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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금림 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장 "드라마가 세상을 바꿀 수도, 인생을 바꿀 수도 있죠"

우연히 아침 드라마를 보게 되었다. KBS TV소설 '복희누나'였다. 눈길을 끄는 톱스타도 없고 자극적인 이야기나 볼거리도 드러나지 않는 이 드라마에 마음이 끌려 '다시보기'를 그렇게 즐겨하게 될 줄 몰랐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해 11월 10%대의 시청률로 출발했던'복희누나'는 16%대까지 시청률을 끌어올렸고, 평균 14%대를 꾸준히 유지했다. 아침드라마 중 가장 높은 기록이었다. 통상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막장 드라마를 떠올리게 되는 아침드라마의 행진 속에서 이 드라마가 단연 돋보이는 이유가 그래서 궁금했는데, 이 드라마를 쓴 작가 '이금림'이란 이름을 보고 '아! 그렇구나'하고 고개 끄덕여졌다. 요즈음의 트렌디 드라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휴머니즘과 삶의 진정성을 갖고 나선 작가라면 '이금림'을 우선 떠올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문학적 서정성과 흥미로운 이야기로 재미가 넘쳐나는 '복희누나'는 1960~1970년대를 배경으로 주인공 '복희'와 여러 인물들이 빚어내는 휴머니즘과 애환, 성장과정을 그린 드라마다. 공간의 배경이 진안과 전주여서 이 지역 시청자들에게는 드라마를 보는 또 다른 즐거움을 덤으로 주었던 드라마다. 드라마 작가 이금림씨(64)를 만났다. '복희누나' 종영 하루 전날이었다. 드라마를 쓰기 시작하면서 "인간 밑바닥의 진정성을 그린다면 특별한 설정 없이도 충분히 재미를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는 그는 드라마가 세상을 바꿀 수도,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는 생각이 좋은 드라마를 써야 한다는 의식을 늘 지키게 했다고 말했다. 감각적인 설정 대신 삶의 진정성을 담은 탄탄한 이야기로 30여년동안 시청자들을 드라마로 울고 웃게 했던 그는 나이와 관계없이 소녀처럼 밝았다. 한때 사경을 해맬 정도로 마음병이 깊어 몸까지 지쳐있었다는 그를 떠올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사적인 이야기부터 드라마 제작에 얽힌 이면까지 흥미로운 이야기가 드라마 못지않게 재미있었지만 아쉽게도 공개하지 못하는 이야기가 꽤 있다. 그는 지난 2월 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장으로 추대됐다. 당초 의지가 없었던 그에게 이 자리를 강권한 것은 선후배들이다. 임기 4년 동안 그가 할 일은 방송작가들의 권익을 찾는 일이다. 그는 다소 버겁다고 했지만 30여년 걸어온 길에서 얻은 명예를 이 기회에 제대로 갚을 생각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직무에 대한 의지가 돋보였다. 역시 그의 빛나는 삶의 무기는 매사에 새롭게 충전되는 진정성이었다. -건강이 아주 좋아 보입니다. 많이 고생하셨다고 들었는데요. "사경을 헤맸을 정도로 심각했어요. 벌써 2년 전이군요. 40일 동안 한숨도 못자는 심각한 상황이었죠. 거의 살아 있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의학으로 치료할 수 없는 병이어서 더 힘들었습니다. 지금은 다 나았어요."-방영 중이던 드라마 집필을 중단 하는 사태까지 갈 정도였죠. 당시 언론 보도로는 다시는 이금림표 드라마를 볼 수 없겠다 싶었습니다. "4-5개월 꼬박 병상에서 지내다 떨쳐 일어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그때는 하품 해보는 것, 눈물 흘리며 울어보는 것이 소원이었어요. 잠을 못자는 고통은 말로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10여 년 동안 잠을 자지 않고 면벽 수도한 스님도 있다고 하더군요. 저는 약과였죠.(웃음)" -활동을 재개한 후 첫 드라마가 '복희누나'군요. 저도 팬이었습니다. 방송 시간대가 출근시간이어서 '다시보기'를 해야 했지만 진안 전주 등 우리 지역이 공간적 배경이어서 더 흥미가 있었습니다. "드라마 대사에 '전북일보'도 나왔죠. 전주를 떠올리며 쓴 부분이 많아요. 고향 분들에게는 좀 더 친근했을 겁니다. 드라마 작가하면서 가장 좋은 것은 제 고향이 전북이라는 것이에요. 아마 그쪽이 아니었으면 그런 드라마 못썼겠지요." -익숙한 지명 때문에 드라마 내용을 실제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진안 쪽에 그런 이름을 가진 양조장이 있었다고도 하던데요. "뜻밖인데요. 사실 드라마 속 양조장 배경은 충북 진천의 덕산 양조장 이예요. 작품을 준비할 때 인터넷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 양조장을 찾아보니까 덕산양조장이 뜨더라고요. 1929년에 공장을 만들어서 사대째 가업으로 내려오는 곳인데 거기 찾아가 그 분들을 만나고 난 다음 이야기가 구체화 되었습니다. 공간만 제 고향으로 가져온 것이죠."-배경이 어떻든 요즈음 그런 드라마를 볼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흥분하지 않아도 되고, 인간적인 따뜻함과 희망을 만날 수 있었던 덕분이지요. "참 고마운 일인데 사실은 걱정스러웠어요. 이 드라마가 좀 위선적인 면이 있잖아요. 이렇게 선량하고 착한 사람들만 사는 집단이 어디 있겠어요. 그렇지만 그런 판타지를 꼭 그리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착할 수도 있고 사람들을 사랑할 수도, 배려할 수도 있다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어딘가에 그런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사실 드라마에서 보여지는 현실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보다 더 끔찍한 경우가 많잖아요." -배우 캐스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십니까. "그렇긴 한데,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출연 배우 캐스팅은 드라마 제작비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아침드라마는 이 점에서 한계가 있어요. 이 드라마에서는 몇 명 중진 원로 배우 말고 젊은 배우들 모두 신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극이 잘 살아났으니 감사한 일이죠." -이 드라마가 주목 받은 이유이기도 할 겁니다. "그런 것 같아요. 통상적으로 사람들은 유명스타가 나와야 드라마가 잘된다거나 그래야만 시청률을 잡고 간다는 편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행인 것은 이 드라마가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에게 재미를 주고 감동을 줄 수 있었다는 점이지요. 시청률이 꼭 스타시스템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주었어요. '다시보기'를 가장 많이 하는 드라마였다고 하는데 젊은 세대들도 이 드라마를 알고 있는 것이 반가웠습니다."-그렇게 고생하시고 결국 돌아오신 곳이 또 드라마를 쓰는 일인데요. 어떤 동력이 있나 봅니다. "작가는 정년이 없잖아요. 행복한 직업이죠. 저는 저희 선배님들이 아직도 현장에 계신다는 것이 큰 위안이 됩니다. 김수현 박정란 선생님 같은 분들을 보면 계속 글을 쓰시는 것도 그렇지만 활동도 아주 왕성하잖아요. 그러니 저같은 사람이 아직 일하는 것은 그냥 아주 당연한 일이 아닌가 싶어요." -좀 무례한 표현인데, 어떤 분이'언제 적 이금림이냐'며 그런데 지금도 우리가 이금림 드라마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이유가 궁금하다고 해서 웃었습니다. "80년에 첫 드라마를 썼으니 만 32년이군요. 다른 직종에서 이렇게 오랜 시간을 보냈다면 실증이 날만하지만, 드라마는 늘 다른 이야기로 다른 배우, 다른 스텝과 만나는 일이기 때문에 항상 새롭습니다. 그런 특징이 이 작업을 계속할 수 있게 하는 외부적인 요인일거예요." -그런데 다시 시작하시면서 왜 굳이 시대극, 가족 드라마 장르를 선택하셨습니까. 요즈음 트렌드로 보면 위험하지 않나요. "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언어특위'라는 곳에서 2년 동안 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보니 드라마가 경계해야 할 비판 대상인 '막장'요소를 가장 많이 갖고 있는 것이 아침드라마였어요. 처음에는 아침드라마를 안쓰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방송사에 아침드라마로 꼭 하려면 없어진'TV소설'을 다시 만들어달라고 했어요. 그리고는 드라마를 시작하면서 방송사 측과 약속을 했죠. 시청률로 스트레스 주지 말 것과 그 대신 저는 막장 코드를 빼고 좋은 드라마를 쓰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막장 코드라는 것이 불륜, 원한과 복수, 출생의 비밀, 비정상적으로 비꼬인 가족 관계 같은 것들이잖아요. 환영하면서도 내심으로는 거런것 빼고도 과연 드라마가 될까하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되었잖아요."-선생님께서는 '막장 코드'나 감각적인 소재와 주제로부터 늘 자유로우셨나요. "저도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푸른안개'예요. 불륜을 미화시켰다고 해서 지탄을 받고 논쟁도 뜨거웠죠. 저는 불륜이 아니라 사랑이었다고 강변했지만 주부 시청자들이 우리집에 쳐들어와서 '폭탄 던지겠다'고 했을 정도로 비난이 거셌습니다."-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좋은 드라마는 어떤 것들입니까. "휴머니티가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따뜻한 사랑을 담아 사람들을 위로 할 수 있는 그런 드라마죠. 사실 막장의 요소를 없애는 것만이 정답은 아닙니다. 그런 요소들을 어떻게 승화시키고 드라마에 좋은 요소로 작용하게 해서 볼만한 드라마로 만들 것인가를 연구하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그것이 우리 현실 속 이야기라면 빼거나 피해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끌어가는 일이 중요하겠죠." -최명희 선생님 이야기를 빼놓고 갈 수 없겠습니다. 최선생님과는 아주 절친한 친구셨죠. "'은실이'를 쓰고 있을 때 명희가 세상을 떠났어요. 그 때 드라마 속 인물 작명이 끝나서 전화를 했는데 명희가 안 어울린다며 다른 성을 붙여주었어요. 그때 명희는 가장 심각한 상황이었죠. 혼수상태에 그 극심한 고통에.(결국 그는 눈물을 흘렸다.) '혼불' 10권을 완성시키고 난 직후 인터뷰와 강연으로 너무 바빴어요. 병원에 갔을 때는 이미 전이가 많이 되어 수술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지경이었죠. 이후 2년 투병하는 동안 최명희는 정말 위대했습니다. 어떤 환자도 보여줄 수 없는 것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갔어요." -10년이 훨씬 넘었는데도 여전히 그리우신가요. "가끔 이런 생각을 해요. 작품을 쓸 때면 어디까지 썼는지, 어디서 막혔는지, 모든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도 하다보면 답이 나왔거든요. 글 쓰는 작업이 외로운 일이잖아요. 장르는 달랐지만 서로에게 위안을 주는 희망이었습니다. 누군가 나처럼 고독한 사람이 저기 또 하나 있어서 불을 밝히고 잠을 안자면서 쓰고 있구나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는지요. 답답하고 글이 안 풀어질 때 이야기 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그 친구 목소리만 들어도 마음이 편안해지곤 했어요." -드라마 작가로 살아오시는 동안 어려운 일도 많았을 텐데요. 특히 가정일과 병행하기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정직하게 이야기 하자면 드라마 좀 쓴답시고 가족과 주위사람들이 희생해야 했습니다. 집안 일을 잘 건사하면서 내 일도 잘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그렇게 하지 못했어요. 다행히 애들은 알아서 잘 커주었고, 남편은 지방대학에 있었기 때문에 부담을 덜어주었죠. 부모나 내 형제한테도 제대로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이 나이가 되었더군요. 아프면서 많은 회한이 듭니다."-글쓰기가 외로운 일이라고 하셨는데, 마음병도 그런 것으로부터 온 것은 아니었을까요. 어떻게 치유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병원을 많이 다녔는데 결국은 마음이 치유되어야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 스승이 법륜스님이신데 스님의 가르침을 많이 받았습니다. 마음공부를 하고 마음을 나누기도 하고 불교에 가까이 다가가면서 자연스럽게 치유가 되었어요. 내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고 나누는 일이 도움이 되었죠. 저도 모르는 내 마음의 깊은 밑바닥에 있던 것들이 쌓여서 불면의 시간을 보낸 것인데, 지나고 보니 그 시간들이 나쁘지만은 않았습니다. 제가 이번 작품을 쓰는 마음 상태로 오기까지는 그런 시간이 있었던 덕분이죠." -30여년 걸어오신 드라마 작가로서의 삶의 가치는 드라마의 시대적 역할과 깊은 관련이 있지 않을까요. "과장된 해석인지 모르겠는데 드라마는 시대를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습니다. 사람의 인생도 바꿀 수 있지요. 드라마가 아니고서는 어떻게 한자리에 같은 시간에 천만 명을 모아놓을 수 있겠어요. 드라마만이 가능한 일이지요. 드라마가 오락성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 못지않게 진정성과 감동이 중요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복희누나' 를 마치고 두달 정도 쉬고 싶다는 그는 여유를 갖고 작품 준비를 할 생각이다. "어떤 여건이 되던 이런 결심이 무너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그는 찬찬히 준비하며 쓰게 될 작품이 자신의 대표작이 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게 없다고 했다. 지친 사람들에게 사랑과 위안의 손을 내밀어 끝내 희망을 갖게 하는 이금림표 드라마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선물이다.

  • 기획
  • 김은정
  • 2012.05.08 23:02

안숙선 국창은…

국창 안숙선은 두 가지 면에서 정평이 나 있다. 하나는 엄청난 공부양이요, 또 하나는 깨끗하다는 점이다. 타고난 재주에다 연습벌레여서 판소리 5바탕 완창은 물론 가야금 등 다방면에 재주가 많다. 또 청렴해서 자신은 물론 제자들의 상(賞) 청탁을 일체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1949년 남원시 산동면 대상리 웃점마을에서 태어난 안숙선은 예인(藝人) 가문의 피를 이어 받았다. 대금산조 인간문화재 강백천이 어머니의 사촌, 판소리 인간문화재 강도근이 외삼촌, 태평무 인간문화재 강선영이 그녀의 이모다. 이로 인해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우리 음악에 눈을 뜨게 되었다. 남원초등학교 3학년 때 이모에게 가야금을 배웠고 주광덕과 강도근으로 부터 판소리 여러 대목을 배웠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배우는 것마다 잃어버린 것이 없었다. 15세에 소녀명창으로 남원 근동에서 이름을 날렸다.19세에 김소희에게 발탁돼 상경, 본격적인 판소리 수업에 들어갔다. 춘향가와 흥보가를 배웠으며 김소희는 그녀를 '녹음기'라 부를 정도였다. 1979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하면서 천부적인 성음과 연기력으로 각종 창극에서 프리마돈나를 도맡았다. 또 박봉술에게 적벽가를, 정광수에게 수궁가를, 정권진과 성우향에게 심청가를 배웠다. 이어 박귀희의 눈에 들어 가야금을 배웠고, 그녀가 타계하자 199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인 가야금 산조및 병창 예능보유지로 인간문화재가 되었다.1999년 이후 해마다 판소리 5바탕 완창무대를 가졌고, 국내뿐 아니라 미국 유럽 아시아 등 전세계를 다니며 한국 전통소리의 위상을 높였다. 1997년 이후 국립창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 용인대 교수를 거쳐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로 후진 양성에 매진하고 있다. 5년 동안 전주소리축제 제전위원장을 역임했으며 올해 남원춘향제 제전위원장을 맡았다. 그동안 춘향제 전국명창경연대회 대통령상, KBS 국악대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국제문화인상(국제문화친선협회), 한국방송대상, 프랑스 문화부 예술문화훈장, 옥관문화훈장, 서울시문화상, 논개상 등을 수상했다. 가족으로는 남편 최상호(68)씨와 2남1녀가 있으며 딸 영훈씨(37)가 국립창극단에서 어머니의 뒤를 잇고 있다.

  • 기획
  • 조상진
  • 2012.05.01 23:02

안숙선 국창(國唱) "자신이 하는 일은 그게 뭐든 목숨 걸고 사랑하라"

