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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이 시작되면서 모두가 달라지고 있다. 어린아이를 닮은 연두 빛 나뭇잎들은 사춘기 소년의 모습으로 점점 바뀌면서 계절의 여왕답게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발랄하고 아름답다. 이 계절에 전국적으로 봇물 터지듯 축제의 향연들이 그 막을 열고 있다. 올해도 족히 천 여 개가 넘는 축제들이 한 해 동안 줄을 이을 것이고 5월 한 달 동안 전북에서만도 5개의 큰 축제가 열리고 있다. 그러나 그 많은 축제들은 밤하늘의 무수한 별처럼 많은 이들의 관심속의 무관심으로 흘러 가고 있다. 왜 그럴까? 어떻게 하면 많은 이들의 관심을 붙잡아 맬 수 있을까. 여기에서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모든 축제들이 그 앞에 문화 라는 말을 가져다 붙이고 있다는 점이다. 전주에서 펼쳐지고 있는 풍남제, 한지문화축제, 대사습놀이, 국제영화제도 올해는 아예 하나로 묶어 전주문화축제라고 이름 붙여 놓았다. 어디 전주축제뿐인가 다른 고을도 마찬 가지다. 하기야 우리 민족은 예부터 문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고 자부해왔고, 몽고족이나 일본의 침입 등 이민족의 침입을 받았을 때에 끝까지 저항 할 수 있었던 것은 문화적으로 우리보다 낮은 민족에게 굴복 할 수 없다는 자존심이 애국심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여기에서 문화라는 것은 다른 민족과 차별되는 독창적이고 우수한 전통이 내포된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각 지역마다 문화를 내세우는 것은 그 지역의 독창적인 전통을 그 내면에 깔고 있음을 의미한다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그 지역만의 독특한 문화는 그 지역의 정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지역축제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축제의 확실한 성격, 지역적 특성화, 내용의 독창성, 주체의 민중성, 축제의 문화 산업화, 축제지식의 전문성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러한 모든 조건은 그 지역정신이 물씬 풍기는 독특한 지역의 문화를 바탕으로 기획되고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문화라고 하는 것 속에는 정신 얼 혼 등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주정신은 전주문화 속에 녹아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화 속에 정신이 있다면 정신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정신은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주역사속에서 전주정신을 찾고 전주정신을 바탕으로 전주문화를 찾아야 된다. 비빔밥, 한지, 소리, 영화, 그리고 여기에서 파생된 모든 멋과 맛, 흥 모두의 문화의 모태인 전주정신을 찾고 그 근원인 전주의 역사를 시민과 문화일꾼 모두가 먼저 알아야 된다. 그래야만 겉포장만 그럴듯한 문화축제가 아니라 느끼고 감동을 줄 수 있는 축제를 만들 수 있다. 전주역사를 모르면 전주정신을 알 수 없고, 전주정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제대로 된 전주문화축제를 꾸밀 수 없기 때문이다.앞으로 전주가 문화의 도시가 되고, 문화축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공무원도, 의회의원들도, 문화일꾼들도 먼저 전주의 역사를 알아야 된다. 알게 되면 무엇을 어떻게 꾸며야 될 것인지는 절로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는 만큼 사랑 할 수도 있다. 자존심과 자부심도 생겨나게 될 것이다. /나종우(원광대 교수)
독도가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며칠 전 한일 외무차관 합의 3개항이 발표되면서 일단 시간을 버는 모양새를 갖췄지만, 미봉책에 불과한 굴욕적 협상이라는 불만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독도가 당연히 우리 땅이라는 생각은 우리들만의 생각이었을까요?갈등의 원인이 독도의 영유권에 직결되어 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압니다. 일본은 수 십년동안 틈만 나면 독도문제를 쟁점화하기 위해 노력해왔으니까요. 잊혀질만하면 독도문제를 거론하고, 한국민의 저항이 거세지면 사무라이 정신으로 옷을 벗는 일본관료들의 행태만봐도 일본 보수우익의 뿌리 깊은 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모두가 흥분한 이런 상황에서, 당신은 사고의 진정한 유연성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어떤 국제적 분쟁도, 국가적 위기도 지난 시기의 이념의 자로 재단할 수 있다는 독특한 생존방식을 일러주었으니까요. 그 누가 아무리 당신을 일컬어 친미의 도를 지나쳐 굴미의 태도를 위장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아가 일본까지 하늘처럼 떠받들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더라도, 가미가제 정신이 영원하듯, 우리의 위대한 보수는 죽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아무도 상종할 논객으로 치부하지 않는 외로움을 딛고, 적화라는 지난 세기의 쓰레기 같은 용어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며, 국익이고 나발이고 간에 오로지 수 십 년 묵은 냉전이데올로기를 창 삼아 천둥에 개 뛰듯 휘둘러대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세계에서 가장 부자 나라인 일본을 적으로 돌리고 세계에서 가장 못살며 잔혹한 집단인 북한과 세계에서 가장 큰 일당 독재국가와 친구가 되겠다는 자살 충동을 억제해줄 세력이 한국에 과연 있는가라는 당신의 비분강개의 목소리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국민 모두가 예라고 대답할 때, 홀로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진정한 용기에서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우리 보수에겐 왜 자살충동이 없을까 하는 것입니다. 일본에 간 김에 용기있게 할복 자살하여 꿈에도 그리던 조국 수호와 적화 방지의 일석이조를 거둘 수도 있었을텐데 말입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대안 없는 충동질이 주특기라 하여도, 일본의 드라이아이스 전략에 말리지 않고 조용히 독도를 헌납하자는 주장이 아니라면, 한번쯤 시도해볼만한 이벤트였을 것입니다. 그 것은 이 땅의 보수 우익이 평생 꾸어온 꿈 아니었던가요?최근 한일간의 문제를 지켜보면서, 우리의 용감무쌍한 극우 보수인사가 핵으로 일본을 쓸어버리자 주장하던가, 하다못해 일본에 건너가 테러나 분신자살을 한다면, 그래서 양국관계를 미묘하게 만들어버리면 어떻게 할까 하는 걱정을 다해봤습니다. 그러나 그건 기우였습니다. 참 다행입니다. 우리의 보수는 영원히 살아야하니까요.이번 기회는 우리 보수의 실체를 드러내는 결정적인 것이었다 생각합니다. 아, 참! 그런데 외롭게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뒤틀린 궤변으로 곡해하여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봐 또 걱정입니다.제발 너나 걱정하세요/김정수(극작가)
