의식이나 사고를 갖도록 한다. 시민교육은 인류가 닥친 문제를 해결하는 보편적인 대안교육이 될 수 있다. 인권의 존중에서부터 세계시민정신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지평을 가지고 있는 시민교육은 공동체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교육이다. 시민교육의 원형질은 거대한 담론이나 이념에 있지 않고 원초적인 삶의 지혜에 있다. 예를 들면 네가 있어 내가 있다는 아프리카의 우분투 정신이 그 대표적인 표본이다. 이의 근본 사고는 나와 타자의 공생과 공유이다. 더 나아가 타자의 삶에 대한 공감이고, 공감의 적극적인 실천인 관용이다. 시민교육은 우리 안에 존재하는 더불어 사는 삶을 위한 원형질을 끌어내어 타자와 더 나아가 환경 등과 함께 잘 살아보자고 말을 건네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자연스럽게 시민교육의 영역은 지식교육을 넘어서 공동체사회, 네트워크 사회, 그리고 글로벌 시민사회를 지향하는 교육으로 확장한다. 시민교육은 미리 닥쳐온 우리교육의 미래이다. 시민교육을 통하여 익숙한 우리의 일상 속에 존재하는 우리 사회의 모순을 찾아서 그 안에 있는 차별을 개선해 나갈 필요가 있다. 우리는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체험하면서 우리 안의 모순, 무지, 편견, 아집 등을 떨쳐내고, 보다 더 정의롭고 포용적이고, 지속가능한 세계를 만드는데 참여하도록 하는 시민교육의 소중함을 깨닫고 있다. 시민교육의 꽃은 참여에 있다. 참여는 곧 연대를 지향한다. 시민교육은 코로나19 바이러스와 같이 감염된 세계에서도 서로 함께 연대하여 해결책을 찾으며, 우리가 겪는 고통 또한 넉넉하게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주고 있다. 특히 시민교육은 미래세대가 민주시민으로서의 태도와 가치를 가지고 사회 문제에 참여하며 또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실천적 주체자로 성장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이경한 전주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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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9.20 16:23

국민을 또다시 테러하겠다는 건가

이성원 TBN 전북교통방송 사장 우리 고장에서 쓰는(쓰던) 표현 중에 김치가 미쳤다는 말이 있다. 엄청 맛있다 는 뜻으로 짐작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반대다. 형편없이 맛없는 상태를 두고 미쳤다고 한다. 싱싱한 양념이 아삭아삭 씹히는 생김치도 좋고 삭은 양념이 깊이 밴 익은 김치도 맛있지만, 모든 김치는 숙성 전에 발효가 시작되면서 쓰고 떠름한 맛을 내는 시기가 있다. 화학적인 지식이 없는 옛 사람들은 당황하고 의아스러워 김치가 미쳤나보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면 김치가 익기 위해 미치도록 몸부림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요즘 우리의 삶도 미쳐가는 김치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 항아리에 갇혀 쓰고 고통스럽다. 긴가민가 판단도 결정도 어렵다. 출연을 무조건 금지하고 전화 연결로만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방송은 과연 잘하는 것일까, 언제까지 이래야 하나? 사람 만나기 어렵고 가족 모임조차 제대로 못하는 생활은 얼마나 지속될까, 어느 선에서 타협해야 하나? 주택보급률이 100%를 훌쩍 넘는 전주의 아파트 값이 몇 억 원씩 뛴다는 데 어떻게 해야 하나? 하루하루가 지나가지만,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나가고 있다는 생각보다는 어찌어찌 때워냈다는 느낌만 든다. 집단적인 코로나 블루(우울증)이다. 김치가 미치는 것은 잘 된 숙성으로 가기 위한 일시적인 과정이지만, 지금 우리사회의 혼란과 불안은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을까? 좀 더 밖으로 눈을 돌려보면 더욱 한숨이 나온다. 공공의료 인력이 부족하다고 불과 몇 년 전에 자기 손으로 보고서를 냈던 사람들이 공공의대 정책을 앞장서서 반대하는가 하면, 독재를 맹종했던 사람들은 현 정부의 기득권 깨기 정책을 독재라며 비난한다. 815 광화문 집회를 통해 온 국민에게 코로나 테러를 자행했던 세력들은 정부가 코로나 사기극으로 자유와 기독교를 탄압한다며 정부를 대상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고 한다. 일부 보수단체는 10월 3일 개천절과 9일 한글날 등에 또다시 대규모 집회를 예고했다. 정부가 사후에 추적하지 못하도록 아예 휴대폰을 끄고 모인다고 한다. 지금 국민들은 매우 불안하고 폭발 직전이다. 815 집회 이전에 43명이던 전북의 확진자수가 지금은 100명에 육박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점심시간이면 사람이 밀리지 않은 음식점을 찾아다녔으나, 이제는 그럴 필요조차 없게 됐다. 음식점이고 커피숍이고 아예 손님이 없다. 전주의 대표적인 뷔페식당인 라루체가 문을 닫았고, 임시휴업 중인 음식점이나 빈 상가가 즐비하다. 국민들의 코로나 레드(분노)가 깊어지고 있다. 그런데도 일부 보수단체들이 또다시 대규모 집회를 강행하겠다는 것은 국가와 국민에 대한 테러를 노골화하는 행위다. 그들의 세력은 별로여도 행위의 결과는 무시하기 어렵다. 유발 하라리는 호모데우스에서 테러리즘의 본질은 쇼라며 테러범들은 도자기 가게를 부수려는 파리와 같다. 파리는 힘이 없어서 찻잔 한 개도 움직이지 못한다. 그래서 황소를 찾아내 그 귓속에 들어가 윙윙거린다. 황소는 공포와 화를 참지 못해 도자기 가게를 부순다고 했다. 국민의 공감을 얻지 못하는 일부 세력이 코로나를 매개로 나라를 뒤흔들고 국민을 혼란으로 몰아가려고 한다. 신천지, 815에 이은 3차 팬데믹(대유행)이 우려된다. 야당의 비상대책위원장이 이런 집회를 31운동에 비유했다는 것은 안이하고 답답하다. 야당은 지금이라도 정신 차리고 좀 더 책임 있고 분명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말로만 그들은 우리와 다르다고 할 것이 아니라 따끔하고 단호하게 말해야 한다. 너 미쳤니? 그것은 미친 짓이다라고. /이성원 TBN 전북교통방송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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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9.13 15:03