2주 전 쯤, 안숙선 명창에게 전화를 걸었다. 인터뷰 요청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는 목소리가 너무 가냘펐다. 아니, 판소리 대가라는 분의 목소리가 왜 이렇지, 내가 잘못 걸었나? 귀를 의심했다. 이후에도 몇 차례 통화를 더 했으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곧 그 의문은 풀렸다. 안 명창은 공연 전에는 목소리를 아끼기 위해 사랑하는 손자와의 대화도 자제한다는 소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듯 안 명창은 철저한 프로다. 인터뷰가 있던 지난 25일, 안 명창은 전주 리베라 호텔에서 열린 411 총선 당선자들을 위한 교례회에서 수궁가 중 용왕이 토끼 간을 빼먹으려는 대목을 불렀다. 전화 목소리와는 완전히 달랐다. 카리스마 넘치는 수리성으로 좌중을 압도했다. 공연이 끝나고 바로 뒤쪽에 자리한 전주소리문화관으로 옮겨 인터뷰를 시작했다.- 반갑습니다. 지난 토요일(21일) 남원에서 '지리산 둘레길 소리여행' 행사를 이끄셨는데 비가 와서 힘들지 않았습니까?"비오고 바람이 많이 불고 그랬어요. 오신 분들하고 길 걸어가면서 서편제 한 장면처럼 노래하고 춤도 추려고 했는데 못하고, 기념식장에서 그냥 민요만 들려 드렸어요."- 이번 제82회 춘향제(4월 27일-5월 1일) 제전위원장을 맡으셨습니다. 1986년 춘향제 전국명창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해 감회가 남다를 것 같은데요?"그래요. 처음에는 제전위원장 보다는 홍보대사나 고문을 맡겨주시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그 동안 마음 한 구석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춘향제에 대한 아쉬움이 항상 있었는데 올 춘향제를 계기로 그에 대한 빚을 갚고 싶다는 생각도 했고요. 프랑스 아비뇽, 영국 에딘버러 등 세계 여러 나라의 축제를 많이 가봤는데 남원에는 춘향가와 흥보가의 무대가 있고, 그런 것을 생각하면 문화적으로 이렇게 좋은 곳이 없을 것 같아요. 저는 K-Pop 이상으로 열풍을 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주제가 '얼씨구! 춘향사랑'입니다. 종전 춘향제와 좀 다른, 차별화된 점은 무엇입니까?"축제를 운영하는 분들에게 그런 말씀을 드렸죠.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축제가 아니고 남원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독창성 있는 축제가 된다면 정말 많이 올 것 같다고요. 남원하면 춘향이니까 모든 걸 춘향과 함께 접목을 시켜보는 방법, 예를 들면 미꾸라지 잡는 행사도 있더라고요. 그냥 미꾸라지만 잡는 것 보다는 다 모여서 미꾸라지 잡아서 춘향아씨 드리자, 춘향도 칼을 쓰고 있다 쑥대머리 한번 부르고 이리 와서 먹어라 하고, 이렇게 먹는 것도 춘향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어떨까.(웃음)"- 발상이 상당히 신선한데요?"꼭 미꾸리지 뿐 아니라 섶다리도 춘향이와 같이 걸어가고, 이도령도 뽑아서 같이 걷고, 남원은 모든 게 춘향, 그리고 춘향과 음악을 통해서 그렇게 만들어 보일 수는 없을까, 그렬려면 축제와 국제적 감각이 있는 분들이 머리를 맞대고, 자존심을 걸고 축제를 만들어 보자, 그런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면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 2004년부터 5년 동안 전주 세계소리축제 제전위원장을 맡았습니다. 당시 정체성에 대해 말이 많았는데 이제는 선생님이 주장하신대로'판소리를 중심으로 한 국제음악축제'로 자리잡은 것같습니다."여러분이 도와 주셨는데, 판소리를 (축제의) 중심에 두겠다는 저의 의지는 분명했으니까요. 도민들 모두가 소리축제는 판소리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다들 그렇게 해 주셔서, 제가 조직위원장 하면서 이런 말을 했어요. 소리축제가 10년 걸리든 20년 걸리든 어느 궤도에 올려놨나 평가를 받을 것이다. 혹여라도 예산 낭비 없이, 일당 백이 돼 줄 수 있겠느냐, 그리고 축제를 사랑해 달라, 소리축제에 상처를 내지 말라, 우리 것을 아껴서 자꾸만 뻗어 나가도록 해야지, 이거 상처를 두들기면 아름다운 꿈과 이상을 어떻게 보여주겠느냐, 때리지 마라. 때리면 나는 그 날로 가버리겠다. 근데 안 두들겨 주셨거든요.(웃음)"- 그 전에는 꽤나 말이 많았거든요?"조그만 여자가 있다가 울고 가버릴까 봐 (웃음) 그랬겠죠."- 예전으로 돌아가 얘기를 해보죠. 선생님은 스승 복이 많은 것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먼저 만정(晩汀)김소희 명창과의 인연은 어떻게 맺게 됐습니까?"1968년 겨울 남원에 있다 선생님으로부터 '서울 한 번 올라 오너라'는 부름을 받고 동생 옥선과 함께 상경했는데 해외공연이 무산됐어요. 그 뒤 1970년에 만정 문하에 들어가 판소리 '춘향가''흥보가'를 배웠어요."- 굉장히 아껴주셨다면서요?"선생님이 저를 가르쳤던 나이가 되고 보니까, 왜 그렇게 각별히 교육을 시키셨고, 보살핌과 정을 주셨는지 조금 이해하게 되더라고요. 제자를 가르쳐 보면 선생님이 가르쳐 준 음악, 구조나 뜻이나 성음을 잘 받아들이면 속으로 아끼게 되는 거죠. 그러나 엄하게 키워야 되죠. 제가 어릴 적에 음악을 잘 받아들이고, 선생님께 큰 애를 먹이지 않고, 또 시킨대로 잘 하고 그런 때문인지 선생님이 하셨던 일, 그 맥을 이어주는 일이 중요하다 생각을 하셨던 것 같아요. 선생님 연배가 돼서 애들 가르치면서 알게 됐어요. 지나간 뒤에야 그런 게 후회스럽고 또 한편으로는 선생님이 그렇게 아껴주시고 챙겨주실 때 저도 선생님을 잘 모시고 즐겁게 해 드렸어야 했는데요. 그렇게 제가 못했거든요. 공연을 핑계로, 또 연습 핑계로 '몸이 아파서 네 약을 지어 놨으니 와서 가져 가거라' 하는데도 며칠을 안 가고, 선생님이 들통에다가 장어같은 것 고와서 가져 오시고, 또 제가 아프다고 하면 제 손을 잡고 병원에 가서 '제 수제자인데 잘 좀 봐주세요' 이런 것들이 보통으로 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눈물) 저는 제자들에게 선생님이 하는 일의 만분의 일도 못하고 있거든요."(안 명창에게 예술 이전에 인간적으로 인품을 갖춰라, 항상 절제된 소리를 내라, 때까치마냥 입만 딸싹딸싹 부르지 말고 기를 모아 소리를 하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자나 깨나 판소리를 걱정하며 평생 모은 재산을 제자 양성에 썼다.)- 또 가야금 병창의 향사(香史) 박귀희 명창과는 어떻게 만나게 된 겁니까?"워커힐 호텔 공연단에서, 그 때는 국제관광공사 때였는데 10년 넘게 매일 두 번씩 공연을 하다보니 기관지가 상해서 소리공부를 일시 중단하게 됐어요. 만정선생님이 그래도 공부를 멈출 수 없으니 박귀희 선생님에게 가야금을 배우라고 권했어요."- 두 분 성격이 아주 대조적이었다면서요? "만정 선생님은 평상시에도 말씀을 크게 안하세요. 어디 가시는 것도 티가 나지 않게 조용 조용 다니시는데, 향사선생님은 좀 남자 같으세요. 향사선생님은 평소 인간관계를 돈독히 해 두셨다가 급한 일이 있어 가면 그 자리에서 금방 해결하는 거예요. 어디든 도움을 받았던 곳에는 꼭 명절 때면 넥타이든 뭐든 사서 보내시고. 정말 대단하신 분이죠. 그래서 향사선생님이 국악계를 이끄셨고 운당여관을 두 번에 쪼개서 국립전통예술학교에 헌납하셨어요. 선생님은 평소에 어떠시냐면 제 손을 잡고 백화점에 가서 이것 하나 입어라 하시는데 (정작) 선생님은 세일한 것을 사 입으세요. 이 옷 어디서 사셨어요 물어보면 남시싸롱(남대문시장) 하시는거예요. 그렇게 검소하게 생활하셨죠."- 박귀희 명창의 권유로 국립창극단에 입단하신 건가요?"1979년도에 제가 당시 국립창극단 단장이신 선생님의 권유로 오디션을 보고 입단했는데요. 그 때는 단원들 처우가 현실화 됐을 때에요. 여기서 제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됐어요. 무대에 선다는 것이 제가 공부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요. 워낙 잘하는 동료들이 많고, 큰 선생님들이 보고 계시는데 허투루 했다간 선생님들께 누(累)가 되고, 무대에 설려면 실력이 부족하면 안되니까 연습을 안할 수가 없어요." - 타고 나신데다가 연습벌레였다면서요?"그 때는 개인 연습실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연습할 곳이 어디 없나 찾아다니다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소리를 하죠. 누가 그래요, 보일러실 밑에 가면 따뜻하기도 하고 (보는 사람도 없고) 거기서 숨어서 그렇게 했거든요. 그리고 다 퇴근하고 나면 연습실에서 하는데 수위아저씨들이 다 갔는가 하고 문 잠그려고 올 때까지 공부하고 했으니까요. 밤에 제가 소등을 하고 소리를 하는데 누가 문을 탁 열고 보니 머리가 헝클어지고, 그래서 놀랬다는 말들도, 좀 과장이 됐겠지만 그 때는 소리에 미치다시피 했지요."- 국립창극단에서 어떤 분들로부터 배우셨습니까?"그 때 제가 국립창극단에 있었던 게 참 다행이었어요. 돌아가신 허규 극장장님이 단원들의 기량을 높여야겠다, 그래서 각 바디별로 인간문화재 선생님들을 다 모셨죠. 정광수 선생님한테 수궁가를, 박봉술 선생님한테 적벽가를, 정권진 선생님한테 배우다 돌아가셔서 성우향 선생님한테 심청가를 배웠어요. 그 분들께 단체로 배웠는데 소리라는 게 공동으로 배워가지고는 안되는 것 같아요. 선생님하고 호흡까지 느끼면서 배워야 하는거든요. 그래서 단체로 배우고 나서 바로 선생님을 모시고 혼자 배우기 시작했죠.- 판소리 다섯바탕을 모두 떼셨군요. 어릴 적 남원에서는 친척인 강도근 명창으로부터 소리를 배우셨죠?"그래요. 강도근 선생님한테 소리 기초를 배웠죠. 서울에서 많은 분들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제가 86년도에 적벽가 완창을 했는데, 그게 뻗세고 남자소리인데 여자로서 저만큼 할 수 있는 것은 (여자들은 적벽가를 별로 안할 때죠.) 제가 어렸을 때 강도근 선생님께 기초를 배웠기 때문이라고요. 흥보가 배우고 수궁가 배우고 중요한 대목 대목, 그러니까 한 2/3는 거의 배웠거든요."- 서양 오페라와 달리 우리 창극의 발전 방안은 뭘까요?"지금 우리가 다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데 궁중무용, 민속무용, 연희, 춤, 줄타기 이런 많은 유산을 어떻게 모아서 보여주느냐. 그러면 우리 창극이 세계적인 오페라 못지 않은 음악이 될거라 생각해요. 중국의 장이모 감독, 그런 분들은 수백억 원 들여서(상해 엑스포) 하지 않습니까."- 판소리의 미래를 어떻게 보세요?"자주 소리판을 열어야죠. 소리판에 자주 오는 귀명창들이 없고서는 이게 가능하겠는가, 그런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어렸을 적부터 소리도 들어보고 우리 춤도 추어보고 해야죠. 그런데 요즘은 과연 그런 어린이들이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돼요. 그래서 관계되는 분을 만나면 제발 유치원부터 장고나 꽹과리 등 장단을 맞출 수 있는 리듬악기 하나, 그리고 단소나 소리를 배운다든지."- 산공부는 어디서 하십니까?"옛날에는 구례 문수사, 연지암 그런데서 했고요. 요즘은 여기까지 내려 올 시간이 없어서 청평이나 양평, 강원도쪽 그런데 가서, 보름 정도 있다가 오기도 하고. 거기서는 꼼짝 못하고 앉아서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몰입이 되는 거죠."- 목소리 관리 비결은?"느닺없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욕심을 버려야 해요. 열기가 위로 뻗치면 목소리가 안나오잖아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욕심을 버린다거나, 자꾸만 뭐든지 내려놓고 마음을 평정하고, 편안하게 하는 것이 목소리 관리에 좋은 것 같아요."- 득음할 때 목이 붓고 그러면 똥물을 먹는다고 그러덴데요?"인분(人糞)요. 요즘 독감이 들어 한 일주일 입원했거든요. 항생제를 써서 그런지 맥을 못추겠더라고요. 옛날 방법이 비위생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오히려 아주 삭혀서, 어느 한 곳의 열을 없애주고 해서 먹을 때만 그렇지"- 드셔보셨는가요?"안 먹었어요.(웃음)"- 딸(최영훈, 거문고산조)에게 "엄마 노릇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 의미는?"제가 막 공부를 하고 그럴 때는 아이들 다 팽개쳐버렸어요. 시어머니께 다 맡기고, 아침에 나왔다 저녁에 들어가고, 그저 공연하는데만 중심을 두었죠. 그렇게 했는데 저희 딸은 자다가도 (아이 때문에) 응급실에 가더라고요. 딸한테 너 공부를 제대로 하려거든 잊어라, 엄마노릇 하지 말라, 그랬는데, 엄마 노릇 해야죠.(웃음)"- 평소 건강 관리는?"제가 해보니까 좋은 공기, 좋은 기(氣)를 받아야 해요. 산에 자주 가서 산의 기도 받고, 최대한 많이 걷고, 음식도 너무 기름진 것 먹지 않고, 그래서 몸을 자연의 순리에 맡기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국악 후배들에게 한 말씀 들려주시겠습니까?"제가 정말 소리를 사랑하는 것 같아요. 소리를 하고 한바탕 잘 됐을 때는 누가 뭘 줘도 이것만 못해요. 내가 내 일을 사랑하고 자꾸 아끼고 잘 할려고 하고 해야죠. 괜히 어거지로 하면 시간만 낭비잖아요. 사랑해라, 충분히 사랑해라, 지금은 어렵지만, 옛날 어르신들이 그랬거든요, '소리를 잘하면 보배네' 그랬어요. 누구도 감히 가져갈 수 없잖아요. 혼자 앉아서 공부한다는 게 자기와의 싸움인데 쉽지가 않죠."- 전북의 경우 문화예술계가 정체되고 파벌도 심한 것 같은데요?"사람이 사는 곳은 어디나 그렇죠. 우리는 소리라는 끈을 가지고 있잖아요. 어떨 때 서로 감정이 안좋다가도 A라는 사람이 소리를 잘 하잖아요. 그러면 '그래 그래, 너 다 먹어라' 이런 때가 있어요. 우리가 가는 길을 서로 이해하고 그러면 풀어져요."

  • 기획
  • 조상진
  • 2012.05.01 23:02

낙선한 정운천 前 장관 "중앙과 통로 만들어 우호적인 환경 조성해야 전북 발전"

옛말에 선거는 학교 반장 선거가 됐건, 이장 선거가 됐건 이겨야 한다고 했다. 선거에 지면 사람이 떠나고 심리적 위축감도 상당할 터다. 큰 선거라면 패가망신하기 십상이다. 선거라면 승자와 패자로 나뉘기 마련이다. 당선자는 권력을 위임받아 6월부터 임기를 시작하게 되고 패장은 안으로 울음을 삭일 것이다. 고진감래와 와신상담. 전북의 출마자 45명 중 11명이 단 맛을 봤고 34명은 쓸개를 씹는 심정으로 다음을 기약할 것이다. 411총선에서 전주 완산 을(새누리당 정운천)과 대구 수성 갑(민주통합당 김부겸), 광주 서을(새누리당 이정현)은 지역장벽 극복 여부로 여야는 물론 국민적 관심을 끌었던 선거구다. 전주 완산 을에서 낙선한 정운천(58) 전 장관을 만났다. 선거가 끝난 뒤에도 방송 대담과 언론매체 인터뷰에 참석하느라 서울을 오가는 등 바쁘게 보내고 있었다. 인터뷰는 20일 그의 선거사무실에서 2시간 가량 진행됐다. -'바보 정운천의 일곱번째 도전'은 실패로 끝이 났습니다. 서운하지 않습니까."4년전 총선 때 4500표였는데 3만표를 넘게 얻었으니 감사한 마음 그지 없어요. 지역을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어려움과 고통을 감내하면서 선거에 나섰는데 일할 기회를 갖지 못해 아쉬움이 커요."-오차범위 내 치열한 접전이 예상됐는데 투표 결과(3만406표)는 당선자와 11.2%나 차이가 났어요."선거 이틀 전까지도 여론조사 결과는 앞섰어요. 그 사이 엄청난 변화가 있었던 거지요. 기표소에서 30년 지역주의 장벽이 재현된 걸로 봐요. 기대가 컸는데 결과를 보고는 멍 했지요."-박근혜 위원장이 뭐라고 하던가요."선거 끝나고 만났어요. 선물 하나 드릴려고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고 하자 고생이 너무 많았다며 그걸로도 충분하다고 하셨어요."-눈물이 나도록 고맙다는 플래카드를 내거셨던데 다음에도 출마하실 건가요."대학 졸업 후 대한민국 농업 살리는 모델을 만들기 위해 해남에서 25년간을 보냈습니다. 도지사 출마 이후엔 신념이 지역장벽 극복으로 바뀌었어요. 농촌에서 25년을 보낸 걸 감안하면 앞으로 10년 쯤은 당락에 매달리지 않고 올인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대구 광주 전주는 여야가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을지 관심 선거구였는데 모두 낙선했습니다. 지역장벽이 여전히 높다는 걸 까요."모두 비슷한 비율로 낙선했어요. 후보가 누구인가를 떠나 넘을 수 없는 장벽이 확실하게 나타난 선거라고 봐요. 30~40년 된 두꺼운 얼음을 녹여내는 데는 한 두번 갖고 되는 게 아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선거운동 과정에서 민심변화 같은 건 느끼지 못했나요."작년 8월부터 쟁기질로 자갈밭을 가는 심정으로 저변층을 훑고 다녔습니다. 표를 달라고 하지 않고 마음을 얻으러 왔다고 했습니다. 많은 변화가 있었지요. 격려해 주는 사람도 많았고요."-선거 슬로건이 '당 보다는 인물을 보고 뽑자'였는데 먹히던 가요? 상대 후보들은 '사람보다는 당이 먼저' 'MB 심판론'으로 맞섰는데."인물론에 공감하는 분위기가 많았지만 막판에 MB심판론이 먹힌 것 같습니다. 시의원 도의원이 총동원돼 새누리당을 찍으면 MB를 찍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표가 많이 달아난 것 같아요."-가족 단위의 조용한 선거를 치렀는데 효과가 있었나요. "선대위나 선거대책본부 같은 것 만들지 않고 직접 발로 뛰었어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으니까 큰 효과가 있었다고 봐요. 1월10일 출판기념회 때 2200여명이 참여했는데 이 때부터 진정성이 알려지고 응집력이 발휘되면서 변화가 있기 시작했습니다."-가족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던가요."어릴 때부터 밥 먹을 때 자유로운 주제를 놓고 토론을 해 왔어요. '밥상머리 토론'이지요. 아빠가 왜 해남에서 일하려 하는가, 아르바이트는 뭘 위해서 하는가 등등 자유로운 주제를 놓고 토론 하다 보면 공감하게 되고 이해하게 되지요. 강압이 끼어들 여지가 없어요."-가족들한테 미안했겠어요."미안하지요. 아내는 경북 선산이 고향이고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 곳에 내려와 교직을 사표 내고 1년 가까이 도왔는데. 진정성을 갖고 일한 만큼 기대가 컸었는데 펑펑 울더라고요."-정치하는 이유는 뭡니까."지역장벽을 깨자는 확실한 가치 때문입니다. 어려운 일이라 더 가치를 느껴요. '안되는 줄 뻔히 알면서 뭐 하러 이곳에 왔느냐' '비례대표 자리도 있는데 왜 힘들게 출마했느냐'는 충고가 많았지만, 중앙에서 소외받고 광주전남의 변방인 전주와 전북을 살리기 위해 출마했어요. 단 한 석이라도 중앙과의 통로를 만들어 우호적인 환경을 조성해야 전북이 발전합니다." -도지사 선거 때 논쟁이 된 LH유치 청와대 교감설은 사실입니까, 아니면 표를 의식한 발언입니까."당시 도지사 선거에 나가라는 권유가 있었는데 두 세달을 버텼어요. 선물 보따리를 달라고 요구했지요. 선거를 한달 보름 쯤 앞둔 5월16일 청와대 박형준 수석비서관이 '내려가서 지지율 20% 이상 올려봐라. 들어주겠다'고 해서 청와대 교감설이 나온 겁니다. LH유치 무산 뒤 함거를 타고 석고대죄 했는데 사실은 도지사나 국회의원 등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책임지는 사람 하나 없어요."-농업발전과 지역장벽 극복 두가지를 평생 해야 할 일로 꼽던데요. "두가지는 전북에서 가장 절실한 문제입니다. 농도이기 때문에 그렇고 지역주의의 피해를 가장 많이 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소명으로 알고 계속 노력해 나갈 생각입니다."-지역장벽 극복은 석패율이나 독일식 정당명부제 같은 제도적 접근이 병행돼야 하지 않을까요."제도개혁을 줄기차게 요구해 왔지만 정치하는 사람들의 당리당략 때문에 이번 선거에서도 물건너 갔어요. 국민 뜻을 저버린 직무유기입니다. 석패율제가 시행됐다면 처음으로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됐겠지요. 독일식 정당명부제는 의석을 50~100석 늘려야 하는데 의석 확대는 국민저항 때문에 쉽지 않아요. 10여석을 배정하는 석패율제가 오히려 가능성이 있어요."-농업을 전공한 특별한 동기가 있습니까."인촌 선생과 아버지는 8촌지간이었어요. 인촌 선생이 서울로 올라가신 뒤 그 집에서 살았는데 인촌 선생이 태어난 그 방에서 제가 태어났어요. 인촌 선생은 학창시절의 제 멘토였어요. 가장 최첨단 아니면 가장 낙후된 곳을 가라는 가르침 때문에 농업을 택했고 해남까지 가서 농사를 짓게 된 겁니다."-해남에서 25년간 전업 농부로 살았습니다. 이때 '참다래 유통사업단'을 만들어 고소득 작물로 키위를 육성했는데 그 비결은."1990년 첫 수입개방이 되면서 바나나파인애플은 1년만에 사라져 버렸고 키위도 똑같은 운명에 처했어요. 상대는 몽둥이를 들고 오는데 우리는 회초리 밖에 없어 경쟁이 안됐지요. 그래서 농민 300명을 모아 '참다래유통사업단을 만들어 백화점 매대를 확보하는 등 유통을 장악해 타개했습니다. 이때 '사즉생'을 체화했고 멘토도 이순신 장군으로 바뀌었습니다. 독특해야 살아남는다는 '거북선 농업'을 실천했지요."-당시 돈은 좀 벌었습니까."조합원 300명이 출자해 최초의 영농조합법인을 만들어 운영했는데 적자 내지 않고 1년에 10억 이상씩 매년 조합에 돌아갔습니다."-MB정부 초대 농림수산식품부 장관 발탁은 어떤 계기였나요."2007년 11월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 캠프인 안국포럼의 농업분야 토론회 참석 요청을 받고 갔는데 주로 표를 의식한 발언과 정책들이 거론되더라고요. 토론 말미에 5분간 발언할 기회가 주어졌는데 그 때 '그래서 우리 농업이 망했다. 식품과 결합해야 경쟁력이 있다'고 지적했어요. 식품산업을 신성장동력으로 삼아야 한다는 등 여러 처방을 제시했는데 이런 게 계기가 됐다고 봐요. 농림수산부 명칭에 '식품'을 넣은 것도 그런 맥락입니다."-김홍국 하림 회장이 장관 제의를 받은 걸로 알려져 있는데."맨 처음엔 하림의 김 회장이 입각 제의를 받았지만 기업경영을 이유로 고사했어요."-MB맨으로 호칭되는 데 대해선 어떤 생각입니까."초대 장관을 해서 그런 것 같은데 개의치 않아요.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직속 농어촌특별대책위원(차관급)으로 활동할 당시 현장체험을 보고했더니 노무현 대통령이 '참 존경합니다'고 칭찬하시더라요. 한미FTA를 앞두고 입각제의를 했지만 거절했어요. MB도 대선때 농업분야 선대위원장을 맡아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했어요. 성공한 농업인이 많은데 나 같은 사람이 들어가면 표를 잃게 되고, 기존 농민단체 대표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것이며 나의 본업이 정리되지 않은 것 등을 이유로 들었지요. 굳이 말한다면 나한테는 '친 전북맨' 밖에 없어요."-장관을 하지 않았다면 정치도 하지 않았겠네요. 도지사나 총선 출마도 없었을 테고."그렇지요. 정치한다는 생각은 아예 없었어요. 이순신 장군도 일 중심으로 했지 어떤 자리나 직책에 매달리지 않았어요. 반장 선거에도 출마해 본 적이 없고 농업 관련 CEO자리도 모두 추대받아서 한 겁니다."-정치를 하지 않았다면 지금 뭘 하고 있을까요. "1980년부터 20년간 땅을 임대해 농사를 지었는데 그 기간이 끝났어요. 농업 관련 단체에 종사하면서 우리나라 농업을 살리는데 일정 역할을 하고 있겠지요." -농업발전은 쉬운 일이 아닌데 우리나라 농업이 발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십니까."보조지원 틀에서 산업화의 틀로 농업구조의 틀이 바뀌어야 해요. 생산에서소비 중심으로, 주체도 정부가 아닌 농민 중심으로, 생산물량도 질 위주로 전환하고 소비자 선택이 확대될 수 있도록 공급물량을 늘려야 합니다. 장관 재직 때도 이 네가지 틀을 강조했어요." -선거에서 지면 지역을 떠나는 경우가 많은데 전주에서 계속 사실 건가요."해남에서도 20여년 간이나 살았지 않습니까. 중요한 일이 있으면 험난한 길이라도 찾아간다는 것이 신념이고 이 곳이 필요하다면 여기에서 살 것입니다. 신념이 중요해요."-향후 계획이 궁금합니다."우선 새만금위원 활동에 집중할 생각입니다. 새만금발전계획 입안에 참여했고 새만금은 전북발전의 큰 동력이기 때문에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지역장벽 극복인데 말은 쉽지만 실천은 간단치 않아요. 전주와 전북을 발전시키는 길이기 때문에 의지를 갖고 실천하려 합니다."

