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좋은 선생님, 아름다운 학교
요즈음 우리 학교사회에 부는 바람이 심상치 않다. 초등학교장이 교사와의 갈등으로 자살하고, 교사들 사이에 폭력이 오가고, 교원단체들이 집단행동을 계획하고, 정책의 실시를 두고 교육당국과 교직단체가 극단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현실은 교육가족 모두에게 불안감과 실망을 안겨 주고 있다.왜 이 모양인가? 무엇이 우리 교육 현장을 이처럼 이전투구(泥田鬪狗)의 현장으로 만들었는가? 교육에 직간접으로 연관된 사람들 모두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다.올해 교육주간을 맞아 한국교총이 내건 주제는 '좋은 선생님'이다. 좋은 선생님에 대한 정의(定義)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경사(經師)는 쉬우나, 인사(人師)는 어렵다'는 말이 뜻하는 것처럼 전통적으로 참다운 선생님이란 지식이나 기능을 잘 가르치는 선생님보다는, 인격적으로 잘 이끌어 주는 선생님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사람마다 좋은 선생님의 조건을 내세우고 있다. '안내자', '협력자', '상담자', '공동학습자' 등이 그것이다. 한마디로 좋은 선생님이 되기 위해서는 학생들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그들이 지닌 소질과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도록 도와 완전한 인격자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아름다운 학교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 먼저 학생의 입장에서는 좋은 친구들을 만나 우정을 쌓는 곳, 좋은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가며 새로운 지식을 탐구하고, 자기의 숨은 능력과 소질을 찾아 가꾸며 기쁨을 누리는 곳이어야 한다. 선생님의 입장에서는 아는 것을 가르치는 기쁨이 넘치는 곳, 학생들이 지닌 소질과 능력을 발견하여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기 발전을 위해 노력하도록 돕는 일에서 보람을 느끼는 곳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학생과 교사가 가고 싶은 학교, 머무르고 싶은 학교야말로 우리가 바라는 아름다운 학교의 모습이다. 또다시 스승의 날을 맞는다.역사의 전환기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각 분야에 변화가 뒤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유독 교육에만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으로 진단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좋은 뜻으로 받아들이자면 그 만큼 교육의 역할이 중대하고, 교육에 거는 기대가 크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지나친 자만일까? 학교는 교육을 위해 존재하고, 학생이 있기에 교사가 있으며, 학생은 인격 완성의 과정을 밟기 위해 학교를 선택한다. 그러므로 교육 없는 학교, 학생 없는 교사를 생각할 수 없다. 문제는 모두가 제각기 맡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느냐에 달렸다.교사는 분명 가르치고 이끄는 일을 소명으로 삼는 사람이다. 잘 가르치기 위하여 먼저 배우고, 잘 이끌기 위하여 고민하고 궁리하는 사람이다. 그의 가장 큰 보람은 자신을 넘어서는 학생이요, 가르침이 실현되는 순간에 맛보는 기쁨이다. 그의 재산은 학생들을 통하여 얻어지는 크고 작은 성과이다. 그가 이룩하는 성과는 돈(성과급)으로 계산할 수 없는 것이다. 성과에 대한 따뜻한 격려와 칭찬의 말 한 마디에 만족한다.우리 사회는 교사의 업적에 대해 퍽 인색하다. 좁은 국토, 빈약한 부존자원, 뒤떨어진 기술 등으로 저개발국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던 우리나라를 오늘날처럼 잘 사는 나라로 탈바꿈시킬 수 있도록 만든 데 기여한 학교교육의 공로를 인정은 하면서도 그에 합당한 사회적 경제적 대우를 하는 데는 기대 수준 이하였다. 이러한 교원 경시 정책은 교사를 성직자의 반열에 올려놓고자 하는 전통적 사고에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이로 인해 교사들이 겪는 갈등과 의욕 상실은 보상받을 길이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돈 많은 정치인은 활개를 치고 사는데, 자라나는 세대에게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치고 있는 교사들의 의욕은 발붙일 데가 없는 나라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스승의 날이 끼인 교육주간만이라도 그 동안 교사들이 받은 스트레스를 다소나마 해소시킬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기획실행되고, 교사도 하나의 직업인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해 주는 주간이 되기를 바란다.스승의 날을 맞으면서 안타깝게 명(命)을 달리한 전 충남 보성초등학교장 고 서승목 님의 명복과 폭력 사태로 상처를 입은 서울 M초등학교 교감선생님의 쾌유를 빈다. 작금의 가슴 아픈 현실은 우리 교육 현장에 투쟁보다는 타협을, 불신보다는 신뢰를, 타율보다는 자율을 정착시킴으로써 교육입국(敎育立國)의 대명제(大命題)를 위하여 다시 태어날 것을 기대하는 시대의 요청은 아닐까?/오태근(부안 동북초등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