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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방용 의장(대한민국헌정회 원로회의)

장맛비가 오락가락 하는 날씨에, 서울로 향하는 발걸음은 기대 반 우려 반이었다. 백수(白壽99세)인데다 왕년에 이름을 날렸던 어른을 만난다는 설렘이 큰 반면 과연 인터뷰를 잘 할 수 있을지 걱정도 없지 않았다.하지만 여의도 국회 옆 헌정회관에서 송방용(宋邦鏞) 원로회의 의장을 뵙는 순간, 우려는 싹 사라졌다. 바둑을 두다 일어서며 맞는 미소와 함께 악수를 건네는 손마디에 힘이 실렸기 때문이다. 큰 키에 맑은 얼굴, 시종 겸손한 모습에 "참으로 곱게 늙었구나"하는 생각이 스쳤다. 약간 허리가 굽긴 했으나 인터뷰하는 2시간 내내 자세 한번 흩뜨리지 않고 강기(剛氣)있는 목소리로 응해주셨다.대한민국 1324명(현직 296명 포함)의 전현직 국회의원 출신중 가장 연세가 높은데도 돋보기를 쓰거나 보청기도 끼지 않은 채였다.- 안녕하세요.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그래요. 반갑습니다. 저도 마음으로부터 전라북도민하고 한번 얘기하고 싶었어요. 나이를 먹으니까 남기고 싶은 말고 있고" (김제시 봉남면 출신인 송방용 의장은 김제에서 무소속으로 나와 제 2대와 3대 국회의원, 그리고 제 5대 참의원, 제 10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또 금융통화위원, 경제과학심의회 상임위원을 역임했다.)- 헌정회에는 일주일에 몇 번 정도 나오시는가요?"월수금 이렇게 오는데요. 대체로 오전 10시에 와서 오후 4시에 들어갑니다. 회원들과 담소도 나누고 바둑도 두고, TV 같은데서 (인터뷰하러) 많이 오는데 가릴 것 없이 얘기합니다."- 원로회의 의장은 언제부터 하셨습니까?"벌써 3번째(임기는 2년)입니다. 세 번 한 사람은 나 하나뿐이에요. 미련하게도 나이가 제일 많아서.(하하하)"- 의장님이 일제 때 연희전문학교(연세대)를 수석으로 졸업했다고 들었습니다만."여담이지만 제가 정인보 선생님의 수제자라면 어떨까 합니다. 일화 하나 소개하지요. 제가 졸업 맡을 때 전교를 대표해서 답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정인보 선생님이 너 답사 썼느냐? 하더니, 가져오라고 해요. 보시더니, 던져버려요. 그러면서 글은 그물로 말하면 벼루줄과 그물코가 맞아야 하는데, '선생님 고맙습니다'라는 말에 무슨 수식어가 그렇게 많냐고 단단히 꾸지람을 들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는가요?"다시 써가지고 갔더니 선생님이 몇 자 고쳐주시데요. 그 뒤 국회의원이 돼서 그 양반이 당시 감찰위원장(지금의 감사원장)이었는데 댁(흑석동)으로 찾아갔지요. 그랬더니, 너 이놈 문과한 놈이(법과도 경제과도 아니고) 국회의원이 되면 어떻게 하자는 것이냐. 나한테 와서 인사할 시간 있으면 돌아가서 빨리 헌법하고 재정문제를 공부하라고. 그게 그 때 사제지간입니다. 요새 전교조 사람들, 아이들에게 자유 주는 것이 지상의 과제인 것같이 하는 걸 보면서, 이건 아닌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3월에 헌정회 총회 마치고 백수연(白壽宴)을 하신 걸로 아는데요?"안 할라고 그랬더니, 총회 끝나고 하면 돈도 안드는데 뭣 땜에 안하려고 그러느냐 해서 그냥 백수연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 자리에서는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내가 99년 동안 살면서 일정 33년 산 것은 접어 버리자. 그리고 첫째로 세계적으로 볼 때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서 비행기가 생겨 육해공 어느 곳이나 갈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또 사람의 말이 광속에 의해 전달되는 시대가 오지 않았느냐. 아울러 우주를 정복하는, 옛날 같으면 신의 세계를 침범하는데까지 이른 것 아니냐. 이외에 1922년 소련이 레닌의 힘을 빌어 소련연방을 세웠죠. 이것을 소련이 1991년에 스스로 해체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유욕망이라는 것을 거스르고는 정치가 안된다는 교훈을 준 것 아니냐, 그런 말을 했습니다. 또 지금 카다피나 이집트 장기집권한 사람들, 중국을 위시해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지 않느냐. 앞으로 대중의 시대가 오는 것이 틀림없다는 얘기를 했습니다.그리고 나는 일평생 우리 한국이 이렇게 잘 살게 될 줄 몰랐단 말야.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한번 짚어보자. 그것은 대한민국이 있기 때문에 그런거야. 나는 이승만 박사를 정적(政敵)으로 삼았지만 이승만 박사가 대한민국을 만든 것은 크게 잘한 일이라고 칭찬을 한단 말이야. 또 박정희 대통령 같은 분, 우리가 경제적으로 잘 살게 하는 방향으로 산업화를 유도했기 때문에 오늘날 이렇게 된 것 이니냐. 누가 포항제철, 경부고속도로 생각한 사람 있겠느냐. 또 5만명 가까운 병사를 한국에 묻어 준 미국같은 나라가 있었기 때문에 미국을 미워할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그게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필로소피(philosopy)입니다."- 제2대 때(1950년) 김제에서 당선돼, 국회에 첫 진출을 하셨는데요?"그 당시 저는 미국을 가려고 연세대학을 들어갔습니다. 영문과를 한 거고. 그때 벌써 일본은 만주를 점령하고, 그럴 야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 가는 것이 좌절되었어요. 낙심하던 차에, 문득 생각한 게 있어요. 그게 허숭이에요."- 이광수의 '흙'에 나오는 주인공 말이죠?"예. 자, 이거 뭐 미국 못 갔다고 실망할 것 없지 않느냐. 나도 허숭이 되면 안되겠느냐. 그래서 졸업 맡은 그 이튿날 시골로 갔죠. 그래서 정말로 지게 지고 소 몰고 거머리 뜯기고 그렇게 시골생활을 했죠. 그것도 저는 훌륭한 아버님을 두어서 가능했어요. 학교도 졸업했는데 취직하라면 큰 일이거든요."(송 의장은 14년간 김제에서 브나로드, 즉 농촌계몽운동을 펼쳤다. 부친은 구한말에 여주군수, 조부는 곡성군수를 역임했다.)- 당시 계몽운동이 힘들었지 않았나요?"유치장에 가끔 들어갔죠. 창씨개명을 않했거든. 거기다가 집안은 그렇지, 아버님은 상투를 안깎으셨지. 그런데 (유치장에서) 그 썩은 보리밥도 꼭꼭 씹으면 맛있어요. 사식(私食) 안들이고 오기로 그렇게 먹은거지. 시커먼 다꽝(단무지), 그런 것 먹었죠."- 그러다 농촌운동 때 가르쳤던 제자들이 국회의원 출마를 권해서 나온 것으로 아는데요?"나 한테서 배운 아이들이 제헌(국회) 때부터 나가라고 그래요. 안나가니까, 그 때는 자기들이 신문지에다 기호를 써 가지고 붙이고 그랬어요. 11명 나왔는데 기호가 11번이에요. 1번이나 11번이나 맘먹지 않느냐. 끝에다만 찍어라. 그래서 당선되었죠.(하하하) "(당시 김제에는 홍희종, 조한백씨와 도지사를 지냈던 장현식씨 등 거물들이 다수 출마했다.)- 무소속으로 있었던 이유가 특별히 있었습니까?"제가 나중에 한민당하고 손을 못잡은 이유가, 그때 나를 공산당으로 몰았거든요. 당시 전주지검 검사장이'이 사람이 공산당이면 당선돼도 가둘 수 있는데, (선거) 이틀 앞두고 구속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해서 (경찰의 구속영장을) 기각해버렸어요. 그 대신 사무장하고 선거운동원 182명을 전부 가둬버렸죠. 곳곳에 가면 부인네들이 금방 낳은 달걀을 손에 꼭 쥐어주는 따뜻한 정(情), 그걸 안고 당선되었기 때문에 이 분들을 절대로 잘 모셔야겠다고 생각을 했던거죠."- 2대와 3대 국회 때 활동은 어떻게 하셨는가요?"2대 때는 부산 피난시절이라 지역구나 의정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3대 때는 한글간소화라는 게 있었습니다. 이승만 박사가 언문같이 쓰면 되는데 무슨 문법이냐 하는 말씀을 하셨어요. 그러자 이선근 문교부장관이 간소화운동을 시작한 겁니다. 그 때 제가 발의자가 되어 이선근씨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종로 네거리가 자동차가 많이 다니고 시끄럽다해서 일방통행을 시키면 잘 되겠느냐, 글에도 길이 있는데. 그렇게 해서 제가 막았죠. 장준하씨의 사상계에 대서특필돼 전문이 실렸습니다."- 또 자유당의 사사오입 때 암호투표를 폭로하셨는데, 큰 용기가 필요하셨을텐데요?"저는 그때 무소속구락부에 있었고요. 국회에 들어가니까 이철승 의원이 자유당의 암호투표 얘기를 해요.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유진산 씨등 몇 사람에게 알아봤는데 후환이 두려워 말을 안해요. 결국 (누구한테 얻었는지) 그걸 목숨을 걸고 보장하겠다고 한후 단상에 올라갔어요. '이럴 수가 있느냐, 헌법을 신성하게 고쳐야지.' 하고 발언을 한 거죠. 그 때 2층에는 이정재 등 동원한 깡패들이 꽉 차있었거든요. 처음으로 나한테 스탠딩 오베이션(기립박수)했어요. 그렇게 싸웠죠." (송 의장은 당시 우리나라가 법도 제대로 시행되지 않을 때의 모습이라며, 지금 생각하면 후회되는 일이 있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가까웠던 죽산 조봉암씨의 일화도 들려줬다.)- 후회되는 일이라뇨?"뭘 후회하는고 하니, 아니오 아니오 하는 소리는 할 줄 알았어요. 그러나 '이거다'하고 제시하지는 못했어요. 다시 말하면 그 때 내 지식은, 또 일반국민이 원하는 것은 아니오 아니오를 원했지, 대안을 가지고 나오지는 못했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나는 그 때 다 알고 잘했다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그 때 나는 무식했다, 정열은 있었다, 싸움도 했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대한민국 역사에 무슨 플러스를 했느냐. 그걸 나 자신이 의심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5대 참의원(1960년)에도 당선되셨는데요. 참의원의 역할이 무엇입니까?"지금 미국하고 똑같아요. 상원이에요. 그 때 참의원은 1부와 2부가 있었습니다. 1부는 6년, 2부는 3년입니다" (참의원선거는 헌정사상 단 한번 실시됐다. 전국적으로 58명, 전북에서는 6명을 뽑았다. 송 의장은 1부에 당선되었다.)- 그런데 516이 일어나 곧 그만두시지 않았던가요?"9개월인가 하고 없어지고 말았죠. 오늘을 만드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보고요. 장면 정부는 무기력했어요. 어떻게 이해할지 모르겠으나, 장면 선생은 정치를 할 분이 아니에요. 정치를 할 사람들은 생명을 내걸어야 합니다. 그리고 정치는 왜 하느냐? 이걸 윌리엄 처칠 경은 얘기하고 있거든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기자들이 처칠 경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의 정치철학은 뭡니까? 대답이 그래요. 나 보다는 정당을 더 중요시한다. 정당보다는 나라를 더 중요시한다. 그런데 요새 국회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과연 그런 정치인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프라이아리티(priority)가 뭔지 모르니까 지금 우리나라 정치가 이 꼴이 아니겠느냐 하는 거지요."- 박정희 대통령과는 상당히 가까운 사이였다고 들었습니다. 입각도 여러번 권유 받으시고."제가 정치인으로서 '이거다'하고 생각한 것은 박정희씨하고 일할 때입니다. 박정희씨가 세번 입각을 권유했지만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한국이 가야할 길은 역시 산업화해서 빨리 부(富)를 증식시켜서 재(財)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지(知knowledge), 이런 것들을 갖추지 않고서는 나라를 세울 수 없다는 것을 박정희 대통령이랑 공부한 거죠." (송 의장은 그 후 장관급인 경제과학심의회 상임위원을 8년간 역임했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어떻게 보십니까. 통일의 연착륙을 위해 인도주의적 지원은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나는 그런 차원을 넘어 이북을 이렇게 보고 있어요. 김정일이 하는 일이 독재입니까 아닙니까. 또 3대를 세습하는 것은 전제주의 아닙니까. 김정일이 하는 것이 공산주의 아닙니까. 그럼 김정일을 도와 주는 일이 2500만 주민에게 도움이 됩니까 해(害)가 됩니까. 우리가 이북사람을 동포라고 한다면 하루속히 해제해 줘야지요. 그런데 무비판적으로 쌀이나 보내 주는 것이 옳은 일 입니까. 이북의 동포들이 법률없는 세상에서 학살을 당하고 있는데 그걸 구해주는 조치를 우리가 취해야 합니까 아닙니까. 이것은 이북을 싫어하는 이전의 문제고, 당위의 문제입니다. 이것을 기억해 주세요."- 내년 12월에 대선인데요. 대통령으로서의 덕목은 무엇을 꼽을 수 있을까요?"나 보다는 정당을, 정당 보다는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 나와야 합니다. 누가 대통령이 되건 그걸 안하면 헛것입니다."- 전북도민에게도 한 말씀 해주시겠습니까?"왜 전라북도는 민주당입니까. 언제까지 그렇게 가야합니까. 캘리포니아 보다 작은 땅에서 뭐가 전라도고 경상도입니까. 제 며느리가 셋이 있는데 전라도 강원도 부산(출신)입니다. 전라북도도 하나의 대한민국 공동체입니다. 전라북도부터 문을 끌르세요. 우리가 클 때 전라도는 그렇게 쪼그라들지 않았거든요. 그래도 정계에 내다 놓으면, 그 사람들 단상에 올라가면 호령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전라북도의 의원으로 있었습니다. 요새 그런 사람이 별로 보이지 않네요. 바람직한 것은 전라북도의 국회의원을 베스트를 뽑아라. 어느 일부에 속한 사람을 집착하지 말아라. 내 이런 얘기를 꼭하고 싶습니다."- 내년에 낼 자서전 준비는 잘 되고 있습니까?"아니요. 안 쓸랍니다. 그동안 준비했었는데, 법정스님이 쓴 책을 회수하는 것을 보면서 그리 생각했습니다. 자서전은 자기 미화의 일부입니다. 아무리 넘어서려 해도 해탈이 안돼요. 그럼 내 변명하고 마는거든요."(송 의장은 인터뷰를 마칠 무렵 전라북도민들에게 "기쁘게 살아주시라고 부탁해주세요. 그리고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자기가 구세주가 돼 보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면 본인도 편하고 세상도 편하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면서 마음 같아서는 전라북도에 가서 마이크도 잡고 강연도 하고 싶은데하며 애틋한 정을 표했다.)◆ 송 의장의 思婦曲송 의장의 부인(이복쇠)에 대한 사랑은 각별한 것으로 유명하다. 10년전, 앞서 간 부인에 대해 "집 사람은 저의 은인이요 천사"라고 말했다.당시 경성보육학교를 나온 인텔리인데도 송 의장의 청혼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함께 농촌운동을 했다. 부인은 한번도 송 의장 앞에서 집안의 걱정되는 얘기를 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정치인의 아내로서 새벽부터 찾아오는 손님을 맞았고 친척 아이들까지 집에 맡겼지만 한 마디 불평없이 내조를 했다. 그래서일까. 송 의장은 10년째 부인의 유골함과 영정을 방에 모시고 산다. 5년간 치매와 당뇨로 투병하다 먼저 간 부인의 유골을 남이나 절에 맡기는 것보다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이 따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송 의장은 아침 저녁으로 "나, 일어났소. 나 다녀오리다"면서 항상 곁에 있듯 말을 건넨다고 한다. 부인의 생일과 기일(忌日)이면 꽃을 사다 유골함에 놓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의장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어떻게 하실 작정이냐?"고 묻자 "자식들에게 화장해서 Let them be free(너희들 마음대로 하라)"했다고 말한다. 부부는 64년을 해로하는 동안 항상 존댓말을 썼고 슬하에 5남매를 뒀다.송 의장의 건강비결 역시 인구에 회자된다. "부모님이 건강한 몸을 주셨다"면서도 "자기관리가 절대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자기관리는 유명한 건강 7계명이다. 덕분에 평생 돋보기도 보청기도 틀니도 지팡이도 사용하지 않고 있다. ①담배를 피지 않는다 ②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다 ③매일 7000보씩 걷는다 ④아침마다 맨손체조와 요가를 한다 ⑤하루 세끼 외에 군것질을 안한다 ⑥술은 친구와 기분좋게 마신다 ⑦비타민제를 정기적으로 먹는다.

