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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예술

평소에 자주 접하지 못했던 귀한분들에게서 요즘 연락이 종종 온다. 예술계 앞날에서부터 전라북도,시, 군, 읍, 면 등 구석구석까지 걱정을 많이 하신다. 전북 도민의 존재가 새삼 느껴진다. 여하튼, 우리동네 사랑을 향한 일이니 퍽 고마운 일이다. 전국이 정치의 계절로 다가오면서 지역곳곳에서 여러가지 형태로 요동을 친다. 바야흐로 군웅할거시대가 도래했나보다. 이시기에 본인 또한 어전판에 꼴뚜기 되어서 전북사랑行버스에 편승해본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전북의 풍경을 예술인의 눈으로 음각, 양각에 찍어 현상해보니, 첫 컷에 국보11호 익산미륵사지와 왕궁리유적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걸린 팻말이 찍혔고, 두번째 컷에서는 2017년 세계태권도 선수권 대회 개최지 선정이라는 커다란 현수막이 무주 적상산 봉우리에 펄럭인다. 귀에 들리는 소리로는, 농생명 탄소중심 연구개발 특구로 확정됐다고 한다.낮아진 전북 위상 되찾으려면그간 LH공사, 프로구단 유치 좌절로 기력 저하된 도민들에게 보양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렇게 훌륭한 작품이 이뤄진 과정에서는 전라북도지사를 비롯한 관계자들의 각고정려한 노력의 결실이라고 여긴다. 전주 경원동 한쪽에서는 노련한 연출자에 의한 작품제작설명회가 전개된다. 제목이 보인다. 전주도시학연구회. 올해 5월 12일 발족해 7월말에 본 작품제작을 위한 법인등기를 마친후, 공식출범한다. 전주도시학연구회 설립취지를 요약하면, 전주는 전라남북도와 제주도까지 관할했고, 문화적 전통과 고유한 역사가 이뤄진 지역이다.하지만 근자에 들어서 타지역에 밀려, 전북도민의 자긍심과 전주의 위상이 낮아지고 있다고 판단, 그래서 옛전북의 문화적 경제적 위상을 되찾기위해서는, 전북을 사랑하는 역량있는 전문가들이 힘을 모아서, 여러 가지 창의적인 일을 도모해 실행에 옮기는 역할을 하자는데 설립목적을 두었다. 참여자들이 모였다. 지역에 경험많은 전문가들을 비롯해, 신진 연구자들로서, 학계, 문화계, 정치계, 경제계 등 다수의 인물들이 뜻을 같이했다. 전북미래를 위한 바람직한 단체의 출발이다. 우리가 살아왔던 전북은 어느무엇하나 뒤질게 없는 복받은 땅이다. 천혜의 자연, 넉넉한 인심, 탁월한 창의력을 두루 갖춘곳이다.그래서 여태껏 양보와 배려를 미덕으로, 삶의 여유를 격조있는 품위로 지켜가면서 살았다. 그런데 이런 모양새가 지금에 와서는 걱정이 쌓여간다.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각 분야의 그래프가 타지역과 비교되면서 갸우뚱 거렸던 도민들의 고개가 처져만간다. 이래서는 안될 일이다. 그래서 옛명성을 되찾기위해서는 순서적으로 해결해 나아갈 일이 있다. 서두에 언급했던 앞으로 닥칠 정치분야 문제다. 우리지역 정치는 어디까지 와있나 되짚어볼 일이다.정치를 예술처럼 할 사람 뽑아야삼국시대 귀족정치에서부터 현 박근혜정부까지 전북정치권은 어느 때, 어디에서 무엇이 되어서 어떤 일을하며 여기까지 왔는가를, 현 도민의 삶에 대입해보자. 전북예술문화를 지극히 사랑하는 원로께서 가끔 하시는 말씀이 떠오른다. 프랑스는 축구를 잘해서 예술축구, 고사동 함흥냉면집은 맛있어서 예술냉면, 사교댄스 선수 쿠웨이트 박은 일용엄마에게 예술한판 하러가세. 그렇듯 각분야에서 고지를 넘나드는 달인들에게 예술이라는 꼬리표를 달아준다네라고, 다가오는 2016년 4월 총선무대에서는 꼭! 정치9단을 뛰어넘는 예술정치, 정치예술을 할 수 있는 인물을 선택하자. 전라감영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날을 그리며.△선기현 회장은 전북미술대전 초대작가이며 풍남문화법인 이사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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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7.21 23:02

자본주의 시대, 예술가의 도전과 응전

요 근래 음악관련 심사와 예산을 배정하는 일, 축제 전체 예산을 편성하고 출연료를 정하는 일들을 하며 느끼는 것은 기획자, 음악가들이 음악을 이야기하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화의 80퍼센트 이상은 돈에 관한 이야기다.축제 준비 때음악 보다 돈만 얘기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는 자본주의는 적극적인 자유를 증대시켜 능동적이고 비판적인 책임을 질 수 있는 자아를 성장시키는데 막대한 공헌을 했다고 말한다. 이처럼 자본주의 시대는 스스로가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얻을 수 있는 시대다. 과거 어느 시절에도 음악가는 돈을 움켜쥐고 예술 행위를 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이 시대를 돌파하기 위해 예술가가 준비해야하는 것은 무엇일까.전통음악은 전통이 지닌 수많은 패러다임들로부터 발목을 잡혀 발전하려하지 않았다. 곳곳에서 애를 쓰고 있지만 이 시대의 판을 바꿀만한 혁신적인 무언가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비슷비슷한, 누구와 같은 것들만 난무하는 가운데 방향을 잡지 못했다.판소리를 이야기할 때 나는 동편제의 송홍록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송홍록의 동편제, 박유전의 서편제, 염계달의 중고제 또는 동초 김연수 바디라고 표현한다. 산조에서도 정남희, 최옥삼, 강태홍, 김병호, 김주파, 김윤덕 외에 많은 선조들이 자기만의 류를 개척했다.쿠바의 전통 룸바리듬은 1940년대 뉴욕의 영향과 많은 여타 장르와 만나 맘보와 차차차라는 새로운 장르로 탄생했다. 미국의 재즈는 통상적으로 루이 암스트롱부터라고 이야기하지만 수많은 개성시대, 명인시대를 거치며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는 퓨전 재즈 창시했다. 일본은 노와 가부끼라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지만 2차 대전 후 히지기타 아쓰미, 오노 가즈오에 의해 부또라는 새로운 예술장르를 탄생시켰다. 300년간 지속된 유럽의 평균율 음악은 베토벤, 모차르트의 소나타 형식이 너무나도 완벽해 인류의 음악이 150년 동안 발달해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작곡가들이 애를 쓴 결과 쉔베르크는 12음 기법을 탄생시켜 평균율의 음계를 깨뜨렸다. 한국에서는 1978년 남사당의 후예들-김용배, 이광수, 김덕수, 최종실 이 네 젊은이들이 풍물을 넘어 사물놀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었다.예술은 늘 고통 속에서, 전통의 장르를 뛰어넘어 또 다른 장르를 개척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음악 행위란 창작 행위다. 한나라와 민족의 음악이 끊임없이 발전하고 유지, 보존되는 것은, 그 시대에 피 끓는 노력을 했던 선조들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그 힘을 이어받아 더 큰 짐을 지고 선조들보다 더 큰 노력을 해야 한다. 주저하지 마라. 스스로의 음악이 전통인가 민속인가 국악인 것인가는 염두에 두지 마라. 새로운 창작의 음악들, 그것은 원근법의 문제다. 시간과 작품이 스스로 증명해 낼 것이다. 누구도 당신의 음악에 대해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창작 위해 조금 더 애쓰기를현 시대 다수의 예술가들은 봉건주의를 타파한 자본주의 시대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지만, 여전히 예술가들이 봉건적인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문해본다. 현 시대를 살고 있는 예술가들에게 우리 선조들처럼 자신만의 제와 류를 만들겠다는 정도의 각오로 임해 달라는 부탁이다. 이것이 선조들에 대한 보답이자 경제적인 어려움을 뛰어넘을 수 있는 오직 단 한 가지 방법일 것이다. 조금 더 노력하고 조금 더 애쓰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 축제에서도 여러분들의 새로운 음악을 기다리며 더 창의적인, 더 농도 깊은 연주를 기다리고 있겠다. 이 시대를 같이 넘자.△박재천 위원장은 중앙대 작곡과를 졸업했고 한국장단 드럼 연주법을 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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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7.14 23:02