주일에 한 번쯤 책상을 정리하다가 종종 머츰해질 때가 있다. 접혀진 채 쌓여있는 신문더미, 뜯지 않은 몇 권의 책 그리고,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 읽혀진 듯한 우편물들을 치우는 가슴에 묻어나는 먼지를 훔칠 때마다 절로 낯설어지는 나를 보게 된다. 행여 그것들 틈에 낀 채 지나쳐버린 약속이라도 눈에 띌라치면 난감하기가 이만저만 아닌데, 바삐 산다는 시쳇말보다 이미 익숙해진 습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편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 일부러 핑계를 대자면 숫제 인터넷 탓이다. 어젯밤도 줄창 컴퓨터 앞에만 앉아있지 않았던가. 웬만한 소식이나 정보쯤은 마우스 하나로 간단히 검색해버리므로 신문을 펼치는 경우라곤 화장실 갈 때가 고작일 정도로 하루 분의 짬에서 소외되어 가는 판이다. 책에 대한 예우도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책이라야 겨우 구독하는 문예지 두서너 권과 애써 보내온 지인들의 시집 낱권뿐인데도 한참을 그냥 쌓아두었다가 따로 시간을 빌어 허겁지겁 넘기는 예가 늘고 있으니 정독은커녕 모름지기 허물까지 쓰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인터넷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새삼 거론할 필요도 없이 인터넷은 이미 생활의 일부로써 다양한 정보와 재미를 안겨주고 있다. 전문지식에서부터 뉴스, 스포츠, 오락에 이르기까지 클릭만 하면 그 즉시 원하는 것들을 창에 끌어다주므로 컴퓨터 한 대만 있으면 대한민국에 안되는 게 어디 있니?라는 우스개 말을 떠올릴 만하다. 날밤을 새워가며 게임삼매경에 빠지는 아이들이나 고스톱을 즐기는 아줌마들, 틈만 나면 카페에 들러 잡담을 주고받는 사람들 모두가 마니아인 우리나라는 가히 인터넷 공화국인 셈이다.나 또한 예외는 아니다. 밤이면 밤마다 컴퓨터를 켜고 새로운 호기심을 찾는다. 뿐만 아니라 따로 즐겨찾기에 올려둔 몇 개의 사이트를 들락거리느라 밤잠을 설치는 날도 많다. 나름의 취향이니 만큼 음악과 시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이물 없이 기웃거리며 마음의 닮은꼴을 찾는 것이다. 그쯤 익숙해지던 어떤 방에서 즐겨 듣던 몇 곡의 노래가 슬그머니 지워진 그 어느 날 이후 일말의 아쉬움과 회의가 드나는 곳마다 조금씩 묻어나기 시작했다.노래가 지워진 까닭은 필경 저작권 시비였다. 모든 노래가 한꺼번에 삭제되지 않은 영문이야 잘 모르겠지만 공짜였던 유명 음악사이트들이 유료화 되어 이제부턴 한 곡 한 곡을 내려받을 때마다 그 대가를 치러야 하게 됐다. 노래 한 곡을 지어 대중의 희로애락을 어우른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생각하면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어 기꺼이 따르다가도 불현듯 울화가 치밀 때가 있다.한창 잘 나가는 가수들의 노래가 걸맞은(?) 예우를 받는데 반해 시인들은 여전히 인터넷을 방황하고 있잖은가. 지명도에 상관없이 대다수 시인들의 글이 거의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고 있으니 말이다. 시의 대중화를 역설한다든지 여전히 생계를 도외시한 채 고리타분하게 정신적인 측면만을 운운한다면 좀 무안한 자기변명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한 편의 시도 한 곡조 노래 이상의 산고를 겪으며 태어나는 것이다. 시집이 이따금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르던 시절이 있었다. 기억하기론 작년에 가장 많이 팔린 시집이 얼추 5000~6000권 정도인 것으로 알고 있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시를 더 많이 읽는다는 통설이 맞다면 한 편의 시가 밥 한 그릇이 되지 못하는 요즘은 살만한 세상인가? 아니면. 그래도 새로운 문예지를 만들고 원고료도 없는 한 두 편의 글을 발표하기 위해 한해에도 수없이 탄생하는 이 땅의 오프라인 마니아들을 보자니 은근히 힘(?)이 난다./김유석(시인)
문화의 시대라는 말은 헛 수사일 뿐인가. 문화와 예술이 창조력의 발원지이며, 문화적 태도와 사고방식이 한국사회가 하청사회에서 창조사회로 진화하기 위해 필수적이라는 말들은 더 이상 낯설진 않다. 그렇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문화적 낙후의 증상을 경험하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여전하다. 문화와 예술의 가치는 경제 논리 내로 완전히 포획된 듯 보인다. 문화콘텐츠가 새로운 생산력을 만들고 문화가 우리를 먹여살릴 것이라고 부쩍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단, 그 낙관적인 전망도 문화와 예술이 가치가 존중되는 사회적 과정이 존재하고, 문화의 힘을 체험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일상의 인프라가 있을 때에나 가능한 이야기일 것이다. 문화의 시대, 콘텐츠의 시대로 이행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또 순탄하지도 않을 것이다. 문화와 경제가 선순환 구조를 형성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사회 각 영역의 수준과 품격이 높지 않는 곳에서 문화와 경제의 대응관계는 난망하다. 특히 천민적인 경제 선동이 무차별적으로 행해지고 수용되는 곳에서 문화의 가치를 인식하는 일은 전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 사례는 적지 않다. 얼마전 방폐장 유치경쟁에서 역사문화도시를 추진한다는 경주시가 90%가 넘는 시민 지지로 선정되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방폐장이 있는 도시와 역사문화도시라는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을 선택한 것은 아마도 눈앞의 이익을 누군가 선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월드컵을 앞두고 대기업 두 곳이 벌리고 있는 문화 마켓팅은 시민들의 자발적 열기를 기업 홍보 차원으로 막무가내로 끌어들이고 있다. 아무리 기업이 시장 경쟁을 위해서는 앞뒤가리는 것이 없다고 하지만, 아무런 사회적 배려가 없는 홍보 전략을 보고 있다보면 그들이 이해하는 문화 마켓팅 수준이 참 천박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가 하면 앞으로 문화기관의 운영도 경제부처가 관리하겠다고 한다. 세계일보 3월 23일자 기사는 기획예산처가 국내 314개 공공기관 및 공기업 전반의 경영과 지배구조에 개입할 수 있는 내용의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기본법 제정안을 입법예고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문화정책과 행정도 경제 부처가 관리하게 될 것이다. 지방자치단체, 기업, 정부가 모두 나서 전방위적으로 경제 선동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 전통도, 시민들의 문화적 열망도, 문화적 공공 서비스의 필요도 오로지 눈 앞의 경제적 이익과 효율성이라는 잣대로 무력화되는 현실인 것이다. 삶의 질과 관계 회복이라는 문화의 가치는 언제나 뒷전이다. 한 후배의 홈페이지에서 봤던 사진 한 장이 생각이 난다. 애완견을 들고 돈다발을 흔들어대면서 춤을 추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있는 사진이었다. 이 어색한 조합이 우리 시대의 상징이다. 만일 이 질서가 숙명이 아니라면 지금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 또 하나의 고민의 레퍼토리가 추가된다./전효관(전남대학교 문화전문대학원 교수)
연두 빛 봄빛이 수채화로 번져가고, 선거 열기는 후끈 달아오르고 있는데 한 모퉁이에서는 어김없이 축제의 계절이 다가오는 홍보용 현수막과 입간판들이 그 사이를 비집고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올해의 축제는 각종 선거 열기 속에 묻혀서 그 의미가 퇴색될 것인지 아니면 그 덕(?)으로 더 빛을 발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우리나라의 축제는 지방자치가 시작되면서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1970년에 120여개의 축제가 전국적으로 있었는데 1996년에는 325개로 늘어났고 지난해에는 1000여개의 축제가 치러졌다. 우리 전북의 경우는 1996년에는 32개의 축제가 있었는데 지난해에는 60여개가 넘어섰다. 덩치가 큰 축제만 보더라도 전주영화제, 풍남제, 한지문화축제, 남원춘향제, 고창청보리축제 등 지역마다 고유한 역사 전통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문화의 정체성을 내세우는 축제들이 제법 많아졌다. 이젠 차분하게 이러한 축제들이 성공하고 부가가치가 높은 축제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생각 해 볼 때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전통 지역축제를 현대적 의미로 복원하고 전승 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철저한 고증 속에서 구성된 축제가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고 신명나는 오락적 기능을 수행 할 수 있으며, 지역사회의 특성을 끌어내는 관광 자원으로 자리 매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지역축제의 관광 상품화에 보다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된다. 