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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더 이상 당신의 권력이 두렵지 않습니다

송원 배우다컴퍼니 대표 2019년 9월, 여성신문으로부터 전화 한통을 받았다. 송원님, 양성평등문화상 신진여성문화인상 수상자로 선정되셨습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공개기자회견을 통해 문화예술계 내 성폭력을 고발하고, 활동가의 삶을 병행한지 1년 만에 일이었다. 아무리 외쳐도 바뀌지 않는 폐쇄적인 분위기에 지쳐 자책이라는 깊은 수렁에 빠진 나에게 선물 같은 수상이었다. 지치지 말라고, 잘하고 있다고, 지금처럼 계속 외쳐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다시 달릴 힘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2018년 2월 26일. 전북지방경찰청에서 언론사를 통해 극단대표의 성폭력사실을 고발했다. 여전히 선명하게 기억나는 그날의 감정은 두려움과 외로움이었다. 피해자가 자신의 얼굴을 공개하겠다고 선언한 미투에 많은 언론사가 관심을 가졌고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기자들과 카메라가 몰려들었다. 그에 비해 함께 손을 잡고 기자회견을 가줄 동료들은 손에 꼽았다. 난생 처음해보는 기자회견 이후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상할 수 없어서 두려웠고, 함께 싸워줄 동료들이 없어서 외로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고 싶었다. 내가 잘못한 일이 아니라고. 잘못을 한 사람이 벌 받는 세상이 오기를 바란다고. 이후 지역 여성단체로부터 집회가 열린다며 발언을 해주길 바란다는 연락을 받았다. 참여하고 싶지 않았다. 기자회견 이후 피해자답지 않다는 말에 잔뜩 주눅이든 상태였고 거의 외출을 하지 않는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나간 그 곳에서 엄청난 광경을 목격 하게 되었다. 정말 많은 여성들이 손수 만든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함께하면, 아무도 다치지 않는다. 가해자는 감옥으로, 피해자는 일상으로 그녀들은 어떤 이유로 내 아픔을 나눠가져갔을까? 우리는 무엇으로 연결되어 있을까? 한 활동가 선생님이 내게 다가오셨다. 송원 씨의 삶에서 가치 있다고 믿는 것을 하면서 살아도 괜찮아요. 송원 씨의 남은 삶을 응원해요. 나의 위드유에요 나조차도 나를 끝없이 피해자의 위치에 놓고 검열했던 과거에서 탈출하는 순간이었다. 새로운 질문을 할 힘이 생기기 시작했다. 권력형 성폭력의 공통적 특징을 공부하고 누가 가해자에게 권력을 쥐게 했는가,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권력을 남용할 수 있게 했는가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연극정신이나 헝그리정신이 숨기려 했던 실체는 무엇이고, 예술계에 만연한 위계폭력, 노동착취, 불합리한 처우에 대한 접점에 성폭력이 어떻게 닿아있는지를 고찰하고자 했다. 나를 포함한 많은 여성예술인을 그토록 오랜 시간 고통 속에 살게 했던 원인의 실체가 보였다. 문제를 인식조차 할 수 없도록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철저히 숨겨두었던 진실. 관행처럼 뿌리 깊게 퍼져있던 문화. 그것은 성차별이었다. 미투를 고민할 때 가장 두려웠던 것은 앞으로 다시는 연극계에서 활동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3년이 지난 지금, 오히려 전보다 훨씬 활발하게 연극을 하고 있고 지역을 넘어서 더 많은 여성예술인 동료를 만나 안전하게 작업하고 있다.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연극이지 어떤 세상에 속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진짜 연극을 하기 시작했다. 두려움이 걷히니 나아갈 길이 보였다. 이제 내 자리는 내가 만든다. /송원 배우다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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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1.22 18:17

장애인 복지는 OK, 장애인 교육은 NO

김주은 도르 대표 교육이란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모든 행위를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이며 수단이고, 복지란 삶의 질에 대한 기준을 높이고, 국민 전체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두어 노력하는 정책을 뜻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시사논술 개념사전) 교육과 복지의 정의를 통하여 확인해 봤을 때, 교육은 인간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과정이며, 복지는 이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정책이다. 때문에 삶을 풍요롭게 사기 위한 요소로서 교육과 복지는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교육과 복지가 연결되어 있지만, 다소 다른 개념임을 알아야 한다. 인간은 교육을 통해 삶을 영위한다. 태어나서 밥을 먹는 것, 걷는 것, 옷을 입는 것과 같은 기초 생활부터, 더 나아가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맞는 직업을 선택하기 위해 배우게 되는 모든 고등교육까지, 평생 동안 교육을 받으며 살아간다. 복지는 주권을 가진 모든 국민의 행복한 삶을 위해 국가가 시행하는 정책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교육과 복지는 연결되어 있고, 인간은 교육이 없이 살아갈 수 없다. 이는 좋은 교육이 선행되지 않고는 좋은 복지가 만들어지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육이 없는 복지는 오히려 나태한 인간을 만드는 안 좋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장애인 역시 국가의 주권을 가진 한 사람으로서 좋은 복지 이전에 좋은 교육이 선행되어야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장애인 교육도구를 제작하고 소개하면서 만났던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이러한 복지와 교육의 차이점을 모르고 있었다. 또는 장애인 복지에 대해서는 적극적이나 상대적으로 장애인 교육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한 사례로 점자교육도구를 소개할 때 만났던 사람에게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시각장애인은 들으면 되지 굳이 점자를 배워야 하는가 물론 시각장애인의 나이와 장애 정도 ? 외부 환경에 따라 점자 학습 여부는 모두 다르지만, 보편적으로 점자를 배운 시각장애인이라면 교육 이후부터 장애인은 스스로 본인의 신체 일부를 사용하여 외부정보를 습득할 수 있다. 하지만 듣고 정보를 습득하는 것은 들을 수 있는 콘텐츠와 재생할 수 있는 이어폰이나, 스피커, 핸드폰 등 청력을 활용할 수 있는 매개체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외부 매개체가 시각장애인을 보조해 주어야만 정보를 습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듣는 것과 점자를 읽는 것은 장애인의 주체성을 결정하는데 커다란 차이를 가진다. 이 예시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점은 많은 비장애인들은 아직도 장애인을 누군가, 또는 무언가로 도움을 주어야 하는 의존적인 존재로 여긴다는 것이다. 역설하자면 듣는다는 장애인을 도와주고 보조하여 주는 복지에는 적극적이나, 상대적으로 장애인이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필수적인 교육의 중요성은 정작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육은 삶을 영위하는데 절대적인 요소이다. 더욱이 사회가 수용하기 어려운 개인적 특성을 가진 장애인이 비장애인에게 맞추어진 현재 사회에서 살기 위해서는 장애인 개인의 특성에 맞는 교육이 절실히 필요하다. 이 칼럼을 통해서 비장애인은 장애인에게 복지 이전에 교육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장애인을 의존적인 존재가 아닌 주체적인 존재로 바라봐 주길 바란다. 또 장애인 역시 비장애인에게 맞추어진 생활환경에서 비장애인과 동일한 권리를 누리며 살아가려면, 단순히 복지정책의 발전을 요구하기 이전에 개인의 교육과 학습이 매우 중요한 요소임을 확인하길 바란다. /김주은 도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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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1.15 19:20

교대역에 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해요?

정은실 사회활동가 우리는 상대방의 말에 제대로 반응하고 있는가? 5년 전 초겨울, 서울에 살 때 있었던 일이다. 3호선 양재역에서 교대역으로 걸어가야 하는 상황에 핸드폰 배터리가 다 돼서 전원이 꺼졌다. 양재역에서 교대역까지 지하철을 타면 한 정거장만 가면 되는 가까운 거리일 수 있지만, 걸어가면 40분 정도 걸리는 거리다. 걸어가기에 멀고 날씨도 쌀쌀해 평소 같으면 걷지 않았겠지만 머릿속이 복잡해서 찬 바람에 정신을 차릴 겸 걸어가기로 했다. 빠른 걸음이면 30분 정도에 갈 수 있으니 서둘러 가고 싶었다. 하지만 마침 핸드폰 배터리가 다 돼서 꺼진 상황이라 방향치에 길치인 나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 교대역으로 갈 수 있는지 몰랐다. 주변에 버스를 기다리는 직장인에게 물었다. 교대역으로 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해요?라고 물으니 직장인은 거기 멀어서 못 걸어가요. 지하철 타면 한 정거장이에요라고 답했다. 음? 약간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는가? 어느 쪽으로 가야 하냐고 물었는데 걸어가기 어렵다는 말이 돌아왔다. 제3자로 이 상황을 보니 질문에 적합한 대답이 아니었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었겠지만, 사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채 이런 식의 대화를 자주 반복한다. 예를 들어 다 끝나려면 얼마나 남았어?라는 질문에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어라고 답하는 경우가 있다. 말하는 이가 묻는 말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먼저 하는 것이다. 이처럼 말한다고 대화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양재역에서 질문을 받은 직장인의 걸어가기에는 멀어요.라는 대답은 사실 나를 걱정해주는 말이었다. 가는 길이 멀다는 것을 알려주고 친절하게 지하철 타면 한 정거장이니 도보보다 가깝다는 것까지 알려준 것이다. 나를 걱정해주고 대안까지 마련해주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다. 나의 궁금증은 해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멀지만 걸어가기로 했어요. 방향치라서 교대역으로 가는 방향을 모르겠어요. 어느 쪽으로 가야 할까요? 그제야 아, 저쪽으로 가면 돼요라고 손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알려주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며 그분을 지나쳐 교대역으로 향했다. 양재역의 직장인이 내 질문을 제대로 듣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자기 생각을 우선시했다. 그렇다면 잘 듣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잘 듣고 싶다면 상대방이 말할 때 자기 생각에 빠지거나 대답할 말에 대해 고민하기보다는 우선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귀와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위의 예시를 좀 더 들여다보자. A의 다 끝나려면 얼마나 남았어?라는 질문에 B의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어라는 대답은 A가 원한 답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A는 다시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원하는 답을 듣기 위해 아니, 끝나려면 얼마나 남았느냐고?라고 한다면 A도 B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것이다. B는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언제 끝나냐고 물어보니 재촉하는 느낌이 들어 방어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렇다면 A가 시작한 지 얼마 안 됐구나. 재촉하는 건 아니고 전체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 건지 궁금해서 물어봤어. 알 수 있을까?라고 다시 물어본다면 둘의 대화는 한결 편안해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말하는 이가 한 말에 대한 반응이나 대답을 먼저 한 후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신이 상대방의 말을 잘 듣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첫 번째 반응이다. /정은실 사회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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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1.08 19:41

