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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이문구가 기록한 문인 21명 세상살이

"선생은 제자와 후배를 가이없이 사랑하셨다. 습작기에는 (중략) 심지어 제목 다는 요령까지 무엇 하나 소홀함이 없으셨지만,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일단 등단하여 기성 작가 대우를 받기 시작하면 어디에 무슨 글을 어떻게 쓰든지 참견을 하지 않으셨다."(10쪽 '한국 현대문학의 거목' 중)'무녀도' '등신불' 등을 쓴 소설가 김동리(1913~1995)가 생전에 제자를 대하는 태도가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용둔마을의 신동은 6세부터 10세까지 서당에서 '천자문' '동몽선습' '명심보감' '논어' '맹자'를 읽었다. 이 신동은 상상력도 수준이 높았다. (중략) 하늘에 총총한 별마저 먹을 것으로 보여 별을 따달라고 울어 보챈 기억도 있다."(73쪽 '5세 신동의 50년' 중)는 부분은 시인 고은(78)의 어릴 적 이야기다. 이처럼 한국 현대 문학사의 한 장을 장식한 문인들의 삶과 일화를 생생하게 그린 이는 바로 '관촌수필'의 작가 이문구(1941~2003)다. 당대 문인과 누구보다 폭넓게 교류한 소설가 이문구가 동료 선후배에 대해 풀어놓은 이야기가 '이문구의 문인기행'(에르디아 펴냄)이라는 책으로 묶여 발간됐다. 책은 이문구가 생전에 잡지 등 여러 곳에 남긴 글 가운데 현대문학의 주요 문인에 대한 자료만 모았다. 이 책의 편집주간인 시인 이흔복은 "이문구는 동료 문인에 대해 무척 깊은 애정을 갖고 있다"며 "문인에 대해 잘 알고 또 그 이야기를 재미있게 쓸 작가는 이문구외에 없다고 판단했다"고 책 발간 배경을 설명했다. 김동리, 신경림, 고은, 한승원, 염재만의 인물평은 1부에 실었고 2부에서는 박용래, 송기숙, 조태일, 임강빈, 강순식 작가의 단행본에 쓴 발문을 모았다. 우리말 특유의 가락이 담긴 글로 유명한 이문구는 각 인물에 대한 애정을 듬뿍담아 유장한 문체를 펼쳤다. 구수한 입담과 해학을 토대로 문인 세계의 풍경을 전한다. 특히 이문구와 친분이 두터웠던 시인 박용래와의 일화를 담은 글에서 이런 분위기가 잘 드러난다. "그는 조상 적 이름의 풀꽃을 사랑하여 풀잎처럼 가벼운 옷을 입었고, 그는 그보다 술을 더 사랑하여 해거름 녘의 두 줄기 눈물을 석 잔 술의 안주로 삼았다. 그는 그림을 사랑하여 밥상의 푸성귀를 그날치의 꿈이 그려진 수채화로 알았고, 그는 그보다 시를 사랑하여 나날의 생활을 시편의 행간에 마련해두고 살았다."(91쪽. '내가 왜 울어야 하나' 중)흥겹고 유려한 문장으로 박용래의 삶을 노래한 그는 박용래의 눈물에 얽힌 일화, 시인 정지용이 자신의 고향 선배인지도 모르던 한 시인을 호되게 꾸짖은 일 등 다양한 에피소드를 전하고 있다. 이어 3부에는 이문구가 '월간문학' 등에 작가 탐방을 주제로 연재한 글이 실렸다. 황석영, 박상륭, 김주영, 조선작, 박용수, 이정환에 대한 글이다. 마지막 4부는 박태순, 서정주 등에 대한 실명 소설 추도사를 담았다. 328쪽. 1만3천원.

  • 문학·출판
  • 연합
  • 2011.08.10 23:02

[최명표의 전북 작고 문인을 찾아서] (25)할말을 가슴에 묻었던 시인 정열

정열(雲月 鄭烈·1932~1994)은 정읍 정우면 회룡리에서 태어난 시인이다. 그의 고향은 갑오동학농민혁명의 함성이 들판을 적셨던 곳이다. 그런 탓인지 몰라도, 그의 시를 읽노라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속이 울울해지는 느낌을 주체할 수 없다. 그 스스로 "내 시는 어머니의 가슴속에서 영영 풀리지 못한 채 응얼진 핏덩이거나, 아니면 한밤중 반딧불 같은 호롱불 앞에서 반쯤 석불이 되어 어깨를 울먹이던 속울음이다"고 고백했듯이, 그의 시에는 한이 서려 있다. 시력 30주년을 맞아 병석에서 낸 시선집의 제목조차 '할말은 끝내 이 땅에 묻어두고'(청사·1985)였으니, 그의 시작품에 살로 배어 있는 '응얼진 핏덩이'나 '울먹이던 속울음'은 포괄적으로 한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그는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여느 아이들처럼 천자문을 배우며 자랐다. 이런 가정 형편은 특출난 것도 아니어서 굳이 시를 쓰지 않아도 될 터이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부터 약골로 소문나는 대신에, 하늘의 허락을 얻어 시재를 부여받았다. 몸과 문학을 맞바꾼 그는 1948년 전주상고에 들어가면서부터 차근차근 수련을 시작하였다. 그는 학교의 문예부장을 맡으며 문학의 길에 본격적으로 발을 디뎠다. 이러한 경로는 시인으로 나아가는 전형적인 방법이었다.1953년 '자유신문'에서 신인들의 문예작품을 공모하자 그는 시를 내어 당선되었다. 그는 자신의 시작에 자신감을 갖고 1955년 '문학예술'에서 추천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의 월간지에서는 3회까지 추천해야 완료된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그는 계속하여 작품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당선 소감문까지 보냈던 잡지가 폐간되어 버리자, 그는 등단 시기를 늦추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59년 11월이 되어서야 그는 '사상계'에서 등단 절차를 마치고 마침내 시인이 되었다.첫 시집 '원뢰'(정치문화사·1959)를 내면서 그는 본명의 정하열(鄭夏烈)에서 '여름'을 지워버리고 정열로 필명을 삼았다. 아마 '여름'이 정열(情熱)의 계절이고, '녀름'이 그 여름의 결실이라 생각하여 중첩된 의미를 삭제해버렸는지도 모른다. 혹은 게으름을 부추기거나 겨르로운 호흡을 요구하는 여름의 의미망에 부담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가 아호를 거의 사용하지 않은 점으로도 유추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그의 필명은 줄임이 아니라 없앰이다. 그는 여름을 지워서 시인의 '정열'을 얻고 싶었던 것이리라.정열은 1963년 국학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의 태인중학교에 국어교사로 부임하였다. 이후로 그의 생은 교육 현장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그에게 변화라곤 통근하기 쉬운 태인기술학교를 거쳐 신태인종합고등학교로 전근한 것 외에, 평생 동안 교단에서 영재를 지도하느라 심혈을 쏟았다. 그는 교직에 종사하는 한편으로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농사도 함께 지었다. 그에게 '농민 시인'이란 칭호를 붙게 해준 것은 그로부터 연유한다.사실 정열의 시집에는 농촌을 소재화한 작품들이 흔하다. 구체적으로 그의 시는 "손금마다 살아 남는 풀물"('풀물')이 듬성듬성하고, 또한 "갯도랑까지 다 메운 팥죽같은 흐레"('미꾸라지')가 질펀하다. 이런 사례를 들어서 정열을 농민시인이라 칭한다손, 크게 어긋난 평판이 아니다. 하지만 조금 더 읽어보면 "지어미 가슴속 기진한 속울음"('쑥국새 소리') 소리와 "제가 꼰 새끼줄에 제 손들 묶여"('진눈깨비')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찾아내기가 더 수월하다. 말하자면, 정열은 더불어 부대끼며 살아가던 농민들의 정서를 작품의 원경으로 삼고, 자신이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던 농촌의 현실을 근경으로 설정한 뒤에, 자신의 섬세한 감수성을 육화한 것이다.이런 성향은 그의 무골호인에 가까운 천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속으로는 속울음으로 범벅된 그였으나, 겉으로는 다정한 이웃 아저씨로 불리던 그였다. 그는 '할말은 끝내 이 땅에 묻어두고' 다정도 병인 양, 시작에 열중하여 농촌의 참모습과 농민들의 애환을 자신의 것으로 승화시켰다. 그가 "거덜난 일상"('흙에게')과 "하얀 백자기의 은은한 속삭임"('농악은')에 '파르르' 떠는 것도, 따지고 보면 "안으로 안으로 크나큰 강물"('여백')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추모하는 움직임이 일다가, 최근 이르러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번지르르한 시편들에 현혹된 세태를 보는 듯하다.이승에 사는 동안에 "살아 남아 귀먹고 눈먼 것들을 위하여"('할말') 몸살을 앓고 가슴을 졸이던 그는 1964년 정읍과 김제, 부안 지역의 문우들과 문학회를 결성하고 동인지 '향토문학'을 발간하는 등 열심히 문단 활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그의 이런 모습은 큰 시인이 되려거든, 먼저 고향의 문학 발전에 헌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소박한 진리를 입증한다. 성근 시재의 시인일수록 저 잘난 맛에 겨워 고향을 멀리한다. 이 점에서 죽어서도 정든 땅을 떠나지 않고 고향사람들에게 무한한 애정을 지녔던 정열의 생애는 오래 기릴만하다.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1.08.09 23:02

