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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은 말을 타고 길을 가다가 잠시 쉬면서 자신들이 온 길을 되돌아본다고 한다. 이유는 걸음이 너무 빨라 영혼이 따라오지 못할까 봐 그런다는 것이다. 컴퓨터 부팅시간을 견디지 못해 안절부절못하고, 운전할 때 신호등 앞에서 마른 침 삼키며 발 떨기 일쑤인 나다. 영혼이 몸보다 앞서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잔뜩 움츠릴 때도 있다.인도영화 〈세 얼간이〉에 나오는 비루 학장을 떠올린다. 그는 학생들 앞에서 쫓기듯 말한다. 빨리, 빨리 달려. 그렇지 않으면 짓밟혀 죽어. 그는 하루에 단 7분간 휴식하는 중에도 그 시간마저 아까워 낮잠과 음악 감상 그리고 면도까지 해결한다.세상의 속도에 맞춰 앞만 보고 돌진한다. 유유자적 하고 싶지만, 여유가 없다. 그런데 이렇게 서두르는 삶은 조급증과 화를 부른다니 주의해야 한다. 삼성의료원 나덕렬 박사는 전전두엽에 충동조절센터가 있는데, 그곳에서 조급증과 화를 조절한다고 말한다. 작은 일을 반드시 마무리하세요. 그리고 순간의 여유를 즐기세요. 축구에서 골이 나는 것은 순간의 응집력이랍니다. 그는 서두르는 이유가 무시당하지 않으려는 마음에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부연한다. 화가 나 있을 때 내면의 소리를 잘 들어보면 어떤 두려움이 있는지 알 수 있다. 자존심이 건드려졌다면 그곳이 약한 부분이라는 사실도 알아차려야 한다.가만히 있으면 경쟁에서 뒤질 것 같은 마음, 새로운 자극이 반복될수록 충동적이고 조급해지는 마음. 앞쪽 뇌보다 뒤쪽 뇌를 주로 사용하는 사람의 전형이다. 외부 자극에 익숙해 있는 사람, 사람들. 보이는 것에 집착하고, 창조보다 복사나 편집에 능통한 이들은 형이상학적, 추상적 사고를 할 수 없다.마음의 속도를 어떻게 조절해야 하나. 일본 영화 〈안경〉은 주인공을 휴대전화도 터지지 않는 외진 바닷가로 보낸다. 그곳에서 할일은 마냥 기다리는 것뿐이다. 무엇을? 지나가는 것을. 나는 자유를 안다. 길을 따라 똑바로 걷는 것이다. 어쩌다 인간이라 불리어 내가 여기 있는가. 같은 목적으로 모인 사람들과 함께 시도 때도 없이 감사 체조를 한다. 무료함에 진일토록 몸을 맡긴다,영화 〈푸른 소금〉은 귀여운 킬러 세빈과 전에 전설적인 조직 보스였지만 지금은 요리 수업 동기생인 두헌(송강호 분)이야기를 다룬다.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서도 이들은 천연덕스럽게 달콤 짭짤한 사랑을 나눈다. 세빈이 묻는다. 아저씨! 세상에 중요한 세 가지 금이 있는데 무엇인지 알아? 답은 한참 뒤 두헌이 조직 선배들을 초청하여 저녁 식사 대접하는 자리에서 나온다. 세 번째는 지금입니다. 여러분, 지금 싸우지 않고 뭣들 하는 겁니까? 불안이 표출되는 대목이다.우리나라 13개 슬로시티를 돌아보며 줄곧 생각한 게 지금이다. 다녀와서 전주 한옥마을에 모인 수많은 탐방객 속으로 들어갔다. 지금 뭣들 하시는 겁니까? 내 물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은 하던 일 계속하고 있었다. 성향과 목적을 묻자 해설사가 말했다. 슬로(Slow)는 속도가 아닌 방향과 철학, 교감과 공감의 개념입니다. 무엇에 못 미친다는 뜻을 가진 늦다는 것과는 의미가 달라요. 천천히는요. 개별적 특성에 따라 달라요.제발 천천히 가자.
전주부성을 한 바퀴 돌았다. 도청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 강의를 마치고 스물 댓명 청중들과 뙤약볕을 걸었다. 객사에서 만나 북문터로 향했다. 성벽은 헐리고 표지석만 남은 북 서 동문자리는 햇볕 피할 데가 없었다. 그래도 풍남문에서는 아치형 성문이 만든 그늘에서 잠시 쉴 수 있었다.웨딩거리 큰길가에 자리한 강점기 시절 세워진 박다옥 건물을 두고 멤버들은 부지런히 사진을 찍었다. 풍남문 주변 고물자골목을 지나 지금은 게스트하우스로 변한 전주부공익질옥에도 들렀다. 1930년대 지어진 붉은색 벽돌의 전당포는 창연했다. 지쳐 쉬어야 했다.우리는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으로 올라갔다. S다방처럼 빈티지를 파는 공간이 아니라 이야기를 파는 다방이기에 선택한 곳이다. 20여 년 전, H마담은 망한 커피숍을 다방으로 만들었다. 역발상은 좋았지만 인스턴트커피와 자판기 그리고 카페에 밀린 다방이 잘 될 리는 없었다.새빨간 립스틱에 나름대로 멋을 부린 오너이며 레지 역할까지 하는 H마담의 다방학개론을 듣기 전에 모두 아이스커피를 시켰다. 수업료다. 스마트폰 부동산 플랫폼으로서 다방이나 알만한 젊은 친구들이 찻잔을 날랐다. 마담 혼자 커피를 타야했기에. 누구도 이 귀여운 막내문화에 툴툴거리지 않았다. 찻잔이 모자라 유리컵 아닌 머그잔에 담긴 아이스커피라니.강사인 내가 다방과 커피숍의 차이에 대해 설명했다. 엽차잔과 재떨이가 놓인, 성냥골을 분지르던, 선을 보던, 예술인의 안식처였던 공간임을 노인처럼 이야기했다. 한 때, 돈 없는 예술가들의 사무실로, 유명한 화가 또 서예가들의 전시공간이었다는 대목에서 잠시 아지트를 뺏긴 어르신들이 다방문을 열고 나가셨다. 커피를 다 탄 마담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다음은 다방경력 40년의 레전드 H마담의 다방학개론 플래시백 요약이다.70년대 여수에서 올라와 처음에는 하꼬비 생활을 했어요. 그릇 닦고 청소하는 시다죠. 월급은 적고 통근하기도 어려운 데다 잠 잘 데가 없어 다방 바닥에 자리를 깔고 잠을 잤어요. 하꼬비를 졸업하고 마침내 아가씨가 되고 경력이 쌓이면 카운터에 앉아요. 그냥 돈 계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네 A다방입니다.하고 전화를 받고서 도청 김과장님, 전화 왔습니다.하는 방송을 했어요.아침 일찍 오시는 분들에게는 계란 노른자를 띄운 커피를 대령했지요. 다방엔 규율이 엄해서 애인이 있으면 쫓겨나야 했어요. 양장에 하이힐의 레지 시절을 지나 한복 입는 마담이 됐지요. 마담은 여름에는 하얀 모시적삼을 해 입었어요. 얼굴마담은 차만 많이 팔면 되지만 책임마담은 수입이 부족하면 월급에서 채워 넣어야 했어요. 제가 팬을 한 오륙십 명 거느렸는데 다방을 옮기면 다들 이쪽저쪽으로 우르르 몰려왔었지요. 영화배우 김진규씨와 하반영 선생님도 기억에 남아요.허마담의 화양연화 스토리텔링은 스토리셀링으로 충분했다. 한 사람의 저물어가는 생애와 탈근대의 풍경을 두고 문화자원이라고 말하기는 좀 그렇다. 하지만 시간적 요소를 파는, 장소마케팅으로 스토리텔러가 있는 A다방은 전주스러운 곳이다. 전통과 근대, 탈근대가 내면화된 도시 전주부성 시간여행을 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관광객들은 다방으로 가 쉬시라.
