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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붓을 보았다 족제비도 산토끼도 아닌 물가 움막에 사는 갈대의 머리털로 만든 거였다 물이랑 사이 난독의 문장이 올라오곤 했다 년도가 불분명한 묵은 서체였다 오랜 기억 속 필담을 나눈 적도 있는 듯했다 목책 바깥 시큰둥하니 내가 있는 쪽으로 긴 모가지를 뻗어 조탁의 언어들 넘실댔다 바람이 책장을 넘기며 빠르게 읽어갔다 먹이 마르기 전 필법을 훔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갈대의 머리털로 만든’ 붓은 누구에겐가 보낼 시를 허공에 썼으리라.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체로 나눈 ‘필담’은 오래오래 견디어 온 세상 이야기였을 것. 천변을 거닐면서 책장을 넘기지 않아도 읽을 수 있는 마법의 붓이 움막에서 산다. 날개 달린 편지가 가슴 속으로 날아들기도 한다. 어쩌다 감동을 주는 시 한 구절을 만나면 언어의 ‘조탁’도 하는 ‘오래된 붓’에 마음을 빼앗긴다. 화자의 산책은 행여 ‘필법을 훔쳐야겠다’라는 욕심이 발동하지 않을까./이소애 시인
거울 속에서 여기저기 피어난 꽃으로 어머니를 보네 그 꽃이 피었다며 설워하시던 어머니의 가슴을 가만히 더듬네 당신 홀로 애만 태우고 사시다가 문득 강물을 보셨지 싶네 봄날 목련 방긋하여 설렘으로 나이 잊더니 오늘 어머니 무릎에 누웠네 △ 어머니가 설워하시던 꽃은 검버섯 꽃이다. 이젠 거울 속에서만 생각으로 피어나는 검은 꽃, 화자는 울컥 그리움이 솟아 어머니 젖가슴을 더듬는다. 빈손이다. 어릴 적 어머니 품속으로 얼굴을 파묻고 어머니 냄새에 젖어 본 그때가 검버섯으로 피어난다. 양지바른 마루에서 어머니 무릎에 누워서 귓밥을 살살 긁어내던 귀지개가 시를 엮었다. 아들을 예뻐했기에 목련꽃처럼 바라만 보아도 행복했겠다. 애틋한 기억이 눈물을 강물처럼 흐르게 한다. 시인은 어머니 나이가 되어서야 검버섯 꽃의 꽃말을 터득한다./ 이소애 시인
황태는 설악에서 자라는 나무다 미시령 넘어가는 길 인제군 용대리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황태 가파른 겨울바람에 비늘 다 떨어뜨리고 가시만 남은 나무들 한 놈 툭, 끊어다가 한 솥 가득 끓여내고 싶다 간밤 술에 얼얼한 뱃속 바람이 불 때마다 휘청대는 황태의 손가락이 쓰린 속을 찌른다 얼음계곡으로 줄지어 몸을 말리는 저것들, 몸이 더워지면 주저 없이 속초 바다에 뛰어들 기세다 말을 버린 것들은 혀부터 단단해진다 나도 저 나무껍질 같은 지느러미 하나 갖고 싶어서 산의 정수리를 쓸어내리는 겨울바람에 눈을 부릅뜬다 △ 인제군 용대리 황태 덕장에는 덕걸이 작업을 하고 있을 주민들의 한파가 휘몰아친다. 