미안해요, 리키들

박지원 변호사 작년 말 개봉한 켄로치 감독의 미안해요, 리키(Sorry We Missed You)는 한 택배노동자의 가족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1936년생의 이 노장 감독은 꾸준히 사회적 사실주의 영화를 제작해왔는데, 전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복지제도의 허점을 짚었다면, 미안해요, 리키에서는 시대적 트렌드로 불리는 플랫폼 노동의 취약성을 파고 들었다. 2008년 금융위기 여파로 실업 후 일용직을 전전하던 리키는 새 삶에 대한 희망을 안고 개인사업자 신분을 갖는 택배기사 일자리를 구한다. 성실히 일하며 간병사로 돌봄노동을 하는 아내와, 말썽도 부리고 철 들기도 하는 사춘기 자녀 2명과의 단란한 가정을 지키려 애쓰지만, 장시간의 고된 육체노동과 감정노동에 몸과 마음은 망가져가고, 자영업자라는 이유로 회사의 어떠한 보호도 없이 모든 불운과 책임을 개인적으로 떠맡으며 화목했던 가족 관계마저 무너져 내린다. 픽션인지 다큐멘터리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실적인 데다가, 배우들이 외국인이라는 점을 빼면 상황 자체는 영국인지 한국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우리와 비슷하다는 점도 씁쓸함을 더한다. 우리나라에서 올해 사망한 택배노동자의 수는 이미 10명을 훌쩍 넘겼고, 대부분 과로사로 추정된다. 실태조사 결과 집계된 택배노동자의 주당 평균 근무시간은 70시간, 월간 평균 근무일수는 25일을 상회한다. 산업재해 사건에서 과로로 인한 업무상 재해가 가장 쉽게 인정되는 업무시간 기준이 주당 평균 64시간이니, 가히 극한 직업으로 부를 만하다. 하루에 여러 시간은 보수를 받지 못하는 소위 까대기(분류 작업)에 쓰고, 남은 시간에는 수백 건의 물량을 1분에 1개꼴로 배달하기 위해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전에 초인종을 누르고 재빨리 돌아오는 사투를 벌인다. 짐을 든 채로 수만 보를 걷고 100층 가까운 계단을 오르내리는데, 과로가 되지 않는다면 도리어 이상하다. 다행히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구도가 점차 형성되고 있다. 택배노동자들이 입는 옷이나 받는 물건에도 새겨져 있고 작업지시에도 등장하지만, 대리점영업소와의 하도급관계나 위탁구조를 이유로 노조의 교섭에 응하지 않았던 원청회사는 작년 말 교섭에 응하도록 판결을 받았다. 택배기사의 근로자성을 인정하는 판결들도 올해 속속들이 이어지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전자상거래의 성장세에 물동량이 꾸준히 증가해오던 택배회사들은 코로나로 인해 비대면 소비까지 급증하자 미증유의 매출과 영업이익을 누리고 있다. 경영상의 어려움을 빌미로 무보수 분류노동을 택배기사에게 전가시키면서 비용은 부담하지 않으려 했던 사측 입장이 더 이상 사회적으로 공감받기 어려워진 것이다. 노동계 의견을 반영하여 택배기사에게 위탁계약갱신청구권을 6년간 보장하고, 운전종사자와 분류종사자를 구분하여 분류작업에 별도 비용을 청구할 수 있도록 근거를 마련한 생활물류서비스발전법안은 지난 20대 국회에서 폐기되었지만, 현 21대 국회에서 다시 발의되었고 여당 의석만으로도 단독 처리가 가능한 상황이다. 영화 원제인 Sorry We Missed You는 다의적 표현이다. 택배기사가 고객을 만나지 못한 채 물건만 두고 올 때 남기는 쪽지 문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정과 사회가 (택배기사) 당신을 놓쳐서 미안하다, 당신을 잃어서 미안하다, 당신이 그리웠다는 의미도 있다. 우리 사회와 전국의 5만 택배노동자들이 서로에게 미안해하거나 서로를 그리워해야 하는 일이 더 이상 계속되지 않기 바란다. /박지원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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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1.01 18:36

‘연극정신’과 ‘헝그리정신’ 사이 어딘가에 예술이라는 보물섬이 있을까?

송원 배우다컴퍼니 대표 스물 한 살의 겨울, 오디션을 보고 극단에 들어갔다. 잘은 모르지만 나는 단원이 되었고 단원이 되면 공연을 할 수 있다고 했다. 6개월간 청소와 인사, 설거지를 배웠다. 먼저 극단에 있던 사람들을 선배님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배웠다. 언제 어디서도 본적은 없지만 서로 익숙한 듯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은 분명 나보다 먼저 시작한 사람들 일 것 이라는 눈치도 배웠다. 그들을 모두 선배님으로 통일해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그들은 나에게 몹시도 사적인 것을 자유롭게 물어보았고 언제나 반말을 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절대 사적인 것을 묻지 말아야 하며 의견이 달라도 토론하는 것은 몹시 버릇없는 행동 임을 배웠다. 성격이 좋거나, 성실하거나, 분위기를 띄우거나, 빠릿빠릿하거나 여하튼 어떤 이유로든 단원으로서 좋은 평판을 갖는 것은 기본 중에 기본이라고 배웠다. 연극을 하기 전 사람이 되어라 라는 문구를 그 예로 배웠다. 7개월 째 부터는 공연연습이 시작되었다. 나는 경력도 없고 인맥도 없는 아주 어린 배우이기 때문에 어떤 급여나 페이는 받지 않는 것이라고 배웠다. 아! 오히려 아마추어인 나에게 수강료를 받지 않고 무대를 설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을 감사히 알라 배웠다. 그렇지만 연습에 방해되는 그 어떤 아르바이트도 하지 말라고 배웠다. 나의 정체성은 배우이기도, 아마추어이기도 했다. 몸매와 얼굴과 실력과 나의 모든 것은 언제나 평가의 대상이었지만 그것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배우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배웠다. 연극은 원래 배고픈 것이라는 통념과, 요즘 것들은 헝그리정신이 없다는 기라성 같은 선배님들의 일침 속에서 나의 20대는 예술이라는 보이지 않는 보물섬을 찾아 표류했다.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이 곳에서 살아남고 싶었고 이 곳에서 잘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아무것도 잘 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리고 스물다섯의 겨울, 극단대표의 성추행으로 인해 극단을 탈퇴하고 예술이라는 보물섬은 찾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 뒤로 3년의 시간이 흘렀다. 전 극단에 있던 다른 또래 동료 네 명도 극단을 탈퇴했다며 우리끼리 공연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가슴이 뛰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30만원씩 돈을 모았다. 우리끼리 역할을 분담했다. 대본을 찾고 포스터를 만들고 무대를 구상하고, 소품을 만들며 안무를 짜기도 하고 밤새 연습을 했다. 준비 기간 내내 우리는 자주 다투고 많이 웃었다. 아무도 혼나지 않는 이곳에서는 다툼을 통해 성장했고 우리는 다툴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공연당일 엄청나게 많은 관객들이 몰렸지만 선배들은 우리 작품을 혹평했다. 우리 연극은 실패한 걸까? 그런데 우리 공연이 왜 성공해야하지? 공연을 마치고 내게는 그들에게 되물을 힘이 생겼다. 이 글은 2020 연극의해 전국청년연극인 공론장에서 눈물을 꾹 참으며 한자 한자 발표한 위계폭력 경험담 중 일부이다. 현재를 사는 나는, 그리고 우리는 어떤 창작자로 존재해야 마땅한 것인가 묻고 싶었다. 또 사업수행과 더 나은 결과물제출이라는 기존의 예술지원방식이 무엇을 놓치는지 말하고 싶었다. 지금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창작환경 속에서 더는 아픈 경험담이 연극정신이라고 일컬어지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미 너무도 불균형한 지역문화예술계의 권력관계 속에서 우리는 어떤 목소리에 귀 기울어야 할까? /송원 배우다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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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0.25 16:26

