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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아침을 여는 시] 장항선-백연숙

수원역에서 아이와 기차 타고 보령 가는 날 저기, 저것 좀 볼래? 학교와 학원밖에 모르는 아이에게 나는 하늘과 맞닿은 지평선을 보여 주었다 학교 밖의 교실을, 교실보다 더 광활한 교과서를! 내가 아직 작은 아이였을 때, 지금의 전주시청 자리에 있던 옛 전주역에서 군산행 비둘기호 열차를 탔다. 덜컹거리는 기차를 타고 끝도 없이 펼쳐진 만경들을 지나, 기적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리던 만경강 철교를 건너면 구이리역이 나온다. 호남선과 전라선이 만나는 곳, 사투리가 싱싱하게 쏟아졌다. 군산행 기차에는 생선을 팔고 돌아가는 아줌마들의 고무 다라이(함지)에서 풍겨오는 비린내도 함께 타고 있었다. 장항은 처음 가보는 길이라 우리는 자주 길을 물었고, 누구나 친절하게 가르쳐주었다. 때로는 한참 말동무가 되기도 했다. 그때 나는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이며 장엄하게 지는 노을을 보았다. 장항으로 가는 길은 그 자체로 광활한 한 권의 교과서였다. 어느새 다시 5월이다. 오월은 여전히 푸르구나! “학교와 학원밖에 모르는” 아이들에게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과 지평선을 보여주고 싶다. 내게 살아갈 힘이 되어 주던 그 싱싱한 비린내의 기억을 나누어 주고 싶다./ 박태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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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5.03 18:41

[새아침을 여는 시] 오줌의 색 - 이현승

아픈 사람을 빨리 알아보는 건 아픈 사람,​ 호되게 아파본 사람이다. 한 사나흘 누웠다가 일어나니 세상의 반은 아픈 사람, 안 아픈 사람이 없다. 정작 아픈 사람은 한 손으로 링거 들고 다른 손으로는 바지춤을 잡고 절뚝절뚝 화장실로 발을 끄는데 화장실 앞 복도엔 다녀온 건지 기다리는 건지 그 사람도 눈꺼풀이 무겁다. 방금 누고 온 오줌과 색이 똑같은 샛노란 링거액들은 대롱대롱 흔들리고 통증과 피로의 색이 저렇듯 누렇겠지 싶은데​ 몽롱한 눈으로 링거병을 보고 있자니 위로받아야 할 사람이 위로도 잘한다는 생각.​ 링거병이 따뜻하게도 보이는 것 같다. SNS에는 화려함이 가득하지만, 주변에 아픈 사람이 생기면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 찬 듯 느껴집니다. ​환자의 고통을 나타내는 소변과 치유를 위한 링거액이 같은 노란빛인 것처럼, 시인은 통증과 치유가 결국 하나임을 깨닫습니다.​고통을 겪어본 사람만이 타인의 아픔을 먼저 감각하니까요. 병든 어머니를 돌보는 후배를 만났을 때, 우리는 말없이 서로의 고단함을 읽어냈습니다. (저도 아픈 가족이 있거든요.) 위로가 필요한 상황에서도 저를 먼저 걱정하는 후배를 보며, 상처받은 이들의 위로가 마치 따뜻한 ‘링거병’처럼 위태해 보이는 세상을 그나마 지탱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변에 아픈 이들이 많아 저도 마음이 아픕니다. / 박태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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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1.25 18:27

[새 아침을 여는 시] 아름다운 이치-박남준

뒤뜰에 창을 냈다 사과나무 묘목은 언제 몸을 열까 궁금함과 기다림 사이 그리움이 움튼다 여전하다 소식 없다 꿈쩍없더니 비비비 한 사흘 비 갠 뜰에 내려 두리번거린다 딱새다 통 통 통 발자국을 찍는다 휘이청 기다리는 먹이를 물고 사과나무에 앉아 망을 보다 푸릉 떠난 가지 오오래 흔들린다 흔들 흐은 들들들 손 흔든다 산다는 것 서로의 다리가 되어 건너는 것이구나 그리하여 어린 사과나무의 긴 잠이 깨었는가 꼬물꼬물 꼼지락거리며 눈곱만 한 이파리를 내미네 한 잎의 초록도 사랑이 깃든 후에야 싹을 틔우는 저 아름다운 이치라니 흔들리는 것의 이쪽과 저쪽 사이에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담고 있을까? 사과나무 가지와 딱새, 그리 별것도 아닌 것들의 만남과 헤어짐으로 인해 초록이 돋고, 우주의 한 순간도 열린다. 문득,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던 것들,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던 것들이 하찮아진다. 그것들이 얼마나 쉽게 사라지며 소멸했는지를 생각한다. 그리고 누군가의 눈길 하나로 내 미소가 더욱 깊어지던 순간을 생각한다. 나를 스쳐 간, 내가 스쳐 온 인연들을 가만히 꺼내본다. 실은 이런 것들이 지금까지 나를 키웠고 앞으로도 나를 보듬어주리라. 그것이 꼭 사랑이 아니어도 될지 모른다. / 경종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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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1.18 17:44

[새아침을 여는 시] 별 - 이병초

전북일보는 올해부터 본보 신춘문예 당선자 모임인 ‘문우회’와 함께 시인들의 안목이 담긴 시편들을 정기 연재합니다. 문신‧경종호‧박태건‧김유석 시인이 소개하는 시편을 통해 일상 속에서 문학을 더 가깝게 만나고, 시가 주는 위로와 활력을 나누고자 합니다. ‘새아침을 여는 시’는 매주 월요일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시냇물 속에 누가 별빛 한 점 내걸었다 바람이 닦아 놨을 잔물결 소리 만지작거리며 별은 반짝반짝 빛난다 시냇물은 오래된 기억일수록 더 맑게 닦아 놓는다 지푸라기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가 또옥똑 떨어지는 짚시랑물을 손바닥에 받아내던 가시내 눈알 속에도 저렇게 별이 반짝였다 뒷머리 갈래 내어 참새 꽁지같이 묶어서 목선이 더 가늘어진 별 시냇물 속 깊숙한 데서 쌀알처럼 빛난다 새해가 되면 마음에 새기는 일이 몇 가지 있다. 올해는 자주 별 올려다보기를 정했다. 별 본 지 오래이기도 하지만, 사는 일이 고단해서였을까? 그간 고개 숙이는 일이 잦았다. 게다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우러르는 일도 드물어졌다. 아무리 허름한 사람이라도 우러르는 마음만 있으면 누구보다 맑게 빛나는 별빛 같을 텐데. 그런 마음으로 이 시를 읽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된다. 별은 스스로 빛나기 전에 우러러보는 사람의 눈빛을 닮아 반짝거린다는 걸. 올 한해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별빛 하나 내거는 마음으로 누군가를 우러르는 날들 많아졌으면 좋겠다. /문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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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1.11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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