해외 출판시장 지평 넓히는 한국 문학

한국 대중음악(K-POP)이 유럽 등에서 새롭게 한류 열풍을 일으키는 가운데 한국 문학도 해외 출판시장의 지평을 넓히고 있어 눈길을 끈다. 최근 해외 무대에서 크게 인지도를 높인 소설가 신경숙은 이스라엘에서 '엄마를 부탁해'를 번역 출간한 것을 계기로 7~12일 현지에서 사인회와 인터뷰를 소화하고있다. 지난 7월 초 이스라엘에서 출간된 '엄마를 부탁해'는 현지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3위까지 오를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조경란의 '혀'가 앞서 이스라엘에 출간된 바 있지만 '엄마를 부탁해'처럼 한국작가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현지에서 작가 사인회까지 열리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신경숙의 해외 판권을 관리하는 KL매니지먼트 이구용 대표는 "'엄마를 부탁해'는 한국 문학의 불모지라고 할 수 있는 레바논에까지 소개되는 등 해외에 어필하고있다"며 "한국 문학을 발굴해 해외에 소개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최근 여러 곳에서 진행되면서 얻어낸 결과"라고 말했다. 일본 문학계에서는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문을 두드리고 있다. 우선 한강의 연작 소설인 '채식주의자'가 한국문학번역원의 '저작권수출활성화사업'의 일환으로 최근 일본에서 출간됐는데 기대 이상의 반응을 얻고 있다. 지금까지는 윤동주, 이상, 채만식 등의 근대 문학 작품이나 김지하, 조정래 등1980~90년대 작가의 작품이 주로 일본에 소개됐지만 최근에는 젊은 작가의 작품이 크게 늘고 있다. 한국문학번역원은 "'채식주의자'는 일본 쿠온 출판사가 '새로운 한국문학 시리즈'의 첫 번째 책으로 지난 6월 출간했다"며 "지난달 중순부터 아사히, 마이니치, 요미우리 신문 등이 관련 기사를 다뤘다"고 전했다. 2000년대 이후에 출간된 작품 중에서는 공지영의 '즐거운 나의 집'이 일본에 소개된 바 있으며 쿠온 출판사는 김중혁의 '악기들의 도서관', 하성란의 'A' 등을 출간할 예정이다. 은희경의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김연수의 '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애란의 '침이 고인다', 박민규의 '카스테라' 등은 한국문학번역원의 지원을 받아 번역이 진행되고 있다. 한국문학번역원은 "한국 문학을 일본에 소개하는 번역가의 세대가 교체되고 있다"며 "재일교포 3세 출신 번역가나 한국 문학에 관심을 둔 현지 학자들이 생기는 등 번역가층이 넓어지면서 한국의 젊은 작가가 일본에 자주 소개되고 있다"고 밝혔다.

  • 문학·출판
  • 연합
  • 2011.08.09 23:02

[김병기의 서예·한문 이야기] (23)'直聲留闕下·秀句滿天東(직성유궐하·수구만천동) -추사 김정희의글씨(10)

直聲留闕下, 秀句滿天東 -顧南雅先生文章風裁, 天下皆知之, 向爲湘浦一言, 尤爲東人所傳誦而盛道之. 萬里海外, 無緣梯接, 近閱復初齋集, 多有南疋(雅?)唱酬之什, 因是而敢託於墨緣之末, 集句寄呈, 以伸夙昔憬慕之微私. 海東秋史金正喜具草.곧은 소리(말)는 대궐에 남아 있고, 빼어난 글귀는 하늘 동쪽(조선)에 가득하다오. -고남아(顧南雅) 선생의 문장과 풍채는 천하가 다 압니다. 특히, 접때 상포(湘浦)를 위하여 한 말씀은 동쪽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전해져 많은 사람의 입에 무성하게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저는 만 리 밖 해외에 있는 몸이라서 다리를 놓아 접할 기회가 없었는데, 최근에 《복초재집》을 읽다보니 옹방강(翁方綱) 선생과 남아 선생 사이에 주고받은 시가 많이 있었습니다. 이에, 이것을 구실로 삼아 감히 옹방강 선생과 묵연을 맺은 사람들의 맨 끝자리라도 의탁해 보고자 이 구절을 써서 보냄으로써 오랜 동안 마음속으로만 해오던 동경과 우러러 추앙하는 마음을 펴 보입니다. 해동의 추사 김정희가 갖추어 썼습니다.直:곧을 직/ 聲:소리성/ 留:머무를 유, 남을 유/ 闕:집 궐/ 秀:빼어날 수/ 句:글귀 구/ 滿:가득할 만이 작품은 추사 김정희 선생이 중국의 학자 고남아(顧南雅)와 교유를 트기 위해 써 보낸 것이다. 顧南雅는 중국 청나라 가경(嘉慶)년간에 정무(政務)를 바르게 처리하기로 이름이 났던 관료이자 학자이고 시, 서, 화에 능했던 고순(顧?:1765-1832)이라는 사람이다. 南雅는 그의 호이다. 협서(脅書)에 나오는 '상포(湘浦)'라는 사람은 몽고족으로서 청나라 조정에 무관(武官)으로 벼슬하여 청렴결백하게 나랏일을 봤던 군기대신(軍機大臣) 송균(松筠:1744-1835)이다. 湘浦는 그의 자(字)이다. 가경 25년(1820), 청나라의 선종(宣宗)이 즉위한 후, 송균을 외직으로 내보내려하자 고순이 나서서 송균처럼 강직한 충신은 늘 주변에 두고서 바른 말을 하게 해야 한다고 직언한 바 있다. 추사는 고순이 행한 그런 직언을 들어 "直聲留闕下·秀句滿天東" 즉 "바른 말은 대궐에 남아 있고, 빼어난 글귀는 하늘 동쪽에 가득하다."고 칭찬하고 그것을 글로 써서 선물로 보낸 것이다. 이 때 추사의 나이는 35세였다. 추사는 24세에 사신으로 가는 생부 김노경을 따라 연경에 들어가 당시 중국 학계와 서예계의 거물이었던 옹방강(翁方綱:1733-1818)을 비롯한 많은 학자들을 접하고 돌아왔는데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후에도 추사는 여전히 청나라 인사와 새로운 교유를 트기 위해 이런 작품을 한 것이다. 이는 마치 오늘날 미국을 비롯한 해외 유학파들이 귀국한 후에도 현지의 인맥을 잘 관리함은 물론 끊임없이 인맥을 넓혀나가려는 노력을 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이 작품은 서울 성북동의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중국으로 건너가 고순에게 전해졌던 것이 어떤 경로를 타고 다시 한국으로 들어와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게 된 것인지 아니면 추사가 이 작품을 써놓고서도 어떤 사정으로 인해 고순에 보내지 않아 국내에 남아 있던 것이 간송으로 들어가게 된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이 작품은 추사체의 형성과정을 가늠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추사는 연경에 다녀온 후 서예를 보는 안목이 크게 달라진 것은 사실이나 그의 작풍이 바로 변한 것은 아니다. 최소한 30세까지의 추사는 당시 조선에 명필로 활동하던 추사보다 19년 연상의 자하(紫霞) 신위(申緯) 글씨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30세 이후에야 비로소 해서에서부터 옹방강의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추사 나이 31세에 쓴 〈이위정기(以威亭記)〉나 33세에 쓴〈가야산 해인사 상량문〉의 해서는 옹방강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35세 경부터는 대련(對聯)이라는 새로운 형식의 큰 글씨에도 옹방강의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이 〈直聲留闕下, 秀句滿天東〉작품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이다.상대방의 장점을 들어 극구 칭찬하는 글을 짓고 그것을 작품으로 쓴 다음, 다시 그런 작품을 쓰게 된 내력을 극존칭의 어사로 표현하여 협서(脅書)로 쓴 이 작품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교유를 트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겸양이 다소 지나치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더욱이 고순(顧?)이라는 사람은 당시에도 그랬거니와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중국 학계에서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는 인물이다. 굳이 "묵연의 말석에라도 끼고 싶다"는 표현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추사는 혹 중국의 학문이나 서예를 너무 신봉하는 모화주의(慕華主義)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추사의 문집인《완당선생전집》을 읽다보면 중국의 서예는 뭐든지 다 좋게 평하고 조선의 서예가나 서예에 대해서는 폄하가 지나치게 심함을 수시로 발견할 수 있기에 하는 말이다.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1.08.03 23:02

손권을 중심으로 본 '삼국지의 세계'

위(魏)ㆍ촉(蜀)ㆍ오(吳)는 중국 대륙을 삼분하며 쟁패했다. 우리는 흔히 이 시대 주인공으로 조조의 위, 유비ㆍ관우ㆍ장비ㆍ제갈공명의 촉을 생각하지만 삼국 중에서 가장 긴 생명을 자랑한 왕조는 오였다. 재일교포 인문학자로 일본 교토대학 인문과학연구소장을 역임한 이 연구소 김문경(金文京. 59) 교수는 이 시대의 주인공을 오와 손권(孫權)으로 본다. 최근 국내에 완역된 단행본 '삼국지의 세계'(사람의무늬 펴냄)에서 저자인 김교수는 위와 조조, 촉과 유비에게 억눌린 오와 손권의 '복권'을 시도한다. 사실 김 교수는 정사 삼국지보다는 소설 삼국지연의의 권위자로 통하기도 한다. 1993년 펴낸 '삼국지연의의 세계'라는 단행본이 그만큼 호평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번에 한국어로 번역된 '삼국지의 세계'는 1993년 단행본의 자매편이라고도 할수 있으며 삼국지에 대한 관심을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정사 '삼국지'로 확장한 성과물이기도 하다. 2005년 일본 고단샤에서 선보인 '중국의 역사 시리즈' 중 하나인 '삼국지의 세계'에서 저자는 손권이야말로 삼국시대를 연출하고 캐스팅 보트를 쥔 숨은 주역이라고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위와 촉은 한(漢) 왕실의 정통을 다퉜기 때문에 동맹이 불가능한 불구대천 원수였다. 손권은 이런 상황을 잘 이용해 때로 위에 신하 노릇을 자청하기도 하고, 이런 위에 대항하고자 촉과 동맹하기도 했다. 삼국시대는 이런 오와 손권이 어느 나라와 손을 잡느냐에 따라 상황이 변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손권은 촉과 동맹한 적벽대전(208)을 거쳐 촉의 관우가 번성을 공략(219)하자 위와 동맹했으며 223년 유비가 죽은 뒤에는 두 번째 '오촉동맹'을 한다. 저자는 황제에 즉위한 손권이 촉의 제갈공명에게 제안한 이제병존(二帝幷尊),즉, 두 황제가 대등한 지위에서 동맹하는 발상을 심상치 않게 평가한다. 전통적인중국의 세계관에서 황제는 오직 한 명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손권이야말로 '노회한 현실주의자'란 것이다. 더불어 저자는 이 책에서 삼국지연의가 덧씌운 이미지, 예컨대 간웅으로 각인된조조, 우국충정의 대명사 관우 등과 같은 틀에서 벗어나는 한편, 삼국시대를 중국역사상 가장 '화려했던 난세'로 간주한다. 유ㆍ불ㆍ도의 삼교가 정립하고, 문학이꽃핀 시대가 바로 삼국시대이기 때문이다. 송완범ㆍ신현승ㆍ전성곤 옮김. 544쪽. 2만5천원.

