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기사 다음기사
UPDATE 2025-11-07 06:01 (Fri)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오피니언 chevron_right 전북칼럼
일반기사

[전북칼럼] 세계화 구호와 모국어 경시풍조

문민정부(文民政府)가 들어선 이후 우리 사회에 등장한 구호가 '세계화'였다. 정부당국과 언론 매체를 비롯하여 지식인집단 사이에서 그것이 중요한 주제의 하나로 부각되었다. 그 내용은 한국이 국제 경쟁을 피할 수 없다는 것과 국제교류의 폭을 넓혀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인과의 교류를 확대하고 무한경쟁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국제 공용어로 사용되는 영어를 습득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최근 보도에 의하면 세계에 유통되는 지식정보 자료의 80% 정도가 영어로 되어 있고 지구촌 주민의 4분의 1이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영어를 국어나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는 나라가 75개국에 이르고 있는 현실도 국제화 시대의 영어 위상을 가늠하게 하는 대목이다. 

대외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의 경우 영어구사력이 그 사람의 능력을 판가름하는 중요한 잣대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국제화 시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당위성만을 성급하게 강조할 때 부작용이 발생하게 된다. 이 사회에 불어닥친 영어 교육 열풍이 그것이다. 교육당국이 어린 학생의 유학을 금지시킬 정도로 그 부작용이 심각했고, 자녀들에게 영어교육을 시키지 않으면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없을 만큼 우리 사회는 영어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전주를 비롯한 상당수의 도시에 위치한 이름 있는 유치원에서는 한 두 명의 영어권 원주민을 초빙하여 강사로 활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찍부터 영어를 습득케 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처럼 우리 사회에 번지고 있는데, 그것이 세계화에 부응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한국어에 관한 기초적인 소양을 갖추지도 않은 미래의 새싹들에게 외국어를 배우게 하는 것은 그들의 민족적 자아를 부정하거나 흔들어버리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민족의 정서와 사상을 담아내는 그릇이 모국어이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본래 모습을 확인하는 것이다. '혼불'의 작가 최명희가 말했듯이 "언어는 정신의 지문"에 해당한다. 

새 천년 이전의 100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진행된 근대화가 대부분 서구화를 뜻했고 그것은 민족적 자아를 버리고 고유한 생활문화를 부정하는 것을 의미했다. '서구 닮아가기'와 '서구 따라잡기' 식의 무분별한 모방과 경쟁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보면 지금 우리 사회에 조성된 영어 조기교육 풍조가 20세기 초와 유사한 측면을 지니고 있다는 진단이 가능하다. 국제화 시대가 가속화되고 전통적인 의미의 국경개념이 무너져버린다 해도 여전히 정해진 국토에서 각각의 민족이 그 나름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신자유주의 자본시장의 가치관이 스며든 '세계화 구호'는 상당히 위험하다. 자칫하면 그것은 민족적인 것과 세계적인 것의 구분을 없애버리면서 지구촌 한가족의 환상을 심어줄 우려가 있고, 나아가 민족적 정체성을 부정하면서 민족단위의 존재근거를 위협할 수도 있다. 

특히 우려되는 것은, 우리 사회의 화두로 떠오른 세계화가 효용성과 기능성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평가하려는 풍조로 변질된 점이다. 우리나라의 미래를 짊어질 어린 세대의 언어생활 현장에 그 징후의 일단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 폐단은 심각한 문제를 불러오게 될 것이다. 민족 구성원으로서의 자아가 형성되는 시기의 어린 세대에게 영어를 주입시키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세계화에 부응하는 길인지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세계인류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서는 다양한 언어와 복합적인 문화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그것이 세계화를 실현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유치원생부터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젊은 세대 모두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것이 세계화를 실현하고 국제화 시대를 앞당기는 것이 아니다. 제대로 된 국어문장 하나 작성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수두룩한 것이 대학사회의 현실이다. 그러한 현실의 이면에는 어린 시절부터 영어를 습득하도록 부추김으로써 생겨난 모국어 경시풍조가 자리잡고 있고, 그것은 왜곡된 세계화의 진행이 빚어낸 부정적 결과이다. 모국어에 대한 올바른 사용법도 익히지 못한 젊은 세대가 냉혹한 국제경쟁의 시대를 헤쳐나가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최명희가 지적했듯이, "모국어는 우리 삶의 토양에서 우리의 생각과 느낌을 품고 길러 정신의 꽃으로 피워주는 씨앗"이다. 첨단 기술문명이 펼쳐놓은 영상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그 씨앗이 "단순한 기호"로 흩어져버릴 것을 우려하여 최명희는 자신의 생명을 녹여 '혼불'을 썼다. 세계화의 잘못된 풍조에 감염된 젊은 세대 사이에서 수천년 동안 우리민족의 삶이 면면히 녹아 있는 모국어가 "단순한 기호"로 흩어져 버리지 않을까 걱정된다.

 

 

/ 전정구(전북대 교수)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다른기사보기

개의 댓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0 / 400
오피니언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