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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계 성폭력, 이제는 제도로 답해야 한다

송원 배우다컴퍼니 대표 여기, 자신의 삶을 걸고 성폭력피해를 공론화 한 여성예술인들이 있다. 법이 공정하게 잘못을 심판 해줄것이라 믿으며, 더 이상은 이런 아픔이 반복되질 않는 사회가 되길 바라며. 지난 6월 19일 전북 문화예술계 박교수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 박교수의 보석신청이 허가되어 석방되었다. 동료교수와 제자를 강제로 성추행하여 1년형을 선고 받고 법정 구속된 지 135일 만에 벌어진 일이다. 이에 분노한 전국의 75개의 여성단체와 인권단체, 시민들이 모여 기자회견을 열고 재판과정 중 피고인의 권리만을 신경 쓸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권리 또한 곤정하게 보장되어야 한다는 내용과 함께 2차 피해를 준 것에 강력하게 규탄하며 피해자와 끝까지 연대하겠다고 공표했다. 또한 힘든 상황에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용기를 낸 피해자의 발언문도 낭독 되었다. 저는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닙니다. 저의 피해사실은 저만의 것이 아닙니다. 수 십년간, 그에게서 갑질과 성폭력을 당해온 많은 선배, 동기, 후배의 이야기입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열 세명의 변호사를 선임한 박교수가 두렵습니다. 그의 영향력이 어디까지 미칠지 무섭습니다. 그렇지만 당하면서도 당했다고 말하지 못하는 수많은 나를 위해, 또 다른 피해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박교수를 제발 엄중하게 처벌해주십시오. 그 자리에서 함께 구호를 외치던 나는 여러가지 생각들로 복잡해졌다. 어떤 문장과 수식어를 붙여도 결코 다 담길 수 없을 투쟁이 일상이 되어버린 피해자들의 고민과 눈물의 날들이 떠올랐고 어떤 곳에서도 피해예술인들을 보호하지 않았던 문화예술계 내부의 차가운 현실을 깨달았으며 아무리 외쳐도 갖춰지지 않는 제도적 한계에 절망스러웠다. 또한 이 모든 상황을 여전히 남의 일로 치부하는 동료들의 무관심과 지금 이 순간에도 가슴을 쓸어내리며 아파할 사랑하는 사람들의 걱정 어린 그 마음이. 한 순간에 뒤섞여 눈물이 되어 아프게 흘러내렸다. 재작년 미투의 국면을 넘은 문화예술계 내부에서는 성폭력 없는 안전하고 평등한 창작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작은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피해예술인의 보호와 회복, 복귀에 대한 논의는 미비했고 제도적 측면에서의 공론화 방안과 가해행위자의 징계처리 규정에 대해서는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사안은 흩어져버렸다. 아직도 문화예술계의 성폭력을 일회성의 이슈나 사건정도로 밖에는 인식하지 못하는 문화예술계 내부의 분위기가 여전하기 때문이다. 이번 전북 문화예술계 박교수 성폭력 사건 또한 2차 피해와 긴 재판과정의 피로감을 오롯이 피해예술인이 감당해야만 하는 상황을 초래했으며 미투 이후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문화예술계의 제도적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더 이상은 피해예술인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 현장을 바꾸려는 노력을 그 누구도 방관해서는 안 된다. 다양한 단위에서 이 과정에 적극 개입하고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제도로써 그들을 보호하고 지침으로 가해자를 엄중하게 징계하는 분명한 변화가 필요하다. 그리하여 어떤 피해예술인도 자신이 사랑하던 예술을 떠나지 않는 안전한 창작현장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만이 이제껏 맨발로 가시밭길을 걷겠다 마음먹은 피해예술인들을 위한 진정한 위로이자 성폭력 근절의 대안이며 평등하고 안전한 문화예술계로 거듭나는 안전판이 될 것이다. /송원 배우다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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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6.28 16:24

팔복예술공장에는 희망이 있다

김성수 조각가 전주 팔복동에는 1979년부터 1991년까지 카세트테이프를 생산하던 공장이 있었다. 시간이 흘러 CD등 새로운 기록 매체에 자리를 내주고 폐업을 결정한 후 25년간 물리적, 사회적인 호흡이 멈춘 오래된 사진처럼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2016년부터 전주시와 전주문화재단이 도시재생사업을 추진하여 팔복예술공장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한 이 공간은 올해 계획 중인 야외 예술놀이터, 수변공간을 포함하여 전시실, 창작 스튜디오, 유아 예술놀이 공간 등을 보유한 다양한 문화예술을 체험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고 2018년 3월 개관 이후 어느새 누적 방문객이 11만 명(2018-2019년)에 이른 전주의 대표적인 문화예술의 명소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유년기를 팔복동에서 보낸 필자는 어렴풋이 80년대의 팔복동의 느낌을 기억한다. 공단 굴뚝에서 끝없이 뿜어져 나오는 회색 구름, 철로 만들어진 낡은 놀이터와 기찻길, 공단에 근무하는 근로자들의 색바랜 유니폼. 흐릿한 유년기의 추억 등등. 상대적으로 열악한 주거환경을 가지고 있었던 전주시의 아픈 손가락 같은 팔복동이 문화와 예술로 덧칠한 도시재생의 메카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감회가 새롭다. 이러한 팔복예술공장의 혁신적인 변화에는 많은 사람의 숨겨진 공로가 있기에 가능했다. 팔복동의 기억을 간직한 체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팔복동 거주민들과 공간의 새로운 대안을 위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고심했던 전주의 예술가들은 무엇보다 우리 지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팔복예술공장을 찾았다. 거기에 다양한 목소리를 경청하고 수용하려 노력했던 기획담당자들의 열정과 전주시의 낮은 자세가 더해져 좋은 시너지를 만들어내었다고 생각한다. 공간의 변화는 소수의 몇몇으로 인해 바뀔 수 없기에 마음과 뜻을 모은 모두가 이룬 성과라 표현하고 싶다. 하지만 끊임없이 성장 중인 팔복예술공장이 보완하고 갖춰야 할 부분은 아직 남아있다. 예술공장이라는 이름답게 다양한 재료를 요구하는 거친 입체조형작업을 할 수 있는 다목적 창작 스튜디오의 부재와 유아로만 한정된 예술놀이 공간의 협소함은 하드웨어적인 측면에서 충분히 개선이 가능한 점이다. 주차장의 좁은 간격도 공간을 찾는 시민들에게 불편함을 일으키는 요소로 작용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술을 하는 공간의 목적성이 있는 곳으로서 다양한 예술 분야의 전문인력(도슨트, 스튜디오 테크니션, 어시스턴트)의 육성과 추가배치를 통해 예술공장을 찾고 이용하는 관람객과 참여작가들에게 더욱 나은 사유의 경험과 창작의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것은 근무와 창작의 환경적인 측면에서 개선할 부분이라 생각한다. 필자는 올해 3월부터 팔복예술공장의 3기 정기입주작가로 참여하여 창작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몇 개월간 오가며 그동안 안에서 바라본 팔복예술공장의 모습은 바깥에서 바라본 시각과는 사뭇 다르게 다가왔다. 팔복예술공장을 위해 밤낮으로 고생하시는 팔복운영팀, 창작기획팀, 예술놀이팀의 직원분들의 노고가 더해져 이 공장이 돌아가는 모습에 측은함과 감사함을 동시에 느낀다. 이제 다음 주가 되면 입주작가로 들어온 지 딱 100일째가 된다. 10명의 입주작가와 작은 축하의 의미로 모든 직원분께 감사의 떡을 돌리기로 했다. 예전 이 공간에는 써니(카세트 공장에서 일했던 여성 근로자를 상징하는 팔복예술공장의 마스코트)가 공장의 불빛을 밝혔지만, 지금은 여러분이 계신다고 말하고 싶다. 어둑해진 밤, 팔복예술공장은 아직도 희망의 불빛을 킨 체 내일을 준비하고 있다. /김성수 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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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6.21 16:13

