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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암이 교차하는 정동영

백성일 부사장 주필

정동영 만큼 명암이 교차하는 의원도 드물다. 전북 출신으로 대선 후보까지 지냈던 그가 낙선해 미국으로 홀연히 떠나 칩거하는 등 냉 온탕을 오가며 4선이 됐다. 방송기자 출신으로 15대 총선때 덕진구로 출마해 전국 최다득표로 정계에 입문,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잘 생긴 외모에 앵커 출신으로 인기가 높아 하루 아침에 DJ입으로 변신,새정치국민회의 대변인을 지내면서 DJ의 신임을 받았다.

출마 때 개나리아저씨란 닉네임으로 전주시민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특히 여성유권자한테 인기가 대단 이미지정치의 상징이 되었다. 정의원이 워낙 중앙정치 무대에서 바쁘게 뛰다보니까 지역구에 내려올 시간이 없었다. 당시 재선인 장영달 의원(완산구)이 의정활동을 열심히 했지만 빛이 안 났다. 그 이유는 정의원의 이미지 정치에 눌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사가 좋은 일만 있는 게 아니다. 40대 기수론을 외치며 당 최고위원이 됐던 정의원은 초선들과 함께 권노갑고문의 2선후퇴를 요구하며 정풍운동을 주도했다. 그 결과 권 고문이 물러났지만 동교동 실세들이 2002년 대선후보 경선 때 앙금이 남아 정의원을 배척, 노무현이 대선후보가 됐다. 대학 동기였던 이해찬 대표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했지만 권 고문이 사무실을 마련해 주는 등 동교동계의 도움이 컸다.

반노이미지를 강조한 그가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 대선 후보로 극적으로 선출됐지만 MB한테 531만표라는 사상 유례없는 표차로 낙선한 것이 가장 큰 패착이다. 노무현은 후보 당시 DJ의 모든 공과를 안고 가면서 대통령이 되었지만 정의원은 노 대통령의 공만 갖고 과는 버리고 가는 바람에 친노세력의 거센 저항을 샀다. 노 대통령 서거 때 봉하마을에서 쫓겨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대선때마다 1백만표 안에서 승패가 갈렸지만 거의 더블 스코어차로 져 진보진영 한테 좌절감을 안겼고 전북 출신들도 MB때 맥을 못췄다.

그후 안철수 탈당으로 술렁이는 호남민심을 잡기 위해 2015년 12월 18일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가 직접 순창에 내려와 그를 만났지만 결국 다른 길을 간게 패착이라는 지적도 있다. 그해 4.29 서울 관악을 보궐선거에서 정몽준 한테 패배한 후 순창에서 씨감자를 재배해왔다. 그러나 문 대표는 정의원과 만나는 것이 비밀이 지켜지지 않은 것에 몹시 실망해 씨감자만 받고 돌아 섰다는 것. 문 대표는 그 누구도 몰래 그를 만나려고 순창까지 왔는데 그때 이미 기자들이 와 있어 놀랐다는 것이다. 문 대표는 한참동안 차에서 내리지 않고 있다가 그냥 갈 수 없어 그를 만났다는 것. 이미 양측이 그의 복당과 비례대표문제를 어느정도 합의해 놓아 문 대표가 확답 받으려는 상태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평화당의 당 지지도가 2.5%이고 그의 정치가 콘텐츠 보다는 이미지 정치로 계속 흘러간 게 결국은 전북정치의 약화로 이어졌다는 지적을 받고 있어 기대가 엇갈린다. 전북정치의 자산인지는 전주시민의 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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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일 baik@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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