  • 문학·출판
  • 연합
  • 2011.08.03 23:02

원본 그대로 만나는 근대 책들

"배추를 통이 크고 좋은 것을 택하야 누렁잎을제치고 잘 다듬어서 물에 정하게 씻나니 씻을 때에 부서지지 않도록 조심해서 잎사귀 틈틈이에 모래가 없도록 정밀하게 씻어가지고 소금에 다시 저리나니 물 두 동이에 소금 석되만 풀어서…" 근대의 교육자 방신영(1890-1977)이 쓴 '조선요리제법'에 나오는 '통김치 담그는 법'이다. 최초의 근대식 요리책이자 스테디셀러였던 이 책이 원본 그대로의 모습으로 다시 출간됐다. 열화당이 1800년대 말에서 1950-1960년대 사이에 출간됐던 책과 기록문 가운데 재조명될 가치가 있는 책들을 엄선해 복각본(復刻本)으로 선보이는 '열화당 한국근현대서적 복각총서' 시리즈의 첫 권으로 나온 것이다. 최대한 원본의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해제도 별쇄 형식으로 제작돼 책 속에 삽입됐으며 각 권마다 고유번호가 찍혀있는 500부 한정판으로 출간됐다. 시리즈의 문을 여는 '조선요리제법(朝鮮料理製法)'은 1937년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나온 제8판을 복각한 것이다. 100년 전인 1911년 '요리제법'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세상에 나온 이 책은 1917년 '조선요리제법'으로 제목을 바꿔 정식 출간된 이후 꾸준히 판을 거듭해왔으며 최근에도 현대어로 바뀌어 출간되고 있다. 요리용어 해석과 중량 비고, 주의할 사항으로 시작해 젓갈류, 김치류, 장아찌, 조림, 찌개, 찜, 무침, 전유어 등 61개 항목 아래 500여 종의 음식 조리법이 상세하게 소개되고 있다. 제목 앞에 '主婦(주부)의 동무'라는 수식어를 붙여 나온 이 책은 '어머님 령 앞에'라는 헌사에 이어 여성 교육자 김활란과 국학자 정인보의 서문 등도 담고 있다. 조후종 전 명지대 교수는 해제에서 "이미 한 세기 전에 방신영은 우리 음식이 우수하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방대한 음식 재료와 조리법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후대에 교육하고 전하고자 했다"며 "이 책이 우리 전통음식문화의 세계화 및 그 발전방향을 세우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말했다. 524쪽. 5만원.1932년 초판이 간행된 성공회 세실 쿠퍼(한국명 구세실) 주교의 기도서 '사도문(私禱文)'도 복각본으로 소개됐다. '사도문'은 교회에서 하는 예배인 '공기도'와 달리 신앙 증진을 위해 개인적으로 바치는 '사기도' 때 사용하는 기도문이다. 김성수 대한성공회 대주교는 "'사도문'은 대한성공회의 출판활동이 한창일 때다른 여러 신앙서와 함께 발간된 것"이라며 "인간의 유한성을 넘어 무한한 존재인 하느님을 만나 자신의 내면을 돌이켜 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책"이라고 말했다. 184쪽. 2만원.

  • 문학·출판
  • 연합
  • 2011.08.03 23:02

[최명표의 전북 작고 문인을 찾아서] (24)할말 많았던 소설가, 이정환

이정환(李貞桓·1930~1984)은 전주역전에서 태어난 소설가이다. 그는 책장사하는 부친을 둔 덕분에 문학에 입문한 듯하다. 나중에 혼자 혹은 동생들이랑 책방을 경영하며 호구하기도 했으니, 그는 태생부터 책으로 먹고살 팔자였는지 모른다. 그런 환경은 그를 자연스럽게 문학판으로 유혹했을 터. 그는 집에 입고되는 책들을 무차별적으로 읽어내면서 또래들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독서량을 보였다. 그는 이미 학교 교사들도 따라가지 못할 만큼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던 것이다. 많은 독서 체험은 그를 정신적으로도 조숙하게 만들었고, 그는 해방 후에 전주남중학교를 자퇴하고 전주농고에 들어가면서부터 습작하도록 부추겼다.전쟁은 한 나라의 장래뿐 아니라,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다. 이정환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는 학도병으로 입대하여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하여 국군에 복귀하였다. 그런데 그는 임시휴가를 나왔다가 모친의 병환이 위독하여 귀대일자를 넘기면서 탈영병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다음해에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그는 무기형, 20년형, 7년형 등으로 감형을 받고 만기 석방되었다. 그의 방황을 눈치 챈 집안에서는 그를 서둘러 장가보낸 뒤, 가업이었던 서점을 운영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그의 삶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틱한 소설과 다름없다. 그런 탓인지 그는 다량의 소설작품을 발표하여 가슴속의 분노와 어혈을 풀려고 매진하였다.1969년 '월간문학'에 단편 '영기'가 당선되고 나서 그는 솔가하여 상경하였다. 그의 서울행은 궁핍한 처지를 감안하면 무모하기 짝이 없었으나, 속으로는 소설쓰기에 더 골몰하기에 서울만큼 좋은 곳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고래로 서울은 못 가진 자에게 함부로 문을 열어주지 않기로 소문난 야박한 땅이었다. 그는 동생들까지 건사할 책임에 힘겨운 나날을 보내면서도 글쓰기를 계속하였다. 마침내 '신동아'의 논픽션 공모에 당선되어 큰 액수의 상금을 받으면서 쪼들린 살림을 펼 수 있었다. 그와 아우들은 상금을 밑천삼아 서점을 내어 악착스럽게 경영한 끝에 대영서점이라는 번듯한 상호까지 내걸게 되었다.그런 한편으로 이정환은 1973년에 발행한 '겨울나비'가 출판가에 입소문을 타면서 생활도 차차 안정되어 갔다. 특히 그가 1976년 창작과비평사에서 낸 소설집 '까치방'은 작가로서의 기반을 다져주었다. 소설가 이문구가 '이정환의 시대'를 예언한 것도 그 즈음이다. 이 소설집의 성공은 그로 하여금 문단의 주목을 받게 해주었고, 1975년 장편소설 '샛강'을 '창작과 비평'에 연재하면서부터 문단에서의 입지는 확실하게 다져졌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1971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당뇨병 때문에 이정환은 1980년 실명하고 말았다.이정환의 소설세계는 자신의 체험으로 구축되었다. 그는 자신의 투병생활을 형상화한 소설 '상놈'에서 "세상은 힘세고 건강한 사람들의 것"이라던 말투로 세상을 향한 핀잔을 작품의 행간에 숨겼다. 또 수인 생활의 경험을 살려서 교도소라는 갇힌 공간을 소재로 다루었다. 구체적으로 그는 무기수, 사형수, 투옥담, 수인간의 다툼, 간수 등을 소재화하였다. 이런 경향을 가리켜서 체험의 소산이라고 서둘러 봉합할 수도 있겠지만, 군부시대에 압살된 자유의 가치를 언표한 것이라고 보아야 맞을 것이다.또 이정환이 즐겨 취급한 빈곤 문제도 작가의 체험과 연루된 것이다. 그의 문제작 '샛강'은 변두리 인생의 애환을 다룬 작품이다. 그것은 표제에서 예감되거니와,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재생산되었던 도시빈곤층의 문제를 정면에서 다루었다는 점에서 사회적이다. 그렇다고 그가 차가운 시선으로 사회를 응시한 것만 아니다. 그는 더러운 물이 흐르는 샛강 언덕에 정착하여 살아가는 가난한 군상들의 허물을 따뜻이 포옹해준다. 그의 넉넉한 마음을 따라 소란한 서사가 진정되고, 주제는 또렷해졌다.이정환의 딸 이진은 "글은 아버지에게 있어 곧 병원비요 생활비며, 심지어 다섯 아이들의 학비였고, 최종적으로는 그 자신의 존재 이유이기도 했다"고 추억하였다. 그녀의 발언은 말년에 이르러 생계용 작품을 양산하여 초기의 긴밀도를 떨어뜨린 아버지를 안타깝게 바라보아야 했던 가족의 증언이다. 평생 동안 지독한 가난과 병마와 싸우면서도 문학을 놓지 않았던 그였지만, 자식들은 하나같이 효자들이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신장을 이식시켜드리려고 기꺼이 나섰고, 조건이 맞지 않자 딸이 뒤따라 나섰다. 그 딸 이진은 작가가 되어 아버지의 문학적 업적을 현양하느라 분망하다. 자식들은 생을 마칠 때까지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잃지 않았던 아버지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했던 것이다. 요즘처럼 인륜조차 파탄나는 세상에서 이정환의 자식들이 보여준 효행은 널리 인구에 회자되어야 마땅하다.생애의 절반 이상을 병마와 싸우면서도 작가로서의 소명의식을 잃지 않았던 이정환. 비록 그는 화려한 명성을 얻은 작가는 아니었으나, 사회의 부조리를 소설화하기에 게으르지 않았던 시대의 기록자였다. 그는 가고 없으나 문학은 남아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문학의 역할과 작가의 바람직한 자세를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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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08.02 23:02

[김병기의 서예·한문 이야기] (22)万樹琪花·一莊修竹(만수기화·일장수죽)' 대련 -추사 김정희의 글씨(9)