화사한 꽃밭 같은 동네

문지연 최명희문학관 학예사 전주한옥마을도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전주시는 문화시설 연장개관과 온라인 스탬프 투어를 운영하며 시민과 관광객을 위로하기 시작했다. 으라차차 향교길 공연, 전통연희 퍼레이드 등 코로나19 감염 상황을 보며 대기 중인 프로그램도 한가득이다. 주말 평균 관람객 수가 150명대에서 300명대로 늘어난 최명희문학관도 지난 11일 『혼불』 완독 프로그램을 열며 조심스럽게 기지개를 켰다. 이 시간이 너무 그리웠다.는 수강생들은 먼저 나서서 개인위생을 지키며 문학 강연을 즐겼다. 문화시설과 이용자 모두 새로운 시대를 맞이해 변화에 적응해나가는 중인 것이다. 문학관이 터를 잡은 이곳. 어린 최명희(19471998)가 뛰어놀았던 화원동(현 풍남동) 일대는 오랜 시간 주거 공간으로 사랑받았던 동네다. 현 전주시청 자리에 전주역이 있어 접근성이 좋았고, 큰 시장과 가까워 많은 사람이 거쳐 가는 물류의 중심이었다. 또한 주요 기관과 공장 등으로 근거리 출퇴근이 가능해 3만 명 내외의 인구가 사는 부촌이었다. 하지만 1977년 한옥보존지구로 선정되고 덕진동을 중심으로 부도심이 형성되면서 문화연필, 백양 메리야스로 대표되는 공장들이 이전하고, 1981년 전주역이 우아동으로 옮겨 간 뒤에는 경제활동 주력 층이 점차 빠져나가게 된다. 구두 수선소며 가방 도매상들은 이미 자취도 없어진 채, 어디론가 밀려나버리고, 아슬아슬하게 남아 있는 노트사, 그리고 낯익은 금은방들도 어수선한 흙먼지에 뒤덮여, 간신히 고개만 내밀고 있는 형국이었다.(최명희 단편소설 「만종」 중) 1980년대 전국체전을 계기로 풍남동 일대에서 벌어진 변화를 다룬 최명희의 단편소설 「만종」을 보면 당시 분위기가 생생하다. 사람들 모다 빠져나가먼, 매급시, 돈은 객지에서 다 갖꼬 가고, 여그는 빈껍데기 건물들만 남능거 아닌가?라고 걱정하는 마을 어르신의 목소리와 절반은 이미 허물어져 가시 철망으로 둘러놓은 울타리, ㅁ 중에서 ㄱ 부분만 남아있는 경기전까지. 사람들의 눈길에서 멀어져 시간 속에서 스러지고 있는 것들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글에 담겨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쓰러졌던 담벼락이 새 단장을 하고 많은 사람이 찾는 명소가 된 것은 2000년대부터다. 2010년 슬로시티로 지정과 2012년 유네스코 음식창의도시 선정 등으로 전주는 교육도시에서 관광도시로 다시 태어난다. 한옥이 모여 생긴 독특한 풍경과 경기전오목대전주향교 등의 문화유산, 향토음식, 남부시장 청년몰과 야시장이 입소문을 타고 널리 퍼지면서 전주한옥마을은 전주를 대표하는 관광지가 되었다. 콘크리트 같은 딱딱한 일상에 지쳐 휴식이 필요해 전주한옥마을에 왔어요. 구석구석 예쁜 한옥마을 전경과 맛있고 푸짐한 음식이 함께하니 숨통이 트이네요.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을 보니 저까지 밝아지는 기분이에요.(최명희문학관 방명록에서, 한○윤서울) 단 한 사람만이라도 제가 하는 일을 지켜본다면 이 길을 끝내 가리라라고 말했던, 아늑하고 화사했던 풍남동 은행나무 골목의 유년 시절과 잠깐 살다 옮긴 전동집에서의 짧은 기억을 사랑했던 작가가 지금의 고향땅을 본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골목마다 보물이 숨어 있는, 소소한 행복이 넘실거리는, 화사한 꽃밭 같은 이곳을 우리는 잘 지켜내고 가꿔야 한다. 애정 어린 눈길과 적당한 거리, 배려하는 마음이 모여 틔워낸 웃음꽃에서 그윽한 향기가 풍겨온다. /문지연 최명희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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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6.14 15:57

우리는 장애인을 만났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김주은 도르 대표 우리는 장애인을 만났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지난 칼럼에서 이야기했던 바와 같이 장애인에 대한 차별은 무지, 즉 어떠한 말과 행동이 장애인에게 불편함을 주는가를 모르기 때문에 발생한다. 실제로 장애 인식개선에 관심을 가지고 이야기 나눴던 사람 중 대다수는 장애인을 특별히 싫어하는 건 아닌데, 장애인을 만났을 때 자신이 몰라서 실수를 하게 될까 봐 다가가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번 칼럼에서는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자연스럽게 함께할 수 있도록, 장애인을 만났을 때의 가져야 할 올바른 생각, 말, 행동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전제(생각)는 다음과 같다. 먼저,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동일한 한 인격체임을 인지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똑같은 한 사람이기에, 비장애인이 불편함을 느낄 수 있는 언행은 당연히 장애인에게도 불편함을 유발할 수 있는 언행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옳다. 또, 장애는 개인의 다양한 특징 중 한 가지일 뿐, 그 사람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단편적인 예시로, 장애인이라고 모두 의존적이고 불쌍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 사회에서는 장애인을 미디어로 만나는 경우가 많기에 장애라는 단어로 장애인을 과하게 일반화하는 경향이 있다. 장애인을 장애라는 특징으로 성격과 정체성을 일반화하여 생각하는 것을 지양하고, 한 개인으로 인정하고 알아가는 것이 옳다. 그렇다면 장애인을 만났을 때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좋을까? 첫 번째, 장애인이 아니라 개인의 이름으로 호칭해야 한다. 당연한 이야기이다. 비장애인 역시 빡빡이, 뚱뚱보와 같이 개인의 한 특징이 그 사람의 전부인 것 마냥 호칭된다면 불쾌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장애인에게 장애도 개인이 가진 특징 중 하나이므로 장애가 개인의 정체성인 것 마냥 호칭되는 것은 불쾌한 일이며, 이름으로 호칭해야 한다. 두 번째, 도움이 필요한지 질문한 뒤 승낙했을 경우에만 도움을 준다. 사람과 상황에 따라, 또는 장애의 특징과 정도가 달라서 도움이 필요하지 않거나, 알맞은 도움이 아닐 수 있다. 또 장애인에게 요청하지 않은 과한 배려는 장애인이라 못할 것이다라는 동정이나 무시로 이해될 수 있기에 장애인에 도움이 필요한 것으로 보일시 도움이 필요하신가요?라고 질문한 뒤 승낙하면 도와주는 것이 올바른 행동이다. 세 번째, 정상인, 일반인이란 단어 사용은 지양한다. 장애인 앞에서 정상인, 일반인과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면 장애인은 비 일반적이고 비정상적인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로 해석되어 불쾌감을 줄 수 있다. 그러므로 장애인이 아닌 사람을 지칭할 때는 비장애인으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올바르다. 앞서 설명한 장애인을 만났을 때 올바른 생각, 말, 행동은 전달 상의 오류를 줄이고자 최대한 일반적이고 포괄적으로 내용으로 구성하였으므로 특정 장애에 따라 행동이 변형되거나 추가될 수 있다. 또 모든 행동은 사람과 상황에 따라 해석이 다를 수 있으므로, 이번 칼럼의 내용이 절대적인 척도가 될 수는 없음을 밝힌다. 가장 중요한 점은 우리는 장애인을 비장애인을 똑같은 한 인격체로 인정하고 대해야 한다는 것이며, 장애인을 몰라서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다가가서 물어보고 알아가며 함께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행동이라는 것이다.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것 그 자체로 충분히 올바르다고 생각하며, 이 글을 읽고 생각하고 행동할 당신을 기대하고 응원한다. /김주은 도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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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6.07 15:59

내겐 정말 그리운 그녀들

송원 배우다컴퍼니 대표 이야기 하나. 14년 전 겨울쯤일까? 아무 기대 없이 보러간 선배들의 연극에서 무대 위 너무도 반짝이던 Y를 처음 보았다. 티비에서 보던 화려한 배우들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배역의 호흡을 섬세하게 표현하는 그녀의 연기에 완전히 매료되어 알 수 없는 울렁거림과 벅참을 느끼며 생각했다. 10년 뒤에 나도 저런 배우가 되고 싶다. 아마도 그 날 부터였다. 소극장 특유의 쾌쾌함도 휑한 객석도 배고픈 현실도 다 잊을 만큼 매력 있는 직업을 찾은 것 같다고 느낀 순간이. 이야기 둘. 기본기가 짱짱하고 무대장악력도 대단하다는 H선배의 모노드라마를 보러가기로 했다. 현장에서 꽤 자주 마주쳤지만 친근하게 다가가기엔 어딘지 어려웠던 그녀. 평소 남 눈치를 많이 살피는 내 성격상 친해지고 싶다는 말은커녕 씩씩하게 인사도 한번 해본 적 없었지만 공연장으로 응원을 가게 된다면 친해질 기회를 조금은 갖게 되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역시 그녀는 공연내내 그 많은 관객들을 혼자서 울리고 웃기며 배우다움을 마구 뿜어댔다. 완전히 그녀에게 매료되어 버린 채, 나는 생각했다. 아주 오랫동안 배우를 하셨으면 좋겠다. 언젠가는 꼭 같은 작품에서 만날 수 있게. 이야기 셋. 우여곡절 끝에 다시 연극을 시작하게 된 나는 K대표님을 만나 배우 인생에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남성연출가의 시각에서 창조된 여성캐릭터만을 연기하던 과거에서 벗어나 다양한 배역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대표였던 그녀는 나에게 특유의 집요함과 꼼꼼함으로 매순간 완벽함을 요구하며 오로지 배우로 성장할 것을 강요했다. 혹독했지만 불합리 하다고 느낀적은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나보다 더 많은 것들을 더 완벽하게 수행했으니까. 그녀와 함께 하는 매순간 느꼈다. 정말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다. 그녀와 함께 했던 순간들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다. 이제껏 어떤 어른도 내게 보여주지 않았던 책임감 있는 모습을 나는 아직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이야기 넷. 동물적인 감각으로 연기를 하는 C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했다. 풍부한 감정표현과 공감능력을 가진 그녀는 이야기를 상상하고, 상상한 이야기를 사랑스럽게 전달하는 능력 또한 으뜸이다. 환하게 웃는 얼굴은 보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이상한 흡입력으로 관객을 빨아들인다. 그러나 그녀의 가장 큰 매력은 매순간 진실한 마음을 녹여내는 방법을 안다는 것이다. 작품에서도 현실에서도. C, 언제나 네가 부럽고 한편으론 자랑스러웠었어. 당신은 정말 타고난 배우야. 나는 그녀들을 다시 무대에서 보고 싶다. 다시금 무대에서 활개 치는 그녀들의 모습이 진정으로 그립다. 누구와 비교해보아도 뭐 하나 빠질 것 없이 잘난 그녀들이 본인의 역량을 뽐낼 수 있는 터전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 속에서 그녀들과 치열하게 경쟁하고 싶고 찐하게 협업하고 싶다. 어쩌면 나 혼자만의 소망이거나 주책 맞은 오지랖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녀들을 현장에서 보내고 싶지 않다. 여전히 이곳은 배고프고 열악하지만 더 많은 여성예술인들과 함께 하고 싶다. 그녀들과 있는 힘껏 연대해 이곳을 바꿔보고 싶다. 그래서 앞으로도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볼 생각이다. 그녀들이 돌아 올 이곳이 안전하고 아늑할 수 있도록. 어떤 이유로도, 여성예술인이 현장을 떠나지 않길 바라며. /송원 배우다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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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5.31 15:57