한 달포 전 기령당(耆寧堂)에서 400주년 행사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나는 그곳을 찾았다. 전주 시내가 환히 내려다보이는 완산 언덕바지에 위치한 기령당은 우리 고장이 어떤 곳인지를 한 눈에 보여주는 의미심장한 곳이다. 기령당은 노인들이 모이는 곳을 말하는 데 우리나라는 예부터 원로 노인을 모시는 풍속이 있었다. 국가에서는 기로소(耆老所)를 만들어 관직 은퇴한 원로들을 우대하곤 했다. 회갑을 넘긴 지역 원로들이 모이는 이 기령당은 예부터 어른 공경의 관습을 잘 담아낸 기구였다. 단순 교제에서부터 시작해서 지역 내 비공식 자문기구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는 모임으로도 알려져 왔다. 기령당의 고색창연한 건물, 그 주위를 덮고 있는 기품과 남아있는 기록들이 그 역사를 증언하고 있었다.숨겨져 있지만 중요한 문화유산들이 우리 주변에 아직도 살아 숨 쉬고 있다. 기령당처럼 사회적인 인지도를 얻게 된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채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가 아무도 모르게 하나 둘씩 우리 주변에서 사라질 것을 생각하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무너져 내리는 건물 속에, 책 속에, 기억 속에 들어 있는 소중한 정신적 가치를 찾아내서 집적해 두는 일이 시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한 두 명의 전문가나 정치가들의 제안이 아니라 도민, 시민들의 집단적 합치가 새로운 문화의 창을 열어 왔다는 점을 되새기고 싶다. 해방이 되자마자 봉안전을 부수고 힘차게 높이 세운 독립운동기념비, 시민들의 모금으로 세워진 종합경기장 등은 집단지성의 힘이 발현된 유산들이다. 21세기의 문화를 더 풍성하게 만들 수 있는 자산인 박물관 건립도 집단의 협치로 이루어져야만 한다.자타가 인정하는 예향이라는 명성과는 달리 박물관 통계를 보면, 다소 실망스럽기만 하다. 2016년에 나온 전라북도 통계에 의하면, 도내 국공사립 및 대학 박물관은 45곳으로 파악되었다. 전국적으로는 780 곳이 운영 중이니, 도내 박물관은 전국적 분포에서 약 5% 정도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우리가 해외여행을 가게 되면 빠뜨리지 않고 들리는 곳이 박물관이다. 재미를 떠나서 방문한 지역에 대해서 좀 더 알고자 할 때 필수 코스가 된다. 이러한 이유에서라도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박물관의 운영은 중요하다. 비단 관광객을 대상으로만 필요하다는 뜻은 아니다. 도민의 자긍심으로 이어질 수 있는 박물관이 지속적으로 세워져야 할 이유가 또 있다. OECD 주요국가와 비교하면, 1관 당 인구수가 독일은 2만 명인데 비해 우리나라는 12.3만 명이다. 일본은 3.7만 명이라고 하니 박물관 수로 보면 후진국에 속한다.세계적으로 정평있는 박물관을 보면, 다양한 문화적교육적 기능을 하고 있어서 지역의 랜드마크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도시 자체보다 박물관으로 더 유명세를 얻는 곳도 적지 않다. 박물관은 나이, 학력, 인종을 불문하고 누구에게라도 개방된 곳이어서 민주적 교육을 실천하는 장이 된다. 지역의 다양한 문화를 발굴연구해서 그것을 기초로 좋은 전시를 하는 것이 박물관이다. 최근에는 교육을 넘어서 놀이, 휴식 기능도 추가하면서 박물관이 다목적 문화공간으로 탈바꿈을 하고 있다.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연구의 연구를 거듭해서 훌륭한 콘텐츠를 가진 박물관이 세워지기를 기대해 본다. 후손들이 대대로 자랑거리로 삼을 수 있는 그런 문화공간의 탄생을 꿈꾸어 본다.
황석영 작가만큼 우리 현대사의 중요 사건을 현장에서 맞닥뜨린 사람이 있을까. 개인사도 겨울 파도처럼 너울 쳐서 그의 자전은 역사와 개인이 부딪히며 내는 파열의 고통과 신산으로 가득하고 또 한편으로 광장과 깃발의 환희로 크게 나부낀다. 해방 전 만주에서 태어나 평양에서 어린 날 잠시 살다가 월남한 그는 한국전쟁, 419, 516, 유신과 베트남전쟁, 1026, 518, 6월항쟁으로 이어지는 한국사 격변의 현장 모든 곳을 살아낸, 드문 작가다. 80년대 말에는 홀연 방북하여 우리 언어의 반쪽인 북쪽의 현실을 작가의 눈으로 목격하고, 때로 개입하며, 남북 모두로부터 탈주하여 잠시 망명객이 되기도 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 영국 런던의 테러, 미국 LA폭동 등 그가 가는 곳마다 기다렸다는 듯 세계사적 사건들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그는 그 모든 것을 보고 들었다. 귀국하여 또 몇 년 징역을 살면서 그의 편력에서 유일하게 왜소했던 감옥 체험까지 완결했으니 한 생애에서 이처럼 많은 사건들의 세례를 받은, 축복받은 작가는 황석영이 전무후무할 것이다. 며칠 전 출간된 황석영의 자전 <수인 囚人>은 이 격동의 시대를 살아온 작가 개인의 역사를 담은 책으로 한국현대사 외전이라 부를만한 책이다.그의 책과 인터뷰, 사회적 언급 들을 빠짐없이 읽으며 오랜 애독자로 살아온 내가 황석영 선생을 특별한 경모의 눈길로 바라보는 것은, 그가 높고 빛나서가 아니라 어쩌면 본성적인 것 같은 그의 양아치 기질 때문이다. 세상일에 지대한 관심을 갖는 것은 작가라면 당연한 일이겠으나 황석영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끊임없이 시대의 가장 뜨거운 현장을 찾아 움직였다. 그의 초기 문제작인 <객지> <삼포가는 길>은 산업화 초기의 노동현실, 도시화와 해체되는 농촌공동체 를 담았고 <탑> <무기의 그늘>은 베트남 참전의 그늘을 다룬 문제작이다. 그가 정리한 광주항쟁의 진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시대와 호흡하는 작가정신의 한 정점을 보여준다. 황구라라는 별칭으로 주변 지인들에게 더 자주 불리며 조야에 너무도 유명한 그의 입심은 종이장을 뒤적이며 머리 속에서 얻은 잡지식이 아니고 이처럼 윤리적 규범과 보편상식의 범속한 테두리를 자주 횡단하며 온몸으로 체득한 것이다. 나는 반듯한 범생이 대가들보다 황석영의 이 좌충우돌을 몹시 사랑한다. 그의 문학은 좁은 울타리 안을 맴돌지 않고, 그의 언어는 문체로 세우는 관념의 나라에 자족하지 않는다. 이제 국가와 민족이라는 개념을 믿지 않고 세계와 개인으로 직통하는 세계시민으로 글을 쓰는 그의 후기작들을 고대하고 있다. <여울물소리> <심청>에서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황석영만이 써낼 수 있는 문학의 영토가 아직 많이 남아 있다고 믿는다.인생을 돌려 놓을 수 있다면 파가(破家)의 사주를 바꾸고 싶습니다. 언어로 수많은 인생의 집을 짓는 작가이지만 자기 현실에서는 집을 부수고 나온 운명. 황작가의 출간 인터뷰에서 이 한 마디가 가장 아프고 공감된다. 안온한 집으로 석방되지 못하고 자청하여 세계의 감옥을 전전하는 그의 오랜 수인 생활이 있었기에 그의 문학은 언제나 팽팽한 긴장 위에 서 있을 수 있었다. 세계와 홀로 대적하는 작가의 전범을 온몸으로 밀고 온 황석영 선생은 우리 문학과 시대의 황홀한 한 빛이다. 오랜 시간을 돌아 모든 사물과 관계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다. 황석영 작가를 비롯해 우리 문학의 많은 목소리들이 작가를 제약하는 어떤 굴레도 없이 개성 넘치는 언어의 집을 짓는 문화의 시대가 되었으면 좋겠다.
온 나라가 커피 열풍으로 뜨겁다. 도심은 한 칸 건너 커피숍이고 거리마다 커피 향이 진동한다. 테이크아웃 용 컵 하나 들고 있지 않으면 이방인이 된 듯 뻘쭘하다. 속칭 당 떨어지는 시간이 되면 많은 사람이 약인 양 커피를 찾는다. 시고 쓰고 단맛이 뒤섞여 우르르 몸속을 파고들면 마법에라도 걸린 듯 기력이 솟는다.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직후 청와대에서 종이 커피잔을 들고 참모들과 산책하는 모습은 서민 대중이 공감하는 한 편의 시였다. 커피가 음료 이상의 기능을 한다는 생각을 했다.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는 누가 뭐래도 당신이 타주는 커피란다. 누구나 격의 없이 즐기는 커피는 시대가 만든 또 하나의 언어다.요즈음 문 블렌딩이 인기다. 커피 마니아로 알려진 문재인 대통령의 블렌딩 방식을 말하는데, 이 커피 배합 방식이 특이하다. 4:3:2:1(콜롬비아, 브라질, 에티오피아, 과테말라 순) 비율이다. 컬럼비아의 시고 달콤한 맛, 브라질의 마일드하고 구수한 맛, 에티오피아의 감칠맛쓴맛, 과테말라의 시고 스모키한 맛이 섞여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오묘한 맛을 창출하는 것이다. 중남미와 아프리카까지 어우러졌으니 어련하지 않을까. 호사가들은 이를 황금비율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명성을 얻기 시작하더니 벌써 전주도 K 커피숍 등에서 선을 보인다. 로스팅한 콩도 살 수 있을 것 같다.커피 블렌딩이란 특성이 다른 2가지 이상의 커피를 혼합하여 새로운 향미를 가진 커피를 창조하는 것을 말한다. 밥으로 치면 비빔밥이나 짬뽕 같다고나 할까. 최초의 블렌딩 커피는 예멘의 모카커피와 인도네시아 자바커피를 혼합한 소위 모카 자바 커피라고 전해진다. 모카의 신맛과 자바의 쓴맛이 섞여 신묘한 맛의 조화를 이루니 애호가들이 열광하였던 것 같다.단종 커피를 즐겨 마시는 나는 외지에 나갈 때 낯선 커피로 인해 고충을 많이 겪는다. 구미가 안 맞는 커피에 입을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도 맛을 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을 터지만 도무지 성미에 맞지 않는 것을 어쩌랴. 무슨 커피의 배합이냐고 질문할 계제도 아니어서 손으로 내리는 커피(핸드드립) 전문점을 만나기 전까지는 불편을 감수해야만 한다. 블렌딩은 이처럼 까다로운 것이다. 물론 생콩의 품질이나 로스팅 상태에 따라 맛이 달라질 수 있겠으나 누가 뭐라고 해도 요체는 품질 좋은 콩과 적정 배합비율이다.커피를 탐미하다가 블렌딩에 두 가지 법칙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나는 어떤 블렌딩을 해도 맛은 한가지라는 사실이다. 스타벅스의 아이스 아메리카노 커피에서 캐러멜 맛이 나는 게 예이다. 다른 하나는 특화된 블렌딩 커피의 맛도 소비자의 기호에 맞게 리뉴얼 한다는 것이다. 최근 시중 프랜차이즈 커피의 맛이 상향 평준화된 것이 이를 증명한다.블렌딩은 다양한 맛을 한데 모은 것이다. 그런데도 그 나름의 정체성이 있어야 한다. 이는 어느 결사체의 이념과 같은 것 아닐까. 하나의 성공을 위해 다수가 결집하는, 자기 것을 적극적으로 보태야 하는. 미각이 살아있는 한 블렌딩에 대한 다양한 시도는 계속될 것이다. 맛의 연금술 블렌딩,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통합의 과학이고 언어라는 것이다.
