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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마을과 박물관

전주 한옥마을의 운영이 본 궤도에 올랐다. 전국적인 관광 명소로 자리를 잡아서 한 해 500만 이상의 관람객이 찾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자치단체에서도 문화관광산업 분야의 대표적인 벤치마킹 대상으로 꼽고 있다.하지만 한옥마을이 급속도로 발전된 만큼 아쉬움도 크다. 우선 먹거리, 살거리는 넘쳐나지만 볼거리와 생각할거리는 여전히 부족하다. 특히 한옥마을의 정체성과 관련된 콘텐츠(contents)가 많이 미흡하다. 이런 면모는 많은 이들에게 한옥마을의 미래를 걱정하게 만드는 요인으로도 작용하고 있다.한옥마을 정체성 관련 콘텐츠 미흡원래 한옥마을은 두 가지 특성을 보여주는 우리의 전통문화이다. 첫째가 조선시대 이후 발전해온 ‘성(城) 내부 마을로서의 한옥마을’이다. 한옥과 함께 전주성(全州城)의 남문이었던 풍남문( 南門)과 빈객(賓客)을 맞이하던 객사(客舍), 아이들을 가르치던 향교(鄕校)가 이러한 한옥마을의 특성을 잘 말해준다. 둘째가 ‘조선왕조 본향(本鄕)으로서의 한옥마을’이다. 이성계가 머물렀던 오목대(梧木臺)와 그의 영정을 모시는 경기전(慶基殿)이 한옥마을을 둘러싸고 있다.한옥마을은 위의 두 가지 특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지만 ‘성 내부의 마을’ 보다는 ‘조선왕조 본향으로서의 마을’ 모습을 보여줄 만한 콘텐츠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이다. 물론 한옥마을 내에 어진박물관이 있지만, 조선왕실의 구체적인 생활상이나 경기전의 확대판인 종묘(宗廟), 조선왕실의 상징물인 국새(國璽) 및 어보(御寶)와 같은 콘텐츠가 여전히 부족한 상태이다.그런데 이러한 콘텐츠는 국립전주박물관의 전시나 교육과정에 담겨져 있다. 예컨대 역사자료실에는 이성계나 조선왕조의 발흥(勃興)과 관련된 내용이 전시물로 펼쳐져 있고, 기획전시실에서는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의 국새 및 어보를 살펴볼 수 있다. 곧이어 개막될 〈종묘(宗廟)〉 기획전을 통해서는 종묘와 경기전의 차이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어린이박물관에서는 ‘나는 조선의 왕이로소이다’라는 주제를 가지고, 왕실의 음식과 복식, 세자의 교육, 즉위의례 등에 대해서 구체적인 체험교육이 가능하도록 꾸며져 있다. 이러한 콘텐츠는 한옥마을에서의 부족함을 메워주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한옥마을을 찾는 관광객은 복잡한 거리에서 먹거리, 살거리에 집중하다가 전주시를 떠나고 있다. 좁은 골목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치이다가 생각하면서 힐링(healing)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전주시를 떠난 사람들에게 과연 한옥마을은 어떤 존재로 남게 될 것인가. 전주 문화유적 연결 교통망 필요이제부터라도 전주시는 한옥마을과 박물관을 연계시키는 교통망을 적극적으로 구축하여야 한다. 더 나아가 소리문화의 전당, 국립무형유산원과 같은 주변의 문화예술기관과 전주시 인근의 문화유적까지도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교통망을 갖추어야 한다. 또한 관광객들에게 전주시뿐만 아니라 주변의 도시에서 진행되고 있는 문화예술프로그램 정보도 적극적으로 제공하는 등의 공세적 서비스체제도 구축해나가야 한다. 이것이 한옥마을의 진정한 발전을 위하는 길이며, 한옥마을을 또 다시 찾게 하는 길이기도 하다.요컨대 한옥마을만의 발전을 지향하지 말고, 전주시 전체가 한옥마을이라는 관점에서 발전전략을 수립하고 실행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곧 전주시의 ‘문화력(culture power)’을 키워나가는 길이며, 또한 실질적인 ‘문화수도’로 성장하는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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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3.03 23:02

기록문화전시관이 절실한 이유

안동의 한국국학진흥원에는 30만 여 점의 한국학 관련 자료가 소장되어 있다.주목해서 볼 것은 출판인쇄문화의 정수인 ‘목판 10만장 수집 운동’을 2003년에 시작하여 작년 기준으로 6만5000여 책판을 모았다. 전국의 문중이나 서원에서 관리가 부실하거나 도난 염려 등 보관하기가 어려워 기탁 받은 국학 자료들이다. 안동에 있는 것도 아니고 각 처 문중이나 서원에서 보관하고 있는 유교 관련 목판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목표로 하고 있다. 지난해 안동 답사 때 한국국학진흥원에 들러 관람하면서 전주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많은 완판본 책들 다른 지역으로 유출전주는 전라감영에서 판각했던 목판이 보존되어 있고 완판본을 만들었던 고장이 아니던가?전주라는 지명의 브랜드로 만들어진 문화콘텐츠가 존재하고 기록문화로서 더 가치가 있는데 소홀한 점은 없었는지 생각해 본다.기록은 시간과 함께 퇴적되고 화석이 되어 역사로 만들어진다. 종이에 남겨진 기록과 금석에 새겨진 문자는 역사의 정사로서 증명이 되는 징표이다. 모든 것이 디지털로 변화되어가는 추세에 기록문화도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필자의 주변에도 개인이 수집한 고문서, 사진첩, 희귀본 등 지역문화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분들이 많이 있다. 얼마 전에 퇴임한 지인과 담소를 나눈 적이 있었다. 지인께서 평생 동안 모은 지역문화 자료를 서울 모 박물관에서 구입하려고 의사타진을 했었다고 한다. 선배는 “돈의 가치를 떠나 우리지역 문화재가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면 어떻게 되겠느냐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면서 “소장 자료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다“며 고충을 털어놓았다. 솔직하게 말하면 누구든지 자료에 대한 가치를 제대로 지불하면 넘겨줄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전주를 중심으로 전라도 지방에서 출판한 완판본의 경우 많은 책들이 다른 지역으로 유출되었다. 국내에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다.조사에 의하면 해방 후 전주에서 유출된 다량의 완판본이 서울 김삼불 교수 집에 보관 되어 있었는데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소실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아픈 사건이다. 종이책은 개인이 보관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고인의 유품을 자식들이 보존하는 경우도 있지만 멸실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금도 우리지역의 많은 자료들이 없어지면서 역사도 지워지고 있다.최근 서울에도 기록문화전시관을 준비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우리 지역도 때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지금이라도 자료 수집 등 우리 것 찾기에 나설 때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전주는 한국의 기록문화를 대표하는 성지라고 불리어도 손색이 없다. 기록문화전시관이 전주에 세워진다면 개인 소장본은 기탁을 하여 영구적으로 보존할 수 있고 관에서는 소장 자료를 확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남아있는 기록 없어지기 전에 대책을관에서는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분들에게 합당한 예우를 다하여 더 이상 자료가 외부로 유출 되는 일이 없도록 대책을 세워야 한다. 기록문화전시관에는 책, 문서, 사진, 영상 등 우리 지역의 총체적인 기록이 담겨져야 한다. 마을의 역사는 대를 이어 터를 잡고 살았던 노인이 잘 안다. 노인의 구술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마을의 역사가 되고 설화가 되는 것이다. 기록으로 남겨 놓지 않고 노인이 돌아가시면 역사도 묻혀버린다. 생존해 있을 때 기록을 남겨 놓는 작업은 여러 분야에서 실행되어야 한다. 지금도 대학이나 연구 단체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병행해서 그 기록된 자료를 모아 전시할 공간이 필요하다. 우리지역의 자료는 우리가 챙겨야한다. 기록의 보존은 절실한 문제이다. 남아 있는 기록마저 없어지기 전에 대책을 세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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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2.24 23:02

창조적 기획자

새로운 세기가 열리고 ‘문화산업’, ‘문화융성’, ‘창조경제’라는 용어가 상당히 많이 사용되고 있다. 사실 산업이나 경제라는 용어가 문화나 창조라는 용어와 결합할 수 있는가? 라고 다들 의아해 할 것이다. 그러나 표현은 모두가 다르지만 결국 지향하는 점은 같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문화를 통해 부가가치를 유발하고 예술과 문화가 하나의 거대한 산업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정부의 생각이 깔려 있다. 자원이 부족한 한국은 미국과 영국의 성공사례-4대 뮤지컬, 해리포터-처럼 고부가가치의 문화산업이 새로운 성장동력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전북 문화예술 산업화 잠재력 충분그렇다면 우리는 이 지역에서 과연 자생력이 있는 예술가로, 기획자로, 예술단체로 살아갈 수 있을까? 문화산업은 특정 대기업이나, 서울과 같이 탄탄한 소비계층이 있어야 활성화 될 수 있는 것인가? 기획자로서, 예술경영을 공부한 필자로서도 쉽게 답을 낼 수 없는 질문이지만, 충분히 가능성과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전라북도는 ‘예향의 도시’이고 문화적 자산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다. 특히 최근에 더욱 확대되고 있는 ‘한류’의 바람을 탄다면 문화산업을 발전시킬 충분히 가능성과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중적 인기가 있는 공중파 방송이나 영화가 아닌 문화예술을 통해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고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방법은 분명히 존재하고 우리가 좀 더 크게 눈을 뜨면 그 실체를 바라다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2007년에 처음 예술경영지원센터에서 열린 예술경영 전문인력 양성프로그램의 워크숍에 참석했을 때 참석자 모두에게 제시된 ‘과연 기획자도 예술가인가?’라는 질문은 워크숍 기간 내내 필자를 붙잡고 있었다.필자가 내린 결론은 ‘기획자도 예술가이다’였다. 그리고 워크숍이 끝나고 나서 공연 기획자로 살아가면서 여기에 행정가와 경영인을 추가하였다. 결론적으로 기획자는 단순히 예술인을 지원하고 사업을 정리하고 수행하는 매니저여서는 안된다. 새로운 형태의 예술을 만들어내고, 창조적 아이디어와 발상의 전환을 위해 고민하고 스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많은 예술가와 소통해야 진짜 ‘기획자’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필자는 이런 기획자를 ‘창조적 기획자’라 부르고 싶다. 지금도 필자는 이런 기획자가 되기 위해 부족하지만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다양한 아이디어·발상의 전환 필요세계적인 뮤지컬 제작 프로듀서인 카메론 매킨토시가 영국 신문에 난 낡은 흑백사진을 보고서 세계적인 뮤지컬 ‘미스 사이공’을 제작했듯이 우리는 우리 주위에 많은 좋은 스토리와 소재가 있음에도 놓치는 경우가 많다. 예술가가 예술적 영감을 통해 이러한 창조적 작업을 수행하듯이, 기획자도 항상 다양한 아이디어와 발상의 전환을 통해 새로운 무언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메모하고 소통하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좋은 창조적 발상은 이를 실현할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실현시켜 나가야 한다. 필자는 전라북도가 ‘문화’를 통해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고 더 많은 사람과 돈이 모이게 만들기 위해서는 이런 기발한 아이디어를 발굴하고 새로움을 추구하는 ‘창조적 기획자’가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많은 창조적 기획자들이 전라북도에서 더 좋은 문화예술 환경을 만들어내고 열정과 신명으로 활동하는 모습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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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2.17 23:02

