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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그림 융합 ‘제3 장르’ 개척한 김병종 화백

미사리에서 양평에 이르는 남한강변은 우리나라 문화예술의 해방구다. 복닥거리는 서울을 피해 20-30년 전부터 자연발생적으로 수많은 카페촌과 화랑 도예공방 미술관 등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 중 한 곳인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이석리 82번지. 반달같은 팔당호가 내려다 보이는 이곳에 김병종 화백(58)의 아담한 별저(別邸)가 있다. 가끔씩 쉬어가기 위해 집을 마련한 것은 1994년. 3년 전 한옥으로 개조했다. 집 이름은 함양당(含陽堂)과 협선재(協善齋). 집 뒷편에는 350년 된 은행나무가 노란 잎을 떨군채 서 있었다. 가슴 높이의 대문 양날개들 밀고 들어서니 김 화백이 반갑게 맞아줬다. 인터뷰는 함양당에서 김 화백이 손수 끊인 차를 마시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항상 바쁘신 듯합니다. 근황을 좀 들려주시죠.“생활이라는 게 거의 늘 동어반복적으로 되풀이됩니다. 강의하고, 그림 그리고, 여행 가고…. 그런데 살아가면서 인간관계와 일의 네트워크가 방사형으로 넓혀지면서 비본질적인 일로 시간을 보내는 게 잦아지는 것 같아요.”- 선생님은 동·서양을 접목시킨 독창적 화풍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크게 보면 1980년대 바보 예수와 1990년대 이후 생명의 노래, 그리고 1990년대 말부터 계속해온 여행시리즈 등으로 나눠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먼저 바보 예수와 관련, 그리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제가 기독교인 가정에서 태어나서 자연스럽게 제 자각의지가 생기기도 전에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됐죠. 바보 예수는 1980년대의 산물입니다. 대학가에 늘 소요가 그칠 날이 없었는데, 특히 서울대학은 아주 심했죠. 어느 날 석양 무렵에 최루탄 연기가 자욱한 교정을 내려오다가 문득 예수님께서 저 최루탄과 학생들 사이에 서신다면 무슨 해법을 내놓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피흘리면서 허공을 바라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 아주 순간적으로 떠올랐고, 그러더니 허공에 연속적으로 형상들이 떠오르는거예요. 당혹스러울만큼. 그래서 허공에 떠오른 형상들을 작업실에 돌아가서 그림으로 표현해 본 것들이 바보예수 연작이죠.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보 예수는 호평과 함께 논란도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요?“지금과 달리 그 때만 해도 신성모독적으로 해석하는 시각들이 좀 있었죠. 하지만 이것은 저만의 독특한 반어법적인 사랑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애들이 울면서 ‘엄마, 바보야’했을 때와 같은 사랑과 존경과 따뜻함으로, 모든 것을 포괄하는 단어였는데 이 단어가 오해를 불러 온 거죠.”- 선생님은 80년대 말 연탄가스 사건 이후 그린 ‘생명의 노??연작은 생명의 기쁨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재밌는 게 문학소년, 문학청년기를 지나면서 하얀 시트가 깔린 병원에 입원해 봤으면…, 예쁜 소녀가 꽃을 들고 위문을 오는 상상을 해봤는데 그것이 현실이 돼 버렸죠. 실제 입원을 해 보니까 양쪽 팔뚝에 주사바늘 몇개씩 꽂고 자야 하는 고통이 결코 그렇게 센티멘탈한 문학적인 게 아니었습니다.”(김 화백은 1989년 11월 23일 새벽 서울 신림동 비좁은 화실 옆 고시원에서 자다 연탄가스 중독으로 병원에 실려갔다. 50일 가까이 입원했다.) - 죽음의 경험 이후 지속적으로 ‘생명 주제’를 천착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퇴원하고 교수아파트에 살 땐데 2월 중순쯤에 뒷산에 오르다가 두터운 동토을 밀고 올라오는 작은 꽃이 파르르 떨고 있는 것을 보면서 생명의 경외감이랄까, 아마 제가 오래 입원해 꼼짝 못하고 있어서 생명의 아름다움에 주목해 봐야겠다, 천지가 하느님의 창조미술관이구나. 이렇게 해서 생명의 노래 연작이 나왔죠.” - 닥 죽을 사용해 토속적인 느낌이 들던데요?“그건 제가 동양화를 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화선지를 쓰게 되는데 화선지가 너무 예민하고 너무 하얗게 표백을 시켜서 시골 소년같은 제 감성하고 좀 안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닥종이를 밀가루 반죽처럼 만들어서 마치 분청사기 표면처럼 좀 두툼하고 어떤 재질감을 만들어 보려고 쓰기 시작했는데요. 중국의 화선지 문화와는 다른 우리 닥문화, 수수하고 덤덤하면서도 텁텁한 그러면서도 뭔가 훈훈하고 한국적인 미감이 그런데 있다고 생각이 들거든요. 뭐 토장국 된장국 장판문화 막걸리 같은 그런 맛을 미술에서도 살려보려고 한 거죠.”- 선생님은 1998년부터 화첩기행 시리즈를 조선일보에 4년 가까이 연재해 장안의 지가를 높였습니다. 감성어린 탄탄한 글발까지 가미해 미술의 대중화에 이바지했습니다. 화첩기행은 글과 그림의 융합에 의한 제 3의 장르라는 평도 들었는데요. 특히 라틴아메리카까지 폭넓게 다니셨는데 힘들지 않으셨습니까?“저는 아주 오래 전부터 남미를 꼭 가보고 싶었어요. 왜냐면 거기에 제가 좋아하던 칠레의 파블로 네루다라는 시인이 있고, 수많은 화가 음악가 등 제게 정신적인 자양분을 준 많은 예술인들이 살던 곳이니까요. 무엇보다 화가인 저로서 감동적이었던 것은 유교문화권에선 색채에 대한 절제가 있는데 남미는 색 자체에서 생의 기쁨을 발견하는 것 같아요. 제가 깜짝 놀라고 강한 인상을 받았던 게 미술관에 들어가 유명한 화가의 작품을 보고 감동을 받은 게 아니고 집이고 자동차 의복 남녀할 것 없이 내뿜는 어떤 기운, 낙천성을 색채로 유감없이 발산하는게 저는 감동적이었죠. 그래서 ‘남미가 저에게 색채의 교사였다’ 그런 생각을 하게 했죠.”- 선생님은 ‘여행을 하면 삶의 에너지가 돌아온 것 같다’고 하신 적이 있는데 글과 그림, 여행의 메카니즘이랄까를 좀 설명해주시죠.“어머님 말씀에 의하면 ‘진득이 앉아서 공부 안하고 어디를 그렇게 싸돌아 다니느냐’하셨는데 어렸을 때부터 들로 산으로 다니고, 그러고 보니까 남쪽의 소도시가 답답한 거죠. 그래서 늘 지리부도를 들여다보면서 도시명을 노래 가락처럼 부르고 다녔는데 실제로 그 도시를 찾아다니면서 느꼈던 기시감(旣視感·언젠가 와 본 듯한 느낌), 그런 환상이 실제와 부딪쳐서 일으켰던 감동이 아니었던가 생각해요. 정말 많이 돌아 다녔죠. 저는 예술적 에스프리랄까, 이런 것을 공감하고 싶은 여행이 대부분이었죠.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몰타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이란 루마니아 불가리아 이런 예술적인 에스프리가 넘쳐나는 곳을,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화첩기행으로 묶으려고 하고 있는데, 그렇게 되면 국내외 합해서 10권 정도가 될 것같고 앞으로 10년 정도 안에 그걸 완성하면 국내외 예술기행으로서 유니크한 형태가 되지 않겠는가 싶어요.”- 그럼 앞으로 갈 곳은 어딘가요?“제 사적(私的) 비전이 공적(公的) 논리의 요청을 받고 있다. 무슨 얘기냐? 조금 거창하게 생각한다면 오늘의 한국사회가 자연에 대해서 인식하고 있는 부분을 유럽 중심의 소위 자연과 인공을 잘 조화시킨 나라들에 대한 기행문을 통해서 소개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거예요. 생명의 노래를 그렸던 화가로서 이 나라가 우리의 후손이 살아갈만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지혜롭게 자연과의 공존을 살펴볼 때가 되지 않았는가, 내 어렸을 때 봤던 일망무제의 보라색 자운영 밭 같은 것, 형형색색의 야생초 같은 것들이 영국의 코츠월즈(Cotswolds)의 바이버리(Bibury)마을같은데 가면 그대로 다 되어 있어요. 예컨대 유럽의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이 어떻게 일찍이 자연과 관계를 맺으면서 건물을 지을 때 자연 앞에 겸손하려 했으며 결국 이런 의식들이 공공디자인이나 도시의 간판까지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 이런 좀 선진화된 의식의 한 부분을 그림과 글로 표현해 보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거죠.”- 선생님은 그림뿐 아니라 인문학에도 두루 밝은 것 같습니다. 특히 유가철학 연구를 하셨는데 동양화의 바탕에 철학성이 있다고 생각하신건가요? “동양의 그림이라는 게 원래 문(文)·사(史)·철(哲)·예(禮), 이렇게 얘기합니다. 포괄적이고 종합적이에요. 그림만 가지고 논하지 않고 그림의 이론 같은 것도 노자나 논어 같은 곳에서 끌어오기도 하고, 또 약간의 호학(好學) 취미같은 게 있는데다??”- 같은 주제라도 재료에 따라 그림의 분위기가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바보 예수’는 골판지에 검은 먹으로, ‘생명의 노???닥종이에 천연안료를, 화첩기행은 아크릴 물감도 거침없이 썼습니다. 어떤 차이점이 있습니까?“내용을 담기 위한 형식과 재료는 마음껏 내가 쓰겠다. 형식이나 재료는 구속받지 않겠다. 여기선 수묵화로 남명 조식(曺植)에 관한 그림을 그렸으면, 남미에 가선 그것 가지고는 안되겠다는거죠. 극채색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고 … 그러니까 어떤 내용을 담는데 있어 형식은 종이가 됐건 나무가 됐건 그건 구애치 않는 거고요.”- 선생님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남원의 자연환경, 즉 지리산과 섬진강의 정취가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가요? “그렇죠.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전주 남원은 앞으로 경쟁력이 있는 곳이 될거라고 생각합니다. 흐르는 섬진강 자락과 멀리 지리산의 억센 뼈대, 그리고 평사리 들판들, 일부러 슬로시티라 하지 않아도 삶의 정말 중요한 정서와 여운을 느꼈는데 여기에는 대단한 노력과 철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고도의 문화의식, 감각, 디자인적인 역량, 자연에 대한 의식 이런 것들이 동원돼야 합니다. 전주나 남원도 독특한 조선조 왕도로서의 잔영이지만 아름다운 기와집들, 훌륭한 미각문화, 그리고 유서깊은 역사의 현장들 이런 것들을 잘 살려서 지혜를 모은다면 대단히 유니크한 도시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전북의 문화예술인들에게 한 말씀 해주신다면?“그건 적절치 않은 것 같습니다. 아직 제가 현역으로 있어서, 나중에 내가 원로가 돼 가지고 그 때나…(웃음)”- 끝으로 한 말씀?“저는 정말 감사한 게 그림 그리는 데 대한 아주 설렘이 있습니다. 저는 어려서 아침에 일찍 학교를 가는 거예요. 왜 일찍 가느냐? 공부하려고 그런 게 아니라 칠판을 가득 몇번씩 왔다 갔다 하면서 그림을 그리는 거예요. 그러면 해갈이 되는 느낌, 그런데 집안이 기울어 그림을 그리는 것에 대해 주변에서 못하게 하려고 많은 핍박이 있었거든요. 예를 들면 아주 어려운 시절에 조강지처를 만나서 함께 늙어가면서 애틋하게 바라보는 시선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시종일관 첫사랑인 미술 하나를 가지고 끊임없이 대화하고 사랑을 불태우면서 여기까지 왔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 감격할 때가 많은 거예요. 이제 본격적으로 할 단계에 접어들지 않았는가 하는 기대와 설렘이 있는 거죠.”- 오히려 열정이 식는 게 아니라 더 뜨거워 지는 것 같습니다.“더 많은 그림에 관한 파노라마들이 펼쳐지고, 그러니까 천생 환쟁이인 것 같아요. 한 가지 저에게 미덕은 정말 열심히 한다는 거예요. 이거는 잘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참 열심히 빠져드는구나 하는 마음을 스스로 갖는데 그 배후에는 13살 이전에 크레용도 없고 못하게 했던 분위기, 눈물겨운 그림과의 인연, 애틋함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분이 저한테 담담할 담(淡)에 늙은이 옹(翁)자, 담옹재라는 당호 현판을 보여주면서 어떠냐고 해요. 그래서 제가 노(No), 나는 불꽃 염(炎)자 염옹(炎翁)으로, 꿈꾸는 소년에서 불꽃의 노인으로 갈지언정, 내면에 그림에 대한 용광로가 타오르는데, 담옹 가지고는 만족을 못할 것이다라고 해서… 우스개 소릴했는데, 정말 신기할만큼 열 두세살의 그림에 대한 열정과 설레임이 조금도 죽지 않은 거예요. 그러니까 천생 환쟁이인데 딴 거 시켰으면 어떻게 됐겠어요.”- 안타까운 부분은 없으신가요?“다만 안타깝고 회한스러운 부분이 있는데, 뭐냐. 나는 이 나이 정도가 되면 굉장히 성숙된 인격과 성숙된 신앙인이 되는줄 알았어요. 그런데 인격도 신앙도 아주 지진아인 상태로, 도대체 진보되지 않는 거예요. 왜 이렇게 되는가 보니까, 그림 그리는 자기 중심적 행위 속에 빠져서 지나다 보니까, 어쩔 때 보면 내가 대단히 유치하고 미성숙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요.”(인터뷰가 끝나고, 집 아래 호수집으로 향했다. 동네 사람들이 지나며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정겨웠다. 민물 매운탕으로 저녁식사를 하며 중학교 때 신문배달을 하다 빼먹은 얘기며 친구인 이강래 국회의원과의 자취생활, 형님과 서울에 있는 전북출신들의 활동 등에 대해 들려줬다. 4시간이 너무 짧게 느껴졌다.)

  • 기획
  • 조상진
  • 2011.11.29 23:02

“위그선, 차별화된 여행문화로 승부, 1조원 시장…전북 성장동력 키워야”