‘시민의 숲 1963’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김성수 조각가 전주에는 전북도민의 힘으로 만들어진 역사적인 공간이 있다. 그곳은 바로 전국체전을 치르기 위해 만들어진 전주시 최초의 전주종합경기장과 야구장이다. 1963년에 만들어진 종합경기장과 야구장은 당시 44회 전국체전을 치르기 위해 합심한 전북도민의 성금을 기반으로 만들어졌기에 더 큰 의미가 있는 곳이다. 80년대생인 필자의 기억 속에는 90년대에 활동했던 쌍방울야구팀을 어렴풋이 기억한다. 홈경기가 있는 날이면 구단 마크가 새겨진 모자를 쓴 아이들이 야구장 주위에서 응원전을 펼치기도 하였다. 97년도에는 동계유니버시아드 대회가 열렸고 종합경기장의 육상트랙에 물을 얼려 스피드 스케이트 경기를 진행했던 색다른 기억도 있다. 종합경기장터는 전북의 역사적 상징성을 지닌 곳이지만 2000년대에 들어와 관리와 보수문제를 안고 있었던 전주시의 오래된 숙원사업이었다. 2012년 전주시와 롯데쇼핑과의 기부대양여 협약을 통해 전주시는 롯데에 종합경기장터 부지의 52%인 1만 9000여 평을 넘겨주고, 롯데는 종합경기장, 야구장을 만들어 주는 대신 대형아울렛과 호텔 입점을 계획했지만, 시민단체와 지역 소상공인의 반대가 심했고 도민의 힘으로 만들어진 공간을 매각할 수 없다는 공론이 확산되었다. 2019년 3월 전주시는 롯데와의 기나긴 협상 끝에 양여가 아닌 50년 장기임대라는 절충안을 내놓았고 종합경기장터 3만 7000평 중에서 7000평은 롯데에게 임대하고 나머지 3만평의 부지를 시민의 숲과 컨벤션 센터, 호텔로 조성하여 전주시민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생태자연과 복합문화의 터전으로 만들 계획이라고 발표하였다. 지난 1월 30일 건축, 조경, 도시, 교통, 환경, 미술 등 재생사업과 관련된 6개 분야 전문가 11명으로 구성된 전문가 자문단이 출범하여 지속적인 회의를 진행하고 있으며 최근 3월에는 1963명에 달하는 대규모 시민참여단을 모집하여 일반 시민들의 목소리를 듣고 아이디어를 얻는 등 진행 과정에서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시민의 숲이라는 이름답게 이 공간은 공공을 위한 숲이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부분이다. 전주시는 주변 자연을 연결하는 생태 자연공원을 조성하여 정원의 숲, 예술의 숲, 놀이의 숲, 미식의 숲, 그리고 국제규모 컨벤션 센터가 조성되는 MICE의 숲까지 총 5개의 컨셉으로 구상을 진행하고 있으며 복합문화공간을 기반으로 한 시민문화 공간, 휴식공간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그동안 미뤄왔던 전주시립미술관 건립도 함께 추진될 예정이라고 하니 기대가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도심 속 숲에서 문화와 예술이 함께 살아 숨 쉬는 모습은 전주시의 품격을 한층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올해 9월 세부 설계용역이 완수될 예정이고 2023년 완공을 목표로 한 시민의 숲 1963이 가야 할 길은 아직 멀다. 시민의 숲을 어떻게 만들어나갈 것인지에 대한 세부적인 구상과 함께 이전될 예정인 종합경기장과 야구장의 모습도 그 계획과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여 시민들의 공감을 얻어야 하는 부분이다.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여 과정의 면면을 공유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올해 3월 출범한 11인으로 구성된 전문가 자문단은 시민의 숲 1963 프로젝트와 관련해 시작부터 완료되는 전 과정에 깊숙이 참여하여 관련 전문 분야에 대한 자문 활동을 펼칠 예정이라고 하니 그 책임은 무엇보다 막중하다. 1963년 후손들을 위해 미래를 설계했던 전북도민의 한마음과 그 혜안을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 지역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희망이 담긴 시민의 숲이 만들어지길 기대해본다. /김성수 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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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5.24 17:24

발로 읽는 이야기

문지연 최명희문학관 학예사 한 바위가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큰 돌. 대개는 그냥 지나치기 마련이다. 하지만 누군가 옆에 서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바위는 호운석이다. 호랑이 호와 떨어질 운,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와 얽힌 이야기가 전해진다더라. 그때부터 바위는 단순한 돌이 아니다.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의 구절처럼 잊혀지지 않는 존재가 된다. 동네, 길, 도로, 나무, 산, 절 등 이름이 허투루 붙은 경우는 찾기 힘들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주변을 살펴보면 모든 걸음걸음이 이야기로 가득하다. 반복되는 일상 속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들에 대한 새로운 발견은 생각의 폭을 넓혀 삶을 한층 더 풍성하게 만들어 준다. 나와 가까운 곳에서 이야기를 찾는 쉬운 방법 중 하나는 도로명주소다. 머물고 있는 동네, 매일 걷는 거리, 수만 번 지나쳤을 장소의 이름에는 우리 지역의 고유한 특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시선이 닿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요즘 청년들은 알기 힘든 역사와 옛 전주의 모습, 생활 풍경 등을 만날 수 있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사람들을 모아 의병을 조직하고, 64세의 나이로 전장에 나가 300여 명의 왜군으로부터 전주성을 지켜낸 이정란 장군(15291600). 그의 시호가 충경(忠景)이다. 장군의 의로움과 희생정신은 전주 시내를 가로지르는 주요 간선 도로인 충경로와 남고산 아래 산성마을의 충경사, 전라북도를 지키는 제35보병사단 충경부대의 이름에 남아 이어지고 있다. 태조어진과 경기전, 오목대와 이목대, 조경단과 조경묘 등 문화유적과 관련된 명칭들도 눈에 띈다. 태조 어진을 모신 경기전 주변의 태조로와 경기전길, 1380년 삼도순찰사 이성계가 남원 황산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승전을 자축하는 연회를 열었던 오목대길, 고종이 전주이씨 시조 이한의 묘에 단을 쌓아 명명한 조경단로 등 조선 왕조의 발상지였던 전주의 역사가 길에 스며있다. 이 고장의 자랑스러운 인물들도 만날 수 있다. 소설 「혼불」의 작가 최명희(19471998)를 떠올리게 하는 최명희길을 비롯해 전북도립국악원에 기적비가 있는 비가비 명창 권삼득( 17711841)을 기린 권삼득로, 조선 시대에 평등한 세상을 꿈꾼 혁신적인 사상가 정여립(15461589)의 대동정신이 서린 정여립로, 병자호란 때 병사를 모집해 서울에 진격했던 이기발(16021662)의 호를 딴 서귀로, 효행으로 명성이 높았던 강서린을 기념해 조선 영조 때 건립된 지행당길 등 올곧은 신념으로 자신의 길을 걸었던 조상들의 자취가 표지판에 새겨 있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길들은 모두 선조들이 먼저 걸었던 길이다. 인간의 언어 속에 시간에 관한 우리들의 깊은 고민이 갈무리되어 있듯이, 길에는 시간과 시간의 길이에 대한 우리들의 고민이 총체적으로 깔려 있다.(김병용의 『길 위의 풍경』 중) 동네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진 지역의 살아 있는 이야기는 일상에 녹아들어 잊어서는 안 될 가치를 들려준다. 인간의 기본적인 도리를 지키며 더불어 사는 사회를 추구했던 전주 사람들의 마음. 전주라는 도시가 지닌 정신과 매력, 역사문화적 힘은 우리가 서 있는 이 땅을 든든히 떠받치고 있다. /문지연 최명희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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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5.17 15:55