졸업시즌 즈음에

해마다 2월이면 우리나라 곳곳이 시끌벅적하다. 유치원을 포함해 각 학교마다 그동안의 배움을 정리하고 상급학교로, 또는 사회로 인재를 배출해내는 마무리 의식인 졸업식이 한창이기 때문이다. 졸업식은 학교생활을 마무리 하는 의미도 있지만 새로운 출발을 다지는 디딤돌 역할도 겸하고 있어 감사와 축하를 해 주는 의미 또한 크다고 할 수 있다.대학 예술전공 인력들 현장 진출 없어하지만 진학과 취업이라는 명분에 가려 그 의미가 퇴색된지 이미 오래 전이고 특히, 대학교의 경우 예전 같으면 졸업하고 난 뒤 따르던 사회적 특권과 취업에 대한 보장은 지나간 과거 속에 묻혔고 오히려 현대 사회가 실질적으로 학문적 능력이나 인격적 성장을 중요시하기보다는 학교의 형식적인 졸업증명서와 자격증 그리고 제일 중요한 취업 여부에 따라 그 사람을 평가해 버리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더욱이 불황에 취업난이 이어지면서 이런 사회적 현상은 쉽게 변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드는 반면에 대기업을 제외한 대다수의 중소기업들은 심각한 인력난에 허덕이고 고통을 받는 것을 보면 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사회적 흐름 속에 문화예술분야 특히, 공연계가 겪는 인력난의 고통은 심각한 수준에까지 다다르지 않았나 싶다. 물론 대학마다 예술전공과에서 배출되는 인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들의 발길이 현장으로 이어지지 않는 다는 것이다. 다만 취업이 주목적이 되어 자격요건 갖추고 예술인 강사가 되는 게 대학 생활의 최고의 목표가 되어 버린 건 아닌지 싶기도 하다. 그러한 행위들이 잘 못 되었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공연 현장과의 함께 할 수 있는 방안을 찾고 공유하는 노력들이 필요하다는 않나 하는 생각이다. 작년 가을인가 어느 모임에서 이런 말을 한 기억이 있다. “전라북도 공연 예술계가 위험하다. 이런 추세가 계속 이어진다면 양과 질적인 부분 특히, 질적인 부분에서 그 수준은 지금보다 못 할 것이라고….” 이유는 간단했다. 현장에서 같이 땀 흘리고 부대끼는 인자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러한 인력난 해소를 위해 문화예술위원회(이하 예술위)나 예술경영 지원센터(이하 예경)에서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서 문화기획자나 민간 공연장 스태프(조명, 음향)을 교육하고 양성하는 인력지원 사업을 행하고 있는 건 참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아쉬움이 있다면 정작 무대에서 공연에 임할 공연자에 대한 지원 사업이-사회적 기업과는 다른- 거의 없다는 것이다. 색안경을 끼고 보면 별 생떼를 다 부린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곰곰이 생각을 해 볼 필요는 분명히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예술위와 예경의 지속 사업으로 인해 문화기획 또는 공연 기획자들이 예전에 비해 많은 활동을 하고 있고 또, 공연 스태프들도 점차 그 수준이 올라 갈 거란 믿음이 있다.공연자 인력지원 사업 시행 필요이렇듯 인력지원사업의 효과는 분명 그 빛을 발하고 있다. 공연자 인력지원 사업도 시행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아니면 지자체가 자체 예산을 가지고 시도를 해보며 어떨까 싶기도 하고, 또 다른 방안으로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관립단체에 연수단원성격의 사업을 시도 해 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지 아닐까 싶다. 뜻은 있으나 현실의 어려움 때문에 힘들어 하는 젊은 공연자들에게도 분명 무대로 향하고 싶은 시작점이 될 수도 있으며 또, 성장을 통한 현실 극복의 방안을 찾고 당당한 예술인으로서 역할을 할 것이며 더불어 공연예술계의 희망으로 자리매김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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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2.10 23:02

박물관은 스토리 제작소 되어야

현대사회는 스토리텔링(story-telling)에 목말라 있는 것 같다. 신문·방송사는 수시로 ‘재미있는 스토리의 발굴’을 강조하고 있으며, 거의 모든 자치단체도 ‘스토리를 적극 활용한 문화관광’을 주창하고 있다. 이런 추세에서 본다면 박물관은 반성할 여지가 많은 것 같다. 왜냐하면 가장 많은 스토리를 가진 곳이기 때문이다.익숙한 유물 이야기만 확대 재생산사실 스토리를 발굴하고 주변에 알리는 작업이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박물관이 그렇게 하지 못한 배경에는 소위 ‘교과서 속 문화재’나 ‘지정 문화재’의 영향이 컸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박물관도 ‘명품 유물’ 혹은 ‘중요한 문화재’만 귀히 다루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러한 작업에 소홀해진 것임에 틀림이 없다.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우리에게 익숙한 유물의 이야기만 계속 확대 재생산되고 있을 뿐이다.그렇지만 박물관의 전시장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토제 등잔(燈盞)에도 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손으로 간단하게 빚어 구웠고 기름 위에 심지가 타오르면서 검게 그을린 흔적도 그대로 남아있지만, 고대문화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왜냐하면 인간의 활동 폭을 밤까지 연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사실 토제 등잔 이전에 받침이 있는 등잔형토기(燈盞形土器)도 있었고, 말 등에 올려서 어둠을 물리치던 등울도 있었다. 하지만 6세기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토제 등잔이 사용됨으로써 진정한 조명(照明)의 시대가 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등잔 여러 개를 목제나 금속제의 받침 위에 올려놓아 조도(照度)를 상당량 높일 수 있었고, 필요하다면 개별 등잔을 방바닥이나 탁자, 서가 위에 올려놓아 편의성도 대폭 늘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경주와 부여의 고대 왕궁과 사찰에 빠짐없이 토제 등잔이 출토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무나 흙으로 만든 남근(男根) 역시 등잔처럼 고대문화를 설명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유물이다. 하지만 이것에 대해서도 제대로 아는 이는 매우 드물 것으로 생각한다. 원래 남근은 신(神)에게 바치는 중요한 공헌물(貢獻物)이었다. 고대사회는 기본적으로 농사 이외에 전쟁과 제사가 가장 중요했다.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장정(壯丁)이 필요하였고 충분한 식량도 준비되어야 했다. 따라서 인구생산력을 증대하면서 농업생산력도 증대해 나가는 것이 필수적이었고, 그러한 바람에 적합한 종교적 상징물[symbol]이 바로 남근이었다. 각종 제사에 남근이 중요한 공헌물로 사용되었던 이유이다. 이러한 흔적은 경주 및 부여의 왕궁이나 도로, 논에서 실제 유물로 확인된 바 있다. 새로운 이야기 발굴해 전달해야이렇게 등잔과 남근이 빠진 고대사회의 이해란 원래의 모습에서 한창 부족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이러한 사태는 박물관 직원들이 자초한 측면이 강하다. 대중의 관심을 쫓아서 국보급의 유물이나 교과서에서 다루는 유물만 포커스(focus)를 맞추다 보니 빈약한 스토리텔링으로 단조로운 전시와 교육을 하게 된 것이다. ‘문화의 주머니’를 새로운 이야기로 채워나가기 보다는 주머니 속의 이야기만 자꾸 꺼내어 쓴 셈이다.박물관은 이제부터라도 스토리 제작소가 되어야 한다. 전공분야의 연구를 보다 깊게 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발굴할 뿐만 아니라 이것을 주변에 잘 전달해서 개개인의 문화적 소양을 높이거나 새로운 문화적 창조의 밑거름이 되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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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2.03 23:02