  • 기획
  • 조상진
  • 2011.07.05 23:02

새터민 실태와 정체성

새터민 2만명 시대를 맞고 있다. 작년 한해에는 2500명이 넘어왔다. 새터민 중 여성이 약 70%를 차지하고 20대와 30대가 전체의 60%에 이른다. 전북에도 347명이 정착해 있다.이들은 탈북한 뒤 주로 중국과 동남아 등을 거쳐 한국에 들어오게 되는데 그 기간이 수개월이 걸리기도 하고 그 이상이 소요되기도 한다.일단 한국에 들어오면 통일부 산하 '하나원'에서 12주간의 사회적응 교육을 받은 뒤 정착에 필요한 기본적인 지원을 받는다. 기본금은 1인 세대의 경우 600만원, 주거지원금 1300만원 등 1900만원이 주어진다. 직업훈련을 받거나 취업, 또는 자격을 취득한 경우 장려금을 준다. 취약계층에게는 별도의 가산금이 주어진다.이 돈으로 임대주택 보증금과 생활비용을 충당해야 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다. 새터민들은 김대중 정부 때 가장 많은 지원을 받았다고 말한다.새터민들은 '분단 체제하 적대국 출신이면서 동시에 헌법상 대한민국 국민'이다. 이중적인 사회적 지위를 갖는다. 법적으론 엄연한 대한민국 국민이지만 현실에선 저발전국 출신 이주민 대우를 받는다.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그들의 정체성 혼란은 우리 사회의 몰이해와 차별, 무시 등 문화적 배타주의가 큰 요인이다.정체성 혼란은 사회통합의 걸림돌이기도 하다. 그들에 대한 우리사회의 배타성이 가시지 않는 한 그들은 같은 민족이라는 동질성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이명자 전북하나센터장(전주 YWCA사무총장)은 "무엇보다 그들의 시각에서 이해하고 도움을 주는 따뜻한 시선이 필요하다"며 "자치단체와 관련 단체들이 일반 주민과 동등하게 또는 더욱 많은 관심과 배려를 갖고 대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그런 연장선에서 송정호 우석대 교수는 "그들의 요구를 포괄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지역사회 차원의 종합서비스지원 네트워크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이런 장치를 통해 그들을 따뜻하게 안아주고 더불어 사는 공동체 의식을 갖게 하는 것이야말로 통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것이다.이제 새터민 문제는 통일과 남북한 사회통합의 중요한 의제가 됐다. 새터민 2만명 시대를 맞아 그들의 삶과 자립문제를 들여다 보고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성찰해야 하지 않을까.

  • 기획
  • 전북일보
  • 2011.06.28 23:02

"라면 한 박스 보다 절실한 건 한국서 살아가는 방법"