황금빛 황태로 변신하려면 눈과 바람으로 혹독한 세상과 싸워야 하는 참혹한 시간을 만난다. ‘가시만 남은’ 황태로 새로운 탄생이 몸값을 올리는 것일 터. 누군가에게 ‘얼음계곡으로 줄지어 몸을’ 말렸던 생의 부대낌이 당신의 즐거움이다. ‘술에 얼얼한 뱃속’의 쓰린 속을 달래는 일이 미시령을 넘어간다. 덕걸이의 추위를 골똘하게 쏟아내는 기쁨이 있다. 황태라는 이름은 겨울이 기억할 몫이다./ 이소애 시인
감나무 가지 끝에 작은 등 하나 허공을 환하게 밝히고 있다 한 생애가 천둥과 사나운 비바람에 맞서 떫은 맛 다 우려내고 묵묵히 소신공양 기다리며 그 꿈 꽉 붙잡고 있는 가난한 저 고집固執 하나 △ ‘감나무 가지 끝에/ 작은 등’은 붉게 익은 감이다. 자기 몸을 배고픈 까치를 위해 아슬아슬하게 비바람을 견디며 생을 ‘꽉 붙잡고’ 있다. 폭설에도 까닥하지 않는다. ‘묵묵히’ 매달린 홍시를 보면 차라리 어둠을 밝히는 전등 불빛 같다. 골목길 오가는 가난한 사람에게 무거운 발걸음을 밝혀주는 고마운 등이면 어쩌랴. 감나무는 홍시를 위해 연약한 가지가 부러지지 않도록 바람길을 바꾸기도 한다. 소신공양임을 눈치챈 까치가 자비를 베푼다. 정다운 두 마리의 새가 홍시를 서로 먹여주며 ‘허공을/ 환하게 밝히고 있다’ /이소애 시인
하얗게 비추는 숭고함은 잎보다 서둘렀다 먼저 있을 생각에 미움의 껍질들 없어진 진실 마음 서둘러 하늘에 담는다 후드둑 떨어질까 봐 북쪽 바람으로 귀를 기울이는 여인의 고운 자태는 잠깐의 애달픔이 웃프구나 △ 숭고하게 피어난 봄날의 목련잎은 그 숭고함을 전하고 싶은 마음에 잎보다 먼저 피어난다. 그러나 세상이 어디 그렇게 만만하던가? 벼르고 별러서 피워낸 숭고함이 “후드둑 떨어질까 봐” 염려스럽다. 봄날의 목련이 “미움의 껍질들/ 없어진 진실 마음”을 “서둘러 하늘에 담”는 이유다. 어디 목련뿐이랴! 가을을 단풍도 그렇고 세상을 등지는 모든 것도 그렇다. 숭고함을 위해서 산 생이 “잠깐의 애달픔”이고 “웃픈” 삶일지언정 삼릐 숭고함 한 자락을 하늘에 담는 것이 존재 이유일 것이다./ 김제김영
소꿉친구였던 배산은 소풍 와서 보물찾기 한 이유로 내 발을 붙들었나! 인생이란 여행에서 아직도 뒷동산을 오르내리게 내 생을 쥐락펴락하고 있다 백제왕도였던 어울마당 단오 풍악을 울려 주고 출복 받은 해맞이까지 이곳에다 차린다 하늘 아래 이만한 명소가 또 어디 있으랴 내가 찾고 싶은 발길 요람이 나를 불렀던가! 여정의 동행자로 내가 그의 손을 붙들었던가! 내게 주어진 산지에서 배산 정기 가슴 깊이 들이마시며 숨 쉬고 산 것이 고마워 백제의 깃발 흔들어 대는 사리장엄 같은 보화 나도 한번 이 뒷동산에서 찾고 싶다.