제주도 다음으로

한병성 전북대 명예교수 「OOO 제주도 다음으로 최하위」 모 신문사 박스기사 타이틀이다. 정부가 발표한 통계자료를 인용해서 작성되는 기사들 대부분을 살펴보면, 전라북도의 상황이 매우 나쁘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용어들 중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는 단어가 「제주도 다음으로」가 아닌가 싶다. 이 말이 전달하고자 하는 뜻은 전국을 대상으로 실적을 평가할 때, 전라북도가 면적이 가장 작은 제주도 다음으로 꼴지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 지역에서 삶을 뿌리 내리고 살아온 한 사람으로서, 제주도 다음이라는 말은 이제는 정말 더는 듣고 싶지 않는 말이 되었다. 이렇게 무시를 당하고, 정주 여건도 좋지 못해 겪어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하며 살아가는 것은 이제는 더 더욱 싫다. 우리도 잘 살 수 있다. 발전할 수 있다. 그렇다, 앞설 수 있는 충분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 근대사에서만 살펴봐도 이 지역이 중심적인 역할을 한 혁신적인 사건들이 많았다. 최초의 민주항쟁인 동학혁명이, 이 땅에 민주주의를 꽃피게 한 6월 항쟁이 그랬었다. 이런 역사가 말해주 듯 우리 도민 스스로 개척할 수 있는 저력이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다. 우리의 생각을 바꾼다면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선 변해야만 한다. 그 무엇보다도 변화를 위해선 누구든지 먼저 스스로가 기존의 틀을 깨 부셔야 한다. 어쩌면 지금보다 더 철저하게 부서지고 낮아져 바닥을 쳐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더는 밑으로 내려 갈 수 없는 절박한 심정이 되어야 한다. 그런 후, 바꿈에 대한 두려움을 걷어내자. 다음으로 지금의 나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나의 현실, 나의 능력, 나의 장점과 단점을 정확히 알고 나서, 성장에 불필요한 것은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불필요한 것, 성장을 방해하는 것들은 바꾸는 정도가 아니라 냉정하다 할 정도로 과감하게 잘라내야 한다. 그렇다면 당장 큰 어려움 없이 바꿀 수 있는 것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우선 친절해 보자. 타 지역 사람들에게 배타적이지 말고 마음을 활짝 열어 포용하자. 음식점에 가보면 서비스 정신이 없다고들 한다. 혁신도시에 이전해 살고 있는 공공기관 임직원들을 만나보면 이런 점이 부족해 보인다며 많이들 아쉬워한다. 도움이 필요하면 편하게 주저하지 말고 도움을 요청했으면 한단다. 그들은 기쁘게 도와주고 싶어 하고, 또 돕는 과정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도 만들고 싶어 한다. 어느 분야에서 건 우리보다 앞서 있는 이들에겐 도와달라고 청하자. 질서를 더 잘 지키는 것도 기본이다. 산업시설이 부족해서 일자리를 찾아 젊은이들이 떠나고 있다. 텅 빈 지역 사회에 지금 당장 공장을 건설하여 그들을 붙잡을 수 없다면 우리 주변이라도 청결하고 아름답게 가꾸어 매력적인 청정도시를 만들자. 그러면 이곳에서 제 2의 보금자리를 만들고 싶어 다시 찾아오는 도시가 될 것이다. 지역통합, KTX 역 신설등과 같은 지역의 중요한 현안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보수적으로 응대하지 말고 열린 마음으로 의사결정을 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변화의 답은 멀리 있지만은 않다. 이런 작고 기본적인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닌가 싶다. 사소하고 상식적인 선에서 작고 기본적인 변화를 시작으로 더 큰 혁신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정부나 정치권이 바뀌면 더 확실하고 더 빠른 더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겠지만, 그들만을 탓하며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지 않는가. 그러니 우리가 먼저 변화하자. 혁신해서, 우리도 앞서가는 도가 되어 보자. /한병성 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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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9.06 18:31

