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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오면

갑자기 문득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노라니, 기억의 한 파편이 뇌리에 각인이 된 듯 가만히 내 귓가로 "가을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가요?"하고 물어보던 기억속의 음성이 파도가 물결치듯이 내 귀 언저리에 흘러들어왔다. 누군가는 시골에 가면 넓은 들판에 황금빛의 누르스름한 벼가 무르익어 고개를 숙이고, 그 들판 중앙에는 참새에게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서인지 모를 기괴하기 짝이 없는 허수아비의 모습이 떠오른다고 할지도 모르고 또, 다른 누군가는 푸르른 창공의 하늘을 동그래한 곡선을 그리며 빠알간 잠자리가 날아다니는 모습이 상상이 된다할지도 모르겠고, 어떤 이는 어느덧 가을이 찾아와 푸르스름하던 색상들이 빛바랜 도화지처럼 또는 수줍은 어린소녀의 불그스레한 볼처럼 세상을 노랗고 붉게 물들여놓은 정경이 떠오른다고 할지도 모르겠다.하지만, 청명한 하늘과 선선한 날씨로 인하여 독서를 하기에 좋은 계절이란 생각이 문득 들었었고, 그 당시 나의 대답은 '책'이라는 고리타분하게 들릴지도 모를 말을 꺼낸 적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책을 읽고 무언가를 안다는 것이 참 즐겁고 좋았었던 것 같다. 우리들은 어렸을 적부터 어른들로부터 "책을 많이 읽어라." 하는 예기를 많이 듣고 자라왔다. 그리고 책을 읽음으로써 즉, 독서를 통해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왜 그토록 책을 읽으라고 강조하셨을까? 그에 대한 내 생각을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이러하다.첫째, 책을 읽음으로써 무수히 많은 간접경험을 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살아가면서, 모든 것을 보고 느끼는 경험을 하고 그에 대한 체험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책을 통하여 저자가 경험하고 체험한 일들에 대하여 우리는 알 수 있고 배울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직접적인 경험이 없다고 하더라도 폭넓은 지식을 책을 통하여 얻을 수도 있는 것이다.둘째, 창의성이 길러진다. 독서를 하다보면 나는 언제부터인가 그 책속의(이야기속의) 주인공이 되어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도 있고, 그로인해 한쪽으로 치우쳐진 편협한 생각이 아니라 다방면으로 생각의 확장을 통한 사고의 유연성으로 인하여 무엇인가에 대하여 상상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닌, 현실속의 편의와 편리를 위한 또 다른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이를 실현가능하게끔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는 밑거름의 토대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고 본다. 셋째, 건전한 여가생활을 보낼 수 있다. 우리의 삶은 하루하루가 스트레스의 연장선상위에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에 자신이 관심이 있었던 분야에 대하여 책을 읽는다면 이를 통해 자신의 지적양식 또한 쌓을 수 있고 동시에 마음의 심적 안정을 통한 스트레스의 해소에도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이외에도 독서를 통해서 우리는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음에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사회는 컴퓨터의 발달과 더불어 인터넷의 발전으로 인해 컴퓨터게임을 한다든가 인터넷을 통한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에 시간을 더 할애함으로써 우리는 독서를 하는 것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는지 싶다.가을이 왔다. 흔히들 말하는 독서의 계절로 불리는 가을이 왔다. 지금이라도 만약에 그동안 독서를 하는 것에 소홀히 하고 게을리 하였다면 시간이 그동안에 없었다는 핑계는 잠시 저 구석 한편에 놓아두고 자기 자신에 대한 투자로 지친 심신을 달래고 마음의 양식을 쌓고자 이참에 독서삼매경에 한번 빠져보는 것이 어떠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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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0.03 23:02

모든 세대를 위한 예의범절

요즈음 나는 도시 외곽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원어민 선생님의 영어수업을 도와주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초등학교에 가면 어렸을 적 생각도 나고 초등학생들을 만나 즐겁지만 가끔은 그들을 대하면서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수업시작 종이 쳤는데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수업에 늦게 들어오거나, 선생님이 수업을 진행하는 중에 떠들어서 혼내면 오히려 반항하는 학생들이 더러 있다. 인터넷과 뉴스 등을 통해 교권이 전보다 붕괴된 것을 알았지만 직접적으로 경험하니 학교 선생님들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녔던 시절과 지금의 초등학생들을 비교해보면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과 예절을 많이 잃어 버렸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아이들이 어른들로부터 어른을 대할 때의 예절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 어른에 대한 존경심과 공손한 태도를 갖지 못하는 것일까.나는 몇몇 어른들이 타인을 배려하는 태도와 예의범절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아이들이 이러한 예의를 배우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국과 호주, 캐나다 등 서구권 나라에서 온 원어민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국에 와서 웃어른께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것은 어색하지만 이러한 우리나라의 예의범절 문화가 부럽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젊은 사람이 어른에게 먼저 공손하게 인사하는 문화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예의를 지켜야한다는 예절이 없어서 웃어른께 예를 갖추지도 않으며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의 시각에서나 우리들의 시각에서 봤을 때 우리가 가진 이 예의범절 문화는 자랑스럽고 널리 알리고 싶은 것 중 하나이다. 하지만 점점 이 문화가 사라지고 신세대는 서구화되고 있어 안타까울 뿐이다.또한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항상 어른을 존경하고 공경하며 예의 바르게 행동해야 한다고 배워왔다. 하지만 모든 어른이 모두 이런 대우를 받을 자격을 갖추고 있지는 않다. 몇몇 어른들은 길거리나 공공장소에서 젊은 사람들이 봤을 때 부끄러운 행동을 서슴지 않고 한다. 욕을 하거나 침을 뱉는 등의 행동들을 보면 그들에 대한 존경심을 갖기 어렵다. 얼마 전에는 원어민 친구와 함께 길을 걷다가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어른 두 명이 서로 소리를 지르며 싸우는 것을 우연히 목격했다. 원어민 친구들에게 한국에서는 사람 사이의 예의가 중요하다고 알려 준데다 동방예의지국의 이미지와 자랑스러운 우리나라의 문화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껴 얼굴이 화끈 거렸다. 신세대, 즉 요즘 자라나는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이 외동인 경우가 많고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므로 아이들도 점점 이기적으로 변하고 어른에 대한 예의를 찾아보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때문에 이 시대에 성장하고 있는 어린이와 청소년에게는 예의범절을 갖추고 있으며 공경과 존경할 수 있는 대상이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는 신세대를 위해,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를 위해 예의범절 문화를 잘 물려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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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9.26 23:02

저는 당신과 다른, 이런 사람입니다

사전에서는 '개성이란 사물이 다른 것과 구별되어 독자적으로 갖는 특징이다. 이것은 사물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해서도 같다. 또한 개성의 신장은 개인이 가진 여러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개인은 사회와 동떨어질 수 없으므로 사회의 제약을 받는다.'라고 한다. 나는 요즘 종종 이 개성 때문에 곤혹스러운 상황을 겪었다. 아마도 기성세대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우리의 다름에서 오는 이질감이 그런 상황을 만들었으리라. 그래서 기성세대만 아니라 나 자신도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인 것을 생각하며, 다름에서 시작되고 이해에서 엇나가는 개성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사람들은 내게 '4차원', '자유로운 영혼', '히피' 등의 별명을 붙여줬다. 그리고 나도 동의한다. 이런 종류의 별명을 갖게 된 이유는 평범하지 않은 옷차림새, 형식에 얽매이는 것을 참지 못하는 성격, 여행으로 떠돌아다니는 습성 등이 한몫 한 듯하다. 하지만 어쩌랴. 나는 의자에 앉아서 하는 공부나, 정해진 답이 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경험하고 보는 것이 더 가치가 있다고 배워왔다. 그래서 그것을 내 가치관에 맞게 좀 더 발전시킨 것이다.그런데 개성의 정의에서 밝힌 것처럼 개성의 신장은 사회의 제약을 받게 된다. 스스로는 형식에서부터 자유로울지 모르지만 타인의 시선은 나를 옭아매고 있는 것이다. 가장 최근에 겪은 일로는, 베트남과 캄보디아에서 귀국하는 날이었다. 캄보디아의상, 손수건을 두른 머리, 잠자리안경, 기타를 맨 모습으로 베트남에서부터 인천을 거쳐 전주까지 왔다. 정작 나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공항이나 휴게소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나보다. "사람들이 너만 쳐다본다."는 말에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별종이네.'하는 눈빛이다. 이런 경우처럼 외모가 튀어서 좋지 않게 평가받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요즘은 거리에만 나가봐도 제각기 다른 옷차림, 머리모양, 말투, 성격 등 개인주의와 다원화로 인해 외모뿐만이 아니라 가치관에 대해서도 개성이 매우 뚜렷한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일부사람들은 이러한 개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렇다고 이 모습을 이해해달라고 투정부릴 수 없으며, 기준치에 획일적으로 맞추는 것도 불가능하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나의 자유는 제한 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상 이러한 개인의 개성에 대해 충돌하는 부분에는 다름에 대한 인정이 있어야 한다.공동체의식이나 집단주의가 낯설지 않은 우리에게 '다름'은 흑백논리나 심지어는 적대감까지도 불러왔다. 그러나 다른 게 문제가 될 이유는 없다. 우리는 그저 개인이 가진 외모를 인정하는 것처럼 성격이나 습관, 개성까지도 그 일부로 보고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나도 누군가에게 있는 그대로를 이해받을 수 있다. 어쩌면 인정하자는 말은 참 쉽게 들린다. 막상 누군가를 이해하려면 참 넓은 마음이 있어야 넘길 수 있는 문제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다원화사회, 더 나아가서는 세계화된 지구촌에 살면서 앞으로 부딪히는 모든 것이 다 생소하고, 색다른 것들을 겪게 될 세대가 아니던가. 따라서 나와 다른 것을 배척하는 고집은 이제 내려놓고 더 큰 아량을 갖기로 다짐해본다. 색깔은 그 자체로도 좋지만, 함께 어우러져 다른 색을 내거나 무지개와 같은 아름다운 하나가 되기도 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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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9.19 23:02