万樹琪花千圃葯, 一莊修竹半牀書 -書應彛齋相國方家正之. 果山 金正喜만 그루 기이한 꽃나무에 천 이랑의 약초 밭.한 별장 가득 두른 잘 가꾼 대나무에 책상의 반을 채운 책.-이재 상국 전문가께서 바로 잡아 주실 것에 부응하여 쓰다. 과산 김정희万:일만 만(=萬)/ 樹:나무 수/ 琪:아름다운 옥(玉) 기/ 圃:밭 포/ 葯:약 약(=藥)/ 莊:별장 장/ 修:닦을 수(=脩: 마른 육포 수)/ 牀:책상 상/ 應:응할 응/ 彛:떳떳할 이/ 齋:집 재/ 相:도울 상, 서로 상이 글씨는 추사 김정희 선생이 만년에 그의 절친한 친구로서 당시 재상의 자리에 있던 권돈인(權敦仁)에게 써 준 것이다. 이것이 추사의 만년 작품이라는 점은 "이재상국 전문가께서 바로잡아 주실 것에 부응하여 쓰다. 과산 김정희(書應彛齋相國方家正之. 果山 金正喜)"라는 관지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과산(果山)'은 추사가 1849년 제주도 귀양에서 풀려나 1851년 7월까지 경기도 과천에 거할 때와 1851년 7월에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 다시 과천에 거하게 되는 1852년 이후 즉 추사 생애의 가장 만년에 사용한 별호이다. 이때에 사용한 별호는 '과산'말고도 '노과(老果)', '과(果)', '과지초당노인(瓜地草堂老人)', '과로(果老)' 등 '果'자가 많이 보인다.관지에 나오는 '이재상국(彛齋相國)'의 '이재(彛齋)'는 권돈인의 호이다. '상국(相國)'은 '나라(임금)를 가장 가까이서 돕는(相:도울 상) 인물'이라는 뜻으로 주로 영의정 혹은 좌의정이나 우의정에 대해 사용하던 호칭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추사가 과천에 거주하였고 권돈인이 '상국(相國)'의 자리에 있었다는 두 가지 조건을 만족하는 시기에 쓴 작품이다. 그때는 바로 1849년이나 1850년 혹은 1851년 즉 추사 나이 64세-66세 때이다. 만년의 원숙하면서도 여전히 진지하고 참신한 필획과 노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생경(生硬)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장법이 돋보이는 또 하나의 명작이다. 관지에 나오는 "方家正之"라는 말은 "방가께서 바로잡아 주심"이라는 뜻이다. '方家'란 '그 방면의 대가(大家), 전문가'라는 뜻이고 '正之'의 '正'은 '바로 잡는다'는 뜻인데 '之'를 붙인 까닭은 '正'을 분명하게 동사화(動詞化)하기 위해서이다.만년의 추사는 그의 아버지 김노경이 젊은 시절에 마련해 두었던 과천의 별장을 거처로 삼았는데 그곳은 참외가 많이 생산되는 지역이었다. 그래서 초당 이름을 '외 과(瓜)'자를 사용하여 '과지초당(瓜地草堂)'이라고 하였다. 권돈인은 과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경기도 광주의 퇴촌(退村)에 은거하였다. 그런데 퇴촌에도 참외가 많이 났던 것일까? 아니면 친구인 추사가 사용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좋았기 때문일까? 권돈인도 만년에 '과지초당노인(瓜地草堂老人)'이라는 별호를 사용하였다. 이처럼 추사와 이재는 별호를 함께 사용할 정도로 너와 나의 구분이 없이 친했다. 이렇게 친한 친구인 권돈인을 위해 추사는 이 작품 "万樹琪花千圃葯, 一莊修竹半牀書"를 쓴 것이다. 친구의 별장에 만 그루 기이한 꽃나무가 있고, 늘그막의 건강을 도울 각종 약초가 심어진 천 이랑의 약초밭이 있으며, 집안을 빙 둘러친 잘 가꾸어진 대나무 숲이 있고, 그런 별장 안의 서재에는 정갈하게 놓인 책상 위에 책상의 반을 덮을 만큼 책이 쌓여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작품을 써 준 것이다. 따뜻하면서도 맑은 우정이 뚝뚝 떨어지는 작품이다. 그런 우정을 표현한 작품임에도 관지는 "이재 상국 전문가께서 바로잡아 주시라(彛齋相國方家正之)"고 썼다. 극도로 겸손한 표현이다. 진정한 우정은 이처럼 끝까지 상호 존경하고 겸손한 데에서 피어나는 것일까? 이 작품을 보며 나의 별장에도 저렇게 万樹琪花와 千圃葯과 一莊修竹과 半牀書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앞서 옛 사람들이 나눈 우정의 깊이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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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07.27 23:02

[최명표의 전북 작고 문인을 찾아서] (23)초야에 묻혔던 시인, 양상은

양상은(也靑 楊相殷·1907~1978)은 순창 금과에서 태어난 시인이다. 그의 생애나 시세계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이 전무하다. 그가 고향에서 산 기간이 짧았고, 서울과 광주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하직한 탓이다. 그는 1929년 '조선지광'사의 기자로 입사하였다. 그것도 잠깐, 한 달 후에 그는 당시로서는 번듯한 직장을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그만두고 낙향하였다. 그때의 인연으로 그는 김억 등과 서신을 왕래하며 교분을 유지하였고, 환향한 후에는 시작에 전념하면서 식민지민의 비애를 달래었다.1929년 8월 양상은은 '문예공론'에서 독자들의 작품을 공모하자 시 '花山小景'을 응모하여 입선을 차지하였다. 그로부터 그는 여러 잡지에 한시와 시조, 시 등을 활발히 발표하기 시작했다. 시작 활동 외에 그는 한글 운동에도 깊은 관심을 나타내어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였다. 그 예가 1935년 이극로의 훈민정음 탄생 기념일 강연 문제를 시비한 일이다. 특히 양상은은 당시에 식자층에서 유행하였던 외국어 사용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 실태에 관해서 그는 "한문을 쓸 때에도 궁벽한 문자 쓰기를 좋아하며, 근래로는 남이 잘 모를 일문을 잘 쓰더니 일본문이 보통이고 보니, 또 지금은 조선문 가운데 영어, 불어, 기타 외국어가 아니면 쓸 줄을 모른다"고 힐난하였다. 그의 할이 크게 들리는 것인즉, 요새라고 해서 별반 달라진 게 없는 탓이다.양상은의 '야청시조집'(1991)을 보노라면, 대부분 시조와 한시로 이루어졌다. 그가 시조와 한시 창작에 남다른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어릴 적에 배웠던 한학의 힘이 컸다. 그는 신학문을 배우기를 고대했으나, 엄격한 가문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집안 어른들은 설진영 선생을 고빙하여 사사하도록 하였고, 그때 엄청난 한문 세례를 받은 것이다. 그런 영향인지 그의 작품에는 압록강, 대동강, 한강, 백마강, 무등산을 비롯하여 국토를 예찬하는 작품들이 많다. 또 그는 송강 정철의 문학을 찬미하였고, 백범 김구에게는 최상급의 예를 갖추어 올리는 등 한국사의 훌륭한 시인 묵객과 위인들의 업적을 기리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다. 그밖에도 그의 작품에는 정읍사와 광한루 등의 전북의 문화유산을 찬양하는 시편들이 즐비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시인으로서의 바람직한 자세를 되돌아보게 한다.이러한 시풍은 양상은이 국권을 강탈당한 채 식민지의 원주민으로 살아오면서 느꼈던 울분에 터한 것이리라. 또한 그의 성품이 올곧아서 생겨난 산물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그가 한시에 조예가 깊었던 사실을 감안하면, 옛 선인들의 시회 모습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시작품의 도처에서 명승지를 호출하고, 자신의 느낌과 고적의 사연을 결부시킨 것을 보면, 그가 수백년간 전해 내려오던 조상들의 시작 풍습을 몸에 익힌 줄 알 수 있다.그러나 이 점은 그의 시세계에 접근하려는 독자들을 멈칫하도록 부추기는 요인이기도 하다. 근래에 들어 독자층이 엷어진 한시라는 양식이 으뜸가는 이유이고, 작품의 여기저기서 뛰쳐나오는 한자어의 돌출이 둘째가는 이유이다. 게다가 다소 관념적인 취향을 내비치는 작품이 주는 '가까이 하기엔 먼 당신' 같은 선입견이 그와 독자의 사이에 거리를 두도록 조장한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양상은의 작품들은 유구한 역사와 함께 면면히 계승되어 온 한시와 시조의 맥락을 잇고 있다는 점, 한국시사에서 한 줄기를 이루고 있는 형이상학적 성향의 시세계를 증언한다는 점에서 시사적 의의를 획득한다.1936년 3월 양상은은 정든 순창을 떠나 광주로 이사하였다. 그곳에 새롭게 삶의 둥지를 튼 그는 1949년 광주에서 발행되던 '동광신문'의 기자로 입사하여 혼란기의 사회상을 취재하는 소임을 맡았다. 그 후 1951년 조선대 부속고교에 근무하면서 대학에 출강하는 등 후진을 양성하는 일에 혼신을 쏟았다. 1962년 그 학교를 사직한 그는 주로 시조와 한시를 쓰면서 산야를 주유하며 소일하였다. 아호에서 짐작 가듯이 그는 세상의 평판이나 문명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그의 작품들은 한참의 세월이 흐르기까지 세인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 것이다.양상은의 작품은 먼지에 묻혀 있다가, 효성이 지극한 아들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장남 양충희는 1991년 구름재 박병순 시인을 찾아가서 유고집의 출판 계획을 설명하고 머리글을 부탁하였다. 이에 박 시인은 그의 효성에 감동하여 흔쾌히 글을 써서 작품집을 빛내주었다. 설령 그의 부연 설명이 없었더라도, 가친의 유고집을 여섯 남매가 뜻을 모아 불효의 징표로 세상에 내놓는 일은 우러를만하다. 자기 아버지의 작품집을 내주어도 의례적인 공치사조차 안 하는 유족들이 태반인 세태에 비추어 보면, 자식들의 정성에 힘입어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작품들을 세상에 내보내게 된 양상은은 복 받은 시인이다. 이제부터라도 그의 시세계에 대한 후학들의 관심이 높아지기를 기대한다.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1.07.26 23:02

