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숙선  국창(國唱) "자신이 하는 일은 그게 뭐든 목숨 걸고 사랑하라"
 2주 전 쯤, 안숙선 명창에게 전화를 걸었다. 인터뷰 요청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는 목소리가 너무 가냘펐다. 아니, 판소리 대가라는 분의 목소리가 왜 이렇지, 내가 잘못 걸었나? 귀를 의심했다. 이후에도 몇 차례 통화를 더 했으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곧 그 의문은 풀렸다. 안 명창은 공연 전에는 목소리를 아끼기 위해 사랑하는 손자와의 대화도 자제한다는 소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듯 안 명창은 철저한 프로다. 인터뷰가 있던 지난 25일, 안 명창은 전주 리베라 호텔에서 열린 411 총선 당선자들을 위한 교례회에서 수궁가 중 용왕이 토끼 간을 빼먹으려는 대목을 불렀다. 전화 목소리와는 완전히 달랐다. 카리스마 넘치는 수리성으로 좌중을 압도했다. 공연이 끝나고 바로 뒤쪽에 자리한 전주소리문화관으로 옮겨 인터뷰를 시작했다.- 반갑습니다. 지난 토요일(21일) 남원에서 '지리산 둘레길 소리여행' 행사를 이끄셨는데 비가 와서 힘들지 않았습니까?"비오고 바람이 많이 불고 그랬어요. 오신 분들하고 길 걸어가면서 서편제 한 장면처럼 노래하고 춤도 추려고 했는데 못하고, 기념식장에서 그냥 민요만 들려 드렸어요."- 이번 제82회 춘향제(4월 27일-5월 1일) 제전위원장을 맡으셨습니다. 1986년 춘향제 전국명창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해 감회가 남다를 것 같은데요?"그래요. 처음에는 제전위원장 보다는 홍보대사나 고문을 맡겨주시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그 동안 마음 한 구석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춘향제에 대한 아쉬움이 항상 있었는데 올 춘향제를 계기로 그에 대한 빚을 갚고 싶다는 생각도 했고요. 프랑스 아비뇽, 영국 에딘버러 등 세계 여러 나라의 축제를 많이 가봤는데 남원에는 춘향가와 흥보가의 무대가 있고, 그런 것을 생각하면 문화적으로 이렇게 좋은 곳이 없을 것 같아요. 저는 K-Pop 이상으로 열풍을 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주제가 '얼씨구! 춘향사랑'입니다. 종전 춘향제와 좀 다른, 차별화된 점은 무엇입니까?"축제를 운영하는 분들에게 그런 말씀을 드렸죠.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축제가 아니고 남원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독창성 있는 축제가 된다면 정말 많이 올 것 같다고요. 남원하면 춘향이니까 모든 걸 춘향과 함께 접목을 시켜보는 방법, 예를 들면 미꾸라지 잡는 행사도 있더라고요. 그냥 미꾸라지만 잡는 것 보다는 다 모여서 미꾸라지 잡아서 춘향아씨 드리자, 춘향도 칼을 쓰고 있다 쑥대머리 한번 부르고 이리 와서 먹어라 하고, 이렇게 먹는 것도 춘향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어떨까.(웃음)"- 발상이 상당히 신선한데요?"