차별은 무지에서 나온다

김주은 도르 대표 장애인을 차별하지 말자.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자. 장애인이 가진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인식개선의 시작이다. 여태껏 청춘예찬에 기고했던 모든 글의 결론이자, 앞으로 이야기할 모든 글의 결론이며, 이 칼럼을 통해 가장 전하고 싶은 이야기이다. 이와 같이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의 다수가 장애인을 의도적으로 차별하고 배제하며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하고자 함이 아니다. 경험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차별은 의도적인 혐오나 배제보다는 장애인의 입장에서 어떤 행동이 차별로 느껴지며, 잘못된 인식을 가진 말인지 모르는 무지에서 오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무지는 비장애인이 의도적으로 장애인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를 입장을 이해하기 어렵도록 분리되어 있는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가장 크다. 그러므로 이 칼럼을 통해 장애인의 입장을 몰라준다고 비장애인을 비판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으며, 다만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의 무지에서 오는 차별을 줄이고자 장애인의 문제와 입장을 알리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다. 비장애인은 사회의 다수로서 주류로서의 삶이 익숙하고 편안하기 때문에, 우리가 누리고 있는 사회의 구조와 환경이 장애인에겐 차별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우리나라 정도면, 나 정도면 차별이 없는 편이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대다수의 비장애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회의 차별적인 상황과 환경에 묵인으로 합승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을 더 깊이 이해하고 싶다면, 김지혜 작가님이 지으신 [선량한 차별주의자]라는 책을 추천하고 싶다. 책의 제목부터 강력한 전달력을 가지고 있다. 사회에는 장애인을 괴롭히고자, 혐오하고자 하는 사람보다 장애인을 차별하지 않으려는 선량한 사람들이 훨씬 많다. 이러한 선량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장애인을 차별하지 않고 있을까?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한 구절을 함께 살펴보자. 우리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 특권이란 주어진 사회적 조건이 자신에게 유리해서 누리게 되는 온갖 혜택을 말한다. 일상적으로 우리가 누리는 특권은 대개 의식적으로 노력해서 얻게 된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조건이라서 눈치채지 못한다. 시외버스 좌석에 앉아서 자신의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의식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휠체어를 사용하는 누군가가 시외버스 탑승을 요구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라는 단어는, 우리는 대다수 차별은 없어야 한다는 선량한 마음을 품고 있으나, 자신이 무슨 특권을 누리는지 알지 못하기에 장애인은 사회적으로 당연히 누려야 할 어떠한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지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차별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장애 인식개선은 우리는 차별을 하지 않는다, 나 정도면 하지 않는다라고 안주하지 않고 우리가 무엇을 모르고 있으며 장애인에게 어떠한 어려움이 있는지 관심을 가지는 것이 그 시작일 것이다. 이 칼럼의 목적은 다음과 같이 분명하다. 누군가는 평온한 우물에 돌을 던져야 하며, 돌로 인해 일어나는 우물 속 오물들을 걸려내야만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다. 이 글이 생각 우물에 돌이 되었으면 한다. 다수가 누리기에 편안한 삶이 익숙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생각 바닥에 깔려있는 차별적인 오물들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인정하기 어려울 수도 있고 불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오물들을 마주하고 깨끗이 걸러내었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차별하지 않는, 누구나 함께할 수 있는 사회를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다. /김주은 도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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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5.10 16:10

안전하고 평등한 예술 창작환경을 위한 모두의 과제

송원 배우다컴퍼니 대표 2018년 2월, 도내 모 극단 대표의 성추행 고발 기자회견으로 점화된 전라북도 문화예술계의 미투운동은 연이은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폭로와 고발에 이어 이를 지지하는 시민들의 위드유로 확산되면서 지역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이후 성폭력을 개인 대 개인의 사적인 문제로 치부하던 과거와는 다르게, 문화예술계의 창작 환경 전반에 대한 구조적 문제의 개선을 요구하는 창작자들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또한 한 다리만 건너면 다 아는 폐쇄적 구조, 소수 기득권의 권력 독점, 작품 내 빈번한 여성혐오적 표현, 불평등한 성별권력, 인맥과 품평중심의 진입 장벽 등 문화예술계에 만연한 문제적 창작환경이 함께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술인 당사자들의 자정적 움직임은 물론이거니와 안전하고 평등한 창작 환경을 위한 지자체와 문화재단의 성평등 정책에 대한 시스템 구축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미투 이후 정부는 성차별 해소를 위한 양성평등정책관을 문체부와 법무부, 교육부를 비롯한 8개 부처에 신설했으며, 문화체육관광부는 2020년 <문화비전 2030>을 통해 성평등 문화 실현이라는 의제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내외적 상황과는 다르게 우리 지역의 행정은 성폭력 사안 중심의 대응 방식으로 일관했다. 성평등을 중요 과제로 인식하지 못하고 지역문화 발전에 흠결을 내는 것으로 오인해 정책적 연구와 시스템 마련이 더디게 되는 안타까운 상황에 놓여 있다. 또한 표현의 자유라는 미명하에 특정 성별 및 나이대를 성적 대상화한 작품을 창작하거나 작품 내 빈번한 여성혐오적 표현에 대한 여과 없는 재현, 자유분방함을 넘어선 성적 표현을 예술적인 자유로움으로 용인하곤 했다. 그러나 예술가의 창작물은 예술계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예술가의 성인지 감수성 함양을 위한 교육과 창작 환경 개선을 도모하는 행정의 성평등 정책 마련은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임을 알 수 있다. 이에 본 필자는 네 가지 정책 제안을 이미 2019 전주문화논총에 실은 바 있다. 첫째, 문화예술 기반 조성 및 제도 개선. 전담부서 신설 및 성평등 자치규약 제정, 실태조사 실시, 성폭력 근절 서약서 의무화, 성폭력 사안에 관련된 매뉴얼 마련, 예방교육 의무화 등이다. 둘째, 문화정책 전문인력 양성 및 활동 지원에서 젠더 관점 갖기. 교부금 심사위원 성별 균형 및 성인지 감수성 교육 의무화, 범 예술인 대상 포럼 및 세미나 개최를 통한 현장 자정의 기회 마련, 문화예술계 내 젠더 문제 해결 소모임 지원에 관련한 정책이다. 셋째, 문화 프로그램에서의 성평등 감수성 제고. 왜곡된 성별 고정관념 혹은 성차별적, 여성비하적 편견이 내재된 작품 소비 지양을 위한 캠페인이 필요하다는 정책이었으며 마지막으로 문화예술 지원사업 및 운영에 있어서 젠더 관점 가이드라인 제안에 대해 교부금 지원 창작물에 대한 젠더 관점 가이드라인 안내물 제작, 젠더 감수성 평가지표를 통한 사업 반영등 에 관한 정책이었다. 문화예술계의 미투는 단순한 이슈를 넘어서 시대적 정신이 되었다. 더는 아픈 과거가 재생되지 않도록 누구도 방관해서는 안 된다. 이제라도 성평등한 문화예술계를 위한 시스템 구축을 가장 중요한 정책적 과제로 인식하고 안전하고 평등한 창작 환경 만들기를 위한 적극적인 움직임이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송원 배우다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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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5.03 15:35

우리 동네에는 어떤 공공미술이 있을까?

김성수 조각가 우리가 사는 동네에는 어떤 미술작품들이 있는지 둘러본 적이 있는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면 우리의 생활 주변 공간에서 다양한 공공미술을 발견할 수 있다. 흔히 바깥에서 볼 수 있는 조형작품은 삭막한 도시 속에서 누구나 예술을 감상할 수 있는 공공재로서의 성격을 띠며 우리 삶 속에 스며들어 있기에 공공미술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우리나라에서 공공미술이 진행되는 경로는 크게 3개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로 퍼센트 법이라고도 불리는 건축물 미술작품 제도로 설치되는 미술작품이 있다. 연면적 1만 제곱미터 이상 신축 또는 증축하는 일정한 용도의 건축물은 건축 비용의 일정 비율에 해당하는 금액을 회화, 조각, 공예 등 미술작품의 설치에 사용하거나 직접 설치비용의 70%에 해당하는 금액을 문화예술진흥기금으로 납부할 수 있도록 한 제도이며 아파트나 대형빌딩, 병원, 마트와 백화점 앞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야외 조형물과 건물 로비에 설치된 미술작품이 이에 해당한다. 건축주가 사전 협의를 통해 지정 공모로 작가를 선정하기도 하고 건물의 목적과 컨셉에 맞는 작품을 공모를 내어 선정하기도 한다. 사업 대부분에 작가가 직접 참여하며 전북의 경우 전문가로 이루어진 20명 내외의 전라북도 건축물 미술작품 심의위원 회의를 통해 작품설치의 가부가 결정된다. 두 번째로 전문작가가 참여하여 커뮤니티 형성이 주축이 되는 마을미술프로젝트 계열의 사업이 있다. 건축물 미술작품 기금납부를 통해 모인 문화예술진흥기금이나 지자체의 예산을 사용하여 삭막해진 도시를 다양한 색으로 수놓는 벽화작업과 기발한 설치작품을 통해 침체되고 소외된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고 지역의 문제를 같이 고민하고 예술로 풀어나가고자 하는 성격이 강하다. 전주시에는 2000년대 초반 공공미술프로젝트로 이루어진 동문예술거리와 자만벽화마을이 있으며 최근에는 첫 마중길 야외조각 전시, 예술있는 승강장 사업과 이동형갤러리 꽃심, 선미촌 2.0 프로젝트처럼 문화예술 도시를 지향하는 도시계획 속에 실험적이고 다양한 형태의 공공미술프로젝트가 실행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공공기관이 발주하는 기념조형물의 형태가 있다. 조달청의 기준으로 집행되며 금액이 큰 만큼 지원조건이 까다로워서 조각가 혹은 전문예술인보다 조형물 전문업체나 기업형태의 접근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첫째와 둘째의 경우 작가의 직접적인 참여도가 높고 전문가로 이루어진 심의위원 조성과 심사과정에서 작품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이루어지기에 심미적 평가가 양호하나, 셋째의 경우 경쟁적으로 이루어지는 거액의 랜드마크형태의 조악한 조형물들이 무분별하게 설치가 되면서 기존의 좋은 취지로 만들어진 공공예술작품마저 함께 질타의 대상이 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각 지역의 특산물이나 상징물을 예술성의 고려 없이 확대하여 조형화시킨 것들이 이런 사례에 해당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공공미술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높아지면서 우리 주변에 설치되는 작품들의 선정절차와 작가선정에 대한 공정성과 투명함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 지역에서 건물이 세워지면 어떤 작가의 작품이 세워지게 되는지 어떤 절차를 통해 작품이 선정되는지를 관심 있게 지켜보는 것도 작품을 관람하는 것만큼 중요한 부분일 것이다. 예술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할 만큼 가까이 있으며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 어떤 이는 작품을 보며 꿈을 꾸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사랑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지친 삶의 위로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코로나로 지친 요즘, 우리 주변에 숨어있는 미술작품을 찾아 산책을 해보는 건 어떨까. /김성수 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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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4.26 16:28

