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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전북대 교수 "기존 정당 '증오의 정치' 끝내야 올바른 대선문화 정착"

뜨겁다. 유례없이 이어지는 염천의 더위 탓만은 아니다. 하기야 올 여름 대한민국이 뜨거워져야할 이유는 여럿이다. 그 하나하나를 들추자면 어디에선가 숨죽이고 있던 분노와 증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아예 폭발해버릴지도 모른다. 적어도 작금의 대한민국 현실에서는 그렇다. 대선을 코앞에 둔 지금, 대한민국은 더위와 분노와 갈등이 뒤범벅이 되어 들끓고 있다. 우리가 처한 이 상황을 좀 더 냉철하게 바라볼 방법은 없을까. 그래서 만났다. 한국사회의 금기와 맞서 우리 사회의 문제와 이슈를 끊임없이 생산해온 지식인. 강준만 전북대교수(56)다. 돌아보면 1990년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의 정치 분야를 포함한 중요한 논쟁의 중심에는 언제나 그가 있었다. 날선 비판의식으로 한국사회의 금기와 정면대결해온 그의 무기는 글쓰기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의 글쓰기 결실은 이미 여러 차례 한국사회를 실험하고 변화시켜온 터다. 한동안 정치적 이슈를 외면하고 지내는 듯, 전공과도 다소 멀어 보이는 문화사와 역사에 집중한 '시리즈'로 '학문의 가로지르기'를 결행했던 그가 다시 일을 냈다. 이번에는 '대통령의 자격'을 논쟁의 중심에 올렸다. 대상은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다. 안 원장을 대통령 적임자로 지지 선언한 새 책 〈안철수의 힘〉은 예외 없이 논쟁의 중심에 섰다. 그도 그럴 것이 강 교수는 1995년에는 〈김대중 죽이기〉를, 2001년에는 〈노무현과 국민사기극〉을 냈었다. 모두 대선을 앞둔 절묘한 시점에서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대통령이 됐다. 정계 뿐 아니라 일반 독자들도 주목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당초 인터뷰는 이런 구체적인 국면에 대한 것이 아니었으나 굳이 피해갈 이유도, 피할 수도 없었다. 다행히 그는 거침없이 더 명쾌하게 한국정치를 분석하고 비평했다. 그 내용은 아쉽게도 다 담지 못했다. 인터뷰는 그의 연구실과 카페에서 세 시간 넘게 이어졌다. 질문과 답이 따로 없는 그의 화법은 열정이 넘쳤다. 덕분에 글쓰기 동력이 어디에서 나오는가도 알게 되었다.-바쁘시겠습니다. 매체들의 인터뷰 요청이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요."워낙 인터뷰를 달가워하지 않는 성격이어서 조절하고 있습니다. 할 이야기는 책에 다 있기도 하고요."-때맞추어서 안철수 원장의 대담집까지 나와 교수님 책도 잘 팔리겠던데요."언젠가는 나올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시점은 예상 못했어요. 책 판매는 비교도 안 됩니다. 덕분에 좀 잘 팔리면 좋겠는데..."(웃음)-〈안철수의 힘〉에 2012 대선의 시대정신을 '증오의 종언'이라고 규정했더군요. 안 원장을 선택한 이유도 그렇고요. "당초 생각했던 책 제목을 제대로 붙이면 〈안철수 이용법〉이예요. '안철수'를 사회가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지금 나온 대선 후보들이 말하는 것을 보세요. 한국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까. 이쪽이 되면 저쪽이 죽고, 저쪽이 되면 이쪽이 죽는 오로지 승자독식주의 체제예요. 이런 상태로 또다시 대선까지 가야한다는 것은 정말 암담하지요. 그럼 그것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 기존 정치로 해결하는 일은 불가능하죠. '안철수'를 이런 증오의 시대를 끝낼 수 있는 적임자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대통령 자격을 이야기하더군요. 물론 자격을 따져야죠. 그런데 그 전에 중요한 것이 빠져 있습니다. 이런 식의 대선문화로 가는 것이 올바른가에 대한 점검부터 해야 한다는 것이에요. 증오마케팅이 판을 치는 상황에서 그것을 내세우지 않는 안철수가 우리사회에 던진 메시지가 있습니다. 매우 의미 있는 것이지요. 지금 한국은 증오가 정치의 동력이 되는 정치 양극화 구도에 잡혀있거든요." -책을 내놓은 시점을 주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수님의 공개 지지선언을 정계에서나 일반 독자들도 매우 의미 있게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안철수 원장이 나올지 안 나올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한국이 잘되어야 한다면 지금이 그 때라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증오의 승자독식주의 모델로는 힘들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실제로 이 모델을 끝장내야만 풀릴 수 있는 과제들이 많아요."-이런 글을 써내면 여러가지 오해를 받기도 할텐데요. 실제 정권 바뀔 때마다 프러포즈를 많이 받지 않습니까. "없다고는 할 수 없죠. 그러나 그런 일은 제가 할 수 없는 일들이예요. 그런데도 그동안 써온 글들을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들은 과잉 정치적 시각으로 분석하죠. 정작 글을 쓰는 목적이 그런 과잉정치에 대한 비판인데도 그렇지요."-사실 정치적 줄서기같은 문화는 비단 한국사회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이죠. 그러나 우리가 정치의 속성까지 물고 들어가 비판한다면 답이 안나와요. 그것이 곧 근본주의적 비판인데, 기본적으로 정치는 적을 만드는 과정이고 기술이거든요. 그런데 한국의 경우는 특성이 있지요. 미국의 경우는 연방제 국가고 50개 정권이 주마다 별개이니 워싱턴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각 주에서 받는 영향이 미미하지만 우리는 서울에서 무슨 일이 나면 제주도 마라도까지도 흔들리는 환경이잖아요. 워낙 1극체제인데다 지방자치 한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모든 것을 중앙이 독식하고 있고 정치적으로 또 다시 엮여 있으니 다 흔들릴 수밖에 없어요. 게다가 한국특유의 인맥적 문화도 있지 않습니까." -교수님께서 몇 년 전 제자들과 함께 만든 인터넷 매체 '선샤인' 같은 경우, 기대가 컸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거의 명맥만 존재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선샤인은 학생들 취업과 관련해서 만든 것이었어요. 시장에서 서바이벌로 살아남는 모델을 만들어보자는 취지였지요. 그런데 수익모델을 내기에는 많은 한계가 있었죠. 수익모델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경제력의 문제만이 아니라 영향력도 못갖는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아쉽지만 시장에서 성공해 이 일로 먹고사는 젊은이들도 나오고 지역에 바람도 일으키는 모델을 만드는 일은 어렵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그래도 처음에 교수님의 이름만으로도 동력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혹시 개인적으로 전투적 글쓰기와 달리 노력을 덜하신것은 아닌가요. "저도 제 자신을 과대평가했었던 것 같아요. 결과를 보면 그런 오해를 받을 수도 있는데, 사실은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거든요. 도와달라는 편지도 수백 통 보냈었는데 답이 없었습니다. 냉정한 사회라는 것을 깨달았지요. 기업과 인맥이 있고, 기반이 있었으면 그리 어렵지 않았을 일이었을 겁니다."-지금은 좀 달라졌지 않을까요. 지역에 대한 의식도 높아지고. 실제로 지방대학 출신 중 지역에 남아 일하려는 인재들이 늘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보기에도 그런 변화는 분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런 젊은 세대들의 철학이 예전과 다르다는 것이에요. 그런데도 이상하게 지역사회가 지역의 젊은이들에게 암묵적으로 또는 노골적이고 강압적으로 강요하는 '탈 전북'에 대한 어떤 압박 같은 것은 여전한 것 같습니다. 아주 심각한 문제예요. 젊은이들이 지역에 남는 것을 패배자로 생각하는 그런 인식인데요. 지금 젊은 세대들은 패배의식으로만 지역에 남는 것이 아닙니다. 지역의 '블루오션'에 관심을 돌리는 경향이 짙죠."-의미 있는 변화군요. 그런데도 정작 지역에서 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지 못하고 외레 패배의식을 안겨주고 있다면 심각한데요. "물론 아직도 정치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서울로 가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이익이 되는 것에 심리적 증폭이 더해져 서울로의 쏠림 현상이 강화된다면 정말 웃기는 이야기잖아요. 그런 심리적 쏠림을 경계해야 합니다. 최근에 들은 이야기인데, 웬만한 직장에 취직해서 서울로 간 젊은이들 중 저축도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군요. 삶의 질도 너무 떨어지고요. 그런데도 여기 남아서 뭔가를 해보려는 젊은이들에게 자꾸 장래성을 이야기 하죠. 실질적인 것과 정서적으로 증폭된 것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그동안의 실명비판 글쓰기가 우리사회에 제시한 이슈가 적지 않았습니다. 늘 그 용기가 어디서 나왔을까 궁금하던데요. "저도 그것이 궁금하긴 합니다. 그래서 가끔 생각해보는데 두 가지 정도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우선은 제 유별난 성격일 겁니다. 저는 제 입장을 어떤 상황에서건 분명히 밝힙니다. 예를 들어 조직이나 단체의 선거 같은 것을 들 수 있겠군요. 저는 이번에 누구를 찍는다고 밝힙니다. 그렇다고해서 그 사람의 선거를 돕는 것은 아니죠. 다만 저쪽이 헷갈려하면 안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미안하긴 하지만, 그런 확실한 입장이 상대방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보통의 사람들은 어떤 반응인가요. "속으로는 어떨지 모르겠는데 헷갈리지 않게 해줘서 고맙다고 하죠. 사람이 이중성을 보일 때 화가 나는 것이지 자기 나름의 이유를 대면서 밝히는데는 오해가 없죠. 그런 유별난 성격 때문에 실명비판이 가능했을 것 같아요. 거기에 결정적인 것은 물리적 고립이 아닐까 싶어요.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예전에는 아예 사회적 관계성을 단절하고 살았지요. 지금 다른 사람이 그렇게 살면 저부터도 욕할 것 같아요. 실명비판으로 삼았던 사람과는 더구나 관계가 없었지요."-결국 교수님의 사회성과 실명비판이 직접 관련이 있었군요. 그렇다면 그런 글쓰기를 위해 스스로를 가두어 놓으신 것인가요. "의도적이진 않았어요. 다만 전북대에 왔던 초기에 끊임없이 서울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그때는 서울도 자주 다녔어요. 그런데 늘 언제 떠나느냐고 묻는 제자들한테 안가겠다고 약속한 뒤에는 지역에서 내가 할 일을 하게 되었고, 그것이 곧 글쓰기가 된 것이죠." -교수님도 서울로 가시겠다는 생각을 하셨었군요. 의외인데요."처음에는 했었는데 학생들이 발목을 잡았어요.(웃음) 그때는 학생들과 만나는 자리가 많았었는데 자리 끝에 꼭 하는 말이 언제 서울가냐는 것이었어요. 한두 번은 다른 이야기로 말을 돌렸는데 여러 번 반복되니까 고민이 되더군요. 결국 여기서 한번 해보자 결심했지요. 그렇게 마음먹으니까 자주 가던 서울도 갈 필요가 없게 되고, 안 나가기 시작하니까 하나의 패턴이 생기더군요. 그렇게 고립적인 여건이 되니까 실명비판도 자유롭게 되고." -그 결과가 사실 한국사회의 중요한 지점에서 이슈를 생산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교수님의 용기가 부럽습니다. "용기는 아닌 것 같아요. 저는 역할분담이란 말을 좋아하는데, 제 직업이 대학교수잖아요. 교수의 강점은 조직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이죠. 다른 사람들이 알고는 있으나 어떤 제약 때문에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면 교수들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게다가 결정적으로 제 장점이 전공학부가 다르다는 것이예요.(강 교수는 신문방송학과 교수지만 학부 전공은 경영학이다) 소위 학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웠죠. 학맥은 스스로의 자율규제 효과가 있거든요." -그동안 글쓰기를 보면 한국사회가 금기시하는 영역에 대한 도전도 그렇지만 전투적인 글쓰기가 갖는 힘이 컸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좀 달라진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있던데요. "나이 탓도 있는 것 같아요. 거기에 그럴만한 계기가 있었다면 민주당 분당 때입니다. 그때까지는 정말 전투적이었어요. 그런데 그 전투성을 내가 되돌려받아보니까 깨달은 것이 많았어요. 말로는 역지사지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쉽지 않아요. 그때 분당은 정말 안 되는 일이었거든요. 그런데 전라도 민의까지도 그쪽으로 다 쏠리더라고요. 이것이 뭘까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과도하게 전투적이었던 것도 저를 자극했습니다. 그때 전투성의 방향이 갖는 위험에 대해서 절감하게 되었죠. 그리고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정치를 향한 열광적인 힘이라는 것이 결국은 증오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사람들은 의로운 분노라고 하지만 그 분노라는 것이 계속하다보면 증오로 가는 것이거든요."-〈안철수 힘〉을 내놓고 대선 국면에 대해 계속 이야기할 것이라는 예상이 있습니다. "하긴 할 겁니다. 그러나 신문 칼럼은 안쓰려고합니다. 내 마음의 행복을 가지려고요. 좀 게으를 권리도 갖고 싶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모았다가 해도 되고. 그런데 지금 마음이 다른 곳에 꽂혀있어요. 문화 간 커뮤니케이션이죠. 이미 많은 자료를 수집했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작업을 학생들과 함께 하려고요. 생각만 해도 즐겁죠." -글쓰기는 교수님에게 어떤 의미인지 궁금합니다. "일종의 중독이죠. 일전에 글쓰기 중독자에 관한 책을 보니까 상당부분 나와 들어맞더군요. 그런 작업에 중독이 되다 보니 다른 놀이의 즐거움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죠. 글쓰기는 곧 즐거운 나의 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기획
  • 김은정
  • 2012.08.07 23:02

강준만 교수는

1956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다. 중학교까지 목포에서 다니다 서울로 이사했다. 숭실고를 졸업했으며 대학은 성균관대 경영학과를 들어갔다. 학과 선택은 당시 인기 있는 과를 고르다가 별 생각 없이 들어갔다. 한때 회계사가 되기 위해 공부도 했었지만 적성에 안 맞는다는 것을 알았다. 대학 졸업 후 MBC PD로 들어가 1년 남짓 근무했으나 곧 미국에 유학, 위스콘신대에서 신문방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9년 전북대 교수가 되어 전주에 정착했다. 곧 서울로 가야한다는 생각으로 부지런히 서울을 오갔으나 제자들과의 술자리 이야기로 발목을 잡혀(?) 지역에서 일을 해보기로 결정했다. 그것이 글쓰기인데, 이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한 이래 사회적 관계 대신에 혼자서 연구하고 글 쓰는 일을 일상으로 선택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스스로 '물리적 고립'을 택한 셈이다. 이 물리적 고립은 그를 한국사회의 금기 영역에 도전하는 글쓰기 투사로 만들었다. 90년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의 글쓰기는 한국사회에 뜨거운 이슈를 던졌고, 그 덕분에 많은 부분에서 토론과 비평의 문화가 성장했다. 90년대 초반, 실명비판을 전개한 일인매체 〈인물과 사상〉을 창간한 이래 〈김대중 죽이기〉 〈전라도 죽이기〉 〈서울대의 나라〉 〈대중문화의 겉과 속〉 〈강남좌파〉 〈특별한 나라 대한민국〉 〈강남, 낯선 대한민국의 자화상〉 〈입시전쟁잔혹사〉, 그리고 〈한국현대사 산책〉 〈한국근대사산책〉 〈미국사 산책〉와 문화를 미시사로 접근한 시리즈 등 200여권의 책을 냈다. 추종을 불허하는 방대한 저작양과 정직한 글쓰기로 '영향력있는 비판적 지식인'이란 평가를 받지만, 그는 '양적인 승부'를 늘'부끄럽다'고 토로한다. 인터넷이 확산되기 전에는 오로지 팩시밀리로만, 인터넷 시대가 된 이후에는 이메일로만 소통했으나 지난해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다녀오면서 휴대폰을 마련했다. 그러나 통화는 역시 원만치 않고 가장 좋은 소통 수단은 이메일이다. 근래 들어 생각도 생활방식도 변화가 있는데, 지금까지 혼자 하는 글쓰기에 오로지 몰두했던 생활반경을 사회적 소통에 열어두고 가끔씩 모임에 나가는 것도 그중의 하나다. 그러나 여전히 글쓰기에 전력투구하는 일상은 변함없어 지난 5월에는 한국사회의 멘토열풍을 분석한 〈멘토의 시대〉를, 7월에는 안철수 서울대교수를 대통령후보로 공개 지지선언하는 〈안철수의 힘〉을 냈다. 미국에서 1년 생활하면서 부딪쳤던 궁금증을 500개의 키워드로 정리한 〈교양영어사전〉을 조만간 발간할 계획이다. 대학생과 중학생 딸들의 교육에는 방임주의를 고수하고 있는데, 남들보다 잘할 수 있는 것과 즐길 수 있는 것을 찾으라고 권한다. 그동안 글쓰기를 위해 모아놓은 수많은 자료들과 수만 권의 책들을 앞으로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가 큰 과제지만 아직은 송천동 자택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공간에 보관하고 있고, 그 공간은 학교 연구실과 함께 그의 즐거운 글쓰기를 유지하게 하는 작업실이다. 2005년, 제4회 송건호 언론상을 받았다.

  • 기획
  • 김은정
  • 2012.08.07 23:02

김오성 조각가는…대한민국 미술대전 4회 입선 / 자랑스런 전북인상 등 수상

한국 인체 조각의 최고봉으로 불리는 조각가 김오성은 입지전적 인물이다. 중학교만 나온 그는 거의 스스로 조각공부를 했다. 변산중학교에 다닐 때 그의 재능을 알아 본 김형수 교감선생의 권유로 조각에 빠진 뒤 선생님이 건네 준 미술관련 책들을 탐독하면서 스스로 익히고 깨우쳤다. 학벌도 연줄도 없는 그가 대한민국 미술대전 입선과 특선에 이어 1984년 국전 초대작가에 오른 것은 오로지 실력과 성실, 끈기로 일궈낸 기적이었다. 그는 1945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났다. 부안으로 시집 온 어머니가 친정 집에서 첫 아이를 출산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부안농고와 군산에서 교사로 후학양성에 힘쓰다 농민교육운동에 헌신하셨다. 그 공로로 금탑산업훈장과 3·1문화상 근로장을 받았고, 당시 아버지를 도와 농사일을 하던 그는 부친과 함께 3·1문화상 예술상을 수상한 김경승 조각가를 만나면서 인생의 항로가 바뀌었다. 그가 열망해오던 조각을 다시 시작하게 됐고 예술계의 냉대와 차별속에서도 20여년간 각고의 노력을 통해 꿈을 현실로 일구었다. 그 이면에는 일면식도 없었지만 그의 실력을 인정하고 국전 초대작가로 적극 천거한 백문기 교수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서 그를 인생의 스승으로 모셨다. 1991년 고향으로 내려온 그는 선친이 일궜던 부안면 변산면 일대 1만5000㎡ 농장에 국내에선 처음으로 금구원야외조각미술관과 사설 천문대를 세웠다. 군 복무시절 미 8군 영내에서 첫 목조 작품전을 연 이후 올 10월에 6번째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으며 그동안 30여차례 초대전과 협회전도 참여했다. 대한민국 미술대전 4회 입선과 특선, 자랑스런 전북인 영광의 얼굴(예술상)과 부안 군민의 장(예술) 전라미술상 김용관과학상 등을 수상했다.가족으로는 부인 허선씨와 큐레이터로 활동중인 큰딸, 홍익대 조소과에 재학중인 아들, 이화여대 정외과와 원광대 경영학과에 다니는 두 딸이 있다.

