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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의두 이사장(완주 화산중학교)

도시학생들이 시골학교로 몰려든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골학교다. 무한경쟁 시대를 역주행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 산골 조그만 사립 중학교가 그들을 둥지처럼 품어내고 있다. 기숙사 생활과 영재수업, 특성화 교육으로 미래 지도자를 키운다. 외국 결연학교와의 교환 학습은 호연지기가 따로 없다. 완주군 화산면 화산중학교(학교법인 화봉학원).겉으로는 여느 농촌학교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연간 6천여명의 벤치마킹 시찰단이 다녀갈 만큼 명성을 떨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 의무교육 시범학교에 이어 2005년에는 전국 최초의 자율중학교로 승격됐다. 그 이듬해 신입생 모집에선 10대1이란 높은 경쟁률을 올려 교육계의 주목을 받아왔다.교육은 대도시에서 받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깨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 3일 교장직에서 물러난 심의두 제4대 이사장(76)의 '인간 상록수' 같은 활동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농촌 성인교육과 고등공민학교를 세워 그 자리에 이르기까지 곡절도 많았던 교육 인생 50년. 그 역정을 관통하는 건 뭘까. 그는 취재진을 맞는 자리에서 '신의(信義)'라고 말했다.※자율학교란초중등교육법 등에 따라 교장임용, 교육과정 운영, 교과서 사용, 학생선발 등에서 자율성을 갖는 학교이다. 자립형 학교와 달리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으며, 전국에서 학생 선발이 가능하다.-왜 신의입니까."그게 스스로 힘든 과정을 버티게 만들었어요. 사실 인간관계에서 믿음과 의리만큼 중요한 게 어디 있나요. 사회생활의 원동력이죠. 신의는 공정성을 기반으로 삼아 예나 지금이나 리더의 첫 번째 덕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의교육은 매우 소중해요."-신의교육이란 게 뭐죠."전인적인 인격형성입니다. 그걸 위해서는 신의로서 교육해야 하거든요. 입시위주 교육만으로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지도자를 키울 수 없습니다. 신의 없는 자가 무슨 일을 하겠어요. 보나마나 뻔한 거 아닙니까. 언제 어디서나 우선 신의를 지키고 성실히 노력하는 인간이 필요해요. 이건 교육자의 사명입니다. 그래서 학교생활목표를 '신의, 성실, 노력'으로 삼고 있지요."-건학이념이네요."그렀습니다."-학교 설립의 계기는요."일찌감치 그런 생각이 있었지요. 중학생 때 완주 봉동으로 왕복 100리 통학 길을 걸어 다니느라 매일 코피를 쏟다시피 했던 거죠. 너무 힘들었어요. 자연히 나중에 그런 전철을 밟지 않게 하려는 생각이 차올랐습니다. 산간벽지 자녀들은 배고픈 설움에다 배우고 싶어도 기회마저 없었던 겁니다."-처음부터 중학교였나요."아닙니다. 대학 4학년때인 1963년10월 마을성인들을 모아 본격적으로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면사무소 회의실을 얻어 공간을 마련하고, 2년째에는 그 칸을 막아 중등과정 1학년 52명과 2학년 33명으로 나눠 가르쳤어요. 1주일에 72시간을 뛰었습니다."-혼자였나 봅니다."물론이죠. 두 학년 전 과목을 혼자 왔다 갔다 하며 담당했어요. 그땐 피곤한 줄도 몰랐어요. 농촌이 잘 살게 하려는 일념뿐이었습니다. 뭐, 정말 몇 년간을 그렇게 무료로 가르치게 되더라고요."-농촌계몽운동 아닌가요."글쎄요. 돈도 없고 배움도 없으면 누가 쳐다봅니까. 무엇보다 배워야 지역도 잘 살지요. 농촌이 살아야 도시도 산다고 믿었어요. 농촌은 뿌리요, 도시는 꽃입니다. 뿌리가 튼튼해야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농촌에 아예 학교가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농촌학교는 지역의 상징이고 지역민의 의지처예요. 학교와 지역은 흥망과 보조를 같이 하는 공동체입니다. 아들딸들이 희망을 싹틔워가는 곳 말이죠. 지난해에 면민교실과 중국어 교육센터인 공자 학당을 세운 것도 이런 농촌의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차원입니다."-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세요."그런 성인교육을 하면서 중학교 설립을 생각했어요. 그러나 뜻밖에도 주민들이 코웃음 치는 조소를 보였어요. 국가도 돈 없어 못 세우는 학교를 어떻게 개인이 할 수 있겠냐는 거죠. 급기야 선친도 결혼한 자식을 1964년말 안채에서 사랑채로 몰았습니다. 그 때 쌀 한가마니와 논 590평을 줬으니 사실상 분가했어요. 그러고도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동네 종중산 1천평을 빌려 안사람과 함께 개간해 고추도 심고 닭 돼지를 길러 돈을 모았습니다. 당장 학교 부지 8천평을 구입했습니다. 지금 학교자리입니다."-그때 고등공민학교를 세우기로 한 거군요."맞습니다. 그런데 웬걸요. 학교 부지를 마련했지만 교실 6개를 신축하다보니 쌀 1,200여가마의 빚더미에 앉게 됐습니다.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궁하면 트인다고 말 못할 고생으로 겨우 살 길 찾았지요. 건물완공에 앞서 화산고등공민학교 설립인가를 받았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그때서야 주민들도 돕겠다고 하더라고요."-화산중학교 전신이겠네요."그렇게 된 셈이죠. 그러다가 1969년12월에 당시 학교법인 화산학원(1985년 화봉학원으로 변경) 설립인가와 화산중학교 인가를 받게 됐으니까요. 직함은 처음부터 교장이었어요. 최연소 교장으로 시작해서 최장수하게 된 거예요. 그러나 말이 교장이지 뒤돌아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험난한 과정이었습니다."-어떤 때 그렇게 힘들었나요."1990년 후반이죠. 전국에 이농현상이 불어 닥치면서 농촌학교들이 여기저기 쓰러지는 거예요. 1980년대에 900명까지 몰려왔던 학생들이 1999년에는 54명으로 확 줄었습니다. 산간벽지 우리학교는 자연히 폐교대상 0순위였어요. 벼랑 끝이 아찔했습니다. 평생을 바쳐 가꾼 학교가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순간이었습니다."-난관을 어떻게 풀었죠."몇날 며칠 고심 끝에 초심을 생각한 겁니다. 미니버스를 직접 운전해서 산중 학생들을 불러 모으고 장학금을 줬어요. 시설투자도 오히려 늘렸습니다. 아들 4형제와 '부자(父子) 계'로 모은 자본으로 연건평 400평의 2층 건물에 기숙사(문무숙)와 강당(문무관)을 지었어요. 주위에선 아무리 시설이 좋아도 누가 산골로 오겠느냐며 또 비웃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닌 걸요. 놀랍게도 학생들이 건물 짓기도 전에 찾아왔어요. 예상이 딱 들어맞은 겁니다. 식당이 없어 집에서 밤새 준비한 음식을 자가용으로 날라 교실에서 배식도 했습니다."-의무교육인데 기숙사가 필요했던가요."1985년에 최초로 의무교육 시범학교가 됐기는 해요. 그러나 기숙사를 꼭 지어야 했어요. 그래야 학생들을 감당할 수 있잖아요. 정관계에 있는 제자와 기업인들의 도움으로 결국 제2,제3의 기숙사를 보게 됐어요. 학교 건물을 증축하고 우레탄운동장과 도서실, 식당, 공자학당도 갖추었습니다. 학생들이 더 왔어요."-지역별 분포가 다양하다고 들었습니다."현재 학생은 모두 348명으로, 도내 출신이 217명(62%)이고 나머지는 전국권입니다. 2년 전에는 도내 출신이 31%였거든요. 서울 경기 인천 등 수도권 뿐 아니라 부산 대구 강원, 심지어 제주도 등 여러 지역에서 학생들이 찾고 있어요. 농촌학교도 우수학생 유치가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고 있는 거죠."-왜 그럴까요."차별화된 우리만의 영재교육 프로그램과 좋은 시설 때문입니다. 모든 교육이 학교에서 이뤄져 사교육에서 자유로워요. 정규수업이 끝나면 보충학습으로 이어져 학원이나 과외 등이 끼어들 틈이 없어요. 주요 과목의 수준별 이동수업에다 중국어와 일본어의 제2외국어 선택교육이 진행되고요. 영재학급도 운영하고 있어요. 기숙사 또한 준비된 시설입니다. 전체 학생의 72%인 250명이 지금 기숙사 생활을 해요. 태권도와 유도 등 2단 이상을 따야 졸업하도록 만들어 놨어요. 체력 단련이 목적이죠."-장학금 제도는 어떻습니까."여기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거든요. 1등 입학 학생은 100만원, 2등 50만원, 3등은 30만원을 주고 매학기 평균 95점 이상 성적을 올리면 10만원씩 지급합니다. 현재 한 학년에 15명 정도가 받고 있어요. 명문 고교와 대학교의 입학, 국가고시 합격생에게는 100만원을 보장해 사후관리까지 한답니다."-인재들이 많다던데요."(웃음)그냥 지나갑시다."특정인을 거론하는 건 동창회와 재학생 내부에 위화감을 가져올 우려가 있다는 판단이다. 그러면서 정관계 인물, 기업인과 각종 대회 우수입상자를 비공식적으로 제시했다.-교육위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요즘 교육 자치는 어떤가요."잘못 가고 있어요. 교육정책에 일관성이 없을 때가 많아요. 정부와 교육청의 정책이 맞아야 일을 하죠. 일일이 거론할 수는 없지만 그래가지고 어떻게 현장에서 교육을 하겠습니까. 그 피해가 많아요."-점수를 준다면요.""(침묵)-무상급식에 대해선 어떤 생각입니까."단계적으로 실시해야 합니다. 시군 단체 예산에 맞게 해야 할 거 아닙니까. 완주군은 전체적으로 실시되어 다행인 것 같아요."-여전히 포부는 있는 거죠."우리나라와 세계를 움직이는 미래 지도자를 키우고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고등학교를 연계해서 설립하려 해요. 이왕이면 최첨단 학교를 만들고 싶어요. 교육은 최첨단사업이란 이유에서죠. 작년에 세종시에 그 부지 5만여평을 구입했어요. 제2의 꿈, 현재의 연장입니다."그는 감청색 정장에 빨간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넥타이는 제자들이 보내준 거란다. 육영사업의 열정과 제자사랑이 인터뷰 내내 돋보였다.

  • 기획
  • 최동성
  • 2011.09.20 23:02

고도원 이사장과 아침편지

고도원 이사장은 전북출신이다. 출신지로 광역권을 내세우는 것은 고향이 제주인데다 외가는 부안이고, 전주를 비롯한 전라북도의 여러 시군에서 성장기를 보냈기 때문이다.부친(고은식 목사)은 근무했던 전주신흥교회 60년사에 '고목사의 손에서 책이 떨어져 있는 것을 못 보았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알려진 다독가였다. 3남 4녀 중 차남인 그는 아버지의 회초리를 맞아가며 책을 읽었다. 만화나 소설에 마음 팔려있던 아들에게 책을 쥐어주며 읽고 밑줄 긋기를 통해 독서를 확인하는 방식이었다. 그는 목사가 되기 위해 연세대 신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대학 신문인 '연세춘추'를 만나면서 인생이 바뀌었다. 학생기자로 일하면서 학점은 'F선상의 아리아'를 그렸고, 유신시절에 여러 차례 필화사건을 거쳐 긴급조치 9호로 제적됐다. 목사의 길도, 신문기자의 꿈도 막혔다. 수배 받고 붙잡히고 강제 징집 당하고 난 뒤, 전기밥솥 하나 가지고 결혼을 했다. 생계를 위해 웨딩가게도 했고, 문방구 차리려다 사기도 당해 보았다. 절망의 계곡을 헤매던 그는 때 마침 창간한 '뿌리 깊은 나무'의 한창기 사장을 만나 기자가 되었다. 5년 동안 부지런하게 일했지만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강제 폐간되는 바람에 다시 실업자가 됐다.'뿌리 깊은 나무' 기자로 일할 때 그의 '글발'을 눈여겨보았던 중앙일보 경제부장이 그를 불렀다. 덕분에 언론고시도 안보고 중앙일보 기자가 됐다. 당시 지역 차별이 유난히 심했던 그 직장에서 사건기자로 3년 넘게 뛰면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발 빠르고 감각이 뛰어난 덕분이었다. 그는 문화부를 희망했지만 정치부 기자가 됐다. 청와대 출입할 때 김대중 대통령이 기자단과 식사하는 자리에서 '인생의 책'을 이야기 했다. 아놀드 토인비가 쓴 '역사의 연구'였다. 대부분의 기자들은 읽지 않은 책이었지만 그는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의 강권으로 읽기 시작해 이미 15번이나 읽은 터였다. 어떤 구절은 암송할 정도였던 그는 대통령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줬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그를 대통령이 직접 청와대로 불러들인 것도 그때의 인연이 계기였다.정치의 한복판에서 나와 명상운동가로 길을 바꾼 그는 사재를 털어 문화재단을 설립했다. 그것이 '아침편지 문화재단'이다. 9월 4일 현재 아침편지 회원은 2,672,893명. 이 재단에서는 아침편지와 함께 명상센터 '깊은 샘 옹달샘', 우리 먹을거리를 생산자과 소비자가 직접 직거래하는 '꽃피는 아침마을'을 운영하고 있다. 명상센터 방문객은 엄청난 속도로 늘고 있으며 '꽃피는 아침마을' 역시 연간 매출 200억대를 훌쩍 넘어섰다.

  • 기획
  • 김은정
  • 2011.09.06 23:02

고도원 이사장(아침편지 문화재단)