놓치기엔 아까운 숨은 명저들

우리나라에서 출간되는 서적은 연간 4만 종이 넘는다. 이중 1만 권 넘게 팔리는 책들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으니 매년 수많은 책들이 독자들의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잊혀지는' 셈이다. '지난 10년, 놓쳐서는 안 될 아까운 책'(부키 펴냄)은 지난 10년간 출간된 책가운데 "값어치나 의의에 비해 현저히 저평가되거나 아예 평가조차 받지 못하고 묻혀 버린 양서를 발굴"해 소개한 책이다. 강수돌 고려대 교수, 철학자 강신주, 영화 평론가 듀나, 미술 칼럼니스트 손철주, 우석훈 2.1연구소장, 임지현 한양대 교수 등 각계 전문가 46명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들지 못한 책들을 중심으로 총 48권의 '숨은 진주'들을 선정했다. 문학평론가 장석주는 하일지의 소설 '진술'이 "지난 10년간 내가 읽은 한국 소설 중 가장 뛰어난 품격과 고른 재미를 갖춘 소설"이라고 말했다. "드문 문제작 중 하나가 될 것"이라는 예측과 달리 큰 주목을 받지 못한 이 책에 대해 장석주는 "한국 소설이 드물게 가 닿은 최고의 경지를 보여준다. 도저한 형식 실험만으로도 주목할 만하다"고 평했다. 임지현 교수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시몬 비젠탈 센터에서 우연히 접한 비젠탈의 저서 '해바라기'를 추천했다. '해바라기'는 유대인인 비젠탈이 죽음을 앞둔 나치 친위대원 칼을 만난 경험을 바탕으로, 전 세계의 종교 지도자와 다양한 지식인들에게 끝내 칼을 용서하지 않은 자신의 행위가 옳았는지를 묻고 그 대답을 묶은 책이다. 임 교수는 그러나 한국어 번역본에는 53명의 답변자 가운데 25명의 답변만이 게재된 데 대해 유감을 표하기도 했다. 만화평론가 김낙호는 도시 부적응자를 주인공으로 한 김수박의 만화 '아날로그맨'을 '아까운 책'으로 꼽았다. '아날로그맨'은 2006년 1권이 출간된 후 후속작이 나오지 않고 절판됐다. 김낙호는 "작품이 나왔던 5년 전보다 더 빠르고 맹목적으로 변화하는 지금, 느리고 모든 것을 둘러보는 '아날로그맨'이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하다"고 말했다. 도서출판 부키는 앞으로 해마다 3-4월에 전년도의 '아까운 책'을 선정해 단행본으로 소개할 예정이다. 416쪽. 1만4천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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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07.26 23:02

[김병기의 서예·한문 이야기] (21)谿山無盡(계산무진) -추사 김정희의 글씨(8)

谿山無盡(계산무진): 시냇물도 산도 다함이 없어라.谿:시내 계(=谿)/ 山:메 산/ 無:없을 무/ 盡:다할 진이 작품은 우리나라에서 추사 김정희 선생의 작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기로 유명한 간송미술관(서울 성북동 소재)이 특별히 아끼며 자랑하는 작품이다. 간송미술관은 이 작품을 추사의 대표작 중의 대표작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혹자는 추사의 다른 글씨에 비해 필획이나 결구가 너무 파격적이라는 점을 들어 추사가 이런 글씨를 썼을 리 없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잘못된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차라리 이 정도의 큰 작품에 아무런 관기(款記: 낙관하는 글)도 없이 도장만 하나 달랑, 그것도 작품의 크기에 걸맞지 않는 아주 작은 도장만 하나 찍혀 있다는 점을 들어 의문을 제기한다면 모를까 필획과 결구를 들어 말하자면 추사가 아니고서는 이만한 작품을 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탄탄한 필획, 살아있는 필획을 설명할 때 흔히 '향상도하(香象渡河)'라는 말을 한다. '코끼리가 강을 건너듯이'라는 뜻이다. 불경에 나오는 말이다. 토기와 말과 코끼리가 함께 강을 건넜단다. 토끼는 강에 들어선 다음, 몇 발자국 가지 못해 물살에 밀려 둥둥 떠내려 가버리고, 말을 강을 건너긴 했어도 사나운 물살에 밀려 더러는 다리가 강바닥에 닿기도 하고 더러는 다리가 들리기도 하면서 뒤뚱뒤뚱 아주 불안하게 겨우 건넜다. 코끼리만 아무리 강의 물살이 급하고 세어도 전혀 흔들림이 없이 발바닥을 강바닥에 철저히 달라 붙이고서 쭉쭉 밀어가며 당당하게 건넜다.글씨를 쓸 때 붓과 종이도 그렇게 만나야 한다. 강을 건너는 코끼리의 발자국처럼 붓이 종이에 완전히 밀착하여 강한 마찰력으로 부딪혀야 한다. 그렇게 운필을 했을 때 얻을 수 있는 필획이 바로 살아있는 필획 즉 '향상도하'와 같은 느낌의 필획이다. 추사의 작품 〈계산무진〉은 바로 그런 향상도하의 필획으로 썼다. 어느 필획 하나 천근 만근의 무게로 종이위에 달라붙어 있지 않은 게 없다.필획뿐이 아니다. 결구도 기묘하기 이를 데 없다. 오른 편에 큼지막하게 자리를 잡은 변형된 모습의 '谿'자는 해서(楷書)적 관점에서 보자면 분명 잘못 쓴 오자(誤字)이다. '谿'의 왼편 윗부분에 있어야할 '爪'부분을 생략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도 이 글자를 오자로 보지 않는다. 비록 변형이 되기는 하였지만 자형으로 보나 전체적인 문장의 의미로 보나 '谿'자로 밖에 불 수 없기 때문이다. 옛 사람들은 이처럼 그 글자로 읽을 수밖에 없는 글자는 그 글자로 읽을 수밖에 없는 범위 내에서 기상천외의 변화를 추구하여 이체자도 만들고 별체자도 탄생시켰다. 추사도 그런 변형의 대가였다. 그렇다면 '爪'부분을 왜 생락 했을까? '谿'의 오른 편에 자리하고 있는 '谷'을 지금의 모습으로 오묘하게 변화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변화시켰기 때문에 오묘한 결구의 '谷'자와 그렇게 정히 잘 어울리게 된 것이다.'山'자는 자형은 전서이면서 필획은 완전히 예서의 필획으로 썼다. '山'자 아래 부분에 과감하게 여백을 남긴 것도 빼어난 장법의 운용이다. '無'자는 괴석처럼 단단하게 뭉친 필획으로 '山'보다 약간 올려서 썼다. 아래에 '盡'자를 놓기 위한 포석이다. 마지막으로 '盡'을 '無'아래에 튼실하게 배치함으로써 작품 전체를 안정된 분위기로 이끌었다. 가히 귀신같은 솜씨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이런 필획과 결구와 포치(章法)가 의도적인 계산으로부터 나온 게 아니라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순간적으로 그렇게 써져 버린 작품이기 때문에 더욱 빛나는 명작이다.이 작품은 추사가 만년에 당시 세도정치의 한 복판에 서서 세도를 부리던 안동김씨 김수근(金洙根)에게 써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수근의 호가 '계산초로(溪山樵老:시냇물 따라 산에 올라 나무하는 늙은이)'이기 때문에 그렇게들 짐작하고 있는 것이다. 김수근은 호는 비록 마치 은자(隱者)인양 '계산초로'라고 지었지만 실지 생활은 권세의 중심에 서서 '계산초로'와는 영 멀리 떨어진 생활을 하였다. 추사는 그런 김수근과 별로 친하지 않았다. 친하지 않은 사람이 써달라는 글씨라서 맘에 내키지 않아 한 마디의 관기도 쓰지 않았고 도장도 그렇게 소극적으로 자그맣게 찍은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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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07.20 23:02

