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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란 무엇일까

영화제가 끝났다. 새삼 영화제가 무엇일까라는 자문을 해 보았다. 여러 장면들이 지나가면서 한 권의 책이 떠올랐다. 정신현상학 서문에서 프리드리히 헤겔은 존재의 기원에 어리석음을 두었다는 이유로 셸링을 꾸짖었다. 헤겔은 대번에 심기가 불편했다. 인간의 현존재에 시원적 어리석음을 귀속시키는 일은 헤겔에게 자신을 함정에 빠트리고 희대의 오독을 불러올 골칫거리가 분명했다.좋고 아름답고 화려한 것 외에도철학자 아비탈 로넬의 어리석음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어리석음을 인간의 본질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헤겔이 아니라 오늘날을 살아가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도 불편한 일일 것이다. 영화제 전에 화제를 모았던 알파고와의 대결의 결과 인간의 스마트함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매력이 스마트함과 이성적인 것일까라는 생각을 새삼 해 본다. 사람들은 자신의 어리석음뿐만 아니라 타인의 어리석음과 실수를 자주 발견한다. 코미디 영화가 그토록 사랑받는 이유는 어리석음을 하나의 장르로 표현해 냈기 때문이 아닌가.아비탈 로넬은 이어서 말한다. 타자 앞에서 나는 어리석다라는 지혜야 말로 진정한 철학적 앎이다. 데카르트, 칸트, 헤겔을 중심으로 한 서구의 주류 철학은 인간의 이성을 발견해 내는 동시에 정리와 탐구를 목표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어리석음은 일종의 오류로 배제되거나 통제되어 왔다.영화제를 하다보면 계몽주의자에 가까워질 때가 많다. 세상에는 이런 영화도 있고, 저런 사유를 담은 작품도 있어요.라고 말이다. 실상 영화제에 대한 저널의 글들을 보면 상영작품에는 거의 관심이 없다. 대부분 기사는 행사에 대한 것이다. 덕분에 작품을 소개하려는 의지는 더 커진다. 그런데, 올해 새삼스럽게 드는 생각은 영화제라는 곳도, 세상의 모든 영화들을 모아 두는 것도 계몽의 의지가 중요하기 보다는 어리석음을 발견하는 일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먼저 영화가 보여주는 어리석음이 있다. 한국은 물론이고 세상 각지에서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일들이 보여주는 우둔함, 유럽의 이민자들이 벌이는 갈등 그리고 코미디와 폭력을 오가는 장르적 변주들은 대부분 인간의 어리석음을 기반으로 한다. 관객들은 이러한 영화들을 보며 스스로 각성하기도 하고, 어리석음을 보태기도 한다.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다보면 자주 나오는 질문 중의 하나가 왜 그렇게까지 불편한 장면을 만들어야 했는가라는 것이다. 그런 질문이 나오는 영화의 상당수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인간의 행동이 일으키는 불편함을 주제로 삼는다.그러나, 질문은 그 장면만 빼면 아름다울 텐데 왜 불편하고 힘든 장면을 넣었느냐고 반문한다. 정답은 이미 질문에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불편해 했을 한 장면을 위해 전체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올해 단편 영화 심사위원으로 왔던 〈한공주〉의 이수진 감독도 자주 받았던 질문이다. 진지한 영화가 인간의 어리석음과 불편함을 카메라를 통해 정면으로 응시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시선이 그러한 현실에 가 닿을 일은 많지 않을 것이다.인간의 어리석음을 발견하는 일영화제는 영화라는 거울을 통해 어리석음을 발견하는 장소다. 흔히 축제를 좋고 아름다운 것, 화려한 레드 카펫의 무대로 상상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리석음의 교감하는 장소라는 것이다. 그런 진심이 꽤 통했던 것 같다. 50회 이상 늘린 관객과의 대화를 통해, 지난해 보다 늘린 상영작 편수를 통해, 그 어느 해보다 잘난 체 하는 이야기들도 많이 들었지만 그 또한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어리석음들이 모여 거울처럼 들여다보는 영화제는 분명 특별한 시간이다. 나는 이러한 시간들이 축제가 끝난 후 우리의 일상에 더 많이 스며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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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5.10 23:02

내 맘대로 엮어본 전주국제영화제

나는 그저 그런 단순히 영화보기를 좋아하는 관객일 따름이다. 영화촬영을 하고 있는 현장도 한 번도 보지 못했고, 레드카펫을 걷는 연예인에게도 예쁜 여배우를 빼고는 별로 관심도 없는, 해외의 영화제나 심지어 국내의 다른 영화제에도 참가해보지 않은 무척이나 소극적인 관객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보러가기 쉽다는 이유만으로 전주영화제는 지성스럽게 참가하였다. 이 이유 하나만으로도 전주국제영화제를 내 맘대로 엮어볼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본다.형식적 행사 줄인 파격적인 개막식내게 전주영화제의 시작은 개막식 예매부터 시작된다. 개막식 예매를 직접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꼈을 것이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예매 시작 채 2분이 안되어 매진이었다. 예매 시작 30분전부터 영화제 홈피에 접속해 오픈만을 기다리다가 재빨리 좋은 좌석을 지정해 예매를 시도한다. 아뿔사 좋은 좌석은 초대석으로 지정되어 예매가 안 된다. 또 다시 괜찮은 좌석으로 메뚜기 뜀을 시도한다. 벌써 다른 사람이 예매했다. 별 수 없다. 2층 가장 외진 곳으로 날아간다. 다행히도 예매가 된다.이렇게 어렵사리 예매를 했으나, 문제는 개막식이었다. 개막 시작 2시간 전에 도착해도 소리 문화의 전당 주차장은 엄두도 못낸다. 게스트 차량만 통과시켜주기 때문이다. 괜스레 심사가 뒤틀리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영화감독과 배우, 그리고 영화축제를 위해 수고해주신 분들인 만큼 당연한 대우이다. 하지만 기분은 어지간해서 풀리지 않는다.그런데 작년부터 야외에서 개막식을 진행한 덕택에 예매가 많이 수월해지고 주차 문제도 많이 풀렸다. 내 입장에서는 매우 고마운 일이다.올해는 더욱 파격적인 개막식이었다. 긴 레드카펫 행사가 있었고, 이어서 간단한 개막식 행사가 이어졌다. 시장님의 개막 선언과 불꽃놀이에 이어서 간단한 공연과 심사위원 소개와 인터뷰 진행으로 끝났다. 지역인사 분들의 기나 긴 연이은 축사가 빠진 것이다. 참가자에게는 흥미 없는 주례사를 듣지 않아 다행이지만, 내년 예산 확보가 그리 쉽지만은 않을 듯싶다.무어라 해도 영화제의 꽃은 영화이다. 일 때문에 많은 영화를 관람하지 못했으나, 3시간이 넘는 상영 시간임에도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만 기억나는 1회 폐막작 트라우마로 흥미가 없어진 때문이기도 했다. 매회 몇 편의 독립영화를 관람했으나, 인내심이 부족하여 중간에 그냥 나오기도 하였다. 흥미를 끄는 영화도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관람 의욕을 북돋우지는 못했다. 작년에 본 우리 아버지를 연상시키는 옹고집 노친네가 전단지에 실린 거액의 복권에 당첨되었다는 말을 믿고, 복권을 받기 위해 긴 여행을 아들과 함께 다녀오면서 부자간의 갈등을 풀고 가족애를 회복하는 네브래스카를 재미있게 본 후 올해는 더 많은 영화를 관람해보리라 결심했다. 이번 개막작 본투비블루도 추위에 떨었던 고통을 보상해줄 정도의 우수작이었다. 다음 날 본 샌드스톰은 수작이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구성이다. 감독과의 대화도 매우 유익했다.많은 사람 즐길 수 있어야 좋은 축제영화제도 축제이다.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어야 좋은 축제이다. 많은 전북사람들이 즐기는 것은 당연지사이고, 전 국민에게 흥미 있는 축제로, 전 지구인에게도 오고 싶은 축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여러 장애를 극복하고 여기까지 오기도 힘들었겠지만, 한바탕의 재미가 아닌 인생을 전환시켜주고 보듬어주는 한 마당의 꿈으로 발전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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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5.03 23:02