우리의 도덕성 사용법

"요즘은 기차표 검사를 하지 않는군. 이 기차에 탄 몇 사람들은 표를 사지 않고 탔겠어." "그러게 말이야. 검사를 하지 않으니 기차표를 사는 것은 손해야. 다음엔 나도 표를 사지 않고 기차에 타야겠어." 기차를 타고 집에 가던 중 지루해서 눈을 감고 있는데 옆 좌석 두 남자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그들은 나름대로 합리적인 근거를 토대로 끝내주게 획기적인 무임승차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나는 처음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그들의 사고방식에 놀랐다. 그러다가 그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음을 이해하다가 이 대화가 도덕과 법에 대한 우리 사회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 슬퍼졌다. 도덕과 법. 굳이 둘을 비교하자면 도덕은 강제성이 없고 법은 강제성이 있다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우리가 사회 속에 살면서 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지켜야 할 사람들 간의 약속이라는 점에서 같다. 두 개념의 의미를 구분하지 않고 우리 사회의 약속이라는 공통점에 초점을 두어 보자. 우리는 왜 도덕과 법을 지킬까?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도덕과 법을 지키는 것이 자신에게 이득이기 때문에, 처벌 받기 두려워서, 지키지 않으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때문에,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등 다양한 이유로 도덕과 법을 지킨다. 그 중 대다수의 사람들이 처벌 받기 두려워서 도덕과 법을 지킨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콜버그는 이런 외부적인 조건에 의해 도덕과 법을 따르는 것은 매우 낮은 수준의 도덕성이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처벌 받기 두려워서 우리 사회의 약속을 지키기 때문에 처벌 받지 않거나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면 도덕과 법을 어겨서라도 개인의 이득을 취하려고 한다. 단적인 예로 지난 여름방학 때 강원도 삼척시 환선굴에 갔었다. 동굴 보호를 위해 동굴 안에서 사진 촬영이 금지 되어있고 적발 시 50만원의 벌금을 내야한다고 표지판에 적혀있었다. 동굴에 입장을 할 때 관리 직원이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다고 재차 강조했다. 하지만 동굴 안 곳곳이 포토존이었다. 동굴 안에 통제하는 사람이 없으니 표지판과 동굴 입구에 있던 관리 직원의 말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서 셔터를 눌러댔고 플래시가 터졌다. 그것이 우리 사회의 약속인지 알면서도 사람들은 왜 누가 보지 않으면 법을 어길까? 왜 외부적 조건에 의해서만 도덕과 법을 지킬까? 법을 불신하기 때문이다. 법대로 살면 피해를 본다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다. 도덕과 법이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구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누가 볼 때는 지키고 보지 않으면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식의 태도는 버려야 한다. 우리는 도덕과 법을 지켜야 한다. 양심, 다른 사람, 처벌 등 외부의 조건에 상관없이 도덕과 법이라는 이유만으로 따라야 한다. 도덕과 법이 온전히 잘 지켜질 때 우리 사회가 더욱 윤택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말이 곧 무비판적으로 무조건 도덕과 법을 지키는 착한 시민이 되라는 것은 아니다. 도덕과 법이 합리적인지 따져보고 잘못 되었다면 논의를 해 진정한 우리 사회의 약속으로 고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사회의 약속이 정말 합당하다고 느껴져 도덕과 법으로 정해졌을 때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 도덕과 법에 대한 신뢰. 기본적으로 법을 만드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맞게 법을 만들고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공정하게 집행할 때 법을 지키는 사람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도덕과 법이 도덕과 법이기 때문에 지켜지는 사회를 꿈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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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9.12 23:02

행복은 항상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만약에 누군가 당신에게 "지금 현재 당신의 삶이 행복하다고 생각하시나요?"라고 물어 온다면 과연 당신의 대답은 Yes일까? 아니면 No일까? 내 생각엔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하지만 얼마 전 방송매체를 통해 들려온 소식에 의하면 OECD에 가입한 34개국을 대상으로 그들 삶의 전반에 대하여 행복지수가 어떠한지 통계를 내려 그 순위를 매긴 바 있었는데 우리나라의 행복지수는 그 순위가 뒤에서 두 번째인 32위를 차지하였다고 하였다. 어떻게 하여 이러한 결과가 나타나게 된 것일까? 무엇이 우리의 삶이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그 이면에는 무한 경쟁이라는 사회속에서의 치열한 생존원리와 지속되고 있는 경기침체로 인한 불황, 그리고 취업난 등 기타 무수히 많은 이유가 존재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행복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행복이 무엇이기에 우리는 그토록 행복해지기를 바라마지 않는 것일까?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행복이란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한번 되묻고 싶다. "세상이 말하는 돈과 권력 즉, 우리가 생각하는 부와 권세 그리고 명예를 모두 다 가지고 있다면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라고 말이다. 우리 모두는 네잎클로버와 세잎클로버에 대하여 저마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네잎클로버는 '행운'이라는 의미를, 세잎클로버는 '행복'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어렸을 적의 기억을 돌이켜 보면 우리들은 서로가 네잎클로버를 한번 찾아보겠다고 숲을 뒤지기도 했던 기억을 다들 저마다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네잎클로버를 찾다보면 네잎클로버 보다는 그전에는 그저 무심코 지나쳤던 세잎클로버가 우리에게 더 잘 눈에 띄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러면서 네잎클로버 찾기를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때로는 네잎클로버를 찾았다며 방실방실 웃는 사람들을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주변을 조금만 더 주위를 기울여 살펴본다면 행복하다고 느낄만한 것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디서 돈벼락 한번 안 떨어지나 하는 심정으로 행운이 있기만을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는 말처럼 우리 가까이에서, 바로 옆에서 존재하고 있는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바라보지 못한 채 그저 우리네 삶을 보다 더 윤택하게 만들려고 하다 보니 작지만 소소한 기쁨들을 외면한 채 살아가면서 삶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누군가는 말 할지도 모르겠다. 산다는 것 자체가 지옥이라고. 그래서 이 삶이 어서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과연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 다시 말해 우리의 삶은 그토록 고통스럽고 힘들기만 한 것일까? 만약에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내 주변을 한번만이라도 되돌아보도록 하자. 내게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나보다 한 살 어린 남동생을 포함하여 사랑스런 가족이 있으며, 나를 언제나 이해하고 지지해주는 친구들과 든든한 동료들이 있다. 그들이 있기에 나는 내가 꿈을 꾸는 것을 이루기 위해 도전할 수 있고 그들이 있기에 때로는 힘들고 지칠지라도 "그래 다시 한번 해보는거야" 되새기면서 다시 시작할 수 있기에 항상 내게는 웃음과 기쁨이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행복은 저 멀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주변에 언제나 함께하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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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9.05 23:02