축제 투자비용 효율을 높임과 동시에 관광 상품화 전략으로 다양한 지역 활성화 효과를 얻는 방향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현대는 지역축제의 관광 상품화 전략이 지역을 살리는 산업으로 보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전국적으로 문화관광 축제가 약 32%인데 우리 전북의 경우는 16%정도를 차지하고 있어서 아직도 보여준다는 의미를 뛰어 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른 곳에서도 하고 있는 축제는 성공하기 어렵다. 보여주는 축제, 축제를 위한 축제는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전국적인 축제에서 보여주는 의미가 강한 문화예술제의 성격이 차지하는 축제가 47%인데 우리 지역에서는 70%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심각하게 생각해 볼 문제다. 이러한 성격의 축제는 볼거리의 다양화만을 추구하여 백화점식으로 구성하기 마련이다. 셋째로는, 디지털 시대에 맞는 축제의 재발견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관람대상을 차별화하는 알차고 작은 축제, 투자가 비교적 적으면서도 효과를 크게 얻을 수 있는 축제의 개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성공한 축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위에서 언급한 것들과 더불어 꼭 정체성이 분명한 축제로 구성되어야 하며, 축제의 타이틀과 내용이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나종우(원광대 교수)
건국 이래 최초의 여성 총리가 막 탄생할 즈음이다. 최고 통치자는 아니지만, 여성총리라는 상징성 하나만으로도 한국 사회에 만만찮은 파장을 가져올 것임에 틀림없다. 수 천 년 억눌려왔던 여성 지위에 분명한 변화의 지표며, 변화의 결과이기도 하다. 일부 야당에서는 허물어진 무덤에서 파내온 썩어빠진 자를 또다시 꺼내들고 여성총리 지명자를 재보겠다고 덤비는 모양이다. 어찌 그 모양들인지…, 여성의 활발한 사회 진출을 남성과 여성의 대결구도로만 받아들이는 몰지각함보다 더 치졸한, 그야말로 논쟁의 가치도 없는 작태다.차제에 여성을 바라보는 이중적 시각도 바로 잡히면 좋겠다. 우리 안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성적 편견은 생각보다 그 뿌리가 깊고 넓다. 언론도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부채질하고 있다. 삼월 한달 정가의 이슈가 되었던 최연희 의원 사건이 그 뿌리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 짧고 작은(?)사건 안에는 왜곡된 성문화, 남존여비, 계급적 성차별, 후안무치의 성도덕 등 우리 사회 성문제가 종합세트처럼 구성되어 있다.문제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태도도 사뭇 이중적이다. “어머! 웬일이니? 어머머, 세상에 그럴 수가 있어?” 라고 제발 말하지 말자. 내숭 떨지 말자는 말이다. 솔직히 당신도 그런 식으로 놀거나 놀고 싶어 한 적 없었던가? 아니면 그렇게 노는 사람들에 대해서 듣도 보도 못했던가? 정말 난생 처음 접한 이야긴가? 그렇다면 기억력에 문제가 있다. 우리에겐 유사한 추억이 있다. 지난 2003년 10월 서울시 정무부시장의 회식 자리 경향신문 여기자 성추행 사건. 이 사건후 총선시민연대의 낙천운동에도 불구하고 그는 금배지를 자연스럽게 유지했다. 그 뿐 아니다. 전 제주도지사의 여성단체장 성추행사건, 지난달의 해양수산부 고위 공무원의 길거리 성추행 사건 등 알만한 권세가들의 추문이 끊임없이 새어나오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용서했다. 단죄의 바람은 잠시 뿐이고 여전히 건재한 그들, 이처럼 좋은 증거가 또 어디 있을까? 우리는 죄인에게 결코 침을 뱉지 못한다.만에 하나 “그래도 보통 사람이 아닌 공인이 말이야, 깨끗한 정치를 해야할 정치인이잖냐, 말이야!” 라고 생각한다면 그냥 놔두지 말자. 과감히 침을 뱉자. 이거 죄 없는 사람부터 침 뱉는 것 아니야? 하는 번민일랑 버리자. 하느님께 죄송하지만, 모두 용서하기엔 세상에 용서할 일들이 너무 많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놀란 척, 분개한 척이 아니라 단죄에 나서는 것이다. 하는 게 아니라 단죄다. 응징이다. 우리가 단호할수록 우리도 바뀐다. 선거철이 다가온다. 내숭도 용서도 잠시 잊어버리자. 나는 수양이 덜 되어서인지, 아직도 침을 뱉고 싶은 얼굴들이 많다/김정수(극작가)
햇쑥 냄새 같은 게 난다고 생각했다. 아니다, 그냥 흙내라고 해야겠다. 누렇게 말린 애보리 눈빛에 찔끔거리던 빗물을 매몰차게 닦아내는 바람 속을 걷는 나절가웃, 어디선가 쏘여 오는 새물내가 연신 가슴을 훔치고 있었다. 얼핏 송사리 떼 같으나 도랑 물 웅덩엔 알록거리는 햇살뿐이고 눈이 밝은 실버들도 아직은 기별을 좀 더 미뤄야 될 성 싶은데, 한참을 따라서 제법 슬거운 기운이 끼는 들길이고 보면 그래, 봄이라 하자.봄이 상징하는 수많은 수식어들, 이를테면 희망, 소생, 시작 등등의 어휘들에 <기다림>이란 낱말을 잇대어보며 들판을 나선다. 흔히 쓰고 듣는 <봄을 기다린다>라는 말 속의 <기다림>이 무엇을 가름하는 것인지 곰곰 끌어가는 걸음이 자꾸 비끗거린다. 여태껏 <기다림>의 어감을 상황의 지속보다는 종료에 이름으로 풀었거나 어떤 보람이나 성취감 같은 것을 미루어 짐작할 때 빗대어 쓰곤 하던 이 말을 새삼 중얼중얼 되새김질 하게 된 것은, 그러니까 지난겨울부터의 일이었다.들판의 한해살이는 얼추 3월에 시작하여 10월이면 마무리 된다. 축산을 한다든지 시설원예를 하는 농가의 경우는 사철 일손을 당겨 써야 하지만 벼농사를 일반으로 하는 농투성이들은 보리갈이를 끝낸 후부터 긴 휴식에 들어간다. 정확이 말하자면 휴식이라기보다 그냥 <논다>라고 얘기해야 할 시간들이 너댓 달 가량 주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무위도식을 하는 것만은 아니다. 생산한 벼를 시장에 내다팔아야 하고 틈틈이 영농교육에도 발품을 팔아야 한다. 갈수록 수상해지는 세월도 걱정이지만 당장은 가격하락으로 눈에 띄게 줄어든 소득을 보태기 위해 먼 공사판 까지 날품을 팔러 다니는 몇몇 바지런한 이들도 있다. 그러나 나머지는 겨울 내내 지루한 시간과의 몸싸움에 시달려야 한다. 어귀에 참새처럼 웅크린 채 한숨을 내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하고 많은 날 주유소나 마을 점방 후미진 방구석에 몰려 화투장을 두드리며 죽이는 시간들이 여전한 겨울나기의 모습인 것이다. 아낙네들의 겨우살이도 크게 다르진 않다. 아직 <누구네 엄마>라 불리는 비교적 젊은 소수의 부녀자들은 아이들 치닥거리에 그나마 무료함을 덜 타지만 <댁네> 호칭이 붙는 연배의 아줌마에 이르면 남정네들과 별 다름이 없어진다. 그리하여 자치단체에서는 풍물, 수영, 노래, 스포츠댄스 등의 프로그램을 짜서 농촌의 삶들도 나름의 취미를 붙일 수 있 도록 점차 관심을 기울려 나가는 듯싶기는 하다. 그러나 <노래방계>가 새로 생겨날 정도로 가요프로그램만이 호응을 보일 뿐 여타의 과목은 영 별무신통인 실정이다.<어서 봄이나 왔으면 쓰것다>. 누차에 푸념처럼 걸쳐 들은 말이었다. 담배값이나 잃고서 자리를 털던 누군가의 겉말 같은 거였는데 한구석에 뒹구는 소주병만큼이나 뒤끝이 씁쓸했다. 어떤 바람이 느껴지기는커녕 그저 공허하고 지루하게만 들렸다. 며칠 동안의 노 동 후에 주어지는 하루 이틀의 휴식이 아니라 나날이 빈둥거리며 기약 없는 세월을 기다 리는 것, 노는 것도 일인데 삼동을 소주와 담배연기에 찌들며 품삯 없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그러니까, 초입의 들판에서 풍기는 이 거름내 같은 건 일철을 맞아 가분한 사람의 냄새인 것이다./김유석(시인)