체르노빌의 목소리

지난 2월 23일부터 매주 화요일 저녁 7시에 2015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대표작 〈체르노빌의 목소리〉를 합독했다. 전북환경운동연합의 초록시민들과 함께 하는 자리였다. 합독회는 내가 먼저 제안했다. 전북환경운동연합의 이정현 사무처장이 좋다고 해서 마련된 자리였다. 그렇게 사람들이 모여 매주 화요일마다 소리 내어 책을 읽었다. 그리고 어느덧 4월 19일 저녁에 읽기가 끝났다. 그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묘사도 서술도 없는 언어의 뼈들이 가시처럼 내 눈을 찔렀다. 30년 전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폭발“엄마, 나 못 참겠어요. 그냥 죽여주세요!” “숲은 아무도 안 씻겨줘요. 숲도 죽을 거예요. 선생님이 말했어요. 방사선을 그려보세요. 나는 노란 비가 내리는 그림을 그렸어요. 그리고 빨간 강도 그렸어요.”1986년 4월 26일 발전소의 제4원자로가 폭발하자 체르노빌 주변에는 사신(死神)이 덮쳤다. 방사선이란 사신은 냄새도 색깔도 없이 공기에 섞여 미세먼지보다 더 작은 빛으로 날아다녔다. 사고가 나자마자 소방대원, 군인, 해체작업자, 엔지니어 들은 심지어 마스크조차 착용하지 않고 현장에 투입되었다. 그들은 소비에트의 영웅이 되었지만 핵에 오염되어 빠르게 병들었고 상상도 못할 지경으로 망가진 채 죽어야 했다. 뒤이어 사고현장에 도착한 공산당원, 마을주민들, 교사, 기자, 과학자, 작가, 사진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체르노빌에 다녀온 것만으로도 그들은 사신의 검은 손에 몸과 영혼을 저당 잡혀야 했다. 그들은 누군가의 남편이며 아내며 자식이었고 부모였다. 그들은 정치와 관료주의 그리고 서방에 대한 정치공세라는 시스템에 가로막혔고, 집단적인 무지와 방심 그리고 국가와 언론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 핵발전소의 사고가 내린 이 재앙의 깊이와 예리한 칼질이 어떻게 삶을 완벽하게 무너트리는지 알지 못했다. 뒤늦게 발견했지만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체르노빌 사람들은 그저 병에 걸린 채 죽어가야만 했다. 〈체르노빌 목소리〉의 처음과 끝은 남편의 죽음을 지켜보는 아내들의 인터뷰로 구성되어 있다. 첫모임에서 첫 번째 장을 읽는 순간, 모임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은 울음을 삼키고 견디느라 제대로 낭독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방사선 덩어리가 된 남편에 대한 여자의 지극한 사랑은 참으로 위대했다. 원자력 발전소의 폭발과 방사선이 삶을 근본에서부터 망가뜨려도,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는 생애의 폐허 속에서도 끝끝내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작가는 있는 그대로 전해주었다. 그 사랑의 말들을 읽을 때, 그냥 울었다. 합독에 참여했던 초록시민들은 어떤 해설과 평가도 없이 그냥 소리 내어 읽기만 했다. 그리고 우리는 책을 낭독하면서 몸으로 전해지는 어떤 울림과 떨림의 실체를 느꼈다. 유통기간 지난 원자로 계속 도는 한국오늘 4월 26일은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한 지 30주년이 되는 날이다. 체르노빌 이후 30년. 체르노빌의 사신은 여전히 우리 주위를 떠돌고 있다. 우리나라는 유통기간이 지난 원자로를 계속 돌리고 있으며, 어떤 원전 직원은 히로뽕을 투약하고 근무하기도 했다. 검사내용이 조작된 짝퉁 부품을 10년 이상 사용하고도 처벌받지 않는 국가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30년 전, 1986년 체르노빌의 재앙은 어느 먼 곳의 우연한 사건이 아니다. 바로 여기 이 땅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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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4.26 23:02

술 빚어 나그네를 부를지니

지난 주 금요일에는 전라남도 무안을 다녀왔다. 전주에서 승용차로 두 시간 남짓, 무안 땅 초입에 이르면서부터 짙은 녹색의 양파들이 봄빛을 듬뿍 받고 땅 기운에도 힘을 얻어서 마치 세워놓은 죽창들처럼 꼿꼿하게 자라는 모습들이 눈에 가득 드러나기 시작했다. 장차 판로에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는 알 수 없어도 올 양파 풍작만큼은 충분히 예측할 정도였다. 하지만 오늘 화제가 양파는 아니다. 양파보다 더 푸르게 남도 르네상스를 기치로 내건, 전라남도문화관광재단이 출범한다고 해서 가던 길이었으니까.문화에 관광 융복합 시킨 재단그쪽 재단 명칭은 원래 문화예술재단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전라북도가 문화에 관광을 융 복합시킨 형태로 재단 이름을 문화관광재단으로 정해놓자마자 재빨리 그 필요성을 인식하고는 개명 절차에 들어갔으며 급기야 또 한 차례 출범식을 거행한 것이다. 아, 전라북도에, 그리고 대한민국 천지간 문화관광 모두 복 있으라.문화에 관광을 접붙여 놓고 이를 기념하는 자리였던 만큼 재단 이사장인 이낙연 지사의 환영사는 온통 관광 얘기로 채워졌다. 전라남도에 관광객 5000만 명을 유치하겠다고 처음 공약했을 때만 해도 많은 이들이 뻥이라고 손가락질했지만 메르스 사태에도 불구하고 작년에 4000만 명을 넘어섰다고 했고, 여수 한 지역만 해도 천이삼백만 명이 다녀가 제주도를 코 바로 밑까지 육박하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했다. 여수 밤바다라는 노래가 불러일으킨 파급력 때문이었을까 하고 필자가 되뇌는 사이에 원인은 이사장 입으로 술술 밝혀졌다. 첫째는 여수 엑스포 영향, 둘째가 KTX 운행과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철도여행 프로그램 내일로(Rail路),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수를 중심에 두고 동서와 남북으로 훤하게 뚫린 고속도로와 이순신대교 등의 교통망 덕택이었다고 했다. 이유야 어찌됐든 놀랄만한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전체 인구가 5000만인데 그중 팔 할이 넘는 이들이 남도 한 곳을 다녀갔다니까 말이다.좋다. 바로 어제 19일, 문화관광의 원조 격인 우리 전북에도 문화관광재단이 출범했다. 장소가 전주시내 한 중심가 팔달로 예술회관이니까 양파 밭 가운데 들어선 거기 무안 쪽보다 불리할 건 없다. 게다가 수도권에서 남도를 찾아가는 이들이라면 시쳇말로 우리 땅을 밟지 않고는 그쪽으로 건너갈 엄두를 낼 수도 없을 터다. 굳이 예시하자면 완주 대둔산이나 익산 미륵사지, 전주 한옥마을이며 김제 지평선을 거치지 않고, 일부러 돌아간다면 혹시 몰라도, 제 아무리 용빼는 재주가 있어도 거기 이르지 못한다.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남도 삼 백리를 향해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를 어떻게든 한 번 불러볼 수는 있어도 손을 잡아끌 순 없다. 대신 여기저기 타는 저녁놀은 분명 같을 터, 다만 술 익는 마을이 군데군데 자리하고 있다면 나그네 역시 용빼는 재주 없이 그냥 지나치지 못하리라. 막걸리를 적지 않게 좋아하는 필자인지라, 이 말은 거의 진리에 가깝다고 주장하고 싶다.전북 맛, 멋, 문화로 '술 익는 마을'을술 익는 마을이 대체 무엇인가? 그게 우리 전라북도의 맛이고 멋이고 또한 문화다. 문화와 관광이 만나 신접살림을 차린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동네, 우리 이웃의 문화예술인들에게 간곡히 제안하고 싶다. 우리도 우리 마을마다 술이 익어가도록 만들자. 어제 출범한 재단이 그 절대적인 재료, 기껍게 누룩 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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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4.19 23:02

셰익스피어 코드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준비한 프로그램 중 하나는 셰익스피어 특별전이다. 서거 400주년을 기념한다는 것이 명목이기는 하지만 단일 작가로서 가장 많이 영화화 된 사례를 꼽으라고 한다면 분명 셰익스피어는 첫 번째, 두 번째 손가락 사이에 꼽힐 것이다. 여기에 영감을 주거나 원작을 변형한 경우까지 포함하면 분명 첫 번째로 꼽힐 수밖에 없다. 작품수도 많은 데다 희극과 비극을 오가는 다양한 이야기를 쓴 탓에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마르지 않는 샘물이었다.전주국제영화제 특별전 준비전주의 상영작 8편은 BFI(브리티쉬 필름 인스티튜트)에서 디지털로 모두 리마스터링한 작품이다. 리마스터링한 작품이 많지는 않았지만 상당수 제외된 작품들을 고려해 보면 영화사에서 남을 법한 영화임에는 분명하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1910년대 만들어진 다양한 원작 영화들이었다. 영국은 물론이고, 이탈리아와 주변국가에서도 셰익스피어 원작을 빌려왔다는 것은 20세기 초반에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은 이미 보편성을 획득했음을 의미한다.셰익스피어가 영화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보편성을 지닌 이름이었다는 것은 다른 문화 장르로의 전이를 손쉽게 하여준다. 셰익스피어는 문학, 연극, 영화, 음악을 오가며 하나의 보편적 코드가 되어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으로부터 기인했다. 〈베니스의 상인〉, 〈오델로〉의 무대가 되는 곳은 베니스다. 심지어 〈로미오와 줄리엣〉의 무대는 이탈리아의 베로나로 알려져 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낯선 도시를 무대로 삼았지만 그 안에서 펼쳐지는 과정은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을 충실하게 대변하였다. 사랑은 물론이고, 질투, 과욕, 파멸과 죽음 그리고 후회의 감정들이 희극과 비극을 막론하고 감정의 결을 따라 뚝뚝 묻어난다. 무성영화 시대의 감독들은 색깔도, 소리도 입힐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들이 원한 것은 인간의 행동과 얼굴 속에서 묻어있는 감정이다. 이들은 셰익스피어를 소환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극적인 감정들을 연출해 볼 수가 있었다. 그의 이야기에 기대어 스크린 위에 인간의 감정을 묘사해 볼 수가 있었다. 100년 이상 보관된 필름들의 모음집인 〈무성시대의 세익스피어〉는 움직이는 화면과 인간의 극적 감정이 조우하는 다양한 순간들을 집성해 놓는다. 셰익스피어 코드는 영화의 시작과 함께 꽃을 피웠다.개인적으로 기억하는 영국드라마 중에 국내에서도 공중파로 방영된 〈닥터 후〉 시리즈 중에는 셰익스피어 코드라는 제목을 단 내용도 있었다. 셰익스피어 시대로 간 닥터와 여주인공이 셰익스피어를 도와주고, 그 시대에 존재했던 마녀(알고 보면 외계인)를 물리친다는 내용이다. 황당한 내용이지만 셰익스피어 작품에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마력을 느꼈다면 공감할 법한 내용이다. 마녀들의 계획은 셰익스피어 작품을 통해 사람들에게 일종의 주문을 거는 것이었다. 이 주문의 실체가 바로 셰익스피어 코드다.친숙하기에 더 끌리는 세계로이 강력한 코드는 시간을 초월하여 로미오! 왜 당신은 로미오인가요. 당신의 아버지를 부인하고 이름을 버리세요. 그러면 나도 캐퓰릿의 이름을 버릴게요.라는 줄리엣의 황당한 주문에 물론 그러겠소. 난 이제 로미오가 아니오.라는 넋이 나간 로미오의 답변으로 이어진다. 감정은 일순간 이성을 마비시키고, 당신에게 주문을 걸고, 사람들을 인생극장으로 끌어들인다. 아마 8편의 작품이 신경마비의 순간들을 제공해 줄 것이다. 그것은 친숙하기에 더 끌리는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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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4.12 23:02