우리네 아파트 문화,그 단절의 시대

중국 조선족 마을에서는 거의가 동포끼리 ‘잘 모여서,술 마시고,노래하고,춤 추고, 마지막에는 꼭 싸우고 끝내더라’고 어느 중국인이 자기 글에 올린 내용을 읽은 일이 있다. ‘자주 모이고 잘 논다’는 점은 러시아 거주 동포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란다.이런 점은 우리 민족성의 일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민족이 유구한 세월 동안 거대 민족들 사이에 끼어 살아 오면서도 민족 정체성을 잃지 않고 의연하게 우리만의 문화를 향유한 점은 저러한 경우에서 그 연유를 찾을 수 있을 거란 생각도 든다.타국에 살면서도 그 환경에 동화되지 않고 우리 언어도 잃지 않음은 퍽 자랑스러운 일이다. 우리가 오늘날 연출해 내는 아이돌 열풍도 우리 민족의 신나게 ‘잘 논다’는 특성에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도 미친다.그런데 문제는 싸움 잘하는 민족이라는 오명이다.좋게 보면, 만사에 제대로 시비를 얹는 이성적 정신이라고 평할 수 있겠다.인간적 교류 막막…험악한 쟁투도그런데 잘 모이는 것은 밝은 사회를 지향하는 데에 공동선을 펴는 시발점이기도 하여 퍽 바람직한 일이다. 그렇게 잘 모이는 것은 환경적 요인으로서 마을 형성의 구조에 따른 점일 것이란 설명에 닿는다. 마을 사람들이 귀가하는 시간 골목길에서 몇이 만나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하루의 일모(日暮)를 맞는 것은 벌써 인간성 교감의 초반이요,그리하여 낭만풍의 분위기가 퍼뜩 서린다. 서로 만나서 인사하고 덕담 주고 받다 보면 ‘모이자’가 가능해지고 드디어 인정어린 공동체 사회가 이룩되는 것이다. 수평적 동네 구조는 산천 굽이치는 대로 오손도손 등을 대며 이웃하는 마을 형성에 말미암은 것이리라.그러나 도시권 아파트 문화는 그 발상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주민들이 제각각 생활 전선으로 방향도 달리, 출발 시점도 다르게, 흩어졌다가 저녁에 돌아와, 한 둘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등 지고 만나는 게 고작이다. 겨우 목례 끄덕하는 일이 전부이고, 담소 한 마디 나누지 못한 채 총총히 자기 문전으로 사라진다. 단절이 날마다 반복되고 드디어 그 꼴이 당연시되는 모습이다. 아니, 인간적 교류가 막막한 터에 무슨 층간 소음으로 험악한 쟁투가 벌어진다. 삭막하다 못해 공포의 본위기도 가끔은 형성된다.층간 서로들 애경사가 일어도 그리고 그 일이 소멸되어도 이웃은 까마득히 모른다.홀로 사는 위층 노인네 임종의 시기에도 전혀 모르며 그리고 그 시신이 며칠을 경과해도 전혀 모르고 그 험악한 공기를 무심코 마시며 사는 것이다. 그야말로 인간 비정의 지옥이 따로 없는 것이다. 마치 대나무 마디마디 칸칸의 어둠을 쌓아 올려, 머리는 하늘에 두었으되, 수직의 곳곳에 단절을 포개고 있음과 비슷한 우리네 아파트 문화의 모습에 갑갑할 뿐이다. 인간 사회 도처가 소외요, 냉소요,갈등 들이 마치 질병의 바이러스처럼 한국 사회를 범람한다.어찌할꼬? 이웃과는 반목하면서 무슨 윤리 도덕이며, 무슨 지역 감정 타파인가? 신문 다른 것 읽으면 벌써 인종(?)이 유별해지고,종교가 다르면 배타요, 형제는 유산 때문에 멱살잡이한다.유구한 민족성 한 올씩 엮어내야아니다, 절대로 그럴 수는 없다. 전라도 인심도 다시 빚어내고 한 바탕이든 두 바탕이든 모여서 작신작신 놀자. 부침개도 이웃에 서로 돌리고, 반상회라도 가끔 열자. 토요일 일요일 두 번씩이나 쉬면서 이웃 챙기기는 개떡같아서야 말이 되겠는가? 고운 빛깔 노을이 우리네 일상의 발치에 놓일 때에는 형이야 아우야 하면서 우리네 유구한 민족성을 아름답게 한 올씩 엮어 내 보자. 우리답게 그리고 빛나게 인간성 누리는 그런 문화에 골똘해 보자. 이제부터라도 진실로….△ 소재호 관장은 ‘현대시학’으로 등단, 전주완산고 교장과 전북문협 회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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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7.07 23:02

'스승'과 '선생'을 찾아서

“나보다 먼저 나서 그 도(道)를 듣기를 진실로 나보다 먼저라면, 내 이를 스승으로 좇을 것이다. 나보다 뒤에 나서 그 도(道)를 듣기를 나보다 앞이라면, 내 이를 스승으로 좇을 것이다. 나는 도(道)를 스승으로 하는 것이다.”-韓愈의 師說에서-형식적 호칭으로만 남용되는 선생스승의 날도 아닌데, 왠 뜬금없는 스승 얘기이인가 하며 의아해 하는 이들도 적잖게 있을 것이다. 선생과 스승의 의미는 우리 사회에 아주 중요하고 값어치 있는 커다란 자리임에 틀림없으나 시대가 변하고 세상의 가치관이 달라지면서 스승과 선생의 의미는 그저 형식적인 용어로 남용되고 있는 현실이다. 무슨 자리나 만남에 있어 서로가 조금 불편하고 어색한 경우나 뭐라 부르기 애매할 때, 여지없이 서로가 선생이라는 말이 쓰는 모습은 흔하게 볼 수 있고, 심지어 어떤 연장자는 자기보다 손아래 사람에게 왜 자신을 선생으로 부르지 않느냐며 나무라는 모습을 간혹 보기도 하는데 이 또한 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선생(先生)’이란 학문적으로나 덕망이 높은 사람, 혹은 사회적으로 존경받을 만한 위치의 사람, 학예가 뛰어난 사람, 각 관청과 관아(官衙)의 전임자를 가리키던 일종의 존칭 또는 경칭으로 고대사회부터 근대사회의 호칭이었다. 그리고 선생이라는 단어는 보통 연장자에게 쓰였으나, 자신보다 어린 사람이더라도 학덕이 높은 사람에게는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않고 선생이라 불렀다. 또한 중국과 한국에서는 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된다 하여 호(號)와 시호를 사용했다 하는데, 이는 그만큼 그 가치를 소중히 생각했기 때문이었으리라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해마다 큰 사건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그와 함께 쏟아내는 말들은 사건에 대처하는 이들의 행동과 방안들을 보면서 깊은 한숨과 답답함이 묻어난 불만을 토해내고 있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아직도 제대로 된 그 무엇 하나 속 시원하게 내놓지 못하는 현실이 더 없이 안타깝기만 하다. 그들도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데, 그들을 가르쳤던 선생이나 스승은 분명 그렇게 가르치지는 않았을 것인데 왜 이런 상황은 계속되는 것인지. 그러면서 입맛에 맞으면 삼키고 그렇지 않으면 무조건 뱉어 내는 이런 현상이 하나의 사회 규범이 되어 가는 건 아닌지 하는 불안한 생각마저 든다.이는 문화계 또한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다. 정치판만큼이나 문화계도 많은 라인들이 있어 그 속에서 여러 갈등들이 난무하기도 한다. 지난 글에서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라는 표현을 했듯이 참 많은 선무당들이 ‘선생’이라는 호칭을 남발하고 또 누구를 평가하고 논하기까지 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보기도 하는데, 누가 뭐라 하기 전에 본인 스스로가 냉정한 평가를 해 봐 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것은 글을 쓰는 나 자신에게도 해당 되는 부분이다. 사람이 완벽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선생이라 불리고 또, 듣기를 원한다면 분명 시간을 가지고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존경(존중)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밑에서 우러러 나올 때 가치가 있는 법이다.덕망·학식 갖춘 인물 존칭해야우리 사회의 선생관은 오랜 전통 속에서 형성, 변천되어왔다. 전통 사회의 선생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학문의 전수 과정에서 형성되는 제도적인 측면과, 덕망·학식을 갖추어 한 시대의 사표가 될 만한 인물을 존칭하는 사회문화적인 측면 등이 그것이다. 요즘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선생의 참모습은 후자의 경우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런 이들이 냉대와 조소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인재들을 길러낸 덕분에 그나마 사회가 발전되어 왔음은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속담에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란 말이 있다. 하지만 언젠가 부터 ‘콩 심은데 콩 안 나고, 팥 심은데 팥 안 난다.’란 말로 쓴 웃음을 짓기도 했는데 그럼 무엇이 문제일까? 심은 콩과 팥이 문제일까? 아니면 새로 싹을 틔운 콩과 팥이 문제일까? 무엇이 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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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6.30 23:02

후백제사를 다시 쓰자

최근 전주 오목대에서 후백제의 도성 흔적이 확인됐다. 오목대의 정상부 가까이에 둘러쳐진 토축물이 폐기된 기와와 흙, 돌을 중첩해 쌓은 통일신라 말부터 고려 초까지의 성벽으로 밝혀진 것이다. 그리고 출토된 도자기와 기와 등의 유물로 판단하건대 후백제 시기에 집중적으로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됐다.오목대서 후백제 도성 흔적 확인원래 고대의 도성은 복잡한 다중시스템으로 구성돼 있었다. 평지에다가 궁궐과 주요 관청이 있는 궁성, 그리고 그것을 보호하는 내성, 다시 궁성과 내성을 보호하는 외성 혹은 나성을 쌓았다. 내외성의 여러 곳에는 관청과 사찰, 백성과 귀족들의 거주지와 시장과 같은 시설을 두었다. 한편 주변의 높은 산에는 튼튼한 성을 쌓아서 전쟁과 같은 긴급사태에 대비했다. 고구려의 안학궁과 대성산성, 신라의 월성과 그 주변의 산성, 백제의 사비도성과 그 주변의 산성, 태봉 혹은 후고구려의 궁예도성과 그 주변의 수많은 산성 등이 그러한 사례이다.이러한 고대의 도성체계를 토대로 오목대의 발굴조사 내용을 후백제의 도성과 관련해 검토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지금의 문화촌과 제일고등학교 근처에 궁성이 있었고, 다시 전주동초등학교-해오름아파트-교동아파트-전주시청을 연결하는 성으로 궁성을 보호하는 내성이 있었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반대산과 오목대 일대에는 일종의 요새로서 조그만 성이 추가로 축조돼 있었는데, 평지에 있는 궁성과 내성으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담당하던 성이었다.이상의 성들은 모두 흙과 돌, 폐기된 기와를 혼합해 쌓았다는 점에서 서로 공통점이 있고, 후백제 이외 다른 나라의 도성과는 관문 역할을 하는 성이 평지에 별도로 있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 외에 전주시를 둘러싸고 있는 산 곳곳에 유사시를 대비한 본격적인 석축 산성을 추가로 쌓아서 운영했는데, 동고산성과 남고산성, 서고산성이 그러한 사례이다.이렇게 오목대의 성벽은 다중의 도성체계 하에서 후백제의 궁성 및 내성으로 통하는 관문성으로 구체적인 증거와 함께 확인되면서 궁성과 내성에 보다 쉽게, 그리고 구조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해 주었다.특히 전주시의 급속한 도시화 때문에 후백제 도성에 대한 이해가 오랫동안 승암산의 동고산성에만 머물러 있었는데, 비로소 산지와 평지를 결합한 새로운 접근도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다.아마도 지금부터는 오목대 성벽을 시작으로 도성에 대한 추가조사와 학술적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될 것 같다. 또한 학사(學史)적으로도 전반적인 후백제 연구에 탄력이 붙을 것으로 예상되며, 더 나아가 신라와 후고구려를 포함하는 후삼국 연구의 진전으로도 이어질 것 같다.한편 눈을 돌려 전주시의 입장에서는 고고학적 물증을 토대로 한 고대국가의 왕도로 한 단계 격상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게 됐다. 아울러 전라북도의 관점에서 본다면, 역사성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면서 최초로 한반도의 역사에서 전라북도가 주인공이었던 시간을 되찾는 셈이 됐다. 자연스럽게 패배적인 역사관에서 벗어나 전북 도민이 자긍심을 되찾게 될 수 있게 됐다.추가 조사학술적 논의 본격화 기대결국 오목대 성벽 발굴을 통해서 후백제사를 다시 쓸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문헌에만 머물러 있다가 고고학적인 조사를 통해서 화려하게 되살려낸 가야사를 참고한다면, 지금야말로 모두가 힘을 합쳐 후백제사를 다시 써나가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전라북도를 비롯한 전주시, 전북 도내 발굴조사기관과 연구기관의 적극적인 동참을 기대해본다. 또한 전북 도내의 언론인 및 정치인도 후백제를 되살리는데 적극 협력해주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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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6.23 23:02

