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 신귀백 감독 데뷔작, 영화 '미안해 전해줘'
시(詩)를 빌어 독특한 영화평을 쓰는 작가 신귀백(53·정읍 배영중 교사). 그가 펜 대신 카메라를 들고 영화제작자로 나섰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영화로 또다른 사색에 잠겼다.
신귀백의 처녀작인 '미안해 전해줘'(67분·2013). 이 영화는 시인이자 문화운동가였던 박배엽(1957~2004)의 삶을 추적한 휴먼 다큐멘터리다. 그가 운영했던 사회과학전문서점인 '새날서점'과 시'백두산 안 갑니다', 이광웅 시인으로부터 배운 뒤 즐겨 불렀던 노래 '금강선녀' 등이 시인을 떠올리는 매개다.
'미안해 전해줘'는 박배엽과 함께 뜨겁고 냉철하게 한 시대를 읊었던 그의 많은 지인들을 불러냈다. 박배엽의 호명(呼名)에 마흔 명도 넘게 불려 나온 그들의 주관적인 기억들은 영화라는 객관적 성과물로 다시 태어났다. '백두산 안 갑니다'라는 시를 핑계로 백두산에 가지 못하는 그들만의 사연을 풀어놓았고, 구슬픈 음성으로 '금강선녀'를 들려줬다. 그리고 그와의 인연 속에서 '갚지 못할 부채'들을 하나 둘 꺼내놓았다. 후배들은 '새날서점은 학교 앞 또 다른 대학이었고, 박배엽은 매혹적인 교사였다.'고 말한다. 당시 운동그룹에게 지식의 저장소이자 쉼터 역할을 한 새날서점은 "꿈의 공간"(소설가 김선경)이었고, 박배엽은 "후배들의 밥이고 술"(평론가 이재규)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박배엽은 여전히 뜨거운 기운을 가진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감독은 '성명서 시인', '카페 혁명가', '목수를 꿈꾸던 게으른 자유주의자' 등 그의 여러 잔상들을 보여주고 들려준다. 그러나 결국 주목한 것은 그의 행적에서 묻어나는 시인정신이다.
"배엽이는 근본정신이 투철했다고 봐야지. 배엽이 앞에 서면 '내 문학이 왜 이렇게 가고 있지?'하는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문학적으로 뭔가 다시 한 번 반성하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었지."(김용택 시인)
"이 땅에서 시를 쓰는 무수한 사람들이 있지만 시인정신을 잃지 않고 시를 쓰고, 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그런 면에서 배엽이는 시를 못 썼지만 시인의 삶을 살다간 친구지."(박남준 시인)
"우리는 배엽이 형만큼 뜨겁지도 않고, 배엽이 형만큼 정신의 급진성도 없고, 배엽이 형만큼 호쾌하지도 못하고, 우리는……."(안도현 시인)
그렇다고 이 영화의 주인공이 박배엽이나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아니다. 감독의 시선은 박배엽이 활동했던 그때나 사라진 지금이나 여전히 불안한 시대를 향한다. 박배엽을 기억하게 만드는 시대다. 그래서 감독은 지인들의 입을 빌어 '시인정신을 잃지 않고 산다는 것'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감독이 '모든 것을 훌훌 버리고 광야를 유랑하겠다.'는 김길수(목수)와 '10년 동안 밥도 안 먹고 글만 쓰겠다.'는 소설가 이광재처럼 후배들의 선언에 주목한 것도 이 때문이다. 박배엽이 어떤 사람이었나에 대한 탐구보다 남겨진 이들에게 '다시 살아 있는 박배엽'을 보고, 이들이 무엇을 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 그래서 감독은 '지금은 없는 시인'을 대신해 "미안해 전해줘."라고 말하는 것이다.
영화 속 박배엽은 맑다. 그 맑음은 참으로 투명해서 세상의 온갖 더러움과 바르지 못한 것들을 끌어안고 비춰내면서도 여전히 아름답다. 이 땅의 시인들이 시집 한 권 내지 않은 그에게, 시보다 시적 허용이 더 많은 삶을 살았던 그에게 '시인'이란 헌사를 바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감독이 '박배엽'이란 고유명사로 이 시대에 전하고자 하는 울림. 그 아득한 기억은 인간이 지닌 원초적인 아픔과 어둠을 밝고 찬란한 빛으로 만드는 힘이다.
/최기우(극작가·전주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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