  • 기획
  • 이경재
  • 2012.04.24 23:02

손주항 前 의원은

3선 의원으로서 반독재, 반민주에 맞서 거침없는 질타를 서슴지 않았던 손주항 전 의원은 1934년 2월 임실 신평에서 전통 한지공장을 운영하던 부친 손태중씨와 모친 진판순여사 사이에 태어났다. 14살에 사고로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가세가 기울어 어머니가 생계를 꾸려나갔지만 아들에겐 어려운 내색 한번 하지않는 든든한 후원자였다. 도의원과 국회의원 출마때 후보등록비로 쓰라며 당시 배냇소 50마리 판 돈을 손에 쥐어 줄 정도로 여장부이기도 했다. 또한 어머니로부터 "물과 불이 가마솥을 사이에 두고 만나면 음식이 만들어진다"면서 상극(相剋)을 통한 상생의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그러한 어머니를 '임실의 민비'라고 칭하는 손 전의원은 10년전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과 자신의 정치역정을 담은 '가마솥 어머니' 라는 시집을 출간했다. 그가 펴낸 7권의 책(외로운 용자, 백의종군, 천하위공, 산 산넘고 물 물건너, 일편단심,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어머니) 가운데 하이라이트인 셈이다.약관(弱冠) 26세에 도의원에 당선된 손 전 의원은 10여년간 달력을 돌리면서 지역구를 다진 결과, 1973년 제 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전직 도지사이자 현역 국회의원을 누르고 당선되는 이변을 연출했다. 10대 총선때는 유세도중 전격 구속되는 비운을 겪기도 했지만 옥중당선의 영예를 안았다. 13대 총선에서는 평민당 공천을 받아 이철승 전 신민당 대표를 압도적 표차로 따돌리면서 전국 최다 득표로 3선고지에 올랐다. 하지만 김대중 총재와 결별하면서 14대 총선에선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3선개헌 반대와 광주 민주화운동 등으로 4번 구속과 2차례 투옥되는 간고를 겪었지만 자신의 소신과 지조를 굽히지 않은 강골 정치인으로 회자되고 있다.문화예술분야에 대한 관심도 남달라 전주대사습놀이보존회 이사장과 회장을 맡아 전주대사습을 부활시켰고 설문체에도 능통해 서예 서도 서각에서도 독보적 영역을 구축하는 등 문화 창달에도 힘써오고 있다.부인은 4년전 사별했으며 2남2녀를 두었다. 장남 손성씨는 메가비전 대표, 차남 손권씨는 무역회사 부장, 장녀 손란씨는 Shon's 마켓 대표, 차녀 손정씨는 C.F제작회사 대표를 맡고 있다.

  • 기획
  • 권순택
  • 2012.04.17 23:02

손주항 前 국회의원 "국회의원은 큰 일 하라고 유권자들이 뽑아준 겁니다"

군부통치시대에 민주투쟁의 길을 걸어 온 소신있는 정치인으로서, 서슬퍼런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을 향해 당당히 그리고 거침없이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했던 국회의원 손주항(孫周恒79). 그는 39세에 무소속으로 국회에 입성한 뒤, 옥중 당선의 기적과 전국 최고 득표를 기록하면서 3선 의원으로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도 받았다. 하지만 불의와 타협하거나 권력에 굴종하지 않는 강단(剛斷)과 결기로 인해 수차례 투옥과 정치규제를 당하는 질고의 세월을 감내해야만 했다. 거침없는 독설, 반골 정치인으로 유명한 손주항 전 의원(79)을 서울 종로구 대우빌딩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지난 2002년 도지사 출마 때 보고 처음 뵙습니다. 지금도 강건한 모습이신데 건강 비법은."남자는 부인이 먼저 가면 절대 안됩디다. 4년전 사별했는데 벼슬 떨어진 것보다 더 안 좋아요. 매일 아침 4시30분에 일어나서 연희초등학교 운동장을 10바퀴씩 돌아요. 한시간 정도 걸리나. 다른 특별한 건강비법은 없어요."-지난 2010년 지방선거 때는 임실군수 출마설이 나돌기도 했었는데"전임 군수 3명이 줄줄이 사법처리 되다보니 주위에서 깨끗하기만 하면 된다며 권유했었죠. 하지만 임실 바닥민심이 안 변했고 의리나 정의나 인간적인 것도 다 없어져서" -임실이 고향이신데 전임 군수 3명에 이어 현직 군수도 군수직 상실 위기에 놓여있습니다. 민선이후 단체장 4명이 사법처리된 전례가 드믄데"고향만 생각하면 참 안타깝습니다. 국회의원 선거구도 임순남으로 묶였다가 완주로 붙었다가 다시 진무장과 합쳤는데 이게 사람이 없기 때문이에요. 양재(養材)를 안했죠. 쓸만한 사람을 안키웠어요."-50여년을 정계에 몸담으셨는데 어떻게 정치를 시작하게 됐습니까."그 당시 자유당 행패가 심해서 20대 초반에 민주당에 들어갔죠. 지구당 부위원장, 도당 선전부장을 했어요. 당시 도당위원장인 이철승씨를 비롯해 주위에서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며 출마를 권유했었죠. 그래서 26살에 3대 도의원 선거에 나서서 당선됐습니다."-9대 국회의원 선거에선 민주당이 아닌 무소속으로 출마했었죠."당시 민주당 총재가 유진산씨 인데 나를 견제하느라 공천을 안 주는 거예요. 그래서 무소속으로 나갔는데 나하고 양해준씨가 되고 도지사를 지낸 현직의원이자 공화당 후보였던 이정우씨가 떨어졌어요. 당시 공화당 후보가 낙선한 것은 전국에서 단 2명뿐이었으니 엄청난 사건이었죠."-당시 서슬퍼런 박정희 정권을 향해 3선개헌 중단 등 비판의 칼날을 세웠우셨는데 어려움은 없었는지요."박대통령이 시책을 반대하면 때려는 잡아도 치사하지는 않았어요. 내가 국회 발언에 들어가면 녹취를 하고 내 주위를 도청도 하고 했지만 박대통령이 그랬데요, '왜 공화당에는 손주항 같은 사람이 없느냐'고 했다는 거예요."-대법원장 비위문제를 국회에서 터뜨려 큰 이슈가 된 적도 있었죠."당시 민복기씨가 대법장이었는데 충남 청양에 있는 땅 100만여평을 농민들로부터 수탈한거예요. 이 문제를 국회에서 10차례이상 질의했죠. 결국 그 땅을 농민들에게 돌려주었죠. 나중에 10대 국회의원 선거기간중 청양 농민들이 버스를 대절해서 임실까지 찾아와 감사하다고 하더군요."-10대 총선때는 유세도중에 전격 구속되는 비운을 겪기도 했지만 옥중당선의 영예를 안으셨죠."당시 긴급조치 9호와 선거법 위반 등으로 순창 합동연설회 도중에 긴급 구속되었습니다. 박정희 정권과 검찰총장출신 대법원장을 비판한 결과였죠. 나 뿐만 아니라 선거운동원 등 100여명이 모두 잡혀갔어요. 그래서 안식구와 운전기사 둘이서 내 사진을 짊어지고 다니며 선거운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개표하는 날 전주교도소 안에서 갑자기 와~ 만세 하면서 웬 함성이 들리는거예요. 난리가 났죠. 교도관이 내가 당선됐다고 알려줘서 알게됐죠. 당시 옥중 당선자가 전남 고흥 보성서 출마한 김수 후보와 2명이었는데 그 양반은 나중에 공화당에 입당했어요."-달력 국회의원이란 별명도 있었는데 달력은 얼마나 돌렸습니까."그 때는 한 장짜리를 벽에 붙이도록 만들었는데, 한 10년이상 돌렸죠. 그러니까 (국회의원이)됩디다."-1980년 서울의 봄 때는 군부정권 타도를 외쳤다가 다시 옥고를 치르기도 했는데"1년간 교도소에 있다가 박대통령이 저격 당한뒤 풀려났는데(나중에 대법원서 긴급조치위반 등 혐의 무죄선고) 다시 광주내란음모 배후인물로 해서 구속되었습니다. 이후 선거권 피선거권 등을 모두 박탈당하고 10년간 식물정치인으로 지냈죠. 나중에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가 됐지만 잃어버린 10년에 대한 보상으로는 미흡했지"-정치 규제로 묶였다가 13대 총선에선 평민당 후보로 전주에서 출마해 이철승 전 신민당 대표를 꺾고 3선고지에 오르셨죠."당시 전국 최다득표를 했습니다. 이철승 전 총재는 3등을 해서 결국 정계를 떠났죠."-5공 비리 청문회하면 지금도 거침없는 직접화법으로 시시비비를 추궁하시던 모습이 생생한데"DJ가 나보고 5공비리 특위위원장을 맡아 제일 먼저 질의에 나서라고 해서 먼저 발언했습니다. 전두환씨가 상왕노릇하려고 만든 일해재단을 집중 파헤쳤죠. 앞장서서 강제모금 등을 추궁하는데 당에선 그들과 뒤에서 협상하고 딴 짓을 하면서 나를 견제하는 거예요."-당시 증인으로 나온 현대 정주영회장에겐 독설가답지 않게 정중하게 대해 논란이 일기도 했었죠."아, 그거 회장님 소리는 잘못 알려진 것입니다. 동해출신 의원이 한 소리인데 나를 정치적으로 죽이기 위해 음해한 것입니다. 다만 초선의원이었던 정몽준 의원이 아버지 증인 순서를 뒤에다 넣어달라고 부탁해서 그렇게 해주었죠. 당시 정 회장이 음식점에서 수표 2장이라고 주길래 나는 작은 것 말고 현재 문화일보자리를 달라며 거절했습니다. 국악협회 건물로 사용하기 위해서. 그 땅 주면 거기에 정회장 동상을 세우겠다고 제안했었죠."-결국 김대중 총재와 결별하고 14대 총선에 다시 무소속으로 나섰다가 낙선의 아픔을 겪으셨고, 이후 김 전 대통령하고는 고소전으로까지 이어졌는데"내가 여러 차례 고소했죠. 국가보안법 위반 공천비리 뇌물수수 재산국외도피 외화밀반출 등 모두 7번 고소했는데 검찰에서 가만히 있다가 DJ가 죽고나니까 공소권 없음 처분을 합디다." -야당사의 산증인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는데 2002년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으로 간 이유는."DJ 때문에 갔죠. 그 일당이 있는 것이 보기 싫어서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에 갔습니다."-그동안 전북과 호남에서 일당독주 문제를 많이 거론하셨는데"우리는 아직도 DJ 향수에 젖어있습니다. 물리적이 아닌 화학적 변화가 일어나야합니다. 이제 DJ 우산에서 벗어나 당당히 전북 몫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전북의 혼을 찾고 전북인의 기백과 기상과 기질을 되찾아야 합니다. 홀로서고 바로서야 전북이 살 수 있습니다." -지난해 LH 문제도 그렇고 전라북도가 힘이 없다는 자조섞인 말이 많습니다. 누구 책임이라 보십니까."광주 박광태시장이나 전남 박준영지사는 다들 제몫을 챙기고 있습니다. 새만금만 가지고 얘기해서는 안돼요. 여수엑스포 같은 것은 군산에서 했어야 맞습니다. 군산항이 왜정때는 4대 항구중 하나였어요. 헌데 지금은 46개 항구중 꼴찌입니다. 여권과 협력할 것은 협력해서 전북에 큰 이벤트를 만들어야 합니다."-새만금 말씀을 하셨는데 20년동안 겨우 방조제 하나 막고 너무 지지부진한 것 아닌가요."지금처럼 이렇게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중앙정부를 상대로 너죽고 나죽자는 식으로 대담하게 나서야만 합니다. 이것저것 눈치보고 말 못해서는 일이 안돼요. 누가 앞으로 1년에 2조원씩이나 예산을 준답니까. -그러면 전라북도와 새만금의 미래를 어떻게 보십니까."새만금을 농지나 산업용지로 쓴다고 하는데 비싼 돈 들여서 그렇게 하면 아까워요. 새만금에 문화를 접목해서 나가야합니다. 지금은 문화시대이잖아요. 또 국가 땅인데 이것을 전북 것으로 못박고 새만금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예향 전북이라고 하지만 사실 대한민국 문화수도는 광주로 넘어갔잖아요."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가 광주를 문화1번지로 만든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대한민국 문화1번지는 전주입니다. 이조 500년 성지가 경기전이고 조선왕조 4대 사고의 유일본이 전주사고이잖습니까. 왜란때 정읍출신 안의손한계 선생이 짊어지고 피란길에 올라 지켜낸 것입니다. 왕들만 들어가는 경기전 안에 두분을 기리는 비석이 지금도 남아있잖아요. 전주사고 원본을 전주로 가져와야만합니다. 또 전주에 전라감영이 있었고 남문이 호남제일성이었습니다. 일제 잔재인 풍남문, 풍남제 대신에 호남제일성을 쓰고 전라감영을 수원성 못지않게 복원해야 합니다."-전북발전을 위해 지역의 리더 역할이 중요하겠군요."앞으로 문화 전북을 표방하는 도지사가 나와야합니다. 전북의 맛과 멋 가락과 소리, 즉 전북의 영혼을 창조해 나갈 리더가 필요합니다. 판소리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만큼 전주에 대사습청과 국악대학원을 세우고 최고의 소리축제판을 벌여야합니다. 전국에 50~60명 되는 명창들만 모아서 대통령상을 걸고 소리왕을 뽑는 축제도 만들어야 합니다." -전주대사습보존회를 설립하고 초대 이사장을 맡아 대한민국 최대 국악 등용문을 만드셨는데 최근 전주대사습과 관련해서 이런 저런 얘기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만"안타깝습니다. 우리 대사습이 300년 역사인데 일제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이 없앴다가 90년만에 부활시켰잖아요. 헌데 지금 체육관에서 행사를 하고 있어요. 이사장도 국악인 대신에 대사습을 관리 계승 부흥시킬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인물을 선임해야합니다. 소리가 전주의 큰 밑천인데 한옥마을이 문제가 아니죠. 전주의 한복판, 현재 예술회관 자리 같은데에 빨리 대사습청을 만들고 명실상부한 소리의 전당으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19대 총선이 끝났습니다. 지역발전을 책임질 국회의원들에게 당부하실 말씀은."국회의원은 큰 일 하라고 뽑아준 겁니다. 하천 다리놓고 학교 체육관세우고 하는 것은 지방의원이 해야하는 일이죠. 중앙에서 교부금 조금씩 받아다가 생색내는 것 말고 큰 것을 잡아야합니다. 또 장관 차관이 무서워하는 국회의원이 되어야 합니다. 부산 대구 광주 의원들 봐요. 할 소리 다 하잖아요. 왜 전북만 오갈병이 들었습니까. 큰 소리 치려면 알아야 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중앙부처 공무원들 머리 좋아서 고시패스한 사람들이잖아요. 그들을 머리 숙이게 만들려면 공부 많이 해야하고 부지런히 노력해야합니다." -독특한 서도 서예 서각을 일궈서 일명 손주항체라는 글씨체를 개척하셨는데 어떻게 배웠는가요."그게 손주항체가 아니고 설문체입니다. 옥편을 찾아보면 초서 행서 뒤에 설문체가 나오죠.(직접 옥편을 찾아 확인시켜주면서) 갑골문과 거의 같아서 조형미가 있고 아름답죠. 글씨는 어머님이 글을 잘 쓰셨는데 어릴 적에 저에게 매일 신문지 한 장씩을 주시면서 새까맣게 채우라는 거예요. 그게 밑거름이 되었습니다."-마지막으로 도민들에게 당부하실 말씀은."전북도민들이 기가 죽어있습니다. 기를 살려야 합니다. 안된다 어렵다는 비관과 자조를 버리고 투지를 가져야 합니다. 전북이 죽느냐 사느냐는 도민들 손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까지 무조건 당만 보고 찍다보니 낙후되고 괄시받고 설움 받아온 것 아닙니까. 이제라도 인재인물을 키워야합니다. 또 큰 생각 가지고 큰 판, 큰 이벤트를 벌어야 합니다."

  • 기획
  • 권순택
  • 2012.04.17 23:02

우찬규 대표는…한학 전공·고전국역요원서 고서화 전문가로 명성

1957년 부안 백산에서 태어났다. 제도권 학력으로는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 여덟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대신 서당을 다녔다. 부안의 한학자 고당 김충호선생이 첫 스승이고 부여 곡부서당의 서암 김희진 선생이 두 번째 스승이다. 한의학을 공부하고 싶었는데,'소학'과 '대학', '사서' 등을 두루 공부하면서 철학있는 학문 '한학'에 매료됐다. 70년대 중반 민족문화추진회가 개설한 국역연수원에 응시해 열아홉살 가장 어린 나이로 합격, 최연소 고전국역요원이 됐다. 그곳에서 2년동안 공부 하면서 학문의 깊이를 더 얻었다. 실력을 인정받아 교과서를 만드는 일에 참여했고, 단국대 동양학연구소의 '한한대사전' 편찬 연구원 시험에도 합격했다. 학계로 진출할 기회도 있었으나 회의가 생겨 다른 길을 택했다. 스승 신호열 선생을 찾아다니다 고서화를 만나 스물세살에 근역서화연구소를 열었고 동숭화랑을 운영하면서 고서화의 세계에 천착했다. 고서화 수집에 나선 것도 그때다. 이후 전문성을 다져 88년 고서화전문화랑 '학고재(學古齋)'를 열었다. 이름은 '옛것을 배워 새것을 창조한다'는 '학고창신'에서 따왔다. 인사동으로 이사해서는 현대미술도 담아내기 시작했다. 덕분에 상업화랑들이 받아들이지 않던 역량있는 민중작가들이 학고재에서 생명을 얻었다. 미술이 발전하려면 좋은 미술 서적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91년, 도서출판 '학고재'를 만들었다. 우리시대의 명저가 된 고 최순우 전집 5권이 첫 작품이다. 뒤를 이어 학고재 신서, 세계문화예술기행 시리즈,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서서'를 비롯한 단행본 등 수많은 미술분야의 양서를 만들어냈다. 학고재 책들은 내용에서만이 아니라 그 품격을 더해주는 디자인으로 독창성을 돋보이는 아름다운 책들이 많다. 적자가 다반사인 출판업종의 환경에서도 좋은 책에는 과감히 투자해온 것이 학고재의 특징인데, 2000년에 펴낸 '중국회화사 3천년'은 1억 5천만원을 들여 만들었다. 원금도 못찾는 투자로 안겨진 적자는 우대표의 강점인 '고서화 유통' 수입으로 메운다. 95년에는 소격동의 한옥을 구입, 현대미술을 전문으로 하는 '아트 스페이스 서울'을 열었으며, 97년에는 문화기획사 '아크 컨설팅'을 발족시켰다. 2008년 인사동 시대를 마감한 이후에는 학고재로 통합한 소격동 갤러리와 제동으로 사옥을 옮긴 학고재 출판사 운영에 집중하고 있으며, 최근 부암동에 현대미술 전시를 위한 미술관 건립을 위해 1천평 부지를 구입했다. 하반기에 착공할 이 미술관은 아시아 현대미술의 중심으로 키워갈 학고재의 미래이자, 우대표의 꿈이 실현될 공간이다. 2녀 1남 중 고고미술사를 전공한 막내아들이 아버지의 일을 잇겠다고 나서 그의 의지가 더 단단해졌다.