  • 기획
  • 권순택
  • 2012.07.31 23:02

김오성 조각가 "한 눈 팔지 않고 한 길만 걷다보니 실력 인정해주더군요"

독학으로 석조(石彫)를 익히고 오직 실력으로 학벌과 차별의 장벽을 뛰어 넘은 조각가 김오성씨(68). 그의 천부적 재질을 눈여겨 본 중학교 교감 선생의 권유와 함께 건네 준 몇 권의 미술 책을 스스로 독파하면서 그의 조각 인생은 시작됐다. 그저 단순한 돌덩이들이 그의 손을 거치면 마치 살아 숨쉬는 듯한 사람의 형상으로 태어난다. 그렇게 50여년을 돌에 생명력을 불어 넣으면서 우리나라 인체 조각의 최고 경지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그의 가슴에는 아직도 다 분출하지 못한 화산이 용솟음치고 있다. 중졸 학력의 한계를 성실과 실력으로 극복하고 당당히 국전 초대작가에 올랐지만 미술계의 아웃사이더로서 질곡어린 삶에 대한 한(恨)이 아직도 응어리져 있다. 예술계의 냉대와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필생의 예술혼을 불태울 때를 기다리는 김오성 조각가를 그가 고향 부안에 국내 최초로 세운 금구원 야외조각미술관에서 만났다.-대도시에서도 보기 힘든 대규모 조각공원을 시골 동네에서 접하니 느낌이 새롭습니다. "이 시골까지 어떻게 알고 찾아오는 사람마다 조각공원을 보고 많이 놀랍니다. 시골에 이런 곳이 있다니 하면서 감탄하죠. 또 천문대도 같이 있고 해서 학생들도 많이 찾아오고 있습니다."-금구원이 우리나라 조각공원의 효시라고 들었는데 조각공원은 언제부터 조성했는가요."선친께서 농민교육운동을 하셨는데 이곳을 원래 농민학교로 조성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건강이 안 좋아지시고 돈도 없고 그래서 농장으로 관리하셨는데 제가 군 입대 전에 만든 작품 4점으로 비롯해서 틈틈이 제작한 작품을 하나 둘씩 가져다 놓다보니 어느새 조각공원이 되었습니다. 목포 유달산 조각공원이 국내 1호라고 요란을 떨었는데 1986년 여성동아 12월호에 금구원 조각공원이 국내 최초 조각공원이라고 6페이지에 걸쳐서 특집기사가 실렸었죠. 1987년과 1992년 대한뉴스에도 금구원 조각공원이 보도되었고요."-지금은 금구원 야외조각미술관으로 등록돼 있던데 언제 사립 미술관으로 등록했고 작품은 얼마나 됩니까."1980년대 말께 문공부 도서관박물관과 관계자가 미술관 등록을 자꾸 권유했었는데 그땐 그냥 흘려 들었지요. 그러나 2003년에 미술관(제277호)으로 정식 등록됐습니다. 현재 작품은 야외공원 90여점과 실내 전시관 40여점 등 모두 130여점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달빛의 숲' (여체 조각상)은 좌대를 뺀 작품 길이만 6m50cm로 아마 국내 조각품 가운데 가장 큰 작품일 것입니다." -특별히 아끼시는 작품이 있다면. "모든 작품이 다 똑같습니다. 자식들이 똑같듯이. 좀 제게 특별하다면 대한민국미술대전 첫 특선작인 '변산반도'가 있고, 그리고 1986년 첫 개인전을 가졌을 때 국내외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분수령' 등을 꼽을 수 있죠."-독학으로 조각을 공부하셨다고 들었는데 천부적으로 예술적 재능을 타고 나셨네요."글쎄요. 어려서 외갓집에 놀려갔다가 하얀 회벽에 그림낙서를 했데요. 그런데 외할머니께서 보시고 그림을 너무 잘 그렸다고 제가 컸을 때까지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 땐 전북도와 교육청 등 각종 사생대회에 나가 상을 받았었고. 그러다 변산중학교 2학년 때 방학숙제로 얼굴 흙조형물을 제출했는데 당시 김형수 교감선생님이 그걸 보시고는 제게 조각가가 되라고 권유했죠. 얼마 뒤 마령중 교장으로 승진하셨는데 미술관련 책들을 보내주셔서 이를 탐독하면서 조소와 목조각 화강석 조각 등에 몰두하게 됐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제가 국전 특선 때도 장문의 격려편지를 보내주셨는데 평생 잊을 수 없는 은사님이시죠."-서울로 올라가서 본격적인 조각 작품활동을 하셨는데 어떤 계기로 가게 됐습니까."농민교육운동을 하시던 선친께서 1963년에 금탑산업훈장을 받으신데 이어 다음해 31문화상 근로장을 받았어요. 그 때 수상자들 기념촬영 사진속에 예술상을 받은 김경승 조각가도 함께 있었죠. 그래서 김 선생님 주소로 미술학도의 꿈을 써서 보냈더니 올라오라고 승낙했습니다. 그 길로 서울로 올라가 공부도하고 작업도 했죠."-국전 입선과 특선은 언제 했습니까."군 제대후에 다시 김 선생님 작업실에서 일하면서 틈나는 대로 내 작품 작업을 했었습니다. 그러다 1972년 국전에 처음 출품했는데 입선했죠. 그 다음해에도 입선했고 1974년 23회 국전에 남자 좌상인 변산반도를 출품했는데 그 때 특선을 했습니다. 당시에 대학도 안 나온 사람이 특선을 했다하니까 수상자 선정을 놓고 논란이 많았다고 나중에서야 얘기를 들었습니다."-국전 특선 입상 때도 논란이 있었지만 국전 초대작가로 선정됐을 때는 미술계에 논란이 적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만."1983년 늦가을이었죠. 누가 초인종을 눌러 문을 열어 주었더니 훤칠한 키에 신사 한분이 들어오더니 '김 선생, 축하합니다. 이번에 초대작가가 되었습니다' 하는거예요. 처음엔 믿기지 않았는데 그 분이 이화여대 미술대 백문기 교수로 초대작가 심사위원이라는 사실을 알고서야 실감이 났죠. 그 순간 온 세상이 내 것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대학은 커녕 고등학교도 못가 보고, 더구나 서울대와 홍익대 양대 학맥이 미술계를 쥐락펴락하던 시절에 제가 초대작가가 됐으니. 그러니 대한민국 미술계가 발칵 뒤집혔죠. 소위 식자층에선 말도 많았고요. 무학자가 초대작가가 됐다고."-초대작가가 되는데 백 교수님 역할이 컸었군요."백 교수님은 제가 평생 잊을 수 없는 은인입니다. 나중에서야 국립현대미술관 관계자가 귀띔을 해줘서 알게 됐는데 심사위원들이 작품을 평가하면서 추천을 하는데 저를 추천하는 위원이 하나도 없었다는 거예요. 그러자 백 교수님이 벌떡 일어나 '이 사람이 빠지면 미술계가 편파적이다고 욕먹는다'면서 5~6분 동안 웅변조로 강력 추천하자 나머지 5명의 위원이 동의해줬다고 들었습니다."-초대작가가 된 뒤 가진 첫 개인전이 큰 성공을 거뒀다고 들었는데."사실 첫 개인전은 미 8군에 있을 때 목조 개인전을 가진 것이 처음이고요, 1986년 가을 서울 인사동에 있는 백악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가졌는데 미술계 뿐만 아니라 경제계 정치계 인사와 고향 분들이 많이 참석해서 성황리에 열렸습니다. 그 때 한국은행 총재님이 오셨다가 제 작품 '분수령'을 구입해서 한은 본점에 설치하자 미술계가 또 발칵 뒤집혔죠. 그러면서 신문과 방송 잡지 등 매스컴에서 저와 제 작품에 대한 보도가 잇따랐습니다. 요즘말로 떴죠. 전시작품의 80% 정도가 팔렸는데 당시에 꽤 많은 수입도 들어왔습니다." -분수령이 매스컴을 타면서 작품 주문이 쇄도했다면서요."분수령과 똑같이 만들어달라는 주문이 쏟아져 한국은행에 있는 것과 똑같은 것을 6점 제작했습니다. 일본 석재공업협회보에도 소개되자 일본 기업인이 주문해서 일본으로도 한 점이 건너 갔습니다."-조각공원을 둘러보니까 주로 여체를 많이 조각하셨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처음에는 변산반도를 비롯해서 남자상만 조각했더니 왜 남자만 조각하느냐고 묻데요. 아무래도 여체가 미적 요소가 많아 조각으로 다양한 표현하는데 용이하기 때문이 아닐까요."-광화문에 있는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상 등 많은 동상 제작에도 참여하셨는데 이승만 대통령 석상 제작 때는 해프닝도 있었다지요."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상은 주로 얼굴작업을 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상은 제가 거의 모든 작업을 했는데 초대작가에 선정된 것을 시기해서 다른 사람이 코 부문을 손댔다가 엉뚱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렸어요. 프란체스카 여사 등 가족들이 와 보기로 했는데 큰 일이 났죠. 제가 다시 서너시간 만에 제 모습으로 만들어놓자마자 유족들이 도착해서 보고 '너무 똑같다'면서 아주 흡족해했습니다." -철원 비무장 지대와 일본 지바현에 조각공원 건립을 추진한 적도 있었다고 들었는데."분수령 작품을 구입해 간 일본 기업인이 자신의 고향에 조각공원을 세우자고 제안하면서 착수금으로 상당액을 내놓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흔쾌히 응했고 그 때 받은 돈으로 지금 살고 있는 집과 작업장을 지었죠. 그런데 일본의 버블 경제가 꺼지면서 경기침체로 이어져 결국 흐지부지되고 말았습니다. 철원 조각공원 조성은 재력가이자 옹기민속박물관을 세운 정모 원장이 제안해서 집 한 채값 받기로하고 응했는데 정 원장이 일본 문화세미나에 참석했다가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일장춘몽이 되고 말았습니다."-올 가을에 여섯 번째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으시죠."10월에 하려고 준비중입니다. 특별히 20년에 걸쳐서 완성한 '달과 여인'작품을 선보일 예정입니다."-지금은 석조분야에 입지전적 인물로 알려졌지만 중학교만 나와서 학벌과 학맥으로 얽혀진 미술계에서 이름을 올리기가 쉽지 않았을텐데요."오직 성실과 끈기, 그리고 실력으로 버텨왔죠. 아틀리에서 거의 무보수로 일하다보니 생활비는 고사하고 집 식구 병원비조차도 댈 수 없어서 돌공장에서 막노동도 해보고. 돌공장에서도 자기들 일감 떨어진다고 따돌리고. 하지만 한 눈 팔지 않고 오직 한 길만 걸어오니 주위에서 실력을 인정해주더군요. 운보 김기창 선생님이나 하반영 선생님도 초등학교도 제대로 안 나오셨잖아요. 한 달 전쯤 군산에 계신 하 선생님을 찾아뵈었더니 '열심히 하라'고 격려해주시더군요." -집 살 돈으로 망원경을 사고 사설 천문대까지 세웠는데 좀 엉뚱하지 않았나요."어렸을 때부터 별과 천문에 대해 막연한 동경이 있었어요. 그래서 작업중에 짬을 내서 천문동호회 활동도 했죠. 집 장만 하려고 상당한 돈을 모았는데 안식구를 설득해서 미국 아스트로 피식스(Astro-Physics)사의 178㎜ 스타파이어 굴절망원경과 삼겹렌즈 206 EDF 스타파이어 굴절망원경을 구입했습니다. 당시엔 최고 성능 망원경으로 서울에서 집 한채 살만한 돈이 들었죠. 그래서 이 곳에 국내 개인 천문대로는 처음으로 금구원천문대를 세웠죠."-학생들에게 천문대를 무료 개방한 공로로 과학상도 받으셨다던데."1995년에 김용신 과학상을 받았는데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을 보급했던 안철수 원장과 함께 장려상을 수상했습니다."-앞으로 계획은."현재 국내 최대작인 7.5m짜리 작품을 작업하고 있습니다만 경제적 여건이 안돼 하고 싶은데로 다 할 수 없어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지금은 조각도구도 발달하고 전기로 쉽게 작업하니까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동안에 못다한 것들을 한 번에 만회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기획
  • 권순택
  • 2012.07.31 23:02

임옥상 미술가는…

임옥상은 1950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공부 잘하고 그림도 잘 그렸던 그는 특히 미술에 재능이 빼어나 동네에서 그림 잘 그리는 아이로 소문났다. 초등학교 3학년, 장래희망을 써넣는 칸에 망설임없이 '화가'라고 썼다. 중학교 2학년 때 가족이 서울로 이사를 했다. 고등학교는 용산고를 다녔는데, 그때 미술반에서 만난 스승이 조각가 강태성씨다. 작업에 몰두하는 모습이 구도자 같았던 스승을 보며 작가의 자세가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서울대 미대와 대학원을 다닐 때에는 연극반에서 활동하기는 했지만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러다 서울대 법대 앞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데모현장을 만나며 예술의 시대적 역할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시대와의 조우는 대학원을 졸업한 직후 이루어졌다. 그에게 미술은 곧 시대와 소통하는 통로였으며 그가 담아내는 미술적 언어는 모두가 시대적 발언의 상징이 되었다. 70년대 말부터 80년대의 뜨거운 시기를 그는 광주와 전주에서 보냈다. 79년 광주교육대 교수로 2년 남짓 근무했고, 81년부터 91년까지 10여년을 전주대 교수로 재직한 덕분이었다. 그는 80년대 거리의 민주화 함성을 온전히 체득할 수 있었던 전주에서의 10여년 삶을 생애에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기억한다. 92년엔 대학교수직을 스스로 버리고 전업 작가가 되었다. 91년 호암갤러리에서 가진 개인전이 자극이 됐다. 당시 문제작가로 분류되어 있던 임옥상은 한국화단의 질서(?)로 보자면 주류가 아닌 비주류 작가였지만 이 전시를 계기로 한국미술계의 주목받는 작가로 떠올랐다. 외국 갤러리의 초대가 이어지면서 그는 국제적인 활동을 새로운 목표로 세웠지만 94년 IMF가 터지면서 무산됐다. 다시 새로운 궤도를 만들어 전시장의 벽을 위한 그림에 몰두하는 대신 거리로 나갔다. 자신이 하고자 했던 예술에 근본적인 회의를 갖고 시작한 고민과 갈등이 준 답이었다. 한국 미술계의 이슈를 불러일으켰던 '당신도 예술가'는 그래서 만들어졌다. 인사동과 여의도에서 4년 동안 진행됐던 이 프로젝트는 대중들의 미술에 대한 인식을 확실하게 변화시켰다. 90년대를 거쳐 2000년대 들어서면서 그가 지향하는 미술의 공공성은 더 큰 폭으로 확대됐다. 전시장 밖으로 나와 지하철역에서, 분단의 경계에서, 극장에서, 거리에서, 아파트에서, 공원에서 대중들을 만나는 그의 작품들은 오늘을 사는 대중들의 정신을 일깨우면서도 단순한 감동의 언어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대중들을 깨우고 흔들어 시대를 읽게 하고 움직이게 한다. 86년 프랑스 앙굴렘 미술학교에서 공부하기도 한 그는 지난해 가나아트에서 가진 '토탈 아트전'까지 14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2000년대 중반, 서울 평창동에 '임옥상연구소'를 열어 창의적인 젊은 미술가들과 작업하고 있는 그는 일상이 예술이고, 예술이 곧 일상인 사회를 꿈꾸며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일을 지치지 않고 구상하며 실현해나가고 있다.

  • 기획
  • 김은정
  • 2012.07.10 23:02

임옥상 미술가 "잊혀진 시대적 아픔·정신, 예술언어로 일깨워요 "