세계 최초로 50인승 위그선이 개발됐다. 내년 3월 군산∼제주간 취항을 앞두고 얼마전 진수식을 가졌다. 자금력과 기술력, 경제성 때문에 선진국들도 감히 넘보지 못했던 영역이다. 소형 위그선에 이어 효용성과 경제성을 높이기 위해 대형 위그선도 개발되고 있다. 상용화가 성공하면 우리나라는 1조원 규모의 위그선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선봉에 서 있을 것이다. 험난한 과정을 뚫고 위그선 개발에 성공한 강창구(57) 윙쉽중공업 대표를 만났다. 군산 현대중공업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윙쉽중공업 사무실에서 2시간 30분 동안 얘기를 나눴다. 윙쉽이란 명칭은 위그선(Wing-in-Ground Ship)의 약어다. -‘하늘을 나는 배’ 위그선(WIG Craft)이 얼마전 군산에서 진수돼 관심을 모았습니다. 마무리 작업은 잘 돼 갑니까.“지난 10월 중순 50인승급 1호선을 진수한 뒤 현재 각종 기기 점검과 이동 및 선회 등 해상테스트를 진행하고 있어요. 세계 최초인 만큼 신중하게 시험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한두달 내에 최종 인증을 획득할 예정입니다.”위그선은 물 위를 빠른 속도로 치고 나가는 초고속 선박기술과 수면에서 뜬 상태로 이동하는 항공기술을 접목해 만든 첨단 선박이다. 배의 날개를 수면 가까이 있게 해, 날개 밑의 공기가 갇히는 표면효과를 일으킴으로써 양력이 커지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수면 위 5m 이내에 뜬 상태로 최고 시속 550Km까지 달릴 수 있다. 선박이냐, 비행기냐 논란이 일었지만 유엔 산하 국제해사기구는 선박으로 규정했다.-당초 계획들이 조금씩 늦어져 왔는데 내년 3월 군산~제주 노선 취항은 가능할까요.“50인승급 위그선은 첫 상용화이기 때문에 변수들이 있을 수 있지만 예정 대로 취항할 겁니다. 조종사 3명과 여 승무원들도 뽑아놨습니다.”-부산 목포 등 여러 곳이 있을 텐데 위그선 건조와 출항을 군산으로 택한 특별한 까닭이 있나요.“위그선 건조 및 진수를 위해서는 생산현장이 반드시 바닷가에 위치해야 하는데, 군장산업단지는 그러한 입지에다 선박 항공 기계 소재 IT 등의 다양한 관련 산업 등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관련 교육기관이 많아 기술인력 확보도 원활한 편이고요. 전북도와 군산시의 적극적인 지원정책도 장점이었습니다.”-세계 몇몇 국가에서 위그선을 만든 적은 있지만 상용화하는 데에는 실패했습니다. 이번에 성공하면 세계 첫 상용인데 노하우가 궁금합니다.“위그선은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러시아(옛 소련)에서 군사적 목적으로 개발해 실전에 배치된 사례가 있습니다. 그후 러시아 독일 미국 일본 중국 등이 상용화를 추진했지만 모두 8인승 급 이하 소형 위그선 개발에 그쳤지요. 중대형 위그선 상용화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기술역량 이외에도 자본력과 제도, 인프라, 자국 내 활용 가능성 등 다양한 여건이 성숙돼야 합니다. 이런 조건을 충족시키고 해결하는데 정부와 자치단체, 수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습니다. 때마침 석유값 급등 등으로 위그선이 절실히 필요한 때에 상용화할 수 있게 됐는데 정말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국내 기술진의 능력은 뛰어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데 윙쉽중공업은 어느 수준입니까.“조선산업에서 한국은 세계 최고입니다. 튼튼한 조선산업이 위그선 기술확보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지요. 국내 위그선 연구개발은 1990년대 중반부터 한국해양연구원을 중심으로 진행해 왔는데 그동안 1인승, 4인승, 20인승 시험선 등의 개발에 성공한 바 있습니다. 우리 회사의 핵심인력은 해양연구원의 위그선실용화사업단 소속 연구원으로 구성돼 있는데, 위그선을 비롯한 초고속 선박 분야의 경험이 풍부하고 다양한 전공을 가진 세계적인 전문가 집단입니다. 현재 수십명으로 구성된 연구개발 및 설계 기술진은 위그선 분야에서 만큼은 세계 최대 조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난히 위그선에 관심을 갖게 된 특별한 동기라도 있나요.“한국해양연구원에서는 각종 초고속선에 대한 연구개발을 오랫동안 진행해 왔지요. 공기부양정, 수중익선, 위그선 등에 대한 연구에 참여했어요. 연구소장을 할 때 연구단지 30주년 기념 전시회에서 위그선이 전시됐는데 이때 참석한 강동석 항만청장(현 여수엑스포 조직위원장)께서 “위그선 하나만 상용화해도 출연연구소의 책무를 다 한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이 위그선에 전념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강 위원장께서는 내년 5월 여수엑스포 개막식에 맞춰 여수∼제주간 위그선을 띄워달라고 주문하셨습니다.”-처음 시도되는 사업이라 관련 규정 또는 기관의 경직된 태도 등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요.“불과 2년 전만 해도 관련 규정이나 제도가 전혀 마련돼 있지 않았고 위그선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관련 기관에 널리 퍼져 있어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수백 번의 프리젠테이션과 설득을 해야 했습니다. 이제는 법 제도가 마련되고 인식도 달라져 긍정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입니다.”-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습니까. “관련 제도 등이 지연되고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생산기지 건설과 설비투자, 원자재 등에 막대한 자금이 소요됩니다.”-총 투자액은 얼마나 됐나요.“개발비용에만 100억 원이 넘게 들었고 부대비용까지 합하면 200억 가까이 될 겁니다. 대우해양조선, 한화금융, 개인투자자들이 도왔지요.”-위그선은 ‘바다의 KTX’로 불립니다. 대중성이 성패를 좌우할 것으로 보이는데 전망은 어떻습니까.“고속철도가 탄생된 이후 결국 대중화의 길로 간 것처럼 초고속 위그선도 해상교통의 중추 수단으로서 대중화가 이루어질 것으로 확신합니다. 최근에 제주도가 세계7대 자연경관으로 선정돼 관광객이 급증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공항은 포화상태입니다. 제주도가 실시한 용역에서도 나타난 것처럼 위그선이 좋은 대안이 될 것입니다.”-군산~제주간 비행기 요금이 왕복 16만6000원, 소요시간이 50분 정도인데 위그선은 1시간 50분이 걸리고 요금도 비행기 요금에 맞춰질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경쟁이 될까요.“위그선은 항공기와는 달리 단순한 이동수단으로만 기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승객에게 새로운 해양문화를 체험하는 기회를 제공하고, 위그선 여행 자체가 관광이 되는 그런 고품격 여행상품으로 개발될 예정입니다. 단순히 속도와 요금으로 항공기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화된 여행문화로 승부할 계획입니다.”-호기심 삼아 한번씩은 타 보겠지만 지속성이 문제 아닌가요. “해안도시 간 접근성, 멀미 없고 안전하며 쾌적한 승선감은 잊을 수 없는 매력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프리미엄급 서비스와 새로운 해양문화의 체험은 지속적인 수요를 창출할 것으로 자신합니다.”-파도가 높은 해역에서는 이·착수가 어려워지고 운항률이 낮아져 결국 경제성이 떨어질 것이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파도는 먼 바다에서 높게 일지만 해안 가까이에서는 낮은 특성을 보여요. 50인승급 위그선의 이·착수 유의 파고는 2.5m이며, 위그선이 뜨지 못할 정도의 해상상태는 소수에 불과합니다. 일반 여객선은 파랑주의보나 폭풍주의보에서는 출항하지 못하지만 위그선은 순항 중에 파도의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이·착수 지점 상태만 허용범위에 들어오면 입출항이 가능합니다. 군산∼제주 항로는 연간 운항률이 90% 이상이 될 것으로 조사됐습니다.”-위그선은 안전성이 뛰어나다고 합니다만 안전성 인증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250년 역사를 자랑하는 영국 로이드 선급과 계약을 맺고 설계단계부터 조립 및 시운전에 이르기까지 안전성 인증을 받고 있어요. 고성능 레이더와 자동식별장비, 야간운항이나 안개에 대비한 적외선 감시장비 등 첨단장비가 갖춰져 있어 운항 중 10~20km 전방에서도 물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항공기보다도 안전한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안전성 확보에는 문제가 없어요.”-내년 여수엑스포가 개막되는 시점에 여수~제주간 운항이 예정돼 있는데 향후 구체적인 운항계획을 들어볼까요. “내년 하반기까지 군산∼제주, 여수∼제주, 군산∼홍도, 인천∼백령도, 인천∼군산, 인천∼제주 등 6개 연안항로 취항 면허를 획득할 예정입니다. 50인승급 15척이 투입되고 2013년 이후에는 150인승급 이상 여객위그선과 적재량 20톤급 화물위그선을 투입해서 국내 주요 항만과 중국 일본의 해안도시를 연계하는 동북아 초고속 해상 네트워크를 구축할 계획입니다. 12개 항로에 약 24척이 투입될 겁니다.”-해외 선사(船社)들의 위그선 건조 요청도 있습니까.“해운 강국인 그리스를 비롯한 유럽과 미국 동남아시아 중국 등과 위그선 도입 협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향후 세계 시장 규모가 1조원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이 있습니다. 이런 수요를 충족시키려면 인프라 확충이 관건일 텐데 어떻게 구상하고 있나요.“현재 군산자유무역지역에 1, 2공장이 들어서 있고, 비응도 위그선협동화단지에 3, 4공장이 올해 안에 완공될 예정입니다. 이들 4개 공장이 연간 20여척의 생산능력을 갖추게 돼 중단기 수요에 대처하고, 장기적으로는 새만금 산업단지 내에 대규모 생산기지를 조성해 연간 1조원 이상의 생산능력을 갖출 계획입니다.”-위그선이 섬과 섬을 오가는 유력한 교통수단이 될 것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고군산군도, 새만금지역 관광을 연계하는 성장동력으로 키워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을 갖게 됩니다만. “맞습니다. 위그선은 기존 고속선보다 3배 이상 빠른 초고속 녹색 해상교통수단입니다. 섬과 섬 뿐만 아니라 중국 등과 연결하면 고군산군도∼새만금 관광 등을 활용한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키울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세계적인 위그선 클러스터를 구축해 지역 내에서 위그선 부품·소재 조달 및 완제품 조립 공정도 동시에 해결해 나가야 하고요. 그럴려면 기업 간 협조와 투자, 자치단체의 선도적인 역할이 중요합니다. 제주도 등 다른 자치단체에서는 위그선 활용에 대한 용역을 마치고 실행단계에 있어요.” -맞춤형 제작, 부정기 운항 등 전략적 접근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150인승, 350인승 여객선은 물론 40톤 적재 화물용 위그선, 날으는 요트(Flying Yacht), 군용 위그선 등 향후 다양한 수요가 이미 나와 있습니다. 단계적으로 진행시킬 예정입니다.”-정부나 자치단체 차원에서 지원해야 할 분야도 많을 법 한데 당장 시급한 현안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전용부두와 접안시설, 터미널 등 인프라 확충입니다. 위그선 전용부두가 국내 주요 항만에 설치될 수 있도록 전국항만기본계획에 반영돼야 합니다. 또 하나는 위그선 선박금융에 대한 지원입니다. 해상여객선사 또는 선주가 일반 선박처럼 선박금융을 활용해 위그선 구입자금을 조달할 수 있도록 제도화해야 합니다. 정부와 자치단체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국책연구기관에서 30여년간 연구원 생활을 하다 이제 막 창업의 길로 뛰어들어 성공여부를 시험받고 있습니다. 어떤 심정입니까.“새로운 길은 항상 두렵고도 설레이는 길입니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길도 보고 또 보면 뚜렷이 보이고, 여러 사람이 믿음을 갖고 보면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연구개발 및 상용화는 끊임 없는 새길 찾기라고 생각합니다. 위그선 상용화는 모든 신기술이 넘어야 하는 깊고도 넓은 데쓰 밸리(죽음의 계곡)를 건너 세계 최초로 신산업을 창출하는 사업입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성공시켜야 한다는 생각뿐이지요.”-소망이 있다면. “중형뿐만 아니라 대형 위그선을 개발, 상용화하는 것이 소망입니다. 그래서 많은 일자리도 만들고 산업 선진화에 일조하면서 후배들에게도 힘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럴려면 최고의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끊임 없이 신기술을 개발하고 투자를 확대해야겠지요. 전북 출신으로서 전북에 기여하는 기업을 만들고 또 전북의 사랑을 받는 기업으로 키워가고 싶습니다.”

  • 기획
  • 이경재
  • 2011.11.22 23:02

강창구 윙쉽중공업 대표는

강창구 윙쉽중공업 대표(57)가 회사 마당까지 나와 맞이했다. 외모에서 풍긴 인상은 온화하고 곱상한 이미지였다. 동안(童眼)이었다. 30년 연구원 생활을 접고 험난한 창업의 길로, 그것도 세계 첫 위그선 상용화라는 전인미답의 길을 찾아 나선 강인함 같은 것은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진드기’로 불릴 만큼 집념이 강하고 한번 마음 먹으면 꼭 관철시키는 의지의 ‘조선공학도’다. 진드기란 말은 정부 부처 관계자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끈기와 의지를 갖고 착 달라붙어 예산을 요청하고 사업을 설명하던 것을 두고 붙인 별명이다. 당시 “강창구한테 걸리면 피곤하니까 피하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우리나라 조선산업의 산 역사다. 서울대 조선공학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친 뒤 미국 미시간대 대학원(선박해양공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선박연구소에서 선임연구원 생활을 시작했다. 조선산업을 전공하게 된 것은 1972년 현대조선이 세워질 무렵 ‘앞으로 조선산업이 크게 발전할 것’이라는 방송을 들은 것이 계기가 됐다.그 뒤 한국기계연구원 선박해양공학연구센터 연구부장과 단장, 한국해양연구원 대형위그선 추진기획단장· 실용화사업단장을 역임했다. 1984년 소형선박 조종시뮬레이터 개발 책임을 맡아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고성능 시뮬레이터 개발의 시초를 닦았다. 서해훼리호와 프린스호 사고 때 사고원인을 과학적으로 규명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런 노하우를 바탕으로 그는 세계 첫 위그선 상용화의 꿈을 실현하고 있다. (주)윙쉽중공업과 (주)윙쉽테크놀러지를 창업해 위그선 설계제작자로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 그의 표현 대로 9부 능선을 넘었다. 강 대표는 남원 사매면에서 태어났지만 학교는 군산에서 다녔다. 금강초등학교와 군산중·고를 나왔다. 부인 김연희 여사(56)와 1남1녀를 두었다. 아들과 딸, 사위가 부친 사업을 돕고 있다는 게 흥미롭다. 아들 병재(30)씨는 대전외고와 서울대 조선공학과를 나왔다. 설계팀장을 맡아 부친이 걸었던 길을 걷고 있다. 수능시험 만점을 기록한 수재다. 연세대 사회복지학과를 나온 딸 민지(28)씨와 서울대 경영학과를 나온 사위도 회사에서 같이 근무하고 있다. 아버지의 ‘강압’이 아니냐고 물었더니 모두 스스로 택한 길이라고 했다. 위그선의 탄생과 현재, 미래를 담은 ‘하늘을 나는 배 위그선’을 저술했고 한국기계연구원 최우수연구상을 수상했다. 산업포장과 국무총리, 장관상이 수두룩하다. 한국해양환경공학회 회장, 한국해양과학기술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다.

  • 기획
  • 기타
  • 2011.11.22 23:02

김진소 소장은

김진소 호남교회사연구소 소장(신부)은 ‘파란만장한’ 역정을 걸어왔다. 끊어질듯 이어지는 삶과 죽음의 갈림길 마다 믿음과 신앙은 그의 손을 잡아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1973년 교통사고로 뇌를 다쳐 2개월간 치료를 받고, 1980년에는 연탄가스 중독으로 수개월을 병상에 머무는 사무친 병고를 겪어야 했다. 1999년에 대상 포진을 앓고, 2000년부터 딱 2년간 뇌경색을, 2005년에는 심장수술을, 그리고 2006년에는 결장암 수술을 받았다. 수많은 병마 등과 싸워온 인고의 세월을 마음으로 읽어가다 “이제 그 얘기는 그만하자”며 눈물과 담배연기로 잠시 헝클어진 심정을 추스렸다. 충남 서천에서 첫 세상을 본 그는 1947년 열 살의 나이에 부모를 따라 가톨릭에 들어왔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전후한 아픔 속 우리 사회는 그를 비켜가지 않았다. 1965년 다니던 한양대학교를 중도에 그만두고 학창시절 키워낸 사회에 대한 ‘희망’과 ‘봉사’의 신념을 품고 광주 대건신학대학(광주가톨릭대학교 전신)에 편입하게 된다. 한국문화와 역사에 눈과 가슴이 모여지는 시간들이 계속됐다. 7년반 동안 수련을 거쳐 1972년7월 사제서품을 받고 중앙 주교좌 성당 보좌 신부로 성무에 뛰어들었다. 이듬해 8월 모교대학에 교수로 자리를 옮긴다. 교회의 과거에서 미래의 희망을 보게 된다. 교회사를 밝히기로 작심하고 몸을 던진 게 이 즈음이다. 1975년1월 나바위 본당 주임으로 새 터를 잡았지만 1년만에 전주교구장은 김 신부를 ‘교회사 사료 수집 정리반’ 책임자로 앉혔다. 1978년에는 참사위원 겸 재정관리위원으로서 활동 폭을 넓혀갔다. 1982년9월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위원회 전문위원과 시복시성 추진부 위원으로 발탁되고, 전주교구 가톨릭 교수회 지도신부로 자리를 바꿨다. 교회사 연구는 전담이 되었다. 1983년5월 ‘호남교회사연구소’ 간판을 내걸었다. 1988년 천호피정의 집 및 천호성지 책임자로 발령됐지만 교회사 연구에 보직은 한계였다. 그래서 1992년1월 호남교회사연구소 전담신부로 천호산에 들어가 본격적인 활동을 벌였다. 1993년11월엔 치명자산 유항검 가족 7인묘 시굴을 주관했다. 1995년5월 봄날에 ‘전동 성당 100년사’를 책으로 내놓았다. 교구사 연구 20년의 결실인 ‘전주교구사’를 순교자 축일인 1998년9월20일에 맞춰 그들 무덤과 제대에 제물로 바쳤다. 2006년에 또 다른 걸음을 내쳤다. 고려대 조광 교수와 전주대 변주승 교수 등과 교감하며 사단법인 한국고전문화연구원을 연구소 옆에 냈다. 큰 시련을 겪으면 사람은 달라진다고들 하지만 턱도 없는 일이다. 김 신부를 두고 하는 얘기다. 범상치 않은 일을 결심했고, 이를 현재도 치러내고 있다. 사료에 기반을 둔 그의 연구는 박해시대 신자들의 믿음과 숨결이 함께 녹아 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신앙 선조들의 믿음을 밝히는 한 사제의 힘이 한국교회사 연구의 물길과 틀을 확실하게 괴여내고 있다.

  • 기획
  • 2011.11.15 23:02

“전북은 한국 천주교 신앙의 주춧돌 놓은 성지”

주한 교황대사가 최근 전북을 방문하고 나서 교계에서 바짝 주목받는 사람이 있다. 교회사발굴과 연구에 일생을 던진 천주교 호남교회사연구소 소장 김진소 신부다. 전북 종교문화유산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2014년 로마교황청의 세계순례대회 개최지로서 전북이 나서게 된 것도 그의 치열한 열정 때문에 가능해졌다. ‘교황 모시기’ 분위기가 달아오르는 지난 7일 완주군 비봉면 천호마을에 살고 있는 김 소장을 찾아갔다. 천호산을 배경으로 천호성지 입구에 자리한 호남교회사연구소에서 이날 오후 2시30분쯤 만났다. 인가받지 못한 상태에서 설립해 28년 동안 고집으로 혼자 이끌어 온 연구소답게 직접 지은 집이다. 문밖 노출을 꺼리는 성품에다 두 차례의 사고와 병환 후유증으로 필담도 어렵다며 사양하던 인터뷰는 처음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농담 한번 없이 주위가 어둑해져서야 끝이 났다. 천주교 교회사에서 전북은 어떤 곳이었냐고 묻는 질문에 그는 “한국 천주교 신앙의 주춧돌을 놓은 교세가 가장 컸던 성지”라고 잘라 말했다. -대학을 공대로 진학했다고 들었습니다. 왜 사제의 길로 바꿨나요.“그래요. 대학에 입학해 토목공학을 전공했죠. 어렵게 성장했기 때문에 돈 벌어 나처럼 힘들게 공부하는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줄까 생각했던 겁니다. 하지만 학교 들어가서 자유당 정권의 정치적 혼란상을 겪으며 교회와 정치현실에 불만이 차올랐어요. 제대 후 1963년12월 성탄절 전날 평생 가야 할 길이 계시됐습니다. 우연히 종소리에 끌려 서울 명동성당에 갔다가 어느 신부의 강론 중 ‘평화’라는 두 마디가 내 영혼까지 흔들어 놓았습니다. 사제가 되어 평화를 위해 대장간 모루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이 길을 결심했어요.” -교회사연구에 파고든 계기가 궁금합니다.“1973년8월 모교인 대건신학대학(현 광주가톨릭대학교)에 교수로 부임하면서 기회가 온 거죠. 대학 측에서 신학의 토착화와 한국교회사 체계를 연구해 달라는 것이었어요.”-원인이 그뿐인가요.“난 역사전공자도 아니었고 토착화를 깊이 생각해보지도 못했어요. 그러나 한국천주교사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은 갖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19세기 말 서세동점(西勢東漸) 시기에 한국 선교를 책임졌던 프랑스 선교사들이 자국 이익을 위해 프랑스제국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들의 순교자적 수고는 그렇더라도 그런 외국인의 복음 해석이 한국인의 감정으로 가능했을까요. 일하던 대학도 예수회 미국인 신부들이 운영해온 터라 외국어 강의를 사람들이 얼마나 강의내용을 이해하고 신자들에게 제대로 강론을 펼 수 있겠어요.”-교회사도 그들 손에 쓰여졌겠어요.“당시 한국교회사 연구는 일천했지요. 놀랍게도 천주교를 알 수 있는 것은 고작 프랑스 신부들이 기록한 한국천주교회사가 전부였어요. 궁리 끝에 순교자의 후손은 물론 박해를 겪은 신자 후손들을 찾아 사료 답사에 나섰습니다. 전국 산골 교우촌을 돌아다니며 자료들을 모아냈죠.”십수년 동안 진행된 사료 수집과 역사의 현장답사에는 새 신발 두 켤레가 해어지고, 배낭 메고 산골을 헤매다가 종종 간첩으로 몰려 곤혹을 치렀다는 얘기들이 이어졌다. -그때쯤 연구소가 필요했겠네요.“교회사연구는 서울교구 한국교회사연구소 한 군데뿐이었죠. 지방역사는 그 지방을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이 책임져야 합니다. 지방에도 지역 교회사를 맡아야 할 연구소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1983년5월 호남교회사연구소가 탄생된 배경이에요. 천주교 역사는 전북문화의 하나로서도 매우 중요합니다.”-천호성지는 어떤 곳입니까.“천호산에는 1866년(고종 3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이명서 손선지 정문호 한재권 등 4인이 묻혀 있어요. 1984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한국천주교 200주년 기념 신앙대회와 한국 성인 시성식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시성(諡??죽은 후 성인품으로 올리는 일)한 분들입니다. 이 분들과 함께 1868년 여산에서 순교한 다른 분들도 묻힌 성지거든요. 호남교회사연구소는 1983년 이곳에서 순교자 유해 12위를 발굴했어요. 그러나 천호성지는 이처럼 예수와 관련된 거룩한 땅이 아니라서 성지(聖地)가 아닌 순교 현장이나 순교자 묘지의 거룩한 터로 쓰이는 성지(聖址)로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최석우 신부와 결정했습니다.”-유항검 일가의 순교는 어떻게 일어났나요.“호남지역에서는 1801년 신유박해로 전국 희생자의 두 배가 넘는 200여명이 목숨을 바치거나 빼앗겼습니다. 그 가운데 전라도에 최초로 천주신앙을 받아들인 유항검이 대역부도(大逆不道)죄로 1801년9월 전주 전동성당 터에서 동생 유관검과 함께 처형됐어요. 10월에는 연좌형으로 동정생활을 했던 큰 아들 유중철과 둘째 아들 유문철이 전주 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고요. 12월에는 그의 부인 신희와 큰 며느리 이순이, 그리고 유관검의 부인과 아들이 전주 숲정이 성당에서 참수형을 받았던 거죠. 유항검은 넉넉했던 재산을 조정에 몰수당하고 김제군 용지면 남정리 바우백이에 버려지듯 묻혔다가 전동 성당을 세운 프랑스인 보두네 신부 등의 도움으로 일가족과 치명자산의 현재 장소에 안장됐습니다.” 유항검의 이종사촌인 윤지충은 한국 최초의 천주교 박해 사건인 1791년 신해박해로 전주 전동성당 터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전북에서 첫 순교자를 배출한 것이다.-다른 얘기를 하죠.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가 일본 이등박문을 처단한 거사의 밑바탕에는 천주교의 종교적 힘이 깔려 있다고 하던데요. “안 의사는 1897년 1월 온 가족과 천주교 세례를 받았어요. 고향인 황해도 청계동에서 1905년까지 본당신부의 사무장과 교리교사로 봉사활동을 하는 등 독실한 신자였지요. 국채보상운동 등에 투신하고, 1908년부터 의병전투에도 참가했습니다. 평소 ‘동양평화론’을 주창해 오던 참에 동양 여러 나라가 동맹 평화를 이루는데 가장 걸림돌이 이등박문이라고 단정해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사살한 것 아닙니까. 분명 천주교인의 의식이 작용했다고 봐야지요.” -그 의거를 가톨릭계는 부정적으로 해석하지 않았나요. “천주교 십계명의 하나인 ‘살인하지 말라’는 대목에 반한 것으로 본 거예요. 독립군 중장의 자격으로 적을 저격하였지만 그걸 인정하지 않고 ‘살인자’로 단죄했던 겁니다. 일제시대가 끝나고 수십년이 흘렀어도 의거는 인정하면서도 제도교회는 그 죄명은 벗겨 주지 않았습니다.”-같은 신부로서 어떻게 보셨나요.“분노할 노릇이죠. 그래서 내가 1986년부터 3회에 걸쳐 한국천주교회가 일제치하에서 저지른 친일행위와 반민족적 태도를 지적한 논문을 발표했어요. 두 가지 제안을 내놓았지요. 한국교회 주교단은 안 의사의 살인자 누명을 벗겨 주고 민족 앞에 사과하라는 요청과 한국천주교회가 공식적으로 공경하는 ‘가경자(可敬者)’로 모시는 운동을 제안했습니다. 특별한 공경을 표시할 필요가 있다고 본 겁니다.”김 소장은 한국교회사연구소가 1993년8월 서울 혜화동 가톨릭 신학권 강당에서 열린 안중근 의사 기념 학술 심포지엄에 논평자로 참석해 김수환 전 추기경을 만났다. 김 추기경은 “교회 대표자로서 사과하라면 그렇게 할 것”이라고 밝힌 것으로 전했다. 한국천주교회의 수장이 처음으로 과거 교회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안 의사의 살인죄 죄목을 벗겨 준 것이다. -우리는 신앙선조들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선조들은 이 세상에 절대적인 가치를 두지 않았습니다. 세상이건 생명이건 하느님이 맡겨 주신 것, 보관하신 것을 빌려 쓰는 것으로 여겼던 거죠. 이웃과 사회에 많은 재물을 나눠주고서도 자랑은커녕 묻는 것을 부끄러워했지요. 세상 어느 것에도 목 매달리는 일이 없었어요.” -천주교 문화유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과제가 됐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건축물의 가격이나 규모보다 역사적 가치가 중요시 된다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박해를 경험한 사람들의 손으로 이루어진 유산이며, 한국천주교만이 살았던 독특한 관습을 그 안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죠. 여기에다 한국 고유의 정신성이 강화되어야 합니다. 문화적 가치는 신앙 정신이 앞서야 높아집니다. 건물이 담고 있는 정신성이나 사상성이 강화된다면 세계인의 마음을 움직일 것으로 생각해요.”-전북이 2014년 로마교황청의 세계순례대회 개최지 유치에 나섰습니다. “세계 순례대회는 천주교 성지가 그 대상입니다. 전라도는 신흥종교들의 고향이죠. 2009년 순례길 계획 과정에서 이런 상황을 감안해 동서종교가 상생의 차원에서 손을 잡고 진리의 여정을 걸어야 한다고 제안했지요. 천주교 측이 ‘아름다운 순례길’을 개신교, 불교, 원불교, 증산교 등과 아울러 진행하고 있는 건 세계 유래가 없습니다. 교황청에서도 전북이 추진하고 있는 순례문화를 특이하게 여기고 관심을 가질 거예요. 한국천주교회는 125명의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을 추진하고 있어요. 교황이 한국을 방문하여 시복시성식을 거행하고 그 연장으로 세계순례대회도 갖고 싶어 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떤 신부로 남고 싶습니까.“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해요. 무얼 하든지 최선을 다해온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 기획
  • 최동성
  • 2011.11.15 23:02