유니버설디자인이 각광받는 이유

김주은 도르 대표 유니버설 디자인이란 성별, 연령, 국적, 문화적 배경, 장애의 유무에도 상관없이 누구나 손쉽게 쓸 수 있는 제품 및 사용 환경을 만드는 디자인이라 정의되어 있다. (출처. 두산백과) 우리는 이러한 유니버설 디자인을 일상생활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대표적인 예시로 건물 입구에서 볼 수 있는 경사로와 비상구에서 볼 수 있는 눌러서 문을 여는 패닉바가 있다. 두 디자인 모두 힘이 약한 노약자부터 보행이나 신체 사용이 불편한 장애인, 짐을 들고 있어 일시적으로 몸의 사용이 불편한 성인들까지 모두가 손쉽게 쓸 수 있는 유니버설 디자인이다. 유니버설 디자인은 왜 각광받고 있는가? 고영준 님의 사용자 중심의 유니버설 디자인 방법과 사례 책에서 살펴보면, 크게 3가지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첫 번째 이유는 고령화이다. 전 세계적으로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고, 이에 따라 우리는 사회에서 노인을 배제하지 않고 함께 살아갈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유니버설 디자인은 연령에도 상관없이 사용하기 편안한 제품 및 환경디자인으로 고령화 사회의 대안이 될 수 있다. 두 번째 이유는 노멀라이제이션(normalization)이다. 노멀라이제이션은 사회복지에서 많이 사용하는 용어로 고령자나 장애인 등을 격리 대상으로 인식하지 않고 다른 사회 구성원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이념이라 말할 수 있다. 노멀라이제이션의 배경에는 오히려 건강한 사람들로만 구성된 사회가 사실상 비정상적인 사회이며, 장애인과 노인 등 사회적 약자들이 대등한 인간으로 함께 살아가는 사회가 정상적이라 말하고 있다. 이러한 노멀라이제이션의 이념이 실행되기 위해서는 장애인과 노약자들이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유니버설 디자인의 확대가 필수적이다. 세 번째 이유는 세계화이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많은 국가에서도 외국인 거주자 및 관광객이 증가하고 있으며, 이는 세계화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늘어나는 외국인을 배려하는 방법으로서 직관적으로 사용할 수 있고, 쉽게 인지할 수 있는 유니버설 디자인은 매우 현명한 선택이다. 위와 같은 분명한 이유들로 유니버설 디자인은 앞으로 더욱 주목받게 될 것이다. 앞선 칼럼에서 여러 차례 말했던 바와 같이 우리는 장애의 범위를 더욱 폭넓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다름만으로 장애를 판별할 수 없으며, 개인의 특성을 사회가 수용하지 못했을 때 장애는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더 많은 사람을 수용하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장애를 줄이는 방법이며, 그 안에서 유니버설 디자인의 역할은 필수적이다. 때때로 유니버설 디자인 또는 무장애 환경디자인은 장애인과 노약자가 누리는 특혜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건강한 사람만이 모든 걸 누릴 수 있다는 차별적인 사고에서 나오는 말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질병으로, 사고로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으며, 장애인이 되지 않더라도 노인이 되어 이러한 환경과 제품 디자인이 기필코 필요할 때가 다가온다. 유니버설 디자인이란 단순히 물리적인 변화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환경적인 변화와 함께 장애인과 노약자를 사회에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우리 모두의 배려와 노력이 있어야만 진정한 변화를 만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최선을 다해 타인을 배려하고 함께하려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분명 훗날의 우리에게 다시 돌아올 행동과 시선이 현재 우리의 노력만큼 따뜻할 것이다. /김주은 도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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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0.18 15:44

마음의 방역이 필요해

정은실 사회활동가 지난 10월 10일은 정신질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고, 정신건강의 소중함을 알리기 위해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정한 세계 정신건강의 날이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지속 되며 마음 속 거리 또한 멀어지고, 눈에 보이지 않게 퍼지는 것은 바이러스뿐만이 아니다. 우리들의 정신건강에도 바이러스가 퍼지듯 코로나우울(코로나블루-코로나19로 인해 우울감을 느끼는 경우를 뜻함)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감염에 대한 불안이 증가하며 감염사망 가능성에 대한 강박적 생각이나 뉴스 보도에 과잉집착이 일어나고 현실적인 불편감과 고립감에 대한 걱정, 일상이 무너진 것에 대한 분노가 자리하게 됐다. 확진자의 경우, 주변인의 부정적인 시선, 사회의 부정적 인식에 대한 낙인감을 갖게 되며 심리적 압박감까지 받는다. 다양한 심리적 어려움이 바이러스보다 더 무섭고 빠르게 우리의 일상을 잠식하고 있다. 그렇지만, 특성상 정량적 측정이 쉽지 않은 관계로 심리적 어려움을 인지하고 대응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기에 우리들의 정신건강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방역이다. 마음방역의 첫 번째는 지금 드는 이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나 세균 감염에 대해 많은 사람이 불안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내 안에 생겨나는 불안감이나 불편감, 분노 등의 감정을 자연스러운 감정으로 받아주고 인정하는 것을 내가 먼저 해주어야 한다. 두 번째는 불안을 자극하지 않는 것이다. 불안한 상황이 지속 되면 대처하기 위해 정보를 검색하게 된다. 하지만 확인되지 않은 소문과 뉴스에 지나치게 노출될 우려가 있고, 오히려 불안감만 키울 수 있다. 비가 올 때 준비해야 할 것은 걱정이 아닌 우산이듯이, 코로나19에 필요한 것 역시 불안이 아닌 위생 및 면역력 관리와 방역수칙 지키기이다. 정부 지침에 집중하고, 신뢰할 수 있는 매체를 선별하는 것이 필요하다. 세 번째는 규칙적인 생활이다. 사회적 거리두기 이전의 집은 긴장하고 피곤했던 몸을 이완시키는 쉬는 공간이었다면 이제 집은 휴식처이면서도 학교이고, 사무실이자 일터가 되었다. 재택근무, 온라인 수업 등 이런저런 이유로 많은 사람이 자가격리와 비슷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생활패턴이 흐트러지기 쉽다. 다양한 생활을 영위하는 공간에 맞는 생활규칙과 루틴을 만들어야 하고, 이를 지켜가는 연습을 지속해야 한다. 일상을 단단하게 지키는 것이 몸과 마음을 보호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네 번째는 가벼운 운동하기이다. 최소 30분 가벼운 운동을 시작해보자. 스트레스 호르몬이 지속해서 과다 분비되면 우리의 몸과 마음에 균형을 잃게 되는데, 이 호르몬은 운동을 통해서 소비시킬 수 있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가벼운 산책을 하거나 집안에서 스트레칭 또는 요가와 같은 실내 운동을 하자. 집에 있는 시간이 오래될수록 운동을 통한 신체 활동이 꼭 필요하다. 다섯 번째는 나만을 위한 평화로운 시간 만들기이다. 명상을 하거나, 차를 마시거나, 일기를 쓰는 등 아무 일도 없는 듯 평화로운 순간을 만든다. 종일 집에서 누군가와 같이 있게 되더라도 나만을 위한 순간을 잠시 갖는다. 마음은 몸의 상태를 따라가기 쉽다. 천천히 심호흡을 가다듬으며 안정을 찾듯이 편안할 때 하는 행동을 해보자. 코로나로 지친 마음을 위로하며 우리 모두에게 응원을 보낸다. /정은실 사회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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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0.11 17:35

보건의료 철의 삼각에서 적정비용 찾기

박지원 변호사 의사 집단휴진이 한 달 이상 소요 끝에 마무리되었지만 여전히 국시 거부 의대생 문제로 개운치 않은 뒷맛이 남아 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의료진에 대한 긍정적 여론과 더불어 공공의료 강화 요구도 높아졌기에, 의료계에 발전적인 정책 추동력을 얻을 수 있는 호기였음에도, 생산적 토론이 아닌 비방과 곡해 끝에 여론마저 싸늘히 식어버린 안타까운 상황이다. 경제학에서는 삼원불가능성의 정리(Impossible Trinity)라 하여 개방경제가 동시에 달성할 수 없는 세 가지로 환율 안정, 통화정책의 독립성, 자본이동의 자유화를 꼽는다. 이런 트릴레마(Trilemma)는 보건의료계에도철의 삼각(Iron Triangle of Healthcare)이라는 개념으로 존재한다. 한정된 자원의 제약 때문에 동시 달성될 수 없는 철의 삼각이란 의료의 질, 의료 비용, 의료 접근성 세 가지다. 연구와 토론을 거쳐 위 세 점을 이은 삼각형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 즉, 사회가 감내할 수 있는 적정 비용과, 그 귀결로 어디까지 의료 접근성이나 질을 희생할지 논해야 한다. 말은 쉬우나 현실에서 구현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모양이다. 괜히 이름부터 불가능성 정리가 아니었음이 이번에 여실히 드러났다. 포문은 정부에서 열었다. 의대 정원 확대를 통한 지역의사제 실행과 공공의대 설립 계획을 발표하면서 제시된 명분은 종별, 지역별 의료 격차 및 의사 수 부족 문제였다. 이에 대한 의협 측 반대 논리도 수긍할 만한 것이었다. 현행 의료전달체계와 수가 구조 하에서는 결코 의도한 정책 효과를 달성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비극은 논의가 그 수준에서 멈춰버린 데 있다. 정책 취지는 삼각형의 한 꼭지점인 비용을 일부 희생하여 정원 확대와 공공의대 설립을 통한 지역의사제를 실시함으로써 나머지 두 꼭지점인 의료 접근성과 의료 질 향상을 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비용을 지출할 만큼 접근성과 질에 문제가 있는지, 또 같은 비용을 공공병원 투자나 기피과에 대한 수가 현실화 등 대안책에 투입하면 접근성과 질 향상에 더 좋은 효과를 낳을 수 있는지 등이 논의되어야 했다. 정부 의도만큼 기피과 현상과 도농 격차 문제 완화하려면 수가를 어떻게 얼마나 개선해야 하는지, 의료전달체계 개선이나 공공의료 투자에 정부재정은 얼마나 필요하며, 이 때문에 인상되어야 하는 건강보험료는 어느 수준인지 등을 논의의 장에 끌어왔다면 단순한 이익단체의 밥그릇 싸움 수준으로 매도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노력 없이 쓸 데 없는 일 한다 정도 주장으로 집단 휴진을 강행해서는 코로나 상황에 우호적 여론을 기대하기 어려움은 당연치 않나. 정작 정부는 지역가산수가나 공공병원 확충 등 보완책을 의료계와 협의해 추진하겠다는 태도를 밝힌 반면, 의협은 전교 1등 의사, 의대 입시 특혜 등 본질과 거리가 먼 프레임으로 여론전에 화력을 소진하며 입지를 약화시키더니, 이후 합의에 반하여 휴진을 계속한 전공의협의회가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 반수를 의료인으로 요구했던 사정, 의대생이 국시 응시 의사를 표명하면서도 끝내 국민들에게 양해를 구하지 않은 정황 등이 잇따르며 여론의 추는 기울어버렸다. 현장 경험과 전문성을 지닌 의사 집단의 선의와 정책능력에 대한 사회적 신뢰는 금번 정책의 추진이나 철회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다. 앞으로는 더 대국적인 관점에 기반을 둔 건설적인 대화와 협상을 기대해본다. /박지원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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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0.04 16:16