전주문화의 블루오션

전주한옥마을은 주말이면 관광객들로 넘쳐난다. 가끔 한옥마을에 들어서면 전주 사람이지만 낯선 곳에 온 이방인 같다. 한옥마을은 관광 수요만 볼 때는 성공적인 모델임을 부정할 수 없다. 도심 한복판에 한옥이 밀집돼 있고 주변에 유서 깊은 문화유적지와 전통문화도시로서 기본적인 인프라가 조성되어 있다는 점이 적중했다. 한옥마을을 찾는 여행자 중에는 젊은이들이 많다. 그들이 찾는 목적은 볼거리도 있지만 요즈음에는 전주의 맛을 찾는 투어가 대세를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입맛을 당기는 전주의 맛이 관광객을 몰고 오는 현상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전주의 맛이 바래지고 정감이 없어질 때 한옥마을의 매력도 잃어버릴 수 있다는 말이다. 완판본을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한옥마을을 보면서 아쉬운 것은 한옥에 대한 낯섦이다. 한옥의 가장 큰 매력은 지붕이다. 버선코처럼 살포시 올려진 지붕은 하늘과 경계를 이루며 이상의 세계를 향한 한옥의 상징이다. 아름다운 곡선의 미학을 살린 지붕은 한옥의 아름다움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결정체이다. 그러나 한옥마을의 지붕에는 백로 옆에 앉은 까마귀처럼 듬성듬성 보이는 강판 기와가 보여 아쉬움이 남는다.안동 하회마을이나 양동마을에 비하여 한옥마을은 고가(古家)의 운치는 기대할 수 없지만 현대식 강판의 지붕은 한옥마을의 정체성과 가치를 생각해서라도 심사숙고해야 할 문제이다. 과연 한옥마을이 현재와 같이 지속적으로 관광수요를 창출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한옥과 한지, 한식으로 대표 되는 전주의 문화콘텐츠는 다른 지역에 비해 우월한 가치가 있지만 방심하다가는 무너질 수도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만 한다.한옥마을이 외형적인 전주문화의 상징이라면 전주인의 정신을 표현한 내적인 문화는 무엇인가? 바로 조선 중기 이후 전주에서 목판으로 만들어진 전주의 책 완판본이다. 전라감영 인청에서 만들어진 책판이 전북대학교박물관에 잘 보존되어 있고 한옥마을에는 완판본문화관이 들어서 있다.시대를 앞서 문명의 한 획을 그었던 전주 사람들의 지식수준과 전주문화의 우월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완판본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자.완판본은 서울의 경판본, 대구의 달성판본, 안성의 안성판본에 비해 판본의 종류나 규모에서 단연 최고였다. 전주는 완판본 간행의 필수인 질 좋은 한지와 판재, 각수의 3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전주는 중국과 일본과도 교역을 하는 상업도시로 물산이 풍부한 지식산업의 거점이었다.완판본의 흥행 이유도 경제적 안정으로 여유가 생긴 전주 사람들이 책을 읽는 풍토가 조성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전주인의 지적욕구의 분출이 완판본에서 생겨난 것이다.자치단체마다 수많은 예산을 들여 문화콘텐츠를 발굴하고 있다. 전주는 완판본이라는 고유한 문화자산이 있는데도 더딘 걸음을 하고 있다. 조선 시대 전주천변에서 책을 발간해 전국에 유통시킨 전주인의 뛰어난 혜안을 오늘에 되살리는 문화혁명을 지금부터 시작하자.근현대 기록을 담은 책도 광의(廣義)의 완판본이다. 완판본을 중심으로 근현대자료까지 모아 전주에 ‘기록문화전시관’을 설립한다면 전주문화의 블루오션이 될 수 있다. 전주에 기록문화전시관 설립을〈조선왕조실록〉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도 전주사고본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조선 시대에 전국3대 출판도시로서 전주의 위용은 완판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러한 찬연한 역사성과 정체성이 있는 문화콘텐츠가 바로 전주문화의 블루오션이다. 전주완판본을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는 과업도 험난하겠지만 도전해볼 가치가 있다.다른 지역에서는 할 수 없는 전주만의 문화콘텐츠가 있음에도 발전시키지 못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누를 범하지 말자.△이종호 상무는 1999년 〈표현〉 신인문학상을 수상한 시인이며 〈문예연구〉 편집장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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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1.27 23:02

디지털시대의 '문화적 감성'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되고 15년이 지나면서 사회는 급속도로 변화되고 있다. 아날로그 시대가 가고 이제는 모든 생활에서 디지털이 지배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디지털 환경, 특히 스마트폰과 카메라, 디지털 TV와 디지털 영화와 같이 초고화질과 빠른 속도가 담보되지 않으면 외면당하는 그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으며 이런 디지털 미디어 장치에 우리는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지배되어 이런 장치 없이 생활하는 것을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기술과 감성의 결합, 새로운 문화로90년대 일명 ‘삐삐’와 ‘민중가요’, 체류탄 가스 가득한 대학가의 풍경과 대중가수들의 새로운 풍의 노래들, 휴대가 가능한 워크맨에서 이어 등장한 286, 386 컴퓨터를 통해 처음 디지털과 만났던 신세대(X세대, N세대)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에서 두 가지 요소가 혼합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냈다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 우리는 동무들과 산과 냇가, 들로 뛰어다니며 자연과 소통했다. 그것은 지금처럼 개인적인 놀이 기구가 없었던 탓과 경제적 상황이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지만 이를 통해 우리는 자연과 함께하며 ‘감성’을 키울 수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점점 함께 즐 함께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는 모습은 사라져가고, 스마트폰과 텔레비전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지 않은가? 점점 개인화되고, 분열을 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아마도 옛 기억속의 따스한 감성을 그리워하는 지도 모르겠다. 디지털과 다른 아날로그적인 향수, 그 안에서 우리가 함께 했던 문화적 동질감을 최근의 영화 ‘국제시장’, ‘변호인’, 그리고 예능프로그램 ‘토토가’, ‘불후의 명곡’ 등에서 느낄 수 있었기에 사람들은 열광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빠르게 변화하는 디지털 사회에서 아련한 그 시대, 그 시절의 기억에 우리는 감정이입을 하고 동화된 것이리라!하지만 이것이 하나의 큰 문화적 흐름으로 이어질 지는 아직 판단하긴 어렵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러한 복고주의 바람이 문화적으로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융합을 통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고 확대할 것이며, 최근에 예능에서 보여주었던 90년대 대중가요 쇼나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와 같이 과거와 현재, 미래의 문화적 감성을 제시함으로써 인기를 얻은 것처럼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융합, ‘감성’과 ‘디지털 기술’의 결합이 새로운 문화적 영역을 더욱 확대할 것이라 기대된다.그렇다면 지금의 새로운 시대에서 공연예술은 어떻게 변화 발전하여야 할까? 광범위성과 동시간성을 가진 디지털 매체와 다른 현장에서 아날로그적으로 만나 소통해야 하는 우리 공연예술은 현장예술로서의 ‘문화적 감성’에 주목하고 관객과 진정성 있는 예술적 소통을 해야 한다. 또한 과거에 머물지 않으며 끊임없이 실험하고 도전해야 하리라. 우리 스스로 실패라 규정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가장 잘하는 우리만의 예술을 통해 새로운 문화적 흐름과 따뜻한 ‘감성’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한 달에 한 번은 문화예술 즐기자문화는 예술가들만이 만들고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들고 함께 향유하는 것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이 시대에서 메말라가는 우리의 감성창고를 우리 주변의 많은 현장예술을 찾아 함께 웃고 울며 즐기면서 채워보면 어떨까? 적어도 1달에 1번은 어떤 장르의 공연도 좋고 다른 예술도 좋으니 현장에서 즐겨보는 예향 전북도민이 더 많아 지길 기대해 본다.△홍승광 단장은 전북대 법대와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을 졸업했으며 국립창극단 총무·정동극장 과장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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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1.20 23:02

문화편식?

시대가 변하고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사람들의 생활양식에 많은 변화가 이루어졌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변화를 보여 준 것 중의 하나가 ‘의식주(衣食住)’의 변화가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고대 원시 사회 아니, 인류의 시작과 함께 의식주는 사람이 살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음식 가려서 먹으면 안 되듯이급속한 산업화와 경제 성장이 이루어지면서 의식주의 문화도 많은 발전과 변화가 이루어 졌다. 특히 ‘식(食)’ 문화는 다른 두 요소 보다 더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그와 더불어 음식을 가려서 입맛에 맞는 것만 먹는 ‘편식(偏食)’이라는 말이 자주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사회적 이슈가 되기도 했고, 지금도 이 문제는 진행형이지 않나 싶기도 하다.우리는 편식을 하면 몸 건강에 이롭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기 때문에 당뇨, 영향결핍, 청소년 골다공증 같은 병들이 초등학생이나 청소년들 사이에서 발병되고 있다는 사실은 또 다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조금은 극단적인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문화도 한쪽으로만 쏠리는 ‘문화편식(文化偏食)’(?) 현상이 발생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순수예술, 그리고 공연예술분야는 조금은 심각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이는 축제나 행사와는 또 다른 부분일 수 있겠으나 자칫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면 흔히 말하는 그들만의 리그로 보여 질 수 있다는 것이다. 공연 관계자의 가족 및 친지 그리고 몇몇 학생들 뿐 만이 아니라 다양한 일반 관객층이 함께 할 때 그 공연의 가치는 조금은 다르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이러한 현상은 어는 한쪽만의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문화생활이란 영화 관람이 전부인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다 순수예술이나 공연 얘기를 꺼내면 아련한 추억속의 빛바랜 사진을 보는 듯 잠시, 감회에 젖어 허탈한 웃음을 웃기도 한다. 나도 함께 웃는다. 하지만 그 웃음의 의미는 분명 다르다는 것은 서로가 알고 있다. 몇 년 전부터 공연장에서 관객들에게 이런 말들을 하곤 한다. “연극을 보시러 저희 공연장을 찾아 주셔서 감사 합니다. 하지만 연극만 보지 마시고 다른 공연-연주회, 창극, 무용 등-도 보시면 더 좋습니다. 그리고 미술관 박물관에 가셔서 전시그림이등도 많이 보십시오.” 그러면 객석이 순간 조용해지며 ‘뭐지?’하는 눈빛을 보낸다. 그러다 “음식을 편식하면 어디가 아플까요?” 하며 물으면 “몸이요!” 라고 답이 돌아온다. 그러면 다시 “문화(공연)를 편식하면 어디가 아플까요?” 물으면 순간 조용해지다가 “정신 아닐까요?”라고 말하면 잠시 후, “아~~”하며 웃는 많은 관객들을 볼 수 있었다. 더불어 “우리 지역은 인구대비로 계산하면 서울보다 더 많은 공연장이 있고, 공연 팀들이 있고, 공연이 올라갑니다. 조금만 더 관심가시고 부지런 하시면 대도시 사람들 못 지 않은 공연 문화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복 받으신 거예요.” 이렇게 말을 하며 마무리를 하면 진짜(?)라는 반응이 나오기도 하지만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다만 관심의 차이고 행동의 차이일 뿐, 다른 특별함은 없다. 특히 공연 문화를 즐기려면 조금의 부지런함이 꼭 필요 하다. 이는 일반 관객들 뿐 아니라 공연종사자들에게도 필요한 부분이 아닌가 싶다. 다른 장르의 다양한 공연을 봄으로써 또 다른 뭔가를 발견하게 되고 그 힘들이 결국 자신들의 공연에 도움이 되면, 그 혜택은 공연장을 찾은 관객들과 공연을 주최한 당사자들에게 돌아 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이 공연의 순기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다양한 장르 문화예술 경험해야모쪼록 2015년 새 해에는 여러 장르의 좋은 공연들이 무대에 -전시장에- 올라가고, 다양한 연령층의 많은 관객들이 공연장을 찾아 심각하고,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 모습들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었으면 하는 기대를 가져본다.△백민기 대표는 극작가이자 배우이며 연출가다. (사)푸른 문화·협동조합 문화 숲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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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1.13 23:02

