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end news
가슴이 메이도록 불러도 불러봐도 대답 없는 어머니 그리움은 태산처럼 세월이 흐를수록 보고픈 어머니 소리 내어 불러보았습니다 가슴이 터지도록 내 어머니 뒷산 소나무를 지붕 삼고 밤이슬 맞으시며 가슴앓이하면서도 육 남매 닭처럼 품에 안아 길러내시는 끝내는 나팔꽃이었습니다 △ 얄브스름한 줄기 끝에 나팔꽃이 매달렸습니다. 나팔꽃의 삶은 명지바람만 불어도 휘청거렸습니다. 밤새 뒷산에 올라 “가슴앓이”를 했지만, 자식들만큼은 절대 세상 밖으로 내놓지 않았습니다. “육 남매 닭처럼 품어 안아” 따듯한 품 안에서 길러내셨습니다. “가슴이 메이도록” 그립지만, 이제는 곁에 없는 어머니를 “가슴이 터지도록” 부를 뿐입니다. 메아리조차 대답이 없어 더 먹먹하게 돌아오는 길입니다./ 김제 김영
꽃 피는 일만큼이나 가슴 떨리고 먹먹한 소리 천방지축 봄바람 햇볕은 누이처럼 따사로운데 숲 속의 앳된 연두 잎 고요를 밟으며 산불처럼 번진다. 새롭다는 것은 누군가를 맞이하는 일 상처 딱지를 떼는 일 봄날의 오후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눈시울 따끔거리고 북방의 황사바람 소용돌이치는데 심장을 다독이는 저음의 봄비소리 꽃잎 가슴을 저민다. △ 봄이 되면 숲속의 연두가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온다. 뒤이어 “가슴 떨리고 먹먹한 소리”로 꽃이 피어난다. ‘피어난다’는 말은 ‘터진다’는 말, ‘터진다’는 말은 ‘쏟아낸다’는 말, ‘쏟아낸다’는 말은 ‘다독인다’는 말, ‘다독인다’는 말은 ‘고요해진다’는 말과 서로 손을 잡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봄이 오면 “상처 딱지를 떼”고 “숲속의 앳된 연두 잎/고요를 밟으며”피어나는 것이다. “가슴 떨리고 먹먹”하게 세상이 다시 피어나는 것이다./ 김제 김영
기차 정거장 대합실에 앉아 가는 사람 쳐다보고 오는 사람 쳐다보는데 가슴으로 젖어오는 바람소리 엊그제 같은 그 옛날 점심때를 알리는 소방서 오포 소리 그립다. <중략> 하늘을 덮을 듯 키 큰 은행나무 최씨 문중 청지기가 사는 세 칸 기와집 높은 토방 감싸듯 뻗은 뿌리 멀리서 온 타관 아줌씨 기린봉 굿쟁이 무당 <중략> 앞 골목 안창으로 들어가면 혼불 소설 쓴 최명희 소설가집이고 <중략> 갓길 채전밭 옆길로 들어서면 가람 이병기 시조 시인의 집 양사재 위로 오목대 산기슭이 미끄러져 내려온다 <중략> 마주쳐 오는 누군가 고향맛을 물어보면 그냥 웃을까 △일찍이 전북의 문화예술을 유달리 사랑하셨던 시적 화자의 절절함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작품이 길어 ‘몹쓸 <중략>’이 많다. 이 코너의 지면이 한정적이어서 작가와 독자의 넓은 마음에 기댈 수밖에 없다. 꼭 찾아 읽어보시라고 인터넷 전북일보에는 전면을 탑재한다. 읽는 내내 아릿한 그리움과 애틋한 사랑은 우리를 순수의 세월로 데려갈 것이다. /김제 김영
