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딱뚝딱'…아픈 역사 간직한 춘포에 '문화예술 옷' 입히다
2000년대 초반 도내에서는 다소 생소했던 공공미술을 시작해 15년 남짓 작업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우직한 사람들이 있다. 문화기획자 최진성 씨(44)와 달문 씨(46). 이들이 공동기획하고 있는 ‘모리에서다’는 주5일제 수업에 따라 매주 토요일 익산시 춘포면 춘포리에서 아동, 청소년 및 가족의 건강한 여가활동을 위해 문화체육관광부 주최로 운영되는 ‘토요일 학교 밖 문화예술교육’프로그램이다. ‘춘포는 역사다’라는 주제로 벌써 3년째다.
춘포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많이 와 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그리 널찍한 마당이 없는 고만고만한 집들, 차 한 대가 빠듯이 지나갈 수 있는 좁다란 길. 여느 시골동네와 별다를 바 없는 풍경이다. 마을 초입에서 목적지까지 차를 타고 들어가는데도 어느 누구 하나 고개 내밀어 보는 이 없이 한적하기 그지없다.
△터에 사람의 무늬를 새기다
이들이 춘포지역을 활동지역으로 고집스레 고수하고 있는 이유가 있었다. 국내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驛舍)인 춘포역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1914년 세워져 대장촌으로 불릴만큼 익산 최대 곡창지대였던 춘포의 수탈 역사를 대표하는 건물로 최초의 간이역이다. 지금은 폐역이 돼 소외된 공간으로 을씨년스럽게 자리잡고 있다. 이밖에도 에토주택, 김성철 가옥 등 일제 식민지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현재는 한 가구 구성원수가 평균 2.19명이고 대부분이 노부부, 독거노인이다. 인근에 위치한 춘포초등학교도 전교생 57명, 천서초등학교는 50명으로 가까스로 폐교 위기는 넘겨 운영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마을은 조용하기 짝이 없다. 아들딸에게 보낼 정도 소량의 텃밭을 가꿀 뿐 농사가 주요 생계수단이 아니다보니 마을 사람끼리 노작으로 만날 기회도 줄은 지 오래다.
달문, 최진성 씨는 이곳에 예술작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역사적 공간을 바탕으로 재발견되는 삶의 경험이 주는 풍요로운 추억과 기억이 세대를 넘어 소통하고 지역 사람의 발걸음과 오고가는 이야기로 새로운 무늬를 만들고 싶어서다.
춘포마을 안쪽에 66㎡가 채 안되는 곧 쓰러질 것 같은 슬라브집, 660㎡ 남짓 마당에는 마늘이 빼곡히 심어 있었다. 사람이 한참을 살지 않아 성한 문짝 하나 없었고 어디가 방이고 어디가 부엌인지조차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온갖 쓰레기와 폐자재가 뒤덮였던 공간이었다.
△예술가와 협업으로 꾸민 주민커뮤니티 공간
마을로 한참을 들어가니 망치소리가 요란하다. 8월 한낮 땡볕, 모자하나 쓰지 않고 구슬땀을 흘려가며 곧 쓰러질 듯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다.
그곳은 몇 개월 전 심란했던 공간과는 달리 몰라보게 바뀌어 있었다. 마늘로 무성했던 땅은 이제야 흙색을 보였고 바로 옆 폐가였던 집은 전시장을 방불케하는 이색적인 공간으로 탈바꿈됐다. 달문, 최진성 작가가 얼마나 이 공간에 애착을 가지고 에너지를 많이 쏟았는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산스크리트어로 ‘논다’는 의미의 ‘릴라’학교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만들어지는 공간은 그들다웠다. 무심하게 놓인 것 같지만 시선을 멈추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모리에서다’는 전국 단위의 작가공동체다. ‘태도가 교육을 만든다’를 모토로 지역 문화 읽기, 지역 문화예술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지역민 커뮤니티를 통해 실천하고 있는 모임이다. 작가간, 지역간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예술가와 협업이 광범위하게 이뤄진다는 점이 이 단체의 특징이다. 이번 작업에도 경기지역에서 활동하는 커뮤니티 아티스트 곽동열 작가가 참여했다. 주민이 다양한 영역의 외부 작가를 만나고 이들과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을 통해 문화, 예술의 다양성을 경험하도록 하는 것이 취지다.
달문, 최진성 작가는 현재 작업하고 있는 춘포를 단순히 아픈 역사를 안고 있는 공간으로만 해석하지는 않는다.
“춘포는 아이들에게 상상력을 줄 수 있는 새로운 공간입니다. 아이들과 청소년에게 새로운 무늬로 입혀지도록 하고 싶습니다.”
그들에게 문화예술교육은 작업의 연속이다. 그동안의 교육방식이 그러했듯이 작가의 시선과 작업의 태도로 공간을 재구성하는 커뮤니티 아트의 원형을 교육으로 활용한다.
△삶의 태도를 나누는 학교
릴라학교는 마을학교다. 지역민의 일상적 삶의 태도를 서로 배우는 것이 목표이다. 여기서는 학생, 교사가 따로 없다. 아이들은 어른들, 친구에게서 배우고 마을 주민인 어른들은 아이들을 보고 배운다. 기획자 최진성, 달문 작가도 마찬가지다.
그러기 위해 커뮤니티 공간은 가장 ‘나’다운 ‘내가 있어야 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마을 사랑방처럼 편안하게 들어와 쉬기도 하고 일상을 얘기하고 놀기도 한다. 누구에게나 새로운 상상력을 주는 곳으로 작용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현재 660㎡ 남짓 마당에는 놀이를 위한 조형공간이 폐목재로 뚝딱뚝딱 만들어지고 있다. 최진성, 달문, 곽동열 작가가 마을주민과 함께한 작업물이다. 마을 주민을 움직이는 일은 당연히 쉽지 않았다.
“젊은 친구들이 매일 와서 뭔가는 하는 거 같은데, 처음에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셨죠. 그런데 수 개월간 한결같은 작업에 더운데 애쓴다며 물도 건네고 과일도 가지고 오시고 도대체 뭐 하냐며 말도 거시기 시작했죠. 이것이 커뮤니티의 시작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방식이었다.
“예술이나 교육은 결코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그들의 태도로 사람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의도하지는 않지만 서로의 태도를 통해 서로 배우고 성장해가죠. 저마다 지닌 무늬로 또 다른 새로운 무늬를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최진성 작가는 몇 개월 후 릴라학교에 오면 아마 또 많이 변해있을 거라 했다. 서로의 상호작용으로 어떤 조형물이 만들어 있을지 자신도 가늠할 수 없단다. 소통과정이 고스란히 춘포마을 한 켠의 터무늬로 남게 돼 더욱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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