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기사 다음기사
UPDATE 2025-11-06 01:00 (Thu)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사람들 chevron_right 줌, 오늘 이 사람
일반기사

김종량 전 언론중재위원회 부위원장 “언론통제 맞선 자유 투쟁 기억해주길”

영상기록 ‘1980년 언론투쟁을 말하다’ 증언

김종량 전 언론중재위원회 부위원장 / 사진=오세림 기자
김종량 전 언론중재위원회 부위원장 / 사진=오세림 기자

“지난날 직필과 곡필의 갈등 속에서 언론 본연의 자세를 정립하지 못한 과오를 통감하며 정론을 펴는 냉혹한 증인으로 영원히 썩지 않는 소금이 될 것이다.”

1980년 5월 17일 전북일보 1면 기사로 게재된 자유언론 수호 선언문 중 일부다.

김종량(81) 전 언론중재위원회 부위원장은 40여년전 자유언론 수호 선언문 내용을 바로 어제일처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1980년에 전북일보는 군부 정권의 언론탄압 중지와 검열 거부 등 7개 실천 결의사항을 채택했다.

어느덧 팔순을 넘긴 그는 언론계 원로이자 민주화의 산증인으로 엄혹한 군부정권과 맞서 싸웠다.

김 전 부위원장은 “1950년대 한국전쟁의 포연 속에서 창간된 전북일보는 생명을 위협받는 공포 속에서 전란의 현장을 지켰던 역사의 증인이 됐다”며 “하지만 전쟁보다 더 살벌했던 군부정권 하에서 언론 자유는 심각한 위협을 받았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최근 자유언론실천재단이 제작한 영상기록 ‘1980년 언론투쟁을 말하다’에는 굽히지 않는 펜을 들고 어두웠던 시대상을 관통하며 새로운 언론개혁을 꿈꿨던 김 전 부위원장 등 34명의 해직기자들이 밝힌 생생한 증언이 담겨있다.

김 전 부위원장은 “1980년대 전북일보 기사로 기사 검열을 받으러 다녔는데 신문 제작에 있어 보안부대의 간섭이 잦아지자 이에 굴복하지 않고자 결연히 맞서 저항했다”며 “정권의 기사 검열 거부 결의 선언에 나서자 결국 반체제 인사로 낙인이 찍혔다”고 말했다.

군부정권은 그를 정리 대상 인물로 정하고 나서 정상적인 취재 활동도 문제 삼았다.

일례로 1980년 5월 당시 야권의 유력 대선 후보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읍 내장산에 갑오동학 문화제 참석차 방문했을 때 약 10만명이 운집한 현장을 밀착취재한 일과 전주 신흥고등학교에서 학생 데모가 최초로 일어났다고 해서 단독 취재한 일을 빌미삼아 해직 사유에 포함시켜 탄압했다고.

이후 불법 연행된 그는 언론 투쟁의 핵심적인 주동자로 몰려 강제 해직되고야 말았다.

김 전 부위원장은 “1984년 전북일보에 복직은 됐지만 한동안 반체제 인사로 낙인이 찍혀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며 “40여년이 흘러 지난해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기여한 해직언론인에 포함됨으로써 명예회복을 이룰 수 있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긴 세월 동안 해직 언론인들은 정신적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김 전 부위원장은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라 끝없는 투쟁의 결과물에서 비롯됐다”며 “언론 자유와 인권이 보장된 나라로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만큼 후배 언론인들과 도민들이 언론투쟁에 나섰던 당시 해직 언론인들을 기억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김종량 전 부위원장은 남원시 주생면 출신으로 전북일보 편집국장, 전북일보 퇴직사우 모임인 ‘전일회’ 회장, 언론중재위원회 전북중재위원 및 부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영호 crcr810@jjan.kr
다른기사보기

개의 댓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0 / 400
사람들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