[최명표의 전북 작고 문인을 찾아서] (22)평생을 단독자로 살아간 자유인, 이철균

이철균(有人 李轍均·1927~1987)은 전주에서 태어난 시인이다. 그는 1944년 5년제 전주북중학교를 졸업하고, 1946년 4월 목포의 문태중학교에 국어교사로 부임하였다. 3년 후 전주로 되돌아오기 전까지 목포에서 생활한 것으로 보인다. 1949년 6월 고향에 온 그는 전쟁 중이던 1951년 2월 중·고등학교의 분리 조치로 전주고등학교로 직장을 옮겼다. 이후 1958년 교사직을 그만 둘 때까지 그는 모교에서 후배들을 양성하면서 일상을 영위하였다. 학교에서 나온 그는 잡지 '인물계'의 편집을 맡았다고 하나, 정확한 시기는 알 도리가 없다. 1953년 2월 이철균은 서정주와의 인연으로 '문예'에 시'염원'이 초회 추천되고, 6월 '한낮에'가 2회 추천되었다. 이듬해 3월 시'소리'로 천료한 뒤 그는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하였다.그 무렵을 전후하여 이철균은 지역의 문단 활동에도 가담하였다. 1951년 10월에는 김효선 김범삼 등과 동인지 '남풍'을 주재하였고, 다음해 4월 전주의 카멜다방에서 열린 시화전에 시를 출품하였다. 또 1953년 출범한 전주문학회의 이사를 맡았다. 이러한 활동은 그의 성향에 맞지 않은 것이다. 그는 워낙 붙임성이 없고 홀로 사는 체질이라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였다. 낯을 가리는 그의 유별난 성격은 평생 고독한 독신 생활로 견인한 제일가는 요인이었다. 그는 밤늦게 귀가하여 오전 내내 잠을 자다가 한낮에 일어나 간단한 세수를 마치면 다시 집을 나섰다. 그는 1950년대에 전주의 물왕물에서 함께 살던 이복누이를 찾지 않았고, 서울에 볼 일이 있어 가더라도 친형댁조차 방문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절대고독의 세계에 유폐시키고, 그는 오로지 자신의 주관에 따라 살았다. 부친의 생존시에는 서학동 토반으로 불릴 만큼 유족한 편이었으나, 그의 일생은 지독한 가난의 연속이었다.더욱이 괴벽에 가까운 성미 탓에 이철균의 주변에는 친구가 없었다. 그는 무소유 정신에 입각하여 쪼들리는 경제 사정을 불평하지 않았고, 잘 사는 자들을 부러워하지도 않았다. 누구에게도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던 그였기에, 마음 맞는 친구를 두기가 쉽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은 그를 사귀려다가도 일방적 지출을 떠올리며 꺼려하였지만, 그의 진솔함 마음가짐을 아는 친구들은 도리어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가 말년에 이르러 궁벽한 처지에 내몰리자 지인들조차 그를 멀리할 당시, 서울에서 살던 시인 하희주는 눈물나는 우정을 보이며 외로운 영혼을 안아주었다. 그는 오갈 데 없는 이철균을 불러들여 자신이 소유한 건물에서 살도록 주선하였고, 한강에서 주검까지 거두며 몌별하였다.이철균은 불행한 시인이었다. 그 원인이 자신의 탓이든 타인들의 잘못이든 간에, 그는 세상과의 불화 속에서 울분을 연마하여 수준 높은 시세계를 일구어냈다. 그는 철저한 자유인으로 살아간 단독자답게 이승의 세파를 초월한 시적 성취를 이루었다. 그는 등단작 '염원'에서 말한 바처럼 '물오리들이 곱게 물살을 갈라도 / 무늬 하나 남기지 않는' 파란 강물처럼 살았다. 그의 시는 전통적인 사유를 바탕으로 동양적 질서를 추구한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러는 한편으로 그의 시는 '항시 새로이 불어오는 바람'을 안에 품고 있어서 읽을 적마다 진애에 찌든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이철균운 아호 '유인'처럼, 어느 곳에서나 있어야 할 사람이었고, 그가 있어야 할 자리면 꼭 있었던 시인이었다. 그는 출판할 목적으로 준비한 시집의 '자서'에서 "죽은 뒤에나 선을 뵈야 마땅하다고 늘 고집하던 것을 고쳐 생각하고, 지천명의 나이테가 지나니 한때의 매듭을 지어보자는 것이요, 또한 발표 후 손을 댄 것도 있고 해서 사회적 책임에 기인한 것이다"고 언급하였다. 과연 그의 바람처럼 시집은 사후에 간행되었다.애초에 그의 시집 '신즉물시초'는 섣달을 맞아 한국문화사에서 간행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 시집은 시인의 생애만큼이나 애처로운 운명을 지녔다. 정가까지 매겨진 이 시집은 1987년 시인이 지병으로 영면할 때까지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시인이 시집을 간행하겠다고 받은 출판지원금을 갖고 다니며 써버렸던 탓이다. 설령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 시집의 지형을 갖고 있었던 어느 시인이 동업자 정신을 발휘해서 출판을 주선하여 마무리했더라면, 시집은 한번도 제대로 웃어보지 못했던 이철균의 생에 기쁨을 선사했을 터이다. 특히 그의 자필 원고로 된 시집의 원본을 넘겨받은 시인이 지금이라도 그것을 공개해주기를 바란다.이 기구한 운명의 시집은 전북문인협회에서 그가 세상은 뜬 지 5년 후에 발간되었다. 다행히 협회에서 1992년의 사업으로 작고 문인 유고시집 출판을 정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비록 살아생전에 변변한 시집 한 권조차 갖지 못한 그였지만, 타계한 뒤에라도 명계에서 환히 웃었으리라. 그 뒤에도 전주의 후배 문인들은 힘을 모아 전주 덕진공원에 시비를 세워 그의 시업을 기리었다. 그는 가고 없으나, 오늘도 그의 시는 남아 오가는 이들을 숙연케 한다.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1.07.19 23:02

천안함 관련 책 '…청소년도서' 선정 취소

천안함 사건을 다룬 도서가 대한출판문화협회가 선정한 '올해의 청소년도서(1분기)'로 발표됐다가 뒤늦게 취소돼 출판사가 반발하고 나섰다. 창비 출판사는 13일 자사의 책 '과학의 양심, 천안함을 추적하다'가 지난달 15일 '올해의 청소년도서'로 선정돼 공문과 출협 기관지, 출협 홈페이지를 통해 공지됐으나 추후 석연치 않은 이유로 선정이 취소됐다고 밝혔다. 이날 출협 홈페이지에 새로 게시된 '올해의 청소년도서'에는 해당 도서가 포함되지 않은 29권의 목록이 올라와 있다. '과학의 양심, 천안함을 추적하다'는 그동안 천안함 관련 정부 발표에 의문을 제기해온 재미 물리학자 이승헌 버지니아대 교수가 천안함 사건에 대한 의혹들을 중심으로 사건의 전개 과정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책이다. 창비 측은 "출협은 출판계 내외부에서 이 책 선정이 부적절하다는 의견이 제기돼 재심사를 했다고 해명했으나 '내외부'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며 "출협은 어떤 인사의 요구에 따라 재논의가 이뤄지고 이번 선정이 취소됐는지 명백하게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출판사는 또 "출협이 선정 취소 경위를 해명하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실무자의 전산 착오라고 말했다가 말을 바꿨다"며 아울러 "별도로 위촉한 심사위원회가 아닌 출협의 운영위원회가 최종 목록을 선정한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박익순 출협 사무국장은 "특별히 외압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며 "정치적ㆍ이념적인 도서는 선정하지 않는 것이 원칙인데 선정 과정에서 미처 이를 고려하지 못해 나중에 바로잡은 것"이라고 밝혔다. 박 국장은 이어 "통상 심사위원회가 2배수로 올린 후보도서 가운데 운영위원회가 30권을 선정하는 방식"이라며 "해당 도서가 천안함 사건과 관련해 객관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개인의 의견을 담은 것이라 청소년들에게 권장하기에는 적절치 않다고 운영위원회에서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 문학·출판
  • 연합
  • 2011.07.13 23:02

[김병기의 서예·한문 이야기] (20)眞興北狩古竟(境)진흥북수고경 -추사 김정희의 글씨(7)

이것은 신라 24대 진흥왕(재위 540∼576)이 황초령에 세운 순수비를 보호하기 위해 지은 비각의 현판글씨이다. 진흥왕은 당시 막강한 고구려에 공동대응하기 위해 백제와 맺었던 나제동맹(羅濟同盟)을 일방적으로 깨고, 백제를 기습 공격하여 한강 유역의 백제 땅을 빼앗고 성왕을 사로잡아 죽였으며, 또 가야를 평정하고 북쪽으로는 고구려의 영토까지 진입함으로써 신라의 세력을 크게 확장한 왕이다. 이렇게 영토를 넓히고 국세를 확장한 진흥왕은 창녕, 북한산, 마운령, 황초령 등 네 군데에 자신이 다녀갔음을 기록하는 순수비를 세웠다.13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 조선 후기에 이르러 이들 네 군데의 비석 가운데 북한산비와 황초령비는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없게 되었는데 바로 추사 김정희가 북한산비를 발견하였고 다시 추사의 조언을 받아가며 추사의 두 친구인 이재(彛齋) 권돈인(權敦仁)과 침계(?溪) 윤정현(尹定鉉)이 황초령비를 발견하였다. 먼저 함경감사로 부임한 권돈인이 비의 아랫부분 두 쪽을 발견하였고, 이어 추사 김정희가 함경도 북청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을 때 함경감사로 부임한 윤정현이 윗부분의 일부를 발견하여 세 쪽의 비를 접합한 다음 원래의 위치인 황초령보다 아래인 중령에 다시 세우고, 이울러 비를 옮겨 세우게 된 내력을 새긴 이건비(移建碑)와 함께 비를 보호할 비각도 지었다. 비각을 지은 후, 윤정현은 추사에게 현판을 부탁하였으니 추사가 쓴 또 하나의 명작 '眞興北狩古竟'은 이렇게 탄생하게 된 것이다.이 현판의 글씨를 통하여 우리는 추사의 강건한 필력과 탁월한 조형 감각을 볼 수 있다. 자형은 평범하나 매우 우람한 필획으로 쓴 '眞'자도 아름답거니와 '興'자의 윗부분은 들쭉날쭉하게 변화를 준 다음 아랫부분은 굵은 가로획으로 정리하고 다시 두 점은 모양을 달리하여 좌우로 힘차게 삐침으로써 강한 생동감을 부여하였다. 다시 '北'자는 안온하게 썼다가 '狩'자는 왼편의 '?(犬)'은 크고 굵게 쓰고 오른 편의 '守'는 작게 씀으로써 대소와 강약의 변화를 크게 주어 강한 대비감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古'자는 탄탄한 필획과 좌우의 대칭을 잘 맞춘 결구를 갖춤으로써 앞서 '狩'자가 보여준 파격적인 분위기를 다시 안정적인 분위기로 이끌고 있다. 마지막으로 '竟'자에 이르러서는 추사의 기발한 창작정신을 더욱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竟'은 '일을 끝맺는다.'는 의미의 '마침 경'자이고, '境'은 땅의 경계를 의미하는 '지경 경'자 이기 때문에 이 비가 가진 경계비이자 순수비의 의미로 보자면 응당 '境'으로 써야 맞다. 그런데, 추사는 '竟'으로 썼다. 왜 그랬을까?한자는 같은 음의 글자끼리는 서로 빌려 쓰곤 한다. 이른 바 '6書'중의 가차(假借)가 바로 그것이며 가차의 의미를 흔히 '동음통가(同音通假)'라고 풀이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추사는 아름다운 서예적 장법(章法: 포치)의 응용을 염두에 두고 '境'을 '竟'으로 동음통가를 하면서 '竟'의 맨 위 점 하나를 생략하였다. 바로 위에 있는 '古'자의 '十'자 부분에 위쪽으로 돌출한 획을 점으로 간주하고 그 점을 '竟'자의 점으로까지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1획2용'의 시각적 효과를 노리고서 '境'으로 쓰지 않고 '竟'으로 쓴 것이다. 추사의 예술적 감각과 창의력을 실감하게 하는 부분이다.그런데 현판의 글을 '眞興北狩古境'이라고 한 점은 다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진흥왕이 자신이 새로 개척한 국경을 둘러보면서 '古境'이라는 표현을 할 리 없으니 진흥왕이 주어가 되려면 '國境'이라고 하거나 '土境'이라고 해야 맞다. 진흥을 주어로 하면서 문장은 추사의 입장에서 쓰다보니 '古境'이라고 하는 착오를 범한 것 같다.아무튼 이 황초령비의 발견은 추사와 두 친구 권돈인과 윤정현이 함께 이룬 한국금석학사에 길이 남을 큰 공적이다. 그렇게 큰일을 함께 하는 절친한 친구였기에 추사는 윤정현의 호 '?溪'를 쓰기 위해 지난주에 본 바와 같이 30년 동안이나 고심한 것이다. '?溪'의 '?'자는 '沈'과 동음이므로 서로 통용할 수 있는 글자이다. 그런데 중국 송나라 때의 큰 학자로서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朱熹=朱子)의 어릴 적 이름이 바로 '침계(沈溪)'이다. 주자학이라고도 했던 성리학을 신봉한 조선 사회의 학자로서 주자를 닮고 싶은 마음에 '沈'과 발음이 같으면서 비교적 까다로운 글자인 '?'자를 택해 '?溪'라는 호를 짓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1.07.13 23:02