다시 손으로 씁니다

문지연 최명희문학관 학예사 복고가 대세다.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트로트를 비롯해 경제문화예술 사회 전반에 퍼지고 있다. 고전문학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출판계 역시 그 바람을 타고 있다. 인터넷서점 YES24에 따르면,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1947)가 문학을 포함한 전 분야를 통틀어 3월 한 달 판매 순위 2위를 기록했다. 최근 개봉한 동명 영화로 입소문을 탄 루이자 메이 올콧의 『작은 아씨들』(1868)은 3위.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1919)은 6위에 올랐다. 초판본 표지 디자인도 다시 등장했다.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55년 증보판을 시작으로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1795), 김소월의 『진달래꽃』(1925), 백석의 『사슴』(1936), 김구의 『백범일지』(1947) 등이 옛 얼굴로 독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디지털에 밀려 희미해져 가던 아날로그는 지친 현대인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다시 힘을 얻고 있다. 자아와 성찰을 다루는 과거 문학작품이 인기를 얻고, 전자 화면에 손으로 글을 쓸 수 있는 스타일러스와 스마트펜 기술이 발달하고, 컬러링북다이어리 북필사시집 등이 생겨난 것은 기계가 충족시키지 못하는 인간 고유의 감성 때문이다. 사과문, 각서, 편지 등을 타이핑하지 않고 여전히 자필로 쓰는 것 또한 비슷한 이유이다. 우리는 활자가 주지 못하는 따뜻함과 정겨움, 진정성을 손으로 글을 쓰는 과정에서 느낀다. 예부터 글씨는 인격을 수양하는 도구로 활용됐고, 오늘날에는 서예와 캘리그래피(멋글씨)가 느림과 정성의 미학을 뽐내며 대중의 관심을 받고 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문학청년들의 글쓰기 연습에 필사가 우선으로 꼽히듯 대다수의 시인과 작가도 손으로 먼저 글을 익혔다. 소설가 조정래는 「태백산맥」과 「아리랑」을 연이어 쓰면서 하도 팔을 굴려 먹어서 오른팔 관절이 어긋나 버렸다.라고 밝히면서도 사람이 글을 쓰는데, 육필, 손으로 쓰는 글씨가 다 없어져 버리는 시대는 얼마나 삭막한가.라고 탄식했다. 작가 박경리는 유고 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에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다.라고 적었고, 시인 김수영은 글을 쓰는 것이 천직이라 좋은 만년필을 갖고 싶은 것이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욕망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만년필 사랑이 각별했던 소설가 최명희도 만년필과 원고지를 고집하는 이유를 만년필은 몸의 일부이며 원고지를 펼치고 펜을 잡을 때 신선한 영감이 온몸에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면서, 소설 「혼불」을 차가운 기계에 의존해 쓴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라고 대답했다. 종이에 손으로 글을 쓰는 행위는 생각을 가다듬게 하고 마음의 안정을 준다. 특히, 필사는 건강한 스트레스 해소와 더불어 논리력과 어휘력을 키우고, 헷갈리는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익히는 데 도움이 된다. 별을 보지 못하고 자라는 아이들은 불행하다. 아이들은 자신의 불행을 모른 채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자란다. 아이들아, 먼지의 장막 뒤에서 별들은 빛나고 있다. 아이들아, 별들은 보이지 않을 뿐 사라지지 않는다.(김훈 『연필로 쓰기』 중) 여러모로 심란한 요즘, 가슴에 와 닿은 시 한 구절, 산문 한 문단을 따라 써 보며 조금은 느리고 불편하지만 과정이 주는 기쁨과 정성의 가치를 다시 느껴보길 바란다. /문지연 최명희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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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4.19 16:15

코로나19·텔레그램 N번방 이슈 속 장애인

김주은 도르 대표 수많은 이슈들로 시끄러운 세상이다. 바이러스부터 성범죄까지 많은 사람들의 몸과 마음이 아프고 있으며, 뉴스에 나오는 문제들이 곧 나와 내 가족의 문제가 될까봐 두려워하고 있다. 이러한 이슈는 사회의 부정적인 면을 들춰보게 됨으로써 두려움을 야기하기도 하지만 어떻게 하면 이러한 부정적인 면을 고쳐나갈 수 있을지 대안을 생각하게 되고, 사회를 더 좋은 방향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문제가 이슈화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고쳐나가는데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이슈 속에서 장애인의 문제는 여전히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우리는 장애인이 겪는 문제의 심각성을 아직 모르고 있다. 우리나라는 현재 코로나19로 만 명이 넘는 확진자를 기록하고 있으며, 아직도 계속적으로 증가하는 확진자를 줄이기 위해서 정부는 [사회적 거리두기] 캠페인을 강력히 권고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안전 안내 문자를 보고, 질병관리본부의 브리핑을 듣고, 줄을 서서 마스크를 사는 것이 혼자서 어려운 장애인들이 있다. 이러한 장애인에게 대책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사회적 거리두기]나 [자가격리]와 같이 혼자서 살아가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면 장애인은 바이러스 감염 이전에 일상생활 유지가 어려워 위기 상황이 닥칠 수 있다. 하지만 전 국민이 함께하는 [사회적 거리두기] 캠페인에서 국민의 5% 해당하는 260만 장애인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는 여전히 가이드라인이 부재한 실정이다. (출처. 연합뉴스) 텔레그램 N번방 속에도 장애인 뉴스가 숨어있다. 미래 통합당은 N번방 사건을 위한 대책 위원회를 구성했다고 알리며, N번방의 잔혹한 영상 중 장애인과 강제 성관계하는 영상 등이 있다고 설명했다. (출처. news1) 지적장애인의 경우, 성에 대한 지식과 판단 능력이 부족하여 성범죄에 쉽게 노출이 된다. 하지만 성범죄를 당해도 자신의 입장을 정확히 표현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기 때문에,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우리는 텔레그램 N번방이란 이슈를 통해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과 미성년자들이 성범죄에 쉽게 노출될 수 있다는 사회의 부정적인 면을 보게 되었다. 자식과 동생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였으며, 분노하였고, 관심을 가지고 문제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같은 텔레그램 N번방이란 이슈 속에서 장애인 성범죄라는 문제는 많은 공감과 관심을 얻지 못하였고, 대중에게 심각성을 알리지 못하였다. 커다란 이슈의 홍수 속에서 장애인이 겪는 문제는 나와 내 가족의 문제가 아니기에, 공감하지 못하고, 관심 가지지 않으며, 결국 뒤로 밀리게 되는 것. 이것이 우리 사회가 아직도 장애인을 우리 사회의 일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차별을 당하는 사람은 늘 명확히 존재하지만, 차별을 하는 사람은 늘 명확하지 않다. 아마도 우리는 누군가를 차별하면서도, 차별한다고 인식을 못 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장애인 차별의 시작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분해서 생각하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수많은 정보를 접할 때, 장애인의 문제에 한 번 더 관심을 가진다면 내가 의도치 않게 장애인을 차별하게 되는 일은 없어질 것이며, 우리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될 것이다. /김주은 도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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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4.12 15:41

“그것은 예술이 아니다”