기차 정거장 대합실에 앉아 가는 사람 쳐다보고 오는 사람 쳐다보는데 가슴으로 젖어오는 바람소리 엊그제 같은 그 옛날 점심때를 알리는 소방서 오포 소리 그립다. - 저 풍남동 은행나무 골목에요 - 지금은 한옥마을 문턱입니다 아! 저기 저 집이 나 살던 옛집인데 마당 구석에서 쑥불 타는 매캐한 연기 엄니는 거적대기 깔고 앉아 기왓장 가루로 놋그릇 닦으시고 우리는 평상에 누워 강냉이를 먹었지 하늘을 덮을 듯 키 큰 은행나무 최씨 문중 청지기가 사는 세 칸 기와집 높은 토방 감싸듯 뻗은 뿌리 멀리서 온 타관 아줌씨 기린봉 굿쟁이 무당 시루떡에 촛불을 켜고 아들 며느리의 손자 점지를 빌고 가족들의 소원성취를 빈다 앞 골목 안창으로 들어가면 혼불 소설 쓴 최명희 소설가집이고 몇 발짝 걷다보면 흙돌담 안에 정원수가 꽉 차있고 기둥만 보이는 커다란 기와집이 몇 채인가 쉬엄쉬엄 걷다보면 철대문 집 벽돌담에는 오색돌 문패 나무대문집 나무기둥에는 나무문패 양철대문집 문짝에는 나무문패가 있었지 갓길 채전밭 옆길로 들어서면 가람 이병기 시조 시인의 집 양사재 위로 오목대 산기슭이 미끄러져 내려온다 한나절 걸어온 뒷길을 돌아보고 전주천 제방 밑으로 내려가 흐르는 물 한웅큼을 떠 가슴에 안았다 남부시장 할매집에 들어가 선지국 한 뚝배기 사먹고 경종배추 묵은지 서너포기 사고 모싯잎 송편도 한무데기 사들었다 초여름 한낮은 아직 한뼘이나 남았는데 마주쳐 오는 누군가 고향맛을 물어보면 그냥 웃을까 △ 일찍이 전북의 문화예술을 유달리 사랑하셨던 시적 화자의 절절함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작품이 길어 ‘몹쓸 <중략>’이 많다. 이 코너의 지면이 한정적이어서 작가와 독자의 넓은 마음에 기댈 수밖에 없다. 꼭 찾아 읽어보시라고 인터넷 전북일보에는 전면을 탑재한다. 읽는 내내 아릿한 그리움과 애틋한 사랑은 우리를 순수의 세월로 데려갈 것이다. / 김제 김영 시인
종이컵에 믹스커피를 타 먹고 무게를 달아보니 빈 잔의 눈금은 날아간 지 이미 오래 바람 앞에 허깨비로 후들거려도 가을의 균형을 잡고 꼿꼿이 서 있다 부끄럽지 않은 당당함 둥글어 모나지 않는 겸손으로 나무의 푸른 향기까지 담아와 구겨진 투정도 참아내며 군소리 하나 없다 홀리듯 뜨거운 입맞춤에 붉은 입술 자국 묻어나 꽃이 피고 중독된 갈증의 목마름을 채워 흐릿한 혼미함도 깨워주는 재주 재활용도 못하는 일회용이라고 놀려도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순발력에 나 반했어, 한 잔의 맛 별미를 내는 한 사발이야. △ 사물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게 하는 시가 좋은 시다. 이 시를 읽고 난 후, 커피를 마신 종이컵을 물끄러미 다시 바라본다. 책상 한쪽에 찌그러진 채 “가을의 균형을 잡고” 의젓하다. 종이컵의 역할은 “꽃이 피”는 일, “목마름을 채”우는 일, “흐릿한 혼미함을 깨워주는 재주”다. 이런 재주에다가 “둥글어 모나지 않”고, “나무의 푸른 향기까지 담”은 종이컵을 새로 발견한다. 다 내주고 싸늘하게 식은 종이컵을 새삼스레 두 손으로 감싼다./김제 김영