평화·통일교육을 향한 새로운 20년

이미영 전북지역교육연구소 대표 615남북공동선언 20주년이다. 2018년, 남북 정상이 만나 새로운 평화시대를 열어가던 남북관계가 다시 교착된 시국이어서 평화통일을 향한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주로 도내 교사들로 구성되어 필자도 함께 활동하고 있는 (사)전북청소년교육문화원에서는 6.15남북공동선언 정신을 계승하고 청소년들의 평화통일정신을 고취하기 위하여 지난 2001년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전북청소년통일한마당을 개최해왔다. 올해로 20회를 맞이하는 전북청소년통일한마당 행사에서는 청소년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생각하고 실천하는 평화통일교육을 위하여 통일 글쓰기그리기대회, 통일골든벨대회, 통일노래가사바꿔부르기대회, 통일길거리농구대회, 평화통일기행, 북녘어린이콩우유보내기 운동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해왔다. 통일노래가사바꿔부르기대회에는 통일동아리나 학급 학생 전원이 참가하여 축제의 자리가 되었고, 온 가족이 함께 참가한 글쓰기와 그리기 대회장에는 2천여 명이 모여 평화통일의 열기가 넘쳐났었다. 2005년부터는 북녘어린이콩우유보내기 운동에 참여하며 직접 북녘의 탁아소 현장을 방문하고 남북교류의 중요성을 확인하기도 했다. 지난 20년 동안 교사들은 학생들과 함께 온몸으로 평화와 통일교육을 실천해온 소중한 경험을 축적했지만, 여전히 학교 현장에서 교사들은 통일교육의 방향과 접근 방식에서 어려움을 느껴온 것이 현실이다. 이제 교육부에서도 화해, 평화, 공존을 지향하는 패러다임적 전환을 요구하는 시대정신을 담아 2018년부터는 통일안보교육에서 평화통일교육으로 명칭을 바꾸고 평화시대를 여는 통일교육을 지향하고 있다. 20년 실천운동을 토대로 새로운 20년을 향한 평화통일교육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평화통일교육의 성공은 교사의 역량에 달려있다. 평화통일교육은 특정 과목과 계기교육으로 실시하는 가치주입식, 일회성 행사 교육으로는 효과가 작을 수밖에 없다. 교사들이 평화통일 의지와 실천역량을 가지고 일상적인 교수-학습과 창의적 체험활동을 지역사회 속에서 실천할 때 아이들의 평화통일 의식은 성장할 것이다. 그러므로 교육당국은 교사들의 역량 강화를 위한 평화통일교육 정책을 마련하고 아울러 예비교사인 교대와 사범대생들의 평화통일교육에도 힘을 쏟아야 한다. 또한 평화통일 교육과정은 평화교육, 민주시민교육의 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 분단체제 70여 년이 지난 지금, 이미 아이들은 통일을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 따라서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는 화해와 연대의 평화 정신,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공감의 민주시민정신이 결합된 관점으로 통일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45년 만에 통일을 이룬 독일이 학교 교육과정으로 실시한 보이텔스바흐 협약에 의한 민주시민교육에서 교훈을 얻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평화통일교육은 지역사회 속에서 체험 중심, 활동 중심으로 이루어져 아이들의 일상적인 삶 속에 녹아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주민과 아이들은 학교와 지역사회, 시민단체 어디에서나 평화통일교육의 체험활동에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내에 평화와 통일교육을 위한 다양한 현장체험학습처 발굴, 체험형 통일교육 프로그램 개발과 지원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지금은 남북관계가 꽉 막혔지만 늘 그랬듯이 평화통일시대를 꿈꾸는 작은 날개 짓이 통일 세상을 앞당길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새로운 20년을 향한 힘찬 발걸음을 내딛자. /이미영 전북지역교육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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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8.30 16:19