전주성에 다녀왔다. 풍남문에서 객사에 이르는 전주부성 아닌 덕진에 있는 전주종합경기장 말이다. 이승우와 백승호 등 깡다구들의 U20 월드컵경기 때문에 K리그 클래식 전주 수원 공성전(攻城戰) 더비가 원조 전주성에서 열린 것이다. 마지막이란다.1963년에 지어진 전주종합경기장다시 찾은 성은 옛날처럼 늙었다. 팔달로와 백제로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경기장은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장군 박정희의 등장을 알리는 제44회 전국체전의 산물이다. 전북도민들의 성금으로 경기장을 짓고 민박으로 체전을 치렀다. 팔달로도 그 때 뚫렸다. 2만8000명을 수용한다는 경기장은, 땡볕과 육상 트랙 때문이었을까, 옛날에 졸업한 중학교 운동장 느낌이었다. 의자는 좁았고 화장실이 낡아서 야외 컨테이너 임시화장실을 사용했다.수원은 없었다. 이재성은 물이 올라 자유자재의 패스를 구사하는 클래스를 보여주었다. 미드필더 김진수와 수비수 최철순도 제 몫을 했다. 결국 형광녹색 유니폼을 입은 전북현대는 코너킥 세트피스 상황에서 김신욱의 헤딩골에 이어 장윤호의 골로 원정깡패 수원삼성을 지그시 눌러주었다. 성벽 뒤에서는 용감한 법이라 나도 아들도 열심히 응원을 했다. 경기 후 마지막 구장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사진을 찍었다.인구 120만 부자도시답게 수백 명의 응원단들과 블루윙즈는 염기훈을 앞세웠지만 전북의 지능적인 포백에 막혀 힘 한 번 못쓰고 졌다. 서정원 감독은 고개를 떨구었다. 응원단들은 열을 다스리려고 시내 한옥마을 쪽 막걸리집으로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 미안하지만 잘 생각하셨다. 먹는 게 남는 것이다.전주월드컵 경기장도 전주성이라 부른다. 사실 전주종합경기장 출입구가 한옥 디자인에 성문의 태극문양을 보고 팬들이 자연스레 붙인 이름이지만 진짜 부성이 있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월드컵경기장은 합죽선 지붕, 솟대 기둥, 열 두 줄 가야금 닮은 케이블이 지붕을 받치고 있다. 경기장으로 향하는 육교 겸 호남제일문 역시 이 동네가 전주성임을 나타낸다. 하여 전북현대의 전주경기를 전주성 전투라 한다. 성을 가진 도시 수원 전주 더비 매치를 공성전이라 부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65만 전주시민과 180만 전북도민의 성원 속 전북현대는 닥공으로 컸다. 이제 시민의 축구응원 추억이 깃든 전주종합경기장이 사라진다. 쌍방울 레이더스의 한숨이 남아있는 야구장도 사라질 것이다. 그 자리에 호텔과 컨벤션센터 그리고 시민의 정원이 들어선다고 한다. 거대자본의 대형마트와 쇼핑몰이 들어오는 것을 막은 좋은 수비다.축구도 전주 문화관광상품으로리버풀과 맨체스터, 뮌헨과 파리 모두 최고의 축구팀을 가진 도시들이다. 특히 생제르맹은 파리라는 도시 브랜드의 덕을 보는 팀이다. 과연 축구팀 전북현대는 전주라는 도시 브랜드 덕을 보는지 생각해 볼 일. 바르셀로나의 캄프 누 경기장, 첼시의 스템포드 경기장, 맨유의 올드 트래포드 경기장 자체가 관광상품이다. 이런 점에서 한옥마을에서 시작된 전주성 문화관광상품은 덕진연못 전통정원을 지나 월드컵경기장에서 완성될 것이다.전주성에서 연승을 거둔 U20 한국팀이 잉글랜드에 삐끗해 수원성에서 16강전을 치른다. 6월 8일 전주에서 치러지는 4강전에서 이승우 백승호의 건방진 골세레모니를 보고 싶었는데, 참.
며칠 전의 일이다. 어느 도시의 헌책방을 지나게 되었는데, 현재 남아있는 곳 중 가장 오래된 곳이라는 설명문이 붙어 있어서 호기심이 더 발동했다. 겉에서 보니 다 허물어질 듯 위태로운 건물이었는데 내부는 작은 생활사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었다. 옛날 상점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 무척 흥미로웠다. 안채는 살림집이고, 도로로 면한 곳은 바깥채를 달아내어서 가게로 사용했던 흔적이 그대로 있었다. 책방은 아주 작지만 깨끗하게 잘 정돈되어 있어서 가뜩이나 큰 내 몸이 더 뚱뚱해 보여 공연히 미안한 마음이 생겼다. 밖에서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내부 풍경에 은근히 놀라웠다.근현대 생활사 속 정겨운 이야기들허리를 굽혀서 안채로 들어가는 문을 지나니 살림집이 나왔다.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아이들이 오순도순 살았던 많은 이야기를 가진 가족들의 공간이 시간을 멈춘 채 남아 있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방이 비좁아지자 동네에서도 손꼽히는 솜씨를 가진 할아버지는 손주들의 방을 넓혀주었다는 이야기, 찌는 듯한 더운 여름날이면 마당에서 뽐뿌로 뽑아 올린 시원한 물로 목욕했던 이야기, 600장의 연탄을 한꺼번에 쟁일 수 있는 지하창고를 만든 이야기 등등. 내 어린 시절의 이야기들이 이곳저곳에서 들려왔다. 일반 박물관과는 또 다른 느낌과 감회를 가지고 잠시 옛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그런 공간이었다.조그마한 안방에는 할머니와 어머니가 사용했던 살림살이들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옛날 장롱과 찬장, 재봉틀과 다리미 그리고 아직도 소리가 나는 것이 신기한 오래된 라디오가 탁자 위에서 음악을 들려주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어린 시절로 돌아가니 아련한 추억들이 내 발을 붙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 자리를 쉬이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시간은 흘러간다. 그러니 과거도 현재도 흘러가도록 두자고 하면 우리 아이들은 지난 세대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아이들의 아이들은 더욱 더 모를 것이고. 그렇게 시대가 흐르다보면 후대에 누군가 나타나서 만들어내는 그런 역사로 후손들은 우리의 시대를 배우게 될 것이다.그 헌책방 안채에는 600장의 연탄이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는 지하창고를 할아버지가 손수 만드셨는데, 이는 며느리를 위해서 한 일이었다 는 글귀가 붙어 있었다. 어른들의 배려와 사랑이 담긴 이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젊은이들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연탄을 사용했었구나 그리고 그 연탄을 지하에 보관했었구나하는 정도로만 알고 끝내기에는 우리 세대의 경험은 무궁무진하다.600장의 연탄을 재워두고 200포기 김장을 하면 부모님들은 겨울나기 준비를 끝내고 비로소 따뜻한 방안에 허리를 펴고 누울 수 있었다. 그러나 60장의 연탄 구입도 힘겨운 부모들도 적지 않았다. 또 불량연탄 때문에 하루에도 수차례 연탄과 씨름했던 이야기, 어디 그뿐이랴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에 이르는 슬픈 사연들도 많았다.부모가 살아 온 이야기를 자녀에게근현대 생활사 속에는 안타깝고 불운한 일도 많았고, 정겹고 사람냄새가 나는 일도 적지 않았다. 바로 우리 주변에도 이같이 정겨운 이야기가 수없이 숨어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곧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것도 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들의 이야기들을 남겨 두는데 힘을 쏟아야 할 것 같다. 부모님들이 살아 온 시대의 이야기들을 자녀들에게 남겨주는 것이 바로 미래를 위한 유산만들기 작업이 아닐까한다.
이제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돌아가 이념적인 잣대로 예술작품을 바라보는 일이 없는 문화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 거론되고 있는 도종환 의원이 13일 서울 남산예술센터에서 연극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 공연 후 열린 예술검열 주제 대담에서 한 발언이다. 그가 정치에 참여하면서도 시를 계속 써온 현역 시인이자 박근혜 정부 때 문화예술인 지원배제명단(블랙리스트) 논란을 제기한 의원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 주장은 더욱 실감나게 다가온다.새 정부 출범, 검열없는 사회홍준표 후보는 정권의 판단에 따라 국책지원사업의 대상을 결정하는 것이 무슨 문제냐 하는 식으로 표현의 자유와 출판의 자유 등 민주주의의 근간에 대한 무지를 드러냈다. 이제 새 정부가 섰으니 검열 없는 창작환경을 보장하는 것에서 문화예술 진흥의 르네상스가 찾아오리라 믿는다. 이번 대선에서 주요정당의 문화예술 관련 정책공약은 비중도 약하고 안보 노동 등의 굵직한 이슈에 밀려 정책 발표의 시기와 세부적 깊이에서 아쉬움이 있었다. 참여정부 시기에 민관 협력형의 문화예술 장기비전을 담은 〈창의한국〉이 나온 적이 있는데 새 정부에서는 예술창작자들과 향유자들의 다양한 논의를 모아가며 그보다 훨씬 진전된 정책들이 세워지고 적극 시도되기를 바란다.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문화창작 환경을 위한 입법과 제도 보완을 약속하며 관련기관 독립성 강화-문화관련 기관장 인사에서 문화예술인들의 추천를 받겠다는 문재인의 약속이 그 첫걸음이 될 것이다. 지난 정부들에서는 권력과 가까운 인사가 문화계의 지원 예산 배분권을 틀어쥐고 문화계를 농락해왔다. 또 다른 권력자가 그 자리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부처의 과도한 권한을 축소하고 잘못된 일에 관여해온 관련자들을 과감하게 정리하면서 문화계 내의 자율성을 회복하는 것이 제대로 된 처방이다. 문화예술에서부터 중심- 주변, 상부-하부, 지시-추종의 낡은 관계를 혁파해야 한다.문화에 균형과 발전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 문화는 됫박을 고르게 깎아치는 균형의 영역이 아니고 수치를 들이대며 지표 달성을 확인하는 계량 중심적 사고와 연결되는 발전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긴 하나 고갈난 바닥을 채워 평형수를 채우는 정책이 먼저 시도되어야 한다. 예술인들의 권리보호, 복지를 기본으로 깔면서 문화시장에서의 독과점 해소, 주류 장르에 치여온 무용, 연주, 국악 분야 등 어렵게 이어가고 있는 소수 장르를 북돋아주는 정책을 써야 한다.문화에도 균형발전을문화향유의 격차가 엄연한 데 이를 현실적으로 줄여가는 정책들도 매우 중요하다. 개인들 모두가 창조성을 맘껏 발휘하게 하는 예술교육의 정상화를 강조하고 소득, 지역, 연령에 따른 문화소비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문화기반시설 지역 간 불평등을 〈문화균형발전〉의 관점에서 접근하며 지역문화진흥법, 문화기본법 제정을 약속하고 문화예산을 2%대로 올리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문화정책은 잘 잡은 방향이다. 사물이 보다 낫고 더 좋은 상태로 나아감이라는 발전 본래의 어의에 충실한다면 개발을 넘어 성장과 진보를 아우르는 말이기에, 문화발전은 매일 새로운 사람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문화예술의 본성에 더욱 맞는 것이라 생각한다. 품격있는 문화예술의 힘으로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자는 구호가 새 정부의 국정 비전 중 핵심요소로 자리잡아 군비보다 문화! 예술로 평화! 가 구현되는 아름다운 세상을 기다린다.