당신은 '어떻게' 살고 싶은가

유명한 기업에 취업한 대학교 선배가 얼마 전 학교를 찾아왔다. 취업에 성공하기 위해 대학시절 학과 공부뿐만 아니라 취업에 필요한 자격증을 취득하고 봉사활동도 하는 등 대내외 활동을 열심히 해 존경하던 선배였다. 자신이 원하던 직장에 들어가 회사생활이 어떤지 물었다. 하지만 그 선배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요즘 행복하다는 걸 전혀 모르겠어, 회사도 그만 두고 싶어" 사정을 들어보니 상사의 압박과 업무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토록 원하던 직장에 들어갔는데 행복은커녕 스트레스 때문에 취업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이직을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왜 그런 마음을 먹게 됐는지 생각해봤다. 그 선배는 누구보다 열심히 취업을 준비했지만 '무엇이 되야겠다'만을 생각하고 '어떻게 살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 같다. 어찌 이와 같은 사람이 한 둘 뿐이겠는가. 아마 많은 취업준비생과 꿈을 갖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경제상황이 나빠지는 동시에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워져 연봉이 높은 직업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이 더욱 늘어났다. 하지만 물질을 좇다가 진정한 행복을 잃어버릴 수는 없다. 아이비리그 대학 중 다트머스 대학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총장이 된 한국계 미국인 김용은 오바마의 선택을 받아 세계은행 총재가 되면서 아시아인 최초의 기록을 다시 한번 냈다. 김용 총재는 그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원동력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 지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과 실천이라고 밝혔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부모로부터 남을 위해 봉사를 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아 다른 이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지에 대해 고민했다. 그는 가난한 이들의 질병을 치료해야겠다는 결심을 해 하버드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졸업 후에는 가난한 나라를 직접 찾아가 각종 질병치료와 빈곤 퇴치에 힘 써 아이비리그 대학 총장과 세계은행 총재라는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더 큰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그는 그 자리를 얻기 위해 노력을 한 것이 아니다. 다만 남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할 지에 대해 고민하고 실천한 덕분이었다.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도 잘 모른 채 입시와 취업을 향해 달리고 또 달린다. 하지만 원하는 것을 얻은 후 만족감은 잠시일 뿐, 기대했던 행복을 찾기란 어렵다. 우리나라 부모들도 자식이 좋은 직장을 얻으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충고 아닌 충고를 하지만 그럴수록 행복과는 멀어질 뿐이다. 만약 우리나라 학생들도 진정한 행복을 위해 봉사정신을 함양하고 물질을 좇기보다 어떻게 살 지에 대해 고민한다면 다른 이들과 함께 행복을 나눌 수 있지 않을까? 또한 노력하는 과정 속에서 고통보다는 성장통이라고 느끼며 삶을 즐길 수 있는 법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학생뿐만이 아니라 무엇이 되고자 하는 꿈을 가진 모든 이들이 그 꿈만을 향해 가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이 세상을 위해 자신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살아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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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8.29 23:02

왜 부자가 되고 싶은가

부자가 되는 법을 가르치는 강의가 열린다는 소식이 라디오를 통해 들려왔다. 별생각 없이 창밖을 보고 있던 나는 뜨악했다. 신학을 하는 나로서는 노골적으로 부를 추구하는 세속가치관에 거부감이 들었다. 그래서 그게 도대체 무엇인지 검색해보았다. 검색어에 '부자되'까지만 썼는데 '부자되는 법', '부자되세요', '부자되는 습관' 등의 검색어들이 무섭게 따라 올라왔다. 부자는 어느 시대에든 있어왔고 빈자들은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언제부터 '부자되기'가 우리 삶 속에 깊이 파고 든 것일까. 그리고 우리는 왜 부자가 되고 싶은 걸까. 반대로, 자신의 이익을 축적하는 것이 아닌 나눔과 만족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나는 지난 7월 23일부터 8월3일까지 국제NGO단체인 '행복한아시아'에서 주최한 '제 2기 전라북도 청소년 해외봉사단'에 스텝으로 참여해 베트남과 캄보디아에 다녀왔다. 물론 청소년들의 글로벌마인드를 고취하기위해 역사, 문화, 종교탐방도 했지만, 봉사단인 만큼 소외계층에 관심을 두고 소외지역과 빈민촌을 많이 방문했다. 그런데 어느 빈민촌에 가든지 공통적으로 보이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사람들의 웃음이었다. 쓰레기와 오물이 깔린 진흙길에 화장실도 없는 그곳에서 우리는 애써 웃어주었으나, 그들은 티 없이 맑은 환영의 웃음과 만족을 보여주었다. 그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매우 깊은 반성을 하게 했다.그들은 어떻게 만족할 수 있을까. 대개의 빈민국이 그러하듯 캄보디아의 행복지수도 높은 편이다. 쉽게 말하면 오늘 먹을 것이 해결되면 걱정이 없는 것이다. 즉, 현실에 만족하는 삶이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갖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내가 가져야 할 것만 보고 있다. 그러니 그것을 갖지 못해 불행해지는 것이다. 그것이 땅이든, 돈이든, 사람이든지 간에 계속되는 불만족과 욕심은 행복에서 멀어지게 만든다.반대로,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람과 가진 것에 만족하는 사람이 있다. 최근에는 각종 NGO단체들과 뜻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나눔과 봉사로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이들은 왜 자신의 물질을 나누고 후원하고 직접 그 땅에서 봉사하는 것일까. 현장에서 그들과 살을 부대껴 보니 이제야 알겠다. 많이 가지지 않았어도 지금의 내 것에 만족하니, 더 이상 욕심부릴 것이 없어지고 외려 나보다 덜 가진 사람에게 관심이 가는 것이다. 또 나보다 덜 가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위해 가보니 그들은 이미 만족하며 웃고 있다.봉사기간과 이 글을 쓰는 동안 스스로에게 부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물었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아마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라는 단순한 답 외에는 대개 나처럼 그 이유를 찾기 어렵지 않을까. 자본주의는 이윤추구가 가장 기본적 원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당연히 더 많은 물질을 갖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게 맞는지도 모른다. 옳은지 그른지는 모르고 사회가 강요하는 논리에 의해 특별한 이유 없이 따라가는 것일 수도 있다. 자본주의가 그르다거나 부자가 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맹목적인 부에 대한 집착이나 욕심을 버리고 작은 것에 만족하자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여러분이 부자가 되고 싶은 편과 나눔의 삶을 사는 편 어느 쪽이든지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안다면, 그 삶 가운데서 작은 만족을 뛰어넘는 큰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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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8.22 23:02

당신은 이 곳에 태어나서 행복하십니까?

한 달 전쯤 여성가족부가 주최하는 나라사랑체험프로그램에 참여해 중국에 다녀왔다. 프로그램의 목적은 중국에 있는 우리 유적을 답사하는 것으로 나를 비롯한 20여 명의 참가자들은 광개토대왕비, 발해 성터 등에 직접 가서 보고 함께 공부했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후 중국에 있는 우리나라 유적지에 대해 몰랐던 사실을 많이 알게 됐다. 하지만 유적보다 기억에 남는 것이 있었다. 한 청년의 말이 내 마음 속에 깊이 박혀 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중국에서 유적지를 답사하는 동안 우리들을 안내해준 가이드는 조선족 청년이었다. 그는 연변 조선자치주에서 태어나 줄 곧 조선자치주에 거주했다고 한다. 나를 비롯한 참가자들은 그가 매우 신기했다. 조선족이라는 단어를 언론에서 자주 접하긴 했지만 조선족에 대해 잘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외모는 우리와 같으나 중국에서 태어나고 자라 중국어를 사용하며 중국 역사를 배운 그들의 생활, 가치관이 매우 궁금했다. 버스로 이동하는 도중에 조선족에 대해 궁금한 것을 질문하고 가이드가 답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 똘똘한 아이가 "당신은 중국에서 태어난 것이 행복하십니까? 만약에 다시 태어난다면 중국과 한국 중 어느 나라를 택하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우리는 내심 한국이 더 좋을 것 같다 혹은 나는 한국 민족이기 때문에 한국에서 태어나고 싶다는 답변을 기대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 청년은 "나는 중국에 태어나서 매우 행복합니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중국에서 태어나고 싶습니다."라고 당당하게 답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조선족은 중국 전통 민족인 한족이 아니기 때문에 차별받지 않는지 궁금했다. 그러자 그는 오히려 중국 정부에서 한족에 대해선 산아정책을 실시하지만 소수 민족들에게는 두 번째 자녀부터 보조금을 주고 무료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한다고 했다. 또한 각 민족들의 자치주를 인정해 주고 그 자치주 내의 가게 간판은 각 민족의 언어를 우선적으로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고 했다. 버스를 타고 연변에 가니 정말 그의 말과 같았다. 가게마다 모두 우리 한글로 된 간판이 있었고 중국어는 한국어 뒤에 적혀있었다. 연변에 가니 한국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나와 다른 것에 대한 인정과 이해. 중국이 다른 민족을 대하는 방식을 피부로 직접 느끼며 놀랍고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단일민족을 유지해야한다는 어리석은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더 나아가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은 행복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농촌 총각들이 결혼 시기를 놓쳐 국제결혼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우리는 국제결혼을 한 외국인들에게, 국제결혼을 해서 태어난 아이들에게 결코 친절하지만은 않았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우리는 그들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다. 혼혈이라는 이유로 우리가 굳건히 지켜온 단일민족사회의 질서를 해치는 존재로 취급하였다. 이런 사고는 그들을 우리 사회의 이단아로 내몰 것이다. 그들은 불행할 것이다. 또한 그들을 우리나라 고유 민족이 아니라고 배척하면 우리나라의 발전도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도 불행 할 것이다. 더 이상 그 누구를 위해서도 단일민족을 주장해서는 안된다. 중국이 다른 민족을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는 것처럼 우리도 그들을 인정하고 곧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야한다. 그래서 모두가 행복 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훗날에 당신은 이곳에 태어나서 행복하냐 물을 때 우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나는 한국에 태어난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할 날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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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8.15 23:02

