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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현경 "좋은 영화에 출연한 걸로 족해요"

"평생 영화를 꿈꾸며, 그리고 영화를 하면서 살 수 있으면 좋겠어요. 배우로서 늙고 싶어요."배우 류현경은 올해 최고의 한 해를 보내고 있다. '방자전' '시라노;연애조작단' '쩨쩨한 로맨스'가 연타석 홈런을 날리면서다. 현재까지 세 작품의 누적관객 수는 600만명을 훌쩍 넘겼다. 평균 200만 이상을 동원하는 배우가 된 셈이다. '조연'이라는 점이 조금은 아쉽다. 그래서 주연배우가 부럽지 않으냐고 물으니 간단 명료한 답이 돌아왔다. "좋은 영화의 일부분이라도 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해요." 지난 7일 강남의 한 카페에서 가진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류현경은 올해 고전과 현대물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연기했다. 순진하지만 사랑의 상처를 입고 돌변하는 향단(방자전)부터 얌전하고 평범한 커피전문점 아르바이트생(시라노 연애조작단), 자유분방한 잡지사 여기자(쩨쩨한 로맨스)까지 다양한 변신을 시도했다. "대중들은 잘 모르시는 것 같아요. '쩨쩨' 시사회를 하는데 '저 친구가 방자전에 나왔던 애야'라고 관객분들이 말씀하시더라고요. 아직은 부족한 것 같아요. 영화계 사람들끼리만 류현경이 이렇다저렇다 말씀하시지 일반인들은 아직 잘 모르시는 듯해요."올해에 갑자기 뜬 별처럼 보이지만, 사실 류현경은 오랜 시간 동안 연기를 갈고 닦은 잔뼈 굵은 연기자다. 13살 때 SBS 단막극 '곰탕'에 출연하면서 연기자 생활을 시작한 그는 '동해물과 백두산이'(2003), '물 좀 주소'(2007) 같은 영화나 드라마 '일단 뛰어'(2006) 등에서 주인공 역을 맡았다. 주ㆍ조연으로 출연한 영화와 드라마만 30편에 육박한다. 연기경력도 15년에 이른다. 이만하면 중견급 배우라 해도 손색없는 경력이다. 연기만 했던 건 아니다. 한양대 연극영화과에서 연출을 전공한 그는 졸업 작품으로 '날강도'를 찍었고, 300만원의 제작비가 든 이 단편 영화는 올해 충무로국제영화제,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해 호평을 받았다. '날강도'는 타이밍이 자꾸 어긋나는 대학생 남녀의 이야기다. 드라마 구조가 탄탄하고, 영화 후반부는 인생의 씁쓸함과 헛헛함을 안겨주기까지 한다. 걸작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재기가 엿보이는 꽤 근사한 단편이다. "연출은 중학교 3학년 때 시작했어요. 첫 작품이 EBS 프로그램에 소개되기도 했었죠. 심영섭 평론가님이 단점도 지적해 주셨지만 잘 만들었다고 칭찬도 해주셨던 것 같아요. '날강도'는 졸업작품인데 시나리오는 금방 썼어요. 제가 청춘물을 못해봐서 청춘영화를 찍고 싶었죠."(웃음)그는 일간지와 영화전문지에 칼럼을 쓰기도 한 재주꾼이다. 항간에는 미술ㆍ글쓰기ㆍ연출ㆍ연기 등 다양한 분야에 도전하는 배우 구혜선과 그를 비교하기도 한다. 류현경은 자신과 구혜선은 전혀 다르다고 했다. "사실 그러한 비교 때문에 조금은 움츠러드는 게 사실이에요. 사실 스타일부터 전혀 다른데요.(웃음) 지금은 연출보다는 연기에 전념하고 싶어요. 아직은 카메라를 들 시기가 아닌 것 같아요. 좀 더 인생을 보는 시각이 깊어지고, 삶 전체를 아우를 수 있을 때, 다시 카메라를 잡을 수는 있겠죠." 그의 한 마디 한 마디에서 영화에 대한 열정이 묻어났다. 생각도 깊어 보였다. 영화와 연기에 대한 이러한 열정 때문일까. 그는 '방자전'에서 데뷔 후 가장 큰 모험을 했다. 순도 높은 베드신을 찍은 것이다. 여배우로서는 쉽지 않을 법한데, 그는 "부담감이 전혀 없었다"고 했다. "저는 고민이 들면 아예 연기를 못 하는 스타일이에요. 베드신에 대해서는 전혀 고민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초반과 후반 성격이 달라지는 향단을 어떻게 표현할까에 더욱 집중했던 것 같아요. 앞으로도 좋은 시나리오가 있으면 망설임 없이 베드신을 찍을 거예요. 노출연기나 밥 먹는 연기나 연기는 똑같은 거 아닌가요?"엄정화, 유해진 등과 찍는 옴니버스 영화 '마마'의 촬영과 '쩨쩨한 로맨스'의 홍보활동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류현경. 마지막으로 어떤 배우가 되고 싶냐고 물었다. "제가 궁극적으로 되고 싶은 건 잘 쓰일 수 있는 배우예요. 스타나 주인공이 되고 싶은 욕심은 별로 없어요. CF에 대한 욕심도 없고요. '노출 신(Scene) 찍는다고 주인공 못하는 거 아닐까?'라는 걱정이 있었다면 노출 장면을 찍지도 못했겠죠. 영화를 만드는 분들께 누를 끼치지 않고 배우 생활을 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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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
  • 2010.12.09 23:02