2001년 8월 1일, 아침에 열어본 이메일에서 〈고도원의 아침편지〉란 이름의 편지를 처음 만났다. 이런 글이었다.'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 노신의 《고향》 중에서 -그렇습니다. 희망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도 생겨나는 것이 희망입니다. 희망은 희망을 갖는 사람에게만 존재합니다. 희망이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희망이 있고, 희망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실제로도 희망은 없습니다.'희망과 용기를 갖게 하는 이 글귀를 보낸 사람은 누구인가. 편지 말미에 덧붙인 글이 있었다.'이 〈고도원의 아침편지〉는 제가 이메일 주소를 갖고 있는 분들에게 시험용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좋은 의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 편지 받기를 원치 않으신 분께서는 〈홈으로〉가셔서 주소를 삭제하시면 됩니다. 고도원 드림'잘나가던 중앙일간지 정치부 기자 출신으로 김대중 정부 출범과 함께 청와대 연설담당비서관으로 입성한 필자가 보내는 편지. 매일 아침 만나게 되는 이 수상한(?) 편지는 금세 화제가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고도원이란 이름 앞에 정치적 행보의 추측이 더해지기 시작했다. 비례대표 영입, 고향 출마 등 '설'만해도 여러 번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정작 본인은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그리고 10년. 그는 많은 사람들이 추측했던 정치인이 아니라 여전히 '아침편지'의 필자이자 자신의 사재를 내놓아 만든 '아침편지 문화재단' 운영자로 살고 있다. '아침편지' 식구는 현재 260만여 명. 수적 그렇지만 '아침편지 문화재단' 식구들이 열어가는 사랑과 신뢰로 열어가는 소통의 방식은 우리시대의 새로운 문화로 주목받고 있다.개인적인 이메일로 시작한 '아침편지'로 경이로운 소통의 문화를 일구어낸 고도원 아침편지문화재단 이사장(60). 충북 충주시 노은면 문성리 자연휴양림 안에 자리 잡은 문화재단에서 그를 만났다. 2층 형식의 특이한 구조로 지어진 그의 집필실은 벽면이 모두 책으로 빼곡히 차있었으며 정갈했다. 주옥같은 아침편지가 가장 많이 쓰여지는 공간이라고 했다. 인터뷰 내내 행복이 충만해 보이는 여유로움이 그 공간 안에서 더 살아나는 듯 했다.세 번의 일정 조정 끝에 인터뷰 시간을 잡았을 정도로 바쁜 일상을 보내는 그의 이 여유로움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일까 궁금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꿈꾸는 일'과 '명상하는 시간'이라고 답했다.그는 각박해진 세상, 속도전에만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앞만 보고 달리지 말고 잠깐 멈출 줄 아는 '쉼'을 일상에 들여놓을 것을 강권했다."정상에 오르고자 하는 사람일수록 쉬는 방법은 알아야 해요. 쉴 줄 모르면 성공적인 삶도 의미가 없습니다. 처절하게 경험한 나의 삶으로부터 얻은 교훈이지요. 휴식의 의미와 진정한 가치를 전달하는 일은 이제 나의 소명입니다."책읽기와 글쓰기, 소통과 명상, 그리고 그가 새롭게 전파하기 시작한 '꿈너머의 꿈' 이야기를 들으면서 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아침편지에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가 알게 됐다.-산세가 아주 좋습니다. 산길인데도 아주 잘 닦여 있던데요. 연고가 있습니까."연고는 없습니다. 우리 재단이 아침편지와 함께 명상센터 설립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충주시에서 그것을 알고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해서 이곳에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충주가 당시 이곳에 휴양림 조성을 추진하고 있었거든요."-많은 사람들이 이곳의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찾아온다고 들었습니다. 명상센터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도 벌써부터 소문이 많이 났던데요. 이런 성격의 공간이라면 이사장님 고향인 전북에서도 유치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 고향을 버리셨나요."(웃음) 왜 그런 생각을 안했겠습니까. 인연이라는 것이 어느 때인가는 고향을 떠나야 할 때가 오는 것인가 봐요. 이곳은 사실 전국 각지에서 접근성이 좋은 장점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세계적인 명상센터를 만들어보겠다는 우리들의 꿈과 계획을 알아주고 관심 가져주고, 힘을 모아준 곳입니다. 고향도 문을 두드려보았지만 관심이 없었고. 그때만 해도 오히려 무슨 소리냐 핀잔을 들었었어요."-이 사업을 시작하신 것이 언제쯤입니까."꿈을 꾸고 그것을 꺼내놓은 것은 2003년 9월 4일입니다. 아침편지 밑글에 제 꿈 이야기를 썼지요. 그 때 마음속으로 땅 60만평이 있었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와서 쉬고, 명상하고 자연 속에서 운동도 하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 받으면서 자기의 꿈을 찾고 키우는 그런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것을 글로 표현했었는데, 그 글이 지금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다 현실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저는 이 경험으로도 '꿈을 적어놓아라' '구체적으로 적어 놓으면 그것이 언젠가는 기적처럼 실현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려줍니다. 꿈은 현실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요."-이제 '고도원'이란 이름은 '아침편지'와 붙여 쓰게 되는 보통명사가 된 듯 합니다. 식구가 정말 많이 늘었더군요. 아침편지도 그렇지만 함께 운영하는 '몽골기행'이 화제던데요."2001년에 아침편지를 시작한지 1년 반 지나서부터 꿈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 생겨난 열두 개 꿈이야기였죠. 그 종합편이 명상센터인 '깊은 산속 옹달샘'이고 또 하나가 몽골에서 말 타기였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꿈꾸어온 일이었어요. 2학년 때인가 징기스칸이라는 위인전을 읽고 도대체 몽골이라는 땅이 어떤 땅이기에 800년 전에 세계최고의 지도를 그려낸 영웅이 태어날 수 있었는지 궁금했었습니다. 마침 청와대에 있을 때 대통령을 모시고 몽골을 가게 되었는데 너무 인상적이었어요. 그 너른 초원과 밤에 쏟아지는 별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800년 전에 세계를 제패할 정도로 강했지만 지금은 인구 300만에 불과한 나라로 한국과의 관계 역시 역전되었죠."지금은 그렇지만 당시의 그들이 가졌던 동인을 생각하면서 저는 그들의 말 타기를 주목했습니다. 이제는 말 타기로 세계를 제패할 수 없지만 인터넷이나 속도를 통해서 마음의 영토를 넓힐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꿈꾼 것이 몽골에서 말 타기였어요. 울란바토르에서 칭기즈 칸의 고향인 헨티까지 열여섯시간동안 길이 없는 초원을 달리는 여정이죠. 여행전문가들이 미친 짓이라고 했는데, 지금까지 해마다 100명 200명 대단위로 1600명 정도 다녀왔습니다."-대단위 여행단 또한 놀랍기도 하거니와 단순한 여행은 아닌 것 같은데요. 함께 가십니까."물론입니다. 참여한 사람들 대부분이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얻었다고 합니다. 저도 일 년에 한 번씩 가는 것이 엄청난 영감과 휴식이 되거든요. 말 타기가 쉽지는 않은데, 의용군 모아서 정예군 만드는 기분으로 합니다. 나중에 징기스칸 된 기분으로 마지막 날은 30킬로미터 대장정하는데, 한번 말에 올라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30킬로를 질주한다고 생각해보세요. 기가 막히죠."(그는 마치 말을 타고 질주 하는 듯이 즐거워했다. 여름에 한차례 떠나는 몽골기행은 해마다 신청자가 쇄도할 정도로 인기가 높아서 경쟁률이 10대 1정도 된다)-몽골기행 역시 이사장님의 꿈이 이루어진 예인데, 아직도 많은 꿈들이 있습니까."꿈이 많이 자랐어요. 아침편지에 열두 개 꿈을 쓸때만해도 '꿈너머 꿈'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꿈너머 꿈'을 많이 씁니다. 꿈이 이루어진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이냐의 문제죠. 한사람이 어떤 꿈을 꾸든 자기 성공에 머무는 것은 그냥 꿈이라고 부릅니다. '꿈너머 꿈'은 자기에게도 의미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도 의미가 있는, 다시 말하자면 다른 사람의 성공과 행복에 징검다리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새로운 개념의 꿈이랄 수 있겠는데, 그것을 저는 '꿈너머 꿈'이라고 붙였습니다. '꿈너머 꿈'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해도 그 방향이 이타적인 것이면 위대해 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깊은 산속 옹달샘' 같은 명상센터 건립도 '꿈너머 꿈'의 실현인 셈인가요."물론입니다. 깊은 산속 옹달샘은 명상센터로만 꿈꾸었던 것인데, 이곳이 다른 사람들의 꿈의 플랫폼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죠. 이곳이 단순히 명상하는 곳에 머물지 않고 어떤 사람에게는 섬광 같은 아이디어를 얻게 하고, 또는 더 멋있는 꿈을 꾸게 하고, 그 꿈을 이룬 다음에 그 꿈이 다시 다른 사람의 성공과 행복의 징검다리가 되게 하는 그런 정거장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지금 아침편지 식구만 260만 명이나 됩니다. 혹시 이런 환경을 정계진출과 연관시키는 시각은 없을까요. 이사장님의 입장이 궁금하기도 합니다."실제 260만 명 회원을 표로 보는 사람도 있고 돈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고도원의 아침편지'와 명상센터인 '깊은 산 옹달샘'의 가치를 몇 천억 원의 가치로 보는 사람들도 있더군요. 그러나 이모든 사업들은 문화재단이라는 공적 기구로 모아져 공공의 재산으로 대물림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정치는 이미 접었습니다. 저는 '고도원의 아침편지'에 죽는 날까지 몰두하는 것만으로도 이 사회에 작은 기여이고 작은 봉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때는 이런 저런 제안에 흔들리기도 했지만 잘 선택해서 여기까지 왔고, 후회도 없습니다."-그렇게 말씀하시니, 정치의 한복판에 있다가 어떻게 갑자기 이런 길을 선택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저는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잡지사와 신문기자로 일할 때도 휴식이라는 것을 모르고 보냈습니다. 인연이 되어 청와대에 들어가 있던 4년 동안에도 단 하루도 휴일 없이 지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계시와도 같은 경험이 있었습니다. 건강이 무너져 주저앉아 버렸죠. 정말 치열하게 사는 과정에서 정지된 상태를 경험한 것인데, 그때 가장 필요한 것이 휴식이었습니다. 그때 시작한 것이 마라톤이고 고도원의 아침편지였습니다. 그런데 휴식삼아서 시작한 이 편지쓰기의 중압감이 만만치 않았어요. 처음 시작할 때는 말랑말랑했던 일이 너무 무거워지고, 힘들어졌을 때 접한 것이 명상이었습니다."-그래서 지금은 명상운동가가 되셨군요."왜 내가 명상을 이제야 알게 되었을까 싶을 정도로 명상은 엄청난 에너지원이었어요. 그때부터 명상을 보다 많은 사람들과 만나게 하는 일을 꿈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비종교적이고 비상업적인 자연친화적인 좋은 명상공간을 만들어놓으면 세계적인 명소가 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죠."-명상은 책읽기와도 연관이 있습니다. 아침편지도 이사장님의 독서와 깊은 관련이 있지 않습니까."저의 책읽기는 목사였던 아버님으로부터 받은 소중한 유산입니다. 아버님이 이름난 다독가이셨는데 가난하고 궁핍해도 책을 사 오셔서 어린 시절 집안이 온통 책이었습니다. 아버님은 저희들에게 책을 읽고 밑줄을 긋게 하셨어요. 아침편지는 그때 그었던 밑줄이 만들어낸 결실입니다. 책은 제 삶의 일부입니다."-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책을 읽으셨습니까."몇 권을 읽었는가는 의미 없고, 이렇게 말씀 드릴 수는 있겠군요. 내가 읽고 밑줄 그은 책으로 지난 10년 동안 아침편지를 썼는데, 오늘부터 책 한권 안 읽어도 지금까지 밑줄 그은 것만으로 5-6년은 쓸 만큼의 책이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습니다."-그런데 '명상'은 세상과 현실 사회, 이런 것과는 떨어져있는 듯하다 생각이 듭니다. 이 시대에 갖고 있는 화두나 이런 것들을 고민하고 소통할만한 통로는 없는 개인적인 그런 의식세계에 몰두해있는 것이 아닌가요."진정한 명상은 현실과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을 좀 떨어져서 보는 것이지요. 무조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잠깐 멈추는 것이구요. 잠깐 멈추면 우리는 곧 뭔가 뒤처지고 밀리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우주의 원리는 잠깐 멈추어야 오래 멀리 갈 수 있고, 잠깐 멈추어야 높이 치솟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명상이예요. 특히 제가 말하는 명상은 생활명상인데, 생활을 누구보다도 예리하게 바라보는 것입니다."-그러나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는 걱정할 일들이 많지 않습니까. 정치도 경제도 사회적인 문제들도 얼마나 절박한 일들이 많습니까. 그래서 아침편지의 역할이 더욱 필요할 것 같은데요."개인적으로는 지금의 정치상황과 사회문제를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때로는 눈물 흘리면서 때로는 아파하면서. 그런데 침묵하고 있어요. 예전에 많은 수도사들이 세상에 대해 침묵하면서 기도했던 것처럼 하지요. 그러나 마음으로는 지향점이 있으니 저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에게 응원의 주파수를 보냅니다. 걱정되는 일도 많지만 그렇다고 뛰어 들고 싶지는 않아요. 선수로 뛸 목표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직접 펜을 들어서 질타하고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고 싶진 않습니다. 그런 생각이 있을 때마다 오히려 그 생각들을 내려놓고 그것 보다 더 밑바닥에 있는 감사 사랑 긍정 희망 꿈 행복 평안을 생각하며 큰 우물을 파는 마음으로 바탕을 지키는 사람도 필요하다는 마음을 다집니다."(정치상황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갔지만 직접적인 코멘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만큼 정치와는 이제 거리를 두었다는 표현으로 받아들여졌다.)-이사장님의 글쓰기는 정평이 나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글쓰기를 잘할 수 있을까요."얼마 전 매체를 통해서 보니 한수산 씨가 좋은 답을 했더군요. 좋은 소설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으니'인생이 재수 없어야 된다'고 합디다. 역경을 경험하고, 엎어지고 깨진데 또 깨지는 시련을 경험하는 것, 그것이 곧 좋은 소설 쓰게 하는 바탕이듯이 좋은 글을 쓰려면 고생을 사서 해야 합니다. 고생한 체험을 글로 쓰기 시작하면 좋은 글이 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글공부를 시키지 말고 삶 공부를 시켜야합니다. 고통의 경험, 그리고 자기가 밑지는 경험, 이런 것들이 스토리가 됩니다. 그런데 없는 스토리를 만들려고 하니까, 아무도 읽지 않는 글, 죽은 글이 되지요."-정말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글을 쓰시는 이사장님께서도 글이 안풀려질때가 있습니까."물론입니다. 아침편지에서도 구상하고 6개월 걸린 것도 있어요. 그런데 신기한 것은 '깊은 산속 옹달샘'에서 명상을 하면서부터 그것이 많이 해소가 됐습니다. 예전에는 글을 쓰기 위해서 머리를 쥐어짜고 오래 사색했는데, 이제는 안에서 솟아나는 영감이 왔을 때 딱 한 줄로 시작하게 되는, 그래서 글쓰기에 대한 피로감이 많이 사라졌어요. 그것이 명상의 힘이에요."-고향은 이사장님께 어떤 곳입니까. 마음도 몸도 떠나신 것 같은데요.(웃음)"고향은 나무 같은 곳입니다. 언제 가도 그 자리에 있는 것. 삭풍이 불고, 비바람 쳐도 밑동으로라도 남아 있는 것이 나무잖아요. 이렇게 고향을 떠나있지만 제가 힘들고 외로울 때 제 인생에 삭풍이 불면 전주 언저리만 가도 마음이 평온해집니다. 몸은 그렇지만 마음은 떠날 수 없지요. "

  • 기획
  • 김은정
  • 2011.09.06 23:02

임경수 교장은

1966년 생으로 서울 출신인 임 교장은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나와 환경대학원에서 석박사과정을 마쳤다. 진안에서 마을만들기에 앞장서고 있는 구자인 박사와는 대학원 선후배다.대학원 졸업후 1999년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유기농산물 전자상거래업체인 인터넷 이장을 창업했다. 또 서울대 근처에 유기농 도시락전문점을 냈으나 3개월만에 문을 닫았다. 이후 호주로 건너가 크리스털 워터스라는 생태마을에서 퍼머컬쳐 디자인 코스를 수료하고 귀국후에는 충남 홍성의 풀무원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2001년에 서울 봉천동에서 (주)이장을 창업했다. 이때부터 농촌 컨설팅을 본격화해 강원도 화천군 신대리마을을 비롯 농촌 마을 100여 곳을 컨설팅했다. 친환경 전원마을 조성에도 힘써 충남 서천의 산너울마을을 만들었고 경남 하동, 충남 서산 등 몇몇 지역에 또 다른 전원마을을 조성 중이다. 그동안 본사 사무실을 6번 옮겼고 본인의 집도 6번 이사했다. 그 중 어머니와 부인 아이들까지 함께 이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주)이장은 그 동안 지역디자인센터푸른새미사업부부설연구소 '환경과 사람'등 3개 사업부와 (주)생태건축집단 자인(주)소박한 풍경(주)책임관광(Res-T)등 3개의 자회사로 성장했다. 직원은 40여명. 2007년에는 노동부 인증 사회적 기업으로 선정되었으며 '가치혁신상'을 받았다.부인 조영란씨(41)는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서 영양사로 7년간 근무하다 남편을 따라 안덕마을로 내려왔다. 지금은 한증막 식당의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자녀는 초등학교 642학년 등 2남1녀이며 올해 대덕초등학교로 모두 전학했다.