누구를 위한 표현의 자유인가

송원 배우다컴퍼니 대표 올해 초 폭력적, 선정적 장면을 그대로 무대에서 재현한 것으로 논란이 되었던 서울연극제 출품작의 연출과 n번방 사건과 유사한 소재를 담아내면서도 주인공 남성을 미화해 문제가 된 넷플릭스 작품 감독은 모두 표현의 자유를 근거로 예술을 그저 예술로 봐달라며 표현의 자유를 항변했다. 또한 최근 자신의 작품 복학왕 304화에 인턴이었던 여성이 성상납 이 후 정직원이 됐다는 장면을 그려 넣어 논란이 된 기안84가 지난 주 프로그램과 방송국 측의 공식 사과나 별다른 조치 없이 슬그머니 방송에 복귀했고 이를 옹호하는 유명 동료 웹툰작가는 만화를 만화로 보라며 시민독재로부터 표현의 자유를 지켜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예술가 혹은 창작자로서 가져야 할 직업윤리는 망각한 채 너무도 당당하게 표현의 자유라는 권리만을 주장하는 그들의 태도를 동료예술인으로서 인정할 수 없다. 그리고 여성예술인으로서 묻고 싶다. 여성의 삶을 희화화하고 축소하며, 대상화하고 폄훼, 혐오하는 방식의 창작물에게 표현의 자유라는 권리를 왜 존중해야 하는가? 도대체 예술의 가치는 얼마나 숭고한 것이기에 타인의 인권을 빼앗고 짓누르는 것조차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포용해야 하는가? 다음 작품을 준비 중이다. 즉흥극과 페이크다큐, 비평극과 다원예술 그 중간 어디쯤에서 작품의 형태를 정의 내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메시지는 명확하다. 고전이라는 미명하에 존엄성과 주체성을 빼앗긴 수많은 여성캐릭터의 이름을 다시 호명하고 동시대적 관점으로 그들의 삶을 재해석하고자 한다는 것. 시놉시스를 작성하고 지원 서류를 꾸린 뒤 연극, 성악, 전통, 무용, 문학 총 다섯 개 예술장르에서 활동하는 여성예술가를 섭외하기 시작했다. 활동장르와 범위가 넓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섭외는 첫 시도부터 난항을 겪었다. 작품의 취지는 공감하지만 자신이 배우고 익힌 고전을 비평할 자격이 없다.는 말로 거절을 당한 것이다. 나의 설명이 부족한 것일까, 작품이 매력적이지 않아서 일까 고민에 빠져 있던 나에게 두 번째 거절의사를 밝힌 예술인의 대답은 고민에 확실한 해답을 찾게 했다. 선생님들께서 해 오신 작업에 누가 될 것 같다.는 것. 그 뒤로도 네 번의 시도를 해봤지만 같은 맥락의 이유로 번번이 거절당했다. 그녀들은 모두 작품의 메시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고전을 신성시하도록 교육 받았던 예술교육의 폐해, 좁은 지역사회의 창작 활동영역, 단 한편의 작품을 출연하더라도 그 작품의 내용과 예술가의 신념을 동일하게 인식할 것을 우려하는 마음, 추후 논란이 될지도 모르는 작품에 자신에게도 꼬리표처럼 따라 붙을 페미니스트라는 평판, 이로 인해 다음 프로젝트를 이어줄 인맥을 놓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여하튼 다양한 이유들이 복잡하게 얽혀 출연을 주저하게 만든 것 이었다. 이것은 그저 수많은 작품 중 단 한편의 연극일 뿐인데도... 나는 이번 섭외과정에서 알게 된 여성 예술인들의 학습된 두려움을 보며 예술을 예술로 봐달라는 워딩이 가진 의미와 가치는 결코 모든 예술인의 표현의 자유를 담보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이미 주류가 되어버린, 그래서 대중을 설득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경험과 평판이 충분히 축척된, 때문에 다양한 측면에서 고려하고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는 소위 가진 자의 편한 작업방식을 지키기 위한 문구였음을 분명하게 느낀다. /송원 배우다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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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9.27 16:10

미디어가 말하는 장애인

김주은 도르 대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분리되어 있는 현재의 사회에서 우리는 오프라인보다는 온라인, 즉 미디어를 통하여 장애인을 처음으로 알게 될 확률이 높다. 때문에 미디어에서 장애인을 어떻게 표현하는지에 따라, 대중이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뀔 수 있다. [드라마 속에서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복수 응답)에는 항상 도움받는 대상(49.1%) 가족의 애물단지(30.2%) 등 부정적인 평가가 많았다. 여성 장애인에 대해서는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청순가련형 이미지라는 답이 39.0%로 가장 높았고, 비운의 여주인공이라는 답도 28.9%나 돼 장애인에 대한 이미지가 정형화돼 있음을 나타냈다.] 2005년 경향신문에 TV 드라마 속 장애인 연약한 애물단지?라는 기사의 한 부분이다. 이와 같이 2000년대만 해도 장애인에 대한 이미지는 굉장히 의존적이며 부정적이었다. 이러한 미디어가 만든 이미지는 장애인에 대한 선입견이 되어, 장애인들은 항상 그 선입견과 싸워야 했다. 장애인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하기 전에 장애라는 특성만으로 먼저 평가되어야 했던 것이다. 반면 2020년 현대에 들어서, 개인적으론 미디어에서 장애인을 나타내는 것에 대하여 많이 성숙해졌다고 생각한다. 2019년도에 개봉한 [나의 특별한 형제]와 [증인]은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들이다. 하지만 여기선 장애인을 특별히 의존적이거나 그들의 힘듦과 어려움을 바탕으로 영화의 내용을 전개하지 않았으며, 그저 한 개인이 자신에 맞게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담았다. 영화 외에도 요즘은 장애인 또는 장애를 가진 부모가 장애를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자유롭게 드러내는 모습을 지상파 방송과 유튜브를 통해서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이와 같이 최근의 미디어는 장애인이 자신의 장애를 인정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많이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미디어의 파급력은, 더 많은 장애인들이 사회에 나올 수 있도록 용기를 주며, 사회에 나온 장애인들이 장애라는 특성으로 자신을 판단하는 사람들의 선입견을 깰 기회를 얻는다. 고령화 때문에, 출산 나이의 증가 때문에 여러 가지 원인으로 우리나라의 장애 인구 비율을 계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장애의 정의 또한 사회?환경이 개인의 특성을 수용하지 못할 시 장애로 판명하도록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들로 우리 사회의 장애인의 비율은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소수가 아닌 장애인과 함께 현 사회를 살아갈 방법을 강구해야 하며, 그 가운데 미디어의 역할은 매우 크다. 이 글의 목적은 현재의 사회와 미디어를 비판하려 함이 아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미디어는 더욱 성숙해졌고, 미디어의 이런 바른 표현은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는데 큰 효과를 내고 있으며, 그 파급력은 더 많은 장애인들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미디어는 지금과 같이 지속적으로 우리 사회의 장애인이 함께 있음을 고려하고 그 장애인의 이미지를 정형화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미디어를 받아들이는 소비자 우리 역시 책임감을 가지고, 미디어가 바르게 표현하고 있는지를 확인하여야 한다. 장애인을 배려하는 미디어 매체의 노력과 미디어를 보고 명확히 비판할 수 있는 소비자의 시선이 함께 했을 때,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앞으로 더욱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하는 사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김주은 도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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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9.20 16:18

