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원호 / 그림 권휘원
항장(港將) 국창이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긴 얼굴, 눈꼬리가 솟은 눈이 번들거렸고 엷은 입술은 야무지게 닫쳐졌다. 국창은 은솔(恩率)이니 한솔인 계백보다 2개 등급이 높다. 국창 좌우로 장수들이 서 있었는데 한솔, 나솔이 네 명이나 된다. 계백이 청 위에 앉은 국창을 올려다보면서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항장 은솔님이시오?”
“보면 모르는가?”
국창이 꾸짖듯이 말하자 계백이 빙그레 웃었다.
“나는 백제국 대왕께서 앉아계신 줄 알았소.”
“무엇이?”
“내가 도성에서 대왕을 뵙고 왔지만 은솔께서는 대왕보다 더 직위가 높으신 것 같소. 황제폐하 모습이오.”
“무엇이?”
국창의 얼굴이 굳어졌다. 대왕보다 더 높게 보인다면 구설이 두려워진다.
“나를 모함하는가?”
국창이 버럭 소리쳤을 때 계백이 다시 웃었다. 그러고 나서 목청을 돋워 말했다.
“지금 황제 행세를 하고 있지 않소? 대왕께서도 단 위에 앉기를 거북해 하시는데 은솔이 계단 위의 단에 앉아 한솔급 성주를 호통 쳐 부르다니, 이곳이 역모를 꾸미는 곳으로 보이오.”
“무엇이라고? 역모?”
“대왕을 능멸하지 않고서야 이런 행태를 부릴 수가 없소. 은솔이 단 위에 앉다니.”
그때 계백이 허리에 찬 장검을 쑤욱 빼들었다.
“내가 은솔을 베어 죽이고 그 머리를 들고 대왕께 가서 자초지종을 말씀 드리는 것이 낫겠소.”
“무, 무엇이!”
했지만 국창의 얼굴은 하얗게 굳어졌다. 둘러선 나솔, 한솔급 장수들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국창의 역성을 들면 역적의 동조 세력으로 몰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계백의 뒤쪽에서 한꺼번에 칼 뽑는 소리가 들려왔다. 섬뜩한 쇳소리다. 계백과 함께 온 화청, 곽성, 한쪽 팔을 못 쓰는 육기천, 그리고 하도리까지 칼을 뽑아 든 것이다.
“자, 은솔 국창! 네가 역모를 꾸미지 않았다는 증거를 대라!”
칼로 단 위의 창을 겨눈 계백이 소리쳤다. 기마군 대장으로 단련된 목청이다. 청이 울렸고 마당까지 퍼졌다.
“바로 대지 않으면 네 목을 베겠다. 내 이름은 들었을테니 그쯤은 일도 아니다!”
“이, 이보게, 한솔…….”
“네 이놈! 대왕을 능멸하고 이곳에서 황제가 될 모의를 꾸미고 있었느냐!”
“내, 내가 언제…….”
“내륙의 성(城)이 침탈을 당하는데도 방관하고 있었던 것은 백제를 멸망시키고 네가 황제가 되려는 의도가 아니냐!”
“한솔, 다, 당치도 않는…….”
“네 이놈! 네 목을 베고 내가 도성으로 가겠다!”
그때 구르듯이 단을 내려온 국창이 계백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한솔! 진정하시게! 오해가 있네, 사람 좀 살리시게!”
계백이 칼등을 국창의 어깨에 대었다. 그 순간 몸서리를 친 국창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치켜뜬 눈의 눈동자는 죽은 생선의 눈 같다. 계백이 머리를 돌려 둘러선 수군창의 무장들을 보았다.
“그대들도 은솔의 말에 동감하는가?”
계백이 소리쳐 물었으나 선뜻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국창에게 동조하지 않겠다는 표시다. 그때 계백이 칼을 내려 칼집에 넣었다. 이만하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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