묻힌 전북의 인물을 발굴하자

우리에게 소설 속 주인공으로 친숙한 심청, 홍길동, 콩쥐팥쥐의 연고권을 놓고 지역 간에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고전소설 속에 나오던 상상 속 인물들이 세상 밖으로 나와 부활했던 것이다. 심청이가 물에 빠진 인당수의 위치와 심청이의 출생지를 두고 곡성군과 옹진군에서, 조선의 3대 의적 홍길동은 장성군과 강릉시에서 연고권을 주장하며 한바탕 떠들썩했다. 우리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몇 해 전 고전에 나오는 콩쥐팥쥐의 태생지를 두고 완주군과 김제시가 갑론을박한 적이 있다. 전주 서문 밖 30리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을 두고 어느 지역이 맞는지 논쟁을 벌인 것이다.완주 출신 한국 불교계 거목 석전 스님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고전소설 속 주인공이 지역의 문화콘텐츠로 부각되면서 빚어진 논쟁이었다. 지역 간 연고권 주장은 소모적인 논쟁이라 치부할 수도 없다. 문화콘텐츠 발굴이 관광산업의 부흥으로 이어지는 현실에서 내 고장 인물 발굴은 치열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총성 없는 전쟁을 하는 지역의 문화콘텐츠 발굴은 어느 지역이 먼저 선점하느냐에 따라 대세가 결정 된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인물 발굴은 중요한 문화콘텐츠다.예향이라 불리는 전라북도는 전통문화가 잘 보존되어 있고 특히 시대를 앞선 선각자들이 많은 자랑스러운 고장이다. 뛰어난 정치인도 많지만 종교 사상가, 문화예술인들이 많이 배출됐다. 그러나 훌륭한 인물이지만 주목받지 못한 분들도 많아 지금부터라도 전북의 인물 찾기에 나설 때다. 그중에 한 분이 석전 박한영 스님이다. 석전 스님은 1870년 완주군 삼례읍 조사마을 출생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불교를 지켰던 한국불교계의 거목이다. 조선불교 교정(종정)을 두 번이나 역임한 당시 불교계의 일인자였으며 중앙불교전문학교(동국대학교 전신)의 교장을 지냈다. 당대의 석학인 육당 최남선, 위창 오세창, 춘원 이광수, 벽초 홍명희를 비롯하여 우리 고장 출신인 가람 이병기 선생과 신석정 시인, 미당 서정주 시인 등이 스님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1925년부터 육당 최남선이 석전 선생과 동행해 전주를 시작으로 전라도 일대를 답사하여 기록한 〈심춘순례〉에 그분의 행적이 잘 드러나 있다. 조선의 3대 천재라 불리던 육당이 석전을 모시고 쓴 답사기에는 천재도 알지 못하는 처처의 역사와 사상, 불교의 지식에 대해 자문을 구하는 행간이 곳곳에 엿보인다. 50일 동안 〈시대일보〉에 발표한 글을 모아 단행본으로 엮은 〈심춘순례〉의 서문에 육당은 “이 작은 글을 영호당 석전 대사께 드리나이다.”고 헌시를 쓴 걸 보면 얼마나 석전 스님에게 의지해 글을 썼는지 알 수 있다.우리 고장 곳곳에도 석전 스님의 흔적이 묻혀 있다. 완주 태조암에서 시작해 모악산 수왕사, 순창 구암사, 정읍 내장사 등 발길 닿는 곳에는 그분의 행적과 기록이 내려온다. 전북을 넘어 한국 사상계의 큰 획을 그었던 석전 스님은 일부 연구자들에 의해 조명되어왔을 뿐이다. 다행히 최근 석전을 조명하는 학술사업이 펼쳐지고 있고 스님의 일대기를 동국사 종걸 스님이 펴낸다고 하니 기쁜 일이다.학술연구 등 선양사업 미흡 아쉬워지자체마다 고장의 인물을 선양하는 사업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추세에 정작 불세출의 선각자인 석전 선생의 고향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것이 안타깝다. 어느 지역에 가면 생존한 인물의 생가도 잘 보존하고 있는데 석전 스님의 생가는 이정표조차 없으니 쓸쓸하기만 하다.훌륭한 인물의 발굴은 그분의 삶의 궤적과 업적을 후대가 본받아 살아가는 지표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전북의 인물을 찾고 발굴된 인물의 선양에 나설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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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6.16 23:02

무한경쟁으로 내몰리는 문화예술

2015년 봄이 물러나고 뜨거운 열정의 계절, 여름이 다가오면서 전라북도 곳곳에 축제와 상설공연이 가득하다. 전라북도를 방문하는 관광객들, 그리고 이 땅에서 발을 딛고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정말 행복한 고민거리라고 생각한다. 이렇듯 그 어떤 지자체보다 앞서가고 있는 전라북도 문화예술계에 응원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갈수록 줄어드는 중앙정부의 지원하지만 현실은 역시 냉혹하다 못해 불안하다. 서울도 마찬가지지만 지역에서 활동하는 문화예술인의 환경은 더욱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점 중앙정부는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을 갈수록 줄이려는 듯 보인다. 그 논리는 언제까지 정부가 지원을 해야 하는가?라는 것이다. 자체적으로 자생력과 경쟁력을 가지고 세계적인 문화산업으로 발돋움해야 한다고 한다. 심지어는 정부의 지원을 받아 어려운 상황에서도 문화적 복지증진과 예술생태계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는 예술단체를 마치 비리의 온상처럼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경우도 있다. 사실 현장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노력하는 예술인의 입장에서는 참담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정부의 말대로 지원금을 줄 수 없는 국가적 재정위기 상황이 언제 닥칠지 모르니 대비해야 하고, 세계적인 문화산업 주체들과 경쟁하려면 자생력과 경쟁력을 가져야 하는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그러나 경제적 어려움이 발생하면 정부 스스로 가장 먼저 예산을 줄였던 부분이 문화부분이고 자생력을 가질 만한 순수예술단체가 기반을 갖추기도 전에 지원을 줄이고 스스로 기반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세계 뮤지컬의 본고장 영국의 웨스트엔드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영국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바로 문화산업이라고 봤고, 스토리와 콘텐츠를 발굴하는데 노력하고 문화산업의 환경을 조성하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영국의 웨스트엔드 뮤지컬은 연간 4조원의 부가가치와 5만명 이상의 고용을 창출하는 거대 산업으로 발전했다.이와 다르게 마치 정부가 은혜를 베푸는 것처럼 지원을 했던 우리의 문화생태 환경에서, 그리고 문화의 보존과 계승, 삶의 질의 향상이라는 측면에서만 접근했던 우리의 문화정책의 추진에서 시장논리인 무한경쟁 주장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어쩌면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에서 무한경쟁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정부가 문화융성을 통해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조하는 창조경제를 이야기한다면 예술적 창조행위의 주체인 예술가와 재정적 기반이 있는 기업을 아우르는 새로운 지원정책을 수립하고 한국식 문화산업의 기반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에 따른 다양한 지원정책이 다시 만들어져야 한다. 현재 한류의 중심이 아이돌과 K-POP이라고 하여 이와 관련된 문화산업에만 집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것은 진정한 한류의 뿌리인 기초 예술을 더욱 어렵게 만들 수 있다. 그리고 문화예술단체 역시 그간의 관행적 운영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와 자생력을 갖추기 위한 노력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함은 당연할 것이다.새로운 콘텐츠 개발위한 정책 절실세계 4대 뮤지컬, 중국의 인상시리즈, 태양의 서커스 등과 같이 경쟁할 수 있는 한국만의 문화콘텐츠의 개발과 인력의 양성 등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예술정책과 문화예술분야의 지원이 확대되길 간절히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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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6.09 23:02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속담이 있다. 한자성어로는 생무살인(生巫殺人)이라고 하는데, 이 속담은 의술에 서투른 사람이 치료해준다고 하다가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다는 뜻인데, 능력이 없어서 제 구실을 못하면서 함부로 하다가 큰일을 저지르게 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영어에도 ‘A little knowledge is a dangerous thing.’ 라는 구절이 있고 또 중국, 일본, 베트남등 각각의 나라마다 이러한 뜻의 속담이나 말들이 있는데 이는 결국, 어떤 일에 솜씨나 기술이 능숙하지 못한 사람이 아는 체하여 일을 그르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뜻이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능숙하지 못한 사람이 일 그르쳐하지만 이런 비유적인 속담과 같은 일들이 현실 속에서 흔하지 않게 일어나고 있고 또 그 러한 현상이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 대다수의 사람들을 혼란스럽고 허탈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많은 국민들이 정치에 환멸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는 것은 어찌보면 ‘선무당’ 같은 정치인들이 많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네들은 분명 아니라고 강력히 반발 하겠지만 - 어디 정치뿐이겠는가? 경제나 사회문제 또한 자기들만의 생각과 논리로 인해 중소기업 살린다고 해 놓고 중소기업 죽이고, 서민 경제 활성화 시킨다 해 놓고선 오히려 서민들이 거리로 떠밀리는 일들이 발생하고 있지 않은가?문화예술계라고 별반 다르지도 않다. 그 단편적인 예가 얼마 전에 있었던 서울연극제에 관련된 부분인데, 지난해 11월 한국공연예술센터는 2015년 정기 대관 심사에서 서울연극제가 탈락했다고 서울연극협회에 통보했는데 이유는 ‘대관 신청 서류 미비’였다. 30년 넘게 아르코예술극장에서 연극제를 치르던 서울연극협회는 당황했다. 행사 특성상 참가작이 미리 정해질 수 없기 때문에 ‘공모와 심사’를 전제로 신청했는데 탈락했기 때문이다. -다른 연속 사업은 ‘공연작품 미정’으로 신청했지만 대관이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다른 곳도 아닌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한국공연예술센터가 일을 이렇게 만든 것에 더 허탈해 했다. 한국공연예술센터는 아르코예술극장·대학로예술극장 등을 운영하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한국공연예술센터를 지휘·감독하는 곳이다. 축제를 도와야 할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오히려 행사 진행을 차단하고 나서니 이것도 문화예술계의 ‘갑’질 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더불어 갑작스러운 공연장 장기 휴관으로 적지 않은 손해를 입은 서울연극제 집행위원회는 한국공연예술센터를 대상으로 감사원에 공익감사를 청구했다. 한국공연예술센터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서로 ‘지시를 받아서 진행했다’거나 ‘원만히 처리하라고 했다’며 책임을 떠넘 있다.우리 지역은 어떨까? 글쎄 별반 다른 변별성이 없지 않나 싶다. 지어진지 얼마 되지도 않은 공연장은 행사를 치르고 공연을 하면 할수록 문제점들이 돌출되고, 이곳저곳에서 다양한 행사들이 치러지고 또 치러질 예정에 있는데, 단체나 책임자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얼마나 돌이켜 보며 사는지 싶다. 과연 ‘난’ 뭘까? 그리고 ‘단체’는 또 뭘까? 단순히 그 분야에서 막연하게 세월의 끈만 잡고 있었다고 해서 역사성이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무엇을, 어디서, 얼마만큼, 어떻게 해 왔고 또 하고 있는지…. 특히, 리더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나 단체라면 더더욱 냉철한 자기반성이 필요하지 않을까? 시대를 끌고 가지는 못 할지언정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지는 않는지, 그리고 과연 내가 혹은 단체가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옳은지도 함께 생각해 보면 어떨까 싶다. 일부 문화예술 리더·단체 성찰 필요최소한 ‘선무당’은 되지 말아야 할 거 아닌가?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그러한 사람들은 그것을 대물림하고 또 패거리를 지어 특권을 잃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잘 하든 잘 못 하든 상관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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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6.02 23:02

