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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표의 전북 작고 문인을 찾아서] ⑩희망의 아동문학가 김완동

김완동(金完東·1903~1963)은 전주에서 태어난 사회운동가이자 교육자이며 아동문학가이다. 그의 아호는 한결과 포훈(苞薰)이다. 그는 193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구원의 나팔소리!'가 3등 당선되고, 같은 해 조선일보의 신년 현상 문예에 동화 '약자의 승리'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그는 1930년대 한국 아동문단은 물론, 전라북도 지역의 아동문학 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한 작가이다. 그러나 그의 아동문학 활동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거의 다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다 보니 그는 한국아동문학사에서 매몰된 작가에 속할뿐더러, 전라북도 문학사에서도 잊혀진 작가에 속한다.김완동은 전주보통학교와 전주고보를 졸업하였고, 군산공립보통학교를 시작으로 대부분의 생을 교직에 종사하였다. 그는 군산에서 재직하던 중에는 지역의 항일운동에 노골적으로 개입하였다. 그는 이 시기에 군산기독청년회, 군산청년동맹, 신간회 군산지회의 준비위원 등으로 활동하던 중 파면되었다. 그는 1929년 초에 군산을 떠나 상경한 후에, 조선어 철자법 연구를 목적으로 경성 시내 공사립 초등학교 교원들이 출범한 초등학교 조선어연구회의 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에 그는 1940년 함경도 성진의 메리볼틴여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다가 해방 후에 귀향하였다. 그는 나중에 전주 시내의 초등학교 교장을 지내다가 정년퇴임한 뒤에, 전북일보사의 편집 고문과 전북어린이신보의 주간을 역임하였다. 그의 사후에 후학과 친지들에 의해 유고 선집 「반딧불」(보광출판사, 1965)이 출간되었다.생전에 김완동이 발표한 아동문학 작품들은 동요, 동시, 동화, 소년소설, 평론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는 이 작품들을 경성에 체류하는 기간에 집중적으로 발표하였다. 그의 동요와 동시는 전통적인 소재를 차용하여 재래의 리듬을 적용하고 있다. 그는 자수보다 한국어의 고유한 소리결에 착목하여 여러 가지 변이형 리듬을 시도하였다. 특히 그는 동요의 창작 과정에서 섬세한 음감을 앞세워 모국어가 지닌 교착어로서의 곤란도를 효과적으로 우회하였다. 또한 그의 동요에는 식민지의 고단한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희망을 심어주려고 노력한 작품들이 눈에 띈다. 당시 전주는 일제의 농산물 침탈이 직접적으로 자행되는 피해 지역이었다는 점에서, 그가 동요에서 내일의 희망을 추구한 사실은 강조되어야 한다.그의 아동문학 중에서 주목할 분야는 동화이다. 특히 당선작 '구원의 나팔소리!'는 일제의 사상 통제를 감안하면 가히 혁명적 내용을 담고 있다. 옛날 어느 나라의 임금이 정사에는 무관심한 채, 자신의 이익을 악착같이 쫓다가 아들과 백성들에게 왕위를 빼앗기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민의를 수용하지 않는 임금은 축출해도 무방하다는 맹자의 혁명관을 잇고 있다. 이처럼 신념에 입각하여 작품을 발표하던 그였기에, 문학을 사회적 반영물로 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동화를 "작가 자신의 아동기를 회상하면서 동심을 가지고 아동이 추구하는 세상을 동화로써 그려내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동화는 아동들의 생활 장면을 반드시 반영하여야 할 뿐더러 그 내용이나 형식은 역사적 조건에 따라 변화한다고 보았다. 그의 민족중심적 동화관은 당대의 평단으로부터 "표현방식과 사건 전개가 능란하다"는 평가로 보상받았다.김완동의 문학관을 좀더 살필 수 있는 분야는 평론이다. 그는 동화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아동에 대한 체계적 인식을 부르짖었다. 그는 동화의 요건과 아동의 발달 단계를 비교하면서 작가들에게 필요한 덕목을 자세하게 제시하였다. 그의 평필은 난삽하거나 강경하지 않고 차분하여 독자를 설득하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나아가 과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논리를 전개한 그의 비평은 당대의 인상주의적이고 감상적인 글들에 비해 윗길에 속한다. 특정한 이념의 전달보다는 대상의 특성을 정확히 파악하기를 바란 것이 그의 평문에 배어 있는 강점이다. 스스로 나이 어린 아동을 대상으로 경직된 이념을 내세우기에 앞서 식민지 현실에 대한 투철한 인식과 아동의 특수성을 조화시키고자 노력한 그였다.문학 활동 외에 김완동은 한글운동에 열심이었다. 그는 조선어강습회에 참석한 후 한글이 지닌 운동적 차원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한글맞춤법통일안에 반대하던 조선어학연구회의 움직임을 비판하였다. 한글맞춤법의 통일은 문학의 형성 과정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작가에게 일정한 학력을 요구하고, 맞춤법을 준수하는 동안에 민족의식을 내면화하도록 강제한다는 점에서 독립운동에 못지않은 비중을 갖는다. 김완동은 한글이 문화운동의 매개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공공의 적을 향한 단일 대오의 중요성을 역설한 것이다. 더욱이 외세에 의해 국자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한글'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모국어의 비참한 운명은 작가 김완동에게 말 못할 비애감을 안겨주었을 터이다. 식민지시대의 아동들에게 희망을 선사하며 전북의 아동문단을 선도했던 그의 빛나는 업적들이 지금까지 조명조차 받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1.04.12 23:02

