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실로 이사가던 날 찾아온 콤플렉스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눈에 밟혀서 발길을 붙잡는 것들이 있다. 쇠락한 것, 허물어져 가는 것, 연민이랄까? 슬픔이랄까, 그런 감정에 빠져 발길을 옮기지 못하고 망연히 앉아서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기게 하는 것, 사람이 살다간 빈집이다.
“집이란 풍경보다는 한 영혼의 상태이다.”라고 본 어떤 시인의 말은 대체로 맞다. 곧 무너져 내릴 것 같은데, 금세라도 주인이 나타나 인기척을 들려줄 것 같은 빈집, 그 〈빈집〉을 노래한 시인이 기형도였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아ㅣ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집이란 무엇일까? 에드워드 존 펠프스는 “집은 자신만의 성城이다.”라고 갈파했다. 어린 시절부터 오랜 나날, 나는 그 성을 과잉은 아니지만 결핍되지 않는 마음으로 ‘나의 성’ 이라고 여기지 못한 채 극심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살았다. 그 ‘성城’ 카프카의 장편 소설 ‘성’과 같이 들어가기 힘든 그 성을 내 이름으로 소유하고 그 오랜 콤플렉스에서 벗어난 것은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남의 집에 살다가 졸업하던 해 이사를 갔던 집이 허물어져 내릴 것 같은 단칸방이었다. 이상의 소설 〈날개〉의 한 구절 같이 “손 수건만한 해가 잠시 창문으로 들어왔다가 나가는” 그 집에서 일 년쯤 살다가 아버님이 아프시자 어머님은 이사를 결정하셨다.
초가을 어느 날, 이사를 가는 날이었다.
고구마를 캐가지고 집에 돌아오자 할머니가 내려와 계셨다. 그렇게 말이 많으시던 할머니가, 아무 말도 없으신 채 아버지만 가만히 바라보고 계셨다. 아무리 미워하고 그래서 매일 만나면 욕을 퍼부어댔던 아들이지만 당신의 큰 아들이, 더구나 장손을 데리고 당신이 듣도 보도 못한 먼 곳으로 이사를 간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가슴이 미어졌겠는가? 더구나 자식이 돈도 벌지 못하시고 그토록 미워하면서 시집살이란 시집살이는 다 시키시고 구박만 했던 며느리가 행상을 해서 번 돈으로 산 집으로 이사를 간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힘드셨을 것이다.
“우리 큰 손주(손자), 인제가면 언제 본디야, 친구들 허고 싸우지 말고, 나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와라이” 하고 내게 말을 마치신 할머니는 결국 저만치 돌아서서 목소리 높여 울기 시작했다.
이사를 간다고 하면 먼저 가슴이 설레어야 하는데, 두근거리는 가슴은커녕 가슴이 답답하기만 하니 이 무슨 심사인가?
곧 이어 작은 아버지 내외와 큰 당숙까지 내려와 이삿짐을 꾸리지만 저마다 살아온 내력으로 이러한 상황만으로도 가슴이 버겁다는 것을 서로 아는지라 가슴 속에 쌓인 말들은 안하고 있다.
그랬을 것이다. 힘들여 형수가 번 돈을 노름빚으로 많이 날린 것을 알고 있는데 이사 갈 집이 얼마나 번듯할 집이겠으며 살아갈 나날이 얼마나 힘들 것인 가가 불 보듯 뻔 한데 이사 가는 것이 그리 기쁠 일이 있겠는가?
이사 짐이라야 장독대 몇 개에다 쌀 두서너 가마 그리고 오전에 수확한 고구마 몇 가마가 고작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여동생을 데리고 앞에 타고 우리 삼형제는 짐칸에 실려 진안 백운에서 임실 관촌으로 이사를 간다.
‘그래 우리 집이 지금 이사를 가는구나.‘ 그때까지도 나는 우리 집이 이사를 가는 곳이 정확히 어디인지를 몰랐다. 고개를 넘고 낮선 마을을 지나 몇 시간을 달렸을까?
기차가 지나는 철길이 보이고 그 철길을 건너 도착한 마을이 현재 치즈마을로 알려진 행정구역상 임실군 관촌면(임실읍으로 편입됨) 금성리 중금마을이었다.
“이 마을이 내가 살 곳이구나.”하고 안도의 숨결을 내 쉬기도 전 나는 암담한 절망감부터 맛보아야 했다.