손으로는 열 수 없는 문 안으로 잠긴 문도 한 숨결로 여는 바람은 어디에서 불어오는 것일까 집집마다 문밖을 나서면 철모를 쓰고, 첨단 번호표를 단 수문장이 밤낮으로 철벽을 두르는데 숯덩이 된 가마솥 심술보 들끓는 한중막 문들은 강철 빗장 가로질러 성벽이 따로 없으리 그리다 미워하다 붉어진 가슴은 밀치고 당기는 고무줄 끝 뒤돌아 서 가슴 비우니, 그들은 한낱 티끌 저 작은 볼우물에 피어나는 맑음 한 송이 그 빛 한줄기에 성벽도 철벽도 한 숨결에 다 무너져 내리고야 만다 △ 미소처럼 큰 무기는 없다. 정말 그렇다. 상대방의 미소는 “철벽”같은 사람도, “가마솥 심술보” 같은 사람도, “들끓는 한증막” 같은 사람도 일시에 무장 해제시킨다. 미소는 “안으로 잠”겨 “손으로는 열 수 없”다. “작은 볼우물에 피어나는” 미소를 보려면 우선“가슴 비우”는 일이 먼저다. 비우고 마주하는 미소는 “성벽”도 “철벽”도 “한 숨결에” 무너뜨리는 것이다. 오늘은 서운했던 사람을 찾아 마음 비우고 미소로 화해해야겠다. <김제김영>
변기 막힐 때 뚫어펑 세제 넣고 기다리면 시원하게 뚫린다 배탈 났을 때 소화제 한 알 먹고 기다리면 금방 낫는다 마음이 답답할 때 오징어 듬뿍 넣은 엄마표 김치전 한 장 먹으면 스르르 풀린다 △ 모든 병에는 반드시 병을 고치는 약이 있다. 심지어 옛날엔 ‘공갈 염소똥’도 ‘배 아플 때 먹는 약’이라는 노래도 있었다. 막히고 답답한 것들은 뚫어주어야 한다. 상황에 따라 혹은 증세에 따라 적절한 약 내지는 치료요법이 필요하다. 그러나 세상에는 약으로 치료하지 못하는 병증들도 있다. 사람이나 자연이 치료할 수 있는 병증이기 때문이다. 미열엔 이마에 서늘하게 올려주는 ‘엄마 손’이고 배가 아플 땐 배를 살살 쓸어내려 주는 ‘엄마 손’이 ‘약손’이다. 그 중엔 “마음이 답답”한 병증은 “오징어 듬뿍 넣은/엄마표 김치전”이다. 식약동원, 음식과 약의 근원이 같다는 말 생각난다. <김제김영>
씨를 뿌리는 것은 양이요 씨를 받는 것은 음이지만 양, 음의 조화로 생명이 존재하듯 음은 양을 위해 섬김의 대상으로 음덕을 쌓으며 희생함으로써 헌신의 깨달음 속 지혜 뿌리 깊은 나무 되어 꽃이 피고 열매 맺듯 음의 기운이 서서히 승천할… △ 세상 모든 것은 음과 양의 조화로 이루어졌다. 사람의 일도 마찬가지지만, 잘 살펴보면 식물과 동물 그리고 무생물까지도 음과 양이 함께여야 비로소 완성된다. 한 사람의 말에도 음과 양이 함께 들어있고, 같은 행동도 음과 양의 경우가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시인이 쓰는 시 속의 단어도 음과 양이 어울려 들어있다. 더는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는 말을 인간 자체의 높낮이나 귀천으로 해석하지 마라. 남자 속에도 음과 양이 있고, 하늘에도 음과 양이 있고, 세상에는 음이나 양 하나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없다. 심지어 하나의 나사 속에도 음과 양이 동시에 들어있다. 음과 양은 생존이나 번식을 위해 상보하고 상극하는 시스템일 뿐이다. /김제김영>
해 뜨듯 아침에 당신이 뜬다 초록같이 그리움 물결치는 온전한 갈망 사랑 그 후 내가 아니라 내 안에 당신이 산다. 사랑은 아침에 뜨는 태양이고, 사랑은 온종일 물결치는 초록같은 그리움이었다. 사랑하는 일이 하루를 만들고 사랑하는 일이 화자의 삶을 끌고 다니는 매혹적인 신호등이다. ‘사랑 그 후’ 화자는 내가 나를 행동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당신이’ 살고 있음을 안다. 사랑은 나를 지배하고 사랑은 나의 기쁨이며 온전한 내가 거울 속 나였다. 그 사랑의 뜨거움을 아는가. 사랑은 사랑을 해 본 사람만이 느끼는 행복이다./ 이소애 시인