문화는 창조성에 기반한다고 한다. 조금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문화의 힘을 창조의 힘이라고 전제하기로 하자. 문제는 이 창조성이 어떤 상태에서 주어질 수 있는 것일까? 또 더 근본적으로 창조성은 개발되거나 지원될 수 있을까? 문제는 한국 상황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수많은 예술인에 대한 지원이 비록 부족하지만 존재하고 있고 문화콘텐츠 업체에 대한 지원금이 막대한 액수로 뿌려지고 있지만, 이러한 정책적 지원의 결과로 만들어지는 결과물이 별반 없다는 것은 부인하기 힘든 사실일 것이다. 말하자면 창조성을 만들어내는 정책이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보자면 대부분 실패한다는 사실이다. 정책의 기대 예측이 번번히 빗나가는 이유는 보이지 않는 문화를 다루는데 있어 문화 생산과 향수에 관한 사람들의 욕망을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창조성은 근본적으로 불안한 존재 위치로부터 기원한다. 창조적인 사람은 창조성에 대해서 학습하는 사람이 아니다. 창조적 행위는 안정적인 기반에서 벗어나 있는 주변적 위치와 상관적이고, 변화의 욕구에 의해서 가동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반해 (문화)정책이 움직이는 방향은 대부분 안정화와 시스템을 만들려는 욕망에 의해 움직이고, 그래서 현실에 존재하는 창조의 힘을 평준화시킨다. 특히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민간의 욕망조차도 대부분 같은 방향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 한국사회의 현실이라고 할 때 그 정책의 제도적 속성은 과정 속에서 매우 강화되기 마련이다.나는 그 한 사례를 최근의 복권사업에서 본다. 최근 사회양극화 문제가 의제화되면서 대부분의 예술 정책도 사회복지적 틀 속에서 조율되고 있다. 어느새 예술은 치유의 힘으로 국한되어 버리고 있고, 예술이 치유적 힘을 가지고 있다는 강조 속에서 예술은 아주 부드러워지고 있다. 예술이 가진 적나라한 존재를 드러내는 힘, 현실을 넘어서는 불편한 힘이 사회적 필요와 일대일 대응관계로 조율될 때, 예술은 그 존재가치를 상실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조차 생기게 된다. 그래서 문화와 예술에 대한 지원은 근본적으로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 지금의 관행적인 지원틀을 깨고 창조력을 기반을 강화하는 지원으로 재편되지 않으면, 문화정책은 실패할 것이다. 문화정책에서 창조력을 지원하는 의미를 숙고할 때가 되었다./전효관(전남대 문화전문대학원 교수)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란 글에 보면 아무도 살지 않는 고궁. 그 고궁의 벽에서 흙덩이가 떨어지고 창문의 삭은 나무위에는 「아이세여, 내 너를 사랑하노라」는 거의 알아보기 어려운 글귀가 씌어 있음을 볼 때 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과거에는 슬프게 하는 것들이 오늘은 기쁘게 하는 것들로 바뀔 수 있음을 생각하는 것은 아이러니(irony)일까.이런 생각을 갖게 된 데는 얼마 전에 있었던 두 가지의 일이 계기가 되었다. 그 하나는 최근 들어 새로 만들어 지는 제도 가운데「등록문화재」제도라는 것이 있는데 그 사업 중의 하나인 「묵은 동네 담장 등록문화재」 등록과 관련하여 현지 조사를 하면서 느낀 것이다. 이 제도는 그 대상이 생성된 후 50년을 경과한 문화유산 중 우리나라 근대사에 기념이 되거나 상징적 가치가 있는 것, 지역의 역사? 문화적 배경이 되고, 한 시대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 등이 그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니까 건조물, 시설물, 문학? 예술작품, 생활문화, 역사? 인물 유적 등이 모두 포함 되는 셈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제는 시골 마을에 퇴락해 가는 상징처럼 여겨지는 묵은 동네의 담장이 그 대상의 하나가 되어 조사를 한 것이다. 우리 전북의 경우 세 곳이 있었는데 어느 곳은 퇴락한 명문가(?? )의 애잔함이 남아있고, 어느 곳은 150여 호의 마을이 이제 80호로 줄어들어 여기 저기 빈집들이 을씨년스런 마을의 담장이기도 하다. 어느 것은 흙으로 된 토담들이고 어느 것은 돌담들이고, 또 어느 것은 흙과 돌을 섞어 쌓은 것 들이다. 어느 것이든 한결같이 숱한 세월이 흘러 이제는 삶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 사라져 가는 것들- 마음속에 그리움으로 남아있는 것들이 문화유산의 이름으로 앞으로는 사랑 받는 존재로 다시 태어 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일은 지난해 가을 개성을 다녀온 뒤의 느낀 소감이다. 개성을 세계문화유산 역사도시로 등재하기 위한 남북역사학자 공동학술조사였는데 과거의 남아있는 문화유산, 또는 이제는 텅 빈 폐허의 자취들, 이런 것들을 정비하고 새롭게 조명하려는 작업이었다.우리 전북은 과거 긴 농업사회의 가장 중심이 되었던 역사의 현장이다. 지금은 그 삶의 현장이 그 의미를 잃고 뒤로 밀려나는 현실의 풍경이 되었지만 이제 그러한 현실의 풍경은 풍경을 넘어서 삶의 자리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요소로 자리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쩜 묵은 담장만이 아닌 등록문화재의 요소는 우리전북이 가장 풍부한 지도 모른다. 관계당국에서는 이런 제도를 홍보하여 의미를 갖게 될 때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들로 다시 태어 날 수 있으리라고 본다. /나종우(원광대 교수)
최근 원판 ‘혹성탈출’을 다시 볼 기회가 있었다. 삼십년 전쯤 티비에서 처음 보았던 나는 상당 기간 이 영화가 흑백이라는 착각을 하며 살았다. 흑백 티브이 세대의 아픈 상흔이다. 강산이 세 번 바뀌는 동안 대부분 장면들은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그 영화가 남기려했던 메시지만은 비교적 정확히 남아있었다. 불시착 했던 낯선 혹성이 지구였음을 확인하는 마지막 바닷가 장면의 처절한 순간과 쓰러져 있던 자유의 여신상만은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영화를 보는 동안, 컴퓨터 그래픽 없이 수제 특수분장을 사용한 이 영화가 몇 년전 다시 만들어졌던 신판 혹성탈출에 비해 훨씬 단단한 주제의식을 보여준다 생각했다. 그건 내 생각 뿐만이 아니었다. 고맙게도 전형적인 컴퓨터 세대인 두 아들들도 그 사실에 동의해주었다. 비교적 함께 영화 보는 시간이 많은 편인 우리, 조금 오래된 영화를 볼라치면 나는 “참 괜찮은 영화지. 그지?” 라며 은근히 옛날 거 무시하면 안 된다는 쪽의 멘트를 날린다. 그리고 내가 살았던 시대도 제법 괜찮았음을 과시한다. 기성세대의 일원임을 증명하는 수작이긴 하다.이번 겨울방학에는 ‘스타 워스’ 꿰맞추기를 했다. 알다시피 이 영화는 삼 십년 전부터 4편, 5편, 6편 순서로 제작되었고, 에피소드란 이름으로 1편부터 제작되었기에, 그동안 뒤죽박죽이 되어 있던 스토리를 1편부터 차근히 정돈해 두자는 취지였다. 아들들의 강력한 도움으로 진행된 이 영화보기를 통해 오래된 영화들이 훨씬 인간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허술한 만큼 로봇 하나에서도 인간의 체취가 강하게 느껴졌다.요즘 복고댄스가 한창 인기다. 어느 세대에 물어봐도 자신들의 춤이 아니라 하니, 어느 시기로 복고 했는지 아리송하긴 하지만, 나이트댄스와 테크노댄스를 적당히 버무려 놓은 듯한 이 춤이 일단 ‘복고’ 자체를 하나의 유행상품으로 띄워놓은 것만은 사실이다. 티비 드라마의 복고도 활발하다. ‘청춘의 덫’에 이어 김수현의 ‘사랑과 야망’이 이십년만에 브라운관에서 재연되고 있다.이 같은 양상에 긍적적 평가도 부정적 평가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시대를 뛰어넘어 공감될 수 있는 ‘그 무엇’이 분명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태리의 문예비평가 폴티는 서른 여섯 가지 극적 경우로 모든 소설과 드라마를 분류한 적이 있다. 실제로 많은 이야기들은 그 범주 안에서 진행된다. 그것이 인간의 경험할 수 있는 폭이며 상상력의 크기다. 그러기에 옛것을 통해 새로움을 배우라는 조언은 여전히 큰 설득력을 얻는다.복고가 유치하고 촌스러움의 표상으로 희화화되는 일은 문제다. 지난 시대에 존재했던 문화적 상황을 가슴으로 느끼고 그 안의 삶을 존중함으로써 진정한 온고지신이 가능해질 거라 믿는다. 세대 차이? 그리 문제될 일이 아니다. 우린 함께 살고 있고, 함께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수없이 공감할 ‘그 무엇’들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김정수(극작가)
