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 역사 이야기] ⑨난파선
천안함이 백령도 인근 바다에 침몰, 온 국민을 충격에 몰아 넣었다. 실종자 가족들은 물론, 국민들의 염원이 담긴 기적적인 생환 소식은 전해지지 않고, 출처와 근거를 알 수 없는 각종 설들이 난무하며 그렇잖아도 깊은 상처로 아린 가슴을 더욱 짓누르고 있다. 인류 역사상 이어진 숱한 선박 침몰 사고들. 지구상에선 어떤 충격적인 선박 침몰 사고가 발생했을까.선박 침몰 사고하면 대다수 사람들은 1912년에 일어난 타이타닉호를 금새 떠올릴 것이다. 대서양 횡단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영국 선적인 타이타닉호는 건조 당시 '신도 침몰시킬 수 없는 배'라는 평가까지 받은 전체길이 268.8m에 이르는 초대형 여색선이었다. 승무원과 승객을 포함해 총승선인원도 2223명 규모이다.1912년 4월 10일 2200명 이상을 실은 타이타닉호는 영국의 사우샘프턴에서 첫 항해에 나섰지만 빙산과 충돌, 1513명이 희생되었다. 당시 최첨단 과학기술로 탄생한 타이타닉호의 침몰은 산업혁명과 함께 문명 최우선주의에 빠졌던 서방세계를 충격으로 몰아 넣었다.하지만 타이타닉호의 비극은 세계 해난사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규모 면에서 한참 뒤로 밀린다. 사망자 숫자를 기준으로 순위를 매길 경우 여덟 번째 정도이다. 세계인들의 뇌리 속에 타이타닉호가 각인되 이유는 선적이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던 영국이었고, 승객들도 최상류층 인사들로 구성되어 세계적인 이목이 집중, 국제적 이슈화에 따른 효과이다.인류 역사상 최악의 선박 침몰 사건은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접어들던 1945년에 잇따라 일어났다.빌헬름 구스틀로프호는 독일 나치 정권이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2000석 규모로 건조한 초호화판 관광 여객선. 기세 좋게 러시아를 침공한 독일군이 소련군의 대규모 반격으로 퇴각하던 1945년, 패전으로 치닫던 독일은 폴란드 점령지이던 동프로이센 지역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했다.하지만 잔악한 독일군으로부터 핍박을 받은 소련군은 무자비한 살육극을 벌이며 피비린내 나는 보복에 나섰고, 독일은 민간인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를 발트해에 투입했다. 소련군에 쫓긴 독일 민간인들은 이 배로 몰려들었고, 최대 정원 2000명보다 5배 이상 많은 1만582명이 갑판은 물론 짐칸까지 빼곡히 들어찼다.전세를 극적으로 뒤집으며 보복에 불타오르던 소련군은 이 피난선을 그냥 두지 않았다. 소련 해군은 잠수함을 타고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를 추격했고, 마침내 어뢰 3발을 발사했다. 초대형 피난선은 힘없이 바다 속으로 자취를 감췄고, 이 사이에 무려 9340여명이 발트해의 차가운 바다에 수장되었다. 침몰 과정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불과 1239명. 이때가 1945년 1월이다.패전으로 치닫던 독일의 바다와의 악연은 계속되었다. 독일은 대형 참사에도 발트해 탈출 작전을 강행할 수밖에 없었고, 1945년 2월 슈토이벤 여객선이 5200여명을 싣고 밭트해 항해에 나섰다. 소련은 빌헬름 구스틀로프호에 이어 슈토이벤 여객선도 잠수함 공격 작전을 벌였다. 어뢰에 피격된 슈토이벤은 4500여명의 피난민과 함께 바닷 속에서 불귀의 객이 되었다.독일 선박의 참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1945년 4월 독일 고야호가 7000명의 피난민을 태우고 발트해를 건너다 또 다시 소련 잠수함에 피격, 6000여명이 희생되었다.1945년 발트해에서 발생한 잇따른 침몰로 인한 사망자는 무려 2만명에 이른다.▲보물선으로 바뀐 난파선가치가 높은 물건이 실려 있는 배가 난파 당할 경우 보물선이라는 별칭이 덧붙는다. 보물선은 세계 어느 역사에서나 등장하는 단골 화젯거리이고 또 다른 '로또'이다.대개는 일확천금을 꿈꾸는 자들의 헛된 망상으로 끝나는 사례가 대부분이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1687년 보물선을 찾아 나선 영국의 뉴잉글랜드호가 침몰한 스페인 해적선을 찾아냈고, 그 속에서 은 32톤을 비롯 보물을 인양했다. 이 보물선 추적선에 투자한 사람들은 무려 1만%의 배당을 받으며 대박 중의 대박을 터뜨렸다.군산 야미도와 비안도와 충남 태안 인근 해저를 비롯 서해안에서 건져내는 고려청자를 실은 선박도 보물선의 범주에 속한다. 상태가 좋은 도자기의 경우 한 점에 1000만원을 웃도는 것으로 알려져, 배 한척의 가치는 가히 천문학적인 숫자를 기록한다.이들 난파선들은 전북 부안이나 전남 강진 등에서 빚어진 고려청자를 개경의 귀족이나 관청으로 운반하는 과정에서 불의의 사고를 침몰했을 것으로 추정된다.서해안에 난파선이 많은 이유는 서해 일대가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하고, 해저 지형이 복잡다단할 뿐만 아니라, 당시 선박 건조술과 항해기술이 낮은 데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된다. 고려청자 난파선은 찾아 내기가 힘든 보물선으로 분류된다. 금속성 보물은 전파탐지기로 탐색이 가능하지만, 도자기는 원격으로 탐색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이 같은 이유로 대부분의 도자기 보물선은 어부들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다.서해안에는 보물선이 아직도 상당히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태종실록에는 1403년 태안 앞바다에서 34척이 침몰 또는 좌초했고, 1414년에도 66척이 바닷속으로 사라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서해안, 특히 태안 앞바다에서 침몰하는 청자운반선과 조운선이 잇따르자, 태안 앞바다에 운하를 만들어 새로운 운반로를 개척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고려사에는 당시 300여명의 인부를 동원해 운하 개설에 나섰으나, 해저 암반이 확인되어 공사를 중단했다고 기록되어 있다.난판선의 의미는 시대가 흐르며 의미가 바뀐다. 청자 운반선의 경우, 당시로선 기억하기 싫은'참사'이었지만, 후대인들에겐 소중한'타임캡슐'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