  • 기획
  • 김은정
  • 2012.04.10 23:02

우찬규 학고재(學古齋)대표 "전북 문화·전통 살려 국제적 미술 레지던스 운영을"

2년 전쯤 문화계에 큰 화제를 불러온 전시가 있다.'500년만의 귀향-일본에서 돌아온 조선 그림'전이라 이름 붙은 전시였다. 일본에 반출됐던 고서화 30점. 길게는 사오백 년, 짧게는 수십 년의 유랑 신세를 마치고 귀향한 이 작품들은 대부분이 국내 화단에 처음 공개된 작품이란 점에서도 그렇거니와 빈자리가 많은 조선 전기 회화사를 보완해줄 귀중한 작품으로 미술계의 주목을 모았었다. 이 작품들을 모으고 전시를 연 사람. 학고재(學古齋) 우찬규 대표(56)다. 전공은 한학이지만 일찌감치 고미술 영역에 입성해 고미술전문가로 한 시대를 살고 있는 그는 지금 한국미술의 오늘을 이끌어가는 중심에 서있다. 온고지신의 이치를 그대로 실천하는 삶이다. 옛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에만 집착하는 시대에, 한눈팔지 않고 옛 것과의 대화를 삶의 노정에 온전히 들여온 그의 선택은 옳았을까. 그래서 만났다. 옛것을 배우고 익히는 즐거움을 온전히 체득하여 세상에 널리 전파하고자하는 우대표와의 대화는 편안했다. 결코 서두르지 않고 마치 옛 책을 읽는 것처럼 '자분자분' 들려주는 화법이 주는 즐거움이 컸다. 인터뷰는 학고재 신관에 있는 그의 업무실에서 있었다. 학고재는 서울 도심의 번잡함을 살짝 빗겨선 종로구 소격동 국립민속박물관 건너편에 자리 잡고 있다. 옛 한옥의 외형을 고스란히 지키고 있으면서도 내부는 본격적인 갤러리로 탈바꿈한, 공간 또한 옛것과 현대가 조화를 이룬다. 지금 학고재에서는 스물여덟살 젊은 여성작가 유현경의 전시 'Lying'이 열리고 있다. 개관 이래 가장 나이 어린(?) 작가란다. 평일인데도 전시장에는 관객들이 뒤를 잇고 있었다. -평일인데도 관객이 참 많습니다. 언론에서도 주목하고 있던데, 학고재의 작가발굴 안목이 다시 확인되는군요. "성장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는 작가예요. 자기 작업에 몰두하는 힘과 표현 역량이 놀랍습니다. 6개월 동안 문화예술진흥위원회의 레지던스 지원을 받아 독일에서 작업을 하고 왔는데, 500점을 그려낸 작가입니다. 참으로 놀랍지요. 이런 작가야말로 우리 미술의 미래를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이 직전 전시도 호평을 받았던데요. '디자인의 덕목'전인가요. 시대도 공간도 다른 작품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었는지 궁금했습니다. "시공을 초월해 디자인이 갖춰야 하는 기본과 정신을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싶었습니다. 전통고가구 강화반닫이, 고미술품인 책가도, 추사 김정희의 판전 현판 탁본, 유럽 출신 디자이너 헬라 용에리 위스, 로낭과 에르완 부훌렉, 피에르 샤르팽, 제임스 얼바인 등의 가구와 조명, 이우환, 정상화, 프랑수와 모렐레, 천원지의 회화를 전시했어요. 한곳에서 비교해보니 우리 조상들이나 유럽의 디자이너들이나 모두 기능을 충족시키는 범위 안에서 가구를 디자인했다는 것을 알 수 있더군요."-미술애호가들에게는 학고재의 이미지가 특별합니다. 일종의 신뢰 같은 것일텐데요. 학고재도 엄연히 상업화랑인데 의미나 명분만 추구하는 일은 한계가 있지 않나요. "우리도 돈이 되는 전시 많이 합니다.(웃음) 사실 의미를 내세운 전시만 하기에는 한계가 있지요. 아무리 좋은 뜻을 갖고 있어도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어렵게 되니까요. 그렇다고 경제성만 탐하게 되면 화랑의 중요한 역할을 놓치게 됩니다. 적당한 절충, 적당한 경계, 이런 것들을 지켜야해요"-그런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십니까."저희 화랑의 강점이기도 한데, 제가 고미술을 조금 안다는 것이예요. 그쪽에서 수익 창출을 어느 정도 해내기 때문에 현대미술분야로 하고 싶은 전시를 1년에 한두 번은 할 수 있습니다."-한학을 전공했고, 고전번역으로도 실력을 인정받으셨는데 그 길을 놔두고 왜 '학고재'라는 화랑을 택했는지 궁금합니다. "학고재가 문을 열었던 1988년 즈음에는 이상하게도 인사동에 고서화전문화랑이 많지 않았어요. 오히려 한참 잘나가던 고서화랑들이 문을 닫고 새로운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던 때였지요. 학고재는 오히려 그런 분위기를 거슬러 고서화전문을 표방하고 나선 셈인데, 특별한 욕심을 내지 않아서였는지 화랑운영이'순풍에 돛 단듯' 잘되었어요. 열 평 옹색한 공간을 불과 2년 만에 벗어나 제 건물을 가질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남다른 문화인식이 읽혀집니다만 그래도 또 다른 비결이 있지 않았을까요. "옛것이라해서 옥석 구분 없이 상품화했던 기존 고서화전문화랑들과 차별화하고 싶었습니다. 철저한 기획 전시로 우리의 옛미술을 대중화하는 방식이었지요.'19세기 문인들의 회화전''무낙관 회화전''구한말 그림전''조선중기 서예전' 등이 그렇게 나왔습니다."-그런 기획전들이 고미술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었지요.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학고재의 대중화 명성은 90년대 초반, 민중미술 작가 초대전이 아닐까 싶습니다."물론입니다. 상업화랑에서 민중미술 작가들의 전시를 한 것은 학고재가 처음이었지요. 결과적으로는 화랑도 그 분들 덕분에 잘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신학철 이종구 오 윤 김정헌 강요배 씨 등 한국미술판도를 바꾸어 놓은 작가들과는 지금도 여전히 교류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어려운 시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운이 좋아 잘 지나갔던 것 같습니다."-그 시절, 민중미술에 관심을 가진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고서화를 전문으로 하는 화랑이 민중미술작가전을 기획한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수 있었겠지만 저는 고서화전을 기획하면서도 회화사에 남을 미술품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회화사에 남을 작품이란 게 어떤 것입니까. 시대정신이 담겨 있는 것이어야죠. 당시 역량 있는 민중미술작가들의 작품에는 시대정신이 살아있었어요. 그것을 주목했을 뿐이지요." -인사동 학고재 시대는 완전히 마감한 셈인가요. "소격동에 한옥을 구해 '아트스페이스 인 서울'이란 이름으로 현대미술 전문 화랑을 마련한 것이 1995년인데, 주로 고서화를 전문으로 하는 인사동 학고재와 함께 운영하다가 2008년에 인사동 건물을 팔고 소격동으로 모두 옮겨왔습니다." -소격동으로 이사온 이후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한국미술계에서 학고재의 위치가 아주 굳건하던데요. "더 책임이 커지는군요. 인사동에서 옮기면서 소격동 공간을 늘렸습니다. 본관 전시 공간을 확충하고 뒤쪽의 당초 학고재 출판사가 있던 곳에 신관을 지었어요. 신관은 새롭고, 앞쪽 한옥은 예스러운 분위기지요. 내용적으로는 기획전을 다양화하고 집중해 화랑을 국제화 시키는데 주력했습니다."-화랑의 국제화는 한국미술의 위상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지 않습니까. "물론입니다. 2008년은 학고재 개관 20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그때 소격동 신관을 짓고 20주년 기념전을 했는데, 저희로서는 중요한 전시였어요. '센시티브 시스템'을 주제로 한 전시였는데 프랑스 생테티엔느 미술관 관장인 로랑 헤기에게 기획을 맡겼습니다. 이 전시를 계기로 학고재의 국제 무대 진출 통로가 좀 더 넓게 열렸습니다." -외국작가들을 초대할 때는 어떤 가치를 우선에 두나요. "상업적인 측면보다는 이 작가의 작품이 어떤 역할을 할까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콜렉터나 미술학도, 미술시장에서 일하는 사람들한테 도움이 될 수 있는 전시가 기준이지요. 그렇다보니 손해가 많았습니다.(웃음) 그러나 학고재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받게 되고, 또 그것을 계기로 우리나라 작가들이 외국에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렸으니 그것만으로도 보람과 의미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역량 있는 작가를 발굴하고 작가들의 지원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으신데요. "화랑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니까요. 다른 예술 장르가 다 그렇지만 특히 미술 발전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작가, 가능성 있는 작가들이 많아지면 그 나라의 미술은 자연스럽게 발전합니다. 그러려면 투자를 해야지요. 우리나라는 그 부분에 너무 인색합니다. 사설 화랑이 작가를 발굴하고 지원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유럽이나 다른 나라들의 경우 정부나 자치단체가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운영해 전 세계적으로 작가를 발굴하고 지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바탕을 잘 들여다봐야합니다."-전주를 비롯해 전라북도는 미술의 전통이 깊습니다.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한때 전주에서 작업하기도 했고, 교류도 활발했었지요. 그런 전통을 살려 지역발전의 동력으로 활용하는 것도 지혜로운 일일 텐데요."전북은 그런 문화적 전통과 배경도 그렇고 지형적으로도 국제적인 미술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운영하면 아주 좋을 것 같습니다. 다른 자치단체들이 비엔날레 형식의 행사를 많이 만들어내고 있는데, 동력이 많이 떨어져 있습니다. 반면 레지던스는 작가들을 발굴하고 지원하면서 국제적인 도시로 만드는데 매우 의미 있고 가능성 있는 통로가 됩니다. 지역작가 지원도 그들끼리의 리그보다는 문을 열어 서로에게 자극을 줄 수 있는 판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전북을 현대미술로 주목받는 지역으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고미술 수집 활동은 어떤가요. 보람이 크겠지만 어려움도 많을 것 같습니다. "10여년동안 일본에서 우리 문화재를 들여오는 일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그 즐거움이 워낙 커서 늘 새로운 마음으로 나서는데 명분이 있는 일이면서도 문화재 환수라는 것이 만만치 않은 일이긴 합니다."-한국미술의 위상은 어떻습니까. "세계미술계에서 한국미술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백남준, 이우환, 그 이후에도 좋은 작가들이 계속 나오고 있죠. 세계적인 비엔날레에서 주목받는 한국작가들이 많습니다. 이용백 같은 작가도 역대 비엔날레에서 그만큼 주목받는 작가가 없었죠. 외신들이 비렌날레를 보도하면서 이용백을 반드시 언급하더군요. 그런 작가들이 우리나라에서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이런 흐름을 있게 한 어떤 배경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그들의 작품이 좋기도 하지만 지금 경제 중심축이 아시아로 옮겨져 왔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시아에서 중요한 나라가 어디입니까. 중국 한국 일본이죠. 미술의 측면에서 본다면 한중일 중에서도 한국 미술의 완성도가 가장 높습니다. 유럽 쪽의 미술전문가 평론가 큐레이터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내용입니다."-학고재는 작가발굴을 어떤 기준으로 합니까. "성장의 가능성을 제일 먼저 봅니다. 작가는 시대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책무이기도 합니다. 그래야 역사에 남을 수 있는 작가로 성장합니다. 어느 시대건 문제가 있고 추구하는 가치가 있습니다. 그에 대한 안목을 갖추는 일이 중요한데 그것이 금방 갖추어지지 않거든요. 독서량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시대를 볼 수 있는 안목이 자연스럽게 생기지요. 그 바탕을 우선 갖춘 후에는 자기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손을 가져야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긍정적인 사고를 갖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앞으로 하실 일이 더 많아지겠습니다. "좋은 작가를 발굴하는 일과 함께 아시아 미술을 이끌 수 있는 화랑으로 발전시키고 싶습니다. 아시아 작가들을 발굴하고 지원해 세계미술의 중심이 될 수 있게 하는 작업입니다. 중국 인도 등 아시아권의 좋은 작가, 기획자들과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지요. 좀 더 활발한 현대미술 전시회를 하려고 부암동에 부지도 마련했습니다. 전시공간만 1500평 규모의 미술관입니다. 금년 하반기에 착공하는데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미술관을 만들고 싶습니다."-고향에도 우 대표님의 문화작업이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좀 더 나이가 들면 좋은 레지던스를 운영하는 것이 마지막 바람입니다. 좋은 공간을 마련해 좋은 작가들을 지원하면서 작가들이 작업할 때 마당도 쓸어주고 함께 지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 까 상상합니다.(웃음) 그 꿈을 고향에서 이루면 더 좋겠지요. 고민도 하고 노력도 해보겠습니다."

  • 기획
  • 김은정
  • 2012.04.10 23:02

송삼석 회장은…문구 제조업 '외길'

(주)모나미 송삼석 회장은 남다른 근면과 강인한 의지로 불모지였던 우리나라 문구산업을 세계적 수준으로 일으켜 세웠다. 그러한 과정에서 송 회장을 떠받쳐 온 기둥은 두 개다. 하나는 기독교 신앙이요, 또 하나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다. 기독교 신앙은 모태신앙으로 손자까지 5대째 이어지고 있다. 사람에 대한 믿음은 모나미를 키우면서 얻어진 철학이다.이는 그의 아호'항소(恒笑)'가 잘 보여준다. '항상 웃는다'는 뜻으로, 온화한 얼굴과 마음을 가지고 긍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그에게 친구들이 붙여주었다.송 회장은 1928년 군산시 구암동에서 6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은 송기주씨로 영명학교를 나와 군산 야소병원 사무장으로 있다, 독학으로 약사면허증을 취득했다. 또 31 만세운동으로 1년 동안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기도 했다. 이후 완주 삼례로 옮겨 '송약방(宋藥房)'을 차렸다. 형제들은 모두 부친의 뜻에 따라 미션스쿨로 진학했다. 위로 두 형은 세브란스 의전을 나왔다. 큰 형은 연세대 의대 교수를 지냈고, 둘째 형은 서울에서 병원을 운영했다. 또 누나 셋은 모두 이화여대를 나왔다.막내인 송 회장은 삼례초등학교를 거쳐 1941년 5년제 전주 북중(전주고 23회)에 입학했다. 대학 진학시 부모님은 의대를 원했으나 서울대 경제학과(6기)에 진학했다. 이현재 전 국무총리, 김재순 국회의장, 조순 경제부총리, 고재청 국회 부의장 등이 동기다. 625 전쟁 중에는 의용군으로 붙잡혀가다 탈출하는 등 두번의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 송 회장은 부산 피난시절 무역회사인 삼흥사를 거쳐 풍화산업 무역과장을 지냈다. 1955년 광신산업에 지분 10%를 받고 상무로 스카우트됐다. 당시 광신산업은 일본에서 문구류를 수입해 판매하는 무역회사였으나 1960년 광신화학으로 이름을 바꿔 물감과 크레파스를 생산했다. 1963년 5월 우리나라 최초로 볼펜을 생산했고 이후 탈세사건, 공장 화재 등을 극복하고 승승장구했다.송 회장은 70세 되던 1997년 장남에게 경영권을 물려주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모나미는 그 뒤 문구제조업체에서 탈피, 글로벌 사무용품 유통서비스 기업으로 도약하고 있다. 태국과 중국 폴란드에 해외공장을 두고, 세계 100여 국에 제품을 수출한다. 또한 자회사로 파커와 워터맨 등을 수입하는 (주)항소를 비롯 모나미스테이션, 원메이트, 모나미 G&P, 모나미 이미징솔루션 등을 두고 있다. 송 회장은 누구보다 고향 일에 앞장서 왔다. 재경(在京) 전북도민회장을 비롯 서울에 있는 전북출신 정관재계 인사 모임인 모악회 회장, 재경 전주고 총동창회장 등을 오랫동안 맡아 전북인의 긍지를 높이는 구심점이 됐다. 2010년 제6회 자랑스런 전북인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역경의 열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내가 걸어온 외길 50년 등이 있다.한편 이화여대 정외과 출신인 부인 최명숙 여사(78)는 이화여대 총동창회장을 연임했다. 세 아들은 모두 미션스쿨인 연세대를 졸업했다. 큰 아들 하경(53)은 미국 로체스터대 경영대학원을 나와 부친의 뒤를 이어 15년째 모나미 사장을 맡고 있고 둘째 아들 하철(51)은 미국에서 교수생활을 하다 귀국, 항소 사장으로 있다. 사돈은 삼양사 김상하 회장이다. 셋째 하윤(49)은 모나미 부사장이다.

  • 기획
  • 조상진
  • 2012.04.03 23:02

송삼석 (주)모나미 회장 "흔히 기업인은 돈을 앞세우지만, 사람이 우선이죠"