받아야 할 만큼 별다른 일도 아닌데 작은 꽃다발 하나를 받았다. 꽃에 대한 기억이라면 여전히 좀 생소하기도 하고 한구석이 설레는 각별함도 있어 안개꽃에 묻힌 장미 서너송이는 오래도록 가슴에 꽂혀 주고받은 그 사소함으로 시들어 갈 것이다.이맘때면 학교마다 졸업식이 한창이고 이어 새내기들 입학식도 이어진다. 뿐만 아니라 주말엔 봄기운에 맞춰 행진하는 젊은 쌍들도 부쩍 띈다. 따로 짬을 낸다든지 제 철이 아니고서 이 만큼의 꽃송이들을 거리에서 눈동냥 하기란 여간치 않아서 남의 공치사라고해도 공연히 은근해지곤 하는 것이다. 그렇듯 꽃이 있는 풍경들은 얼마든지 따사롭고 갸륵해도 좋을 성 싶겠지만 때론 다소 치우치는 면도 있어 한 때는 관에서까지 가로 나서는우화를 빚기도 했었으니. 꽃과 함께 크고 작은 선물들을 받기도 한다. 학창시절의 선물에 관한 유서를 따르자면그 옛날의 공책에서부터 한참 주가를 올리는 노트북에 이르도록 나름의 세태를 반영하는것들이 주종을 이루어 왔다. 주는 이의 정성이 우선인 건 틀림없겠으나 요즘은 받고 싶은사람의 바람을 먼저 고려해야 할 만큼 구체적이고, 어지간한 것으론 생색조차 낼 수 없을정도로 드는 비용도 만만찮은 것들이 많다. 그 가운데 으뜸으로 유행하는 것은 핸드폰이아닐까 싶다.중 고등학생쯤은 물론 웬만한 초등학생들의 주머니 속에서도 쉽게 만져지는 그것. 언제부턴가 생필품화 되어버린 그것의 한계는 과연 어디까지 일지, 단지 소통의 도구로써가아니라 알면 알수록 복잡하고도 경이롭다는 사실을 감출 수 없다. 단순한 수첩 기능에서부터 계산기, 사진기, 인터넷, 그리고 이제는 위성수신 능력에 까지 무소불위로 그 영역을넓히는 그것의 편리함에 익숙해져 가다가도 얼핏 씁쓸한 맛을 다실 때가 있다. 문자메시지라는 걸 받아볼 때 이따금 그렇다. 긴급한 연락이라든지 피치 못할 사정이 담겨진 내용은 그렇다 치더라도 연하장을 대신해서 날아드는 연말연시의 수많은 문자들, 모임 약속이나 애.경사 알림은 이미 오랬고 심지어는 부모에 대한 자식의 문안마저도 글자 몇 개로 갈음하는 매트릭스적 세상이 된 것 같아 유감스러운 순간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핸드폰인지도 모르겠다. 손바닥 한 번 쥐었다 펴는 시간과 비용으로 그만한 효용가치를 창출해 낼 수 있는 것을 몇이나 셀 수 있을까? 반면 그것의 편리함 속에는 뜸한 불편함도 들어 있다. 먼 길이라도 떠나와 그것의 배터리가 닳아버렸을 때, 마침 통화해야 할 일이 생겨 주위를 두리번거릴 때, 그쯤 있어야할 전화부스가 사라져버린 것을 알았을 때 그렇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조금은 번거로움을 덜게(?)된 직업이 있다면 죄송한 말씀이지만 아마 집배원일 것이다. 따로 소포를배달해주는 택배회사들이 생긴 탓이 아니라 여타의 서신은 문자메시지나 이메일로 대신 해버리므로.누구한테서 인가 받은 지 꽤 오래된 선물이 하나 있다. 만년필이다. 소지품 중 가장 애지중지 하는 것으로써 이 만년필을 꼽는다. 명품이 아닌 그것은 그 때 담았던 마음들을변함없이 또박또박 적어주며 낯 설은 세월을 위로해 왔다. 갈수록 책상보다는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늘어도 백지를 펼 수 있는 여분의 생각만큼은 남겨두고 싶은 것인데마음은 자꾸 편한 것들만 닮으려 해서 탈이다. 한밤중 깨어 다시 잉크를 채워본다. /김유석(시인)
얼마 전 내 일상을 돌아볼 두 가지 계기가 있었다. 하나는 어린 아이들과 놀아주는 서비스 프로그램이 있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아이들과 조립하고 놀아주는 것이 즐거움이기도 하지만 꽤 피곤한 노동이기도 한 나는 그 서비스의 유혹에 유혹 당했다. 또 하나는 비만을 치유할 지방분해 약품 주사가 있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요즘 옷이 맞지 않는 내 몸을 보면서 잉여 칼로리 소비로 고민하던 나는 규칙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대신 약물로 지방을 분해할 수 있다는 말에 의사를 하는 친구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내 정서적 노동이 투입되었야 할 일, 그리고 내 몸을 관리해야 하는 일을 상품 구매로 쉽사리 처리하고 싶어지는 나를 목격하게 된 것이다. 그러는 나를 보면서 100% 상품 세계에 둘러싸인 존재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내가 상품 질서와 무관하게 존재할 수 있는 영역은 얼마만큼일까 의문을 던지게 된 것이다. 순도 높은 상품질서에 둘러싸인 내 욕망의 구성 자체가 결국은 기계와 다를 바가 무엇인지 고민에 빠져 들었다. 자본주의는 이제 단순히 삶의 존재를 유지하는 물품을 제공하는 것을 넘어 내 감정과 행복을 제공할 수 있다고 자신감있게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 자본주의는 쾌락을 설계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매일 광고에 넘쳐나는 메시지는 그 약속이 곧 여기에서 실현된다는 믿음을 강요한다. 자동차를 구매함으로써 가족의 행복을 얻고, 아파트를 잘 선택하면 웰빙이 실현될 수 있다는 믿음을 전파하는 것이다.그렇지만 그 약속이 확실하다고 믿는 순간, 나는 그 상품 질서 내에서만 존재한다. 아마도 상품 질서 내에 존재하는 나는 근본적으로 무력한 존재이다. 왜냐면 내 욕망과 신체를 조정하는 서비스가 나라는 존재가 구매를 통해 투여한 환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환상과 대면하는 순간, 공허감과 무력감이 나를 지배할 것이다. 근본적으로 결여된 존재의 문제를 상품과 서비스로 대체하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이 환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나는 요즘 막다른 선택에 내몰린 느낌이 있다. 문화는 상품 질서와는 다르게 존재의 결여를 채우고 자율적 연대를 통해 서로 만나는 힘이 되어야 하지만, 문화 역시도 그 힘을 가시화하는데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매달리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문화적 실천이 이 힘에 굴복할 것인지, 아니면 자율적이고 자구적인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생성의 힘이 될지 결정적인 선택에 직면하고 있는 느낌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문화가 삶의 기쁨과 존재 이유를 구성하는 에너지가 되는 작은 실천을 나로부터 도모해보는 것을 꿈꾼다. /전효관(전남대 문화전문대학원 교수)
지방자치 실시 이후 각 지방 마다 관광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그리고 지역마다 다른 지역과 차별되는 관광을 내세우기 위해 문화관광 이라는 용어들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어느 지방, 어느 도시든지 그 명칭 앞에 ○○ 문화관광도시 라는 말을 수식어처럼 내 걸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의 관광개발이란 관광자원으로서 차지하는 문화유산(유형? 무형)과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문화관광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는 경제성장이 문화발전을 담보로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문화적 수준과 창의성이 경제를 이끌어 간다고 보기 때문에 문화를 상품화하고 경제적 가치로 바꾸는 문화의 산업화가 큰 관심이 되고 있다. 그런데 문화산업의 핵심 가운데 하나가 관광산업이다. 관광산업도 국민소득이 높아지고 시대가 변하면서 달라져야 한다. 관광이 한가한 여가 생활로서 즐김의 놀이 활동뿐만 아니라, 문화지식을 확충하고 새로운 문화체험을 위한 필수적인 지식정보 습득과 현장학습 활동의 하나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관광의 추세가 과거의 보았다 해봤다 식의 관광에서 휴양관광, 문화관광으로 발전하고 있다. 과거에는 온천지역이 인기여서 이곳에 모여들던 사람들이 이제는 전통문화의 현장으로 몰리고 있는 것이다. 문화관광의 현장이 바로 문화유산이 풍부한 전통문화의 고장이다. 우리전북의 경우는 관광을 구체적으로 구상하여 계획되고 시행한 것이 15년이 지났지만 대체적으로 몇 번의 변경된 계획들이 기본 틀에서는 크게 벗어나질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시 말해서 근본적으로 접근하는 전략 구상에서 변화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문화관광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관광산업에 대한 기본적인 철학의 바탕위에서 정책수립이 이루어져야하며, 또한 지역의 전통문화에 대한 충분한 지식기반 확충위에서 새로운 전략의 관광개발을 미래 지향적으로 구성해야 된다. 다음으로는 문화유산의 관광자원화라는 것이 일시적인 관광 상품을 가공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관광자원으로서 지속 가능하게 만들어 문화관광의 부가가치를 높여야 한다. 또한 관광상품 가운데서 특히 문화상품이 되게 하려면 예사 상품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거나 문화적 기능을 띠게 만들어야 한다. 이러한 일들은 문화유산의 관광자원화와 이벤트화라는 점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을 이루어 내기 위해서는 문화관광이 문화산업이라는 안목에서 새롭게 추진되어야한다. 다시 말하면 문화산업의 범주에 들어가는 출판, 음반, 게임, 영화, 방송, 기타(사진, 디자인, 광고, 공예품, 한복, 한지, 음식, 박물관 등) 모두를 전북의 문화관광이라는 틀 속에서 협력하고 이해하는 관광계획이 수립되어야 한다. /나종우(원광대 교수)