● 성남훈 작가는

성남훈은 연극배우 출신이다. 진안에서 태어난 그는 미술을 좋아했지만 공무원인 아버지의 뜻에 따라 전주상고를 나와 전주대 경영학과에 들어갔다. 그러나 학과 공부에는 워낙 취미가 없었고 대학극단 ‘볏단’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소질을 발견했다. 스스로 경영학과 대신 ‘동아리과’ 출신이라고 말할 정도로 학과생활에 불성실했던 그는 졸업 후 전주의 극단 황토에서 배우로 활동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걸걸하고 활달한 성격이어서 극단 생활에 불만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존재감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그 때 만난 것이 사진이다. 무작정 유학을 생각해냈으나 선택의 폭은 넓지 않았다. 같은 극단에서 활동했던 후배들이 프랑스에 유학중이어서 그도 프랑스를 택했다. 준비기간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했지만 집에서 짓던 인삼농사가 딱 그 해에 목돈을 낼 수 있어 강행했다. 89년이었다. 6개월간은 어학코스를 밟았고, 이듬해에 프랑스 파리 사진대학 ‘이타르 포토(Icart Photo)’에 들어갔다. 재학 중이던 92년에 ‘루마니아 집시’로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의 ‘르 살롱’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르 살롱’ 수상은 사진의 방향과 길을 결정지어준 계기가 되었다. 그는 그때까지만 해도 패션 같은 상업사진을 병행했었지만 수상 이후로 상업사진은 담을 쌓았다. 졸업한 이듬해인 94년에는 다큐멘터리 집단인 사진에이전시 ‘라포’ 소속 사진가가 됐다. 99년에는 인도네시아 민주화 과정을 취재한 사진으로 ‘월드프레스포토(WPP)’에서 수상했으며 2009년, 같은 공모전에서 두 번째 수상했다. 프랑스로 건너간 초기에는 존재감에 대한 물음이 가슴을 짓눌러‘내가 과연 사진을 통해 무엇인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존재인??고민하며 갈등을 겪었다. 패배의식과 콤플렉스가 그만큼 깊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라포의 작가로 활동하면서 자신감을 찾았다. 카메라 렌즈로 세상과 마주하면서 의식도 변했다. 치열했던 한국사회의 80년대, 사회적 상황을 외면하고 비켜 다닌 죄책감이 컸다. 근래 작업은 그 빚에 대한 치열한 화답이다. 그는 얼마 전 남원 인월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서울과 남원을 오가며 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새로운 일을 구상 중이다. 다큐멘터리 사진가로서 그는 사회와 함께 호흡하며 소통의 장으로서 기여할 수 있는 사회적 책무를 고민하고 있다. 사진을 통해 세상을 보는 관점과 의식을 깨우친 그의 작업이 주목되는 이유다.

  • 기획
  • 김은정
  • 2011.11.08 23:02

“가치관 안에서 이념상 추구…사회적 책무 지켜나갈 것”

아직도 생생하다. 피난길의 한 소녀가 금세라도 눈물 터뜨릴 것 같은 까만 눈망울로 응시하던 그 사진을 보았을 때의 감동이. 그 밑에 작가 이름이 쓰여 있었다. 성남훈. 90년대 중반, 그 이름은 낯설기 만한 세계의 분쟁 지역 난민들을 담아낸 흑백 사진들로 한국의 관객들과 만났다. 그리고 지금 성남훈(48)씨는 우리나라의 몇 안 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이면서 한국인 최초로 ‘세계보도사진’(wpp)을 두 번이나 수상한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다. 세계보도사진은 56년 역사를 가진 포토저널리즘의 가장 권위 있는 상이다. 1년에 한번 세계의 보도사진 기자들과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들은 이 의미 있는 상의 수상자 반열에 오르기 위해 나선다. 성남훈은 이미 99년에 일상뉴스 부문에서 수상했고, 지난 2009년 다시 인물사진 부문에서 수상했다. 이번 수상작은 중국의 간쯔현 아추가르 불교학교에서 배우고 수도하는 비구니를 찍은 사진이다. 분쟁지역의 난민들을 통해 역사의 이면에서 소외당한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주목해온 그가 <연화지정(蓮花之井)>이란 주제로 작업한 연작의 결실이다. 그는 다시 ‘환경’을 주제로 우리 삶의 공간과 의식의 저변을 훑기 시작했다. 이미 적지 않는 작품들이 우리의 의식을 깨우고 있다. “한국에 들어와 머무르는 시간이 많아지니 다큐 사진가로서의 사회적 책무를 생각하게 되었다”는 그는 격동의 80년대를 치열하게 살지 못했던 마음 빚을 갚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말 그는 전주의 시민단체가 요청한 강연에 기꺼이 달려왔다. 이어지는 프로젝트 참여로 바쁜 일상이지만 ‘진안 촌놈’을 고향에서 불러준 것만도 영광이라며 활짝 웃었다. -여전히 전사 같은 차림이시군요.(웃음) 90년대 초반 ‘루마니아 난민’을 주제로 한 전시회를 봤습니다. 그 후로도 매체를 통해 강렬한 이미지의 사진을 보게 되었는데, 그것이‘유민의 땅‘이란 프로젝트의 연작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지요. 그 작업을 꽤 오랫동안 해오셨지요.“90년부터 2005년까지 했으니까 15년 작업입니다. 일단 마무리 했지만 끝났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전쟁과 기아, 자연재해로 신음하는 현장이 아직도 세계 도처에서 이어지고 있으니까요.”-사진집으로도 나온 ‘유민의 땅’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습니까. “프랑스에서 사진 공부를 하던 90년대 초반, 파리 근교에서 루마니아 난민들을 만났습니다. 파리에서 제가 살고 있던 랭스로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밤에 기차 창밖으로 매우 생경한 풍경을 보게 되었어요. 호기심에 이끌려 그들을 찾아갔지요. 80년대 말 루마니아의 사회주의가 붕괴된 이후 파리로 온 난민들이었습니다. 자기 땅에서 내몰려 집시가 되어 떠도는 그들은 고단한 삶을 살고 있었지만 돈을 모아 고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꿈과 희망을 잃지 않았어요. 저에게는 큰 충격이자 감동이었습니다. 이방인으로서의 어떤 동질감 같은 것도 있었지요.”-세계의 분쟁 지역에 눈을 돌린 것도 그때부터인가요.“그렇습니다. 루마니아 집시들을 만나면서 국가 간 민족 간 분쟁과 그로부터 소외되는 사람들의 고통에 눈을 뜨게 되었어요.‘유민’이라는 화두가 제 가슴에 들어온 겁니다.”-본격적인 다큐멘터리 사진가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경험이 거기서부터 시작되었군요. “그런 셈입니다. 그 뒤 운 좋게 사진에이전시인 ‘라포(Rapho)’에 들어가면서 저의 관점과 의식이 더 확장될 수 있었지요. 운이 좋았습니다.” -‘라포’이야기가 나왔으니 성공기가 궁금한데요.‘라포’는 ‘파리의 키스’로 널리 알려진 로베르 두아노 같은 세계적 사진가들이 속해 있는 유럽의 대표적인 사진에이전시인데 입성이 만만치 않았을 것 같습니다.“사진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라포’에 들어가는 일이 큰 꿈이었죠. 마침 제가 다녔던 ‘이카르 포토’에는 라포 회원들이 강의를 나왔었는데, 제 작업을 눈여겨 보아주었습니다. 그러나 정원이 정해져 있어 일단 자리 나기가 어려웠는데 로베르 두아노가 작고하면서 자리가 났어요. 그때 마침 저는 한국에 들어와 전시했던 루마니아 난민들과 소록도, 또 다른 이민자 이야기 등 3개 주제의 작업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라포 회원들이 권해서 포트폴리오를 냈는데 줄곧 제 작업에 냉랭하기만 했던 라포 디렉터가 그 포트폴리오를 보더니 ‘내일 니 문서를 설명할 수 있는 실력 있는 통역자와 함께 오라’고 하더군요. 사인을 해야 한다며. 라포의 회원이 된 겁니다.”-그때 심경이 어떻셨나요. “정말 세상이 다 끝난 줄 알았습니다. 이제 가고 싶은 곳, 찍고 싶은 것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희열감에 얼마나 벅차던지. 사인을 하고나서는 파리 시내까지 걸어오는 30분 내내 공중을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은 바로 달라졌어요. 딱 6개월 잘되더군요. 선배들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꿈같은 시간이 지나니 현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때마침 경기도 안 좋아져서 사진 판매도 저조하고. 다시 갈등에 빠지게 되었지요.”-일종의 돌출구가 필요하셨겠습니다. 그때쯤 한국에 들어오시지 않았나요. “그때 큰 실험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두 개의 시장을 개척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프랑스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권역이었죠. 그래서 한국에 들어와 머무는 시간을 늘렸습니다. 그러다가 97년쯤 결혼을 하려고 한국에 들어왔는데, 라포에서 연락이 왔어요. 아시아가 심상치 않으니 아예 그쪽에 남아 아시아권을 맡으라는 것이었죠. 저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졌던 셈입니다.”-남들은 한 번도 잡기 어려운 기회를 여러 번 잡으셨군요. 오늘이 있기까지 극적인 상황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연극배우에서 사진가로 길을 바꾸었던 것도 그렇고요. “연극도 열심히 했었습니다. 진안 촌놈이 어찌어찌하다가 경영학과를 들어갔는데 영 흥미가 없었어요. 예술에 대한 갈망은 크고. 그러다가 대학 극단을 들어갔는데 숨통이 트이더군요. 졸업 후에는 선택의 여지없이 기성 극단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다가 사진을 공부하고 싶어 유학을 떠나게 되었지요.”-국내에서도 사진 공부를 할 수 있는 길이 있지 않았습니까. “일단 나를 둘러싸고 있는 여건을 극복하고 싶었어요. 대한민국에서는 나이 열아홉살이면 인생의 50%가 결정되어버리지 않습니까. 어느 지역 출신에 어느 대학이냐에 따라 서열이 정해지죠. 더구나 저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보면 자신감이 없었어요. 존재감도 없는 것 같고. 나란 존재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늘 고민했습니다. 연극하는 선배들과 협업 하면서 자아를 발견하기도 했지만 학연 지연으로 엮어지는 한국사회의 견고한 구조 안에서는 성장의 한계가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다시 작품 이야기를 좀 해보죠. 유민의 땅 이후에 새로 잡은 주제가 궁금합니다. “유민의 땅을 끝내는 시점에서 뒤돌아보니 벅찬 부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열정과 의욕이 앞서 있어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더 크게 다가오더군요. 저의 담론이 개인적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것이 아니었었나 싶어요. 그러면서도 감사한 일은 개인적으로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조금 더 밀착해서 볼 수 있는 것들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환경과 관련된 것들이죠. 2006년부터 시작했는데, 가능하면 이 작업은 개인적으로 성취해나가기 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 집단의 화두로 풀어나가는 작업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환경문제는 갈수록 예측하기 어려운 대상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큐멘터리 사진과 같은 기록의 역할이 더 큰 것 아닐까 싶습니다.“바로 그 점입니다. 사실 핵 같이 인간이 만들어낸 것들은 예측이 가능하지만 자연 재앙과 같은 것들은 전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환경 문제는 단순히 찍어서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류학적 인문학적 관점을 어떻게 조합하고 어떤 담론으로 전개해갈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공동의 과제로 삼아야 하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지금까지 찍어온 사진들을 보면 시대적 역사의 기록이나 사회적 발언의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는데, 다큐의 특성을 고려한다 해도 개인의 철학이나 가치관이 맞닿아 있어야 가능한 작업 아니겠습니까. “제게는 시대적 빚이 있습니다. 제가 81학번인데요. 당시 한국사회의 정치적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습니까. 그런데 저는 극단에서 활동하면서도 사회참여에는 관심이 별로 없었거든요. 기성극단에 들어가서도 사회변혁운동으로부터 벗어나있었죠. 연극 한다는 핑계로 잘 비켜 다녔던 셈입니다. 그런데 프랑스에서 카메라의 렌즈를 세상에 대고 보니 그것이 아니었어요. 유학생활을 시작한 80년대 말 90년대 초에 동유럽이 무너지면서 격동의 시대를 맞게 되었고요. 카메라를 메고 보니 이제는 결코 비켜갈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어요. 내 나라에서 먼저 껴안았어야 할 사회적 책무가 더 뜨겁게 와 닿았습니다. 세계 도처의 분쟁지역을 찾아 나선 것도 이런 마음의 빚이 강하게 작용했을 겁니다.”-그런데 분쟁지역에서 담아온 사진들을 보면 전쟁의 현장에서 만나게 되는 그 처절하고 치열한 상처의 흔적 보다 소외와 차별 같은 휴머니즘의 이미지가 더 강하게 와 닿습니다.“그럴 겁니다. 제 경우는 루마니아 집시들을 만나면서 사진의 시각적인 것을 익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을 보는 인문적 사회적 관점을 키울 수 있었거든요. 역사의 전면이 아니라 그 이면에 더 주목하게 하는 그런 의식이 싹튼 겁니다. 그래서인지 전쟁터에서도 저는 그 사회 안에서 다시 소외받는 계층과 여성, 어린아이들을 주목하게 되더군요.”-치열하고 처절한 분쟁지역의 난민들을 찾아다녔던 지금까지의 작업이 한국과 아시아권으로 옮겨온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 한국사회 역시 정치적 사회적 치열한 현장이 시시각각 도처에서 이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앞으로의 작업이 궁금합니다.“실제로 틀이 크게 바뀌지는 않을 겁니다. 한국에서의 작업 역시 지금까지 견지해온 제 가치관과 철학의 틀 안에서 발현될 것이고 그 바탕은 휴머니즘에 있습니다. 사회적 욕망과 개인적 욕망이 부딪치는 경계의 풍경을 주목하고 싶습니다. 일전에 광화문에서 있었던 어떤 종교집단의 행사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도저히 상식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그런 풍경이지만 그런 행위가 어떤 사회적 문제를 가져올 것인지는 알죠. 사고의 폭력성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지, 한 사회의 발전을 거꾸로 돌려놓는지를 많은 사람들이 인식 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제 사진이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노숙자나 도시의 개발 현장의 풍경들을 담는 작업도 같은 연상에 있겠지요.“물론입니다. 한국사회가 소비사회로 들어가면서 그 안의 강력한 구조 안에서 우리는 편리라는 형태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만 자본 같은 거대한 권력에 묶이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 거대 권력이 행사하는 암묵적 폭력을 담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의 삶과 직결된 문제니까요.”-그동안의 작품 활동만으로도 이미 정치적 사회적 변혁 운동의 중심에서 역할을 하고 있는데요. 한국사회에서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살아간다는 것의 사회적 책무로 받아들여도 좋을까요. “가끔씩 제 작업을 놓고 혹시 가치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이념으로 판단하는 것은 아닌가 들여다 보게 됩니다. 고백하건대 지금은 오히려 이념에 많이 빠져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가치의 기준도 달라지니까요. 내 가치관과 철학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고 이념상으로도 추구하는 그런 작업이 최선의 선택입니다. 그것이 사회적 책무라면 더 흔들림 없이 해나가야죠.”