송원 배우다컴퍼니 대표 나의 20대, 이제 막 문화예술계에 진입했을 때 무대와 관련된 일이라면 무엇이든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시간이 흘러 무대가 나의 삶이 되겠구나라는 막연한 결심이 들 때쯤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 진짜 예술가가 되고 싶다는 열정이 솟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누가 진짜 예술가인지, 무엇이 진짜 예술을 판가름하는 기준인지 알지 못했고 유명작가, 유명연출가 등 대중에게 알려진 성공한 예술가가 하는 창작행위는 적어도 진짜 예술일 것이라는 믿음에 빠졌다. 그들의 작품을 관람하고 수집하는 데 돈과 시간을 아끼지 않았고 저서와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일에 꽤 큰 만족감을 느꼈다. 그들의 작품을 닮고 싶었고 그들의 삶을 선망했다. 어떻게 하면 나도 저들처럼 될 수 있을까 고민하며 대학원에 진학했다. 석사과정을 시작하고 전문지식을 습득하여 구사할 수 있는 전문가적 언어가 늘어난 것에 대한 자신감은 커졌지만 이상하게도 나의 예술은 수렁에 빠진 듯 한 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위대한 작품들과 나의 작품을 비교하기 시작했고 창작과정에 대한 자기검열이 심해졌으며 열등감과 부끄러움이 더해졌다. 무대는 가장 무거운 숙제가 되어 나를 짓눌렀다. 무엇에 대한 두려움인지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는 시간을 갖는 것은 어렵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예정된 숙제였을지도 모른다. 정작 내 삶의 반경에서 일어나는 부조리한 사건들에 대해서는 들여다보지 않으면서도 무대 위 소재에 대해서는 내 일인 양 분노하였고, 다수가 인정하는 성공한 타인의 삶만을 욕망하며 그 외양을 흉내내는 데 온 힘을 쏟고 있었기 때문이다. 2018년 2월 공개기자회견을 통한 나의 미투는 이러한 치열한 자기고민에 대한 고백이었다. 더 이상은 나에게 일어난 모든 사건들에 대해 외면하지 않으리라, 내가 서 있는 이 곳에서 내 세상을 관철하리라, 그것이 예술가로 존재하는 나의 시발점이며 정체성이고 오롯이 내가 담아낼 작품의 소재임을 깨달은 셈이다. 그리고 그 해, 수많은 문화예술계 미투를 보며 진짜 예술을 바라보는 나의 기준은 분명히 달라졌다. 천재라 불리던 유명연출가의 성폭력 사건을 보면서, 미투 가해자의 대부분이 사회적으로 성공한 예술가였다는 사실을 지켜보면서, 추앙받았던 그들의 유명 작품이 피해여성의 성착취가 묵인된 과정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 모든 상황을 공동체의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고 여전히 자신의 전문가적 기량만을 뽐내기에 바쁜 몇 몇의 유명연출가의 행보를 보면서 내가 선망했던 진짜 예술은 어쩌면 허상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최근 성착취채팅방 사건과 한 정치인의 딥페이크, 예술작품이라 생각하고 만들 수 있지 않냐는 발언과 관련 법안을 졸속처리한 국회를 보며 이 사회의 일원이자 여성인 나는 한없이 분노한다. 또한 이 분노가 무력감이 되지 않기 위해 예술적 동력으로 활용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하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에 이바지할 작품을 세상에 탄생시켜야 한다는 책임마저 생긴다. 나는 여전히 진짜 예술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예술이라는 미명 하에 타인을 착취하고 괴롭히며 묵인, 방조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던 어떤 것에도 예술이라는 이름을 허락할 수 없다는 기준은 명확하다. 폭력과 배설에 예술을 빙자하도록 허락하지 않겠다. 그것은 예술이 아니다. /송원 배우다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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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4.05 15:34

조각가의 하루

김성수 조각가 아침 6시반, 알람 소리와 함께 하루가 시작된다. 간단히 아침을 챙겨 먹은 후 삼례에 있는 작업실로 향한다. 운전대를 잡은 왼손의 붕대 안의 상처는 전보다 많이 아물었지만, 움직일 때마다 욱신거리는 통증에 계속 신경이 쓰인다. 지난 1월 21일 구정을 앞두고 손을 다쳤다. 4인치 그라인더로 금속판을 자르던 중 회전하는 절단날이 왼쪽 집게손가락 위를 덮쳤고 깊게 들어간 날은 피부를 찢고 인대를 스쳤다. 급한 대로 작업실에 갖춰놓은 구급함 붕대로 지혈하고 허겁지겁 도착한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10여 바늘을 꿰맨 후 수술은 마무리되었고 다행히 신경은 무사하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작업하거나 그림을 그릴 때 왼손을 사용하기에 작가 생명을 좌우할 수 있었던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아직도 왼손 검지는 깊게 말리지 않아 불편함이 있지만, 밀린 작업 진행을 위해 오늘도 작업실에 도착했다. 지난겨울은 봄을 시샘하지 않는 듯 몹시 춥지 않아서 작업하기 딱 알맞은 온도였다. 묵직한 망치로 금속판을 두드리고 불꽃이 튀는 용접작업을 하는 필자는 더운 여름보다 시원한 겨울을 선호한다. 가끔 망치질할 때 생각을 비우기도 하지만 곧 다가오는 작업실 월세라든지, 다음 달 생활비를 생각하며 한탄 섞인 망치질을 하기도 한다. 오늘은 오전 내내 1제곱미터 넓이 분량의 금속판을 두드렸다. 농사짓는 분들이 솟아나는 볏모를 보며 느끼는 감정과 비슷하려나. 잘리고 두드려진 금속판들을 보면 말할 수 없는 보람이 느껴진다. 2009년에 데뷔해서 올해로 작업 11년 차 조각가로 활동을 이어오고 있지만, 작업실에서 시나브로 완성되어가는 작품을 볼 때 생애 첫 작품을 바라보는 것처럼 뿌듯함과 희열을 느낀다. 고된 망치질 덕에 허기를 느껴 점심을 간단히 먹고 돌아와 오후에는 용접을 진행했다. 망치질에 비하면 용접은 나름 신선놀음이지만 섭씨 1,500도의 강한 알곤가스 용접의 빛에 눈이 종종 화상을 입곤 한다. 조각가의 숙명이려니 하고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차가운 물수건을 올린다. 예술의 범주에서 놀고 있지만 고된 노동력을 수반하는 작업성향 덕에 노동자의 옐로칼라가 훨씬 잘 어울리는 듯하다. 언제까지라도 이 재밌는 놀이(?)를 계속하고 싶지만 내 몸이 버텨줄까 하는 걱정과 함께 못 버티면 그때 가서 할 수 있는 작은 작품을 만들면 되지! 하고 위안을 하곤 한다. 조각가들은 고된 작업성향으로 인해 실제적으로 작업을 할 수 있는 물리적인 시간은 다른 미술 장르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은 편이다. 요즘은 부드럽고 가벼운 재료와 오브제를 사용한 개념 위주의 작품들도 많이 볼 수 있지만, 재료의 물성을 기본바탕으로 하는 작업의 형태는 전통적인 조각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전북에서 활동하는 대략 40~50명 정도의 조각가들은 대부분 노동력을 수반하는 땀 흘리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재료와 숙성기간, 음식을 담는 그릇이 다르면 그 맛이 천차만별 다르듯 각각의 조각가의 신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개성 있는 작품들은 그저 경이로울 수밖에 없다. 3D프린터가 나오고 기술이 고도화되는 시대로 흐를수록 만드는 행위의 기본이 되는 시간과 땀의 소중한 가치는 오히려 빛을 발하는 것 같다. 작업을 마치고 어둑해진 길을 나서며 보람찬 하루를 보냈는지 자신에게 되묻는다. 난 오늘도 뜨거웠는가? 오늘도 이렇게 조각가의 하루가 지나간다. /김성수 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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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3.29 15:19

설령 코앞에 삼재 팔난이 닥칠지라도

문지연 최명희문학관 학예사 알록달록 색을 더해가는 전주한옥마을 담벼락. 낯설게 고요하다. 익숙한 재잘거림이 사라진 거리에 상인들의 한숨이 나뒹굴고 있다. 갑자기 찾아온 코로나19는 평범했던 일상과 특별했을 계획을 모두 얼어붙게 했다. 소살소살 흘러온 봄을 보고 있자니 더욱 야속해진다. 사람이 아무 살도 안 띠고 평생을 순탄하게 살기는 아무래도 어려운 법이란다. 누구라도 한두 가지 살은 맞게 되어 있지마는, 그러더라도 어쩌든지 제가 미리 알고, 조심허고, 뛰어갈 거 걸어가고, 소리칠 거 어루만지고, 그렇게 삼가면, 설령 코앞에 삼재 팔난이 닥칠지라도 가벼이 지나간단다.(소설 「혼불」 중) 전주시의 지침으로 도서관박물관체육관 등 대부분의 공공시설은 문을 닫았지만, 최명희문학관을 비롯한 일부 민간위탁 문화시설은 정상 운영하며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문학관 역시 다수의 사람이 모이는 문학강연문학기행체험행사문학제 등 모든 행사를 잠정 중단한 상황이다. 출근길 전주사고 근처를 지나니 과거 조상들은 전염병을 어떻게 이겨냈을까 궁금증이 인다. 지금보다 의학지식도 첨단장비도 부족했던 왕조시대에는 심각한 국가위기를 어떻게 이겨냈을까. 그 안에서 얻을 수 있는 지혜는 무엇일까. 『조선왕조실록』에는 1,455건의 전염병 기록이 등장한다. 1392년부터 1917년까지 연평균 2.73회 발생했다. 임금별로 보면 숙종이 25회로 가장 많았고, 영조(19회)와 현종(13회)이 뒤를 잇는다. 유행 빈도는 3월(12.3%), 2월(12%), 4월(10.4%) 등 봄철이 34.7%로 가장 많다. 겨울에 시작해 봄에 확산된 코로나19의 상황과 비슷하다. 병자 격리, 처방문 배포, 위생관리, 구휼미 제공 등 대응 방안도 지금과 유사한 부분이 눈에 띈다. 1437년 봄 전염병이 진제장(무료급식소)을 휩쓸어 수많은 백성이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1444년 또다시 역병이 돌자 세종은 7년 전의 전처를 밟으면 안 된다.라며 빈민들을 분산 수용하고 질병에 걸린 사람은 다른 사람과 섞여 살게 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1526년 중종은 평안도로 의약품을 내려보내 마음을 써 치료하도록 하고, 또한 중앙에서 제사 지낼 것을 예조에 말하라.라며 피해자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했다. 1613년 2월 광해군은 백성들이 병에 대처할 수 있도록 전염병 매뉴얼인 『신찬벽온방』을 전국에 배포했는데, 물을 반드시 끓여먹고, 옷가지를 삶아서 입고, 몸을 깨끗하게 하고, 고여 있는 물을 퍼내어 쓰라고 적혀 있다. 기록 속 조상들의 모습에서 전염병을 개인의 희생이 아닌 사회문화적 문제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엿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현재로 이어져 코로나19를 막는데 큰 힘이 되고 있다. 전주에서 시작한 착한 임대료 운동과 재난기본소득을 비롯해 사회적 약자를 위한 기부, 피해지역 의료봉사, 사회적 거리두기, 예방수칙 지키기 등 사회 전반에서 서로를 배려하는 기분 좋은 소식들이다. 과거에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은 공동체 문화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은 재물을 풀어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병으로 농사를 못 짓는 가정을 위해 이웃에서 대신 농사를 지어주는 것.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고통받는 힘든 상황에서도 희망을 품는 이유이다. 우리는 이 위기를 잘 이겨내고 소중한 일상으로 반드시 돌아갈 것이다. 설령 코앞에 삼재 팔난이 닥칠지라도. /문지연 최명희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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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3.22 15:16