꿈이 있는 곳에 행복이 있다

사람들은 항상 꿈을 꾸며 그 꿈을 이루고자 노력한다. 마치 한 마리의 새가 따뜻한 보금자리인 둥지를 벗어나 저 푸른 창공을 향해 날개 짓을 하며 날아오르듯이 누구나 성공을 꿈꾸며 도약하고자 한다. 나 또한 그렇게 나의 꿈을 향해 비상하고자 작년 3월 호주로 떠났다. 처음 호주공항에 내려서 바라본 그때의 기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게 떠오른다. 금발의 외국인들, 한국과는 다른 낯선 대지의 풍광들 그리고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의 다른 언어로 이야기하는 모습들 이러한 모든 것들이 나에게는 신기했고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그렇게 호주의 낯선 문화와 환경을 접하면서 나의 외국생활은 시작되었다. 그 당시를 회상해보면 나는 남들과 달리 특별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영어를 유창하게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였기에 새벽에는 학교청소를 하면서 생활비를 벌었고, 이후 아침 9시부터 오후 저녁 늦게까지 어학원에 다니면서 영어 공부에 나의 모든 것을 투자하였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듯이 나 또한 그러하였기에 하루 24시간 중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한 치의 시간도 낭비하지 않으려고 했고, 노력만이 살길이다 싶어서 영어공부에 최선을 다하였다.약간 우스갯소리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한번은 잠을 자는데 잠꼬대를 영어로 하던데 무슨 꿈을 꾸었냐고 친구가 물어본 적도 있었고 길을 가다가 분명히 영어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데 영어로 들린다거나 아무도 없는데 영어가 들리는 환청에 시달리기도 했었다. 아마도 이런 일들이 발생하게 된 이유는 밥을 먹으러 음식점에 가든 무엇을 하든 항상 영어를 사용해야 했기에 영어는 내게 있어서 낯선 타지에서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도구이자 수단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지 않았나 싶다. 처음에는 무작정 외국인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어 얘기를 나누어 보기도 했지만 대화에는 한계가 있음을 인지하고 외국인들과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어학원 선생님이 다니는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나는 이 기회를 통해서 많은 외국인들을 만나 사귈 수 있었으며 그 곳에서 한 베트남 친구의 추천으로 학교에 출품할 작품인 "you and me"라는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했었다. 점차 시간이 흘러 호주생활에 나름 적응해 나가고 있을 무렵 나는 레바니즈인이 운영하는 호주에서 제법 큰 water view라는 레스토랑에서 스태프로 일할 기회도 생겼고 그 곳에서 성실히 일한 결과 총매니저인 제임스의 추천으로 한국인 담당매니저로서 일할 수 있는 기회도 거머쥘 수 있었다. 또한 나는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호주의 수도인 캔버라를 비롯하여 멜번 그리고 타즈매니아 등 여러 도시를 여행하면서 다양한 외국인들을 만나고 그들의 파티에 참여하면서 외국의 전통음식, 결혼식 등 다른 나라의 문화들을 접하면서 견문도 넓힐 수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짧은 기간이었지만 호주에서의 생활들은 내게 값진 경험과 많은 생각들을 하게 해주었던 것 같다.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일까?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현재 나는 나만의 소중한 꿈을 꾸고 그 꿈을 향해 나아가고자 준비하고 있다. 만약 성공한 미래의 내가 존재한다면, 현재의 내가 끊임없는 도전과 준비가 있었기에 존재하는 것임을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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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8.08 23:02

직업엔 귀천(貴賤) 있다?

어머니 曰 "너는 땡볕에 나가 힘들게 일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서 나중에 냉난방 잘되고 컴퓨터 앞에 앉아 일할 수 있는 그런 안정된 곳으로 취직하렴."딸 曰 "그럼 저는 버스기사가 될래요."어머니 曰 "아니, 왜?"딸 曰 "버스 안에도 시원하고 따뜻하게 냉난방 잘되고, 컴퓨터는 없지만 앉아서 안정되게 일할 수 있잖아요"어머니 曰 ""위의 대화는 필자가 나눴던 어머니와의 대화 내용이다.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한말이기에 웃어 넘겼지만 대학교 4학년이 되어 취업을 해야 되는 상황에 몰린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는 직업엔 귀천이 있다고 생각을 하고 계셨던 모양이다.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안정된 직장을 얻어 일하는 것으로 변질되어버린 요즘 20대 젊은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힘든 일은 거부하는 성향이 강하다고 한다.EBS에서 방송되는 '극한직업'에서는 더운 여름날 뜨거운 불속에서 작업하고, 아슬아슬한 다리 위에서 케이블 교체 작업을 하는 등 힘들고 위험한 직업 또는 일들을 소개한다.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언젠간,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프로그램에 소개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 일을 하면서 ~할 때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이런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우리가 편리한 생활을 하고 있단 생각에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어느 직업이든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 찾아온다. 또한, 그 보람을 느끼면서 자신의 일을 소중히 여기고 천직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더러운 것을 만진다고 하여, 위험한 일을 한다고 하여 그 사람들이 뒤떨어지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일을 해주는 사람들이 있기에 대한민국이 살기 좋은 나라가 되고, 질 높은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기에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말이 나온 것.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수입을 사회적 가치의 척도로 삼아 평가하는 현실에서 돈을 가지고 사람들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직업에는 귀천이 있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또한 이러한 생각이 취업난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대기업, 공무원이라는 안정적인 직종에 너무 치우치는 경향이 있어 취업난이 일어난다고 말은 하지만 조금만 옆(중소기업)을 살피면 정작 사람이 필요한 곳이 많이 있다. 이러한 것이 직업에 대한 귀천을 따지는 것이 아닐까?한편 호주, 캐나다 등 타 국가에서는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한다. 기술직이라고 해서, 어느 힘든 직종에서 일하고 있다고 해서 그 직업을 천하게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못한 일들을 하고 있기에 그 직업과 사람들을 존중해 준다고 한다.약육강식의 자연 생태계처럼 모든 직업에는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 직업을 얻어야 먹고사는 인생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이 상황에 자신이 나눈 직업의 귀천에 자신이 휘둘리는 것만큼 슬픈 것이 어디 있을까?필자가 전국에 있는 졸업을 앞둔 대학생들에게 감히 물어보고 싶다. '자신이 이것저것 따지면서 원하는 연봉을 받으며 살게 된다면 과연 행복할까?'라고.대학생들이여! 청춘들이여! 너무 안이한 직업만을 추구하려 말고 대학생이라는 신분일 때 여러 가지 인턴생활을 하면서 직업을 탐색해보며, 귀천을 따지지 말고 자신에게 맞는 것을 선택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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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8.01 23:02