꼭 미꾸리지 뿐 아니라 섶다리도 춘향이와 같이 걸어가고, 이도령도 뽑아서 같이 걷고, 남원은 모든 게 춘향, 그리고 춘향과 음악을 통해서 그렇게 만들어 보일 수는 없을까, 그렬려면 축제와 국제적 감각이 있는 분들이 머리를 맞대고, 자존심을 걸고 축제를 만들어 보자, 그런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면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 2004년부터 5년 동안 전주 세계소리축제 제전위원장을 맡았습니다. 당시 정체성에 대해 말이 많았는데 이제는 선생님이 주장하신대로'판소리를 중심으로 한 국제음악축제'로 자리잡은 것같습니다."여러분이 도와 주셨는데, 판소리를 (축제의) 중심에 두겠다는 저의 의지는 분명했으니까요. 도민들 모두가 소리축제는 판소리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다들 그렇게 해 주셔서, 제가 조직위원장 하면서 이런 말을 했어요. 소리축제가 10년 걸리든 20년 걸리든 어느 궤도에 올려놨나 평가를 받을 것이다. 혹여라도 예산 낭비 없이, 일당 백이 돼 줄 수 있겠느냐, 그리고 축제를 사랑해 달라, 소리축제에 상처를 내지 말라, 우리 것을 아껴서 자꾸만 뻗어 나가도록 해야지, 이거 상처를 두들기면 아름다운 꿈과 이상을 어떻게 보여주겠느냐, 때리지 마라. 때리면 나는 그 날로 가버리겠다. 근데 안 두들겨 주셨거든요.(웃음)"- 그 전에는 꽤나 말이 많았거든요?"조그만 여자가 있다가 울고 가버릴까 봐 (웃음) 그랬겠죠."- 예전으로 돌아가 얘기를 해보죠. 선생님은 스승 복이 많은 것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먼저 만정(晩汀)김소희 명창과의 인연은 어떻게 맺게 됐습니까?"1968년 겨울 남원에 있다 선생님으로부터 '서울 한 번 올라 오너라'는 부름을 받고 동생 옥선과 함께 상경했는데 해외공연이 무산됐어요. 그 뒤 1970년에 만정 문하에 들어가 판소리 '춘향가''흥보가'를 배웠어요."- 굉장히 아껴주셨다면서요?"선생님이 저를 가르쳤던 나이가 되고 보니까, 왜 그렇게 각별히 교육을 시키셨고, 보살핌과 정을 주셨는지 조금 이해하게 되더라고요. 제자를 가르쳐 보면 선생님이 가르쳐 준 음악, 구조나 뜻이나 성음을 잘 받아들이면 속으로 아끼게 되는 거죠. 그러나 엄하게 키워야 되죠. 제가 어릴 적에 음악을 잘 받아들이고, 선생님께 큰 애를 먹이지 않고, 또 시킨대로 잘 하고 그런 때문인지 선생님이 하셨던 일, 그 맥을 이어주는 일이 중요하다 생각을 하셨던 것 같아요. 선생님 연배가 돼서 애들 가르치면서 알게 됐어요. 지나간 뒤에야 그런 게 후회스럽고 또 한편으로는 선생님이 그렇게 아껴주시고 챙겨주실 때 저도 선생님을 잘 모시고 즐겁게 해 드렸어야 했는데요. 그렇게 제가 못했거든요. 공연을 핑계로, 또 연습 핑계로 '몸이 아파서 네 약을 지어 놨으니 와서 가져 가거라' 하는데도 며칠을 안 가고, 선생님이 들통에다가 장어같은 것 고와서 가져 오시고, 또 제가 아프다고 하면 제 손을 잡고 병원에 가서 '제 수제자인데 잘 좀 봐주세요' 이런 것들이 보통으로 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눈물) 저는 제자들에게 선생님이 하는 일의 만분의 일도 못하고 있거든요."(안 명창에게 예술 이전에 인간적으로 인품을 갖춰라, 항상 절제된 소리를 내라, 때까치마냥 입만 딸싹딸싹 부르지 말고 기를 모아 소리를 하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자나 깨나 판소리를 걱정하며 평생 모은 재산을 제자 양성에 썼다.)- 또 가야금 병창의 향사(香史) 박귀희 명창과는 어떻게 만나게 된 겁니까?"워커힐 호텔 공연단에서, 그 때는 국제관광공사 때였는데 10년 넘게 매일 두 번씩 공연을 하다보니 기관지가 상해서 소리공부를 일시 중단하게 됐어요. 만정선생님이 그래도 공부를 멈출 수 없으니 박귀희 선생님에게 가야금을 배우라고 권했어요."