  • 기획
  • 김은정
  • 2011.11.08 23:02

박승 전 총재는

가난했던 시절 대학교수가 되는 게 꿈이었고 그 꿈을 이룬 뒤 대통령 경제수석(1988년)과 건설부장관(89년), 한국은행 총재(2002년) 등 학계와 관계, 금융계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우리나라 경제계의 큰 별이 됐다. 유지경성(有志竟成). 이루고자 하는 뜻이 있으면 반드시 성공한다는 고사성어는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다. 누구한테나 일생에 세번쯤 기회가 온다고 했던가. 박 전 총재한테도 세번의 기회가 있었다. 서울대 상대에 진학한 것이 첫번째이고 한국은행에 입행한 것이 두번째, 미국 유학이 세번째 기회였다. 한국은행 근무 시절 학술연수생으로 선발돼 뉴욕주립대에서 경제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교수(중앙대 경제학과76년)의 꿈을 이루는 전환점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경제학 교수가 되고 싶어했고 후진국 경제발전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아마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러 권의 책을 냈지만 역저를 꼽으라면 경제발전론이다. 두차례 개정판이 나와 지금도 대학에서 교재로 활용되고 있다. 오늘의 그를 있게 한 키워드는 고난이다. 고난은 당장은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큰 길과 기회를 제공한다고 회고록에서 썼다. 한국일보에 기고한 연재물(2009.72010.11) 제목도 고난 속에 큰 기회 있다였다. 어려웠던 시절 그는 하늘을 보고 별을 보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다짐하면서 자신을 추스렸다. 그래서 회고록 제목도 하늘을 보고 별을 보고로 정했다.어릴 때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계속해 온 것이 두가지 있는데 하나는 일기 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맨손체조 하는 것이다. 방대한 분량의 회고록을 쓰는 데도 일기가 결정적인 자료가 됐다. 경제전문가이자 한국경제발전의 산증인이지만, 삶의 궤적과 철학을 들여다보면 그는 꼭 이 시대의 선비라는 생각이 든다. 카리스마 넘치는 열강,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성품, 자신과 가족한테 엄격하지만 이웃에게는 따뜻한 성품,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마음가짐 등이 그런 일면이다. 한국은행 총재 시절 연봉의 20%를 떼내 고향 김제의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 학교지역, 소년원 등 복지시설에 보탰다. 드러내지 않고 지금도 남을 돕고 있다. 건설부장관 7개월 재직중 공식적인 대외활동비로는 턱 없이 부족해 2000여만 원을 사비로 충당했다. 남한테 손 벌리지 않은 탓이다. 사후에 장기기증 하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나이가 많아 안구만 가능하다고 해서 서울대병원에 안구기증을 등록해 놓았다. 서울대 상대 동기 모임(350여명) 때 아반떼를 타고 갔더니 동기생들이 쇼크 먹었다는 일화도 있다. 성공했다, 잘 나갔다던 사람이 소형 승용차를 타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지금도 대통령 자문 국민원로회의 때 자가운전으로 청와대를 들어가는 위원은 박 총재가 유일하다고 한다.부인 권영하여사는 두살 아래다. 익산 양조장 집 딸로 이화여대 국문과를 나왔다. 당시 김제군 백구면 제내리에서 이리공고로 기차통학을 할 때 수도 없이 오갔던 그 집 딸이지만 당시엔 부부인연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슬하에 2남3녀를 두었다. 두 아들은 각각 KDI정책대학원 교수와 삼성경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이고 사위들은 강원대 교수와 (주)유니레버 상무, 포항공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 기획
  • 이경재
  • 2011.11.01 23:02

“‘빈곤화 성장’ 큰 문제…정부, 강력한 재분배정책 펴야”

-요즘처럼 경제가 어려우면 더욱 바쁘실 것 같은데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합니다.“여행도 하고 글도 쓰고…. 인터뷰나 강의요청도 있어 바빠요. 행사도 많고.”-경제문제를 먼저 꺼내야 할 것 같습니다. 모두들 살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어디에 문제가 있는 걸까요.“국가경제는 성장하지만 대부분의 국민은 더 어렵게 되는 ‘빈곤화 성장’이 문제입니다. 자유 경쟁 개방 등 신자유주의 질서의 역기능이지요. 성장의 과실이 승자독식되고 그 결과 양극화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겁니다.”-MB(이명박 대통령) 정부는 서민경제를 내세우지만 역설적으로 서민고통이 더 큽니다. “출범 초 친기업, 부자감세 정책을 내놨지만 이건 서민경제를 악화시키는 역주행이었습니다. 뒤늦게 친서민 정책을 내걸고 부자감세도 철회했지만 서민민생고는 더 깊어지고 있어요.”-왜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 보십니까.“MB의 개혁의지 부족 때문이지요. 부자와 대기업 등 기득권 세력의 저항을 극복하지 못한 결과라고 봅니다.”-MB 정부의 경제정책 중 가장 큰 문제점은 어떤 점일까요.“기업식으로 하면 국가도 잘 경영될 것으로 본 것 같은데 잘못된 판단입니다. 기업은 잘못하면 퇴출시키고 잘 되는 부문만 끌고 가면 되는데 국가는 그렇게 할 수 없지요. 공항에 기업인을 위한 귀빈실 만들고 친기업정책 펴면서 세금 깎아주면 잘 될 걸로 알았지만 기업들은 투자하지 않고 경제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경제정책들은 갈팡질팡했지요.”-참여정부도 ‘친 서민정책’을 폈는데 결과는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총재께서는 ‘노무현의 역설’로 표현하셨던데 무슨 의미입니까.“노무현 대통령은 늘 약자를 배려했고 정책도 서민 위주로 수립하도록 주문했습니다. 그러나 노 대통령 재임 시절 실제 혜택을 본 사람은 부유층이었고 서민대중의 삶은 더 어려워졌습니다. 말하자면 배를 서쪽으로 저어갔는데 실제 배는 동쪽으로 가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나는 ‘노무현의 역설’이라고 부릅니다.” -‘노무현의 역설’의 원인이 뭘까요.“집값폭등, 양극화현상 두가지입니다. 노 대통령은 부동산 값 상승과 관련해서는 최강도 대책을 주문했습니다. 그래서 집값 안정효과는 임기말에 나타나기 시작해서 그 혜택은 MB정권이 누리고 있습니다. 집값상승보다 서민생활을 더 어렵게 한 것은 경쟁우위 부문인 대기업과 열위부문인 중소기업, 자영업, 농업과의 양극화현상이었습니다. 재임 5년간 대기업은 연평균 4.4%씩 성장했지만 중소기업, 자영업, 농업은 위축되고 실업자는 늘어나고 빈부격차는 커져서 서민들 먹고 살기가 더 어렵게 된 것이지요.”-양극화 현상은 사회통합과 경제발전의 걸림돌입니다. 우리사회가 풀어야 할 숙제인데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만일 정부가 강력한 의지를 갖고 대응하지 않으면 더 어려워질 것입니다. 자유 경쟁 개방의 시장주의는 생산과 수출증대에는 효과적이지만 분배문제에는 역행합니다. 파이가 특정 계층에게 돌아가고 국민 대부분은 빈곤해지는 게 문제입니다. 이를 극복하려면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재분배 정책을 펴야 합니다. 시장주의는 지켜가지만 분배문제 만큼은 시장에 맡기지 말자는 겁니다.”-재분배 정책을 하려면 많은 재원이 관건인데요. “‘사회복지세’를 신설하자는 겁니다. 빈부격차의 주범이 자산에 있기 때문에 개인에게는 자산(금융자산과 부동산)을 기준으로 세금을 부과하고, 법인에게는 기업소득(이윤)에 일정 비율을 세금으로 떼낸다면 연간 20조~30조원의 재원이 마련되는데 이 돈은 결국 부유층과 대기업이 부담하는 돈입니다. 이 돈으로 반값 등록금과 실업자 최저 생활비, 최저생계를 하면서도 정부한테 한푼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쓰자는 겁니다.” -정동영 의원이 주장하는 부유세와는 어떻게 다른가요.“부유세는 부자한테만 세금을 부과하고 부자를 미워하는 느낌이 들어 있습니다. 반면 사회복지세는 중산층을 포함해서 먹고 살만한 계층이 세금을 조금씩 더 내고, 대기업도 이윤의 일정액을 세금으로 내기 때문에 개념이 다르죠. 어려운 계층을 돕는다는 명분이 있어 가능합니다.”-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퓨전이군요.“공동체 자본주의로 가자는 거지요. 국민의 기본수요인 교육, 의료, 생존의 문제 만큼은 빈부 격차 없이 똑같이 누려야 할 덕목 아니겠습니까. 똑같이 책임지고 함께 잘 사는 사회를 만들자는 겁니다.” -한국은행 총재 임기 4년 중 3년을 참여정부에서 지내셨습니다. 경제문제에 관한 노무현 대통령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항상 약자와 서민 편에서 국정을 챙기셨습니다. 특권과 권위의식이 없고 부동산투기에 대해서는 반도덕적, 사회적 죄악이라고 말할 만큼 거부반응을 보였습니다. 중요한 정책회의도 사저에서 상의 벗어 제치고 넥타이 풀고 담배도 권하면서 자유분방하게 했습니다. 소탈한 그런 분위기는 처음 경험했습니다.”-지금 지구촌에서는 ‘월가를 점령하라’는 항의 시위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탐욕스런 금융자본’에 대한 저항인데 정부가 금융자본을 더 견제하고 감시해야하지 않겠습니까. “무질서한 과당경쟁의 대표적인 사례가 금융입니다. 승자독식, 빈익빈부익부가 심화되고 빈곤과 실업이 최고조에 이른 시점에 서민들의 소외감이 폭발한 것이지요. 정책 당국이 깊이 새기지 않으면 자본주의 위기로 치달을 수 있어요. 정부가 강력한 재분배정책을 펴야 합니다.”-이야기를 돌려, 지난 4월 모교인 김제 백석초등학교에 ‘박승 도서관’이 개관됐습니다. 총재께서 5억원을 기부해 성사됐다는 소식이 지역사회에 알려져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만. “내 재산은 자식한테 안 물려준다,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30년 전부터 공언해 왔어요. 그런데 3년 전 폐교 위기에 몰린 모교에서 교장과 교사들이 목공기술과 빵굽는 기술, 예절을 가르치는 등 좋은 학교를 만들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걸 봤습니다. 이에 감명 받아 나도 힘을 보태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지난 4월 22일 개관한 이 도서관은 박 전 총재가 5억원을 기부하자 도교육청이 2억원을 지원해서 지상 2층 규모로 지어졌다. 박 전 총재의 이름을 따 ‘박승 도서관’으로 명명됐다. 1층에는 도서관 및 박 전 총재 기념관, 2층은 3D영화관(80석) 및 연극, 세미나실을 겸비한 문화관으로 꾸며졌다. 3000여권의 장서가 있다. 이영란 교감은 모교에 대한 박 전 총재의 관심이 지대하다며 장학금 등 필요할 때마다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신다고 전했다. -총재님의 좌우명이 선심후물(先心後物)입니다. 기부도 많이 하셔서 ‘노블레스 오블리제’(사회지도층의 도덕적 의무)를 실천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회자됩니다. 선심후물은 어떤 의미가 담겨있나요.“‘물질보다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뜻인데 나는 자식들에게 정신은 남보다 앞서고 물질은 한발 뒤따라가라고 가르쳐 왔어요. TV나 전화, 냉장고도 남보다 늦게 마련했고 자동차도 동료들보다 한단계 낮은 차를 탔어요. 그렇다고 권위가 떨어진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바른 정신은 많을 수록 좋고 물질은 많을 수록 조심해야 합니다.” -대학시절 서울을 오가면서 농사를 지으며 공부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동력이 작용한 걸까요. “가난 때문에 다른 길이 없었어요. 아버님은 중풍으로 누워 계시고 어머님은 연로해서 노동능력이 없었지요. 직접 농사(논 2000여평, 밭 500여평)를 지어 등록금을 마련해야 했어요. 등록만 하고 내려와 농사를 짓다 시험 때가 되면 친구 노트를 빌려 공부하고 시험을 쳤어요. 집에 내려올 때에는 책을 한아름 도서관에서 빌려와 주경야독을 했습니다. 3학년 1학기까지 그런 생활을 했는데 자각은 더 깊어졌고 의지는 더 강해졌던 것 같습니다. 4학년 때는 서울대 상대를 대표하는 학생으로 뽑혔으니까.”당시 여동생은 오빠가 이런 변칙적인 대학생활을 하자 ‘서울대생들은 모두 시험 때만 학교에 가는 줄로 생각했다’고 박 전 총재는 회고록에 적고 있다. 푸른 벼라는 뜻의 청도(靑稻)를 호로 지은 것도 농사짓던 때 농민들의 땀냄새와 흙냄새, 푸른 벼 냄새를 잊지 못했기 때문이다.-얼마전 회고록 ‘하늘을 보고 별을 보고’를 출간하셨습니다. 가난한 농사꾼에서 한국경제를 책임지는 인물로 성장하기까지의 역사와 여러 경제 사회현안에 대한 이야기가 기술돼 있더군요. 보람 있었던 일, 아쉬웠던 기억이 있다면. “일산 분당 등 5대 신도시를 건설한 것과 한은총재 시절 한은법을 개정해서 독립성을 강화한 것이 보람으로 남아요. 반면 화폐개혁이 무산된 것은 아쉬워요. 화폐단위의 인플레 현상이 심각해서 1000원을 1환으로, 대미 환율도 1대1로 하는 개혁안을 마련했지만 무산됐어요.” -1988년 노태우 정부 때부터 참여정부에 이르기까지 경제정책을 입안하고 결정하는 등 한국경제발전사(史)의 산 증인이신데 지근거리에서 본 역대 대통령은 어떠했습니까.“전두환 대통령은 호남형, 보스기질이 있지만 국정철학이 빈곤했고, 노태우 대통령은 군인이었지만 문학소년처럼 다정다감했어요. 김영삼 대통령은 우직한 결단력이있지만 지도자로서 허점이 많은 분이고, 김대중 대통령은 역사의식이 투철하고 명석한 머리를 가지셨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반권위적, 친서민적이었지만 지도자로서 세련미가 좀 떨어지는 분으로 비쳤습니다.” -화제를 전북 문제로 돌려 볼까요. 밖에서 본 전북은 어떤 곳, 어떤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까.“조용한 곳, 농사짓는 곳, 소외된 곳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지요.”-전북은 예나 지금이나 인구는 빠져나가고 국내총생산은 16개 시·도 중 꼴찌 수준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동안 산업화 정책이 경부축에 집중됐고 정치적으로도 오랫동안 소외됐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또 지정학적 조건에서도 산업화하기에 부족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당 대표, 국회의장, 대통령후보, 장관 등 인물도 많았고 호남정권도 탄생시켰습니다. 그런데도 달라진 건 없지 않습니까.“인물은 많았지만 지도세력으로서 세력화하는 데에는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에 관심은 없었나요.“여러번 기회가 있었지만 사양했어요. 젊었을 때부터 평생 정치는 하지 않겠다는 것이 소신이었습니다. 나는 성격상 정치가 맞지 않아요.”-지역이 발전하려면 어떤 점이 보완돼야 할까요. 대안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전북이 실망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어느 나라나 산업화 과정에서 공장 많은 곳이 잘 살았어요. 그러나 앞으로는 돈은 공장지대에서 벌고, 소비는 환경이 좋은 곳에서 할 것입니다. 돈 버는 곳과 쓰는 곳이 분리된다는 얘기지요. 자연환경과 사회질서, 민심이 아름다운 곳이 경쟁력이 있는 시대가 옵니다. 살기 좋은 환경, 문화발전, 공공질서 있는 곳이어야 희망이 있습니다. 전북이 그렇게 되도록 잘 가꿔가야 합니다.”-그에 덧붙여 도민들에게 당부하실 말씀이 있다면.“자녀교육 잘 시켜 달라고 당부하고 싶습니다. 가난 벗어나는 좋은 방법이 교육이지요. 전북은 침체돼 있지만 2세들을 잘 가르쳐 훌륭한 인물로 만들면 그들이 전북을 일으켜 세울 것입니다. 또 하나는 공동체 의식을 가져 달라는 것입니다. 나만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해선 안 됩니다. 공동체 의식을 갖고 지역발전을 위해 힘을 합하면 막강한 힘이 발휘되고 20~50년 뒤 전북은 가장 잘 사는 지역으로 발돋움할 것입니다.”

  • 기획
  • 이경재
  • 2011.11.01 23:02

김삼룡 前 총재는

김삼룡 전 전북애향운동본부 총재는 따라붙는 애칭이 많다. 대학 총장, 향토사학가, 애향운동가 등 수식어가 유난하다. "무엇으로 불리우고 싶냐"는 물음에 "그때그때 상황에 맡게 불러주면 된다"고 말한다. 그만큼 어느 한 분야에 치우치지 않고 최선과 열정을 쏟아온 인생역정의 배려였다.1925년 정읍시 북면 화해리에서 3남3녀 중 3남으로 태어나 할머니의 선업(善業)으로 오늘의 위치에 이르게 됐다. 원불교 교조인 소태산대종사(박중빈. 1891~1943)와 후계 종법사 정산종사(송규. 1900~1962)의 운명적인 첫 만남이 할머니 당대의 집에서 이뤄진 것이다. 그 인연으로 14세에 익산 중앙총부로 출가했으며, 그 5년만에 대종사가 열반에 드는 슬픔과 허탈에 빠졌다. 인생의 본질에 눈 뜨는 시기였다.해방 다음해 설립된 유일학림(원광대학교 전신)의 전문부 1기생으로 3년 교육과정을 마치고 군산교당 교무를 거쳐 원광대에 근무하게 된다. 그러나 동국대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그 학교에 전임강사로 돌아온 것은 35세 되던 1959년이었다. 세상일은 수레바퀴처럼 처음은 힘들어도 일단 구르면 탄력이 붙는 걸까. 학생처장 등을 맡으면서 대학면모를 다졌고 1971년 종합대학 승격 후에는 교무처장으로 자리를 옮겼다.1973년은 또 하나의 운명적 선택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초대소장을 맡게 된 것이다. 고고학은 전공이나 강의와 관련이 없었던 비교적 생소한 분야였다. 하지만 지역에는 마한 혹은 백제와 관련된 유적과 이를 뒷받침할 기록, 그리고 다양한 구비설이 남아 관심을 끌었다. 특히 익산이 백제의 수도인가, 미륵사는 이와 관련해 창건되었는지 등은 연구 과제로 내려왔다. 그 과정에 황수영 이병도 전영래 이병기 등 학자들이 뜻을 모았다.무던하게 쫓아다닌 결과 1984년 59세로 일본 쯔꾸바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게 됐다. 그러던 중 박길진 초대학장의 열반으로 1986년 총장직에 올랐다. 하나의 인연이 다음으로 이어지면서 널리 뻗어가는 모양새였다. 그 다음해는 전북애향운동본부 총재를 맡게 된다. 진기풍이존익이치백 부총재와 방영선 사무총장이 오랫동안 함께 일을 꾸렸다. 1990년대에 만든 '애향장학금'의 수혜대상 1호는 서울대 재학생 유성엽(현 국회의원)에게 돌아갔다.고희가 된 1994년 8년간의 총장직을 마감하고, 2003년에 전북애향운동본부 총재직을, 2006년에는 33년간 몸담아 온 마한백제문화연구소장직을 차례로 그만두었다. 국민훈장 동백장과 무궁화장, 전북대상(학술부문), 전라북도 문화상, 전라북도 어른상 등은 이런 일련의 활동 평가다. 파고들었던 일들은 지금 준비하고 있는 자서전에 담아 내년에 발간할 생각이다.