남미작가 파울로 코엘료가 이 십년 전에 썼던 연금술사가 장기간 베스트셀러에 올라있다. 참 대단한 작가다. 첨단과학 시대에 쌩뚱맞게도 연금술 이야기로 돈을 벌다니 게다가 어린왕자에 버금가는 몽환적이고 비현실적 언어로 말이다. 하지만 연금술사를 손에 들면 책에 집중하는 시간보다 내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훨씬 많아짐을 느낀다. 그런가? 이것마저도 신비로운 연금술이었던가?연금술은 고대로부터 납이나 구리 같은 천한 금속을 금과 같은 귀금속으로 변환시키고자하는 인간들의 열망을 반영해왔다. 시대마다 방법은 다양했지만, 내재된 인간의 욕망은 연금술을 발전시키는 변함없는 힘이 되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아무도 성공한 적 없는 비과학적인 금 만들기가 오히려 과학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어왔고,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사람들의 꿈이 되어주고 있다.코엘료는 연금술사를 통해 삶의 지혜를 말하고 있다. 우리들이 평생을 찾아 헤매는 황금은 바로 우리 삶 가장 가까운 곳에 있고, 위대한 연금술사는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일수 있다는 가정을 감미롭고 그윽한 상상력으로 설명하고 있다. 연금술을 전혀 알지 못해도 자신의 삶 속에서 철학자의 돌을 발견하는 사람들, 그들이 진짜 연금술사임을 웅변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치르치르 남매가 찾아가는 파랑새와도 같다.영화 왕의 남자가 제작비를 훨씬 많이 들인 영화들을 단주먹에 때려눕히며 연말연시 극장가를 평정했다. 몇 번씩 봤다는 사람들이 주변에 속출한다. 무엇이 이 영화를 다시 보게 했을까? 그 사람들은 이 왕의 남자에서 무엇을 찾아낸 것일까?역사가 주는 중후함에 궁중의 암투, 동성애가 주는 성적 호기심, 신분과 계급을 뛰어넘는 호쾌한 도발, 신성한 왕궁의 비밀스런 성 등은 이 영화를 끌어가는 몇 가지 코드다. 하지만 원작에 강하게 다가왔던 왕의 동성애에 관한 표현수위를 이 작품은 인간애로 우회한 듯 보인다. 그리고 더 깊은 곳에서 질문을 한다. 삶의 방식에 대해서, 진정한 행복에 대해서영화의 마지막 장면, 눈이 먼 채 줄 위로 올라선 장생과 울먹이며 대화하는 공길. 미친 놈 또 광대가 된다고? 그러는 너는? 나야 뭐 물어보나 마나 광대지그들은 알았던 것 같다. 그리고 영화를 통해 금을 만드는 방법을 넌지시 일러준다. 세상의 어떤 부귀와 영화로도 얻을 수 없는, 하지만 아무 것도 없어도 얻을 수 있는, 영원히 변하지 않으면서도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금을 어떻게 만들 수 있고 어디에 있는 지를 알려주고 있다. 구정 연휴가 끝났다. 떠들썩한 귀향길에서 벗어나 모두가 일상으로 돌아왔다. 이제 새해를 차분히 살아갈 때다. 때로는 권태롭게 느껴지는 우리네 일상이 사실은 우리 삶의 전부다. 그러니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새해 금 많이 만들어 다들 부자 되면 좋겠다. 우리 모두 연금술사가 되어서 말이다./김정수(극작가)
며칠 후면 다시 설이다.요즘은 양력을 쇠는 집안도 있고 좀 귀찮게 여기는 이들도 있다시피, 큰 명절인 설을 맞는 예전의 마음과 모습들을 떠올린다는 것은 아무래도 객쩍은 노릇일 것이다. 흩어진 핏줄들이 큰집에 모여 차례를 지내고 덕담을 주고받는 정겨움의 이면에는 귀성으로 주어진 연휴를 공일삼아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여피족들이 점점 늘고 있다 하니 말이다. 교통난을 구실로 역귀성 하는 가족도 부쩍 눈에 띄는 걸로 봐선 명절도 이미 여러모로 시류에 점염되어 가고 있음을 굳이 역설할 순 없음이다.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그맘때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철새들처럼 삶의 어딘가에 쌀자루마냥 놓여 있던 고향을 떠올리며 잠간 생업을 놓는다. 이미 익숙해지긴 했지만, 이쯤 저쯤 막히는 길쯤은 넉넉히 돌 줄도 알며 빠듯한 가계 한 귀 나마 쪼개어 들고 찾아온다. 오래 겨웠던 그 어떤 허물도 잘름잘름 앞세울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을 포용할 만큼 모성적인 명절을 지키려는 우리네 삶의 흔적들이 서로 닮아있기 때문일 것이다.갈수록 설은 객지에 터를 잡은 사람들이기 보다 아직 거기 남아있는 이들에게서 한결 소담한 모습을 지닐지도 모른다. 섣달그믐, 헛간에 까지 구석구석 내걸던 등불은 꺼진지 이미 오랬다. 여럿이 돼지를 짜 잡고 따로 설빔을 마련하는 예는 눈동냥하기 여간하지 않게 됐지만 대목장을 받으러 가는 품이나 대문 밖까지 비질자국을 놓는 모습은 여전히 눈에 익다. 으레 그래왔듯 떡시루를 얹고 산적을 꿰는 정성이 어디 조상들만을 위한 것이겠는가. 아직은 흔한 그런 모습에 고물처럼 묻어있는 건 필경 기다림과 같은 것일 것이다. 자식형제들도 과객일 수밖에 없는 이만한 세월에 모처럼 모여 장만한 것들을 나누고 남은 건 딸려 보내기도 하는 마음이 기다리는 자의 설이다. 밤새 컴퓨터에 매달리는 아이들이야 격세지탄이라 치고, 타분한 윷가락 대신 화투장을 두드린들 뭐 어떤가. 모든 것이 바랜다하더라도 기다림이 남아있는 한 마당 쓰는 소리가 들리고 까치는 날아와 울 것이다.꼭이 그렇게 받은 날이 아니어도 가끔은 일부러 시간을 훔치고 싶은 곳들도 있다.일전에 정읍 어딘가에 있는 산외라는 곳엘 간 적이 있다. 높고 낮은 산들을 비집은 길, 한꺼번에 내린 눈을 치우기엔 햇발이 좀 짧은 산길 깊은 곳에 엎딘 여느 마을이었다. 입소문에 의하면 질 좋은 한우고기를 싼 값에 떼 주고 즉석에서 요리도 해주는 곳이었는데 벽지임에도 찾는 이들이 의외였다. 집어보니 그만한 육질은 도심에서도 얼마든지 씹을 수 있는 것이어서 가격논리 만으로 그 곳까지 찾아든 사람들을 돌려세우기엔 뭔가 서먹한 구석이 있었다. 살점만이 아니라 숲가에 묻은 잔설과 퀭한 산바람을 함께 집어보고 싶었거나 어릴 적 침침한 불빛을 얹혀 달아주던 동네 푸줏간을 떠올리며 길을 물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자치제가 시행된 후, 여타의 지역들이 앞 다투는 일 가운데 하나가 <축제>라 불리는 놀이문화 짓기이다. 다분히 인위적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애쓴 흔적이 엿보이기도 하는 그것들에게나마 한 순간 위안받을 수 있다는 건 다행이자 씁쓸함 일 것이다. 다만 일과성의 것이 아닌 시골장터 같은 모습으로 오래 남았으면 하는 바람, 그것은 착각일까?기다림과 돌아옴이 속속들이 버물려 맛 들리던 명절처럼 나날이 낯설어가는 우리네 기억들이 잠시나마 이물 없이 들러오고픈 그런 것들이 점점 더 그리워진다. /김유석(시인)
얼마 전 청계천에 나가 보았다. 청계천 복원에 뒤이어 광화문과 청계천은 휘황찬란한 조명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연말부터 루미나리에(luminarie: 조명으로 만드는 축제) 서울 행사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도시를 밝히는 불빛 아래서 사람들은 해맑은 모습으로 몰려다니고 사진을 찍으면서 즐거워한다. 도시의 공간을 자기표현의 욕망을 드러냈던 월드컵 이후 사람들은 공간을 주체적으로 즐기는 데 더 이상 부자연스럽지 않다.서울이라는 대도시에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공간이 탄생했다는 데 굳이 이의를 달기는 싫으나, 나에게 청계천은 하나의 단순한 이미지로만 인식되었다. 그 화려한 조형물이 전달하는 이미지는 지난 겨울 일본의 센다이 시에서 보았던 소박한 루미나리에 불빛과 내 의식 속에서 명확하게 구분되었다. 시민들이 1년 동안의 자치적인 모임을 통해 행사를 준비해서 만드는 소박함과 기업의 협찬과 서울시의 전시 행정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화려함 사이의 명확한 차이가 의식되었다. 아마도 그 차이는 행정적 효율성과 문화적 소통 원리와의 대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사실 도시는 많은 문제들로 넘쳐난다. 