- 두 분 성격이 아주 대조적이었다면서요? "만정 선생님은 평상시에도 말씀을 크게 안하세요. 어디 가시는 것도 티가 나지 않게 조용 조용 다니시는데, 향사선생님은 좀 남자 같으세요. 향사선생님은 평소 인간관계를 돈독히 해 두셨다가 급한 일이 있어 가면 그 자리에서 금방 해결하는 거예요. 어디든 도움을 받았던 곳에는 꼭 명절 때면 넥타이든 뭐든 사서 보내시고. 정말 대단하신 분이죠. 그래서 향사선생님이 국악계를 이끄셨고 운당여관을 두 번에 쪼개서 국립전통예술학교에 헌납하셨어요. 선생님은 평소에 어떠시냐면 제 손을 잡고 백화점에 가서 이것 하나 입어라 하시는데 (정작) 선생님은 세일한 것을 사 입으세요. 이 옷 어디서 사셨어요 물어보면 남시싸롱(남대문시장) 하시는거예요. 그렇게 검소하게 생활하셨죠."- 박귀희 명창의 권유로 국립창극단에 입단하신 건가요?"1979년도에 제가 당시 국립창극단 단장이신 선생님의 권유로 오디션을 보고 입단했는데요. 그 때는 단원들 처우가 현실화 됐을 때에요. 여기서 제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됐어요. 무대에 선다는 것이 제가 공부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요. 워낙 잘하는 동료들이 많고, 큰 선생님들이 보고 계시는데 허투루 했다간 선생님들께 누(累)가 되고, 무대에 설려면 실력이 부족하면 안되니까 연습을 안할 수가 없어요." - 타고 나신데다가 연습벌레였다면서요?"그 때는 개인 연습실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연습할 곳이 어디 없나 찾아다니다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소리를 하죠. 누가 그래요, 보일러실 밑에 가면 따뜻하기도 하고 (보는 사람도 없고) 거기서 숨어서 그렇게 했거든요. 그리고 다 퇴근하고 나면 연습실에서 하는데 수위아저씨들이 다 갔는가 하고 문 잠그려고 올 때까지 공부하고 했으니까요. 밤에 제가 소등을 하고 소리를 하는데 누가 문을 탁 열고 보니 머리가 헝클어지고, 그래서 놀랬다는 말들도, 좀 과장이 됐겠지만 그 때는 소리에 미치다시피 했지요."- 국립창극단에서 어떤 분들로부터 배우셨습니까?"그 때 제가 국립창극단에 있었던 게 참 다행이었어요. 돌아가신 허규 극장장님이 단원들의 기량을 높여야겠다, 그래서 각 바디별로 인간문화재 선생님들을 다 모셨죠. 정광수 선생님한테 수궁가를, 박봉술 선생님한테 적벽가를, 정권진 선생님한테 배우다 돌아가셔서 성우향 선생님한테 심청가를 배웠어요. 그 분들께 단체로 배웠는데 소리라는 게 공동으로 배워가지고는 안되는 것 같아요. 선생님하고 호흡까지 느끼면서 배워야 하는거든요. 그래서 단체로 배우고 나서 바로 선생님을 모시고 혼자 배우기 시작했죠.- 판소리 다섯바탕을 모두 떼셨군요. 어릴 적 남원에서는 친척인 강도근 명창으로부터 소리를 배우셨죠?"그래요. 강도근 선생님한테 소리 기초를 배웠죠. 서울에서 많은 분들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제가 86년도에 적벽가 완창을 했는데, 그게 뻗세고 남자소리인데 여자로서 저만큼 할 수 있는 것은 (여자들은 적벽가를 별로 안할 때죠.) 제가 어렸을 때 강도근 선생님께 기초를 배웠기 때문이라고요. 흥보가 배우고 수궁가 배우고 중요한 대목 대목, 그러니까 한 2/3는 거의 배웠거든요."- 서양 오페라와 달리 우리 창극의 발전 방안은 뭘까요?"지금 우리가 다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데 궁중무용, 민속무용, 연희, 춤, 줄타기 이런 많은 유산을 어떻게 모아서 보여주느냐. 그러면 우리 창극이 세계적인 오페라 못지 않은 음악이 될거라 생각해요. 