  • 기획
  • 조상진
  • 2011.08.30 23:02

퍼머컬쳐학교 교장 임경수 박사

완주군 구이면 모악산 남쪽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안덕마을. 전주에서 그리 멀지 않으면서도 심산유곡에 들어온듯, 마음이 여유로워지는 곳이다.이곳은 부지런한 주민들과 10여 년전 고향에 내려와 문을 연 민속한의원이 힘을 합쳐 만든 건강힐링체험 마을이다. 장파 미치 신기 원안덕 등 4개 마을주민 54명이 1억3000만 원을 출자해 '안덕파워 영농조합법인'이란 이름의 마을공동체 회사를 세운 것이다. 국내 커뮤니티 비즈니스 1호다. 건강과 치유를 테마로 토속한증막과 황토민박, 그리고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해, 최근 각종 연수 장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생태적 삶과 일자리 창출, 농가소득 등 1석3조를 올리는 농촌의 오래된 미래(Acient Futures)라고나 할까.이러한 컨셉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원군(援軍)이 지난해 말 이곳에 정착했다. (주)이장 대표 임경수 박사다. 임 박사는 전원마을 조성과 생태농업분야에서 내노라 하는 전국구다. 그가 이곳에 퍼머컬쳐 대학과정을 설립한 것이다. 그로 부터 퍼머컬쳐의 운영과 지속가능한 농업의 미래에 대해 들어봤다.- 반갑습니다. 특별히 안덕마을을 선택한 이유가 있습니까?"전부터 농촌에 들어가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제 생활을 유지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고 그 대신 제가 잘 할수 있는 게 뭘까를 고민했는데 그 중 하나가 저같은 일을 할 수 있는 젊은이를 키우는 것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학교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계속 갖고 있었는데요, 완주군하고는 2008년에 인연이 돼서 마을계획을 하게 됐는데 그곳이 바로 안덕마을이었습니다."- 고향도 서울이고, 대학도 화학공학과를 졸업했는데 어떻게 농촌문제에 관심을 갖게됐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처음에 석사학위는 대기오염을 가지고 했습니다. 그런데 석사학위를 받자마자 느낀 점은 제가 공부한 게 환경문제에 별로 도움을 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면 환경정책이나 기술, 환경공학은 환경문제가 생기는 것을 가정하니까요. 사실 가장 좋은 것은 환경오염이 생기지않게 하는 겁니다. 그것이 뭘까를 고민했어요. 가장 좋은 것은 자연에 대한 사람의 태도를 바꾸는 것입니다. 그 해답이 농업과 농촌에 있다는 것, 그래서 전공을 바꿨습니다."- 올 4월부터 안덕마을에 퍼머컬쳐 학교를 열었는데 어떤 분들이 다닙니까?"고등학교 이상을 졸업하고 농업과 생태분야에 관심있는 분들입니다. 1년에 1기수를 운영하고 총 8개월 과정입니다. 올 4월에 정원 20명으로 시작했는데 현재 14명이 공부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20대 초반에서 40대 초반까지, 전국에서 왔습니다. 농촌이나 지역에서 일해보고 싶다거나, 귀농귀촌을 희망하거나, 이미 경험이 있는 분도 계십니다."- 퍼머컬쳐가 무엇인지 좀 자세히 설명해주시죠."퍼머컬쳐는 호주의 빌 모리슨(Bill Mollison)이란 분이 만들어낸 체계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생태마을을 계획하거나 설계하는데 쓰는 방법인데요. 빌 모리슨의 고향이 남부의 타즈메니아라는 섬인데 우리나라 같으면 제주도와 같은 휴양지입니다. 모리슨이 멜버른에서 일을 하다가 자기 고향에 가보면 고향이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자꾸 환경은 망가지는데 자기 친구들은 잘 살지 못해요. 이것은 뭔가 잘못됐다, 이렇게 생각한거지요. 조경설계를 했는데, 직장을 그만두고 전 세계 여행을 다닙니다. 우리나라에도 왔습니다. 충남 홍성에 와서 유기농 농부를 만났어요. 질문을 했습니다. '이 논이 언제부터 논이었나요?' 농부가 이렇게 대답을 했어요. '아버지 때도, 할아버지 때도 논이었다. 몇백년, 아니 몇천년이 넘었는지 모른다' 빌 모리슨이 깜짝 놀랍니다. 호주에서는 그렇게 농사짓지 않거든요. 호주는 워낙 땅이 넓으니까 지력이 떨어지면 휴경을 하거나 아예 버립니다. 반면 우리는 한 땅에서 한가지 작목을 계속하는데도 소출이 줄어들지 않거든요. 그래서 빌 모리슨이 호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한국에서는 퍼머넌트(permanent)하게 어그리컬쳐(agriculture)를 하고 있다, 그래서 퍼머컬쳐가 탄생하게 된 거죠."- 그러면 지속가능한 농업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단순하게 농업에서 끝나는게 아니구요. 경제, 지역사회, 문화 이렇게 확장이 되는 것입니다."- 과목은 어떤 것을 배웁니까?"환경생태학, 퍼머컬쳐, 지역개발, 건축과 조경, 농촌경영학 등이 실무과목이고요. 소양과목으로 인문학을 배웁니다.'너, 왜 농촌에 들어 갔느냐'라고 물었을 때 대답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럴 수 있는 통찰력을 갖게 하려면 인문학 베이스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위기와 시련이 닥치면 접습니다. 그리고 도시로 가죠. 또 마음을 낮추게 하는 방법을 습득해서 시련이 왔을 때 자기를 지키게 하는 과목이 '영성과 소통'입니다."- 애로사항도 있을 것 같은데요?"14명의 생각과 수준을 맞추기가 참 어렵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한 학기가 지나니까 잘 적응하게 되었는데 1학기 중반부터 하루 생활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거든요. 명상과 108배, 검도 등 삶을 조금 깊게 들여다 보면서 적응하게 된 것 같아요."- 사회적 기업 (주)이장 얘기를 좀 하죠. 어떻게 이장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습니까?"박사과정 들어가서 농업 공부한다고 했더니 사람들이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더라구요. 귀찮아서 '이장되는 게 꿈'이라고 대답했어요. 그러다가 회사 창업 전에 서울대 내에 벤처회사를 등록했거든요. 그때 이름을 지을 때, 사람들이 부르던 이름이 제일 좋다더라, 해서 이장이라 부르기 시작했죠."- 요즘은 이장되기도 쉽지 않다고 합니다. 창업과정을 설명해 주시겠습니까?"처음에 창업하려고 했던 것은 농촌일 뿐만 아니라 환경, 생태, 유기농업에 관련된 여러가지 일을 해보고자 해서 시작했습니다. 처음 한 일은 제가 호주에서 배운 퍼머컬쳐를 기본으로, 우리 농촌을 생태마을로 바꾸는 일을 했습니다. 때 마침 정부가 그린투어리즘과 관련해서 마을사업들을 많이 벌이면서 마을의 기본계획을 하거나 주민교육컨설팅을 해 왔구요. 두번째로 했던 일은 도시민들이 농촌에 들어가려고 할 때 기존의 농촌마을에 들어가기가 좀 어려운 경우가 있거든요. 주변의 문화 환경이 다르거나 정주환경이 자기의 생각과 다를 때 그런 분들을 위해 거주단지를 아예 새롭게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경영이 독특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만."제가 10년을 회사를 경영한다고 해봤는데 경영에는 큰 재주가 없는 것 같아요. 물론 가치있는 일을 찾다보니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구요. 사실 저희는 어떤 사업분야가 잘 돌아가면 자꾸 독립을 시키거든요. 제가 여기 와서 학교를 할 수 있는 것도 대외적으로 대표 역할을 하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거의 독립해서 가능합니다. 저희는 그것을 자율경영이라고 부르는데요. 즐겁게 일할 수 있는 회사를 만들겠다, 이 모토가 계속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회사경영에 직원들이 참여할 수 있는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어서, 3명이든 5명이든 한 팀이 되면 결정을 위임합니다. 인사권 예산권 작전권을 모두 준 거죠. 제가 대표지만 직원 1명도 해고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웃음)"- 그 동안 컨설팅을 100군데도 넘게 했는데, 마을마다 수요에 맞춘 유형이 있을 것 같은데요?"마을에 있는 자원이나 환경을 보고 저희가 판단을 하고 마을지도자들과 상의를 하는데요. 어떤 유형보다는 절차가 훨씬 중요한 것 같아요. 처음에는 주민들이 의지를 갖고 조직을 만들고 으쌰으쌰하는 분위기가 있어야 하구요. 두번째 단계는 뭐든지 작은 사업을 해서 꼭 성공해야 하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그냥 주저 앉아요. 많은 전문가들이 처음 마을계획을 할 때 굉장히 멋있는 계획을 해요. 근데 그건 어렵거든요. 아주 쉬운 것, 그렇지만 성과가 날만한 것, 이것부터 해야 합니다."- 지금 농촌의 현실은 젊은이들이 거의 없어 활성화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인데요?"그게 제약사항 중의 하나입니다. 지역과 관련해서 일을 하다 보니까 '공공성을 지닌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죠. 그 동안 농촌개발과 관련해 정부가 많은 교육을 했는데요. 그 교육은 경쟁력있는 사람을 만들려는 교육이었어요. 경쟁력을 확보해서 자기 이익을 취하거든요. 그런 사람도 필요하지만 그런 사람만 가지고 농촌을 발전시킬 수는 없거든요. 사실 지역에 NGO도 있고 지역신문도 있는데 이슈를 중심으로 움직이지, 지역의 활동가로서 역할을 할 수 없거든요. 여하튼 시민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도시에서 농촌으로 들어와야 뭔가 자극을 받고 지역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귀농귀촌을 준비하거나, 이미 한 사람들도 꽤 많은데"제 경험을 말씀드리면 제가 시골에 왔다고 하니 먼저 교육문제부터 말을 해요. 아이들 교육이 어렵지 않느냐는 거죠. 지금 저희 아이들은 초등학생이어서 고민을 안하고 있긴 하지만, 지금 다니고 있는 학교의 방과후 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서요. 학원을 보낼 필요가 없어요. 또 한가지는 도시에서 공부를 가르치고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다고 해서 더 행복하게 사는 걸까, 지역사회에서 얼마든지 보람있는 일을 찾을 수 있고 더 행복할 수 있다는 거죠. 제가 원하는 교육이나 직업의 수준을 낮추고 바라보면 별로 걱정할 게 없어요. 요즘 선생님이나 학부모 모임에서 저를 강사로 부르는데요, 이런 얘기를 합니다. 우리 사회의 직업이 2만개랍니다. 그런데 학부모들이 원하는 직업은 20개랍니다. 그 20개 직업을 위해 사교육을 하느라고 아이들은 학원을 뺑뺑돌고요, 부모들은 학원비 대느라고 매몰돼 있거든요. 제가 볼 때 이것은 정신나간 사회거든요. 우리 사회는 1만9980개의 직업이 있어야 돌아갈게 아녜요. 그렇게 사회를 보기 시작하면 농촌 오는게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게다가 자원도 풍부하고 경쟁할 사람도 적죠.(웃음)"- 그 동안 전국을 섭렵하셨는데 전북의 농촌을 활성화 시킬 방안을 제시해 주신다면?"광역 단위별로 보면 전북은 경제적으로 낙후가 많이 됐죠. 하지만 반대로 농촌의 다양한 자원이 난개발되어 있지 않고 잘 보전되어 있으니까 가능성이 있는 것 같구요. 그런데 한 가지 고민해야 할 지점이 있습니다. 농촌을 개발하는 것 자체가 돈을 많이 벌게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거죠. 농촌관련 지표를 놓고 보면 우리 농촌이 어려워진 이유가 돈을 못벌어서가 아닙니다. 10년 전과 비교해서 매출액 늘었구요, 농가소득도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실소득이 낮아졌거든요. 그 이유는 지출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결국 많이 벌어 많이 쓰는 구조가 된 거죠. 이걸 바꾸지 않는 한 농촌이 잘 살수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거죠."첫번째가 퍼머컬쳐 같은 것을 도입해서 생태적으로 사는 겁니다. 에너지도 스스로 자립하고 주변에서 많은 것을 얻어내고, 옛날에는 다 그랬죠. 두번째가 협업하는 것입니다. 혼자서 지출을 줄이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주변에 있는 농민들과 협업해서 기계도 같이 쓰고 퇴비도 같이 만들고 해야 더 효과적인 거죠. 세번째는 생활에서 지출을 줄여야 하는데요. 그것은 공동체가 돼야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다양한 방식의 협동조합, 또는 사회적 기업, 커뮤니티 비즈니스, 이런 것이 필요한 거죠. 그렇지 않는 한 농촌에 답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농업정책 역시 시장 위주가 아닌가요?"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져라. 이것만 가지고는 답이 되지 않습니다. 일정부분 사회정책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완주군은 사회정책적인 농촌정책을 활발하게 도입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선택한 이유도 있죠. 퍼머컬쳐 과정은 학생들 입장에서 그런 현장이 있어야 직접 보고 경험할 수 있거든요."- 최근에는 농촌에서 마을 만들기가 너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것 같은데요?"오해가 조금 있는데요. 마을 만들기를 도입한 것은 일본입니다. 일본에서는 마찌추쿠리(まちづくり)라고 부르죠. 마찌가 정(町)을 번역한 건데요. 정의 수준은 우리나라 면(面)보다 크고 군(郡)보다 조금 작습니다. 그런 규모를 우리나라 작은 마을에 적용하니까 잘 안돌아가는거죠. 그래서 요즘 저는 용어를 바꿨습니다. 마을만들기가 아니라 지역만들기, 지역가꾸기, 지역공동체로요. 또 많은 분들이'마을이 희망이다'고 말하지만 그 때 마을은 지금 있는 공간구조로서의 마을로 해석해선 안됩니다. 예전에 생산 소비 교육 문화 복지가 하나로 돌아갔던 마을 시스템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끝으로 지역에 사는 분들에게 힘이 되는 얘기를 좀 해주시죠."저는 우리 사회가 전반적으로 불확실성이 많은 시대로 가고 있다고 봅니다. 기후 변화 등 환경변화가 심하고 경제위기도 예측할 수 없는 정도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잘 사는 것을 고민할 때가 아니라 이런 불확실성에서 어떻게 벼텨낼까를 고민할 때라고 보거든요. 이런 불확실성 시대에 정말 안정적인 곳은 농촌입니다. 희망이 농촌에 있다는 거죠. 어쩌면 우리 사회의 장기적인 발전을 위해서도 농촌에 그런 기반이 남아 있어야 하고, 그런 기반을 하나씩 만들어 갈 때, 농촌이 우리 사회를 지지해 줄 거라는 거죠. 그런 자부심을 가지고 농민들이, 지역주민들이 열심히 생활해 주셨으면 합니다."(임 대표는 혹시 다른 곳으로 다시 떠날 생각은 없는지를 묻자 "아이들이 점점 크니까 고향이 필요하고 동문도 필요해서 이곳에 정착해야겠다"고 대답했다.)

  • 기획
  • 조상진
  • 2011.08.30 23:02

양산시정 취재언론사 운영 핵심 규정

제3조(시정취재 언론사 등록) 지역일간지 신생언론사는 창간 다음 연도말 한국ABC협회 발표기준 발행부수 1만부 이상이 돼야 시정취재 언론사로서 등록 가능.제4조(프레스센터 운영)① 프레스센터는 발행부수와 관계없이 모든 언론사 기자들이 이용 가능하지만 취재기자가 공갈, 금품수수 등으로 금고 이상 형을 선고 받을 경우 해당언론사 및 기자는 영구히 시정취재 불허.② 취재기자가 기자 고유업무 이외 타 업종을 겸업할 경우 프레스센터 이용을 불허할 수 있음.③ 취재기자가 실과를 방문하여 무리한 광고 요구 등으로 시의 청렴실천에 반하는 행위를 하거나, 신분 이용으로 금고 미만 형을 선고 받을 경우 2년 이상 보도자료 제공중지 및 프레스센터 이용 불허.④ 프레스센터내에서 타 기자의 보도자료 작성 등에 심각한 방해를 일으키는 행위를 한 기자는 1개월간 이용 불허.제5조(시정광고 등)① 지역일간지는 발행부수 1만부 이상 언론사에 한해서 고시공고와 시정광고를 시행함.② 지역주간지는 일간지와 별개로 시정광고를 실시함.③ 사실왜곡, 허위, 과장, 편파보도를 해 언론중재위원회에서 인용조정 결정한 경우 1년 이상 시정광고를 중단.④ 제4조 제1항부터 제3항까지의 요건 발생시 시정광고를 중단함.⑤ 등록된 언론사가 제6조 제1호에 해당될 경우 시정광고를 중단함.제6조(등록취소)① 지역일간지는 연말 한국ABC협회 발표기준 발행부수가 2년 연속 1만부 이하일 경우.② 제4조 제1항부터 제3항까지의 요건에 해당될 경우.

  • 기획
  • 전북일보
  • 2011.08.23 23:02

나동연 양산시장은

양산의 중견 기업체(한독이엔지) CEO 출신으로 두차례 시의원을 지낸 뒤 지난해 6.2지방선거에서 당선돼 양산시장을 맡고 있다. 부산 동아고와 동국대 무역학과를 나왔다. 시의원 8년 동안 정치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을 만큼 소박하고 꾸밈이 없다.한나라당 소속인 그는 민주당 성향의 무소속 출신인 김두관 경남도지사와의 관계는 어떻느냐는 질문에 "아주 좋다."고 자신있게 대답했다. 김 지사가 너무 잘해 준다는 것이다.그는 하마터면 시장을 하지 못할 뻔 했다. 지방선거 당시 뒤집힌 공천 에피소드가 흥미롭다. 처음엔 여론조사에서 근소한 차이로 져 공천을 받지 못했지만 일주일만에 뒤집힌 '사건'이다. 여론조사 결과가 8년간이나 활동한 지역구에서 압도적으로 뒤진 게 미심쩍었다. 여론조사과정도 문제점이 있어 법원에 가처분신청을 내 받아들여졌다.결국 2개 기관에서 다시 여론조사를 실시했고, 높게 나온 나 시장이 한나라당 공천을 받아 당선됐다. 일주일만에 내려진 가처분결정, 공천 번복 당선은 최초 사례라고 한다.시장에 당선된 뒤 '통상적인 업무보고-시장의 일방적 지시' 형태로 운영되던 간부회의 진행을 토론 식으로 바꾸었다. 잘못된 일은 반드시 개선하고 불의와는 절대 타협하지 않는 강인함이 있다고 직원들은 평한다.지난해 12월27일 영세 언론사 난립으로 인한 폐해를 줄이기 위해 발행부수가 1만부 이하이거나 발행부수를 공개하지 않는 언론사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출입기자 명단에서 제외하고 고시 공고 등 광고를 주지않겠다고 밝혀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지난 96년 시로 승격된 양산시는 부산 울산과 함께 3산의 도시다. 인구는 27만명. 부산 다대포 앞바다가 보이는150m 높이의 전망대가 랜드마크다.

  • 기획
  • 이경재
  • 2011.08.23 23:02

나동연 경남 양산시장

경남 양산시청까지 가고 오는 길은 너무 멀었다. 왕복 530㎞. 1시간 30분 인터뷰하기 위해 7시간 30분을 달렸다. 익산장수간, 대전통영간, 남해, 경부 등 고속도로를 4개나 거쳤다. 나동연 양산시장(56). 그는 왜 미운 털이 박힐 '신문사 퇴출'이라는 언론정책을 실행했을까, 그후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그리고 7개월이 지난 지금 그 자신의 언론정책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여간 궁금한 게 아니었다. 그는 활력이 넘쳤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거침 없이 이야기를 풀어갔다. 궁금했던 것들이 확 풀렸다. 힘들었지만 그를 만나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고 처음 만났지만 시민들이 좋아할 정치인이라는 느낌을 받았다.시정(市政) 운영방침을 보니 '정도(正道)행정'과 '3불5행'을 내걸으셨던데 어떤 뜻입니까."3불(不)은 청탁배제, 이권불개입, 군림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5행(行)은 화합 민주 소신 비전 청렴을 실천하겠다는 뜻입니다. 이 두가지를 실천하면 정도행정이 되는 것이지요. "자치단체들이 대개 지역발전 청사진 등을 구호로 내거는데 이와는 달리 철학적인 냄새가 납니다."표를 얻기 위해 도로개설이나 공공시설 건립 같은 선심공약을 하다 보면 사심이 개입하게 되고 무리한 예산집행 등으로 역기능을 초래하게 됩니다. 또 공무원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으려면 시장이 직원들한테 신뢰를 얻어야 합니다. 리더가 깨끗하고 투명하지 못하면 어떤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어요. 전시행정이 아닌 내실과 질 높은 행정에 촛점을 맞추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입니다."지난해 말 '시정 취재 언론사 운영규정'(이하 가이드라인)을 시행하겠다고 밝혀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럴만한 동기가 있었나요."양산시청에는 드나드는 기자가 50명이 넘어요. 직원들이 스트레스를 받고 광고 요구액도 많아 행정력과 예산낭비가 컸습니다. 또 원칙이 없다 보니 행정이 출입기자들에게 끌려가는 잘못된 일도 벌어져요. 시정을 제대로 비판하거나 홍보하지 못하는 언론사에게 시민 세금으로 조성된 예산을 무분별하게 지원한다면 업무태만이지요."언론난립의 폐해랄까 실태를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신다면.-"신문사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생기다 보니까 기자 2명에 여직원이 고작일 만큼 영세한 곳도 있고 독자들이 거의 없는 신문도 있어요. 그런데 모두 큰소리를 쳐요. 심지어 기사도 제대로 작성하지 못하는 기자도 있고 전과자도 기자행세를 해요. 민원실 앞에서 하루종일 왔다갔다 하면서 시청분위기를 훼손시키고, 담배 꼬나문 채 퇴근하는 공무원을 손가락으로 불러내는 기자도 있어요. 기자의 자질, 신문의 질이 부족한 걸 방치한다면 직무유기 아닌가요."두차례나 시의원을 지냈기 때문에 지역 언론상황을 꿰뚫고 있겠군요. 지역언론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퇴출방침'이 나온 건 아닌가요."그런 측면도 있지만 시민세금으로 운영하는 행정이 사이비언론 때문에 잘못 간다면 용납할 수 없는 문제지요. 정도행정에도 반하는 것이고요."'가이드라인'은 어떤 내용입니까."신문 등록부수(한국ABC협회 조사 기준)가 1만부 이상이어야 시정취재언론사로 등록하고 광고예산도 지원하겠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출입기자가 금품수수 등으로 벌금형 이상 선고될 경우, 사실왜곡이나 허위 과장 편파 보도로 언론중재위에서 결정한 경우 예산지원을 중단하게 됩니다. 취재기자가 무리하게 광고를 요구해서 시의 청렴실천에 반하는 행위를 한 경우에도 2년 이상 광고를 중단하고 프레스센터(기자실) 이용도 중지됩니다."한국ABC협회는 객관적인 방법으로 신문 잡지 등의 발행부수를 실사하는 기구다. ABC(Audit Bureau of Circulations)는 신문 잡지 웹사이트 등 매체량 공사(公査)기구의 약자다.1만부라는 기준은 어떤 근거에서 나왔습니까?"기사 스크랩을 하다 보면 기자나 기사, 신문의 질에 대해 어느 정도 간파할 수 있게 되는데 이런 대략적인 판단을 놓고 지난해 12월 한국ABC협회에서 발표한 발행부수와 비교했더니 1만부라는 공통점이 나왔습니다. 우리 시에서 내부적으로 인정해온 언론사와 거의 일치했습니다."발행부수를 공개하지 않거나 1만부 이하 신문의 기자들이 출입기자 명단에서 제외됐는데 몇개 신문사가 이에 포함됐습니까."전체 16개 신문사중 7개 신문사가 해당됐습니다"반응은 어떻던가요."'퇴출'되지 않은 언론사는 적극 찬성했고, 예산지원이 탈락된 언론사도 대체적으로 수용했습니다. 불만이 많을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심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탈락된 모 언론사에서도 찬성한다는 편지를 보내왔습니다."'퇴출 신문'들의 불만이 많았을 텐데요."그중 1개 언론사는 몇 개월 정도 반발했습니다. 여러 악성루머를 퍼뜨리고 다녔는데 우리 시에서 제소하는 등 법적으로 강력 대응을 했더니 이제는 잠잠해졌습니다."이른바 해꼬지나 보복성 취재는 하지 않던가요."처음에는 '밤길 조심하라'는 전화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시민들이 찬성하고 정도행정을 하는 거니까 시비꺼리가 없어요. 그리고 업무와 관련이 없으면 일체 취재에 응하지 않고 보도내용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사실을 왜곡할 경우엔 강력히 대응하고 있습니다."'가이드라인'에서 제외된 신문한테는 광고 등 예산지원을 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실제로 단 한건도 준 일이 없나요."당연하지요. 올해 1월부터 시행했는데 단 한건의 광고도 주지 않았습니다."기준을 갖춘 9개 신문사에게는 광고예산이 집행됐을 텐데 이 때에도 적용되는 기준이 따로 있나요."있습니다. 한국ABC협회가 발표한 발행부수를 참고해 광고예산에 차등을 두고 있습니다."지역에서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당시 오전 10시에 기자회견을 통해 '가이드라인'을 발표한 뒤 12시에 기관장 모임이 있어 갔는데 그 사이 발표내용을 들은 기관장들이 "용기있게 잘했다."며 기립박수를 쳐 주었습니다. 시민들 뿐만 아니라 중소기업 사장, 사찰 주지로부터도 감사전화를 받았고 경기도에서도 어느 시민이 감사 편지를 보내왔습니다."양산시의 언론정책을 벤치마킹한 자치단체나 기관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청와대와 국가정보원, 감사원, 중앙정부 등에서 격려전화와 문의전화가 왔습니다. 9개 광역자치단체와 30개 기초자치단체에서 내용을 소개해 달라는 문의전화가 왔고 언론 관련 시민단체와 언론 학계에서도 관심을 보여주었습니다."그 후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시행하는 자치단체들이 있나요."우리 시를 벤치마킹한 뒤 성남시와 안산시, 시흥시, 광명시가 가이드라인을 정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자치단체가 자의적 기준을 내세워 언론사의 출입 여부를 결정한다면 언론자유라는 가치와 상충한다는 지적도 있습니다만."취재 자체를 막는다면 언론탄압이 될 수 있지요. 하지만 취재를 막는 게 아니라 일정 요건을 갖춰야 광고예산을 지원한다는 것이고, 취재기자가 공갈 협박 등으로 구속될 경우엔 공무원 처벌규정을 준용해서 출입을 제한하겠다는 것입니다. 출입기자로 인정되지 않을뿐, 프레스센터는 출입할 수 있기 때문에 탄압은 아니지요."이 제도를 시행한 지 8개월째를 맞고 있습니다. 어떤 효과가 있었습니까."시정취재언론사에 대한 원칙을 세우다 보니 기자관리가 훨씬 편해졌고 질서가 많이 잡혔어요. 부수적으로 예산절감도 되었고요. 이런 원칙을 세우지 않았다면 신생 언론사로 인한 출입기자 수가 늘어나 공무원들이 많이 시달리고 행정낭비도 많아졌을 겁니다. 관내 기업체들도 이 가이드라인을 기준으로언론을 대하고 있습니다."정치인들은 대개 언론과 적대관계를 맺지 않으려 하는데 지금 판단해도 잘했다고 생각하십니까."언론 관계를 생각한다면 못할 일이지요. 지역신문 난립 때문에 경영이 어렵고 뉴미디어 출현으로 지방신문은 위기입니다. 정부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하는 이유가 뭡니까. 건전한 지역언론을 육성하자는 것인데 일부 사이비 신문들이 저해하고 있으니 건전한 언론사가 피해를 보는 것 아닙니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해요."다음 선거를 염두에 둔다면 괜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나요."그런 마음을 먹었다면 애초부터 못하지요. 정도행정에 역행하는 것을 바르게 했는데 후회할 것이 뭐가 있습니까. 제 소신입니다. 몇몇 기자 때문에 재선이 되고 안 되는 그런 사회는 아니잖아요. 그런 걸 따진다면 오히려 '남는 장사'라고 해야겠지요"전북 역시 언론난립 지역입니다. 인구는 180만 명에 불과한데 신문은 일간지 13개에다 주간지 특수주간지 인터넷신문을 합쳐 모두 90개에 이릅니다. 민폐 관폐가 많은 데도 아무도 손을 쓰지 않고 있는 게 문제지요."굉장히 많군요. 그렇잖아도 '가이드라인' 발표 후 경기도와 호남지역 자치단체들의 문의가 많았습니다. 뭐든 시민들이 불편해 하면 개선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언론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지요."전북의 자치단체장들도 시장님과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지만 선뜻 행동에 옮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의 문제인데 조언하신다면."각 자치단체의 환경에 따라 대응방안도 다르지 않겠습니까. 시민세금이 들어가기 때문에 언론관리도 시 행정의 한 부분입니다. 우리 시는 불필요한 언론사들이 많고 언론피해 민원이 있어 과감히 시행했습니다. 까다로운 일을 할려면 결단이 있어야 하고 세밀한 준비와 끝까지 밀어붙일 힘도 필요합니다. '잘못된 부분은 개선시켜야 한다'는 의지만 있다면 어려운 문제는 아닙니다."