감을수록 더 아른거리는 법 닿을 듯 닿을 듯 손닿지 않는 등 뒤가 더욱, 안타까운 법 잎 가버린 뒤 번쩍 피는 일주문 밖 상사화 감았던 눈 다시 뜨는 것이다 그만 잊자, 부릅뜨는 것이다 떨군 고개 들어 목젖에 걸린 낮달을 삼키는 돌탑 뒤 저 사미니 눈물 감추는 게 아니다 어룽어룽 자꾸만 따라붙는 그림자 산문 밖으로 밀어내는 거다 눈 감으면 다시 또렷해 위봉사 목어는 스스로 제 눈꺼풀 잘라버렸다 △ 슬프다. 괴롭다. ‘돌탑 뒤 저 사미니처럼’ 삶의 갈등을 경험한 시인은 처절한 외로움을 알 것이다. ‘일주문 밖 상사화’가 ‘목어’를 두드린다. 목어는 ‘사미니’의 흔들리는 마음에 혼침을 경책하는 것일까? 속을 비운 목어가 낮달을 삼킬 때 물고기가 바람을 붙잡고 소리를 낼 것이다. 사미니의 얼굴에서 눈물이 소리를 내면 목어는 막대기로 가슴을 때린다지요. 상사화 꽃잎처럼 속세와의 이별은 고요한 기쁨으로 다가올 것이다./ 이소애 시인
시냇물 속에 누가 별빛 한 점 내걸었다 바람이 닦아 놨을 잔물결 소리 만지작거리며 별은 반짝반짝 빛난다 시냇물은 오래된 기억일수록 더 맑게 닦아 놓는다 지푸라기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가 또옥똑 떨어지는 짚시랑물을 손바닥에 받아내던 가시내 눈알 속에도 저렇게 별이 반짝였다 뒷머리 갈래 내어 참새 꽁지같이 묶어서 목선이 더 가늘어진 별 시냇물 속 깊숙한 데서 쌀알처럼 빛난다 △ ‘짚시랑물’에서 갑자기 떠오르는 ‘뒷머리 갈래 내어 참새 꽁지같이 묶’었던 친구와 담장너머 남학생을 훔쳐보는 재미로 널뛰던 생각이 손등의 잔주름처럼 잡힌다. 비가 오면 대야, 옴박지, 수대를 처마 밑에 놓고 낙숫물 받아서 빨래를 했던 어린 시절. 반짝이는 별이 너무 보고 싶어서 은하수를 건너는 고난과 시련으로 옛 동무를 불러내는 시다. ‘시냇물은 오래된 기억일수록/맑게 닦아 놓는다’고 하는데 물결만 보이고 기억이 가슴에 ‘또옥똑’ 떨어진다./ 이소애 시인
세 손가락으로 너를 세우면 내 뜻 흘러들어 곧게 네 까만 몸짓이 된다 생각하므로 글이 되는 너의 행적은 인류의 표의와 표음 검은 심으로 붉은 사랑도 그려낸다 인류가 읊는 모든 경은 우주란 백지에 달려나간 너의 행적 신화에서 달빛까지 긴 여정을 몽당의 네 처절한 몸부림으로 가라 혀 끝 서로 닿아서 더 또렷해지는 진실 또는 사랑 △ 연필은 검은 심을 품고 있습니다. 연필이 품은 검은 심은 연필의 “몸짓”입니다. 또한 “우주라는 백지에 달려 나간” “행적”도 됩니다. 몽땅한 몸이 될 때까지 연필은 “백지”에 “신화”며 “달빛”을 “처절한 몸부림”으로 갈 것입니다. 우리가 가끔 연필심에 침을 바르는 행위는 연필의 “더 또렷해지는 진실”에 힘을 보태는 일입니다. 필통에 꽂혀있는 연필은 영락없이 무기처럼 보입니다. 연필이 칼보다 강한 이유는 연필의 이런 모습 때문일 겁니다. 제 몸 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연필은 품고 있는 심을 놓치지 않습니다./ 김제 김영