잔잔하던 물결이 오늘 따라 출렁인다 징검다리 저 너머 억새숲은 마냥 고요로운데 한 발 내딛을 때마다 물살이 눈에 들어 어찔거린다 "아가, 물을 바라보지 말고 징검돌을 바라보거라” 어질머리 세상 휘몰이 바람 속 건널 적에도 등을 다독이던 어머니 말씀, 엉클린 마음 비다듬고 다시 내를 건너면 이제야 굽이져 흘러가는 물의 길이 보인다 징검돌에 부딪혀 물보라 일으키며 흐르던 길 흐를 수 없어 그들도 나처럼 아팠을 거라 그래 그랬을 거라. △ “이제야 굽이쳐 흘러가는 물의 길”이 보이는 순간이다. 세상일은 매양 “어질머리”가 난다. 이럴 때는 물살을 보지 말고 “징검돌”을 봐야 한다, 물살은 욕심이나 시류를 따라 요동치는 마음으로 읽힌다. “징검돌”은 확고부동한 신념 내지는 자아로 읽힌다. 때론 물의 길이 돌에 부딪혀 “흐를 수 없어”도, 시류에 흔들리는 신념 때문에 마음 아파도 “엉클린 마음 비다듬고” 다시 건너간다./ 김제 김영
사마귀가 뱀의 목덜미를 꽉 물고 시간 속으로 떠났다 꿈틀 꿈틀 온 몸을 비틀며 저항하는 뱀 꼬리를 파르르 떨면서 죄를 털어냈지만 사마귀의 시간은 집요했다 생과 사의 처절한 시간은 무심하다 △ 시인은 몇 달 전 시를 남기고 은하수로 갔다. 아직 팔팔한 시인이 그리워 시를 뒤적거리다가 섬뜩섬뜩한 「사투」가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한다. “사마귀가 뱀의 목덜미를” “꽉 물고 시간 속으로 떠났다”는 소름 끼치게 한다. 사마귀가 뱀을 물고 사투를 벌이는 장면을 상상해 본다. 화자는 시간을 밟으면서 얼마나 치가 떨릴 만큼 분하고 원통했으면 뱀을 불러냈을까. 집요하게 한을 품고 손을 불끈 쥐면서 부르르 떨었을까. 생의 고통을 시와 함께 살다가 은하수로 건너간 시인이 생각났다./ 이소애 시인
하늘에 쪽빛 구름 둥근 달 하나 땅에 제비꽃 등 굽은 노송 나도 함께 허물 벗어 던지고 하룻밤 곁에 머물고 싶다 △ '함께'는 서로 더불어 동일하게 취하는 행동이다. ‘쪽빛 구름’과 ‘둥근 달’ ‘제비꽃’ ‘노송’과 함께 어울리기 위하여 화자는 고고한 자세를 벗어던져야 함께할 수 있다. 가면을 집어 던지고 속마음을 진실하게 서로 소통하면 하늘과 땅은 '함께'가 된다. 어쩌면 택배 짐짝처럼 각각의 집 문 앞에 집어 던지면 홀로 살아가는 짐짝이다. 상대방이 무시하고 업신여겨도 너와 내가 서로 함께라면 강한 힘이 솟을 것이다. 함께 사는 공동체는 당기고 밀려도 한목소리를 낸다./이소애 시인
얼굴에 핀 주름꽃 환하다 삶을 한 잎 한 잎 접어 미수(米壽)에 이르러 겨우 피운, 빛바랜 생화 한 송이 △ 「할머니」라고 불러주기만 해도 고맙다. 얼마나 마음이 아름다우면 ‘주름꽃’이라고 했으랴. ‘빛바랜 생화’ 어떠리. 꽃대를 꺾어 버리지 않고 ‘생화’라고 바라보니 ‘주름꽃’의 한 생애가 처절하다 못해 참 고맙다. 섭섭함과 고독감으로 하루를 사는 ‘미수’의 할머니를 아름다운 언어로 시로 엮어냈느니 또 읽고 읽는다. ‘겨우 피운’ 미수의 주름꽃이다. 그냥 저절로 핀 꽃이 아니다. 아픔과 그리움을 가슴에 묻어둔 ‘한 송이’꽃이다. /이소애 시인
지 아무리 부자여도 제아무리 잘났어도 ‘너도 언젠가는 흙이겠지’ 생각하면 흑흑 대며 미워졌던 세상도 다시 위로가 됩니다. △'흙의 한마디'가 고독에 흡입되어 가는 외로운 사람에게 따뜻한 위로가 된다. 한 편의 시가 쓰라린 삶의 광장에서 헐떡거리는 심장에 온기를 불어넣는다. 어느 순간 번개처럼 뇌리를 스치는 소외감에서 초록의 빛이 보인다. 충격적인 말의 소리는 기억으로 저장된다. 평생 흙을 떠받들고 사는 농부처럼 시인은 땀방울에 남을 배려하는 사랑을 적셔본다. 질투심이 아름다운 열매로 익어갈 때까지 시를 흙으로 버무려 보면 좋은 시가 세상에 눈을 뜰 것이다./ 이소애 시인