법고창신

새해를 맞아 신문지상에 사자성어(四字成語)가 유행이다. 개인적으로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을 제시하고자 한다. 옛 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뜻이다. 필자에게는 선조들의 정신·문화유산을 다양하게 접하면서 진정으로 과거의 조상들을 이해하게 되며 그 과정에서 얻게 된 통찰력에다 약간의 상상력을 더해서 보다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옛 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 창조서예를 예로 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많은 서예가들은 옛 명필을 배우면서 자신의 글씨를 완성한다. 처음에는 붓을 잡고 운용하는 요령을 배운 다음에 선생이 직접 써준 글씨를 그대로 옮겨 쓰게 된다. 이 단계를 넘어서면, 학습자가 스스로 법첩(法帖)을 보면서 글씨를 써나가는 임서(臨書)를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글씨를 쓰는 것보다 주의 깊게 글씨를 살펴보면서 글씨의 형태, 필획의 간격과 필선의 변화, 무게중심을 익히게 된다. 좀 더 고등한 단계로 진입하면, 역대 명필 글씨의 시대별 비교와 분석이 가능하게 되고 수많은 서예이론과도 접하게 되면서 과거의 글씨를 다시 한 번 깊게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글씨를 이루게 된다. 한호(1543~1605)의 석봉체(石峯體)나 김정희(1786~1856)의 추사체(秋史體)가 대표적인 사례이다.이와 유사한 사자성어로는 온고지신(溫故知新)과 여고위신(與古爲新), 입고출신(入古出新)을 들 수 있고, 박고통금(博古通今)이나 학고수성(學古修性)도 같은 범주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표현이 존재한다는 것은 조상들이 ‘법고창신’의 정신으로 살고자 늘 애를 썼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기야 1950년대까지만 해도 몇몇 화가에 의해서 이러한 전통이 부분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예컨대 이중섭(1916~1956)과 김환기(1913~1974)는 청자(靑磁)의 문양[童子文]과 백자(白磁)의 형태를 각각 재해석하여 명품 현대회화로 재탄생시켰다.하지만 복잡한 21세기의 현대사회에 머물러 있는 우리에게는 매우 어려운 과제이기도 하다. 세상이 너무 복잡하게 얽혀있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적으로 표현하자면 실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을 거듭하고 있다. 게다가 현대인은 현재의 시간만을 중요시하며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기에 분주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전혀 자기 확신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불확실성은 더욱 증폭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일수록 조상들처럼 과거를 현재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려 애쓰고, 그 과정에서 우리 스스로 시대의 변화상을 읽어 내거나 그 시대에 맞는 것을 창조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세상 복잡할수록 되돌아보는 게 지혜그 옛날 조상들이 이룩했던 서예와 같은 훌륭한 학습제도, 견제와 균형이 조화롭게 이루어지던 정치체제,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옥석을 가려내는 인재등용시스템,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균형이 잡힌 인재를 길러내던 교육체제, 주변의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살고자했던 생태관(生態觀) 등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되돌아보아야 할 소중한 가치이다. 그리고 길을 잃고 헤매는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던져주는 방향성이나 대안이 될 수도 있다. 즉 오늘의 문제나 미래의 예상과제를 해결하게 해주는 방향타 역할을 할 수 있다.세상이 복잡할수록 되돌아보는 것도 지혜이다. 새로운 것은 완전한 무(無)에서 창출(創出)되지 않는다. 법고(法古)하고 또 법고(法古)함으로써 창신(創新)해야 할 때이다.△유병하 관장은 서울대에서 고고미술사학을 전공했고 국립춘천·공주박물관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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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1.06 23:02

후백제사 복원 위한 바람들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는 후백제 멸망의 비통함을 토로했다. 우리 역사에서 두 번의 큰 비극 중 후백제가 망하면서 삼국의 책을 다 모아 놓은 전주의 서고가 불타버린 것을 하나로 꼽았다. 물론 승자가 역사를 기록하기 때문에 후백제의 역사를 전해주는 문헌이 없다. 그리하여 혹자는 후백제사를 제2의 가야사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후백제처럼 문헌이 없었던 가야사는 가야 사람들이 남겨 놓은 유적과 유물로 거의 복원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향후 후백제사를 복원하기 위해 최소한으로 추진됐으면 하는 몇 가지의 바람들을 당부하고자 한다.운봉고원 철·사신 왕래 길 연구 필요후백제가 융성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견훤은 무진주에서 나라를 세운 뒤 남원 실상사에 큰 관심을 두어 조계암 편운화상 부도에 후백제 연호인 정개가 유일하게 전해진다. 우리나라에서 철불이 처음으로 만들어진 실상사에 왕실 차원의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은 운봉고원의 철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후백제의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삼국시대 기문국부터 그 가치를 인정받은 철이 절실했을 것이다. 운봉고원의 철과 그 역동성을 규명하기 위한 학술조사가 반드시 필요한 대목이다.후백제와 오월의 사행로를 복원해야 한다. 견훤은 무진주에서 나라를 세운 뒤 45년 동안 오월과 돈독한 국제외교를 펼쳤다. 중국 절강성 항주에 도읍을 둔 오월은 중국 청자의 본향으로 우리나라의 청자기술도 오월의 월주요에서 전래됐다. 거의 반세기 동안 양국의 사신들이 오갔던 사행로가 중국 청자기술의 전파 루트로 추정된다. 921년 동리산문 경보가 30년 중국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자, 그를 영접하기 위해 견훤이 만경강하구 신창진을 찾았다. 김제시 청하면 동지산리 소상산 부근 신창진은 후백제의 국제교역항으로 추측된다.진안 도통리를 떠난 초기청자가 어디로 유통됐는지 그 흔적도 찾아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중국식 벽돌가마에서 초기청자만을 생산하다가 갑자기 가마터의 문을 닫았다. 아마도 수만 점 이상의 초기청자가 진안 도통리를 떠났지만, 지금까지 진안 도통리 생산품으로 학계에 보고된 초기청자가 한 점도 없다. 다행히 전주 동고산성을 중심으로 후백제와 관련이 깊은 절터와 산성에서 초기청자가 출토되어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후백제가 진안 도통리 초기청자 요지를 운영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밝히기 위한 발굴조사가 절실하다.후백제 불교미술의 우수성과 그 아픔을 잊어선 안 된다. 완주 봉림사지 석탑과 석등, 불상이 후백제 불교미술의 존재와 그 예술성을 세상에 알렸다. 견훤의 고향으로 가는 길목에 완주 봉림사지가 있었다면, 후백제와 신라의 사신들이 오갔던 사행로가 통과하던 백두대간 육십령 부근에 장수 개안사지가 있다. 이 두 개소의 절터를 중심으로 후백제 때 창건됐거나 융성했던 것으로 밝혀진 절터에 대한 발굴조사가 추진됐으면 한다.진안 도통리 청자 유통경로 찾아야거의 모든 사람들이 후백제는 기록이 없다고 한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단지 문헌 기록이 없을 뿐이지 후백제 사람들이 남긴 유적과 유물이 풍부하고 그 종류도 다양하다. 후백제가 융성할 때 나라가 갑자기 망해 후백제의 유적과 유물에서 위풍당당함이 느껴진다. 비록 후백제가 반세기라는 짧은 역사를 마감했지만 전주에 도읍을 두어 천년 전주를 있게 한 역사의 뿌리가 됐다. 후백제가 남겨놓은 매장문화재는 후백제사의 블랙박스와 같은 것이다. 후백제사가 복원될 때까지 후백제를 꼭 기억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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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2.30 23:02