4차 산업혁명시대에도 학생의 기초학력은 중요하다

이경한 전주교육대학교 교수 기초학력은 인간답게 살기 위한 기본적인 학습능력이다. 기초학력의 개념 정의에는 다소 논쟁이 있을 수 있으나, 기초학력의 소중함 자체를 경시할 수는 없다. 최소한의 기초학력에도 미치지 못하는 학생들을 애써 모른 채 하거나 언어의 유희로 방기하는 것은 교육기관을 포함한 우리 모두의 직무유기이다. 기초학력이 없이는 사회구성원으로서 인간적인 삶을 제대로 살아가기가 힘들기 때문에 기초학력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학생이 사회구성원으로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학습능력인 기초학력에는 읽고 쓰기의 문해력과 셈하기의 수리력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2008년부터 전국의 초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를 수행하면서 기초학력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 그 결과, 생각보다 기초학력에 미치지 못하는 학생들이 매우 많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전북은 기초학력의 미달 비율이 타지역에 비해서 매우 높게 나타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시대를 맞이하면서 기초학력의 개념이 달라지고 있음도 사실이다. 문해력은 미래사회의 학생들이 다루는 문자, 그림, 동영상 등의 다양한 매체로 표현된 텍스트의 이해 능력으로, 수리력은 사칙연산을 넘어서 자료의 이해와 디지털 기기의 활용 능력으로 확대되고 있다. 여기에 학습자가 자신을 존중하고, 더불어 타인과의 조화로운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자기 인식 및 관계 능력까지도 기초학력으로 요청되고 있다. 하지만 그 개념 정의를 어떻게 하더라도, 사회구성원으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기초학력인 읽고 쓰고 말하고 셈하기의 위치와 중요성은 흔들림이 없다. 그러기에 기초학력은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학습 능력이다. 기초적인 이해와 쓰기 능력을 갖추지 않고서는 다양한 매체로 표현된 글과 말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또한 사칙연산, 도형과 측정의 능력 없이 데이터로부터 얻은 정보의 해석과 활용 능력을 기대하기란 난망한 일이다. 아무리 초연결 사회, 초지능 등으로 지칭되는 4차 산업혁명시대일지라도, 기초학력으로서 문해력과 수리력은 모든 학습자가 학습능력을 갖추는데 있어서 필요조건에 해당한다. 이런 능력들을 갖추지 않고서는 미래사회에서 의미 있는 존재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 이처럼 기초학력은 실존적인 문제인데, 전북교육청은 참학력이라는 모호한 개념을 사용하여 (기초)학력을 추상화시키고, 더 나아가 거대 담론으로 만들고 있다. 너무도 간단한 (기초)학력을 교육철학의 이념과 교육목적을 두고서 논쟁을 펼치는 대상으로 만들고 말았다. 추상화된 기초학력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읽고 쓰고 셈하기의 기초학력으로부터 학생들을 포함한 학부모와 지역주민을 이반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이제 기초학력이라는 실존적인 문제를 애써 외면하지 말고, 기초학력 미달 학생들에게 관심을 더 쏟을 필요가 있다. 기초학력보장법의 제정에 대한 찬반을 떠나서 교육당국을 포함한 우리 사회 모두가 학생들이 기초학력을 다질 수 있도록 함께 발 벗고 나서야 한다. 특히 기초학력을 다지는 데는 초등학교 4학년 시기가 중요하니 그 때를 놓치지 않길 바란다. 그리고 교육의 주체들은 기초학력을 증진시키는 데 있어서 그 출발은 읽기에 있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경한 전주교육대학교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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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8.23 16:19