종묘와 경기전, 그리고 조경묘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서울 종묘(宗廟)는 조선 왕실의 사당[廟]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묘의 건물 안에는 역대 왕들의 어진(御眞)이 모셔져 있고 신주(神主)가 세워져 있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돌아가신 왕을 상징하는 각종 기물(器物)도 별도의 장(欌)에 모셔져 있는데, 중국의 황제로부터 받은 책봉문서(冊封文書)나 어보(御寶), 왕의 공적을 기록한 국조보감(國朝寶鑑)이 여기에 해당된다.전주는 조선 왕실 세운 이씨 본관이 사당의 공간은 왕과 왕비를 모시는 각각의 신실(神室)로 구성돼 있다. 그런데 왕조(王朝)가 계속 이어지면서 돌아가신 왕과 왕비가 많아질 경우에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즉 공간이 제한된 탓으로 더 이상 최근에 돌아가신 분들을 같은 공간에 모실 수 없는 경우가 생긴다.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정전(正殿) 이외에 별도의 건물, 즉 영녕전(永寧殿)을 세웠다. 예컨대 앞서의 정전에는 19대 왕과 왕비를, 영녕전에는 정전에 모시지 못하는 16대 왕과 왕비-일부 황태자 포함-를 모셨다.이렇게 종묘는 왕실 사당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던 정전과 영녕전이 핵심 시설이었다. 이외에 왕을 잘 보필했던 공신들의 사당[功臣堂]이 별도로 있었고, 부속건물로서 전사청(典祀廳), 향청(香廳), 재궁(齋宮), 집사청(執事廳), 망묘루(望廟樓) 등이 있었다.조선왕실이 이처럼 복잡하고 성대한 건축물인 종묘를 세워 운영한 것은 단순히 왕실의 조상[祖宗]으로부터 직접적인 가호(加護)를 원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종묘가 당시 사회운영에 막대한 의미를 가졌기 때문이다. 즉 왕권(王權)의 정통성을 태조(太祖) 이성계를 비롯한 역대 왕들에게서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령 왕이 직접 제사를 주관함으로써 주관자(主管者)인 왕의 정통성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할 수 있었고, 그런 과정을 거침으로써 군신(君臣)이나 백성들로부터 혈족(血族)의 특별함 내지는 왕권(王權)의 신성함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이러한 이유로 종묘에서 지내는 제사는 최상급의 제기(祭器)나 제물(祭物), 제의절차(祭儀節次)를 갖춘 국가 중대사였다. 통상 춘하추 사계절과 동지 뒤의 납일(臘日)에 맞추어 5차례 제사를 지냈는데, 왕의 즉위와 같은 특별한 일이 있을 때는 별도의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상서로운 제사[吉禮]였기 때문에 장중한 음악과 화려한 무용이 곁들여졌다. 또한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기 때문에 전문 화원(畵員)과 관원(官員)을 동원해 상세한 기록으로 남겼으니 그것이 곧 종묘의궤(宗廟儀軌)이다.한편 1395년 서울[漢陽] 경복궁 가까이에 처음으로 종묘가 세워진 후, 전주에도 태조의 어진(御眞)을 모신 경기전(慶基殿)이 부속건물과 함께 세워졌다. 전주가 조선왕실을 세운 전주 이씨의 본관(本貫)였고, 또한 태조가 왜구를 정벌할 때 특별히 머물렀기 때문이다. 세부적으로는 1410년에 처음으로 건물을 세워 어진을 모신 후, 1425년에 경기전이라는 명칭을 정식으로 얻었다. 이곳의 본전(本殿)에서도 매년 6차례 이상 제사를 지냈으며, 태조의 어진을 모신만큼 최상급의 제기와 제물이 동원됐다.경기전조경묘, 서울 종묘 축소판그리고 1771년에는 전주 이씨의 시조(始祖)인 이한(李翰)과 부인의 위패(位牌)를 모신 조경묘(肇慶廟)도 세워졌다. 이것은 조선 왕업(王業)의 기원을 이성계의 4대조에서 시조까지 끌어올린 것으로, 조선 역사는 이한으로부터 오랫동안 덕(德)과 인(仁)을 쌓은 결과이다라는 것을 대내외적으로 널리 과시한 것이다. 이곳에서도 경기전과 마찬가지로 최상의 예우를 다해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냈다.이상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경기전과 조경묘-고종(高宗) 이후에는 조경단(肇慶壇)으로 불리움-는 사실상 왕실의 조상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라는 측면에서 서울의 종묘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즉 서울 종묘의 축소판이 전주의 경기전과 조경묘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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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5.26 23:02

아날로그 시대의 보루, 책

중세사회에서 책을 소유한다는 것은 권력의 상징이었다. 권력자는 동서양의 책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여 통치의 방편으로 이용하였다. 문맹이었던 국민을 계몽하는 도구로 이용하였던 것이다. 책은 통치자에게 사상과 지혜를 주는 연금술사였고 민중에게는 보여주지 말아야할 금기였다. 백성이 무지해야 통치를 제대로 할 수 있다는 발상으로 분서갱유를 일으킨 진시황이나, 아랍 왕 오마르1세가 이집트 원정 당시 〈알렉산드리아 대 도서관〉의 장서를 목욕탕 땔감으로 사용한 것은 민중의 우민화와 사상의 통제를 가한 광기(狂氣)의 사건이었다.영상 보다 종이책이 뇌 진화에 좋아그러나 코페르니쿠스의 금속활자의 발명은 책의 보급으로 이어져 권력자의 신화가 무너지는 사태에 이른다. 어찌 보면 문명의 진화는 활자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우리나라 역사를 들여다보자. 코페르니쿠스의 금속활자보다 먼저 발명되었던 것이 고려의 금속활자이다. 발명은 했으나 주조기술의 어려움으로 목판을 사용하다가 세종대왕 대에 이르러 본격적인 금속활자의 전성기를 맞는다. 그러나 중앙 관서에서 한정본으로 책을 발간하다 보니 지방에까지 보급될 리가 없었다. 목판은 활자를 대체하는 수단이었고 전라감영의 인청에서 발간한 완영본 책판은 그 증거이다. 보급률이 낮았던 당시 책은 사대부들의 전유물이었고 백성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그로부터 100년 후 잡스라는 한 인물이 정보통신의 혁명을 일으켰다. 통신과 영상, 정보를 통합한 쇼셜네트워크의 등장은 코페르니쿠스 이후 인류 문명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변화되는 역사적 사건이었고 아날로그의 소멸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다.빛의 속도로 진화하는 디지털 매체는 불과 몇 년 사이에 전자책의 등장으로 이어진다. 세계 최대의 전자책을 만드는 구글은 한국에 상륙하여 전진기지를 구축하고 있다. 우리가 잠자는 사이에 소리 없는 전쟁이 시작 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기록문자로 대변되는 종이책마저 점령할 태세이다. 페이퍼 신문도 점점 설자리를 잃어가는 현실이다. 종이신문의 구독률은 한때 70%에서 현재는 11%로 낮아졌다는 통계이다. 이른바 올드 매체로 취급받는 현실이다. 정보의 신속성과 언제든 꺼내 볼 수 있는 휴대성에 필요한 지식을 무료로 얻는 덤까지 제공받고 있는 전자 매체의 진보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출판문화 시장에서 아동이나 청소년을 상대하는 책은 이미 영상과 연결된 상품이 대세이다.교과서로 공부하다가 모르는 것이 나오면 밑줄을 긋고 사전을 찾아보며 공부하던 시대가 멀어져가고 있다. 손으로 책장을 넘기며 글을 읽는 단순한 동작이 뇌를 진화시킨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 영상은 정보기능에는 강하지만 금방 잊어버리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종이책은 한마디로 영상정보의 알츠하이머 효과 덕분에 근근이 버티고 있다.디지털로 마음의 평화 얻을 수 없어SNS의 발달로 뇌를 활용할 기회가 점점 없어지고 있다. 스마트폰을 열면 지식백과가 있으니 무거운 사전 볼 필요가 없고 아는 길도 내비게이션에 의존하다 보니 뇌의 기능은 퇴화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심각한 장애를 불러일으키는 현실을 목도하면서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집단중독에 걸렸다.그러나 희망은 있다. 개성 있는 나만의 필체로 종이에 꾹꾹 눌러쓰면서 상상력이 생겨나고 창조적 글쓰기로 이어지는 아날로그 방식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또한 영상으로 보는 전자책이 가독성이나 지식 습득 면에서 활자매체를 따라올 수 없고 무엇보다 인간 내면의 감성과 마음의 평화는 디지털이 해결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이다.미래시대의 주역인 아이들의 교재만은 종이책으로 공부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것만이 교육의 마지막 보루이자 희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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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5.19 23:02