차이를 인정해야 평화가 온다

고등학생이 스스로 만든 인화물질을 들고 토크콘서트장에서 난동을 부리다 붙잡히는 사건이 일어났다. 우리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라 충격이 더 컸을 것이다. 일부 언론에서 이른바 종북콘서트라고 낙인찍어서 마녀사냥을 해댄 그 행사이다. 당사자들이 아무리 종북이나 친북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쳐도 소용이 없다. 그저 누군가의 눈에 종북으로 비치고 그 생각을 마구잡이로 퍼뜨리기만 하면 당사자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 낙인은 확산된다. 이데올로기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건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사건 이후 벌어지고 있는 기현상들이다. 철없는 고등학생을 의사, 열사라 칭하고 후원금을 모으는 등 정상적인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이어진다. 이미 반세기를 훌쩍 넘긴 이념 전쟁의 질긴 후유증이 어린학생들의 의식에까지 끔찍한 증오의 싹을 대물림하고 있는 셈이다. 반세기 훌쩍 넘긴 이념 전쟁서양의 역사에서 마녀사냥의 어두운 기억은 후세인들에게 집단적 증오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낳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미국 개척시기 세일럼 마을의 마녀재판에서는 어린 소녀들의 무지와 불장난이 삽시간에 어른들 사이의 증오로 이어져서 짧고 강렬한 집단적 비극을 만들어냈다. 유부남 목사를 유혹하려던 한 소녀의 빗나간 사랑과 저주, 거짓 증언이 온 마을에 증오의 연쇄반응을 일으킨 결과였다. 아더 밀러는 1950년대 초반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치던 미국사회에 이 이야기를 꺼내옴으로써 통렬한 교훈을 전하려 했다. 수백 명을 투옥하고 수만 명을 조사위원회에 회부하는 등 삽시간에 광풍을 일으킨 매카시즘은 실로 무서운 기세로 미국사회를 잠식한 사건이다. 극작가 자신은 물론 희극배우 채플린이나 음악가 번스타인 등 유명한 대중적 인기인들도 이 칼날을 피할 수 없었다. 아더 밀러가 〈시련 crucible〉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세일럼의 마녀재판 이야기에는 철없는 소녀 애비게일이 등장한다. 그녀는 자신의 빗나간 사랑과 그로 인해 겪는 모욕감을 해소할 탈출구로 온 마을을 마녀사냥의 광풍에 휩싸이게 하는 길을 택했다. 흥미롭게도 매카시즘의 창시자인 조셉 매카시 의원도 온갖 추문과 범법행위로 인해 파멸 직전에 있던 정치인이었다. 오래 전에 사라졌어야 할 매카시즘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고비 때마다 고개를 쳐드는 것은 우리 사회의 집단의식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저 냄비 투척 고등학생은 어찌 보면 그 스스로 어처구니없는 선동의 희생양일 뿐이다. 그리고 그 일은 엄히 꾸짖고 타일러서 집에 돌려보내는 것으로 마무리되어야 한다. 잡아가두고 처벌을 하는 것으로 저 빗나간 증오심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누군가의 주장대로 오도된 ‘열사’의 길을 가도록 부추기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생각을 가진 젊은이들이 늘어나지 않게 하는 일이다. 여전히 그리고 점점 더 빠르게 번져가는 우리 사회의 레드콤플렉스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고민해야 할 때이다. 그리고 그 궁리는 이 뿌리 깊은 피해의식의 존재를 인정하고 들여다보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두말할 것 없이 생각이 다른 이들과 공존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근본적 가치이다. 레드 콤플렉스 극복 방안 고민할 때북한에도 도깨비가 아니라 ‘사람이 살고 있다’는 건 이미 몇 십 년 전에 다 알려진 이야기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동강 맥주가 맛있다는 말이 북한 체제를 찬양하는 소리로 들린다는 것은 참 무섭고도 슬픈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슬픈 생각을 떨치지 못 하는 이들의 존재도 엄연한 실체로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오래된 피해의 기억을 어떻게 새로운 상생의 기운으로 바꾸어낼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파스칼 키냐르의 말대로 우리가 잊은 것들은 결코 우리를 잊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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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2.23 23:02

가까이에 있는 문화예술교육

문화예술교육지원법제정 이후 10년, 문화예술교육은 국민의 문화적 삶의 질 향상과 사회의 문화역량 강화를 위해 사회적 흐름에 의해 다양한 정책적 방향으로 이 땅에 뿌리내려가고 있다. 허나 그간의 세월을 무색하게도 문화예술교육의 수요 당사자가 될 국민에게는 그 존재의 가치가 아직은 인식되지 못하고 있어, 주체적으로 누리고 참여하는 데 있어서 수동적 상황이다. 문화예술교육이 세분되고 확장되어 가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현재 상황을 볼 때 누구를 위해, 왜, 문화예술교육이 존재하는지에 대해 다시금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때이다. 문화예술교육지원법 제정된지 10년잦은 눈 탓에 겨울나기를 걱정하고 있던 며칠 전, 나는 뜻밖의 선물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전북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가 발행한 전북권역의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 한 해 동안 펼친 따뜻하고 생기 있는 문화예술교육 이야기 묶음의 자료였다. 자료집을 펼쳐보니 글보다는 생생한 현장의 이미지가 먼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곳곳의 현장에서 함께 어울려 사계절 동안 흘렸을 땀과 열정이 그대로 전해지고 상상이 돼 이 겨울의 추위를 잊어버리기에 충분했다. 자료집은 한 해의 지원되었던 사업을 섹션별로 구분하여 이해할 수 있도록 소개되고 있었다.어떤 지역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자신이 살아온 의미 있던 시절의 기록을 담기 위해 색연필을 들었고, 어디서는 귀농인들이 마을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 호미를 들고 꽃을 심으며 마을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현장의 장면도 눈에 들어왔다. 또, 상인들이 카메라로 자신의 판매상품을 촬영하여 고객을 위한 친절한 간판을 손수 만들고 있는 모습, 아이들이 친구와 재밌게 노는 방법을 고민하며 친구에게 손 내밀며 미소로 눈을 맞추고 있는 장면들도 보였다. 그 외에도 다양하고 풍성한 전북지역의 문화예술교육 현장을 보여주는 듯했다. 자료집에 담긴 이미지 속 참여자이자 주인공들의 공통점은, 배움에 대한 열의와 자신을 표현하는 것에 대한 진지함, 그리고 함께 따뜻한 미소를 나누는 훈훈함을 지니고 있었다.소개되고 있는 문화예술교육 활동은 그렇게 거창한 것은 아니었지만, 일상 속에서 사람으로서 삶의 주체가 되고, 그들 스스로 삶을 즐기기 위한 표현으로 창조적인 문화생활을 추구해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었다. 즉, 문화예술교육은 삶과 밀착된 통합적 교육이기 때문이며, 삶의 질적 향상을 돕는 교육으로 그것을 가치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가치의 가능성을 멀리 놓고 본다면 문화예술교육을 통해 국민의 사회적 의식 성찰 기회 또한 가능하다 여기기에 사회적 기반이 되어야 하는 소중한 교육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삶에 주체가 될 수 있도록 돕는 문화예술교육은 우리 가까이에 펼쳐지고 있었다. 하지만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경험과 인식 부족으로 생소하게 생각하거나, ‘문화, 예술, 교육’이란 단어에 그동안 길든 해석이 합성되며 사고하는 각자가 오류의 정의를 내려 거리감을 만들고, 그로 인해 참여 대상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국민 인식·참여 확대위한 정책 필요그래서 문화예술교육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아는 사람만이 또는, 누렸던 사람만이 인식하는 것에 머무르지 말고, 모든 국민이 문화예술교육의 존재와 가치를 인식할 수 있는 발판 마련이 현재로써 필요하다. 문화예술교육은 삶의 질적 방향을 향하고 있기에 행정부처 간 서로 융합될 수 있고 협력도 가능하다. 각자의 성과만을 생각하기보다는 국민을 위해 융합하고 협력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하면 국민의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인식과 참여는 더 빠르게 될 것이며, 삶의 주체로서 삶의 질적 방향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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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2.16 23:02

꽃을 가꾸면 바로 그 곳이 유토피아

필자의 유년 시절,이웃집에 할머니 한 분이 적막한 생애를 살고 계셨다. 언덕배기에 초막을 얹어 날마다 여기를 기어들고 기어나왔으니 마을 사람들은 모두 이를 안타까워 했다. 그러나 이분이 상당히 견문이 넓고 유식했던지 사람들은 이분을 한껏 공경하는 것이었다. 이웃으로부터 먹거리를 얻거나 식사 초대를 받아도 남들에게 결코 경멸의 대상은 되지 않았다.그런데 이 분의 생활 일과 중 하나가 꽃을 가꾸는 일이었다. 집 주변으로 빼곡히 백일홍, 봉선화, 채송화를 심고 가꾸었다. 꽃은 꼭 이 세 가지였다. 농촌 마을 어느집도 이런 호사스런 집은 한 곳도 없을 때여서 할머니 집은 이상한 동경의 나라 그 자체였다.긴 고샅을 돌아 들어 사립문에 들어서기까지 줄지어 색색의 백일홍꽃이 양편으로 도열했다.꽃 만발한 곳이 가장 살기 좋아어린시절 무슨 선경이니 하는 소리를 듣지 못했어도 아름다운 정경하면 이 할머니 집 환경을 연상짓게 했다. 필자는 이 때부터 한 평생 백일홍꽃을 제일 좋아하는 꽃으로 마음에 심었다.꽃을 받들고 우러르는 사람의 마음이 철학도 하고, 종교도 만들고, 예술도 창작한다고 필자는 믿기 시작했다. 산 속 절간에 이르면 문짝이며 서까래며 아니 뜰에 파놓은 연못까지 꽃의 모양이 아닌 게 없다. 부처님도 아예 꽃 위에 앉아 있다. 성당엘 가보아도 유리 창문마다 무늬가 온통 꽃 아닌 게 없다. 꽃이 빚어낸 지상의 조화들은 바로 이상적인 하늘 나라를 본받음이 아니겠는가? 저승 길에도 꽃으로 배웅하고 사랑을 주고 받을 때에도 꽃으로 몸짓한다.꽃을 바치는 일은 어떤 간절한 소원을 빌기 위한 수단으로써, 그 꽃에 담는 소원이 절대자에게 정중히 전달되도록, 또는 감복되도록 하는 신성성의 행위에 다름아니다. 꽃을 통해 신도 인간에게 영접되는 것이다.동서양을 막론하고 절경이라는 곳에는 틀림없이 아름다운 꽃이 장식됐다. 정원이며, 공원이며, 곳곳이 모두 꽃이고, 청정한 물 위에는 수련이나 연이 앉아 있었다. 선사 이래로 사람들은 허리띠에도 머리에도 꽃을 장식했다. 무덤에서 발굴된 유물에는 온통 꽃의 장식품이었다.꽃은 웃음을 빚는다. 꽃을 가꾸는 동네는 결코 범죄도 일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는 사악함이 깃들지 않기 때문이다. 꽃은 사랑을 낳는다. 사죄할 때는 꽃을 바치고 인정을 받으려면 꽃을 올린다. 꽃을 주는 일은 뇌물 증여도 아부하는 일도 아니다. 표창하려면 꽃이 꼭 필요하다. 꽃을 매우 사랑하면 가난하지 않고 드디어 풍요한 정서의 나라에서 행복을 누린다. 모든 동화 속 세상은 그리고 살기 좋은 고장은 모두 꽃들의 함성으로 번성하는 것이다.문화 도시 조성 위해 꽃 심어야우리가 꽃을 심어 유토피아를 건설해야 하는 필연성과 당위성이 저러한 데서 연유한다. 문화 문명의 도시는 절대로 절대로 꽃이 필 수 요건이다. 문화가 조금 뒤진 도시, 그런 고장도 꽃이 번창하면 일시에 몇 차원 뛰어넘는 문화의 고장이 되고 만다. 도시 설계가 잘못 됐어도 구석구석을 꽃으로 채운다면,가난한 사람이 도시 절반을 차지하더라도 그런 도시를 꽃으로 그 공허를 채운다면 도시는 천하의 유토피아가 될 것이다. 물론 꽃에는 여러 가지 나무도 포함한다. 우리 산야에 널려 있는 토종의 수목들 말이다. 유물 유적으로 그 예술성을 돋보이게 하려면 곁에 꽃을 둘러쳐야 한다. 꽃이 있는 곳에서는 모든 여인도 미인이 된다.옥상에도 꽃, 벽에도 꽃, 담장 위에도 꽃, 아파트 난간에도 꽃을 치렁치렁 매달자. 모든 자투리 땅, 빈터에는 꽃으로 채우자. 전주는 꽃의 도시, 그게 한옥 마을을 전 도시화 하는 첩경이다. 그게 바로 유토피아요, 사람들이 꿈꾸는 이상향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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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2.09 23:02