몽돌이라 했다 몽돌해변은 돌의 수도원 통성기도가 적막으로 수렴되는 곳 모나고 날카로운 애초엔 바위였으리라 잘게 더 잘게 작게 더 작게 부피도 무게도 지니지 않은 이윽고 한 점이 될 때까지 빛을 꿈꾸는 돌이 있다 △ 혹독한 겨울 추위는 꽃몸살로 고통이 내게로 왔다. 마치 수도원의 통성기도처럼 적막을 수렴하듯 아픈 상처가 파도에 잘게 부서지도록 기도했다. ‘통성기도’는 ‘적막으로 수렴’되기까지 뾰족한 감성을 아름답게 통회하도록 한다. 바위에 부서지는 아픔이 ‘한 점이 될 때까지’ 몽돌은 처절한 고독과 아픔을 곱디고운 참회로 마음을 다듬었으리라. 미움이 빙하처럼 바다로 흘러 수도원의 적막으로 수렴될 때 가지 「꿈꾸는 돌」이 될 것이다. / 이소애 시인
간밤에 눈이 내려 온 세상이 하얗네 강아지가 걸으니 매화꽃이 피고 참새가 종종거리니 난 꽃이 피네 고양이가 걸으니 국화꽃이 피고 닭이 뒤를 쫓으니 대나무 잎이 피네 내가 걸으면 무슨 꽃이 필까 ※ 註: 推句 한시 일부 인용 △ ‘눈 덮인 들판 길을 걸어갈 때 발걸음을 함부로 어지러이 걷지 말라 오늘 내가 남긴 발자국은 훗날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라는 서산대사의 말씀이 생각난다. 어두운 밤을 지나는 동안 흰 눈은 온 세상의 어둠을 덮어버렸다. 다시 시작하는 아침에 “강아지” “참새” 고양이“ 닭”과 같은 동물조차 각자의 발걸음에 매, 난, 국, 죽, 사군자를 새기는데 내 발자국은 후세에 어떻게 이바지할지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새해 새 아침에 곰곰 새겨볼 일이다./ 김제 김영
나는 너를 작약(作約)으로 읽는다 이루지 못한 언약 얼마나 많이 괴로웠나 봄을 어긴 적 없는 꽃 혁명을 부르짖다 단두대에 목을 넣고 쓸쓸히 죄를 청하는 전사처럼 떨어진 꽃잎 진하고 아름답다 약속을 깨고 아직껏 용서받지 못한 죄 올봄도 그 부끄러움 작약밭에 심었다 예쁜 약속 하나 갖지 못한 가난한 삶 그 잘못이 실로 크니 작약꽃밭에서 피 묻은 파약(破約)을 생각한다. △ 작약꽃은 활짝 피어 ‘환호작약’한다. 꽃 중의 꽃, 봄날의 환희여서, 흔희작약’ 할 줄 안다. 비록 땅속에 뿌리가 묻힌 삶이지만, “봄을 어긴 적 없”이 약속을 지켰으므로 피어있는 시간 동안은 ‘부추작약’으로 생을 즐기리라. ‘작약’하는 “작약꽃밭에서” “作約”을 생각하고 마침내 “피 묻은 破約”에 이르는 시적 화자의 고백이 못내 쓸쓸하고도 비장하다./ 김제 김영
들녘을 노랑 물감으로 칠했던 벼이삭 농부의 마음까지 물드는 그 가을을 나는 숨 쉬듯 마음에 들여 놓는다 낙엽이 제 갈 길을 찾아가는 입동 시린 바람이 관절을 꺾어 놓아도 아래로 아래로 은행잎이 노랗게 눕는다 환경미화원 두 분 은행잎만큼 노란 조끼를 입고 빈 가슴에 온기를 불어 넣는다 마음 밭 일구는 가을에 나는 액자에 노란 그림을 담고 있다 들녘과 은행잎과 미화원 두 분을 눈 안 액자에 실어 마음 벽에 내건다 △ ‘훌륭한 예술작품은 그 안에 사람이 들어있어야 한다’라는 말이 있다. 역량 있는 시인이 좋은 풍경을 보고 훌륭한 예술작품을 탄생시켰다. 벼 이삭이 노랗게 물든 가을 들녘이 그냥 그림이 될 리 없다. “아래로 아래로 은행잎이 노랗게 눕”는 게 그냥 그림이 될 리 없다. 그 풍경 안에 “노란 조끼를 입”은 “환경미화원 두 분” 덕분에 가을 들판이 한 점 그림이 되는 것이다. 겨울 초입에서 따뜻해지는 “마음 벽에 내”거는 그림은 “환경미화원 두 분”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김제 김영