아침 일찍부터 비가 왔다. 봄부터 가뭄이 계속되었으니 단비다. 비오는 서울 풍경은 일상적으로 만나는 도시 서울과는 사뭇 다르다. 광화문 넓은 광장은 더 특별한 풍경이다. 지나면서 언뜻 보니 세종대왕 동상 앞에 녹색공간이 펼쳐져 있다. 자세히 보니 벼다. 웃자란 벼들이 단비를 맞아 더 푸르다. 도심의 광장에 논을 들여놓은 풍경은 낯설어야 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친숙하고 흥미롭다. 이 도발적인 행위의 주체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광화문 광장에 논을 만들어 도시농업의 가능성을 대중들 앞에 펼쳐놓은 사람. 작가 임옥상씨(62)다. 그는 우리 사회에 가장 뜨거운 예술적 이슈를 가장 많이 생산해내고 있는 작가다. 1970년대부터 2010년대를 막 거친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가 쏟아놓은 예술작업들은 한 시대를 관통하며 기록해온 역사로 서있다. 평론가 김정환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훌륭한 예술가란 사회의식이 새로운 예술언어를 만드는 것보다 예술언어가 새로운 사회의식을 만드는 면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시대를 향한 치열한 발언으로 대중들을 깨어나게 하는 그가 다시 새로운 운동을 시작한 것은 올해 초다. 지난 4월 세종문화회관의 초대를 받아 극장 계단위에 넝쿨콩이며 고구마와 감자를 심어 놓더니 5월에는 아예 광화문 광장에 논을 만들었다. 그가 하는 대부분의 작업이 그랬듯이 이 프로젝트 또한 뜨거운 이슈가 됐고 2개월이 지난 지금, 광화문 광장의 벼들은 쑥쑥 잘 자라고 있다.그를 만났다. 80년대와 90년대 초반 10여년을 전주에서 보냈지만, 그는 전주를 고향처럼 아낀다. 예술적 정신의 자양분이 전주에서의 삶으로부터 온전히 온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뷰는 지난 5일 평창동 그의 연구소에서 시작해 광화문 광장에서 끝났다.-남미여행은 어떻셨습니까. 꽤 긴 일정이던데요.(그는 환경재단 일원으로 멕시코 리우에서 열리는 국제행사에 참가하고 3일 귀국했다) "좋았어요. 리우에서 행사 끝나고 상파울로를 거쳐 페루 아르헨티나 브라질 몇 개 도시를 답사했습니다. 주로 생태 환경 도시들이죠. 비행기만 열두 번 타는 고생스러운 일정이었는데 아주 의미있었습니다." -광화문 광장 설치작품은 선생님께서 즐겨하시는 '그로잉 아트'라고 들었습니다. 도심의 공간, 그것도 광화문 광장에 그런 작품을 들여놓을 수 있다는 것이 놀랍더군요. 반대는 없었습니까.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논쟁도 있었고요. 그러나 예술가의 예술적 행위에 논리가 중요한 것은 아녜요. 시기상조를 내세워 반대했던 측에서 내세웠던 것이 여론수렴이었는데 물론 여론수렴은 중요하지만, 오히려 일방적인 경우가 많잖아요. 시대의 이슈가 될 만한 것이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예술행위에 그런 논리를 대는 것은 부당하죠." -벼가 아주 잘 자라고 있더군요. 가을이면 전국 각지를 대표하는 쌀이 광화문에서 수확되는 진풍경이 벌어질 텐데 또 하나의 예술적 사건이 될 것 같습니다. 도시농업에 주목하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이번 프로젝트의 주제가 '이제 농사다'예요. 개인 작업으로 접근할 수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도시농사를 보다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뿌리를 내릴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중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판단이었죠. 도시농업은 지금 우리 사회가 꼭 지향해야할 가치 있는 과제예요. 예술적 행위로 그런 운동이 더 즐겁게 확산될 수 있다면 의미 있는 일이죠." -이런 큰 화두를 잡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까. "'어느 날 우연히'는 아니고, 그림을 그리면서 나 스스로 뭔가 붕 떠있는 듯 한 느낌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위안하지만 해결되지 않는 의문이 남아요. 내 예술이 사람들에게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죠. 사실은 지난해 개인전을 마치고 이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했었어요. 이제 나이도 있으니 완성도 높은 작품에 집중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연말 연초를 지내면서 문득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냐' 싶더군요. 그것은 결국 스스로 편안하게 살겠다는 것인데, 내가 그렇게 작품 뒤에 숨어 지낼 나이는 아니지 않는가하는 생각이 들면서 새로운 고민이 들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신 거군요. (웃음) 그런데 그 고민의 답이 도시농업이었다는 것이 의외입니다."언제부터인가 도시농업에 관심이 갔어요. 도시에 생명을 불어넣고 함께 사는 공동체 사회를 지향하는데는 농사만큼 좋은 통로가 없거든요. 때마침 이런 고민을 공유하는 지인들이 있어서 구체적인 논의를 진전시킬 수 있었습니다."-농촌운동하는 것도 아니고 예술문화운동으로 도시농업을 실현시켜가겠다는 목표가 바람직하긴 하지만 실현시키는데에는 많은 과제가 있지 않을까요. "물론입니다. 도시농업이라는 화두도 중요하지만, 도시농업을 어떻게 현실화 시킬 수 있을까가 가장 큰 과제예요. 그 답을 협동조합에서 찾고 싶습니다. 사실 엔지오 활동이 그동안 눈에 띄게 성장했지만 여전히 정치적인 바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시민사회단체도 마찬가지고요. 지속성과 주체성을 갖춰 나가기가 어렵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 협동조합 체제예요. 지금까지 만들어진 제도 중에 협동조합은 가장 앞선 제도가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협동조합을 만들어 도시농업을 뿌리 내릴 수 있게 하자는 것이 목표가 되었습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 과정이 필요한데 문화예술로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통로를 찾아보자 싶었지요. 그래서 상징적으로 광화문에 논을 만들자. 그냥 논이 아니라 예술가가 작품의 일환으로 만드는 논, 농사, 이런 것이라면 훨씬 설득력이 있지 않겠냐 했던 것이지요."-도시농업의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한, 시민들의 인식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군요. "그렇죠. 대개 사람들은 농사를 어떻게 도시에서 짓느냐는 생각부터 하는데, 사실 벼농사가 아니어도 좋아요. 농작물이라든지 어떤 다른 것도 상관없어요. 도시농업의 소재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런 프로젝트가 서울에서 벌어지는 것이 상징적이기는 하지만, 전라북도의 도시들처럼 중소도시에서 더 성공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요. "물론이죠. 중소도시에서는 더 아름답게 시민들과 더 긴밀하게 판을 짤 수 있겠지요. 작은 도시의 풍경을 주민들이 모두 나서서 바꾸는 일은 상상만 해도 멋있는 '퍼블릭 아트'가 될겁니다."-큰 프로젝트에만 집중하시다보면 개인적인 작업은 너무 밀리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선생님의 그림을 만나고 싶은 사람들도 많을 텐데요. 실제로 아까 말씀 하신 것처럼 이제 그림을 그리시겠다는 생각도 하셨었구요. "그림이라는 것이 좁은 의미가 있고 넓은 의미가 있는데, 넓은 의미의 그림은 그만큼 넓기 때문에 사회적 파급력은 있지만 사실 고단하지요. 일을 성사시키기에도 어려움이 많고요. 그래서 잠깐 개인작업을 마음에 품기도 했었을겁니다. 이제는 좀 편하게 살고 싶어서.(웃음)"-그런데 또 다시 돌아오셨잖아요. 이것이 무슨 생각인가 하면서."그러니까요. 그림을 그리긴 하는데 사회의 그림을 그리겠다는 데에 마음이 닿은 것이죠. 소셜 큐레이팅이나 퍼블릭 아트 같은 영역이 나에게 주어진 어떤 소명 같은 것인가봐요."-그동안의 삶에서 전주는 어떤 시기였는지 궁금합니다. "나에게 전주는 아주 의미 있는 공간입니다. 내 삶에서도 그렇고 예술적 활동에서도 그렇죠. 전주에서의 삶은 80년대의 격변기에 온전히 놓여있습니다. 내 작품의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 공간이었죠. 그러니까 전주라는 공간과 정서적 풍토가 없었으면 내 예술은 발화하기 어려웠을겁니다. 70년대 말 광주에서의 생활이 피 끓는 치열함으로 들떠 있었다면, 전주는 마음에 확신을 갖고 열정을 구체화시키고, 작품을 해나갈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확보했던 공간이었던 것 같아요." -선생님의 작업은 항상 시대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외면하고 싶은 시대적 상황이나 우리가 처한 현실을 강렬한 메시지로 전하면서 예술에 대한 편협한 시각을 교정시켜주었죠. 미술의 사회적 역할이 중요하긴 하지만 의미나 보람만 있었던 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91년 호암갤러리 전시 이후 주목받는 민중작가로 각인됐습니다. 화가로서 예술성과 가능성을 인정받은 셈인데, 그럼에도 제가 가야할 길은 그림을 그리는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자연히 사회적 발언으로서의 미술활동을 해나갔는데 그때 주위에서조차 왜 자꾸 판을 벌리느냐는 비판을 했어요. 섭섭함이 크더군요. 작가가 작가로서 행보를 할 때 박수를 쳐주지는 못할망정 왜 자꾸 그쪽으로 가느냐는 식의 조언은 바람직하지 않죠. 우리나라 풍토가 갖고 있는 한계일 텐데, 개인적으로는 그런 과정 속에서 오히려 단련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91년까지 몸담았던 대학교수직을 버리고 전속작가가 될 때는 또 그와 반대되는 혹평이 있지 않았나요. "그랬죠. 상업작가로 변신한다고. 민중작가에 대한 기대를 저버렸다고 비판했습니다." -대학교수직을 그만둘 때 갈등은 없으셨는지, 왜 그 길을 택했는지 늘 궁금했습니다. 선생님이 생각하는 미술의 사회적 역할은 대학교수를 하면서도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요. "갈등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구요. 그런데 그때 상황이 참 어려웠어요. 당시 제가 교수협의회장을 맡아야 했습니다. 재단과의 힘겨루기를 해야 하는데 자신이 없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학생들에게 올인할 수 없는 제 환경이었고요. 소모품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내 스스로 계기를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림으로 살래 아니면 교수로 살래, 이런 양자택일의 경계에 나 스스로를 내놓고 선택했지요." -그럼에도 정작 개인적인 그림을 그리는 대신 거리로 나오셨는데, 지금은 보편적인 예술행위가 되었지만 아이엠에프 직후 인사동과 여의도에서 벌였던 '당신도 예술가' 프로젝트는 획기적인 예술적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아이엠에프를 겪고 있는 사람들을 예술 활동으로 위로하고 함께 놀고 싶었습니다. 예술의 가치가 특권층의 고급문화로만 놓여있던 환경에서는 예술이 대중들을 소외시키고 동시에 대중들로부터 외면 받게 되죠. 그런데 직접 대중들을 찾아가 그림을 갖고 놀자고 하니 반응이 아주 좋았어요.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거리미술제니 찾아가는 미술이니 체험미술이니 하는 모든 양식의 출발지점이라고 할 수 있죠."-정치에도 관심이 많으시죠. 지난 지방선거때는 젊은 세대들의 투표독려를 위한 인증샷 운동에 나서기도 했었는데요. 혹시 정치적으로 보이는 것에 부담은 없습니까. "그런 것에는 신경 안 씁니다. 정치와 문화 사회 경제 이런 것들은 우리 삶을 규정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경계를 구분하고 살 수 있는지 궁금해요. 우리 삶의 근간이 그들 영역에서 나오는데. 저는 정치는 못합니다. 그러나 정치적 활동은 제가 할 수 있는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총선때는 특별히 할 일이 없었는데, 이번 대선에서는 해야 할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무엇이 되던 역할을 할 겁니다. 한 인간으로서 주어진 허락된 정치 행위를 한다는 의미죠." -이 작업 이후의 프로젝트가 벌써부터 궁금해집니다. "이제 시작한 도시농업 운동을 열심히 해나갈겁니다. 협동조합이 중심이고 더 재미있는 예술적 행위도 더해질겁니다. 그리고 문자축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세계문자축제죠. 인류의 역사에서 문자는 매우 중요합니다. 문자에 의해서 문화가 구분될 정도로 문자의 가치는 큽니다. 활자 시대에서는 문자가 모든 것을 지배했던 시대라고도 할 수 있죠. 요즈음은 문자가 새로운 도전을 받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새로운 힘을 발휘하기도 하는 시대잖아요. 그래서 한글을 만든 나라로서 문자에 주목하고 문자를 바라보는 크고 넓은 시각을 우리가 먼저 만들어낼 필요가 있겠다는 의지를 모았습니다. 얼마 전부터 한국문화가 케이팝으로 대표되고 있는데 문화소비의 부분에서는 상당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지만 문화의 전반을 고민하는 국가로 인식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문자나 활자 출판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는 전주도 문자축제를 공유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문자축제는 문화를 문명사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는 시도입니다. 세계의 사라져가는 문자 사라진 문자, 더 나아가서는 문자 이전의 문자, 그리고 앞으로의 문자의 운명과 세계가 어떻게 만나고 무엇을 만들어나갈 것인가 이런 큰 틀을 고민하는 자리죠. 우선은 서울을 세계 문자의 허브도시로 만드는 것이 목표인데 전주를 비롯한 도시들과 연대하는 것도 좋은 방식이 될 것 같습니다. 기회를 만들어보면 좋겠군요."

  • 기획
  • 김은정
  • 2012.07.10 23:02

DJ권유로 정치 입문… 대선 실패 후 현장에서 길찾아

정동영 민주당 상임고문은 전북인과 진보진영에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5년 전 여당 후보로 대선에 나섰으나 530만 표라는 엄청난 차이로 낙선한 것이다. 몽골기병처럼 파죽지세로 치닫던 그의 정치역정도 이 때를 계기로 전환점을 맞았다. 하지만 그는 밑바닥에서 부터 다시 시작했다. 미국 금융위기와 용산참사가 계기였다. 땅 위에서 몸으로 길을 찾아 나선 것이다. 고통과 단련의 터널을 지나 다시 한번 우뚝 설지 관심이다. 그는 순창군 구림면에서 1953년 7월 27일, 9형제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형 4명이 병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장남이 되었다. 전주로 옮겨 전주초등학교와 북중, 전주고를 다녔다. 도의원이던 선친은 고교시절 돌아가셨다. 서울대 국사학과에 입학했으나 유신 반대 시위로 구속돼 강제징집을 당했다. 그가 수감되자 어머니는 가족을 데리고 상경, 셋방에서 재봉틀로 생계를 이었다. 출소 후 정 고문은 새벽이면 아동복 바지를 보따리에 싸들고 청계천 평화시장으로 나갔다. 대학 졸업 후 전주에서 음악교사를 하던 민혜경씨를 '납치'해 결혼하게 된 일화는 유명하다.1978년 MBC 보도국 정치부 기자로 발을 디딘 후 승승장구했다. 미국 LA 특파원과 뉴스데스크 앵커를 지냈다. 1996년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의 권유로 전주 덕진에서 출마, 15대와 16대 연속 전국 최다득표로 당선되었다. 이어 40개월 동안 명 대변인과 최연소 최고위원에 올랐다. 그가 정치인으로 일대 도약한 것은 2000년 민주당 쇄신파동을 거치면서다. 당시 청와대에서 열린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동교동 실세였던 권노갑 고문의 2선 후퇴를 요구한 것이다. 이후 경선지킴이로서 노무현 대통령 당선에 큰 역할을 했고, 두번에 걸쳐 열린우리당 의장을 맡았다. 통일부 장관 겸 NSC(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장을 지냈으며 2007년 집권여당의 17개 대선후보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본선에서 이명박 후보에 고배를 마셨다. 18대 총선에서는 서울 동작을에 나와 떨어졌으나 2009년 전주 덕진 재선거에 무소속으로 나와 당선되었다. 19대 총선에서 당의 권유로 서울 강남 을에 나가 다시 떨어지는 아픔을 맛봤다. 가족은 부인과 미국 스탠포드대를 나온 장남 욱진, 연세대에 재학 중인 차남 현중 등 아들 2명이 있다.

  • 기획
  • 전북일보
  • 2012.07.03 23:02

정동영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돈에서 사람으로 시대정신 전환… 국가 운영 바꿔야"

싹 바뀌었다. 삶을 리셋하듯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기자 초년병 시절처럼 현장에 뛰어든 것이다. 용산 참사 현장이며 한진중공업, 쌍용자동차, 제주 강정마을 등에 그가 있었다. 서민들이 눈물 흘리는 낮은 곳에 함께 했다. 그런 과정에서 멱살잡이 등 수모도 겪었다. 그런 세월이 벌써 3년을 넘었다. 누구는 또 대선에 나가기 위해 쇼를 한다고 했다. 또 누구는 새로운 정치 모델이라 했다. 정동영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을 이르는 얘기다. 비록 각종 선거에서 연거푸 고배를 마셨지만 시대를 읽는 눈은 더 밝아졌다. 깊은 성찰과 연마로 콘텐츠도 탄탄해진 느낌이다. 그런 그가 앞으로 역경을 딛고 어떤 그림을 그릴지 자못 궁금했다. 인터뷰는 국회도서관 514호실에서 진행되었다.- 안녕하세요? 지난달 국회에서 열린 민주통합당 정치개혁모임에 참석해 정견을 밝혔는데 이번 대선에 나오기로 결심은 섰습니까?"지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우선 전북 도민들에게 인사부터 하시겠습니까?"전북, 호남은 제 어머니죠. 제가 몇 년 전에 출마할 때도 슬로건으로 '어머니, 정동영입니다'를 걸어 놨는데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는 거죠. 저는 이 땅의 아들입니다. 이 땅이라는 게 무슨 땅이냐, 차별과 소외, 그리고 민주주의와 민족의식의 고향이죠. 전주를 갈 때나, 생각하면 마음이 싸해요. 짠해요. 아들로서 아들 노릇을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 아들이 객지에 나가서 돈도 벌고 출세도 해야 부모가 기(氣)가 서고 그러는데 아들이 출세도 못하고, 돈도 못 벌고…. 그러나 또 어머니가 있기 때문에 힘의 원천이고 정신의 뿌리고, 자존심의 뿌리고 그렇죠."- 최근 '정동영, 대한민국을 선도하다'라는 보도자료를 통해 그 동안의 정치행보와 비전을 선보였습니다. 2009년부터 지난 5월말까지 정 고문님의 이슈별 정치적 주장과 실천적 행보를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해 놨던데요?"인터넷 칼럼니스트가 재능 기부한 거예요. 3000페이지가 돼요. 국회연설, 동영상, 인터뷰 등을 정리한 거죠. 서문과 8개 분야로 돼 있죠.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3년 동안 여기에 집중했다는 거죠. 그 결과물이 민주당의 강령에 담겼다는 것이고, 그것은 당을 제 활동을 통해 이 방향으로 이끌어 왔다는 것이고, 반면에 안타까움은 올해 들어서 이것이 실종됐다는 것이죠. 이게 지금 펄펄 살아서 뛰는 의제여야 하는데 다 실종되고, 종북논란이니 이박담합이니 뭐 요새 엉뚱한 곳으로 가 있는 거죠."(이 말을 하며 정 고문은 태블릿 PC에서 경향신문에 난 고려대 최장집 교수의 칼럼 '민주당내 두 개의 진보노선'을 보여주었다.) - 3년 전 용산참사 때부터 변하신건가요? "그러니까 2007년 대선에 임했을 당시는 중도노선이라고 봐야죠. 2008년에 미국 금융위기, 2009년에 용산참사를 겪으면서 근본적 성찰, 담대한 변화, 그리고 전주 출마해 원내에 들어와서 18대 국회 3년 동안 한 기록이죠. 전주에서 당선되고 올라와서 국회선서하면서 '용산의 눈물을 닦아 주는 게 정치다'고 했죠. 그것이 정동영의 길이면서 대한민국의 나아갈 길이다 한 거죠. 그런데 당이 이 길에 대한 신념과 확신이 없는 거에요. 당이 뒷걸음치고, 자신감이 없는 거에요."- 지난 선거에서 민주당이 휩쓸줄 알았다가, 너무 죄클릭하다 실패한 거라고 보는 사람이 많은데 정 고문님은 그게 아니라는 거죠."거기서 자신감을 잃었기 때문에, FTA든 재벌개혁이든, 복지문제든 신념을 가지고 임했어야 지지를 받았을 거 아녜요? 그런데 의제는 다 실종되고 민간인 사찰 하나 가지고 그러니 공허했죠. 2010년 지방선거는 의제가 있었고 2012년 4월 총선은 의제가 실종됐고, 2012년 12월이 되면 다시 의제를 되살려야 한다, 그것이 내 생각이고, 진보진영의 지식인들 생각이죠."- 그러면 지금의 시대정신을 한 마디로 뭐라고 할 수 있습니까?"한 마디로 하면 '돈에서 사람으로'죠"- 아, 멋진데요."지난 30년 동안 돈과 시장에서 사람으로, 경쟁에서 행복으로 시대정신이 전환된 거죠. 경쟁이 목표가 될 수 없죠. 행복이 목표야죠. 요새 성장담론을, 우리가 성장도 얘기해야 된다고 말하잖아요. 성장이 나쁜 게 아니고 좋은 거죠. 그런데 성장이 목표가 돼서는 안돼요, 결과지. MB(이명박 대통령)는 성장을 목표로 걸었잖아요. 7% 성장하겠다, 그걸 따라가겠다는 건데. 경제민주화, 복지국가, 남북 평화… 이 결과로 성장이 이루어지면 추구하는 거지. 성장을 목표로 내거는 것은 철학의 빈곤이죠. 시대정신을 꿰뚫지 못하고 있다는 거죠."- 어쨌든 문재인, 손학규씨 등은 성장을 얘기하면서 좌에서 중도로 가고, 박근혜씨도 우에서 중도쪽으로 가고, 그러다 보니 여야가 따로 없는 것 같애요. "사회를 잘못 읽고 있는데, 단봉사회가 아니고 낙타처럼 쌍봉사회에요.(정 고문은 이 대목에서 그림을 직접 그려주며 설명했다.) 사회경제적 양극화가 진행되다 보니까 가운데가 푹 파져버리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방향을 택하는 거에요. 확실하게 이걸 정해야 1 대 1 대결이 되는 것이죠. 구체적으로 개별사안에 대해서 정책으로 말해야죠."- 정치개혁모임에서 휴대폰 제조업체들이 30만 원 올린 것, 재벌들이 골목 빵집을 점령해 가는 것을 예로 들었던데요?"그런 것에서 문제해결 능력을 보여줘야 하는 거죠. 오늘 아침 신문에 인천에서 69세 노인 부부가 자살한 것 보셨겠지만, 한 달 노인연금 15만 원이 수입의 전부입니다. 통장잔고가 3000원이죠.(태블릿PC로 기사를 보여주면서) 그게 그 분 한 사람 얘기가 아니라, 현재 65세 이상 노인인구 550만 명의 45%가 절대빈곤선에 있어요. 의식주가 불안한 거예요. 그래서 그 결과가 나타난 게 노인자살률 세계 최고입니다. 그러면 국가적 과제가 어떤 게 시급한가, 민주당이 어떤 것부터 손대야 하는가. 1번이 노인연금, 2번이 아동수당, 3번이 반값 등록금입니다. 그 다음에 청년층, 그러면 민주당이 여기에다 올인해야 되는 거예요, 이게 왜 좌클릭입니까?"- 지난 번 4·11 총선 때, 한미 FTA나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 등에 대한 논리가 부족한 것 같더라고요. 노무현 정부 때 한 것 아니냐, 왜 그것을 부정하느냐 그러는데 대응을 못하더라고요."반성문이 들어가야 대응이 되는 건데, 반성문을 안 쓰니까. 왜냐면 대통령이나 정부가 잘못할 수 있잖아요. 잘못했으면 잘못을 인정해야죠. 인정하면 대응이 되는데 그걸 인정 안하고 얼버무릴려고 그러니까 역공으로, 적반하장이지, 너희들 말 바꾼 사람들 심판해야 한다고 그러는 거죠."- 지난 3년 동안 몸으로 부딪치면서 현장에 답이 있다는 것을 느끼신것 같은데요?"그렇죠. 현장에 답이 있는 거예요. 여의도는 멀어요. 전주 모래내 장사하는 분들하고 여의도와 무슨 상관있어요. 거기서 괴리가 생기는 거죠. 현장은 지금 가뭄으로 땅바닥이 쫙좍 갈라지고 목이 타는데 여의도 앉아서 시원한 맥주나 마시고 있으면 너무 멀잖아요. 목이 타는 현장에 정치가 있어야죠. 안 그러니까 불신이 생기는 것 아닙니까. 불신이 뭐로 가요? 투표 안해 버리는 거죠. 그 놈이나 저 놈이나 똑같다 이거죠."- 반성문(2010년 8월 8일 작성)에도 나와 있고 떠올리기도 싫은 악몽이겠지만, 지난 대선 때 BBK 하나만 가지고 선거 치르니까 국민들 눈에는 그것이 뭔지 잘 모르고…, 그러다가 패배하신 것 아녜요?"사실 관계를 정확히 하면 제가 다른 얘기를 많이 했죠. 열에 아홉은. 그런데 BBK는 안했어야지, 나는. 나도 BBK에 대한 분노와 도덕성의 문제다, 그런데 (국민들에게) 다른 것은 기억에 안 남죠. 다른 것은 다 실종돼 버리고…"- 호남 쪽에서는 인구가 적어 당분간 집권하기가 힘들지 않을까요?"그걸 깨야 된다고 봅니다. DJ(김대중 전 대통령) 때 지역등권론이라고 있었죠. 오죽 했으면 그것이 등장했겠습니까만 그러면 대한민국에서는 특정지역에서 태어난 사람만 대통령을 할 수 밖에 없는가, 그 다음에 호남 출신은 아예 피선거권이 없는건가, 그런 근본적인 질문에 부딪치잖아요. 지역구도라는 현실이 있지만 넘어야 할 대상이지, 거기에 복종할 대상이 아니죠. 특히 이번 선거의 중요한 변수는 세대전쟁이라고 봐요. 박원순 시장 선거 때, 30대가 76 대 24의 지지를 했어요. 서울의 30대가 3배 넘게 지지한 거에요. 거기에 전라도가 어디 있고 경상도가 어디 있습니까. 그 20대 30대가 근본적 변화를 원하는 겁니다."- 그럼 앞으로 호남이니 뭐니, 그런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겠네요?"2차적인 게 됐죠. 1차적이 것은 세대전쟁입니다. 그리고 이번 총선 투표율 나왔잖아요. 수도권에서 20대 30대가 10% 이상 올라갔어요. 그에 비해서 50대 60대는 2% 올라갔거든요. 거기에 하나 덧붙이는 게 '잉여'라는 말 아세요. 이것이 키워드입니다. 1958년 손창섭 소설가가 '잉여인간'이란 소설을 썼는데, 요즘 20대가 자신들을 잉여라고 불러요. 자학적인 표현이지만 현실이예요. 그런데 이 사회는 자기들이 만든 사회는 아니란 말이죠. 거기에 분노하고 있는데 민주당이 이 분노를 흡수해야죠." - 통일부장관때 개성공단 착공과 9·19 공동선언 이끌어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MB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 말씀해 주시죠."MB의 정책은 이미 실패했으니까 얘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고, 다음 정부가 할 것을 얘기하죠. 첫째 대륙으로 가는 길을 뚫어야 해요. 그것이 한국경제의 활로입니다. 둘째 개성공단을 확장해야 해요. 20개는 만들어야 합니다. 셋째 9·19로 돌아가야 해요. 대륙을 뚫으면 청년실업에 대한 전망이 보이는 거고, 개성공단을 확장하면 중소기업의 전망이 보이고, 9·19로 돌아가면 한반도 평화체제가 보입니다."- 통합진보당 사태와 관련, '종북도 안되지만 종북장사도 안된다'고 했는데요. 종북장사라면 뭘 말하는가요?"매카시즘이죠. 낡은, 철 지난 딱지붙이기죠. 용공이다 좌빨이다, 박근혜에 부메랑이 될 거예요."- 노 대통령이 원래 복지부장관을 권했다면서요.'역동적 복지국가'를 주장하는데 DJ정부의 생산적 복지나, 박근혜 대표의 한국형 복지와 다른 점은 뭡니까?"복지와 경제를 결합하자는 거죠. 첫째가 보편적 복지고, 둘째가 적극적 복지, 셋째가 공정한 경제, 넷째가 혁신경제입니다. 예를 들면 OECD 평균이 임금노동자의 4명 중 1명이 사회서비스 분야에서 일해요. 그런데 한국은 8명 중에 1명이예요. 여기서 150만 개 이상의 일자리가 만들어지죠. 여기다 돈을 쓰자는 거죠. 4대강에다 썼더니 녹조밖에 더 생겨요. 그런 것이 복지와 경제를 결합한 역동적 복지죠."- 지난 4월 전주에서 전북고속 노조지부장이 단식농성하는 망루에 올라갔다 내려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전라북도에 그런 장기 분규사업장이 처음이잖아요. 안타까운 일이죠. 이것은 헌법의 부족입니다. 무슨 얘긴가 하면 헌법에 노동3권이 보장돼 있으면 정부는 당연히 이걸 뒷받침해 줘야 되잖아요. 그런데 정부가 이걸 눌러요. 노조를 자꾸 와해시키려고 해요. 이 정부 들어와서 노조 조직률이 9.7%밖에 안 되잖아요. 사실 정부는 약자를 도와줘야 되는 거예요. 옳고 그른 것, 구체적인 것은 그 다음 문제고. 그게 바뀌면 전북고속 문제 같은 것은 분규가 생길 수 없는 거죠."- 서울에서 농성중인 전주대 청소노동자들도 만났다면서요? "지금 학교 청소하시는 분들 시간당 4500원 받아요. 서울은 5000원 주고. 한 달 90만 원 받거든요. 사람값을 너무 헐하게 치는 거죠. 최소한 150만 원은 돼야 어떻게 좀 살 거 아녜요. 홀어머니 가정이라든지 그걸로 생활하는 가정이 있거든요. 이것을 어쩔 수 없다고 놔두면 안 돼죠."- 한옥마을 만들고 35사단 이전에도 꽤 힘쓰신 걸로 아는데요?"35사단 이전에도 힘을 썼죠. 한옥마을은 김완주 시장 전에 지구 지정이 해제됐어요. (김완주 시장을 공천 받도록 해서) 그걸 다시 묶고 전통문화중시도시로 해서 판소리극장 짓고, 견인차 역할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10년만에 대박이 난 거에요. 또 제가 전주 국회의원이 아니었으면 월드컵경기장도 없었을 겁니다. IMF 금융위기 오니까 97년 12월 초에 광역시 7개로 정부가 발표해 버렸잖아요. 그걸 제가 뒤집은 것 아닙니까. 대통령 당선자에게, 그 때 제가 대변인이니까, 없는 공공사업도 일으켜야 하는데, 일본은 10개인데 우리는 왜 7개입니까. 바꿉시다. 해서 10개로 바꿔서 전주로 온 거죠."- 지난 1월, 지역구(전주 덕진)를 떠났습니다. 그래도 전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변함이 없을 줄 압니다만."에너지 불변의 법칙이죠. 에너지라는 게 전북이 가진 정치적 역량, 총량이 가령 100이라면 그게 어디 가겠어요. 의원이 수도권 등 어디에 가있건 고향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요."- 김대중 대통령이나 노무현 대통령을 아주 가까이서 겪었는데 그 분들 평이랄까?"역사가 평가해야죠. 저는 DJ 대통령의 손에 이끌려 정치에 입문했고, 노무현 대통령의 특사로 평양에 가서 김정일 위원장과 담판을 했다, 그게 제 정치역정 17년을 두 분과 관계속에 정리한 거죠."- 정치를 하는 이유랄까,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뭡니까?"세상을 한번 바꿔보고 싶었어요. 성공한 대통령이 되고 싶었죠. 통일의 초석을 놓고 통일시대 문을 열고 싶고…. 또 약자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죠."