[최명표의 전북 작고 문인을 찾아서] ⑨목가적 서정시인 - 신석정

신석정(辛夕汀·1907~1974)은 부안에서 태어난 시인으로, 본명은 석정(錫正)이다. 그는 향리에서 보통학교를 마치고 한학을 수학하다가 1930년 상경하여 중앙불교전문강원에서 불경을 공부하였다. 당시 그곳에는 불교의 사회 참여를 강력히 주장하던 완주 출신의 유명한 박한영(石顚 朴漢永) 선사가 주석하고 있었다. 그는 유불선에 통달한 학승으로, 신석정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이며 신심의 발원을 빌어주었다. 그의 작품에 배어 있는 유교적 영향이나 불교 사상은 이때 형성된 것이다. 그곳에서 신석정은 선암사에서 올라온 시인 조종현과 동문수학하면서 죽이 잘 맞았던 듯하다. 둘은 동광사로 주요한을 찾아가거나, 불교사에 가서 한용운을 예배하거나, 동아일보사에 들러 이광수를 만나 문학과 세상에 관한 고견을 들었다. 이러한 만남이 인연이 되어 신석정은 훗날 김억 정지용 박용철 등과 교유하게 되었다.고향에 내려온 신석정은 상경 중의 경험을 토대로 세상을 응시하는 안목이 넓어졌다. 그의 시가 1930년대에 접어들어 한층 원숙해진 것이 그 증례이다. 당대의 비평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은 그는 시문학파의 일원으로 가담하며 문단의 입지를 다지게 되었다. 특히 김기림은 그의 시적 특성에 주목한 최초의 비평가였다. 신석정을 가리켜 목가시인이라고 부른 것이나 그것의 당대적 의미가 남다른 줄 안 이도 그였다. 그의 신석정에 대한 애정은 계속되어 첫 시집 「촛불」이 발간되자 독후감에서 '촛불'이 '횃불'인 이유를 설득력있게 해석해 주었다. 최근 들어 신석정을 목가시인의 반열에서 떼어 놓으려는 노력이 일고 있다. 그러나 목가시인이라는 별칭이 폄하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게 아니고, 더구나 김기림의 평가처럼 '건강하고 원시적인 말하자면 어린이의 세계'야말로 식민지 이전의 세계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목가시인이야말로 외세에 강점되기 이전의 세계를 지향하는 용어인 셈이다.신석정의 시세계가 변모하게 된 계기는 러시아 작가 이반 뜨르게네프와의 만남이 결정적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는 러시아의 정치적 상황이 식민지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뚜르게네프의 소설을 통해 알았다. 그가 시에 '그 전날 밤'의 주인공 인사로프와 '아버지와 아들'의 바자로프를 등장시켜 자신의 생각들을 주제화한 것도 그 덕분이었다. 두 인물은 러시아의 봉건 질서에 맞서 새로운 세상을 개척하려는 '잉여인간'이다. 신석정은 역사적으로 전제 군주 밑에서 신음하던 러시아 민중들의 편에 서서 인텔리겐챠로서의 책무를 다하려고 노력한 주인공들의 행동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지식인된 자의 몸가짐에 대하여 고민하게 되자, 그의 눈에 식민지의 '슬픈 전설'과 '슬픈 구도'가 포착되기 시작하였다. 그로부터 신석정은 시가 현실을 떠나서 존립할 수 없다는 사실은 뚜렷하게 깨달았다. 이 점만 보더라도 그의 시에 배어 있는 뚜르게네프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그러므로 그의 시적 특성으로 검출되는 노장사상을 위시한 동양적 사유방식은 노년기의 시를 구획하는 자질로 보아야 맞다. 무릇 한 시인의 사상이란 세월을 더하면서 깊어지기 마련이라면, 청년 시절의 방황이 끝난 무렵에 전래하는 정신사적 전통에 귀의하여야 자연스럽다. 이런 측면에서 김기림이 예언한 '어린이의 세계'는 예리한 비평가적 안목의 소산이었다. 신석정은 궁핍한 식민지시대에 찾아갔던 목가적 세계로부터 동양적인 세계에 안착하여 시작을 마감한 셈이다. 두 세계는 원시적 질서가 훼손되기 이전의 자연과 다르지 않을 터이고, 자연에 살기 적합한 사람은 어린이처럼 순결한 영혼의 소지자가 아니면 안 될 것이다. 그를 두고 목가시인이라고 칭하기를 거부하는 축은 이 점을 간과하고 있다.신석정은 1920년대 초반부터 작품을 발표한 이래, 전북을 떠나지 않고 시작에 전념하였다. 해방 후에 그는 이병기, 김해강 등과 전라북도 문단의 초석을 다지는 일에 앞장섰다. 한국전쟁 후에는 호남의 대표적인 시인들끼리 모여 만든 '시와 산문'의 공동회장으로 전남의 박정온과 활동하였다. 이 회는 전남의 김현승, 이동주 등과 전북의 이병기, 김해강, 신석정, 서정주, 백양촌 등이 전후의 황폐한 시심을 추스르려고 조직한 동인회였다. 그 뒤에 신석정은 여러 중등학교에서 근무하면서 후진을 양성하면서 전북대학교에 나가 시론을 강의하였다. 그가 ?자유문학?의 선고위원으로 있는 동안에 등단시킨 시인들은 나중에 전북 문단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하여 문향의 지위를 고양하는데 앞장서고 있다.그는 생전에 「촛불」, 「슬픈 목가」, 「빙하」, 「대바람소리」, 「산의 서곡」 등의 시집을 상재하였다. 그는 고향의 문학 발전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전라북도문화상, 전주시문화장, 한국문학상 등을 받았다. 그는 지금도 덕진공원에 시비로 남아 내방하는 시민들에게 생전의 시를 들려주고 있다. 그를 사숙한 시인들이 전북시의 서정성을 잇고 있고, 근래에 신석정의 시정신을 기리고자 향리에 문학관을 건립하고 있으니, 그가 남긴 시향이 내외에 그윽해지리라.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1.04.05 23:02