어버이날 찾아간 요양병원 뜰에 지면패랭이꽃이 타는 듯 피었다. 꽃 잔디라 부르는 꽃이다. 요즈음 이곳저곳 편하게 피어있어 자주 보지만, 오늘 여기서 보니 유난히 화사하고 눈이 부시다. 지면(地面)으로 퍼지는 특성이 있고 패랭이꽃과 비슷하여 저 이름을 얻었단다. 꽃말이 희생이라는데. 어쩌면 한 시절을 살라 희생하고 지금은 여기서 외로움과 싸우고 계신 어르신들과 운명이 비슷할까. 애잔한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 보니 향이 진동한다. 여기 계신 내 어머니의 젊음도 한때는 저와 같았겠지.봄에 핀 화목이 가을에 또 피는 현상알고 보니 꽃의 삶은 그게 전부가 아니다. 와락 피었다 지는 것이 끝이 아니고, 저들 햇가지 나온 자리에서 하나둘 계속하여 가을까지 꽃을 피운다. 이를 막핀꽃이라 부른다. 봄에 핀 화목이 가을에 또 꽃을 피우는 현상.을 말함이다. 맥문동과 개나리도 이와 같다. 이곳 어르신들도 막핀꽃처럼 한 시절을 다시 구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요즈음 진달래, 철쭉, 벚꽃도 계절과 상관없이 자꾸 꽃을 피우는데.우리 영화 〈장수상회〉에는 김성칠이란 치매 어르신이 나온다. 아내의 얼굴과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중증 환자다. 어르신은 급기야 자기 이름까지 잊게 된다. 어느 가을날 아내 금님은 화단 돌 틈에서 막핀꽃을 발견하고 뛸 듯이 기뻐한다. 금님이 성칠과 나란히 앉아 소원을 빈다. 이 사람 저 꽃처럼 다시 활짝 웃게 해주세요. 이때 성칠이 떨리는 손으로 꽃을 쓰다듬는다. 혹시? 그러나 성칠의 기억은 끝내 돌아오지 않는다.건강보험관리공단에 물으니 전라북도 요양시설과 요양병원 입소 인원이 3만여 명에 이른다. 이 어르신들, 다시금 꽃을 피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계실까. 반면에 세상은 이분들의 노력을 뒷받침하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보호자들이 꼭 손님 같아요. 그리고요. 오자마자 금방 가요. 면회 안 오는 침상이 더 많아요. 한 요양보호사의 말이 양심을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 같다.얼마 전 이 요양병원 벽에 포스터가 하나 붙었다. 상단에 큰 글자로 우리는 괜찮아요. 이렇게 씌어있다. 무슨 말인지 궁금해서 자세히 보니 아래쪽에 지게를 진 할아버지 그림이 보인다. 이 어르신 안자(字)를 짊어지고 힘겹게 걷고 있다. 안자를 번쩍 들어다 문장을 다시 구성해보니 우리는 안 괜찮아요.가 된다.5월은 가정의 달이고, 어르신들의 날이 있다. 그런데 포스터는 저렇게 아프다고 말한다. 저 안자 지울 수 없을까? 꽃도 아쉬워 가을이면 다시 피는데, 하물며 사람의 여생에 꽃눈 형성의 기회가 안 주어진대서야. 지면패랭이꽃은 필요할 때마다 솔솔 부는 바람과 촉촉한 빗물이 찾아와 몸을 돌봐준다. 건조하기 짝이 없는 육신 구부린 채 외로움으로 떨고 계신 어르신에게는 누가 필요한 양분을 공급할까. 어느 치매 전문가의 말을 들으니 보호자들이 병상의 어르신 앞에 가까이 오지 않는 이유가 의존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한다. 쉬운 말이 어렵게 들린다.어르신에게 "무엇을 해드릴까요?"메이 아이 헬프 유? (May I Help You?) 이렇게 하면 어떨까? 아무 데서나 하지 말고 어르신 계신 곳에서 직접 무엇을 해드릴까요? 이렇게 여쭙는 것이다. 5월(May)이니까. 꽃이 무성한 5월만이라도.
전주는 영화다. 50년대 전주충무로를 이뤘던 역사에 이어 영화제가 열리는 도시이기에 하는 말이다. 전주국제영화제(JIFF)는 결코 재미를 추구하는 영화제가 아니다. 사실 국제와 필름에 오래도록 방점을 찍어 대한민국 2강의 영화제로 자리 잡았다. 전주나 축제에 방점을 두는 전주양반님들이 오래도록 잘 참아준 덕에 전주는 전통과 현대를 조화시키는 도시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었다.영화, 소리, 한지, 서화 그리고제18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식이 열린 전주부성 고사동을 찾은 스타 박해일은 단정했고 하지원은 길라임 아닌 심사위원으로 가오가 있었다. 토요일 저녁, 정우성을 보려는 젊은 여성관객들의 줄은 돔을 한 바퀴 돌 정도였다. 김지미 임권택 안성기 그리고 전주가 낳은 불세출의 시나리오 작가 송길한이 참가한 〈비구니〉GV는 감동의 도가니였다. 무엇보다도 개막작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는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의 서늘한 사랑영화였다. 근래 개막작 중 최고의 영화를 맛본 영화신도들은 〈리틀 하버〉 〈네루다〉 등 좋은 영화에 입소문을 낸다. 영화제는 꽃심을 향해 순항중이다.전주는 영화지만 영화가 다는 아니다. 이 동네가 인구나 도세가 한참 딸리는데 문화 수도라 하는 이유는 소리꾼도 꾼이려니와 들을 줄 아는 귀명창이 많아서이고 이 동네가 한지와 서화의 도시인 것은 감식안을 가진 양반들이 많아서이다. 여기 두 가지가 더 있다.전북은 축구다. 전주성을 키워드로 구글링하면 전북현대가 뜬다. 닥공! 닥치고 공격의 대명사 전북현대모터스는 유아독존 1강이다. 수원삼성이나 서울FC는 라이벌도 못된다. 하늘에는 한국의 즐라탄 김신욱이 있고 땅에는 다비드 실바라 불리는 이재성이 자리한다. 요즘 골맛을 못 보는 이동국은 좋은 아빠로서만도 프랜차이즈 스타다. K리그 클래식 춘추전국시대를 진즉 평정한 후 아시아챔피언스리그까지 먹어버린 전북현대는 거의 국대급이다.인구 65만 도시에서 경기장에 삼만 명을 채운다? 오오렐레∽를 부르는 녹색전사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재성이 아득한 스루패스를 날릴 때 믿고 달려가면서 오프사이드 라인을 뚫는 김신욱의 닥공은 새로운 시어가 탄생하는 순간이다.전북은 문학이다. 김용택과 안도현, 이병천을 비롯한 전북작가회의 그룹은 대한민국 최고의 스리백이다. 최근 최고의 시빨을 보여주는 박성우와 이병초, 유강희와 문신 등 작가그룹은 최고의 스쿼드를 자랑한다. 그래서, 전북현대! 한 판 붙자. 작가 팀 감독 정양 시인은 최강희 봉동 이장님과 악수를 주고받을 것이다. 어렵겠지만 작가회의는 김용택 시인이 김신욱을 마크할 것이다.전북은 축구와 문학이다전북작가회의 주최 전국백일장에 즈음해서 이 게임이 열리면 뉴스마다 메인을 장식하고 월드컵 경기장이 차고 넘치리라. 전북문화의 품이 넓어지리라. 이 도전에 전북현대가 즉시 응답하지 않으면 조금 늦게 연락이 올 것으로 믿는다.5월 20일, U-20월드컵 코리아 개막일이다. 아르헨티나와 잉글랜드 전을 예약했다. 여기에 또 다른 메시와 호날두가 있을 것이기에. 이어 한국대표팀과 기니의 경기가 있다. 바르셀로나 듀오 이승우, 백승호 이 친구들이 앞으로 박지성과 손흥민이 될 것 아니겠는가. 이날 새로 선출된 대통령도 전주월드컵경기장에 오시면 좋겠다.