북한판 코리안드림의 상징인 새터민(탈북자) 조명철씨가 공무원으로서는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얼마 후엔 북한 주민 9명이 서해상으로 넘어왔다. 정착해 있는 새터민들의 고민과 삶이 궁금했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기도 해서 새터민을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인터뷰 대상자를 섭외하기가 쉽지 않았다. 북한에 두고 온 가족 때문에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전북하나센터의 조미영 실장이 열심히 사는 사람이라며 이수현(42)씨를 추천해 주었다. 물론 가명이다. 이수현씨 역시 이름과 얼굴이 나가면 안된다는 조건을 달고 인터뷰에 응했다.남남북녀. 미인이다. 억양이 센 북한 발음은 마치 싸우는 것처럼 들려 불편했지만 2년쯤 지나니까 괜찮아졌다고 했다. 그래도 액센트는 살아있었다. 성격은 활달했고 말솜씨는 수준급이었다.인터뷰는 지난 17일 점심식사를 같이 하면서 이뤄졌고 커피전문점으로 옮겨 3시간 가까이 진행됐다. 사흘 뒤 그녀는 못 미더웠던지 전화를 걸어 왔다. "내가 가치 있는 사람도 아니고 새터민들한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해서 순수한 마음으로 인터뷰에 응한 것이다. 얼굴 나가면 안 된다."-얼마전 북한 주민 9명이 배를 타고 서해로 넘어왔다."잘 왔다. 뱃길로 오는 게 어려운데"-새터민으로서는 처음으로 조명철씨(52)가 지난 7일 공무원 1급 자리인 통일교육원장에 임명됐다."그런 사람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새터민들을 밀어줄 게 아닌가. 새터민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조명철씨는 김일성 종합대에서 교수생활을 하다 중국에 유학하면서 전환기를 맞아 탈북했다. 공무원으로서는 최고위직에 올랐다. 북한판 코리안 드림을 이룬 사례로 새터민 정착 지원에도 큰 의미가 있다.)-탈북과정이 궁금하다. 어렵지 않았나."아홉 살 짜리 딸 손잡고 압록강 건너 탈북했다. 2003년의 일이다. 1년 뒤에 한국 땅을 밟았다. 중국에서 6개월 체류하는 동안 숨막히는 하루하루를 보냈다"-계기는."먼저 탈북한 언니가 한국은 지상천국이라며 오라고 했다. 언니는 지금 신학대학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형부는 전주 사람이다. 서울에서 전도사 일을 하고 있다."-북한에는 누가 살고 있나."부모님은 돌아가시고 오빠들이 있다."-송금한 적은 있나."오빠에게 한차례 송금했다. 중국에 산다고 속이고 통화했다. 잘 있다고 했다. 아마 한국으로 간 걸 느낌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연간 송금액은 100억원에 이르고 송금은 한두시간 내에 완료된다. 중개 수수료로 30% 정도를 지불한다. 정부는 앞으로 개인간 거래도 승인을 받게 할 방침이어서 일부 반발을 사고 있다.)-북한 화폐개혁이 실패로 돌아갔다. 얘기는 들었나."2009년 화폐개혁을 했다. 돈 바꾸는데 한 세대당 얼마로 제한하는 바람에 불만이 고조됐다. 악착같이 번 돈을 불태우고, 많은 돈들이 강물에 던져졌다. 왜 탈북할 수밖에 없는지, 왜 새터민이 늘어나는지 안보강연 때 이런 말을 거침 없이 한다."-강연에서는 주로 무슨 내용을 얘기하는가."북한의 맥을 잡아 이야기한다. '새터민 중에는 간첩도 끼어 있다더라'는 질문도 받는다. 설령 올 때는 간첩으로 왔더라도 (남북한 차이가 너무 커) 전향할 수밖에 없을 정도라고 하면 이해를 한다. 중국에는 탈북을 준비하려는 주민들이 10만 명이나 들어와 있다. 두만강 압록강 쪽 건물은 물론이고 내륙 쪽에도 문은 너덜너덜하고 건물이 텅 비어있다. 주민들이 다 빠져나간 탓이다."-북한에서 보는 남한, 남한에서 보는 북한은."만날 데모하고 머리띠 두르고 남한은 어떻게 사나 했다. 북한에선 그런 것만 보여주니까. 그런데 와서 보니 혼란스럽더라도 양보도 하고 머리도 맞대고 하면서 잘 풀어간다. 북한은 그런 게 없다. 북한 주민 생활은 남한 밑바닥 생활 보다 못하다. 여기 사람들 풍족하게 사니까 이해 못한다. 하루만 살아보라고 하면 다 못산다고 할 것이다. 북한은 '하지 말라' '해라'만 있다. 듣지 않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잡아간다."-뭘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지 궁금하다."게으르면 윗동네나 아랫동네나 살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바이올린 레슨을 4~5개 정도 한다. 운전면허는 땄지만 아직 자동차는 없다. 지금 신학대학을 다니는데 올해 졸업한다. 전공은 음악(바이올린)이고 사회복지와 보육을 부전공하고 있다."(새터민들은 북한을 '윗동네', 한국을 '아랫동네'라 부른다.)-바이올린은 언제 배웠나."어릴 때 배웠다. 오케스트라 규모의 기동대 생활을 했다."(기동대는 일종의 선전대로, 행정기관에 소속돼 김일성김정일과 체제를 찬양하는 음악활동을 한다.)-새터민들끼리 자주 어울리나. 그들은 어떻게 생활하고 있나."한달에 한번 정도 만나는 모임이 있다. 수다 떨고 가장 행복할 때다. 대부분 어렵게 산다. 뚜렷한 기술 직업이 없다 보니 여자들은 식당일, 남자들은 막노동 일도 한다. 나도 처음에 김 구워 파는 일을 했다. 연변 조선족으로 알더라. 그러거나 말거나 '맛 보세요 맛 보세요' 외치며 열심히 팔았다. 세탁소에서 밤 10시까지 1년 간 옷 수선하는 일도 했다. 돈 버는 게 얼마나 힘든지"-한국에 온 지 6년 정도 됐다. 살아보니 어떻던가."처음에 남한에 왔을 때 깜짝 놀랐다. 막힌 세상, 울타리 안에서만 살다가 인권이 보장되고 자유로운 걸 보고 놀랐다. 윗동네에 비하면 대한민국은 지상천국이다.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고 정보화, 컴퓨터 등이 잘 돼 있다. 윗동네를 모르고 살아서 그렇지 천국이다."-그래도 한국은 비리 부정이 판치고 있지 않은가. 얼마 전에는 대통령까지 나서서 '나라가 온통 비리 투성이'라고 장차관들을 질책했다. 이런 걸 보는 심정은 어떤가."북한은 더 썩었다. 남한에는 시스템이라도 있지 북한엔 그런 게 없다. 해먹는 게 임자다. 강탈하고 약탈하고 말 못할 정도다. 권력자, 세력자들은 시스템이 없으니까 노련하게 해 먹는다.(시스템은 견제 감시장치를 말하는 것 같다. 비리가 터지면 언론 등 감시망 때문에 덮어둘 수 없는 제도적 틀을 두고 하는 말로 들렸다.)-냉대나 차별적 대우도 겪었을 텐데."학원 강사 시절 한명부터 시작해서 2년간 수강생을 많이 늘렸는데 갑자기 원장이 나오지 말라고 했던 일, 수강생이 늘자 바이올린 강습 칸을 두 개로 늘려 원장이 세를 받아먹은 일도 있었다. 감사 사례 돈을 원장이 가로챈 일도 있다. 눈물만 흘리고 누구한테 말도 못했다. 학원을 박살내고 싶었지만 하나님이 참게 했다. 나중엔 학부모들이 내 실력을 인정하고 원장한테 나만 데려오라고 요구하더라."-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625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나."미국놈들이 고요한 새벽에 전쟁을 일으켰다고 배웠다. 나중에 거짓말이란 걸 알았다. 언젠가 시아버지께서 "네 시어머니는 고생 안 했다"고 하셨다. 왜요? 하니까 전쟁 날 줄 미리 알고 중국에 대피시켰다는 것이다. 전쟁 나기 전 간부들은 가족을 미리 대피시켜 놓았는데 이것이 (사전에 남침을 준비했다는) 증거 아닌가."-전쟁에 대해 주민들은 어떤 생각인가."너도나도 못 사니 미친 개처럼 전쟁이라도 해보자는 식이다. 세뇌가 심하다."-남북한 환경 차이로 새터민들의 심리적 공황이 심각하다고 들었다."탈북 과정도 고통스럽고 해서 심리적 상처가 크다. 우울증에 걸리거나 밖에 나가기 싫다는 동료들도 있다. 힘들어 하다 나중엔 자살을 택하기도 한다. 꿈과 희망을 크게 품고 왔는데 좌절과 무력감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거리다."-대책이라면."새터민들의 마음을 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상담사를 많이 배출해야 한다. 한사람이라도 더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이곳에 살다 보면 자치단체나 정부한테 바라는 게 있을 텐데."제도적으로 지원해 주어야 한다. 꾸준히 상담하고, 정착할 때까지 돕는 게 중요하다. 지역사회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단체를 안내해 주고 계속해서 관리해줄 필요가 있다."-정착하는 과정에서 아쉬운 점은."그냥 집이 여기다, 여기가 마트다 이런 거나 알려준다. 직업 알선 등에 좀더 투자했으면 좋겠다. 무슨 협회다 해서 전단지 잔뜩 늘어놓고 라면 한박스 주고 가면 다 되는 줄 안다. 밥벌이 수단, 사는 방법을 알려줘야 한다."-한국 사람들 생활 스타일 보고 많은 걸 느꼈을 텐데."너무 큰 집만 선호한다. 식당도 먹을 것 알맞게 준비해야지 낭비가 너무 심하다. 절반만 먹고 버린다. 닭볶음탕도 3분의 1 먹고 나머지 3분의 2는 버린다. 음식 소비문화 고쳤으면 좋겠다. 너무 부유하니까 아까운 걸 모른다. 후세들한테 교육도 시켜야 한다."(인터뷰하면서 점심 때 삼계탕을 시켜 먹었는데 기자는 앞가슴 퍼걱살을 남겼지만 그는 깨끗이 비웠다.)-통일에 대한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통일해야 된다. 자본주의 남한식 통일로 해야 된다. 그래야 인민들이 편히 산다. 오빠들이 보고 싶다. 능력껏 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한국 사람들한테 바람이 있다면."이곳 사람들은 다 자기네 살 궁리만 한다. 새터민들이 뭘 알겠나. 새터민이라면 싫어하니까 조선족이라고 속이고 취업하는 경우도 있다. 많은 관심 갖고 따뜻하게 대해 주었으면 좋겠다. 새터민들 참으로 어렵게 산다."-앞으로의 소망은."두가지다. 탈북 과정의 고통, 한국사회에서의 부적응 때문에 새터민들 정신적 상처가 심하다. 상담분야를 전공해 전문상담사로서 이들을 치료하고 싶다. 또 하나는 새터민 자녀들로 오케스트라를 만들고 싶다. 그러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해 음악을 더 공부하려고 한다. 한국에 왔으니 열심히 살아야하지 않겠는가."