'길 잃은 고양이' 조문근이 왔다

지난해 엠넷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 K'에서아프리카 말리의 전통 타악기 젬베를 치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조문근(25).이 프로그램에서 2위를 한 그가 1년여 만에 데뷔 미니음반 '길 잃은 고양이'를 발표했다. 당시 그는 2인조 인디 밴드 '길 잃은 고양이'로 도전했지만 예선에서 홀로 합격, 악기 연주 실력과 독특한 음색으로 심사위원들을 사로잡았다.이후 그는 드렁큰 타이거와 윤미래가 소속된 정글엔터테인먼트와 계약하고 담금질에 들어갔다. 우승자였던 서인국, 3위를 차지한 길학미가 바로 음반을 선보였던 행보와는 달랐다.최근 연합뉴스와 인터뷰를 한 조문근은 "1년의 시간은 내 음악 진로를 탐색하는시간이었다"며 "지난 5월 음반을 내려다가 미흡해 작업한 곡을 폐기처분했다. 어쿠스틱 사운드의 밴드 음악이 내게 맞는 옷이기에 라이브 공연을 염두에 두고 수록곡을 작업했다"고 말했다.음반에 작사, 작곡자로도 참여한 그는 젬베를 들고 나올 것이란 고정관념을 깼다. 소박하고 경쾌한 기타 리플, 서정적인 피아노 음계, 강렬한 밴드 사운드를 아우르며 포크 록, 레게, 모던 록, 보사노바, 펑키한 재즈 등 원없이 장르 탐닉을 했다.때론 앙칼지고 때론 감미로운 두 얼굴의 음색도 제대로 살렸다.타이틀곡 '너라는 걸'은 셔플 리듬에 피아노와 현악기가 더해진 미디엄 템포의 곡. 미국 싱어송라이터 제이슨 므라즈의 사운드처럼 달달함도 느껴진다.'노래할 땐 기타만 있어도 행복해'란 노랫말이 인상적인 '러브 라이크 디스(Love Like This)'는 포크 록, 인디 밴드 시절 공연하며 예쁜 여자를 본 경험담을 담은 '필 러브(Feel Love)'는 어쿠스틱한 오리지널 버전과 레게 버전으로 실었다. '그래 그렇게'는 펑키한 재즈곡, '포레누아 체리'는 룸바 형식을 띈 보사노바다. 자작곡인'길'은 '길 잃은 고양이' 시절 만든 노래를 모던 록으로 편곡했다.조문근은 '슈퍼스타 K' 출연 이후 자신의 음악 환경이 크게 달라졌다고 했다.이러한 변화를 마음껏 누렸다는 그는 "동네 카센터 출신이 프로의 세계인 F1에 입문한 셈"이라며 웃었다."밖에서 바람맞던 꽃이 화분, 비닐하우스에서 소중하게 가꿔지게 된거죠. 제 인생 처음으로 곡 작업을 했을 때 7만원짜리 사운드 카드로 곡 작업을 하고 홈레코딩을 했는데 이번엔 수천만원 짜리 장비로 녹음하고 믹싱하는데 무척 행복했어요." 그는 소속사가 자신이 고집한 음악 화법을 인정해준데 대한 고마움도 표시했다.'길 잃은 고양이' 멤버였던 신홍민이 이번 음반에 작사, 작곡가 겸 엔지니어로 참여한 것도 소속사의 배려였다고 한다.그는 "사람들이 힙합 음악의 대표 기획사인 정글엔터테인먼트와 계약한 걸 궁금히 여기더라"며 "내가 좋아한 드렁큰 타이거, 윤미래 선배가 음악과 무대에서 보여준 표현의 자유가 늘 부러웠다. 그렇기에 음악에 빠지면서부터 동경한 곳이 지금의 소속사였다"고 말했다.그러나 윤택해진 음악 환경과 달리, '슈퍼스타 K'를 통해 경제적인 혜택까지 누린 건 아니다. 아버지가 중학교 1학년 때 세상을 떠나 그는 어머니, 두 형과 근근히살았다."신촌, 홍대, 대학로, 인사동, 명동 등지에서 거리 공연을 하며 제 힘으로 살았어요. 거리 공연하는 노하우가 생기기 전까진 컵라면만 먹었죠. 어느날 공연을 마치고 관람료를 받는 상자에 파란 색깔 지폐가 보이는데 신기했어요. 늘 가난했기에 경제적인 여건이 제 음악을 방해하진 못해요."그는 음반 발매에 앞서 지난 10월 '슈퍼스타K 2'의 최종 결선 방송에서 데뷔 무대를 펼쳤다. 허각, 존박, 장재인 등의 출연진이 활약하는 모습도 꼼꼼히 챙겨봤다고 한다.그는 "올해는 상금이 두배가 됐더라"고 웃은 뒤 "출연진의 실력도 뛰어나고 프로그램 진행의 짜임새도 훨씬 좋아졌다. 노래하고픈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무대가 대중의 관심을 끌어 고무적이다. 그런 무대가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내 인생에도 이런 기회가 올 줄 몰랐으니까.."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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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
  • 2010.12.09 23:02