  • 기획
  • 최동성
  • 2011.10.25 23:02

김삼룡 前 전북애향운동본부 총재

김삼룡 전 전북애향운동본부 총재(86)는 취재진을 합장으로 반갑게 맞아주었다. 17일 오후 정원 잔디가 곱게 자란 익산시 소재 원불교중앙총부 원로원에서다.임기 3년의 총재직을 내리 5차례 역임한 지역 원로로서 전북의 비전을 인터뷰 2시간 넘게 가슴으로 풀어냈다. 이따금 유머 섞인 반문 화법이었지만 분위기를 긴장시키는 외유내강의 인상이 남달라 보였다. 세상 모든 일이 인과응보의 진리를 따를 수밖에 없다는 대목에서는 원불교가 모시는 일원상(一圓相)을 바탕으로 설명했다. 전북의 현안인 새만금사업도 도민들의 땀과 눈물로 엮어낸 만큼 지역의 미래상으로 내다본 것이다. 문화적 자존심을 세우는 데도 배수진이 없었다. 익산 백제문화 연구의 산증인이다.그 힘은 어데서 나오는 걸까. "내 평생 여러 가지 일을 해왔으나 원불교에 몸담았기 때문에 그런 기회가 온 거죠. 그게 고마운 거지." 교단의 최고 지도자급인 종사(宗師)로서 신앙 정신으로 철저히 무장된 생활이 지역과 함께 하는 시작과 끝이 없는 연속의 길이었다.-애향운동본부를 오랫동안 이끌어 오셨습니다. 못다 한 일이 있습니까."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애향운동본부의 설립목표는 이름 그대로 애향인거죠. 애향이란 게 어디 마디가 있나요. 그래서 현재 진행형으로 봐주시면 됩니다."-도민들의 애향의식은 어떤가요."돈 벌면 타 지역으로 이사하는 게 문제죠. 고향을 더 발전시키겠다면 그런 행동이 나올 수 없어요. 고소고발 사건도 너무 많아요. 당연히 무고가 난무할 수밖에 없지요. 이런 곳에 지역화합이 가능하겠습니까. 전북이 잘살고 못사는 건 우선 우리 내부에 원인이 있다는 말입니다. 요즘처럼 어려울 때 경제발전도 챙겨야 하겠지만 의식개혁이 매우 중요해요. 전북은 다른 지역에 비해 도세가 비교적 약하기 때문에 스스로 자긍심과 자신감을 단단히 가져야 할 필요가 있어요. 그런 점에서 전북애향운동본부가 막 시작한 '긍정의 힘으로 전북의 미래를 열자'는 정신운동은 시의적절한 것으로 생각합니다."-그게 쉽게 되는 건 아닐 텐데요."그렇습니다. 정신운동이 쉽게 된다고는 보질 않아요. 하지만 언제, 어떻게, 얼마나 의식전환을 하느냐가 관건입니다. 잠자고 있는 듯한 우리 특유의 근성과 도전의식을 되살려 단결한다면 지역발전에 기대하는 만큼 보탬이 될 거예요. 그 꼭지 점에 애향운동본부가 앞장 서야 합니다."-새만금사업 추진에 많은 공로를 남기셨네요."개발과 보전이란 이해가 충돌하면서 힘들었어요. 쓴맛을 느꼈죠. (웃음) 1999년에는 환경단체가 새만금호의 수질오염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착공 8년만에 개발이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졌어요. 사업 재검토 위기가 몰아친 겁니다. 애향운동부는 사업을 지속시키려고 60만명의 서명을 받아 청와대와 총리실, 환경부, 해양수산부에 전달했습니다. 직접 마이크를 들고 각 시군을 돌아다니던 내 모습이 기억나네요."-그때 일화가 있을 것 같아요."한명숙 환경부장관에게 그 서명부를 전달할 때였어요. '새만금사업 지속추진회' 목사님들과 같이 가서 '이 사업은 국책사업일 뿐 아니라 세계적인 사업이기 때문에 더 멀리 보고 받아들여 달라'고 목소리를 높였지요. 그러자 한 장관은 '소위 환경부장관이 환경파괴를 잘하라고 할 수는 없지 않느냐. 직책상 반대할 수밖에 없다'며 냅다 거부하던데요."-그래서 장관실을 뛰쳐나왔나요."아닙니다. 충격을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대뜸 내가 물었어요. '가을철 농촌은 까치들이 떼로 몰려 사과를 파먹어 한해 농사를 망치는 판에 길조라는 까치를 살려야 합니까, 아니면 사람을 살려야 합니까. 어떤 선택을 해야 하겠습니까'라고 물었던 거죠. 돌아오는 대답은 황망해 보였습니다. '총재께서 잘 아니까 판단해보시라'는 거였어요. 장관을 곤란하게 만들었던 것 같네요.(웃음)"-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말 아닌가요."그래요. 그때는 환경단체들이 방조제가 조성되면 갯벌이 사라지고 환경파괴가 심각해질 것이란 주장이 강했어요. 물론 환경보호는 오늘날 인류가 염두에 둬야 할 지상과제란 걸 모르는 건 아니잖습니까. 그런 의견을 결코 무시하면 안 되고, 소홀해서도 안 되는 거죠. 하지만 사람이 집을 짓거나 도로를 개설해서 살아가는 게 더 우선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새만금사업은 앞으로 여러 분야에서 많은 이익을 가져올 것으로 보는데, 유독 이 사업만 못하게 막고 있는 것으로 보였어요. 갯벌도 그렇지요, 어디 사라졌습니까."-새만금 현장에 가신 적은 언제입니까."수도 없이 가보았고, 언제든 기회만 있으면 찾고 싶은 곳입니다."-왜 그런가요."애착이 많이 가는 걸요. 갈 때마다 변하는 모습을 보면 감회도 다르다는 걸 느낍니다. 거대한 바다가 육지로 바뀌는 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잖아요. '바다가 육지라면'이란 소원 섞인 노래도 이런 측면일 거예요."-개발전망은 어떨까요."세계인들이 몰려오는 멋진 도시가 되지 않겠어요. 사업지구 일대에 있는 선유도 비응도 비안도 야미도 신시도 등 지명처럼 이름만 들어도 신선들이 신공항으로 대거 들어와 아름다운 새로운 시장(도시)이 생길 겁니다. 새만금은 20년 후면 대한민국에 그치지 않고 세계 속의 중심도시로 변해 있을 거예요. 그 시기는 우리들의 몫으로 얼마만큼 투자하고 노력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삼성의 투자계획을 의심하는 시각이 있던데요."그건 의심하는 게 아니라, MOU 체결내용을 제대로 추진하라고 재촉하는 차원일 겁니다. 거대 그룹이 정부와 지역에 약속한 거 아닙니까. 그럼 믿고 추진하는 거예요. 쓸데없이 확대 해석할 이유가 없어요. 틀림없이 올 것으로 믿습니다."-다른 얘기로 넘어가 보죠. 마한백제문화연구에 유독 신경을 쓰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계기가 있었나요."1973년초 익산 유지들이 우리 대학 박길진 총장을 찾아왔어요. 주변에 문화유산이 깔려 있는데 보존이 안 된다는 거예요. 심지어 탑을 넘어뜨려 돌다리를 만들 지경이란 겁니다. 이 건의가 받아들여져 그해 마한백제문화연구소가 설립됐어요. 교무처장이던 내가 초대 소장을 맡게 됐습니다."-그간 괄목할만한 연구활동이 돋보입니다. 미진한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백제 무왕의 익산 천도설에 대한 보다 확실한 규명이죠. 그러나 익산에는 관련 유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왕궁터와 국립사찰터, 성곽과 왕릉 등이 남아 있고, 1970년 일본에서 발견된 관세음신앙 영험기록인 '관세음응험기'를 보면 익산천도 기록이 있어요. 이 정도면 한 때 임금이 살아왔다는 게 명백하지 않는가요. '삼국사기'에 천도사실이 없다는 일각의 의견에 연연해 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그 이유가 뭔가요."금마왕궁 미륵사지권역과 웅포일원의 입점리권역으로 대표되는 익산역사유적지구가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잠정목록에 등재되고, 지난 2월에는 문화재청이 세계유산 등재 우선추진유산으로 선정했거든요. 그걸 보면 익산이 백제의 왕도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거 아닙니까. 천도설을 입증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어야 하겠지요. 천도사실은 지금 그림퍼즐처럼 하나둘씩 완성되고 있어요. 그래서 새롭게 구성된 세계문화유산등재추진위원회의 활동이 기대됩니다."-역사유적지들이 상당수 유구로 남아 있습니다. 지상복원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1970년대부터 미륵사지를 필두로 왕궁리 유적, 쌍릉, 입점리 고분군, 연동리 석불좌상, 제석사지 등 수많은 발굴이 이뤄지고 있어요. 국보 11호인 미륵사지 석탑(서탑)은 2001년 해체가 시작되어 지난해 발굴조사까지 마쳤네요. 복원은 각계의 전문가 의견을 수렴해 해체 전 남아있던 6층까지만 부분 복원하는 방안으로 가닥이 잡히고 있습니다. 백제문화유산지킴이가 이런 미륵사 복원사업에 대해 본격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어요."-쉬지 않고 일하시는군요. 아버지로서는 어떤 분입니까."나는 몰라요. 허허허. 애들한테 물어보세요. 많은 시간을 같이 못해 미안할 따름이죠. 3남2녀를 길렀습니다. 둘은 대학교수를 하고 있고, 나머지는 사업가, 병원장, 대학 교직원을 하고 있어요. 자식은 비교적 잘 키운 셈 아닌가요. 아이들 교육은 아내가 도맡아서 했습니다."-하루 일과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은 언제인가요."아침 5시에 일어나 원로원 옆에 있는 대각전에서 1시간여 동안 좌선할 때지요. 일상을 벗어버리고 마음에 사무치는 경건함이 해가 갈수록 더욱 소중해지기 때문입니다."

  • 기획
  • 최동성
  • 2011.10.25 23:02

김광수 명예회장은…

김 명예회장의 고향 사랑은 누구보다 뜨겁다. 김영진 사장의 말처럼 "무엇이든 생기기만 하면 고향으로 달려가"내놓는다. 기부가 거의 육화(肉化)된 느낌이다. 도내 학생들을 대상으로 1973년 설립한 목정장학회가 그렇고, 2001년 설립한 목정문화재단이 그렇다. 그것 말고도 알게 모르게 장학기금이며 발전기금, 각종 대회 등을 후원하고 있다. 나이 들수록 움켜쥐려 하고, 말로만 고향 사랑을 외치는 세태와는 정반대다.김 회장의 일생은 크게 3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출판사업과 정치활동, 그리고 도시가스 등 에너지사업이다.1925년 무주군 무풍면 증산리에서 5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김 회장은 1938년 무풍초등학교를 졸업했다. 혼자서 '중학강의록'을 공부하던 중 가출, 서울로 올라갔다. 그의 나이 14세 때다. 서울에서 친척 아저씨인 우석(愚石) 김기오 선생을 만나 부자의 인연을 맺었다. 일찌기 자손이 없었던 우석 선생은 김 회장의 선친을 찾아가 "종말(김 회장의 兒名)이를 달라"고 한 바 있다.김 회장은 낮에는 우석이 운영하던 문화당 사진제판부에서 일하고 밤에는 덕수상고에 다니며 주경야독으로 미래의 꿈을 키웠다. 이어 조선신탁은행에 들어가 2년여 은행원 생활을 했다. 해방이 되고 1948년 우석이 세운 대한교과서 창립사원으로 입사했다. 625 전쟁 중 국민방위군을 거쳐 육군 경리장교로 들어갔으며 우석이 운명하자 1955년 대위로 예편, 본격적으로 출판사업에 뛰어 들었다. 그 해 우리 문학사에 금자탑을 이룬 '현대문학'이 창간되었다. 당시 한방에서 뒹글던 소설가 오영수씨로 부터 목정(牧汀)이란 호를 받았다. 물가에서 유유자적하는 낭만적인 모습을 담았다고 한다.1961년에는 대한교과서 사장에 취임하고 어문각 설립, 한국번역도서주식회사 인수, 삼광고등학교 인수, 새소년사 설립, 새한제지 설립, 월간 '詩文學'창간 등 눈부신 활동을 벌였다. 우리나라 출판계의 대부로서 자리를 확고히 한 것이다. 2003년에는 충남 연기군에 교과서박물관을 세웠다.김 회장은 1973년 고향 무주 청년들의 성원에 힘입어 무주진안장수지역구에서 제9대 국회의원에 당선, 무소속 원내총무를 맡았다. 이후 10대에는 민주공화당으로, 12대에는 국민당으로 당선되었다. 뒤 이어 14대(민자당)와 15대(자민련)에는 전국구로, 5선 의원이 되었다. 당시 택시요금 거리시간병산제 실시와 농어촌 백서 발간 등의 족적을 남겼으며 지역구 일이라면 발벗고 나섰다.김 회장은 또 미래산업인 에너지분야에 관심을 돌려 1982년 전북도시가스를 설립했다. 현재 전북도시가스는 전주와 김제, 완주군에 도시가스를 공급하고 있으며 2012년에는 남원, 순창, 무주, 고창군에 공급할 예정이다. 또 2003년에는 서해도시가스(한보도시가스)를 인수해 충남 서북부지역에 도시가스를 공급하고 있다. 올 8월에는 미래엔인천에너지를 설립했다.미래엔그룹의 지난해 말 매출액은 7700억 원이며 2014년에는 1조원 매출 700억 영업이익을 달성할 것으로 보인다.