  • 기획
  • 이경재
  • 2011.06.28 23:02

한상언 교수(전북대 교양교육원 수학전공)

전북대 한상언 교수(52. 교양교육원 수학전공)와 인터뷰를 한 8일은 연구실에 경사가 있었다. 교육과학기술부 산하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가 주관하는 2011년도 '올해의 과학기술 우수논문상' 수상자로 수학분야에선 유일하게 선정됐기 때문이다.한 교수는 영상 정보화시대를 맞아 위력을 떨치는 케이스다. 개인 스스로 수학이론을 창안했다. 100여편의 굵직한 논문과 활발한 학술활동은 순수위상수학과 디지털위상수학분야에서 국내외적인 주목을 끌게 한다.대개 학창시절 수학을 떠올리면 딱딱하고 힘든 과목으로 머릿속에 남아 있기 십상이다. 이날 인터뷰를 하면서도 생소한 용어와 내용들이 튀어나와 진행이 여간 어렵지 않았다. 그만큼 반복질문이 이어졌다. 앞머리를 2:8로 반듯하게 탄 가르마처럼 그의 모습은 깔끔했다. 미소를 띄엄띄엄 지었지만 수학으로 무장된 생활이 정장의 차림새에서도 정갈하게 배어났다. 자연계 진학 기피현상에 대한 질문에 "논리적 사고가 결여되면 그 사회는 대가를 치른다"고 말했다.-이번에 큰 상을 수상하게 됐습니다."개인적으로 영광입니다. 이 상은 우리나라 과학기술분야 모든 학술단체들의 모임인 과총이 대표적인 학회 추천을 받아 분야별로 1명씩 선발하게 됩니다. 디지털위상수학과 디지털기하학의 그동안 연구활동을 인정받아 대한수학회가 추천했지요."-디지털위상수학과 디지털기하학이란 무엇을 연구하는 분야인가요."순수 기하학과 공학적 사고의 결합으로 보는 거죠. 수학분야와 컴퓨터과학 및 정보통신분야 학문과의 융합학문입니다. 컴퓨터과학, IT분야에 사용되는 도형의 기하학적 성질을 연구한다 할까요. 그래서 기하도형의 효율적인 해석과 활용에 필수이고, 병원에서 쓰는 컴퓨터 활용 전자기계(MRI.단층촬영기)의 기술발전에는 직접적인 영향이 있습니다. 이 분야는 1990년대 컴퓨터과학과 정보통신의 급속한 발전과 더불어 전성기를 맞게 됐어요. 이산객체(점, 선, 면, 원, 구, 다면체 등으로 구성된 유한집합)에 의미 있는 위상구조를 주어서 이산객체의 중요 성질을 찾는 연구 열기가 고조되고 있는 겁니다."-내용 설명이 이해하는데 상당히 어렵네요."그럴 수도 있지요. '디지털'이란 말이 들어가는 분야엔 이 연구가 다 필요하다고 보면 됩니다."-수학자의 길로 가게 된 계기는 뭐죠."단순히 풋내기 대학시절 캠퍼스 연못 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몇 마리 물방개 때문이었습니다. 인상이 깊었어요. 자유자재로 놀고 있는 몸놀림을 본 것입니다. 그 광경은 '자유롭게 생각하고 아이디어를 생산할 수 있는 학문은 무엇일까'란 생각을 던져줬습니다. 그러던 중 당시 위상수학을 연구하는 교수님들로부터 관련 얘기를 들을 기회가 많아 그 쪽으로 빠져들게 됐습니다."-어릴 적 꿈이 궁금해지는데요."생명공학자가 되길 원했습니다. 뭘 만드는 게 취미였거든요. 그러나 대학에 진학하면서 그때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의 권유로 사범대를 택하게 됐습니다. 교직으로 가라는 말씀이었어요."-학창시절 수학성적은 꽤 좋았을 것 같습니다."(웃으며)아니죠. 수학은 누구에게나 그리 만만한 상대는 아니라고 봅니다. 거기서 예외일 순 없었지요. 대학에 들어와서야 '수학이란 무엇인가' 에 대해 스스로 큰 물음이 있었습니다. 대학시절에도 '수학은 왜 이해하기 쉽지 않은가'를 두고 고민이 적지 않았습니다."-이제는 수학이 재밌나요."재미 보다는 사실 즐거운 맘으로 공부하려는 거죠. 그러면 즐겁게 하는 그 방법이 뭐냐고 또 물을 텐데요. 문제는 생각보다 간단해요. 수학의 기본개념을 충분히 이해한 다음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슨 공부든 '열심히 하면 된다'고 하지만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습니다.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데 어떻게 오래 갈 수 있겠습니까. 결국 성공할 수도 없지요."-그렇게 하면 정복도 가능하다는 얘깁니까."완결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완성도는 크고 작은 문제해결이란 경험도 쌓아야 가능하니까요. 그런 경험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나아가 창의성이 풍부하다면 그 차별성과 독자성도 기대할 수 있겠어요."그는 '창의성'이란 말을 소나무 밑에서 자라는 송이버섯과 비유했다. 송이버섯의 종균이 적절한 환경이 되면 잘 자라게 되는 이치가 창의성이란 설명이다.-수학에서 얻는 매력은 무엇인가요."다른 학문에 비해 논리성이 강한 특성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사고의 자유로움과 유연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게 매력입니다. 기본 개념과 가설, 공리를 기초로 합리적 논리와 확실한 결과를 도출하는 사고 과정이 마음을 사로잡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이처럼 수학의 본질은 정확한 사고, 논리개발, 유연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수학은 어쩌면 시와 비슷하지 않을까요."-시와 비슷하다는 건 어떤 뜻입니까."개념을 극도로 축약된 언어로 표현하고 결과도 매우 정선된 언어로 표현하는 점에서 그리 본 것입니다. 수학이나 시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결과를 표현하는데 있어 공통분모가 있어요. 진행과정도 그렇습니다. 우선 아이디어를 생각하고 기본 가정이나 가설을 구성한 다음 기본 정의를 만들고 논리적인 사고 전개를 거쳐 결론을 도출하는 겁니다. 이런 과정 끝에 이끌어낸 단아한 표현에서 연구의 희열을 느끼곤 합니다."(기자에게 본인이 쓴 논문 한편을 보여주며) 시그마()와 루트() 등으로 구성된 짤막한 수학공식을 가리키며 "얼마나 단순하고 우아합니까. 시도 이런 거 아니겠나요"하고 감탄 섞인 반문을 했다.-힘든 적은 없었나요."왜요, 그런 때가 많았습니다. 어떤 분야의 학문이든지 기본이 되는 개념의 이해가 절대적이잖아요. 개념 이해가 안 되면 힘들어지기 마련 아닌가요. 결과에 대한 적절한 예를 찾지 못할 때는 심리적 압박이 말도 못할 정도입니다. 고도의 수학 세계로 가면 더 그렇습니다. 그럴 땐 연구의 한계마저 느껴지기도 합니다. 부족하면 학문의 하부구조를 보강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돼요. 당장 어려운 과정을 대충 넘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자녀들은 다른 과목에 비해 그 공부가 어떠했나요."."그는 질문을 하지 말아달라는 손사래를 두서너 번 쳤다. 그러고선 "칭찬을 많이 해주는 '바보 아빠'가 됐어야 했습니다. 내 스스로 조급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라며 작은 목소리로 깔았다.-요즘 자연계 진학 기피현상이 적지 않다는 건데요."교육현장에서 그런 정황을 알고 있습니다. 이건 우리사회의 큰 문제 중 하나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수학적 사고와 논리적인 사고가 결여된 사회는 그 대가를 치르거든요. IMF 환란도 그러했고, 최근 경험한 미국발 금융위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코 가볍게 여겨선 안 될 일입니다. 선진국에서도 기초학문 분야를 어려워하는 분위기가 있어요. 그래서 미국과 유럽 등 과학 선진국에서는 기초학문 부흥을 위한 학습활동으로 '기본으로 돌아가라'를 새수학 운동의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습니다."-수학 잘하는 비결이 있습니까."특별한 방법은 없어요. 일반적으로 수학이 어렵게 인식된 것은 심리적인 면이 앞서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생각하기도 전에 미리 긴장하는 선입감이 불필요하게 작용하는 것입니다. 수학은 논리가 다른 분야 보다 명백하기 때문에 기본 단계를 닦으면 오히려 기대치가 확실하거든요. 다만 평소 주변생활에서 가능한 수학적 사고를 적용하는 노력이 필요해요. 그걸 생활화하고, 즐기려는 의식 말이죠. 나아가 창의적인 사고를 진행하는 동안은 사고의 무질서를 인정해야 합니다. 수학은 살아있는 유기체와 같아서요."그는 수학 공부하는 방법으로 미리 꼼꼼히 적어놓은 15가지 학습법을 제시했다. 거기서 반복적인 내용이나 다른 학문과 유사한 건 인터뷰 내용에서 배제했다.◆ 한상언 교수는...한상언 교수는 군산시 임피면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초등 교사였던 아버지 한택수씨(81. 청주한씨 중앙종친회 부회장)와 어머니 박옥희씨(2003년 작고) 슬하에서 4남2녀 중 장남으로 엄격한 규율과 예절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래선지 살면서 중요시하는 가치를 기본과 본질, 예절이라고 소개한다.익산 남성고교와 전북대 수학교육과를 졸업하고 전남대 대학원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가족은 전라북도 예비고사(1980년) 수석과 전북대 수석 입학 및 수석졸업 출신인 부인 김배규씨(익산 어양중 교사)와 대학교 재학중인 두 아들이 있다. 2009년부터 전북대에서 연구중점 교수로 선정됐으며, 현재 미국수학회 논문 평가위원과 유럽수학회 논문 평가위원, 대한수학회 이사 등을 맡고 있다.◆ 한상언 교수의 연구실적디지털 영상이 수많은 점으로 이루어졌으나 마치 실선으로 이어진 것으로 적당히 해석된 이유는 뭘까. 디지털위상수학과 디지털기하학이 제대로 연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디지털 이미지를 수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도구는 2,3차원에 국한됐다. 4차원 이상은 해석할 수 없었다.그러나 한상언 교수가 이 문제를 해결했다. 모든 차원의 디지털 영상을 수학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이론들을 개발한 것이다. Han's 디지털 피복 이론, 상대적 디지털호모토피이론, 고차원 디지털 이산 곡면론을 정립했다. 15년간의 연구결정체다. 이 이론은 세계적인 과학책 출판사인 독일 '스프링거' 및 Elsevier 출판사에서 출판하기도 했다. 그는 "4차원 이상의 디지털 영상을 해석하려면 이 이론을 이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디지털 암호학 발전에도 기대가 크다"고 전망했다.지난 1990년부터 SCI급 25편을 포함 104편의 논문과 10권의 저서를 출판하면서 연구활동을 활발하게 진행해 왔다. 이런 연구가 우수성이 인정되어 수학 및 응용수학 분야의 SCI 최고 수준의 국제저명학술지인 Journal of Mathematical Imaging and Vision(JMIV) 2008년5월호에 게재됐다. 한국 과학자 단독논문으로는 최초다. 그리고 Information Sciences, ACTA Applicandae Mathematicae, International Journal of Applied Mathematics and Computer Sciences, International Journal of Computer Mathematics, JKMS 등에 발표해 국제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그간의 탁월한 성과가 세계적으로 평가받게 되어 2008년 세계 양대 인명사전인 Who's who in the world(미국)와 IBC(영국)에 동시 등재됐다. 국제학술회의 논문발표가 40여회에 달하고 초청강연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25일부터 유럽의 크로아티아 드뷰르니크에서 개최되는 '기하적 위상수학' 분야 국제학술대회에서는 '국소 유한 공간 기하학(Geometry of locally finite spaces)'을 주제로 논문을 발표한다.