우리 시대의 '엄마'…국경은 없다

소설가 신경숙(47)에겐 '어머니'가 아니라 '엄마'다. '어머니'란 말을 써 놓고 글이 안 써져 '엄마'라고 고쳤더니 술술 써졌다고 한다. 글이 막힐 때면 '엄마'에게 전화를 걸기도 한다. 한참 통화 하다 보면 뜻하지 않게 문제가 해결된 적이 많아서다. 언어는 달라도 '엄마'라는 이 단어가 주는 가슴 먹먹한 울림은 전세계 어디든 마찬가지다. 「엄마를 부탁해」(Please Look After Mom·번역 김지영)가 5일 미국에서 공식 출간된다. 일단 출발은 좋다. 한국 작가의 미국 데뷔작으로는 이례적으로 초판 10만부를 찍었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많은 현지 매체들이 출간 전부터 호평을 쏟아낸 덕에 초판 발매 전 2판 인쇄에 미국 7개 도시와 유럽 8개국 북 투어, 전 세계 24개국 번역·출판까지 진행됐다. 외국 문학이 미국 전체 출판 시장의 1%도 못 미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책에 대한 기대가 남다른 이유다.「엄마를 부탁해」를 출간한 미국을 대표하는 문학 전문 출판사 크노프는 작가에게 "이 소설을 통해 엄마라는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이것이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메시지다. 한국적 어머니가 지닌 보편성이 국경 너머 닮은 점이 있다"고 한 것으로 알려졌다. 작가 역시 다른 인터뷰를 통해 "한 북클럽의 할머니가 '엄마와 끝까지 사이가 안좋았는데 진심으로 엄마와 화해하고 싶어졌다'고 말해 가슴이 뭉클했다. 한국에서 독자들이 보였던 반응과 비슷했다"고 밝혔다. 이어 "울림과 여운이 많은 우리말의 의미가 번역을 통해 점점 명확해져 (내 작품이) 제대로 이해받는다는 느낌"이라고도 했다.영문판 「엄마를 부탁해」가 성공하면, 한국 작가들이 미국 출판 시장에 진입하기가 훨씬 수월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그의 뒤를 이을 한국 작가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동시에 더 많은 한국 작가들을 양성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1963년 정읍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85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겨울 우화」가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왔다. 장편소설 「깊은 슬픔」, 「외딴 방」, 「기차는 7시에 떠나네」, 소설집 「강물이 될 때까지」,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등을 펴낸 바 있다.

  • 문학·출판
  • 이화정
  • 2011.04.05 23:02

[내가 권하고 싶은 책] (21)서광일 시인 -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윤동주의'서시' 中) 바라며 하늘을 올려다 본다거나 오순도순 별을 헤아리며 밤을 지새본 지도 참 오래된 것 같다. 그렇다. 요샌 참 별 볼일이 없다. 도시의 밤 불빛이 너무 밝아서라고, 먹고 살기 바쁜데 무슨 별이냐고 변명하기엔 어느새 왠지 모를 먹먹함이 가슴을 채우고 있을 것이다.「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김영사)는 천문학을 연구한 저자가 우리 역사에 대해 몇 가지 의문을 품으면서 시작한다."단군왕검이 조선을 서기전 2333년에 세웠다고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우리는 정말 반만 년 역사를 지닌 민족인가? 우리는 정말 북방에서 유래한 민족일까?"등 이러한 의문을, 특히 11세기 이전의 역사에 대한 기록이 매우 빈약한 실정(이 점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가 막히다. 반만 년이라는 역사 가운데 고려 이전의 기록이 어떻게 딸랑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두 권만 남게 된 것일까?)임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기록된 고대 천문 현상을 바탕으로 단군조선을 검증하려 하지만 역시 사료 부족으로 한계에 부딪힌다. 하지만 일식이 지구상의 특정 위치에서만 관측이 가능한 점을 이용해 고구려, 백제, 상대 신라, 하대 신라의 일식 최적 관측지를 표(p56)로 보여준다. 더불어 실측 기록을 중국에서 베끼지 않고 독자적인 천문 관측을 했었음을 밝혀낸다.저자 박창범 서울대 천문학과 교수는 우리 민족이 고대로부터 하늘의 과학, 천문학을 사랑해왔고 여러 가지 문화유산을 남겼음을 강조한다. "세계 절반 이상이 우리나라에 모여 있는"고인돌에 새긴 별자리(고대인들은 이미 별 모양을 둥글게 그렸다. 또한 빛의 밝기에 따라 크기를 다르게 했다), 암각화, 고구려 고분 벽화, 천상열차분야지도, 첨성대 등 선조들이 남긴 유산 (특히, 윷놀이 윷판에 디자인 된 우주 원리는 놀랍고 재밌다)은 미래를 밝히는 거울일 지도 모른다. "고리타분하게 무슨 역사야!" 이런 타박을 들어가면서 난 불행하게도 역사를 제대로 배우지 않은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는 걸 보고 있다. 자연을 정복 대상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자연의 조화와 원리를 관찰하고 상징체계와 삶의 방식으로 발전시키던 선조들의 지혜는 분명 상상력이 빈곤해지는 우리에게 또 다른 아이디어를 제공할 것이다. 언젠가 별 헤던 그 밤처럼…….▲ 서광일 시인은 1973년 정읍 출생으로 1994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제1회 중앙신인문학상(2000)'을 수상한 바 있다.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1.04.04 23:02

