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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계 '작은 거인' 익산국악원장 임 화 영 명창 "제자 양성 주력… 스승 은혜에 보답"

스물살에 결혼… 시장통 지나다 소리듣고 소리꾼의 길 선택…  어린시절 가난의 굴레 벗고 춘향국악대전 대통령상 거머줘

▲ 익산국악원장 임화영 명창이 판소리를 하고 있다.
어르신들이 모이는 행사장이면 빠지지 않는 우리 소리와 어깨춤. 멋들어진 춤 실력이나 어려운 가사를 몰라도 들려오는 우리 소리에 손과 어깨를 리듬에 맞춰 흔들면 모두가 실력 있는 전통춤의 댄서가 된다. 특히 이런 모습이 자주 연출되는 익산지역에는 50년이 넘는 익산국악원이 있기에 더욱 그렇다. 1953년 이리국악원으로 출범해 우여곡절을 거치며 익산국악원으로 어렵게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이곳에선 지금도 끊이지 않고 시원한 목청의 우리 소리와 가야금, 북소리를 들을 수 있다. 꺼져가는 등불을 다시 환히 밝혀가고 있는 '작은 체구의 국악 거인' 익산국악원장 임화영 명창(50)을 만났다.

 

-국악과 어떻게 연을 맺게 되었나요?

 

△익산에서 태어나 군산으로 이사 간 뒤 초등학교에 다닐 때 우연히 동네 공터와 천막을 치고 공연을 하는 유랑극단을 보게 된 때부터인 듯합니다. 당시 창극위주의 공연에서 장화홍련, 호동왕자, 사도세자 등을 선보였는데 사도세자가 갇혀있는 장면을 보며 얼마나 울었는지 지금도 당시가 생생합니다. 3년정도 저희 집에 머물던 소리꾼의 북소리와 장구소리도 국악과 연을 맺게 한 인연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임 명창은 초졸(초등학교 졸업)대학교수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국악에 웃고 울었지만 가정형편이 좋지 못해 학교조차 제대로 다니지 못했습니다. 2남7녀 중 7째인 저는 언니가 중학교에 입학한 뒤 더욱 어려워 진 가정형편에 중학교 진학도 포기해야 했습니다. 몇날며칠을 울다 지쳐 잠이 들며 부모님께 투정을 부렸고, 그렇게 아픈 상처가 마음속에 몽우리 졌습니다. 어린나이에 고무신공장에서, 가정부로, 가발공장으로, 남들의 학창시절을 저는 그렇게 보냈습니다. 20살에 친구의 소개로 남편을 만나 결혼했지만 생활고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익산으로 이사와 시장통을 지나다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인근의 최란수 국악원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운명이 바뀌었던 것 같습니다.

 

 

-명창 반열에 오르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셨나요?

 

△처음 최란수 국악원에 다니며 학원비가 없어 두 달 만에 그만뒀습니다. 그 후 온몸이 아파 병원을 연연하다가 다시 한 번 국악원에 가보라는 남편의 권유에 씻은 듯 나았습니다.

 

이 후 1년여의 시간이 지난 뒤 고인이 되신 성운선 선생님을 만나게 됐고, 민요와 토막소리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성 선생님은 다시 이일주 선생님을 소개해 주셨고, 당시 가진 전재산이나 다름없는 결혼반지와 목걸이 팔찌 등 모은 것을 모두 팔아 91년 드디어 전주로 본격 공부를 하러 다니게 되었습니다. 늦깎이로 시작하면서 가진 모든 열정을 불태운다는 마음가짐으로 공부했고, 익산국악원과도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공석이 된 익산국악원 판소리 선생이 되면서 공부하는 선생이 되기로 마음먹기도 했습니다.

 

95년부터 심청가 완창과 97년 흥부가 완창발표를 하면서 주부가 아닌 소리꾼으로 대접받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97년 적벽가 완창, 200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이수자로 지정받았지만 명창 반열에 오르기 위한 필수인 대통령상이 빠졌었습니다.

 

2001년부터 대통령상에 도전장을 수없이 내밀었지만 본선진출에서 고배를 마신 뒤, 2005년 최우수상까지 가능했습니다. 마지막이라며 도전한 2007년 춘향국악대전 판소리 명창부문에서 꿈꿔온 대통령상을 거머쥐게 됐습니다.

 

 

-국악가족으로도 유명합니다.

 

△국악과 저의 인연은 가족으로 확대된 셈입니다. 남동생 임청현 고수는 전북도립국악원 교수로 제직하고 있고, 장남 송세운은 남원국립민속국악원 창극단원으로 활동하며 소리꾼이자 고수 두 부문에서 장관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전북대 국악과에서 거문고를 전공한 둘째 송세엽은 익산국악원 거문고 강사로 활동하며, 경비 절감을 위해 무급 사무국장을 맡고 있기도 합니다. 친조카 임세미도 국립남도국악원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제2의 인생을 살고계신 지금은 만족하십니까?

 

△이 모든 일이 꿈만 같다고 할까요. 정말 수없이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셔서 부족하지만 명창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받은 만큼은 안 되겠지만 가진 모든 것을 후배들을 위해 쏟아내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인지 4번의 전북교육감상과 전북도지사 상 등 9번의 지도자상이 가장 자랑스럽습니다. 특히 누구보다 가난을 겪어봤기에 주변을 돕고 싶은 마음입니다.

 

 

-익산국악원장으로 1년여가 지났습니다. 앞으로 계획은?

 

△우선 훌륭한 제자들이 많이 배출될 수 있도록 하는 것과, 익산을 넘어 전국에 국악이 널리 퍼졌으면 하는 거죠. 특히 실력 있는 국악인들이 어려운 생활고 때문에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안타까운 일이 없도록 하고 싶은 소망입니다.

 

익산국악원장으로 익산지역에도 국악과 관련된 많은 일들이 꾸준히 전개되도록 노력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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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만 kjm5133@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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