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방용 의장(대한민국헌정회 원로회의)
 장맛비가 오락가락 하는 날씨에, 서울로 향하는 발걸음은 기대 반 우려 반이었다. 백수(白壽99세)인데다 왕년에 이름을 날렸던 어른을 만난다는 설렘이 큰 반면 과연 인터뷰를 잘 할 수 있을지 걱정도 없지 않았다.하지만 여의도 국회 옆 헌정회관에서 송방용(宋邦鏞) 원로회의 의장을 뵙는 순간, 우려는 싹 사라졌다. 바둑을 두다 일어서며 맞는 미소와 함께 악수를 건네는 손마디에 힘이 실렸기 때문이다. 큰 키에 맑은 얼굴, 시종 겸손한 모습에 "참으로 곱게 늙었구나"하는 생각이 스쳤다. 약간 허리가 굽긴 했으나 인터뷰하는 2시간 내내 자세 한번 흩뜨리지 않고 강기(剛氣)있는 목소리로 응해주셨다.대한민국 1324명(현직 296명 포함)의 전현직 국회의원 출신중 가장 연세가 높은데도 돋보기를 쓰거나 보청기도 끼지 않은 채였다.- 안녕하세요.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그래요. 반갑습니다. 저도 마음으로부터 전라북도민하고 한번 얘기하고 싶었어요. 나이를 먹으니까 남기고 싶은 말고 있고" (김제시 봉남면 출신인 송방용 의장은 김제에서 무소속으로 나와 제 2대와 3대 국회의원, 그리고 제 5대 참의원, 제 10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또 금융통화위원, 경제과학심의회 상임위원을 역임했다.)- 헌정회에는 일주일에 몇 번 정도 나오시는가요?"월수금 이렇게 오는데요. 대체로 오전 10시에 와서 오후 4시에 들어갑니다. 회원들과 담소도 나누고 바둑도 두고, TV 같은데서 (인터뷰하러) 많이 오는데 가릴 것 없이 얘기합니다."- 원로회의 의장은 언제부터 하셨습니까?"벌써 3번째(임기는 2년)입니다. 세 번 한 사람은 나 하나뿐이에요. 미련하게도 나이가 제일 많아서.(하하하)"- 의장님이 일제 때 연희전문학교(연세대)를 수석으로 졸업했다고 들었습니다만."여담이지만 제가 정인보 선생님의 수제자라면 어떨까 합니다. 일화 하나 소개하지요. 제가 졸업 맡을 때 전교를 대표해서 답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정인보 선생님이 너 답사 썼느냐? 하더니, 가져오라고 해요. 보시더니, 던져버려요. 그러면서 글은 그물로 말하면 벼루줄과 그물코가 맞아야 하는데, '선생님 고맙습니다'라는 말에 무슨 수식어가 그렇게 많냐고 단단히 꾸지람을 들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는가요?"다시 써가지고 갔더니 선생님이 몇 자 고쳐주시데요. 그 뒤 국회의원이 돼서 그 양반이 당시 감찰위원장(지금의 감사원장)이었는데 댁(흑석동)으로 찾아갔지요. 그랬더니, 너 이놈 문과한 놈이(법과도 경제과도 아니고) 국회의원이 되면 어떻게 하자는 것이냐. 나한테 와서 인사할 시간 있으면 돌아가서 빨리 헌법하고 재정문제를 공부하라고. 그게 그 때 사제지간입니다. 요새 전교조 사람들, 아이들에게 자유 주는 것이 지상의 과제인 것같이 하는 걸 보면서, 이건 아닌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3월에 헌정회 총회 마치고 백수연(白壽宴)을 하신 걸로 아는데요?"안 할라고 그랬더니, 총회 끝나고 하면 돈도 안드는데 뭣 땜에 안하려고 그러느냐 해서 그냥 백수연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 자리에서는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내가 99년 동안 살면서 일정 33년 산 것은 접어 버리자. 그리고 첫째로 세계적으로 볼 때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서 비행기가 생겨 육해공 어느 곳이나 갈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또 사람의 말이 광속에 의해 전달되는 시대가 오지 않았느냐. 아울러 우주를 정복하는, 옛날 같으면 신의 세계를 침범하는데까지 이른 것 아니냐. 이외에 1922년 소련이 레닌의 힘을 빌어 소련연방을 세웠죠. 이것을 소련이 1991년에 스스로 해체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유욕망이라는 것을 거스르고는 정치가 안된다는 교훈을 준 것 아니냐, 그런 말을 했습니다. 