어린 시절 가장 힘들었던 것은 남원에서도 얼마를 덜컹거리며 올라야 하는 여원재, 올라서야만 겨우 닿았던 나의 집 떠나는 이에게 잠깐 기다려줄 수 없냐고 묻지 않았고 길게도 울먹이던 편지에 한 줄 답장도 안 했고 장마로 전주천이 넘실댈 때나 겨우, 그이를 길게 생각하는 우두거니가 되었다 나이 들어 영업을 접었을 때 무너지는 담장 밑에서 뽑아버려야 했던 늙은 향나무 덩달아 고향으로 보내버린 누렁이 나 시 쓰기 잘했다 미안해 미안해 쓸 수 있어서 낮아진 산능선이 너머 고향 친구 찾아가리라. △ 삶의 굴곡에서 마음을 흔드는 양심의 파토스가 깔린 아름다운 시다. 맑은 계곡물에 단픙 든 낙엽의 가난하고 슬픈 생의 물결 소리 같다. 폭풍과 폭우를 견디어 온 사시나무가 눈물로 엮은 사연이다. 참회하는 기도였다. 시를 쓰려고 기억을 더듬어 본 화자는 ‘미안해 미안해’만 방황하는 고뇌가 뇌리를 스쳐갈 뿐이다. 사랑의 색이 미안함으로 고스란히 묻어나는 시인의 고백이다./이소애 시인
무성한 미루나무에 앉았던 참새는 벌레를 많이 잡았을까, 짹짹 우는 법은 어디서 배웠을까, 한때 목청을 높인 적 있다 먹히지 않으려고 더 먹으려고 고래고래 핏대를 세우다가 나동그라진 적 있다 왜 이리 춥냐, 잎 다 떨군 미루나무가 윙윙 운다 왜 이렇게 어둡냐, 웅얼웅얼 혼잣말하며 세상이 점점 추워진다 미루나무에 앉았던 참새 어디로 갔나 핏대 세우던 나는 또 어디로 갔나 △ 겨울의 시작이다. 동물들이 땅속에 굴을 파고 숨는다는 입동이다. 김장 담글 걱정하는 주부처럼 미루나무도 성큼 추워지는 날씨에 참새 걱정하다니. 춥고, 밤은 길고, 미루나무도 인간이 견디어 내야 할 겨울의 매서운 추위를 그림처럼 그려냈다. 어울려야 산다는 생의 모습 같다. 살기 위해서 짹짹 우는 참새에게 말을 건네는 나무는 입동이 걱정을 만든다. 걱정이 나를 끌고 허공을 헤멘다. 나무의 포용력에서 인간이 본받아야 할 함께 살아가는 풍경이 보인다./ 이소애 시인
여든 할머니처럼 구부러져 있는 내 고향 8월이면 뽀얗게 분 바르고 피어나는 간지럼 나무꽃 연분홍 흐드러진 사연 구슬프다 간밤에 떨군 꽃잎마다 다홍치마 손질하고 있다 꽃등 밝히고 떠나간 것들 그리워서 대쪽 같은 우리 사랑 쳐다보고 있을지 몰라서 사랑 그 꽃, 석 달 열흘 밝혔다 누군가는 아주 차갑게 누군가는 아주 뜨겁게 피고 지는 일상에서 나는 누굴 기다리며 이 밤 꽃등 들고 있는가 어디서 왔는지 조용히 앉아 산기를 겪고 있는 그림 하나 후련하게 만나지 못한 당신과 나의 후렴구처럼 다가온다 △ 간지럼나무꽃은 배롱나무꽃이다. 시적 화자의 고향에 피는 배롱나무꽃은 “떠나간 것들 그리워서” “대쪽 같은 우리 사랑 쳐다보고 있을지 몰라서” “여든 할머니처럼 구부러”진 몸뚱이에 “뽀얗게 분 바르고” 꽃 피워낸다. “석 달 열흘” 피어나는 저 꽃을 백일홍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백일’이라는 말은 ‘끝없다’라는 말, ‘백일’이라는 말은 ‘영원하다’라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당신과 나의 후렴구”라는 말은 몇 절을 불러도 다시 돌아오는 곡조다. “배롱나무 전설”은 그래서 끝없고 영원한 기다림의 노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김제김영>