  • 기획
  • 이경재
  • 2011.08.23 23:02

황의옥 소장은

황의옥 전주시 자원봉사센터 소장은 순창군 동계면 주월리 태생이다. 순창농림고등학교(현 순창제일고등학교)와 원광대 약대를 졸업한 약사다. 1970년 개업한 전주 가나약국 대표로 관리약사를 두고 있다.가족은 부인 이준형씨(60)와 2남1녀의 3남매를 두었다. 전북고속 황의종 사장(73)이 친형이다. 형제가 매우 닮았다. 본래 4형제의 막내였지만 첫째와 둘째 형은 작고했다. 황 사장은 어릴 적 두 분 관계가 어떠했냐는 전화질문에 "친구같이 편하고 서로 다정했다. 형님 아우 따지는 게 아닐 정도로 유별났다"고 말했다. 그는 형으로서 황 소장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을 때 "생각이 깊고 서두르지 않은 사람"이라고 소개하고는 "매사를 매우 신중한 태도로 대한다"고 알려줬다.이런 봉사의 길에는 국민포장과 대통령상, 국무총리상 수상 등 여러 기관평가가 있었다. 2004년엔 전북일보사와 페이퍼코리아(주)가 공동제정한 제27회 전북대상 본상(봉사부문)을 받기도 했다. 수상식에서 "봉사는 생활이자 희생이라는 신념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소감을 남겼다.사회적으로도 1989년부터 1995년까지 전북약사회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전주인재육성재단 상임이사와 재전순창향우회장, 순창제일고등학교 총동문회장등 고향 껴안기에도 열정을 보이고 있다. 전주시 자원봉사센터 소장직은 2003년부터 2006년까지 거친데 이어 2009년부터 무급으로 두 번째 맡고 있다. 그 중간에 전주시 자원봉사연합회장을 지냈다.▲ 26년간 벌여온 마약퇴치운동마약퇴치운동에 뛰어든 건 올해로 26년이 된다. 1985년 전주시약사회장 재임 당시 요식업 종사자 등에게 마약예방교육을 한 게 발단이었다. 그 4년 후 전북약사회장으로 선출되고 나서 공을 세웠다. 마약예방교육의 중요성을 대한약사회에 건의해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의 태동을 끌어냈다.한국마약퇴치운동 전북본부가 1992년 창립되고 초대본부장을 맡아 1995년 그만뒀다. 그러다가 2000년 다시 그 자리에 돌아가 2009년까지 또 맡았다. 2005년에 본부 소식지 '햇살향기'를 창간했다. 두 차례 본부장을 역임한 그는 본부 정관에 따라 지금은 고문에 앉아 이 운동을 거들고 있다.일찍이 마약퇴치운동에 '중독'된 것은 약사로서 전문성을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는 신앙적 생각에서다. 마약류는 강한 중독성으로 개인의지만으로는 중단이 어렵고 환각, 폭력성 등 사회적으로도 심각한 폐해를 주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들 환자들에게 작은 관심만 쏟아도 건강한 사회인으로 복귀하는데 큰 힘이 된다는 걸 믿고 있다.그는 "더불어 함께 사는 건강한 사회를 위해서는 마약환자에 대한 왜곡된 편견을 버리고 따뜻한 관심을 보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재소자와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약물 오남용 교육과 계도활동을 벌이는 건 이러한 '마약 없는 건강한 사회' 만들기에 목표를 두고 있는 것이다.

  • 기획
  • 최동성
  • 2011.08.16 23:02

전주시 자원봉사센터 황의옥 소장

"스스로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 그럴 때 작품은 비로소 빛을 보게 된다. 관객과 주인공을 이어주는 통로로서의 삶은 아름답다. 자신이 아닌 남을 아름답게 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드라마나 영화를 빛내는 조연들을 말한다. 약사 황의옥씨(70)의 인생이다. 평생을 소리 없이 '조연'으로 살아왔다.지역 자원봉사의 산증인으로 재난현장과 무의촌(無醫村)은 단골무대다. 짬만 나면 그런 곳에 달려간 지 올해로 50년. 그는 왜 조연에 그친 채 힘들고 굴곡진 여정을 멈추지 않는 걸까. 국내외 가리지 않고 그늘진 곳이면 그렇게 누벼왔다. 폭우피해지역도 예외가 아니다. 자원봉사, 그 길에는 사랑과 기쁨, 슬픔과 고통이 함께 녹아 있었다.위기상황에서 지역을 지탱하는 힘은 자원봉사자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황홀하게 눈멀어 제 모든 걸 그 앞에 던지는 사랑. 낮은 곳으로 내려앉아 사랑을 나누는 자리를 찾았다. 전주시 자원봉사센터에서 최근 귀국한 황 소장을 만났다. 시간과 여유가 없어 남 도울 엄두를 못 낸다는 흔한 핑계를 부끄럽게 하는 봉사의 삶이었다.-언제 귀국하셨습니까."3일 돌아왔어요. 중앙아시아 내륙인 키르기스스탄의 오쉬라는 지역이었어요."-뭘 했나요."인구 50여만명이 살고 있지만 의료기관이 조그만 보건소 하나뿐인 곳입니다. 개인병원과 약국은 찾아볼 수도 없고요. 이번에 단원 8명을 의료봉사와 이미용봉사 두 개 팀으로 만들어 7박8일간 활동 했죠. 준비해간 의약품 나눠주고 진료하고 이발 및 미용봉사를 해줬습니다."전주시 자원봉사센터는 2008년부터 매년 필리핀과, 베트남, 몽고에 이어 올해 4년째 해외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요즘 국내 활동이 궁금합니다."며칠 전 서울 사당동 풍수해지역을 찾았어요. 도내에서는 11일 전주시 효자4동 석산마을에 들어가 빨래와 청소를 하고 12,13일엔 정읍시 하모동, 태인면과 임실군 운암면 쌍암리로 나눠 침수지역 노력봉사와 빨래 등을 지원했지요."-개인적으로 언제 시작했습니까."고교 2학년 때니까 1961년이죠. 교내 청소년 적십자(J. R. C) 단장으로 활동했어요. 외딴 초등학교에 나가 머리 깎아 주고 한글 깨우쳐주기 등을 했거든요. 이발기기는 마을 이발소에서 빌렸고요. 그때부터 평생 자원봉사의 길을 걷게 된 거죠."-참 대단하십니다. 특별한 기억이 있을 것 같아요."1977년11월 터진 이리역(현 익산역) 폭발사고를 잊지 못해요. 59명이 사망하고 중상자만 185명에 이른 대형사고 아니었나요. 약국 운영하던 때였어요. 후배약사 5명을 긴급 소집해서 다음날 오전 10시께 이리시 공관에 자리 잡았지요. 사고지점 1㎞ 쯤 떨어진 곳에서 그 쪽을 바라보니까 거리는 온통 건물 깨진 유리로 뒤범벅이었어요. 보행인은 전혀 안 보였고. 인명구조와 약품투입에 나선 것이 엊그제 같네요."-약사로서 편하게 살 수 있을 텐데요."갖고 있는 기술과 지식을 개인을 위해서만 사용한다면 그 사회는 발전할 수 없어요. 사회구성원이라면 그 전문성을 사회에 환원해야지요."-가족들이 원망하지 않나요."그렇지 않아요. 힘든 속내를 나타낸 적이 없어요. 묵묵히 뒷받침해주는 응원군입니다. 오히려 가장으로서 같이 하는 시간을 못내 늘 미안하죠."-자원봉사 하는 게 어렵지 않던가요."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리 거창한 것도 아니고요.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실천 할 수 있답니다. 자신의 지식, 경험, 기술, 정보를 이웃과 나누면 됩니다. 주변에 있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것, 이 작은 실천이 자원봉사 아닙니까. 그러다보면 어두운 그늘이 사라지는 만큼 밝은 양지가 넓어지지 않겠어요."-봉사내용이 달라졌죠."기본적으로 봉사의 대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삶이 같잖아요. 다만 영역이 확대되었을 뿐이지요. 과거에는 불우이웃돕기 명목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을 챙겼다면 요즘에는 노인아동청소년장애인과 일반 시민들까지 서비스가 이뤄지고 있어요. 그리고 초기엔 동정심과 측은지심이 작용했지만 이제는 인간 띠잇기 차원의 사랑 나눔입니다."-전문성이 필요하단 말인가요."기초봉사는 기본이고 전문적 재능을 갖는 봉사자들이 필요해요. 맞춤 서비스를 위해서죠. 수지침, 이미용, 매직, 노래, 춤, 악기, 제빵 및 요리 등 전문 봉사단 수요가 갈수록 늘고 있어요. 아직은 사회복지 분야가 중심이지만 재난복구, 보건의료, 환경정비, 문화예술 등 다양한 전문영역으로 넓히는 방안이 과제입니다. 의약계, 법조계, 예술계 등 전문가들이 나서야 해요. 고령화 사회에도 대비해야 합니다."-센터 등록회원은 얼마나 됩니까."8월 현재 8만800여명입니다. 주민등록 기재를 꺼리는 미등록 회원까지 합치면 18만명 정도 될 겁니다. 등록된 단체는 418개로서 사회복지, 보건의료, 기술기능, 교육상담, 행정, 문화행사, 교통 환경, 재난구호 등으로 나눠 활동하고 있어요. 그중 사회복지단체가 전체의 58.4%로 쏠려 있어요. 20대가 가장 많고 여성이 남성보다 2배가량 많아요."-그들은 특별합니까."과거에는 특별한 사람만 할 수 있는 거란 인식이 강했어요. 그러나 지금은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는 생활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받아드리고 있습니다. 실상 대부분 우리 이웃의 평범한 얼굴들입니다."-다들 무보수입니까."물론이죠. 보수가 없어요. 자원봉사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스스로 자유 의지에 의한 자발성이며, 사회공동선을 위한 공익성과 이타성이 특징이라고 봅니다. 어떤 대가를 바라고 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자원봉사가 될 수 없는 거 아닙니까."-그러면 생활이 넉넉한가 보군요."그런 건 아닙니다. 모두들 강한 신념과 의지가 있기 때문에 뛰어드는 거죠. 어디든지 필요하다고 보거나 불러주는 곳은 마다하지 않아요. 그 과정에서 전주시가 재정적으로 우리 센터를 지원하고 있어요. 어쨌든 각박해지는 사회에서 고무적인 일이 아닌가요."-경기가 침체되면 활동이 위축될 것 같은데."별로예요. 큰 영향 없어요."-왜 그럴까요."자원봉사자들은 자발적으로 고통을 나누고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마음자세가 있기 때문이죠. 경기가 좋지 않을수록 수요가 늘어나 더 분주하게 움직이게 마련입니다. 거꾸로 봉사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 고맙다고 생각해요. 경제 여건이 흉흉할수록 나눔과 봉사는 빛을 발하는 법이죠."-아쉬운 점은 없습니까."이번 수해처럼 대형 재난이 생기거나 연말연시 때 봉사가 활발하지만 평소엔 그렇지 못하다는 점입니다. 생활습관처럼 지속성을 가져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봉사활동이 대학 입시를 위한 스펙(SPEC) 쌓기의 일환이 된 것도 씁쓰레하지요. 초중고생의 센터 참여율이 전체의 14.7% 차지하고 있어요. 상당수가 내신 성적과 연계한 측면이 있어 보여 마음에 걸리는 대목이네요. 참여를 높이기 위해 자원봉사도 마일리지 외에 기부금처럼 소득공제 대상으로 지정하는 방안을 검토해 볼 때가 됐어요."-다쳤을 때 보상은 어떤가요."특별하게 의사상자에 해당되지 않으면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해요. 어려운 처지에 빠지게 되는 거죠. 이런 선의의 피해자에게 국가가 보상금 지급 등 제도를 정비해 국가차원의 나눔 문화 후원이 필요합니다."-전주완주 통합 민간추진협의회 공동대표로 활동하셨던데."2009년 추진 당시 전주와 완주는 서로 준비가 안 된 겁니다. 그래서야 결과도 뻔한 거 아닙니까. 개인 열정만으로는 한계가 있었지요. 결국 불찰입니다. 한편 지역 보다 일신의 안위를 우선 찾는 기득권에도 책임이 많아요."-성공하려면 조건은 뭔가요."양쪽 단체장 의지에 달렸다고 봐요. 미래를 내다보고 두 단체장이 먼저 대화한 다음 의회와 민간에서 진지하게 협력하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막상 자신이 필요할 때 이런저런 핑계대고 빠져나가는 지도자들의 이중적 태도와 자기 단체가 주도해야만 한다는 집단 이기주의는 통합하는데 극복해야할 문제입니다."-현재 약사입니다. 동네슈퍼에 일반의약품 공급을 어떻게 보십니까."의약품은 일반식품과 다르게 신체 부위에 따라 작용범위가 달라요. 그만큼 투약에는 전문가의 식견이 필요합니다. 편의성만 따져서는 안 되지요."-다시 태어나도 자원봉사 하시겠죠."아마도요."(웃음)

  • 기획
  • 최동성
  • 2011.08.16 23:02

국악피아니스트 임동창은

임동창씨는 군산 출신이다. 중학교 2학년때 피아노를 시작해 고등학교까지 군산에서 다녔다. 끼니걱정을 해야 할 정도로 가난했던 집, 5남매의 장남이었던 그는 과외는 엄두도 못냈지만 그의 재능을 눈여겨 보았던 스승(이길환) 덕분에 피아노를 공부할 수 있었다. 군대 가기 전 출가해 스님으로도 1년 남짓 살았던 그는 제대 후 다시 절집으로 들어갈 생각이었으나 첫사랑을 만나 파계(?)하고 서울시립대 음악과에 들어가 피아노를 전공했다. 문화반란의 기수로 꼽혔던 그는 우아한 피아노 연주가 아니라, 우리 음악을 피아노로 접목시킨 새로운 작업과 즉흥연주, 파격적인 형식의 창작곡 등으로 가는 곳마다 화제를 뿌렸다. 음악적 천재성으로 늘 주목의 대상이 됐던 그는 김덕수 사물놀이패와 교류하면서 우리 음악의 뿌리를 전파했으며, 장사익을 공식적인 무대에 이끌어낸 장본인이기도 하다.남원에서 함께 살고 있는 그의 제자 10명도 그 못지 않게 특별하다. 열여덟살부터 서른 다섯 살까지 연령층도 다양하지만 공부하는 영역도 제각각이다. 대부분이 그가 운영했던 서천 동강중학교 방과후학교에서 인연을 맺은 제자들이다. 잘나가는 회사를 그만두고 아예 전공까지 바꾼 제자, 피아노를 배우기 위해 찾아왔다가 피아노는 작파하고 노래나 연기를 공부하는 제자, 좋은 농사꾼이 되고 싶은 동생과 음악을 좋아했지만 건축으로 진로를 바꾼 형제 제자도 있다. 이곳의 살림을 꾸려가고 있는 신성희 'ta'대표(35) 역시 외국계 회사를 다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인가를 배우고 싶어 제자가 됐다.스승은 제자들을 구속하지 않는다. 하기 싫으면 하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일러준다. 제자가 선택한 분야에 재능이 없어 보이거나 마음이 떠난 듯 보이면 그 분야에서 '졸업'시키고, 하고 싶은 새로운 일을 찾으라고 한다. 그의 교육 방식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지만 제자들은 한결같이 행복하다고 답한다. 이들 스승과 제자가 함께 갈 수 있는 힘은 신뢰다. 그래서 더욱 아름답다.