  • 기획
  • 조상진
  • 2012.07.03 23:02

바울선교회 대표 이동휘 원로목사 "세상의 빛과 소금역할이 교회의 사회적 책임이죠"

목회자로서는 늦은 나이에 교회를 개척해서 한국을 대표하는 선교 교회로 성장시킨 전주 안디옥교회 이동휘 원로목사(78). 교인수가 8000여명에 달하는 큰 교회로 부흥했지만 개척 당시 비행기 격납고를 뜯어다 만든 깡통교회 그 모습, 그대로 외형에 치중하지 않는 대신 세계 90개 국가에 400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수많은 농어촌 교회를 지원하며 장애인과 저소득층 홀로노인 등 소외된 이웃을 돕는 그에게서 한국 교회의 새 희망을 찾게 된다. 성공한 목회자로서 편하고 안락한 길 보다는 '불편하게 삽시다'를 목회 케치프레이즈로 평생 자가용 없이 청빈하고 검소한 삶을 살았고 은퇴 후에도 교회에 부담주기 싫다며 수원의 조그만 아파트로 이사한 이동휘 원로목사는 좁은 문, 좁은 길을 가는 이 시대의 참 목자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국내 교회와 해외 집회의 바쁜 일정 가운데도 흔쾌히 시간을 내서 전주에 있는 2평도 채 안 되는 선교회 사무실에서 이동휘 원로목사님을 만났다.-은퇴하신지 벌써 7년 되셨는데,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목회하실 때 보다 더 바쁘신 것 같으신데"은퇴 후 수원으로 이사했어요. 최근 미국 캐나다 선교집회에 초청받아 다녀왔습니다. 국내 교회와 선교단체에서도 오라고 부르면 갑니다. 또 바울선교회 대표를 맡고 있어 전주에 있는 선교사무실에도 자주 내려옵니다."-전북일보와는 인연이 깊으신데 은퇴하시던 해인 2006년엔 '나의 이력서'를 18회에 걸쳐 연재하셨었죠. "저도 전북일보 애독자입니다. 지금은 신문을 볼 수 없지만 전주에 있을 때는 꼭 보았습니다. 또 개인적인 친분도 있고요."-목회자로서는 좀 늦은 나이에 안디옥교회를 개척하셨는데, 지금도 처음 개척 당시의 깡통교회 모습 그대로이더군요. "제가 49살 때인 1983년 4월에 안디옥교회를 개척했죠. 농촌교회에서 19년동안 사역하다 전주로 와서 4년 만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당시 교인이라야 몇 십명에 불과했었죠. 교회 자리를 물색하다 비행장 격납고를 뜯어다 창고로 사용중이던 건물을 600만원 전세로 빌렸죠. 그 뒤 건물을 매입하고 2차례 깡통 건물을 증축해 현재까지 교회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안디옥교회 정도의 교세이면 규모에 맞는 교회 건물을 마련하고도 남았을 텐데요."교인들도 그렇게 불편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요, 또 교회 건축의 필요성을 얘기하는 교인들도 없었고"-왜 안디옥교회라 이름 지었는지요."교회 개척할 때부터 선교에 대한 비전을 세웠습니다. 성경에 보면 선교를 많이 한 교회가 안디옥 교회라서 이를 본 따 교회 이름을 지었죠."-목회 방침이 "불편하게 삽시다"이던데, 창고같은 건물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어려움이 많았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특히 여름과 겨울철엔 냉난방이 제대로 안돼 찜통더위와 추위에 고생하셨다던데 왜 스스로 불편을 감수하시는지요. "기후나 언어가 달라 불편을 감수하는 선교사를 돕는 교회인데 우리가 편안하게 지낼 수는 없잖아요. 마치 아들을 전선에 보낸 어머니가 편한 잠을 잘 수 없는 것처럼 말이예요. 그래서 어머니 교회로서 반문화 생활만 하자 제안했고, 교인들도 억지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받아들렸죠."-안디옥교회가 짧은 기간에 폭발적 성장과 부흥을 이룬 동력은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요."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처럼 없는 가운데도 줄 수 있는 기쁨은 주어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습니다. 주는 기쁨이 쌓이다 보니 교인들 스스로도 자부심이 생겼죠. 예수님도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다 내게 한 것이다'고 말씀하셨는데, 교회는 선교와 구제가 가장 중요한 사역입니다. 해외 선교 뿐만 아니라 어려운 농촌교회를 후원하고 장애인들과 소외계층을 지원하고 하니까 자연스럽게 성장도 됐죠. 물론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교회 재정의 70% 이상을 선교와 구제에 사용하는데 교인들의 반대나 불만은 없었습니까. 교회내 각 기관 단체를 운영하는 비용도 많이 들텐데요."반대하거나 불만을 얘기하는 사람은 전혀 없었습니다. 또 교회 기관과 단체는 모두 스스로 자립했죠. 자립하니까 더 발전하고 더 성장하고 더 좋아했습니다. 성장은 교회 재정 투자와 관계없이 이뤄졌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예산을 따로 세우지 않는다고 들었는데요, 어떻게 예산을 세우지 않고도 수백명에 달하는 선교사를 지원하고 장애인 농어촌 선교 등 많은 일을 감당하셨는지요."제가 전에 있던 교회에서 어려운 농촌교회를 돕자고 하니까 장로님 한분이 예산이 없어 안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안디옥 교회를 개척했던 것입니다. 목사와 직원들 필수 경비만 정해놓고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필요한대로 채워주신다는 믿음으로 해왔습니다. 이달 초 미국 집회에 갔을 때 어떤 분이 경제계도 예산 계획없이 더 잘 된 사례가 있다며 분석기사가 실린 잡지를 저에게 준 일이 있었습니다." -해외 선교사 지원뿐만 아니라 농촌교회에도 많는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는데 "농촌 목회를 20년 가까이 해서 농촌교회의 열악한 실정을 잘 압니다. 그래서 3년 동안 지원해서 자립시키는 것을 원칙으로 교육 훈련프로그램과 재정지원을 했죠. 한번에 70~80개 교회가 참여합니다. 그렇지만 모두가 잘 되지만은 않습니다."-장애인 예배를 마련하는 등 장애우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배려가 남달랐었죠."지금이야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많이 개선됐지만 예전에는 장애인들이 집 바깥으로 나오기조차 힘들었죠. 장애인 오후 예배를 신설하자 처음에는 수십명이 참여하더니 나중에는 수백명씩 몰려오는 거예요. 깜짝 놀랐죠. 재가 장애인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습니다. 장애인 지원 뿐만 아니라 독거노인과 중증 장애인 목욕차량 선교, 발클리닉선교, 의료선교, 교도소선교, 노인복지센터 위탁운영 등으로 확대해 나갔습니다."-안디옥교회 하면 바자회 교회로 유명한데 바자회를 시작한 배경은. "미국에서 이웃돕기 바자회가 잘 되는 것을 보고 우리 교회도 시작했죠. 품질 좋은 옷을 천원씩 저렴하게 팔고 먹거리까지 구색을 갖추니까 교인뿐만 아니라 시민들도 몰려들면서 전주시내 명물이 됐죠. 1년에 2차례씩 바자회를 가져 해외 선교센터나 학교 건립을 지원하게 됐습니다."-현재 바울선교회 대표로 활동중이신데, 바울선교회는 언제 설립했고 지금 선교활동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지난 1986년 바울선교회를 교파를 초월해서 설립했습니다. 매년 선교사를 선발해서 교육하고 파송하고 있습니다. 지난주 제36기 선교사 12명을 새로 뽑아 이번 주부터 훈련에 들어갑니다. 현재 아시아와 서부 아프리카, 중동지역을 비롯 세계 90개 국가에 선교사 400명을 파송했습니다. 복음의 사각지대에서 질병과 박해와 테러 등의 어려움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하는데 헌신하고 있죠."-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점에 대해서 여쭈겠습니다. 며칠 전 서울 대형교회 원로목사의 고백으로 한국교회의 부자 세습 문제가 다시 이슈화되고 있습니다만"교회세습에 대해선 좋은 사례와 나쁜 사례가 있습니다. 세계 선교를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있는 캐나다 토론토의 피플스 교회의 경우 오스왈드 스미스목사에 이어 아들 목사가 맡아서 잘 이끌었는데 3대에 다른 목사가 맡으면서 기울어졌거든요. 전주의 한 교회는 아버지 목사가 아들이 교회를 맡는 것을 반대했는데 교인들이 원해서 아들 목사를 세워서 지금 잘 하고 있습니다. 일부 몇몇 대형교회에서 막연한 생각으로 아들에게 맡겼다가 교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좋지 않은 일이 있어 안타깝게 생각합니다."-목사님도 자녀들이 모두 선교사의 길 걷고 있는데 교회를 물려주고 싶다는 생각은 안드셨는지요."고생하는 자리인데 왜 자식들에게까지 물려주겠습니까."-대형교회 목사들의 경우 은퇴하면 적지않은 예우를 받으시는 분들도 많은데 목사님께서는 교회에서 전주에 거처를 마련하려 했지만 극구 사양하시고 수원의 조그만 아파트로 가셨죠."나 편하려고 수원으로 간 것입니다. 그동안 자가용 없이 생활해왔기 때문에 대중교통 이용이 수월한 수원을 택했습니다. 수원은 호남선 전라선 경부선 모두 닿고 인천공항도 리무진으로 50분이면 갈 수 있어서 좋습니다." -몇몇 대형교회 목사들의 돈과 여자 문제가 언론에 오르내리다보니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요, 요즘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시각도 많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부 성직자의 실수 인정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또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민족 앞에 고백해야 합니다. 얼마 전 불교계 문제가 불거졌지만 유독 기독교계 문제에 대한 폭로와 공격이 많다보니 극히 일부 문제가 마치 전체 문제인것 처럼 잘못 비쳐지는 대목도 있습니다. 인터넷에서도 안티 기독교세력이 크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북한에서도 사상이나 이념보다도 기독교를 더 말살하려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경계해야 합니다."-한국 교회가 70~80년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외형적으로 급성장을 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교인수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한국교회 무엇이 문제라고 생각하시는가요."교회가 기도의 힘이 약해지니까 기독교가 약해지고 있습니다. 예전에 뜨겁게 기도하던 기도원들이 지금은 세미나 장소로 변했습니다. 무릎 끓고 기도하기보다는 듣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밤을 세워 기도했던 것처럼 성도들이 기도를 회복해야 합니다. 미국도 교회가 많이 침체되고 있지만 일부 교회는 계속 성장하고 부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변질된 교회가 아닌 원색적인 교회로 나아가야 합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봉사 잘하면 복 받고 성공하고 잘산다는 이른바 기복주의 신앙이 한국 교회 내에 여전한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우리가 부모님께 효도하면 복 받는다는 것과 복 받기 위해 효도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성경에 축복에 대한 얘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복 받기 위해 믿는 것은 이기적인 신앙입니다. 이 같은 믿음은 시정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참 자유와 평강을 얻는 것이 믿음의 복입니다."-교회 내에서는 모두 천사들 같지만 사회 속에서는 크리스챤들이 잘 구별이 안 된다는 지적도 많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뭔가 달라져야 하는데 변화가 없는 것은 왜 그럴까요."구라파는 기독교 역사가 1000~2000년씩 되었쟎아요. 해적, 바이킹이었던 그들이 예수 믿고 신사국가로 변했습니다. 우리는 기독교 역사가 120~130년으로 좀 짧습니다. 신앙의 생활화가 안 된 것에 대한 잘못이 있습니다만, 그래도 예수 믿으니까 우리나라가 이 정도 유지되고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개인적 차원에서 보면 신앙의 미성숙한 면이 있죠. 성경을 제대로 알고 말씀대로 살면 자연히 변화될 수 밖에 없죠. 이를 위해 교회에선 제자화 훈련과 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교회내 목사 장로 권사 집사라는 직책이 섬김과 봉사라는 직분보다는 계급화 서열화 되고 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만"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장로의 경우 평신도로서는 최고 예우를 받는 직책입니다. 명예욕이 사람을 타락하게 만들듯 장로 권사로서 인격적 결함이 있어선 안되겠죠. 교회 중직(重職)은 순교(殉敎) 순서이고 교회의 최고 VIP는 새신자입니다."-교회의 역할, 교회의 사명은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요."성경에 있는 사도행전 1장 8절이라 생각합니다. 제 목회 철학이기도하고요. 예루살렘 즉 전주지역과 온 유다인 대한민국과 사마리아인 어려운 이웃과 소외된 사람들, 그리고 온 땅인 세계를 향해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준행하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사회적 책임입니다." -앞으로 계획은."앞으로도 바울선교회 봉사를 계속하고요, 한국교회에 힘과 격려가 된다면 집회도 계속 참석하고, 나 자신의 회개도 계속하고, 주님이 허락하는 날까지 할 일을 하겠습니다."※기사내용 가운데 언급된 일부 통계 수치는 이 목사님이 밝히기를 꺼려해서 간접 취재를 통해 기록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 기획
  • 권순택
  • 2012.06.26 23:02

장세환 前 의원은 - 소신 정치투쟁 선봉역할…'불출마 선언' 세간의 화제

장 전 의원은 시쳇말로 세상을 쪽 팔리지 않게 살려고 노력해 온 언론인 출신 정치인이다. 언론인으로선 정론직필했고 국회에 들어가서는 '튄다'는 소릴 들을 정도로 소신 정치를 했다. 지역과 중앙의 언론계 후배들한테는 '의리 있는 선배'라는 평을 듣는다. 지난해 12월14일 411총선 불출마를 선언해 주목 받았다. 당시 "예산안언론악법한미 FTA 날치기, LH 전북유치 실패 때마다 느꼈던 야당 정치인으로서의 자괴감과 무력감, 마음의 빚을 이렇게나마 갚고 싶었다."고 기자회견문에 썼다. 결심 과정이 힘들었지 막상 결단을 내리고 나니까 그렇게 마음이 홀가분해질 수가 없더라고 했다. 정치 입문은 민주화운동의 상징인 김근태 대선후보의 캠프에 합류한 게 계기였다. 2001년 9월 공보특보로 발탁돼 함께 일했다. 1979년말 YS(김영삼)의 비서실장이었던 DR(김덕룡)의 권유로 공보비서생활을 한적이 있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90년 YS의 3당 합당으로 그쪽 진영과는 절연했다. 김근태 대선캠프에 합류하면서 본격적인 중앙정치를 익혔고 이 때가 사실상의 정치 입문이었다. 1617대 총선에서 연거푸 낙선하고 2008년 18대 총선(전주 완산 을)에서 당선돼 국회에 진출했다. 전반기(문방위)에는 언론악법 원천무효를 위한 의원직 사퇴 등 정치투쟁에 몰입했다. 이런 활동이 높이 평가돼 경향신문과 유력 주간지인 '시사 인'에서 '정치분야 올해의 인물'로 선정됐다. 후반기(행정안전위)에는 2년 연속 경실련 선정 '우수 의원'으로 선정됐고, 국정감사 NGO모니터단과 시사서울한국문화예술유권자총연합회 등 5개 단체로부터는 '국감 우수의원'으로 선정됐다. YS 비서생활을 그만 두고 낙향해 있다가 1981년 초 전북일보에 입사했다. 지역언론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다 1988년 4월 한겨레신문으로 옮긴 뒤 정치부장(대우)을 지내면서 정부 부처와 정치권의 인프라를 넓혔다. 98년엔 전라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유종근 도지사 시절 정무부지사를 지냈다. 부안 진서 출신으로 전주고와 전북대 법대, 연세대 행정대학원을 졸업했다. 김영숙여사(59)와 회사원인 민국(32) 민수(29) 등 아들 둘을 두었다. 불출마 사실을 언론을 통해 알게 된 아들은 "모두가 다 하려고 하는 국회의원 직을 미련 없이 내려 놓는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욕심을 버릴 줄 아는 용기를 갖고 있는 아버지가 자랑스럽다고 하더라."고 했다. '펜으로 읽는 세상 풍경'(2000년)과 '광장에서 만난 정치'(2011년) 두권의 책을 냈다. 인터뷰 말미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불출마 한 걸 후회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아내와 결혼한 다음으로 두 번째로 잘한 결정일 것"이라고 했다.