지난 해 1월 세계경제포럼의 막이 내리던 시간 스위스 휴양도시인 다보스에 때 아닌 아프카니스탄 민속음악단이 등장하여 눈길을 끌었다. 전쟁으로 얼룩진 아프카니스탄에서 온 젊은 여성들이 연주하는 전통민속음악이 잔잔하게 울려 펴지면서 4차 산업혁명에 대한 긴장과 열기를 식혀 주는 듯 했다. 소박하면서 진솔한 전통민속음악이 초과학시대를 사는 우리가 잃어버려서는 안 될 귀중한 유산으로 재인식시키는 순간이었다.인간을 중심에 둔 융합이 먼저다보스포럼으로 알려진 세계경제포럼은 전 세계의 공공 및 민간 부문의 지도자들이 모여서 당면한 의제를 가지고 논의하는 자리다. 이 연례회의에서 채택된 포럼의 논제는 당해 연도 경제, 정치, 사회, 환경 분야의 정책 방향을 결정짓는데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런데 첨단 과학이 이끄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천명하는 그 자리에서 제3세계의 전통민속 음악으로 피날레를 장식하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었다.과학과 민속예술, 산업혁명과 오래된 전통. 이 개념의 짝을 우리는 상반되는 것이라고만 본다. 얼핏 보면 대조의 짝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호 교류와 소통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영역이다. 4차 산업혁명시대 초현대적 과학만 가지고 인간의 삶을 개선하고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전통 속에서 이어져 온 문화와 예술을 아끼는 분위기가 무르익어야 4차 산업혁명도 성공할 수 있다. 오로지 기술과 과학, 권력과 돈만 추종하면서 신산업을 개발해 간다면, 이 나라는 물론이고 인류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지도 모른다. 아프카니스탄의 여성들이 들려준 전통 민속음악은 이러한 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우리는 요즘 이곳 저곳에서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을 많이 듣고 있다. 첨단 과학을 가지고 우리나라의 경제를 살려야 하고, 청년 일자리도 늘려야 하고, 국력을 더 키우고 발전시켜가야 한다는 내용들이다. 이러한 경제와 정치 일변도의 주장을 가지고는 4차 산업혁명시대의 승자가 되기 힘들다. 인간을 먼저 생각하는 진정한 휴머니즘 정신, 더불어 살아야 하는 배려의 정신, 그리고 나눔을 실천하는 공유의 정신이 앞서야만 이 새로운 시대를 열어나갈 수 있다.그래서 문화와 예술을 아끼는 나라가 4차 산업혁명시대를 선도해 갈 수 있다. 로봇, 사물인터넷, 바이오산업, 빅데이터 등 오늘날 산업의 특징은 인간을 중심에 둔 융합에 있고, 이 융합에 성공 모델을 세워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적 가치를 잃지 않고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전통문화와 예술을 존중하고 그 속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해가는 법고창신의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4차 산업혁명 발전모델 전북에서프랑스 사람들은 문화와 예술을 유독 사랑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적은 급료로 근근이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음악회, 전시회를 가기 위한 비용은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 주중에 열심히 일하는 이유가 주말에 열리는 문화예술에 흠뻑 취하기 위해서 라고 할 정도다. 우리 고장이 예향이었던 이유도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예전의 그 명성을 우리는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 문화와 예술이 과학에 시녀노릇을 하거나, 정치와 경제를 위해서만 복무한다면, 우리의 앞날은 암울하다. 그러나 다른 어떤 고장보다도 아직은 전통문화와 예술을 아끼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인간이 중심에 선 4차 산업혁명시대의 발전모델을 바로 우리 고장에서 시작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세월호 이후 한동안 말도 글도 나오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실이 상상을 압도하여 말문이 막히고 그저 억억 하는 신음소리에 눈물범벅일 뿐이었다. 내 눈앞에서 사랑하는 이가 죽어갔는데도 아무 손도 쓰지 못한 죄책감에 짓눌려 한동안 삶의 자잘한 기쁨을 누리는 것조차 죄스러웠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온몸을 감싸는 분노에 질식할 것 같으나 출구를 찾지 못해 생기는 울혈 같은 것이 많은 사람들 안에 들어앉았다. 배의 형상, 바다, 노란 리본, 그만한 또래 아이들의 모습만 봐도 가슴이 저며왔다. 그날로부터 3년의 시간이 흘렀어도 보통의 장례 절차에서 시간에 바래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슬픔의 경감이라 할 탈상은 아직 치르지 못했다. 돌아오지 못한 주검들이 있었고, 선체는 가까스로 육지에 올렸으나 진실은 미처 인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세월호 진실은 미처 인양하지 못해김탁환 작가의 소설 〈거짓말이다〉에 대한 호평을 여러 곳에서 들었으나, 사두고도 오래 책을 펴보지 않은 것은 고통에 대한 일종의 회피였을 것이다. Axt 최근호에 실린 김탁환 작가 인터뷰를 읽고 난 뒤에서야 〈거짓말〉을 펼쳐 들었다. 희생자의 주검 대부분을 수습한 민간잠수사들의 이야기다. 잠수사들은 모시고 나온다는 표현을 썼다. 죽은이에 대한 경의 그리고 깊은 바다속에서 주검을 수습하는 일의 소중함을 함께 이르는 말일 것이다. 맹골수도에서 평생 하지 않아도 될 포옹을 한 잠수사들은 격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무리한 작업으로 인한 잠수병으로 고통 받으나 어느 쪽으로부터도 온전하게 이해받지 못한다. 국가로부터도 충분한 치료는커녕 냉대를 받고 사정을 모르는 보통사람들에게는 돈벌이한 것이라는 오해를 받는다. 소설은 주검을 찾아 심해로 내려가는 잠수사들의 현장을 정밀하게 그려내면서 세월호를 바라보는 여러 사람의 처지와 시선을 매우 냉정하게 담아낸다. 우리 사회의 축약도가 거기 있다.이 소설의 압권은 수색과 수습의 과정에서 생생하게 전해지는 그 장면 그 냄새 그 물소리이다. 독자도 잠수사가 되어 깊은 물속 세월호 선체 안을 헤매고 다닌다는 실감에 사로잡힌다. 세월호가 남긴 내상의 치유에 전력해온 정신과 의사 정혜신은 이 실감이야말로 뜻밖의 위로가 된다고 썼다. 그 고통에 나도 함께했다는 느낌 때문이다. 깊은 공감을 느끼며 같은 주파수를 공유한 사람들은 의도치 않아도 서로에게 치유적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이른바 빅스토리를 주로 써오며 역사소설가로 알려져 온 김탁환에게 이 소설은 자기 문학세계에서 커다란 전환점이었다. 김 작가는 소설 작업을 심장을 바꿔 끼운다라고 표현했는데 세월호의 모든 것을 자신의 삶 속에서 녹여내고 문장으로 표현하다보니 매우 고통스러운 창작일 수밖에 없었다. 김탁환은 이 책 출간 이후 20년 넘는 작가 생활에서 처음으로 독자들에게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들었다. 세월호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한 방식으로 소설이 독자들에게 다가가는 것을 원했고, 지금 써야 할 것을 써야 한다는 생각에 집필에 집중했다는 그의 작가로서의 헌신에 독자가 박수를 보낸 것이다.기억하는 것으로 싸우자김탁환 작가가 〈거짓말이다〉 소설을 퇴고하던 중(2016년 6월)에 주인공 나경수의 모델인 김관홍 잠수사가 목숨을 버렸다. 작가는 허망한 심경 중에도 다시 사람들을 만났고,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8편을 모아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를 냈다.소소한 기쁨들이 큰 슬픔을 견뎌내는 힘이 된다. 우리 곁의 아름다운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치유와 구원이라고, 작가는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을 건넨다.
봄꽃 잔치가 한창이다. 찰칵찰칵 꽃망울 터지는 소리에 마음이 절로 열린다. 익산 숭림사 앞 꽃길을 한 바퀴 돌고 나니 꽃보다 사진이다. 뷰파인더를 들여다보며 한 장씩 넘겨본다. 내가 찍은 사진, 내 사진, 내가 찍은 내 사진. 사진은 느낌을 찍는 것이라는데, 찍을 때 느낌이 아니다.정녕 눈에 보이는대로 찍힐까지우고 말리라. 마음에 안 드는 순서대로. 가만있자, 기준을 어떻게 정할까? 한 장 한 장이 한순간의 증거이고, 의심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인데. 다시 살펴보게 된다. 사진치료자 주디 와이저는 심리적 도구로서 사진을 정의한다. 사진은 우리 마음의 발자국이고, 우리 삶의 거울이며, 우리 영혼의 반영이고, 적막한 한순간 우리 손안에 쥘 수 있는 응고된 기억이다.셔터(Shutter)는 세상을 여닫는 장치다. 건물 셔터나 카메라의 그것이나 뜻이 같다. 한번 열었다 닫는 일이 그저 단순히 들어오고 나가는 일 같지만, 따지고 보면 이처럼 거창한 심리적 기제를 담고 있다. 한 장의 사진을 대하는 자세가 진지해야 하는 이유다. 사진은 찍기보다 보기가 더 어렵다.최근 주목받고 있는 사진치료(Photo Therapy)에서는 사진 지각의 주관성을 강조한다. 영화 〈클로저〉에 이에 관한 장면이 나온다. 실연당한 여인 엘리스는 사진작가 안나의 전시회에 걸린 울고 있는 자기 사진을 보며 말한다.거짓투성이죠. 남의 슬픔을 너무 아름답게 찍었어요. 사진은 세상을 아름답게 왜곡시키죠. 전시회는 말짱 사기극인데, 사람들은 거짓에 열광하죠.앨리스는 자기가 눈에 보이는 대로 찍힐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착각이라면, 자기중심의 지각이라면 저 말은 푸념일 수밖에 없다. 우리 삶에서 시간과 공간은 고정되지 않는다. 상황도 마찬가지다. 박제된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봄꽃 마당을 일전하고 나서 꺼내본 내 자취가 그것을 증명한다. 기분이 좋았다면 좋은 대로 사진도 그렇게 나왔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영화에서 안나가 인물사진을 찍을 때 하는 말이 있다.등 곧게 펴세요. 눈썹 올리지 말아요. 뻔질해 보여요.눈썹 내린다고 뻔질하지 않으리란 보장 있을까. 저 뻔질은 누가 느끼는 것일까. 느낌에 다양한 관점이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요즈음 직장인들 단체 사진 찍는 모습을 보면 공허한 느낌이 앞선다.하나, 둘, 셋 파이팅!대한민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저 풍경. 선전을 기원하는 일종의 풍속도 같다. 일전을 불사할 태세로 사진을 찍는대서야. 저 사진 게시판에 보름쯤 걸릴 것이라는, 사진 뽑아서 모두에게 나눠주지 않을 것이라는 확실한 느낌이 있다. 한때는 사진 찍기 전에 사진사가 입술에 침을 바르라고 했다.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하나 더 있다. 김치!하는 것 말이다. 치~ 하면 입꼬리가 올라가 예쁘고 편한 얼굴이 될 것이라 기대하는 것.있는 그대로 찍고, 찍히고있는 그대로 찍으면 안 될까? 파이팅 하지 말고, 입술에 침 바르지 말고. 무엇을 찍는가. 왜 찍는가를 생각하다 보면 느낌도 찍히지 않을까. 가족사진, 행사 사진, 여행 사진, 꽃 아래 독사진. 위장된 평화 연출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찍고 찍히자. 요즈음 무보정 사진 광고가 인기를 끄는 것은 사실성(寫實性)을 중시하는 시대적 요구를 반영한 것 아닌가 싶다.