  • 기획
  • 김은정
  • 2011.08.09 23:02

남원서 생활공동체 꾸린 임동창 국악피아니스트

이런 풍경을 상상했다. 한옥의 몇 개 방마다 피아노나 국악기가 놓여있고, 그 어느 방에서는 피아노 소리가, 또 그 어느 방에서는 스승의 무서운 호통소리가 새어나오는. 혹은 여러명이 함께 신명나게 국악기를 배우며 무더운 여름 더위와 대결하는 그런 치열한 현장을.그런데 예상은 빗나갔다. 대책 세우지 말고 그냥 마음 가는대로 '하고 싶은 것'해보라고 가르치는 이상한 스승과 다니던 회사며 학교며 전공까지 작파하고'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나선 용감한 제자들은'그냥' 놀면서 쉬면서 사는 것 처럼 보였다. 하기야 반나절도 채 안되는 시간동안의 엿보기로 이 특별한 스승과 제자들의 궁극적 삶의 지향을 어찌 알 수 있을 것인가마는 그래도 짐작 할 수 있었다면 그들이 꾸리는 생활공동체 안의 충만한 사랑과 행복, 그래서 즐겁게만 보이는 일상이었다.남원시 송동면 영동리 영촌마을. 피아니스트 임동창씨(56)가 그 제자들과 남원에서 함께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2년 전 쯤이었다.궁금했다. 그가 누구인가. 90년대 중반, 피아노를 치며 꽹과리와 징을 동시에 연주하고, 무대 위를 펄쩍 펄쩍 뛰어다니며 신들린 듯한 열정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던 사람이 아니던가. 우리 음악의 모든 것을 섭렵하고 거의 모든 장르의 국악을 피아노로 풀어내는, 그래서 전통과 현대의 경계를 없애고, 관습과 혁신의 만남을 새로운 형식으로 창조해낸 많은 작품들로 우리 음악계를 들썩이게 했던 그는 2000년대 초, 방송진행자로도 인기가 절정에 이르렀던 바로 그 때, 대중들로부터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언론에서는 칩거라고 했다. 가끔씩 춤이나 연극무대로 그의 작업이 드러날 때면 여지없이 매체들이 주목했지만 본격적인 활동을 중단하고 들어앉아 작업한 시간은 10년. 의외로 길었다. 지난해 여름, 비로소 그가 세상에 나왔다. 〈허튼가락〉이라는 작품집이 그 앞에 놓여있었다. 그의 근황이 더 궁금해진 즈음, 이번에는 완주군의 할머니 다듬이연주단 프로젝트를 이끈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두시간을 넘긴 인터뷰 시간동안 그는 넘치지 않게, 진지하면서도 나분나분하게 우리 음악의 뿌리찾기에 바쳐온 시간들을, 그리고 새로운 인생이 된 '가르치는 삶'의 철학을 들려주었다. 그의 화두는 자유로움. 음악에서도 그랬지만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도 예외가 없었다. 그냥 내버려 둘 것. 어떤 틀로도 구속하지 말 것. 옳고 그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내가 어떻게 해야 잘 살 수 있는가'를 알게 하는 것. 그것이 그가 가르치는 모든 것이었다.-남원에서 무엇을 하시는지 궁금했습니다. 남원에는 언제 들어오셨습니까."2008년 봄이니 3년이 넘었네요. 뭐가 그렇게 궁금했어요? 그냥 나 이렇게 살아요. 아이들하고 재미있게."(웃음)-생각했던 것과는 생활이 많이 다르군요. 짧은 생각으로 피아노나 국악을 스파르타식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일종의 영재학교가 아닐까 했거든요."저는 영재 교육 같은 것 안좋아합니다. 아이들은 누구나 천재예요. 그것을 못깨우거나 안깨우고 있을 뿐이지요."-함께 생활하고 있는 제자들은 몇명이나 되나요. 무엇을 공부하는지도 알고 싶습니다."지금은 열명입니다. 전공은 모두 달라요. 들어올 때는 피아노를 더 잘 치려고 나한테 왔는데, 공부하다가 내가 길을 잘못 선택했구나 해서 때려치우고 노래로 바꾸기도 하고, 연극을 하기도 하고. 그러고보니 정작 피아노를 공부하는 아이는 한명도 없네요."-뜻밖입니다. 그것을 다 가르치십니까."다 가르치죠. 일일이 구구절절 옛날처럼 콩이야 팥이야 하는 가르침은 이제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고. 아이들이 가고자 하는 궁극적인 지점을 보기 때문에 뭐든지 가르칠 수 있어요. 과정이 중요하니까요."(자수에 글쓰는 일, 농사에, 돈 버는 일까지 다 가르친다니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그래서 다시 에둘러 물었다.)-제자들은 선생님께 무엇을 배우러 왔을까요."그것은 애들한테 물어봐야죠. 그런데 애들이 무엇을 배우러 왔든 나는 사실 관심이 없어요. 어차피 그런 선택은 잘못된 것이 많으니까. 무엇을 가르치냐 그러면 답할 수 있죠. 그래서 저는 잘 사는 것을 가르쳐요.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사람이 없으면 못삽니다. 그런데도 사람을 미워하고 함부로 대하죠. 세상을 살면서 가장 대하기 어렵고 힘든 것이 사람이지 않습니까. 사람을 좋아하면서 사람을 싫어한다는 이 문제, 이것이 핵심이에요. 사람을 대하는 태도, 이것을 위해 사랑으로, 다시 말하자면 본성으로 돌려놓는 겁니다."-2001년쯤 일체의 활동을 중단하셨는데, 그때야말로 잘나가던 시절 아니었습니까."화두가 있었어요. 어떻게 하면 피아노를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는가, 내 음악은 무엇일까. 나는 누구고 사랑은 무엇일까. 피아노를 자유롭게 연주하는 것은 스무살에 해결되었는데, 나머지 세 개의 화두는 해결하지 못했지요. 그때가 내 나이 40대 중반인데, 이 문제를 풀지 못하고 나이가 더 들면 불행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들어앉아 안성 집과 금산에 있는 보광사, 속리산 상환암, 안동 예술촌을 다니면서 작업에 전념했어요."-열정적으로 연주활동을 하다가 작곡에만 몰두하는 일이 쉽지 않으셨을텐데요."그렇진 않았어요.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한 3년동안은 작곡에만 몰입했는데 2년만에 허튼가락을 만났어요. 2003년에 그 작업을 마무리했고, 그 다음부터 정악에 몰입했어요. 그리고 민속악을 했죠. 거창 합천 여주 제주도 이런 곳 다니면서 자료 조사도 하고 채보도 하고. 민요, 산조 장단, 진도 씻김굿이나 동해안 무속 장단까지. 다 해결했어요." (그가 '해결했다'는 것은 비로소 내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의미한다)-그런데 왜 이런 어려운 작업을 하십니까."내 뿌리니까요. 사실 우리 음악은 내가 전공한 피아노와 어울리지 않아요. 피아노는 뻣뻣한 악기인데 우리 음악은 낭창 낭창 하잖아요. 그래도 달리 방법이 없어요. 내가 공부한 것이 피아노니까. 그러니 우리음악을 피아노로 연주하고 그것을 위해서 새로운 곡을 만드는 일을 안할 수가 없어요."-남원에 오시기 전에 그런 작업만 하셨습니까."서천에 있었어요. 자치단체 지원으로 1년 동안 애들 음악 가르치는 프로그램을 운영했었죠. 동강중학교라고. 일종의 방과후 학교였어요."-그래서 한때 '임동창이 중학교 음악선생님이 됐다'는 소문이 있었군요."배우는 학생들은 중학생 뿐 아니라 대학생, 대학을 졸업한 직장인까지 다양했어요. 내가 지금 행복한가. 내가 무엇을 해야 잘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아이들이 다 찾아 왔어요."-그런 작업을 하시면서 지난해 새 작품집을 내셨군요. '임동창의 풍류, 허튼가락'이란 이름이 붙었던데요."어떻게 해야 오롯한 내 음악을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한 화두를 풀어낸 것이 허튼가락입니다. 영산회상, 경풍년/염양춘/수룡음, 수제천을 골라 피아노로 연주했어요. 그동안에는 전통음악을 그냥 그대로 제식으로 쳤어요. 내가 만든 음악이 많이 있었지만(우리 전통음악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라이브 공연에서는 할 수가 없지요. 대중들에게 어울리지 않고, 또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음악을 원치 않기 때문이죠. 그런데 음반으로 만들어내면 관심 있는 사람들은 들을 수 있잖아요. 특히 외국 사람들에게 기회가 된다면 우리 전통음악을 좀 더 가깝게 접할 수 있게 하고 싶었구요."-'허튼가락'은 무엇입니까. 저는 산조가 떠오릅니다만."산조와 다르죠. 산조는 흩어진 가락이고. 여기 저기 흩어져 있던 가락을 다 모아서 연주를 한 것이 산조거든요. 허튼가락은 장르가 아니예요. 하나의 삶의 철학이랄까. 단순한 음악의 장르를 넘어서죠.-아이들과의 이야기를 좀더 듣고 싶습니다. 하루 일과가 어떻습니까. 몇시부터 시작하나요 하루를."지들 하고 싶은대로 합니다. 애들은 대개 7시 넘어서 일어날 거예요. 아침은 안 먹어요. 자유롭게 먹거나 말거나. 점심은 12시, 저녁은 6시, 두끼 먹죠. 식사 당번은 돌아가면서 하고. 누군가가 자기 공부에 몰입하느라 시간이 없다면 그런 사람은 죄다 빼줘요. 한번 미친듯이 해보라는 배려죠."-배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갈 길을 찾아가게 하는 방식인가요. 자기 스스로 자기 공부를 하게 하는."그런 면이 있지만 애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는 철저하게 체크합니다. 그냥 놔두고 지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니고. 그림 그리는 아이라면 어떻게 무엇을 그릴것인가를 이야기합니다. 스스로 길을 잡지 못할 때는 제가 제시를 하죠. 이렇게 한번 해봐라하고."-가르침과 배움이 있는 공간이니 일종의 학교랄 수 있는데 함께 생활도 하니 생활공동체인 셈인데요. 먹고 사는 비용은 어떻게 해결하십니까."애들이 생활비를 냅니다. 형편이 안되면 그냥도 살고. 모자라는 부분은 제가 충당하지요. 수업료는 없어요. 그것 아니어도 먹고 살수는 있을 만큼 제가 버니까요."-오래전부터 선생님께서는 우리 음악으로 피아노를 재해석하는 작업을 비롯해 우리음악에 대한 대중화를 이끌어내셨는데, 요즈음 음악을 보면 어떻십니까."어떤 장르나 제도나 장단점이 있지요. 중요한 것은 음악을 어떤 마음으로 하는가예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시류에 편승해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음악을 하거든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죠. 나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어요. 다만 내가 기대하는 것은 바로 그런 상황에서도 자신의 욕망만을 채우려 하지 않고 정말 음악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실력을 갖춘 음악가가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우리 음악은 도제식 교육 중심인데, 이것은 어떻게 보십니까."장단점이 있어요. 장점은 바른 정신을 몸으로 붙이는 과정, 그래서 근본을 만든다는 것이고, 단점은 그런 과정에 매달려 너무 많은 세월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지요."-선생님이 가르치는 이 방식은 계속 유효한가요."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에게 올해까지만 이렇게 한다고 일러두었어요. 내가 가르치는 것을 몸에 붙여서 제 것으로 만들고, 사상이나 철학을 세워 올해까지 자리 잡히지 않으면 교육방식을 바꿀 수 밖에 없다고."-앞으로 가고자 하시는 길은 어떤 길입니까."20대부터 교육이 갖는 의미와 가치를 생각했습니다. 스무살에 저 스스로 피아노 연주가 툭 터지면서 모든 사람이 천재인데 교육이 문제라는 생각을 가졌어요. 그래서 교육을 가장 큰 길로 세웠죠. 그것도 물론 인연이 되면 하고 그렇지 않으면 말거예요."-이효재씨와는 부부연을 갖고도 오랫동안 떨어져 계시는데요.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합니다."내가 워낙 비가정적이고 비가족적이거든요. 우리가 젊은 나이에 만난 것이 아니잖아요. 그때 저는 사십대 중반이었는데 한 삼년 정말 알콩 달콩 기막히게 살았어요. 다들 모르시겠지만.(웃음) 효재는 꿈이 살림이었고, 내 뒷바라지 하면서 살기 원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이 사람을 가만 보니까 그것이 아닌거예요. 공적인 사람이다 싶었죠. 그래서 제가 이렇게 자유롭게 살자고 했어요. 나한테 묶어두기에는 너무 할 일이 많은 사람이죠. 지금은 가끔식 다녀가는 것만으로도 서로 편하고 좋습니다." (한복디자이너인 부인 이효재씨와 그는 최근 국립공원 홍보대사로 위촉됐다)-완주에서 추진중인 할머니 다듬이연주단과 관련한 계획은 언제부터 실행하십니까."구체적인 것은 아직 문서로 주고 받지 않았지만 곧 시작할 겁니다. 자치단체장이 큰 관심을 갖고 추진하는 일이니 잘 되겠지요. 두가지 제시했어요. 지금 할머니들의 연주는 그 취지를 살려 그대로 다음 세대에게 전승하는 것이 하나고, 또 하나는 다듬이를 중심으로 한 타악 앙상블이 주가 되는 세계 공연단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지금 많은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우리의 진정한 뿌리 깊은 전통의 멋을 제대로 보여주면서 성공한 것은 사물놀이 밖에 없거든요. 그런점에서 저는 우리것의 진정성을 온고이지신으로 발현시킬 이 작업이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새롭게 시작하는 일에 열정과 의지가 각별하신 것 같습니다."인생을 정리하는 시점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일인만큼 조심스럽고 설레고 떨리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교육이 함께 가야 성공할 수 있는데, 그것이 과제입니다. 사실 모든 일은 사람에 달려 있잖아요. 그래서 교육이 필요한 겁니다. 좋은 사람을 선택해서 좋은 교육을 하는. 그것은 결국 제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풍류학교인데, 풍류는 건강하고 행복하고 아름답고 신명나게 사는 것이거든요."그는 풍류를 우리 삶의 중심에 들여놓으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풍류를 우리 몸과 마음에 붙이는 일이 쉬울까. 그는 몸짓 마음짓 흥짓을 통한 교육으로 가능하다고 했다. 흥짓은 몸짓과 마음짓이 합해진 것인데, 이것은 또한 사람의 삶을 아름답고 신명나게 하는 예술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 어디론가 숨어버린 것이 아닌가 싶었던 그의 에너지가 이제 무엇으로 발휘될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세계적인 타악연주단과 가장 한국적인 풍류학교. 이 귀한 선물을 우리 지역에서 만나는 일은 상상만으로도 행복한 일이다.