  • 기획
  • 이경재
  • 2012.06.19 23:02

장세환 前 국회의원 "일하지 않는 국회의원이 문제…'특권' 과감히 도려내야"

411 총선을 앞두고 정치판을 바꾸자는 목소리가 높았다. 정당과 정치인에 대한 불신이 최고조에 달했다. 쇄신과 혁신은 시대의 아이콘이 됐다. 여야 가릴 것 없이 국민 눈높이 정치를 하겠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기득권 버리기가 곧 실천될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데 총선이 끝난 뒤엔 이런 다급함이 쑥 들어갔다. 달라진 게 없다. 지난 5일이 국회 개원일이었지만 문도 열지 못하고 있다. 현안은 수북한 데도 원(院) 구성 하나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국회의원 '특권'을 개혁하라는 국민적 요구가많지만 이 역시 미적거리고 있다. 국회는 여전히 개혁 대상으로 국민들한테 비쳐지고 있다. 국회의원의 눈에 비친 국회는 어떨까. 작년 불출마 선언을 한 현역 국회의원이 여럿이었다. "국민은 새로운 가치와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데 정치권은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있다."며 자기희생을 한 사람들이다. 그 중의 하나가 장세환(59) 전 의원이다. 두번 낙선한 끝에 어렵게 국회의원이 됐는데 불출마를 선언하고 백수를 자청했다. 담백하고 쓴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인터뷰를 요청했다. 전주 완산칠봉 밑 전통찻집에서 최근의 근황과 국회개혁과제, 향후 계획 등에 대해 한시간 반 동안 얘기를 나누었다.-국회의원이 아닌 민간인으로 보름을 보냈습니다. 소회가 남다를 것 같은데요."지지와 성원을 보내주신 많은 분들께는 참으로 죄송하지만, 한마디로 자유를 얻은 느긋한 기분입니다. 자유시민적 관점에서 볼 때 국회의원이라는 옷은 사실 거추장스러울 때가 많아요." -국회의원 배지를 뗀 뒤 가장 먼저 한 일이 궁금합니다."아내와 함께 여행을 했어요. 저는 국회의원 대우라도 받았지만 아내는 그런 대우도 없이 4년 동안 고생 많이 했습니다. 불출마 결심까지 기꺼이 동의해 준 아내가 고맙기도 해서 위로도 할겸 아내의 제안 대로 해외여행(터키와 그리스)을 다녀왔어요. 자연환경이랄지 휴양시설 등이 너무 좋아 부부가 한번쯤은 꼭 다녀올 곳으로 추천하고 싶습니다." -신분 변화가 천양지차인데 불편한 점은 없던가요."서울에선 지하철을 많이 이용하고 있어요. 하루 만보 이상 걷기 목표를 세웠죠. 불출마 결심을 할 때부터 신분상 변화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해서 그런지 별로 불편함은 느끼지 못해요.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불출마 선언을 후회하게 되고, 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니까 마음에도 없는 헛웃음 칠 일 없고, 국회에서 싸울 일도 없어져 더 편안해졌어요."-경제적인 변화도 있을 터인데 씀씀이는 예전과 많이 달라졌겠어요."이젠 백수 아닙니까. 문제는 전직일 망정 품위유지를 요구받는 백수이기 때문에 단순한 백수가 아니라는 거지요. 이런 백수를 '화백'(화려한 백수)이라고 하던가요?(웃음) 수입은 없고 씀씀이는 줄일 수가 없어 참 고민입니다. 단단히 긴축하고 내핍하는 수 밖에 없을 것 같아요."-얘기를 국회 문제로 옮겨 볼까요. 18대 국회를 평가하신다면."한 마디로 '싸움국회'였습니다. 국회의원이 된 뒤 첫 활동은 서울 명동 한복판 거리에 주저앉아 이명박 정부의 잘못된 한미 쇠고기협상 규탄 및 철회 촉구농성이었죠. 2008년 말 본회의장 점거농성을 시작으로 거리투쟁, 의원직 사퇴, 삭발투쟁 등 온갖 투쟁수단을 동원해 격렬히 저항했습니다. 정부에 대한 감시와 비판의 일환이었지만 투쟁에 많은 시간을 뺏기다 보니 자연 입법활동 같은 생산성과 효율성 면에서는 소홀히 됐어요. 또 해머나 최루탄 같은 과격한 투쟁수단으로 인해 국민적 불신과 비판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그렇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일차적으로는 이명박 대통령의 폭정과 독주 때문이라고 봐요. 마치 노동판의 현장소장을 연상케 하는 막가파식 밀어붙이기에 야당이 맞서 충돌이 일어난 거지요.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국민의 이익을 지키는 일은 야당의 의무 아닙니까. 야당의 리더십 부재에 따른 무기력한 대응과 책임지지 않는 안일한 자세도 지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지금 국민 눈높이에 맞게 국회를 개혁하라는 요구가 많습니다. 대안이 있다면."국회가 불신과 비판을 받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공천과 당의 얼굴인 지도자의 리더십이라고 봐요. 말로는 국민에게 공천권을 돌려줬다고 하지만 사실상 당 지도부가 공천권을 쥐고 조자룡 헌 칼 쓰듯 휘둘러 대는 것 아닙니까. 그러다 보니 능력보다는 지도부와의 친소관계가 공천기준이 되는 기막힌 일이 벌어지죠. 이런 상황이라면 지도부 눈치 보며 줄서기 할 수 밖에 없어요. 이를 거부하고 소신 있게 활동하는 국회의원은 대개 다음 공천 때 보복을 당합니다. 이를 개선하지 않고는 국민 신뢰를 회복할 수 없어요. 방법은 고비용저효율 구조의 상징인 중앙당을 폐지하면 됩니다. 미국처럼 당 지도부를 없애고 원내 지도부만으로 운영하는 것입니다. 중앙당이 폐지되면 중앙당 유지를 위해 투입되는 엄청난 국고보조금도 대폭 절약돼 이중으로 이익입니다. 지도자의 리더십 부족은 개인의 문제인 만큼 정치권 스스로 해법을 찾아야겠지만 중앙당 폐지는 제도적인 문제이므로 의지만 있으면 해결될 수 있습니다."-국회의원한테는 특권이 200여개나 된다고 하는데 특권이 너무 많은 것 아닙니까."글쎄요, 세어보지 않았지만 언뜻 생각해도 2백개 씩이나 되는 것 같지는 않고요, 어쨌든 상당한 특권을 누리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국회의원직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많아요. 특권에 대한 비판 얘기가 나오는 건 국회의원이 그만큼 일을 하지 못한다는 반증이지요. 국회의원의 권위를 의식해, 시쳇말로 개폼 잡기 위해 배려된 특권이 있다면 과감히 도려내야 합니다. 그것이 민주주의 정신에 부합됩니다. 19대 국회에서는 본격적인 특권 정비가 이뤄지기를 소망합니다."-이른바 국회의원 '노후연금'에 대한 국민 비판이 거센데 향후 수급대상자로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당연히 개선돼야 합니다. 65세 이상 전직 국회의원에게 무조건 지급한다는 건 국민정서와 맞지 않아요. 국회의원으로서 1년 미만 재직했고, 파렴치범으로 의원직을 상실한 경우, 일반 상식에 비추어 재산이 많은 경우 등은 제외하도록 관련 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무노동 무임금'을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많습니다."원칙적으로는 찬성합니다. 하지만 무노동의 범위를 정하기가 쉽지 않은 데다 소수 야당 탄압용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어요. 장기 파행 시 무임금을 적용한다면 정부가 일방 독주할 경우 투쟁수단을 상실할 수 있다는 점도 고려돼야 돼요. 현실 가능성은 커 보이지 않습니다."-쇄신이나 혁신도 이뤄지지 않고 야권통합도 그 의미가 퇴색해 버렸는데 불출마 선언을 한 의미가 없어진 것 아닌가요."당시 '변화와 개혁을 통한 새로운 정치'를 요구하는 국민적 열망이 봇물을 이루던 역사적 전환기였습니다. 사람을 바꿔 개혁적인 새로운 정치를 통해 정권을 교체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그 뒤 우리 당이 보여준 정치는 참으로 실망스럽기 짝이 없어요. 계파 이익에 함몰돼 무원칙, 무감동, 무개혁 공천으로 총선을 죽 쑤게 만든 것이 한명숙 지도부였습니다. 오죽하면 총선 때 (여당을 심판하지 않고)야당이 심판 받는 한국 정치사상 초유의 일이 빚어졌겠습니까. 씁쓸할 수 밖에요." -기억에 남는 의정활동을 꼽으라면 어떤 게 있을까요."공무원연금공단전북지부와 전주전파관리소의 광주통폐합 방침을 백지화시킨 걸 꼽을 수 있겠지요. 국감때 문제점을 지적하고 장관을 다그쳐 무산시켰어요. 또 음향대포 도입을 저지시킨 것도 기억에 남아요. 당시 조현오 경찰청장이 이명박 대통령의 내락을 얻어 시위진압장비로 도입하려 했던 음향대포는 시위대는 말할 것도 없고 시위현장 부근의 일반시민들에게까지 청력손상을 입힐 수 있는 인명 손상무기였습니다. 구체적인 자료와 근거를 제시하며 집중 추궁하자 한나라당 의원들도 동의하면서 결국 도입을 무산시켰습니다. 당시 경실련은 '피감기관의 잘못된 정책과 행태에 대한 집요하고 날카로운 추궁이 돋보였다'고 논평했지요."-지역이 발전하려면 도정과 국회의원, 국회의원간 응집력이 중요할 겁니다. 전북의 정치력이 취약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데 경험해 보니 어떻던가요."4년 간 의정활동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북의 분열'이었습니다. 국회의원들끼리, 또는 국회와 도정 간에 정례모임 자체가 없어요. 예산확보 등 필요한 때만 정책간담회 몇차례 갖는 게 고작입니다. 그러다 보니 전북발전을 위한 중지가 제대로 모아지지 않아요. 지도부가 무관심하기 때문이지요. 정치권과 도정은 전북발전이라는 대명제 아래 굳게 뭉쳐야 합니다. 정례모임을 통해 무엇이 부족한지, 개선점은 무엇인지 항상 현안을 점검하고 누수가 발생하지 않도록 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도지사는 지역에 얽매일 필요가 없어요. 도정은 부지사한테 맡기고 서울에서, 국회에서 활동하고 외국도 나가는 등 스케일이 크게 활동해야 해요."-전북의원 11명중엔 초선의원이 7명이나 됩니다. 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은."젊고 패기 넘치며, 역동적인 분들이 많아 기대가 큽니다. 공천 불이익을 미리 상정해 여기저기 눈치 보며 줄서기 하는 구태는 버려야 합니다. 선공후사(先公後私) 정신으로 소신 있게 밀어붙이는 뚝심이 필요합니다. 단결과 소신 두가지를 부탁하고 싶어요. " -국회의원의 매력과 경계해야 할 독(毒)으로는 무얼 꼽을 수 있을까요."국회의원은 매력있는 직업입니다. 억대 연봉에 9명의 보좌진(인턴 2명 포함)을 둘 수 있고 불체포특권과 면책특권 등 많은 특권이 주어집니다. 하지만 이런 특권에 취해 본연의 임무인 국민에 대한 봉사를 게을리 하면 그건 바로 독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특히 국회의원이라는 직위를 이용해 이권이나 인사에 개입하는 것은 가장 경계해야 할 행태지요. 이른바 당론이라는 미명 아래 개인의 정치적 의사가 때로 사장되는 것도 일종의 독이라 할 수 있습니다."-계속 백수 생활 할 겁니까.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정치적 활동은 당분간 중단한 채 평범한 시민으로서 일상의 자그만 기쁨을 누리고 싶었는데 대선 때까지는 그 소망을 유보해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손학규 전 대표의 요청에 따라 손 캠프에 합류했습니다. 손 전 대표는 대학시절 민주화운동, 졸업 후에는 노동운동을 하는 등 청년시절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치열한 투쟁을 벌인 분으로서 아주 양심적이고 정의로운 분입니다. 부드러우면서도 강한가 하면 한없이 겸손하고 남의 아픔과 고통 해결을 위해 직접 행동에 나서는 실천가로서 보편적 복지와 경제민주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요구하는 지금의 시대정신에 딱 들어맞는 분이라고 믿습니다." -항간에는 2014년 도지사 선거에 나설 것이라는 설이 있던데요."불출마 선언을 하니까 그런 얘기가 봇물처럼 터져 나옵디다.(웃음) 처음에는 '도지사 나가려고 불출마했다'는 말이 돌더니 나중에는 '장세환 같은 사람이 도지사 돼야 한다'는 말로 진화(?)하더라고요.(웃음) 솔직히 저는 단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런 생각을 했다면 제 성격상 '도지사 출마를 위해 이번 총선서 출마하지 않겠다'고 직접 선언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어떤 시대적 소명이 주어진다면, 또한 그런 정치적 환경이 조성된다면 무리를 하면서까지 피해갈 생각은 없어요. 저 개인적으로는 권력의지보다는 자유의지를 더 사랑합니다만 지역발전과 국민을 위한 봉사는 개인 차원을 넘어 공인에게 주어지는 의무라서 그렇습니다."-전북엔 해결해야 할 현안들이 너무 많습니다. 언론인 출신으로서 전북일보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우리 지역에서 가장 오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전북일보에 대해 항상 무한한 애정과 신뢰를 보냅니다. 지역 언론의 맏형으로서 지역발전과 도민 복지향상의 중추적 역할에 대한 기대가 커요. 열악한 언론환경 속에서도 춘추필법을 실천하는 가족들을 존경합니다. 권력과 자본의 횡포에 맞서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고 정의와 인권을 바로 세우는 정론지로 거듭나길 바랍니다."

  • 기획
  • 이경재
  • 2012.06.19 23:02

고석만 총감독은…

1948년 전주 교동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어린 시절을 외롭게 보냈다. 부친이 고위직 행정공무원이어서 윤택한 생활을 했지만 집에 마음을 붙이지 못했다. 전주 북중 2학년 때 서울로 올라온 그는 공부 대신 다른 쪽(?)에 마음을 두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싸움 초단'일 정도로 싸움을 잘했다. 방황했던 어린 시절에는 감추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지만 그래도 그 시절이 있었기에 문화 판과 인연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방황했던 시절, 고등학교를 여섯 군데나 전전했던 그는 '최종에는 명지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중고등학교를 마음대로 다닌 것도 자신의 삶에'필요악'이었다고 말하는 그는 나름대로 철학과 지각을 갖고 있는 아이의 방황이라면 언젠가는 제자리로 온다고 믿고 있다. 중학교 3학년 때는 공보처가 주최한 시나리오 공모에 응모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외갓집을 가기 위해 가출했던 기억을 그대로 담은 이 최초의 작품은 물론 떨어졌다. 방황은 대학 입학과 함께 끝냈다. 연극영화과 실기시험에 자신이 없어 서라벌예대 신문방송학과에 들어갔지만 3학년 때 과를 옮겨 끝내 연극영화과를 졸업했다. 1학년 2학기 때 정식으로 출가(?)한 이후에는 학교에서 기숙하며 지냈다. 그가 '생애에서 가장 알차고 화려하고 보람 있게 생활했던 때'로 회상하는 그 시절에 '슬리핑 야성'도 단련됐다. 1973년 MBC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4개월 동안 날밤을 새며 학과공부를 했는데, 전문시험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맞아 합격했다. 신입시절 1년 동안은 통근 사이렌 불면 퇴근하는 일상에서 매일 아침 생방송을 했을 정도로 방송에 모든 시간을 바쳤다. 일 잘한다는 소문이 나 드라마 파트와 쇼 파트에서 프러포즈를 받았는데 더 적극적이었던 드라마를 택했다. 어린이 연속극을 만들 때는 아동심리까지 공부했고 청소년드라마 〈제 3교실〉을 만들때는 PD라는 직업에 대한 철학을 갖게 됐다. 이후 〈수사반장〉 〈제 1공화국〉을 비롯한 공화국 시리즈, 〈거부실록〉 〈야망의 25시〉 〈땅〉 〈간난이〉등 수많은 대표작을 냈다. MBC를 거쳐 SBS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그는 정치드라마에 열정을 쏟았다. 덕분에 '고석만'이란 이름은 정치드라마의 대명사가 됐다. 99년 청와대 행정관으로 들어가 일하기도 했지만 그 뒤 국립영상간행물제작소 소장과 K-TV대표를 거쳐 2003년 EBS 사장으로 다시 방송으로 돌아왔다. 은퇴할 나이에 오로지 '좋은 드라마를 만들고 싶어' MBC 제작본부장으로 다시 들어갔으나 그 꿈은 무참히 깨졌다. 2007년 한국콘텐츠진흥원 원장에 취임했으며 퇴임한 이후 연극 연출 등으로 '젊은 시간'을 보내다 여수엑스포 총감독으로 합류했다.

  • 기획
  • 김은정
  • 2012.06.05 23:02

고석만 2012 여수세계박람회 총감독 "융합 콘텐츠 시대… 박람회도 새로운 패러다임 필요"