[최명표의 전북 작고 문인을 찾아서] ⑧부안에 은거한 작가, 김태수

백주 김태수(白洲 金泰秀·1904~1982)는 부안 출생의 작가이자 교육자였다. 그는 유학을 숭상하는 집안에서 태어나서 신학문을 배우려고 가출하여 서울의 중동중학교를 수료하였다. 여느 집안처럼 유달리 손자를 중지하던 조부가 금전 심부름을 시키자, 그는 상환금을 갚는 대신에 상경해버린 것이다.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의 기대를 배반하고 자신의 바라던 바를 이루려는 그의 담대한 성격을 유추할 수 있는 일화이다.그는 1924년 「개벽」에 희곡 '희생자'가 당선되었고, 11월에는 「조선문단」에 소설 '과부'를 발표하였다. 그의 작품을 뽑은 이광수는 '여자의 심리를 그린 것으로 우리 문단에 드문 작품'이라는 호평을 내렸고, 당대의 합평회에서도 유명 작가들의 찬사가 계속되었다. 김태수는 1년 6개월 정도의 문단생활에서 소설, 희곡, 수필, 동화 등 각 분야를 망라하며 30여 편의 작품을 활발히 발표하였다. 그가 낙향한 뒤에는 문단과 거리를 두고 생활한 탓에, 기존의 한국문학사나 전북 문단에서도 거론되지 않았다.김태수의 작품세계는 식민지 사회의 궁핍한 현실을 고발하고 타파하려는 의지로 충만해 있다. 그의 출세작 '암야'는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는 문제를 두고 조손간에 갈등상을 노출한 작품이다. 작가는 식민지하의 시국을 '어두운 밤'에 비유하며 사상의 전환기를 문제삼고 있다. 이 작품이 정신적인 면에서 식민 상황을 혁파하려는 의지를 표출했다면, 소설 '살인 미수범의 고백'은 '새 나라를 세울 새 사람'의 행동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주인공 K는 이 세상이 잘 되어지기만 기다리지 말고, 차라리 살인미수범이 되어서라도 사회의 부조리를 척결하는 인물이다. 김태수는 그를 통해서 식민 통치하의 민중들이 겪고 있던 모순을 해소하기를 소망하였다. 그는 다소 도식적이고 투박한 주제의식을 내세워 작품화하던 차에, 고향에 내려와서 변혁운동에 투신하여 사상의 실천에 가담하게 되었다.그는 1928년 전북 지역을 휩쓸어 갔던 고려공산청년회 재건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을 선고받았다. 그 무렵에 동아일보 부안지국장을 경영하며 부안에 야체이카를 조직한 것으로 보면, 김태수는 노동조합운동에 상당히 깊숙하게 관련되어 있었던 듯하다. 아마 부안 출신으로 조선공산당의 조직책이었던 김철수나 서울청년회의 신일용 등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을 터이다. 더욱이 소설가 이익상이 그의 은사였고, 서울에서 유학하던 경험까지 더해진 그로서는 자연스럽게 일제에 대한 항거수단으로 사회주의를 선택했을 것이다. 당연히 일경의 감시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그는 감옥을 체험한 이후에 사회주의는 물론이고, 문학까지 폐기하고 말았다.일제는 1908년 전주와 군산 사이에 최초의 포장도로인 전군가도를 개설하고 나서, 전국적인 도로망을 구축하느라 부산하였다. 그에 따라 자동차가 도입되면서 식민지 사회는 폭치시대로 접어들었는 바, 김태수는 이 무렵에 고향에서 운수업을 시작하였다. 그는 안전자동차와 남선교통, 금만자동차 등을 잇따라 설립하여 상당한 자본을 축적하게 되었다. 그의 사업 수완은 남달라서 을림광업을 앞세워 광산업에도 진출하였다. 또 백합 양식사업에도 뛰어들어 부안양식업협회 초대 회장을 맡기도 하였다.김태수는 사업에서 벌어들인 돈을 가산의 증식이나 가문의 이익 증대에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향리에 학교가 없는 줄 알자 부안중고등학교를 세웠다. 이어서 낭주학회를 만들고, 여성들을 위한 부안여중고도 설립하였다. 그의 줄기찬 육영사업은 이영일(春軒 李永日)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내일네일을 가리지 않고 서로 믿고 도운 양인의 우정은 길이 오르내릴 만하고,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교육입국을 뼈에 사무치도록 절감했던 김태수의 신념도 숭앙될 일이다.그의 문학적 재능이나 육영 의지는 후손에게 계승되어 찬란히 빛을 발하였다. 시인 김민성(金民星)은 가친의 유업을 이어받아 학교를 운영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부안의 향토사학자로 활동하였다. 또 그는 1960년 「자유문학」으로 등단한 뒤에 시작품을 왕성하게 발표하여 시집 「파도가 밀려간 뒤」 등을 발간하였다. 그는 선친이 상재한 「부안향토문화지」의 후속작으로 「오오, 변산이여」 등을 발행하여 부안의 문화유산을 널리 소개하는 일에 앞장섰다. 그가 부안 출신 매창을 현양하는 사업에 골몰한 것도, 결국 애향심에 투철했던 가친의 위업을 기린 일 중의 하나였다.김태수는 비록 활동 기간이 짧은 작가이지만, 전북문학사의 온전한 서술을 위해 필히 거론되어야 한다. 그의 유작들을 수습한 작품집이 늦게나마 발간되었으니, 앞으로는 그의 문학세계를 심층적으로 파헤치는 기회가 마련되기를 기대해 본다. 그 일은 문학 연구자들의 몫이기도 하나, 전적으로 지역의 문화적 유산을 선양하려는 지자체의 행정적 노력이 앞서야 한다. 게다가 부자가 남부럽지 않은 문학적 업적을 남겼으니, 한자리에서 논의하면 보기에도 좋을 것이다.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1.03.29 23:02

[내가 권하고 싶은 책] (20)장창영 시인 - 문태준의 '맨발'