느리게 걷는 즐거움

다른 이들과 함께 걷다 보면 "빨리 오지 않고 거기서 뭐해?"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듣는다. 그리고 "조금만 천천히 걸어요."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한다. 언제부터 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의식적으로 느리게 걷기 시작했다. 느리게 걸어야만 마음에 들어오는 것들을 담아둘 여유를 갖게 되었다.며칠 전, 볼 일 때문에 서울에서 이틀을 묵게 되었다. 지하철을 이용하고 걷는 내내 일행과 나는 서울사람들은 뭐가 그리 바쁘냐는 질문만 되풀이했다. 그리고 전주로 돌아와 원룸으로 향하는 길, 어두교에서 보이는 학교의 고적하고 넉넉한 모습을 보고서야 평온을 되찾았다.요즈음 우리는 꼭 무엇인가를 이루어 내야한다는 의무감이나 해낸 일에 대한 인정 등 성과주의 내지는 결과주의를 추구하는 모습을 누구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세태속에서 우리는 늘 바쁘고 일하지 않으면 불안하기까지 하다. 물론 그것은 우리가 원해서 해내는 일들이 아니다. 사회 혹은 속한 집단의 요구에 맞추어 내야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조급함을 삶까지 가지고 들어왔다. 그래서 무엇이든 바쁘게, 빠르게 해내야한다고 생각하고 여유를 잃게 되었다. 사실 나는 신학을 공부하므로 내 세대가 걱정하는 취업, 자격증, 어학연수와 같은 스펙이 아닌 세상말로 '사색과 성찰'을 해야 나를 발전시킬 수 있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나도 학생인지라 성적이나 내 욕심에 채워져야만 하는 것들 때문에 바쁘게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빠르게 걷는다. 그럴 때면 나는 늘 탈진상태가 되어버린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즐거움이나 소중함과 같은 의미들은 퇴색되어 버릴 뿐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느리게 걷는다. 그것을 여유라고 생각하는데 내 경우에는 사진을 찍거나 풍경을 보며 느리게 걷고 자유롭게 여행을 해야 하는 형식이다. 그리고 나면 다시 내 모습을 되찾고 살아갈 힘을 얻는 것이다. 이것은 꼭 거창한 여유가 아니어도 된다. 느리게 걸으며 주위를 보면, 매일같이 보던 것이 새롭게 다가온다. 바짝 말라서 고여 버려 썩을까 봐 걱정될 정도였던 하천이 비 온 뒤 얼마나 힘차게 흐르는가를 보기도하고 비 온 뒤 큼지막해진 대추알을 보며 침을 삼키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내 삶에 직면해 있던 문제들에 대한 답을 얻고 또 나를 다시 성찰해 본다. 그렇게 내가 관심 갖지 못했던 살아있는 것들에 대해 다시 여유가 생기고 그것들을 통해 내 삶을 재조명해볼 기회를 갖게 된다. 늘 보아오던 것들을 느리게 걸으며 다시 바라보는 것이란 늘 다른 의미를 준다.나는 전북이, 전주가 아름다운 것은 우리내 고장이 참 느리게 걷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이는 뒤쳐졌다고, 성과가 없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 느림으로 인해 지금의 모습을 간직하고 정체성을 지킬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소중한 것이 아닐까. 또한 그 옛날 뒷짐을 지고 느리게 걸으며 여유를 만끽하며 이 길을 걸었던 양반들의 정취를 느끼고자 이곳에 찾아오는 이들에게도 그 느림이라는 것이 중요한 의미일 것이다.이제 나는 여러분과 다시 빨라지려하는 걸음을 늦추고 돌아보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시선을 옮기며 그를 통해 진정한 내 모습을 다시 발견하며 느리게 사는 즐거움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사는 즐거움'을 배우려한다.※ 한 편집장은 2010년부터 학보사 기자로 활동했으며 현재 신학부 3학년에 재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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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7.25 23:02

우리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한다면

꽤 오랫동안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 책에서 우리의 인생을 시간에 비유했다. 인생을 팔십년이라 가정하고 이를 24시간에 비유하면 20대 우리의 시간은 7~8시라고 한다. 우리 나이는 이제 막 집을 나설 시간이니 늦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힘을 내어 집을 나설 준비를 하라고 한다. 우리는 집을 나설 준비를 잘하고 있는가? 20대, 자유롭기에 즐겁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면서 부모님, 선생님 등 우리를 얽매이게 했던 존재들로부터 점차 자유로워진다. 사회에서는 우리를 법적으로 어긋나지 않는 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존재로 인식하기에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다. 심지어 학교생활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대학에서 출석을 하지 않아도 집으로 전화해 왜 학교에 나오지 않았느냐고 묻는 사람도 없고, 성적이 떨어졌다고 학부모 면담을 하지 않는다. 대학 생활 뿐 아니라 우리의 생활을 누구의 간섭도 없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유롭다고 해서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점차 자유로워지는 만큼 나의 삶을 내가 책임져야한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고 해서 결과도 내가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한 행동을 바탕으로 결과가 나타나고 그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 부모님, 선생님, 어른이 나의 삶을 조언해 줄 수 있지만 본격적으로 나의 삶을 설계해야하는 시기가 온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설계하기에 많은 준비가 되어 있을까? 중고등학교 때 부모님, 선생님 말씀만 듣고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공부만 열심히 했던 우리는 우리가 뭘 하고 싶은지, 어떤 사람이 되어야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자꾸만 어서 사회로 나가라고 한다. 우리는 막막하고 불안하다. 사회로 나가야하는데 어떻게 할지 모르고 머리만 아파온다. 고민 끝에 우리가 택하는 길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닌 사회가 원하는 일을 하기. 고시공부, 스펙 쌓기, 인턴십 등을 하며 사회가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을 충족한다. 이런 것들을 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가 진짜 원하는 것인가 나에게 질문을 해봐야한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사회가 원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든 것을 접어두고 진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 이번 방학에도 전국에 있는 수많은 대학생들이 방학을 즐기지 못하고 취업을 준비하기 위해 스펙을 쌓고 공부를 하고 있다.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디디려는 우리에게, 아직 작은 우리에게 사회는 큰 우리가 되길 원한다. 20대가 되어 갑자기 다가오는 진로에 대한 막막함, 불안함을 없애려면 중고등학교 때 입시공부만 하지 않고 자신이 무엇이 되고 싶은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고민이 끝났다면 자신이 원하는 직업을 갖기 위해 어떤 과정이 필요한지 진로 탐색을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어떤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꾸준히 생각하고 준비한다면 지금 20대들의 불안함, 막막함은 줄어들 것이다. 학교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가 청년들에게 미리 준비하고 생각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너그러움을 보여주었으면 한다. ※ 강 편집장은 2010년부터 전주교대 학보사 기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2012년 전북 학생기자단 멘토로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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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7.18 23:02

청춘의 끝에서 외치다

"물가는 계속 오르는데 취업은 안돼요." "어서 번듯한 직장에 취업해 남들처럼 살고 싶어요." 같은 말들을 종종 듣고 살아가는 현대에서 꿈과 열정을 갖고 도전하는 우리들의 이름은 대학생이라고 부르고 싶다. 우리는 나름의 꿈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그 꿈을 향해 목표를 가지고 도전하기도 하고 때론 실패하여 좌절하기도 하며 쓰러진다 할지라도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나 다시 도전할 수 있는 '빛나는 청춘'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우리들의 꿈은 어느 샌가 빛바랜 도화지처럼 사회현실이라는 거대한 문턱 앞에서 점차 퇴색되어 버려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어렸을 적 우리 모두는 에디슨과 같은 발명가가 되어 사람들의 삶을 보다 윤택하고 편리하게 만들고 싶어 했을 수도 있고, 또는 위대한 과학자가 되어 문명의 발달을 선도하는 선구자가 되고 싶어 했을 수도 있으며 그 외에도 다양한 꿈들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꿈들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경제적 관념이 생겨나면서 '돈'이라는 굴레 또는 적자생존이라는 법칙 앞에서, 즉 '승자 만이 존재하는 비정한 사회현실'이라는 장벽 앞에서 무너져 버리게 되어진 것은 아닌가 싶다. 나 또한 이러한 사회현실의 생리들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 굳이 그 이유를 묻는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나도 어찌 보면 이 사회의 피해자 아닌 희생양이라고 볼지도 모르겠다고 말이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무엇이든 자기가 마음 먹은 대로 되는 법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그럼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바라고 원하던 것 대신에 현실과 타협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고, 타성에 쉽게 젖어 버리게 됨으로써 그저 무작정 아무런 목표 의식조차 없이 회사에 들어가는 일꾼으로 아니면, 한번 들어가면 평생직장이 되어 버린다는 공무원이 되기 위하여 우리들의 삶에 대한 선택을 다른 곳으로 서서히 돌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우리는 현시대에 있어서 꿈이라는 것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얼마 전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도전과 삶에 대한 주제로 한 방송을 우연히 보게 된 적이 있었는데 그 방송에 나온 출연자들 중에서 한 여성은 여태껏 살아가면서 자기가 원하고 바라던 것을 깨닫지 못하다가 어떤 계기를 통하여 항공사의 기장이 되어 푸른 창공을 날아보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그녀는 그 당시 대사관에서 일도 잘하는 재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과감히 포기하고 기장이 되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자신만의 소신을 가짐으로써 도전하고 피나는 노력 끝에 지금은 중국의 한 항공사에서 기장으로 근무 중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는 말 참 흔한 말이죠. 지금 내 현실에 있어서 내 꿈은 저 멀리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힘든 것 같지만 꾸준히 준비하고 기다린다면 언젠가는 그것을 이룰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니 포기하지마세요"라고 했었는데 어찌나 이 말이 가슴에 와 닿던지 아직까지도 내 기억의 한편에서 소중한 디딤돌의 하나로써 기억되고 있다. 나는 말하고 싶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때론 포기해야 할 것도 있으며 그 과정은 참으로 힘들고 고될 것이다. 하지만 그 꿈은 나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고 내가 가야할 방향의 등불이 되어줄 것이라고 말이다.빛나는 청춘을 가지고 있는 우리. 우리는 이대로 꿈을 상실하고 혼돈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지금이라도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내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를 가지고 먼 훗날 '나'라는 내 자신을 돌아보았을 때 후회 없이 살았노라고 말할 수 있게끔 꿈을 되찾고 그것을 향한 청춘의 여정을 떠나보는 것은 어떠할까?※ 최 편집장은 2011년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거쳐 대학 동아리 손짓사랑 고문을 맡고 있으며 호원대 법경찰행정학부 4학년에 재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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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7.11 23:02

