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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맞닿은 곳이 없네

'꽃보다 할배'에서 개선문에 오른 신구 할아버지는 파리 거리를 보며 "우리는 (건물을) 높이 올리느라고 열을 올리고 개발을 했는데 여기 올라와 보니 스카이라인(지평선)이 한 군데도 걸리는 데가 없다"며 감탄했다. 뒤이어 카메라가 비춘, 보존된 옛 건물들은 멋진 풍경으로 손색없었다. 키 작은 건물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는 모습은 신구 할아버지의 말을 빌려 "죽어갈 때도 잔상으로 남아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 할 만큼 아름다웠다.옛사람들의 삶과 추억이 담긴 건물들이 시대를 넘어 또 다른 누군가의 추억이 된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도 추억할 풍경이 있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울적했다.잠자리가 떼 지어 나는, 매년 한여름이 되면 해남 이모네 집 생각이 난다. 그곳에서 지낸 초등학교 고학년 여름방학의 기억 때문이다. 이모네 집은 해남에서도 진도와 가까운, 공룡발자국 유적지가 있는 마을에 있다. 마을은 탁 트인 밭과 가늘게 뻗은 길 덕분에 멀리서도 잘 보였다. 가끔 바다 냄새가 마을까지 날아왔다. 야트막한 뒷산에는 선 자리에서 둘레가 다 보이는 호수가 있었다. 호수에는 자라가 많이 살았다. 이모네 집 마당은 온통 꽃잔디여서 초록색보다는 분홍색에 가까웠다. 비 온 다음날 해가 뜨면 꽃잔디는 빗방울을 머금어서 반짝였다. 꽃잔디 위에 앉아있는 잠자리들은 가까이 가도 도망가지 않았다. 잠자리는 날개가 젖으면 마를 때까지 날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날개를 펴고 앉은 잠자리를 쓰다듬은 일은 내 어린 시절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 그 집과 마을 전체에 여러 공장이 들어섰다는 얘기를 들었다. 공장에 가려 눈으로 봐서는 마을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바다 냄새도 더는 불어오지 않았다. 자라가 살던 호수와 산은 사라졌고 밭과 집 대신 보상금을 받은 마을 사람들은 떠났다. 꽃잔디 위에는 이슬이 앉기 전에 먼지가 쌓였다. 아름다운 그 집과 마을은 이제 내 기억 속에만 있다. 잠깐 눈을 감은 사이에 아주 소중한 것을 빼앗긴 느낌이다. 이 상실감은 처음이 아니다. 내가 아장아장 걸을 때부터 중학생 때까지 살았던 마을이 도로 개발로 헐리고, 하천 복개 공사를 한 것이 5년 전이다. 포크레인에 허물어진 빨간 벽돌담은 숨바꼭질하다가 앞니를 깨트린 곳이고, 시멘트로 편평하게 매워 놓은 언덕은 두발자전거 연습을 하던 곳이다. 주차장이 된 놀이터는 마을 사람들이 돈을 모아 미끄럼틀, 그네 등을 사다 만든 곳으로 나와 친구들의 아지트였다. 그러나 이제 그 마을을 지나며 예전 집 자리를 가늠하기도 어려워졌다. 올해 마을은 공원 조성 때문에 통째로 사라질 예정이다. 나는 그나마 남은 마을 구석구석을 사진으로 남기려 사진기를 들었다. 집을 나서는 나에게 엄마는 젊은 애가 뭘 벌써부터 새로운 걸 싫어하느냐고 말했다. 70, 80년대의 촌스러운 특징 같았던 개발 욕심은 사그라지지 않았고, 시골 마을까지 무분별하게 들이쳤다. 나는 내 환경의 소중함을 깨달을 시간이 없는 이 빠른 변화가 야속하다. 무엇이 언제 내 동의 없이 사라질까 전전긍긍해야 하는 것이 싫다. 굽이쳐 흐르던 강들과 강정처럼 내가 손 쓸 수 없이 망가지는 풍경들이 늘어갈 때 무력하다. 그것들이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추억과 맞바꿀 만큼 가치가 있는지 궁금하다. 마음 아픈 풍경이 늘어나고 있다.△ 박 부장은 2011년 우석대 문예창작과에 입학한후 2012년부터 우석대 신문 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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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7.17 23:02