  • 기획
  • 최동성
  • 2011.06.21 23:02

장수 번암면 '좋은 마을' 이남곡 대표

길을 잘못 들어 고생 꽤나 했다. 시골길이니 금세 찾을 수 있겠거니 했던 생각이 얼마나 당치않았는지는 자동차 겨우 한 대 지날 수 있는 산길을 서툰 운전솜씨로 되돌아 나오면서 절감했다. 세 차례의 통화 끝에 간신히 제 길 찾아 올라간 장수군 번암면 유정리의 '좋은 마을'은 아름다웠다.녹음이 짙은 산길을 따라 올라간 그 곳, 낮게 내려 지은 작은 집들이 선하게 모여 있는 마을 입구에 이남곡 좋은 마을 대표(66)가 나와 있었다."20세기의 진보가 낡은 것을 허무는 것이었다면 21세기 진보는 새로운 것을 짓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을 짓는 것과 낡은 것을 허무는 것은 그 주체와 동력과 방법이 다를 수밖에 없어요. 새로운 인간 없이는 새로운 진보가 실현되기 어렵습니다."느릿하고 부드럽지만 단호한 화법. 마치 좋은 강연을 듣는 것 같았던 이 대표와의 인터뷰는 세 시간 가깝게 이어졌지만, 들을 이야기는 아직도 많이 남았다.-마을이 참 좋습니다. 녹음이 아름다워서 눈을 어디에 주어야 할지 모르겠어요."나도 나이 예순에 처음 와본 곳 이예요. 장수는 60년 살면서 지나본 적도 없었는데 묘한 인연이지요. 집짓고 살기 시작한 것이 2004년인데, 그때는 우리 집 달랑 하나만 있었어요."-지금은 이웃들이 있던데요."네 집이 우리 인연 따라 들어왔어요. 여기서 결혼한 부부 덕분에 네 살짜리 아이도 있고, 바로 윗집에는 초중학생도 있어요.'마을에 애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감사한 일이죠."-어쩌다 장수 이 산골까지 오셨습니까."2003년에 수원 야마기시 실현지에서 8년 공동체 생활을 마감하고 나오면서 집사람과 누구나 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일을 해보고 싶었어요. 마을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도 고립감이 있고 소통이 안 되니 적당히 거리가 있으면서도 작고 독립적인 마을을 만들고 싶었죠. 강원도 횡성부터 전남 해남까지 찾아다니다 만난 곳이 여기입니다. "-선생님이 생각하시는'좋은 마을'은 어떤 곳인가요."공동체 생활은 무소유와 무아집이 중요한데, 관념은 있지만 체화 안 된 사람에게는 피곤한 일이예요. 부자유, 허위의식 이런 것이 발생할 수밖에 없거든요. 그런 것으로부터 좀 더 자유로운 곳이 좋은 마을이라고 생각했어요. '좋은' 이라고 하는 것은 '좋은 생산력' '좋은 욕구' '좋은 소비', 이런 것들이죠."-경험도 없으셨을텐데 곧 바로 회사를 차리셨더군요."처음에 항아리 열 댓개 들여놓고 장류사업 한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취미 생활 하는 줄 알더군요. 그 뒤 생협과 관계하다 보니, 차츰 커져서 지금은 큰 항아리만 300개 쯤 됩니다. 이제는 제법 꼴을 갖춘 사업장이 되었어요."-요즈음 강의 때문에 바쁘실텐데 사업은 누가 합니까."사장은 집사람, 나는 종업원. 또 직원 한사람이 있었죠. 그런데 작년에 집사람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어요.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고 참 어려웠어요. 큰 아들이 어렵게 결단을 내리고 들어와 사업을 맡으면서 나는 자진 퇴사했어요."-논어 이야기를 좀 해주시죠. '논어' 강의 활동으로 바쁘신데 언제부터 논어를 공부하셨습니까."논어도 예순이 넘어서 만났어요. 사실 내가 젊은 시절 사회운동으로 보낸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 시절엔 논어에 대해 반감이 깊었지요. 공자도 그렇고, 보수적이고 완고한 어떤 견고한 틀의 상징처럼 생각했어요. 그런데 여기 들어와서 사람들하고 소통하다보니 자꾸 얽혀요. 이해관계도 그렇고, 대화의 방식도 그렇고.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에 옛날분이라도 성현을 모시고 공부를 좀 해보자 했어요. 그때는 마을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을 때니까 장수는 물론이고 전국 각지에서 왔죠. 공동체 생활 같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죠. 새로 마을을 만들 때 사람들 심층의 의식이나 가치관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그 것 같다고 어설프게 같이 했다가는 크게 후회 하는 경우가 많죠. 심층의 의식이 서로 소통할 수 있어야 해요. 그 연습의 장으로 한번 해보자 해서 논어를 선택했죠. 2년 동안 매주 했어요."-논어 읽기의 성과는 있었습니까."논어를 만난 것은 정말 행운이었어요. 공자라는 사람 자체가 대단히 인간적인 면모를 가진 성현이고. 우리는 논어 읽기를 '연찬'이란 말로 씁니다. '연찬'은 서로 대화하고 소통하는 하나의 방식이지요. 누가 강의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읽고 서로 생각한 것을 이야기 하는 형식입니다."-선생님께서 강조하시는 '연찬'은 무엇입니까."연찬이란 어떤 것에 대해서도 단정하지 않고 무엇이 진리인가라든지, 지금 시점에서는 어떤 것이 가장 옳은 것인가를 끝까지 함께(선생은 '함께'를 강조했다) 탐구하는 과정이지요. 가장 중요한 연찬 태도는 상대의 말을 그대로 듣는 것입니다."-그런데 상대의 말을 잘 듣는 것, 그것 참 쉽지 않은 일 아닙니까."맞아요. '잘 듣는 것' 쉽지 않지요. 공자는 이순이라 해서 60에 이르러서야 얻었다고 했어요. 자기 생각과 다르면 보통은 다른 사람 이야기가 안들리죠. 자기 생각과 다르면 어떻게 저것을 반박할까 생각하느라 듣지 못하거든요."-논어를 현대인들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열정이 각별하신 것 같습니다."논어에서 만난 공자는 무아집의 사람이더군요. 배울수록 완고해지지 않는. 이를테면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일관성인데, 배워도 완고해지지 않는 것은 유연함이지요. 아집이 없어서 오는 유연함이 중요해요. 유연한 일관성은 바로 현대에서 필요한 리더십이기도 한데, 내가 보기에는 지금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모습과 일치해요."-요즈음 높아지고 있는 인문학에 대한 관심은 어떻게 보십니까."나는 우리의 지난 반세기 전체 과정을 혁명으로 봅니다. 실제로 신생독립국가 운동에서 한국만큼 민주화와 산업화, 이 두가지를 반세기에 성공시킨 나라가 없습니다. 그 결실을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 아닙니까. 물론 민주화에 대한 평가가 다를 수 있지만, 어찌됐든 적어도 절대 빈곤과 독재에서는 벗어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만큼 행복해졌냐 하면 그것은 별개의 문제거든요. 오히려 다른 요소들이 있죠. 빈부 양극화나, 환경 파괴 같은. 그러다보니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인지, 어떤 것이 진정한 자유인지, 이것에 대한 물음이 시작된 것이죠. 이런 성찰이 인문학으로 나타난 것이지 않겠어요. 그런데 인문학은 잘못하면 거품이 될 수 있습니다. 지적 사치일 수 있어요. 그러니 그것을 진전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의식과 생활을 변화시키는 차원이어야 하고, 그 중심은 자기를 넘어서는 것이어야해요."-그것이 선생님께서 최근에 주창하시는 신인문 운동인가요."예전 문예부흥은 중세부터 근대로 넘어오는 분수령이 된 사상문화운동입니다. 유물론자들은 그것을 별로 중시하지 않았지요. 그러나 역사를 보면 의식이 중시 되지 않는 운동은 다 실패했어요. 사회주의 다 실패했지 않아요? 그리고 결국은 지금 그 과제가 발생했습니다. 전쟁과 환경문제, 빈부 양극화를 해결하는데 이제는 제도와 물질만으로 안 되는 시대가 온 겁니다. 생활과 의식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나는 이것을 신인문운동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결국 공동체여야 된다는 뜻인가요."'공동체'라는 말을 쓰고 싶지는 않아요. 다만 그동안 너무 개인주의적인 이기심이 강하게 작동하면서 지나친 행위능력이 발휘되고 그렇다보니 전쟁이나 환경파괴, 빈부 양극화 같은 많은 갈등과 문제가 생겼죠. 그것을 해결하려면 생활혁명운동이 일어야 한다는 겁니다. 단순 소박한 삶의 가치를 회복하는 것이랄까요."-단순 소박한 삶을 말씀 하셨는데, 귀농하신 분들의 지향이 그것 아닐까요."귀농하는 사람들 중에는 단순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많죠. 그런데 단순 소박한 삶은 도시에서도 할 수도 있는 일이거든요. 시골에 생태적인 삶을 살겠다고 온 사람들 중에는 누가 더 생태적인가 서로를 비교하며 비난하기도 해요. 이것은 단순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태도가 아니죠. 비교하고 경쟁하고 질투하는 의식을 없애야 합니다. 형태적으로 소박한 삶이란 욕구가 변하면 자연스럽게 옵니다. 정신적 욕구가 커지다보면 물질적 욕구는 자연스럽게 감소하죠. 내핍을 강요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녜요."-귀농한 사람은 많은데 성공한 사람들이 많지 않은 이유가 그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큰 뜻을 품고 농촌에 온 사람일수록 실패하는 예가 많아요. 큰 꿈을 갖고 왔는데 그것이 실태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자기 머릿속의 꿈이었을 때는 백번 실패합니다. 내가 〈진보를 연찬하다〉를 펴냈을 때 그것을 비판한 글을 본 적이 있어요. 내가 실태를 강조했더니 자기는 실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에요. 왜냐면 실태, 현실을 인정하면 꿈이 사라지니까. 놀랄 일이죠. 진보를 추구한다는 사람이 현실을 인정하면 꿈이 사라진다고 하니. 그런 꿈은 이상도 아닌 환상일 뿐이에요."-선생님의 귀농은 성공하신 겁니까."내 경우는 귀농이라기보다는 공동체에 들어간 것인데 만족했어요. 나는 사실 도시 생활도 부정하지 않아요. 무엇이든 차별심을 두고 하는 것은 스스로가 자유롭지 못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자연환경 때문에 시골로 오는 사람이 있어요. 6개월만 살아보세요. 별것 아녜요. 중요한 것은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이에요. 특히 부부가 뜻을 같이해 세운 삶이라면 그야말로 확실한 로망이랄 수 있는데, 그것은 남진이 이미 불렀잖아요. '저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웃음) 그런 로망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부부가 사이좋으면 이웃과도 좋아지고 마을이 화평해져요."-명문고, 명문대를 나와 보다 성공적인 삶을 사실 수도 있었을 텐데 왜 무소유적 삶을 선택하셨는지 궁금합니다."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선택하는데에는 환경적인 요소도 있지만 타고난 기질도 있는 것 같아요. 나는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살았습니다. 서울대 법대 들어가서 남들이 하는 것처럼 사법고시 예비시험도 보았어요. 그런데 현실을 보니 내가 일신의 출세를 위해 살 때가 아니더군요."-결국은 남민전에 연루되어 감옥생활을 하셨지요."남민전과 관련해서는 3개월 활동했습니다. 주체적이거나 과학적이고 현실적인 운동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나왔어요. 그런데 1년 있다가 사건이 터져서 15년 구형을 받았지요. 그동안 실사구시 하지 않은데서 비롯된 내 삶에 대한 댓가라는 생각으로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5년 선고에 4년 살고 1년은 특사로 풀려났어요."-그 안에서 무슨 변화를 겪으셨습니까."그 전부터 내 사상의 변화가 시작되었었는데 그 안에 있으면서 심화되었어요. 제도만을 변화시켜서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는 깨달음, 혁명에서 개벽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개벽은 총체적 변화지요. 제도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의식과 생활까지 바뀌어야 하는."-선생님께서는 '역사의 대긍정'을 말씀하시던데요. 수긍하기 어려운 사람도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물론이죠.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태도 중의 하나가 문명 자체를 부정하는 태도예요. 나는 이것을 매우 위험하고 반지성적이라고 생각합니다.'대긍정'은 이루어진 현실 전체를 (실패한 경험이든 성공한 경험이든) 받아들여 그것을 바탕으로 새롭게 나가보자는 그런 의미에서 내놓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면 진보라고 하지요. 신자유주의 반대를 열심히 외치던 사람들이 생활에 돌아오면 어떻게 됩니까. 초자유주의예요 신자유주의도 아니고. 이런 것은 정치적 구호일 뿐이지 생명력이 강하지 못하죠. 사실 우리가 경쟁의 폐단을 이야기 하지만, 경쟁을 넘어서는 것에 대해서는 발견하지 못하고 있잖아요. 진보가 해야 할 진정한 '진보의 길'을 찾아야 해요. 그것은 결국 실사구시에 대한 이야기지요. 사회적 실천으로 사회적 진보와 인간 자체의 진보를 이뤄야 해요."-어떻게 하면 이 시대를 잘 살아갈 수 있을까요.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한 말씀 전해주십시오."기개를 가져야 합니다. 이 시대는 젊은 세대들의 진정한 호연지기를 오히려 꺾고 있어요. 대학 만해도 어떻습니까. 대학은 새로운 문화 새로운 진보의 산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고루한 진보의 장이 되고 있지요. 시대는 순환하는 것이니 대학이 다시 창조의 산실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싶어요. 청년들이 그 안에서 호연지기를 기르며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세상을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이남곡 대표는...1945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를 나와 서울대 법대에 들어갔으나 4.19혁명을 계기로 사회의 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 사회변혁운동에 나섰다. 반독재 민주화투쟁에 앞장서면서 빈민운동에 참여하고 농촌학교 교사로 일했으며 1979년 남민전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다. 이때 사상에 큰 변화를 얻었으며 출옥 이후 법륜스님과의 인연으로 불교사회연구소에서 새로운 사회 새로운 문명을 연구했다. 이즈음 무아집 무소유로 집약되는 '야마기시' 사상을 만나 1996년부터 8년 동안 경기도 화성의 야마기시 실현지에서 생활했으며 이후 무소유 사회보다는 오늘의 실태에서 출발하는 보편적인 실천을 하고 싶어 장수군 번암면 유정리에 터를 잡고 '좋은 마을'을 만들어가고 있다.논어를 통해 자기 성찰과 소통의 방식을 나누는 강연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으며 논실마을학교(장수군 번암면) 이사장을 맡아 실상사의 도법스님과 함께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운동을 시작했다.최근에는 현대적 위기로부터 미래의 밝은 빛을 여는 운동을 의미하는 '신인문 운동'을 주창해 주목 받고 있다. 저서로 〈진보를 연찬하다〉를 펴냈으며 〈논어를 연찬하다(가칭)〉가 곧 출간될 예정이다. '좋은 마을'은 다섯가구가 사는 마을의 이름이면서 이 대표가 만든 장류 생산업체 이름이기도 하다.