지금 나의 상태 알기

정은실 사회활동가 2년 전 필라테스 수업에서 코어 운동 자세가 훌륭하다는 칭찬을 받았다. 그런데 운동을 지속해갈수록 선생님도 나도 의문이 생겼다. 건축전공의 특성상 하루 10~12시간 이상을 의자에 앉아있고, 20시간 이상 일하는 때도 많았다. 게다가 운동이라는 단어가 삶에 없던 나에게 단련된 근육이 있을 리 없었다. 2~3개월이 지나고 우리가 내린 결론은 잘 단련된 코어근육이 아니라 몸에 배어 있는 긴장하는 습관이 원인이었다. 또, 4~5년 전 도수치료 물리치료사가 몸에 힘을 빼세요.라고 말하면 그 말이 어찌나 어려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결국 선생님은 같은 말을 여러 번 다시 했다. 그럴 때면 의문이 생겼다. 응? 어떻게 힘을 빼는 거지? 힘을 빼라고 하면 다시 힘이 들어가는 거 같고 자세가 편안해지지 않았다. 사실은 내 몸에 힘이 들어가 있는지도 몰랐다. 힘을 빼라는 말에 아~ 내가 힘이 들어가 있구나 하고 깨달았다. 이후에 몇 번의 유사한 경험이 이어지면서 알게 됐다. 긴장이 너무 익숙해서 스스로가 긴장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긴장한 몸으로 살고 있었다. 놀라웠다. 경직되거나 긴장하는 경우가 곧잘 있다고만 생각했다. 긴장이 이미 숨 쉬듯이 당연해서 긴장한 줄도 몰랐다니 몹시 당황스러웠다. 나의 몸과 마음에 미안했다. 많이 힘들었을 텐데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주인 때문에 지속해서 방치당해온 몸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내 몸의 상태를 알고 나니 돌아봐 지는 것들이 많았다. 소화가 잘되지 않아 체하는 일이 자주 있었고, 밤에는 잠이 들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길었다. 일이 과하거나 압박감이 클 때면 날카롭게 반응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친구들에 비해 작은 일의 변화에도 예민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편이었다. 긴장된 상태로부터 여유가 없어 벌어지는 일들이다. 긴장은 꼭 부정적인 발현만 있었던 건 아니다. 긴장은 나를 나태하지 않고, 보다 활력적이고, 생산적으로 만들어줬다. 힘들고 그만두고 싶을 때 행동하게 만드는 촉진제가 됐다. 지속적인 긴장으로 주변 사람들의 심리 변화를 빠르게 인지했고, 그에 맞는 대응도 빨랐다. 심리학자 K.레빈의 심리학 표현에 따르면 인격은 중심영역과 여러 하위영역으로 분화되어 있는데, 각 영역은 긴장을 내포하고 있으면서도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어떤 욕구나 의도가 생겼을 때 특정한 하위영역의 긴장이 높아지면 중심영역에는 불균형이 생기고, 전체적으로 균형을 회복하려고 하는 경향 또는 힘이 생긴다. 그러나 행동함으로써 목적에 도달하고 욕구가 충족되면 다시 균형상태가 회복된다고 한다. (두산백과) 나의 상태와 긴장이 운용되는 원리를 이해하고, 생활에서 여유를 가지는 노하우가 생겼다. 긴장이 기본값이어서 경계하는 마음 20~30%와 나의 현상태를 유지하려는 마음 20~30%가 이미 차 있어서 쉽게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가 많으니 한 번 더 듣고 한 번 더 생각해야 한다. 또한, 팽팽하게 당겨져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상태가 곧잘 반복되기 때문에 일이나 관계에서 10~20% 정도의 여유를 항상 가져야 하는데, 이를 갖지 못해서 끊어지는 때가 생긴다면 주로 원인은 상대가 아닌 나로부터 비롯되는 때가 많았음을 되새기며 탓하는 마음을 먼저 내기보다는 내가 어디서 끊어지게 됐는지 살피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 이렇듯 스스로의 상태와 마음씀씀이를 알고부터는 마음의 여유를 어떻게 만들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정은실 사회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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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9.13 15:33

출산을 주저하게 만드는 정상가족의 높은 문턱

박지원 변호사 지난 연재를 통해 저출산 관련 입장을 밝혔다. 저출산을 암울한 미래의 원인이 아니라 누적된 과거의 결과로 볼 것, 저출산이 개인의 자유와 권리 행사의 일환이라면 긍정하되, 사회 문제에 대한 불만의 징후라면 해결책을 찾는 대화의 실마리로 쓰자는 것과 더불어 정책방향도 경제성장을 위한 인구 통제가 아니라 삶의 질 향상에 무게를 두자는 정도였다. 정부 역시 2018년부터는 출산율에서 삶의 질로 정책 초점을 전환할 계획임을 밝히면서 일자리, 주거, 보육, 교육 등 문제를 하나하나 짚어가고 있기에 고무적이다. 어찌 첫 술에 배부르랴. 소득과 고용안정성, 부동산과 사교육 등 밤새 토론해도 끝나지 않을 논의에 말을 더 보태지는 않겠다. 다만, 혹시 간과한 점은 없는지 짚어보려 한다. 그간의 정책 공급은 혼인한 부부의 출산을 독려하는 데 집중해왔고 어느 정도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결혼이 늦어지는 만혼과 결혼을 꺼리는 비혼이 보편화되면서 정책 효과가 줄어들자, 이제 정부는 어떻게 젊은이들을 빨리 결혼하게 만들지 궁리하는 모양이다. 고민의 관점을 달리해보는 것은 어떨까. 결혼 없는 출산도 생각해보자는 이야기다. 결혼을 꺼리는 정책수요자의 말을 들어보면 집을 마련하기 힘들다거나(대체로 남성), 시댁/처가를 만들고 싶지 않다는(대체로 여성) 현실적인 이유에서부터, 구속받기 싫고 평생 한 사람만 사랑할 자신도 없다는(남녀 공통) 철학적 이유까지 다양하지만, 결국 결혼과 가족제도를 너무 무겁게 느낀다는 것이 핵심이다. 가부장제 하에서 짊어져야 하는 부양의무, 두 배로 확대된 직계와 방계가족에 수반하여 요구되는 각종 의례와 노동을 고려할 때, 헌신과 희생만 요구될 뿐 별달리 효용이 와닿지 않는 가족제도에 편입되는 것이 부담스러워 결혼을 꺼린다는 것이 개인화 성향이 강한 청년 세대의 속내다. 반대로 동거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인식을 보인다. 두 사람의 관계가 전통적인 가족 규범에 들어가지 않으면 명절, 제사, 경조사를 신경쓰지 않아도 되며, 여차하면 헤어질 수 있으니 단칸방 월세에 살아도 마음이 한결 가볍고, 같이 살다 좋으면 아이도 생각해볼 수 있겠다고 한다. 이처럼 개인간 결합은 원하지만 가문간 결합이라는 규범을 거부하는 정책수요층이 존재하는 이상, 결혼보다는 느슨한 시민 결합을 제도화하는 방안으로, 수 년 전 추진되다 발의되지 못한 공동생활계약이나 생활동반자에 관한 법안은 곱씹어볼 가치가 있다. 요지는 단순하다. 같이 사는 동반자를 등록하면 부부에게 주어지는 각종 권리나 제도 지원(상속권, 수술동의 등 중대 사무 결정권, 주거지원, 육아 관련 사회보장과 세제혜택 등)을 인정하되, 계약 해지는 이혼처럼 까다롭지 않다. 집안의 영속적 결합 대신 개인간 신뢰에 기반한 잠정적 결합을 존중하면서, 그 동안 사실혼의 이름으로 음지에서 어설픈 보호만 받던 관계를 양지로 드러내는 것이다. 몇 년 전 통계지만 한국의 혼외출산비율은 1.9%로 OECD 평균인 약 40%에 비해 현저히 낮다. 동거와 동성혼을 합법화하여 성적 문란을 조장한다는 둥 반대 의견이 벌써 들려오는 듯 하지만, 출산율을 고민하는 위정자라면 가족다양성을 포용하자는 목소리에 진지하게 귀 기울여볼 일이다. 결혼 없이 아이를 키워보겠다거나, 정상가족의 높은 문턱에 결혼을 단념하려던 이들에게 힘이 될 수 있고, 혼외출산이나 미혼모에 대한 지원과 인식 변화도 덤으로 따라올 것이다. /박지원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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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9.06 15:30

앞으로 나는 연극을 계속할 수 있을까?