후백제 불교 미술과 그 아픔

백두대간과 금남정맥에 철통같은 방어체계를 구축했던 후백제가 갑자기 망했다. 후백제가 융성할 때 멸망해 한 줄의 역사 기록이 없고 후백제 문화유산도 거의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가끔씩 후백제를 생각할 때마다 융성한자 반드시 망한다는 라는 역사의 교훈을 떠 올리게 한다. 최근에 군산 발산초등학교 내 석탑 및 석등이 후백제 때 만들어졌다는 논문이 발표되어 학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도내 곳곳 방치된 후백제 불상·석탑후백제 도읍 전주에서 견훤이 태어난 문경시 가은읍으로 가는 길목에 완주 봉림사지가 있다. 본래 이곳에 있었던 석탑 및 석등이 일제강점기 군산으로 옮겨졌다. 군산지역 농장주였던 시마따니가 자신의 농장으로 석탑을 옮겼는데, 그것이 바로 군산 발산리 오층석탑이다. 안타깝게 탑신의 한 층이 통째로 없어지고 4층만 남았지만 간결한 아름다움과 완벽한 균형미를 자랑한다. 그렇지만 석탑의 구석구석을 살펴보면 우리들의 눈을 의심할 정도로 금이 가고 깨진 부분이 적지 않다.완주 봉림사지의 아픔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전북대학교 박물관 1층에 완주 봉림사지 삼존불상이 잘 모셔져 있다. 1977년 완주 삼기초등학교 뒤뜰에 있었던 것을 옮겼다고 한다. 대좌와 광배를 갖춘 중앙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협시불이 모셔진 통일신라 불교미술의 걸작이다. 그런데 본존불과 협시불은 모두 머리가 없고 광배와 대좌도 큰 상처를 입었다. 불자들의 신앙의 대상이자 중심인 불상과 석탑이 무슨 이유로 훼손됐을까?후백제의 동쪽 거점이었던 장수군에도 버려진 석탑이 있다. 일명 개안사지로 불리는 밭을 경작하는 과정에 우연히 땅 속에서 나온 것들로 당시 웅장했던 사찰의 존재를 암시해 준다. 오늘도 장수군 장계면 삼봉리 탑동마을 모정 부근에서 사람들이 찾아주기만을 간절히 기다린다. 장수군에는 영취산을 중심으로 법화산과 백화산, 장안산 등 불교적인 의미를 가진 산들이 많은데, 그 주된 배경이 무언지 밝혀내야 한다.남원 만복사지에도 응급환자와 똑같은 석탑이 있다. 고려 문종 때 창건된 사찰로 문헌에 등장하지만 그보다 훨씬 이전에 만들어진 또 다른 석탑이 있다. 남원 만복사지 오층석탑 남쪽에서 그 존재를 드러낸 석탑은 대부분의 탑재석이 없어지고 일부 남은 것도 참담한 모습이다. 무엇 때문에 문헌에 초대받지 못하고 탑재석도 그토록 심하게 훼손됐는지 어느 누구도 그 석탑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임실 진구사지에도 붕괴된 석탑이 있다. 본래 임실 용암리 사지로 불리다가 절 이름이 새겨진 기와가 발굴조사에서 출토되어 그 이름이 바뀌었다.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석등이 만들어질 정도로 번창했던 진구사의 발전상을 자랑하던 석탑이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이다. 다행히 진안 도통리 초기청자 가마에서 생산된 초기청자가 가장 많이 나와 후백제 왕실과의 긴밀한 관련성을 방증해 줬다.실체 규명 위해 학자 노력·행정 지원지금까지 살펴본 석탑과 불상은 그 시기가 단순히 나말려초로만 두리뭉실하게 알려졌다. 그런데 그 연대를 엄밀히 말하면 후백제다. 그렇다면 후백제 때 창건됐거나 융성했던 사찰들이 무슨 이유로 치유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상처를 입었을까? 우리들이 꼭 밝혀내야 할 역사의 비밀이다. 전북지역에서 머리가 없는 불상과 붕괴된 석탑은 후백제 멸망의 아픔을 전해주는 역사책과 같은 것이다. 앞으로 후백제 불교미술의 실체와 그 역동성을 심층적으로 규명하기 위한 학자들의 노력과 행정당국의 지원도 당부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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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2.02 23:02

절망을 이기는 힘

올 한 해는 유난히 절망할 일이 많았다. 정부에 대한 절망, 이웃에 대한 절망, 개인의 성취 가능성에 대한 절망 등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전반에 대한 절망으로 이어진다. 굳이 내 곁에 닥친 불행이 아닐지라도 절망하는 인간들 틈에 끼인 사람이라면 누구도 그 절망의 그림자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것이 세상 이치이다. 이념을 따지지 않아도 신을 들먹이지 않아도 슬픔에 잠긴 이웃들 곁에서 희희낙락할 수 없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됨을 비웃고 내다버린 세상그런 의미에서 올해 우리가 느끼는 절망감은 그 깊이가 다르다. 우리는 지금 숫자로 가늠하기 어려운 절망의 구렁텅이를 지나가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 절망감의 맨 밑바닥에는 인간에 대한 절망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못 견디게 억울하고 험한 꼴을 당해도 인간은 인간을 의지하며 살아남아왔다. 우리는 이웃의 시선으로부터 위로받고 막다른 벽 앞에서도 그들의 말 한 마디 손짓 하나로 살아남을 힘을 얻는 존재들이다. 돌아보면 신에게 간절히 매달리는 이들조차도 광야에서 홀로 기도하게 되는 상황을 최악의 상황으로 여기지 않았던가? 홀로 동떨어져 있는 시간이야말로 사탄들이 창궐하는 세상이고 인간과 신 모두를 부정하게 하는 위험천만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간에게 절망하는 이들, 저들이 견뎌야 하는 시간이야말로 지옥의 시간이고 짐승들의 시간이다. 올해 우리는 그 시간들을 견디고 있는 것이다. 자식을 잃고 밥을 굶으며 울부짖는 이들 곁에서 치킨을 시켜먹으며 낄낄거리는 저들의 얼굴에서 우리는 악마를 보았다. 그리고 그럴 듯한 말로 저들의 행위에 은근슬쩍 면죄부를 주려는 숱한 지식인들, 그 악마의 나팔수들을 목격하였다. 대낮에 거리를 누비는 저들 살아있는 좀비들의 세상에서 우리는 절망한다. 그래도 하소연할 데는 국가밖에 없는 국민들에게 도대체 국가는 무엇이며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 힘없는 이들은 여기저기서 영문도 모르고 죽어나가는데 왜 죽었는지 따져 물으면 어느 사이 경제를 좀먹는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내몰린다. 만성적인 실업에 기껏해야 비정규직을 전전하던 이들이 치솟는 전세값에 이리저리 쫓겨 다니다가 제 숨통을 조르고 사라져 가도, 이 거대한 세상은 이제 눈 하나 꿈쩍 않는다. 내가 당하지 않았으면 그뿐, 내 식구가 평안하면 그뿐이다. 인간들의 세상은 먹고 마시고 아귀다툼을 벌이며 돈에 핏발 선 이들의 행렬로 뒤덮인 지 오래되었다. 이긴 자들의 오만이 하늘을 찌르고 약한 존재들을 대변한다던 자들은 감감 무소식이다. 인간들이 인간됨을 비웃고 무참히 내다버리는 세상에서 신들은 도대체 다 어디에서 소풍 중이신가? 절망할 일이 산처럼 쌓여서 이제 더 이상 절망할 기운조차 잃게 만든 한 해가 간다. 이 가파른 절망의 절벽을 어찌할 것인가? 멀쩡한 어린 자식의 주검을 안고 나라를 상대로 따져묻다가 나라가 준 메달마저 내던지고 이민을 간 국가대표 부부가 부러워지면 안 되는데. 슬픔·절망 직시해야 이길 수 있어그래도 절망을 이기는 힘은 절망을 직시하는 데서 나온다. 슬픔을 이기는 힘은 주변의 슬픔을 내 슬픔으로 직시하는 데에서 나온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정호승 시, ‘슬픔이 기쁨에게’)지 말고, 우리 모두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느끼는 것으로부터 이 거대한 절망을 뿌리치는 계절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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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1.25 23:02