사후 30년 존 레넌..'살아있는 전설'

8일은 비틀스의 멤버였던 존 레넌이 때 이르게 세상을 떠난지 꼭 30년이 되는 날이다. 그는 뉴욕 센트럴 파크의 자택 아파트 앞 길에서 기다리던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에게 등에 4발의 총탄을 맞았다.올해는 레넌의 탄생 7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두번째 부인으로 그의 영원한 반려가 된 오노 요코는 바로 얼마 전인 10월 9일 그 행사를 치렀다. 해마다 이날과 12월8일에는 요코가 여전히 살고있는 그 아파트 구역으로 팬들이 몰려와 레넌을 추모하고 기린다. 범행 당시 채프먼은 정신이 불안정한 25세 청년이었다. 그는 그날 아침 이곳에서 레넌을 기다리다가 레넌의 당시 최신 앨범에 사인까지 받았다. 그러고 다시 하루 종일 기다리다가 귀가하던 레넌에게 다가가 총을 쏘았다. 채프먼은 단기 20년,장기 종신형을 선고 받고 여전히 복역 중이다. 뉴욕의 아티카교도소에 수감된 그는 이제껏 여섯 차례의 가석방 요청이 모두 기각당했다. 오노 요코는 자신과 아들 션 레넌(35)의 신변 안전을 이유로 그의 가석방에 반대하고있다. 음악과 세계평화운동으로 당시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그는 전설이 됐다. 하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여전히 살아있으며 전 세계 사람들의 일상적 삶에 녹아있다. 잊을 수 없는 비틀스의 히트곡 '스트로베리필즈'를 딴 센트럴파크의 한 구역에서부터 레넌의 대표곡이랄 수 있는 '이매진'이 새겨진 모자이크에 이르기까지 그가 남긴 유산은 어디에나 있다. 레넌의 고향인 영국 리버풀은 공항 이름도 존 레넌공항으로 바꿨다. 올해 초 오노 요코는 아이슬란드에서 레넌 탄생 70주년 행사가 될 기념식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그녀는 레넌이 생전에 세월의 흐름을 두드러지게 표시하는 것을 결코 즐기지 않았다고 말했다. "지난번 생일 말야,내가 40이 된다니 정말 믿을 수 없어"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오노요코는 타임스지에 밝힌 적이 있다. 시라큐스대학에서 팝문화를 강의하는 로버트 톰슨은 레넌이 "엘비스 프레슬리 처럼 젊어서 죽었다"고 말했다. "이 둘은 모두 음악적 영향력의 절정을 지난 때였지만 죽자마자 즉각 전설이 됐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레넌이 정치적 인물이기도 했으며 생김새와 헤어스타일,안경,생활 양식 등으로 그 당시의 '시대정신'을 상징했다"고 지적했다. 톰슨은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들의 음악이 끝난 것은 레넌의 죽음이 아니라 그보다 3년 앞서 '새터데이 나이트 피버'가 나왔을 때"라고도 말했다. 어찌됐든 레넌의 죽음은 한 시대의 몰락을 가리켰으며 그는 사람들의 뇌리에 트레이드마크 격인 동그란 알의 안경을 쓴 봉두난발의 음악가로 영원히 남았다. 세월은 갔지만 비틀스의 열기는 전 세계에서 가시지 않고있다. 지난달 애플의 아이튠즈에서 비틀스의 음악이 출시된 후 첫 1주일 동안 판매된 음반이 앨범으로만 45만장이 넘고 개별 곡들로는 200만 곡이 넘는다. 지난 6월에는 비틀스의 히트곡 "어 데이 인더 라이프"의 가사를 레넌이 손으로 쓴 종이 한장이 소더비 경매에서 예상가의 거의 두배에 달하는 120만달러에 팔리기도했다. 레넌의 페이스북 공식 페이지 팔로워는 120만명이 넘는다. 레넌의 죽음은 비틀스의 팬들에게 특히 씻지못할 아쉬움을 남겼다. 톰슨의 말 처럼 "그의 죽음은 수많은 팬들이 바라던 비틀스의 재결합이라는 소망에 종지부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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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
  • 2010.12.08 23:02