'모나미 153' 볼펜은 한국 문구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50년 동안 35억 자루가 넘게 팔렸다. 한 줄로 늘어 놓으면 지구 12바퀴를 돌고도 남는다. 지금도 하루 15만 개가 팔려나간다니 그야말로 '국민볼펜'인 셈이다.또 어린 시절 왕자표 파스와 모나미 그림물감을 사용하지 않고 자란 한국인은 드물 것이다. 상표 이름인 사인펜 매직펜 플러스펜 역시 보통명사가 되었다. 그 만큼 모나미는 우리 생활 깊숙히 잡고 있다. 이 땅에 이 같은 문구류의 싹을 띄우고 기른 분이 (주)모나미 송삼석(宋三錫84) 회장이다. 경제개발의 삽질이 막 시작되던 1960년대 초 문구 제조업 외길에 매진, 불굴의 의지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것이다. 지금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성공적인 노후를 보내고 있는 송 회장을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 대신빌딩 5층 (주)항소에서 만났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근황을 들려주시죠."매일같이 아침이면 아내와 함께 이화여대 뒷산(안산)을 다녀 옵니다. 도중에 봉은사를 지나는데 요새는 중간에 좀 쳐져요. 그리고 1주일에 한 두번씩은 친구들(고재청 전 국회부의장 등)을 만나 점심식사를 합니다. 경기도 수지에 있는 모나미와 이곳 항소에는 한 달에 한 두번 정도 들립니다."- 교회에는 주일마다 나가십니까?"70대 초반만 해도 (부부끼리) 교회에 나갔는데 80대 넘어서 부터는 큰 아들이 자동차를 몰고와서 데려갑니다. 인생이 노년기에 행복해야 참다운 인생의 맛인데 아직은 행복합니다.(웃음)" (송 회장은 정동제일감리교회 장로, 부인은 집사로 독실한 크리스찬이다. 또한 송 회장 자녀들은 일요일 저녁이면 북아현동 송 회장 집에 모여 화목하게 저녁식사를 같이한다.) - 고향 전주(삼례)에는 가끔 들르시는지요?"지금은 못내려 갑니다. 전주에 있는 (북중)동창들이 거의 다 죽었어요. 예전엔 총동창회가 열릴 때면 꼭 내려갔는데"- 모나미(Monami Corporation)는 당초 문구 제조업체에서 글로벌 사무용품 유통서비스 기업으로 탈바꿈하고 있습니다. 창업자 입장에서 지금의 사업 다각화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사업 다각화는 좋습니다만, 문구산업에 기초한 기업을 육성해 달라, 이렇게 당부합니다. 작년에 모나미가 3450억 원의 매출을 올렸습니다. 2015년까지 1조 원을 올린다는데 잘 되리라 믿습니다." - 모나미 하면 아무래도 국민볼펜으로 사랑받고 있는 '모나미 153'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처음 볼펜과는 어떻게 만나게 되었습니까?"1962년 5월께 516 군사쿠데타 1주년을 기념해서 경복궁에서 국제박람회가 열렸습니다. 저희 광신화학은 그 때 일본에서 문구류를 수입해 팔면서 모나미 물감과 왕자파스를 자체 생산하고 있었습니다. 박람회에는 우리의 문구류 수입원인 우치다요코(內田洋行)측과 공동 참가했는데 그 회사에서 파견나온 직원이 양복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쓰는 겁니다. 그게 볼펜이었어요. 당시 우리는 펜에 잉크를 찍어 쓰거나 만년필을 사용했습니다. 신기했지요. 바로 '저걸 우리가 생산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그렇게 시작했죠."- 일본 업체에서 볼펜 만드는 기술을 쉽게 이전해 주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볼펜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이 서자 마음이 바빠졌습니다. 일단 일본인 직원을 설득했습니다. 그가 본사로 부터 '계산기 10대를 팔고 오라'는 밀명을 받고 온 것을 알고 도와줬습니다(당시 1인당 GNP가 87달러였는데 계산기는 2000달러였다). 고맙게 생각한 그 직원이 본사에 보고를 했고, 사장이 일본 볼펜시장의 90%를 차지하고 있던 오토볼펜을 소개해줬습니다. 바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어렵게 설득한 끝에 우선 유성(油性)잉크 제조기술만 가르쳐주기로 약속을 받았습니다."- 처음 볼펜을 만들어 판매했을 때 국민들은 생소하게 느꼈을 텐데,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으면 말씀해 주시죠."처음에는 볼펜 판매가 부진했습니다. 국민들의 몸에 밴 펜글씨 탓에. 그래서 직원들을 동원해 책상에서 잉크없애기 운동을 벌이고 사무실을 돌며 볼펜 나눠주기 판촉을 벌였습니다. 웃지못할 에피소드도 많았습니다. 볼펜은 잉크의 성분 배합이 조금만 잘못돼도 플라스틱 관 밖으로 역출해 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간혹 성분배합이 잘못돼 직장인이나 대학생들이 와이셔츠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 잉크가 새는 바람에 흰 와이셔츠를 못입게 되는 경우가 왕왕 발생했습니다. 우리는 고객들에게 무조건 변상해줬습니다." - 국민볼펜인 '모나미 153'이란 이름은 어떻게 생겨난 것입니까?"국내에서 처음으로 만든 볼펜에 근사한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습니다. 전 직원을 대상으로 아이디어를 공모했는데 이구동성으로 '모나미 볼펜'(모나미는 프랑스어 Mon Ami로 나의 친구라는 뜻)을 추천했습니다. 이미 '모나미 물감'이 큰 인기를 얻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더 특별한 의미를 담고 싶었는데 한 직원이 '모나미 153이 어떻습니까?'라고 툭 뱉는겁니다. 화투놀이에서 1, 5, 3을 더하면 가보로 가장 높고, 발음하기도 좋다고 하면서요. 순간 성경책 요한복음이 떠올랐습니다. 21장 11절에 베드로가 예수님이 지시한 곳에서 153마리의 물고기를 잡았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귀절이 나옵니다. 여기서 153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면 많은 성과를 올릴 수 있다는 상징적 숫자입니다. 저는 그런 정신으로 기업을 경영했습니다."- 현재 모나미 153 볼펜 값이 300원인데, 그 동안 볼펜 가격에 얽힌 사연이 꽤 있을듯 합니다만."당시 서울 시내버스 요금이 15원, 신문 한 부값이 15원이었는데 거기에 맞췄습니다. 이후 30년 가까이 정부에서 볼펜을 독과점 품목으로 분류해 가격을 올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소비자 물가에 영향을 미친다고 해서."- 당시 볼펜 판촉을 위해 많은 광고를 했고, 덕분에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과 골프 칠 기회를 가지셨다면서요?"1968년에 이병철 회장이 광고주인 기업체 대표 30명을 안양 CC로 초청했습니다. 저는 1시간 먼저 가서 이 회장과 같은 조(組)에서 친 겁니다. 9홀을 마치고 클럽하우스에서 냉면을 먹을 때 마침 제일제당의 미풍이 눈에 띄길래 일본의 아지노모토(味元) 얘길 꺼냈습니다. 여름 장마에 구멍을 2배로 키워 재고처리를 했다는 일화입니다, 그 말을 듣던 이 회장은 '기업인은 절대 그런 식으로 소비자를 우롱해서는 안된다'면서 정도(正道)경영을 강조했는데 인상적이었습니다."- 청와대에서 열린 세계 문구류 비교전시 행사서 박정희 대통령과 만났을 때, 인상은?"1979년 4월, 그러니까 박 대통령이 서거하기 6개월 전이었습니다. 청와대에서 세계 각국의 문구류를 전시하는 행사를 여니 오후 3시에 참석해 달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6개 문구업체 대표가 참석했는데 박 대통령 입에서 술 냄새가 확 풍겼습니다. 낮술을 한 거죠. 박 대통령은 내게 '모나미라는 상표를 우리 말로 크게 쓰고 영어는 작게 쓰는 게 좋겠다'고 당부하면서'다른 나라 볼펜은 시원하게 잘 써지는데 모나미볼펜은 좀 빡빡한 느낌이 든다. 우리 기술력이 떨어지는 것 아니냐?'고 물어요. 그래서 우리는 한글 특성상 세필(細筆)을 선호하는 국민들의 필기 습관을 고려해 0.7mm를 쓴다. 일본은 0.8mm인데 우리가 더 고난도 기술이며 조금 쓰면 부드러워진다고 했더니 꽤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기억이 납니다."- 초창기 해외 수출은 어떻게 하셨습니까?"처음에는 미국에 주문자 상표부착(OEM) 방식으로 순탄하게 잘 수출을 했습니다. 그런데 80년대 중반 곤욕을 치른 적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펜텍(Pen-Tech)'이라는 브랜드로 문구류를 수입판매하는 바이어가 모나미153 볼펜 500만 달러 어치를 주문했는데 독점판매권을 달라고 해서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함정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한국에 '펜텍 코리아'라는 현지법인을 설립한 뒤 동남아시아에서 생산되는 값싼 문구제품들을 미국으로 수입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앉아서만 당할 수 없어 수차례 미국을 오간 끝에 세계적 유통업체인 월마트와 문구류 50만 달러어치를 수출하기로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펜텍측이 손해를 입었다고 소송을 걸어왔지만 결국 우리가 이겼습니다." - 한때 공장에 불이 나 위기를 맞았던 적도 있었다면서요?"1978년 가을이었습니다. 집에서 자고 있는데 새벽 3시쯤 회사에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공장에 불이 났다는 겁니다. 그 때는 통금이 있던 때라, 파출소에 들려 통행허가를 받은 뒤 달려가 봤더니 공장이 폐허가 되었고, 특히 볼펜 팁을 생산하는 SPM실이 새카맣게 타버렸습니다. SPM실은 회사의 심장부로, 기계 자체가 기름 덩어리입니다. 스위스에서 5대를 들여왔는데 이것이 없으면 회사는 문을 닫아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다행히 일본 도쿄 지사에 스위스 기술자가 파견나와 있어 신속히 분해한 후 조립해서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기업 공개 압력을 받은 것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1974년 6월인가에, 재무부 차관보가 보자고 해서 갔더니 모나미의 증시 상장을 추진한다는 겁니다. 업종별 대표기업들을 증시에 상장시켜 자본시장을 육성한다는 목표를 정해 놓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 때 웬만한 기업들은 무자료 거래를 하던 때입니다. 증시 상장으로 모든 거래가 낱낱이 공개되면 도매상들이 거래를 꺼릴 것이 뻔했습니다. 다행히 소비자들이 모나미 제품을 사랑해줘 매출은 줄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날벼락이 떨어졌습니다. 기업 공개 4개월 뒤 검찰에서 회사에 들이닥쳤습니다. 수입대행사를 통해 사인펜 끝에 장착하는 닙(Nib)을 일본에서 전량 수입하는데 그것이 도매상에 판매한 장부와 차이가 난 것입니다. 탈세 사실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됐고 주가는 휴지조각이 됐습니다. 또 국세청에서 7억5000만 원의 추징금을 부과했습니다. 백방으로 뛰고, 또 행정소송을 통해 승소하면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1997년에 2세 경영체제로 넘기셨는데 퇴진을 결심하게 된 동기는?"모나미는 1960년 광신화학으로 출발했을 때부터 퇴직금 누진제를 실시해 왔습니다. 이것은 사원들이 평생직장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근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그런데 회사 연륜이 30년이 넘어가면서 장기근속 직원의 숫자가 늘어 퇴직금 누진제가 회사 자금 사정을 압박하는 요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해결한 사람이 다름아닌 제 큰 아들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모나미에 말단사원으로 입사해 과장 차장을 거쳐 이사로 있었습니다. 1년 중 절반이상을 공장에서 숙식하며 노조원들을 상대로 설득한 것입니다. 퇴직금 누진제를 원만히 해결하는 것을 보고 경영자로서의 자질을 인정한 것입니다."- 기업경영을 하면서 가졌던 경영철학은 무엇이었습니까?"저는 사람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흔히 우리 기업하는 사람은 돈을 앞장세우지만 그건 아니에요. 사람이 모든 일의 중심입니다. 될 사람을 골라서 써야 합니다. 또 저는 어떤 일을 하든 그 분야에서 만큼은 1등이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기업은 정글의 법칙이 작용하는 경쟁구도에서 1등을 하지 않으면 살아 남을 수 없습니다."- 건강 비결은?"사람은 다리부터 튼튼해야 합니다. 가능한 많이 걸어야 합니다."(송 회장은 젊은 시절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전주 북중 시절 야구와 기계체조 검도 수영 스케이팅 등을 했다. 골프는 36살 때인 1964년, 의사인 형님들의 권유로 시작했다. 처음 1년 동안 국내 최초로 세워진 충무로 골프연습장에서 거의 매일 500개의 공을 쳤다. 친구들과 처음 간 필드에서 참패한 뒤 1년 동안 레슨을 받고 핸디캡 8의 싱글이 됐다. 1년 전 부터 힘이 딸려 골프장을 나가지 않고 있다.)

  • 기획
  • 조상진
  • 2012.04.03 23:02

강동석 위원장은…

인천국제공항 건설 당시 사장을 맡아 불도저처럼 뚝심을 갖고 일했다."내가 죽으면 화장해서 인천공항에 뿌려달라"고 한 일화는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열정과 책임감이 강하고 자신에게 엄격한 야전사령관 스타일이다. 국토 해양 분야에서 잔뼈가 굵었고 전문성을 기른 정통 행정 관료 출신이다. 전주 출신으로 전주고를 나와 경희대 법학과에 들어갔지만 중퇴했다. 1965년 행정고시(3회)에 합격한 뒤 당시 교통부 기획관리실 사무관으로 관료생활을 시작해서 승승장구했다. 해운항만육운 분야를 두루 섭렵함으로써 74세에 이른 오늘날까지 사회가 그를 필요로 하고 있고 그 역시 역동적으로 일하고 있다. 그의 이력은 화려하다. 능력 못지 않게 관운도 따랐던 것 같다. 정부 부처 관료를 마감한 뒤에는 공기업 사장과 장관, 교수를 역임하는 등 쉬지 않고 일했다. 특히 굵직굵직한 박람회의 조직위원장을 여러차례 맡은 것이 이채롭다. 해운항만청장과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 한전 사장을 역임했고 참여정부 때에는 건교부장관을 지냈다. 인천대 석좌교수와 한국양회공업협회 회장을 지낸 뒤에는 2007년 전북세계물류박람회와 인천세계도시엑스포 조직위원장을 맡았다. 그 뒤 2009년부터는 여수엑스포 조직위원장을 맡아 세계적 행사를 진두지휘하고 있다. '세심하게 배려하는 사람 중심의 박람회'를 설계하고 있다. 부인 이홍자 여사와 2남을 두고 있다. 클래식 음악감상과 산책이 취미다.

  • 기획
  • 이경재
  • 2012.03.27 23:02

강동석 여수엑스포조직위원장 "기후변화·육상자원 고갈 해결책은 바다에 있죠"

오는 5월12일 개막되는 여수엑스포가 50일 앞으로 다가왔다. 여수엑스포는 93년 대전엑스포와 88서울올림픽, 2002년 월드컵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가장 큰 규모의 국제 행사다. 유치까지 10년, 준비기간만 4년이 걸렸다. 5대양 6대주의 해양 강국 106개 국가가 참여한다. 바다를 주제로 한 박람회로는 세계 처음이다. 93일 동안 80개 전시시설이 운영되고 8000여회의 문화공연이 펼쳐진다. 개막이 목전에 다가오자 조직위도 준비에 여념이 없다.  박람회장은 조경공사 마무리, 매일 반복되는 전시관 시연으로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이 모든 걸 총괄하는 '지휘자'가 전북 출신의 강동석(74) 조직위원장이다. 2주전 인터뷰 요청을 했다. 해외 출장중이어서 답변이 늦어지다 시간이 촉박해지자 서면인터뷰로 대신하자는 요청이 왔다. 단 한시간도 시간을 낼 짬이 없다고 했다.-여수엑스포 개최일이 어느 덧 50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세계적인 축제를 맞는 소감이 남다를 것 같습니다."대전 엑스포 이후 19년만에 우리나라에서 다시 열리는 세계 박람회라서 감회가 새롭습니다. 그만큼 국민적 기대 또한 크리라 생각합니다. 전 국민, 전 세계에 감동과 자긍심을 심어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시범운영에 들어간 걸로 알고 있는데 보완해야 할 점은 없나요."4월말부터 개막 전까지는 실제 관람객들을 초청해 세 차례 예행연습을 가지면서 미비점을 완벽하게 보완할 계획입니다. 시범운영 기간에는 콘텐츠를, 예행연습 기간에는 서비스를 점검한다고 보면 돼요."-준비에 차질은 없다는 거군요."박람회장 시설 공사도 이달말 모두 마무리 돼요. 4월 한달 간은 80개 전시시설과 8,000여회에 달하는 문화공연을 시범 운영하게 됩니다. 개막 일정에 맞춰 차질 없이 준비하고 있어요. " -주제가 '살아 있는 바다, 숨 쉬는 연안'인데 바다를 주제로 한 배경은 무엇입니까. "기후변화와 육상자원 고갈의 해결책이 모두 바다에 있어요. 최근 영국의 BBC방송에서, 100년 후인 2112년 지구상 100억의 인구를 먹여 살릴 식량자원과 에너지자원, 광물자원 등을 바다에서 구할 수 있다고 미래학자들이 전망한 바 있습니다. 특히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 국토는 21세기 큰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수엑스포를 계기로 지금부터라도 바다로 눈을 돌려야 해요."-'휴먼 엑스포'로 치르겠다고 강조하셨는데 어떤 의미입니까."과거엔 건물, 기술 중심의 박람회를 해왔습니다. 이런 걸 탈피해 콘텐츠와 사람 중심의 박람회, 관람객이 주역이 되는 '휴먼엑스포'를 추구한다는 점이 여수엑스포의 또 다른 특징입니다. 전시와 공연도 단순히 눈으로 보기보다는 오감으로 체험하는 것들이 많아요. 영상을 보는 도중 실제 퍼포머가 등장하고, 한국관에서는 관람객들과 강강술래 한마당도 펼쳐집니다. 초대형 LED를 활용해 관람객들이 원하는 메시지를 화면에 띄울 수도 있고, 화면의 이미지를 다운받는 등 '소통'도 가능해 집니다. 매일 밤에는 박람회장이 신나는 클럽으로 변하고 관람객끼리 함께 어울려 물을 첨벙이며 춤추는 신나는 장관도 연출됩니다." -엑스포는 흥미진진한 볼거리들을 선보이는 이벤트이기도 합니다. 관광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특화시설이 어떤 게 있습니까."4개의 특화된 전시시설(빅오, 엑스포 디지털갤러리, 스카이타워, 아쿠아리움)이 있는데 '빅오(Big-O)'와 '스카이타워'는 세계가 주목할 명품 콘텐츠예요. '큰 대양(Big-Ocean)'을 뜻하는 빅오는 박람회장 내 바다 공간을 주요 공연무대로 활용해서 해상쇼와 수상공연을 펼치고, 불꽃물안개레이저분수 등 최첨단 연출 기법을 총동원한 멀티미디어쇼와 관람객이 하나 되는 DJ쇼가 펼쳐집니다. '스카이타워'는 산업 폐기물인 시멘트저장고를 하프모양의 대형 파이프오르간으로 탈바꿈시킨 것입니다. 기네스북에 세계에서 가장 큰 소리를 내는 악기로 등재돼 있어요. 유명 오르가니스트들의 공연도 볼 수 있고 관람객들이 직접 스마트 기기로 연주해 볼 수도 있습니다." -국가 이미지가 걸린 대규모 행사인 만큼 참가 규모에 관심이 많은데요, 참가국과 기업유치는 어떻게 예상하고 있습니까. "세계 106개 국가와 10개 국제기구, 국내 7개 대기업이 전시에 참여하고 현대차 등 21개 기업이 후원합니다. 세계적인 경기 불황을 감안하면 만족할 만한 수준이라고 봐요. 주요 해양강국 뿐만 아니라 투발루, 키리바시 등 기후 변화로 위기에 처한 남태평양 섬나라들도 다수 참가합니다. 우리 국민이 세계 곳곳의 해양 문화와 기술 풍물, 해양 환경변화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북한도 참가하나요."북한이 참가한다면 박람회 흥행 뿐 아니라 남북관계 개선의 물꼬를 트는 데도 기여할 겁니다. 조직위는 지난해 11월 파리 주 프랑스 북한대표부에 박람회 공식초청장을 보냈습니다. 아직 소식이 없지만 북한 참가에 대비해 1100㎡ 규모의 독립전시관도 마련해 놓았어요." -국내외 관광객들이 많이 몰리면 교통숙박시설이 문제될 것 같은데 어떻게 준비하고 있나요."지난해 개통된 순천~완주고속도로와 전라선 KTX에 이어 목포~광양고속도로, 한중일 해상크루즈, 임시 항공편 등 다양한 광역교통망이 속속 확충되고 있어요. 문제는 여수시 외곽에서 박람회장까지인데, 이는 환승주차장과 셔틀버스 시스템으로 운영하면 큰 불편은 없을 것으로 봅니다. 하루 최대 900여대까지 수시로 운행하면 대기 시간이 10분 미만으로 단축될 겁니다. 숙박시설은 여수 시내로만 보면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숙박권역을 여수 인근 2시간 이내로 확대하는 방안을 강구했어요. 하루 13만6천여실에 달해 관람객이 가장 많이 몰리는 5월 주말에도 충분해요." -공짜 표는 없다고 단언하시던데 입장권 판매는 잘 돼 가고 있나요. " 공짜표에 대한 기대심리도 있을 텐데 박람회를 준비하면서 세운 철칙 중 하나가 무료 입장권은 없다는 것입니다. 지난 2월 말부터 이마트, 광주은행, 기업은행 등에서 입장권을 오프라인으로 판매중인데 3월말 현재 300만장 중 12%인 36만장이 판매됐어요. 예약문화가 잘 안돼 있어 아직은 저조한 편인데 4월에는 훨씬 많은 판매가 이뤄질 것으로 봐요." -예매홍보가 부족한 것 아닙니까. 예매에 따른 인센티브도 있나요."당일 현장에서 입장권을 구입하거나 예매한 입장권을 발급받으면 창구 혼잡 등으로 시간이 많이 소요될 수 있어요. 때문에 사전에 입장권을 예매하고 입장권도 미리 배송 받는 게 편리합니다. 배송료는 모두 조직위가 부담해요. 사전 예매하면 할인도 받고 입장권도 안전하게 받을 수 있는 잇점이 있지요." -전북지역에서도 관광특수를 기대하고 있습니다만."전북은 수도권 관람객들이 완주순천 고속도로를 통해 오는 길목이기 때문에 이를 최대한 활용하면 충분한 관광효과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최근 박람회 수요조사에 따르면 1080만 관람객 중 460만명이 수도권 지역 관람객으로 예상됐습니다. 이 관람객들이 여수엑스포와 함께 전북지역을 관광할 수 있도록 연계 관광상품을 개발하고 다양한 이벤트와 혜택을 제공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북이 연계 관광효과를 얻기 위해선 어떤 전략이 필요할까요."예를 들어 전북에서 여수엑스포장으로 오는 임시 직행버스를 운행하고, 음식점이나 관광지에서 엑스포 입장권을 예매한 고객에게 할인해 주는 것도 한 방법일 것 같습니다. 특히 서울전주여수로 이어지는 관광코스를 통해 한국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경험하고 내륙부터 해양까지 다양한 측면을 즐길 수 있도록 상품화하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세밀한 준비와 홍보가 필요합니다." -군산 윙쉽중공업과 (주)오션익스프레스가 위그선을 개발하고 취항을 추진중입니다. 개최기간중 여수제주간 취항이 가능할까요."개발자인 (주)오션익스프레스가 6월 중 취항을 목표로 추진중입니다. 다인승으로는 세계 최초인데 위그선은 바다를 나는 유력한 초고속 해상 교통수단입니다. 시험운항이 성공하면 제주 애월항에서 여수엑스포장까지 매일 2회 운항하게 됩니다. 바다를 주제로 하는 여수엑스포에 처음 도입되면 기념비적인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엑스포 개최 이후 시설 활용 방안은 세워져 있나요."사후 활용도 성공적인 박람회의 기본요건입니다. 엑스포장은 기본적으로 해양 레저스포츠 용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종합 리조트가 될 것입니다. 바다에는 각국의 최신 요트를 전시함으로써 실제 구매자들이 시승할 수 있도록 하고, 육상에는 옥외전시장과 쇼핑몰을 운영하게 돼요. 계획 단계부터 전시관 등 하드웨어보다 문화예술행사, 엑스포 디지털갤러리, 전시물 등의 콘텐츠를 남기는 방향으로 설계했습니다. 활용 가능한 필수 시설과 용도가 확보된 시설만 영구 건물로 건축하고 이외의 시설은 임시 건물로 조성하고 있어요." -여수엑스포의 기대 효과는 어떻게 전망하고 있습니까."국가적으로 보면 엑스포를 통해 지역균형발전과 해양과학 선진국 도약이라는 의미가 있어요. 경제적으로는 생산유발 12조2천억, 부가가치 5조7천억, 고용창출 8만명의 기대효과가 예상됩니다. 또 국가브랜드 향상 효과도 엄청나고 대한민국의 위상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계기도 될 것입니다."-인프라가 구축되고 마무리 점검도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 같습니다. 성공 개최를 위한 지금부터의 과제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세련되고 세심한 마무리입니다. 1000만 관람객한테 선 보일 박람회이기 때문에 시설에서부터 전시, 문화공연까지 꼼꼼하게 마무리돼야 해요. 무엇보다 관람객이 불편하지 않도록 철저하게 준비할 계획입니다. 시범운영과 예행연습을 통해 관람객들에게 어떤 서비스가 필요한지 적극적으로 찾아내 실천하려고 합니다. 감동은 거창한 전시나 공연보다 작은 서비스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엑스포 폐막식에서 UN(국제연합) 사무총장을 비롯한 세계 각국 정상과 해양 전문가들이 모여 '여수선언'을 채택할 예정인데 그 내용은 무엇이 될 것 같습니까."여수선언은 서문과 본문 9항으로 이뤄지는데 서문에서는 인류의 주된 소득원이자 인류 공동유산인 해양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본문에는 해양을 보존하고 현명하게 이용하기 위한 실천 조항이 들어갑니다. 여수선언을 통해 여수엑스포에 참가한 106개 국가가 해양역량 구축과 교육, 국제사회 협력을 다시 한번 다짐하게 됩니다." -당부하실 말씀이 있다면."여수엑스포에 많은 관심을 가져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CNN은 2012년에 꼭 가보아야 할 곳 1위로 여수엑스포를 꼽았습니다. 다양한 세계 각국의 문화예술 공연과 이벤트, 전시관마다 신기하고 놀랍고 재미있는 볼거리가 넘칩니다. 그리고 모두 바다를 주제로 하고 있어요. 꼭 여수엑스포에 오셔서 전시와 문화공연, 아름다운 남해안 여름 바다의 정취를 만끽하셨으면 합니다. 평생 잊히지 않는 아름다운 추억이 될 것입니다." 여수엑스포는 '살아있는 바다 숨쉬는 연안'이란 주제로 5월 12일부터 8월 12일까지 93일간 개최된다. 여수시 신항 지구 174만㎡와 전시구역 25만㎡가 개최 장소다. 1993년 대전세계박람회 이후 두 번째로 치러지는, 국제박람회기구(BIE) 인정 박람회이다. 지난 2007년 11월 26일 프랑스 파리 총회에서 한국(여수)과 모로코(탕헤르), 폴란드(브로츠와프) 등 3개 국가가 유치경쟁을 별였고, 2차 투표에서 77표를 받은 한국의 여수가 63표를 받은 모로코의 탕헤르를 제치고 2012년 세계박람회 개최지로 결정됐다.160년 세계 박람회 역사상 처음으로 '환경 지침'을 제정해 계획-건설-운영-사후활용까지 친환경 가치를 실현하고 있다. 정부와 여수엑스포조직위는 지난 5년간 주제관과 국제관, 한국관, 해양생물관, 국제기구관, 스카이타워, 빅오 등 대회 개최에 필요한 주요 시설들을 준비해 왔다. 엑스포 개최를 통해 기후변화 등 전 지구적 환경문제의 대안을 해양에서 모색하고 국제사회의 공존과 협력을 다짐하게 된다. 바다를 착취의 대상이 아닌 관리 보존의 대상으로 인식, 지속가능한 이용을 추구한다는 게 취지다.