하나도와 1도, 그리고 사흘과 4흘

이성원 TBN 전북교통방송 사장 이번 주말부터 광복절 사흘 연휴가 이어진다. 토요일과 겹쳐서 사라진 광복절(15일) 휴일을 대신 쉴 수 있도록 청와대가 17일 월요일을 임시공휴일로 정했기 때문이다. 코로나로 지친 국민들에게 휴식을 주고 관광 활성화를 통해 경제살리기도 꾀하겠다는 취지다. 지루하게 길었던 장마도 이번 주에는 끝난다고 하니 모처럼 맞는 황금연휴의 의미와 기대가 크다. 그런데 사흘 연휴에는 난데없는 사흘 사태가 있었다. 8월 15일부터 17일까지 사흘 연휴를 맞게 됐다는 기사가 나가자마자 사흘이라는 단어가 뜨거운 관심을 받게 된 것이다. 언론사 기사댓글 공간과 인터넷 게시판 등을 도배하다시피 했고, 한 포털 사이트에서는 실시간 검색어 1순위에 올랐다. 사흘이라는 말이 낯설기 때문이었겠지만, 표현의 수위는 걱정스런 정도였다. 15일부터 17일이면 3일인데, 왜 기사가 죄다 4일이래 15일부터 17일이 사흘이냐? 나라 잘 돌아간다~ 3일간의 연휴를 4일간의 연휴처럼 들리게 하느라 쓰레기 같은 기자들이 사흘간의 연휴라고 표현한다. 끝없이 이어지는 댓글들에는 비난과 조롱이 양념처럼 섞여 있다. 급기야 일부 언론사는 사흘은 4일이 아닌 3일을 가리키는 순 우리말이라고 안내하는 후속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언론도 원인(遠因)의 하나를 제공한 책임을 면키 어렵다. 1도(하나도)가 어느덧 방송자막에서도 공공연하게 쓰이는 공용어가 됐고(하루 대신에 1루가 조만간 방송 자막에 등장할지도 모른다), 일부 언론에서는 개봉 4흘만에 누적 관객수~ 국내 이용자는 4흘만에 무려~ 4흘만에 해임 등 사흘을 4흘로 잘못 써온 이력이 적지 않다. 사흘이 아니라 3흘이라는 어느 댓글러의 주장은 오히려 애교스럽기조차 하다. 사흘의 뜻을 모르는 자체가 크게 부끄러운 것은 아니다.(언론은 제외하고) 자신의 잘못 가능성에 대해 아예 문을 닫아걸고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손쉬운 검색조차 끝내 외면하고, 자신의 목소리만 당당하게 내세우는 youniverse(you+universe)들. 이들의 태도에는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이고, 자신이 대세라고 믿는 과도한 자신감이 폭넓게 깔려 있다. 그러다보니 검색을 통해 사흘의 뜻을 알고 난 뒤에도 사흘이 3일이라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헷갈려 죽겠다. 사흘(을) 4일로 바꾸거라고 당당하게 외친다. 영어 one과 first는 똑 부러지게 구분하면서 일, 이, 삼, 사와 하나, 둘, 셋, 넷의 차이는 몰라도 되고, 사흘=3일이라는 것은 굳이 알 필요 없다는 확신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소통이 단절된 우리 사회 민낯이 아닐까 싶다. 자신이 내뱉는 말의 무게와 책임을 생각하기 보다는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한 사람들, 뻔뻔하게 악다구니 쓰고 헐뜯고 공격해야만 박수 받는 사회, 이런 세상에서 사실(fact)과 객관은 뒷전으로 밀린 채 주장과 외침만이 넘친다. 가짜 뉴스일수록 인기가 높고 힘이 세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는 지나가는 행인을 유인해서 자신의 침대에 눕혀놓고 침대 길이에 맞춰 큰 사람은 사지를 잘라내고 작은 사람은 늘여서 죽인 노상강도다. 그래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는 자신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의 생각을 억지로 맞추려고 하는 횡포나 독단을 뜻한다. 그러나 프로크루스테스 자신도 결국은 테세우스에 의해 그 침대에 묶인 채 머리와 다리가 잘려 죽었다. 지나친 자기중심주의는 타인은 물론 자신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모처럼 맞는 황금같은 사흘 연휴이다. 사회적 거리를 지키는 건강한 휴가 속에서 마음과 정신도 차분하게 정리해보면 어떨까? /이성원 TBN 전북교통방송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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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8.09 16:48