태풍이 다녀간 뜰에 하늘이 성큼 내려선다 발자국이 희미해질수록 침묵은 빠르게 번져서 태고로 돌아가는 마당 낯선 기호들이 쏟아진다 적막에 잠겼던 나무들이 잠시 귀를 세운다 책을 보던 해당화가 그제야 바자울 너머 주인의 안부를 챙긴다 빈집은 거미가 읽던 페이지의 귀퉁이를 접어 안개 속에 넣어둔다 해거름까지 하늘을 마당을 떠나지 않았다. △ 바자울은 대, 수수깡 등을 엮어 만든 울타리다. 바람도 들락거리고 사람도 쉽게 들락거릴 수 있다. 겨우 경계를 표시한 정도의 울타리는 “태고로 돌아가는 마당”을 가진 가난한 집을 마지막까지 지키고 있다. “침묵이 빠르게 번”지는 바닷가 빈집은 “거미가 읽던 페이지의 귀퉁이를/접어 안개 속에 넣어”둔다. 바자울이, 거미가, 해당화가 바닷가 빈집을 지키고 거기 하늘은 더 오래 머물렀다. 시적 자아는 아직도 빈집 마당에 있다./ 김제 김영 시인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두 페이지가 있어요 그날을 낭떠러지로 밀어 버렸어요 첨벙 잠기는 소리 수도 없이 들었건만 과자를 커피에 적셔 베어 문 순간, 또 솟아 올라와요 묻고 가는 백 삼십 년 동안 해와 달 수도 없이 지나갔지만 봉인된 그 페이지에 문득 촛불이 켜져요 뜯어진 악보 때 묻은 낱장을 눈물로 헹궈요 무릎 꿇고 전주가 시작되자 새가 날아요 내 몫의 눈물을 물고요 나뭇가지 흔들리고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막 지나요 신기루는 보이는데 오아시스는 그 어디에도 없어요 △ “누구에게나 두 개의 페이지가 있”다는 말은 같은 페이지의 그늘과 양지를 말하는듯하다. “촛불이 켜”지는 순간은 130년 동안 공개하지 않았던 성가곡 페이지를 모차르트가 알린 순간과 그동안 미제레레를 몰랐던 서정적 자아에게 성가곡의 감동이 겹쳐지는 순간이다. “때 묻은 낱장”을 눈물로 헹구는 일은 그간 은폐되었거나 실토하지 못했던 그늘이 “새”가 되어 날아가는 일. 신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김제 김영 시인
경사진 언덕바지 햇볕 좋은 골목이 있었다 그 언덕 왼쪽 자락에 핀 보라 제비꽃을 좋아하던 옛 소녀 누굴 찾는 걸까, 골목 어귀를 서성인다 그날 불었던 서풍이 소녀의 볼을 물들였을 석양이 뭇별 쏟아지던 밤이 어디론가 가고 없다 이미 시들어버린 제비꽃, 서성거리던 소녀 말없이 돌아선다 골목을 빠져나간 것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 화자는 발에 밟힐 뻔했던 보라색 제비꽃이 골목 어귀를 서성이다가 빠져나간 서풍에 양 볼에 물들었다. 보라색이 온통 골목을 물들였을 것이다. 나를 생각해 달라는 무언의 색이라고 말해도 될까. 청초한 꽃에 대한 고백이 솔직하다. 꽃바람이 소소리바람처럼 매서울 때도 있지만 뱃사람들이 갈바람이라고 부른다는 서풍이 봄에 오셨다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소문은 서학동 골목에 핀 제비꽃이란다./ 이소애 시인