'관크'가 될 것인가

바야흐로 완연한 봄을 맞아 전라북도는 문화예술의 향기로 가득하다. 최근에 장기 상설공연인 새만금상설공연 〈아리울스토리〉와 전북관광브랜드공연 뮤지컬 〈춘향〉이 무대에 올랐다. 작년에도 수많은 관객을 만났지만 올해는 봄기운 탓인지 더 밝고 활력이 넘치는 관객이 많아 기분이 좋아진다. 바로 공연예술이 갖는 행복이 아닌가 싶다. 관람 에티켓 없는 일부 관객그렇지만 가끔은 공연장을 찾아오시는 관객 분들의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보면 마음이 우울해 질 때가 있다. 사실 다른 공연을 관람할 때도 이해하기 힘든 관객들을 만나면서 조금만 다른 이들을 배려해 주실 순 없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요즘 온라인에서는 ‘관크’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졌다. 참 낯선 용어라 의아해 하겠지만 ‘관크’는 관람에 방해를 주는 다른 관객들의 행위를 뜻하는 속어라고 한다. ‘관객 크리티컬’의 줄임말로 결정적인 피해를 입히는 행위라는 크리티컬이 관객과 합성되어 만들어진 말이라고 한다. 사실 어렵게 풀어서 속어로 만들어 ‘관크’라고 하지만, 관람 에티켓이 없는 관객을 부르는 말이라고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대체적으로 공연장에서 만날 수 있는 ‘관크’의 유형을 보면, 첫째는 어디서나 ‘촬영본능’을 발휘하는 경우이다. 큼직만한 DSLR 카메라와 콤팩트 카메라, 그리고 스마트폰을 사용해서 공연 중에 제지를 받아도 반복해서 몰래 셔터를 누른다. 둘째는 전혀 스마트하지 않은 스마트폰이다.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벨소리와 진동음, 그리고 결정적인 장면에 집중을 하고 있는데 울리는 ‘카톡왔숑’ 알림음과 액정의 밝은 화면이 그 범인이다. 세째는 아이들과 학생들의 수다본능이다. 사실 아이들은 어둠 속에서 진행되는 공연에 잘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산만해서 친구들과 수다떨고, 신발 찍찍이를 떼어다 붙였다 반복하거나, 극장 좌석표를 떼어내려고 계속 긁어내고 있는 경우도 있다. 넷째는 바로 어디선가 나는 이상한 ‘향기’이다. 지나친 향수 냄새일 수도 있고, 음주로 인한 술냄새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 음식냄새까지 나는 경우가 있다. 또 애정행각과 공연 중 좌석 이동까지 불쾌감을 주는 행위를 생각보다 참 많다. 그리고 그런 행동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공연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사람들은 모든 관객이 최상의 서비스를 받고 만족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그렇다보니 ‘관크’와 같은 좋지 않은 행동을 하는 관객들에게도 심하게 제지를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제지를 하다 오히려 다른 관객들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경우도 많다. 이 모든 것은 사실 ‘배려’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내가 내 돈 내고 표 사서 왔는데, 뭐 어때?’라는 생각은 다른 관객에게 피해를 줄 수밖에 없다. 다른 관객 역시 소중한 돈과 시간을 내어 온 관객인데 말이다. 사실 돈을 내고 산 것은 내 좌석일 뿐 다른 사람의 소중한 추억을 망칠 권리는 없다. 다른 사람 배려하며 공연 즐겨야이제 나부터 혹시 ‘관크’ 유발자가 아닌지 반성해 본다. 공연장에 들어설 때 그 공연에 대한 사전 정보도 미리 이해할 수 있도록 준비도 하고, 아이들과 함께 할 경우 공연장에서의 에티켓도 알려주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며, 모두가 공연을 함께 즐 행복해 하는 ‘해피굿 관객’을 더 많이 만나길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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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5.12 23:02

축제의 주인과 축제의 역할

거리의 가로수나 산의 꽃봉오리가 만개해 온 세상이 울긋불긋한 다양한 치장을 하고, 새로 싹을 틔운 나뭇잎들 또한 그 푸르름이 한 없이 반갑기만 한 봄날이다. 이렇듯 절정에 다다른 봄의 기운과 더불어 이곳저곳에서 축제의 향연이 시작됐다. 이미 지난 4월에 화려하게 피고 흩날리던 벚꽃과 함께 벚꽃축제가 많은 사람들에 가슴에 봄의 기운을 흩뿌리고 지나갔지만, 가정의 달이기도 한 5월은 축제의 달(계절)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지 않나 싶다.풍성한 5월 문화예술행사지난 달 마지막주를 기점으로 우리 지역도 본격적인 축제와 문화행사가 시작됐다. 가깝게는 전라북도 브랜드 공연인 ‘춘향’과 새만금 상설공연인 ‘아리울스토리’가 새 단장을 하고 긴 대장정을 시작했고 또 일주일간 치러진 ‘31회 전북 연극제’가 지난달 30일 막을 내렸다. 이와 동시에 같은 날 ‘제16회 전주국제 영화제’가 성대하게 막을 올렸고, 지난 2일부터 ‘제19회 한지문화축제’가 막을 올렸다. 그리고 도청 야외 공연장에서 펼쳐지는 ‘우리가락 우리마당’과 한옥마을 내에서도 다양한 상설공연과 행사들이 기획, 공연될 예정이거나 진행되고 있다. 이렇게 전체도 아니고 불과 몇 개만 나열했는데도, -잠깐 현기증 비슷한 증상이 있었지만 - 참 다양한 볼거리들이 진행되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근로자의날,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날 등을 비롯해 갖가지 행사와 대학가의 축제가 또 기다리고 있으니….이러한 축제와 행사 및 공연은 앞으로 한 6개월간은 우리지역 여러 곳에서 꾸준히 진행될 것이다. 그리고 잠깐이지만 그 수를 헤아려보니 휴~하는 짧은 한 숨과 다른 한편으로 뭐라 딱히 말 할 수 없는 웃음이 튕겨져 나온다. 언제부터 이렇게 다양한 축제와 문화행사들이 많아졌지? 하며 잠깐 생각해 보았다. 정확히 언제부터라고 말 할 순 없으나, 지자체가 본격적으로 뿌리내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이러한 다양한 축제가 전국적으로 봇물처럼 생 사라지고 또 생기기를 반복하며 이제는 무슨 행사가 있었나? 하며 스쳐지나가기도 하고 기억조차 없는 축제도 치러지는, 그야말로 축제와 행사의 홍수 속에 살고 있는 요즘의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더불어 그런 다양한 축제와 문화행사를 즐기기 위한 사회 구성원의 노력도 절실히 요구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하나의 축제가 지역사회에 자리 잡기 위해선 그 행사를 주관, 주최하는 당사자들과 유관 기관의 노력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지역민의 협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외지에서 찾아오는 방문객들 또한 그 역할에 적극적인 협력도 필요하다. 그 대표적인 예로 주차문제와 쓰레기(음식물)문제를 꼽을 수 있다. 이는 우리 지역 뿐 만이 아니라 전국적인 문제이기도 한 부분이지만 이제는 어느 지역이 이런 복잡한 문제를 슬기롭게 풀어나가는가에 따라 그 축제의 값어치는 상승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우리 지역도 주말은 물론이고 평일인데도 축제를 찾은 외부 관광객과 지역민들로 인해 행사장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지역주민·관광객 모두 협력 필요조금은 거창한 얘기일 수 있겠으나 고조선 시대에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弘益人間)처럼 우리 사회의 축제나 문화행사가 널리 우리 사회에 이로움을 주는 역할을 해 주길 바라는 맘 간절하고, 또 어려운 지역민과 함께 할 수 있는 그러한 장이 마련되고 그 사람들도 행사나 축제의 주인으로 즐겼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러한 노력들이 요즘처럼 삭막하고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축제가 할 수 있는 값어치이고 역할이지 않나 싶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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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5.06 23:02