가깝고도 먼나라 일본에서 들려온 지진 소식은 우리에게 살아 있음과 그 소중함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지진 이후 밀려온 쓰나미,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그 짧은 찰나의 시간에 사람들은 무엇을 떠올렸을까! 아내를 차 밖으로 밀어 살리고 사라진 남편이나 손자의 사진첩을 찾기 위해 죽음의 길을 떠났던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가족이, 또 아련한 추억이 우리 삶과 어느 지점 쯤에서 대체될 수 있는가를 반문하게 만든다.지진과 쓰나미로 엉망이 되어버린 도시, 도처에 깔린 죽음의 상흔 한켠에서 떠올리게 되는 시가 바로 문태준의 「가재미」이다. 시인은 어느 날 들렀던 큰어머니의 병문안 길에서 "죽음만을 보고" 있는 모습을 통해 그이가 살아 왔던 치열한 삶을 떠올린다. 그리고 병실에 누워 있는 모습 너머에서 지난했던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현실을 목도한다. '가재미'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우리에게 삶이란 죽음의 또다른 얼굴로 다가오기도 한다.'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중인 그녀가 누워있다 /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중략)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 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어쩌면 우리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죽음은 우리 주변에 늘 함께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삶의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모르고 그냥 지나쳤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어느 순간에 죽음이 삶의 또다른 이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주변 사람들의 죽음이나 어떤 특별한 계기들을 통해서, 다만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너무 늦어서 후회하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얼마 전에 나온 시인의 산문집에는 그의 시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들이 보인다. 산문집 제목도 「느림보 마음」이다. 각종 미디어와 인터넷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에 '느림의 미학'이라니. 이쯤 되면 눈치 빠른 이는 시인의 심성과 세상 살아가는 이치를 알아차렸을 법도 하다.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맨발」은 각박한 세상에서 우리 주변을 다시금 돌아보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갔다 /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일본 대지진의 희생자들도, 지금 이 순간 살아 숨쉬고 있는 우리도 결국에는 맨발에서 와서 맨발로 간다. 이처럼 삶과 죽음, 열림과 닫힘을 아우를 수 있는 시선이야말로 이 시인의 가장 큰 미덕이다. 오늘날 우리는 취직에 힘들어하는 88만원 세대, 장 보기가 살벌한 물가, 하루가 다르게 오르는 부동산 시장 등 좀처럼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다. 공허한 메아리보다 주변에 따뜻하게 건네는 말 한마디가 시보다 더 큰 울림과 감동을 준다. 오늘만큼은 우울했던 세상사를 잠시 잊고 문태준의 「맨발」과 함께 멋진 세상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겨우내 기다리던 봄이 성큼, 오고 있다.▲ 장창영 시인은 전주 출생으로 2003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200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부문으로 등단했다. 전북대 국어국문과와 동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현재 전북대 국문과 겸임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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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03.28 23:02