  • 기획
  • 김은정
  • 2011.08.09 23:02

문규현 신부

문규현 신부(66)는 지난 3월 전북대 정문 코앞 2층에 60평 남짓한 카페를 냈다. 35년간의 사목직을 은퇴하고 이곳에서 인생 3막을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거리가 지척인데도 인터뷰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의 표현대로 '백수가 과로사한다'더니 은퇴 후 더 바빠졌기 때문이다.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 더 많아진 탓이리라. 문 신부를 형인 문정현 신부와 함께 '빨갱이 신부'라 부르는 이가 없지 않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이 만큼이라도 민주화를 누리고 생명과 인권이 존중되는 것은 그 분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권력과 불의에는 호랑이로 알려져 있으나 마주 대하니 너무 편안했다. 겸손했고 유머 감각도 뛰어났다. 너무 바빠 문답은 이 메일로 주고 받았다.- 안녕하세요? 은퇴 후 카페를 여셨는데 잘 되십니까?"손님 없는 날, 소위 공치는 날도 있고, 자리가 꽉 차서 북적이는 날도 있고 그래요. 영세자영업자들이 겪는 희로애락을 저도 매일 겪습니다. 외부 일정 있는 불가피한 날이 아니면 출 퇴근을 꼬박꼬박하죠. 문 열고 문 닫고, 청소 하고 운전기사도 하고. 퇴직자 등 많은 사람들 꿈이 카페 사장하는 거라는데, 그런 거 보면 저는 복이 많아요. 어딘가 갈 데가 있고 할 일이 있어서 좋다는 말을 특별히 실감하죠. 제 개인에겐 인생 제3막, 새로운 사제생활의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영업이익으로 대박은 어려울 것 같고, 사람들 만나고 함께 희망을 엮어가는 것으로 승부해야죠. 손님들이 앉아서 차 마시며 얘기 나누거나 책 읽는 모습을 보면 아주 기분이 좋습니다."-'영화로 읽는 성경'을 진행하시는 걸로 아는 데요?"영상이나 미디어에 익숙한 세대와 소통하고, 또 신앙을 좁은 영역이 아닌 세상의 모든 감정들, 사건들 속에서 해석하고 풍요롭게 만들기 위한 시도입니다. 성경을 단순히 활자에만 의존해서 묵상하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내용도 방대하고, 천주교 전례력으론 3년이나 걸리거든요. 예전엔 성경 의미 따로, 영화 감상 따로였는데, 지금 이걸 통합하니까 의미들이 새롭게 드러날 때가 많아요. 아하! 체험을 자주 하죠. 이게 즐겁습니다. 앞으로 좋은 책을 나누는 독서 포럼도 진행할 예정입니다."- 지난 1월 전주교구 평화동 성당에서 은퇴 미사와 송별식은 가지셨는데, 마지막 미사 강론이 잔잔하면서도 감동적이었습니다. 사제생활을 마감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고맙습니다. 성당 사목 중심의 사제생활을 마감하는 거지, 사제생활을 그만둔 건 아니지요. 하느님께선 성당 안에도 계시고 성당 밖에도 계시니까요. 또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한번 사제는 죽을 때까지 예수님의 대리인으로서 세상을 위해 선하고 의롭고 좋은 무언가를 해야 합니다. 이런 몫에는 유통기한이 없지요. 본당 사제직을 은퇴하는 건 아무래도 일종의 기득권이랄까, 안전함이나 권력을 확 비우고 내려놓는 큰 전환기적 사건일 수밖에 없습니다. 과연 어느 시기가 적당한 것일까를 고민했지만, 저울질 하고 고민하는 것 자체가 바로 물러서야 할 때임을 말하는 것이었어요. 내려놓고 떠나고 보니 잘 결정했다는 생각이 확실히 들더라구요. 꽉 쥔 주먹으로는 자유로이 기도하기가 쉽지 않잖아요."- 신부님은 1989년에 두 차례에 걸쳐 방북하셨습니다. 그 중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대표로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임수경 학생을 보호하기 위해 분단 이후 처음으로 판문점을 넘어 함께 귀환,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즉시 체포돼 3년 4개월 동안 영어(囹圄)의 몸이 되셨는데 당시 어떤 각오이셨는가요?"당시에 저의 평양 방문과 판문점 귀환을 환영하고 큰 역사적 사건으로 뜻 깊게 받아들인 사람들도 있지만, 정부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국민들 정서는 한 마디로 '죽일 놈'이었잖습니까. 처음부터 '이건 내 일이다. 내가 해야 한다.'는 각오는 아니었습니다. 남북통일에 대한 신념도 있었고, 이미 개별적으로 방북해서 평양 장충성당에서 미사도 드려본 뒤였지만, 임수경 학생을 데리러 재차 방북하는 일엔 사실 고뇌와 번민이 많았어요. 계획한 일도 많았고요. 정의구현사제단에도 제가 안 갔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렇다 해도 제가 가야하고 해야 할 몫이라면, 독배 드는 걸 피하지는 않겠노라고 기도했지요. 참 여러모로 상황이 어려웠는데 이상하게도 제가 갈 수 있도록 장애물들이 하나하나 치워지는 거예요. 가라는 뜻이구나, 가야하는 거구나 하고 우리 신앙인 표현대로 하자면, 하느님이 이끄시고 하시는 일이었지요. 몸과 맘 다 항복하고, 독배를 기꺼이 손에 들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게 성배가 되었어요. 특별히 선택되었음에 감사할 따름이죠."- 지금 우리 사회에서 북한을 보는 시각은 극명하게 갈립니다. 한쪽에선 북한을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또 다른 쪽은 천안함 백령도 사태에 대한 사과 등을 요구하면서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는 게 바른 시각일까요?"중요한 건 남과 북이 어떤 상태로 살면 좋겠는가에 대한 관점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는 겁니다. 서로 으르렁거리고 대결하고 총구를 앞세우는 준전시 상태를 유지하며 살겠는지, 아니면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고 긴장을 완화하면서 평화체제를 다져나가는 게 좋은 건지, 길을 선택해야지요. 준전시 상태를 유지해야만 권력과 기득권, 이익을 누릴 수 있는 세력이 우리 사회에 분명히 존재합니다. 한편으론 북한을 몰락시켜 흡수통일 하는 게 유일한 통일전략이고 목표인 세력도 존재합니다. 그런데 죽이겠다고 달라 들면 상대방은 그냥 '나 죽었소' 하고 무릎 꿇을까요. 그들도 당연히 총 듭니다. 악순환이 반복되는 거죠. 보세요. 정부 요직에 있는 사람들,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국무총리, 여당 대표, 법조계에 있는 사람들까지 병역 면제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사람들이 주로 제일 격한 단어를 써가며 호전적이 됩니다. 전쟁 나면 대부분 없는 집 자식들이 전장에 내보내지고 희생됩니다. 천안함, 연평도 사태 등등에서 확인됐잖습니까. 이명박 정부 들어서서 그간 남과 북이 이뤄둔 모든 긍정적 관계가 다 파탄 났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다시 대화테이블에 앉기 시작했습니다. 북도 마찬가지겠지요. 어떡허든 살아야하고 그러기 위해선 남측의 지원과 협력이 필요합니다. 같이 살아야죠."- 통일에 대한 전망은 어떻게 보시며, 국민들이 어떤 노력을 해야 하겠습니까?"남과 북 사이엔 문화나 심리 정서적, 역사적 경험 차이가 갈수록 벌어지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38도라는 남북 간 경계선조차 지워지는 완전한 통일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남북 간 평화체제와 상호공존, 상생이 가능한 체제와 방법들을 모색하고 실천하는데 모든 노력을 경주하는 게 우선이겠죠.'평화가 돈이다!' 이걸 분명히 합시다. 평화가 경제이고 국격입니다. 나라가 평안해야 서민들은 그래도 살기 좋아요. 김대중 노무현 정부시절이 그래도 제일 평화로웠고, 우스운 얘기지만 그 시절에 국민들은 다른 걱정 없이 부동산과 주식 불리는 데만 열중해도 됐어요. 더구나 아이들을 이런 '전쟁' 상태에서 잘 키워보겠다고 하는 건, 교육에 세계 최고로 열 올리는 나라에서 앞뒤 안 맞는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태도예요. 국민들도 남북 간 공존과 상생에 초점을 맞추어 그런 정치인들, 시민사회를 지지해야 합니다."- 신부님은 2001년과 2003년 새만금 갯벌을 살리기 위해 삼보일배를 하셨습니다. 이후 새로운 시위문화로 정착해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북 도민들 상당수는 새만금사업이 낙후된 전북을 발전시키기 위해 필요한 사업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낙후된 것은 우리의 사고와 상상력입니다. 바다가, 갯벌이 바로 미래경쟁력이지요. 투자 대비 시너지와 수혜자가 적은 보여주기식 대규모 토건공사는 미래경쟁력이 될 수 없어요. 창의적 지식과 아이디어가 세계경제를 좌지우지 하고 있습니다. 저는 혼자서 되묻곤 합니다. 새만금 사업 시작한 지 10년, 20년 되갑니다. 그동안 전북이 발전 했는가요? 학생들은 대도시로 빠져나가고, 인구 줄고, 실업률, 공장 가동률 등등 좋아진 게 있을까요? 끊임없이 새만금 로또를 부추기며 표 얻는 데만 관심 있었던 정치인들, 몇몇 대기업 건설회사와 그에 하청 받는 지역건설업자들 일부만 배불린 사업이죠. 또 땅 투기, 부동산 투기로 각광받은 것 말고, 뭐가 있을까요. 수많은 어민들이 일자리 잃고 농촌 빈민, 도시 빈민으로 전락했는데, 경제 활성화를 말할 수 있을까요. 간척에 쏟아 부었고, 앞으로도 쏟아 부어야 할 그 어마어마한 돈이면 전북지역 경쟁력은 이미 갖추고도 남았을 거예요."- 신부님은 2003년 부안 핵폐기물처분장(방폐장) 유치 반대 운동에 앞장섰습니다. 성공을 거두셨고, 지금은 부안에 신재생에너지단지가 들어서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노무현 정부였고, 원전이 불가피하다는 주장도 많았습니다. 당시를 돌이켜 볼 때, 그 때의 행동과 지금의 소회는?"그 때의 신념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핵은 무서운 것이고 ,이 세상 어디에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국가권력이 그렇게 일방적으로 힘없는 지역민들에게 무조건적인 희생을 강요한다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에선 없어져야 할 국가폭력입니다. 참여정부의 한계랄까 수준을 처절하게 경험했죠. 참여정부가 여러 면에서 진일보한 유산들을 남겨주었지만 부안 문제는 무엇보다 뼈아픈 대목일 겁니다. 미래 정치세력은 부안항쟁에서 많은 배움이 있어야 할 겁니다. 후쿠시마(福島) 원전사고 이후 무엇보다 기쁜 것은 부안군민들이 치유되고 있음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옳았다, 돈에 우리의 영혼과 고향, 삶의 터전을 팔아넘기지 않았다는 자긍심이 살아나는 거죠. 비록 옳다고 믿고 한 일이었지만 지역이기주의네 어쩌네 하는 많은 비난과 공동체 분열에 시달려왔기 때문에 사실 부안사람들은 그동안 무척 힘들었어요. 게다가 핵폐기장을 돈 덩어리로 보고 계속 유치하려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부안항쟁이 이제 새로운 탈핵 시대를 계승해가야 하는 시대적 소명을 부여 받았다고 봅니다. 부안을 넘어 전라북도가 그래야겠죠."- 신부님은 그 동안 우리 시대를 관통해 온 굵직굵직한 사건 현장에 거의 함께하셨습니다. 특히 용산참사 때는 단식으로 의식불명의 위험한 지경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항상 힘없고 낮은 사람 편에 섰는데, 그 원동력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저는 5대 째 천주교 집안사람이고, 천주교 사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일체와 일치로 모시는 사람입니다. 제 모든 근거와 원천은 예수님에게 있고 그분에게서 찾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힘없고 낮은 사람, 소수자를 사랑하시며, 이들이 귀하게 대접받는 하느님 나라를 만들고자 하신 분이었습니다. 성경말씀을 매일 읽고 묵상하고 미사 드리니 그걸 까먹을 수가 없죠."- 지난해 6.2 지방선거에서 진보진영의 김승환 교수를 전북교육감으로 당선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셨습니다. 어떤 계기에서 관여하셨고 또 현재 교육계의 변화를 어떻게 보시는가요?"언제나 교육문제에 관심을 가져왔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사회에서 가장 건강하고 훌륭해야 하는 교육계가 어찌 보면 가장 부패하고 낙후되어 있는 게 솔직한 현실입니다. 이런 오명을 벗어나야만 왜곡된 교육환경에 질식 상태인 아이들이 살아나고, 제가 바라는 생명평화 세상도 하루라도 빨리 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경기도 김상곤 교육감이 앞서서 좋은 본보기를 보여준 것도 자극이 되었지요. 김승환 교육감 당선 뒤, 저는 그분을 비웠습니다. 그분은 그분 자리에서 자기 몫을 다하고, 저는 제 일을 해야 하는 거지요. 그분이 올곧게 계속 자기 길을 잘 가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다 저렇다 할 얘기는 아닌 것 같군요."- 신부님은 전동성당에서 출발해 평화동 성당에서 은퇴식을 갖기까지 평생동안 전주교구 산하에서 목회직을 맡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지방언론과는 거리를 둔 느낌이 강합니다. 한때 부안독립신문도 창간하셨는데 지방언론의 문제점이랄까, 고쳤으면 하는 점을 지적해주셨으면 합니다."제가 지방언론을 멀리한 게 아니라, 저를 지역개발 걸림돌이요 훼방꾼이라고 생각한 지방언론들이 저를 멀리한 거 아닌가요(하하). 지역 언론들이 갈수록 생존하기 어려운 환경입니다. 안쓰럽습니다. 그래서 지역에선 자의반 타의반으로 지역 토호들, 권력자들과 공생하거나 그들의 대변인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그게 죽는 길이예요. 언론, 언론인임을 포기하는 겁니다. 언론이 제대로 살아나면 지역발전이나 미래경쟁력에 생기와 창조성을 불어넣을 수 있어요. 참 언론인으로서의 자긍심과 자존심이 팔팔 살아났으면 합니다. 영혼 있고 개념 있는 걸로 치면 언론인이 최고여야 하는데, 요샌 형편없어졌어요. 언론인에게서 정신을 빼놓으면 이익집단 되기 쉽죠. 또 철학 없고, 소신 없고, 무지함을 드러내는 '받아쓰기'좀 그만하라는 겁니다. 제발 공부들 좀 하고, 사고하고 또 사고하고, 발로 뛰고 연구합시다. 정말 지역발전에 필요한 게 뭔지, 사건의 본질은 뭔지, 세상의 다른 마을들에선 어떤 멋진 일들, 사건들이 펼쳐지고 있는지, 미래를 향해 신나고 좋은 게 뭔지 자꾸 파고들면서 지역정치인들 지역민들에게 도전해야죠."- 끝으로 주시고 싶은 말씀은?"한 사람, 한 사람이 희망입니다. 조금이라도 변화하고 새로워지려 노력하는 사람들, 사람들과 좀 더 나은 것을 나누고, 좀 더 좋은 것을 주고 싶어서 마음 보채며 묵묵하게 자기 길을 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바로 희망입니다. 오늘보다 좀 더 괜찮은 내일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오직 나만이 아니라 건강한 사회, 공동체를 생각하는 사람들, 그들이 희망입니다."/ 대담 조상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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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상진
  • 2011.08.02 23:02

이상일 사무총장은 누구

프로야구계의 대표적인 실무통이자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으로 통한다. 마치 컴퓨터에서 자료가 출력되듯 프로야구 역사나 관련 수치들을 정확히 짚어낸다.야구 저변에 관한 얘기를 나눌 때에도 그는 '일본은 고교 야구팀이 4,200개, 한국은 52개팀, 2006년도 등록선수가 한국은 1,493명, 대만은 7,000명, 일본은 팀이 1만1,000개' 하는 식으로 즉석에서 구체적인 수치가 술술 튀어나왔다.그가 야구와 인연을 맺은 건 우연이다. 프로야구 출범 다음해인 1983년 기록원으로 KBO와 인연을 맺었다. 토목공학을 전공했던 그는 건설업체에 취직했지만 적성이 맞지 않아 그만두었다. 마침 신문에서 KBO 기록원 공개 모집 공고를 보고 응시해 합격했다. 기록원 2기 공채 출신이다.현 이용일(81) KBO 총재(직무대행)가 입사 당시 사무총장이었다. 28년째 이어오고 있는 인연이다. 자신의 결혼식 주례를 이 총재가 섰고 내친김에 딸 주례도 이 총재한테 부탁할 참이다. 한 사람이 '부녀 주례'를 맡는 이색기록이다.야구경기를 처음 본 건 고 1때 롯데가 전주에서 아마추어 시범경기를 할 때였고, 고 3때인 1976년 대통령배 대회가 인연이 돼 야구에 빠졌다. 군산상고에서 김성한 김용남 김종윤이 활약할 당시 1사1루 마지막 공격에서 김종윤이 역전 투런 홈런을 날렸을 때 짜릿한 감동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대학 시절 봉황기 야구대회 때는 경기가 열린 16일중 15일이나 경기를 관람했다. 이쯤 되면 '야구 광'이다.운영부장과 홍보부장, 사무차장, 총괄본부장을 역임하는 등 KBO에서 잔뼈가 굵었고 이젠 터줏대감이 됐다. 사무총장은 2009년 7월 승진 발령돼 2년째 KBO의 실무 행정을 총괄하고 있다. 내부 승진으로 사무총장이 탄생한 것은 지난 91년 안희현 사무총장 이후 두번째다.무리하지 않으면서도 강단 있고 세심한 일처리를 해온 덕분에 야구계 내외에서 신망이 두텁고 대인관계도 넓다. 김제 청하 출신으로 원광고와 명지대, 성균관대 대학원을 나왔다.사무처 직원들이 서울에서 제각기 모교 야구경기가 있을 때면 응원하러 가는 게 그에겐 부러운 광경이다. 원광중고 재단 책임자를 만났을 때 "음료수 사들고 모교 야구경기 응원하러 가는게 소원"이라며 야구부 창단을 주문할 만큼 열의가 대단하다. 그 책임자는 즉석에서 관계자를 불러 검토해 보라고 했지만 그 뒤 반가운 소식은 아직 들려오지 않고 있다.