송원 배우다컴퍼니 대표 올해 초 배우다컴퍼니는 열심히 준비한 무대작품제작지원사업에 선정되었고 8월 22일, 23일 전라북도공연예술페스타(JBPAF)에서 연극 자화상을 통해 관객과 극장에서 만나기를 고대하며 3개월간의 촘촘한 회의와 연습을 거듭하였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무대에서 실현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이미 잘 아는 우리는 지원사업이 정말로 절실했고 열심히 준비해서 거머쥔 이번 공연의 기회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연습 과정도 즐거웠다. 참여 예술인의 팀워크가 좋았고 각자의 전문성을 존중하며 무리 없이 잘 진행되었다. 대부분의 연출이 그렇듯 연습이 잘 될 때는 현장에서 만난 관객들이 어떤 눈빛과 소리로 에너지를 더해줄지 기대했고, 연습이 잘되지 않을 때에도 우리의 작품을 숨죽이고 지켜봐 줄 관객들을 생각하면 게으를 수 없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성실히 준비한 우리 작품은 극장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잠잠해질 거라 기대했던 코로나19는 다시 심각해졌고 재난상황이 여전히 낯설기만 한 예술단체와 주최 측은 아무 문제없이 페스타를 강행할 수 있을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 우리는 감히 반드시 극장에서 관객을 만나겠다는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1년 전 까지도 관객 없는 공연을 상상해 본 적 없었기에 관객 없는 공연을 직면할 자신도 없었다. 결국 배우다컴퍼니는 관객과 극장 모두를 포기하고 공연이 아닌 영상 형태로 작품을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공연 예정일이었던 22일, 23일에 촬영으로 작품을 마무리했다. 원래대로 라면 이 글을 쓰는 지금 즈음은 공연이 끝나고 가장 후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테지만 관객을 만나지 않기로 결정한 그날부터 내내 마음이 슴슴하다. 과정도 즐거웠고 첫 시도치고는 영상 결과물도 꽤 괜찮은 수준으로 완성되었는데 이상하게도 마음은 여전히 끝내지 못한 작업이 있는 듯이 찝찝하고 어색하다. 처음 느껴보는 이 감정에 관해 어떤 이름을 붙여야 답을 찾을 수 있을지 혼란스러운 고민은 계속된다. 나의 고민은 동료들의 삶과 닿아있다, 코로나19와 함께 찾아온 재난상황 속에서 많은 예술인들은 제한 당하거나 중지 당했다. 급여도 대안도 없이 그저 기약 없이 멈추거나 미루는 방식의 지시에 지쳐 더는 버티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원하던 원하지 않던 연극을 포함한 많은 예술은 이제 그 기조가 달라졌다. 예견했지만 막상 현실이 되고 보니 직면하기 두려웠던 나와 같은 예술인들과 코로나19의 종식만을 기다리며 일단 결정을 미루고 보았던 문화예술계 내 수많은 기관과 사업, 국가와 행정 모두가 아예 시스템을 통째로 바꿔야 할 시점에 당도했다. 부정하고 싶지만 사실이다. 이제는 함께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가능한 많은 소통 창구를 열어 현장의 목소리를 수용하고 현장에 숨을 불어넣어야 한다. 예술을 수치화하고 서류화하던 기존의 방식으로는 존폐 위기에 놓인 창작 현장을 되살릴 수 없다. 이 글을 마무리 지으며 두 개의 질문이 머릿속에 맴돈다, 이번에 내가 한 작업은 무엇이었을까? 앞으로 나는 연극을 계속할 수 있을까? 지금 나는 내 젊은 날을 다 걸고 매진했던 연극의 존폐 앞에서 내 존재를 다시금 사유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지금, 내가 연극인으로 할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것이기에. /송원 배우다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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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8.30 16:14

왜 선진국일수록 장애인이 많을까

김주은 도르 대표 한국보건사회연구원 김성희 님의 2018년도 주요 국가의 장애 판정제도 비교 연구와 2019년도 장애인 고용통계 자료를 비교해서 보았을 때 우리나라와 영국, 미국, 스웨덴, 호주, 독일 등 우리가 주로 선진국이라 부르는 국가들의 장애 출현율이 유의미하게 차이 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2019년도 기준으로 5.39%의 장애 출현율을 보였으며, 2018년도 기준으로 영국은 21.1%, 미국은 19.3%, 스웨덴은 16.1%, 호주는 17.7%, 독일은 14.9%의 장애 출현율을 보였다. 적게는 3배에서 많게는 4배까지 차이가 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왜 이러한 결과가 나왔을까? 정말 선진국일수록 장애인이 많은 것일까? 아니다. 이는 장애를 규정하는 범주가 다르기 때문이다. 과거의 우리는 장애를 오직 의료적인 기준으로만 판단했다.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고, 비정상적인 외형이나 기능, 즉 손상을 가진 사람을 장애라고 정의했다. 이와 같이 손상에 초점을 두었을 때에는, 사회는 장애는 장애를 가진 개인의 문제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 이 시선은 변화하고 있다. 장애를 개인의 기능적인 손상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장애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환경의 문제로 인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만약 애초에 장애인이 활동하기에 전혀 문제가 없는 환경이었다면, 예를 들어 세상에 있는 모든 길에 턱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또는 세상에 계단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신체 일부의 어려움으로 계단과 턱을 오르는 것이 불편한 사람을 지체장애라고 정의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는 시선이다. 다시 말하면, 사회환경적으로 개인의 특성을 수용하지 못하는 지점이 생겼을 시 사회적 의미에서의 장애가 생겨나고 이를 장애로 정의한다는 것이다. 현대의 변화된 시선에서 사회는 장애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받아들이지 못하는 환경의 문제로 보고 있다. 변화된 장애를 바라보는 시선은 위에서 언급한 선진국을 중심으로 적용되고 있다. 사례를 살펴보자. 미국은 비만을 장애의 한 영역으로 포함하고 있다. 비만인 사람은 취직에도 불이익을 받고, 만약 취직을 했다고 하여도 승진조차 어렵기 때문에, 사회적 의미에서 개인의 특성이 수용되지 못하는 것으로 보고 장애라고 정의한 것이다. 또 다른 예시로 스웨덴을 들 수 있다. 스웨덴은 외국 이민자를 장애의 한 영역으로 넣고 있다. 외국 이민자는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기 때문에 의사소통의 불편함이 수용되지 못하는 사회적 의미에서의 장애로 판별하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이러한 사례를 보고 부당하다 또는 비합리적이라고 말한다. 개인적인 의견으로, 이러한 반응은 우리 사회가 장애에 대하여 부정적인 편견과 낙인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장애라는 단어는 누군가와 우리의 차이를 규명하기 위한 단어가 아니다. 한 개인이 사회적으로 어떤 불편함을 겪고 있으며, 어떠한 배려가 필요한지를 확인하기 위해 규정한 단어일 뿐이다. 때문에 장애는 그 자체의 문제보다, 장애를 보는 우리의 부정적인 시선의 문제가 더 크다고 말할 수 있다. 장애 인식개선이란 이러한 부정적인 편견과 낙인을 수정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장애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어 장애라는 단어가 주는 편견과 낙인이 줄어들었을 때, 사회는 더 많은 장애인들을 포용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이는 장애인을 위한 더 폭넓은 복지정책과 배려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김주은 도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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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8.23 16:12

환대를 위한 내 마음의 여유

정은실 사회활동가 지난 칼럼을 통해 한 사람이 온다는 것은 단순히 만남의 시작이 아니라 한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가 오는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므로 그의 갈피를 살필 수 있는 환대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렇다면 환대는 어떻게 잘할 수 있을까?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집단과 집단의 접촉 등. 세상에는 다양한 만남과 접촉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 속에서 사람을 만난다는 일에 어마어마한 일이라는 표현은 다소 과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리고 때론 부담이 될 수도 있다. 가볍게 스치는 인연에 어마어마한 일이라는 수식을 달면 더 신경 쓰고 마음을 쏟아야 하는 일이 늘어나서 사람을 만나는 일이 마치 과제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어느 한쪽에 부담을 지우기 위한 일이 아니라 서로가 조금 더 편안하고 따뜻하게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처음 누군가를 만나거나 혹은 오랜만에 누군가를 만날 때 환하게 웃는 미소, 반가운 인사말, 적극적인 행동 등을 갖춘다면 상대방의 눈에 직접 드러나는 반기는 태도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행동들은 지속해서 일관되게 나오기는 어렵다. 모임의 자리가 길어지고, 대화가 길어지면 어느새 중심은 나에게로 향해 있다. 무슨 말을 할까?, 어떤 말을 할까?, 어떻게 이야기할까?, 언제까지 하는 거지?, 이거 끝나고 뭐하지? 등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할지에 쏠리거나 이미 이 자리에서 마음이 떠나 다음을 계획하고는 한다. 나에게도 자주 있던 일이다. 이런 자리들이 반복되는 와중에 어떻게 하면 그 만남이 가볍게 흘러가지 않고 서로에게 유의미한 자리가 되어 다시 만났을 때 반갑고 기쁜 관계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하다 보니 발견한 것이 있다. 누군가에게 환대를 잘 해주기 위해서는 우선으로 살펴야 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남의 상태가 아니라 바로 나의 상태ㅡ지금 나의 마음이었다. 첫 만남을 앞두고 내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다른 사람을 돌아볼 새가 없다면 앞서 보인 반기는 말과 행동들은 흉내에 그치고 말 때가 많았다. 예의를 갖추려고 만들어진 흉내는 보는 사람이 제일 잘 알고 상대가 그걸 알게 되면 가까워지는 깊이가 얕아지게 된다. 그리고 여러 번 만나게 된 사람들은 얕은 깊이를 알기 때문에 딱 그 깊이 만큼의 관계가 된다. 이는 반대로 생각할 때 더 잘 보인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 나나 우리보다는 자신만을 생각하고 챙기고 있다면 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잘 나지 않는다. 웃으며 대하고 있지만 자기 생각을 하느라 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거나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느라 내가 말할 시간을 주지 않으면서 같이 있는 곳에 내가 있을 자리가 점점 줄어든다면 나는 왜 여기 있지?, 없어도 될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렇기에 환대를 잘 해주기 위해서는 상대를 온전하게 챙길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하고 그 여유는 내 마음의 넉넉함으로부터 비롯된다. 자신을 챙기는데 급급하느라 상대를 살피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마음에 넉넉함이 남아 있어야 한다. 이 넉넉함은 굳이 애써 만들지 않아도 누구에게나 있는 당연한 것이야 할텐데 요즘 주로 접하는 뉴스를 보면 각박하다라는 말이 먼저 떠오른다. 각박한 세상에서 넉넉함을 찾아 사람이 오는 일을 어마어마한 일로 삼을 수 있고, 그 어마어마한 일을 통해 환대할 수 있는 넉넉함이 다시 생겨 각박한 세상에 조금씩 윤기를 더해가길 바라며 내 마음의 여유에 대한 다음 기고를 기다린다. /정은실 사회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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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8.09 16:42