A+ 대학생활은 무엇인가?

방학을 맞는 젊음이여남의 꿈을 좇으며스펙 쌓기에 연연하지 말고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활동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방학과 동시에 1학기 대학생활이 점수로 매겨지는 성적표!성적이 이미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1학기 성적에 미련을 가지고 자책을 하고 있는가? 또는 성적을 짜게 주신 교수님을 원망하고 있는가? 성적이 잘 안 나왔다면 성적을 나쁘게 주신 교수님을 원망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탓하길 바란다. 또한 성적으로 대학생활을 평가하지 말길 바란다. 필자의 친구들 중에서는 "이 성적으로 어느 회사에 취직하지?"라는 말을 하곤 한다. 하지만 이 말에 성적이 좋다고 무조건 취업이 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이력서에 활동내용을 가득 채우는 것이 중요하니, 성적에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대답해 주었다.대학생활의 끝에 서 있는 4학년 학생으로서 1, 2, 3학년 재학생들에게 말하자면, 대학생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를 누리길 바란다. 대학교를 졸업하면 누릴 수 없는, 대학교 안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을 말이다. 필자는 모범답안은 아니지만, A+대학생활이란 4.5점의 성적이 적힌 성적표가 아니라 자신이 학업뿐만 아니라 꿈을 설계해 나가는 뜻깊은 활동을 하면서 대학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계방학을 맞이한 대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야호! 학업에 지친 대학생들이여, 성적은 성적이고, 하계방학이 다가왔으니 실컷 놀자!" 잘 노는 아이가 공부도 잘 한다는 말이 있듯이 성적에 자신을 너무 채찍질하며 스트레스 받지 말고, 여름방학은 A+ 대학생활을 위해 심신을 달래며 재충전하는 시기로 보냈으면 한다. 또한 학기 동안에 해보지 못한 것을 방학을 계기로 경험해 보고, 배낭여행, 국토 대장정 등과 같은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활동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대학생의 방학기간은 두 달이라는 시간이 있기에 다들 아르바이트, 인턴, 자격증 취득 등 여러 스펙 쌓기로 정신없이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하지만 아르바이트, 인턴, 자격증 취득 등의 경험을 쌓는 것도 중요하지만 쉬면서 1학기 동안의 대학생활을 되돌아보고 2학기를 차근차근 준비해가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인생은 짜장면과도 같습니다. 텔레비전에서 짜장면 먹는 모습을 보면 참 맛있어 보이는데 막상 시켜서 먹어보면 맛이 그저 그래요. 지금 내 삶보다 다른 사람의 삶을 부러워해도 막상 그 삶을 살아보면 그 안에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고뇌가 있습니다. 그러니 어떤 사람을 보고 부러운 마음이 생기면 '남이 먹는 짜장면이다!'라고 생각하세요. (혜민 스님 지음,『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中 )책에 있는 구절과 같이 남의 잘된 꿈을 좇으며 스펙 쌓기에 연연하며 너무 잘된 사람을 좇는 사람이 되지 말고, 누군가가 자신의 꿈을 비난해도 자기만의 소신을 가지고 끝까지 꿈을 좇아 이루길 바란다. 또한, 계획 중에 위에서 말한 것들이 속해 있다면 작심삼일이 되지 않고, 꼭 실천하여 하계방학을 허투루 보내지 않길 전국에 있는 대학생들에게 건투를 빈다.※ 김 전 편집장은 2009년부터 군산대 신문사 기자로 활동했으며 군산대 생활과학부 4학년에 재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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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7.04 23:02

현재 당신의 온도는 몇 도 인가요?

끓어가는 물 안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개구리처럼위기상황을 인식하지 못하고꿈을 잃고 살고있지는 않은지자신을 돌아보자당신도 끓어가는 물 안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개구리와 같은 삶을 살고 있진 않은가? 나에게 찾아온 작은 변화를 인지하지 못한 채, 그렇게 세상과 타협하며 나를 죽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삶은 개구리 증후군(Boiled frog syndrome)은 비전(꿈)상실 증후군이라 불리기도 하는 사회적 현상을 말한다. 미국의 코넬 대학에서는 물에 개구리를 넣는 실험을 진행했다. 차가운 물에 개구리를 넣고 아주 약하게 가열하기 시작하는 실험과 팔팔 끓는 물에 개구리 투입시키는 두 가지 실험을 진행했다. 첫 번째 실험에서 개구리는 서서히 가열해져 오는 물 속에서 한가롭게 헤엄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점점 물이 뜨거워짐에 따라 한 번도 뛰어 올라보지 못한 채 결국 죽어갔지만, 두 번째에서는 뜨거운 온도 때문에 바로 튀어나와 생존하게 되는 결과를 보여줬다. 자신이 위기에 처한 것도 모른 채 죽어가는 현상. 비단 개구리에게 비유되는 일만은 아니다. 나에게 찾아온 작은 변화를 인지하지 못한 채, 목숨을 잃고 꿈도 잃어가는 우리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차가웠던 물이 팔팔 끓는 물로 변화되기까지의 과정은 우리들 삶에 들어온 자신의 문제점의 크기로 비유될 수 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나중에 하면 될 거야'하는 안일한 생각들로 인해 손톱만 했던 문제들이 태산만큼 커져버리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삶은 개구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먼저, 자신의 물 온도를 체크해야 한다. 물이 차가운지, 미지근한지, 아니면 이미 끓는 상황인지 말이다. 즉, 현재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나아가, 나의 물 온도를 낮추기 위해서는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 지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두 번째, 내 앞에 펼쳐진 일에 대해 '합리화'하려 하지 않아야 한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 정도 쯤이야'하는 생각의 일들이 합쳐져 커다란 산을 이루고, 결국엔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고야 만다. 작은 변화에 신경 쓰지 못한 우리의 탓이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는 말처럼, 지금 쉽게 해결 할 수 있는 문제를 스스로 합리화시켜 등 뒤에 두지 말고, 바로바로 해결하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 것이다.세 번째, 적당한 고통과 시련이 우리들의 삶에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들은 나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앞의 목록들과 중복되는 개념이기도 하지만, 삶은 개구리 증후군을 해결하기 위한 가장 중요하고 강력한 무기이기도 하다. 편안함과 단순함만 추구한다면, 사회에 나가서도 그저 그런 '도시노동자'밖에는 되지 못할 것이다. 통찰력 있고 지각 있는 인재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나에게 좀 더 모질게 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비전을 상실해버린 삶은 식물인간과 다를 바가 없는 것처럼, 도전과 열정이 없는 사람은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할뿐더러 그 어느 곳에서도 반겨주는 이 하나 없을 것이다.계속 나의 몸에 채찍질 해가면서 나의 꿈을 향해 달려간다면 실패와 좌절을 맛보게 될 것이다. 이는 곧 뜨겁게 끓고 있던 나의 물에 찬물을 끼얹는, 곧 나를 죽지 않고 다시금 나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지금, 무언가가 나의 물을 끓이고 있는 것은 아닐지 그리고 현재 자신의 온도는 몇 도일지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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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6.27 23:02