승자는 누구?..'자이언트' 화제 속 종영

결국은 해피엔딩이다. 하지만 과연 무엇이 '해피'한 것일까. 오로지 복수를 위해 전력 질주했지만 복수가 끝난 뒤에 밀려오는 허무감은 무엇으로 설명할 것이며, 성공을 손에 쥐었지만 그것으로 처절했던, 애끊는 슬픔으로 점철됐던 지난 세월을 보상받을 수 있는 것일까. SBS TV 창사 20주년 특집극 '자이언트'(극본 장영철.정경순, 연출 유인식)가 이 같은 질문을 남기며 7일 60회를 끝으로 7개월 여정을 마무리한다. 1970-1980년대 서울 강남 땅 개발기를 배경으로 한 가족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리며 인기를 모은 '자이언트'는 특히 박력있고 파워풀한 스토리로 중장년 남성팬들로부터는 '오랜만에 볼만한 드라마가 나왔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시대극답지 않은 빠른 스피드로 젊은층을 유인하는 데도 성공했다. ◆초반 시청률 고전 = 중반 이후 인기를 바탕으로 10부가 연장됐지만 처음부터 좋았던 것은 아니다. '자이언트'는 건설업계를 배경으로 맨손으로 일어나 성공신화를 쓴 남자의 이야기라는 점 때문에 기획단계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모델로 한 것이 아니냐는 시선을 받아야했다. 유인식 PD는 6일 "방영이 되기도 전에 근거 없는 루머에 시달려야 했고 그로 인한 선입견 때문에 일단 외면하는 다수의 시청자들이 계셨다"며 "그런 선입견은 오로지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내용으로 불식시키는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는데 제게 그 과정은 아득하고 외롭게만 느껴졌다"고 고백했다. 이런 이유와 함께 '동이'가 한창 인기 있을 때 시작한 데다 이후 월드컵 중계로 편성이 뒤죽박죽 되면서 '자이언트'는 초반에 고전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제작진의 승부욕을 고취시켜 드라마를 더 많은 이야기와 더 빠른 스피드로 무장하게 만들었다. 이에 힘입어 시청률은 초인적인 의지로 숱한 역경을 헤쳐나간 주인공 이강모(이범수 분)의 활약과 보조를 맞춰 상승세를 탔고, 결국 3개월 만에 '동이'를 잡는 데 성공했고 지난달부터는 시청률 30%대를 유지하고 있다. 유 PD는 "이러다가 영영 저희의 의도는 왜곡되고 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무렵에 '자이언트'를 변호해주는 네티즌들이 나타났다"며 "그 힘으로 점차 드라마를 둘러싼 부정적 이미지가 깨어져 가는 과정은 경이롭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내가 정말 싸웠던 것은 당신 같은 인간이 잘사는 시대" = 장영철 작가는 제목에 대해 "'자이언트'라는 제목을 보고 주인공이 거인이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제가 생각한 자이언트는 어두웠던 1970-1980년대를 살아온 이들이 극복하고 맞서 싸워야했던 삶, 시대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는 "극중 모든 인물이 성공을 위해, 자이언트가 되기 위해 전력 질주하지만 그런 의미보다는 1970-1980년대가 쓰러뜨리기 힘들었던 시대였다는 것을, 거인 같은 시대였다는 것을 상징했다"고 설명했다. 