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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안도현(安度眩) 편】민중에 대한 남다른 연민

▲ 안도현 시인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살이 되자.

 

- '우리가 눈발이라면' 전문, 1991

 

안도현 시인은 어느 고등학교 도서반 학생들과의 대담에서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시는 단정한 모습을 보여야 하고, 세상이 차가울수록 시는 따뜻한 편에 서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 그러니 시인은 '바람 불고 춥고 어둡고 낮은 곳'으로 내려와 '힘들고 지친 사람들을 더욱 어렵게 하는 '진눈깨비'가 되지 말고, 어려운 사람에게 희망과 행복을 주는 '함박눈'이 되었으면 합니다"라고 술회한 바 있다.

 

이러한 현실 참여적 생각을 바탕으로 그는 더 이상 세상 밖에서 '바라보는 문학', '관망하는 문학'을 청산하고, 세상 가까이로 내려가 그들과 함께 화광동진(和光同塵)하는 입전수수(立廛垂手)의 자세를 보인다.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연 탄 한 장')이라는 휴머니즘의 바탕 위에서 외진 벌판의 들풀처럼 나직하게 그러나 강한 야성으로 타인에 대한 배려, 약하고 하찮은 것들에 대한 남다른 연민을 보이고 있다. 그리하여

 

연탄재 함부로 차지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너에게 묻는다' 전문, 1994

 

구원의 길은 그리 멀고 거룩한 구두선(口頭禪)이 아니라 , 이렇게 가까이 아니 우리의 일상적 삶 속에서 기꺼이 자신을 바치는 뜨거운 행동이요 실천임을 깨우쳐 주고 있다. 이기적 (利己的) 개인주의와 방관으로 일관된 우리의 미온(微溫)한 지성에 일침을 가한 그의 경구적 아포리즘은 아래의 시에서도 여전히 이어져 있다.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 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 '겨울강가에서', 전문, 1997

 

눈발들이 강물에 닿아 사그러지기 전에 그것들을 구해내려고 제 몸을 던져 가장자리부터 얼어가기 시작했다는 강의 마음, 곧 살신성인의 자세. 이게 자비요, 측은지심이요 뜨거운 인간애가 아니겠는가? "살다보면 삶이 부조리하고 비루해 환멸을 느낄 때도 있다. 그럴 때도 pen을 잡는가? 버릇이 되면 그렇게 된다. 시가 기쁨의 입구는 물론 환멸의 출구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만큼 미울 때도 있다. 그럴 때 시를 쓰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다시 한 번 생각이 정리되면 내게 시는 일종의 마음 수련 같은 것이기도 하다." 고 말했던, 그의 시작노트를 요즘에 들어 다시 한 번 살펴본다.

 

/시인·백제예술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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