  • 기획
  • 김은정
  • 2011.06.14 23:02

[인터뷰] 제이슨 R. 핸더슨 캔자스시티 연방준비은행 오마하 지부장

국가간 무역의 장벽이 허물어지면서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된 것이 농업이다. 농업 특성상 생산의 경직성에다 농가의 보수성 등으로 구조조정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다자간 무역협정에 이어 개별국가간 협상을 통해 개방의 폭이 계속 넓어지는 게 현실이다. 특히 세계적 식량대국인 미국과 FTA를 앞둔 국내 농가의 걱정은 더욱 클 수 밖에 없다.본보는 미국의 제이슨 R. 핸더슨 캔자스시티 연방준비은행 오마하 지부장으로부터 미국 농업의 실상과 한국 농업이 나아갈 방향을 들어보았다. 주한미국대사관의 미 국무부 연사 초청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한국을 찾은 그는 2일부터 5일까지 한국에서 강연활동과 한국의 농업 상황을 살펴볼 계획이라고 말했다.4일 전북도청 강연에 앞서 본보를 찾은 그는 농촌의 발전을 위해 기업가 정신을 강조했으며, 단순한 생산에서 나아가 부가가치를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개방화시대 한국 농업의 경쟁력을 위해서는 가격이 아닌 품질쪽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한국 농업상황을 아직 구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셨겠지만, 밖으로 보인 한국의 농촌 풍경을 본 소감은.△전주에 내려오면서 (한국) 농촌 곳곳이 개발된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특히, 비닐하우스(green house)가 많은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제가 사는 네브래스카주와는 다른 환경이지만, 쌀을 생산하는 캘리포니아와 미시시피 삼각주와는 비슷하더군요. 비닐하우스 안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 안에서 다양한 작물을 키우면서 새로운 '상품 가능성'을 실험하고, 도전하는 기업가 정신이 싹 트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한국 농업은 대외 개방에 따라 가격 경쟁력에 밀리고, 대내적으로는 고령화 등으로 활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미국 농업의 현실은 어떤지요.△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도 작은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인구 감소와 고령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국제시장에서도 브라질·아르헨티나 등 남미 국가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상황입니다.-미국 농업의 근래 추세와 함께, 농업발전을 위해 어떤 정책이 추진되는 지 설명해주십시오.△미국의 농촌 지역은 '상품 생산 경제'에서 '부가가치 경제'로 이행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단순히 옥수수만 파는 게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가공식품을 만들어 틈새시장을 공략하고, 마진(중간 이윤)이 높은 상품을 생산하는 겁니다.같은 맥락에서 부가가치 경제 활동과 농촌 개발 이슈 관련 예산이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일반 작물에 대한 정부 보조금은 늘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는 수준인 반면, 바이오 연료(bio fuel)와 지역 식품 시장에서의 농촌 관광(eco tourism), 유기농·특수 작물에 대한 정부 예산과 투자는 늘고 있습니다.구체적으로, 미 농무부에선 마이크로크레딧(microcredit·무담보 소액대출) 등 지역 식품 시장에 대한 금융 지원을 실시하고 있고, 미 상무부에선 지역 농촌 기업들에 시장 분석 지원 등을 하고 있습니다.연방정부(지방정부) 차원에선 기업가 정신을 장려하기 위한 정책과 사업 계획 수립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각 대학과 농무부가 협약을 맺어 농촌 기업들의 신상품 개발이나 시장 진출을 돕고 있습니다.△지부장님께서는 농촌의 발전을 위해 기업가 정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떤 배경인가요?- 미국 중서부 지역은 인구 밀도가 낮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농촌 지역 사회에서 파트너십(partnership) 구축은 매우 중요합니다. 있는 자원을 활용할 수 있고, 작은 농촌 시장에서는 갖추기 힘든 '규모의 경제'를 구성원 간 협력 관계를 통해 키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특히, 변화하는 시장 환경에서 성공할 수 있는 혁신적인 상품과 기업을 만들 수 있는 기업가 정신이 필요합니다. 농촌에서 기업가 정신이란, 첫 번째가 신기술을 개발해 상품을 효율적으로 생산하는 것이고, 두 번째가 전혀 새로운 소비자를 공략하는 것입니다. 일종의 '창조적 파괴'를 의미합니다.'가장 강한 종이나 가장 영리한 종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는 종이 살아남는다'는 찰스 다윈의 말처럼 끊임없이 변화를 모니터링하고 새로운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는 것이 기업가 정신의 고갱이입니다.-기업가 정신이 성공을 거둔 사례가 있다면.△기업가 정신이 성공을 거둔 예로 비농업 분야이긴 하지만, 네브래스카주의 '커니(Kearney)'라는 컴퓨터 컨설팅 기업이 있습니다. 운영은 시골 지역에서 하지만, 서비스는 도시 지역 소비자를 대상으로 제공하는 방식으로 인도까지 회사를 확장하는 등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그리고 바이오 에탄올 부문에서, 최근 네브래스카주에서 옥수수에서 '바이오 플라스틱'을 추출해 천이나 자동차 시트, 컵 등의 재료를 생산하는 것도 성공 사례입니다.-전북은 한국의 주된 쌀 생산지였고, 지금도 쌀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습니다.쌀 수매제가 폐지되면서, 상당 부분 구조조정이 이뤄지긴 했지만, 아직도 많은 농가에서는 마땅한 대체작물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미국 농촌도 1990년대 한국과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농산물 공급 과잉으로 미국 정부는 옥수수 등의 곡물을 기르지 말라고 농가들을 압박하고, 일부 보조금은 중단했습니다. 지금은 대체작물을 생산하거나, 기존 작물을 다른 방식으로 활용하는 방향으로 대안을 찾고 있습니다.한국도 현재의 환경에서 쌀을 대체할 수 있는 작물을 찾거나, 쌀을 다른 용도로 활용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할 필요가 있습니다. 쌀이 다른 산업에 쓰일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다른 종을 생산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미국 소고기 시장에서 비싼 값에 팔리는 '앵거스 소고기'(Angus Beef)에서 함의(含意)를 찾을 수 있습니다. '앵거스 소고기'가 마진이 큰 것은 (철저한 위생 관리와 과학적인 사육 등에 따른) 소가죽의 색깔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이러한 고급화 전략을 쌀 시장에 도입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한-미 FTA(Free Trade Agreement·자유무역협정)에 대해 한국 농가들은 걱정이 많습니다. 한-미 FTA가 양국의 농가에 어떤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하며, 한국 농가들에게 조언을 해준다면.△정부를 대표해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교역량이 늘어나면 두 나라 모두에게 돌아갈 이익이 많아지고, 이것은 양국 경제의 확장과 성장을 의미합니다. FTA를 통해 더 큰 시장과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죠.미국 농가 입장에서는 한-미 FTA가 비준이 되면, 미국 내부적으로 농업 생산자 간 경쟁이 붙고, 미국 농업이 가진 주요 자원이 무엇이고, 장점이 뭔지 고민할 것입니다. 이것은 마케팅 등 기존의 경쟁 방식을 모두 새롭게 바꿔 도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한국 생산자들도 가격 경쟁력 말고 다른 경쟁력을 확보해 질로서 승부해야 합니다.