성 소피아사원

필자는 최근에 그리스와 터키를 여행했다.광활한 자연 경관이며, 고대와 중세와 현대까지 아우르는 찬란한 유물 유적들, 그냥 그대로 장관이었다. 또한 많은 왕조들이 교체하며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중에도 적국의 유물을 그대로 두어 자신들의 보고로 삼는 민족들의 슬기로움을 경의롭게 관람하는 복을 누렸던 것이다.그리스 정교와 이슬람교가 한 곳에그중에서도 그리스 정교의 원류인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가 한 방을 쓰고 있는 성소피아사원에서 필자는 참으로 감탄스런 정경을 만났던 것이다. 그러니까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마리아상을 옛 터키 이슬람인들이 페인트로 덮어씌웠다가 근래에 다시 겉을 긁어내고 본래의 모습으로 환원시켜 놓은 것이었다. 이슬람교의 코란 문자들, 무슨 상형의 말씀으로 겹겹이 안치시켜 놓으면서도 병치하여 나란히 기독교의 성화들이나 조형들을 복원시켜 함께 모셔놓은 것이다. 그리하여 이국에서 몰려온 각양의 민족, 각양의 종교인들이 이 경건한 두 종교의 화목(?)을 관람하게 된 것이다. 회교 국가의 이슬람 사원을 세계 기독교인들이 돈을 내고 꾸역꾸역 모여드는 상황을 보며 감동이 일었다.터키인들은 조석으로 이슬람식 예법을 챙기면서도 그리스도교인들의 도래에 마냥 기뻐하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자기 종교의 강박한 고수보다는 돈벌이가 더 신이 난 것이다. 유럽인들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 무슨 선교다 포교다 하는 건방진 행위는 애시애초 마음도 먹지 않는다고 했다. 서양 문화는 거의가 기독교 문화라고 필자의 인식이 굳어진 터에 저리도 무한 무변한 이슬람인들의 인문학적 넘나듬에 대하여 필자는 골똘해질 수박에 없었다. 유럽의 모든 역사적 전쟁은 거의 종교전쟁이었다고 믿고 있으며, 지금도 종교 분규로 총성이 그치지 않은 마당에 여기서는 천연덕스럽게 두 종교가 화평하고 있었다.아, 이렇게 넘나들고 있구나! 서로의 가로막이 경계가 희미해지고, 국경이니 민족차별이니 무슨 이념이니 고집스럽기만 하던 종교적 교부가 서로는 서로에게 물들고, 서로가 서로에게 번지고 있구나!EU라 하며 유럽이 통합되고 화폐도 유로화로 통일되고, 비자도 없이 오고 가는 저 유럽 나라들은 일찍이 국가의 울타리를 걷어차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넘나드는 것은 이뿐이 아니었다. 고대 문명이 현대에 다른 모습으로 승화되고, 동양과 서양이 합심하여 지중해에서 유람선을 띄우고 있었으니 상황 변이는 그 궁극을 모를 일이었다.필자에게는 저 원효대사의 화쟁 원융의 이상 설파가 퍼뜩 뇌리를 스쳤다. 우리에게도 중세를 넘어오며 유불선이 우리의 의식 속에서 한타랑을 이룬 것도 괄목할 일이 아닌가. 우리 국민에게 이다지도 시시한 지역 감정이란 도대체 무슨 잠꼬대란 말인가. 남북이 철조망을 걷어차버릴 때도 머지 않지 않은가.저 그리스 터키는 구원은 무슨 구원, 아침 저녁 식사를 교차하여 먹는 그들이 마냥 부럽다. 안중근 의사는 동양 평화를 부르짖었다. 우리 독립선언문에 주장된 바, 아시아의 공영 공생은 그냥 막연한 이념만은 아니다. 속좁은 일본이나 동북 공정 운운하며 음흉하게 속셈부리는 중국을 이끌고서 의연한 형님으로서 우리가 동북 아시아 통합 문명권을 창달한다면 오죽 좋으랴 싶다.우리가 동북아 통합문명권 창달해야소피아 사원 안에서 예쁜 터키 여고생들에게 둘려싸여 사진 촬영에 응했던 감격은 순전히 한류 열풍 덕이었다. 세계 젊은이들에게 한국인들은 신비의 민족이 되어 있었다. 굽 높은 우리네 문화 인기를 실감하고서 환상적 세계 넘나들기 여정을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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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1.18 23:02

지역 생활문화의 보물창고, 전통시장

나는 지역 전통시장을 지역의 생활문화가 담겨 있는 ‘보물창고’라 여긴다. 그래서 전통시장을 찾아 지역의 보물들을 구경이라도 해보자는 심사에 지역문화의 거래 현장을 기웃거리며 즐길 때가 많다. 무주반딧불시장 '우리대장간'무주에 있는 무주반딧불시장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무주반딧불시장 중심을 가로질러 끝자락 모퉁이에는 ‘우리대장간’이라는 작은 대장간이 있다. 오늘날 보기 드문 대장간이 존재한다는 것에 놀랍고 반갑기도 했지만, 아직도 대장간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기에 무주를 방문하는 날엔 꼭 한 번씩 들르게 되었다. ‘우리대장간’은 전통방식을 고수하며, 쇠를 다루는 소리로 주변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당겼다. 한 평쯤 되는 작은 공간 안에는 쇠를 달구는 화덕이 있고, 쇠를 두드리고 다루는 모루와 풀무를 비롯한 여러 연장들이 주인장의 손이 닿기 편한 위치에 가지런히 배치돼 있다. 대장간을 찾는 사람 대부분 농사를 짓는 노인들이다. 무주에 사는 사람들도 있고, 타 지역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농사에 필요한 연장을 새로 장만하기도 하고, 오래 사용해 무뎌진 도구를 고쳐가기도 한다. 모두 볼일을 보고 돌아가는 길에 자신의 맘에 흡족한 듯, 쇠를 다루는 주인장의 꼼꼼한 솜씨로 맞춤으로 잘된다며 칭찬 일색이었다. 내가 대장간을 찾는 날마다 대장간 주인아저씨는 항시 작업에 열중하고 있어 말을 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드디어 차분히 대화할 기회가 생겼다. 대장간 주인아저씨는 그 일에 대한 사명감이 대단했다.“옛날에는 대장간이 잘되고 인정도 받던 직업이었지. 내가 열아홉에 시작해 벌써 48년이 되었네! ‘우리대장간’이 전북에서 아니, 대한민국에서도 가장 작을 거야. 그래도 여기서 돈 벌어 자식들 다 키우고 했으니 나에게는 소중하고 고마운 대장간이지.”“대장간을 찾는 사람들이 예전처럼 많지는 않아도,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장날이면 꼭 찾아와! 그래서 대장간이 아직 있는 것이고, 내가 이 자리를 지켜야 하는 이유지. 내 사명이라고 생각해!, 항상 그분들에게 고맙지.” “이 일도 10년쯤 아니, 15년쯤 되면 사라질 것이 분명해. 대장간을 찾는 사람들도 없을 것이고, 이 일을 할 사람들도 없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지!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런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아. 힘들고 돈이 되지 않아서지. 젊은 사람들은 머리만 조금 쓰면 이 일로도 벌어먹고도 살 수 있지만, 누가 이런 일을 배우려고 드나!”“어찌 보면 이것도 우리의 소중한 전통문화라서 난 자부심이 있어. 그런데 이런 전통문화가 사라지게 돼 안타까워. 나라에서 이런 문화를 지킬 수 있도록 관심을 갖고 노력해야 하는데 말이여. 이런 문화가 사라지지 않게 젊은 사람들이 신경 좀 써 봐.” “요즘은 대장간이 흔하지 않아서 이런저런 행사하는 곳에서 전화가 많이 와! 돈 줄 테니 대장간 행사 좀 하게 오라고. 그런데 그런 곳에서 하는 것이 무슨 대장간이겠어. 흉내만 내는 것이지. 그래서 안 간다고 했어. 대장간은 이렇게 사람들 보고 의견도 들으며 만들어가는 것이지, 대대로 내려온 우리의 전통문화를 흉내만 내면서 잘못 소개하면 안 되지!”전통문화, 행사 돈벌이 도구되면 안돼말씀 속에 전통문화에 대한 사회 현실적인 문제가 담겨 있어 전통문화에 대해 다시금 고민할 기회가 되었다. 우리는 전통이라고 떠들어대며 지켜야 할 문화는 지키지 못하고, 전통이라는 모형만 갖춘 박제로 행사용 돈벌이 도구가 되어 그 속에 담긴 얼과 정신은 무시하며 전통이라고 우겨대는 것은 아닐까! 어디에서 발생한 것인지도 모르는 문화들과 뒤범벅되어 이것이 우리의 전통이라며 포장하고 자랑하는 모습들이 생각나 부끄러웠다. 대장간 주인아저씨는 자신의 이름이 ‘박재용’임을 알려주며, 자주 찾아와 놀다 가라고 하셨다. 그것이 곧 우리의 전통을 만나는 것이며, 지키는 것이고, 전통을 알아가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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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1.11 23:02