'목도리'론과 '아궁이'론

필자는 예전에 신문 지면을 통해서 목도리론(論)을 설파(說破)한 적이 있었다. ‘차가운 겨울을 잘 나려면, 다른 무엇보다도 목을 감싸주는 목도리를 잘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목이 유달리 추위에 민감한 부위인지 아니면 신진대사의 중심인 상체와 가깝기 때문인지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경험적으로 알 수 있듯이 목만 잘 감싸면 온 몸으로 파고드는 칼날과 같은 추위도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목도리에 담긴 이치는 세상사에도 널리 통한다는 것이 목도리론(論)의 요지였다. 즉 ‘세상사(世上事)는 여러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섞인 채로 굴러가지만 핵심이 되는 요소가 분명히 존재하며, 그것을 잘 파악해서 대처하면 몸 전체의 추위를 목도리 한 장으로 막을 수 있듯이 세상사에도 효율적으로 잘 대처할 수 있다’고 하였다.한쪽에만 치우쳐 발전하는 전라북도한편 저명한 여행가인 한비야씨도 최근의 신문 지면을 통해서 특유의 아궁이론(論)을 피력(披瀝)한 바가 있다. 그녀에 의하면, ‘열 개의 장작을 나누어 한 개씩 아궁이에 넣어서는 솥의 물을 충분히 끓일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열 개의 장작을 한꺼번에 넣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한 적은 많았지만 한 번에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느니만 못하다는 세상 이치를 솥과 아궁이를 살펴보면서 깊이 깨달았다’고 하였다.뜬금없이 웬 목도리와 아궁이 타령이냐고 할 수 있으나 전북의 현재를 살펴보면서 저절로 목도리론(論)과 아궁이론(論)이 되새겨진다. 현재의 전북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특히 새만금사업과 혁신도시 개발의 성과가 눈에 보이기 시작하고, 자치단체가 주도한 지역개발 혹은 역사·문화 관광사업의 성과를 살펴보는 것도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예컨대 잠시만 눈을 돌려보면 곳곳에 새로 생긴 공장과 건축물, 토목시설뿐만 아니라 지역마다 문화축제와 각종 관광프로그램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그러나 이 모든 발전이 지역적으로 한쪽에 치우쳐 있는 것 같다. 농촌보다는 도시에, 지역보다는 중심인 전주에, 그리고 전주 내에서도 새로운 도심으로 부상한 서부신시가지에 집중되어 있는 것 같다. 마치 전라북도(全羅北道)가 아니라 조금 과장한다면 전주도(全州道) 내지 전주서도(全州西道)가 아닐까한다. 이렇게 전라북도는 발전을 거듭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지역적으로 불균형이 심화되고 있음에 틀림이 없는 것 같다. 비록 지금은 따뜻한 봄의 햇살을 즐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역간 불균형으로 인해 언젠가 전라북도의 발전과 통합이 심각하게 저해되는 사태를 맞이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즉 한 겨울의 찬바람을 온 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날이 곧 올지도 모르겠다.균형발전 염두에 둔 정책 개발·집행그렇다면 앞으로 달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언젠가 목으로 파고들 칼바람을 막을 목도리를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이것이 목도리론(論)을 거론(擧論)한 이유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지역간의 소통과 균형발전을 염두에 둔 정책 개발과 집행을 전라북도가 서둘러야 한다. 그 내용이 무엇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지역간 문화향수 기회의 균등은 꼭 포함되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문화적 균등만이 진정한 통합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그리고 아궁이에 장작을 하나하나 넣어서는 솥의 물을 충분히 끊일 수 없듯이 지역간 불균형은 단발성의 정책적 시도만으로 쉽게 타파될 수 없다. 그렇다면 불길이 활활 타오르도록 정책 담당자들이 종합적인 균형발전 정책을 적극적으로 준비해서 솥의 물이 잘 끓도록 조치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목도리론(論)과 함께 아궁이론(論)을 다시 꺼내서 되새겨본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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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4.28 23:02

도래하는 변방의 시대

수년 전에 국도 30호의 기점인 부안 영전에서 종점인 대구까지 답사한 적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국도 30호선은 왕복 2차선의 도로가 대부분이었다. 지금은 부분적으로 4차선 도로도 개설됐지만 느리게 변화하는 곳이 30번 국도다. 잠시 그 길을 따라 떠나 보자. 국도 30호선이 시작되는 부안 영전에서 해안선을 따라가면 곰소만의 칠산바다에서는 풍어를 기원하는 뱃노래가 들려오는 듯하고 산과 들은 내내 동행하며 나그네의 벗이 되어 준다.부안 영전서 대구까지 30번 국도허균과 매창의 연서(戀書)를 떠올리며 내소사와 개암사가 있는 내변산의 속살을 먼발치로 바라본다. 왕포, 격포, 고사포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다 동진 나루가 보이면 부안의 절경도 멀어져 간다. 태인에 들어서면 동학혁명 때 태인전투가 벌어졌던 성황산과 신라의 대문장가 최치원 선생이 태산군수로 부임해 풍월을 읊었다는 피향정이 길손을 맞는다. 태인 지역은 칠보와 더불어 유무형 문화재가 즐비하다. 조선 시대 최초로 지방에서 출판이 이루어지고 판매됐던 태인방각본은 지식문화의 상징이다. 또한 한국 가사문학의 효시인 정극인의 〈상춘곡〉과 무성서원, 고현향약 등이 있는 이 곳은 학문의 고장으로 표현될 만큼 문화콘텐츠가 풍부하다.구절재를 지나면 옥정호가 보인다. 진안 데미샘에서 발원한 물이 천을 이루고 제법 몸을 부풀려 섬진강이 되어 느리게 흘러가다 한숨 자고 머무른 곳이 옥정호다. 옥정호 아래쪽에 있는 섬진강댐은 우리나라 최초의 다목적댐이다.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 주력부대인 남부군의 주무대였던 회문산을 옆에 끼고 강진과 청웅을 지나면 임실 사선대가 나온다. 마령으로 들어서면 천하의 명산 마이산이 하늘과 경계를 이루며 불끈 솟아 있는데 영험한 기운이 느껴진다. 백운지역은 전형적인 산촌으로 마을마다 아름드리 노거수가 수호신처럼 버티고 서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수차를 이용한 물레방앗간도 있었다. 백운면 소재지에서 국밥 한 그릇으로 허기를 달래고 진안 상전에 들어서면 용담호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상전벽해란 용담호를 두고 한 말인 듯싶다. 덕유산과 나제통문을 지나 전라북도 최동단 무주 무풍에 이르면 이곳이 경상도인지 전라도인지 헷갈린다. 행정구역은 무주인데 주민들은 경상도 사투리를 쓰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지역감정이란 애초부터 없는 듯하다. 가을에 가면 옥수수가 지천이다. 대덕산을 넘으면 전북과 경계인 경남 김천이다. 한적한 길을 따라 상주를 거쳐 대구에 이르게 되면 30번 국도는 긴 여정을 마친다. 이처럼 30번 국도는 자연 풍광과 문화를 꾸밈없이 보여주는 길이다. 호수가 있고 문화유적이 있고 바다가 있는 종합자연세트의 길이다. 길의 확장은 시간을 단축하는 편리함도 있지만 주변 마을과 아름다운 풍경, 문화를 지우는 파괴의 역할도 한다. 길을 따라 가다 보면 문화가 있고 마을이 있고 사람이 있다. 그러나 좁은 국토에 사방팔방으로 도로가 개설되다 보니 자연은 누더기가 되고 전통문화도 길과 함께 사라지고 있다.길 따라 가면 문화·마을·사람 있어이렇게 개발돼 콘크리트가 땅을 점령하다 보면 머지않아 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 관광지가 되는 날이 분명히 올 것이다. 길의 확장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물동량이 많고 지역경제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해야 되지만 전통문화의 보존과 자연유산으로서 가치가 있는 길이라면 심사숙고해서 결정해야 할 것이다. 전라북도는 산업화의 그늘로 상대적으로 낙후지역으로 밀려나 있었지만 역으로 생각한다면 발전 가능성이 열려 있는 황금의 땅이다. 산업화가 남긴 후유증은 삶의 질로 나타난다. 상대적 박탈감으로 소외됐던 변방이 주목받는 이유이다. 그 시기가 도래하고 있다. 30번 국도를 따라가 보자. 바다와 산, 호수가 있는 아름다운 풍경과 문화유산이 즐비하고, 무엇보다 오순도순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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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4.21 23:02

다름 속에서 찾는 문화적 다양성

따스한 봄기운에 개나리, 벚꽃이 활짝 피어 거리에 꽃향기가 가득하고 찬란한 햇살이 도시를 아름답게 물들이는 4월이 되었다. 전라북도 문화계에서도 겨우내 준비한 다양한 문화소식이 가득하다. 전북관광브랜드공연 뮤지컬 ‘춘향’을 시작으로 새만금상설공연, 한옥야간상설공연, 소극장 연극, 전시 등이 열심히 준비한 결과물을 내놓으며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다. 이처럼 생명이 움트는 찬란한 봄을 맞이해서 다양한 문화가 한 아름 종합선물세트처럼 펼쳐진다. 우리는 이제 그곳에 찾아가서 입맛에 맞는 것을 골라보면 된다. 어쩌면 어떤 것을 찾아가 보는 것이 좋을지 행복한 고민에 빠질지도 모르겠다. 옳고 그름이 아니라 생각이 다른 것우리는 어떤 것을 보거나 듣거나, 아니면 상품을 고를 때 무엇에 포커싱을 맞출까? 편리성, 견고성, 아름다움, 차별성 등이 아닐까 생각한다. 남과 다른 나만의 독특한 개성 표출이 자연스러운 시대에 남과 다른 나만의 색깔을 찾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르겠다.오늘은 이 ‘다름’ 속에 있는 ‘문화적 다양성’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우리는 흔히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려 하는 오류를 범한다. 그러나 ‘다름’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생각의 차이, 기호의 차이, 철학의 차이를 보여주는 표현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탁자 위의 사과와 같은 똑같은 대상을 그림으로 그리라는 숙제를 여러 아이들에게 주면 모두가 사진처럼 똑같이 그리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바라보는 시점에 따라서, 아니면 빛을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서 다양한 표현으로 그릴 것이다. 초등학생의 다양한 시선과 빛의 색깔을 바라보는 이미지가 서로 다르듯이 우리의 문화도 같은 대상을 다른 방식의 장르나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성장하면서 규범화된 표현방식 또는 표준화된 방식에 익숙해지고 획일적인 교육을 받으면서 ‘다름’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뇌리에 깊숙이 자리 잡은 규범화 내지 표준화된 판단기준으로 이를 옳고 그름으로 평가하거나 다른 이의 ‘다른 시선이나 생각’을 보면 공격적으로 그런 생각이나 의견은 틀렸다고 잘못되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는 창조적인 아이디어, 독특한 디자인과 상품이 그 나라의 새로운 경쟁력이 되고 성장동력이 되는 시대에 ‘다름’에서 출발하는 문화적 다양성 확보에 대해 더 깊게 생각해보아야 한다. 내 생각이 옳고 그른지, 타인이 이것이 틀렸다고 평가하는 것은 아닌지 사전에 자기 검열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개성과 시선으로 아이디어를 내고 다양한 다른 이의 아이디어가 모여 창조적인 색다른 무언가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나만 옳고, 너희는 틀렸어’가 아니라 ‘내 생각은 이런 관점과 시선에 있는데, 너는 내가 보지 못한 또 다른 관점과 시선을 가지고 있네, 우리 함께 더 좋은 생각을 모아 보자’라고, 서로 다름과 차이를 이해하고, 더 포용력을 가지는 모습이 전라북도 문화예술계에 더 많아졌으면 한다. 그로 인해 더 창조적인 생각으로 만들어진 다양한 예술작품을 만날 수 있길 희망해 본다. 포용력 가져야 창조성 발휘할 수 있어전라북도의 무형의 문화자산과 예술인이 이런 ‘다름의 다양성’에서 새로운 아이디어와 창작을 통해 ‘문화적 다양성’이 더 풍부해지고 이를 통해 우리 도를 찾는 관광객과 도민들이 더 다양한 예술작품을 통해 행복한 문화생활을 즐기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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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4.14 23:02