  • 기획
  • 전북일보
  • 2011.07.26 23:02

이상일 KBO 사무총장

KBO(한국야구위원회)에 쏠리는 눈길이 많아졌다. 10구단 창단 때문이다. 권한은 구단주들에게 있지만 행정적인 일처리는 KBO 몫이다. 전주 군산 익산 완주와 전북도가 10구단 창단에 시동을 건 지금 KBO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 지 궁금했다. KBO의 실무행정을 총괄하는 이상일 사무총장(53)한테 전화로 인터뷰 요청을 했다. 민감한 시기라 핑계를 대며 거절하면 어쩌나 했는데 확답이 왔다. 김제가 고향이라 애정도 작용했을 법 했다. 프로야구 2군 '퓨처스 올스타전'이 열린 군산 월명야구장에서 만났다. 인터뷰는 야구장 귀빈실에서 두시간 동안 이뤄졌다. 그는 인터뷰 내내 힘있고 자신있게 이야기했다.프로야구계의 대표적인 실무통이자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으로 통한다. 마치 컴퓨터에서 자료가 출력되듯 프로야구 역사나 관련 수치들을 정확히 짚어낸다.야구 저변에 관한 얘기를 나눌 때에도 그는 '일본은 고교 야구팀이 4200개, 한국은 52개팀, 2006년도 등록선수가 한국은 1493명, 대만은 7000명, 일본은 팀이 11,000개' 하는 식으로 즉석에서 구체적인 수치가 술술 튀어나왔다.그가 야구와 인연을 맺은 건 우연이다. 프로야구 출범 다음해인 1983년 기록원으로 KBO와 인연을 맺었다. 토목공학을 전공했던 그는 건설업체에 취직했지만 적성이 맞지 않아 그만두었다. 마침 신문에서 KBO 기록원 공개 모집 공고를 보고 응시해 합격했다. 기록원 2기 공채 출신이다.현 이용일(81) KBO 총재(직무대행)가 입사 당시 사무총장이었다. 28년째 이어오고 있는 인연이다. 자신의 결혼식 주례를 이 총재가 섰고 내친김에 딸 주례도 이 총재한테 부탁할 참이다. 한 사람이 '부녀 주례'를 맡는 이색기록이다.야구경기를 처음 본 건 고 1때 롯데가 전주에서 아마추어 시범경기를 할 때였고, 고 3때인 1976년 대통령배 대회가 인연이 돼 야구에 빠졌다. 군산상고에서 김성한 김용남 김종윤이 활약할 당시 1사1루 마지막 공격에서 김종윤이 역전 투런 홈런을 날렸을 때 짜릿한 감동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대학 시절 봉황기 야구대회때는 경기가 열린 16일중 15일이나 경기를 관람했다. 이쯤되면 '야구 광'이다.운영부장과 홍보부장, 사무차장, 총괄본부장을 역임하는 등 KBO에서 잔뼈가 굵었고 이젠 터줏대감이 됐다. 사무총장은 2009년 7월 승진 발령돼 2년째 KBO의 실무 행정을 총괄하고 있다. 내부 승진으로 사무총장이 탄생한 것은 지난 91년 안희현 사무총장 이후 두번째다.무리하지 않으면서도 강단 있고 세심한 일처리를 해온 덕분에 야구계 내외에서 신망이 두텁고 대인관계도 넓다. 김제 청하 출신으로 원광고와 명지대, 성균관대 대학원을 나왔다.사무처 직원들이 서울에서 제각기 모교 야구경기가 있을 때면 응원하러 가는 게 그에겐 부러운 광경이다. 원광중고 재단 책임자를 만났을 때 "음료수 사들고 모교 야구경기 응원하러 가는게 소원"이라며 야구부 창단을 주문할 만큼 열의가 대단하다. 그 책임자는 즉석에서 관계자를 불러 검토해 보라고 했지만 그 뒤 반가운 소식은 아직 들려오지 않고 있다.-프로야구의 산 증인이랄 수 있는 분을 고향에서 뵙게 돼 더 반갑습니다."권위와 전통을 자랑하는 전북일보와 인터뷰할 수 있게 돼 제가 영광입니다."-요즘 프로야구 관중들이 많아 기분 좋으시겠습니다."국민들께서 야구를 사랑하시고 성원해 주셔서 항상 감사할 따름입니다."지난 17일 프로야구 관중이 올해들어 처음으로 400만명을 넘어섰다. 311경기를 치르는 동안 407만817명이 야구장을 찾아 경기를 즐겼다. 지난해보다 16% 증가한 수치다.-이렇게 많은 관중이 몰리는 이유는 뭘까요."남녀 노소 함께 즐길 수 있는 운동이 바로 프로야구입니다. 각 구단들은 꾸준히 투자를 했고 경기력도 향상돼 이젠 어느 팀도 우승을 장담할 수 없을 만큼 치열한 순위 다툼을 벌이고 있습니다. 또 팬들이 편안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야구를 즐길 수 있도록 운동장 시설이 보완되고 다양한 마케팅을 시도한 것도 한 원인이겠지요. 세계 최고 수준의 경기력도 관중을 불러모은 요인이라고 봅니다." 프로야구는 국내 남자 구기 종목 사상 최초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종목이다. 또 세계 야구 강호들이 출전한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함으로써 세계적인 수준의 실력을 과시했다.-그런 점도 있지만 달라진 야구장의 문화 때문이 아닐까요."예전 야구장이 경기를 보기만 하던 곳이었다면 지금은 볼거리와 먹거리가 풍부한 공간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중년 남성들의 전유물에서 이젠 가족 연인 친구들이 함께 찾는 문화공간, 사교의 장이 된 것이지요. 또 팬들도 피켓을 통해 본인 의사를 표현하는 소통의 스포츠가 되었고, 승패에 연연하기 보다는 분위기 자체를 즐깁니다. 사직구장의 롯데 봉다리 응원 신문지 응원, 문학구장의 삼겹살을 구워먹을 수 있는 바비큐존 외야파티 덱 그린존 등이 이런 문화의 정착을 이끈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했으니 올해로 30주년을 맞았습니다. 장년이 된 우리나라 프로야구의 과제라면."경기의 기술적인 측면은 미국 일본 등 야구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수준으로 올라섰습니다. 하지만 팬은 계속 늘어나는데 지방구장의 관람환경은 열악합니다. 선수들도 지방의 딱딱한 인조잔디 그라운드에 서면 부상 위험 때문에 몸을 움츠립니다. 구장 인프라 개선이 중요한 과제입니다."-출범 당시 6개 팀이었지만 지금은 8개 팀으로 늘었고 머지 않아 10구단도 탄생하겠지요. 관중은 즐겁지만 구단들은 많은 돈을 쏟아부어야 할 터인데 흑자운영이 가능할까요."KBO와 각 구단이 마케팅에 많은 심혈을 쏟고 있습니다. 그 결과 경기 외적인 분야의 수입이 급격히 늘고 있습니다. 미국 MLB 사례에서 보듯, 수익창출의 길은 무궁무진합니다. KBO와 각 구단들이 구장 내 사업, 티켓 판매, 광고, 중계권, 마케팅사업 다각화 등의 분야들을 개척한다면 충분히 이익 있는 산업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KBO는 프로야구 출범 30주년을 맞아 제 10구단을 창단하고 2020년에는 12개 구단을 운영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당장 10구단 창단을 겨냥한 지역들이 많은데 어느 지역들이 의향을 밝혀왔나요."수원, 안산, 용인, 고양시 등이 야구단 유치 의향을 갖고 있습니다."-수원시가 창단의향서를 KBO에 제출했다고 들었는데 어떤 내용이 담겨있습니까."수원을 연고로 창단하는 기업에게 '야구장 명칭 사용권'(Naming Rights)을 부여하고 200억 원을 들여 기존 수원구장의 관람석을 전면 정비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스카이박스, 풀컬러(Full Color) 동영상 전광판 설치, 조명타워 전면교체 등의 리모델링 계획이 담긴 10구단 창단 의향서를 KBO에 제출했습니다. 향후 수원 화성 오산시가 통합하면 새로운 구장을 건립하고 야구장 장기임대(3~25년) 및 야구장 사용요율을 인하하겠다는 입장도 밝혔습니다. 야구장 내 식음료 판매권 및 광고권리 등 야구 외 사업수입 권리도 구단에 부여하는 등 파격적인 지원책을 제시했습니다."-지금도 서울 연고구단이 세곳이나 되는데 그런 자치단체들에게 10구단이돌아간다면 수도권 중복이라는 비판을 받지 않을까요."그점을 지적하는 의견도 만만치 않습니다. 지역간 균형을 고려해 현재 프로야구단이 없는 도시지역의 야구단 유치가 더 시급하다는 의견에 많은 전문가들이 동의하고 있습니다." 현재 8개 구단중 두산베어스와 LG트윈스, 넥센히어로즈가 서울을 연고로 하고 있다.-기업이 아닌 자치단체가 선두에 서서 프로구단 창단 작업을 벌이는 것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지방 정부는 주민들에게 더 나은 삶의 질을 제공하기 위해서 노력하기 마련입니다. 주민 열망이 크고 프로야구단 유치가 경제적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효과를 누릴 수 있다면 자치단체가 나서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미국 일본도 자치단체가 적극적으로 프로구단 유치를 위해 다양한 지원책을 내놓고 있습니다."-창원시와 엔씨소프트의 9구단 창단 과정을 보면서 벤치마킹으로 삼아야 할 점이 있다면, 그리고 경계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엔씨소프트의 창단은 자치단체와 기업, 주민들의 염원이 하나가 되어 순조롭게 진행된 이상적인 케이스였습니다. 창원시는 프로구단 창단이 새로 탄생한 통합시의 주민 단합에 가장 좋은 컨텐츠라고 판단했고 또 경제적 파급효과와 홍보효과 등을 꿰뚫어 보고 전례 없는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엔씨소프트 역시 창원시의회의 반발로 막판에 진통을 겪었지만 끝까지 창단 의지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관련 단체들이 열린 마음으로 소통했기 때문에 가능했지요."-10구단 창단에 관심을 기울이는 기업이 있습니까. 어렴풋이라도 가능성이 있는 기업을 꼽는다면."먼저 지방 정부에서 좋은 조건을 제시하고 지역주민들의 열정이 확인되면 기업은 자연스럽게 나타날 겁니다. 그런 기업은 많습니다."-전북에서도 강력한 의지를 갖고 10구단 창단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다른 자치단체들과 비교해서 가능성은 어느 정도나 됩니까?"전북은 1990년대 전주를 연고로 하는 프로야구단을 유치하고 운영한 경험이 있습니다. 10년간 야구단을 운영했던 경험은 다른 어느 도시보다도 큰 장점이고 또 유치 열정이 강력하기 때문에 충분히 경쟁력이 있습니다."-그렇긴 해도 걸음마 단계입니다. 이제 막 추진위를 구성한 전주 군산 익산 완주 등 4개 자치단체와 전북도한테 조언하신다면."무엇보다 전라북도의 야구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야구계에 인식시키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앞서 말씀드렸지만 야구단을 운영한 소중한 경험을 잘 살려야겠습니다." KBO에는 전국 각지에 고향을 둔 많은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다. 전북이 10구단 창단 움직임을 보이면서 고향이 전북인 자신도 오해 아닌 오해를 받는다고 털어놓았다. 지역 이야기가 나오는 민감한 부분에서는 구체적인 언급을 삼갔다.-전북엔 쌍방울 레이더스가 있었지만 모기업 부도로 연고지가 인천으로 넘어갔습니다. 도민들은 기득권을 살려야 하고 10구단도 당연히 전북에서 부활시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충분히 공감합니다. 건전한 여가의 장인 프로야구에서 시민들이 소외되는 지역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역균형발전도 중요하고요."-도민 열의는 부산이나 광주 못지 않습니다. 기아타이거즈 경기를 보러 대전이나 광주에 원정 가는 팬들이 많습니다."군산구장에서는 1년에 9차례 프로야구 경기가 열리는데 매 경기마다 수많은 야구팬들이 야구장을 가득 메워주고 계십니다. 지역 주민들의 야구에 대한 사랑은 최고라고 생각합니다."-이런 열망을 10구단 창단 때 KBO가 담아내야 하지 않을까요."KBO는 리그의 전체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곳입니다. 신생 구단의 성공적인 리그 진입을 위해 여러 측면에서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10구단 창단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큰 틀에서 두가지를 들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야구단을 운영할 기업이 올 수 있는 조건을 지방 정부가 얼마 만큼 준비하느냐 입니다. 기업은 이익을 내기 위해 존재합니다. 지방 정부의 지원이 미흡하다면 굳이 다른 지방을 버리고 이곳에 올 리 만무할 겁니다. 둘째는 지역 주민들의 열정입니다. 야구에 대한 주민 열정이 없다면 기업이 굳이 많은 돈을 들여 야구단을 운영할 리 없겠지요."-향후 12개 구단을 만들어 동부와 서부, 양대 리그로 운영할 계획이라면 지역별 배려도 주요 고려사항일 텐데 10구단 창단도 이런 틀에서 이뤄져야 하지 않을까요."당연히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역균형발전을 이루고 야구 소외 지역도 없애는 쪽으로 가야 맞습니다. 하지만 야구단 유치의지가 관건이겠지요."-도민들이 머지 않아 10구단 창단을 보게 될까요."전라북도의 야구단 유치를 위한 준비와 도민들의 강력한 열정이 함께 한다면 좋은 소식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야구 외길을 걸어왔는데 야구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야구는 인생이고 드라마다. 경기 내용 자체도 그렇거니와 삶도 야구를 떠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10구단 창단을 열망하는 도민들에게 한 말씀."야구를 사랑해 주시는 도민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도민 여러분들의 열정이 모이면 불가능도 가능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평창 올림픽 유치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민관이 합심해서 열정을 보여 줬기 때문입니다. 멀지 않은 장래에 전라북도에 멋진 야구장이 들어서서 그곳에서 선수들이 최선을 다하는 플레이와 도민 여러분들의 함성을 듣기를 바라겠습니다."/ 대담 이경재 선임기자

  • 기획
  • 이경재
  • 2011.07.26 23:02

정희운 전 군수는…

정희운 전 김제군수는 김제서고와 전북대 농과대학 농학과를 졸업했다. 공무원 생활은 1962년 부안군 농촌지도소에서 7급 지도직으로 시작했다. 중도에 연구직, 행정직으로 전직했지만 공직 33년을 주로 농산 부서에 몸담았다. 그것도 고향 김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농촌업무 중심으로 일을 맡았다.1986년12월 부안군수에 오르고 순창군수, 김제군수, 전라북도 민방위국장과 농림수산국장등을 거쳐 새만금간척지원사업소장에서 공직을 물러났다. 정 전 군수는 "열심히 살아왔지만 운도 좋았다"고 휘갑을 쳤다. 국가사회발전의 유공으로 녹조근정훈장과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등 각종 표창을 받았다. 2008년엔 김제시민의 장을 수상했다.이런 길에는 부인 김정자씨(69)가 함께 했다. 그는 전주여고와 원광대를 나왔다. 지금은 원광대 대학원 서예문화학과 석사과정에서 농장일 틈틈이 늦깎이 자아실현에 열정을 태우고 있다. 전라북도 미술대전 초대작가와 대한민국 미술협회(국전) 문인화 부문 특선, 2004년엔 서화개인전을 갖는 등 서예의 실기와 이론에 공력을 쌓고 있다.소 축사 주변 1,500평에는 왕방울 은행나무 400그루와 소나무 300그루, 계절 따라 바꿔 피는 여러 화초들이 자라고 있다. 이들 부부의 손발로 일궈낸 것들이다. 지난 2006년에는 서울 코엑스 전시관에서 열린 '전원마을 페스티벌'에 성공한 귀농부부로 참여해 생의 보람을 다시 찾았다고 한다.자녀는 성균(45. 신한캐피탈 부장) 혜윤(43) 혜선(41. 서울시청 7급 공무원) 윤종(39. 행정안전부 7급 공무원)씨 등 4남매를 두었다.

  • 기획
  • 최동성
  • 2011.07.19 23:02

지평선축제제전위원장 활동

(사)지평선축제제전위원회 위원장인 정희운 전 군수는 위원장직을 11년째 맡고 있다. 지평선축제를 행정과 손잡고 전국적인 축제로 반석에 올려놓은 장본인이다. 우리나라 최대의 곡창지대인 김제를 문화관광의 명소로 우뚝 설 수 있는 새로운 이미지 창출에 기여해 왔다. 지평선행사의 주 무대인 벽골제(사적 제111호)는 김제군수 시절 성금 1억5백만원으로 부지 1만평을 구입해 새로 조성한 역사적인 시설이다. 사업비 55억원의 신규 사업으로 개발한 것이다. 현재 제전위원은 419명이며, 기금은 13억원을 확보했다.그런 그가 요즘 고민에 빠졌다. 올 9월29일부터 10월3일까지 열릴 지평선 축제를 앞두고서다. 지난 7년간 연속 대한민국 최우수문화관광축제로 이끌어 그간 최우수축제로서 매년 3억원씩 보조됐으나 이번에 끊기게 된다. 올 연말 '대표축제'로 선정되지 않으면 일반축제로 전락한다. 축제위상이 그만큼 낮아질 전망이다.정 위원장은 인터뷰 끄트머리에 "지평선축제는 이제 김제만의 것이 아니라 전북, 대한민국의 축제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면서 "전라북도와 정치권 등이 품격 높은 대표축제가 되도록 힘을 모아 달라"고 주문했다. 대표축제로 선정될 경우 향후 3년간 매년 8억원씩 정부지원이 이뤄진다고 한다.

  • 기획
  • 전북일보
  • 2011.07.19 23:02

정희운 전 김제군수

김제시 죽산면 옥성리에 있는 동천농장 주인 정희운씨(76). 기자가 방문한 11일 그는 추리닝 바지에 발목 짧은 장화를 신고 외양간을 연방 드나들었다. 한우 70마리에게 간식을 주기 위해서였다. 사료를 보고도 누렁이들은 물러섰다. 사육 두수가 줄어들면서 외부인을 경계하는 거란다. 두엄냄새가 여간 아니었다. 손가락 굵은 뼈마디와 햇빛에 그을린 피부. 여느 농사꾼과 다름없다.세월은 한 인생을 이토록 확 바꿔 놓았다. 16년 전 번듯하고 쾌적한 사무실 환경은 생각할 엄두를 못 낸다. 전라북도 국장과 일선 군수직을 잇따라 연임한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지방관가에서는 묵묵하고 성실했던 인물로만 기억된다. 지금은 화려했던 행적은 과거에 묻고 억센 새 삶터에서 현장을 가꾸고 있다.인터뷰 대상으로 '정희운'을 떠올린 것은 요직을 거친 관료 출신이 고향으로 돌아와 제2의 삶에서 성공을 거둔 귀농 축산인이기 때문이다. 현재 밀어닥친 축산업계의 위기와 함께 지역의 미래를 행정권 밖에 있는 고관 출신의 눈으로 읽어내는 데도 도움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그 나이에 소 키우느라 힘들 것 같습니다."그렇지 않아요. 소 키우는 데 많은 나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직까지는 건강해서 할 만합니다."-축산업에 뛰어든 건 언제인가요."1995년5월 공직생활을 마무리하고 나서지요. 그해 6월 있었던 민선 초대 김제시장 선거에 당시 여당이었던 민정당 후보로 차출돼 출마했다가 호남권의 '민주당 싹쓸이 판'에 낙선하고 이 길로 접어든 겁니다."-미리 준비는 했습니까."아닙니다. 소 사육은 낙선 후 6개월간 두문불출하다가 결심했습니다. 물론 공직에 있으면서 여생을 고향에서 보내야겠다는 생각은 갖고 있었지요. 오래 전부터 가슴에 묻어둔 꿈이었습니다."-군수 출신이 소 키우겠다고 했을 때 주위 반응은 어땠습니까."다들 비웃었어요. 불안한 거죠. '선거에서 망하고 소 키워서 끝장 보려고 그러느냐'며 길을 막았습니다. 어머니도 눈물로 한사코 만류했지요.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꼭 성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선 남의 도움 없이 직접 귀촌의 터를 닦았지요. 그건 귀농인이 농촌 사람들의 눈높이에 다가가는 일이었습니다."-선거 후유증으로 시작이 쉽지 않았을 텐데요."(아랫입술을 지그시 물며) 그렇습니다. 선거 치르느라 퇴직금과 연금을 다 날렸으니까요. 빈털터리였어요. 그대로 주저앉게 될 판이었습니다. 그러나 8남매 중 장남이 그럴 순 없었죠. 농협에서 3,000만원을 대출받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밭 3,000평에 축사 120평을 지었습니다. 1996년7월까지 암소 20마리를 입식했어요."-혼자 그런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아요."아내와 단둘이 해 왔어요. 하는 일이 어느 정도 기계화되어 크게 힘들진 않습니다. 시작 3년 반 만에 110마리로 늘렸고, 많게는 120마리까지 길렀습니다. 한해에 보통 송아지 40여 마리를 생산했네요."-그러면 이제 한우에 대해선 전문가 수준이겠습니다."웬만한 예방접종과 출산 방법은 알고 있지요. 그동안 행정기관의 각종 교육과 견학을 통해 배웠습니다. 기른 소 대부분 1등급 판정을 받았고, 한 때 육우 챔피언을 차지했을 정도입니다."-공직 경험이 소 사육에 도움이 됐나요."소 키울 때 공무원 정신으로 일했어요. 책임감 가지고 잘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정말 자부심 갖고 일하고 있습니다. 공직경험을 살려 직접 농부로서 성공사례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축산업의 어떤 점이 문제인가요."구제역 파동과 소 값 하락입니다. 소 값이 곤두박질치는 건 자유무역협정(FTA) 등 수입개방 확대가 주원인입니다. 가장 피해가 예상되는 분야가 바로 축산업 아닙니까. 축산업 붕괴 위기는 결국 농촌경제의 파탄을 예고하는 겁니다. 소비둔화에 사육두수는 늘어나 정상적인 수급이 이뤄지지 않아요. 축산 농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수입개방으로 얻은 이익은 일부나마 마땅히 축산 농가에 돌아가야죠. 한우 암소 23마리를 출하해 총 8천3백49만원의 소득을 올렸어도 손해가 만만치 않아요. 연간 사료 6,600만원과 볏짚 1,500만원의 지출액 8,100만원을 감안하면 생산비도 못 건지는 형편입니다. 한우 산지가격도 600㎏기준으로 작년 말 보다 37% 내려갔어요. 그래서 파동 전보다 연간 수익이 절반가량 줄었습니다."-그런데 소비자 가격은 왜 떨어지질 않는가요."유통구조에 원인이 있습니다. 소 등급 값의 16등급이란 세분화가 문제입니다. 두 세 등급 간에 무려 100만원 이상 경락 차익이 발생합니다. 이 때문에 저등급이 높은 등급으로 둔갑해 음식점과 정육점으로 유통되거든요. 소비자 시장에서도 이대로 16등급으로 판매됩니까. 현행 쇠고기 등급제는 그 보다 적은 5단계로 하고 있어요. 그러니 비싼 가격 때문에 소비가 줄어들 수밖에 없지요. 이런 구조로는 소비자들이 싼값에 먹을 수 없다고 봅니다. 한쪽에선 값 싼 쇠고기가 수입된다는데 한우가 내키겠어요."-수급과 유통 질서를 잡는데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한다는 건가요."당연하죠. 그러면 누가 조절하고 질서를 세웁니까. 남아도는 소를 보고만 있을 순 없는 노릇입니다. 소비 촉진을 위해 통조림 등 가공식품을 값싸게 식탁에 올릴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해야 합니다. 각 기관 단체에서도 '소 먹는 날'을 만들어 문제를 풀어가야지요. 정부는 우리나라 농업생산액 대비 농업보조금이 매우 낮다는 걸 알고 있을 거네요. 유럽 연합(EU) 가입국이 22.3%이고, 미국 14.6%, 일본은 5.4%인데, 우리나라는 4.6%에 불과해요. 보조금을 확대하고 축산 직불금제 도입도 알아봐야 합니다."-이런 상황에서 자녀들이 소를 키우겠다면 허용하겠습니까."일단 여건이 안 됩니다. 그러나 현재처럼 정부에서 농촌을 등한시 한다면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얘기를 바꿔보죠. 인생 2막의 '바꿔 살기'에서 무엇을 가장 중시했나요."일의 연속입니다. 인생의 가치는 태어나서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느냐가 중요해요. 적성에 맞는 일을 하게 되면 더욱 만족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노인이라고 해서 일하지 않으면 국가나 사회에 배반하는 것과 다름없어요. 일의 끈을 쉽게 놓아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공직의 삶과 축산인으로서 길은 어떻게 다른가요."힘들기는 마찬가지예요. 축산은 몸이 고되지만 정신이 편합니다. 공직생활은 그 반대입니다."-지방자치 부활 20년을 맞아 제도권 밖에서 본 행정이 궁금합니다."제대로 하는 게 문제지요. 집행부와 의회의 두 바퀴가 하모니를 이뤄 지역발전에 견인차 역할을 해야 할 거 아닙니까. 그런데 선거로 책임자를 뽑다보니까 능력 없는 인물이 맡을 때는 그 부담이 주민들에게 돌아가곤 합니다. 간혹 관선 때가 좋았다는 말은 사전에 인물검증이 충분히 있었기 때문 아닌가요. 그런 게 좀 미흡한 것 같습니다. 유권자들의 의식이 어느 때 보다 강조되는 건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또 행정은 농촌 살리기에 역점을 둬야 해요. 도시에만 공장을 유치할 게 아니라 농촌에도 공장 건립으로 농업소득과 공장 근로소득이 있게 해야지요. 소득이 없는데 누가 농촌에 남겠습니까. 말로만 그러지들 않았으면 합니다."-새만금간척지원사업소장을 역임했습니다. 새만금 행정구역의 설정에 대한 합리적인 방법은 어떤 게 있을까요."(잠시 말을 멈추고) 새만금 단독의 특구는 반대합니다. 대신 당초 개발계획을 구역 관리체계를 마련하는데 적용하면 되죠. 해안선을 따라 총 401㎡ 가운데 군산시가 285.25㎡, 김제시가 62.85㎡, 부안군이 52.90㎡를 관리하는 내용입니다. 그런 다음 어느 정도 여건이 성숙됐을 때 '새만금특별자치시'의 단일 행정자치단체로 만드는 겁니다. 통합기구가 총괄은 할 수 있겠지만 세부적인 구역관리를 위해서는 그 때 가서 이들 3개 시군에 관리권을 주면 어떨까요. 그래야 상생도 가능할 거예요."-꿈이 있으시나요."이 나이에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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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동성
  • 2011.07.19 23:02