알파고 승리, 학습일까 창의일까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대결 여파가 만만치 않다. 사람들은 어느새 인공지능이 이렇게 발달하였을까 놀라면서 곧 이어 ‘터미네이터’의 ‘스카이넷’과 ‘아이, 로봇’의 ‘비키’와 같은 공포가 실현되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가져 본다. 또 다른 편의 사람들은 인공지능은 인간을 도와주기 위해서 인간이 만든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사람을 해치는 인공지능은 없다고 선을 긋는다. 하늘이 무너질 가능성은 없겠지만, 대비책까지 포기하고 마냥 인공지능의 행복한 미래상만을 강조하는 것도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아무튼 이번 대국에서 필자는 두 가지 흥미로운 점을 주목했다.창의성 발휘·몰입 환경 조성 필요이번 대국에서 구글은 미국 기업인데 알파고 밑에는 영국 국기가 그려져 있어 그 이유가 궁금했다. 찾아보니 알파고를 최초로 개발한 회사가 영국의 딥마인드라는 회사였다. 이 회사를 구글이 인수하여 본부를 여전히 런던에 두고 있었다. 그래도 구글이 미국 국기가 아닌 여전히 영국 국기를 걸게 해두었던 것이 흥미로웠다. 구글은 자본을 통한 점령을 택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부심을 택한 것이다. 미국의 국기가 아닌 영국의 국기 아래 알파고 팀의 자발적인 연구 능력 확대를 택한 것이다. 결과는 구글에게 시총 58조 증가라는 엄청난 이득을 가져다주었다.이번 대국에서 필자가 주목한 또 하나는 알파고가 전통적인 바둑과는 상당히 다른 수를 두면서 결국 승리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바둑에 문외한이라 대국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모른다. 중계를 들으면서 특히 제 2국의 초반에서 중반까지 알파고가 의외의 수를 두고 있기 때문에 이세돌이 우세하다는 해설을 여러 차례 들었다. 그런데 막상 후반에 접어들자 알파고의 그 의외의 수가 이세돌을 불리하게 하고 결국 불계패로 몰아갔던 것이다. 4000년 역사를 통해 인류가 개발한 바둑 수를 능가한 기보를 알파고는 어떻게 창출할 수 있었을까. 개발자들이 창의적인 요소를 집어 넣어 프로그램화한 결과일까. 아니면 알파고가 3000만 번의 기보를 집중 학습하는 능력에서 창출된 것일까. 다시 말해 알파고의 창의적인 한수 한수는 창의 학습을 모델로 개발된 교육 프로그램에서 창출된 것인지, 아니면 수없이 많은 시간을 특정 분야에 몰두한 집중 학습의 결과에서 창출된 것일까. 전자라고 한다면 창의적인 학습모델을 개발하는 것에 집중투자가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후자라면 특정 분야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 싶다. 협동심 키워주는 교육 우선돼야한편 알파고 개발팀원은 100여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 100여명이 투자한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 사람이 모든 분야에 특출한 재능을 발휘할 수는 없다. 특출한 재능을 가진 여러 사람들이 서로 협동하면서 작업을 진행할 때 그 시너지 효과가 훨씬 크게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종합적인 사고능력을 가진 인재를 육성한다는 명목 아래 한 사람에게 모든 분야의 능력을 키우게 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 중이다.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시도일 것이다. 한 사람에게 종합적인 사고 능력을 키우는 교육보다는 여러 명의 전문가가 협동하여 일을 할 수 있는 협동심을 키워주는 교육이 우선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해답은 명백하다. 특별한 창의적인 교육 모델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는 흥미를 갖고 긴 시간 여러 사람이 협동하여 연구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주는 것이 더욱 중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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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4.05 23:02

역주행의 당당함

익산 역 앞에는 시에서 조성한 문화예술의 거리가 있다. 문화예술의 거리라는 명칭에 걸맞게 문화와 예술이 넘치는 거리는 아니다. 한국의 어느 중소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낡고 늙은 원도심의 풍경이 그대로 펼쳐진 거리다. 나는 그 거리에 있는 E127 창작 스튜디오에 입주해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이 거리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기만 해야 하는 일방통행 길이다.익산역 문화예술거리 일방통행길한 달 전쯤의 일이다. 승용차를 몰고 문화예술의 거리로 들어와 카인드마트 앞에 왔는데 역주행 하는 승용차와 마주치게 되었다. 일방통행의 길에서 역주행하고 있는 자동차가 비켜 주는 것이 상식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역주행하는 승용차가 비켜주길 기다렸다. 하지만 그 역주행 승용차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경적을 빵빵 울리며 나더러 비켜 달라고 성화였다. 어이가 없어 그대로 서 있었더니 양장점 옆으로 방향을 움직여 겨우 교차할 수 있게 되었다. 교차하면서 여기는 일방통행 길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X새끼야, 뭘 어쩌라고? 니가 비키면 되지! 라는 욕을 퍼붓고는 가버렸다.112에 전화를 걸어 일방통행로의 역주행에 관련해 민원을 넣었더니, 인력이 부족해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들었다. 그러더니 국민신문고에 민원을 넣으라는 친절한(?) 해법도 제시해주었다. 그 후로도 이 거리의 역주행 문제는 어떤 해결의 기미도 없이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문화예술의 거리는 사실상 일방통행로가 아닌 쌍방통행로가 되어 버렸다. 역주행을 하는 승용차들이 요란한 경적을 울리며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것을 볼 때마다 가슴이 서늘하다.며칠 전의 일이다. 승용차를 몰고 문화예술의 거리로 막 들어오는데 역주행하는 차와 맞닥뜨렸다. 역주행하는 차니까 먼저 양보를 할 줄 알고 잠시 기다렸다. 그런데 상대방 운전자가 창문을 열더니 손짓으로 옆으로 양보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어처구니가 없어 가만히 있었다. 그랬더니 역시나 경적을 울리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기어이 비켜주질 않아서 하는 수 없이 내려서 이 길은 일방통행로인데 역주행하는 차가 비켜주셔야죠. 라고 말했다. 아, 그 X발 너무하네. 좀 비켜달라니까! 라는 말이 돌아왔다. 이쯤 되면 나도 물러설 수는 없다. 일방통행을 위반한 역주행 차가 비켜야 하는 거지. 내가 왜 비킵니까?라고 응수했다.그 때, 허름한 양복점에서 오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 두 명이 나오더니 거 좀 비켜주지 빡빡하게 나오네. 라고 말했다. 화를 꾹 참고 아니 역주행하는 차가 비켜야 되는 거 아닙니까? 라고 되물었다. 아 거참, 깐깐하시네. 그냥 좀 비켜주시오.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 라고 말한 뒤 나는 버티기에 들어갔다. 양복점에서 나온 그 사람들은 오히려 나를 비난했다. 그들의 비아냥에도 꾹 참고 버티니까 그들은 역주행하는 차로 가서 양보하라고 말했고, 그 차가 양보(?)했다. 양보라니. 저들은 내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역주행을 하던 그 운전자는 무슨 승리라도 한 듯이 욕설을 퍼부으며 소위 양보(?)를 했다. 몰염치와 몰상식이 거꾸로 승리하는 순간이었다.몰염치 몰상식이 오히려 큰소리 쳐문화는 시민적 교양이 축적되어야 비로소 그 오래된 빛을 발휘한다. 일방통행로에서 역주행하는 자동차가 더 당당한, 몰염치와 몰상식이 늘 염치와 상식을 억압하고 있는 상태가 길게 이어지기 때문에 생활문화는 물론이고 정치문화까지 천민성의 바닥에서 허우적거리게 된다. 형편이 이러하니, 시민적 교양은 아예 발붙일 데가 없는 것이다. 아니 교양이랄 것도 없다. 그저 상식만 지켜도 되는 일이 아닌가. 일방통행로에서의 역주행은 불법이다. 이것이 상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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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3.29 23:02

우리가 보았던 바둑의 신, 다음은?

전주 출신 이창호 기사가 열여덟 나이에 바둑으로 세계를 제패했을 때, 이전까지 천하를 호령하던 기사들은 적지 않게 당황하고 또 몹시도 허탈해마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둑은 오랜 세월 우리가 믿어왔던 대로 그야말로 인생의 축소판이라서 지천명의 나이 오십은 돼야 비로소 바둑판을 제대로 읽을 수 있으리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니 그 충격과 황망함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되고도 남는다.과학 발전의 정점에서 신을 대하다니누군가가 기사 이세돌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만약 바둑의 신이 있다면 몇 점이면 되겠습니까? 이세돌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두 점 깔면 충분합니다. 그런 뒤 덧붙였다. 만약 목숨을 걸라고 한다면 석 점은 깔아야겠죠. 이 얘기는 원래 일본의 기성 후지사와에게 기자들이 물었던 내용이다. 당시 후지사와는 석 점이라고 대답했고, 한참을 생각한 끝에 그게 만약 목숨 대국이라면 넉 점을 깔고 두겠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세돌은 후지사와보다 한 점씩을 더 줄여 대답한 것이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발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바둑을 아는 이들이라면 충분히 공감하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요즘 세계 정상급 기사들의 바둑 내용을 평하기를 궁극에 이르렀다고도 하고, 바둑 9단을 따로 일러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뜻으로 입신(入神)이라고까지 하지 않던가?인간 두뇌의 대표인 이세돌과 인공지능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알파고의 바둑 대결이 지난주 끝이 났다. 필자 역시 아마 몇 급에 지나지 않는 실력이지만 관전 분야에서만큼은 8단이라고 평소에 자랑하고 다녔던 터라 기대 속에서 대국을 지켜봤고, 이세돌의 연패를 지켜보면서 엄청난 자괴감에 빠지고 말았다. 아니, 두려웠다. 이창호가 바둑계를 평정하던 시대의 당혹감은 오히려 낭만적이었던 셈이다. 미안한 얘기지만 4:1이라는 전적만으로 본다면 이세돌은 알파고에게 두 점 접바둑 상대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렇다면 알파고가 바로 바둑의 신일 터였다. 신이라니? 우리가 이 대명천지 과학 발전의 정점에서 막상 신을 대해야 하다니?바둑 대결이 한창일 당시 파이낸셜타임스는 영국 최대 국립은행이 인공지능을 활용한 로보 어드바이저 도입을 확대하면서 550여명의 인력을 해고할 방침이라는 사실을 전한 바 있다. 그 족집게 도사 로봇이 알려주는 대로 투자하면 과연 수익률이 어떻게 될는지 현재로서는 헤아릴 길이 없지만 아직 초보 수준이라고는 할망정 우리 곁에 투자의 신까지 이미 모습을 드러낸 셈이다. 그런가하면 지난해 언론재단에서는 한 의미 있는 실험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다. 로봇이 자동 작성한 신문기사를 일반인들에게 보여주고 작성 주체가 사람인지 로봇인지를 묻는 실험이었는데 불과 46%만 정답을 맞혔다고 한다. 머지않아 기사 작성의 신까지 등장할지도 모를 일이다.문화예술분야도 로봇이 대체할까문화예술 분야는 어떨 것인가? 로봇이 시를 쓰고 소설을 창작하고 그림을 그리거나 작곡을 하는 시대가 오지 않을 거라고 과연 장담할 수 있을까? 어떤 이들은 게임과 달리 예술은 인간 정신의 영역이라서 로봇이 인간을 대체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단언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까? 이번 바둑 대결에서 알파고는 단순한 알고리즘을 넘어서서 무엇인가 사고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대국이 끝난 뒤 이세돌은 제주도 여행을 떠났다지만 필자는 그날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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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3.22 23:02