가판을 운영하는 사람에게는 잡지 판매가 저조해지는 것이 문제일 것이고, 방음이 잘 안 된 건물에 사는 사람은 이웃집에서 뿜어대는 소음이 괴로울 것이다. 저녁에 자기 집 앞에 쓰레기가 무단으로 버려지는 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학부모는 아이의 등굣길이 걱정일 것이다. 이처럼 지역의 도시는 풀어가야 하는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하지만 문제를 풀어가는 데서 행정적으로 효율적인 방식만을 고집하거나 이른바 전문가의 기술합리적인 방식으로는 문화적 해결에 항상 미달한다. 종종 문제는 더 확대되고 의견 차이는 시민들 사이에 심한 대립을 낳기조차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역 내에서 문제를 풀어가기 위해서는 문화적 소통의 매개자들이 있어야 한다. 이 매개자들은 도시의 구성원들이 가지는 이해관계, 의견들을 조율하면서 공공 영역의 과제로 문제를 해결해간다.이런 의미에서 지역의 문화 역량이란 문화적 소통의 매개자들이 얼마나 있느냐와 거의 같은 의미라고 나는 항상 생각하고 있다. 문화적 전통과 문화도시의 지향을 꿈꾸는 전주에서 새로운 문화적 소통의 매개자들이 많아진다면, 전주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풀어가면서 창조적인 공동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신년에 해보게 된다.△전교수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과 문화연대 문화교육센터 소장, 대통령자문 동북아시대위원회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전효관(전남대 문화전문대학원 교수)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지방화 시대가 열리고 각 지방마다 지방문화와 그 지방의 전통문화를 되살리려는 운동이 일어나면서부터 문화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또한 21세기에 접어들면서 문화의 시대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21세기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정치적인 이념이나 경제적인 여러 가지의 제약들도 무너져 세계화, 국제화라는 어떻게 보면 지구촌 공동체 같은 모습으로 변해 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독특한 자신의 문화만이 자신을 지켜 낼 수 있는 무기가 되고, 따라서 문화경쟁의 시대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문화라는 개념은 문화경쟁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단순히 삶의 질을 높이는 역할이외에 산업의 영역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문화산업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게 나올 수 있지만 문화경제학적 측면에서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문화와 예술을 소재로 상품화하여 유통하는 산업부문을 문화산업으로 보는 시각에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편이다.문제는 문화산업 중에서 가능성 있는 어느 분야를 집중 육성하는 것은 좋으나 그것이 지역실정과 맞는 것인지, 다른 지역과 경쟁력이 있는 것인지를 심도 있게 분석해야 될 것이다. 예컨대 전북의 경우 2004년을 영상수도의 원년으로 삼아 향후10년 후에는 세계적인 영상도시를 건설한다는 것이다. 계획안을 살펴보면 국 ? 내외영상산업의 동향과 정책이 설정되어 있으나 분야별 동향정도만 나와 있지, 구체적인 검토가 미흡하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다른 지역의 성공한 영상산업의 경우 성공 할 수 있었던 요인과, 전북의 성공 할 수 있는 요인은 무엇으로 보며, 어떻게 차별화 할 것이며, 무엇을 특성화 할 것인가도 분명하게 설정되어있지 않다. 물론 올해의 예산에 국가지원이 어느 정도 확보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구체적인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러한 방안들이 하드웨어라고 보기에는 너무 평이하고 소포트웨어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솔직한 견해다. 문제는 문화산업의 특성이라 할 수 있는 상품적 특성, 산업적 특성, 입지적 특성, 문화산업과 네트워킹의 검토가 정확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점과 문화산업의 기능과 역할이라 할 수 있는 고용창출, 지역개발 등에 대한 검토가 미흡하다는 점이다. 얼마 전 주한 프랑스 대사는 전통과 미래를 결합하는 능력, 바로 오늘날 유럽인에게 부족한 것이 한국에 있는 것 같다고 하였다. 과거와 현재만이 아니라 미래까지도 내다보는 안목을 지녔다는 이야기다. 전북의 영상산업으로 전북의 모습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이러한 안목이 전북의 문화산업 구상에 있는 것일까.△나교수는 문화관광부 한일문화교류정책자문위원과 전라북도문화재위원, 전북역사문화학회회장으로 활동하며, 향토사에 관심을 갖고 전북의역사와인물등 7권의 저서가 있다. /나종우(원광대 교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같은 영화가 달리 보이는 경우는 종종 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은 분명 서른 번 이상 봤지만, 신기하게도 처음 본 듯한 장면들이 아직도 있어 깜짝 놀라곤 한다. 기억의 문제를 떠나서, 사춘기 적 보았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전쟁과 평화>, <닥터 지바고> 등의 명화도 처음엔 그저 사랑이야기였다가, 한참 후 비로소 역사와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 영화들이었다. 경우는 다르지만 그런 의미에서 <아마데우스>도 새로운 느낌을 제공했던 영화다.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짤트의 생애를 담은 이 영화는 영화화되기 이전 연극무대에서 짜릿한 감동을 주었던 작품이다. 영화에 비해 모짤트의 라이벌이었던 살리에르의 인간적 고뇌와 갈등이 훨씬 강하게 부각된 연극이었다. 젊은 시절, 국내 초연 무대를 보면서 모짤트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테리와 살리에르의 인간적 번민에 흠뻑 빠졌었던 기억이 있다. 그 나이에 볼 수 있던 만큼의 <아마데우스>였다. 돌이켜보면 차라리 행복한 시간이었다. 최근 이 <아마데우스>를 다시 보게 되었을 때, 가슴에 파고드는 느낌은 자본과 예술의 지배와 종속 관계에 관한 것들이었다. 한 예술가를 옥죄이는 현실적 문제와 더불어 그를 둘러싼 암투가 죽음이라는 그림자로 이미지화되어 다가왔다. 중년이 되어 느끼는 단상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씁쓸하다.갈수록 대형화 되어가는 무대와 현대적 메카니즘이 필수적인 공연 형태에서 원론적이고 기초적인 예술관은 더 이상 설자리가 없어져 가고 있다. 예술이 그 생산을 자본에 기대는 것조차 부정할 수는 없지만, 자본에 의해 철저히 제어되는 무대예술 시스템 속에서는 투자되는 비용이 예술의 질을 결정하는 중대한 요소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무대 주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돈대로 나온다는 자조적 넉두리는 한 예술가가 자기의 예술 세계를 웅변하기에는 막강한 자본의 기획력 앞에 얼마나 무기력해질 수 있는가를 우회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무대 예술가들도 사람이다. 생존해야 무언가를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 같은 요인에 의해 좌절하고, 나아가 절대적 맹종으로 기우는 것만은 반대하고 싶다. 예술이 사람에 의해 생산되고 사람을 위해 기능한다는 사실, 그리고 이를 통해 서로가 행복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라 믿는다면, 예술의 존재 이유와 당위성이 뒤바뀐 상황을 바로 잡을 노력도 가능하고 또 필요하리라 믿기 때문이다. 지난 해, 중남미 국가 순회공연 때였다. 명색이 국립극장인데도 각종 장비는 형편이 없었다. 백 년 이상씩 된 오페라극장에는 사람의 손에 의해 무대세트가 오르내려야하는 불편함과 불안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불편함을 여유있게 받아들이는 그들을 보면서, 그 불편함이 그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불편함을 불행하다고 생각한 것은 오히려 우리였다. 그렇다. 넘치는 것이 모자라는 것보다 낫다는 말을 아직은 인정하고 싶지 않다. /김정수(극작가)