또 지금 카다피나 이집트 장기집권한 사람들, 중국을 위시해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지 않느냐. 앞으로 대중의 시대가 오는 것이 틀림없다는 얘기를 했습니다.그리고 나는 일평생 우리 한국이 이렇게 잘 살게 될 줄 몰랐단 말야.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한번 짚어보자. 그것은 대한민국이 있기 때문에 그런거야. 나는 이승만 박사를 정적(政敵)으로 삼았지만 이승만 박사가 대한민국을 만든 것은 크게 잘한 일이라고 칭찬을 한단 말이야. 또 박정희 대통령 같은 분, 우리가 경제적으로 잘 살게 하는 방향으로 산업화를 유도했기 때문에 오늘날 이렇게 된 것 이니냐. 누가 포항제철, 경부고속도로 생각한 사람 있겠느냐. 또 5만명 가까운 병사를 한국에 묻어 준 미국같은 나라가 있었기 때문에 미국을 미워할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그게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필로소피(philosopy)입니다."- 제2대 때(1950년) 김제에서 당선돼, 국회에 첫 진출을 하셨는데요?"그 당시 저는 미국을 가려고 연세대학을 들어갔습니다. 영문과를 한 거고. 그때 벌써 일본은 만주를 점령하고, 그럴 야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 가는 것이 좌절되었어요. 낙심하던 차에, 문득 생각한 게 있어요. 그게 허숭이에요."- 이광수의 '흙'에 나오는 주인공 말이죠?"예. 자, 이거 뭐 미국 못 갔다고 실망할 것 없지 않느냐. 나도 허숭이 되면 안되겠느냐. 그래서 졸업 맡은 그 이튿날 시골로 갔죠. 그래서 정말로 지게 지고 소 몰고 거머리 뜯기고 그렇게 시골생활을 했죠. 그것도 저는 훌륭한 아버님을 두어서 가능했어요. 학교도 졸업했는데 취직하라면 큰 일이거든요."(송 의장은 14년간 김제에서 브나로드, 즉 농촌계몽운동을 펼쳤다. 부친은 구한말에 여주군수, 조부는 곡성군수를 역임했다.)- 당시 계몽운동이 힘들었지 않았나요?"유치장에 가끔 들어갔죠. 창씨개명을 않했거든. 거기다가 집안은 그렇지, 아버님은 상투를 안깎으셨지. 그런데 (유치장에서) 그 썩은 보리밥도 꼭꼭 씹으면 맛있어요. 사식(私食) 안들이고 오기로 그렇게 먹은거지. 시커먼 다꽝(단무지), 그런 것 먹었죠."- 그러다 농촌운동 때 가르쳤던 제자들이 국회의원 출마를 권해서 나온 것으로 아는데요?"나 한테서 배운 아이들이 제헌(국회) 때부터 나가라고 그래요. 안나가니까, 그 때는 자기들이 신문지에다 기호를 써 가지고 붙이고 그랬어요. 11명 나왔는데 기호가 11번이에요. 1번이나 11번이나 맘먹지 않느냐. 끝에다만 찍어라. 그래서 당선되었죠.(하하하) "(당시 김제에는 홍희종, 조한백씨와 도지사를 지냈던 장현식씨 등 거물들이 다수 출마했다.)- 무소속으로 있었던 이유가 특별히 있었습니까?"제가 나중에 한민당하고 손을 못잡은 이유가, 그때 나를 공산당으로 몰았거든요. 당시 전주지검 검사장이'이 사람이 공산당이면 당선돼도 가둘 수 있는데, (선거) 이틀 앞두고 구속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해서 (경찰의 구속영장을) 기각해버렸어요. 그 대신 사무장하고 선거운동원 182명을 전부 가둬버렸죠. 곳곳에 가면 부인네들이 금방 낳은 달걀을 손에 꼭 쥐어주는 따뜻한 정(情), 그걸 안고 당선되었기 때문에 이 분들을 절대로 잘 모셔야겠다고 생각을 했던거죠."- 2대와 3대 국회 때 활동은 어떻게 하셨는가요?"2대 때는 부산 피난시절이라 지역구나 의정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3대 때는 한글간소화라는 게 있었습니다. 이승만 박사가 언문같이 쓰면 되는데 무슨 문법이냐 하는 말씀을 하셨어요. 그러자 이선근 문교부장관이 간소화운동을 시작한 겁니다. 그 때 제가 발의자가 되어 이선근씨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종로 네거리가 자동차가 많이 다니고 시끄럽다해서 일방통행을 시키면 잘 되겠느냐, 글에도 길이 있는데. 그렇게 해서 제가 막았죠. 장준하씨의 사상계에 대서특필돼 전문이 실렸습니다."- 또 자유당의 사사오입 때 암호투표를 폭로하셨는데, 큰 용기가 필요하셨을텐데요?"저는 그때 무소속구락부에 있었고요. 국회에 들어가니까 이철승 의원이 자유당의 암호투표 얘기를 해요.