'소년 파르티잔' 개봉에 맞춰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수입한 〈소년 파르티잔〉을 개봉했다. 이에 맞춰 서효인 시인과 함께 명동의 씨네라이브러리 극장에서 대담을 나누는 행사를 가졌다. 이 작품은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이었다. 처음부터 〈소년 파르티잔〉을 개막작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애초에 고민했던 작품들의 경우 게스트 방문이 어려워지면서 부랴부랴 〈소년 파르티잔〉을 개막작으로 선정하게 됐다. 전주로 옮겨온 후 이전의 개막작 분위기와는 달리 최소한 개막작 감독의 참석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이전에는 개막작 게스트가 없이 전주에서는 개막식을 치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개막식의 느낌이나 개막작 위상으로 적절치는 않다는 것이 개인적인 견해다.세상에 대한 의심회의 던지는 일 필요아무려나 오랜만에 〈소년 파르티잔〉을 관람해야 했다. 사실, 이 영화의 원제목은 파르티잔이다. 한국에서는 빨치산으로 옮겨진 파르티잔의 원래 뜻은 유격전을 펼치는 비정규군을 이르는 말이다. 영화와 어울리지 않는 제목은 아니지만 레드 콤플렉스 이후의 한국 사회에서 파르티잔이라는 말은 종종 오해를 사거나 왜곡되기도 한다. 작년 이 무렵에 적당한 개막작의 제목을 고민하던 소년 파르티잔 행동지침이라는 서효인 시인의 시집을 알게 되었다. 당장에 서점에 달려가 시집을 들춰봤다.항문에서 바람이 거세게 불어옵니다. 당신의 등을 밀어냅니다. 그럼 이제 당신 차례, 꽃의 슬픈 유래나 강물의 은결 무늬에 대한 노래에 항문이 간질간질하던 당신, 구타의 음악 소리에 볼기짝이 꽃처럼 붉어져 혼자 타오르고 있던 당신, 무거운 가방에 매달려 참고서를 완주하던 당신, 바로 당신. 붉은 엉덩이를 치켜들고 만국의 소년이여, 분열하세요. 배운 대로, 그렇게.( 소년 파르티잔 행동지침 부분)나는 시집의 제목과 동일한 시의 내용이 고스란히 영화 속 주인공 알렉산더의 분열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원제인 파르티잔을 대신하여 소년 파르티잔이라는 제목을 지었다. 몇 주 혹은 몇 달의 시간이 흘러 출판사 민음사에 방문할 일이 있었을 때 서효인 시인의 이야기를 꺼냈고, 편집부 직원들은 내 앞에 서효인 시인을 데려다 주었다. 그는 민음사 한국문학팀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지난 주에 서효인 시인을 만났을 때 그는 팀장이 되어있었다. 물론, 팀원은 한 명 밖에 없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무대 위에서 벌어진 그와의 대화는 즐거웠다. 나는 앞서 소개한 이 영화의 제목을 짓게 된 사연을 이야기하면서 시인에게 영화를 보고 난 후 정말 당신의 시집과 비교하는 것이 어떤지 질문을 던졌다. 서효인 시인은 감각적 의심이라는 단어를 끄집어냈다. 두 아이의 아빠가 된 지금은 조금은 달라지긴 했지만 첫 시집인 소년 파르티잔 행동 지침을 내놓았을 때 세상에 대한 의심과 회의를 던지는 것에 열중했다는 표현을 했다.순종만으로는 자아를 성장할 수 없어영화 속 주인공인 알렉산더가 성장과 함께 고민하는 것 역시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의심이다. 이 감각적 의심은 한 자아를 성장시킨다. 학교나 가정이나 공동체에서 질서와 함께 강조하는 것은 순종이지만 순종만으로는 성장할 수가 없다. 어떻게 이 질서가 만들어졌는지, 어떻게 공동체의 규칙이 유지가 되는지를 의심하는 순간 아이는 어른이 되고, 소년은 청년이 된다. 의심을 위한 의심이 아니라 성장을 위한 의심,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부정의 정신은 새로운 세대의 도래를 기다린다. 〈소년 파르티잔〉의 동화적인 상상력은 동생을 안고 도망친 알렉산더를 통해 미래의 시간을 품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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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3.15 23:02

역사가는 미래를 바라본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한다. E.H. Carr의 유명한 명언이다. 이 명언은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의 1장 역사가와 사실의 마지막 결론 부분에서 제시되고 있다. 역사가가 다루는 사실은 과거에 있으나, 역사가는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역사가가 과거의 사실을 다루는 것이 역사라면, 역사는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명제가 성립된다.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 역사한걸음 더 나아가 역사가는 먼지 냄새 풀풀나는 옛날 책과 문서를 왜 뒤지는 걸까. 역사가가 과거의 부스러기를 이렇게 뒤지는 이유가 과거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가가 단순히 궁금해서일까. 아무래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역사가들이 과거를 궁금해 하는 이유는 생생한 과거의 모습을 통해서 미래를 바라보자는 것이다. 역사가들이 진정으로 궁금해 하는 것은 미래이다. 미래를 전망해 보는 수단으로 과거를 택했을 따름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역사가는 한 눈은 과거에 두면서, 한 눈은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고 하겠다.오늘날 우리는 지금껏 경험해보지 않은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다고 한다. 어렸을 적 만화로만 보아왔던 로봇이 현실세계에서 실제로 등장할 수 있다고 하니 기대 반 우려 반이다. 나는 로봇 태권 V의 세대도 아닌 강철 로봇 마치스테의 세대이다. 마치스테는 소년한국일보에 연재된 만화였다. 내용은 이제 거의 기억이 안난다. 어린 소년이 로봇을 시계로 조정하면서 악당을 물리치는 내용이 아니었을까 싶다.그런데 실제로 로봇이 나오고, 핸드폰 같은 것으로 조정을 할 수 있다고 하면 곧 이어 웨어러블 형태로 시계 같은 것으로 조정기를 만들지 않을까 싶다. 최근에는 인간이 조정하는 로봇이 아닌 스스로 학습하여 인지하고 행동하는 로봇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다. 이세돌 9단과 컴퓨터와의 바둑 대결이 곧 벌어진다고 한다. 나는 이세돌 9단이 5전 전승을 했으면 한다. 그러나 골퍼들이 평생에 한 번도 하기 힘들다고 하는 홀인원을 로봇 골퍼가 5회 만에 이루었다는 뉴스를 접하는 순간, 5전 전승이 아닌 3승을 기원하는 쪽으로 바뀌게 된다.이렇게 하루가 다르게 기술력이 발전하는 시대에서 과거를 통해서 역사가는 미래를 어떻게 전망해줄 수 있을까. 청동기와 철기 시대에는 청동기와 철기를 만들 줄 아는 기술이 급속하게 사회를 변동시켰다. 그 다음 시대의 사회에서는 기술력을 기반으로 급속하게 변화된 사회를 법과 제도를 통해서 통제하는 율령사회가 등장하였다. 또 산업혁명 이후에는 급속하게 팽창된 생산물을 세계 곳곳에 팔고 값싼 원료를 획득하기 위해 제국주의가 등장하였다. 기술력의 팽창과 함께 국가 권력이 형성되고 커져왔던 것을 알 수 있다.기술력 발전과 함께 강조되는 도덕성그런데 최근의 기술력은 인터넷을 기반으로 국경선을 넘어 글로벌화 되고 있다. 기술력의 발전이 통제를 벗어나 자칫 사회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글로벌화된 기술력을 가진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한 UN과 같은 세계기구가 필요로 할지 모른다. 인류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 기술력과 권력자들에게 똑같이 엄격한 도덕성이 요구될 것이다. 인류 경험상 도덕성은 스스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강제력이 뒤따라야 한다. 기술력의 발전과 함께 도덕성이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아이러니하지만 현실이다. 아무튼 사회는 변화되고, 역사는 흘러간다. 역사가의 양쪽 눈이 바쁘게 돌아가야만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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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3.08 23:02

