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26)(주)보배-⑥전성기와 쇠퇴
1970년을 전후한 시기, 전국의 소주시장은 그야말로 춘추전국시대였다. 1960년대 중반 300여개에 달하던 소주업체는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254개로 줄어들었다. 진로와 삼학, 대선, 백화 등 대형 업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제법 큰 술도갓집 수준에 불과할 만큼 영세했다. 1969년 5월 중앙동에서 마동으로 이전한 문병량 사장은 남선양조장 설립후 처음으로 소주공장을 확장하고 공격적 마케팅을 위해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1970년 3월 경품부대를 조직, 판매 작전을 전개하고 나섰다. 당시 소주업계는 경쟁이 치열했고, 자사 제품 판매를 늘리기 위해 경품부 판매가 많았다. 당시 경품은 승용차, 피아노, TV, 자전거, 선풍기, 금반지 등이었다. ▲ 전국으로 뻗어가는 보배 1970년 7월 전주에 출장소를 개설하며 전국 시장 확대를 선언한 문병량 사장은 이듬해에는 충북 청주에 출장소 문을 열었고, 1972년 6월 충북 제천출장소, 73년 2월 강원도 춘천연락소, 4월 목포출장소, 강진출장소, 대전출장소, 9월 정읍출장소, 광주출장소, 영산포출장소 등을 잇따라 개설하며 전국적으로 판매망을 확대해 나갔다. 정부의 주류 통폐합 조치에 따라 1973년 5월 태양, 진강 등 8개 소주업체 면허를 흡수 합병한 보배양조는 대내적으로는 군산의 백화와 경쟁하면서 대외 시장 확대에 온 힘을 다했다. 이처럼 사업이 확장되면서 문병량 사장은 1973년 10월 모범상공인으로 선정돼 상공부장관상을 수상하고, 연예인협회 연기분과위와 자매결연을 맺는 등 대외적 활동 폭도 넓혀 나갔다. 당시 유신체제 구축 과정에서 문 사장이 정치적 오해에 휩싸이면서 보배양조는 73년 12월 2개월 조업중단 조치를 받기도 한다. 서슬퍼런 군사독재정권에서 호남의 기업인 문병량은 자칫 모든 것을 날려버릴지도 모를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했지만, 문 사장은 특유의 처세를 바탕으로 슬기롭게 극복해 낸다. ▲ 이리상의 회장 피선 한바탕 거세게 몰아친 폭풍우를 이겨낸 보배양조는 더욱 단단해진 기반 위에서 성장한다. 이 당시 소주업계는 정부가 탈세의 온상으로 지목하고 통폐합 조치를 취하면서 68개로 줄어들었고, 보배양조는 우월적 지위를 확보하며 성장을 지속했다. 1974년 12월 3차 소주공장을 증설하며 완전 자동화 시설을 갖췄고, 1975년 7월에는 상호를 보배양조에서 (주)보배로 변경해 새로운 도약을 꿈꾼다. 1980년 4월 6차, 85년 7차 등 모두 7차례에 걸쳐 소주공장을 증설하면서 보배는 시설의 완전 자동화 및 고성능화를 이뤘고, 생산비도 크게 절감했다. 생산능력도 소주 60만 병/일(360㎖기준), 주정 5만 ℓ/일에 달했다. 보배는 재수도 좋았다. 정부는 1973년 소수업계를 통폐합하면서 도당 1개소 정도의 소주공장을 유지시켰다. 하지만 도내에서는 백화와 보배가 살아남아 힘겨운 경쟁을 계속했다. 이런 가운데 정부가 1976년 11월에 자도주의 도내 의무판매 비율을 50% 이상으로 정하면서 백화와 보배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양측 모두 이익이 적을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1979년 무렵 2차 석유파동이 닥치면서 청주와 위스키 등 고급주류업계가 타격을 받았는데, 소주만 생산하는 보배보다는 백화의 어려움이 컸다. 결국 백화가 1979년 9월 소주 부문을 보배에 넘겼고, 보배는 전북 대표 소주 지위를 확보하는 행운을 안았다. 