섣불리 포기하기 전에…

지난 달 전국 대학생 신문·방송국 기자모임이 있어 신안군 비금면에 있는 이세돌 기념관에서 하룻밤을 보낼 기회가 있었다. 숙소를 배정받았을 때 안내 해주시는 분이 근처에 해수욕장이 있다는 말을 전해줬다. 오랜만에 만나는 바다라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혼자 해변을 보기위해 발걸음을 옮겼다.그런데 경쾌하게 움직이던 나의 발걸음은 서서히 느려지고 있었다. 아무리 걸어도 해변이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눈앞에 보이는 것이라곤 정글같이 무성한 수풀로 둘러싸인 좁은 통로뿐 이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머릿속은 "내가 가는 이 길이 바다로 가는 길이 맞는 걸까?. 지금이라도 발걸음을 돌리는 것이 현명할까?"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있었다. 결국 포기하고 숙소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리기로 결정했다.숙소 방향으로 몸을 돌렸을 때 수풀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낡은 이정표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이정표는 내가 가는 길이 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미 의구심으로 가득 찬 나는 이정표가 잘못됐을 것이라는 생각도 잠시 하긴 했지만 해변을 보고 싶은 마음이 컸기에 이정표를 믿고 조금만 더 나아가 보기로 결심했다. 10분 쯤 걸었을 까? 풀이 무성한 숲이 끝나자 어느새 내 눈 앞에는 맑고 깨끗한 바다가 파도소리를 내며 나를 반기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던 해변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지만 우거진 수풀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 날 다시 아름다운 해변이 보고 싶어 새벽같이 일어나 전날 갔던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른 시간이라 전날보다 더 녹음이 우거지고 날도 다소 어두웠지만 바다로 향하는 발걸음은 더 경쾌했다. 머릿속에도 더 이상 의구심은 들지 않았다. 아무리 지금 당장은 해변이 눈앞에 보이지 않더라도 조금만 더 가면 곧 내가 원하는 그것이 저 너머에 있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기도 했다. 우리들의 삶도 우거진 숲을 헤치고 해변을 찾아가는 발걸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걸음 한 걸음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걸어가고는 있지만 지금 이 길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길이라고 확신할 수도 없고 마땅히 믿을만한 이정표도 없기 때문이다.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하는 일에 의구심을 갖고 불안한 마음을 갖기 시작하면 쉽게 '포기'를 생각하곤 한다. 아무리 노력해봤자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을 것 같고 돈과 시간만 버리는 것 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이 정말 잘못된 방향일 수도 있다. 이때 섣불리 판단하고 발걸음을 돌리기 전에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하얀 종이위에 지금껏 목표 달성을 위해 노력해왔던 일들을 적어보자. 아마 이렇게 작성된 종이는 당신의 목표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나타내주는 좋은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이 종이를 갖고 당신이 원하는 목표를 달성한 사람에게 찾아가 보는 것도 좋다. 이미 그 길을 다녀온 사람이라면 당신의 노력들이 목표달성으로 가는 길이라는 확신을 줄 수도 있고 방향이 잘못됐다면 올바른 방향으로 안내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김 편집장은 군산대 경영학과 3학년으로 2011년부터 군산대신문 편집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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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7.10 23:02

도서관에 가면 '죄인'입니까

지난해 여름, 청년유니온의 한 관계자가 명사로 초청된 특강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청년 유니온 관계자답게 오늘날 대학생들의 상황과 통증을 유창하게 대변하고 있었다.한 청중이 그에게 물었다. "오늘날 청년들은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도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정치에 문외한인데, 사회에서 청년들이 외면 받는 것은 그들이 자초한 일이 아닌가요?"라고. 그러자 명사는 당장 내일 월세와 등록금, 그리고 취직을 걱정해야 하는 대학생들이 정치에 문외한인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청년들을 변호했다.때때로 몇몇 청년들은 오늘날 대학생들을 7,80년대 대학생들의 모습과 비교하며 '비겁하다' 고 평하곤 한다. 스스로의 주권을 찾아 격렬한 학생운동을 펼치던 당시의 대학생들과 지금의 대학생들의 모습이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들은 학생운동으로 기득권이 된 지금의 기성세대들이, 이제는 그 사다리를 걷어차고 지금의 청년들에게 경쟁을 요구한다며 기득권을 비판함과 동시에 그러한 요구에 응하는 청년들도 함께 비판한다. 이러한 대학가의 모습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일종의 문화충격 같은 것을 느꼈다. 아마 기성세대들과, 아직 대학생이 되지 않은 어린 학생들은 모를 것이다. 이곳에서는 '투쟁하지 않는 학생들' 이 마치 죄인처럼 취급받는다는 것을.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당시 한 선생님께 들은 말이 있다. 7,80년대 대학가에서는 특별히 정치적인 성향이나 관심이 없더라도 마르크스 평전을 손에 들고 다니는 것이 하나의 대학 트랜드였고, 그때는 그것이 멋이었다고 말이다. 나는 그 선생님을 다시 만난다면, 지금도 그것이 변하지 않았노라고 말하고 싶다. 분위기가 변했고 과거보다 '투쟁' 하는 학생들은 적어졌지만, 도서관과 고시원에 앉아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비겁하고 한심한 죄인취급을 받고 있는 것이 이 대학사회이다.아니, '투쟁'이나 '운동'까지도 아니다. 이곳은 '진보' 라는 단어에 극도로 민감한 사회이다. 학내의 경사를 소개하는 기사를 쓸 때 마다 학교 홍보기사를 쓴다며 비겁하다 조롱하는 반응을 받을 때 느끼는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분명 기형적인 형태의 진보이다. 대학생의 의사를 관철시키기 위해 투쟁하는 그들의 노력을 무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건전한 사회에는 늘 행동하는 청년들이 존재했고, 변화된 사회 속에서도 자신의 미래를 걸고 용기 있게 투쟁하는 그들은 분명 이 사회에서도 필요한 존재이다.그러나 참여하지 않는 청년들을 비겁하다 매도하는 생각을 고칠 필요가 있다. 1점대 학점으로 졸업만 해도 어디로 취직할지 일자리를 고르던 시대는 끝났다. 오늘날 대학생들의 현실조차 이해하려들지 않으면서 그들을 위해 투쟁한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이다.그러고 보면 이 사회는 청년들에 대한 강한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는 듯하다. 청년들과 대학생들은 반드시 투쟁해야 하고 현실보다는 이상을 추구해야 한다는 사고, 그런 암묵적인 강박관념은 오늘도 조용히 미래를 준비하는 대학생들의 목을 조른다.강요된 진보는 후퇴를 야기한다. 침묵하는 청년들에게 비겁하다 손가락질하기보다는 그들을 지켜봐주고 응원해 주는 편이 낫다. 그러한 응원과 관심이 당신이 생각하는 정답이 아니라면, 그들을 '비난' 할 것이 아니라 '설득'할 일이다.△ 윤 편집장은 전북대 정치외교학과 3학년으로 6월부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전주지역회의 청년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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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7.03 23:02