  • 기획
  • 전북일보
  • 2011.10.18 23:02

미래엔 컬처 그룹 김광수 명예회장

서울시 서초구 미래엔 컬처그룹 김광수 명예회장(87)의 집무실엔 문기(文氣)가 어렸다. 방 입구 사각 유리창 안에는 보물 398호 월인천강지곡 영인본이 은은한 빛을 발하고, 집무실엔 추사 김정희의 원본 편액과 강암 송성용의 목각글씨가 고아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또 책장엔 현대문학 창간호 영인본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아, 역시 우리나라 최고의 출판사구나!"하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젊은 시절 영화배우 뺨치던 수려한 용모가 그대로 남아있는 김 회장은 출판인으로의 삶부터 정치 역정, 미래에너지 산업 등에 대한 생각을 2시간 30분 동안 차분히 풀어냈다. 인터뷰 도중 장손이자 미래엔 대표인 김영진 사장이 들어와 거들었다.- 안녕하십니까.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매일 아침 8시 30분에 집에서 나와서 9시 30분이면 회사에 도착합니다. 신문을 정독하고 회사 상황에 대해 보고를 받아요. 결재는 안하지만 직접 의논하고 상의하죠. 정오에 친구들하고 점심을 하고, 같이 목욕하는 게 즐거움입니다. 지금도 책은 매일 읽어요. 매달 일본 종합잡지 하나 읽고. 책밖에 읽는 게 없어요."- 대한교과서는 우리나라 교과서 출판역사의 대명사인데 언제'미래엔(Mirae N)'이라 바꿨습니까?"지난 2008년이 대한교과서 창립 60주년이었습니다. 60년 동안 할아버지에서 너희들까지 3대에 걸쳐 했으니, 이제 모든 것을 일신한다는 뜻에서 이름을 한번 지어봐라 했어요. 그래서 미래엔이라 지었는데, 교육이라는 게 항상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회장님은 대한교과서와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나요?"나는 원래 무주 구천동 무지랭이였어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강의록'을 들으며 독학으로 중학과정을 준비했어요. 부모님한테 강의록 교재비 3원을 받아 돗자리 밑에다 숨겨 놨었어요. 그걸 가지고 경성(서울)으로 올라갔지. 일자리를 알아 보다가 결국 집안 아저씨(愚石 김기오 선생으로 김 회장의 양아버지)댁으로 찾아갔어요. 문화당이라고 출판인쇄공장을 했는데 거기서 급사 일부터 시작했죠. 1948년 아버님이 대한교과서주식회사를 창립했고 나도 창립회사의 일원이 됐어요."- 직접 경영하시면서 보람도 있고 어려움고 있었을 것 같은데요?"내가 육군본부 조달청 예산담당관으로 임명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님이 느닷없이 임종을 하셨어요. 예편해서 주주의결을 거쳐 상무취체역으로 선임되었어요. 당시 우리 회사는 교과서 도서 전문출판사업체로서 꽤나 유명세를 탔어요. 보람있었던 것은 그 때만해도 '가로짜기'활자체가 생소했는데'대교체'라는 것을 개발했고 영한사전에 쓰일 전용체도 개발한 일입니다. 황소처럼 밀어 붙여 조판기술에 일대 혁신을 일으켰죠. 그런데 의욕만 앞서다가 산업은행으로 부터 4년간 법정관리에 묶이고 말았습니다. 그 때 여성 채권자에게 머리채를 잡히기도 하고 잠깐이지만 자살 충동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새소년'잡지를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그것은 순전히 내 창안이예요. 잡지가 나오자 인기가 대단했어요. 당시 순수 어린이 교양지로는 새소년이 유일했으니까. 그런데 어깨동무라는 잡지가 모 여사(육영수)의 힘을 빌어 회사를 냈어요. 그 사람들이 힘이 있어서 판로가 어려워져 문을 닫았죠."- 1965년 전주에 새한제지회사를 만드셨는데 그것이 오늘날 전주제지의 모태입니까?"516군사혁명 이후 물자가 모자랐어요. 우리 회사도 사세는 점점 커져 가는데 용지수급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어요. 매년 용지난을 겪느니 차라리 제지회사를 설립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습니다. 마침 전주지역에서 제지공장을 유치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외자도입 승인을 정부에 요청했는데 정부가 승인을 안해줘요. 아마 그 때 내가 정치를 알았더라면 재벌이 되었을 겁니다. 당시 장기영 경제기획원장관이 정치자금 4천 몇백만 원을 가져오라고 그래요. 3년을 끌다 200만 불 승인이 나서 전주공단에 공장부지를 정하고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정부시책이 바뀌고 2만 평부지의 매입자금을 지불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때마침 이병철씨가 중앙일보를 창간했어요. 전국적으로 용지가 부족한 때였는데 만나자고 해요. 10분 만에 OK했는데 역시 이병철씨는 판단력이 대단해요. 다만 조건이 하나 있다. '전주를 떠나서는 안된다'고 했어요. 당시 공장을 울산으로 옮겨가려고 했는데 전주에 남게되었지요."- '현대문학'은 우리 문학사의 자랑입니다. 단 한차례의 결호도 없었고 기라성같은 문인들을 배출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순수 문예지 창간이 쉽지 않았을텐데요?"우리 아버님이 대단히 폭이 큰 사람이예요. 학교는 국민학교만 다니셨지만 일제때 야학, 신간회,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셨어요. 또 해방 이후 영리에 구애받지 않고 아동문학, 조선교육, 소년, 현대문학 등 4가지 잡지 발행을 주도하셨어요. 나는 군에 있었는데 아버님이 부산에 계실 때 고향이 같은 오영수(吳永壽)선생을 만난 모양이에요. 그 때 권유를 받고 조연현 창간주간, 오영수 편집장, 이렇게 해서 창간을 했습니다."(현대문학은 지난 해까지 570여 명의 문인들을 배출했다. 현대문학사의 수레바퀴 역할을 한 셈이다. 그리고 현대문학상은 시 54명, 소설 56명, 평론 44명, 희곡 11명 등 165명이 수상했다.)- 조-부-손 3대가 이어오고 계시지만 경영 측면에선 밑빠진 독에 물붓기가 아닐까 싶은데."아버님은 현대문학 창간호(1955년 1월호)가 발행되고 석달만에 돌아가셨습니다. 당시 현대문학은 잘 팔렸어요. 문학하는 대학생들이 현대문학을 옆에 끼고 다니지 않으면 대학생이 아니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현대문학은 60년 가까이 되었지만 지금도 적자예요. 대한교과서와 전북도시가스, 서해도시가스에서 한달에 각각 1000만 원씩 매년 3억6000만 원을 지원하고 있어요. 그것은 왜 그러냐? 아버님의 유업이고 내 시대에도 계속해야 할 문화사업이니까요."- 회장님은 전북의 문화창달을 위해 목정문화상을 제정하시고, 도내 최초로 목정문화재단을 설립하셨습니다. 계기가 무엇입니까?"외부 사람들은 우리 전라도를 예향이라고 해요. 그러면서도 소리하는 국창 몇 사람 빼고는 존재가 별로 없어요. 도민들의 특기를 좀 살려야 할 것 아니냐, 해서 문화상을 제정했습니다. 문화재단을 만든 것은 개개인들이 인심을 써서 문화상을 만들었는데 그 사람이 죽으면 그만이고, 해서 재단을 만들었어요. 내가 죽더라도 재단이 관리하도록 한 거죠. 그리고 미래의 인재를 키우자는 뜻에서 매년 고교생 대상의 백일장 미술실기 음악콩클 대회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이제 정치분야로 넘어가겠습니다. 무진장 지역구에서 1973년 제9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신 이래 5선 의원을 하셨는데 정치 입문의 계기는 무엇입니까?"나는 정치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녜요. 정치할 생각도 없었어요. 나는 국회의원 하기 전에도, 내가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무주에 라디오를 보냈어요. 또 내가 책장사하기 때문에 새소년을 각 면에 돌렸어요. 시골아이들이 읽을거리가 없을 때여서 반품되어 온 것을 보내줬더니 그렇게 좋아하고, 책이 오는 날은 동네잔치가 됐어요. 또 청년들은 신지식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어요. 나는 무주 청년들이 구천동에서 캠프를 여는데 건국대 농과대학 교수 등을 초빙해 줬어요. 10년 동안 계속했어요. 무주지역 청년들의 요청도 있고 해서 8대와 9대 민주공화당에 공천을 신청했는데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어요. 그런데 이상한 전화(이후락 중앙정보부장으로 짐작)가 걸려왔습니다. '공화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할 의사가 없느냐'는 겁니다. 나는 무조건 발로 뛰었고 무주군민의 76%라는 압도적인 표를 얻어 당선됐습니다. 지금도 무주에 가면 30대 넘는 사람은 나와서 나와 손잡고 갑니다."- 20년 가까이 정치활동을 하는 동안 기억에 남는 일이 많으셨을텐데요?"그 당시 정치인의 역할이라는 게 예산 많이 따오는 것밖에 없었어요. 무진장 지역은 전기 안들어가는 곳이 대부분이어서 전기 넣어주고 전화 놓아주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한번은 진안에 오후 5시쯤 갔더니 '우리 눈에 불 좀 켜주세요'하는 거예요. 종일 밭에서 일하고 집에 들어오면 밥을 지어야 하는데 캄캄한 거지요. 그래서 직접 총리공관으로 김종필씨를 찾아가 장시간 면담 끝에 그 이듬해 전기를 넣어줬어요. 장수도 그랬고. 또 내가 교체위원이어서 무진장 지역에 정읍보다 먼저 우체국을 지었어요. 나는 국민의 민정을 잘 반영시켜 주는 게 내 임무다 생각하고 10호 이상 동네를 다 돌았습니다. 그게 꼭 3년 걸리더라구요."(김 회장은 세비를 타서 써본 적이 없다고 한다. 대부분 사재(私財)로 주민숙원사업을 해결하고 생색도 내지 않았다.)- 황인성 전 총리와는 막역한 사이로 알고 있는데요."그 친구는 무풍면 증산리 위아래 동네에서 살았고, 동네에서 초등학교 동기생이 우리 둘 밖에 없었어요. 황인성이는 사람이 진지하고 진실하고 자기개발을 굉장히 한 사람이에요. 군에서도 순전히 노력으로 좋은 평을 받았어요. 한때 지역구 확보 문제가 없지 않았지만. 작년에 죽기 전까지 내 사무실에 가끔 들렸어요."- 회장님은 일찍 에너지산업에 눈을 뜨신 것 같습니다. 전북도시가스를 발족시켰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습니까?"에너지 산업은 미래 성장산업이고 정부 주력산업입니다. 조철권 지사 땐데 그 때는 대한민국이 막 도시가스를 시작할 땝니다. (당시 대한교과서는 도시가스 사업 진출을 기획하면서 수익성 논의를 하고 있었다.) 한번은 지사를 찾아가 '도시가스 사업이 어떻게 됐느냐?'고 물으니까 '아무도 신청을 안했다'고 그래요. '신청자가 없어 상공부에 반송해야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신청해야겠다'고 했더니 손을 거머쥐면서 '고맙다'고 그래요. 그렇게 해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뒤늦게 유기정씨가 '내가 전주지역 국회의원인데 어떻게 무주사람에게 주느냐'고 항의해 내가 '전주사람만 전북사람이고 무주사람은 전북사람 아니냐?'고 했죠.(웃음) 운이 좋았던 거죠."- 이번에 미래엔인천에너지를 설립하셨던데요?"우리가 출판에서 에너지로 사업을 다각화하고 있습니다. 올 8월에 설립했습니다. 인천에너지는 쓰레기를 활용하는 지역난방으로 인천시 남동지역에 집단에너지를 공급하는 회사입니다."- 건강비결이 궁금합니다."움직일 수 있는 범위에서 다 움직입니다. 조금 걷고 구부렸다 폈다 하고 그래요. 하체에 힘이 없으니까."(김 회장은 그동안 담석과 전립선암 등 수술을 3번이나 받았다. 하지만 2주에 한번 꼴로 골프장에 나가 15홀까지 돈다고 김영진 사장이 귀띔했다.)- 고향 무주에는 가끔 다녀오시는지요. 끝으로 도민들에게 한 말씀 주시겠습니까?"나이가 들수록 고향 생각이 납니다. 고향 얘기가 나오면 눈물이 나오려고 해요. 그런데 내가 이런 얘기해도 좋을지 모르겠으나 전라북도에도 여야가 있어야 합니다. 정당이라는 게 국민을 대표하는 정당이라야지 정당을 대표하는 정당이어선 안됩니다. 한 예를 들겠어요. 9대 때는 국회의원이 전북에서 공화당 4명, 신민당 4명, 무소속 4명이었는데 서로 얘기를 안해요. 그래서 내가 우리가 국가를 위해서 일한다고 나왔으니, 도민들을 위해 한달에 한번씩 모입시다. 우리 계를 합시다, 해서 강제로 모였어요. 우리 전라북도에도 야당 일색이어선 곤란합니다. 적어도 여당을 대표하는 사람이 1-2명이라도 있어야 도민의 의사를 정부여당에 전할 것 아닙니까."(인터뷰가 끝날 무렵 김 회장은 "나는 전라북도 사람이다"면서"내 집안이 잘돼야 남의 집안도 잘되는 법"이라고 말했다. 그런 뜻에서 그런지 17일에는 전북대에 발전기금 10억 원을 내놓았다. 또 미수(米壽88세)잔치를 하지 않는 대신 고향 무풍중학교에 1억 원, 무주군장학재단에 2억원을 기부키로 했다. 이달 29일 열리는 무풍면 체육대회 비용 2500만 원도 쾌척했다.)/ 대담= 조상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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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상진
  • 2011.10.18 23:02

이재규 대표의 '잉어와 송사리론'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꺼내든 이야기. 연못을 흐려놓은 오래된 잉어와 송사리의 합창론이 흥미로웠다. 동료들은 '송사리'라는 표현을 쓰지 말라고 했단다. 그래도 그는 그 연못을 지키고 살아온 '송사리들의 합창'이 갖는 '혁신'의 가치와 미덕을 열심히 설명했다.그는 시인이다. 소설가이고 평론가다. 오랫동안 시민사회운동 현장을 지켜온 활동가다. 이것 말고도 이력은 다양하다. 광주미문화원점거농성으로 구속돼 감옥생활도 해보았고, 시민사회단체가 배출한 자치단체장을 돕기 위해 말단공무원도 경험했다. 함께 사회운동을 해온 선배(이광철의원)의 국회 진출로 아주 잠깐 동안 보좌관으로 현실정치 언저리에도 가보았고,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부대변인과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 사무처장으로 일하면서 남북교류의 생생한 현장을 지켜보기도 했다. 방송 진행자로도 일했고, 밥벌어먹기 위해 편집디자인 기획사를 운영했으며, 운동권들이 포진했던 인터넷 쇼핑몰 지역점장과 콘택트렌즈 대리점 사장도 해보았다. 그러나 수많은 직종을 섭렵하면서도 어느 것 하나 길게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은 세상을 바꾸는 시민사회운동의 현장으로 돌아가야 하는 운명(?)이었기 때문이었다.1963년, 광주 태생이지만 그는 대학부터 30년 동안 오롯이 전주의 풍광과 정신을 껴안으며 살아온 온전한 전주 사람이다. 전북대에서 법학을 전공한 그는 대학시절 소설(전북대학술문학상)과 시(해양문학상)로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본격적인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그 뒤 소설은 한편도 쓰지 못했고, 시 또한 발표하지 않았다. 대신 94년에 '시와 소설로 읽는 한국현대사'를 펴냈다. 그래서 지금 작가회의 평론분과 회원이다.어릴 적 꿈은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지금도 물론 꿈을 버리지 않았다. 모든 경험과 순간이 언젠가는 문학적 감성으로 발현될 것이라고 그는 믿고 있다.사실 세상을 바꾸는 방식은 문학의 힘이 정치보다 더 크다는 것을 그는 안다. 그러나 끝내 정치의 길을 선택한 이유는 모든 변화의 정점이 정책제도화와 실행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때로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정치현실을 관조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그가 믿는 것은 따로 있다. 소통하는 정치, 이웃과 함께 하는 정치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확신과 지금 그의 내면으로부터 샘솟는 열정이다./ 대담= 김은정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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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은정
  • 2011.10.11 23:02

희망과대안전북포럼 이재규 공동대표

"길이 없다.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숨 막히며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며간다. 여기서부터 역사이다. -고은시인의 '길'중에서-"사무실 문을 열자 왼쪽 안내판에 붙어 있는 많은 인쇄물 사이에 직접 쓴 필기체 시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길이 없다'는 것은 암울한 현실이다. 그런데 이 암울한 현실로부터 희망을 읽는다니. 가슴에 차오르는, 그 무엇인가가 느껴졌다."사무실을 막 열었을 때인데 이 시가 떠올랐어요. 제 심경과 똑같았거든요.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며 간다 여기서부터 역사다' 마음에 이 구절을 새겼습니다."한국사회에 새로운 혁신의 바람이 불고 있다. 정치지형의 변화를 꿈꾸는 시민들의 절박한 소망이 지펴내는 희망의 불씨다.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둔 2011년 가을, 시민사회는 이 새로운 바람으로 다시 출렁이고 있다.전북 지역 또한 새바람이 인다. 온오프라인에서 이루어지는 이 바람의 진원은'우리'라는 이름으로 함께 가고자하는 시민사회단체와 재야, 진보노선의 활동가들과 시민들이다. 지난 10월 5일, 물밑에서 움직이던 그들이 모여 전북@'혁신과통합'을 출범시켰다. 야권단일정당 만들기의 선언이자 본격적인 시작이다. 마침 서울시장 야권후보단일화 경선을 통해 정치혁신의 열망을 담은 시민사회의 힘을 제대로 보여준 직후였다. 이러한 새로운 정치혁신의 바람을 불어오는 대로 그냥 마주하고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이재규 '희망과대안전북포럼 공동대표(48)를 만난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다. 이 대표는 학생운동부터 시민사회운동까지 줄곧 재야를 지켜온 시민운동가다.'혁신과통합'을 출범시키기까지 그 중심에서 일해온 그는 정치혁신위원장이란 직함을 새로 얻었지만 그 또한 내년 총선에 출마의 뜻을 두고 있다. 그래서 인터뷰는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그를 만나고 난 뒤 혁신을 갈망하며 기꺼이 정치의 길을 가고자 하는 젊은 정치인들의 진정성을 다시 보게 됐다.도전은 늘 모험이 따른다. 성공을 향해 가지만 그 대척점에는 반드시 실패가 기다리고 있다. 그는 야권통합단일정당 출범이 꼭 성공하리라는 믿음과 확신이 있지만 만약 실패한다 해도 그 '실패의 경험' 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말했다.-'혁신과통합'이 출범했으니 이제 더 바빠지겠습니다. 그런데 웬 대표가 그렇게 많습니까. 많은 분들이 모두 공동대표인 것을 보고 이런 직책부터 혁신시켜야하는 것 아닌가 싶었습니다. 대표성만 가진 분들만 많아서 일이 잘 되겠습니까."그렇게 보였을 수 있겠군요. 그 분들이 원했던 것은 아닙니다. 같이 좀 거들자는 뜻이죠. 일종의 시민단체 총동원령 같은 그런 취지입니다. 일은 오히려 잘 될 겁니다."(웃음)-서울시장 국민참여 야권단일후보 경선 결과에 좀 더 희망을 갖게 되었을 것 같습니다."안철수에서 발원해서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로 매듭지어진 새로운 일련의 변화를 보면서 기존 정당정치가 단순히 낡았다는 것 뿐 아니라 그 방식으로는 이제 국민의 마음을 모아내기 어렵다는 것을 다시 확인한 결과입니다. 한 언론매체에서 '새로운 20대 30대 젊은이를 두려워하는 늙어버린 민주당'이란 제목을 뽑았더군요. 오후부터 밀려나온 젊은 세대들에 의해 이루어진 그 반전의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이 대표께서는 반전의 의미를 어떻게 읽으셨습니까."저는 기존 정당이 포함하지 못한 젊은 변화의 동력들이 정치결정에 다시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고 보았습니다. 어쩌면 '박원순'은 그들에게 희망의 도구인지도 모릅니다. 개인에 대한 열광보다 변화에 대한 불씨를 꺼트리면 안 된다는 어떤 조바심 같은 것이 더 컸지 않았을까요. 그만큼 새로운 변화에 대한 갈망이 절실하다는 것이죠. 물론 사람과 정책을 온전히 평가하는데는 그 사람이 살아온 이력이 그대로 반영되는 것 인만큼 박변호사의 궤적이 무엇보다 우선 작동했겠지만요."-삶의 궤적을 말씀하셨는데 이 대표의 정치 입문 동기가 궁금합니다. 이 대표의 출마의지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의외로 받아들이는 분들도 적지 않던데요."그동안 사회운동을 해오면서 이것이 곧 정치운동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언젠가는 진출하겠다는 의식이 내면에 있었는데 이제 나서서 감당해야겠다는 강력한 의지랄까 열정이 생긴 것은 이 정부 들어와서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입니다. 특히 제가 살고 있는 덕진구의 정치적 상황을 보면서 그런 의지가 더 단호해졌습니다."-그래도 시민사회운동의 한 중심에 서온 입장에서 정치권 진출이 자유롭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사회운동은 현실권력의 문제를 늘 제기하는 것입니다. 시민운동도 권력에 직접적으로 개입해서 정책을 비판하거나 돕거나 하는데, 그것 역시 따지고 보면 다 정치 행위입니다. 입장을 정리하는 일이 쉬웠다고는 이야기할 수 없지만 장외에서 오랫동안 정치과정을 지켜보아왔기 때문인지 저 스스로 낯설지는 않았습니다."-어제 '혁신과통합' 출범 기사를 보니 민주당이 구태하고 낡고 독선적이고 모든 것을 독점한 정당으로, 모든 비판이 모아지더군요.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의 지역 구도를 고착화시킨데 대해 민주당이 자유로울 수 없고 또 그런 구도를 이용해서 기득권을 굳힌 것은 사실이지만 정당정치사에서 과연 그렇게 비난 받을 일만 한 것인가 하는."사실 민주당의 전통은 한국의 야당사나 민주화의 역사와 거의 일치합니다. 물론 민주당 밖에서 만들어진 힘이 컸기 때문에 민주당만이 독점할 수 없는 것이지만 민주당 역사는 그런 변화를 끌어온 시민들의 역사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자랑스러운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민주당의 역사를 존중하고 민주당을 정통으로 표현하는 것에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지방자치 20년 동안의 정치적 독점입니다. 특히 전북지역의 상황은 얼마나 심각합니까."-'혁신과통합'이 야권단일정당을 내세웠는데, 오랫동안 민주당이 독식해온 전북의 정치 환경 속에서 그 작업이 가능할까요."서울시장 야권단일후보 경선 결과가 '희망의 도구'로 읽혀지기도 하지만 박원순변호사나 안철수교수는 평생을 쌓아온 자기 세계가 있습니다. 그것이 국민들에게 어필하는 부분이 있는 것이구요. 결국 아무리 시대변화가 있다 해도 그것을 온전하게 담아내는 것은 그런 그릇, 이를테면 인물과 정당이 필요한 것입니다. 언론에서는 시민정치가 정당정치를 이겼다는 표현도 썼던데, 이 둘이 계속 대립항으로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현재의 정당정치가 담아내지 못한 부분을 시민들의 정치적 참여를 통해서 보완해내면서 결국 정당정치의 혁신을 제대로 이루는 것으로 완결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회적 요구가 거세게 몰려오는데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면 도태될 수밖에 없겠죠."-혁신과통합이 보는 전북정치의 현실은 어떤 것인가요."민주당이 걸어온 과정을 보면 비난의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방자치단체에 다양한 주민서비스가 시도되고 새로운 모색들이 이루어지면서 주민들의 생활여건 또 자치의 여건들은 많이 진전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니까요. 그러나 민주당의 전통과 역사, 도전과 모색에 비추어볼 때 전북지역의 정체가 도드라져 보인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야당 집권 10년을 포함해 그렇게 힘을 몰아주었지만 주민들의 생활에 큰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무엇보다도 새로운 패러다임에 맞는 발전 모델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지금 당장 눈앞에 다가온 총선으로만 보자면 결국 '혁신과통합'이 기대하는 것은 민주당을 포함한 야권단일후보겠지요."그렇습니다. 민주당을 포함하되 민주당을 넘어서는. 민주당의 현재로는 안 된다는 것이고, 민주당을 혁신시키고 기존의 정치문화를 바꾸어서 민주당의 주요한 동력을 참여시키면서 이루어내는 통합정당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민주당의 행태가 많은 문제를 안고 있고, 정당민주주의가 심각하게 왜곡된 현실이 있긴 하지만, 이 부분들을 다 털고 통합수권정당을 말한다는 것은 사실 비현실적이거든요."-이 작업이 만약 12월 13일 예비후보 등록 전까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어떻게 됩니까."무엇이든 과정이 진행 중이라면 상관없겠죠. 그런데 민주당은 자기를 지키려고 하고 진보정당은 꿈쩍도 하지 않을때가 가장 곤혹스러운 국면일겁니다. 그럴 경우에도 야권연합정당을 제기했던 문제의식을 유지하면서 마지막까지 그런 결과를 만들어내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겠지요. 전북의 정치현실을 혁신과통합의 비중으로 볼 때 전북은 혁신이 80%정도 힘이 실려야 한다고들 합니다. 호남에서는 민주당을 혁신시키는 문제, 민주당의 현재 기득권 주류들을 때로는 청산하기도 하고 때로는 변화시키기도 하는 것, 결국 전북정치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이것이 가장 절박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민주당의 역사는 존중하되 민주당의 현실을 넘어서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현실을 넘어서는 그 자체가 가장 큰 과제 아니겠습니까."민주당은 역사적 고비마다 국민경선을 만들어내고 그런 흐름 속에서 기존 당원을 넘어서는 어떤 에너지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런데 잘 들여다보면 그것은 민주당원만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죠. 시민들이 대대적으로 참여한 덕분입니다. 국민참여경선이란 말 자체가 이미 이 정당의 당원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예요. 민노당이나 진보신당은 국민경선 안합니다. 당원들 상향식으로 뽑죠. 거꾸로 민주당과 같은 큰 정당들은 상시적으로 명부로 관리하는 당원이 있긴 한데 그 당원이 진보정당만큼 충성심이 강한, 완전히 이념적으로 또 조직적으로 결속력이 강한 사람은 적습니다. 두 개의 서로 다른 정당의 특장점을 잘 살리면 저는 통합정당이 대중정당으로 급비약할 수 있다고 봅니다."-개인적인 이야기를 피해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 대표께서는 이미 전주의 덕진구 출마를 밝히셨던데 현실적으로 어려운 결정이 아닌가요."이번 총선 출마를 결심한데는 두 가지 계기가 있습니다. 2005년부터 남북관계 일에 참여하면서 총체적인 우리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나서고 싶다는 자아의식이 싹텄습니다. 또 하나 더 중요한 계기는 전북에 살아온 사람으로서 지역구 의원의 비상식적인 복귀과정을 지켜보면서 주민들 중 한사람이자 전북 정치 현실을 바꿔보겠다는 생각을 해온 사람으로서 자괴감 같은 것, 분노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이런 잘못된 질서를 바꾸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오래된 잉어가 우물을 휘젓고 있는데 다른 힘 있는 잉어를 옮겨오는 것 또한 잘못된 것이지요. 결국은 송사리들의 합창이랄까. 함께 그 연못에서 살아오고 누구보다도 그 연못의 문제를 잘 알고 있는 그런 송사리들의 합창이 지금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입니다."-지금껏 그런 도전이 여러번 있었지만 실패하지 않았습니까."그동안의 정치가 수직적으로 어떤 슈퍼영웅이 나타나 한꺼번에 해결하는 영웅의 시대였다면, 지금은 집단지성, 시민의 참여, 누구나 다 정치적 판단력과 실천력을 가지면서 현실에 개입하는 SNS(소셜네트워크)시대의 정치행위가 이루어지는 시대입니다. 시대의 패러다임이 바뀌어가듯이 이제 시민사회운동속에서 시민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지역문제를 함께 해결해가는 이웃으로서, 경청하는 자로서의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송사리들의 합창으로 보일지라도, 그래서 횡포를 부리는 오래된 잉어를 내쫒을 수 있다면 새로운 잉어를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자치 네크워크를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새로운 변화를 위한 도전은 가치 있지만 궁극적인 지점에는 성공과 실패의 경험이 공존합니다. 성공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까."많은 분들이 지역구 선택을 말렸습니다. 실현가능성 때문이겠지요. 겨레말큰사전 작업에 참여할 때 지켜봐주신 고은선생님이 제일 먼저 말리셨습니다. 그때 제가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죽으러 간다'구요. 지금 80년대 학생 운동 때 가졌던 열정이 샘솟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때 아무것도 대가를 바라지 않고, 변화를 시켜야한다는 그런 열정입니다. 단지 개인적인 성취를 넘어서서 뭔가 자기 삶의 기둥처럼 너는 무엇을 위해 살았느냐고 할 때 학생운동 시민운동 하면서 살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자기가 가장 심각하게 생각하는 문제의식을 갖고 정면에서 도전하고 깨지더라도 실천해보고 그런 열정을 담아내며 살았다고 답하고 싶습니다. 성공에 대한 확신도 있지만 실패의 경험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가 지금 저에게는 필요합니다."