  • 기획
  • 이경재
  • 2012.03.27 23:02

박청수 이사장은…세계 55개국 소외이웃 돌보는 '한국의 마더 테레사'

박청수 청수나눔실천회 이사장은 1937년 10월 남원 이백면에서 태어났다.1956년 전북고녀(현 전주여고)를 졸업한 뒤 어머니의 영향으로 원불교로 출가했으며 원광대 원불교학과와 동국대 대학원 불교철학과를 졸업했다. 31세에 원불교 사직교당 교무가 되어 10년간 시무했으며 김제 원평교당서 2년 우이동수도원서 2년간 일했다. 그 뒤 1981년 서울 강남교당을 건립해 지난 2007년 퇴임때 까지 26년간 교무로 봉직했다.박 이사장은 평생 나눔의 삶을 실천해오고 있다.지금까지 세계 55개국에서 무지·빈곤 퇴치와 의료 사업을 펼쳐왔고 그가 방문한 나라는 53개국에 달한다. 모금 후원한 금액만도 무려 150억 여원에 이른다. 박 이사장의 지원으로 오지중의 오지인 인도 히말라야 설산 라다크에 마하보디 기숙학교와 카루나 자비병원, 국제명상센터가 설립됐다. 캄보디아 지뢰제거사업을 17년간 지원했으며 2003년에는 바탐방 무료 구제병원을 개원해 13만여 명이 의료 혜택을 받고 있다. 미얀마·캄보디아에서는 270개 마을에 공동 우물을 팠으며, 아프리카 15개국에 의약품과 우물 195개 시설 비용을 지원했다.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 돕기에도 나서 이주정착민들에게 70세대 분량의 주택구입비와 의류 등을 지원했으며 북한에도 식량과 의류·비료·의약품을 지원했다. 이 외에도 콩고 화산 폭발,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 지진, 남미 태풍 등 세계 각지의 재해 현장에도 구호의 손길을 아끼지 않았다. 박 이사장은 교육에도 앞장서왔다. 1998년 중국 조선족 장애아를 위해 훈춘특수교육학교 설립을 후원했으며 2002년 국내 첫 대안 중학교인 성지송학중학교를 전남 영광에 설립했다. 이어 2003년 경기도 용인에 수도권 첫 대안 중학교인 헌산중학교를 설립하고 2006년 경기도 안성에 북한 이탈 청소년을 위한 특성화 학교인 한겨레중·고등학교를 설립하는 등 지금까지 국내외에 9개 학교를 세웠다. 이 같은 공적으로 캄보디아 왕실로부터 사하메트레이 훈장을 받았으며 인도 헌법의 아버지인 암베드 카르 국제상을 올 3월말 수상한다. 국내에선 자랑스런 신한국인 대통령 표창, 용신봉사상, 사회공익부문 효령상, 평화여성상, 대한적십자사 포장 박애장 금장, 국민훈장 목련장, 호암상 사회봉사상 등을 두루 수상했다. 지난 2010년에는 노벨평화상 후보 최종 10인에 포함되기도 했다.저서로는 '기다렸던 사람들처럼' '마음으로 만난 사람들' '나를 사로잡은 지구촌 사람들' '하늘 사람' '마음눈이 밝아야 인생을 잘 살 수 있다' 등이 6권이 있다. 현재는 청수나눔실천회 이사장과 농어촌청소년육성재단 이사장을 맡고있다.

  • 기획
  • 권순택
  • 2012.03.20 23:02

박청수 청수나눔재단 이사장 "나누는 삶에는 은퇴가 없죠 내 몸 완전 연소될 때까지 도움 필요한 곳 찾아갈 것"

남원 출신으로 한국의 마더 테레사로 불리는 박청수 청수나눔재단 이사장(78). 세계 55개국의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찾아 평생 나눔의 손길을 펼치면서 세계인의 어머니가 된 박 이사장을 익산 원불교 중앙총부에서 만났다. 지난 2007년 26년간 봉직해온 원불교 강남교당 교무직을 은퇴한 뒤 경기도 용인에 작은 거처를 정하고 여전히 나눔의 삶에 분주한 나날을 보내면서도 익산까지 내려오는 여유(?)를 내셨다. 국내외 각계 인사 97명이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 지난 2010년 최종 10인 후보에 오를 정도로 해외에서 더 알려져 있다. 소녀처럼 수줍으면서도 해맑은 미소로 반갑게 맞아주었다.-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교무직을 은퇴한 후에 경기도 용인에 있는 '삶의 이야기가 있는 집'에 있어요. 평생 봉사의 삶을 살면서 생긴 이야기들을 담은 소박한 곳이죠. 1층과 2층은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고 3층에 법당과 서재와 방 한 칸을 마련해 쓰고 있습니다. 나누는 삶에는 은퇴가 없습니다. 몸이 완전 연소될 때까지 도움이 필요한 곳이 있으면 어디든 가려고 합니다."-출가는 어떤 계기로 하셨는지요. 또 원불교 정녀된 동기는."어머님의 영향이 절대적이었죠. 어머님은 늘 그러셨어요. 너는 시집가지 말고 큰 살림을 하라, 더 넓은 세상에 나아가 일을 하라, 더 많은 사람을 도우라고. 여자가 아무리 똑똑하고 부지런해도 한 가정으로 시집가면 한평생 몇 식구를 위해 사는 거지만 원불교 교무님이 되면 넓은 세계를 한 집안 삼고 많은 사람들을 위해 일할 수 있다고 하시면서. 그리고 네가 교무만 된다면 이 어미는 너를 끝까지 가르치겠다 면서 저에게 꿈을 심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전북고녀(전주여고 전신)를 졸업하고 바로 출가했죠. 어머니의 뜻대로 우리 두 자매 모두 정녀가 되었어요.(동생은 박덕수 교무)"-지난해 말 어머니에 관한 책인 '어머니가 가르쳐 준 길'을 출간하셨죠."어머니는 스물일곱에 남편과 사별하고 그 어려운 시기에 홀로 두 딸 공부를 시키셨어요. 바느질과 음식 솜씨가 뛰어났던 어머니는 교무가 될 딸에게도 음식 만드는 법 등을 가르치셨죠. 호의호식하며 호강하려고 교무가 되었느냐, 고생을 해봐야 그만큼 보람도 크다며 격려했습니다. 그래서 종교인으로서의 나의 삶을 열어준 어머니에 대한 감사와 그 뜻을 따라 살았던 지난 날들을 정리했죠. 어린 시절 어머니에 대한 추억과 어머니의 헌신과 사랑, 강남교당에서의 교화활동, 세계를 돌며 봉사한 여정, 마음으로 만나왔던 각계각층 인사들과의 인연 등을 책이 담았습니다."-교무는 언제 되셨는지요."대학 졸업후 교화부 서기부터 시작했죠. 교무는 31살 때 사직교당을 맡으면서 됐어요. 당시에는 지도자들이 많지 않아서 비교적 이른 나이에 교무가 됐던 것 같아요. 10년간 봉직한 뒤 김제 원평교당에서 2년, 서울 우의동수도원에서 2년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1981년 강남교당을 개척하면서 26년간 퇴임 때까지 있었죠. -강남교당을 세울 때 삼성 홍라희씨가 도왔다는 얘기도 있던데요."홍라희 여사와는 1980년 '불의회' 모임을 통해 알게 되었죠. 홍 여사 어머니도 독실한 원불교 신자였는데 당시에 교당 부지를 마련해주었습니다. 이후에도 가난한 나라 사람들에 옷 등을 지원할 때 많은 후원과 도움을 주었습니다. 지난해 미국 뉴욕에 세운 원불교 원다마르센터도 홍라희 여사와 홍석현 회장이 후원해서 이뤄진 것이었죠.-그동안 여러 권의 책을 펴내 내셨고 수필문학상도 받으셨죠."사실 학창시절 글 재주는 좀 없었어요. 하지만 정녀로서, 또 교역자로서의 삶을 살다보니 모든 수도자의 목표이자 내 인생의 목표인 '하늘사람'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구체적인 사례를 남겨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졌죠. 그래서제 삶의 궤적을 글로 남기게 됐습니다. 첫 세계 기행인 '기다렸던 사람들처럼'을 시작으로 '마음으로 만난 사람들' '나를 사로잡은 지구촌 사람들' '하늘사람' '마음눈이 밝아야 인생을 잘 살 수 있다' 그리고 '어머니가 가르쳐 준 길' 등 모두 6권을 펴냈습니다. 글을 쓰다보니까 1996년 현대수필문학상도 받게 되었죠."-해외에선 '빅 마더'로 불리우시며 국내에서보다 더 유명하신데 나눔의 삶을 시작한 계기는 언제입니까."1987년 인도로 40일간 순례 여행을 갔을 때예요. 날람다대학의 아난다 스님의 안내를 통해 성지를 돌아보게 됐습니다. 당시 겨울철에 몹시 추운데 눈과 얼음 속에서 신발도 없이 홑이불을 덮고 생활하는 노숙인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그 뒤 히말라야 라다크의 상가세나 스님이 한국으로 찾아와서 아난다 스님의 부탁편지와 함께 다른 인쇄물도 함께 건넸는데 거기에 히말라야 설산 사람들의 딱한 처지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먹고 살기 어려운 점과 인근에 학교가 없어서 4000km나 떨어진 남인도로 보내어 공부시키고 있다는 내용 등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는 장학금이나 아니면 책걸상이라도 마련해 달라는 요청이었어요.그래서 설교 시간에 이 같은 얘기를 하니까 교도 중에 한분이 아들과외비 200만원을 쾌척하였고 십시일반 모금을 통해 5000달러를 상가세나 스님에게 쥐어주었죠. 이것이 해외 나눔의 시작이 됐습니다. 상가세나 스님 또 도움을 요청해와 동대문과 남대문 상가를 돌며 학용품과 필기구 등을 구입하고 1만 달러를 모아서 보내게 됐고 이 같은 지원이 계속되면서 1991년 6월 라다크 사부마을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마을 공터에 기초석을 놓아두고 상가세나 스님이 무슨 설계도 같은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학교를 지어달라는 요구였죠. 그래서 학교건립 지원을 결심하고 먼저 7만 달러를 보내고 나중에 4000만원을 모아서 보냈죠. 그렇게 해서 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마하보디 기숙학교가 세워졌습니다, -그 같은 인연으로 오지 중에 오지인 히말라야의 라다크에 마더박청수재단이 세워지고 학교와 병원 국제명상센터까지 설립됐군요."산간 오지라 병이 들면 치료받을 의료기관이 없었고 더욱이 병원이 없다보니 아이를 출산하다가 사망하는 사례가 부지기수였죠. 그래서 7억원을 들여 병원을 세우고 명상센터를 건립해 게스트룸을 만들어놓으니까 세계 곳곳에서 관광객들이 찾아오면서 지금은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바뀌었습니다."-캄보디아에서도 지뢰제거 후원을 비롯해서 물이 없는 마을에 우물을 파주고 무료 진료 병원을 세워 주는 등 많은 일을 하셨죠."1988년 한국에서 세계 MRA대회가 열렸었습니다. 그 때 참석했던 앵모리씨라는 분이 크메르루즈에 의해 200만명이 학살됐다며 울면서 얘기를 하더라구요. 딱한 사정 얘기를 듣고 매년 1만 달러정도를 모아 지원했죠. 그 분이 나중에 장관이 되었더라구요. 그 후 1994년 스위스에서 캄보디아 평화를 위한 원탁회의가 열려 참석했는데 웬 남자한테 전화가 왔어요. 나중에 알고보니 훈산총리 아들이자 국회부의장인 손 수베르씨였죠. 그 분 요청으로 17년간 지뢰제거 사업과 고아원 건립을 지원했고 2003년엔 구제병원을 세워 지금까지 13만여명이 무료진료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또 76개 지역에 우물을 파주고 지뢰로 팔다리는 잃은 사람들에게 의족 의수 1595개를 지원했습니다.-그 같은 공로로 캄보디아 국가훈장을 받으셨고 앞서 언급한 인도에서도 올 초에 좋은 소식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요. "내세울 것도 없는데 과분하게 지난 2000년 캄보디아 시아누크 국왕으로부터 사하메트레이 훈장 받았습니다. 인도에선 1월말에 인도 헌법의 아버지인 암베드 카르의 탄생을 기념해 제정한 2012년 암베드 카르 국제시상식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전갈을 받았죠. 수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번 주에 인도로 출국합니다."-북한동포 돕기에도 앞장 서섰는데 어떻게 지원했는가요."1994년 평양교구장으로 있을 때 우리민족서로돕기 공동대표를 맡았죠. 중국 훈춘에 조선족 장애학교를 세워주었을 때 먼 발치에서 북한 쪽을 보았는데 사람들이 너무 헐벗은 거예요. 그래서 쌀 18가마를 구입해서 건네 주고 1995년에 1000만원과 옷 컨테이너 두 대 분량을 보냈죠. 1998년에는 정부 허가를 받아 직접 방북해서 3000만원과 간장 옷감 폐결핵환자 의약품 등을 지원했고 이후에도 북한학생 절반이 사용할 교과서용지와 감자 옥수수 생리대 20만개 등을 전달하는 등 모두 7억여원 어치와 옷 9개 컨테이너를 지원했습니다."-그 외에도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를 비롯 지진이나 화산 전쟁 피해지역에 긴급 구호지원활동에도 앞장서섰는데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성 라자로마을 후원은 종파가 다른데 어떻게 해서 31년간이나 하셨는지"원불교 대변인으로 활동할 때 한번은 서양인 수녀를 만나 손을 잡았는데 꽁꽁 얼어붙은 손으로 환자들을 보살피는 거예요. 남의 나라까지 와서 도와주고 있는데 우리는 뭐하나 이런 생각이 들어서 시작한게 31년째 발길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또 라자로마을과 천주교 등에 건축공사를 할 때면 성금을 지원했어요. 지금까지 한 1억 정도 후원했습니다. 종교간 불화로 십자군전쟁이 일어났고 종교간 갈등이 큰 충돌을 빚고 있는데 종교 지도자들이 서로 교류하면 이 같은 갈등과 대립도 사라질 것으로 봅니다."-지금은 고인이 된 법정 스님과 소설가 박완서 선생님, 또 김수환 추기경님 등 각계 각층의 명사들과도 깊은 교류가 있으셨던 것으로 아는데요."법정 스님은 1991년 불일암에서 처음 뵌 후 많은 후원과 격려를 해주셨죠. 2003년 대안학교인 헌산중학교 개교식엔 강원도에서 직접 차를 몰고 참석해주셨죠. 캄보디아 봉사를 나갈 때는 더위를 식히라고 눈 그림엽서를 보내주시기도하고. '내가 등너머로 항상 지켜보고 있어요'라며 격려와 함께 저의 세정을 알아주시던 분이었죠. 박완서 선생님은 내가 라자로마을 봉사활동할 때 보시고 담박에 눈에 들었다고 말씀하셨죠. 이 후 10년이상 교류했는데 호암상 수상금중 1000만원을 제게 주시며 좋은 일에 쓰라고 후원해주셨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1975년 라자로마을에서 처음 뵌 이후 자주 만났습니다. 은거중인 노기남 주교님을 뵙기위해 자주 오셨다는데 그 때 걷는 모습이 경건 그 자체였고 고뇌의 옷을 걸치고 계신 듯 했죠. 독재와 불의에 맞서 정의를 지키신 큰 지도자이자 어른이었죠."-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움켜 쥐려고만 하는데 교무님께선 비우고 내려놓고 베풀며 살아오셨는데 이 같은 삶의 동력은 무엇인가요."저는 수행자이기 때문에 사심이 없어요. 제가 쓰는 방은 두 사람이 들어가기가 어려워요. 제가 입고 있는 옷은 천주교 수사가 해주었는데 30년째 입고 있습니다. 무소유의 삶을 살고 있지요. 내 것을 챙기지 않는 공심(公心) 때문에 사람들을 기꺼이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보다 남을 위해 살 때 충족감이 더 큽니다. 내 인생 내 목숨이 완전 연소될 때까지 시간을 아껴서 이 같은 삶을 살려고 합니다."-마지막으로 고향인 전북 도민들에게 한마디 해주신다면"사람은 본능적으로 이기적이며 저마다 잘난 맛으로 살죠. 하지만 내 것 나 만 생각하고 살다보니 양극화 현상이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이제 가진 자들이 손을 벌리고 내놓아야 합니다. 또한 돈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지식도 나누고 마음도 나누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친절만 실천해도 우리 사회가 이렇게 삭막하지는 않을 거예요. 바로 마음의 전환이 중요하죠. 그런 마음이 모이면 태산도 움직이는 힘이 나온다는 것이 무아봉공(無我奉公)의 삶을 통해서 터득한 것입니다."

  • 기획
  • 권순택
  • 2012.03.20 23:02

강광배 부회장은…대한민국 썰매종목 개척자

강광배 FBIT 부회장은 1973년생, 전주 토박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지만 2대 독자인 그를 '끔찍이' 아는 어머니와 누나들의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잘' 성장했다. 어렸을 때부터 야구를 좋아해서 야구선수가 되고 싶었지만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이 '하나밖에 없는 아들 운동시키려하느냐'고 어머니께 고언하면서 꿈은 꺾였다. 그래도 운동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려 태권도 도장에는 열심히 다녔다. 고등학교(전주 한일고)때 결국 체육인의 길을 택해 유도부에 들어갔다. 전주대 체육학과 1학년 때 무주리조트에서 썰매종목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때 난생 처음 스키를 만났다. 그러나 왠지 스키는 '돈 있는 사람들이 타는 레저'로만 생각되어 의도적으로 외면했다. 지금 생각하면 자격지심 탓이었다. 스키 타러온 고등학교 친구를 만난 후 생각이 바뀌었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보다도 스키를 잘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상대로 그는 곧 스키에 미쳐버렸다. 각종 스키대회를 휩쓸었고, 최연소로 스키강사 자격증을 땄다. 그가 가르쳤던 '코흘리개' 무주 산골 아이들은 지금 스키점프 국가대표 선수가 되었다. 그 역시 스키 국가대표 코치가 되고 싶었지만 무릎 십자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을 얻었다. 큰 시련이었지만 좌절은 곧 희망이 되었다. 대한루지연맹의 루지국가대표선수 선발에 도전한 것이다. '누워 타는 썰매' 루지는 무릎을 쓸 수 없는 그에게 딱 좋은 종목이었다. 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에 루지 국가대표 선수로 첫 출전했다. 같은 해, 200달러를 쥐고 무작정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떠났다. 그즈음 대한루지연맹이 '세대교체' 한다며 국가대표에서 밀어냈다. 그의 나이 스물다섯 살이었다. 설상가상 부상까지 당했던 그는 생애 최악의 시련을 맞았지만 다시 일어섰다. 루지 대신 스켈레톤으로 종목을 바꿔 새로운 도전에 나선 것이다. 오스트리아 대학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오스트리아 국가대표 선수로 뛰었던 그는 어느 날 대회 순번을 기다리면서 전광판에 켜진 'AUT(오스트리아) 광배 강' 사인을 보았다. 문득 '내가 손기정도 아니고 지금 뭘 하고 있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에는 개인자격으로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국제대회에 출전했다. 대한봅슬레이·스켈레톤연맹이 국제연맹에 가입한 후에서야 그는 비로소 국가대표 자격으로 국제대회에 참가할 수 있었다.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에 스켈레톤 국가대표로 참가했고, 2010년 밴쿠버 올림픽에 봅슬레이로 출전했던 그는 세계에서 최초로 올림픽 썰매 전 종목에 출전한 선수가 됐다. 국내 썰매종목 스포츠를 개척한 그의 삶은 외로운 도전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 도전의 길은 그 자체로 대한민국 썰매종목의 역사가 됐다. 그 또한 "썰매를 통해 이름을 알렸고, 썰매를 통해 인생을 배웠다"고 말한다. 그는 2005년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국제대회에 취재온 연합통신 현윤경 를 만나 이듬해 결혼했다. 유학생활을 했던 인스부르크는 그 덕분에 그의 인생에서 가장 의미있는 도시가 됐다. 이번 학기부터 한국체육대 초빙교수로 임용되어 활동 영역이 더 넓어졌다.