리얼리즘의 복권을 위하여

2월 어느 날, 몹시 바람이 불고 추운 날, 서울의 가나인사아트센터에서 유홍준이 기획한 〈리얼리즘의 복권〉 전시회에 갔었다. 이종구, 신학철, 황재형, 임옥상, 고영훈, 오치균, 권순철, 민정기의 그림이 층마다 전시되어 있었다. 그림을 찬찬히 보다가 문득 “복권”이라는 말에 어떤 의문이 들었다. 복귀도 아니고 복권이라니……. 한국의 문학예술에서 리얼리즘은 ‘파문’ 당했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파문' 당한 한국 문학예술 리얼리즘민중미술, 민족미술, 리얼리즘이 1970년대와 1980년대를 풍미할 때에도 당대의 미술시장에서는 철저히 무시당했다. 오윤을 필두로 한 현실주의자들은 ‘미술시장, 당대의 화풍, 아뜨리에’라는 제도의 바깥에 존재하며 현장에서 시대와 격투하며 화폭으로 현실에 대해 발언하고 온몸으로 참여했었다. 당대 주류비평과 시장은 그들을 그림자처럼 취급했고 무시했다. 그러나 그들은 권력의 탄압과 투옥, 시장의 외면에 굴하지 않고 시대정신을 이끌어가는 강렬한 전위적 존재로 살았다. 그리고 그들은 서서히 잊혀졌다. 유홍준의 이번 기획전은 한 시대의 추억과 회고를 통해 ‘이 땅의 오늘’을 살피자는 의도로 기획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유홍준의 이름을 걸고 리얼리즘을 복권시키겠다는 의도는 약간 위험하긴 했지만 성공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추억과 회고에 집중했기 때문에 리얼리즘이란 여전히 ‘과거에 갇힌 시선’으로 오해할 여지가 있다는 점이 아쉬웠다. 신학철의 〈한국현대사〉는 예나 지금이나 오늘의 역사를 준엄하게 담고 있었으며, 이종구는 농민들의 굽은 등과 서슬 퍼런 낫의 ‘투쟁’에서 깊고 푸른 밤의 산 속에 등불 하나로 빛을 내보이고 있는 미황사의 ‘영성’으로 존재를 이동시키고 있었다. 황재형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두 눈 가득 흘러넘칠 듯 눈물을 담고 이 세계의 남루와 가혹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오치균과 권순철 민정기 고영훈의 작품 앞에서도 오래 머물렀다. 세계를 채운 어두운 색채와 거친 질감이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얼마 전, 옛 보안사령부 건물에 다시 들어선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를 거부당한 문익환 목사가 철조망을 넘어오는 그림을 다시 출품한 임옥상은 당대성이 펄펄 살아 있는 작품으로 유홍준의 기획전에 응답했다. 서른여섯 장의 목탄화로 구성된 ‘상선약수(上善若水)’는 결코 팔리지 않을 그림이었다. 시대의 가장 아픈 곳에 응답해온 임옥상의 이 그림은 경찰청 종합상황실의 모니터와 완벽하게 닮아 있다. CCTV가 실시간으로 전송해오는 서른여섯 개의 상황을 경찰청 종합상황실에서 보는 느낌이었다. 그 한 복판에 물대포와 맞서고 있는 농민이 서 있다. 임옥상은 노자의 가장 아름다운 이상인 상선약수를 그림의 제목으로 삼아 2015년의 대한민국을 야유하고 있었다. 임옥상은 물을 그렸으니 이제는 불을 그리겠다고, 적당한 제목이 없다고 고민했다. 그 자리에서 삼계화택(三戒火宅)이라는 제목이 어떠냐고 제안했더니 좋다고 했다. 불의 그림 삼계화택은 오직 붉은 색의 단색화로 이미 완성되어 있다. 즉물적인 것에만 현혹된 건 아닌지이번 〈리얼리즘의 복권〉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던 작품은 황재형의 ‘폭설주의보’였다. 이재규는 이 그림을 “곧바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듯 겨우 버티고 서있는 산속 집에 내린 ‘폭설주의보’는 우리 모두에게 닥쳐온 위기의 깊이를 짙게 보여준다. 보는 내내 아팠다.”고 평했다. 나도 더 이상의 말을 찾지 못했다. 우리 모두에게 닥쳐온 위기의 깊이를 우리는 애써 외면하며 겨우 살고 있다. 즉자적이고 즉물적인 그 무엇에만 현혹되어 있는 것이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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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3.01 23:02

전라북도 거시기 사전

선생님, 쇳대 주세요. 중학교 시절, 서울에서 부임해 오신 물리 선생님은 젊은데다가 미인이어서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오죽하면 물리실 청소 당번으로 뽑히는 게 영광이고 자랑이었다. 소년 몇이 그날 그 영광을 안았다. 쇠, 때라니?. 선생님은 당연히 그렇게 반문했다.아, 물리실 끌르는 거요. 소년 하나가 설명했지만 선생님에게는 더욱 요령부득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끌르는 거?아, 키 말이니? 소년 하나가 손가락을 모아 비트는 수화를 곁들인 다음에야 선생님은 쇳대에 대해 이해했다. 소년들이 그때 일제히 외쳤다. 기요!.표준어 정책으로 사라지는 우리말키(key)를 두고 처음에는 쇠때라고 하더니 이번에는 왜 기라고 말하는 것인지, 선생님은 여전히 오리무중의 고운 눈길을 보냈지만 소년들은 그저 신을 내고들 있었다.소년들이 자라서 군대에 갔더란다. 하루는 쇠고깃국이 나왔는데, 고기는 선임병들이 사전에 다들 나눠 먹은 터라 기름이 둥둥 뜬 국물이 전부였다. 그걸 본 호남 병사가 순전하게, 정말 알 수 없어서 혼잣말을 해버렸다. 이게 무슨 말국이야?. 그러자 타 시도 출신의 선임병이 귀싸대기를 냅다 갈기더란다. 그도 살코기를 먹었던 선임 가운데 하나였던 터라 비밀이 탄로날까봐 쉬쉬하던 참이었으리라. 야, 쇠고깃국을 두고 뭐, 말(馬) 국이라고?전라도 사투리를 두고 잠시라도 웃는다면 다행이다. 웃을 일 하나 없는 판국에 전라도 사투리라도 있어서 함께 박장대소할 수 있다면 그게 얼마나 기특한가 말이다. 헌데 때로는 억울한 심사가 들 때도 아주 없지는 않다. 쇳대는 그렇다 쳐도 표준어로 등록해야 할 말들을 배척하는 대신 용납하지 말아야 할 단어들을 마치 선심이나 쓰듯 표준어로 인정할 때가 그렇다.이를테면 사과가 너무 익었다고 한다면 그 사과는 상품가치도 떨어질뿐더러 먹기에도 좀 그렇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이 너무는 작년에 표준어로 채택이 됐다. 아, 그 물리 선생님은 너무 이쁘셨지, 하고 동창회에서 누군가가 말한다면 이제 우리는 그 뜻을 어떻게 헤아려야 하는 걸까?손주라는 말도 표준어가 된지 오래다. 명백한 한자어 손자(孫子)를 일러 교양 있는 서울 사람들은 손주라고들 불렀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니면 아니고, 기면 죽어도 긴 것이다. 그건 아무래도 인정하지 말았어야 했다. 표준어로 채택해야 할 말의 수효가 따로 정해져 있는 건 아니겠지만 손주라는 말이 표준어로 자리 잡는 바람에 한 자리를 꿰차지 못한 아름다운 전라도 말도 있다.이를테면 열쪼시라는 말이 그렇다. 교양 있는 서울시민들은 닭을 보면 그게 암탉인지 수탉인지, 아니면 병아리인지만 관심을 갖는 모양이다. 씨암탉이란 표현까지는 용케 살아남았지만 그건 속담에 인용된 탓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삼계탕 재료로 딱 좋은, 대닭이나 소닭이 아닌, 중닭들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 그게 바로 열쪼시다. 헌데 이 멋진 표현을 인정하지 않으니까 사람들은 그걸 일러 영계라고 해버리는 것이다. 표준어 정책이 우리 국민들을 조금은 우습게 만들어버린 예다. 깜밥과 눌은밥은 없고 누룽지만 있다고?이제 전북 사투리 지키기 나선다할 수 없다. 우리말이니까 우리가 지킬 수밖에. 그래서 전라북도문화관광재단은 우리 사투리사전을 편찬할 계획을 이미 세워두었다. 사투리사전이라는 말도 싫다. 아구똥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전라북도 거시기사전〉이라고 명명할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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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2.23 23:02

한국 영화인들이 늘어난 베를린 풍경

올해 베를린 국제영화제에는 정말로 한국인들이 많이 보인다. 베를린 경쟁작에 한국영화가 있거나 초청작으로 한국영화가 많아서가 아니다. 외화를 수입하려고 하는 한국인들이 대거 베를린 영화제의 EFM(유럽피안필름마켓)의 배지를 달고 왔기 때문이다. 최근 5년 동안 한국 영화의 외화 시장은 큰 증가세를 이루어 왔고, 그러한 결과가 반영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자연스럽게 보인다. 그런데, 실상을 들여다보면 문제가 심각하다.수입될 작품 완성본 확인하려고베를린의 경쟁 부문을 포함하여 입소문이 난 작품은 이미 국내 수입사에 팔린 지 오래다. 한국인들이 베를린에 온 까닭은 새로운 영화를 고민하기 위함이 아니다. 미리 지불한 영화의 완성본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언제부터인가 아트영화들의 흥행이 몇몇 작품을 통해 이루어지면서(여기에는 IPTV를 통한 부가판권 시장의 확장도 이유가 크다), 경쟁구조가 가열화 되었고, 이제는 보기도 전에 선점하는 상황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이제 영화는 선점하여 수입하는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자본주의 사회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논리가 지배하는 것은 당연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영화를 보기도 전에 미리 사지 않으면 화제작이 될 만한 것들을 구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자본주의적 압박은 점점 큰 도박판이 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해외 세일즈사들은 한국영화 수입사에게 세 편의 영화를 묶은 패키지들을 판매하려고 한다. 그들로서는 골치 아픈 영화의 판매를 해결하는 방식이 되고, 한국의 수입사는 좋은 영화를 선점하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패키지에 응찰한다.여기에 새로운 상황이 하나 더 생겼다. 최근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수입한 〈소년 파르티잔〉의 개봉을 준비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작년 말부터 포털 사이트에 올리는 예고편 동영상들을 모두 심의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전에는 없던 일이다. 통상적으로 포털 사이트의 예고편 동영상은 수입사들 역시 무척이나 신경을 쓴다. 왜냐하면, 이 예고편 영상이 영화의 인상을 보여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흥행을 고려해야 하는 수입사로서는 이래저래 대중적인 요소를 고려하여 영화의 예고편을 만들어 낸다. 여기에다 제도적 검열까지 가해지고 있는 것이다. 예고편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안다면 불필요한 제도다. 예고편에서 성적 노출이나 자극의 빈도라는 것은 현재의 문화 수준을 반영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혹여 정치적인 것을 다루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스스로 양산되어 가는 문화에 제동장치가 필요한 일인가 의문이 든다. 자본의 검열, 제도적 검열을 통해 문화는 자유로움을 잊어버린다. 그것이 지금 팽창하고 있는 예술영화 시장의 실체이고, 따지고 보면 자본과 통제로 잃어버린 허울 좋은 예술 시장이기도 하다.세상에 좋은 영화는 많다. 하지만, 유럽과 미국 영화를 제외한 작품들은 시장을 위한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낯선 언어, 낯선 배우, 낯선 감독에 대해 환호할 경우의 수는 지극히 희박하기 때문이다. 수입사들의 경쟁이라고 하는 것은 지극히 좁은 영역 안에서 이뤄지는 눈치전이다. 그것은 수입작품 가격을 높이고, 보지도 않고 구매하며, 울며 겨자먹기로 개봉해야 하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자본검열로 잃어버린 예술영화감내해야 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많은 외화가 수입됐다고 좋아하지만 잘 따져보면 포화의 상태에서 좋은 영화를 만날 확률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미래라면 망하는 것이 맞다. 증식해 가는 속도 속에서 수정하거나 보완할 수 있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다. 발터 벤야민의 말처럼 달리는 기관차에 비상브레이크를 잡는 것이 훨씬 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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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2.16 23:02