삼청교육대와 근로봉사대가 위용을 떨치고 정경유착, 중앙정보부의 만행, 정치적 살인 등이 만연했던 그 시절이 바로 거대한 거인이었고, 드라마는 계란으로 바위치기일지언정 불의에 분노한 민초들의 힘이 하나둘 모여 그 거인과 싸웠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물론 그 가운에는 용기와 양심, 정의감으로 뭉친 이상적인 인물 이강모가 있어 극적 재미를 고조시켰고, 시청자는 그에게 감정이입을 하면서 지금은 과거가 됐지만 여전히 트라우마를 주는 그 시절을 회고했다. 이강모 역시 마지막에는 자신이 평생을 걸고 복수의 칼을 갈았던 조필연(정보석)에게 "내가 정말 싸웠던 것은 당신이 아니라 당신 같은 인간이 잘사는 시대였다"고 말하며 조필연을 넘어선 더 큰 악이 무엇인지 짚는다. ◆"다 가졌지만 아무것도 갖지 못한 나" = 드라마는 현재의 '금싸라기 땅'인 강남이 어떻게 개발됐는지를 보여주며 정치 드라마와 함께 경제적 성공 신화를 조명하며 흥미를 끌었다. 이강모의 한강건설은 온갖 방해공작과 사고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지만 이강모는 위기의 순간 지략을 발휘하고 사선에서도 편법을 쓰지 않는 정정당당한 모습으로 장애를 하나하나 헤쳐나가며 시청자와 승리의 기쁨을 나눴다. 특히 어린 아이들이 연탄재를 날라 매립지를 메우고, 흙 경화제를 이용해 도로를 건설하고, 아파트 공사 초기 보일러 사고가 발생하고 개발 경쟁이 치열했던 점 등은 모두 실제 있었던 일이라 드라마에 대한 몰입도를 높였다. 결국 이강모는 성공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과연 행복을 찾았을까. 드라마는 이미 1회 프롤로그에서 이강모의 대사를 통해 극한의 고통을 뚫고 나온 자를 기다리는 것이 과연 행복만일까 질문했다. 이강모는 프롤로그에서 "다 가졌지만 아무것도 갖지 못한 나"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며 회한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결국 드라마는 이강모뿐만 아니라 이성모, 이미주, 조필연, 황태섭, 조민우 등 70-80년대를 관통했던 인물 모두가 승자, 패자를 떠나 '역사'라고 말한다. 장영철 작가는 "어두웠고 암울했던 만큼 그 시대 사람들은 치열하고 진지했다. 그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이후 1990-2000년대가 열리지 않았을까"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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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12.08 23:02