김훈은 『자전거 여행』의 서문에 만경강에 바친다.고 썼다. 몇 년 후, 이 작가는 소설 『칼의 노래』 작가의 말에서 다시, 만경강에 바친다.고 썼다. 김훈처럼 자전거는 없지만 드론을 들고 만경강에 나가보았다. 대아 댐에서부터 어우보 지나 망해사까지. 벚꽃 핀, 안개 낀, 비가 오고 눈이 오는 그리고 해가 지는 만경강을 붙들었다. 오래 보니 아름다웠다.지는 해 보며 명상할 수 있는 최적지여기 만경강 어름, 춘포역 가까운 방뚝에 문학공원이 생겼다. 이 강이 낳고 기른 정양 시인, 윤흥길 소설가, 홍석영 소설가, 말석에는 안도현 시인의 시도 돌비에 새겨져 있었다. 안타까운 일은 공원 자리에서는 강이 잘 안 보인다는 것. 조금 아래쪽 강폭이 가장 넓게 휘어지는 사행하천 지점을 택했으면 좋았을 텐데.만경강 둑 안쪽 둔치의 논들이 모두 사라졌다. 경작재배 금지. 농사과정 속 농약이나 비료가 흘러들어 수질을 망치는 것을 막고자 한 고육지책일 것이다. 그럴 수 있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 일부러 꽃을 심는 것은 더욱 어리석은 일인데, 홍수가 한 번 쓸어가면 그 다음은 어떻게 할지. 숨어하는 사대강 사업으로 오늘도 둔치에는 포크레인이 계속 삽질을 하고 있고 거대한 트럭들이 제방 위를 달린다.문학공원을 지나 목천포에 이르면 잘라진 만경교가 보인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멘트 다리가 낡았다고 철거하려다 김제방면과 익산방면의 교각 서너 개씩만 남겨놓은 것. 만경교는 중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윤흥길의 소설 「기억 속의 들꽃」의 무대다. 익산국토관리청은 잘라진 다리 이곳에 데크를 설치하고 소설 속 장면들을 새겨놓았다. 밥값 했다.해지는 쪽으로 더 내려가면 새챙이다리가 나온다. 이곳 또한 붕괴위험의 진단을 받은 곳이지만 청하면의 몇몇 생각 깊은 분들이 보존하고 가꾸어서 시민들은 낚시를 한다. 한 때 망둥어 천지던 신창진에는 이제 새만금에 막혀 붕어가 입질을 하고 김훈의 표현대로 다리가 긴 하얀 새들이 논다.세상 그렇다. 임진강에서 낙동강 하구까지 모두 갈비집과 카페에 모텔 아니던가. 그러나 만개의 이랑을 적시는 이 복된 강은 고산천에서 망해사까지 쓸 만한 점방 하나 눈에 보이지 않는다. 논들에 젖을 흘려보내는 수문조절장치 말고는 인위적인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다. 김훈은 모텔도 삽질도 없는 이 강 너머로 지는 해에 반했을 것이다.여행의 트렌드는 변한다. 불국사나 콜로세움 같이 인류가 남긴 거대 문화유산에서 요즘은 한옥마을과 골목 등 시간 여행을 즐긴다. 언제까지 이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뭐냐? 자연이다. 만경강에는 안개가 피고 기러기가 날고 매일 해가 진다. 지는 해를 두고 명상을 할 수 있는 대한민국 최적의 장소가 만경강이다. 그러니, 부디 만경강 가에는 그 어떤 것도 만들지 말고 짓지 마라.강을 파헤치고 강물 막은 죄 씻어라강의 끝에 소담한 절집이 있다. 바다를 잃은 망해사 앞은 이제 담수로 바뀌고 있다. 그 너른 땅에 골프장과 카지노를 지을 구상을 하는 중생들에게 한 마디 한다. 서해바다가 가장 잘 보이는 새 땅에 망해사 지을 터를 전라북도민들에게 돌려주시라. 거기 한 오천 평 절집 지을 곳을 보시하여 수많은 게와 고동들, 서해 훼리와 이 앞길을 지나간 세월호의 넋들을 위로하게 하라. 강을 파헤친, 강을 막은 죄를 씻을 마지막 기회다. 그 절 세울 땅을 만경강에 바치시라.
이솝우화로 널리 알려진 시골쥐와 도시쥐는 어린 시절 누구라도 한번쯤 읽어 보았을 이야기이다. 도시에 사는 쥐가 시골로 내려와서는 먹을 것이 형편없는 것을 알고, 시골쥐를 도시로 초대한다. 도시에 오면 세상에 맛난 것은 다 먹을 수 있다고 도시쥐는 장담하고 돌아갔다. 시골쥐는 기대에 차서 도시로 갔다. 맛난 것을 먹을 수 있는 대신 각종 위험과 위기에 노출되어 근근히 살고 있는 도시쥐의 볼품없는 꼴을 보고 시골쥐는 미련없이 시골로 갔다는 이야기이다.도시재생에 과거 시골문화 활용을이 이야기는 물질적인 풍족을 얻는 대가로 각종 유해환경과 싸워야 하는 것 보다는 여유있는 삶이 좋다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이 이야기를 좀 더 확대해 보면, 시골의 넉넉한 인심, 서로를 돌보며 사는 것이 좋다는 뜻이 있다. 창고, 곳간을 드나드는 쥐와 같은 미물들도 같이 살아간다는 철학이 있었던 예전 시골의 문화가 새삼 그리워진다.이런 뜻에서 인본주의가 살아있던 과거 시골문화를 도시재생 등의 사업에 활용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거꾸로 도시문화를 시골에 심으려는 정책이 있어서 큰 문제가 되고 있다. 과거 시골은 인재의 산실이 되었고, 그 인재들이 정신적 지도자가 되어서 고향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매사에 모범을 보이며 살았다. 안으로는 엄격한 규율과 협동을 강조했고 밖으로는 중재와 외교 창구가 되어 주었다. 촌의 이런 정신적 지도자들을 우리는 빠르게 잃어가고 있다. 도시형 리더십으로는 감히 생각할 수 없는 포괄적이고 인본주의에 바탕을 둔 시골형 리더십이 마냥 그리워진다. 엄격함과 자애, 협동과 중재로 마을에 좌정해 있던 진짜 지도자들이 소리없이 우리 곁을 다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며칠 전 신문을 통해서 실낱같은 희망을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소록도를 배경으로 한, 두 가지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꽃다운 나이 20살 때 소록도에 와서 평생 환자들을 돌보다가, 80을 넘기고, 모국으로 돌아간 두 수녀님이 계신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뒤늦게나마 이 분들의 처지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힘을 보탠 촌의 인심이 두 번째 미담이다. 더 이상 환자들을 돌 볼 수 없으니 다른 이들에게 폐가 된다고 옷 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조용히 소록도를 떠났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고국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 두 노인수녀님의 안타까운 소식을 접한 고흥군에서는 조례를 새로 만들어서 연금지급을 결정했다. 더 나아가서 이 미담을 카메라에 담고 있던 가난한 다큐멘터리 작가들에게도 지원의 손길을 뻗쳤다. 그래서 영상제작을 무사히 마쳤다고 한다.우리나라 공동체 정신 되살려야두 분을 맨손으로 돌려보냈으니, 우리가 자칫 도리를 못할 뻔 했다. 그런데, 고흥군수와 군민들은 적은 예산을 쪼개며 일조를 하였다. 이들의 아름다운 마음에 갈채를 보낸다. 시골의 인심이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도시였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우리도 마음은 간절하지만, 선례도 없고, 예산도 없어서 그런 일을 추진할 수 없다고 했을 지도 모른다.우리나라에는 오랫동안 소리없이 전해지는 공동체정신이 있다. 자발적이면서도 엄격한 규범과 윤리 그리고 인본주의에 바탕을 둔 협치를 스스로 실천했던 정신적 지도자가 그 안에 좌정하고 있었다. 오늘날처럼 계산에 능숙한 지도자들이 이끄는 느슨한 협업 수준의 정신으로 공동체는 운영되기 힘들다는 것을 우리는 유념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한 여자가 한 세상이다 부제가 모든 것을 말해주는 책 〈여자전(女子傳)〉은 인물 인터뷰로 유명한 김서령 작가가 최근 다시 펴낸 책이다. 한국 현대사만큼 굴곡지고 우당탕탕 흘러가며 숱한 이야기를 골짜기마다 부려놓은 장강도 드물 터인데 그 역사의 한복판을 맨몸으로 헤쳐온 여자들 이야기 일곱 편을 묶었다. 왜정시대-해방-인공-뒤집어지고 총칼 들고 나타나고 다시 뒤집어지고, 다 죽었구나 생각했는데 또 살아나고.한국 현대사 헤쳐온 여자들 이야기내 살아온 사연을 다 풀어놓으면 책 열 권으로도 모자란다는 분들이 어디 한둘일까. 하지만 기록으로 남은 분들은 극히 드물다. 평생학습센터 등에서 드물게 여는 생애사 쓰기, 한글학교에서 비뚤비뚤 글씨와 서툰 문장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분들의 인생을 읽을 때 특별한 감동이 있다. 역사교과서를 둘러싸고는 치열한 논쟁을 벌이면서 정작 어느 교과서에서도 기록되지 않은 진짜 이야기의 소중함을 우리는 놓치고 산다.〈여자전〉은 개인사의 곡절을 뚫고 나오면서 제 삶의 진액으로 역사를 써오신 분들을 다룬다. 동상으로 발가락이 빠져버린 지리산 빨치산, 팔로군이 되어 모택동 대장정에 참여했다가 나중엔 중공군으로 한국전쟁에 투입되었던 여자 군인, 만주에서 일본군 성노예의 고통을 겪은 위안부, 월북한 좌익 남편을 기다리며 수절한 안동 종부, 50년을 죽은 사람만 쳐다보며 살아온 옛날식 미혼모, 피난지 부산에서 창문 너머로 배운 춤으로 평생 춤꾼의 길을 간 누구, 참혹한 전쟁의 기억은 없으나 일상에서 남성과의 전쟁을 가혹하게 치른 미술관 주인. 신분과 학력, 고향과 환경은 제각각이었으나 한 시대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운명을 좌우한 결정적 요소였다. 