세월을 담아내는 나무처럼

군산엘 가면 자주 만나는 것 중 하나가 제재소이다. 공장의 드넓은 마당에 원목이 산처럼 쌓여 있는 것을 보면 괜히 가슴이 뛰곤 한다. 그렇다고 아무 제재소나 무턱대고 들어가 나무를 구경하러 왔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저 차창 밖으로 보는 정도에 그쳤다. 그러던 중, 지인이 군산에 있는 어느 제재소를 인수하였다는 말을 듣고 얼씨구나 하고 드나들게 되었다.오동나무는 시간이 흐르면 명품으로제재소를 들락거리면서 나무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었다. 예전에는 아름드리로 쌓여 있는 원목들이 비슷비슷하게만 보여 그저 나무려니 했는데 지금은 초보적인 안목을 갖추게 되었다. 원목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원목이 아니었고, 나무의 종류와 원산지에 따라 쓰임새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건축자재 중에서 막 쓰는 나무가 뉴송이다. 뉴질랜드 소나무란 뜻인데, 왜송이라고도 부른다. 뉴송은 지름 30센티 정도 자라는데 20여년이 걸린다. 지름 30센티에 나이테가 스무 개 정도 있다는 뜻이다. 이 나무는 너무 물러서 건축 현장에서 막 쓰고 버리는 용도로 사용하거나 어(魚)상자를 만드는 등의 허드렛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수입하고 있다.요즘 한옥 건축에 제일 많이 사용하는 나무는 미국에서 수입하는 더글라스 퍼라는 나무다. 재질이 단단하고 붉은 색이 은은하게 나와 한옥 재료로 적당하다고들 한다. 이 나무가 지름 30센티 정도 자라려면 60여년 정도가 걸린다. 하지만 이 나무로 한옥을 지었을 때 삼년 정도가 흐르면 위에서 아래로 갈라지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다. 단단해서 조각이 잘 안 먹을 정도지만 이상하게도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정도의 틈으로 갈라지는 특성이 있다.남대문 복원 공사에 사용해야 할 나무는 우리나라 토종의 금강송이어야 했다. 하지만 금강송은 금강산에나 가야 만나볼 수 있을 뿐, 휴전선 남쪽에서는 거의 보기가 어렵다. 그래서 사용했던 나무가 시베리아 적송이었다. 시베리아 적송이 30센티 정도로 자라려면 90여년 정도가 걸린다고 한다. 물론 금강송으로 복원 공사를 해야 했지만 유전자 검사를 하지 않는 이상 시베리아 적송과 금강송을 육안으로 구별할 수는 없다. 그것을 대목수는 알고 있었고, 손쉽게 시베리아 적송을 사용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전문가들은 금강송이나 시베리아 적송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다. 다만 금강송으로 남대문을 복원하겠다고 큰 소리를 쳐놓고, 국민들 또한 금강송으로 복원할 줄로 알고 있는데 시베리아 적송으로 복원해버린 것이 문제였다.합판으로 만든 가구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접착이 약해지거나 부풀어 올라 곧 쓰레기가 된다. 물푸레나무나 오동나무로 만든 원목 가구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골동품이 되어 간다. 겉모양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합판은 시간을 담아내지 못한다. 시간을 담아내지 못하는 나무는 결국 쓰레기가 된다. 오랜 세월에 걸쳐 자란 나무로 집을 짓거나 가구를 만들면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명품이 된다.전북문화관광재단, 긴 호흡의 사업을문화도 저와 마찬가지다. 단기순이익을 구하는 작품은 결국 쓰레기가 될 터이지만 오랜 세월을 견뎌내는 작품은 고전이 된다. 뉴송이나 왜송으로 집을 지을 순 없다. 더글라스로 지으면 처음에는 보기가 좋지만 나중에 그 내면의 싸구려가 드러난다. 잘 건조한 금강송이나 적송으로 집을 지으면 천년의 세월을 견디는 문화재가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갓 출범한 전북문화관광재단도 문화와 관광을 행정적으로 지도하려 들지 말고, 단기사업에만 몰두하지 말고, 금강송이나 적송을 키우는 긴 호흡의 사업에 밝은 눈을 돌려주길 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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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2.02 23:02

임도 보고 뽕도 따러 가는 길

지금은 쉽게 접할 수 없는 풍경의 하나가 됐지만 뽕밭은 예로부터 물방앗간과 함께 연인들이 밀어를 속삭이던 대표적인 로맨스 장소였던가 보다. 〈뽕〉이라는 영화가 지난 80년대 이후 잇따라 제작돼 히트하더니 재작년에도 마치 저 80년대에 응답이라도 하듯 〈뽕 2014〉가 제작 상영된 적이 있다. 문화예술은 '임', 관광은 '뽕밭'그런가하면 우리 고장 부안에서는 벌써 7년째, 〈님의 뽕〉이라는 별난 이름의 축제가 개최되고 있다. 해풍을 맞고 자란 지역의 자랑스러운 특산물인 뽕을 홍보하기 위한 축제라고 한다. 발음을 혹 잘못했다가는 상스런 욕설로 들릴 위험이 있지만, 이 명칭의 근거는 보나마나 ‘님도 보고 뽕도 따고’란 우리 속담에 있을 게 틀림이 없다. 그리고 또 뽕이나 뽕밭이 불러일으킬 자발적 상상력에 편승하려 했을 게 분명하다. 어쨌거나 그러저러한 일들 덕분에 뽕밭은 아예 구경조차 못해봤을 신세대들조차 뽕밭이라고 하면 이제 야릇한 상상을 한번쯤은 하게 될 판이다.말이 나온 김에 물방앗간 얘기도 마저 하고 싶어진다. 물방앗간은 뽕밭 이상 우리 조상들이 아끼던 전통의 성역(性域)이었다고 할 수 있다. 툭 트여 있어서 남의 시선을 의식해야만 하는 뽕밭보다 은밀해서 좋고, 폭풍우나 폭설이 내려도 개의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삐걱대면서 돌아갈 물방아소리가 있어 웬만한 소리쯤은 밖으로 새나가지도 않았을 터다. 그래서 전주한옥마을을 찾아오는 젊은 관광객들을 위해서 한옥마을 어디 한갓진 부지에 물방앗간을 세웠으면 좋겠다고 제안한 적이 있는데 듣는 귀가 없어서 안타깝다. 옛적 한옥마을이라면 물방앗간 하나 정도는 필시 있었을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방앗간 입구 기둥에는 작게 이런 글 하나 붙여두면 어떨까 하는데, 연인이세요? 그럼 잠깐 쉬어가세요. 이곳이 우리 전통의….뽕밭이 있고, 물방앗간이 있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전북문화관광재단’이 태동을 시작했다. 말 그대로 태중 움직임 단계이니, 아직 탄생까지는 하지 않은 상태라고 고백해야겠다. 수많은 도민들이 예의주시하면서 재단이 도대체 언제 입을 열어 고고성을 터뜨릴지 관심이 많은 판국이라서 아직은 출생 전이라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곤 하는 사정을 독자제현들께서 헤아려주셨으면 한다.헌데 많은 이들은 의문을 갖는 듯하다. 다른 광역단체들과는 달리 유독 우리 전라북도에서만 문화에 관광이 붙어있기 때문이다. 의심은 뻔하다. 차제에는 문화예술이 관광산업에 더부살이를 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리라.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문화예술과 관광은 서로 다른 굴속에 사는 두 마리의 토끼가 아니다.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기 위해서 허둥댈 일은 애초에 없다. 왜냐하면 문화예술과 관광은 두 마리 토끼가 아닌, 임과 뽕의 관계가 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다.전북문화관광재단 기대하세요문화예술이 임이라면 뽕밭은 관광이다. 임이 없는 사람에게 뽕밭을 가라고 하면 아마 죽을 맛이 될지도 모른다. 그 반대로 임은 있는데 근처에 뽕밭이 없다면 어디를 가야할지 참으로 난감할 게 뻔하다. 요즘 들어 유행하는 무슨 융 복합 그런 게 아니더라도 문화예술과 관광은 서로가 있어서 상승효과를 내기 알맞은 분야들이다. 전북문화관광재단은 그 절실한 필요성에 의해 창설이 됐다. 재단은 지금 임도 보고 뽕도 따러 가는 길이다.△이병천 대표이사는 소설가이며 전주MBC에서 PD로 29년을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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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1.26 23:02