중국의 장이모 감독, 그런 분들은 수백억 원 들여서(상해 엑스포) 하지 않습니까."- 판소리의 미래를 어떻게 보세요?"자주 소리판을 열어야죠. 소리판에 자주 오는 귀명창들이 없고서는 이게 가능하겠는가, 그런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어렸을 적부터 소리도 들어보고 우리 춤도 추어보고 해야죠. 그런데 요즘은 과연 그런 어린이들이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돼요. 그래서 관계되는 분을 만나면 제발 유치원부터 장고나 꽹과리 등 장단을 맞출 수 있는 리듬악기 하나, 그리고 단소나 소리를 배운다든지."- 산공부는 어디서 하십니까?"옛날에는 구례 문수사, 연지암 그런데서 했고요. 요즘은 여기까지 내려 올 시간이 없어서 청평이나 양평, 강원도쪽 그런데 가서, 보름 정도 있다가 오기도 하고. 거기서는 꼼짝 못하고 앉아서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몰입이 되는 거죠."- 목소리 관리 비결은?"느닺없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욕심을 버려야 해요. 열기가 위로 뻗치면 목소리가 안나오잖아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욕심을 버린다거나, 자꾸만 뭐든지 내려놓고 마음을 평정하고, 편안하게 하는 것이 목소리 관리에 좋은 것 같아요."- 득음할 때 목이 붓고 그러면 똥물을 먹는다고 그러덴데요?"인분(人糞)요. 요즘 독감이 들어 한 일주일 입원했거든요. 항생제를 써서 그런지 맥을 못추겠더라고요. 옛날 방법이 비위생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오히려 아주 삭혀서, 어느 한 곳의 열을 없애주고 해서 먹을 때만 그렇지"- 드셔보셨는가요?"안 먹었어요.(웃음)"- 딸(최영훈, 거문고산조)에게 "엄마 노릇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 의미는?"제가 막 공부를 하고 그럴 때는 아이들 다 팽개쳐버렸어요. 시어머니께 다 맡기고, 아침에 나왔다 저녁에 들어가고, 그저 공연하는데만 중심을 두었죠. 그렇게 했는데 저희 딸은 자다가도 (아이 때문에) 응급실에 가더라고요. 딸한테 너 공부를 제대로 하려거든 잊어라, 엄마노릇 하지 말라, 그랬는데, 엄마 노릇 해야죠.(웃음)"- 평소 건강 관리는?"제가 해보니까 좋은 공기, 좋은 기(氣)를 받아야 해요. 산에 자주 가서 산의 기도 받고, 최대한 많이 걷고, 음식도 너무 기름진 것 먹지 않고, 그래서 몸을 자연의 순리에 맡기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국악 후배들에게 한 말씀 들려주시겠습니까?"제가 정말 소리를 사랑하는 것 같아요. 소리를 하고 한바탕 잘 됐을 때는 누가 뭘 줘도 이것만 못해요. 내가 내 일을 사랑하고 자꾸 아끼고 잘 할려고 하고 해야죠. 괜히 어거지로 하면 시간만 낭비잖아요. 사랑해라, 충분히 사랑해라, 지금은 어렵지만, 옛날 어르신들이 그랬거든요, '소리를 잘하면 보배네' 그랬어요. 누구도 감히 가져갈 수 없잖아요. 혼자 앉아서 공부한다는 게 자기와의 싸움인데 쉽지가 않죠."- 전북의 경우 문화예술계가 정체되고 파벌도 심한 것 같은데요?"사람이 사는 곳은 어디나 그렇죠. 우리는 소리라는 끈을 가지고 있잖아요. 어떨 때 서로 감정이 안좋다가도 A라는 사람이 소리를 잘 하잖아요. 그러면 '그래 그래, 너 다 먹어라' 이런 때가 있어요. 우리가 가는 길을 서로 이해하고 그러면 풀어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