〈여자전〉은 지금 이땅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전사(前史)이자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고통의 기원과 삶의 장엄함에 대한 한 백서로 찬찬히 읽어봐야 할 책이다.조남주 장편소설 〈82년생 김지영〉은 말 그대로 요즘 핫한 책이다. 변호사로 있을 때 남다른 필력을 보여주던 금태섭 국회의원이 먼저 읽고 감동하여 300권을 주문하여 다른 의원실에 돌렸다는 책이다. 요즘같은 소설 불황의 시절에 출간 4개월만에 1만 5000부가 나갔다.최근 페미니즘을 둘러싼 논쟁이 복잡하고 자폐적인 측면이 있었다면 이 소설은 82년생(서른 다섯) 김지영이라는 인물을 통해 한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실체를 선명한 사진처럼 보여준다. 대학을 졸업한 후 홍보대행사에서 근무하다가 서른한 살에 결혼해 딸 아이 하나를 키우고 사는 김지영. 그가 겪는 낭패의 순간들은 오늘의 여성들이 매일 마주쳤을(혹은 마주치게 될) 장면들의 연속 컷이다. 임금차별, 유리천장, 성희롱, 감정노동, 일과 육아, 시댁으로 상징되는 봉건유제와 낡은 의식. 이 모든 것들에 쥐어 짜지면서 김지영은 미쳐가고, 어느날 전혀 다른 모습으로 말문이 트여 그동안 감춰두었던 가슴 속의 깊은 말들을 터뜨리기 시작한다.한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어려움모든 장면에 공감할 여성들은 물론 하늘의 반쪽을 제대로 모르고 살아가는 많은 남성들에게 함께 읽자고 권하고 싶다. 이 땅에 살아가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사방에 진주한 이 봄이 저마다 다른 빛깔의 상처와 갈망이 세상을 향해 마침내 터뜨리는 오랜 시간의 발화임을 깨닫게 한다. 다시, 봄이다.
두 소녀가 눈에 밟혀 며칠을 울었어요.영화 〈눈길〉을 본 한 심리상담사는 가정파탄으로 오갈 데 없는 자기 내담자도 함께 떠올렸다고 했다. 영화는 순백의 설원에 기세등등하게 서 있는 매끈하고 잘 생긴 자작나무들을 여러 번 보여준다. 그 숲을 일본군 위안부 소녀 둘이 몸을 잔뜩 움츠린 채 걸어간다. 자세히 보니 자작나무는 몸 곳곳에 시꺼먼 흠집이 나 있다.사람은 실감으로 세상을 살아많은 세월이 흐른다. 영화는 홀로 당차게 사는 할머니 종분을 비춘다. 종분은 위안부 갈 때 납치를 당했기에 공적 기록이 없다. 자작나무 숲을 같이 걸어가던 친구 영애 이름으로 살고 있다. 연립주택 옆집에는 홀로 사는 여고생 은수가 있다. 정학당하고, 집세도 공과금도 못 내서 곧 거리로 나앉아야 할 처지에 놓인 절박한 아이다. 늦은 밤, 종분은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는 은수에게 처음으로 자기의 지난 세월을 이야기한다. 지옥보다 무서운 나날을 영애와 둘이 의지하며 버텼다고, 기진맥진한 몸을 끌 듯하며 집으로 돌아왔다고 말한다. 할머니는 그 부대에서 홀로 살아남았다.영화가 일본 감독 가와세 나오미의 세계를 닮았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이혼하고 대고모 밑에서 자란 감독은 외톨이로 세상을 떠돌았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영화는 항상 우울하고 죽음에 대하여 지순(至順)하다. 질문을 던진다.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이죠? 실감(實感)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이는 무엇인가에 닿았을 때 전달되는 에너지, 그 느낌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상대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감독은 또 문을 강조한다. 영화 〈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의 원제는 두 번째 문인데, 이는 세상을 여는 장치를 뜻한다. 그러니까 삶이란 소중한 사람과의 애착, 연대 그리고 또 다른 문을 여는 일이라 말할 수 있다.일본군의 만행, 위안부 참상 등을 다룬 영화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생명력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는 그러니까 당신도 살아.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 번도 자신의 아픔을 들춘 적 없는 종분은 앞길이 구만리 같은 은수가 실감을 느끼게 하려고, 다른 문을 열게 하려고 자기를 버렸다. 은수에게 전달된 할머니의 에너지는 구원으로 전환된다. 이제 할머니는 세상을 향해 자기가 먼 길 다녀왔다는 고백을 해야 한다. 자기 주민등록 만들고, 다른 문을 열어야 한다.고통을 내보내는 방법 터득해야지구에는 명칭과 방법을 달리하는 심리치료법이 400여 개 있다고 한다. 세상의 발전과 궤를 같이하여 다양하고 복잡한 문제들이 인간의 심리 정서적인 문제와 연관되어 나타나고 있기에,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다양한 치료법들이 비례적으로 증가하는 것 같다. 살면서 고통이 들어오는데, 내보내는 방법을 터득해야 할 것 아니겠는가. 영화치료도 여러 방법의 하나이다. 각종 영상매체를 심리상담심리치료교육에 활용하는 것을 말하는데, 심리적생리적 채널을 통해 전달되는 효과가 커서 날로 이용자가 느는 추세다.오늘 영화를 통해 극한상황을 이겨내는 두 인물을 모델링 했다. 영화 보는 동안 경험한 수용성은 고통과 두려움에 대하여 내적 전환을 도와준다. 그 험한 시간 나를 지탱한 힘은 나를 속이는 데서 나왔다.라고 말하는 종분을 보면서 나는 어떤 방법으로 다른 문을 열지 생각하게 된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으로 시작하는 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과 박태원의 「천변 풍경」이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선정되었다. 70년대 영화 〈바보들의 행진〉과 〈별들의 고향〉까지. 미래유산이란 우리가 지금 보고 사용하던 것을 후대에 남기고 싶은 가치를 말함이리라. 고궁이나 종묘 같이 거창한 공간 말고 장충동의 체육관과 족발골목 그리고 문학작품까지 포함시키는 작업이 진행 중인 것.완주~익산~김제~군산으로 이어져전주가 쉬고 있을 리 없다. 한옥마을 말고도 서학동 예술인마을이 미래유산으로 지정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도 깨끼나 두루마기 한복을 만들고 과거 미군 군복을 줄여 검은 물을 들인 스모루바지와 양키시장에서 흘러온 청바지를 수선하던 풍남문주변 청바지골목이나 김남주 시인과 신영복 선생의 청춘을 가둔 전주교도소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좁은 골목과 하얀 페인트의 큰집 역시 백성들의 삶의 애환이 깃들어 있음에 보존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이리라.완주 익산 김제 군산을 아우르는 미래유산이 있다. 이름하여 대간선수로다. 한 때 나이아가라 폭포라 불리며 유원지였던 대아댐에서 흘러내린 물이 고산면 어우보 취수구에서 갈라져 해지는 옥구저수지가 그 종착점이니 장장 80킬로미터에 이르는 수로가 그것.5년 뒤면 만들어진지 100년이 되는 엄청난 사이즈의 이 인공수로는 현재도 농업용수와 음용수 그리고 공업용수로 사용되고 있다. 시멘트 콘트리트로 노출되어 있는데 삼례 독주항처럼 넓은 곳은 폭이 20미터, 목천포를 기역자로 돌아 전군도로와 나란히 달리는 8미터 정도의 좁은 물길은 보는 이 없이 무심히 흘러간다.걸어보자. 밥을 벌어다 주던 물길에 이야기가 있으니. 거북이 등이 된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밤을 세워 물꼬를 트고 큰물에 배수를 하며 쌀농사를 짓던 백성들의 보릿고개 눈물이 있으니 말이다.강점기 시절, 대아댐 건설과 만경강직강공사 또 이 인공수로의 건설은 당시 최대의 SOC사업이었다. 중장비도 없이 맨몸으로 건설에 몸 바친 현장노동자들의 사진과 자료는 농어촌공사가 잘 보존하고 있다.대간선수로의 물은 근대 수리시설이나 도작문화의 역사에 그치는 게 아니다. 삼례를 지나 신흥정수장으로 흘러들어가는 물만도 하루 7만 톤에 이른다. 기나긴 수로를 타고 각 가정의 수도꼭지에 배달되는 물로 익산시민들은 커피물을 끓이고 밥을 짓는데 사용한다. 오늘 저녁에도 말이다.오래된 것에는 유지 보수비용이 많이 든다. 완주공단과 수로 주위 논에서의 농약 오염 등 관리와 감독에도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 곳 상류지점의 물을 파이프로 가두는 논의가 있는 것으로 안다. 결론은 아니다. 청계천도 오픈했고 노송천도 복개를 걷으려는 계획이 있는데, 그 물길 덮으면 안 된다. 작가들은 이 물길의 시절을 작품으로 남기고 감독은 다큐멘터리로 기록해야 한다.'쌀의 고장' 문화정체성 바탕대간선수로를 전북의 미래유산으로 선정하고 보존해야 하는 이유는 이 동네가 쌀의 고장이라는 문화정체성을 바탕으로 한다. 정체성 같이 거룩한 입장 말고 그 눈동자 그 입술로 지켜보던 전북사람들이 만든 영화 〈피아골〉이나 〈선화공주〉, 센베이의 풍년제과, 결혼예물을 준비하던 국수 이창호가 살던 시계점 또 풍남문 타종소리까지 당연히 미래유산이다.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지 않던가 말이다.