  • 기획
  • 김원용·김준희
  • 2010.08.05 23:02

[인터뷰] 제이슨 R. 핸더슨 지부장은

제이슨 R. 핸더슨(Jason R. Henderson·38)은 캔자스시티 연방준비은행 부총재이자 오마하 지부장을 맡고 있다. 2006년 지부장에 취임한 그는 네브래스카주에서 연방준비은행을 대표하는 경제학자로서, 연방공개시장위원회 위원인 캔자스시티 연방준비은행 총재에게 네브래스카주의 경제 및 상업 활동에 대해 보고하는 업무를 맡고 있다.이와 더불어 분기마다 '농촌 신용 상황', '농촌 금융 데이터북'을 발간하고 있으며, 농촌 지역에 영향을 주는 경제 이슈를 다루는 '메인 스트리트 이코노미스트'를 두 달에 한 번씩 발행하고 있다.연방준비은행의 지역 연구 코디네이터로서 농촌 개발 등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는 그는 △기업가 정신 △토지 가치 △인구 통계 △농촌 지역의 지식기반 활동의 증가 △농업 전자상거래의 활용 △부가가치 식품 제조업의 증가 등을 주제로 연방준비은행 및 외부 학술지에 연구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그는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국가를 돌며 비즈니스와 금융, 정책 등을 주제로 왕성한 강연 활동을 하고 있으며, 그의 연구 보고서는 정부 관리와 연구자들이 활용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과 '뉴욕타임즈', '파이낸셜 타임즈' 등 다양한 언론 매체에서도 그의 보고서를 인용하고 있다.아이오와주 센트럴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퍼듀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오마하 지부장으로 임명되기 전 캔자스시티 연방준비은행에서 수석 경제연구원을 지냈다.

  • 기획
  • 김준희
  • 2010.08.05 23:02

[인터뷰] 삼성 에스원 태권도선수단 김세혁감독

“태권도에 입문했던 60년대말, 70년대초 전북은 태권도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이후 다소 침체된듯 했지만 최근 한층 활기있는 분위기가 반갑습니다.”남녀 선수 15명 모두가 현역 국가대표인 삼성 에스원 태권도팀의 김세혁감독(50·사진). 지난 2002년 시드니올림픽에서는 한 팀에서 2개의 금메달을 따내는 새로운 역사를 창조한 것 역시 에스원 태권도팀이다. 그 중심에서 8년째 사령탑에 있는 김감독이 전지훈련차 선수들과 함께 우석대를 찾았다.3박4일의 짧은 일정이지만 가능한 지방과 후배선수들과의 합동훈련을 통해 자연스레 기술전수를 하겠다는 생각으로 몇몇 지역을 돌며 전지훈련 일정을 잡았다. 무엇보다 국가대표를 꿈꾸는 선수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는 김감독의 의지 때문이다. 국가대표 선수생활에 이어 70년대 후반 부산 송도고를 맡아 지방팀으로는 처음으로 우승을 안았고, 80년대부터 20년동안 서울 동성고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태권도 명문으로 이끌기도 했다. 오랜 지도자생활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태권도 지도자들의 훈련지침서와 같은 ‘태권도 겨루기론’을 펴내기도 했다. 품새 중심이었던 대부분의 태권도 교본이 고작이었지만 동영상을 담은 그의 겨루기론은 지도자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줬다. 국기원에서 지도자들을 대상으로한 ‘겨루기 강의’를 만들고 15년째 해온 것 김감독의 노고다.그는 태권도 훈련법과 지도법, 그리고 대표팀 코칭스탭 참여경험 등을 담은 태권도 관련 행정 등을 두루 포함한 ‘태권도 가이드북’을 후배들을 위해 집필할 계획이다.김감독은 “전북은 태권도의 역사나 현재 인적자원면에서 충분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며 “우석대를 중심으로 우수선수들의 성장이 기대된다”고 말했다.

  • 기획
  • 이성각
  • 2003.12.31 23:02

[인터뷰] 생활체육 줄다리기연합회 초대 고미자회장

"줄다리기가 스포츠라고 말하면 웃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줄다리기가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팀웍, 특히 출전선수 모두가 단합된 힘을 발휘할 때의 그 매력은 상상하기 어려운 경험입니다.”오는 20일 전라북도 생활체육 줄다리기연합회 창립을 앞두고 초대회장을 맡은 고미자회장(59·사진). 그는 일반인들에게 친근한 종목이면서도 스포츠로서는 오히려 생소하게 느낄 것 같다는 걱정 때문인지 '줄다리기 예찬론'으로 말문을 열었다. 3년여전 우연한 기회에 스포츠로서의 '줄다리기'를 접하게 된 그는 일본과 대만 등을 찾아 다니며 생활체육으로서 적격이라는 믿음아래 줄다리기 보급을 위해 나섰다. 손수 심판자격증을 취득하는 등 남다른 열정을 보여왔다. 1900년 제2회 파리올림픽에서 육상종목 중 하나로 제7회 벨기에 올림픽까지 정식종목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일본에 5천여개의 클럽이 활동중이며 정식종목 부활을 위해 IOC(국제올림픽위원회)에 청원한 상태라는 점까지 더해진다면 줄다리기를 다시 생각케한다.고회장은 3년전부터 팀을 구성해 전국대회에 자비를 들여 출전하는 등 생활체육 줄다리기 보급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또 올해는 그동안 공들여온 결과로 연합회를 창립한다.(창립·취임식 20일 오후 5시 전주관광호텔) 올해 전국체전에서는 재외동포단과의 교류의 물꼬를 트기도 했다. 미국오렌지카운티 한인회가 내년 한인축제에 줄다리기 연합회 임원을 공식초청했으며 재몽골한인회도 정식으로 자매결연을 신청해왔다. 특히 연합회 출범과 함께 학교교육 과정을 통해 보급할 수 있는 방안마련에도 도교육청과 협의할 예정이다. 고회장은 "줄다리기는 참가선수 모두가 주인공이자 스타가 되는 스포츠”라며 "현재 도내 동호인 1천5백여명을 더욱 늘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 기획
  • 이성각
  • 2003.11.18 23:02

[인터뷰] '꽃다방 블루스' 연출가 박근형씨

"내용·형식의 실험보다 우리네 삶에 어울리는, 전라도의 말 맛을 살렸습니다” 작품마다 굵직한 화두를 던지며 국내 연극계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연출가 박근형씨. 그는 전북과 첫 인연을 맺게 된 이 작품을 "골치 아프거나 졸린 연극이 아니라 편안하게 한바탕 웃으며 즐길수 있을 것”이라고 소개했다. 전주시립극단 단원들과 2개월간의 만남. 어눌한 어투와 능청스러운 걸음걸이, 뻔뻔스럽게 보일 정도로 차분한 표정으로 연습을 이끌어왔지만, 단원들은 그를 '외유내강형 연출'이라고 소개한다. 섬세한 관찰력과 상상력으로 소품 하나까지 꼼꼼하게 짚어주기 때문이다. 그 역시 "자연이 함께 어울린 전주는 한번쯤 살고 싶은 도시”이며, "전통적으로 연극이 강성인 지역 이어서인지 최균·백민기 등 좋은 배우들이 많다”고 말했다. "시립극단은 누구나 몸담고 싶은 곳, 부족하다고 생각되면 재충전해서 다시 도전하는 지역 연극인들의 꿈의 공간이 돼야 합니다. 급여도 많이 주고 처우도 확실하게 해 줘야 하겠지만 그만큼 배우들의 오고감도 자유로워야죠” 청년예술대상(희곡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백상예술대상(희곡상), 동아연극상(작품상·희곡상) 등을 수상한 그는 지난해 창작극회에서 올린 '대대손손'의 작가로 이미 낯익다.

  • 기획
  • 최기우
  • 2003.10.31 23:02

[인터뷰] 발효식품엑스포 홍보대사 김수미

"우리 음식이 유럽이나 미국의 식탁에 오르는 일이 전혀 불가능한 게 아닙니다. 세계에 널리 알리고 싶은 마음 때문에 직접 발벗고 나섰죠.”국제발효식품엑스포 홍보대사로 나선 전북출신 탤런트 김수미씨(52). 지난 24일 개막하면서부터 줄곧 공식행사와 참여업체 부스를 돌며 '우리 발효식품 알리기'에 나섰던 그는 갑자기 떨어진 기온과 냉장창고(발효식품 대부분이 냉장창고에 전시돼 있다) 곁에서 보낸 시간이 많아서인지 심한 감기몸살로 고생하고 있었다. 고향일이라면 열일 제쳐놓고 앞장서 찾았던 그이지만 이번 행사는 더욱 특별하다. '유난히 손맛이 좋았던 어머니 덕'에 전라도 음식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고, 2∼3년전부터 김치제조업체 고가식품을 직접 맡아 운영해오고 있다. 홍보모델로 나섰던 게 인연이 돼 투자와 경영으로 이어졌다. 이 업체 역시 엑스포에 참여했다. 요리에도 관심이 많아 두 권의 요리책을 펴내기도 했던 그는 우리음식을 세계시장에 알리는 '얼굴'로서나 '솜씨'면에서 두루 적임자인 셈. 그는 발효식품이 우리 음식과 농업이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길이라고 강조했다."더이상 1차 농산물 생산으로 세계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어요. 산물을 가공해서 새로운 상품으로 승부를 해야 하고, 이런 점에서 발효식품엑스포는 우리농산물을 살릴 수 있는 길입니다.”그는 '엑스포 홍보대사'가 아니라 '우리 식품과 우리 농업의 홍보대사'라고 강조했다.

  • 기획
  • 은수정
  • 2003.10.27 23:02

[인터뷰] 전주 KCC 서포터스 회장 대학생 김선희

겨울을 기다려온 사람들. 프로농구 시즌을 기다려온 사람들 가운데 선수들처럼 가슴설레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서포터스. 전주KCC 서포터스단도 시즌이 다가오면서 응원준비로 시즌 개막보다 먼저 서포터스 활동을 먼저 시작했다. 1천5백여명의 서포터스 회원 10개 구단 가운데 가장 두터운 층을 자랑하는 KCC서포터스. 지난 시즌부터 1천5백명 식구들을 지휘하고 있는 김선희회장(23·원광대 식품영양학과)새로운 응원도구 준비, 선수대기실 꾸미기에 대학 4학년으로 졸업시험 준비하느라 눈코 뜰새없는 그는 그래도 5개월 동안의 농구 대장정에 흥분되는 듯한 목소리였다.비시즌에도 정기모임을 통해 끈끈한 유대를 해온 서포터스들은 이번 시즌에서 선수들의 든든한 후원자로 일찌감치 응원준비를 해왔다. 올해는 쿼터별 응원구호를 준비하고, 그동안 흩어져 있던 서포터스들을 서포터스존에 집중해 '정예화된 응원의 힘'을 보일 계획이다. 손수건만한 크기의 선수들의 모습을 실사(實寫)한 응원도구도 선을 보인다. 종이에 인쇄해 응원하던 지난해보다 한층 업그레이드 된 것. 젊은층이 대부분으로 경제적 부담때문에 원정경기 응원이 어려웠던 점도 올해는 나아질 전망이다. 단체이동하는 방법과 구단협조가 긍정적으로 검토되고 있기 때문. KCC 서포터스단은 올해의 별도의 명칭도 만들 계획이다. 경기장 응원 뿐아니라 서포터스단 회원들간 자체적인 활동에도 힘을 실을 예정이다. 그는 "지난 시즌 성적이 너무 좋지않아 응원하는데도 힘이 들었던게 사실”이라며 "용병들의 기량도 좋고, 선수층도 한결 탄탄해져 우승을 예감한다”고 말했다. 초등학교때부터 이상민선수를 좋아해 농구에 빠진 그는 2000-2001 시즌 KCC가 연고지를 옮기면서 서포터스에 참여한 '전주KCC 원년 멤버'. 총무를 맡아오다 지난 시즌부터 회장직을 맡아온 그는 이번 시즌 'KCC 우승'을 확신했다.