  • 기획
  • 김은정
  • 2012.03.13 23:02

"올림픽 썰매 3개종목 출전 세계 유일한 기록 남겨 개인적으로 큰 영광이죠"

그는 세계적으로 이름을 널리 알린 스포츠 스타다. 그는 1998년 나가노를 시작으로 2010 밴쿠버까지 루지와 스켈레톤, 봅슬레이 등 썰매 전 종목으로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세계 최초이자 유일한 선수다. 그래서 동계스포츠계에서는 그를 썰매종목의 역사를 새롭게 써나가는 개척자 '광배 강'이라고 부른다. 스위스의 IOC박물관에는 그가 2006 토리노동계올림픽(스켈레톤)에 입고 출전했던 운동복과 모든 장비가 전시되어 있다. 터놓고 이야기 하자면 지난해 2018평창동계올림픽 유치 성공 뒤에도 그가 있었다. 2002년 평창 유치위원회에 합류해 스포츠디렉터로 활동해온 그는 10여 년 동안 각 국가의 동계올림픽 관계자들을 찾아다니며 스포츠외교력을 쌓았고, 마침내 그 진가를 지난해 유치 경쟁에서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이름은 정작 그의 고향인 전주와 전북에서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래서 궁금했다.  국제 봅슬레이스켈레톤연맹 강광배 부회장(40)을 만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자랑스러워도 한참 자랑스러워야할 그의 이름이 왜 고향에서는 내세워지지 않는 것인지. 아니나 다를까 인터뷰 시작부터 그는 고향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국제연맹 부회장 자격으로 미국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 참석하고 막 귀국한 그는 곧바로 국제경기장 승인을 위해 러시아 소치 방문 일정이 예정되어 있었다. 얼마나 분주한 일상을 보내는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 덕분에 인터뷰는 평창까지 가지 않고 서울에서 진행됐다. 지난 1일, 휴일임에도 기꺼이 시간을 내준 강 부회장은 그의 도전이 그랬듯이 열정적으로 지난 삶을 들려줬다. "시련이 없었다면 오늘의 이 자리도 없었다"고 말하는 그가 왜 대한민국 썰매종목의 역사인지 알게 됐다.-'강광배'란 이름을 인터넷으로 검색해보고 참 대단한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전주출신이어서 더 반갑더군요. "전주 토박이예요. 고향을 떠난 지 10여년 밖에 안되었는데 그사이 참 많은 일들이 있었네요."-오스트리아 유학중에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위원회 제의로 들어오신 것으로 압니다. 막 올림픽 유치가 시작되었을 때죠."1998년에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당시 루지 국가대표였는데 루지를 더 공부하고 싶어 택한 일이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무모한 도전이었죠. 독일어 한마디도 못하면서 박사과정을 공부하겠다고 나섰으니까요. 어렵게 어학과정 통과하고 박사과정에 들어갔는데 강원도에서 제안이 왔어요. 2002년이었죠. 스포츠매니지먼트에 관심이 많아서 현장에서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마음에 끌렸습니다."-그때라면 평창과 무주가 동계올림픽을 두고 국내 경쟁이 치열했을 때 아닌가요."다행히 제가 들어왔을 때는 이미 평창 쪽으로 결정되고 무주는 대신 태권도공원 건립이 결정된 상황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제가 평창으로 갈수 없었겠죠."-이런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은 오해 할 수도 있겠는데요. 고향의 경쟁지역을 위해 일한다구요."물론이죠. 이미 정부에서 평창으로 결정한 후였는데도 왜 전북 사람이 강원도 가서 일 하느냐고 비판이 쏟아졌어요. 당시 제 모교에 객원교수로 나갈 때인데 얼마나 그 강도가 심했냐면 총장님한테 그런 사람은 출강 시키지 않아야 된다는 민원까지 있을 정도였어요. 졸지에 '매향노'가 된 거예요. 올림픽이라는 것이 전국체전도 아니고 국가를 위한 일인데 억울하기도 하고 상처가 컸습니다." (가볍게 한 이 질문에 그는 가슴속에 담고 있던 이야기를 쏟아냈다)-전북으로서는 후보지 경쟁에서 지고 난후 상실감이 컸었는데, 그 때문에 강 부회장님께 더 큰 상처를 안긴 것 같습니다. "지난 일이니 이제 웃으며 이야기 할 수 있지만 그때는 원망스러움이 컸어요.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싶었거든요. 평창과 무주가 유치 경쟁을 할 때 오스트리아 유학중이라고는 해도 고향에서는 연락 한번 없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요."-지금은 2018평창올림픽 조직위 스포츠 디렉터로 활동하시지 않습니까. 이제 고향에서도 국가를 위한 노고에 모두 박수를 보낼 겁니다. "저도 고향을 위해서 할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나설 생각입니다. 사실 무주는 우리나라 동계스포츠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저만해도 무주리조트가 아니었으면 동계종목을 시작할 수 없었겠죠. 제 인생에서 무주는 그만큼 의미 있는 곳입니다."-썰매종목 이야기 좀 해주시죠. '강광배가 대한민국 썰매종목 역사'라고 하던데 그런 평가를 들으면 어떻습니까."사실이니까 그러려니 합니다."(웃음) 우리나라 썰매종목의 역사가 참 짧거든요. 그 역사를 처음 시작한 것이 저구요. 그래서 늘 외로웠지만 그 대가를 과분하게 받고 있는 것이죠." -썰매종목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낯선 종목입니다. 경기가 어떤 것들이 있나요."세 종목이 있습니다. 누워 타는 썰매인 루지, 그것과 반대로 엎드려 타는 스켈레톤, 그리고 봅슬레이예요." -선수층은 어떻습니까. 경기 시설도 그렇고 고가의 장비도 그렇고 활성화는 어렵지 않을까요. "대중화는 아직 먼 이야기고, 선수 선발도 쉽지 않아요. 그래서 태권도 유도하는 선수들을 썰매종목 선수로 전환하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봅슬레이 경우는 2003년에 강원도청에서 봅슬레이 실업팀을 만들었어요. 2003년 7월에 체코 프라하에서 동계 올림픽 유치에 실패하고 난 직후예요. 그때 실패 원인을 분석해보니 썰매종목 선수가 많지 않은 것도 큰 약점이더군요. 그래서 당시 김진선 강원도 지사께 요청했어요. 썰매팀 하나 만들어달라고. 그것이 봅슬레이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강원도에서 봅슬레이 팀을 안 만들었으면 동계올림픽에 나가지 못했을 겁니다."-그런 열악한 환경에서도 썰매 세 개 종목에 모두 출전하셨는데요. 세계에서 유일한 기록이라고 하던데요. "제가 국제연맹 부회장이 된 것도 그 덕분입니다. 세 개 종목 모두 올림픽 나간 것은 전 세계 저 하나 뿐이거든요. 그래서 썰매 하는 사람들에게는 제가 '새로운 역사'입니다. 부회장 될 때 모든 위원들이 썰매 3개 종목으로 출전한 유일한 선수라고 저를 대단히 높이 평가했습니다. 썰매종목에 그런 기록을 남겼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큰 영광 이예요. " -썰매종목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르신 것 같습니다. "썰매종목은 짧은 역사지만 스피드 스케이트나 쇼트트랙, 피겨 등 빙상종목에 이어 성적을 잘 내고 있는 것이 썰매예요. 대한민국에 제일 늦게 들어온 것이 썰매종목인데, 세계선수권대회나 올림픽에서 다른 종목에 비해 아주 성적이 아주 좋습니다. 이제 올림픽에서 메달 따는 것이 희망이죠."-기사에서 보니까, 봅슬레이스켈레톤 국제연맹 사무총장과 각별한 사이로 알려져 있던데요. 그리고 동계올림픽 평창 유치도 그분의 도움이 컸다는."제 정신적 멘토이면서 사적 관계로는 아버님으로 모십니다. 2018 평창 유치 작업 과정에서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사적 공적 국제관련 정보를 다 지원해주셨거든요. 40년 동안 국제연맹에서 일하면서 쌓아온 노하우를 저에게 그대로 전수해주신 셈입니다. 지금도 국제관계에서는 가장 큰 지원자입니다."-10년 동안 참 많은 일들을 긴박하게 해내셨군요. 스키 활강에서 내려오는 속도처럼."작년까지만 해도 저는 학생이었어요. 2008년 연세대에서 과정을 다시 시작해 박사학위를 마치고 그해에 미국에 갔어요. 2002년 동계올림픽 열렸던 솔트레이크시티였죠. 그곳 유타대학에 가서 스포츠외교를 공부했습니다. 대한체육회의 스포츠 인력 양성 프로그램 지원을 받아 1년, 그리고 자비로 2년을 더 공부했습니다."-스포츠매니지먼트나 스포츠외교 영역은 아직 낯선 분야 아닌가요."제가 개척하는 일은 좀 잘하지 않습니까.(웃음) 국제 관련 일을 하면서 우리 체육계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시작했는데 국제연맹 부회장을 맡고 보니까 더 절실해지더군요. 젊은 세대들이 스포츠 외교 분야에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넓혀주고 싶고, 국제심판도 많이 배출하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운동하는 사람들이 좀 더 다양한 영역으로 관심을 갖고 외국으로 나가 자격증도 따고 외교 쪽에서 일할 수 있는 경험을 쌓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금은 글로벌 스포츠 인재 양성이 중요합니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은 잘 준비 되고 있습니까. 평창 유치를 위해 정말 열심히 뛰셨는데요."두 번 실패하고 세 번째 성공했는데, 저는 그것을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많은 공부를 했거든요. 선수출신으로 평창올림픽 프리젠테이션을 진행하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는 스포츠 외교의 영역을 넓힐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2010년 국제연맹 부회장이 된 후로는 국제 교류 활동도 더 적극적이고 다른 차원에서 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성공적으로 올림픽을 치루기 위해 할 일이 더 많아졌습니다." -활동 이야기를 들으니 평창이 참 부럽습니다. 무주를 동계스포츠로 잘 활용할 방법은 없을까요. "무주는 태권도 공원이 들어서기도 하지만 무주리조트는 아직도 동계스포츠 종목으로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입니다. 우선 국제적인 스포츠이벤트를 잘 활용했으면 좋겠어요. 축제가 이어져야 도시가 발전합니다. 일단은 태권도 공원을 잘하면 좋을 것 같고요. 무주리조트 시설도 잘 활용했으면 좋겠어요. 전주 빙상경기장도 연계할 수 있지 않나요. 대부분 메가급 국제대회만 생각하는데 사실 동계종목의 세계선수권대회가 많습니다. 스키점프 올림픽 같은 것도 유치하면 아주 좋겠죠. 그런 종목을 유치하면 정부 지원도 받을 수 있습니다. 시설 활용도 하고. 그래서 재 생각으로는 종목별 대회 같은 것을 유치해서 동계스포츠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을 제안하고 싶습니다."-부회장님의 역할이 꼭 필요한 것 같습니다. "고향을 위한 일인데 필요하다면 적극적으로 나서야죠. 사실 무주리조트는 동계스포츠 분야에 아주 큰 기여를 했습니다. 스키 대중화는 물론이고, 우리나라 컬링도 무주리조트에서 시작되었어요. 스키점프도 그렇고. 동계 유니버시아드도 유치했지 않습니까. 무주리조트에는 에어리얼 시설도 있어요. 그런 경기장을 활용하면 얼마나 좋아요. 동계스포츠 경기 중 에어리얼 시설 있는 유일한 곳이 무주예요. 프리스타일 스키 중에 체조처럼 공중에서 묘기부리고 떨어지는 시설이죠. 그런 대회를 유치하면 국제연맹에서도 다 지원합니다."인터뷰 말미 그는 전북이 할 수 있는 많은 일들을 쏟아냈다. 한때나마 그를 '매향노'로 몰아붙였던 고향 사람들에 대한 서운함도 다 잊은 듯 했다. 그의 제안에 귀담아 들을 이야기가 많았다.

  • 기획
  • 김은정
  • 2012.03.13 23:02

송월주 큰 스님 "세간을 떠나 佛法 찾는 건 토끼의 뿔을 구하는 것과 같다"

송월주(宋月珠·77) 스님이 회주로 있는 영화사(永華寺)는 서울 구의동 아차산 아래 자리 잡고 있다. 혹한이 물러가고 봄빛이 내리쬐는 가운데, 평일인데도 절을 지나 산으로 향하는 등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대웅전에 들러 부처님께 절을 올리고 스님을 뵈었다. 스님을 찾은 이유는 조계종 총무원장을 두번이나 역임한 불교계의 원로여서만은 아니었다. 이제 세수 77살로 왕성하던 사회활동을 정리할 연치(年齒)인데도 어려운 사람을 돕는 등 자비행(慈悲行)을 실천하는 에너지가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했다. 더불어 한국 불교계의 산 증인으로서, 불교정화운동이며 실천과정, 깨달음의 사회화 등에 대해서도 듣고 싶었다. - 안녕하십니까. 굉장히 바쁘신 듯한데 최근 근황을 들려주시죠."반갑습니다. 요즘 역점을 두고 있는 일은 '지구촌 공생회' 활동입니다. 일본국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삶의 터를 제공하는 나눔의 집'그리고 사회적 기업과 일자리 창출사업을 하는 '함께 일하는 재단(예전의 실업극복국민재단)'일도 계속하고 있고요. 10일에는 공생회 관계로 아프리카 케냐에 다녀 올 예정입니다. 1년에 세번 정도 현지에 나갑니다."- 김제 금산사에는 자주 다녀오시는지요?"금산사는 나의 고향과 같은 곳입니다. 초파일과 설날 추석에는 꼭 다녀옵니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두번 가서 3-7일 정도 머물다 옵니다."- 제가 스님의 일생을 편의상 3단계로 구분해 봤습니다. 출가 전(出家 前)(1935-1956), 수행 및 종단정화와 개혁(1956-1988), 사회활동(1998-현재)단계 입니다. 먼저 사회활동을 하게 된 계기부터 여쭤보겠습니다."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입니다. 불교가 부처님의 법을 전하고 올바른 지혜를 갖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수행해서 확신을 얻고 불교 교리를 연구해서 논리적 체계를 얻었다면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는데 그칠 게 아니라 중생들에게 진리를 전하고 고통을 덜어줘야 합니다. 원효스님은 귀일심원 요익중생(歸一心源 饒益衆生·본래의 청정한 마음으로 돌아가 널리 중생에게 이익을 준다)이라고 했습니다. 또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위로는 지혜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한다)"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 불교는 그 동안 귀일심원과 상구보리에 치우쳐 요익중생과 하화중생을 소홀히 했습니다."- 최근에는 지구촌 공생회 활동에 역점을 두고 계시는데."지구촌 공생회는 국제개발구호 비정부기구(NGO)입니다. 민족의 울타리를 벗어나 지구촌 차원의 나눔 운동입니다. 우리나라는 이제 도움을 받는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로 성장했지만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 국가의 상황은 지금도 처참합니다. 6·25 전쟁 뒤 한끼 먹기도 힘들었던 과거 우리의 굶주림이 그곳에 그대로 있습니다. 글로벌 시대에 국가와 민족을 넘어 돕는 것도 우리의 의무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지구촌 공생회는 천지여아동근(天地與我同根·세상이 나와 더불어 한 뿌리) 만물여아일체(萬物與我一體·모든 존재는 나와 더불어 하나)라는 가르침의 실천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활동상황을 소개해 주시죠."캄보디아 등 8개 국에 진출해 식수개발과 교육지원, 지역개발을 돕고 있습니다. 식수가 부족한 캄보디아 몽골 등 4개국에서는 생명의 우물'1658곳을 만들었습니다. 내년까지 2300개를 완성할 계획입니다. 이들 나라는 오염이 심한 웅덩이 물을 식수로 사용해 많은 아이들이 피부병과 장티푸스 등 수인성 질환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또 교육분야는 7개 국에 유치원 초·중학교 등 28개의 교육시설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캄보디아 도로 건설을 비롯해 몽고와 케냐에서 농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필요한 재원은 어떻게 마련합니까?"개인회원도 있고 스님모임, 기업모금, 지역단체 등에서 후원해 줍니다. 후원회원 7000여 명이 공생회 활동을 지원해 줍니다."-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도 봉사활동을 펴는 것을 봤습니다. 특히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님과 개신교 강원용 목사님과는 단짝인 것 같던데요."북한동포를 돕기 위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실업극복국민운동본부 활동, 지역감정 해소, 공명선거실천운동 등을 이 분들과 함께 했습니다. 두 분다 나이가 나보다 한참 위였지만 같이 해야 상승작용이 있어서 자꾸 뭉치게 된 것 같습니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등을 하면서 북한에 자주 다녀온 걸로 아는데요?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대북지원을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불교계 교류와 인도적 지원을 위해 북한에 10여 차례 다녀왔습니다. 30여 단체가 모인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을 통해 북한에 약 2000억 원 상당(매칭펀드 포함)의 물품을 도와줬을 겁니다."- 북한의 불교는 어떻든가요?"북한에는 65개의 전통사찰이 보존돼 있고 스님이 300여 명이 있다고 합니다. 신도는 약 1만 명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북한스님들은 우리처럼 삭발염의(削髮染衣·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음)를 하지 않습니다. 또 주체사상이 곧 부처님 사상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제 종단개혁 단계로 넘어가겠습니다. 스님은 1980년 17대 총무원장에 취임하셨는데 그 해 신군부에 의한 10·27 법난(法難)으로 6개월만에 물러났습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개운사에서 아침 공양이 막 끝날 무렵, 보안사 직원이 찾아왔습니다. 나를 지프차에 태워 처음에는 총무원장실로 갔다가, 다시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데려갔습니다. 가사장삼을 벗기고 푸른색 미결수복을 입혔습니다. 그곳에서 23일간 조사를 받았습니다. 구속된 상태에서 강압에 의해서 총무원장 직을 사퇴했습니다." - 그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요?"법난이 있기 전에 총무원을 담당하는 보안사 직원이 '구국 영웅 전두환 장군을 대통령으로 추대합니다'는 성명서에 서명을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당시는 각계에서 그런 지지성명이 쏟아질 때입니다. 나는 '정교(政敎)분리 원칙을 지켜야 한다'면서 거절했습니다. 그 뒤 두차례 더 요구가 있었습니다. 또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을 때 종로경찰서장이 못가게 하는 것을 뿌리치고 갔습니다. 성금을 모아 광주에 가서 희생자를 위한 법회를 열고 병원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 9월경 이철희·장영자씨 부부가 여의도에서 (전두환 장군을 위한) 호국기도회를 했으면 했는데 그것도 거절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뒤 법난이 일어났습니다."- 그 후 자의반 타의반으로 3년간 해외 순례포교에 나섰는데요."1년 동안은 억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미움이 엷어질 무렵 지명스님의 초청으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미국과 캐나다, 유럽에서 순례포교를 하고 인도와 동남아시아, 일본의 불교계를 둘러봤습니다."- 그 때 느끼신 게 많았습니까?"서구문명의 모습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지나친 물신주의가 문제이긴 하지만 무질서 속에서도 분명한 룰이 있었습니다. 우리처럼 작은 나라에서 아웅다웅 싸울 일이 아니라 먼 안목을 갖고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기간은 내 자신의 내면은 물론이고 해외문명과 불교를 살피면서 새롭게 눈을 뜨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 불교는 전통적으로 참선 위주의 수행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데 그것도 중요하지만 대중의 고통을 멀리해 왔다는 자각도 들었습니다. 소중한 재충전의 시간이었죠."- 귀국 후 다시 28대 총무원장에 뽑히셨는데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은데요?"14년만에 복귀한 것입니다. 법난으로 한 차례 좌절되었지만 나는 이미 종단개혁을 위한 청사진을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수행할 자질이 없는 이들이 제대로 된 교육과 수행도 하지 않은 채 가사장삼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승가고시제를 통해 일정 자격을 갖춘 스님에게만 법계를 주도록 했습니다. 그 때 환속해서 승적만 있는 3000명이 넘는 승려를 제적시켰습니다. 또한 총무원과 교육원 포교원을 전문화시키고, 총무원장과 종회 의원의 주요직책 겸직금지, 승가교육체계 정비 등을 했습니다. 총무원장이 본사와 말사 주지를 임명하던 것을 본사 주지는 소속 스님들의 산중총회에서 추천하도록 하고 말사 주지는 본사주지가 총무원으로 품신하여 발령했습니다. 교구본사 자치제를 실시했습니다. 그리고 사회복지재단과 승가대학교를 설립하고 나눔의 집을 설립했습니다."- 스님은 종정중심제 보다 총무원장 중심제를 선호하시는데…"종정은 종단의 법통을 계승하는 권위의 상징입니다. 종정 중심제의 폐해는 종단사에서 충분히 드러났습니다. 만약 종정이 종단행정에 나서면 법률소송까지 종정 이름으로 하고 잘잘못의 대상이 되는 등 권위의 손상이 불가피합니다. 종단은 총무원장이 책임지고 이끌어야 합니다."- 이제 출가 전 단계에 대해 여쭙겠습니다. 출가하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6·25 전쟁은 나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당시 우리 마을에는 130호 800여 명이 살았고 면민은 8000명이었는데 전쟁이 나면서 서로 이념 갈등으로 총부리를 겨누는 것을 봤습니다. 또 전쟁 중 가산이 몰수당하고 포격으로 화염이 치솟는 등 흉흉한 분위기를 접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전쟁이 끝나던 1953년 말 나는 국회의원 선거에 낙선한 셋째형의 서울집에 있었는데 우연히 조계사에 들렀다가 친구를 만났습니다. 오랫만에 만난 그 친구는 놀랍게도 스님이 돼 있었습니다. 김혜정스님이 그 이인데 1954년 초 한 달 정도 쉴 요량으로 스님이 수행하던 법주사로 갔습니다. 거기서 새로운 세상을 만났습니다. 출가하겠다고 발심(發心)을 하게 된 것입니다."- 스승인 금오스님과의 일화를 들려주시죠."은사님은 하도 엄한데다 화엄사 주지를 지내 '지리산 호랑이'로 불렸습니다. 출가 초기 은사님이 화엄사 주지로 있을 때 내가 교무 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마주치게 되었는데 허리를 숙여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 때 은사는 '숙여라, 깊이 숙여라, 더 숙여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내가 어리둥절해 하자 스님은 대뜸 '네 놈 전생에 아만(我慢·스스로 높은 척하는 교만)'이 탱천해 있어. 그걸 버려야 돼"하셨습니다. 남에게 자신을 낮추는 하심(下心)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때는 불만스러웠는데, 살면서 그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전북의 최대 현안인 새만금사업이 한때 환경문제로 기로에 섰던 적이 있는데 스님은 어떻게 보십니까?"새만금 개발을 둘러싼 갈등이 한창일 무렵 환경운동에 전념하던 수경스님과 나의 상좌인 도법스님, 그리고 문규현 신부가 찾아왔습니다. 개발을 막아야 하니 도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정보도 없고 전문가가 아니니 좀더 알아보겠다고 했습니다. 그 뒤 자료를 모으고 찬반측 주장을 경청했습니다. 그 결과 새로 조성할 담수호의 수질을 깨끗이 유지하는 등 친환경적으로 개발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국민 합의를 거쳐 상당부분 진행된 사업을 무조건 중단하라는 것은 수술하다 말고 상처를 꿰매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 프로젝트가 국가의 미래를 위한 국책사업인데다 전북 도민 대다수가 원하고 있다는 점도 고려했습니다. 그렇지만 정부가 만경강과 동진강 수질 개선에 신경을 쓰는 것은 수경스님 등 불교계와 환경단체의 공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곧 4월 총선이 있고 12월에 대선이 있습니다. 국가를 이끌어갈 지도자의 덕목이 무엇이라고 보십니까?"우선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소통을 통해 함께 안고 갈 수 있는 인물이 필요합니다. 또 정책 대안을 제시하고 남북문제도 대화를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국제적으로 호혜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그런 정견과 정책을 가진 사람, 말에 일관성이 있는 인물이어야 합니다."- 끝으로 불자(佛子)와 도민들에게 좋은 말씀을…."자비행을 해야 합니다. 더불어 함께 사는 이웃의 고통을 덜어주고 베풀고 나눌 줄 알아야 합니다. 자비가 부처님입니다."