당연한 것들

한병성 전북대 명예교수 그때는 알지 못했죠. 우리가 무얼 누리는지. 거릴 걷고 친굴 만나고 손을 잡고 껴안아주던 것. 우리에게 너무 당연한 것들. 처음엔 쉽게 여겼죠. 금세 또 지나갈 거라고. 봄이 오고 하늘 빛나고 꽃이 피고 바람 살랑이면 우린 다시 돌아갈 수 있다고. 우리가 살아왔던 평범한 나날들이 다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버렸죠. 당연히 끌어안고 당연히 사랑하던 날 다시 돌아올 때까지 우리 힘껏 웃어요. 잊지는 않았잖아요. 간절히 기다리잖아요. 서로 믿고 함께 나누고 마주보며 같이 노래를 하던 우리에게 너무 당연한 것들. 우리가 살아왔던 평범한 나날들이 다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버렸죠. 당연히 끌어안고 당연히 사랑하던 날 다시 돌아올 거예요. 우리 힘껏 웃어요. 당연히 끌어안고 당연히 사랑하던 날 다시 돌아올 거예요. 우리 힘껏 웃어요. (이적의 당연한 것들 노랫말) 이 노래는 코로나19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우리에게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의 소중함을 생각하며 스스로를 격려하고 어려움을 극복해 보자고 부른 이적의 노래다. 가수 이적처럼 세계 많은 아티스트들이 음악으로 춤으로 또는 그림 등으로 희망을 갖고 어려움을 극복해 보자고 응원을 하고 있다. 이러한 응원들이 절실히 필요한 것은, 코로나 19가 우리들 모두에게 견디기 힘든 참 많은 어려움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수십만 사망자 발생도 그 중 하나다. 부모 형제는 물론 매일매일 얼굴 맞대고 인사 나누던 가까운 이웃을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었다. 안타까운 것은 이들을 보내는 마지막 배웅 길마저도 함께하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꾸역꾸역 울음만을 삼켜야 하는 슬픈 광경도 목격했다. 이들 죽음에는 병원에서 제대로 진료도 받지 못하고 죽은 20대 일본 스모 선수도 있다. 중국 후베이 성 우한에서는 신종코로나 바이러스의 위험성을 처음 세상에 알렸다는 이유로 공안에 끌려가 처벌을 받았던 우한 종합병원 의사 리원량(34세)도 있다. 그는 병원에서 환자진료를 계속하다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 확진판정을 받고 투병 중 결국 사망했다. 더 가슴 아픈 것은 그의 부인이 우한의 한 병원에서 둘째 아들을 출산하던 중에 남편 사망소식을 들어야만 했다는 것이다. 경제적 어려움 역시 매우 심각하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물론 국가 간 이동 제한에 따른 경제활동 위축으로 많은 실업자가 발생했다. 격리기간이 장기화 되자 배고픔이 코로나보다 더 견디기 어렵다는 원망의 소리도 커지고 있다. 아프리카에서는 몇몇 수녀원들이 엄격한 봉쇄와 치솟는 물가로 끼니를 못 잇는 지경이다. 그러다 보니 코로나19의 확산이 가난한 사람에게 더 혹독한 시련이 되었다. 이런 어려움들이 시간이 지나도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지만, 극복하고자 하는 우리들의 노력이 멈추지 않는다면 희망은 있다. 극복을 위한 다양한 노력들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방호복 옷을 땀으로 흠뻑 젖어가며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생명의 위협도 무릅쓰고 의료현장을 누비는 의료진과 방역 관련자들의 헌신도 있다. 경제적 지원은 물론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한 재능기부도 줄을 잇고 있다. 그렇다. 당연히 끌어안고 당연히 사랑했던 그런 날이 다시 돌아올 것이다. 희망을 가지고 우리 힘껏 웃어보자, 비록 현실은 어렵더라도 스스로를 격려하고 이웃들에게 웃음을 전하며 응원하자.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극복되어야만 한다. /한병성 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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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8.02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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