[최명표의 전북 작고 문인을 찾아서] ⑦태양의 시인 김해강

해강 김대준(海剛 金大駿, 1903~1987)은 전주 출신의 시인이자 교육자였다. 그는 가친이 학감으로 재직하던 천도교단의 창동학교를 마치고 서울의 보성고보에 진학하였다. 당시 고모부 최린의 집에 기거하던 그는 명망가들이 자신의 책상을 가운데 두고 기미독립만세운동을 사전 협의하던 광경을 목도하고, 독립만세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일경의 피검을 피하여 귀향하였다. 그 사건으로 인해 상경하지 못한 그는 전주의 신흥학교와 전주사범학교를 마치고, 1925년 진안에서 교편을 잡으면서부터 신문 지상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였다.마침내 그는 192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새날의 기원'이 당선되었고, 11월에는 「신문예」의 작품 공모에 시 '흰모래 위를 걷는 처녀의 마음'이 당선되었다. 또 부인의 이름으로 공모한 '문자보급가'가 1931년 조선일보에 당선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화려하게 문단에 등장한 그는 식민지 현실을 굵은 톤으로 비판하면서 일거에 중견시인으로 발돋움하였다. 당시 문단을 주도하던 카프가 그의 시를 주목하여 동반자작가의 반열에 편입한 사실이나, 당대의 평론가들이 고평한 사실들이 이를 뒷받침한다.그는 이웃의 시인 김창술과 연배가 비슷하고 시적 성향이 유사하여 잘 어울렸다. 두 사람은 조국의 현실에 분노하면서 서로 도우며 전북 시단을 주도하였다. 김해강은 시편들을 활발히 발표하는 한편, 지역의 청년운동에도 힘을 기울였다. 천도교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천도교청년회 전주지회의 간부로 활동하면서 도내 전역을 순회하며 강연하였다.1935년부터 그는 시전문지 「시건설」을 주재하였다. 중강진의 남인 김익부가 재정을 담당하고, 작품의 선고나 편집은 그가 맡았다. 이 잡지는 일제의 탄압으로 잡지 발간조차 순조롭지 못하던 시기에 유수 시인이나 신인들이 작품을 발표하는 장이었다. 훗날 대시인이 된 서정주가 자발적으로 투고할 정도로 이 잡지의 명성은 전국에 자자했다. 이 무렵 그는 김남인의 초청을 받아 금강산과 만주 일대를 여행하며 이국정조에 관심을 가지면서 서정적 경향의 작품을 쓰기 시작하였다.김해강은 단적으로 말하여 '태양의 시인'이다. 그는 시단에 나온 후로 줄곧 식민지 상태의 해체를 노래하였다. 그의 웅건한 음성은 1920년대 시단에 유행하던 장시 형식으로 각종 지면을 장식하였다. 예를 들어 그의 시 '용광로'는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들을 녹여버리자는 무정부주의적 사상을 시화한 작품이고, 시 '지주망'은 전국에 걸쳐 감시망을 친 일제의 잔악한 통치방식을 우유한 것이다. 시 '폭치시대'는 1920년대 말부터 식민지 도시인들을 감염시켰던 성적 타락을 폭로한 작품이고, '물레방아'는 일제에게 농작물을 수탈당하는 농민들의 애환을 담은 작품이다. 또 '오오 나의 옛 요람이어'는 전주의 화려한 과거를 회상한 작품이고, 한때 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수록되었던 유명한 '가던 길 멈추고' 등은 금강산 8경을 노래한 서정시편이다. 이와 같이 그의 시가 거느리는 음역은 광활하다. 또 김해강은 '별나라'에 동요를 발표하였고, 1940년에는 전주에서 발행되던 동광신문에 소설 '장설라'와 '사랑의 여명' 등을 연재하기도 하였다.해방이 되자 모교인 전주사범학교 교사로 자리를 잡은 그는 이병기를 도와 1947년 전라북도문화인연맹을 창설하는 등 도내의 문단을 바로세우는 일에 앞장섰다. 또 1959년에 그는 전주문학회를 해체하고 신석정 등과 문인의 집을 발족시켰다. 그리고 1962년에는 시력 60년 동안 한번도 고향을 떠나지 않고 도내의 문학 발전을 위해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회원들의 추대로 초대 예총 전라북도지부장을 맡았다.김해강은 교육자로서 한국전쟁 중에 전주고등학교를 자리를 옮긴 후 정년퇴직할 때까지 재직하며 숱한 인재들을 길러냈다. 학생들과 교직원들은 1968년 퇴임하는 그를 향한 경의의 표시로 성금을 모아 시선집 「동방서곡」을 봉정하였다. 1984년 그는 제자 육기창의 도움으로 「기도하는 마음으로」를 발간하여 생전에 두 권의 시집을 갖게 되었다. 1930년 「기관차」를 발간하려다가 검열에 걸려 실패하고, 1942년 「동방서곡」과 「아름다운 태양」을 발간하려다가 좌절되었던 그의 바람이 제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이 밖에 그는 '전북의 노래'를 비롯하여 '전주시민의 노래'와 '춘향의 노래' 등을 작사하였다. 한때 초등학교 운동회 때마다 시끄럽게 들었던 "모교의 영예를 한 몸에 모아 / 당당히 출전한 우리 선수들"로 시작되는 응원가도 그의 작사에 황덕철이 곡을 붙인 것이다. 또 김해강은 도내 여러 각급학교의 교가를 작사해 주었다. 이 점은 그가 도내에서 존경받는 대시인이었던 사실을 단적으로 증거해준다.생전에 조국의 해방을 열망하며 태양을 노래하던 김해강은 이상스럽게 그보다 못하고, 시대에 따라 신념도 없이 모호한 행적을 보인 시인들보다 각광받지 못한 편이다. 차라리 그가 남긴 족적이 너무 넓어서 접근하기 어렵다고 하는 게 정직할 텐데, 덕진공원에 시비만 덜렁 남아 시인의 위업을 증언하니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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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03.22 23:02

[내가 권하고 싶은 책] (19)극작가 최일걸 -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고전문학은 오랜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널리 읽힌 작품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하나의 작품이 망각에 묻히지 않고 오랜 시간 동안 읽힐 수 있는 힘의 근원은 무엇일까? 고전의 지속성은 원형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굳이 칼 융의 원형무의식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인간에겐 태고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근간을 이루는 원형이 있다. 고전문학이라 하면 시큰둥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거의 속도의 광기라 불릴 만큼 빠르게 변하는 현대 사회에 와서도 우리가 고전문학을 읽어야 하는 까닭은 우리의 근간을 이루는 뼈대가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보지 않고 어떻게 자기 자신을 명확하게 밝힐 수 있단 말인가? 고전문학은 결코 진부하지 않다. 고전문학 속엔 과거가 아닌 우리의 내일이 있다.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으로 불리는 햄릿, 리어왕, 오셀로, 멕베스는 지금까지도 널리 읽히는 고전문학에 속한다. 굳이 희곡집으로 접하지 않았더라도 영화나 연극으로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을 접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오늘날에 와서도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은 재해석되어 자주 연극 무대에 오른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희곡집이 아닌 소설이나 동화로 읽은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접했고, 알고 있는데도 필자가 희곡집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을 권하는 이유는 셰익스피어가 인간의 원형을 이루는 핵심을 정확히 짚어 그것을 극으로 집대성했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은 삶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할 뿐만 아니라 그에 관한 깨달음의 길을 열어두고 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를 대명제로 하는 <햄릿>은 인간의 증오심을 모티브로 한 복수극이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얼마나 갈등하고 번민하는가. 그 고뇌의 깊이를 햄릿에서 가늠할 수 있다. 간계에 속아 질투의 화신이 된 오셀로, 혈육 간의 유대의 파괴를 그린 리어왕, 야망이 초래하는 비극적인 결말에 도달하는 멕베스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과 마주칠 수밖에 없으며, 자신의 삶이 비극적인 결말에 도달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각하게 된다.비극은 운명론과 모종의 결탁을 하고 있다. 하지만 운명은 결코 거역할 수 없는 게 아니다. 운명이 촘촘한 그물이라 할 때, 그 씨줄이 외적 요인이라면 날줄은 자기 자신인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에서도 외적 요인인 씨줄과 주인공인 날줄이 교묘하게 교차하며 상호 작용한다. 그런데 이 극이 비극적인 결말에 도달하는 것은 주인공들이 자신의 삶에 주체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외적 요인에 자신을 그대로 내맡겼기 때문이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조차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생이란 극을 스스로 이끌어갈 수 있는 힘은 자신의 내밀한 속에 있다. '주체가 되느냐, 개체에 머무느냐?' 햄릿처럼 심각하게 고민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작가 최일걸씨는 진안 출생으로 우석대를 중퇴했다. 1995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2010년 제18회 전태일문학상 소설 부문과 5.18문학상 詩 부문에 당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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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03.21 23:02