훈훈한 땀 냄새 손녀의 미소가 가벼워진 볼에 안긴다 이마에 매달린 촉촉한 땀방울 매서운 꾸지람으로 찔끔거리는 눈물도 있다 나목의 숲 깊숙이 안긴 햇살의 온기 바람은 나뭇가지를 비벼대며 그리움을 흔들고 주름을 포개 논 나이테의 종알거리는 소리 의연한 그 자리에 기운찬 숨소리 운장산 서봉에서 구봉산에 남긴 흔적 하늘과 땅의 경계를 그으며 산 새소리 부스럭거리는 생명의 고요함을 보듬고 환상의 꿈을 기억하는 모반의 산그리메 아련히 찾아오는 신선의 기운 살랑대는 내 그림자를 밟을 수 있었다 △ 열심히 달려온 나를 위로하는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 산에 오르는 일, 손녀의 미소를 보는 일, 머릿결을 씻어주는 바람, 나무가 하는 말을 듣는 일, “내 그림자를 밟”으며 하산하는 일, 산그늘에 조용히 앉아있으면“아련히 찾아오는 신선의” 느낌, 이런 것들이 쉬지 않고 달려온 나를 조용히 위로해주는 것들이다. 더는 달려가지 않아도 된다. 더는 애쓰지 않아도 충분하다. 지나온 삶의 모든 순간이 치열했으니 이젠 산그늘 아래 앉아 나무의 “나이테 종알거리는 소리”에 위로받을 시간이다. /김제김영
이끼서린 기왓골은 말씀이 없어도 숱한 세월 잉태를 하고 있는 언어들 켜켜이 쌓이고 쌓인 그 내력이 속 깊다 드높은 용마루를 마주하고 섰노니 어디서 나는지 밭은기침 호령소리 앗 뜨거, 제물에 놀라 주눅 든 듯 뒷걸음 △ 오래된 기와집을 보는 시적 자아는 “말씀이 없”는 기왓골에서 한 말씀 듣는다. 오래된 기와는 단순한 사물이 아니다. “말씀은 없어도” “어디서 나는지 밭은기침 호령소리”가 들린다. 시적 화자는 “제물에 놀라 주눅 든 듯 뒷걸음”을 놓는다. 유유자적하며 사는 산촌 생활은 자칫하면 겉멋이나 나태가 스며들 수도 있다. 아무리 잡아매도 마음의 끈은 성글어질 수도 있다. 이런 시적 화자의 마음 상태를 다잡는 도구는 가르치려는 스승도 아니고 쏟아져나오는 종교적 사설도 아니다. 동네의 고택이 용마루를 높이하고 떠받들고 있는 낡은 기와다. 때로는 말보다 침묵이 더 힘이 세다.<김제김영>
신문을 본다 '20. 3 입원하면서 끊었던 전북일보 오늘 아침 5년 만에 받아본다 캄캄하던 사회, 문화에 눈을 떴다 지역 신문은 지역 곳곳을 바라보는 눈 지역 구석구석을 흐르는 물결 모처럼 보는 눈도 생각하는 마음도 떠오르는 아침 햇살처럼 환하다. △ 음악방송을 틀어놓고 아침 신문을 펼치며 하루를 시작하는 일은 번번이 행복하다. 요즘은 거의 찾아보기 힘든 풍경이나 필자도 아침에 배달된 종이 신문을 읽는 일로 시작하는 하루를 끝까지 고집하려고 한다. 신문의 잉크 냄새만큼 아침의 뇌를 자극하는 기제가 있을까? 지역 신문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넘치지 않는다. “지역 곳곳을 바라보고", “지역 구석구석을 흐르는 물결”이다. 곰곰 생각하고 되짚어보며 신문의 활자를 읽는 일, 나를 위한 일이고 지역을 위한 일이고 인류를 위한 일이다. 병마와 싸워 이긴 김기화 시인도 아프기 전의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확신을 아침마다 전북일보를 펼쳐 들면서 날마다 새롭게 받을 것이다./ 김영 시인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
남원 모노레일 500억 참사, 시민은 분노한다
안호영 의원의 위대한 결단
태풍의 눈 ‘통합 전주시장’
완주‧전주 통합, 특례시 지정으로 완성해야
“위기의 파도 앞에서 우리는 같은 배를 탔다”
남원파크, 전·현직 시장에 구상권 행사해야
동학농민혁명 서훈, 왜 1차 봉기 참여자 배제하는가
정부는 완전통합에도 재정지원 규모 밝혀라
리셋되는 행정, 중단의 비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