“결심을 한다는 뜻으로서라도 내게는 나의 상황에 끝없이 절망할 권리가 있다”는 카프카의 글에서처럼 나는 고대하고 고대했던 이사를 가자마자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살아야 할 집이 대지라고 해야 열다섯 평도 안 되고, 방 한간( 3.5평이나 될까 싶은) 에 부엌 한간(2.5평이나 되었을 것이다.), 그것도 2.5미터도 채 되지 않는 마을길이 방문 앞에 나 있는 말 그대로 길갓집이었다.“네가 흰 바우떡(댁) 큰 아들이구나.” 하고 어떤 중년의 아주머니가 내 등을 두드리는데 그 손길이 미치자마자 마치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당황한 쥐가 쥐구멍 속에 얼굴을 감추듯 방안으로 들어간 나는 작은 방 한 구석에 몸을 숨긴 채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런 내 마음은 아랑곳없이 어머니는 이사를 왔다는 징표로 팥죽을 쑤기 시작했고, 이사를 온 사람을 반기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꾸역꾸역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날 팥죽과 함께 준비해온 막걸리를 마시며 즐기던 풍물 가락 속에서 내 가슴에 상처는 깊게 패었다.
“좁은 복도 모퉁이의 그림자 하나 흔들렸네.침묵은 벽을 타고 흐르고 집은 더 없이 어두운 구석에 웅크려 들었네.“라고 노래한 르베르디의 〈대부분의 시간〉의 몇 소절처럼 나는 그날부터 임실에 머무르는 동안은 그 집에서 단 한발자국도 떠나는 것이 불편한 붙박이가 되었다.
나는 그 집에 누구도 초대하지 않았고 몇 사람이 나를 찾아왔어도 만나지 않았다. 더 이상 의 희망이 없을 것 같은 곳, 그곳이 바로 비좁은 방이었다.
그렇다면 집이란 무엇이며 어떤 존재인가?
“어린이에게 집을 그리라고 하는 것은, 그에게 그가 그의 행복을 그 속에 보호하고 싶어 하는, 가장 은밀한 꿈을 보여 달라고 하는 것과도 같다.” 고 발리프(Balif) 부인은 회고했다.
● 집 짓는 자체만으로 행복했던 시절
언제 쯤 번듯한 집으로 이사를 갈 수 있을까? 나는 매일 허공 속에 집을 짓고 또 지었다. 부모님에게 내가 내 의견을 말한 것은 집을 옮길 수 없느냐 하는 그것뿐이었다. 우리 집 형편상, 그 무엇도 가능한 일이 아니었지만, 방이 두 개만 있어도, 길갓집만 아니어도 살 것 같았다.
그 말을 여러 번 해서 그랬는지, 아버지가 우리 집 건너편에 있는 빈 집터로 가더니 “아무래도 이곳에 우리 집을 짓는 게 좋겠다.”고 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얼마나 좋아했던지,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무래도 미심쩍었다. 그 빈 집터는 우리 것도 아니고 지금 우리 집 형편에 무슨 집을 짓겠다는 말인가?
“우선 흙벽돌부터 찍어 놓자” 아버지는 그렇게 말씀 하신 뒤 개울 건너의 공터에 진흙을 경운기로 몇 차 실어 날랐다.
그리고 날이 며칠간 좋을 것이라는 날을 잡아 일꾼들을 사서 벽돌을 찍기 시작했다. 그 때 내 기분은 날아갈듯 좋았다. 임실로 이사를 와서 어느 한순간도 나는 내가 사는 집 때문에 마음 편할 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집을 짓는다면 그동안의 그 답답했던 마음이 풀릴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물론 3칸 접 집이나 2칸 접 집을 짓는다고 내 생활이나 우리 집의 경제상황에 무슨 변화가 있겠는가, 하지만 집을 짓는다는 그것 자체만도 내 가슴을 설레게 했다, 흙벽돌을 찍는 작업은 순조로웠다. 마당에 널어놓은 흙벽돌도 비에 젖지 않고 잘 말라서 차곡차곡 쟁여놓았고 행여 비를 맞을세라 비닐로 잘 덮어놓았다.