새해 덕담은…기본에서

새해 첫 달의 절반이 지났다. 지난 해 영화산업의 평가 기사들을 보니 전반적으로 호의적이다. 연 2억 명을 넘긴 관객수를 돌파하였고, 메르스 사태가 없었더라면 더한 숫자의 증가를 보여주었을지도 모르는 대목이다. 그러나, 숫자가 현실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2015년 절반이 지났을 무렵 상반기 한국영화 결산을 준비하는 기자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상반기 한국영화의 분위기가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원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묻는 질문이었다. 대답은 이랬다. 8월의 시작과 함께 최동훈 감독의 〈암살〉이 개봉을 하고, 류승완 감독의 〈베테랑〉이 개봉을 하면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는 쑥 들어갈 겁니다. 대단한 예언도 아니었다. 두 영화가 천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한국 영화 위기론은 사라져 버렸다. 한국영화의 흥행을 두고 일희일비하는 풍토는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만, 이제는 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하는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든다.독립 장편영화 만명 관람 유도하고가장 눈에 띄는 현상은 만 명의 관객을 돌파하던 한국의 독립장편 영화들이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는 것이다. 영화진흥위원회의 박스 오피스를 기준으로 보면 〈위로공단〉, 〈마돈나〉, 〈춘희막이〉, 〈한여름의 판타지아〉,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소셜 포비아〉 등이 만 명을 넘겼고, 화제를 모았던 독립 장편영화들이다. 영진위의 다양성 영화로 인정을 받은 작품이 더 많기는 하지만 이미 잘 알려져 있는 감독들의 예술 영화이거나 제작 시스템이나 배급력이 다른 영화들이 포함되어 있다.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부문을 통해 소개되었던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와 〈춘희막이〉가 어느 정도의 성적을 낸 것은 작품의 완성도라는 측면도 있겠지만 CJ의 아트하우스를 통해 배급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과거와 달리 어떤 배급망을 통해 소개되는가 하는 것이 지난해만큼 중요했던 적도 없던 것 같다. 젊고 새로운 감독들은 독립 장편영화들이 매년 쏟아져 나오지만 그 중 극장을 통해 개봉하는 경우를 찾아보기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개봉관 상영 회차의 부족으로 인해 만 명이라는 숫자는 산술적으로도 달성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매년 천만이 중요한 화두로 여기지만 진짜 중요한 숫자는 천을 뗀 만이다.여기에 해외영화를 수입하는 수입사의 증가와 콘텐츠의 무분별한 수입은 작은 영화들이 벌이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2014년의 호황을 지나 시장을 붕괴시키는 결과를 이끌어 냈다. 콘텐츠 확보 경쟁으로 인해 이름이 있는 감독과 배우들의 예술영화 가격은 치솟은 반면 세 편의 영화 묶음인 패키지를 수입하게 되면서 원치 않는 작품들까지 극장과 IPTV에 풀어놓는 일이 늘어났다. 영화를 보지도 않고 선 구매 하는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저마다의 이유는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돈 때문이다. 몇 번의 허탕을 치더라도 한 번의 대박으로 만회할 수 있으리라는 자본의 기대감이 끝내 예술영화 시장을 무너뜨리는 경우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예술영화 무분별 수입 없어져야올해는 좀 더 나아질 것으로 기대하지만 수입된 해외 작품의 편수를 파악하고 나면 희망적이지만은 않다. 천만 영화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작은 영화들이 관객을 만나는 방식은 달라진지 이미 오래다. 빈익빈부익부의 시스템이 고착된 상황에서 무지와 무관심이 만나 펼쳐지는 이전투구는 더욱 심해질 것으로 보인다. 기본에서 새 출발해야 한다. 한국의 독립 장편영화는 2010년에 그랬던 것처럼 만 명 관객을 모으기 위한 시스템으로 전환되어야 하고, 수입 예술영화들은 아트버스터라는 화려한 말을 버리고 아트영화로 시작해야 한다. 큰 것(숫자)만을 볼 때 놓치는 것이 바로 기본적인 것들이다. 이것이 새해 덕담이 될 수 있기를.△이상용 씨는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지냈으며〈영화가 허락한 모든 것〉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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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1.19 23:02

여기는 후백제 왕도인 전주

그 어느 누구도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었겠지만, 지난 12월 24일에 전주 르윈호텔 맞은 편에서 조그마한 발굴보고회가 있었다. 이곳은 한옥마을에서 동고산성으로 올라가는 길을 확장하기 위하여 예전 집터자리를 국립전주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한 것이다. 발굴되어 나온 유물도 눈에 확 띄는 것이 없다. 그러나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의미있는 발굴이었다. 다름아니라 그 곳에서 후백제에 관련된 유물이 다수 찾아진 것이다. 한편 지난 여름 메르스가 한창 기승을 부리는 시기에는 오목대에서 후백제시기에 축성된 성곽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어서 전주 주변에서 후백제와 관련된 유물들이 상당히 지표상에서 수습되었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실은 이번 발굴조사도 지표 조사상에서 발견된 유물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조그마한 지점이라도 이런 조사들이 지속되어 나갈 때 앞으로 후백제 도성으로서의 전주의 위상을 정립시키는데 좋은 근거 자료들이 될 것이다.후백제 수도 역사 밝힐 자료 수집 위해전주의 도심은 최근 엄청나게 팽창되었다. 신도시, 혁신도시, 아중지구 등으로 팽창되면서 고층 아파트들이 여기저기에 수도 없이 건설되었다. 구도심지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단독주택 주거지가 많이 남아 있다. 구도심지는 바로 조선의 치소인 전라감영이 위치해있던 곳이다. 조선뿐만이 아니라 고려시대에도 고려의 치소인 성곽이 위치해 있었으며, 통일신라시대에도 치소가 있었던 곳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도심지의 조그마한 지점이라도 재건축시에 시굴조사가 이루어진다면 전주의 역사를 밝힐 수 있는 좋은 자료들을 수집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마침 구도청 건물을 허물고 전주감영 터에 대한 발굴을 시도한다고 하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마침 영화의 거리에 주차장으로 사용되던 공터에 호텔이 건립된다고 하는데, 이번 기회에 그 곳을 발굴조사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전주부성의 핵심 중심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부성의 옛터였던 만큼 천년 전주의 모습의 일단을 드러내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된다.이렇게 후백제 왕도에 대한 자료를 하나씩 하나씩 모아 가다보면 왕도의 경관이 어떻게 구성되었을까를 유추해볼 수 있다. 왕도의 경관을 재구성할 수 있다면 전주도 고도(古都)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고도는 문자 그대로 오래된 도시가 아닌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고도보존 및 육성에 관한 특별법에 규정된 각 시대의 수도를 말하는 것이다. 경주는 2000년 12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지난 해 여름에는 부여와 공주, 익산이 백제의 고도로서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 부여와 공주는 백제의 수도라는 분명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15년 이상 지속적으로 발굴을 진행해왔으며, 익산은 지금까지도 20여년 이상 꾸준히 발굴을 시도하여 미륵사의 경관을 복원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삼국유사의 기록과는 달리 선화공주가 아닌 639년에 사탁적덕의 딸이 무왕의 건강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미륵사를 건립했다는 명문이 나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렇게 너무도 명백한 사실을 지닌 고도라고 하더라도 경관 복원을 위한 자료수집을 위해 긴 세월 지속적인 발굴이 진행되어 온 결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긴 세월 지속적 발굴조사 뒤따라야36년이란 짧은 시간이지만, 전주가 후백제의 수도라는 역사적으로 분명한 경험을 가진 만큼 이를 드러내 고도로 지정되는 자랑스런 역사를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다면 천년 전주의 품격을 드높이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김주성 교수는 전남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백제학회 회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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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1.12 23:02

아름다운 도전과 새로워지기

201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는 낯익은 문학인이 둘이나 당선되었다. 등단한 지 10년이 넘은데다 작품 활동 또한 게을리 하지 않은 작가들이다. 둘 다 전북소재 대학 출신들이었다.하나는 전주대 국문학과를 졸업한 뒤에 2004년 전북일보와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시로 당선되었고, 2015년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시로 당선되었던 경력의 시인 문신이다. 그는 201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발굴하는 토피아, 복권되는 생활로 당선되었다.전북출신 문학인들 신춘문예 당선또 하나는 원광대 국문학과에 적을 두었다가 2003년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로 등단한 뒤에 2009년 제3회 시작문학상, 제17회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제28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시와 희곡, 동화와 산문을 넘나드는 문단의 괴물인 시인 김경주이다. 그는 201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희곡 부문에 태엽으로 당선되었다.문신은 전주에 거주하면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문신의 도전을 지방에 살고 있는 문인의 고달픔으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지면 부족과 중앙문단에서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것에 대한 소외감으로 끊임없이 신춘문예에 도전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문신의 문학을 폄훼하는 명예훼손에 해당할 수도 있다.김경주는 프로필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한 순간도 고여 있지 않고 머물러 있지 않으려는, 유목의 작가이다. 김경주의 문학적 성과와 도전은 이미 중견 이상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스스로를 문화생산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십년 넘게 홍대앞과 상수동에서 살며 오늘의 홍대앞이라는 현상을 만들어낸 문화생산자 중의 하나이다. 이미 시극(詩劇)을 연출하고 연극 대본도 썼던 그가 신춘문예 희곡 부문에 응모하였고 보란 듯이 당선된 것이다.문신과 김경주의 도전에 큰 박수를 보낸다. 신춘문예 당선의 영광을 훨씬 뛰어넘는 아름다운 번뇌, 새로운 것에 대한 갈구와 영혼을 긴장시키기 위한 각고의 분투에 고개 숙인다. 신춘문예에 당선될만한 작품을 내놓기 위해서는 긴 시간 고투해야만 했을 것이다. 고독한 시간을 섬기지 않는다면 결코 작품은 탄생하지 않는다. 그들의 문화생산을 위한 고독은 삶이 낡아가는 것에 대한 간절한 거부이며 동시에 새로워지기 위한 열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지난 해 말,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걱정말아요 그대를 듣다가 그만 울음이 터진 적이 있다. 가사 중에 ~ 새로움을 잃어버렸죠~에 콧등이 시큰하더니 기어이 울음이 터졌다. 사과를 먹던 중이었는데, 사과 조각을 입에 넣고 꺼이꺼이 울었다. 거실에서 함께 드라마를 보던 가족들은 뭔일이래?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스스로를 새롭게 하는 이들에게 감사나는 새로움을 잃어버린 낡은 작가였다. 낡은 나새로움이나 변화를 간절히 추구하지 않았고, 스스로에게 엄정하지 않았다. 그럴 듯한 표정과 말로 독자를 기만하는 위선자, 문학적 허명에 우쭐대는 자, 자기기만으로 영혼을 폐허로 만들고 그것을 모르는 자, 문학 이외의 것을 가지기 위해 비겁도 불사하는 자였다. 무엇보다도 지금에 안주하면서 새로운 도전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낡아갔던 것이다. 작가의 영혼이 낡아가는 것은 자기자신에 대한 범죄이다. 나의 울음은 나의 낡음에 대한 반성이었다.정초부터 두 후배 문인에게 크게 배웠다. 끝없는 도전으로 스스로를 새롭게 하는 그들에게 감사한다.△소설가 정도상 씨는 전북대를 졸업하고 중앙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7년 단편 십오방이야기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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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1.05 23:02