'전국 상춘곡 백일장' 일반부 대상에 이정인 씨의 '월이(月耳)'

정읍시가 후원하고 문인협회정읍지회가 주관한 '제5회 전국 상춘곡 백일장 공모전'에서 일반부 대상에 이정인씨의 '월이(月耳)'가 선정됐다.또 학생부 장원에는 김 빈(정읍여중 3년) 양의 '한 문인을 위하여'가 선정됐다.이들에게는 각각 상장과 시상금 100만원과 30만원이 수여됐다.지난 5월 한달간 실시된 공모에는 일반부 24명, 학생부 68명등 총 92명이 참가했다.장원과 차상 작품은 오는 10월에 발간되는 내장문학 29호에 게재될 예정이다.이번 대회 시상식은 11일 김생기 시장과 정창환 정읍문화원장, 김희선 예총정읍지부장,은희태 문인협회 정읍지회장을 비롯해 수상자, 문인협회회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정읍시 예술창작스튜디오에서 열렸다.일반부 입상자는 ▲장원 - 이정인(전북대) ▲차상 - 전병운(전주), 김간란(인천) ▲차하 - 남설희(음성), 최흥석(정읍), 백은경 (정읍), 문사랑 (동서대) ▲입선 - 장희담(전주), 김병철(정읍)학생부 입상자는 ▲장원 - 김 빈(정읍여중 3년) ▲차상 - 이정석(정읍고 3년), 정윤철(남성고 2년) ▲차하 - 김보람(고양예고 3년), 김아람(정주고 2년) ▲임채민(남성고 2년), 김찬호(남원용성고 2년)▲입선 - 전대원(목포덕인중 3년), 공기쁨(남성고 2년),백수미(전주여고 3년), 채혜지(군산여상 1년), 하태성(정읍중 2년)등이다.

  • 문학·출판
  • 임장훈
  • 2011.07.12 23:02

[최명표의 전북 작고 문인을 찾아서] (21)사바의 꽃, 시인 하희주

하희주(河喜珠·1925~2004)는 전주 아중리에서 태어난 시인이다. 그는 상생소학교를 마치고, 해방되던 해에 5년제 전주북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재학 중에 동급생들과 한글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어 한 해 더 학교를 다녔다. 곧바로 전주우체국에 취직한 그는 1947년까지 사무를 보았다. 그러나 적성에 맞지 않았던지 그는 그해 12월 국민학교 교사 자격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동국대 불교학과에 입학하였다. 문학을 공부하고 싶었으나, 당시 국문학과가 설치되지 않은 탓에 진학한 것이다. 그로 인해서 그는 공부에 취미를 붙이지 못하고 이듬해에 중퇴하고 말았다.1948년 모교인 전주북중학교 교사로 부임한 그는 1951년에 전주고로 전임하였다. 잠시 그는 김제여고로 전출하였다가 모교로 되돌아왔다. 전쟁 중에 후퇴하여 전주고등학교에 재직한 서정주와의 인연으로 그는 1955년 '현대문학'의 시 부문에서 추천을 받았다. 그는 3회 추천 제도가 대세였던 등단 제도에 따라 1958년 1월에 추천을 완료하고 시인으로 데뷔했다. 이어서 고향을 떠나 서울의 중앙고등학교로 전임하게 되어 가족을 이끌고 상경하게 됐다. 국어교사로 충실하게 근무하던 그에게 처자식뿐 아니라 동생들까지 부양할 책임이 늘어났다. 이에 그는 규칙적인 생활이 보장되나 봉급이 적은 학교를 그만두고 입시학원 강사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의 고전문학 강의는 학원가뿐 아니라 학생들의 입소문을 타고 널리 알려지게 되어 최고 대우를 받는 유명강사가 되었다.1977년 하희주는 학원에서 물러난 뒤, 여생을 보람 있게 지냈다. 우선 그는 소유하고 있던 강남 논현동 사거리의 건물 뒤편에 자비를 들여 경로당과 시조회관을 지었다. 1983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문화 시설이 전무하던 그 시대의 형편으로 보면 매우 선구적인 사회봉사활동이었다. 그는 건축은 물론 운영비까지 부담하였다. 이때 전주의 시인 이철균을 불러 경로당에서 살도록 해주었고, 그가 숨을 거두자 장례까지 치러주었다. 일생을 불우하게 보낸 고향 친구의 애통한 순간을 지켜준 그의 우정은 주위에 자자한 칭송을 남겼다.하희주는 과작의 시인이었다. 그는 1994년 고희를 맞아서야 첫 시집 '자화상'을 펴냈다. 세상살이에 열심이었던 그였기에, 등단 40년을 맞을 때까지 시집의 출판을 미루었던 것이다. 그는 정확히 10년 뒤에 두 번째 시집 '사바의 꽃'을 간행하였다. 이 시집을 낼 당시에 그는 지병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한 상태였지만, 이승에 남겨줄 마지막 선물인 줄 알고 한 땀씩 공들여 가며 교정을 보았다. 시집의 사진 속에서 그는 지팡이를 짚고 고개를 기우려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마치 자신이 세상을 떠나거든 기억해달라는 듯이, 그가 운명한 다음날에 나온 시집이었다.그의 제2시집은 독특하게 구성되어 있다. 시인은 시편의 끝마다 '붙임'을 두었다. 이것에 그는 시작하게 된 동기나 소회를 남기기도 하고, 나름대로 작품의 해설을 적었다. 또 작품마다 낱말풀이를 달아서 국어교사다운 도리를 잊지 않았다. 그는 고어나 전라도 사투리, 흔히 쓰지 않는 말 등에 자세한 토를 달아 읽는 이를 도와주려고 노력하였다. 세상 사람들과 마지막 이별을 하는 순간까지 교사로서의 직분을 잃지 않은 그의 마음 씀씀이다. 그의 노력은 '사바의 꽃'으로 남았고, 그의 시는 이생에서 살다간 아름다운 삶의 기록이었다. 평소에 시를 가리켜 "강물처럼 흐르고 바다처럼 너울거리며 치솟아 부서져 잉태한 무지개를 찬연하게 비추는 물보라 같은 율어(律語)로 피워내는 꽃 중의 꽃"이라고 했던 하희주. 그는 노경에 이르러 원숙한 시의 경지를 보여주었으며, 자재한 언어로 모국어의 운율감을 되살리려고 힘을 쏟았다. 그가 시도한 '가새짬시조'는 용어부터 생경하거니와, 이 형식을 도입한 그는 도처에서 수년간 다져진 시적 내공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예컨대 그는 시조 '꽃 소리'에서 운율과 한시의 평측법을 파격하여 변용하고 행을 들쭉날쭉하게 배치함으로써, 꽃의 소리가 초래한 파동과 파장을 시각화하여 보여주는 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고전문학에 조예가 깊은 그가 아니고서는 감히 꾀하지 못할 바이고, 자유시에 비해 정체되어 있는 시조의 대중화 측면에서도 각광받아야 할 터이다.하희주는 말년에 전북 지역의 문학 발전을 위해서 '모악문학상'을 제정하고, 거액의 상금을 쾌척하였다. 1993년 시행된 첫 해의 수상자는 작고한 시인 이병훈이었다. 평생 동안 사치하지 않고 착실히 번 정재를 모아 후배 작가들의 문학욕을 고취할 만큼 고향을 사랑했던 하희주였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이 고장에서는 그의 시세계에 관한 연구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제라도 서둘러 그의 시적 업적을 평가하여 한국시문학사에 편입시킬 일이다. 그의 독실한 애향정신은 전북애향운동본부에서 수여한 상으로 치하되었을지 모르나, 시인에 대한 문학사적 성취는 후학들에 의해 보상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1.07.12 23:02

시속에 녹여진 삶의 성찰

40여 년 시밭을 기웃대면서도, 시쓰기는 미뤘다. 이유는 하나. 시인 자격으로 '발가벗고' 나설 용기가 없었다. 김영재 전북대 영문학과 교수(64)가 '이리저리 돌무덤 사이 비집고만 다니다' 만용에 가까운 객기를 부려 첫 시집'나비 크로키(신아출판사)'를 내놓았다. 시인은 "'땅 속 깊이 묻어둔 씨앗 / 움 한 번 터보려 / 짓누르는 돌더미 밑에서 몸부림'만 쳐온 것 같다"고 적었다.시인은 봄날 대학 캠퍼스를 그린 표제작'나비 크로키'를 통해 나비가 처음 세상을 대면할 때의 고통을 읊었다. 문학평론가 오하근(원광대 교수)은 '캠퍼스 회색 건물','시멘트 계단','퇴색한 병상복' 등을 통해 현대문명에 맞서 병든 나비를 통해 우리의 자화상을 그려냈다고 평가했다. 그것은 대학입시에 내몰린 교육 현실일 수도, 경쟁으로 인해 그늘진 현대인의 모습을 여물처럼 오래 곱씹어 풀어냈다. 삶에서 마주치는 슬픔의 국면들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은 시세계를 펼친 것. 향수, 시심, 회한, 반어 등 8개 의미의 숲에 서정성을 실험하는 그림을 선물한다. 그의 오랜 벗인 임영택 화백이 고맙게도 그의 시에 어울리는 그림 8점을 추려줬다."젊은 시절 나에게 사랑과 꿈과 희망을 준 사람들, 나를 실망시킨 사람들, 분노하게 한 사람들, 이 모든 사람들이 내 시상을 불러일으켜준 사람들입니다. 아마도 약간씩 과장돼 묘사되긴 했으나, 시적상상력 혹은 시적 허용이란 말로 용서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정읍에서 태어난 시인은 전북대 영문학과를 전공하고, 동대학원에서 현대 미국소설을 연구·강의하면서 대학신문사 주간, 인문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한영어영문학회장 등을 역임했다.