우리나라 장애인 인식의 역사

김주은 도르 대표 조선시대 우리나라는 장애인의 대우와 인식은 긍정적이며 선진적이었다. 하지만 개화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부정적으로 쇠퇴되었으며 현재 우리의 장애인식에 영향을 주었다. 오늘은 우리나라 역사의 흐름에 따른 장애인 인식 변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글은 정창권의 「근대 장애인사」의 내용을 정리, 재조합하여 글쓴이의 의견을 덧입힌 것으로 원작의 흐름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힌다. 먼저 조선시대의 장애인 대우와 인식을 알아보자. 조선시대엔 지능에 문제가 없는 척추장애인, 건강장애인(뇌전증), 지체장애인 등은 장애와 상관없이 과거를 보아 관직에 나갈 수 있었고, 능력만 있다면 정 1품 정승까지 오를 수 있었다. 또 시각장애인은 점을 치는 점복, 경을 읽어 질병을 치료하는 독경,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와 같은 직업을 가졌다. 이에 세종대왕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관직으로 명과학, 명통시, 관현맹인을 설치하여 장애인을 국가 차원에서 지원하였다. 그 외 교육이 어려운 지적장애인, 언어장애인 등은 가족이 부양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국가에서도 시정이라고 하는 오늘날의 활동보조인을 제공하고, 자립하기 어려운 중증 장애인은 재생원 같은 구휼 기관을 통해 구제하는 등 다양한 복지 정책을 펼쳤다. 조선시대는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뛰어났기 때문에 이러한 복지 정책을 시행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장애인을 단지 몸이 불편한 사람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인식했다. 때문에 오늘날처럼 장애를 완전하지 못한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고, 한계나 극복의 대상으로도 보지 않았다. 오직 그 사람이 지닌 능력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장애에 국한되지 않고 직업을 가질 수 있었고 존중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개화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장애인 인식은 부정적으로 바뀌었다. 근대화로 단순노동 위주의 장애인 직업은 사라져갔고, 점복과 독경을 미신으로 여기고 금지했다. 또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수탈로 많은 장애인은 심각한 생활고를 겪게 되었다. 그 결과, 장애인들은 구걸로 생활을 연명할 수밖에 없었고, 이때부터 우리는 장애인을 불쌍한 존재로 인식했다. 근대의 부정적인 장애인 인식은 장애인을 용어의 변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민간에선 장애인은 병신이라 부르곤 했다. 여기서 병신이란 오늘날처럼 조롱이나 비하, 욕설의 의미가 아니라 장애를 고치기 어려운 고질병으로 인식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개화기에는 장애인을 불구자로 불렀다. 이는 후구샤(不具者)라는 일본에서 온 말로 ~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란 뜻이다. 즉 기능적으로 결함을 가진 사람을 의미한다. 이는 한번 장애를 입으면 고칠 수 없는, 즉 나을 희망이 없이 평생 불구자로 살아야 하는 존재로 인식한 것이다. 이와 같이 장애인을 불쌍하고 희망이 없는 존재로 여기는 인식은 근대화와 일제강점기로 인해 생겨났다. 우리는 일제로 인해 가지게 된 부정적인 장애인 인식을 지양하고, 조선시대 때의 우리 고유의 긍정적인 장애인 인식을 다시 되새길 필요가 있다. 장애는 바꿀 수 없으나, 장애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바꿀 수 있다. 장애인도 그저 나와 같이 세상에 하나뿐인 존재로, 하나뿐이기에 나와는 다른 존재로 인식하길 바란다. 우리가 장애를 떠나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하고 더 나아가 배려한다면 장애인을 배제하고 차별하는 문제는 사라질 것이다. /김주은 도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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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3.15 15:56

해결책은 이미 우리 안에 있지 않을까?

송원 배우다컴퍼니 대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위기 경보가 심각 단계로 격상 되면서 문화예술계의 시계는 마치 멈춘 것만 같다. 극장과 전시장, 행사와 강연, 교육과 지원사업까지 사람들이 모이고 사람들을 모으는 모든 곳의 일정이 취소되거나 무기한 연기되었다. 같은 처지의 예술인들을 만날 때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느냐며 두려움과 막막함을 쏟아내고 우리 중 누구도 코로나바이러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에 대한 공포감이 엄습한다. 맞다. 정말 두렵다. 돈을 벌 수 없으니 현실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상당한 타격을 받고 있다. 아무것도 할 수없이 무기한 기다려야 하는 이 상황이 지치고 점점 화도 난다. 마치 내가 입은 피해가 무책임하고 무능력한 특정한 누군가 때문에 발생된 무자비한 바이러스로 느껴진다. 그렇게 한참동안 비난의 화살을 퍼붓다가 퍼뜩 깨닫는다, 어쩌면 나는 이 어려운 현실을 감당할 수 없기에 마땅한 분노의 출구가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 익숙한 방식은 내가 겪었던 혐오와 몹시 닮아있다. 4년 전 연극작품 보조금 신청을 위한 면접을 준비하던 중 한 선배가 나를 향해 물었다. 보조금 타내려고 단체 만들었니? 실력도 없는데 돈 욕심 때문에 물 흐리지 마라 면전에서 들은 이유 모를 비난을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떨린다. 시장이 형성되지 않은 지역 문화예술계에 대다수의 생계수단은 보조금이다. 때문에 새로운 단체가 나타날 때면 파이를 빼앗긴다는 두려움 때문에 배재와 혐오의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곤 한다. 가난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우리지역에 예술시장이 자리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민들을 위한 예술은 무엇이고 전향적 변화를 위해 예술가와 행정은 어떻게 상생해야 하는지 등의 협력의 방법을 찾지 않은 채 그저 서로의 파이를 잃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 서로를 미워하는 날들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창궐의 원인은 무분별한 생태계 파괴와 서식지를 잃은 야생동물들의 포획, 식용으로 비롯되었다고 한다. 절제되지 않는 인간의 정복욕에 대한 자연의 경고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근본적인 물음을 외면한 채 특정대상을 향한 손 쉬운 배척과 혐오만을 일삼고 있다. 또한 집단감염으로 많은 수가 사망한 폐쇄병동의 정신장애인을 보면서도 신종바이러스로 인해 가장 고통 받는 위치에 누가 놓이는지에 대해서 외면해버리곤 한다. 몇몇의 사악한 인간들은 바이러스를 도구화하여 선동하거나 여론을 악용하여 권력을 쟁탈하려는 움직임마저 보이고 있다. 무엇이 우리를 안전하게 할까? 라는 질문은 또 다른 언쟁을 발생시킨다. 이 물음이 더욱 지혜로워 지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협력할 수 있을까? 혹은 어떻게 우리는 서로를 도울 수 있을까? 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연을 해치지 않으면서 평화를 유지하고 인간적인 존엄을 지키면서 발전하려면 상생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타인과 타생명체를 대하는 방식에 대한 성찰로부터 예술도 시작된다. 배제와 불신으로는 예술이 성장 할 수 없다. 각자도생이 표제어가 된 현실이지만 예술의 힘과 기능은 여전히 살아 움직일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선함을 깨닫고 이를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 이렇게 우리는 어려움을 통해서 배우고 다시 성숙해질 것이다, 아니 꼭 그래야만 한다, 그러길 바란다. /송원 배우다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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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3.08 16:58

2020년 전북의 청년작가들 (2)