젊은 세대에게 보내는 메시지

겨울이 오고 매년 그래왔듯이 올 겨울도 쉽지 않을 것이라는 부정적인 뉴스가 난무하고 있다. 이 세대를 지나오며 마주하게 되는 가장 큰 화두는 지금, 우리는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내가 무엇을 대답할 수 있겠는가.불확실한 미래로 힘들고 지친 지금수많은 매체와 미디어를 통해 들려오는 부정적인 언어들, 학벌 과잉시대, 스펙 과잉시대, 금수저 또는 흙수저라는 말들로 젊은 세대를 규정짓고 있는 말들, 비정규적이니, 알바불안이라느니 불안을 촉진하는 말들. 어쩌면 이 세대보다 이 세대를 규정하는 이 부정적이고 불안한 말들이 젊은 세대들을 오히려 나락으로 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 이러한 말들이 오히려 젊은이들의 소망의 싹을 잘라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취업불가능과 같은 말들을 지나 니트족, 달관세대, 프리터족, 3포, 5포, 7포 세대, 급기야는 n포세대를 넘어 포기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는 말들까지 들려온다. 매우 안타깝다.나 역시도 기성세대가 되었고, 이런 세대를 만든 것에 무한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 나도 20대 자식이 있지만, 그 아이마저 툭하면 농담반 진담반으로 이런 언어들을 서슴없이 사용하고 있다. 내가 이들에게 무어라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 혹시 힘들고 지친 지금의 이 세대, 미래가 불확실한 지금의 세대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말들이 아닐까.차디찬 겨울을 이겨낼 수 있는 가장 쉽고도 옳은 방법은 겨울이라는 계절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 옷을 단단히 여미는 것이리라. 오늘은 얼마나 추운지, 내일은 얼마나 추울지를 토로하다보면 어느새 그 추위는 더욱 가깝게 느껴지고 말 것이다. 이렇게 그 어느 때보다도 추운 겨울을 지나는 세대들에게 기성세대로서의 나의 미안한 마음,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응원하고 싶은 마음을 전하고 싶다. 세상과 그대들을 논하는 부정적인 말들을 뛰어 넘어 위대한 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 연말, 또 새해가 되길 바란다. 나의 말이 아닌, 수세대를 전해 내려오면서 현자들에 의해 전해졌던 희망의 문구들을 모아서 소개하는 것으로 원고를 갈음하겠다. 수세대를 지나 나를 비롯해 모든 이들에게 옳은 말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깨닫게 해주는 현자의 말들로 젊은 세대들의 메마른 마음이 다시 한번 타오르길 바란다. 진리에 가까운 이 말들이 추운 연말 당신의 마음을 지피는 불쏘시개가 되길 바라본다.목적지에 당도하기 위해서는 날마다 의미 있고 힘찬 발걸음들이 보태어져야 한다. -단테 알리기에리일이 끝나기 전에는 결코 불가능을 입에 담지 말라. 운이 좋거나 나쁘다 하는 것은 뒤에 가서나 할 말이다. -키케로최고의 보물은 내안에 있는 꿈이다. 꿈이 있기에 오늘의 내가 있고 나의 미래가 있는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주변 환경이 어떻든지 간에 인간은 자신의 장점을 찾기 위해 힘써야 한다. 행복이란 바로 그러한 노력 속에 존재한다. -디오게네스성실한 마음과 불타는 노력으로써 극복할 수 없는 역경이란 이 세상에 없다. -소크라테스사람들이 얻게 되는 것은 모두 모험의 열매이다. -헤르도토스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진실은 마음가짐을 바꾸면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점이다. -플라톤현자들 희망 문구 다시 되새기길성실한 마음과 불타는 노력으로써 극복할 수 없는 역경이란 이 세상에 없다. -소크라테스할 수 있는 힘이 자신에게 있는데도 하지 않는 것은 무척이나 불명예스러운 일이다. -투키디네스일에는 높고 낮음이 없다. 신은 언제나 땀 흘리는 사람 곁에 머문다. -헤시오도스가만히 있어도 죽을 만큼 괴롭다면 그대는 어찌하여 죽을 각오로 덤벼보지 않는가?-호메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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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12.29 23:02

'품격 경영'에 대한 소감

동문선(東文選) 도서출판 신성대 사장은 그의 저서 〈품격 경영〉에서, 국민 소득 1만 불까지는 성실, 2만 불까지는 기술, 3만 불까지는 문화, 4만 불 이상은 품격이라고 일렀다.국민소득 4만불 이상은 품격그러면서 프랑스의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의 〈만종〉을 예로 들었다. 모델은 귀족이 아니고 서민인데도, 그리고 프랑스의 모든 성화도 제치고, 이 〈만종〉이 프랑스 국격을 대표하는 그림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림 속 부부 옆에 놓여진 바구니는 실은 제 아기가 죽어서 담았던 그 바구니인데, 그 부부는 너무나 가슴 아픈, 가난한 서민이면서도 일모에 멀리 종소리가 들리자 두 손 모아 기도하면서, 내 사적인 분노나 슬픔은 다 내려놓고 전 자연과 전 인류에 대한 융성과 평화를 비는 공적인 기도를 했다고 했다. 이런 주장은, 쉬르 모던풍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가 그림의 내밀한 사연을 밝힌 것이기도 하다. 이에 더 보태어진 이야기인데, 밀레의 친구들이 말하기를,신성하게 보이는 그림에 어찌 아기 시신의 그림을 담아야 하겠느냐고 충고하여, 담긴 물건을 감자로 바꿔 그렸다고도 전해진다.그런데 이 그림이 어찌하여 미국으로 건너갔는데, 어느 프랑스 부호가 전 재산을 털어 이 그림을 구매하여 본국 박물관에 기증했다는 것이다. 그림의 내용이 시사하는 바나, 그림을 구득하여 조국의 품으로 영접한 한 평범한 국민의 애국심이나 다 함께 조국의 국격을 높인 자존심이라고 동문선 저자는 결론을 맺는다. 가난한 사람이거나 부자이거나 간에 내 영화나 부귀보다는 국격을 먼저 앞세운 정신이야말로 지고한 애국심의 발로가 아니겠는가?필자가 지난 어느 해에 일본 센다이라는 온천 도시를 여행할 기회가 있었다.시내 버스를 타고 이동 중이었는데, 도로 몇 블록쯤 지날 때마다 간간히 욘사마라 이르는 배용준 사진이 전신 크기로 윈도우 앞에 내걸린 모습을 보게 되었다. 우리네 영화 배우가, 늘 경계의 대상국인 저들의 존대를 극진히 받고 있다는 점에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그냥 존경 받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우러름의 대상으로 높이 숭경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경험은, 유럽 여러 나라를 여행 중에, 우리 K-팝 한류 열풍을 실감하면서도 놀라움이 컸던 생생한 기억도 경험 중의 하나였다. 터키에 갔을 때는 늙수그레한 우리 내외가 아예 무슨 배우 취급을 받으며 여고생들 일행에게 둘러싸여 사진 모델이 되었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다. 한류 열풍이란 것이, 우리네 영화며, 연속극이란 것이, 또한 소녀시대를 비롯한 K-팝 그룹들이, 온 세계를 휩쓸며 눈부시게 활약하는 것으로 우리네 자존심은 하는 높은 줄을 모르게 되었다.그런데 우리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은 가만히 자존심만 챙길 뿐, 우리가 스스로 소위 국격을 높이기 위한 어떤 행위도 모색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다는 점으로 우리가 함께 깊이 자성해야한다고 필자는 생각했다. 우리나라 어느 한 곳도 배용준 사진이 걸릴 리 없었다. 중국 심양 도심에 크게 내걸린 장윤정 사진이, 우리나라에서는 아무곳에도 발견되지 않았다. 아니 우리 박물관 음침한 창고 속에 갇힌 청자며 백자며,백제 대향로며 우리 민족에 의해 영활한 예술품들, 자랑하고 아끼고 선양한 일이 있었던가? 누리며 향유한 일이 있었던가? 이쯤에서 자괴하고 자성해야 한다. 연예계 사람들이 남의 나라 사람인 양 우리는 심리적으로 간극해 있었다.문화 선진 국민 되기 위한 노력 필요예술적인 소양면에서, 문화의 모든 영역 진흥면에서, 우리 민족의 창의성은 탁월한데, 다만 우리가 공유하지 못한다고 생각된다. 전 민족 전 국민이 누리는, 문화의 선진 국민이 되기 위한 우리의 정려가 지금 바야흐로 필요한 때이다. 그것이 우리 자신의 품격과 우리 나라의 국격을 높이는 첩경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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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12.22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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