"수명 100년의 문화콘텐츠를 만들고 싶다." 5년 전쯤 한국콘텐츠진흥원 원장에 취임한 그의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다. 아무리 문화가 밥이 되는 시대라지만 아무것이나 밥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은 뻔 한 이치인데도 그것을 잊고 있었던 사실에 새삼 고개 끄덕여졌었다. '수명 100년 문화콘텐츠'를 내세운 그의 인터뷰는 그래서 더 흥미롭게 읽혀졌다. 고답적인 논리나 주장에만 의지하지 않고 생생한 문화현장의 안팎을 분석해낸 직관과 경험은 그냥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 터였다. 들여다보니 그의 활동은 늘 현장, 그 중심에 놓여 있었다. 어느 분야에서 일하든 뚜렷한 자기직관과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으로 탐구하며 방향을 제시하고 그 선택을 열정적으로 실천하면서 한국 문화의 흐름을 새롭게 열어온 사람. 지금은 2012여수세계박람회조직위원회 현장에서 또다시 문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내기 위해 고민하고 있는 고석만 총감독(65)을 만났다. 개막 한지 20일째 되는 날이었다. 여수박람회는 비교적 무난한 출발이 안정적 운영을 예고하고 있지만, 널뛰기하듯 하는 초반의 방문객수 때문에 언론사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인터뷰 중에도 방문객숫자 등 현장 상황이 총감독의 휴대폰 문자보고로 쉴 새 없이 전달됐다. 긴장할 수밖에 없는 3개월 동안의 일상이 짐작되었지만, 그의 의지는 그래서 더 충만해보였다. 여수박람회의 가치 구현, 그 목표는 무엇인가 물었더니 망설임 없이 "문화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박람회를 만드는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문화적 일상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키는 길을 모색해온 그와의 인터뷰는 그가 놓아온 삶의 궤적에서 돋보이는 한국문화사의 한 단편을 이야기로 듣는 기록 같았다. 정작 그는 손사래 치지만 한국문화의 지형이 그가 걸어온 노정위에서서 더 새로워졌음을 또한 알게 됐다. -여수엑스포에는 언제 합류하셨습니까. 인연도 궁금합니다."엑스포조직위원회가 공식적으로 출범한 것이 4년 전인데 저는 2년 전에 합류했습니다. 조직위에서 연락이 와 강동석 조직위원장을 뵈었는데 총감독에 대한 의향을 물어보시더군요. 서슴지 않고 의향이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저도 추천된 이유가 궁금했는데 위원장님께서 '엑스포가 갖고 있는 타깃 층이 있다. 다른 어떤 예술문화 장르와는 다르게 불특정 대다수의 대단히 보편성을 갖는 것이다. 그런데 고 감독은 이미 방송을 통해 충분히 훈련되었다고 생각했다'고 하시더군요. 제가 방송 쪽에서는 타율이 좋은 편이었거든요.(웃음)" -개막식에 많은 공을 들였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혼신의 힘을 쏟았어요. 올림픽이나 월드컵과 같은 다른 영역의 개막식과는 차별성을 갖게 하는 것이 과제였는데 오랜 시간 고민하다가 그 답을 지역적 특성에서 찾았습니다. 여수는 아름다운 풍광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을 주목했어요. 모든 분들이 실내 개막식을 기대했는데, 풍광에 대한 자신감으로 바닷가로 나갔고, 시간도 밤 시간대를 택했습니다. 공간의 새로운 확장, 그리고 시간에 대한 개념을 뛰어넘고 싶었습니다." -엑스포에 담고 싶었던 콘텐츠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여수엑스포는 직전에 열렸던 상해엑스포와 차별성을 갖는 것이 과제였습니다. 규모도 그렇고 예산 면에서도 큰 차이가 나는데, 그래서 어떤 형식으로 다루어야 하는지 더 고민이 많았죠. 게다가 예전의 박람회는 산업박람회적인 성격이었지만 오늘날의 박람회는 국가들의 문화적 이미지를 보여주는 경향으로 바뀌었습니다. 특히 융합시대에 진입하는 지금은 박람회도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관객들의 패러다임도 그렇고요. 어떻든 '진일보' 해야 한다는 것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의 고민이었습니다."-엑스포는 전시 형식이 가장 관심사인데요. "여수엑스포는 새로운 인식과 감동을 전할 수 있는 전시 방식을 찾는데 오랜 시간 투자했습니다. 열어놓고 보니 그런 의도가 많이 비껴가진 않은 것 같아 다행스럽습니다. 사실 그동안 전시는 패널전시를 통한 주입식이었습니다. 우리는 일방적으로 소개하고 설명하는 패널전시 대신 드라마 제작 용어로 보자면 '풀 샷(full shot) 형식'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을 저는 '풀 샷 전시'라고 표현하는데, 부분적으로 쪼개지 않고 전체적으로 철학과 가치관을 담아내는 형식입니다. 그 '풀 샷' 속에서 관객들이 '나만의 것'을 찾아낼 수 있기를 기대했습니다."-이제 좀 엑스포를 관전하시는 마음으로 돌아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 "워낙 개막식에 혼신의 힘을 다 쏟아서인지 개막식 끝나자마자 탈진해서 병원신세를 져야 했어요. 원래 무슨 일을 맡으면 '올 인'하는 스타일이어서 그것이 지나치면 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만큼 빠져버리죠. 엑스포가 끝날 때까지는 여유를 갖고 돌아보는 일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함께 일하는 분들은 좀 고달프겠는데요. "힘들어하지요. 그래도 끝나고 나면 보람을 함께 나눌 수 있으니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연출자로서 스텝을 관리할 때도 쉴 때는 확실하게 쉬고 일할 때는 완벽하게 집중하게 하는 방식으로 일했습니다. 고도의 감각은 고도의 긴장감에서 나오는 것이고, 긴장을 늦추지 않았을 때 좋은 감각도 나오고 기억력도 더 잘 발동하거든요." -젊은 시절 드라마 피디로 이름을 날렸던 소위 '스타 피디' 1세대신데 그 힘이 거기서 나온 것 같습니다. "20대 후반부터 20여 년 동안 전성기를 구가했다고들 하는데 만약 그랬다면 늘 고도의 긴장감 속에서 보다 더 완벽한 준비를 하고, 다른 사람 보다 몇 배 노력했던 덕분일겁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것이 별로 없고 오히려 학식이나 재주도 부족하니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제 전공 분야에서 노력하는 길 밖에 없었거든요."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일을 해오셨는데, 항상 그 분야에서 새로운 일을 주도해 특정한 흐름을 만들어오셨습니다. EBS 사장으로 재직하실 때는 실험적인 사업들을 주도해 화제가 되었죠. "그때는 어떻게 보면 만용에 가까울 만큼 용기가 있었던 것 같아요. 다행히 성과도 좋았고요. 50-60년대와 70년대를 이어오는 한국 문화사를 담아내는 드라마를 제작한 것이나 일주일동안 하루 17시간씩 연속 방영하는 획기적 편성을 감행한 '국제다큐멘터리페스티벌', 1백만 명 동시 접속 수능방송 운영, '스페이스 공감' 같은 것들이 기억에 남습니다."-그런데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떠나시게 되었죠. 그래서 원망과 비판을 들으셨죠. "결과적으로는 제 오판이었어요. 엠비시 사장 공모에 나서면서 사표를 내게 되었는데, 단순한 권력욕은 아니었어요. 제가 출발했던 엠비시를 성장시켜 새로운 터전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주위에서 권유도 있었지만 거기에만 휘둘린 것은 아니고요. 후에 회사에서 여러 통로로 함께 일 해줄 것을 강권해 제안 받은 여러 직책 중에서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 제작본부장을 받아들였습니다. 사실 굴욕적 입성이었지만 제 소신을 펼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현실은 정반대였어요. 무참한 세월이었습니다." -무참한 세월이라는 표현이 얼마나 그 시절을 힘들게 보내셨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콘텐츠진흥원에 가셔서는 문화의 가치를 어떻게 담아내셨습니까. "'문화는 앞으로 먹을거리'라는 부분에 방점을 찍었습니다. 모든 사업을 그 위에서 기획하고 실행했죠. 100년 수명의 콘텐츠 만들기도 그 연상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성과는 어땠습니까."과제가 많았어요. 융합시대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구조를 우선 만들어야 했습니다. 물리적 융합이 아니라 화학적 융합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으니까요. 예를 들어 현대미술을 보면 어느 시점에 와서는 '예술은 죽었다'고 이야기했을 정도로 동의어 반복의 시대가 있었잖아요. 그런데 다행히 백남준 류의 융합 콘텐츠가 등장했지요. 새로운 미디어 아트 같은 것들이죠. 융합콘텐츠는 쌍방향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제1의 공간과 2의 공간이 만나 3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콘텐츠진흥원이 해야 할 일은 바로 이 제 3의 공간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그 방향은 유효하다고 봅니다."-100년 수명의 문화콘텐츠를 제안하고 실행도 하셨는데, 지금 한국문화 세계화에 가장 절실한 과제는 무엇입니까. "국가적 차원에서 생각한다면 문화의 유통정책을 바로 잡는 일입니다. 한국 문화는 유통부분이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어요. 이것이 바로 잡지 않으면 한국문화의 미래는 없습니다. 예컨대 한국최고의 종합유통문화회사 같은 것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예요. 한국 문화 유통시장은 완벽하게 99대 1의 논리에 빠져 있습니다. 모든 문화가 번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1프로의 창작자는 생활고에 시달려야 하는 아주 나쁜 구조지요.(그는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의 안타까운 죽음을 예로 들었다) 정부도 정부지만 일본의 '덴츠' 처럼 오늘의 문화판을 주도하는 거대 문화 유통 회사들이 인식을 바꾸고 구조를 바꾸어 창작자와 현장이 같이 가는 구조를 만들어야합니다." -거대자본이 독점하는 문화유통 구조가 가져오는 심각성은 어느 정도인가요. "방송 쪽을 보죠. 문화콘텐츠, 한류와 관련 있는 회사가 아주 많습니다. 이들의 궁극적 목적은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인데, 문광부에 등록된 것만 작년 기준 990개라고 하죠. 이중 케이블 회사에 프로그램을 납품하는 회사가 214개, 그 중에서 프로그램을 내고 돈을 받는 회사는 50여개에 그칩니다. 나머지는 전부 적자인데, 회사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서 울며 겨자 먹기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죠. 초대형 MSO(복수종합유선방송사업자)가 전체 85%를 차지하고 있는 유통구조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영화판도 마찬가지예요. 이러한 독점식 유통구조가 지속되는 한 한국문화의 미래는 없습니다."-산업화에 뒤쳐진 전북은 오랜 세월 패배의식에 빠져있습니다. 그러나 문화가 밥먹여주는 시대를 맞았으니 가능성과 희망이 있지 않은가요. "물론입니다. 그러나 과제가 좀 많은 것 같습니다. 약간 벗어난 이야기인데 같은 맥락으로 보고 한 가지 제안하고 싶군요. 오래전부터 UEC(Urban Eentertainment Center) 개념 도입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해왔습니다. 구체적인 콘텐츠도 제안 했었구요. 전라북도도 자원은 많은데 그것을 보편화 대중화하고 산업화 할 수 있는 뭔가가 빠져 있다는 느낌을 갖습니다. 전주만 해도 영화제와 대사습, 한옥마을 같은 자원이 있고 한스타일 자원도 많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것은 그런 것들이 제각각 놓여있다는 것이에요. 전주가 가장 한국적인 도시로 가려고 한다면 특히 UEC의 개념이나 기구, 체계를 주목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전라북도에서 지금 대표적인 브랜드 공연물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조언을 해주신다면. "장예모 감독이 제작한 '인상 유삼저(印象劉三姐)'가 도시 브랜드 공연이 성공한 예죠. 중국에서도 당초 3개 도시가 제작했던 것이 7개로 늘었다고 들었습니다. 성과가 좋으니 그러한 흐름이 만들어지는 것이겠죠. 여수 엑스포의 '빅오쇼'도 브랜드 공연물로 내세울 수 있습니다. 엄청난 예산이 투자되었고, 호응도 높아 귀하게 여기고 있어요. 중요한 것은 어떤 작품을 어떻게 제작하느냐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브랜드 공연물을 만든다면 대형공연물이 될 텐데, 치밀한 논의와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규모에만 집착해 제작한다면 관객보다 출연자가 많은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 부분들을 극복해야 하는데, 지역에서도 고민하는 분들이 많겠지만 우선은 호흡을 길게 가져갈 것을 권합니다. 예컨대 프랑스의 아방가르드가 일어나듯이 작은 것들로 시작해 문화의 큰 틀까지 바꾸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중요한 것은 구조이고 건강한 구조가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콘텐츠라도 빛을 내기 어렵습니다." 2시간 넘게 이어진 인터뷰 동안 그는 문화에 대한 깊고 넓은 식견을 거침없이 풀어냈다. 모두가 그가 체득한 생생한 현장으로부터 길어 올린 것들이었다. 엑스포가 끝난 후 계획을 물었더니 아직 마음에 놓아둔 일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문화가 밥 먹여주는 이 시대'에서 고 총감독이 쉴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아 보인다. 스스로는 이미 일할 수 있는 절정기가 끝났다고 했지만 그는 여전히 한국문화의 리더이고 첨병의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 기획
  • 김은정
  • 2012.06.05 23:02

김용택 시인은

김용택 시인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간행되고 있는 초중고 국어교과서에 글이 가장 많이 실린 문인이다. 시와 산문이 50편이 넘게 실려 있다. 쉽게 말해 '국민시인'인 셈이다.그를 두고 고은 시인은 "용택이는 용택이라고 함부로 부를 수 없는 사람, 내가 무서워하는 사람" 이라고 했다. 매번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오른 시인이 외경(畏敬)하는 천상의 시인인 것이다. 또 이창동 영화감독은 "김용택의 시만큼 나를 위안하고 구원한 것도 없다"고 밝히고 있다. '아이의 영혼을 잃어버리지 않은 어른'이라 불리는 이 시인을 키운 건 무엇일까. 그것은 섬진강과 어머니, 그리고 독서가 아닐까 싶다. 서정주는 자신을 키운 게 8할이 바람이었다고 하지만 김용택 시인을 키운 건 8할이 섬진강이었다. 1948년 임실군 덕치면 진메마을 섬진강가에서 태어난 그는 순창중과 순창농고를 졸업하고, 이듬해 우연히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2008년 퇴직하기 까지 38년을 자신의 모교인 덕치초등학교와 인근 운암초등학교 마암분교 등에서 근무했다. 이곳에서 그는 천진한 아이들과 생활하면서 시인으로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지독하게 독서를 했고 신문을 지식창고로 활용했다.1982년 창작과 비평 21 신인작가상에 불후의 명시 '섬진강1' 등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이후 섬진강, 맑은 날, 그 여자네 집, 나무 등 11권의 시집과 섬진강 이야기, 사람 등 10권의 산문집, 동시집 콩, 너는 죽었다 등 50여 권의 책을 펴냈다. 그리고 곧 섬진강을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한 시집과, 인터뷰집, 산문집 등을 쏟아낼 예정이다.중요한 것은 지금도 그의 작품들이 진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퇴직 이후 TV 출연과 강연 등 바쁜 일정에도 오히려 글발에 힘이 붙고 있는 것이다.

  • 기획
  • 조상진
  • 2012.05.29 23:02

김용택 시인 "시인은 시대와 긴장감 놓지 않아야… 고행의 시간 필요"

거침이 없었다. 예전의 '섬진강 시인= 김용택'이 아니었다. 말발이며 글발이 경지에 오른 듯했다. 그의 말에선 몽고 기병의 말발굽 소리가 났다. 끝없이 펼쳐진 평원을 향해 거침없이 내닫는 모습이었다. 시와 산문에 날개가 달렸고, 우리 교육에 대한 소신이 칼날 같았다. 정치와 사회를 보는 눈도 명쾌했다. 때론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그는 요즘 38년간 몸 담았던 교직을 떠난 후 신바람 나는 생활을 하고 있다. 밀려드는 강연요청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고, 글에도 청춘의 기운이 실렸다. 그러면서도 특유의 맑은 웃음 속에는 섬진강 물이 흐르고 진메마을을 스치는 바람이 일었다. 국민시인이자 국민강사로 제2의 삶을 사는 김용택 시인(64)을 그의 전주 자택으로 찾았다. 인터뷰는 창문 밖으로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SK뷰 아파트 2층 서재에서 2시간가량 이어졌다.- 요즘 굉장히 바쁘신 것 같습니다. 방송 출연도 잦고, 강의도 많이 나가시고"저도 깜작 놀랐는데 방송 섭외가 많이 들어옵니다. KBS '한국의 재발견' 프로를 1년간 맡았고, SBS '물은 생명이다(도랑 살리기)'를 10월까지 매주 찍고 있습니다. 또 교육방송(EBS)도 6월부터 10회 학교 찾아가는 프로그램을 하기로 했습니다."- 강연도 한 달에 20번 이상 나간다고 들었는데요? "강연 요청을 거의 감당하지 못합니다. 10월까지는 거의 짜여 있습니다. 4, 5월 달에는 20번도 더 했죠. 서울 같은데는 하루에 3군데를 맞추어 갈 때도 있고, 2군데는 보통이고요. 예전에 초등학교 출퇴근 할 때 수업 일수와 거의 비슷하게(웃음)." - 아, 참 축하드려야겠습니다. 6월 2일 시상하는 '제7회 윤동주 문학대상' 수상자로 선정되셨던데요. 수상작이 '내가 살던 집터에서 마지막 기념촬영' 등 5편이던데, 어디에 실린 작품인가요?"창비에 실린 것 같아요. 새로 쓰는 섬진강 연작 중에 하나죠. 제가 2002년도에 본격적인 시집을 내고 그 이후 헤맸죠. 제대로 된 시집을 못냈고 제대로 된 시가 쓰여지지 않았죠. 왜냐면 고향에 대한 상실과, 상실의 아픔이 너무 커서 10년간 본격적인 시를 못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올 1월부터 시를 다시 쓰기 시작했죠. 섬진강 연작을 19편 정도 쓰기 시작했는데, 그 중 몇편을 여기저기 문학잡지에 발표를 했죠. 그동안 제가 써왔던 시들과는 다른 시들을 쓰고 있는데, 거의 시집으로 한 권 정리가 될 것 같아요."- 책 제목은 정해 놨습니까?"제목을 정해 놨는데, 그 책은 자본의 횡포, 자본에 끌려 갈 수 밖에 없는 삶의 처절함, 자본과의 대결, 그런 이야기죠. 그동안에 섬진강이라는 가냘프고 서정적인 어떤 그 강이 남해로 스며들었다고 하면, 이번에 섬진강 시집은 남해로 가지 않고 도시로 가는, 사람들을 향해 흘러가는 그런 아픔, 자본을 향해 흘러 들어가는 그런 어떤 고통들이 주조를 이르고 있다고 봐야죠. 그래서 그 글을 보는 사람들은 '정말 시가 젊어졌다, 청춘이다, 무모하다.'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집 안에 들어오면서 보니까 새로 나온 '김용택의 어머니'란 책이 눈에 띠던데요. 어머님의 건강은 괜찮으신가요? "아주 안좋으십니다. 지금은 병원에 주로 계시고. 제가 처음 어머니 책을 내려고 할 때는 굉장히 꺼렸습니다."- 왜요?"사진을 찍는 분이 계시는데, 그 분이 1980년 후반부터 섬진강 사진을 많이 찍었어요. 그 사진들을 찍다가 어느 날, 어머니를 찍은 거예요. 어머니가 한 일흔 살쯤 되셨을 땐 것 같애요. 어머니 사진을 찍어서 사진집을 내자, 그래서 난 어머니 책을 낼 수 없다, 우리 어머닌데, 어떻게 내가 어머니에 대해서 쓸 수가 있느냐. 자식들은 다 불효막심한 놈들인데, 작년에 또 책을 내자고 하면서 이 사람이 출판사에 그 사진집을 갔다 줬어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잘 살고 많이 배운 사람들 책은 많아요. 아들 딸이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출세한 사람들의 어머니에 관한, 그런 책이 있어요. 근데 정말 일제 식민지 시대때 태어나서 625 전쟁 겪고, 새마을 운동 겪으면서 농촌 전체가 와해되는 과정에 살았던 가난한 시골 아낙네들의 글은 전혀 없어요. 그래서 이거 내도 괜찮겠다, 우리 어머니 이야기지만 결국은 우리 시골에 있는, 평생 농사를 짓고 사는, 그러면서도 결코 인간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지켰던 그런 농사꾼들의 부인 이야기가 없었던 거죠. 굉장히 반응이 좋았습니다."- 선생님은'섬진강이 나의 전부다' 이런 말을 하셨는데 지금도 그렇습니까?"그렇죠. 그 때 섬진강을 쓸 때, 1970년대 말까지만 해도 사실 농촌공동체 문화가 많이 살아 있고, 남아 있을 땐데, 그 때는 강물이 조금은 살아 있었어요. 물고기도 많고, 우리 동네 목욕(수영)도 갈 수 있었고, 근데 90년대 넘어 오면서 강물이 완전히 죽었죠. 그러다 보니까 순환의 고리가 끊어진 것이죠. 강물이 죽어서 저도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죠.(웃음) "- 제가 보기에 '섬진강 1'은 대단한 수작입니다. 그런데 죄송한 얘기지만, 그 뒤에 그런 수준의 시가 안 나오는 것 같더라고요? "저도 그것을 굉장히 아쉽게 생각을 하죠. 그러다가 '그 여자네 집'이라는 시가 나오면서 약간 회복을 했고, 7-8년 후에 '나무'라는 시집을 냈는데, 약간의 자신감을 얻었고. 몇 년전에 '수양버들'이란 책을 냈습니다. 그 때 약간 문학적인 회복기였는데 실패로 돌아갔어요. 다시 섬진강을 쓰면서 젊어졌죠. 자신감이 붙어서, 나는 지금부터 새로운 출발이다."- 저도 시골에서 자랐습니다만, 산만 있고 개울이 있고 그러면 대개 답답하게 느끼는데 그것을 시로 만들고, 자기화시키고 그런 게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제가 초등학교 선생만 했잖아요. 일반적으로 초등학교 교사라는 게 굉장히 폐쇄적이고, 굉장히 한 쪽에 있죠. 교육을 담당해야 하기 때문에. 근데 저는 문단에 나온 이후로 세상과 한번도 뒤떨어져 본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어요. 저는 공부를 한 거죠. 끊임없이 책을 읽고 세상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죠. 아마 지금도 현실과 팽팽하게 긴장감을 갖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하죠."- 선생님은 시를 참 쉽게(?) 쓰는 것 같습니다. 안도현 시인 같은 경우, 단번에 쓰지 못하고 50번을 고치는 경우도 있다는데?"저는 시를 대개 한 번에 다 씁니다. 예를 들어 동시집 '콩, 너는 죽었다'도 한두 달에 다 썼고, 평소에는 잊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시가 써지면 한두 달 정도 시를 집중적으로 씁니다. 그러면 한 권이 거의 돼요."- 창작과정에서 시와 동시의 차이는 뭘까요?"시작이 다르죠. 근데 보면 하나죠. 시든 동시든 산문시든 그게 하나인 거죠. 하나의 이야기를 놓고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동시를 쓰기도 하고, 어른들이 좋아하는 시를 쓰기도 하는데, 제 시는 일단 그림이 먼저 그려집니다. 그리고 가락이 있습니다. 강물이 흘러가듯 바람이 나뭇가지에 불듯 이렇게 흐름이 있죠. 제 시는 노래로 만든 게 굉장히 많습니다."- 선생님 글은 시 못지않게 산문이 빼어나다고 느낍니다. 시와 산문의 경계는 어떻게 보십니까? "일단 시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음악성과 미술성이 있어야죠. 특히 음악을 떠나서 시를 생각할 수가 없죠. 우리 인간이 하루하루를 사는데 삶에 리듬이 있잖아요. 그 리듬을 떠나서 똑똑 끊어서 삶을 살 수 없잖아요. 사실 산문이 더 어려울 때도 많죠. 산문은 사회를 닮아야 하고, 사회문제를 담아야 되죠."- 선생님은 38년간 교직에 계셨고 고향인 임실 인근에서만 근무했습니다. 그 중 26년 동안 2학년 담임만 맡았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개인적으로는 2학년이라는 게 시간이 좀 많이 있죠. 오후 수업 안하고. 2학년에게 배울게 너무 많아요. 닳아진 인간이 아닌 거죠. 충동적인 인간들이예요. 말하자면 고정되어 있는 관념이 없습니다. 굉장히 자유로운 영혼이어서 하루하루 부딪치는 게 너무 너무 재밌는 거예요. 또 아이들이 새로운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신비함을 가졌어요. 그래서 감동을 줘요."- 선생님은 창의력 교육을 중시합니다. 창의력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놀이, 자연을 접할 기회, 독서, 이 세가지가 필요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놀이입니다. 논다는 것은 상대가 있는 것입니다. 상대란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부란 대상만 있는 거죠.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대상만 있는 거죠. 이게 차이가 나는 거죠. 놀이는 상대가 있어서 나를 죽이고 맞춰야 되는 거예요. 대상은 내 맘대로 해버려도 되는 거고. 그래서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혼자 내 맘대로만 하다보니까 개념이 없어지는 거죠. 상대가 아파하는지, 안 아파하는지 모르는 거죠. 괴로워하는 것을 몰라 버리는 거죠. 그러다 보니까 왕따가 생기고, 폭력이 생기고, 가치관의 혼란이 생기고, 영혼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죠. 대상은 영혼이 없는 거잖아요. 무서운 일이죠."- 오랜 경륜에 비추어 우리 교육의 해결책을 뭐라고 보십니까?"가장 큰 문제는 우리 교육이 그 동안 계속 정치권력에 의해서 좌우된 것입니다.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된 국가적 차원의 교육 계획이 필요합니다. 학교 현장으로 들어가면 학교학급당 학생 수가 너무 많다는 거죠. 이게 가장 치명적입니다. 또 큰 문제 중 하나가 교직원의 승진제도를 지금처럼 놔두고는 교육을 얘기할 수가 없습니다. 개방화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육대와 사범대가 지금 체제로 가면 절대 안됩니다. 4년 동안 죽어라 시험공부만 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가정으로 들어오면 우리나라는 가정 자체가 애정과 사랑으로 뭉쳐진 아름다운 공동체가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가정은 없고 가족만 있는 거죠. 너무 썰렁하고 무서운 일이죠. 또 제일 큰 문제는 기업들이, 어떤 애들을 뽑느냐에 따라서 교육제도가 바꿔지는 거죠."- 임실군에서 짓자는 '김용택 문학관'은 거부하고, 작은 학교를 준비하고 계시는데요?"임실군에서 문학관을 자꾸 얘기해서, 제가 감당 못하고, 제가 살아있는 사람인데 무슨 문학관을 짓느냐 했습니다. 시골집에 작은 학교를 짓고 있는데 지금은 덕치초등학교에서 매월 둘째, 넷째주 10시에 제가 아이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농식품부에서 예산을 받아, '섬진강 A+A(Art와 Agric ulture) 타운벨트' 라고 김용택 송만규 임동창해서 돈이 40 몇 억이 나왔습니다. 한 개인한테 14억이 배정 되었는데 그 중 6억은 시설을 합니다. 나머지는 마을을 가꿉니다. 저의 집과 땅을 기부채납했습니다. 관리실하고, 조그만 강당 하나 짓고, 거기서 제가 기거하면서 가르칠 것입니다."- 선생님은 오늘이 있기까지 독서량이 엄청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책을 멀리하는 추세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신문입니다. 전라북도에서 나오는 신문은 전라북도의 모든 중요한 문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바둑까지 모든 일을 담아서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거죠. 이건 어떤 책보다도 중요한 책입니다. 신문을 안보면 시대에 뒤떨어지는 거죠. 저는 종이신문을 3개 봅니다. 정말 꼼꼼하게 보죠. 그리고 사설과 칼럼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인터넷에 들어가서 모든 신문의 헤드라인 기사를 봅니다. 왜냐면 헤드라인이라는 게 신문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문제잖아요. 그리고 모든 신문의 기획기사를 반드시 읽습니다."- 자녀 교육은 어떻게 해 왔습니까?"저희 아들한테 늘상 이런 얘기를 했어요. 공부를 잘해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좋지만, 그것 이전에 내가 좋아하는 일이 뭔가를 찾아야 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 그래서 자기의 삶을 자기가 창조하면서 살아야 된다, 학교가 왜 중요하냐? 학교는 다니다가 다니기 싫으면 말아라. 안 다녀도 좋고, 대학이 절대 중요하지 않다. 사회가 원하는 가치,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가치, 이데올로기에 따라 갈 필요가 없다, 너희들은 너희들의 삶을 가꿔가고 꾸려가라,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검사, 판사, 변호사, 의사, 공무원들만 좋다고 그러잖아요. 근데 저는 그걸 이해를 못합니다. 20살 30살 때 안주 하지 마라. 방황하고 좌절하고 아픔을 느끼고 고통을 느껴서 60살 70살 때 성공한 삶을 살아라. 우리 애들은 그렇게 자랐습니다."- 먼 미래를 내다보시는군요?" 100세 시대잖아요.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절대 하지마라. 어머니가 좋아하는 일은 어머니가 하면 되지, 왜 어머니가 좋아하는 일을 아들에게 시키려고 하냐. 아버지 말을 듣지 마라. 아버지가 좋아하는 일은 아버지가 하게 해라. 선생님 말을 듣지 마라. 네가 좋아하는, 네 맘이 시키는 일을 하라. 그런 거죠."- 전북 문학에 대해 조언을 해주신다면?"전북이 예향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문화예술 자체가 굉장히 빈약합니다. 글 쓰는 사람들은 피나는 수업과정, 거의 도(道)를 닦는 것 같은 문학적 고행의 시간이 필요한데 지금은 그러질 않아요. 문화예술 전반적으로 보면 너무 나이 많은 분들이 오랫동안 문화예술을 장악해 왔습니다. 이게 문화예술계의 큰 병폐죠. 문화예술지원정책을 혁신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 기획
  • 조상진
  • 2012.05.29 23:02