김성수 조각가 청년은 시대를 불문하고 사회를 움직이는 중요한 축으로 존재해왔다. 사전적 의미로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한창 성장하거나 무르익은 시기에 있는 20대 정도의 연령대를 말하지만, 오늘날의 청년은 19살부터 34살 언저리의 연령대를 살아가는 남녀를 포함한다. (청년기본법 참고)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청년은 우리 지역에서 어떤 모습으로 활동하고 있을까. 전북에는 꾸준히 자생력을 쌓아가며 활동을 이어가는 청년작가단체가 있다. 그중 하나로 C.art(씨앗) 단체가 있다. 2011년 전북 도내 예술대학과 미술학과의 정원이 축소되고 폐과가 되는 현실에 위기감을 느껴 전북에 위치한 4개 대학 (전북대, 전주대, 원광대, 군산대)의 졸업을 앞둔 미술학과 4학년 학생들이 합심하여 창립 후 현재까지 매년 새로운 기획전시발표와 국내의 저명한 미술평론가를 초빙하여 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지속적인 활동을 10년째 이어가고 있다. 단체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은 위기감에서 시작했지만 다른 지역 청년작가단체와의 교류, 공개 아티스트토크 등 매년 새로운 시도를 통해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나가고 있다. 더젊음 이라는 단체는 2014년부터 대중들에게 다가서는 실험적인 기획과 전시로 꾸준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아트상품제작과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사생대회를 여는 등 관람객의 눈높이에 맞춘 참신한 기획을 통해 긍정적인 반응을 만들어가고 있다. 2018년 12월부터 전주 선미촌에 물결서사라는 책방을 열고 주민 워크샵과 청년작가 기획전시 등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는 물왕멀이라는 단체가 있다. 미술, 음악, 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로 이루어진 이 단체는 미술의 제한적 프레임에서 벗어나 다양한 장르와 융합하며 새로운 시각으로 예술에 접근하는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전라북도에서 활동하는 청년작가들은 우리 지역의 정체성을 지닌 채 나름의 역사를 만들어나가고 있으며 그들에게 보내는 격려와 응원의 박수는 전혀 아깝지 않다. 척박한 토양을 스스로 일구어나가고 있는 굳센 농부들이며 하루하루 정해진 길이 아닌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탐험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전시장의 화려한 조명과 작품 뒤에는 생활과 창작이라는 두 줄 타기를 아슬아슬하게 견디는, 이 시대 청년으로 살아가는 작가들의 치열한 삶의 단면이 존재한다. 88만원 세대로 시작하여 아프니까 청춘이다로 일컬어지는 이 시대의 청년들의 얼굴에는 당찬 푸르름이 느껴져야 당연하지만, 오늘의 빵과 내일의 꿈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 청년작가들의 하루는 점점 여유를 찾아보기 힘들다. 지난 1월 9일 청년기본법 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청년의 권리 및 책임, 청년 정책의 수립조정 및 청년지원을 목적으로 하는 기본법의 주요 내용은 청년의 권리 보호 및 신장, 정책결정과정 참여확대, 고용촉진, 능력개발, 복지향상 등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청년의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한 것이라고 나와 있다. 청년이 직접 참여하고 결정되는 정책적인 부분에서 청년들의 기본권이 나아진다면 생활과 창작 사이에서 어려움을 겪는 청년작가가 중도 포기하지 않고 예술가로서 스스로 입지를 다져갈 수 있는 토대가 될 것이라 믿는다. 청년을 시혜의 대상이 아닌 권리를 가진 시민이자 정책의 주체로서, 대안을 함께 논의해야 할 시점이다. 언젠가 우리 지역예술계의 중요한 한 축으로서 청년작가들이 당찬 푸르름을 내뿜으며 우뚝 서는 그날을 기다려 본다. /김성수 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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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3.01 15:27

문학의 길에서 꽃심은 피어나고

문지연 최명희문학관 학예사 어느 장소든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힘이 있다. 그 힘은 그곳에 애착을 갖게 하고, 그곳에서 자란 이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기도 한다. 전주시는 도시에 자연스레 쌓인 얼을 탐구해 전주 사람들의 고유하고 특별한 성질인 대동풍류올곧음창신의 정신을 찾았다. 그리고 전주의 정신을 꽃심이란 단어에 담았다. 그중 올곧음은 의로움과 바름을 소중히 여기는 정신으로, 부당함에 맞섰던 민족정신을 상징한다. 임진왜란 때 안의손홍록오희길 등이 지켜낸 조선왕조실록이 있던 전주사고, 동학농민군 집강소를 두었던 전주성, 을사늑약 이후 서문 밖 일본인들에게 이 땅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전주한옥마을, 31 만세운동이 열렸던 남문장터 등 눈에 닿는 곳곳이 기억해야 할 역사의 현장이다. 하지만, 전주를 찾는 관광객은 물론 이곳에 사는 우리조차 그 가치를 잘 모르고 있다. 역사는 문학을 매개로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내고, 작품은 머무는 공간에 대한 뚜렷한 정체성을 각인시킨다. 현실감 있게 버무려진 기록을 통해 자연스럽게 지역의 역사가 전해지고, 작품에 새겨진 삶의 자리를 보며 내 고장의 지난날을 공유하는 것이다. 그 시절을 살아냈던 우리의 문인들은 현실과 역사를 향해 비판의 날을 세웠고, 시대의 아픔을 글로 남겼다. 전주에서 고독의 굴레를 벗은 시인 박봉우(19341990)는 1975년 전주에 정착해 인생의 마지막을 보냈다. 전주에서 펴낸 시집인 『황지의 풀잎』(창작과비평사1976)에서 독재와 혁명의 6070년대를 시인이 어떻게 몸부림하며 부딪쳐왔는가를 엿볼 수 있다. 오늘은/완산칠봉/내일은/풍남문 근처에서/아직/전주를 알기는 이르다/당분간/시가 되지 않은/이 밤/울고만/울고만 싶어라(「전주에 와서」 중) 1987년 6월 항쟁부터 1991년까지 전주의 민주화운동을 대하서사시로 형상화한 시인 최형(19282015)도 꾸준히 시대의 아픔을 토해냈다. 그의 대표작인 『다시 푸른 겨울』(시와사회2000)에는 이윽고 모두가 중앙성당 앞에 이르러서/촛불 행진은 끝낸 셈이지만/누구라 없이 그대로 거리와 광장을 메우고 있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시위행렬로 넘쳐나던 팔달로와 관통로, 코아백화점(현 세이브존) 광장 등 그 장소에서 함께 한 이들의 진솔한 기록이다. 작가 최명희(19471998)의 소설 「혼불」에도 의병활동, 우리말우리글 쓰기 운동, 독서회 조직, 독립만세운동 등 일제강점기 전주의 수난사와 항일투쟁의 행적이 세세하다. 기미년 삼월에 독립만세 운동이 거국적으로 벌어졌을 때, 사람들은 이 용머리 고개를 하얗게 넘어오며 목메어 만세를 불렀지.(「혼불」 10권 296쪽 중) 완산칠봉, 풍남문, 중앙성당, 팔달로, 용머리 고개 등 작품에 등장하는 장소는 대부분 우리에게 낯익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낯설다. 전주시는 이병기신석정유진오하근찬이태 등 우리 고장과 깊은 인연을 맺은 올곧은 문인들을 조명하고, 문학 속 전주정신을 일깨워야 한다. 청년예술가들과 함께 전주문학지도를 만들어 도시의 정체성을 품은 관광자원으로 활용한다면, 역사와 문학을 사랑하는 많은 이의 발길이 전주로 향할 것이다. 꽃심의 향기가 널리 퍼질 때, 국가관광거점도시 전주는 더 활짝 피어날 것이다. /문지연 최명희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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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2.23 15:46

장애란 운이 없는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김주은 도르 대표 우리 사회에서 장애는 언제부터 문제 시 되었을까? 오늘은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의 정의와 유례를 알아보고 이와 연결하여 장애가 언제부터 사회에서 문제(Problem)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는지 이야기하고자 한다.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이란 성별, 연령, 국적, 문화적 배경, 장애의 유무에도 상관없이 누구나 손쉽게 쓸 수 있는 제품 및 사용 환경을 만드는 디자인으로 모든 사람을 위한 디자인(Design For All), 범용(汎用) 디자인으로도 불린다. (출처. 두산백과) 다양한 이름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유니버설 디자인은 아동, 여성, 노약자, 장애인을 포함하여 비장애인까지 우리 모두가 사용하기 편안한 제품과 환경을 추구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이야기하는 새로운 사고방식이라 말할 수 있다.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유니버설 디자인은 1960년대 후반 2가지 커다란 사회적 요인으로 미국과 유럽에서 시작되었다. 첫 번째, 미국은 베트남 전쟁으로 엄청난 수의 부상자, 즉 장애인이 생겨나게 되었다. 미국은 이 많은 부상자들을 사회로 복귀시키기 위해 장벽이 없는 디자인, 배리어 프리(Barrier Free Design) 디자인을 고안하였다. 이 배리어 프리 디자인이 발전되어서 장애인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디자인, 미국형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이 시작이 되었다. 두 번째, 북유럽은 당시 스웨덴을 시작으로 고령화 사회로 변화하고 있었다. 1960년대는 유럽의 산업혁명이 일어나던 시기였기에 늘 일손이 부족하였다. 집안의 가능한 모든 노동력이 일을 하러나가고, 혼자 집에 남겨진 노인들이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스스로 일상생활을 보낼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 유럽의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 시작이었다.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은 우리가 찾은 해결 방법(Solution)이었으며 해결하기 위한 문제(Problem)는 장애인과 노약자의 일상생활 영위였다. 그렇다면 이전에는 장애인과 노약자가 없었을까? 왜 갑자기 문제(Problem) 시 되었던 걸까? 20세기는 2차 세계대전과 제2차 산업혁명이 함께 일어났던 시기이다. 전쟁과 산업혁명의 흐름 속에서 비장애인들은 모두 군인으로, 노동자로 사회로 나갔기에 장애인과 노약자를 돌봐줄 인력이 없었을 것이다. 또 노동력과 생산력이 가장 중요시되는 사회로 변화하면서 힘이 없는 장애인과 노약자는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졌을 것이다. 여기서부터 장애인과 노약자가 문제(Problem) 화 된 것이다. 장애는 운이 없는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전쟁과 산업화라는 사회 전체적인 변화로 인해 우리가 장애인을 문제(Problem) 화 시킨 것이다. 장애인이 생겨나게 한 것도 우리이며, 장애인을 생산력이 없다고 배제한 것도 우리이며, 당연히 배려하고 당연히 함께하였다면 이름 짓고 구분 지을 필요도 없었을 장애란 개념을 만든 것도 우리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니버설 디자인이라는 새로운 사고방식을 만들어 낸 것도 우리이다. 다만 우리 사회가 자신의 일만으로도 벅차게 변화해 가면서 잠시 잊었을 뿐이다. 이 글을 통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우리 모두의 책임을. 우리가 함께하는 사회를. /김주은 도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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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2.16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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