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초, 주목을 끄는 사료가 공개됐다. 정조가 좌의정을 지낸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어찰첩이었다. <정조어찰첩> 은 정확하게는 모두 6첩, 297통의 편지가 담겨 있었는데 그 내용이 대부분 정사와 관련된 것들이어서 학계에서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하며 그 존재를 반겼다. 학계가 이 어찰첩의 존재를 더욱 주목한 이유는 또 있었다.
개혁을 추진했던 진보적 군주로 알려져 있던 정조의 품성과 비밀스럽고 민감한 정치적 사안까지도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는 내용 때문이었다. 일반적인 편지의 형식이나 격과는 다른 부분들도 관심사였다. 발신자인 정조의 편지임에도 보낸 날자가 기록되어 있지 않은 반면, 수신자인 심환지는 수신한 일자와 시간을 기록하고 있어 이 편지를 후대에 알릴 목적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점도 주목을 끌었다. <정조 어찰첩> 은 ‘선비 군주’로 알려져 있던 그의 이미지를 바꾸기에 충분했다. 정적이었던 심환지에게 비밀리에 보낸 편지가 297통이나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정조가 막후 정치에 능한 정치가였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으며 게다가 신하들을 꾸짖는 편지에서는 ‘호로자식’이나 ‘주둥아리’ ‘젖비린내’와 같은 적나라한 표현의 단어들이 적혀있어 다혈질이었던 정조의 성격까지도 고스란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정조>
연구자들은 이 편지의 의미와 사료적 가치 중에서도 ‘막후정치’에 능했음을 보여주는 내용들에 놀라워했다. ‘충청도의 인심을 수습하기 위해 자리를 안배할 것’을 지시하거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자신인 왕에게 올리게 한 뒤 이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일을 처리했으며 그렇게 올리는 글을 직접 써서 보내기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 어찰첩은 정조가 작고하기 전 4년 동안 심환지 한 사람에게 보낸 편지들이다. 시대적 배경으로 볼 때 정치적인 격동기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도 사료적 가치를 높이게 하는 대목이다. <정조 어찰첩> 에 관심을 갖게 되는 이유가 있다. 이 어찰첩은 국왕이 지속적으로 폐기하라고 명령했던 밀찰이다. 따라서 오늘날에까지 그 존재가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랄 수 있다. 심환지가 수신일까지 꼬박꼬박 기록하고 국왕의 명령까지 거스르며 지켜 후대에 남긴 이유가 궁금해진다. 정조>
사실 극비로 다루었던 내용이 후대에 샅샅이 공개되어 역사적 사실이 바로 잡아지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박근혜정부의 기록들이 대부분 없어졌거나 기록물로 보관되어 감추어진 현실을 생각해본다. 우리의 후대는 그 기록들에서 어떤 진실을 만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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