  • 기획
  • 조상진
  • 2012.03.06 23:02

송월주 스님은…한국불교 정화운동·종단개혁에 큰 발자취

"불법은 세간 속에 있다. 세간 속을 떠나서는 깨달을 수 없다. 세간을 떠나서 보리(지혜)를 찾으면 흡사 토끼의 뿔을 구하는 것과 같다.(佛法在世間 不離世間覺 離世覓菩提 恰如求兎角)"송월주 스님이 즐겨쓰는 법어다. 이 법어처럼 스님은 불법을 깊은 산중에서 찾은 게 아니고 원효나 진묵처럼 중생들 사이에서 찾았다. 수행과 더불어 종단개혁과 사회봉사활동에 스님 삶의 대부분을 바쳤다. 두 차례에 걸쳐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한 스님은 한국 현대불교의 산 증인이다. 비구와 대처승이 대립했던 불교정화운동을 시작으로 때로는 종단개혁의 선봉에 서기도 했고, 때로는 분쟁의 한 축이 되기도 했다. 또 스님은 다른 종교와도 회통(會通)했고 폭넓은 사회활동을 통해 불법을 실천하는데 앞장섰다. 은사인 금오스님을 비롯 탄허 청담 성철 숭산 광덕, 그리고 서옹 서암 월하 혜암 등 역대 종정, 고산 법장 정대 지관 등 총무원장들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 스님의 활동은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등 역대 대통령을 비롯 김종필과 고건 전 총리,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 시인 고은, 소설가 조정래 등과도 폭넓게 교유했다.스님은 1935년 정읍시 산외면 정양리에서 5남4녀 중 8번째로 태어났다. 속명은 현섭. 부친(송영조)은 자수성가한 대농으로 사서삼경과 한학에 밝았다. 연희전문을 나온 둘째형과 셋째형은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등 집안에 정치적 분위기가 감돌았다. 산외초등학교를 거쳐 서울 중동중에 진학했으며, 중학시절 연극과 영화에 흠뻑 빠졌다. 3학년때 셋째형이 선거에 나서자, 돕기 위해 고향에 내려왔다 6.25 전쟁이 터졌다. 전쟁이 끝나고 집에서 가까운 정읍농고로 진학했다. 스님은 1954년 법주사에서 금오선사를 은사로 모시고 사미계를, 1956년 화엄사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스님은 1961년 금산사 주지가 되었다. 본사 주지로는 최연소로,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기록이다. 1986년에 또 다시 주지를 맡아 18년 동안 금산사 주지를 역임했다. 이후 1971년 개운사, 1980년 조계사, 1990년 영화사 주지를 맡았다. 1992년 실상사 백장선원 회주에 올랐고 1994년 부터 금산사와 영화사 회주, 2010년 실상사 조실을 맡고 있다. 그 동안 중앙종회 의장, 17대 총무원장(1980년)과 28대 총무원장(1994-1998)을 역임했다.1980년 총무원장 재직시에는 신군부에 의한 10.27 법난(法難)으로 강제로 물러났으며 1982년부터 3년간 자의반 타의반으로 미국와 유럽, 아시아 등에서 순례포교를 벌여야 했다. 1998년 이후에는 이념과 종교 국경을 넘나들며 깨달음의 사회 실천에 앞장서고 있다. 경실련 공동대표와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대표 및 이사장, 실업극복국민운동본부 공동위원장 등을 10년 동안 맡았다. 현재 지구촌 공생회 이사장, 나눔의 집 이사장, 함께 일하는 재단 이사장, 대통령자문 국민원로회의 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종교간 화합에 힘써 한국종교지도자 협의회 대표의장 겸 이사장을 역임했다. 고향발전에도 관심을 기울여 산외초등학교에 책 1080권과 서가를 기증했으며 지난 해 수해 때는 영화사를 통해 고향에 1000만 원의 성금을 기탁했다.스님의 상좌는 도영 도법 원행 도원 성우 등과 손자상좌까지 60여 명에 이른다.그 동안 국민훈장 모란장과 무궁화장, 조계종 포교대상, 제1회 민세상, 제16회 만해상(평화부문), 제6회 자랑스런 전북인상 등을 수상했다.스님은 똑딱선처럼 자기 수행에만 그치지 않고 한국불교라는 거대한 선단을 이끌며 한국 현대불교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 기획
  • 조상진
  • 2012.03.06 23:02

'아산의학상' 수상한 고 규 영 KAIST 특훈교수 "신개념 암 치료제 연구개발… 새로운 전기 마련"

전북 출신의 고규영 한국과학기술원(KAIST) 의과학대학원 교수(54)가 지난 9일 제5회 아산의학상을 수상했다. 신개념 암 치료제 개발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공로를 인정받아 수상자로 선정됐다. 혈관 생성 기전에 대한 꾸준한 연구로 세계적인 연구성과를 이뤄내고 있다. 30년 동안 기초의학에 매진해 온 세계적인 생명과학자다. 고 교수는 작년에 KAIST 특훈 교수로 임명됐다. 세계적 수준의 연구업적과 교육성과를 이루고, 그 전문분야를 앞서 이끌어 가는 교수 중에서 선정하는 최고의 명예직이다. 지난 22일 대전에 있는 KAIST를 찾았다. 인터뷰를 사양했던 그였지만 연구실을 찾은 취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연구하고 실험이나 하는 사람 인터뷰는 무슨 인터뷰냐, 상 받는 게 무슨 대단한 일이냐며 겸손해 했다. 인터뷰 중에도 연구성과에 대해서는 연구팀과 동료 교수들 도움이 컸다고 강조했다.-'아산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전혀 생각치 못했는데 큰 상이 주어졌어요. 연구팀이 노력한 덕분이지요."아산사회복지재단(이사장 정몽준)은 매년 훌륭한 연구성과를 낸 의학자를 한명씩 선정, 시상하고 있다. 내년부터는 임상과 기초의학 분야로 나눠 두 명에게 주고 상금도 1인당 3억원으로 증액한다. 국내 의학상 중 가장 많은 액수다. 젊은 의학자를 격려하기 위한 '젊은 의학자상'도 신설할 계획이다. -상금이 2억원이나 되던데 어떤 계기로 이렇게 큰 상을 받은 겁니까."신개념 암 치료제 개발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 것 같습니다."-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입니까."암 성장과 전이에 필수적인 게 혈관신생인데 이를 차단하는 게 항암제입니다. 의학계에서는 혈관내피 성장인자(VEGF)가 혈관 신생의 주요 물질이라 여겨왔고 이 인자를 억제하는 항암제 아바스틴(Avastin)을 개발해 암환자에게 투여해 왔지만 효과는 크지 않았어요. 이 아바스틴 투입시 안지오포이에틴-2(Ang2)라는 또 다른 성장인자가 급격히 증가해 혈관신생을 촉진한다는 사실을 새롭게 발견한 것이지요. VEGF-A와 Ang2를 동시에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이중혈관 성장차단제'(DAAP)을 개발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새로운 암 치료제 개발의 전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은 것이지요."-'이중혈관 성장 차단제' 개발은 세계적인 연구성과로 평가받고 있는데 어떤 원리입니까."현재 암 치료제로 사용되고 있는 VEGF 차단제는 치료효과가 적고 내성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 원인을 추적하기 위해 암이 생성된 실험동물에 VEGF를 투여하니 암 혈관에 Ang2가 과다 발현되어 내성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이를 근거로 VEGF-A와 Ang2를 동시에 차단하는 DAAP이라는 물질을 새롭게 디자인한 겁니다."-원천기술을 개발한 것이군요. 기존의 차단제보다 얼만 만큼 효과가 있었나요. "원천기술이지요. 한 스텝씩 전진하는 거라고 봐요. 실험한 결과 기존의 단독 차단제보다 암 성장은 2.1배, 전이는 6.5배 가량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것으로 밝혀졌어요."이 연구결과는 암 분야 세계 최고 권위의 학술지인 '캔서 셀(Cancer cell)'의 표지논문으로 게재됐다. 고 교수는 그동안 Cell, Science, Nature, Blood, Circulation 등 SCI(과학기술논문 인용색인)에 18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연구논문이 '캔서 셀'에 게재됐을 때 세계적인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열악한 여건에서 굉장한 일을 했다고 칭찬이 많았어요. 국가가 도와주고 운이 따라 실행한 것이지요."-결국 암 억제는 혈관신생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차단하느냐에 있는 것 같습니다."그렇지요. 암은 혈관 있는 곳에 생기고 혈관이 없으면 크지 못해요. 영양분과 산소가 있기 때문에 암이 자라는 겁니다. 각막망막은 혈관이 없기 때문에 암이 생기지 않아요. 당뇨도 오래되면 혈관이 생기게 되는데 어떻게 하면 혈관신생이 안되도록 할 수 있을까 하는 것 등이 연구과제입니다. 세계적인 전문가들이 이 부문을 갖고 어떻게 차단하고 조절할 것인지 연구하고 있습니다."-다른 생명과학자들이 고 교수님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더 발전된 성과물을 내놓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연구성과는 발표 즉시 세계적인 전문가들이 공유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분야는 기술이동이 빠르고 명멸이 심한 IT산업과는 달라요." -연구성과물에 대한 소유권이나 지적재산권에 대한 보호장치는 어떻게 하나요."연구비와 기자재 등을 정부가 지원해 주기 때문에 KAIST에 소유권이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 기술 사용을 요구해 올 때 개발자는 중재역할을 하는 정도입니다. 지적재산권은 발표 전에 특허출원 등 절차를 밟아 놓아요."-우리나라 연구비 지원은 어느 수준입니까."미국은 엄청날 정도로 지원을 많이 해주어요. 유럽은 복지에 투자를 많이 하고. 우리는 연구로 먹고 사는 나라 아닙니까. 우리나라는 절대액으로 보면 많지 않지만 GNP 대비 R&D 지원규모는 높은 수준에 들어갑니다. "-2010년엔 백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조혈모 세포가 뱃살 같은 지방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세계 최초로 발견했는데 이에 대한 설명도 좀 해주시죠. "한 분야를 줄곧 연구하다 보면 창의적인 생각이 키워지고 상상력도 발전하게 되는데 우리 연구팀은 지방과 골수가 구조상 유사하다는 점에 착안해서 지방에도 조혈모 세포가 존재할 것으로 추정했는데 실제 발견하는데 성공했습니다."백혈병은 골수의 조혈모세포(혈액줄기세포)가 병에 걸려 발생한다. 지금까지는 타인의 골수 이식으로 정상적인 조혈모 세포를 만들어 백혈병을 치료했다. 그러나 고 교수팀의 연구로 백혈병 환자 본인의 지방에서 조혈모세포를 추출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 연구내용은 국제학술지 '블러드(Blood)' 표지논문으로 발표됐다. -지난 2006년엔 전북의대 박성광 교수팀과 공동으로 신장병 치료 가능성을 입증한 논문을 세계 최고의 신장 관련 학술지인 미국 신장학회지에 발표했습니다. 어떤 이론입니까."신장의 모세혈관 질환이 신장질환 진행의 주요 원인일 수 있다는 것에 착안, 혈관형성촉진제인 콤프앤지원(COMP-Ang1)을 신장병 생쥐에 투여했더니 모세혈관을 대부분 재생시켰어요. 신장병 치료에 확기적인 약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증명한 것이지요." -백혈병 신장병 치료약을 기대하는 환자들이 많은 데요."논문이 발표되니까 곧 신약이 나오는 것처럼 인식되는 바람에 전화를 많이 받았어요. 전북지역에서도 전화가 왔으니까. 미안한 마음이 있어요. 세계적인 생명과학자들이 연구에 몰두하고 있지만 시기는 예측할 수 없어요. 상용화에 대한 희망의 끈 만큼은 놓지 말아야 하겠지요. 자포자기하면 안될 테니까."-오랫동안 암에 대한 연구를 해오셨는데 암은 왜 발병하는 겁니까. "암은 생명체 때문에 생겨요. 암이 없으면 생명체도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담배를 피우지 않아도 폐암에 걸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담배를 많이 피워도 폐암에 걸리지 않는 사람이 있어요. 유전자 때문이지요. 암 걸릴 유전자는 피해야 합니다."-감기약처럼 암 치료약도 개발될까요."사람마다 암 걸리는 원인이 다릅니다. 맞춤형으로 개발될 걸로 봐요. 이를테면 폐암이 담배 때문에 발병한 것이라면 그에 맞는 치료약이 개발되는 식이지요."-암 치료를 위한 신약은 언제쯤이나 가능할까요."민감한 사안이라 대답하기가 조심스럽습니다. 정부와 기업 투자가 관건이고 고급인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괜찮은 약 하나 개발해서 상용화하기까지 1조원 정도 소요됩니다. 우리 여건으로는 어려운 일이지요. 이런 기반을 잘 닦아놓아야 선진국으로 갑니다."-혈관 성장의 비밀을 밝히고 신개념의 암 치료제 개발에 몰두해 왔습니다. 연구와 논문쓰기 등 매우 활발한 활동을 하시는데 이런 왕성한 에너지는 어디에서 나오는 겁니까."아침마다 새로운 생명현상이 보여요. 하고 싶어 했던 일이고 이런 일을 할 때가 제일 좋아요. 우리 몸과 직접 관련된 일이고 난치병 치료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활동이라서 일하는 것 자체가 즐겁습니다."-스트레스는 받지 않나요."스트레스 많이 받지요. 우리 연구팀이 20여명 되는데 연구비도 확보해야 하고 과업도 진척시켜야 하고."-의대에 진학했는데 의사가 되지 않고 기초의학에 전념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스승의 말씀 한마디가 방향을 바꿨어요. 의대 본과 1학년때 조경우 교수(현 원광대 한의대 명예교수)께서 '의사가 되어 환자 한명 한명을 치료하는 것도 좋겠지만 기초의학자가 되어 좋은 신약을 개발해 한꺼번에 수십, 수백명의 병을 고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이 저를 기초의학의 길로 이끌었어요." -기초의학 연구에 30여년을 보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분야인데 후회한 일은 없었나요."기초의학 연구는 끝을 알수 없는 시간과의 싸움이며 약해지는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 싸움의 끝에는 새로운 생명현상의 발견과 신약 개발이라는 기쁨과 환희가 있어요.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갈 겁니다." -연구에 몰두하다 보면 짬이 없을 텐데 여가는 어떻게 보내시나요."그림그리기를 좋아합니다. 생명혈관현상을 관찰하고 그림도 그려요. 가끔 산책도 하고 노래도 좋아합니다."-작년에 KAIST 최고의 명예직인 '특훈 교수(Dist inguished Professor)'로 임명되셨는데 어떤 혜택들이 주어집니까."특훈교수는 KAIST 전체 교수 중 8명 밖에 안돼요. 정년 뒤에도 70세까지 비전임직으로 일할 수 있고 월급을 조금 더 줍니다. 스카웃이 심하니까 붙잡아 두는 기능도 할 테고."-우리나라에서도 노벨의학상을 기대해 볼 수 있을까요."우리 세대는 노벨 의학상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적겠지만 제자들을 잘 교육하고 훈련시킨다면 실현될 수도 있겠지요. 제자들이 노벨상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많도록 하는 것이 저한테 주어진 의무이자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도록 열심히 가르쳐야지요."-연구성과를 보면 전북대의 자랑이자 자랑스런 전북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포부가 있다면."예방과 치료효과는 탁월하고 반면 부작용은 적은 새로운 암치료제를 개발하는 것이 꿈입니다. 그래서 인류에 공헌한다면 더이상 바랄 게 없겠지요."

  • 기획
  • 이경재
  • 2012.02.28 23:02

고규영 교수는 - 기초의학 연구에 매진… 세계적 생명과학자로 명성

꿈 많은 고등학교시절, 문학가와 미술가가 되고 싶었지만 폐렴과 결핵에 걸려 학업을 중단하고 1년간 투병생활을 해야 했다. 이 때문에 전주고 53회로 입학해서 54회로 졸업했다. 그 때 도립병원에서 불쌍한 환자들을 보고 의사가 되어 그들을 도와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리고 전북대 의대에 들어갔다. 1979년 어느 봄날, 강의실에서 "기초의학자가 되어 신약을 개발하면 수십만명의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는 스승의 말 한마디에 의사의 꿈을 접고 기초의학에 매달렸다. 기초의학 연구에 매진해 온 지 30여년. 지금은 세계적인 생명과학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고규영 교수는 암 혈관치료제 분야의 독보적 인물이다. 전북대 의대(77학번. 석사박사)를 나온 뒤 열악한 연구환경을 극복하면서 혈관신생 연구에 몰두해 왔다. 미 코넬대 의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이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고, 미 인디애나대 심장연구소 선임연구원, 전북대 의대 교수, 포항공대 생명과학과 부교수에 이어 2003년부터 KAIST 생명과학과의과학대학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혈관 생성을 촉진하는 단백질인 '콤프 앤지원(COMP-Ang1)'의 메커니즘을 세계 최초로 밝혀냈다. 지난해 암 성장과 전이에 필수적인 혈관신생을 가장 효과적으로 막는 이중혈관신생 차단 단백질(Double Anti-Angiogenic Protein = DAAP)을 발명했다. 아산의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것도 이 공로가 인정됐다. 지난 2002년에는 대한의학회가 선정한 '노벨상 근접 한국 20인 과학자'로 뽑히기도 했다. 수상 경력도 화려하다. 독창적인 연구성과를 국제적으로 인정 받은 결과다. 1994년 미국심장학회의 심장연구우수상, 2002년 대한의학협회의 화이자의학연구상, 20인 우수의학연구상을 받았다. 지난해 5월에는 교육과학기술부가 주최하고 서울경제신문과 한국연구재단이 주관한 '이달의 과학기술자상'을 수상했다. 2007년에는 전북대가 개교 60주년을 맞아 선정한 학술연구 분야 공로상을 수상했다. 2010년엔 '올해의 KAIST인 상'을 받았다.고 교수는 연구결과물을 주요 저널을 통해 발표하고, 국제 학회에서 해마다 초청연사 및 리더로 활약하고 있다. 미국혈액학회가 발간하는 혈액학 분야 최고의 저널인 '블러드(Blood)'지 편집위원에 선임돼 논문심사와 편집방향 설정 등에 참여하고 있다. 아들 5형제중 막내다. 고영호 전북대 교수(평생교육원장)가 셋째 형이다. 부인 백승희 여사(52 )와 1녀 1남을 두었다. 딸(30)은 회사원이고 아들 봉인군(27)은 아버지의 전공을 잇고 있다. 하버드대를 나와 프린스턴대 대학원에 재학중이다. 7세 때 첼로를 시작, 한국예술종합학교 예비학교에서 정명화 교수를 사사했다. 12세 때 97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차이코프스키 국제청소년콩쿠르에서 첼로 부문 1위에 입상했다. 공부 때문에 연주에 몰두할 수는 없지만 지금도 가끔씩 공연을 한다. 봉인군은 고 교수가 아산의학상을 수상했을 때 "아버지와 같이 손을 잡고 암과 줄기세포 연구를 하는 날이 무척 기대된다"며 훌륭한 과학자가 되겠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 기획
  • 이경재
  • 2012.02.28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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