응급 의료시스템 문제 조명

'SBS 뉴스추적'은 8일 밤 11시15분 우리나라 응급 의료시스템의 문제를 조명한 '수술대 오른 응급실'을 방송한다.우리나라의 응급환자 수는 매년 크게 증가하고 있다.2008년 890만명이던 응급환자 수는 1년 만에 1천만명을 훌쩍 넘어섰다. 응급환자 수가 느는 가운데 응급실 관련 의료 사고와 불만도 끊이지 않는다.제작진이 만난 50대 이모씨는 서울의 한 종합병원에서 뇌수막종 수술을 받고 퇴원한 며칠 뒤 수술 후유증으로 대학병원 응급실을 찾았다.제작진은 "그러나 이씨는 18시간 동안 의사를 만나지 못한 채 방치됐다"며 "결국 병원을 찾은 지 만 하루가 다 돼서야 의사로부터 뇌경색 진단을 받고 재수술을 했지만 이미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고 전한다.제작진은 교통사고나 산업재해 등으로 발생하는 중증외상 환자들의 현실은 더 비참하다고 지적한다.수도권의 한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는 외상 전문의는 전국 각지에서 이송되는 환자들로 하루에도 몇 차례씩 예고 없는 대형 수술을 한다. 중증외상 전문 인력과 집중 치료실 등을 갖춘 병원이 국내에 전무하다시피 하기 때문이다.이 때문에 병원이나 이송 단계에서 잘 대응했다면 살릴 수 있었던 환자의 비율(예방가능사망률)이 10명 중 3명을 넘는다.법적으로 권역응급의료센터는 전문의 이상, 지역응급의료센터는 레지던트 3년차 이상이 24시간 응급실에 상주하도록 규정돼 있지만 부족한 인력과 의사들의 관행때문에 이마저도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제작진은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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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12.08 23:02

스타와 함께하는 '천사들의 편지'

톱스타 이병헌과 이승기, 김정은 등이 모델로 참여한 '천사들의 편지 8th, 조세현의 입양아를 위한 사진전'이 오는 15-20일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다.'천사들의 편지'는 대한사회복지회와 사진작가 조세현이 2003년부터 개최해온 사진전으로, 인기스타와 입양을 기다리고 있는 아기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부모 없는 아기의 백일 사진을 찍어달라는 한 사회복지사의 요청으로 시작돼 입양 문화 캠페인의 일환으로 진행되고 있다.올해는 이병헌, 이승기, 장근석, 김정은, 한효주, 이민정, 김희애, 김옥빈, 유지태, 윤시윤, 배종옥, 박경림, 김민준, 왕지혜 등이 모델로 나섰다.조세현 작가는 "사진전을 통해 가정이 필요한 아이들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고 더 많은 아이들이 좋은 가정을 찾아 사랑을 받고 자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대한사회복지회는 "지금까지 사진전에 함께한 아기들은 90%가 가정을 찾아 입양됐다"고 전했다.전시회장에서는 후원자에게 스타들과 아기의 사진이 담겨있는 팸플릿과 다이어리를 제공하며 모금된 후원금은 가정을 기다리는 아이들의 치료비와 수술비 및 국내입양활성화를 위해 사용될 예정이다.전시 작품은 인터넷(http://gallery.lovefund.or.kr)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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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
  • 2010.12.08 23:02

'가객' 김광석을 다시 노래하다

1996년 1월 세상을 떠난 '영원한 가객(歌客)' 김광석을 추억하는 무대가 마련된다. 생전 고인을 기억하는 선후배 가수들이 내년 1월 15일 대구 경북대학교 대강당, 2월 12일 서울 이화여자대학교 대강당에서 '2011 김광석 다시 부르기'라는 타이틀로 공연한다. 공연 수익금은 김광석 추모 재단 조성을 위한 '김광석 추모사업회' 기금으로 쓰이며 출연 가수들도 출연료를 기금으로 전달한다. 이 무대에는 4CUS(박학기, 강인봉, 박승화, 이동은)를 비롯해 동물원과 장필순, 윤종신, 이적, 김태우 등이 참여해 노래판을 펼친다. 이들은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변해가네' '서른 즈음에' '사랑했지만' '이등병의 편지' '일어나' 등 김광석의 대표곡을 노래한다. 김광석은 노래를찾는사람들, 동물원을 거쳐 솔로 활동을 벌이며 1995년까지 1천회가 넘는 공연을 펼쳤다. 그가 떠난 지 10여년이 훌쩍 흘렀지만 여전히 그의 노래는 동료 가수들, 팬들의 가슴에 기억되고 있다. 고인이 1천회 공연을 펼친 동숭동 소극장 학전블루 앞에는 2008년 김광석 노래비가 세워졌으며 올해는 전국 5개 도시에서 추모 콘서트가 열렸고 고인의 고향인 대구 수성교 방천시장에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도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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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
  • 2010.12.07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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