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유진산 씨등 몇 사람에게 알아봤는데 후환이 두려워 말을 안해요. 결국 (누구한테 얻었는지) 그걸 목숨을 걸고 보장하겠다고 한후 단상에 올라갔어요. '이럴 수가 있느냐, 헌법을 신성하게 고쳐야지.' 하고 발언을 한 거죠. 그 때 2층에는 이정재 등 동원한 깡패들이 꽉 차있었거든요. 처음으로 나한테 스탠딩 오베이션(기립박수)했어요. 그렇게 싸웠죠." (송 의장은 당시 우리나라가 법도 제대로 시행되지 않을 때의 모습이라며, 지금 생각하면 후회되는 일이 있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가까웠던 죽산 조봉암씨의 일화도 들려줬다.)- 후회되는 일이라뇨?"뭘 후회하는고 하니, 아니오 아니오 하는 소리는 할 줄 알았어요. 그러나 '이거다'하고 제시하지는 못했어요. 다시 말하면 그 때 내 지식은, 또 일반국민이 원하는 것은 아니오 아니오를 원했지, 대안을 가지고 나오지는 못했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나는 그 때 다 알고 잘했다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그 때 나는 무식했다, 정열은 있었다, 싸움도 했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대한민국 역사에 무슨 플러스를 했느냐. 그걸 나 자신이 의심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5대 참의원(1960년)에도 당선되셨는데요. 참의원의 역할이 무엇입니까?"지금 미국하고 똑같아요. 상원이에요. 그 때 참의원은 1부와 2부가 있었습니다. 1부는 6년, 2부는 3년입니다" (참의원선거는 헌정사상 단 한번 실시됐다. 전국적으로 58명, 전북에서는 6명을 뽑았다. 송 의장은 1부에 당선되었다.)- 그런데 516이 일어나 곧 그만두시지 않았던가요?"9개월인가 하고 없어지고 말았죠. 오늘을 만드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보고요. 장면 정부는 무기력했어요. 어떻게 이해할지 모르겠으나, 장면 선생은 정치를 할 분이 아니에요. 정치를 할 사람들은 생명을 내걸어야 합니다. 그리고 정치는 왜 하느냐? 이걸 윌리엄 처칠 경은 얘기하고 있거든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기자들이 처칠 경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의 정치철학은 뭡니까? 대답이 그래요. 나 보다는 정당을 더 중요시한다. 정당보다는 나라를 더 중요시한다. 그런데 요새 국회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과연 그런 정치인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프라이아리티(priority)가 뭔지 모르니까 지금 우리나라 정치가 이 꼴이 아니겠느냐 하는 거지요."- 박정희 대통령과는 상당히 가까운 사이였다고 들었습니다. 입각도 여러번 권유 받으시고."제가 정치인으로서 '이거다'하고 생각한 것은 박정희씨하고 일할 때입니다. 박정희씨가 세번 입각을 권유했지만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한국이 가야할 길은 역시 산업화해서 빨리 부(富)를 증식시켜서 재(財)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지(知knowledge), 이런 것들을 갖추지 않고서는 나라를 세울 수 없다는 것을 박정희 대통령이랑 공부한 거죠." (송 의장은 그 후 장관급인 경제과학심의회 상임위원을 8년간 역임했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어떻게 보십니까. 통일의 연착륙을 위해 인도주의적 지원은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나는 그런 차원을 넘어 이북을 이렇게 보고 있어요. 김정일이 하는 일이 독재입니까 아닙니까. 또 3대를 세습하는 것은 전제주의 아닙니까. 김정일이 하는 것이 공산주의 아닙니까. 그럼 김정일을 도와 주는 일이 2500만 주민에게 도움이 됩니까 해(害)가 됩니까. 우리가 이북사람을 동포라고 한다면 하루속히 해제해 줘야지요. 그런데 무비판적으로 쌀이나 보내 주는 것이 옳은 일 입니까. 