  • 기획
  • 김은정
  • 2011.10.11 23:02

장경순 총재는

장 이사장은 숫자 10과 연관이 깊다. 우리나라 의정사상 최연소 국회부의장으로 시작해 10년 동안 여당 부의장을 지내며 국회운영을 주도했다. 또 유도 10단으로, 유도계의 세계 최고수다. 평생 유도로 몸을 단련했고 유도정신에 입각해 살아온 것을 자랑스러워 한다.1922년 김제시 만경면 화포리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난 장 총재는 만경보통학교와 배재중학교(5년제)를 졸업했다. 1941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대학 척식(拓植)과를 마치고 중국 상해에 학도병으로 끌려갔다. 해방이 되고 이청천 총사령관 휘하의 광복군 잠편지대(暫編支隊)에서 참모조장을 지냈다. 귀국 후 2년 반동안 전북중학교(전주고 전신)에서 훈육주임과 유도교사 생활을 했다. 이 때 좌익서클 활동을 하던 10여 명이 경찰에 적발돼 구속된 것을 밤을 새워 사찰과장과 담판, 빼낸 일화는 유명하다. 박권상 KBS 사장, 임방현 청와대 대변인, 조세형 새정치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 등이 당시 제자다.이어 육사 제7기 특별반으로 입대해 육군 남산학교(특수정보) 학생처장, 특무부대(CIC) 차장, 제3사단 2223연대장, 육본 교육과장, 육사 참모장, 육군 제2훈련소 교관단장 등을 거쳤다. 준장으로 승진해 육군정보학교장, 육군본부 교육처장을 역임하다 운명의 516 쿠데타에 가담했다. 혁명정부 농림부 장관을 역임하고 중장으로 예편, 민주공화당 사무총장을 맡았으며 고향 김제에서 6-10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5선의원이 되었다. 한독의원협회 회장, 한국유도회 회장, 세계유도연맹 부회장, 민주공화당 중앙위 의장, 제1무임소장관을 역임하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자 정치일선에서 물러났다.이후 대한민국 헌정회 원로회의 의장과 헌정회장을 지냈으며 2002년 보수우익 시민단체인 자유수호국민운동을 발족시켜 총재를 맡고 있다.

  • 기획
  • 조상진
  • 2011.10.04 23:02

장경순 총재(자유수호국민운동)

"지금, 나라가 어려운 때요. 여러분도 힘을 합하고, 특히 언론이 앞장서야 합니다." 자유수호국민운동 장경순(張坰淳90) 총재는 인터뷰 요청을 하자 "어디냐"고 물어본 후 대뜸 나라 걱정부터 했다.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는 목소리가 쩌렁저렁했다. 한사코 "바쁘다"면서도 "좋소"하며 흔쾌히 응락했다. 인터뷰 내내 516 군사혁명의 주역으로서의 자부심이 묻어났다. 나라를 이만큼 성장시켰다는 자긍심과 보수 우익의 원로답게 국가의 안보에 대한 염려가 컸다. 장 총재는 평생 세가지 목표에 가치를 부여하고 살아왔다고 했다. 강력한 조국, 잘 사는 농촌, 유도 최고봉이 그것이다. 인터뷰는 서울시 중구 롯데호텔 건너편에 있는 나전빌딩 자유수호국민운동 총재실에서 진행했다.- 안녕하십니까. 요즘 굉장히 바쁘시다면서요?"그래요. 요즘 안보 정세 강연회, 현대사 바로세우기 등 각종 행사에 참석하고, 언론 인터뷰 하느라 바쁩니다. 대학 강연도 자주 다닙니다. 5일에는 고향 김제노인대학과 군장대학에 가서 '우리나라의 미래는 밝다'는 내용으로 강연을 할 예정입니다."- 2007년에 회고록 '나는 아직도 멈출 수 없다'를 펴낸 후 책 제목대로 멈추지 않고 왕성하게 활동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자유수호국민운동은 주로 어떤 활동을 합니까?"2002년 4월에 시작했습니다. 당시 나는 딸들이 살고 있는 미국 LA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재미교포인 안교명 예비역 대령이 나를 찾아와 '이러다가 대한민국이 망하는 것 아닙니까?'며 몹시 걱정을 해요. '그게 무슨 말이요?'하자 한 월간지 기고문을 보여주는 겁니다. 우리나라가 베트남 전쟁 당시 적화통일 직전의 자유베트남 보다 더한 국기안보 위기에 처해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안되겠다 싶어 닷새만에 귀국해서 이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정래혁 전 국회의장과 김성은 전 국방부장관 등 7인 호국위원회를 결성하고 각계인사 100인이 참여한 발기인 대회를 가졌습니다. '좌익정권 몰아내야 국가가 산다'는 기치를 내건 것입니다."- 벌써 10년이 되어갑니다. 운영에 어려움은 없습니까?"출범하고 미국 상원 인권위원회와 해리티지 재단의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 곳에서 한국정부의 친북 용공태도와 국가안보 해이에 대해 알렸습니다. 고맙게도 제 말에 동감하는 교민들로 부터 재정적인 도움도 받았습니다. 지금은 회원이 3000여 명으로, 경제적인 도움을 주는 분도 있고, 자원봉사를 해 주시는 분도 계십니다."- 예전으로 돌아가 질문 드리겠습니다. 해방 후에 잠시 전북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셨던데."일본에서 귀국 후 고향에서 농촌 부흥운동을 해야겠다며 당시로는 첨단농업인 토마토 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같은 학도병 출신인 친구가 불쑥 집으로 찾아 왔습니다. 다짜고짜 학교에 가자는 것입니다. 당시는 해방정국으로 좌우익 정파간 싸움이 치열했습니다. 학교도 동맹휴학이다, 관공서 습격이다 하는 소동으로 조용할 날이 없었던 거죠. 그 때 존경받던 김가전 교장(나중에 도지사가 됨)도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교사인 친구의 말을 듣고 저를 데려다 학교를 조용히 만들려고 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내키지 않았지만 국가동량이 될 청소년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 학교 훈육주임과 유도교사를 맡았죠."- 625 전쟁 얘기는 건너 뛰겠습니다. 총재님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516 쿠데타를 함께 하셨는데, 어떻게 알게되었습니까?"내가 박 대통령과 처음 만난 것은 1948년 육사 제7기특별반으로 막 군복을 입은 때입니다. 당시 박 대통령이 우리의 중대장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만난 것은 한국전쟁이 치열하던 1950년 겨울이었습니다. 대구에서 CIC특무 차장으로 있을 때 내 직속상관이 한웅진 중령이었는데 그가 박 대통령과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전신) 2기 동기생이었습니다. 당시 박 대통령은 여순반란 사건 연루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한국전쟁 발발로 전격적으로 군인신분에 복귀한 상태였습니다. 우리 셋은 애주가로 의기가 투합해 형님 아우하며 거의 날마다 저녁이면 대구의 술집을 누비고 다녔습니다. 그 후 나는 경북 영천의 육군정보학교 교장을 하다 1960년 7월 육군본부 교육처장으로 갔는데 얼마 후 박정희 소장이 직속상관이 되어 나타났습니다."- 1961년 518 거사 전야(前夜)는 긴박했을 텐데요."5월 15일 오후 3시 무렵, 박 장군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좀 만날 수 없느냐?'는 것입니다. 이유도 묻지 않고 '어디로 가면 되느냐?'니까'우리집으로 오시오'했습니다. 퇴근하고 신당동 박 장군 댁으로 갔더니 '장 장군, 오늘 밤이 거사요'하는 겁니다."- 깜짝 놀라셨겠군요?"청천벽력 같은 일이지만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습니다. 이미 충분히 예견한 일이니까요. 당시 419 민주혁명과 그 이후의 국내 사정은 혼란의 절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당이 집권했으나 밥그릇 싸움에 여념이 없고 학생들은 남북통일을 외치며 북한 젊은이들과 대화하겠다며 판문점으로 달려가는 판이었습니다. 이 위기 국면을 슬기롭게 수습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도덕적 힘이 필요한데, 그 힘을 갖춘 집단은 오로지 군부밖에 없었으니까요."- 당시 어떤 역할을 맡으셨습니까?"박 장군은 장도영 참모총장을 설득하고 낙하산 부대를 동원해 달라고 했습니다. 나는 마음이 무겁고 착잡해, 일단 집에 들렸습니다. 아내와 장모님께 이승에서 마지막이 될지 모를 작별인사를 하고 박 장군 집으로 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박 장군이 침통한 표정으로 거사가 폭로돼 끝났다는 겁니다. 나는 피가 정수리에 확 솟구치는 기분이었습니다. '갑시다. 기왕지사 한번 해 보고 죽든지 살든지 해야 할 것 아닙니까?'하고 내가 소리치자 박 장군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516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농림부 장관 시절, 산림녹화 일화가 꽤 유명하던데요?"요즘도 어쩌다 시골길을 달리다 울창한 산림을 보면 뿌듯한 긍지를 느낍니다. '저 산림녹화는 내 작품이다'하는 자부심 때문입니다. 당시 우리나라 산은 민둥산이었습니다. 장관이 돼자마자 당시 심종섭 산림국장(전 전북대 총장)과 시도 산림과장을 모두 불렀습니다. 그리고 내가 고심 끝에 고안한 방법을 추진토록 했습니다. 사방(砂防)사업할 땅에 무조건 202020㎝ 깊이로 구덩이를 파서 거기에 논흙을 채우고 풀씨 싸리씨 등을 파종토록 한 겁니다. 그러면 비가 와도 흘러내리지 않고 빨리 안정화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토양을 키운 다음에 식목을 하니 나무가 잘 자랐습니다. 당시 USOM(주한미군 원조사절단)이 처음에는 무모하다고 말리다 대성공인 것을 보고 미국 행정부와 의회에까지 알렸습니다."- 김제에서 내리 5선을 하시고 국회 부의장을 10년간 하셨는데, 에피소드 한 가지만 들려주시겠습니까?"호남야산개발프로젝트와 광주에 아시아자동차(현재의 기아자동차)를 설립토록 한 것이 기억납니다. 또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여야가 첨예하게 맞서 합의를 도출하지 못한 안건이 있었습니다. 여야 원내총무를 불러 조정을 하려 했으나 안되길래 '몇 시간이 걸리든 합의를 하지 않으면 못 나옵니다'하고 문을 잠가 버렸습니다. 결국 합의를 보고서야 풀려났죠.(웃음)"- 1970년에 미군을 감축하려는 것을 저지했다고 들었는데요."닉슨 대통령이 취임 직후 소위 '닉슨 독트린'이란 정책을 발표했습니다. 약소 우방국에 경제적 군사 원조를 제공하는 대신 해외주둔 미군을 감축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내가 보니까 주한미군도 조금씩 빠져 나가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미군부대에서 이삿짐 반출입 업무를 담당하는 강홍모 대령에게 은밀히 체크해 보라고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당시 주한미군이 3만5000명인데 7000명이 빠져 나갔어요. 박 대통령에게 긴급히 보고했더니 깜짝 놀라는 거예요. 그래서 비밀리에 정일형 박준규 백두진 이동원 나 이렇게 사절단을 편성했는데 다음날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나버렸어요. 할 수 없이 혼자 미국에 갔죠. 그때 야당 부의장인 윤제술 의원에게 상의를 했습니다. 결국 미국의회 지도자들을 설득해, 어렵게 막았습니다."- 윤 부의장과 상의한 것을 보니 야당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가 보죠."윤 부의장과는 여야로 당이 다를망정 단순한 관계 이상이었습니다. 더구나 개인적으로 고향의'선생님'이기도 했습니다. 자초지종을 설명드렸더니 '이준 열사가 헤이그 가는 마음이겠군'하면서 공항까지 나와 '국가안보에는 여야가 따로 없다. 꼭 성사시키고 돌아 오라'고 격려해주셔서 콧날이 시큰했습니다."- 정치를 하면서 김대중(DJ) 김영삼(YS) 김종필(JP) 등 3김(金)씨를 지켜 보셨을텐데요. 이 분들에 대해 한 마디씩 평가해 주신다면?"DJ는 우리나라에서 노벨평화상을 받은 유일한 사람이고 호남정권을 세웠지만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이 나라를 좌경화하고 국가 정체성을 훼손시킨 장본인입니다. YS는 미국이 북한핵을 치려 하니까 반대했고 IMF를 초래하지 않았습니까. JP는 DJ를 도와 대통령을 만들었는데 516 혁명을 같이 한 사람으로서 대국민 사과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민주화를 하려면 국력이 배양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토대를 나는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이 만들었다고 봅니다."- 그럼 이승만박정희 두 대통령에 대해서는?"두 분도 공과가 있습니다만 이 대통령은 건국과 건군(建軍)을 했고 문맹퇴치에 앞장섰습니다. 또 토지개혁을 해서 625 전쟁이 났어도 공산화를 막았습니다. 한미 동맹을 체결해서 박 대통령이 산업화를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우리나라 산업화를 30년만에 해 냈습니다. 영국은 200년, 미국은 180년, 일본은 100년이 걸린 것 아닙니까. 새마을 운동과 산림녹화, 그리고 1978년 한미연합사 창설은 우리나라를 지탱해 준 것입니다."- 내년에는 총선과 대선이 치러집니다. 오랜 정치경륜에 비추어 나라를 이끌어갈 지도자, 특히 대통령의 덕목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나는 대통령이 될 사람은 우선 철저한 애국심과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또 안보에 대한 신념과 의지, 부정부패 척결 의지, 통치전략 전문가, 파벌의식이 없는 포용력을 갖춘 선비형 대통령이 바람직합니다. 국제정치, 특히 미국과 중국에 영향력을 가져야 합니다. 물론 병역기피자와 탈세자는 뽑아선 안됩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대북정책에 대해서는?"처음에는 방향을 제대로 잡았지만, 지금은 큰 일입니다. 국가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안보, 경제, 사회가치의 고양, 이 세가지가 필요합니다. 그 중 제일 중요한 게 안보입니다. 안보가 무너지면 모든 것을 잃게됩니다. 나는 공산주의와의 싸움에서 '중도'란 결국 좌편(左便)일 뿐이라는 것을 경험상 확신합니다. 이념적 중심이 없는 중도는 종북(從北)주의자들이 활개치고 국론을 분열시킨다는 것을 명심했으면 합니다."- 전북 정치권은 정부수립 당시와 비교해 활동이 크게 위축되고 도세(道勢) 또한 후퇴했습니다."호남에서는 민주당 아니면 당선되지 않는데 이래서 되겠습니까. 전라북도부터 문을 열어야 합니다. 나라를 위해 일할 인재를 뽑아야 합니다. 전라북도가 도세가 약하다고 하지만 새만금사업이 성공하면 전국에서 제일가는 도가 될 수 있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유도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유도에 입문하신 동기와 유도정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유도와 유도로 부터 함양된 정신은 나를 평생 지탱해준 모든 정신활동과 가치개념의 근간입니다. 유도는 나에게 삶 그 자체요, 종교나 다름없는 절대가치입니다. 배재중 3학년 때 입문했는데 당시 조선연무관에는 국내 유도계의 1인자인 이범석 사범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사람은 문무를 겸비해야 한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또한 유도의 요체는 자기의 체력과 정신력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감격스러웠습니다. 그 전까지 싸움질을 많이 했는데 이 때부터 열심히 공부도 하고 유도를 했습니다. 일본에 가선 강도관에서 일본 유도계의 쌍벽인 도쿠 산보와 미후네 규조 두 사범으로 부터 배웠습니다."- 아직도 젊은이 못지않게 건강하신데 비결은 무엇입니까?"열심히 활동하는 게 비결인 것 같습니다.(웃음) 지금은 아침 5시에 일어나 6시까지 집 근처인 독립공원을 1시간 가량 걷습니다."(장 총재는 2시간 30분 동안의 인터뷰를 끝내고 자리를 옮겨 점심을 같이했다. 점심 내내 국가 안보, 특히 한미연합사가 해체되어선 안되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리고 노산 이은상의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 술에 얽힌 일화 등을 흥미진진하게 들려줬다.)

