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우리나라에서 북을 만들었던 곳은 경남의 하동과 전남의 담양, 서울의 동숭동과 남원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남원은 판소리북으로 이름을 알렸다. 판소리북의 전통은 수많은 소리꾼들이 남원을 거쳐 갔던 배경과 맞닿아 있다. 게다가 당시 남원에는 전국에서 가장 큰 소시장과 도축장이 있어 북을 만드는 재료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초기까지도 남원 운봉의 만석꾼 별장인 운악정에는 소리꾼들이 머물면서 소리를 가르치고 공연을 했다. 그들 소리꾼들은 운악정을 떠날 때면 어김없이 남원 판소리북을 하나씩 마련해가곤 했다. 그만큼 남원 북은 소리꾼들이 갖고 싶어 하는 명품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남원 판소리북은 내놓고 판매하는 북이 아니라 북을 필요로 하는 소리꾼의 주문에 의해 그의 소리에 맞추어 제작되는 맞춤북이었다. 사실 남원 북을 갖게 되는 과정은 까다로웠다. 북을 주문하면 북을 만드는 장인은 소리꾼의 소리를 들어보고 체격과 앉은키를 고려해 북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것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소리꾼의 성음과 성량을 고려해 북통과 가죽의 두께를 정하고 다시 그 소리꾼의 소리와 맞추어가며 북을 만들었다. 과정이 까다로운 만큼 제작시간도 길어져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1년 이상이 걸렸다.
옛 소리꾼들은 가르치던 제자를 독립시킬 때 그 징표로 소리북을 맞추어 주었다. 가장 최고의 북 선물은 역시 남원 북이었음은 물론이다. 북을 만드는 장인들은 하나같이 소리를 잘 구별해내는 귀명창들이었다. 소리꾼은 북이 만들어지는 동안 여러 번 찾아와 소리를 해야했는데, 장인이 그 소리를 듣고 가죽의 두께를 조절하는 등 일종의 ‘튜닝’과정을 꼼꼼히 거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북이 완성되면 스승은 붓으로 징표를 써넣었다. ‘이제 내 소리가 너한테로 간다’는 뜻이었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의미 있는 대물림이 멋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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