산경표 속 후백제 방어 전략

우리나라 전통지리학의 지침서가 산경표다.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지리학자인 신경준에 의해 편찬됐다. 순창읍 남산대에서 출생한 신경준은 ‘산은 스스로 물을 가르고 물은 절대 산을 넘지 않는다’는 기본 원리에 바탕을 두고 산경표를 완성했다. 1900년대 초 우리 곁을 떠났다가 1980년 서울 인사동 고서방에서 산악인 이우형이 발견해 세상에 알렸다. 산경표 속 백두대간과 금남호남정맥, 금남정맥 산줄기를 따라 후백제의 도읍을 지킨 산성들이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후백제 강성함 느껴지는 산성 유적전주 동고산성 발굴조사를 통해 후백제 산성의 특징이 일목요연하게 파악됐다. 승암산을 한 바퀴 휘감은 성벽은 방형 혹은 장방형으로 잘 다듬은 성돌을 가지고 쌓았다. 성돌은 마치 옥수수 낱알모양으로 그 끝이 상당히 길어 달리 견치석(犬齒石)으로도 불린다. 성벽의 뒤쪽에는 성돌과 뒤채움석이 서로 견고하게 맞물리도록 기다란 돌로 채웠다. 고려 말 전주성을 축성하면서 성돌 대부분이 반출됐지만 후백제 산성의 비밀이 고스란히 남아있다.조선시대 십승지지에 그 이름을 올린 운봉고원을 감싼 백두대간에 동고산성과 축성방법이 비슷한 산성이 많다. 아마도 철의 왕국인 운봉고원을 지키려는 후백제의 국가 전략이다. 금강과 섬진강 물줄기를 갈라놓는 금남호남정맥에도 후백제 산성이 있다. 견훤이 다시 쌓은 것으로 전해지는 팔공산 남쪽 장수 합미산성은 마치 두부처럼 잘 다듬은 견치석으로 쌓아 지금도 성벽이 위풍당당함을 자랑한다. 장수군 장계면 서쪽 방아다리재 부근에 침령산성이 있는데, 후백제와 신라의 사신들이 오갔던 사행로(使行路)가 통과하던 길목이다. 성벽의 높이가 8m 내외로 전북의 산성 중 가장 높고 웅장하다.진안고원의 서쪽을 휘감은 금남정맥에도 후백제 산성이 많다. 달리 호남의 지붕으로 불리는 진안고원의 금산분지에서 전주방면으로 향하는 길목에 백령산성이 있다. 이 산성을 쌓기 위해 견훤이 금산군 남이면 대양리에 경양현을 설치했다는 대목에서 마음까지 숙연해진다. 진안 용담댐 일원에서 전주로 나아갈 때 주로 넘었던 노래재 남쪽에 환미산성이 있다. 이 산성은 서쪽 골짜기를 휘감은 포곡식으로 옥수수 낱알모양의 성돌과 품자형 성벽쌓기, 성벽의 뒤채움이 동고산성과 똑같다.삼국시대 때 가야계 왕국으로까지 발전했던 백두대간 속 운봉가야와 장수가야에 대한 견훤의 관심이 아주 컸던 것 같다. 그 이유는 백두대간과 금남호남정맥을 따라 집중 배치된 많은 산성을 다시 고쳐 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주로 향하는 내륙교통로가 통과하는 길목에 위치한 산성들까지 개축함으로써 철통같은 동쪽 방어망을 구축했다. 후백제는 융성할 때 갑자기 망했다. 그리하여 산경표 속에 남겨놓은 후백제의 산성들을 보면 저절로 견훤의 자신감과 후백제의 강성함이 느껴진다.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돼야얼마 전 남한산성이 세계문화유산에 그 이름을 올렸다. 서울 북한산성과 함께 한성을 지킨 조선시대 주된 피난성이다. 견훤은 평상시 인봉리 왕궁에 머물러 있다가 위급할 때 피난성인 동고산성으로 이동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안타깝게 동고산성의 사용 기간이 무척 짧았던지 후백제의 역사이야기가 거의 없다. 이를 근거로 동고산성이 축성되기 이전까지는 전주 남고산성이 후백제의 피난성으로 이용된 것이 아닌가 싶다. 삼국시대 이후의 왕조들이 대부분 세계문화유산에 그 이름을 올렸기 때문에 후백제 문화유산도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이 조속히 시작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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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1.04 23:02

공설운동장, 그 추억과 미래 사이

그 날 아침에는 학교엘 가지 않았다. 공설운동장에서 교련실기대회가 있는 날이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학교 가는 시간보다 더 일찍 일어나서 위아래 교련복 챙겨 입고 버스에 올라탔을 것이다. 요대와 각반은 교련복 차림의 마지막 완성이었다. 그 두 가지가 빠지면 그저 헐렁한 군복 흉내의 건달 같았지만, 허리에 요대를 철컥 차고 각반을 바짝 동여매는 사이에 우리는 제법 군인다워졌다. 멀리 책에서만 보던 학도병 생각이 나기도 했을 것이다. 전주시내의 모든 고등학교가 공설운동장에 모여서 그 동안 갈고 닦은 군사훈련 솜씨를 자랑하고 경쟁하는 날이었다. 남자들은 목총을 들고 ‘찔러 찔러 뒤로 돌아 길게 찔러’ 외치며 총검술을 하고, 여고생들은 들것과 부목을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저희들끼리 붕대를 감았다 풀었다 했다. 전쟁이 곁에 있는 듯했지만 우리는 마냥 즐거웠다. 많은 사람이 어울려 즐기던 곳그리고 또 어느 날인가는 세계적인 부흥목사 빌리 그레이험을 보러 그 자리에 모였고 전주시민 수만 명과 함께 이 불쌍한 민족을 구원해달라며 통성기도를 했다. 그렇게 영험 있는 분의 인도로 그 정도 외치면 통일도 머지않을 것 같았다. 또 정말로 운이 좋은 어느 날은 국가대표 축구팀이 화랑과 충무 팀으로 나뉘어 경기하는 것을 직접 보기도 했다. 우측 터치라인을 따라 돌파하던 김진국 선수가 텔레비전에서 볼 때보다 더 작고 빠르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기억은 시간 순으로 펼쳐지는 게 아니고 공설운동장에서는 체육행사만 펼쳐진 게 아니다. 때로 그 자리는 정치가들의 유세현장이기도 했고 가수들의 콘서트장이기도 했다. 어느 날은 축제의 메인 싸이트였고, 또 어느 날은 팔달로를 따라 펼쳐지는 퍼레이드의 집결지이자 해산지이기도 했다. 그 자리에서 설익은 첫사랑을 만난 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도 그 근처 어디쯤의 버스 안에서 황혼의 로맨스가 싹트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모든 기억들 가운데에서 가장 결정적인 것은 야구장에서의 어느 날이다. 승부는 격렬했고 관중석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 날 야구장의 모습이 갑자기 오래 된 극장으로 보였다. 아 이건, 사진으로만 보던 고대 그리이스 극장의 모습 그대로 아닌가? 반원형의 관중석은 그 시절의 말굽형(horse-shoe shaped) 객석이고 경기장은 오케스트라라 불리던 연기공간이었던 것이다. 포수 뒤편의 관중석 자리만 무대배경이 된다면 영락없는 그 시절의 극장 꼴이었다. 그러고 보니 스타디움, 콜로세움, 오디토리움이 모두 비슷한 뿌리말로부터 나왔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지금의 투수 마운드 언저리는 제단(altar)이 있던 자리이다. 저 공간은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시민들이 모여서 스스로의 몸으로 무엇인가를 공들여 만들어 내고 그를 바라보며 집단으로 갈구하고 즐기던 자리였다. 그렇다면 축제의 뿌리도 결국 이런 공간으로부터 뻗어 나온 것 아닌가? 오늘날 어딜 가나 가장 많은 사람이 가장 격렬한 방식으로 동시에 한 자리에 모여 아우성을 치며 노는 자리가 경기장인 건 다 사연이 있는 셈이다. 시민축제 상상 공간으로 됐으면그렇다. 예나 지금이나 운동장은 그냥 운동장이 아니다. 모두가 제 살기에만 바쁘고 제 가족만 생각하는 세상에서 운동장은 여전히 여럿이 어울려 노는 자리이고 함께 꿈을 꾸는 공간이다. 저 자리가 끝 모를 욕망의 소비 공간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제는 도시 한 복판이 된 이 공간은 그 자체로 시민축제의 상상공간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야구장 같은 콘크리트 구조물을 아이들이 구석구석 들락거리는 거대한 우주선으로 바꿔줄 수만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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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0.28 23:02

지역생활문화,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우울했던 상반기의 시간들을 잊으려고 그런지 아니면 계획되었던 자금을 모조리 소비해야 한다는 과제가 있어서인지는 모르지만, 유난히 이번 가을에는 나라 곳곳에 지역 축제들이 한창이다. 그 축제들은 하나같이 지역문화와 환경, 지역 활성화 등의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있다. 그런 점에서 지역과 지역민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는 생각에 의미 있게 다가온다. 삶·문화 거래되는 시장하지만 그 축제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몇몇 여타 축제들을 짜 맞추듯 구성해 명칭만 다를 뿐, 대동소이한 축제들을 양산하고 있어 지역만의 특색과 문화는 살리지 못하고 중복되게 예산만을 낭비하며, 지역축제의 한계점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지역에 대한 이해와 깊은 고민 없이 유행처럼 경쟁하듯 축제를 생산해 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듯 보인다.축제를 여는 이유는 지역민의 교류 화합일 것이며, 지역문화를 통한 지역 경제순환을 바라서일 것이다. 그런 이유라면 명목만 거창한 축제를 생각하기보단 작아도 좋고, 축제라는 이름이 없어도 좋으니, 지역민이 상호 교류하고 지역 현실과 지역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그 속에는 지역민이 주체가 되고 참여자가 되어 서로 부담 없이 어울려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판이 되어야 함을 말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지역 전통시장 또한 그 자체가 지역 생활문화를 교류하고 소통할 수 있는 일상의 판이 될 수 있는 좋은 예가 아닐까 생각된다. 일상에서 지역의 생활문화를 엿볼 수 있는 좋은 방법 하나가 지역 전통시장을 찾는 것이다. 전통시장은 지역의 지리적 환경적인 특성에 따라 재배되고 생산되는 것들이 모이며, 그 지역의 수요 욕구에 따라 다양한 품목들이 갖추어지고 구성되는 현상으로 지역 특성의 삶과 문화가 융합되는 창고라 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지역 시장마다 각기 다른 지역 특성을 보이기에 시장을 통해 다양한 지역의 생활상을 엿볼 기회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지역 시장에서는 그 지역의 지리적 자연환경의 작용에 의한 1차 산업의 먹을거리 품목들이 강세를 보이기도 하고, 또 어떠한 지역 시장에서는 2차 산업의 가공 품목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그 지역의 지리적 환경에 의한 지역 특성의 삶과 문화를 만날 수 있고, 예측해볼 수 있는 기회이다. 전통시장에서는 단순히 대형마트에서처럼 구매의 목적만을 앞세워 시장을 방문하는 것으로는 그 지역의 고유한 삶과 문화를 느끼기에는 어렵다. 시장에는 공급과 수요의 관계에서 대화가 필요하고 그 대화로 서로 협의에 따라 거래가 성사되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문화교류이며, 그 또한 시장의 거래문화이다. 그로 인해 지역의 생활문화가 유지되기도 하고 생성하기도 하며, 지역경제가 순환될 수 있다. 그래서 시장의 거래가 지속해서 형성될 수 있도록 지역 전통시장의 활성화는 중요하다. 전통시장 활성화 중요그러나 현실적으로 전통시장은 대형마트에 밀려 쇠퇴해가고 있다. 현재 전통시장을 활성화하려는 노력이 여러 측면에서 다각적으로 벌어지고 있으나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사회구조에서 수요 욕구를 얼마나 충족시키며 전통시장을 지켜나갈지는 아직까지 의문이다. 전통시장을 통해 지역과 지역민, 공급과 수요의 관계가 상호 교류하고 소통될 수 있는 소소하지만, 가치 있는 판이 지역 전통시장에 필요한 때라 여긴다. 그것이 지역의 생활문화를 지속, 자생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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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0.21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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