'가족'이란…

햇살이 따스하게 느껴지는 봄이다. 들녘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주변이 하나 둘씩 색을 달리하며 다양한 봄옷으로 갈아 입어, 세상이 한층 더 환해지고 밝아진 느낌이다. 더불어 많은 공연과 행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이곳저곳에서 열리고 있다. 이렇듯 매해 봄이면 ‘가족’란 타이틀을 가지고 10년 넘게 공연을 해오는 단체가 있다. 그곳은 극단 문화영토 ‘판’이라는 연극 단체이고, 올해도 어김없이 소극장 ‘판’에서 ‘봄날은 간다 (최창근 작/고조영 연출)’라는 작품이 ‘11번째 가족시리즈’라는 타이틀로 무대에 올려졌다. 10년째 계속되는 가족 주제 연극지난 2005년 ‘행복한 가족’을 시작으로 매년 봄에 공연되는 문화영토 ‘판’의 가족 시리즈는 새로운 관객을 개발하고 다양한 연령층의 관객이 공연장을 찾게 만들었다. ‘봄 하면 가족시리즈’라는 공연 마니아층의 두터운 신뢰와 새로운 공연문화 콘텐츠로 자리매김 해, 우리지역의 대표적인 레퍼터리 공연으로 자리 잡았으며 많은 관객들과 공연 단체들에게 호평을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2009년 경숙이 경숙아버지’ ‘2011년 고령화 가족’ ‘2013년 민들레, 아리랑!’은 전북 연극제 및 전국 연극제에서 다양한 수상 실적을 가지고 있어 작품의 객관적인 위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가족(家族)이란 무엇일까? 우리에게 ‘가족’은 딱히 하나로 단정 짓기 어렵지만, 우리가 ‘엄마’라는 단어에 왠지 모를 연민과 아련함을 느끼는 것처럼 통하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기에 그 애틋함은 뭐라 표현 할 수 없는 그 이상일지도 모르겠다. 우리에게 가족은 늘 곁에 있고, 늘 따뜻함으로 든든한 기둥이 되어준다. 생각해보면 ‘사랑한다. 고맙다. 감사하다.’등과 같은 말들을 언제했는지 기억하기가 쉽지 않다. 더불어 기쁘거나 슬플 때, 또는 아프고 괴로울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떠 올려보면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에게 무심하게 살고 있는지 알 수가 있다. 가족은 산소와 같아서 평소에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 결핍이 생기면 호흡이 곤란해지듯 그 소중함을 바로 알 수 있고, 그 존재 가치를 절대 잊거나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다양한 장르의 공연들이 무대에 올라가지만 연극은 듣는 귀와, 보는 눈, 그리고 편안한 마음만 가지고 오면 참 즐겁고 재미있게 볼 수가 있다. 어느 부분에서 박수를 쳐야 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다. 즐거우면 웃고, 슬프면 울고, 박장대소 할 수도 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몇 년 전에 시각 장애우들이 공연을 보러 온 적이 있었고, 또 2년 전엔 청각 장애우들이 공연을 보러 온 적이 있는데, 너무도 즐겁게 재미있게 공연을 즐기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분들은 보이지는 않지만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수화 동시 통역을 했음) 그리고 마음으로 느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더불어 그런 행사를 기획한 사회복지사들과 자원봉사자들이 없었다면 실행이 될 수 없는 부분도 있겠지만 그 장애우들에겐 복지사나 자원봉사자들이 또 다른 가족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공연장을 나오는 그분들의 모습은 공연을 보기 위해 들어가던 모습과는 달라져 있었고,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을 들을 땐, 왠지 모를 미안함에 고개를 숙였던 기억이 있다.따듯한 봄날, 가족과 공연장으로마냥 싱그럽고 활기가 넘쳐야 할 봄이지만, 또 다른 한쪽에선 너무도 큰 아픔의 봄이 함께 하는 2015년의 봄이다. 사랑한다는, 보고 싶다는 말을 마음껏 하고 싶고 그리고 안아보고 싶은 맘에 마음껏 안아 볼 수 없는 그 심정은 어떤 말로도 위로가 안 될 것이다. 공연이든 책이든 또 다른 무언가를 통해 ‘가족’이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금 새겨보는 그런 봄이 되었으면 싶은 맘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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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4.07 23:02

고려 백자와 조선 청자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상식을 벗어나는 일들이 의외로 많다. 박물관에 근무하면서 알게 된 고려백자와 조선청자가 그러한 사례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려청자와 조선백자는 알아도 고려에서 만든 백자와 조선에서 만든 청자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을 것이다.전통문화 단선적도식적 이해 탈피고려시대의 백자는 청자가 처음 만들어지는 10세기 무렵부터 전 시기에 걸쳐 꾸준히 생산되었다. 즉 청자와 백자는 오랫동안 생명력을 같이한 도자기였다. 그릇의 형태[器形]나 문양(文樣)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제작방법이 청자와 같았다. 다만 백자 고유의 흙[胎土]을 찾아내지 못해서 청자를 만들던 고령토(高嶺土)를 그대로 썼기 때문에 굽는 과정에서 자기화(磁器化)가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고려시대의 백자는 청자에 비해 질감(質感)이 약간 떨어지고 표면은 엷은 녹색이 감도는 유백색(乳白色)을 띠게 된다.이렇게 생산된 고려백자의 초기 흔적은 용인 서리, 시흥 방산동, 여주 중암리 등의 가마에서 확인되고 있으며, 특히 용인 서리와 여주 중암리는 백자만 전문적으로 생산하던 곳이었다. 그 이후에도 부안 유천리와 같은 대규모의 가마 단지에서 고급 백자가 청자와 함께 생산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백자상감모란문매병(白磁象嵌牡丹文梅甁)과 백자상감연애초문합(白磁象嵌蓮唐草文盒)이다.한편 조선시대의 청자는 분청사기 및 백자와 함께 소량이나마 조선 초기부터 생산되었다. 주로 경기도 광주(廣州)의 백자 가마에서 17세기 중엽까지 생산되었다. 즉 백자를 생산하던 가마에서 백자와 같은 흙을 사용하되 백자와는 달리 푸른빛이 도는 유약(釉藥)을 그릇에 덧씌워서 구운 것이다.그런데 각종 기록에 의하면 동궁전(東宮殿)에서 사용된 그릇이 청자라고 언급되고 있다. 이는 유교적 위계질서가 엄격했던 조선 왕실에서 왕과 왕비의 그릇인 백자와 구분하여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전용 그릇으로 청자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현재까지 전하는 조선시대의 청자로는 청자항아리(靑磁壺)와 청자음각운문대접(靑磁陰刻雲文大 ) 등이 있다.이와 같이 고려백자와 조선청자는 한국도자사(韓國陶磁史)에서 일정한 비중을 차지할 만큼의 명품 그릇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려시대는 청자만이, 조선시대는 백자만이 생산된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전통문화를 단선적(單線的), 도식적(圖式的)으로 이해하게 만들 수 있다.우리의 조상들은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여 고려시대에 새롭게 청자를 만들면서도 백자까지도 만들어 유통(流通)하였고, 조선시대에는 본격적인 백자 전성시대를 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유약을 달리 사용한 청자도 만들어 왕실에 공급하였다. 보다 나은 도자기를 만들어내겠다는 그들의 창조적 시도와 실패마저 기쁘게 감당하였던 인고(忍苦)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나올 수 없는 결과였다. 사정이 이러할진대 우리가 고려청자와 조선백자만을 기계적으로 알고 있다면, 우리 문화의 다양성(多樣性)과 조상들의 창조성(創造性)은 간과(看過)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앞으로 문화적 다양성을 토대로 창조적인 변용(變容)의 과정을 거쳐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는 것도 불가능해질 것이다.다양성 시대, 창조적 인재 길러내야바야흐로 문화융성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제부터 미래의 주역인 청소년층에게라도 고려백자와 조선청자가 존재하였음을 가르쳐야 한다. 그래서 우리 문화에 대한 좁은 폭의 이해를 극복하고 다양성의 시대에 어울리는 창조적 인재를 길러내도록 준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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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3.31 23:02