[최명표의 전북 작고 문인을 찾아서] ⑥전북 계급주의 사단의 개척자 김창술

야인 김창술(野人 金昌述·1902~1953)은 전주 출신의 시인이다. 일제 시대에 그는 유엽, 김해강 등과 전주시회를 조직하는 등 고향의 문학 발전에 공을 쏟았다. 해방 후에 그는 이병기, 김해강, 신석정, 채만식 등과 전북 문단의 재건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던 차에 전쟁이 발발하고 서울이 수복되자 그는 향리를 떠나 서울로 거주지를 옮겼다. 1953년 11월 3일 그는 잠깐 외출하겠다고 집을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유족들은 이 날을 기일로 삼고, 가묘를 써서 그를 기리며 봉제사하고 있다.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의 행적은 자세히 알 턱이 없는 연구자들은 한국근대시사를 그릇 서술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먼저 그는 무학의 노동자 시인이 아니다. 그는 전주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전주의 남부시장에서 순창상회라는 포목상을 하며 넉넉하게 살았다. 두 번째, 그는 시집 「열과 광」을 낸 적이 없다. 이 시집은 당시 조선일보에 출판 불허 사실이 나와 있고, 김창술은 문우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선총독부의 검열에 걸려 시집을 내지 못하는 울분을 토한 바 있다. 셋째, 김창술은 1928년 동향의 시우 김해강과 함께 「기관차」라는 시집을 펴내려다가 그마저 불허되었다. 그는 생전에 변변한 시집조차 발간하지 못한 것이다.김창술은 사상적으로 진보적 색채가 강한 시인이었다. 그가 1927년 발표한 시 '전개'에는 '전북청년동맹위원회에게 보내노라'는 관련 정보가 부기되어 있다. 또 그 무렵에 발표한 시 '군산 해안에서'는 식민지시대 유일한 합법 정당이었던 신간회의 군산 지부 활동을 암시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밖의 시작품들도 조국의 해방을 염원하는 강렬한 서사를 담고 있어서 문학사가들은 그를 카프 시인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마저 부정확하다. 그는 해방 전에 전주를 떠난 적이 없고, 카프가 전주 사건으로 해산되기 전에 시작 활동을 중단하였다. 그의 전기적 생이 불확실한 탓에 이러저러한 문학사적 과오가 생겨난 것이다. 그 증거는 해방공간에서도 확인 가능하다.1946년 2월 그는 조선문학자대회의 참가를 요청받았다. 하지만 신석정의 출석과 달리 회의록과 출석자 명단에서 그의 이름은 찾아보기 어렵다. 도리어 그는 1930년대 초반에 시작을 중단한 이후 작품 생산에 나서지 않았다. 유족의 증언에 따르면 이 시기에 그는 서울과 고향을 오가며 포목을 거래하느라 분주하였다고 한다. 이 사실은 그가 전쟁 중에 북한군에 끌려가 처형 직전에 탈출했다는 증언과 함께 해방기의 소란한 정국에서 시작보다는 은일을 택한 그의 행적을 유추하는데 도움을 준다.김창술의 시세계를 단적으로 말한다면, 반외세 민족 해방 의지의 표현이다. 그는 1920년대 초에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이 범주에서 한번도 벗어나지 않았다. 비록 습작기의 작품에서는 개인적 서정을 노래한 작품들이 더러 눈에 띈다. 그러나 그가 강고한 시대 현실과 열악한 식민지적 조건을 직시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구체적 현실을 매개항으로 설정하여 당대의 상황을 응시하여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식민지 민중들에게 시급한 생의 조건은 '절대 평등'의 구현이라고 보고,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윤리적 명제를 정치적 명제로 전환시키려고 노력하였다.이처럼 김창술의 시적 욕망은 철저히 식민지 현실에 기초하여 발아되었다. 그는 일제의 교활한 분열정책에 의해서 민족 구성원 내부의 균열이 발생하고, 식민 당국의 비호를 받는 부르주아지들이 발호하자 그의 시는 집단적 화자를 내세워 당대의 궁핍한 현실을 고발하는데 집중되었다. 이 무렵 전북 도내에서는 옥구 이엽사농장 쟁의 사건(1927. 11), 도내 최대 지주 백인기 댁 습격 사건(1928. 12) 등을 거치며 소작쟁의가 격화되고 있었다. 또 삼례에서는 정미소와 운송점 사이의 임금 문제(1930. 7) 등이 발생하여 노동권의 보장은커녕, 농산물을 수탈당하며 생존을 위협받는 사태에 직면해 있었다. 이에 김창술은 시 '앗을대로 앗으라'에서는 농민들의 울분에 찬 분노를 대신하고, '지형을 뜨는 무리'에서는 노동자들에게 희망을 제시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만치 그는 현실에서 단련된 경험을 토대로 일상적 체험을 시적으로 수용할 만큼 각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예컨대, 그 "문명! 발달이 빠름을 더할 때 일거리를 잃은 자가 버쩍 느나니"('진전')라고 예언할 정도로, 그는 시대의 흐름을 진단하고 예견할만한 예지를 확보하고 있었다.그렇지만 김창술은 밝혀지지 않은 이유로 시작을 중단하고 말았다. 살아서 시집 한 권조차 펴내지 못한 그의 시편들은 식민지시대의 시사를 조감하는 연구자들이 필수적으로 검토할 만큼 의의를 인정받고 있다. 만약 그가 작품 활동을 계속했더라면, 전라북도의 시단은 더욱 다채롭고 풍요로웠을 터이다. 무릇 서정시를 사소한 개인적 감수성의 표현과 동일시하는 무리들을 대할 적마다, 그의 현실지향적 시편들이 시의 다양성을 웅변하기에 충분하여 삼삼하다.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1.03.15 23:02

