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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의 무자비

측천무후는 중국의 최초의 여성 황제다. 당나라 고종의 황후였던 그는 국호를 주(周)로 고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15년 동안이나 중국을 통치했다. 여성으로 황제의 자리까지 올랐던 그는 정치를 쇄신하고 파격적으로 인재를 등용해 행정체계를 대대적으로 정비하는 등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했지만 황제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리고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황실 안팎의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한 공포정치로 악명이 높았다. 야사로는 그가 자신의 야욕을 위해 딸과 아들까지 죽이는 등 광기의 삶을 살았다고 전해진다.

 

측천무후의 삶은 지난했다. 그가 처음 궁에 들어온 것은 열세살 때, 고종의 아버지인 태종의 후궁이 되어서였다. 그러나 11년 후 태종이 죽자 관례에 따라 비구니가 되어 절에 들어가 살게 된다. 태종이 죽기 전부터 무후와 관계가 있었던 고종은 궁을 떠난 그를 잊지 못해 절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무후가 다시 궁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고종의 황후 왕씨 덕분이었다. 슬하에 자식이 없었던 왕씨는 다른 후궁을 견제하기 위해 무후를 궁으로 끌어들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그 자신 다른 후궁들과 함께 폐위를 당하게 된다.

 

무후가 황후에 오른 것은 그의 나이 서른한 살. 이후 그는 자신의 반대편에 있던 중신들을 차례로 숙청하고 고종이 정사에 소홀히 하자 전권을 장악하고 실질적인 통치의 권한을 갖게 된다. 아들들이 연이어 왕의 자리에 올랐지만 권력은 무후에게 있었다. 690년 둘째아들인 예종을 물러나게 하고 스스로 권좌에 앉아 나라를 통치했다. 무후는 권력을 지키기 위해 공포정치를 감행했지만 백성들의 삶은 안정됐다. 이런 상황은 한동안 계속되었으나 무후가 중병에 걸리고 노쇠해지자 대신들은 양위를 강요했다. 궁을 떠나 있던 무후는 698년 세상을 떠났다.

 

중국 시안에는 당나라 고종과 그의 황후 측천무후가 묻혀있는 건릉이 있다. 이 건릉에 이르는 길가에는 120여개 석상이 늘어서 있는데 길의 가장 안쪽에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비, 무자비(無字碑)가 세워져 있다. 측천무후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지자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자신의 업적이 너무 많아 비석 하나에 다 기록할 수 없을 것이니 아무것도 새기지 말고 비워두라는 유언이었다. 남다른 모략과 술책으로 권좌를 지키며 나라를 통치했던 측천무후는 ‘무자비’를 통해 무엇을 남기고자 했을까.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이 비의 의미가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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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 kimej@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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