저출산 담론이 의미를 가지려면

박지원 변호사 지난 글에서 연금 걱정 없게 아이 좀 낳아달라던 50대 지인을 향해 저출산은 외려 문명 발전과 인권 신장의 결과 아닌지 의문을 제기했다. 온통 저출산을 걱정하는 목소리 일색이니, 반골기질에 혼자 노라고 외치고픈 마음도 물론 있었다. 그러나 사실 공포 마케팅처럼 보이는 저출산 우려 담론에는 쉬이 동조하기 어렵다. 일단 국가주의적 시각이 내재된 듯해 거부감이 든다. 이런 위정자나 경영자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다보면 사람을 도구 취급하기 쉽다. 덮어놓고 낳으면 거지꼴 못 면한다며 국가가 불임수술하던 때가 60년 전이다. 출산율이든 GDP든 수치를 목표로 삼는 순간 비인간적인 발상은 끊어내기 어렵다. 대통령도 사람이 먼저를 외치는 시대다. 시민이 굳이 국가와의 일체감에 관료집단의 걱정까지 짊어져야 하나. 해서인지 정부야 아무리 나대봐라. 애 낳나. 고양이랑 살지라는 일갈을 듣노라면, 며느리에게 불임수술 권하러 온 공무원을 곰방대로 쫓아내던 60년대 시아버지 모습이 겹쳐 못내 후련한 마음도 든다. 국가주의적 저출산 우려 담론은 늘 암울한 경제 전망을 동반한다. 그러나 수십 년 뒤의 경제를 예측하는 시도는 그저 토정비결처럼 재미삼아 보는 것으로 족하지 않나 싶다. 식량은 산술급수로 증가하고, 인구는 기하급수로 증가한다던 맬서스의 예측이 어찌됐나. 화학비료로 식량 생산은 폭증했고, 인구 감소를 걱정하게 됐다. 70년대 로마클럽 보고서엔 석유가 2000년쯤 고갈된다더니, 올해 유가는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예측만 잘하면 돈을 버는 주식시장에서도 수많은 전문가 예측이 수개월을 못 버티고 명멸하는데 누가 수십 년 뒤를 장담하는가. 섣부른 예측보다 기술혁신과 인간의 적응력을 믿는 편이 낫지 않을까. 오죽하면 주식 격언에도 시장은 예측보다 대응이라 한다. 하나 더 보태자면 비관론자는 명성을 얻지만, 낙관론자는 돈을 번다. 사실 암울한 경제전망은 지난 세월 한국이 겪은 인구보너스 즉, 생산가능인구가 많고 부양대상은 적던 시기의 성장률이 유지될 수 없다는 불안에 기인한다. 그런데 지금 출산율을 높인다고 그 문제가 해결될까? 60년대 노동집약적 산업구조 하에서는 미숙련 노동이라도 투입만 하면 경제가 성장했다. 하지만 70~80년대 자본축적과 설비투자로 숙련 노동을 요하던 때를 지나, 이제 기계와 AI가 노동을 대체한다고 떠들썩하다. 생산요소 중 기술과 자본을 놓아두고, 노동에만, 그것도 질 아닌 양에만 천착해서는 나아갈 수 없는 시대다. 청년실업을 보면 노동 공급은 이미 과잉이다. 소비 감소도 걱정된다지만 우리 경제가 내수의존이 아닌 수출주도형이라는 점은 모두가 알지 않나. 또 어차피 지금의 소비는 대부분 돈 가진 사람이 쓰는 사치재에서 발생하니 수요의 기준도 인구가 아닌 자본에 방점을 두어야 맞다. 아이가 줄어도 유아용품 산업은 성장하는 이치다. 부양부담, 재정파탄이 우려된다지만 같은 맥락에서 소득과 자본 없는 청년은 생산가능인구라도 부양대상에 불과하다. 장기로 보면 베이비붐 세대가 파도처럼 인구 그래프를 쓸고 간 뒤에 오히려 부담 없는 인구구조가, 심지어 다시 인구보너스기가 올 수도 있다. 누구도 국가나 특정 세대를 부양하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시선을 돌려 현 구성원에게 충분히 행복한지 물어야 비로소 의미있는 대화가 시작되지 않을까. 낳고 싶은지, 낳기 싫다면 어째서인지, 낳고 싶은데 어렵다면 고민이 무엇인지 귀기울여보자. /박지원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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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8.02 16:07

우리의 선택지는 결코 두 개가 아니다

송원 배우다컴퍼니 대표 많은 매체들이 한사람의 상처에 관해 쉴 새 없이 이야기한다. 단독과 오보 사이를 달리며 누가 더 자극적인 언어를 뽑아내는지 겨루는 경주마 같은 언론이 그러했고 공감과 연대는 사라진 채 분노와 의심, 억측에 휩싸여 피해자라는 과녁을 조준한 화살 같은 SNS가 그러했다. 보고 있자면 턱 하고 숨이 막힌다. 2년 전 피해사실을 고백하던 그날의 기억이 소용돌이치며 가슴이 먹먹하고 뜨겁다. 여전히 의연하지 못한 나의 존재를 사유하며 혹 세상 어딘가 나와 비슷한 존재가 있다면 잔인하고 아픈 칠월을 잘 견뎌주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것을 해보는 것이 살아있음을 감각하는 일이라고 말해도 괜찮을까. 이 지면을 빌어서. 나는 2018년 2월 공개 기자회견을 통해 극단대표의 성추행사실을 고발한 미투 생존자이다. 그 당시 얼굴을 공개한 피해자라는 이유로 용기, 진정성, 이슈 등 다양한 말들이 쏟아져 나오며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내가 얼굴을 공개한 이유는 신뢰를 얻기 위함이 아니었다. 가해행위자로 지목한 대표가 이미 공소시효가 지나 법적처벌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고 또 다른 피해자가 있을 확률이 높아 공론화가 필요했다. 또한 나는 직장이 아닌 개인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었고 사업장의 수익은 생계를 꾸리는 데 충분했다. 또 평소 대화를 많이 하는 분위기 속에서 가족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나의 피해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고 미투를 적극 지지했다. 다시는 연극을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지만 적어도 미투로 인해 내 생계와 일상이 위협받지는 않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코 모든 피해자의 상황이 나와 같지는 않다. 또한 피해자가 만인 앞에 자신을 드러내서 그 많은 상황들을 견뎌야할 하등의 이유도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타인의 상처에 훈수를 두며 쉽고 간편하게 피해자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싫습니다. 못합니다를 하지 않은 이유를 몹시 궁금해 하면서도 그 요구가 충분히 받아들여질 수 있는 근무 환경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궁금해 하지 않는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저의에 대해서는 온갖 억측을 하지만 얼굴을 드러낸 이후 완전히 달라진 일상 속 고통을 감당할 피해자의 남은 삶이 어떤 것일지는 짐작하려 하지 않는다.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으면서 마치 그의 삶에 어떤 지분이라도 있는 듯 믿을만한 증거를 운운하며 끝내는 한 죽음과 한 상처를 연관 짓고 책임을 묻고야 만다. 피해자가 나와 같은 직장인이고 노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며 사회적 일원으로 인정받아 안전하고 즐겁고 일하고 싶은 욕망을 가진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왜 떠올리지 못할까? 무엇이 우리의 상상력을 이토록 무력하게 만들었을까? 자 이제 내가 속한 공동체를 떠올려 보자. 공동체 일원 모두에게 싫습니다. 못합니다를 말할 자격이 주어지는가? 그 말을 한 어떤 사람도 결코 불이익이 없는가? 그리고 당신은 그 말을 단지 하나의 의견으로 쿨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인가? 피해자를 의심하고 비난하는 방식으로는 그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피해사실에는 우리가 바꿔야할 많은 구조적 문제가 숨어있고 우리는 분명히 그것을 찾아낼 수 있다. 누구도 거절에 거창한 용기가 필요 없게 되는 날, 우리 모두는 분명 조금 더 성숙해져 있을 것이다. /송원 배우다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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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7.26 16:22

장애 인식개선이란 무엇일까?