故박용하 모친, '나의 아들, 진실한 박용하' 출판

지난해 6월 세상을 떠난 한류스타 故박용하의 어머니 오영란 씨(58)가 8개월간의 침묵을 깨고 아들과의 추억을 담은 책을 출판했다. 산케이스포츠는 10일 오씨가 가도카와 서점을 통해 이날 수기 '나의 아들, 진실한 박용하'를 출간했다며 책은 박용하를 중심으로 서로 의지하며 살아온 끈끈한 가족간 사랑이 그대로 담겨있다고 전했다. 책에는 고인의 초등학교 시절의 첫사랑과 실연, 1994년 첫 출연 드라마의 에피소드, 배우 배용준과의 비화 등을 5장으로 나눠 260페이지에 걸쳐 소개됐으며 박용하의 미공개 사진을 비롯해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던 생전의 마지막 인터뷰도 수록됐다. 오영란씨는 수기를 출간한 배경과 관련, "훌륭했던 가족의 모습을 세상에 남기고 싶다. 용하의 끔찍했던 사고를 잊고 웃는 얼굴로 지냈던 가족의 지난날을 되찾고 싶었다"고 신문에 밝혔다. 오 씨는 이어 "용하가 남긴 자기 인생의 궤적을 이어가는 게 엄마의 몫"이라며 "박용하는 언제나 웃는 얼굴이었다. 주위 사람이나 팬과 함께 웃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다. 그렇게 밝은 아들과의 즐거운 추억만을 기억하길 바란다"고 부탁했다. 후지TV의 인기 정보프로그램 '도쿠다네'도 이날 오전 오 씨와의 인터뷰를 특별 제작해 방송했다. 한편, 박용하의 일본 공식 팬클럽이 주최하는 필름콘서트 '박용하 FILMS 2004~2010 ☆We LOVE Yong Ha☆'도 5일 니가타에서 시작돼 오는 29일 도쿄 공연까지 전국 11군데를 돌며 총 23회에 걸쳐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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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
  • 2011.03.11 23:02

'전주시 열린 시민 강좌' 찾은 고은 시인

'떠도는 자'의 한평생 시 쓰기. 바로 고은 시인(78)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지난 7일 미국 '컨템퍼러리 아츠 에듀케이셔널 프로젝트'(Contemporary Arts Educational Project)가 수여하는 '아메리카 어워드'(America Award)의 수상자로 선정된 데에 "황송합니다, 황송해요."라고 답했다."사실 전주에 마음의 빚이 있어요. 2009년인가요. 나를 한 번 오라고 초청했는데, 거절했어요. 내 친구가 전화를 줘서 흔쾌히 오겠다고 했습니다."8일 전주 시청 강당에서 열린 전주시 열린 시민 강좌에서 그는 가람 이병기, 육당 최남선, 고운 최치원 등을 통해 시대와 시의 연결 울타리를 넘나들며 '바다의 시 정신'을 강조했다. 그에게 바다는 우주적이며 자기 폐쇄적인 세계를 벗어나는 것으로 '바다의 시 정신'은 사람들에게 적극 다가가는 시를 쓰겠다는 의지로 읽힌다."한국 근대시의 시초인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알고 있지요? 당시에 바다와 소년이 등장한 것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한국 현대시의 출현을 알린 사건이죠. 과거엔 우리 시에 바다가 거의 없었어요. 최치원의 시에 중국으로 건너갈 때의 풍랑이 시련으로 조금 언급되기도 했지만, 바다는 우리에게 금역의 공간이자 절망과 죽음의 부정적 대상이었지요."그는 이어 "황진이마저도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 하면 다시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할 제 쉬어간들 어떠리'라고 읊었듯 바다는 두 번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 금기의 대상으로 여겨졌다"고 했다. 바다를 중심에 둔 시 정신이 중요하지만, 실제 삶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고민이다."그런 의미에서 육당이 대단한 발견을 한 것이죠. 이제 한국 문학이 바다 앞에서 청장년이 된 것인데, 바다는 시의 운명적 기호로서 우리 앞에 존재하는 겁니다. 한국 현대시는 노 하나 저으며 죽느니 사느니 하면서 살아남아 100년인데, 사실은 그 바다가 강력한 원점이 됐다는 것이죠."그는 이어 시인들에게 당부하는 말로 "시를 쓸 때 절로 나오게 하라"면서 "시에 너무 고도의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시 정신에 너무 고취되지 말것"을 조언했다."시에는 두 가지가 있지요. 하나는 많이 읽히는 시가 잘 쓴 시요, 또 하나는 어딘가 숨어 박힌 시가 잘 쓴 시에요. 요즘은 박혀 있는 시가 드물어요. 그게 있어야 하는데…. 시적 불운이 필요해요. 보면 아무 매력도 없는데 어딘가에 기가 막힌 것 말입니다."군산 출생인 그는 1958년 「현대시」와 「현대문학」 등에 추천돼 문단 활동을 시작, 첫 시집 「피안감성」(1960)을 비롯해 시선집 「어느 바람」, 서사시집 「백두산」(전 7권), 「고은 전집」(38권) 등 150여 권에 달한다. 1989년 이래 전세계 20여 개 언어로 번역 돼 해마다 노벨 문학상 후보 중 한 사람으로 거론된다. 그는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회 의장, 하버드 옌칭연구소 특별연구교수 등을 거쳤으며, 현재 겨레말 큰사전 남북공동편찬위원회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 문학·출판
  • 이화정
  • 2011.03.09 23:02
문화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