  • 문학·출판
  • 이화정
  • 2011.07.12 23:02

젊은 화가의 눈으로 다시 보는 이중섭

화가 몽우(夢友) 조셉킴(본명 김영진.35)이 어릴 적부터 자신의 우상이었던 이중섭의 삶과 작품세계를 짚어본 에세이집 '이중섭을 훔치다'(미다스북스)를 펴냈다. 조셉킴은 초등학교 중퇴 학력에 병마와 싸우면서 빚더미에 올라앉는 등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도 그림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며 외국에서 더 실력을 인정받은 작가다. 작가는 5살 때 아버지가 사오신 이중섭 도록 '대향이중섭화집'에서 소 그림을 보자마자 이중섭의 그림에 빠져들기 시작했다고 털어놓는다. 그는 "나는 이중섭의 그림만 보면 심장이 뛴다. 기분이 매우 좋아져서 울컥한다. 그리고 끝내는 가슴이 뜨거워진다"고 고백한다. 크레파스로 수없이 이중섭의 그림을 따라 그렸지만 타는 듯한 붉은색을 흉내 낼수 없자 붉은색을 관찰하기 위해 집 안팎에서 수시로 불을 질러 정신병원에 끌려갈 뻔한 일화도 소개한다. 이중섭의 그림에 빠져든 나머지 그의 그림을 훔치고 싶었다는 작가는 이중섭의 작품을 따라 그리고 그를 닮고 싶어하면서 비로소 천재화가 이중섭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가 그림을 통해 만난 이중섭은 위대한 민족의 정서를 생생하게 표현하고자 노력한 천재적 화가이자 시인의 감성을 가진 문인이며 담배 파이프를 직접 깎고 문양을 새겨 넣은 조각가였고 천을 직접 재단해 자신의 몸에 맞게 옷을 만든 세련된 디자이너였다. 책에서 작가는 천재화가 이중섭이 아닌 인간 이중섭이 실제 느낀 감정과 그가작품에 쏟아낸 감정들, 그리고 그러한 감정들이 작품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살펴본다. 이중섭에게 보내는 헌시로 시작되는 책은 이중섭의 모든 것을 연구하고 닥치는대로 그림을 따라 그리며 그를 닮고자 했던 작가의 눈을 통해 이중섭을 새롭게 조명한다. 작가가 세계적 미술컬렉터인 독일인 토머스 마틴의 주선으로 이중섭 그림의 복원작업에 참여했던 일화도 흥미롭다. 256쪽. 1만6천500원.

  • 문학·출판
  • 연합
  • 2011.07.12 23:02

고은 "아내와 살았던 일상이 감동적"

여든을 앞둔 나이에도 왕성하게 창작 활동을 하는 거장 고은(78) 시인이 나란히 두 편의 시집을 출간했다. 2008년 '허공' 이후 3년 만에 낸 신작 시집 '내 변방은 어디 갔나'와 첫 연(戀)시집 '상화 시편:행성의 사랑'(창비)이다. 고은 시인은 6일 오후 무교동의 한 식당에서 막걸리를 한 잔 걸친 뒤 "내가 1980년대에 연시집을 냈다면 ('접시꽃 당신'의) 도종환 시인 다음은 갔을 것"이라고 껄껄 웃으며 시집 발간 소회를 전했다. ◇'상화 시편: 행성의 사랑' = 고은 시인은 이날 아내인 이상화(64) 중앙대 영어과 교수에게 바치는 이 연시집에서 '사랑은 사랑의 부족입니다' '아내의 잠' 두편을 골라 직접 낭송했다. 1958년 문단에 모습을 드러낸 뒤 허무주의적 초기시, 현실 참여 저항시, 불교의게송(偈頌)과 선시(禪詩)의 전통을 잇는 단시(短詩)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스펙트럼을 펼쳤지만 사랑 노래를 읊은 것은 처음이다. "1980년대에 한 번 연시를 쓰려다가 아내가 말려서 그만둔 적이 있지요. 지금낸 시는 일상을 담았지만 그때 썼다면 '오~ 나의 태양~' 같은 식으로 상당히 몽환적이었을 것입니다. 지금보다는 더욱 좋은 게 나왔을 거에요. 지금은 퇴락했잖아요.(웃음)"고은 시인이 아내를 만난 것은 1974년이다. 1983년 결혼한 뒤 30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보냈다. "1974년 겨울/그녀의 긴 편지를 받았습니다 (중략) 기어코 1983년 결혼 이래/아내의 긴 편지와 좀 덜 긴 편지를 받았습니다 (중략) 황홀경이었습니다 언제부턴가나의 편지는 아내의 편지가 되고 말았습니다/더이상 참을 수 없이 나는 아내의 오른손이고 왼손이었습니다"('아내의 편지' 중)아내를 부를 때 '너'부터 '님'까지 다양한 호칭을 활용한다는 시인은 "내 작품은 아내와의 합작"이라며 "상화가 없었다면 나는 이미 15년쯤 전에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돌아갔을 것"이라며 "아내와 나는 '무갈등 체제'로 싸움이 성립되지 않으며지금도 보면 볼수록 아내가 좋다. 요즘 젊은 부부에게도 '사랑하기보다 존경하라'고 말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아내와 살면서 일상의 사소한 티끌 같은 시간의 집적이 참 감동적이었다. 우리는 나이 차도 없고 성도 서로 모른다"고 미소 지으며 "다만 이 시집에는 다른 연인들을 위한 가능성도 스며들었기 때문에 우리 둘만의 사사로운 시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시인은 시집에서 굵고 호방한 필치로 사랑을 노래한다. 시인에게 연인은 달빛을 저만치 밀어내는 '벌거숭이 둘의 나신'('달밤' 중)이자'무수한 정의들 이전/무수한 정의들 이후'('아직 가지 않은 곳' 중)에 자리한 인연이다. 그는 직접 그린 그림으로 표지를 장식했다. 또 이상화 교수가 쓴 시 '어느 별에서 왔을까'도 담았다. 고은 시인은 그림에 대해서는 "가족 생일 때 시와 편지를 주고받는데 몇 해 전아내의 생일 때 그린 그림이다. 형상화할 수 없는 꽃밭을 담았다"고, 이상화 교수의시에 대해서는 "아내의 시가 '싸가지 없이' 나보다 더 낫길래 한 편 슬쩍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내년 아내가 정년 퇴임한다"며 "내후년에는 멋지게 준비해서 시베리아로 여행을 떠날 것"이라며 아내를 위한 또 하나의 선물을 준비하고 있음을 공개했다. 292쪽. 9천500원.◇'내 변방은 어디 갔나' = '상화 시편:행성의 사랑'이 고은 시인의 첫 연시집으로 눈길을 끈다면 '내 변방은 어디 갔나'는 시인의 시적 전통을 잇는 시집으로서의미를 갖는다. 고은 시인은 "두 시집을 유비(類比)할 수는 없다"며 "시인으로서는 '내 변방..'을 지키고 싶고 '상화 시편'도 양보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양손에 술잔을 들고어느 것을 마실지 정하지 못하는 모양새"라고 설명했다. 군사독재 치하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던 고은 시인은 이 시집에서 현시대와 문명에 맞서며 당당하게 목소리를 낸다. "저 1970년대 10년의 날들/그 싸움 기슭/내 맹목의 살점들 지글지글 타던/모두의 숨찬 넋들로 새로이 와야 한다//이 모독의 지상 여기저기/내 석탄의 고뇌가 와야한다"('태백으로 간다' 중)그는 '변방'을 자처한다. 문학평론가인 도정일 경희대 영문학과 명예교수는 시인이 말하는 '변방'을 "시는 이 시대의 변방"이라며 "변방은 우리의 고향이고 시대를 넘어선 곳에 있으며 시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삼천리강산이 모조리 서울이 되어간다/오, 휘황한 이벤트의 나라/너도나도/모조리 모조리/뉴욕이 되어 간다 (중략) 가장 흉측망측하고 뻔뻔한 중심이라는 것 그것이 되어 간다"('내 변방은 어디 갔나' 중)고은 시인은 이어 '중심 문명'을 향해 "더이상 발견하지 말 것/다시 말한다/더이상 발견하지 말 것"('포고' 중)이라고 일갈을 날린다. 그러면서 그는 세상이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절망보다는 희망을, 부정보다는 긍정의 힘을 강조한다. "그래도 다시 태어나야 한다/이 모독당한 산야에 태어나야 한다 (중략) 그래도 살아야 한다/생명이란/얼마나 독점이냐/얼마나 집착이냐 (중략) 그래도 일어서야 한다/이 과잉의 땅에서/이 소외의 땅에서/('그래도 다시 태어나야 한다' 중)136쪽. 7천원.

  • 문학·출판
  • 연합
  • 2011.07.07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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