대학, 더불어 살아가는 곳이 되길

대학에는 만여 명의 학생들이 다니고 있다. 대학에 다니면서 같은 학교라는 소속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경험이 있었던가. 술 마실 때만 친구가 아닌, 과제 할 때만 연락을 주고받다가 과제가 끝나면 전화번호부에서 삭제하는 사이가 아닌, 그런 사람을 대학에서 찾았는가? 실제로 학과, 동아리, 스터디 그룹 등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공간과 모임은 많다. 하지만 이는 소수학생에게 해당되고 대학생활의 단면만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한 포털 사이트에서 대학생 52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34.5%가 자신을 '아웃사이더'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속칭 '아싸'라 불리는 아웃사이더는 본래 외부인을 뜻하는 영어 단어지만, 요즘 대학가에서는 다른 학우들과 어울리기보다 주로 혼자 대학생활을 하는 학생들을 일컫는 말. 대학생 3명 중 1명은 학과생활에서 겉돌며 혼자 대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응답에 따르면 대부분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서 아웃사이더가 됐다. 개인주의 성향이 큰 사회환경과 맞물려, 대학생들 역시 서로 어울리고 학우들 간 우애가 강조된 90년대 이전과 비교해 개인주의적이고 목적지향적인 성향이 상대적으로 강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까닭인지 대학생들 사이에서 아웃사이더에 대한 인식도 '긍정적'이라는 응답이 66.7%로 절반 이상의 결과를 보였다. 아웃사이더가 개인의 생활방식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이러한 현상이 긍정적이고 밝다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가끔 대학에서 발생하는 안타까운 사건을 목격하곤 한다. 치열한 경쟁, 외로움으로 인한 우울증, 최근에는 얼마전 제대한 예비역 학생이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이 모든 사건은 필자가 대학을 다니면서 들었던, 정말 우리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하지만 이 같은 사건을 겪고도 우리는 변하지 않았다. 같은 대학, 옆 학과의 학생이 무관심 때문에 목숨을 잃었는데, 우리는 또다른 무관심으로 그들의 소리 없는 외침을 외면하고 있다. '난 혼자가 좋아, 혼자가 편해' 이런 말을 서슴지 않게 내뱉어도 인간은 본디 외로움을 느끼는 존재이기에 속마음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건 아웃사이더를 선택한 자신을 합리화시키고 외로움 속에 우리를 무자비하게 던져놓은 것이라 생각한다. 대학도 더불어 살아가는 공간이다. 같은 대학, 같은 학과에 함께 입학한 모두가 같은 반인 셈이다. 먼저 다가가고, 먼저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곳도 자유로운 대학이다. 대학에서 외로움을 느끼고 있는 시점에서 필요한 것은 개인의 마음가짐이다. 우리는 대학생이고, 더 이상 엄마 손잡고 다니는 어린이가 아니다. 그렇기에 다가와 주길 바라는 마음만이 아닌 먼저 다가갈 수 있는 마음도 필요하다. 먼저 다가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지 마라. 같은 수업을 듣는 옆자리 학생에게 말을 걸어보고, 학교 홈페이지에 올라오는 공모전, 스터디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봐라. 대학 생활 4년 동안 자신을 고스란히 외로움에 구속하지 말길 바란다. 필자도 남은 한 학기를 더불어 살아 대학의 소속감을 느끼면서 다니도록 노력하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20대여, 청춘을 잃지 마라. 무엇인가 포기하기엔 우린 아직 뜨거운 청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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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6.20 23:02

'딴 짓'을 허하라

드디어 졸업을 한다 생각하니 오래입고 있던 갑옷을 내려놓는 것 같다. 졸업이 뭐 길래 이토록 숨차게 달려왔을까. 대학 입학 전, 세 번의 졸업식을 치르는 동안 우리는 무엇을 꿈꾸었을까. 졸업앨범만 의무의 증거처럼 고이 꽂혀있을 뿐, 시간은 말이 없다.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시간들이 과거가 되어가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는 일. 과거를 생각하면 힘이 든다. 무언가 사라지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이것은 생각이 아니라 노동이라는데 확신한다. 딴딴하게 굳어 도무지 입을 열 마음 없는 벽이 앞에 있다. 그 벽에 무쇠숟가락 하나 들고 동굴을 파보겠다는 심정이다. 하지만 아무리 파고 파내도 끝은 없다. 끝끝내 그것들은 말이 없다. 먼저 졸업한 친구들은 공모전이나 인턴십, 기업체 서포터즈 활동 같은 대학생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을 많이 겪어보지 못한 게 후회된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별 생각이 없다. 경험마저 흥정의 대상이 되는 것이 못마땅할뿐더러 너무 많은 감정과 에너지를 쏟아 붓길 강요당하는 분위기에 거부감이 드는 까닭이다. 또, 같은 바이러스에 걸린 환자들처럼 여기 갔다 저기 갔다 위로받으러 원정 가는 걸 보면 단체로 기념품이라도 얻어오려고 그러나 싶다. 그러거나 말거나 똥구멍에 힘을 불끈 주고 끙끙대며 걸어온 4년은 무심하기만 한데 말이다. 개성을 찾고 창의력을 키우라면서도 '딴 짓'을 환영하지 않는 세상에 속아온 우리가 아니던가.얼마 전 한 대학신문에서 '쓸데없는 일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한 인터뷰 기사가 있어 유심히 봤다. 평생 영화광으로 산 덕분에 글도 쓰고 진짜 영화에 출연하게 됐다는 한 시인, 성(性)에 관심이 많아 어렵게 포르노잡지를 구하며 읽었는데 그 때 쌓은 지식 덕분에 최초로 성적담론을 이야기 할 수 있었다는 한 국문과 교수, 유학시절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할 때 쌓은 경험으로 사람 대하는 방법을 배웠다는 정치인, 대학 축제 때 떡볶이를 팔아 100만원에 가까운 흑자를 낸 일을 기억으로 그때 마음을 평생 교훈으로 삼는다는 출판 사업가까지. 그들의 과거는 참으로 쓸데가 없다. 대학생은 묻는다. 과거를 묵묵히 과거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인가. 도도하게 내 갈 길만 가면 되는 것인가. 아니면 이것저것 다 해보면 되는 것인가. 이 물음에 답해줄 수 있는 사람은 과연 있는가. 하지만 '인생은 삼천포에 있다'는 것을 조급해하지 않는 사람이 진짜 대학생(大學生)이 아닐까 싶다. 겪지 않고서는 모두 하찮은 말로 듣는 싸가지 없는 우리지만, 그마저도 모두 버릴 것 없는 삼천포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 딴 짓을 허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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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6.13 23:02