내가 실을 감으면 손주는 풀고 감으면 풀고 전기불빛이 감기고 어디선가 부엉이 소리 들리고 감기고 감기며 사과처럼 동그러지는 실타래 엉킨다고 천천히 감고 슬슬 하품이 감기고 펄펄 함박눈이 감기고 어느새 애호박만큼 커지는 실타래 뽀송뽀송 나를 감고 손주는 도란도란 할미 품에 잠드네. △ 맑고 고운 시여서 손주와 할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마침내 ‘전기불빛이 감기’는 은유적인 비유는 애호박만큼 동그랗게 커져서 담장에 걸린 호박이 성큼 떠오른다. 사과처럼 감긴 실타래가 하품도 감기고 함박눈이 감긴다는 군더더기 없는 사물의 통찰력에 시의 맛을 느낀다. 나를 감는 실타래는 뽀송뽀송하다니요. 손주의 잠든 모습이 엉킨 실타래가 풀리듯 따뜻하고 보드라운 숨소리가 아닐까요. 한 편의 그림이 그려지는 아름다운 시가 박완서 작가처럼 ‘시의 가시에 찔려서’ 시가 내게로 품었다. / 이소애 시인
꽃만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어느 해질녘 비가 나리고 무담시 지나가던 바람도 너를 어여삐 하였으리라 꽃만 향기로운 것은 아니다 한밤에 우레도 울고 뿌리까지 오는 뙤약볕도 너를 향기롭게 하였으리라 아름답다거나 향기롭다거나 그것만의 길은 아니다 뽑혀 던져진 풀일지언정 세상에 그의 웃음도 있으리라 △ ‘뽑혀 던져진 풀일지언정’ 내던져진 비참한 생명에 눈길을 준 화자의 마음이 고맙다. 고맙고 고마운 사람은 소외되고 멸시받는 잡풀에도 존재감을 인정해주며, 이름을 불러주고 쓰다듬어 주는 사람이다. 처절한 절망감에서 허덕이는 보잘것없는 잡풀에서 웃음소리를 듣는 건 포기하지 않고 삶을 일으켜 세우는 웃음일 것이다. 꽃의 향기는 꽃처럼 시늉하는 모든 사물에서 향기를 맡는 아름다운 마음일 것이다. ‘무담시 지나가던 바람’을 소리쳐 불러 내 곁으로 앉힐 것이다. 꽃처럼 아름다운 마음이 있을테니까./ 이소애 시인
내 주소가 없어 뉘 방(方)으로 산 세월 대문이 있어야 내 문패를 달 게 아닌가 가난한 마음에다 대못 박아 걸 수 없는 일 내 글이란 것도 평생을 남의 방으로 썼으니 인생 심지는 타들어 가고 불은 꺼지려 깜박이는데 언제나 내 글을 만들어 문패를 달아 볼거나 △ 제목만 읽어도 정겹다. 대문에 「문패」가 걸린 집에서 사는 것이 꿈이었던 옛 기억이 떠오른다. 문패는 ‘대못 박아 걸’었다. 가끔 우체부 아저씨가 문패를 보고 이름을 부르면 사랑이 담긴 편지를 불쑥 내밀던 시절, 남의 집 셋방살이는 주눅이 들었다. 문패 없는 방이었으니 말이다. ‘인생 심지는 타들어 가고/ 불은 꺼지려 깜박이는데’에서 성급한 시인의 시간 재촉이 엿보인다. 시간이 몸을 끌고 다녀도 문패처럼 시인의 시집들이 깜박이는 불을 꽉 붙잡고 있을 것이다./ 이소애 시인
새만금의 것은 새만금에게
전주문화재단 20년, 정체성·역할 재정립을
지방선거 본격 불법행위 신속 엄단 대응을
“시민의 일상이 관광이 되는 도시 전주”
단체장 경선이 중요한 이유
탑-승한
지속 가능한 토석 채취를 위한 방안
논란빚는 전주 경전철사업 포기
‘인저리 타임’보다 ‘추가시간’이 좋아요
고전과 전통의 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