가뜩이나 시를 읽지 않는 세상, 그걸 노래로라도 만들어서 함께 부르자고 하는 데 더 할 말이 있겠는가마는······한 개그맨이 열 몇 번째 결혼기념일을 맞은 부부한테 각각 똑같은 질문 몇 가지를 던지더니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는다. “결혼한 날짜도 똑같고, 함께 살아온 세월도 똑같고, 집 주소도 똑같고, 아이들 이름도 똑같은 걸 보니 두 분이야말로 천생연분이네요.” 억지스럽긴 해도 그런대로 개그 한 토막은 된다 싶었다. 시(詩)와 음악도 그와 비슷한 사이지 싶다. 리듬이 바탕을 이룬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아니, 이 둘은 애시당초 혼인하듯 함께 출발했다는 게 옳다. 우리 문학사를 보면 오늘날의 시는 시가(詩歌) 양식으로 애창되었다. 향가가 그랬고, 시조 또한 그랬다. 이따금 듣는 시조창(時調唱)은 맛깔스러운 구석이 있다. 널리 애창되는 우리 가곡(歌曲)들 또한 시와 음악의 ‘천생연분’ 같은 결합으로 생겨났다. 내가 좋아하는 우리 가곡 <동심초>의 가사는 중국 당나라의 설도라는 여류시인이 지은 한시(漢詩)에서 빌려온 것이라고 하는데, 시의 정서와 곡조가 참으로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들을 때마다 애잔한 감흥에 젖게 한다. 정지용의 <향수>는 오랜 세월의 억류기간을 거친 뒤 대중가요의 가사로 거듭나서 일반인에 널리 알려졌다. 고향을 그리는 시인의 아련한 심사가 노래의 전편에 아름다운 선율로 녹아 있어서 이 또한 더할 나위없다.이렇듯 한 편의 시 작품과 음악의 조화로운 만남은 잘 맺어진 부부처럼 보기도 듣기도 부르기도 좋다. 그런데 다 그런 것만은 아니어서 그게 문제다. 시와 음악이 한 집안 태생인 건 분명해 보이지만, 하나로 묶여 있으면서도 서로를 등지고 각각 반대 방향을 바라보고 있으니 이걸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하루가 멀다하고 삐걱대는 부부 사이 같다고나 할까. 과거와 달리 시는 이제 더 이상 노래로 존재하지 않는다. 활자화되어 읽히고, 그런 읽음을 통해 독자 저마다의 독특한 감흥으로 되살아나는 것이 바로 시 양식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한 편의 시가 만들어내는 감흥은 그것을 찬찬이 읽은 독자의 수와 비례한다. 시는 오로지 읽는 이의 자유로운 정서와 만났을 때 진가를 발휘한다. 그뿐이다. 가미(加味)도 제약도 필요하지 않으며, 그것이 가해져서도 안 된다. 그런데 이따금 시와 음악을 한 곳에 억지로 묶어놓자고 드니 그게 문제다. 서로 죽고 못 살아서 묶어주어도 문제거늘, 하물며 정략결혼시키듯 둘의 성격이나 취향까지 깡그리 무시하고 칭칭 동여매놓으니 영락없는 개발의 편자 꼴이다. 곡을 붙이다 보니 정서는 하나로 제한되고, 결국 그 시는 더 많은 상상력을 자아낼 수 없는, 단지 어설픈 노래 한 곡의 노랫말로 전락해서 억울하게도 꽃다운 나이에 요절해버리고 마는 꼴이다. 기왕에 시를 가져다 곡을 붙여서 노래를 만들 거라면 그 시의 정서를 제대로 살려냈으면 좋겠는데 그게 쉽지 않은 모양이다. 시낭송이라는 것도 가끔 듣다 보면 이따금 소름이 돋는 경우가 있다. 감흥 때문이 아니라 저게 아닌데 싶어서다. 그건 필경 낭송자의 감정 과잉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겨레 칠천오백만 국민시인인 소월의 <진달래꽃>에 붙여진 곡은 부조화의 결정판이라 할 만하다. 로큰 롤 밴드 반주에 곁들여진 여가수의 째질 듯한 음색은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시가 좋아서 그걸 가져다 노래로 만들라치면 그 시가 갖고 있는 보편적 정서에 대해서 한 번쯤 깊이 생각해 보았으면 정말 좋겠다. 그게 자신 없으면 차라리 시집 속에 그대로 두는지. 화단에 피어 있는 장미꽃이 하도 아름다워서 그걸 곁에 두고 보자고 꺾어서 방안에 들여놓으면 며칠 못 가 시들어 버린다. 장미꽃이야 또 피우면 된다고 하지만, 밤을 꼬박 새우며 피어난 그 꽃을 제대로 만날 수 없게 되어버린 더 많은 이들의 아쉬움은 어떡하라고. 가뜩이나 시를 읽지 않는 세상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걸 노래로라도 만들어서 함께 부르자고 하는 데 더 할 말이 있겠는가마는, 그래도 이건 아니지 싶다. 물론, 시인도 아닌 것이, 작곡이 뭔지도 모르는 것이, 마구 풀어낸 생각의 일단이긴 하지만 말이다.
우리는 서로서로 행복하게 잘 살라고 덕담을 해 준다. 가끔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고민하지만 쉬운 것 같으면서도 정의 내리기가 쉽지 않다. 학식이 높거나 명예가 있거나 고매한 인품을 가진 사람이 뛰어나 보인다. 도덕 교과서에서 배웠던 든 사람, 난 사람, 된 사람이 떠오른다. 어떤 사람이 잘 사는 것으로 보이는지 살아가는 모습을 살펴보기도 한다. 언제부턴가 이웃이나 친구가 잘 산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돈을 많이 가지고 있구나.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물론 돈이 많으면 사람 도리를 하며 살아야할 때 편리하다. 좋아하는 일을 부담 없이 하며 여유 있게 살 수 있다. 살아갈수록 돈의 위력을 크게 느끼며 돈이 없어서 좌절하는 사람도 늘어간다. 아이들에게 꿈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부자가 되고 싶다는 대답을 종종 한다. 부자가 되기까지의 과정이나 이후의 구체적인 삶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못한다. 돈이 주는 달콤한 것만 기억하고 상상한다. 아이들도 돈의 마력을 눈치 채고 있다. 그런데 돈이 삶의 목적이라 생각하며 자라는 것이 문제이다. 돈으로 할 수 없는 것을 같이 찾아보며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지 않기 위해 정신 무장을 한다.우리는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줍니다 따위의 광고가 거리낌 없이 나오는 가치관이 흐트러진 세상 속에 산다. 성인들이 머리 둘 곳 없이 살다 갔어도 그 인격이 보잘 것 없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힘들게 살기를 원하지 않고 그럴 용기도 없기 때문에 쉽고 편안한 삶을 택하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 진다. 그리고 그 말처럼 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쟁취해야 된다는 최면에 걸리기도 한다. 어쨌든 돈이 많은 것과 잘 산다는 것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건 분명하다. 돈이 많아도 잘 살고 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여름, 숨 막히게 더운 날 엘리베이터 수리하던 젊은이를 보았다. 기름이 묻은 작업복을 입고 땀 흘리며 일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민망하여 얼른 돌아섰지만 등 뒤에서 들리는 젊은이가 부르는 콧노래 때문에 마음이 놓이고 기분이 좋아졌다. 힘든 일을 기피한다지만 밝은 마음으로 자신의 일을 하는 그는 참 아름다웠다. 이른 새벽에 딸그락거리는 소리가 나서 밖을 보면 채 걷히지 않은 어둠 속에서 쓰레기를 치우는 손을 볼 수 있다. 폭우가 쏟아져도 눈이 쌓여도 쉬지 않는다. 주위를 둘러보면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는 사람이 많이 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이웃에게 사람의 정을 나눠주며 사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도 있다. 물질보다 정신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사는 이들이 있다. 잘 산다는 것이 어떻게 사는 것인지 아직도 모른다. 그렇지만 한 해가 또 기우는 이 때,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낸 사람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는 것도 잘 사는 것이라 확신하는 이들이 많아지기를 꿈꾼다. 사람만이 희망이기 때문에. /한경선(글짓기 논술지도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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