  • 기획
  • 조상진
  • 2011.10.04 23:02

홍성대 이사장은

홍성대 이사장은 올해 일흔넷이다. 특별히 하는 운동은 없지만 칠순이라는 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좋은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화색도 10년쯤 젊게 보인다.그 많은 세월을 논리력과 사고력, 이성(理性)의 힘에 의지해 온 탓일까. 지금은 가끔씩 허탈감을 느끼고 숙면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정점을 향해 굳세게 달려온 뒤 끝의 허탈감 같은 것이라고 했다.'진기(盡己)'는 홍성대 이사장의 좌우명이다. 자기 자신을 다하라는 뜻이다.살아온 인생을 보면 진기야말로 그한테 딱 들어맞는 단어라는 생각이 든다.그는 정읍 태인면 태성리에서 7남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00년생인 부친(홍수표씨)은 서울 중동중학교 1회 졸업생이다. 국회부의장을 지낸 운제(芸齊) 윤제술 선생이 부친과 동기동창이다. 홍 이사장이 전주고를 놔두고 남성고로 진학한 것도 부친과 친구인 운제 선생이 남성고 교장으로 있었고 기차 통학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부친의 호를 따 설립한 명봉도서관의 현판은 운제 선생의 글씨다.어릴 때 가세가 기울었고 고교시절엔 거처를 열다섯번이나 옮겨야 할 정도로 가정형편이 어려웠다. 태인에서 신태인까지 자전거를 타고 간 뒤 통학열차를 타고 익산역에 내려 20분쯤 걸어 등교했다. 1957년 서울대 수학과에 입학한 뒤엔 과외 아르바이트로 등록금과 책값, 하숙비 등을 해결했다. 졸업 후에는 학원 강사로 진출했고 명성을 얻어 스타강사로 부상했다.과외 시절 광화문 서점가를 뒤져 만든 문제와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책을 저술한 게 '수학의 정석'이다. 많은 자료를 버리기가 아까웠고 내 책을 갖고 강의해야겠다는 욕심에서 책을 만들었다. 26살에 시작해서 3년만에 완성했다. 그리고 부(富)도 쌓였다.돈을 어디에 쓸 것인지 고민도 많이 했고 주변 인사들의 조언도 받았다. 결론은 인재양성이었다. 그리고 1981년 상산고를 설립했다. 그의 나이 마흔네살 때다. 올해 30주년을 맞은 상산고는 서울에서 상산고 진학반이 따로 있을 만큼 전국적인 명문사학으로 부상했다. 한번 집어넣으면 빼내 쓸 수 없는 학교법인에 번 돈을 투자, 사학다운 사학을 만든 것이다.사학에 대한 홍 이사장의 열정은 남다르다. 사립학교인 태인중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자신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당시 태인에서 전주나 익산의 중학교로 진학하는 학생이 서너명에 불과한데 태인중이 생기면서 100여명이 중학교에 진학했고 자신도 그중의 하나라고 한다. 사립학교가 없었다면 국민중 3분의 2는 중고교 문턱에도 가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다.그래서 사학을 곱지않은 시선으로만 볼 게 아니라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한다. 한국 자선단체가 네팔에 10억짜리 학교 지어주자 학생과 학부모, 정부가 그렇게 고마워하던 광경이 부러웠고 우리도 그런 풍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홍 이사장은 낯 내는 걸 싫어한다. 주변에 도움 줬던 일들을 물었더니 손사래를 쳤다. 1998년에는 거액의 사재를 출연, 모교인 서울대에 연건평 3600㎡ 규모의 초현대식 연구동인 '상산수리과학관'을 기증했다. 크고 작은 기부가 많았겠지만 그는 입을 다물었다.한국사립고법인협의회 회장, 서울대총동창회 부회장, 국제수학올림피아드후원회 회장을 역임했고 전북대 초빙교수를 지냈다. 전북대에서 명예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홍 이사장은 1남4녀를 두었다. 아들 상욱씨는 성지출판주식회사 대표이사 사장과 상산학원 이사를 맡아 부친의 육영사업을 물려받을 준비를 하고 있다.

  • 기획
  • 전북일보
  • 2011.09.27 23:02

홍성대 이사장(상산학원)

홍성대(74) 상산학원 이사장을 처음 만난 건 1983년 상산고에서 교생실습을 하던 때였다. 어느 날 이사장과의 간담회 일정이 있었다. 삽을 들고 화단을 가꾸던 홍 이사장이 신고 있던 장화를 벗고 옷에 묻은 먼지를 훌훌 털어내며 간담회 장소로 들어왔다. 메시지는 잊혔지만 그 첫 인상은 28년이 지난 지금도 새롭다. 나무 한그루마다 손 때 묻혀 가꾼 상산고는 조경협회가 선정한 한국조경 백선(百選)에 들 만큼 잘 가꿔져 있다. 그리고 이젠 명문 사학으로 우뚝 서 있다. 홍 이사장은 정읍 태인초등학교 총동창회장이다. 24일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를 앞두고 지난 22일 태인에 들른 홍 이사장을 만났다. 인터뷰는 태인 소재지에 있는 명봉도서관 관장실에서 2시간 반 동안 이뤄졌다.(인터뷰)▲총동창회장으로서 개교 100주년을 맞는 감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나라 잃은 암담한 시절에도 우리 선인들은 좌절하지 않고 배움의 요람을 열었습니다. 이 나라 교육사에 '1세기의 역사'라는 족적을 남겼으니 감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선친과 제 7남매가 모두 이 학교 동문입니다. 조카들도 이 학교에서 배움을 닦았으니 우리 집안은 3대가 이 학교를 거친 셈이지요. 태인초등학교는 바로 우리들의 고향 집입니다."▲이 곳 명봉(明峰)도서관은 어떻게 세워졌습니까."1979년 부친께서 돌아가셨을 때 많은 분들이 조문해 주셨습니다. 그 부의금에다 부족한 돈을 보태 '재단법인 명봉재단'을 설립하고 '명봉도서관'을 건립했습니다. 명봉은 아버지의 호입니다."명봉 도서관은 홍 이사장 생가 옆 2000여평의 부지에 2층 건물로 지어져 있다. 학생과 마을 주민들이 이용한다. 수형이 제법인 소나무와 잘 가꿔진 정원이 일품이다. 1년에 두차례씩 책을 구입하는데 책 구입비만 3000만원에 이른다. 유지관리비에 연간 1억원쯤 소요된다고 한다.▲상산(象山)이라는 호를 갖게 된 계기가 있을 텐데요."고등학교 은사 중에 시인 장순하 선생님이 계시는데 저를 물끄러니 보시더니 '자네 호를 상산이라 하게. 태인 근처 상두산(象頭山)의 가운데 자를 뺀 것이네' 하시면서 지어주셨습니다. 그 뒤 친구들이 반놀림으로 저를 상산이라 불렀지요. 학교 이름을 상산고로 정하면서 호를 버렸습니다. 학교 이름에 설립자의 이름이나 호를 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선생님도 훗날 잘했다고 하셨습니다."▲상산고가 1981년에 설립됐으니 올해로 30주년을 맞았습니다. 애환도 많았을 법 합니다."개척자의 뼈저린 아픔을 맛보았고 시련을 겪었습니다. 때로는 정당성을 짓밟으려는 사람들과 외롭게 싸워야 했고 당연한 권리를 빼앗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욱 강해질 수 있었습니다. 쉬지 않고 걸어 온 끝에 떳떳한 오늘을 맞게 되었지요."▲2003년 자립형 사립학교 전환 이후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는데 도내 학생들이 입학하기엔 문턱이 너무 높은 것 아닙니까."첫 해 타 지역 학생 비율이 38%이던 것이 2006년엔 84%에 이르렀고 이대로 놔두었다간 90%를 훨씬 넘을 것 같아 2007학년도부터는 25%를 전북지역 학생을 뽑는 걸로 정했습니다. 고향에서 후학을 길러 보겠다는 당초의 제 뜻이 무너질 것 같아 그렇게 했습니다."▲전국 각지에서 온 학생들을 바라볼 때 뿌듯하시겠습니다."수도권 학생이 60%쯤 되고 제주와 강원도에 이르기까지 고루 분포돼 있습니다. 경상도에서도 우수 인재가 많이 오고 있어요. 교정에 울려퍼지는 팔도 사투리는 마치 천당의 화음처럼 들려요. 지역감정은 어른들에게나 있지 학생들 사이에는 전혀 없습니다."▲타 지역 학생이 많은 걸 배타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만."저는 학생들에게 '네가 몸담은 터전을 영화롭게 하라'고 가르칩니다. 우리지역을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하고 좋은 감정을 갖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지 않겠습니까. 타 지역이라고 해서 차별하지 말고 이 지역 학생과 똑같이 함께 안아야 할 것입니다. 전북발전은 이 고장에서 얼마나 훌륭한 인재를 많이 길러내 내일을 약속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공부 잘하는 학생들끼리 경쟁하다 보니 내신성적 때문에 입시스트레스가 클 것 같습니다. 일부 중도 포기하는 학생들도 있고요."어느 학부형이 이런 얘기를 해요. 어느 대학을 가느냐도 중요하지만 내 아이가 전국의 뛰어난 인재들과 3년 동안 뒹글면서 선의의 경쟁을 하고 좋은 친구들을 사귀는 것 자체는 돈으로 살 수 없는 일이라고. 내신 문제는 대학마다 선발방법이 다양하기 때문에 그 방법을 찾아가면 극복할 수 있습니다. 대학들이 내신 위주로만 뽑았다면 명문대학에 들어간 우리 학생들의 숫자가 그렇게 많지 않았을 겁니다."상산고는 올해 서울대 37명, 연세대 88명, 고려대 85명의 합격자를 냈고, 의치한의대에만 102명이 들어갔다▲지난 4월27일 개교 30주년 기념식에서 '세계 속의 상산'을 강조하셨는데 어떤 의미입니까."세계 곳곳에서 기둥 구실을 해야 한다는 것, 매너리즘에 빠져선 안된다는 것, 신뢰할 수 있는 전통을 쌓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학교 문을 열 때 상산인들이 외쳤던 다짐이 있습니다. 전주 속의 상산, 한국 속의 상산을 뛰어 넘어 '세계 속의 상산'으로 우뚝 올라서자는 다짐이었지요. 세계 선진국들의 젊은이들 부럽지 않게 공부할 수 있는 학교를 만들고 싶었어요.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내 생애에 튼튼한 발판만이라도 다져두었으면 해요."▲투자인색, 부실운영 등으로 일부 사학에 대한 비판이 많습니다만, 상산고는 본보기가 될 정도로 대조적입니다. 기숙사, 체육관, 잔디구장, 강의동 등 계속 시설투자를 하시는데 지금까지 총 투자액이 얼마나 될지 궁금합니다."전체 사학인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비리는 발본색원돼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일부 사학의 비리가 전체인 양 매도되고 침소봉대되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학생들이 학교를 드나들 때마다 '도둑놈' 생각을 할 텐데 그런 환경에서 교육이며 인성이 어떻게 길러지겠습니까."상산고에 들어간 투자액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사학인 중에는 마음은 있지만 돈이 모자라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들한테 상처를 줄 수도 있어 돈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했다. 2003년 자립형 전환 이후에만 360억원이 투자됐고 2만여평의 학교부지와 10개 동의 시설을 건축했으니 대략 1000억원이 넘을 것으로 주변에서는 추정하고 있다.▲학교 기숙사 증축 때 건강이 좋지 않아 병원에 입원하시면서 '내게 무슨 일 있으면 이 돈으로 모두 결재하라'며 통 크게 통장을 내주셨다는 일화가 회자됩니다만."기자들이란, 어떻게 그런 일까지(웃음) 경추에 이상이 있어 9시간 반 동안 대수술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학교는 입원 사실도 모를 때인데 학교운영비 20억원하고 건축비 잔금에 쓰라고 통장을 내준 일이 있습니다. 이런 얘기는 쓰지 맙시다."▲이사장님과 수학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고, 고교생의 필독 참고서인 '수학의 정석' 얘기도 빼놓을 수 없겠지요. 책을 쓰게 된 동기가 궁금합니다."'수학의 정석'은 대학(서울대 수학과) 시절 고학(苦學)의 산물입니다. 등록금 책값 하숙비 등을 스스로 해결해야 할 처지였는데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과외 아르바이트를 했지요. 기존 참고서에 만족할 수 없었고 또 기왕이면 학생들에게 좋은 문제를 풀어주기 위해 광화문의 외국서적 판매점을 뒤지거나, 일본 미국 프랑스 등에 수소문해서 수학 관련 자료를 모았습니다. 아이디어도 얻고 좋은 문제들을 모았지요. 이때 새로운 아이디어로 주옥같은 많은 문제를 만들었습니다. 그대로 묻어두기가 아까워 책으로 엮어보자는 생각을 하게된 것이지요."▲1966년에 '수학의 정석'이 처음 나왔습니다. 성경책 다음의 베스트셀러라는데 지금까지 얼마나 팔렸을까요."올해가 발행 45돌입니다. 아마 4200만 권 쯤으로 추정됩니다."▲지금도 개정작업을 하실 때 직접 저술하시나요. 책 뒷면에 '도운이 이창형, 홍재현'이라는 이름이 있던데요."몇 해 전까지만 해도 새벽까지 원고를 쓰며 가다듬었습니다. 밥을 먹거나 차를 타고 가는 도중에도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바로 문제카드에 옮겼습니다. 이렇게 모은 자료(카드)가 서재에 가득하지요. 창형이는 사위이고, 재현(서울대 수학과 교수)이는 딸이지요. 둘은 서울대 수학과 동기생입니다. 개정판을 낼 때마다 사위와 딸의 도움이 컸습니다. 그 덕분에 더욱 좋은 책이 된 듯하여 뿌듯합니다. "'수학의 정석'은 교육과정 개편에 맞춰 5년 단위로 개편작업이 이뤄진다. 앞으로 훌륭한 필진을 찾아 딸 사위와 함께 개편 작업에 참여시킬 계획이라고 한다. '수학의 정석'은 세대를 물린 창의적인 전수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수학의 달인' '수학의 신(神)'이란 별칭이 있을 정도인데 수학이란 한마디로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굳이 말한다면 '논리력 사고력을 기르는 가장 으뜸 학문이자 멋진 학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수학은 수를 공부하는 학문이 아니라 수를 매개체로 논리력 사고력을 기르는 것이고 또 모든 학문은 수학의 토대 없이는 발전하지 못합니다."▲과거 '학교 세운 걸 후회한다'고 불만을 표출하셨습니다. 사립학교가 수조원의 국민 세금을 지원받는다면 정부의 규제와 간섭도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과거엔 사립학교 수업료가 공립보다 많았지만 1974년 고교평준화 이후 사립의 수업료를 공립 수준으로 낮춰 통제하기 시작했습니다. 교원 처우개선, 물가인상 등 수업료 인상요인이 20% 이상 생기는 해도 있었지만 수업료 인상률은 번번이 5% 미만에 그쳤습니다. 그러니 사립은 수업료만으로는 인건비도 충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 때문에 재정결함보조금을 지원받고 있습니다. 정부의 책임으로 인해 생긴 재정결손을 정부가 매워주는 꼴이지요. 분명한 것은 보조금은 수업료 부담을 줄여주기 위한 것이므로 학생과 학부모에 대한 지원이지 사학에 대한 지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수업료 통제 대가로 보조금을 주면서 정부가 시혜자 행세를 하고 간섭하는 것은 가당치 않아요." 상산고는 이 보조금을 한푼도 받지 않고 있다.▲교육의 평등성과 수월성을 놓고 이념 논쟁이 끊이지 않습니다만."이념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미래가 달린 문제입니다. 국경없는 무한경쟁 시대에 경쟁력을 갖추려면 인재를 길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수월성 교육이 필요하지요. 경쟁 없는 사회, 일등을 키워내지 못하는 나라는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원도 없는 우리가 가진 것이라고는 인적자원뿐이지 않습니까. 수월성 교육은 학생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라와 미래를 위한 것입니다. 사회주의 평등사상을 중시했던 중국도 지금은 철저한 엘리트주의 교육을 하고 있어요."▲얼마전 전북교육청과 전교조전북지부가 체결한 단체협약에 '사립교원 신규 임용 시 도교육청이 위탁받아 공개전형을 실시하거나 법인간 공동전형을 통하여 사립학교 교원을 임용하는 제도를 마련하도록 노력한다' 는 내용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한마디로 어처구니 없습니다. 노사협약은 노동자와 사용자간에 체결하는 것이고, 사립학교 교원의 임면권자(사용자)는 사학 이사장인데 왜 제3자인 교육청과 전교조가 단체협약을 체결한 것인지 이해되지 않아요. 구속력이 없는 일을 왜 하는지. 부질 없는 일이예요."▲전국구 1번 제의 등 과거 정치권의 유혹을 거부한 것으로 압니다만. 지금 그런 제의가 오더라도 같은 생각인가요."그동안 전국구뿐 아니라 국회의원 공천 유혹도 여러차례 받았지만 다 거부했습니다. 돈 벌고 명성 얻으면 정치권에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참 딱해요. 인재들을 유혹해 놓고 망가뜨리는 정치권도 한심스럽고요. '수학의 정석'은 제 자식 같은 놈이지요. 제가 평생 쓰고 고치고 다듬어야 할 책입니다. 정치를 하면 책은 누가 씁니까. 도자기 굽는 사람은 좋은 작품으로, 나 같은 사람은 좋은 수학 책을 쓰는 것으로 그 권위가 인정받는 사회가 돼야 선진국 소릴 듣습니다."▲이루고 싶은 꿈은 다 이루셨는지,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이런 저런 꿈이 많았지요. 일흔이 넘었는데 나이는 어쩔 수 없나 봐요. 뭔가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가도 '아, 시간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해요. 새로운 일을 벌이는 것보다는 상산고등학교가 젊은이들의 꿈의 동산이 되도록 마음을 쓰면서 여생을 보낼까 합니다. '수학의 정석'도 독자들의 계속적인 사랑을 받도록 하고요."

  • 기획
  • 이경재
  • 2011.09.27 23:02

심의두 이사장은

심의두 화산중학교 이사장은 9세때 어머니를 잃었다. 편부 아래서 자랐지만 본래 강한 성품을 타고 났다. '가장 영향력이 컸던 사람은 누구냐'는 질문에 대뜸 "혼자 엎어지고 깨지면서 자랐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번 좋은 걸 알게 되면 절대 놓치지 않으려는 억척스런 노력 때문에 올곧게 살아왔다는 생각이다.가정형편에 중학교를 마치고 일자리를 위해 1954년 상경했지만 6.25전쟁이 남긴 폐허는 연명조차 어렵게 만들었다고 한다. 야간 용문고교에 입학하고도 일주일간 배곯은 시골뜨기는 급기야 한강철교 난간으로 내몰려 극단적인 상황까지 처하게 됐다는 것. 현장 경고문을 보고 가까스로 맘을 추스려 행상과 열쇠공장 등을 전전하며 졸업장을 손에 쥐게 된다. 귀향 후 곧 입대해 군부대 배려로 복무기간에 대학과정(전북대학교 법대)을 마쳤다. 대학졸업은 꿈의 실현을 가능케 했다. 중학교 때 이상형이던 육영사업가의 길을 실제 행동으로 걷게 된 것이다.그 결과 화산중학교가 최초로 의무교육 시범학교와 자율중학교로 우뚝 섰다. 2009년과 2010년에는 교육과학기술부로부터 특성화 교실을 활용하는 '교과교실제 운영' 최우수학교로 선정됐다. 최근 3년 동안 '한국최고 브랜드 대상'(한국일보) 등 각종 언론사 및 관련단체의 6개상을 차지했다.개인적으로는 1995년 제2대 전북도 교육위원회에 진출해 후반기 의장직을 맡았다. 2000년에는 제27회 교단 문학신인상(시 부문)을 통해 늦깎이로 시단에 들었다. 그간 받은 제1회 경향사도상(경향신문 주최), 문교부장관상, 전북대상, 국민훈장 석류장 등이 보람과 평가로 돌아왔다.가족은 두 살 아래인 부인 이채영 여사와 4남이 있다. 장남 웅택(49. 전주효문여중 교무부장), 둘째 범택(46. 전주성심여고 교사), 셋째 헌택(43. 화산중 행정실장), 막내 양택(40. 전주 동암고 교사), 그리고 며느리들이 다같이 대학교와 중등학교에서 몸담고 있는 교육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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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11.09.20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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