그런데 그 후속작업이 더 이상 진전이 없는 것이었다. 며칠, 며칠 하다가 달이 여러 번 지났고 결국 해를 넘겼다. 흙벽돌을 덮었던 비니루가 다 벗겨져 자꾸 벽돌이 마모되어가도 집을 지을 어떤 조짐조차 없던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가 유난히 기분이 좋고 상기된 표정으로 어서 옷을 입고 나를 따라가자고 하셨다. “청웅면에 헌 집 한 채가 났단다. 그것을 사서 옮겨 짓자”
아버지를 따라 버스를 타고 간 곳이 임실읍을 한창 지난 청웅면의 한 마을이었다. 비어 있는 그 집은 3칸 접 집이었는데, 멀리서 보니 낡은 집처럼 보였지만 가까이 가서보니,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러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 집의 주인이 먼데 출타 중이었다. 이리 저리 둘러만 보고 해질녘에야 돌아왔다. 그 것뿐이었다. 그 뒤 그 집에 대하여 아버지로부터 단 한마디의 말도 듣지 못했다.
그때 만들었던 그 흙벽돌은 여러 해를 지나는 사이에 무너져 내려 다시 흙이 되었고, 드디어 잡풀에 뒤 덮여서 동산처럼 되었고,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결국 아버지는 살아생전에 당신이 살 수 있는 새 집을 짓지도 못하고, 이사도 못 가시고, 삽 수년을 살았던 그 비좁은 단칸방에서 57세의 나이로 돌아가시고 그 집은 빈집이 되었다.
세월이 강물처럼 흐른 뒤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 그 때 우리 집 형편에 집을 지을 수 있었어요?” 어머니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아니, 집은 무슨 집? 동생들 학비 대기도 벅찼는데,”
아버지가 진실로 집을 지을 계획이었는지, 아니면 항상 집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나에게 부질없는 꿈이라도 심어주시려 일부러 집에 대한 계획을 세우셨는지, 아버지의 그 마음속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몇 해 동안, 나는 이런 저런 형태의 집을 여러 채 지었다가 부수곤 했다.
‘내 방에 책 꽃이는 이렇게 저렇게 배치하고, 그 방에서 나는 책을 읽다가 글을 쓰기도 하리라.’
그 계획은 실재하지 않은 허공에 지어졌다가 스러지고 만 것이다.
나는 사랑이 아니라 희망을 잃은 채 살았고, 그리고 내가 그리던 집은 내 앞에 신기루처럼도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는 올수 없는 불행했지만 지나고 난 뒤 뒤돌아보니 행복했던(?) 시절인 그 시절, 아버지와 함께 집을 설계하고 집을 짓고자 했던 그 시절,
청소년기에 살았던 집은 삶이 계속되어 나이가 들면 들수록 여러 가지를 회고하게 되는 징검다리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할까?
1985년 가을 남의 집 정원으로 편입되고, 길로 변한 그 집터를 찾아가서 〈그리운 옛집〉이라는 글 한 편을 지었다.
“열쇠조차 망가져
녹슨 괭이로 문을 열면
썩은 새물이 방안 가득 고여 있었다.
가슴 속으로, 그 속으로만 파고들던 그리운 시절,
가슴 아리면서도 그리워하던 옛집
드디어 헐렸구나.
귀 기울이고 있으면
숨넘어갈 듯한 아버님의 기침소리 들릴 듯 싶고,
생솔가지 타던 매캐한 연기 냄새
코끝을 스칠법한데,
온 세상 들썩이던 새마을 운동에도
역사처럼 살아남아 마을 중앙을 지키고 있던
한 때는 부끄러웠고, 한 때는 눈물겹던
작은 집, 결국은 없어졌구나.
저어기 우리의 꿈이 잠자던 곳도
저어기 호롱불 밝히던 곳도
저어기 어머님 새벽마다 밥 지으면서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눈물 훔치던 곳도
부서진 한 줌 흙으로 남아
따스한 햇살에 한 줌 흙이 되고 말았구나.
살아가는 것이 그리 대수라고
바쁘다는 핑계 아닌 핑계로
해마다 두어 번씩,
바람처럼 왔다가 눈길만 주고 돌아가던 빈집,
지붕을 뒤덮은 풀이며
미세한 바람결에도 머리에 내려앉던 썩은 지푸라기가,
행여 조금이라도 남아 있어 갈 길을 붙잡을세라
바쁘다고 돌아서던 그리운 옛집,
그 집터에는 그날의 꿈만 남아 있는데,
햇살은 어찌 그리 찬연하게 빛나고 있던지,“
아, 가버린 그 세월 속에 그 집, 사진 한 장 남기지 않고 사라져간 임실의 그 집이 지금 문득 그리운 것은 겨울 탓인가? 내 마음 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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