서정태 시인은, 서정주 시인의 동생…'미당시문학관' 지킴이

미당 서정주(1915~2000)의 동생으로 알려져 있지만 미당에 가려 그늘진 삶을 산 인생이다. 공교롭게도 이젠 미당을 지키며 인생을 살고 있다. 아들 딸 다 키우고 68세 때 부인을 떠나 보낸 뒤 1989년 "나를 해방시켜 달라"며 글 읽고 시도 쓰면서 조용히 살기 위해 이 집(우하정)을 샀다. 뒷산(소요산)에 오르며 난초 캐는 재미에 푹 빠져 있던 때도 있었다. "난초에 빠지면 병이 된다"며 1촉에 1억원 이상 가는 난초도 있다고 했다. 모아 둔 난초를 모두 도둑 맞았다. 몸이 불편해 일산에 있는 20평짜리 문촌(文村=글마을) 아파트로 옮겼다가 9년만에 질마재로 내려왔다. 2009년의 일이다. 자의반 타의반이라고 했다. 농림수산부가 농촌공존 정책의 하나로 40억원 규모의 사업을 추진할 당시 질마재가 혜택받기 위해선 우하가 필요했다. 미당시문학관 지킴이가 된 것이다. 이때 흙집도 새로 지었다. 우하는 3남2녀중 셋째다. 위로 미당과 누이, 아래로 동생 둘이 있다. 미당 생가는 우하 생가이기도 하다. 그 집에서 미당이 났다. 미당과는 여덟살 차이다. 미당과 우하는 어려서 한 방에서 지냈다. 미당이 열살, 우하가 두살 무렵 부안 줄포로 이사를 갔다. 당시 줄포는 파시가 형성되고 경찰서가 있을 만큼 번화한 곳이었다. 신학문을 배우게 하기 위해 이사를 한 것이다. 우하는 일본에 유학 가서 중학교를 나왔다. 우하는 시적 기질이 뛰어난 형을 따라 시인이 되고 싶었다. 미당의 영향으로 시인이 됐지만 미당은 동생의 시에 인색했던 모양이다. 우하가 시집을 낼 때 호평하면서 서문을 써 준 것이 전부다. 구상 시인이 친구다. 우하는 시를 접고 기자가 됐다. 1946년 서울에서 민주일보 기자로 출발해 전북지역 일간신문에서 30년간 일했다. 편집국장만 18년을 역임했다. 슬하에 2남2녀를 두었다. 큰 아들 내외가 서울에서 교직에 있고 딸 둘도 서울에 살고 있다. 막내 아들은 미국에서 7년째 살고 있다. 12년 전 미당을 떠나 보낸 뒤 혼자 질마재를 지키고 있다. 미당의 대표시집인 '질마재의 신화'가 고향 마을에 재현되는 게 소망이다.

  • 기획
  • 이경재
  • 2012.05.22 23:02

우하(又下) 서정태 시인·언론인 "'질마재 신화' 재현하면 한국 유일의 '詩 민속촌' 될거야"

우하(又下) 서정태는 시인이자 언론인이다. 미당(未堂) 서정주의 동생이다. 올해 아흔살이다. 지금도 시를 쓰고 있다. 문인이나 언론인에겐 잘 알려져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겐 낯선 이름이다.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미당길 14번지. 미당시문학관 옆 길로 들어서면 나무로 된 커다란 책걸상 모형의 조형물이 나오고 그 아랫길을 지나면 우하정(又下亭)이다. 우하가 살고 있는 집 이름이 우하정이다. 우하는 '질마재 지킴이'다. 지난주 목요일 우하를 찾았다. 우하정 뜰에 들어서니 팽나무와 감나무가 너울 인사를 하며 반겼다. "어르신 계세요?" 하고 들어서니 기다렸다는 듯 반갑게 맞이했다. 허리가 좋지 않아 거동에 불편을 겪는 것 말고는 정정했다. 목소리는 또렷하고 눈매는 형형하며 기억력은 놀라웠다. 사람에 대한 그리움 탓일까.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오전 11시에 인터뷰가 시작됐지만 오후 3시까지 계속됐다. 오래된 인연처럼 스스럼 없이 대해 주었다. 보신탕을 먹자며 심원면 소재지까지 취재기자 일행을 데리고 나갔다. 아흔살인데도 소주를 석잔이나 했다. 불쑥 왔다가 훌쩍 떠나 보낸 이들이 부지기 수였을 텐데도 작별할 때는 못내 아쉬워 했다. 적적해서 그럴까, 가정의 달이라서 그럴까. 부모 생존 여부를 물으며 아이들 데리고 부모 자주 찾아보라고 기자한테 몇번씩이나 당부했다.-혼자 생활하시는데 적적하실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아. 사색하고 사람 만나고. 아침 6시반이 되면 산 꾀꼬리가 울어주고, 밤 9시반이면 소쩍새가 울어주어. 그러니 사는 것 자체가 시(詩)야. 고독을 즐길 수 있어야 해."-사람에 대한 그리움도 있을 것 같은 데요."찾아오는 사람 만나고 마을 사람들과 얘기 나누고괜찮아. 아들들이 서울로 모시겠다고 하는데 내가 반대해. 시골에 부모를 혼자 놔두면 효도하지 않는단 소릴 들을까 봐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가 게의치 말라고 했어. 이곳이 좋아."-그래도 혼자 음식 해 드시고 생활하시는 게 불편하지 않나요. "방 안에 싱크대 있고 전기밥솥 있고 불편하지 않아. 쌀 10킬로그램이면 70일을 먹어. 이가 좋지 않아 국물이 있어야 하는데 햇감자로 된장국을 만들어 먹으면 아주 맛있어. 미역국도 자주 끓여 먹지."-집에 우하정(又下亭= '자신을 낮추는 집'이라는 뜻)이란 현판이 걸려 있던데 '우하'라는 호를 갖게 된 연유가 궁금합니다."구한말 열네살에 진사벼슬을 했던 염재선생이 계시는데 염재선생 손자하고 내가 친구라서 집에 놀러갔지. 그 때 염재 선생이 '又下'라고 쓰시면서 '마흔살 넘어 네 호로 쓰라'며 주시더라고. 집에 와서 아버지한테 호가 뭐냐고 물었지. 잊고 있다 예순살 넘어 호로 썼어." 미당시문학관 뒷쪽에 미당 생가가 있고 생가 담 하나 건너편에 우하정이 있다. 초가 지붕을 올린 흙집이다. 방 한칸에 앉은뱅이 책상과 이부자리, 냉장고, 전자레인지,싱크대, 텔리비전, 책장이 갖춰져 있다. 처마에는 드림줄이 달려 있다. 우하는 허리가 불편해 드림줄을 잡고 방문을 출입한다. 방문을 열고 마루에서 바라보면 멀리 야트막한 산 자락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부모님과 미당 내외의 산소가 한 눈에 들어온다. 산소 주변(7000여평)에는 국화가 가득 심어져 있다. -미당이 너무 유명하셔서 어르신은 항상 '미당 동생 서정태'로, 미당의 그늘 아래 사셨는데 불만이 많았겠습니다."미당은 미당이고, 나는 나야. 젊을 때야 서운하기도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시를 쓰신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내가 시를 쓴 건 미당의 영향이 컸지. 그런데 시에 대해 이야기를 잘 해주지 않았어. 칭찬도 없었고."-지금도 시작(詩作)을 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300여편쯤 될 걸. (책상을 가르키며) 그 책상 서랍에 들어있어. 시집으로는 한 세권쯤 될 거여."-그런데 왜 시집을 내지 않으십니까"시집 내자고 출판사 사장이 지금도 볶아먹어. 그런데 귀찮아. 분류하기도 어렵고. 시집 내봐야 누가 읽어야지. 출판사는 돈을 벌어야 하는데 시집 내봐야 사는 사람이 없어. 부담만 주는 거지. 지금은 (자신을 과시하러) 자비로 출판을 많이 하던데 원래 시집은 자기 돈으로 발간하는 게 아니야."-1986년엔 '천치의 노래'라는 시집을 발간하셨습니다만. "천치는 등신이라는 뜻이여. 당시 동아출판사 사장이 내주었지. 해방후부터 1985년까지 약 120편이 수록됐어. 지금은 절판되고 도서관에도 없어."-당시 미당이 시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해 주시던가요."출판사(동아출판사) 사장이 내 원고를 가져간 뒤 형(미당)한테 시집 낸다고 자랑한 모양이더라고. 형이 서문은 누가 쓰느냐고 묻기에 당시 김광균이란 유명한 분한테 부탁했다고 하니까 '내가 써주마' 하고는 시를 가져오라 하더니 읽어보고는 '네 시 참 좋더라' 하더군.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여."미당은 서문에 '네가 쓴 시들이 부디 명이 길어서 나와 너의 육신이 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오래 살아있는 것이 되기만을 바랜다. 1986년 1월 29일. 미당 서정주.'라고 썼다.-선운산문학회 고문으로도 활동하시던데요."활동은 무슨. 나이 많이 먹었다고 이름 넣어준 거지."-어릴 적 미당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옛날엔 칠팔살이면 서당에 가고 제일 먼저 배우는 게 천자문인데 보통 아이들은 반년 걸려야 뗄 수 있어. 그런데 미당은 열흘만에 천자문을 마쳤어. 드문일이지. 동네에서는 '신동났다'고 했고 아버지는 기분이 좋아 잔치를 벌였지. 암기교육이나 마찬가지인데 뛰어났어. 자상하고 인간미가 넘쳤어."-미당이 시인으로 등단한 계기가 재미있습니다."당시엔 독자투고가 신문에 자주 실릴 땐데 연말에 미당도 '벽'이라는 시를 신문사에 투고했어. 그런데 독자투고한 시와 신춘문예 공모작품이 데스크 잘못으로 합쳐져 버렸어. 심사위원들이 심사를 했는데 신춘문예에 합격했다고 연초에 연락이 오더라고. 독자투고 한 것이 등단한 계기가 돼 버렸어. 스무살 때 투고해서 스물한살에 등단한 셈이지."-미당은 '모국어의 연금술사'라고 비유할 만큼 언어적 재능과 자질이 뛰어난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타고난 겁니까, 아니면 노력의 산물입니까."내가 한창 기자생활을 할 때, 나 보고 늦지 않으니까 외국어를 배우라고 해요. 그리곤 영어로 대역된 성경책을 주더라고. 난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 공부를 안했지. 그런데 형은 쉰살이 넘어서 영어 러시아 불어 공부를 했어. 그것도 독학으로. 타고난 것도 있지만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겠어. 술 마시고 노래만 부른 게 아니야." -미당의 시 '자화상'을 보면 '자신을 키운 건 8할이 바람이었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어떤 의미입니까.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지 않았나요."당시 생가 마당에 1000석 노적가리를 쌓아놓을 만큼 잘 살았지. 기름 바른 조기알을 도시락 반찬으로 싸 가지고 갔을 정도였으니까. 스물 세살 때 자화상이란 시를 지었는데 왜정 때부터 논쟁이 일었지. 바람은 헛 것을 뜻해. '아비는 종이었다'는 말도 나오는데 백철 같은 평론가는 '특수계급의 후예인가 보다'고 평했지만 식민지 시절의 백성을 뜻하는 것이야." -미당은 친일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데 심정이 편치 않으시겠습니다."미당이 직접 당하는 심정 보다도 내가 더 편치 않아. 미당은 그런 사람 아니야. 일제가 한창 발호하던 1943년 정읍의 한 여관에 미당과 둘이 숙박을 했을 땐데 '이러다 일본화되는 것 아닌가' 하고 내가 물었지. 그랬더니 미당이 '역사란 그런 것 아니다. 민족이란 쉽게 없어지는 것이 아니야'라고 하더라고. 친일정신이 있었다면 그런 식으로 말을 했겠어? 일본과 가깝게 지내라고 했어야 맞지. 어느 인터뷰에서도 얘기했지만 미당은 시인이지 혁명가가 아니여. 내가 잘 알아. 이런 일도 있어. 내가 공사판에 숨어지낼 때 군대 소집영장이 나왔어. 그런데 나 보고 '도망가거라'고 그래요. 내가 도망가면 미당이 호주라서 고통을 당할 게 뻔했지. 그런데도 도망가라고 한 걸 보면 친일한 사람으로 볼 수가 없어." -미당시문학관에는 일본 찬양 시와 전두환 생일을 찬양 시까지 걸려 있던데요. 동생으로선 이 역시 고통이겠습니다."태평양유족회 등이 행사 때마다 친일파라며 데모를 했어. 미당시문학관 이사장이 그들과 협상을 했는데 데모를 안하는 대신 친일시도 문학관에 걸어 두기로 합의해서 그렇게 된 것이야."-미당 슬하의 자녀 근황이 궁금합니다."아들 둘을 두었는데 큰 아들은 미국 하버드대학을 나와 미국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고 있지. 둘째도 미국에 있어. 듀크대를 나와 의사생활을 하고 있어."-시를 접고 기자생활을 하셨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1946년 5월 민주일보 창간 때 임정 부주석을 지낸 김규식 선생 등이 같이 하자고 해서 기자생활을 시작했어. 그후 30여년간 언론인 생활을 했지. 전북에선 태백신문이 창간될 때 김가전 도지사에게 부산에 피난 가 있던 문인들을 모이게 해달라는 조건을 달고 참여했지. 그 뒤 군산신문 삼남일보 전북매일 등 여러 신문사에 몸 담았고 1973년 3사가 통합된 뒤엔 전북신문사 기획관리실장을 지냈어. 기자 30년 생활하는 동안 편집국장만 18년을 지냈지. 아마 전국 최장일거여."-뒤돌아본 삶은 만족하십니까."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어. 하지만 여한은 없어. 잘 헤쳐 나왔다고 생각해. 정신적으로는 모르겠지만 물질적으로는 하나도 빚진 게 없어. 미당 문학이 좀 더 의미 있게 남도록 마지막 역할을 해야겠어. 그런데 내가 언제 죽을 지 몰라."-'질마재 지킴이'로서 세상 사람들한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미당 시 중에 '질마재 신화(神話)'라는 시집이 있어. 질마재의 실존 인물과 사물, 전래 설화를 소재로 쓴 유일한 산문시집이지. '질마재 신화'를 재현시키고 싶은 욕심이 있어. 그렇게만 된다면 대한민국에 시가 있는 유일한 민속촌이 될거야. 경기 양평에는 황순원 마을이 있어. 소설 '소나기를 재현한 것인데 관광객이 넘쳐나. 내가 얼마나 살지 모르지만 '질마재 신화'가 실현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질마재 신화'는 1975년 간행된 미당의 대표적인 시집이다. 이 작품집은 고향으로 회귀하고 싶은 정신적 토대 위에서 창작된 것이다. '질마재'는 시인의 출생지인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의 속칭이다. 길마는 수레를 끌기 위해 소나 말 따위의 등에 얹는 안장을 가르키는 말이다. 길마처럼 높고 가파른 고개가 질마재이다. '질마'는 구개음화가 안된 상태를 이른다. 이 작품집은 토속적이고 주술적인 세계를 창작한 것인데 신화적 내용들은 미당의 고향 마을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한국인의 원형적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1970년대 산업화의 진행으로 우리 고유의 전통이 매몰되어 가던 때에 방언과 속어, 비어를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한국적인 원형의 모습을 지켜내고 있다. 민족 의식의 뿌리와 한국인의 원형을 발견하려는 노력의 소산이라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김남곤 시인(전북일보 사장)은 지난 4월 송하선 시인(미산)과 함께 우하를 만나고 돌아와 '질마재 봄날'이라는 시를 썼다. 백마디 글보다 시 한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스케치 기사를 읽는 것 같아 그대로 옮긴다.질마재 봄날未山과 함께 진달래가 미치게 울어 쌓는 질마재에 갔다.8할이 바람이라던 未堂 형보다 2할을 더 키워 10할이 바람이라는 동생 又下를 만나 뜬 세상 빚 갚아주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찡하게 들었다.어둑한 안방에는 나들이 양복 한 벌이 헐렁하게 걸려 있고 아직도 뒷짐을 지고 있어 전기 난로가 벌겋다.가져갈 것이라고는 고목진 시심(詩心) 하나 밖에 없는데 문고리엔 소요산 들 개 불알만한 자물통이 이를 악 물고 있다