며칠 전 일본 하네다 공항 출국장에서 잠시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점심도 먹어야 했고, 오랜 만에 귀국 선물도 살 겸 상점가를 둘러보았다. 에도시대 풍으로 외관을 꾸민 점포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우연히 눈에 띄는 물건이 있었는데, 바로 화지로 만든 목욕용 타올이었다. 아이디어 상품으로 상까지 받았다는 선전과 함께 진열대 위에 소복이 싸여 있었다. 목욕용 타올로는 비싼 편이었지만, 만원이 안 되다 보니 여행선물로는 괜찮은 가격이었다. 전통 기술·현대 문화 접목해 만든 상품홍보영상물까지 돌아가고 있어서 한참을 그 제품 앞에 서 있었다. ‘이 타올이 진짜 종이로 만든 것 맞을까요?’라는 그리 낯설지 않은 멘트를 들으면서, 그래도 이 제품은 무언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지로 만든 양말이나 넥타이 보다는 훨씬 실용가치가 크다는 점이 먼저 떠올랐다. 목욕할 때 사용하는 타올이므로 까칠까칠한 질감이 좋을 것이고 몸에 직접 닿는 것이니 화학섬유보다는 천연 제품이 좋을 것이다. 그래서 소비자들의 구매 욕구를 충족시키는 상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이래서 색다르게 느껴진 것이로구나. 현대인들의 생활문화를 꿰뚫어 보면서 전통 종이 제조기술의 우수성까지를 팔고 있었던 것이다. 전주시가 한지를 보전·전승시키려는 노력을 떠 올리면서 한참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최근에는 한지장의 신규 지정, 흑석골 한지생산단지 조성사업, 한지 임용장·표창장 사용 정책 등을 발표했다. 그런가하면 한지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으로 올리고자하는 계획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선조들이 만들어 왔던 물건들을 현대에서 쓰임새 있게 하려면 문화에 대한 통찰력을 요구한다. 전통과 현대문화 모두를 깊이 이해해야만 전통 기술의 전승자나 소비자에게 다가설 수 있다. 화지 목욕 타올은 비록 하찮은 생활용품이지만, 전통 기술과 현대의 문화가 마주해서 만든 상품이다. 목욕이 생활화되었고, 천연제품에 대한 요구가 높은 현대의 소비자들의 생활문화를 꼭 집어 낸 것이다. 그러나 한지섬유로 만든 상품들은 전통이든 현대든 문화를 접어 둔 채 개발된 경우가 많다. 전통 기술을 이용해서 현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전승과 산업화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면 여러 영역이 모여서 머리를 맞대야만 한다. 제조기술에 대한 연구에서부터, 종이 문화에 대한 면밀한 검토, 그리고 상품화 전략에 대한 초감각적인 아이디어 등이 통합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어느 한 부분만 특화시켜 개발하기 보다는, 융합의 전략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장인들 따로, 연구자 따로, 상품기획자 따로, 이처럼 따로 따로 개발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예산만 무한히 낭비한 채 곧장 어느 기관의 보관창고 속으로 들어가고 만다. 작은 생활용품에 스며있는 전통문화전통기술과 현대의 문화를 융합해서 세계적인 상품으로 만든 경우가 적지 않다. 독일의 헹켈사가 만든 칼은 대장장이 마을이 그 원조이다. 스위스의 시계도 디지털시계의 출현으로 고전하는 줄 알았더니 여전히 최고의 수공업 시계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바틱제품들 역시도 전통기술과 현대문화를 접목시켜서 세계시장으로 진출한 케이스이다. 공항 안 한 점포에서 우연히 마주친 목욕용 타올 때문에 하마터면 비행기를 놓칠 뻔 했다. 하지만, 작은 생활 용품 속에 전통문화가 살아서 숨 쉬고 있는 것을 보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좋았다.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 나는 서점으로 달려가 책에게서 위로를 받았다.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을 때, 내 안에 남겨진 무언가를 보물찾기 하듯 책을 뒤적거렸다. 사랑에 깊이 빠졌을 때에는 책 안에서 사랑의 지도를 더듬었으며 목숨을 던지고 싶은 절망의 순간에도 책을 읽으며 희망의 날갯짓을 찾았다. (윤소희 서점을 헤매다)헤어나오고 싶지 않은 '읽기' 중독세상의 여러 중독 중에서 헤어 나오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면 아마도 사랑과 책일 것이다. 읽을 때마다 낯선 세계가 시작되어 한없는 환상 속으로 우리를 이끈다는 점에서 그것은 같은 마법을 지녔다. 맺었다 풀기가 쉽지 않고 배타적 독점의 특성이 강한 사랑과 달리 책은 어느 페이지에서 멈추든 너그럽게 우리를 보내준다. 읽는 자에 따라 한없이 깊은 우물이었다가 가볍게 건너 뛸 수 있는 개울이 되기도 한다. 사랑의 목록은 함부로 전시할 수도 없고 목록만으로는 전모를 짐작하기 어려우나 누군가의 책장을 일별하는 것만으로도 그가 어떤 존재이며 무엇에 매혹되는가를 알아차릴 수 있다. 그래서 다른 이의 서가를 훔쳐보는 짜릿함은 매우 독특한 관음이라 생각한다. 책의 가장 위험한 중독성은 아직 읽지 않은 책에 있다. 언젠가, 하고 염두에 두었으나 미처 읽지 못했던 책을, 그 실물의 무게와 표지를 만지며 감각하고, 빠르게 몇 문장을 읽어내려갈 때의 아찔함이란 아직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 애인을 갈망할 때와 닮았다.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와 나와 사이에 놓인 시공을 압축하고 들이밀며, 때로 돌아서고, 등을 졌으나 뒷모습으로 온통 그를 바라보고, 그가 나에게 가하는 기습적인 폭력에 덜덜 떨다가 후드득 온몸을 적시는 쾌감에 진저리를 치게 되는 것이다. 나를 향해 포획의 그물을 던지는 매혹의 문장들을 예감하고 미리 전율하는 것에 그 중독성의 핵심이 있다.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라는 프란츠 카프카의 말은 읽는 자의 전 존재를 흔드는 한 권의 책에 대한 서늘한 비유다. 그런 흔들림을 자청하지 않는 자, 책을 읽지 않은 자의 세계란 얼마나 지루한 얼음의 세계랴.책을 읽으며 한 문장이 거듭 새롭게 밀려오는 경이를 발견하는 쾌락의 맞은 페이지에 자신이 직접 글을 쓸 때의 희열이 자리한다. 나의 시간과 환상을 빚어낸 책을 손에 쥐는 순간, 나는 전혀 다른 존재로 비상한다. 산다는 일이 이처럼 읽고, 쓰는 것이 끝없이 자리를 바꾸며 무수한 파문을 이어가는 꿈과 쾌락의 연속임을 실감할 때 우리는 내 하나의 일생이라는 유한성을 넘어 수많은 타인들의 시간 속에서 공존하고 영생하는 것이리라. 읽고 읽히며 전승되는 이 불멸이야말로 책이 건네는 쾌락 중에 최상일 것이다.자신이 직접 글을 쓸 때의 희열간혹 작가는 삶이 어둡고 불행하기 때문에 글을 쓴다고, 글을 쓰면서 간신히 현실의 불행을 이겨내며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 작가가 글을 쓸 때의 희열이 대체불가능한 종류이며 / 글에 관한 생각만으로도 뇌 속에서 희열의 호르몬이 솟구친다는 것을 / 그러므로 호흡의 매 순간마다 글이 작가의 존재와 더욱더 얽히고 / 잠 속에서도 무의식 속에서도 찰랑거리며 /호수처럼 무수한 겹의 파문으로 번져가고 영원한 거울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 그리하여 생이 많아진다는 것을 / 생의 순간이, 작가의 자아가 무수하게 중첩되고 증폭된다는 것을 / 그러므로 작가는, 가장 솔직한 의미에서, 쾌락의 한가운데서 살아간다는 것을 /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배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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