6월의 기억

'아니 벌써'라는 노랫말이 떠오른다. 개강한지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6월이 되었다. 매월 그랬던 것처럼 일정을 체크하려 다이어리를 폈다. 6일은 '빨간 날'이고, 9일부터 유로 2012가 개막한다. 내 생일에 빅 매치가 열리는군. 근데 기말고사는 그 다음날부터고. 그렇게 쭉쭉 일정을 정리하다가 책상에 놓인 종이 쪼가리를 봤다. 아, 예비군 훈련이 있었지. 날짜를 살펴보니 공교롭게도 6월 25일이다. 625에 예비군 훈련이라. 뭔가 느낌이 묘하다. 씁쓸하면서도 애매한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6월. 우리에게 6월은 어떤 느낌이고 기억일까.생각해보면 6월에 대한 느낌, 감정들은 세대별로 각자 다른 것 같다. 나와 같은 또래들, 특히 남자들에게 6월은 월드컵의 짜릿함이 떠오르는 것 같다. 벌써 10년 전이지만, 2002년 6월은 온 국민들에게 기쁨이었고 환희였고 감동이었다. 국민들은 모두 빨간 옷을 입어서였는지, 경기장에서, 거리에서, 집에서 분출되었던 응원의 열기와 함성 때문이었는지 그해 6월 대한민국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결과도 결과였지만 모두가 하나의 목표와 희망을 공유하고, 하나 됨을 느낄 수 있었던 그때에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큰 축복이었던 것 같다.우리 아버지세대들, 혹은 흔히 386이라고 불리는 세대들에게 6월은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과 간절함이 폭발했던 시간들, 그로인해 승리했던 시간들로 기억되지 않을까. 1972년 10월 유신이후로 15년 동안 지속되던 군사독재에 맞섰던 그 함성들. 마침내 지금의 헌법으로 개정해낸 우리의 선배들에게 6월은 어떤 느낌일지. 똑같은 느낌과 생각일수는 없지만 그때 선배들의 모습들을 생각하며 상상해본다. 개인적으로 '다른 6월들'에 비해 그들의 6월은 비교적 조명이 적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또한 우리의 할아버지들. 그들이 피와 땀을 흘려가며 지켰던 6월. 어떤 이유에서든 서로가 총을 겨눠야 했고 싸워야 했던 그때의 6월은 어땠을까. 그나마 '태극기 휘날리며'같은 영화를 통해, 책을 통해 우리는 그때의 상황들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낀다.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했던 슬픈 6월. 그 슬픔을, 피와 땀들을 기억하고자 6월 6일을 현충일로 정해놨지만 사실 우리에게 그날은 그저 '빨간 날'이었을 뿐인 것 같아 씁쓸하면서도 죄송한 마음이 든다. (물론 현충일은 625 전쟁에서 전사한 국군만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모든 선열들을 기억하기 위한 날이다.)6월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게 우리 국민들에게 잊지 못할, 잊어지지 않는, 잊어서는 안 되는 6월인 듯하다. 2002년의 6월은 잊지 못할 감동이었고, 1987년의 6월의 함성은 국민의 열망을 담아 '성문화'가 되어 잊어지지 않으며, 1950년 6월의 피와 땀은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대한민국의 밑거름이 되었다. 지금 우리의 평온한 6월도 2002년의 행복했던 6월도 1987년의 6월, 1950년의 6월이 있었기에 허락되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나니 이번 예비군 훈련에는 다른 때보다 '비교적' 성실하게 임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전투복을 입으면 몸이 '천근만근'이며 마치 '피곤한 사람 경연대회'에 선발된 선수처럼 되는 것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겠지만, 예비군 훈련 지도하시는 간부님들이 우리네 6월을 '재미있게' 상기시켜 주신다면 좀 더 협조적이고 의미 있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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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6.06 23:02

21세기 페미니즘의 현주소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라는 말이 사회에 팽배했을 때가 있었다. 지금은 어떠할까. 과거에 비해 현대여성들의 지위는 얼마나 나아졌을까? 여성 억압의 원인을 밝히고 궁극적으로 여성 해방을 목표로 운동하고자 했던 페미니즘의 시초인 자유주의 이론이 출현하고부터 지금까지 많은 이들이 노력해왔지만 그 빛을 보기에는 아직 역부족한 듯하다. 물론 사회에 진출하지도 못하고, 그저 안방마님으로만 살았던 조선시대와 비교한다면 그 변화는 크겠지만 말이다.자유주의, 마르크스주의, 급진주의, 사회주의 등으로 점차 페미니즘의 이론이 발전하고 현 사회에 맞춰 그 해결책을 내놓고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 그 성과가 발휘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현재까지도 여성들의 지위는 남성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겉으로 남녀평등이 이뤄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소위 말해 '먹을 것이 많은 밥그릇'에는 아직도 남성 비율이 현저히 높은 것이 현 상황. 여성 억압에 관한 수많은 원인 중 가장 신뢰받고 있는 대표적인 것이 우리나라 뼈 속 깊게 자리 잡은 '가부장제도'이다. 안사람, 바깥사람이라는 말로 여성을 집안에서 활동하는 사람으로, 남성을 사회에서 활동하는 사람으로 구분 짓고 여성과 남성의 역할을 나눠 생활해온 지금까지의 역사가 우리사회 여성을 이 지경까지 몰고 간 것이다. 필자 또한 어렸을 때부터 봐왔던, '엄마와 아빠'의 관계를 보면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학습해 왔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사실상 나 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정의 모습에서 사회의 모습을 배워왔다. 때문에 생물학적 성의 역할로 인해, 여성이 출산과 양육을 하는 과정에서 사회에 배제되고, 그 기간 동안 남성지배적 사회가 이뤄져, 결과적으로 지금의 남성지배 이데올로기를 정착시켰다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이론이 맞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성 억압의 해결책을 생물학적 성역할을 없애야 한다는, 즉 여성이 출산을 하는 과정을 기술의 발전을 통해 남성에게 전가시키는 등의 과정만이 그 '방법이다'고 말하는 것은 아직 받아들여지기 힘든 해결책이 아닐까.사실, 사회가 발전하고 여성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아 진다해도 남녀가 완전한 평등을 이루기는 어렵지 않나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우리가 갖고 온 수백 년의 역사가 단기간에 치유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자본주의 사회인 21C에는 경제적인 면에서 여성이 완전한 자유를 이룰 때, 비로소 여성억압도 서서히 완화될 것이라고 본다. 이것 또한 지금의 역사만큼이나 수많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말이다. 브랜드 MCM으로 유명한 성주그룹 CEO인 김성주 회장은 "여성이 예뻐지기 위해 노력해서 부잣집 마나님이 되는 것, 예전엔 나쁘진 않았지만 현대 여성이 추구할 바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취집(취직+시집)'이라는 말이 생긴다는 것 자체가 이미 남녀평등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는 증표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진정으로 주장해야 할 점은 여성 억압의 원인과 터무니없는 해결책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이미 기울어져 버린 축구장에서 어떻게 여성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생각하는 것이다. 자책골을 넣을 것인지, 오르막길을 올라가 1골을 터트릴 것인지. 이제, 우리가 생각하고 주장해야 할 페미니즘은 무엇인지 함께 고민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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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5.30 23:02

대화가 단절된 가족

게임에 빠진 아들 때문에 우울병으로 점점 말라 가는 어머니,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한집에서 모르는 사람처럼 지내는 가족, 의사소통의 부재로 심한 말이 오고가는 아버지와 딸. 가족은 서로를 위로해주지 못하고 하루하루 서로에게 미움과 상처를 주고 있었다. 이들에게 없는 것은 바로 대화였다.SBS 스페셜 '무언가족(無言家族)'이 지난 13일부터 2회에 걸쳐 방영됐다. '무언가족'에서는 대화를 포기해버린 가족들을 통해 오늘날 가족이 처한 불편한 현실을 조명했다. 갈등을 겪고 있는 가족들이 실제로 나와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행복의 울타리라는 가정은 대화가 단절된 채 더 이상 가족이라 부를 수 없는 기묘한 동거로 비춰졌다. 우리 현실의 모습이라는 것 때문에 보는 내내 불편한 다큐멘터리였다. 가부장적 사고로 가정을 군림하던 아버지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 과거, 힘을 통해 가정을 꾸려가야만 하던 시대와 달리 현대 사회는 힘이 아닌 두뇌로 그 노동 가치를 획득한다는 점에서 통상적인 남성 위주의 사회는 몰락하고 말았다. 이런 몰락의 과정에서 아버지의 역할은 자연스럽게 혼란을 겪을 수밖에는 없었고 그런 혼란은 결국 극단적일 경우 가족 붕괴로까지 이어지게 됐다. 또한 경제 불안정으로 안정적인 직장이 점차 사라지며 불안해진 가장은 부담감을 느끼고 그 감정은 고스란히 가정 전체로 확대됐다. 이런 점에서 어쩌면 '무언가족'의 탄생은 예정된 순서일지도 모른다. 개인주의와 핵가족화의 확대는 '무언가족'의 밑거름이 됐다. 더욱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점점 그 범주가 확대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무언가족'의 문제점은 심각하다. 개인의 문제는 곧 사회의 문제로 이어진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지켜내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가장 중요한 해법은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과 함께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에게 함부로 대하는 행위는 사라져야 한다. 가족은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무너지는 말과 행동도 가능하다는 생각은 그만둬야한다. 가족이기에 서로를 존중하고 가치관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더해져야한다. 결국 서로를 바라보는 시각에서부터 문제의 해결은 시작되는 것이다. 나는 과연 부모님들과 어떤 시각을 공유하고 있는지 혹은 자식들에게 자신의 가치관만을 투영하려고 했던 것은 아닌지에 대한 고민들이 필요하다.또한 서로를 마주보고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필요하다. 적어도 식사시간이라도 함께 해보자.비로소 제대로 서로를 바라보면 고백과 용서, 그리고 이를 통해 치유가 될 것이다. 가족의 관계 회복은 다가가기 힘들 뿐 절대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개인주의가 팽배해진 요즘, 가정에서마저 소통하지 못한다면 우리사회는 더욱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시대가 올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 가족이라는 존재를 다시 고민해보길 바란다. 가족의 행복이 바로 자신의 행복임을 잊지 말아야한다. 당신의 가족은 안녕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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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5.23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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