김선식 다산북스 대표

올해 초 문학상과 관련된 자리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요즘 '꽤 잘나가는' 출판사 대표라고 했다. 반곱슬 머리에 나이를 가늠하기 쉽지 않을 정도로 젊어 보이는 그는 말수가 별로 없어 보였다. 그런데 책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태도가 바뀌었다. 명쾌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사람을 집중시키는 힘이 있었다. 자신의 출판사에서 발간한 책들이라고는 해도 그처럼 확신에 가득 차 소개하는 것은 좀체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를 주목하게 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제 갓 마흔을 넘어선 젊은 CEO의 화려한 경력이었다. 인쇄공부터 시작해 창업 6년 만에 뒤를 잇는 베스트셀러 출간에 우리나라 출판계 10위권 대열에 들어설 정도로 성공한 고창 출신 출판인이라니, 호기심이 생겼다. '다산북스' 김선식 대표(41)다. 예상했던 것처럼 그는 바빴다. 그래도 다행히 인터뷰 시간은 뒤로 밀리지 않았다. 한번 만났던 인연 덕분이다.'다산북스'는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에 있다. 출판사가 집적되어 있는 파주까지의 노정을 예상하고 있었던 우리에게는 조금 더 가까워진 거리만으로도 좋은 일이다.서교동에는 파주 대신 서울을 택한 출판사 100여개가 모여 있다. 다산북스는 염리동에서 1년 전에 이사를 왔다. 주택가의 넓지 않은 골목길에 지어진 출판사 건물은 2층의 세련된 현대식 디자인이 아름다웠다. 인터뷰는 좁고 소박한 그의 집무실에서 진행됐다."출판 일은 내 삶의 본질적 생명의 가치과 관게가 있습니다. 학생운동에 10년 이상 투신해오면서 좀 더 많은 사람들과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었어요. 출판은 그 꿈을 실현하는데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거든요."인터뷰 내내 자신감이 넘쳤다.'좌절을 겪어보지 않았을 것 같다'고 에둘러 물었더니 곧바로 답이 돌아왔다. "바닥까지 떨어지는 경험도 했어요. 그런데 좌절은 나를 일으키는 힘이 되더군요. 좌절해보아야 도전을 하게 되고 도전 해야 꿈을 실현할 수 있어요."그와 '다산북스'의 비전은 2013년에 국내 최고 출판 브랜드로 서는 일이다. 남은 기간 2년은 바로 코 앞에 와있다. 그런데도 그의 비전은 무모하거나 위태로워 보이지 않는다. 그가 지켜온 도전의 힘을 믿고 싶기 때문이다.-출판사 건물이 예쁩니다. 요즈음에는 출판사가 디자인도 아름답고 공간 구성도 효율적인 것 같아요."예전 출판사 환경과는 많이 다르죠. 서교동만해도 100개 정도의 출판사들이 집적되어 있는데, 건물 리모델링 작업이 활발합니다. 그런데 좀 비좁아요. 제 사무실을 최대한 줄였는데도 우리 식구 50명이 일하기에는 꽉 찹니다."-출판 일은 언제부터 하셨나요."창업하기 전에 두곳에서 일했어요. 99년에 입사한 '미라스북스'가 첫 직장이고, 사회과학 전문 출판사로 이름을 알린 '거름'이 두 번째입니다. 그때는 출판 쪽에 학생운동 조직 출신들이 많았어요."-인쇄공부터 시작했다고 들었는데 그것이 아니었군요."맞습니다. 제가 대학을 좀 늦게 들어갔어요. 동국대 경영학과 출신인데, 90년 입학해서 99년에 졸업했어요. 줄곧 학생운동 현장에 있었지요. 4학년때 군 입대 문제가 걸렸는데, 졸업하고나서도 노동현장을 계속 지키고 싶더군요. 자격증 같은 것이 있어야 했어요. 그래서 직업전문학교인 상계직업훈련원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사진제판 기능사와 사진 촬영 기능사를 땄습니다. 그래서 병역특례업체에 들어갔어요."-생계 때문에 인쇄공으로 일하신 것이 아니라 불온한(?) 목적으로 인쇄공이 되신 거군요."그렇게 되나요?(웃음) 그래도 회사에서 나올 때는 제가 가르친 직원이 18명이나 되었어요. 잔업을 밥먹듯이 했었지요. 병역특례기간이 끝나고도 인쇄 기술로 현장에 남아 있고 싶었는데 세상이 빨리 바뀌더군요. 어쩔 수 없이 복학을 했어요."-출판사 환경은 어땠습니까."첫 직장은 어려웠어요. 처음에 책을 세권 만들었는데 사장님 창업 자금이 바닥이 났어요. 하루 주문이 50-60부에 불과해 도저히 먹고 살 수 없었죠. 다시 몇 권 책을 만들었는데 그것들도 창고에 쌓여있었어요. 그때는 소원이 매달 3천만원 정도 매출과 수금을 하는 회사를 만드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상황은 절망적이었죠. 그때부터 우리 책은 왜 나가지 않는가, 고민을 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경쟁사들을 분석하고 연구하기 시작했죠. '거름'은 사회과학 서적으로 잘 나가는 출판사였지만 사회가 변하면서 사회과학 책들이 다 반품되는 상황을 맞았습니다. 나중에는 경제경영서 출판으로 살아났지만요."-두차례 모두 회사가 잘 나갈 때 그만두셨던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회사의 목표 매출이 있었고, 저 스스로 서른 다섯 살이 되면 창업을 하겠다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거름'에서 제가 기획한 '총각네 야채가게'가 잘 되었을때 창업의 시점과 맞아 떨어졌는데 그때 마침 출판사가 안고 있는 구조적인 한계를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어요. 그 당시 출판사들은 개인적 비전을 해결해줄 수 없었고, 사람을 키우려면 교육의 체계나 학습의 체계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분배의 문제도 있었죠. 출판은 벤처적 성격이 강합니다. 문제는 회사가 잘 되었을때도 분배 시스템의 정비가 없다는 것인데 이 때문에 결국 출판은 가족형으로 변하거나 아니면 끊임없이 1인 기업을 창출하는 방식이 됩니다. 그런 한계를 극복하는 출판사를 만들어 보고 싶었어요."-창업할때 어려움은 없었습니까."자금이었죠. 교사인 집사람이 대출 받은 3천만원과 다른 출판사가 투자한 창업자금까지 1억원으로 회사를 만들었어요. 지분은 제가 75% 가졌죠. 돈을 많이 투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운영하는 사람의 기획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설득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스템은 불합리한 점이 많더군요. 2004년 4월에 창업했는데 3개월 만에 이익을 냈어요. 그 해 말에는 10억 매출을 이루었고 2년차에 35억원 매출을 올렸어요. 다른 출판사로부터 인수 합병 제의를 받기도 했지만, 창업자금을 투자한 출판사에 5억원을 돌려주기로 하고 독립했습니다."-창업한지 7년째인데 지금은 매출이 얼마나 됩니까."작년에 150억원 매출을 올렸습니다. 국내에서는 10위권에 들겁니다. 사실 매출보다 얼마나 이익을 내느냐는 것이 중요한데 저희는 다 밝힐수 없지만 이익 포지션이 높은 편이지요. 그 이익금을 계속 재투자 합니다. 책에 투자하고, 회사를 확장하고 또 직원들에게 투자하는 그런 형식이죠."-출판사를 만든 이유, 그리고 '다산북스'가 지향하는 비전을 알고 싶습니다."'The joy of story', 다시 말하자면 '스토리의 즐거움을 인류에게 전한다'는 것이 우리 회사의 비전입니다. 그런 책을 만들겠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러한 비전이 나오려면 사상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다산 정약용의 애민(愛民)정신과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에서 나옵니다. 지식의 '소스'만 주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즐거움'을 다수 대중이 소유할 수 있게 하고, 답을 줄 수 있는 책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지식의 즐거움과 실사구시 정신의 비전을 지키면 성공 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출판은 아주 창의적인 분야입니다. 그런데 지나치게 현실만 보고 있으면 창의성이 차단되지 않을까요."그렇죠. 그런데 창의성은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창의성은 기본적으로 몰입에서 나온다고 봅니다. 몰입하려면 그 실체가 정확해야 합니다. 몰입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 콘셉트죠. 콘셉트가 있다는 것은 강력한 현실 추동성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이예요. 출판에서 보자면 이 책만이 갖고 있는 본질적 특성이죠. 이것을 잡아내는 능력이 창의성의 핵심이고 창의성의 본질입니다. 실체나 현실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책을 성공시키는데 콘셉트가 중요하다면 그것을 어떻게 펼칠 것인가의 기획도 중요할텐데요."기획은 아이디어로부터 출발합니다. 아이디어가 중요하지요. 우리는 아이디어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어요. 아이디어는 새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있는 것을 찾고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머리로 만들려고 합니다. 아이디어는 발견하는 가치입니다."-'다산북스'의 베스트 셀러들은 다 콘셉트로 성공시킨 예가 되겠군요."〈4개의 통장〉이나 〈덕혜옹주〉 〈리버보이〉 〈Who시리즈〉 등 모두가 그렇습니다. 그중에서도 〈덕혜옹주〉는 저자의 첫 작품이었는데 70만부 이상 팔렸어요. 사실 처음에는 인상이 강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덕혜옹주 사진에서 그의 눈망울 보는 순간 전율을 느꼈습니다. 확신이 들었죠. 꼭 만들어내야겠다, 성공시킬 수 있다는. 저자와 1년동안 작업을 했습니다. 마케팅에 투자도 많이 했죠. 카피는 제가 직접 썼습니다. 광고 카피를 10년 넘게 써왔는데 그때까지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만들었어요. '당신이 한국인이라면 이 여자를 기억하라'는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이 카피 문구를 달아 광고 하자마자 책 주문이 하루에 2000부~3000부까지 들어왔다고 김대표는 소개했다.)-진정한 베스트 셀러는 어떤 것일까요."기획자는 자기가 좋아하는 책은 쉽게 기획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좋아할 수 있는 책을 기획하기가 힘들죠. 그런데 모든 사람의 마음을 사로 잡으면서도 진짜 질 좋은 책은 사상이 되거든요. 그 시대를 이끌어가는 사상이 되죠. 한편으로는 꼭 그것이 아니더라도 베스트셀러는 문화가 되기도 하고 주변 문화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주목해야 해요. 베스트셀러는 그 사회의 경향성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출판계도 정말 치열한 문화전쟁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디지털 시대에 종이 인쇄의 생명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습니다."이 분야는 결국 콘텐츠 비즈니스로 전환되지 않겠어요. 출판도 종이에 담느냐 전자책에 담느냐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는. 결국은 시대와 호흡하는 좋은 콘텐츠를 누가 생산하느냐. 그리고 가치가 있는 콘텐츠를 누가 잘 기획편집하고 생산하느냐의 문제일거예요. 이런 흐름에 민첩하게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런데 한국사회에서는 그것이 너무 급격해요. 스마트 폰에 많은 사람들이 시간을 뺏기면서 책을 읽지 않게 되었죠. 이제 지하철에서 책읽는 사람을 찾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종이책은 10년 정도 지나면 전자책의 보조적 수단으로 전환 될겁니다. 미래를 준비해야죠."-대표 상품인 어린이 학습만화 〈Who〉 시리즈가 화제입니다."후시리즈는 15억원을 투자해 개발했습니다. 네 번 계속 엎고 보완하는 일을 했지요. 이 책의 성공요인 또한 콘셉트입니다. 다른 위인이야기와는 다릅니다. 1백년 안에 있는 동시대의 위인을 다룬 것도 그렇고, 업적 중심이야기를 위인들의 어린시절에 맞춘 것도 그렇습니다. 역발상이지요. 역사적 위인들에게도 평범한 어린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전해주고 싶었습니다."김대표는 이 책을 만드는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학습만화는 만들어본 경험이 없었지만 좋은 컨셉트와 열정, 의지로 어린이를 위한 좋은 책을 만들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는 과정에서 수많은 실수를 경험했지만 좌절하지 않았다고 했다. 〈Who〉 시리즈 올해 목표는 1백만부. 7개 국에 수출했으며 작년에는 우리나라 책으로는 처음 미국 초등학교 부교재로 채택되어 화제가 되었다.◆ 김선식 대표는1970년 고창에서 태어나 중학교까지 고창에서 다녔다. 전북대 사대부고에 입학하면서 전주로 온 그는 전북대 근처에서 하숙을 했는데 20명 하숙생 모두 대학생이었고, 그만 유일하게 고등학생이었다. 민주화의 열기가 높았던 시대 상황에서 '하숙생 형'들은 밤마다 토론하며 사상논쟁을 했었는데 그 역시 한축에 끼었다. 그는 "내 나이에는 받을 수 없는 사상적 세례를 그 때 다 받았다" 고 말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김남주 김지하 시집을 읽었고 수업까지 빠지면서 시위현장을 쫒아 다녔지만 자주 아파 병원에 가는 것으로만 알았던 학교에서 그는 모범생이었다.정외과를 가고 싶었으나 첫 해 실패한 이후 꼬박 2년 동안 서울의 온갖 집회와 시위현장에 다녔다. 88년 연세대 사태 때는 4박 5일동안 현장을 지키며 개근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틈틈이 종로서적을 들러 책 읽기를 즐겨했던 그는 대학에 꼭 들어가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집회현장에서'좋은 대학생 선배'들을 만나면서 대학에 가고 싶어졌다. 동국대 경영학과에 늦게 들어가 8년만에 졸업하고 난 후 그는 운동권 선배들의 권유로 두 곳의 출판사를 거쳤다. '미라스북스'와 '거름'에서 그가 한 일은 마케팅 분야. 말이 좋아 마케팅 부장이지, 책 한권 팔기 위해 온갖 막일을 다해야 하는 영업직이었다.지금은 국내에서 내로라 하는 출판사 사장이 되었지만 고향에서 농사 짓는 그의 부모님은 지금도 새벽 4시면 일을 나간다. 그의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100마지기 땅을 짓는 동네 최고 부자가 되는 꿈을 갖고 있었는데 작년, 72세에 그 꿈을 이루었다. 김대표는 지칠때 마다 농사를 천직으로, 노동을 행복으로 알고 살아온 부모님이 '실천으로 가르쳐주신' 삶의 의지와 원칙을 떠올린다고 한다.김대표가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가장 중요한 일로 꼽는 것 역시 현장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출판 현장의 핵심은 책읽기. 다른 출판사의 베스트셀러와 자기 출판사의 신간을 다 읽어내는 것, 그리고 독자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김 대표의 경우는 물론 이 책들을 거의 다 읽는다. 어떤 경우는 다섯 번까지 읽기도 한다. 서점에도 자주 들러 서점가의 흐름을 짚어낸다.김 대표는 기업의 사회적 기여에도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다. '다산북스'는 최근 전세계 소외아동을 돕는 사업에 뛰어 들었다.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와 손잡고 벌이는 이 사업은 다산북스 출판 전 도서에 세계 소외아동 후원엽서를 달아 후원할 기회가 없거나 방법이 없는 기부자들에게 좋은 창구를 만드는 일이다. 김 대표는 "한해 약 200여만명이 후원엽서를 받게 돼 후원사업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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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은정
  • 2011.07.12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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