김주은 도르 대표 장애인식이 개선된다는 것은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인식이 변화한다는 것을 증명할만한 명확한 척도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차별 문제와 인권문제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통해 우리나라의 인식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으며 어떻게 변화해나가야 하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인식과 차별은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지난 칼럼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차별은 누군가를 사회에서 배제하려는 나쁜 마음으로 발생하는 경우보다 어떠한 행동이 차별인지 모르는 무지에서 나오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렇기에 인식개선이란 한 사람의 생각과 마음, 그리고 행동을 송두리째 바꾸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어떠한 행동이 장애인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지 또 장애인에게 어떠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알리는 것을 시작으로,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의 존재를 명확하게 인지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노약자를 배려하는 것과 같이 장애인을 배려하는 방법이 알리고 권장하는 것이 장애 인식개선의 과정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장애 인식개선은 왜 필요한 것일까? 단순히 장애인만 살기 편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이러한 인식개선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대부분 차별받지 않기를 원하며 자신이 차별하지 않는 공정한 사람이기를 원한다. 그렇기에 알지 못해서 실수한 행동으로 인하여 너는 차별을 하는 나쁜 사람이야라는 말을 듣는 것은 억울할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차별을 하는 사람을 비판하기에 앞서 어떠한 행동이 장애인에게 차별로 느껴질 수 있는지 알리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므로 장애 인식개선은 꼭 필요하다. 장애 인식개선은 누구나 다양한 형태를 통해 할 수 있다. 장애인은 성실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인식을 개선할 수 있으며, 장애인의 부모나, 특수교사, 사회복지사는 장애인을 동정하며 도와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독립적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지지하는 것으로 인식개선을 할 수 있다. 또 장애인과 함께 일을 하는 비장애인들은 장애인이 자신의 삶을 성실히 살아가는 것을 편견 없이 보는 것만으로도 인식개선이 될 수 있으며, 장애인을 보지 못하는 비장애인들은 이러한 글을 읽음으로써 장애인을 알아가는 것으로 인식개선을 할 수 있다. 이렇게 장애 인식개선이란 착하고 마음이 바른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대단한 사회적 책임감을 가지고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알아가고, 마음이 움직이는 만큼 실천해 가는 것으로 충분하다.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장애 인식개선은 어떠한 척도와 결과로 평가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러한 장애 인식개선으로 얻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장애인이 자연스럽게 버스를 타고, 길을 걷고, 영화를 보고, 일을 하는 것이며, 이렇게 장애인이 활동할 때에 힐끔거리는 눈길이, 쑥덕거리는 소리가 줄어드는 것이다. 이로 인해 장애인과 장애인의 가족, 친구와 같이 장애인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 삶의 만족감이 커지는 것이다. 인식이란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도록 생각 깊은 곳에 깔린 선입견과 편견을 포함하고 있다. 그렇기에 사실 진정으로 인식을 개선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애인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포기할 수 없기에 오늘도 장애인의 이야기를 알리는데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오늘 이 글을 읽음으로써 자신의 자리에서 한걸음 더 장애 인식개선에 가까워졌기를 희망한다. /김주은 도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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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7.19 16:18

사람이 온다

정은실 사회활동가 사람들과 새로이 인연을 맺을 때 생각하는 시 한 편이 있다.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ㅡ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어떤 사람에 대하여 지금 눈앞에 보이는 단편적인 모습을 보고 이 사람은 어떻다라고 판단하며 쉽게 타인에 대해 무례를 범하고, 서로를 혐오하곤 한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사람은 눈앞에 보이는 뼈와 살로 이루어진 하나의 덩어리를 넘어서 그 사람이 살아온 과거의 삶, 그가 살고 있는 현재에 대한 인식, 미래에 대한 걱정과 기대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결정체 같은 것이다. 그렇게 과거, 현재, 미래가 얽혀 지금의 그 사람이 내 앞에 있을 수 있다. 덧붙여 그 사람을 대하는 내 과거의 경험과 현재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 그리고 나의 미래에 대한 가능성과 불안이 모여 그 한 사람을 무엇이라 인식하고 때론 정의한다. 그렇다면 그 인식과 정의에는 상대방의 책임만 있는 것은 아니겠다. 나의 삶의 경험과 가치가 기준이 되어 내가 만든 상자 안에 타인을 짜 맞추어 넣고 상자 위에 라벨을 붙인다. 이 과정에서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그 마음을 살피는 일은 생략되곤 하는데, 마음을 살피는 일이 상대를 다 꿰뚫어 보거나 정확하게 이해하려는 것과 상응하지는 않는다. 그의 갈피를 더듬어 보고 살펴보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다. 이런 과정을 살펴서 타인을 바라보면 한결 마음이 편안해진다. 나 자신도 과거의 삶들을 충실하게 살피지 못할 때가 많았고, 현재도 일과 상황에 치여 그때그때를 살아가는 데 바쁘다. 그런 상황에서 미래에 대한 그림 또한 흔들릴 때가 많다. 이렇듯 나로서 30여 년을 살아온 나도 스스로에 대한 고민과 혼란이 있고, 정의 내리기 쉽지 않은데, 하물며 남에 대해 내가 겪은 부분적인 모습들을 두고 그 사람은 어떻다라고 정의 내리는 것은 쉽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살면서 진정으로 환대해준 사람이 몇이 있을까? 그 경험을 더듬어 보기 전에 환대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봤다. 환대는 반갑게 맞아 정성껏 후하게 대접한다.라는 뜻인데, 사전적 정의대로 하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마음이 즐겁고 기쁘게(반갑게) 맞이해야 하고, 온갖 힘을 다하여 참되고 성실한 마음(정성)을 담아야 하며, 마음 씀씀이나 태도를 너그럽게(후하게) 마땅한 예로써 대해야(대접) 한다. 이쯤에서 다시 생각해본다. 살면서 진정으로 환대해준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렇다고 살아온 시간을 낱낱이 반성할 필요는 없다. 앞으로 다른 이를 환대하기 위한 마음, 그 마음을 어떻게 가질 것인가에 대해 주목하자. 반갑게, 정성껏, 후하게, 대접하는 것 이전에 내 눈에 보이는 일면에 사로잡히기보다는 한 사람의 일생을 마주한다는 마음으로 더듬어 볼 여유를 갖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런 마음가짐을 갖는다면 우리는 날마다 어마어마한 일을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다. 그 어마어마한 일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조금 더 상대를 바라보고 살필 수 있기를 바란다. 더듬어 보는 바람을 흉내 내 더 많은 사람을 환대해줄 수 있기를 바란다. △ 정은실 사회활동가는 평화재단 청년포럼에이피종합건축사사무소에서 근무했으며 현재 전주시사회혁신센터 공간지원팀에서 근무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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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7.12 15:51

저출산이 사회악인가

박지원 변호사 첫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다. 50대 공무원 지인으로부터 나중에 연금 떨어지지 않게 아이 좀 많이 낳아줘라는 말을 들었다. 농담 반, 덕담 반 섞어 웃음을 건네는 그였기에 차마 개그를 다큐로 받지 못하고 나 역시 웃음으로 답했을 뿐 아쉽게도 대화를 이어가지는 못했다. 하지만 몇 해가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한 마디는 여러 생각을 들게 한다. 당시 미처 나누지 못한 이야기를 몇 회에 걸쳐 지면으로 전하고자 한다. 오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하는 모습을 보면 심사가 뒤틀리는 성격이다보니 후배의 출산을 축하하는 자리에 연금 걱정 운운하게 만든 사회 분위기에 아니꼬운 의문이 들었다. 왜 저출산을 근절 대상인 사회악으로만 보는가? 정부와 언론 영향이 컸으리라 짐작한다. 저출산으로 잠재성장률이 저하되고 나라가 통째로 소멸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소식이었을 터. 인터뷰가 첨부된다면 단칸방에서 시작하던 옛 시절을 전하며 철부지들의 근성을 아쉬워하는 기성세대와, 사람을 귀히 여기지 않는 시대에 희망 없는 삶을 물려주기 싫다며 욜로를 외치는 청년세대의 모습이 함께 그려졌으리라. 100년 전으로 돌아가보자. 소위 호환, 마마, 전쟁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던 시대다. 물리적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농경사회에서 자녀는 유일한 노동력의 원천이자 노후대비 수단이었다. 사람들은 시키지 않아도 생존을 위해 다산했으며, 피임기술이 보급되지 않아 흥부는 뺨을 맞으면서도 굽신거리며 살았다. 시곗바늘을 50년만 뒤로 돌린다. 우리는 맹수, 질병, 전쟁, 기아 등 수 천년간 인류를 괴롭힌 문명사의 파고를 정복해나갔다. 산업화로 자본이 축적되면서 연금 등 복지제도가 싹을 틔우고, 도시화로 대가족의 효용은 줄어든다. 50년이 더 흐른 현재. 개인의 인권과 행복은 최우선 가치이고, 여성도 경제활동에 참여하여 독립할 수 있다. 사회와 복지시스템이 일정 수준의 안전과 부양을 보장한다. 매슬로우의 욕구단계이론 운운하지 않더라도 생리적 욕구가 충족되면서 자아실현 욕구에 집중하게 되고, 가족 제도나 자녀의 효용이 감소하면서 출산율은 자연스레 낮아진다. 이처럼 돌이켜보면 저출산은 공포와 척결 대상이기 전에 인류 번영, 발전의 징표이자 자랑이다. 정히 저출산이 싫고 고출산을 원한다면 아프리카와 중동 국가를 본받아 과거로 돌아가면 된다. 가부장제를 강화하여 여성의 인권을 억압하고 피임을 금지하며, 사회보장을 없애고 부정부패를 만연케 하며, 군사력과 경찰력을 무력화시켜 시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이다. 여성은 전쟁, 강도, 겁탈을 피해 혼인제도에 의탁하고, 무능한 국가에 기댈 수 없는 사람들은 생존과 노후를 위해 아이를 낳으며, 유력한 가문과 권력자의 보호를 받고자 사돈의 팔촌까지 찾아다니면서 혈맥과 혼맥에 의지하려 애쓸테니 저출산은 그야말로 발본색원이다. 그런 사회로 회귀를 원하는가? 아니라면 개인이 스스로 행복을 위해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결정할 수 있는 데까지 온 우리 문명 발전사의 도도한 흐름을 자축하며, 그 노정에 작금의 저출산 현상이 있다는 전제에서 논의를 시작해야 하지 않나. 물론 저출산 우려 담론이 의미를 가질 수는 있는 지점은 분명히 있다. 그것이 본론이었는데 하도 연금 걱정으로 불안해하는 통에 등 한번 토닥이고 시작한다는 것이 서론이 길어졌다. 다음 글에서 뵙겠다. △ 박지원 변호사는 김제시 고문변호사, 서해대학교 이사, 전주MBC 시사프로그램 이슈옥타곤 진행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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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7.05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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