백화가 소주공장을 포기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80년대 초반부터 소주시장이 살아났고, 그 수혜자는 바로 보배였다. 보배는 이같은 여세를 몰아 1981년 3월 광주에 연락소를 낸다. 문병량 사장이 광주에 보배 연락소를 낸 것은 도내 시장 방어적 성격이 컸다. 그 당시 전남의 보해양조는 고창과 부안 등 전남 도계 인접지역에 보해소주를 진출시켰다. 전북의 맹주 보배로서는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문 사장의 명령에 따라 광주 전남에 간 보배소주는 잘 먹혀들지 않았다. 지역 장벽이 너무 컸다. 하지만 애초 광주전남시장 장악이 아니라, 도내시장에 진출한 보해양조를 자극하기 위한 전략적 조치였기 때문에 실망스런 것은 아니었다. ▲ 도내 시장점유율 85% 이처럼 성장한 보배소주는 1990년대 초 전북시장점유율 85%를 기록했다. 매출도 2000억원에 달했다. 진로와 선양, 보해 등이 도내 시장에 진출해 있었지만, 보배소주가 전북시장은 완전 장악한 상태였다. 그러나 항상 전주지역이 문제였다. 전주지역은 전통적으로 자도주인 보배와 백화에 대한 인식이 약했는데, 보배가 대표 자도주가 된 상황에서도 개선되지 않고 진로, 보해, 선양이 설 자리를 제공했다. 이에 전주출장소를 강화했지만,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문병량 사장은 이듬해인 1982년 12월 (주)보배 대표이사 회장에 취임하고, 태용해 전무를 대표이사 사장으로 임명했다. (주)보배는 보배소주가 성장하는 것과 궤를 같이 해 성장 가능성이 큰 기업들을 인수하는 등 방법으로 그룹을 일궈갔다. 그 결과 1995년 무렵 보배그룹 계열사는 (주)보배를 비롯해 주정공장인 (주)동주발효, (주)보배개발과 (주)보배운수 육운사업부, (주)보배운수 해운사업부, (주)보배상사, (주)보배양주, (주)보배도시가스, (주)보배건설, (주)세화창투, 보배홍콩유한공사, 북경보배유한공사 등 12개사에 달했다. 주정과 소주 제조 판매 외에 외국산 주류의 수입판매업과 도시가스업, 육상운송과 항만하역업, 건설업, 금융업 등 다각적인 사업을 전개하면서 거대 그룹을 꿈꾸었다. 1989년 2월 서울 삼성동에 보배 서울빌딩을 확보하고, 1992년에는 보배이리빌딩(지하 4층 지상 12층) 2층으로 본사를 이전했다. 1989년 무렵 중국에 들어가 북경 한복판에 북경보배원을 설립하고 영업에 나선 것도 문병량 회장이 그린 세계로 뻗어가는 보배그룹의 원대한 꿈의 한 부분일 뿐이었다. 하지만 문병량 회장은 그 꿈을 다 그리지 못했다. 1994년 어느날 채권은행들이 갑작스럽게 1000억원대의 대출금 회수에 나섰고, 1994년 12월 30억원을 증자해 총자본금을 81억원까지 확대했지만 회생의 길을 마련할 수 없었다. 보배소주와 동주발효, 도시가스 등 많은 계열사들이 흑자를 내고 있었지만, 건설과 개발 부문에서 외부 금융자금을 빌려 공격적 투자에 나선 것이 화근이었다. 보배는 1995년 7월10일 회사정리절차 개시 신청을 하고, 1996년 2월29일 법원의 개시 결정이 내려졌다. 선 굵었던 향토 기업인 문병량 회장은 1996년 2월11일 63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문 회장의 한 측근 인사는 "문 회장은 애향심이 투철한 기업인이었다. 지역에 큰 것을 만들어 놓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인사는 "회사를 위해 지독하다 할 정도로 열정을 기울였다"며 "문 회장은 사적 치부를 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회사를 위해 최선을 다한 기업인이었다"고 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