이북의 동포들이 법률없는 세상에서 학살을 당하고 있는데 그걸 구해주는 조치를 우리가 취해야 합니까 아닙니까. 이것은 이북을 싫어하는 이전의 문제고, 당위의 문제입니다. 이것을 기억해 주세요."- 내년 12월에 대선인데요. 대통령으로서의 덕목은 무엇을 꼽을 수 있을까요?"나 보다는 정당을, 정당 보다는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 나와야 합니다. 누가 대통령이 되건 그걸 안하면 헛것입니다."- 전북도민에게도 한 말씀 해주시겠습니까?"왜 전라북도는 민주당입니까. 언제까지 그렇게 가야합니까. 캘리포니아 보다 작은 땅에서 뭐가 전라도고 경상도입니까. 제 며느리가 셋이 있는데 전라도 강원도 부산(출신)입니다. 전라북도도 하나의 대한민국 공동체입니다. 전라북도부터 문을 끌르세요. 우리가 클 때 전라도는 그렇게 쪼그라들지 않았거든요. 그래도 정계에 내다 놓으면, 그 사람들 단상에 올라가면 호령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전라북도의 의원으로 있었습니다. 요새 그런 사람이 별로 보이지 않네요. 바람직한 것은 전라북도의 국회의원을 베스트를 뽑아라. 어느 일부에 속한 사람을 집착하지 말아라. 내 이런 얘기를 꼭하고 싶습니다."- 내년에 낼 자서전 준비는 잘 되고 있습니까?"아니요. 안 쓸랍니다. 그동안 준비했었는데, 법정스님이 쓴 책을 회수하는 것을 보면서 그리 생각했습니다. 자서전은 자기 미화의 일부입니다. 아무리 넘어서려 해도 해탈이 안돼요. 그럼 내 변명하고 마는거든요."(송 의장은 인터뷰를 마칠 무렵 전라북도민들에게 "기쁘게 살아주시라고 부탁해주세요. 그리고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자기가 구세주가 돼 보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면 본인도 편하고 세상도 편하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면서 마음 같아서는 전라북도에 가서 마이크도 잡고 강연도 하고 싶은데하며 애틋한 정을 표했다.)◆ 송 의장의 思婦曲송 의장의 부인(이복쇠)에 대한 사랑은 각별한 것으로 유명하다. 10년전, 앞서 간 부인에 대해 "집 사람은 저의 은인이요 천사"라고 말했다.당시 경성보육학교를 나온 인텔리인데도 송 의장의 청혼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함께 농촌운동을 했다. 부인은 한번도 송 의장 앞에서 집안의 걱정되는 얘기를 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정치인의 아내로서 새벽부터 찾아오는 손님을 맞았고 친척 아이들까지 집에 맡겼지만 한 마디 불평없이 내조를 했다. 그래서일까. 송 의장은 10년째 부인의 유골함과 영정을 방에 모시고 산다. 5년간 치매와 당뇨로 투병하다 먼저 간 부인의 유골을 남이나 절에 맡기는 것보다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이 따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송 의장은 아침 저녁으로 "나, 일어났소. 나 다녀오리다"면서 항상 곁에 있듯 말을 건넨다고 한다. 부인의 생일과 기일(忌日)이면 꽃을 사다 유골함에 놓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의장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어떻게 하실 작정이냐?"고 묻자 "자식들에게 화장해서 Let them be free(너희들 마음대로 하라)"했다고 말한다. 부부는 64년을 해로하는 동안 항상 존댓말을 썼고 슬하에 5남매를 뒀다.송 의장의 건강비결 역시 인구에 회자된다. "부모님이 건강한 몸을 주셨다"면서도 "자기관리가 절대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자기관리는 유명한 건강 7계명이다. 덕분에 평생 돋보기도 보청기도 틀니도 지팡이도 사용하지 않고 있다. ①담배를 피지 않는다 ②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다 ③매일 7000보씩 걷는다 ④아침마다 맨손체조와 요가를 한다 ⑤하루 세끼 외에 군것질을 안한다 ⑥술은 친구와 기분좋게 마신다 ⑦비타민제를 정기적으로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