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진 정치부장
중국 고대 역사교과서로 꼽히는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명멸한다. 춘추전국시대를 살아간 제왕과 제후, 영웅과 호걸, 간웅으로 부터 협객, 점쟁이 건달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인물의 활약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이 가운데 가장 압권은 맞수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에 관한 부분이 아닌가 한다.
본기(本紀) 12권중 '항우본기''고조(高祖)본기' 두권에 담겨있는 이들의 얘기는 자못 흥미진진하다. 항우는 이름 석자를 겨우 쓰는 수준이었지만 힘이 장사였고 유방은 여유있으면서도 치밀한 사내였다. 난세의 두 영웅이 벌이는 용쟁호투는 결국 유방의 승리로 끝나 그는 한(漢)나라를 개국한다.
하지만 눈길을 끄는 대목은 이들보다도 천하통일을 이루는 과정에서 유방을 도운 한신(韓信)이 아닐까 한다. 불세출의 영웅 한신은 당초 항우의 부하였다. 그는 머리를 짜내 여러가지 비책을 제안했으나 채택되지 않자 유방의 휘하로 들어갔다. 여기에서도 처음에는 인정을 받지 못했으나 여러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제(齊)나라 왕에 오른다. 제나라 책사 괴통은 한신에게 천하를 삼분, 유방과 항우 그리고 한신이 분할통치할 것을 권한다. 하지만 한신은 자신에게 벼슬을 주고 신임한 유방을 배신할 수 없어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한신은 군사를 파죽지세로 몰아 해하(垓下)에서 항우의 군대를 격파, 유방에게 천하통일의 위업을 안겨준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반란의 죄목이었다.
이때 한 유명한 말이 '토끼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먹고(兎死狗烹), 하늘을 나는 새가 없어지면 활을 창고에 쳐박아 놓으며, 적국을 모두 함락시킨 후에는 공신들을 처치하느냐'는 항변이다. 이후 한신도 불만을 품고 역모를 꾀하다 붙잡혀 삼족이 몰살당한다.
우리네 정치판을 보면 2천여년 전과 어찌 그리 닮았는지 놀라게 된다. 배반과 이합집산이 난무하는 꼴이 그렇다는 말이다. 80년대 이후만 보더라도 노태우씨는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친구 전두환씨를 찬바람 몰아치는 백담사로 유배보냈다. 또 3당 합당으로 한배를 탔던 YS는 이들 둘을 모두 감옥에 가둬버렸다. '역사 바로세우기'라는 이름이었다. 두번이나 대권고지에 근접했던 이회창씨는 자신을 발탁했던 YS에게 등을 돌렸고, DJ 덕분에 대권을 잡은 노무현대통령은 대북송금 특검을 받아들여 동교동계를 단칼에 정리해버렸다.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은 자신을 키워준 동교동계를 딛고 일어섰다.
이들 정치현상을 인간적 정리(情理)로 보면 배반의 연속인 셈이다. 하나같이 원칙과 소신, 개혁 등을 내세우지만 각각의 정치적 입지가 깔려있었던 것이다.
최근에는 노대통령의 사전선거운동 발언을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야당에서는 탄핵발의를 하겠다고 으름장이다. 같은 뿌리에서 나온 민주당이 한나라당보다 더 열을 올린다. 분당으로 배반의 쓴 맛을 본데다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의 2강 구도로 판세가 짜이고 있으니 급할만도 하다.
4·15 총선을 앞둔 전북정치권도 마찬가지다. 배신과 변절, 보복과 권모술수, 줄타기와 철새논란 등이 난무한다. 특히 같은 탯줄에서 나와 한솥밥을 먹던 후보끼리 정반대의 길로 갈라서 공방을 벌인다. 한때는 형님 동생하던 사이끼리 못잡아 먹어 안달이고 자기가 모셨던 후보의 등에 비수를 꽂는 일도 서슴치 않는다. 정치적 계산에 따라 인간적 신의는 헌신짝버리듯 벗어던진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배반과 이합(離合)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와 선택이다. 개인적인 입장에서 의리의 단절일지라도, 긴 안목에서 정치발전과 역사의 진보에 기여했느냐가 그 기준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배반에도 용기가 필요한지 모르겠다.
정치의 계절을 맞아 숱한 항우와 유방 한신들이 저마다의 명분을 내세우며 국민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그것이 단순한 배반인지, 역사의 진보에 기여할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국민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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