  • 기획
  • 이경재
  • 2012.05.22 23:02

홍태표 前 교육감은…

익산 왕궁 태생인 홍태표 전 교육감(85)은 당초 총무처에서 시행하는 일반 행정직에 합격, 발령을 기다리다 우연히 지인의 추천으로 교직에 몸담았다. 1956년 이리여중 임시교사로 교직에 발을 들였다가 평생 교육자의 길을 걷게 된 것. 정교사로 임용된 이후 남원여고와 남성중고 왕신여중고 등 일선에서 10년간 아이들을 가르치다 1966년 8월 도교육청 중등교육과 장학사로 발탁되면서 교육행정 전문가로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다. 도내 우수 교사들로 출제 평가·분석위원회를 만들어 문제은행제를 도입, 고3 수험생을 대상으로 모의고사를 실시한 결과 만년 전국 최하위권이던 성적이 전국 4위권으로 뛰어올랐다. 중앙교육원에서도 이 같은 괄목한 성과에 주목하고 전북도교육청의 문제은행제를 벤치마킹했다는 것. 이후 '교육청 브레인'으로 불리우며 새로운 교육정책 입안에 주력했다. 학생체육발전계획도 수립, 만년 꼴찌를 기록하던 학생체전 성적도 상위권으로 도약시켰다. 또한 이리여중시절 효과를 거뒀던 '묶음식 특별활동'을 특기적성 교육으로 확대 하는 등 지덕체(知德體)를 갖춘 전인교육의 기틀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같은 성과로 7년만에 도교육청 장학계장을 거쳐 중등과장으로 초고속 승진했다. 이후 전주여고 교장, 정읍고 교장, 이리여고 교장을 역임한 뒤 1982년 완주교육장, 1983년 도교육청 학무국장과 초대 교원연수원장을 거쳐 1988년 8월 임명직으로는 마지막인 제9대 전북도 교육감에 취임했다. 하지만 1988년 사회전반에 민주화바람이 불면서 교원노조가 태동, 교원 대량 해직사태가 발생하면서 교육감으로서 큰 격랑을 겪기도 했다. 4년 임기를 마친 뒤 1993년 대통령자문 교육개혁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학교운영위원회 제도 도입과 학급당 정원 30명선 감축, 대학 재정의 선진국 수준 지원 등을 입안 하는데 기여하기도 했다.전주고(27회)와 중앙대 상학과를 졸업했으며 교육행정분야에 대한 공로로 국민훈장 석류장과 동백장을 받았다. 부인 강신갑 여사(82)와의 사이에 아들 넷을 두었다.

  • 기획
  • 권순택
  • 2012.05.15 23:02

스승의 날 만난 홍 태 표 前 전북도교육감 "참 스승이 돼야 교권도 확립되고 교원 지위도 향상"

제 31회 스승의 날을 맞아 제9대 전북도 교육감을 역임한 홍태표 전 교육감(85)을 찾았다. 일선 교사에서 교육청 장학사로 전격 발탁된 이후 '문제은행제'와 고3 모의고사제를 처음 도입하고 학생체육발전계획을 수립, 학력신장과 체력향상에 탁월한 성과를 올리면서 '교육청 브레인'으로 통했던 홍 전 교육감. 윗사람의 잘못된 행태에 대해선 직언과 막말도 서슴지 않았던 강단과 기개가 지금도 교육계 안팎에서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마지막 임명직 교육감을 맡으면서 민주화 열망을 타고 일어난 전교조 사태로 큰 홍역을 치르기도 했다. 팔십 중반의 나이임에도 교육자로서 기품을 잃지 않은 채 아직도 오래 전 일과 이름 연도 수치 등을 정확히 인용하는 기억력이 놀라웠다. 홍 전 교육감을 전주 관광호텔 커피숍에서 만나 교육계 현안과 교육자로서 걸어 온 길, 후진들에게 전하고 싶은 얘기를 들어보았다.-연세에 비해 강건해 보이십니다.△"지난해 폐렴으로 한동안 고생 좀 하다가 한 달 전부터 바깥출입을 했어요. 지난주에는 모처럼 지인들과 운동을 했는데 무리를 했는지 몸이 뻐근합니다. 평소 아침마다 30~40분 정도 걷기운동을 해요. 전주천변에서" -오늘이 31회째 맞는 스승의 날인데 감회가 남다르실텐데요.△"뒤돌아보면 보람된 일도 많았고 한편으론 아쉬움도 커요. 엊그제 신문 칼럼에서 (학교에)'선생은 없고 교사만 있다. 제자는 없고 학생만 있다'라는 글을 읽었어요. 오늘날 교육현실에 대해 교육자의 한 사람으로서 자괴감이 많이 들어요. 왜 이렇게 됐는지. 앞서 교육에 몸 담았던 사람으로서 책임도 통감합니다."-스승의 날에 찾아주는 제자들이 있는지요.△"일선 교사를 얼마 안해서. 그래도 몇 아이들이, 지금은 모두 할머니들인데 서울에서 찾아옵니다. 반갑고 고맙죠."-스승의 날 의미가 큰데 요즘은 교사나 학부모 모두 부담스러운 날이 돼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만△"예전엔 아이들이 십시일반으로 꽃이나 간단한 선물을 했었어요. 사제간에 아름다운 모습이었죠. 그런데 점점 커지다보니, 일부에선 무리한 요구도 있었던 것 같고, 또 이런 것 때문에 아이들 차별하는 문제도 생기고 해서 선생님에 대한 이미지가 흐려졌습니다. 선생은 선생으로서 대접받을만한 일을 해야만합니다."-일부 교사들 문제도 있지만 '내 아이만은 특별하게'라는 일부 극성스런 학부모들도 문제잖아요.△"아주 오래전 얘기죠. 전주 중앙초등학교에 검사장 아들이 다녔어요. 그런데 이 아이가 선생님 말을 잘 안 듣는 거예요. 하루는 아이 아버지가 선생님을 집으로 저녁 초대를 하고 아주 깍듯이 선생님을 모셨어요. 그 다음날부터 선생님을 대하는 아이 태도가 완전히 달라진 거예요. 아이들이 우리 선생님이 최고라는 생각을 가질 때 학교 교육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또 선생님들 위상도 높아지게 되고요."-일선 학교에서 10년 정도 계시다 도교육청 장학사로 전격 발탁되셨다죠.△"1966년 8월말인데, 태인 왕신여중고에 있을때 교육청에서 들어오라는 전화가 왔어요. 마침 비 온 뒤라 신발에 온통 흙이 묻었길래 길거리 구두방에서 구두를 닦으면서 신문을 뒤척이는데 교육청 인사가 게재됐어요. 자세히 보니 거기에 내 이름도 있는 겁니다. 그때서야 장학사로 발령 난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장학사로 계실 때 교육감에 대한 항명 사건이 유명한 일화로 전해지던데요.△"당시에는 주산부기 자격 검정시험이 서울에서 치러졌어요. 그런데 군산상고 아이들이 서울로 시험보러 올라가면서 장항에서 무임승차를 했다가 서울역에서 딱 걸린 겁니다. 이것이 군산신문에 대서특필되어서 제가 조사를 나가게 됐죠. 교장과 주임교사 인솔교사의 사표를 받았지만 훈계조치하고 복명서를 작성해서 교육감에게 결재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교육감께서 복명서를 읽어 보지도 않고 내 얼굴에 냅다 내던지는 거예요. 그 때만 해도 젊고 혈기가 왕성할 때라 저도 모르게 육두문자가 튀어나오면서 교육감에게 '읽어보기나 해라'고 큰 소리를 쳤죠. 당시 부속실에 비서들과 기자들이 있었지만 감히 들어오지 못하고 안절부절 하기만 했답니다. 나중에 과장과 계장이 올라와 말리면서 소동은 진정됐습니다."-그 사건을 계기로 오히려 교육감께서 더 신임하게 됐다지요.△"잠시 뒤 교육감께서 부르더니 햇병아리 장학사에게 '내가 잘못했다'고 사과하시더라고요. 그러니 내가 되레 몸둘 바를 몰랐죠. 바로 잘못했다고 사죄했죠. 그 사건 이후 저를 믿고 많은 일을 맡겨주셨죠."-당시 교육청 브레인으로 불리면서 새로운 교육정책 추진에 큰 성과를 올리셨다는데.△"1969년 대학 예비고사가 처음 실시됐는데 성적이 전국 12개 시도 가운데 10위로 최하위권이었어요. 소년체전 역시 10위를 했고요. 당시 신문사설에 '공부 못하면 공이라도 잘 차야지'라고 실렸습니다. 그래서 학력신장과 체육진흥을 기치로 내걸고 고3학생에 대한 연 4회 모의고사 실시와 체력향상에 예산 지원을 집중했죠. 또 우수교사들로 출제 평가위원회를 구성하고 문제은행제를 도입했죠. 그 같은 노력으로 다음해 전국 학력평가에서 4위로 껑충 뛰어올랐죠. 소년체전은 전국 2위를 했습니다. 당시 우리가 처음 도입했던 문제은행제도는 중앙교육원에서도 채택하게 됐죠."-그 당시 고3 모의고사제를 거부했다가 낭패를 당한 학교장도 있었다지요.△"1975년 광역시에 고교평준화제도가 도입되면서 광주지역 우수학생 2개반 정도가 전주고로 진학했습니다. 그러자 학교장이 이들을 '옥동자'라고 치켜세우며 200명은 서울대에 합격시킨다고 호언장담했죠. 그러면서 100등까지는 알아서 공부하라고 방임하고 101등~ 200등 까지만 보충수업을 실시했습니다. 또 교육청서 실시하는 모의고사를 계속 거부하는 거예요. 결국 그 아이들 대학입시 결과 서울대에 겨우 19명 합격했죠. 학교장도 문책당해 경질되고 말았습니다." -재임시절 '참 스승상'을 많이 강조하셨다는데.△"함석헌 선생이 참 스승상을 3가지로 정의했는데 제가 큰 공감을 받았습니다. 첫째 실력있는 사람, 둘째 본을 보이는 사람, 셋째 감화를 주는 사람이에요. 선생은 부단한 자기 연수와 노력을 통해 어느 한 분야에 대해 자신있게 가르칠 수 있는 실력을 갖춰야 합니다. 교과 수업만 잘한다 해서 되는게 아니고 학생 개개인의 능력을 발굴해서 키워주어야 합니다. 또 선생님은 말과 행동에 있어서도 학생들에게 본이 되어야합니다. 매사에 조심하고 신중하고 수범을 보여야합니다. 아이들이 선생님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선생은 감화를 주어야합니다. 선생이 변해야 아이들도 변합니다. 가르치는 것만으로 책무를 다했다 생각하면 안됩니다. 아이들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주는 것이 참 스승으로서 할 일입니다."-요즘 도교육청의 학생인권 조례 추진과 교육과학부의 교육벌(두발 복장 소지품 검사 교내집회 금지 등을 학칙으로 정해 시행여부를 결정하도록 함)제도 도입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1991년 교육자치제도가 부활됐는데 교육자치의 근간은 학교자치입니다. 유럽의 경우 학교운영위원회가 교장 교사를 모집 선발합니다. 교육행정기관은 뒷바라지 역할만하죠. 1995년 문교법전이 교육법전으로 바뀔 때 학교자치권을 인정해줬어요. 학교가 학칙에 따라 운영되도록 학교에 맡겨주는 것이 교육자치의 기본입니다. 이를 위해선 교과부의 권한을 교육청에 대폭 위임해주고 교육청은 학교가 잘 운영되도록 지원하고 뒷받침해야합니다. 또한 학운위가 활성화되어야 하고 앞으로는 학교자치가 교원임용권도 가져야한다고 봅니다."-저출산 이농현상으로 농촌이 붕괴되면서 농촌 교육현장도 어려움에 직면해있는데요.△"제가 교육감 재직때부터 농촌지역 1면 1학교를 추진했어요. 1개로 통폐합하는 대신 예산과 교사 정원은 다 그대로 인정해주면서 집중 투자를 통한 교육효율성을 높이자는 것이었어요. 결국 교장 교감 자리가 없어지다보니 반대가 심해 제대로 하지 못했죠. 핵심은 농촌학교를 살리려면 교사가 그 지역에서 함께 생활해야합니다. 많은 예산을 지원하고 좋은 시설을 해줘도 사람이 없으면 뭐 합니까. 교사가 함께 생활하면서 아이들을 관찰하면 어떻게 지도하고 가르칠 것인지 자연히 알게돼죠."-학교폭력 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데요. △"모든 선생님들이 관심을 가지면 학교폭력과 왕따문제 해결이 가능합니다. 학교에 경찰을 불러들이는 것은 선생님들이 가르치는 것만 하고 나머지는 외면하거나 방치하겠다는 것 밖에 안됩니다. 누구는 잘못한 것에 대해 훈계하고 누구는 이를 외면하고 하면 교육이 안됩니다. 교육문제는 우리가 책임진다는 선생님들의 책무가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선 선생님들의 훈계에 대한 학부모와의 약속과 인정이 요구됩니다."-무너지는 교권 문제도 심각한 상황인데요. △"엊그제 부산에서 여교사가 여학생에게 폭행을 당했다는 뉴스를 신문에서 보았습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지. 정말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학생을 훈계하려면 현장에서 해야합니다. 교무실로 데려가 다수의 힘을 빌려서 하려고하면 안됩니다. 학생에게 수치심을 유발하면 교육효과를 거둘수 없기 때문이죠."-재임시절 청렴 강직하시다는 평가를 받았으셨는데 지난해 교육청렴도 조사결과 도교육청이 인사행정 분야에선 만점을 받았지만 나머지 분야에선 전국 16개 시도 가운데 14위로 나타났습니다. 어떻게 해야 개선될까요.△"예전에 인사를 하면 답례를 하는게 관행이었던 때가 있어요. 그런데 내가 돈봉투를 안 받으니까 주위에서 '얼마나 배포가 크냐'라는 비아냥이 들려요. 그래서 원칙을 세웠죠. 비서실 직원하고 간단한 점심만 먹겠다고. 비리문제는 법만 가지고 안됩니다. 교육감의 의지가 일선에 까지 파급되도록 해야합니다."-전임 교육감이 비위 혐의와 관련해 도피중인데 교육자로서 모양세가 좋지 안습니다만.△"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일면 이해도 돼요. 교육감을 직선제로 하니까 당선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잖아요. 그러다보니 막대한 선거자금이 들어가게 되고. 교육감 선거를 돈 안드는 방법으로 개선해야 됩니다."-재임중 전교조 교사 대량 해직문제로 고충이 컸었을텐데요.△"마음 고생이 실로 컸습니다. 그만한 관심과 노력을 부모에게 했다면 큰 효자소리 들었을 거예요. 임기중 절반을 전교조 문제에 매달리다 보니 여러 가지 구상했던 교육 개혁안은 재대로 추진하지 못하고. 저도 이리여중 교사로 있을 때 노조격인 교사협의회 지부장을 했어요. 그런데 철도국 파업때마다 교사들을 동원하는 거예요. 선생이 가르치는 것은 뒷전이니 나중에 안되겠다 싶어서 그만두었죠. 노조도 법의 테두리 내에서 해야합니다. 법을 벗어나선 안됩니다. 당시에도 합법화되면 얼마든지 하라고 설득했었죠." -전북사람들은 인물을 키우는데 인색하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많은데요.△"저도 공감하며 반성합니다. 1980년대 말에 광주교육감이 지역기관장들을 모아놓고 '우리는 518성지로서 인재양성 밖에 없다'며 동의를 구하고 교육예산을 학교에 전폭 지원하면서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을 밀고 나갔습니다. 그 결과 사법 행정고시 합격자를 다수 배출했었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육을 통해 인재를 키워야 합니다. 또 서로 헐뜯고 비난하고 깎아내리지 말고 북돋아 주고 격려하고 도와야 전북에 큰 인물이 나올 수 있습니다."-후진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참 스승이 되어야합니다. 즉 선생다운 선생이 되어야합니다. 그럴 때 교권도 확립되고 교원의 지위도 향상되는 겁니다. 선생으로서 기본을 절대 잊어서는 안됩니다."

  • 기획
  • 권순택
  • 2012.05.15 23:02

이금림 이사장은

작가 이금림은 좀 속된 표현을 빌려오자면'가장 잘나가는'드라마 작가다. 80년 첫 드라마 작품을 발표한 이후 32년. 그동안 발표한 작품은 일일이 기억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단막극 말고 일일드라마와 특집드라마만 대략 꼽아도 30편을 넘는다. '이금림 드라마'의 아이콘은 청소년 드라마와 가족드라마다. 80년대 중반, 파죽지세로 인기를 구가했던 '호랑이 선생님'이나 '고교생일기'가 청소년드라마의 길을 열었다면,'당신 때문에''옛날의 금잔디'나'당신이 그리워 질 때''은실이' 같은 드라마는 인간의 따뜻함과 휴머니즘을 그린 가족드라마의 모범이다.'불륜'을 다룬 '푸른 안개'가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키키도 했지만 그는 선정적이거나 감각적인 내용의 드라마를 경계해왔다. 그런데도 그의 드라마들은 인기가 있었다. 재미와 감각위주의 트렌디 드라마가 홍수를 이루는 환경에서 이단(?)으로 분류될 수 있는 그의 드라마가 주목받을 수 있다는 것은 흥미롭다. 이금림은 1948년생이다. 남원이 고향. 5남매 중 막내다. 아버지는 평생을 별 직업 없이 한량으로 사셨다. 시조 명인이자 아마추어 연식 정구 선수로 밖으로만 나다니는 아버지 대신해 농삿 일은 어머니에게 안겨졌다. 공부 잘했던 막내딸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어머니 덕분에 그는 가고 싶은 길을 갈 수 있었다. 공부를 꽤 잘했던 그는 어렵다던 전주사범 병설중학교 입시에 합격해 전주로 유학을 갔다. 그러나 첫 학과 시험을 보고 좌절했다. 이후 공부보다 도서관에서 책 읽는 일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 시절, '혼불'의 작가 최명희를 만났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이금림은 전주여고로, 최명희는 기전여고로 진학하면서 헤어졌지만 둘은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나 함께 책 읽고 전주천변을 거닐며 문학에의 꿈을 키웠다. 한명은 드라마 작가가, 한명은 소설가가 되었다. 최명희가 1998년 작고하기 전까지 37년동안 그들은 서로에게 힘이고 희망이었다. 아버지의 불같은 반대를 무릅쓰고 고려대 국문과에 진학한 그는 졸업후 10년동안 인천과 서울에서 국어교사를 했다. 그런데 문득 단조로운 일상에 숨이 막혔다. 사표를 냈다. 지인 소개로 79년 '별이 흐르는 밤에' 대본을 쓰게 되었는데 그의 필력을 눈여겨 본 프로듀서가 드라마 작가를 권했다. KBS단막극 '소라나팔'이 데뷔작이다. 80년대부터 그가 내놓은 수많은 작품은 한국 드라마의 역사가 됐다. 한국방송작가상과 한국방송대상 작가상, 한국프로듀서상 특별상, 백상예술대상 텔레비전 드라마 극본상 등 수많은 상을 수상한 그에게 고향 전북에서는 '자랑스런 전북인상'(1996)을 안겼다. 2009년, 사경을 헤맬 정도로 건강이 악화돼 방영중인 드라마를 중단하고 칩거했던 그는 지난해부터 외부 활동과 집필을 시작, TV소설 '복희누나'로 시청자들을 다시 만났다. 세계적으로 주목 받고 있는 피아니스트 김정원(경희대 교수)이 둘째 아들이다.

  • 기획
  • 김은정
  • 2012.05.08 23:02
기획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