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연극협회가 10년 전 <전북연극사 100년> 을 출간했다. 지역의 원로·중견 연극인 등을 중심으로 엮은 이 책을 통해 전북연극이 어떤 길을 걸으며 오늘에 이르렀는지 확인할 수 있다. 지역의 연극사를 정리했다는 점을 넘어 전북연극의 자긍심을 높이게 했다는 점에서 평가받을 만하다. 근대연극의 뿌리를 창극으로 보고, 판소리의 창극화에 공헌한 고창 출신의 동리 신재효 선생을 주목했다. 전북이 한국 연극의 중심에 있다는 것을 드러낸 셈이다. 전북연극사>
전북연극사를 들여다보면 지역 연극인들이 참 대단했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문화예술이 서울로 향했던 시절에 척박한 지역에 씨를 뿌리고 꽃을 피웠으니 말이다. 60년대부터 여러 극단이 창단되고 소멸되는 과정을 거쳤던 전북연극이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80년대 이후다. 특히 창작극회와 극단 황토는 80년대‘파벌 싸움’을 벌인다고 할 만큼 무대 안팎에서 치열한 경쟁을 펼치며 전북연극발전을 이끈 양대 축이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전국연극제 대통령상을 거머쥐기도 하고, 자체 소극장을 마련해 상설 공연에 나선 것도 이 시기였다. 이후 익산과 군산, 정읍, 남원 등지에도 극단이 생기면서 양적·질적 발전을 더했다.
매년 전북연극제를 비롯해 전북소극장연극제·영호남 연극제를 열어 무대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다른 지역에 앞서 전주시에 시립극단이 탄생한 것도 전북연극의 저력이었다. 시립극단은 지금도 전국에 몇 개 되지 않는다.
전북연극이 오늘날 단단히 뿌리내리는 데 큰 역할을 한 분이 박동화 선생(1911~1978)이다. 일본 유학시절 극단 활동을 했던 박동화는 1950년대 중반부터 전북대신문 편집국장으로 활동하며 대학연극반을 만들었고, 여기 출신들을 모아 창작극회를 결성한 이다. 창작극회가 1964년 전국연극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차지했다. 그의 극작(‘두 주막’)과 연출을 통해서다. 그의 연극적 업적을 기려 전주체련공원에 박동화선생 동상이 세워졌고, 대표작 <나의 독백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가 사후에 발간됐으며, 20년 넘게 박동화연극상이 시상되고 있다. 나의>
이런 자랑스러운 역사와 선배를 가진 전북연극계가 요즘 한 극단 대표의 여배우 성추행 문제로 물의를 빚고 있다.‘미투’ 열풍 속에 나온 8년 전의 일이라고 하지만, 전북연극계 일각의 민낯을 드러낸 셈이다. 더욱이 지역 연극계 일각에서“오태석·이윤택을 복사한 괴물이 근처에 살고 있다”는 말까지 나오는 걸 보면 이번 극단 대표의 문제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나의 독백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연극계 대선배의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환골탈태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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