  • 기획
  • 이성각
  • 2003.10.25 23:02

[인터뷰] 마임축제의 최경식 운영위원장

"전주가 가진 전통적 자산인 한옥과 판소리·춤사위 등을 통해 우리 몸짓과 소품을 쓴 전통 창작마임극과 현대적인 마임을 모두 선보일 예정입니다” "한옥의 처마에서 이국적 향이 짙은 마임을 공연한다는 것 자체가 신비하고 즐겁다”는 한옥마을마임축제 최경식 운영위원장(38·소리전당 공연기획과장)은 "한국적인 테마가 있는 전통의 거리에서 마임예술가들이 종횡무진하며 펼칠 이색적인 공연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매력이 있다”고 말한다. 서양에서 출발한 장르지만 우리 것과 조화를 이룬다면 오히려 한국의 전통예술을 세계로 알리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 '권원태의 남사당줄타기'(12일 오후 6시 전주공예품전시관 놀이마당)와 '강정균·현대철·이찌로(일본)의 무대'(13일 오후 3시 교동다원), '이두성·유홍영·이태건의 무대'(13일 오후 8시 30분 다문찻집), '프랑스 마임극단 르노'(11일 오후 6시 전주공예품전시관 놀이마당) 등은 일부러 시간을 내서라도 꼭 봐야할 무대라고 소개한다. 그는 "올해는 가능성을 타진해 내년에 더 풍성해 질 것”이라며 "우선 예술장르인 마임을 시민들과 친숙하게 하는데 집중하겠다”고 말했다. 예산이 충분치 못해 올해 마임축제가 대폭 축소된 것도 사실. 특히 국내 최초로 열 계획이던 제1회 전국학생마임콘테스트를 미루게 된 것은 아쉬운 일이다. 마임축제의 예산규모는 4천만원 가량. 하지만 출연자들에게 교통비조차 제공하기 힘들 정도로 아껴야 할 판이어서 출연진과 스탭들 대부분 자원봉사를 결의했단다. 최 위원장은 "상당수의 마임 동지들이 전주시민들을 위해 무료로 서겠다고 했다”며 지면을 통해 감사인사를 부탁했다.

  • 기획
  • 최기우
  • 2003.10.09 23:02

[인터뷰] 이종인 국민체육진흥공단 이사장

"국민체육진흥을 통해 국민들의 복지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키자".지난해 8월 공단이사장직을 맡아 1년여동안 직원들과 함께 국민들을 위한 공단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온 이종인이사장(55. 사진). "올 한해 설정한 경영목표를 달성하고 직장에 대한 열정과 애정을 갖자"며 직원들을 독려해온 그는 '일등공기업'으로 공단을 이끌겠다는 각오다. 이를 위해 최근 공단은 조별, 팀별로 활발한 토론을 벌여 '일등 공기업'에 대한 연구와 실질적으로 공단의 존재를 업그레이드시키는 구체적인 방안찾기와 실천에 나서고 있다. 그는 "공단이 바로 서 체육계는 물론 국민전체가 공단에 고마움을 가질 수 있도록 새로운 공단만들기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전북출신으로 지역의 체육발전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애정을 가져온 그는 올해에만도 국민체력센터 건립과 전주해성고와 순창중 전북대의 잔디 우레탄 사업 지원을 비롯해 정읍시 장애인 체육시설 기능보강사업, 전국투우 민속대회 지원등 전북지역 체육발전 지원에 노력해왔다. 이종인이사장은 전주출신으로 전주고와 서울신학대, 고려대와 서울대에서 각각 석박사를 밟았고 한국인권문제연수소, 공단 감사(1998~2002)등을 거쳐 지난해 8월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 기획
  • 전북일보
  • 2003.10.08 23:02

[인터뷰] 정읍사문화제 제전위원회 이한욱 이사장

"올해 정읍사 문화제는 예년과 달리 민간 기획사측과 협의해 행사를 기획하고 추진하는만큼 내용이 알차면서도 특색이 있어 시민과 관광객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할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눈앞으로 다가온 행사를 준비하는라 눈코뜰새 없는 정읍사제전위원회 이한욱 이사장은 "버게한 행사를 대폭 줄이고 '천년의 기다람 부부사랑'이란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내용에 변화를 줬는데 어쩔지 모르겠다”며 시민들의 반응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 이사장은 올해 특색행사로 백제 정촌현의 발원지로 알려진 정해마을의 우물을 채수해 정읍사 망부사까지 봉송하는 행사를 처음으로 도입했다며 이 행사에는 남편을 기다리다 망부상이 된 정읍사여인의 숭고한 부덕을 기리고 모든 가정이 화목한 가정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깃들여 있다고 밝혔다.이 이사장은 실제로 정해마을의 경우 이혼부부가 거의 없고 모든 가정이 화목해 채수행사의 의미를 더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 이사장은 채수행사외에도 부부애를 마음껏 뽑낼수 있는 부부가요제,청소년들을 위한 틴틴페스티발,소원을 비는 축등달기,백제시대 당시의 의상입어보기 행사도 또하나의 볼거리라고 자랑했다.이 이사장은 체험행사로 망부상탁본뜨기와 즉석사진찍기,스티커벽화,퍼즐맞추기,가족소망쓰기,페이스페인팅,인쇄풍선,도자기체험 등 다양한 부대행사를 마련했다며 반드시 정읍사문화제에 참석해 부부사랑과 가족애를 다시한번 확인하는 귀중한 자리가 되기를 소망했다.

  • 기획
  • 손승원
  • 2003.10.04 23:02

[인터뷰] 전북사랑하는 탤런트 박근형씨

"연어가 바다로 나갔다가 자기가 태어난 고향으로 회귀하듯 저에게도 고향은 항상 돌아가야 하는 마지막 안식처로 자리하고 있습니다.”가칭 '전북을 사랑하는 대중문화예술인 모임(전북사)'을 주도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중견 탤런트 박근형씨(62·정읍)는 "젊었을 때부터 고향생각을 잊은 적이 없으며, 이제 나이가 들면서는 고향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할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고향에 대한 진한 애정을 표현했다.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왕성한 방송활동을 펼치고 있는 박씨는 "그동안 고향의 혜택을 받았으니, 이제는 몸과 정신을 고향에 쏟을 때가 됐다”며 전북사를 준비하는 배경을 설명했다.이어 박씨는 "이러한 모임은 사회적 부름보다는 개인의 느낌으로 시작하는 것으로, 내 자신의 느낌을 주위에 계속 전파시켜 왔다”면서 "이제 첫발을 내디뎠지만 이 모임은 갈수록 더욱 확산될 것”이라고 자신했다.박씨는 4년전부터 전북출신 연예인들과 불우이웃돕기 자선골프대회를 개최하는 등 지역 출신들과 연락을 취해왔으며, 이번 전사모의 모임은 이를 토대로 이뤄지게 됐다.박씨는 또 "고향 전북이 문화예술면에서는 풍부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각종 정치적 모임에는 절대 참가하지 않을 정도로 자기관리가 철저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그는 "순수한 마음의 고향사랑 운동이라면 모든 것을 제쳐두고 앞장설 것”이라고 강조했다.'고향에서 부른다면 언제든지 달려갈 마음의 준비가 돼 있다'는 그는 오히려 "그동안 고향에서 한번 불러주지 않았다”며 서운했던 마음을 내비치기도 했다.후배들의 연기 교육에 있어서는 무서우리만치 엄격한 그는 "연기는 끊임없이 배우는 것”이라면서 "영원한 예술인으로 남기를 바라며, 마지막 순간까지 무대에서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 기획
  • 김준호
  • 2003.08.28 23:02

[인터뷰] 정세균 새만금사업 특별위원회 공동위원장

정세균 새만금사업 특별위원회 공동위원장은 "10∼20년이 아닌 1백년 뒤까지 영향을 미치는 대형 국책사업인 만큼 도민들의 인내심과 진지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새만금특위가 뚜렷한 결론을 내지 못한 채 논란만 증폭시킨 과거 민관공동조사단의 재연이 될 것으로 우려하는 시각이 있는데.△문제가 있을 때 덮어두는 것보다 터뜨려 놓고 해결하는 것이 좋을 수 있다. 미봉책이 능사가 아니다. 과거의 쓰라린 경험을 토대로 성숙한 시민의식을 발휘할 때다. 과거보다 진전이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환경단체 등에서 특위 구성에 문제가 있다며, 새로운 위원 구성을 요구하고 있다.△위원들이 모든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다. 분야별 전문가와 전문가 집단의 도움을 받을 것이다. 여러 의견도 폭넓게 수렴할 것이다.-어떻게 결론이 날 것으로 예상하는가.△특정한 결과를 정해놓고 집착하기 보다 폭넓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담수호 여부·농지여부 등에 대해서 예단을 갖지 않았으면 좋겠다. 수질 등 환경과 경제성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할 것이다.-본안소송에 맞춰 결론을 내다보면 졸속 처리될 수 있는데.△최종 보고서는 당초 계획대로 내년말까지 마련하고, 본안소송에서 참고할 수 있도록 조건부 중간보고서를 내겠다. 1, 2단계로 추진한다는 이야기다. 즉 여러 대안중 실현 가능한 몇 개 안을 선정해 개괄적인 검토를 거쳐 의견으로 제시하는 것이 1단계다.-치밀한 협의가 안 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앞으로 계획은.△이제 막 걸음을 시작했다. 위원들과 협의를 거쳐 다음 3회 회의부터는 1주일에 한 번씩 회의를 갖겠다. 전문기관에 용역을 줘 그 결과를 토대로 집중적으로 논의를 벌이는 방식으로 진행될 것이다. 다양한 의견들을 수렴해 최대 공약수를 내는 것이 중요하며, 새만금특위에서 그 모델을 제시하겠다.

  • 기획
  • 김원용
  • 2003.07.23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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