기차로 떠나는 시간 여행

고속철도 시대가 열렸다. 서울에서 익산까지 한 시간 남짓 걸린다니 눈 깜박할 새 가는 셈이다. 시속 300㎞로 달리는 기차가 몰고 올 변화가 눈앞에 다가온 것이다.기차를 타고 먼 기억 속으로 떠나보자. 조선후기 물류운송수단은 해상으로 통하는 수로교통이었다. 1876년 조선과 일본의 강화도조약으로 인천, 원산, 부산 등 항구가 개항되면서 서양문명까지 유입돼 항구는 본격적인 시장경제 중심으로 자리 잡는다.고속철도 시대 우려도 있지만해로유통이 활발해지면서 포구를 중심으로 시장이 형성된다. 한강수운을 중심으로 충주, 줄포, 강경 포구 등은 해상을 이용한 물류가 집하되면서 급속한 발달을 가져온다. 한반도는 산이 많아 육상으로 통하는 도로 개설은 당시 상황으로는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었다. 산에서 흘러 내려온 물은 자연적으로 물길이 만들어지고 하천은 강이 돼 수로가 형성됐다. 이러한 지형적인 조건으로 전통적인 문물의 이동은 내륙에서 포구로 이어졌다.그러나 철도가 등장하면서 포구는 점점 쇠락하기 시작한다. 조선의 철도는 일본 본토와 만주를 연결하는 대륙침략의 전진기지로 식민지 정책의 가장 우선 순위였다. 한반도를 사방으로 연결하는 철도의 종단역은 대개가 항구나 국경도시였다. 철도역은 전통도시의 몰락을 가져오고 신도시의 등장을 가져왔다. 경부선은 원래 금산, 논산, 공주 노선으로 설계됐으나 대전으로 노선이 변경됐다. 허허벌판인 대전은 철길 덕분에 대도시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수운의 중심지인 충주도 조치원역이 생기면서 청주로 상권이 이동하는 결과를 낳았다. 호남선도 광주와 전주를 연결하는 노선였지만 제외됐다. 일본은 전주의 일부 인사가 반대했기 때문에 제외됐다고 주장하지만 전주의 역사성과 고도의 전통을 무시하려는 정책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노선에서 제외된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전주와 익산을 오가는 경편철도가 개통됐다. 협궤 증기철도로 전주역은 옛 전매청 구역 내 서쪽에 있었다. 육당 최남선의 〈심춘순례〉를 보면 1925년에 경편철도를 타고 전주로 오면서 기록한 글이 나온다. “됫박 같은 경철에 백탄을 피운 동그란 화로 한 개일 망정 난방이란 설비가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보기부터 시원한 전주평야를 동남으로 내려간다. 채신없는 값으로 어떻게 까불깝죽하는지, 마치 요망스러운 당나귀에 올라 앉은 것 같다.”근대화를 압축적으로 보여준 것을 꼽으라면 철도다. 철도는 속도감을 오감으로 느끼게 해준 문명의 상징으로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는 관계망이자 시장경제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철길은 공간과 전통생활의 재편도 가져왔다. 남녀가 유별하고 반상이 차별되는 신분제도 아래에서 기차의 등장은 요금만 내면 남녀노소, 귀천을 가리지 않고 이용할 수 있는 사회적 변혁이 일어나는 현상이 벌어졌다.한국전쟁 때는 피난열차로 운행돼 생사의 갈림길이 되는 아픔도 겪었다. 필자도 어렸을 적 서울에 갈 때는 완행열차를 타고 갔다. 기차가 중간 지점인 서대전역에서 잠시 정차할 때 가락국수를 먹던 생각이 난다. 여행의 참맛은 기차여행이 단연 압권이다. 굉음을 내면서 긴 꼬리를 물고 달리는 기차를 보노라면 왠지 멀리 떠나고픈 생각이 절로 난다. 기차 안에서 여객차장이 파는 삶은 달걀을 먹으며 창밖에 펼쳐지는 풍경을 보는 것은 기차 여행이 주는 매력이다.전북 찾는 관광객 늘었으면고속철도가 운행되면 상권이 수도권으로 빠져나가는 쏠림 현상으로 우려의 면도 있다. 그러나 관광객의 유입면에서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인바운드 투어가 될 수 있는 대책을 세워야 하고 그것은 지역민과 지자체의 몫이다. 고속철도 시대가 열리지만 노선연장과 요금인상으로 시끄럽다. 잘 해결돼 전북을 찾는 관광객들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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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3.24 23:02

새로운 열정의 시대

동장군이 물러나고 불어오는 바람에서 생명의 기운이 움트는 봄이 오고 있다. 따스한 봄기운에 겨울 내내 움츠렸던 몸을 한껏 펴고 높이 뛰고 싶다. 봄의 기운은 우리에게 생명의 에너지를 주고 새로운 시작과 변화를 준비하게 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하지만 지난 해 많은 좋지 않은 많은 사고로 소중한 생명들이 꺼져갔던 것을 생각하면 가슴 한쪽을 망치로 맞은 것 같이 먹먹하기만 하다. 절대 잊지 말아야 하며 더 나은 세상을 향해 전진해야 함이 마땅할 터인데 웬일인지 지금의 우리 현실은 뒷걸음질 치거나 정체되어 있는 것 같다. 답답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답답함을 아름다운 문화예술로 새로운 열정으로 치유할 수는 없을까?답답한 현실, 문화예술로 치유 가능풍부한 먹거리와 문화예술로 활기가 넘쳤던 전라북도! 그러나 풍요로운 땅이었으므로 봉건시대를 지나 근대로 넘어오면서 탐관오리와 일제에게 지속적으로 수탈을 당했던 곳이다. 그렇기에 이곳은 새로운 시대를 열망했고, 희망을 꿈꾸며 동학농민혁명이 들불처럼 타올랐다고 생각한다.새로운 변화가 역동적으로 진행되는 시대에 희망과 새로운 시대에 대한 열망이 가득한 전라북도! 문화예술의 활기가 넘쳐나는 전라북도! 예향 전북의 자부심을 다시 찾기 위해 우리는 이제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지금은 모두가 힘든 시기라고 말한다. 한옥마을의 관광객이 넘쳐나도 경기는 좋지 않고 먹고살기 어렵다고들 한다. 우리가 오늘 좋은 공연이 있으니 보러 오시라고 권하면 십중팔구는 먹고 살기도 힘든 판에 참, 팔자 좋은 소리 하네!라고 할 것이다. 그러니 더욱 문화예술을 즐길 여유나 시간을 내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그렇지만 어렵다고, 힘들다고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문화예술이 아닌가? 한반도 역사에서 유구히 지켜왔던 우리의 문화가 이제 한류라는 이름으로 세계에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그 한류의 전통과 뿌리가 이곳 전라북도에 있다고 말한다. 문득 김구선생님의 바라던 나라가 생각난다. 일제식민지시대 독립운동을 하셨던 김구 선생님이 바라던 나라는 자유로운 독립국가로 아름다운 문화로 가득 차있는 나라이며 인류 평화와 공생에 이바지 하는 나라였다.그렇다면 문화가 중심이 되는 문화의 시대에서 우리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가? 열정과 창의로 우리가 가장 잘하는 것 보편적이고 세계적인 감성을 가진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개발하고 그것을 다양한 장르의 예술작품으로 구현하는 수많은 도전을 해야 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교류하여야 하며, 전라북도만의 멋과 맛, 향으로 새롭게 융합하여야 한다. 창조적 융합과 더불어 다양성과 폭넓은 차이의 이해를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새롭고 도전적인 창의와 열정이 충만하여야 한다. 또한 창의적 실험과 융합을 지속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행정적, 금전적 지원을 해줄 정책을 개발하고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아름다운 문화예술 꽃 활짝 피길문화가 중심이 되는 새로운 열정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우리에게 더욱 큰 미래가 펼쳐지고 있음을 직시해야 하며, 그 기회를 적극적으로 잡아야 한다. 진흙 구덩이에서 아름다운 연꽃이 피듯 아무리 큰 어려움이 있다고 해도 환경이 척박하다고 해도 불타는 열정과 창조적 생각으로 아름다운 문화예술의 꽃을 활짝 피는 전라북도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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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3.17 23:02

공공 자산 활용에 대하여

기나긴 동장군의 계절이 물러가고 만물의 기운이 샘솟는 봄의 계절이 돌아 왔다. 대지에도 따스한 기운이 감돌고, 거리의 가로수들과 산의 나무들도 겨우내 움츠렸던 새싹과 꽃망울을 틔우기 위해 봄의 기운을 맞이하고 있는 모습들이다. 이와 더불어 공연과 문화계도 봄을 맞아 다양한 공연과 행사로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축구경기 때 간단한 문화공연 어떨까지난 주말에 우리 지역의 프로축구 구단인 전북 현대의 K리그 홈 개막전을 맞아 딸과 함께 전주 월드컵경기에 다녀왔다. 가족끼리 또는 친구나 연인끼리 삼삼오오 손을 잡고 경기장을 찾는 모습이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다. 경기 결과는 우리지역 팀 전북의 승리로 끝나 경기장을 찾은 모든 사람들의 기쁨은 두 배가 되지 않았나 싶다.그러면서 단지, 경기만 보고 오는 게 아니라 공연 문화도 함께 즐기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특히, 가족 단위로 찾아오는 관객들이 많은 만큼 축구를 소재로 한 관객 참여형의 간단한 공연물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 마임공연이나 우리 전통 리듬을 활용한 공연 등 - 또 응원가에도 우리 정서를 활용한 흥을 북돋을 수 있는 노래들이 만들어지고 불려 진다면 이전과는 또 다른 재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리고 유니폼과 케릭터 상품에서도 한지를 적극 활용해 보면 어떨까 싶다. 특히 한지 의상을 입고 ‘광대학교’라는 공연을 장기간 해 온 경험이 있는 필자로서는 한번쯤 시도를 해 볼만 하다는 생각이다. 더 나아가 국가대표 유니폼까지 확대 된다면 더더욱 좋겠지만 말이다. 물론 가격적인 면도 고려의 대상이 되겠지만, 생활적인 면을 제외 하더라도 선물용으로도 그 가치는 충분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다. 축구단의 모기업인 현대자동차나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와 다른 해외 구단과의 교류를 통한 한지 상품 활용은 기존과는 다른 반응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또 다른 하나는 공공자산을 활용한 홍보와 마케팅이다. 경기장 전광판에서는 축구 경기의 영상과 관련 자료들이 비춰지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간간히 공연 하나가 소개되곤 했는데, 우리지역 단체의 공연이 아닌 외부에서 찾아오는 공연 하나만 덜렁 소개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한 과정에는 그에 따른 사정이 있었겠지만, 우리지역 단체의 다양한 공연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또 그런 공연을 찾는 관객들이 더 많아 진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구단 홍보팀이나 관계자와 각 공연 단체와 협약을 통해 경기장을 찾은 관객들이 입장권을 가지고 공연장을 찾는다면 적정선에 한해 할인 혜택을 주고받는 방안도 고려해 보면 어떨까 싶다.주민들 문화예술 향유 기회 확대해야예전에 필자는 자치단체 관계자들에게 시내버스 정류장에 설치된 시간 알림판에 공연 홍보를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방안을 제안 한 적이 있다. 하지만 몇 년이 흐른 지금도 그 활용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예전에 비해 많이 개선된 부분이 없잖아 있으나 그마저도 자치단체 홍보나 행사 그리고 지자체 지원을 받은 공연이나 축제에 한해 가끔씩 이뤄지고 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딱 그 정도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때도 시스템 얘기가 나왔고 업무가 과중하다는 말도 나왔었다. 몇 년의 시간도 흘렀고 더불어 기술도 더 발전했다. 이제는 그러한 말들이 변명처럼 들리지 않았으면 한다. 조금 더 욕심을 부린다면 각 지자체 건물이나 그에 따른 부속 건물들 구청, 주민 자치센터, 문화의 집, 기타 여러 공간에 그러한 방안들이 만들어 진다면 지역민들이 더 많은 문화예술을 향유 할 수 있는 기회제공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고 또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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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3.10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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