전역하면 끝날 줄 알았나요?

얼마 전, 진행요원 아르바이트로 간 한 대기업 체육대회에서였다. 그날따라 속이 영 좋지 않아서 일하는 내내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일하다가 몇 번 의자에 앉아있던 게 동료들 눈에 볼썽사나워 보였나보다. 같이 아르바이트하러 온, 그 날 처음 본 스물여섯 먹은 형이 충고랍시고 이런 말을 던졌다. "군대를 안 갔다 와서 그 모양이냐? 눈치껏 알아서 좀 하란 말이야. 그거 우리 사장님 의자인데 거기 앉으면 어떡해?" 의자에 이름이 붙어있는 것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기억하나 싶었다. 행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기 직전, 걱정한답시고 또 말했다. "아무래도 넌, 군대에 빨리 갔다 오는 게 좋겠다. 정말 걱정돼서 하는 말이야. 사회생활 잘하려면 군대는 꼭 갔다 와야 돼"라고 말한 그는 그 날 번 돈을 나이트클럽에 바치러 총총히 사라졌다."군대 다녀와야 사람 된다"는 말은 군대가 개인의 인격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인정함으로 성립된다. 군대에서 배운 대로만 하면 사회생활 어렵지 않다는 수많은 증언은 이 사회가 군대와 그다지 다를 것이 없다는 뜻으로 비춰진다. 인격이 완성되지 않은 20대 남성들은 2년 동안 군대 질서를 체득하고 사회에 진출한다. 그리고 그 남성들이 사회를 이끌어감에 따라 자연스레 군대의 논리는 사회 질서의 큰 축으로 자리 잡는다. 상명하복, 소속 집단에 대한 충성, 극단적 반공주의, 평범함의 강요 등이 바로 그것이다.그것은 하나의 순환구조로 자리 잡았고, 우리는 어릴 때부터 군대를 주입받게 됐다. 초등학교 운동장에서는 차렷 자세로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맹세해야했다. 사회에 진출하면 흔히들 사회초년'병'으로 불린다. 여성들은 남성들로 채워진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진짜 사나이'같은 군대 관련 예능을 시청함으로써 군대의 질서를 간접경험으로나마 체득한다.군대의 논리는 사회에 대한 건전한 비판을 사전에 차단한다. 그 논리에 머리가 굳은 사람들은 모든 인간을 아군과 적군으로 구분하며 소속집단을 위해 수많은 진실을 왜곡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자유민주주의 질서에 입각한, 국가기관 선거개입 수사 촉구에 대한 대학생들의 시국선언을 그 사람들은 종북주의자의 사주로 인한 행위로 매도한다. 정권에 조금이라도 반대하는 이는 종북좌파의 딱지가 붙는다.군대를 없애야한다는 말이 아니다. 사회의 자유를 위해서도 군대는 반드시 필요하다. 네드 돌런은 "자유는 절대 그냥 얻을 수 없다. 그리고 미 해병대가 그 대가의 대부분을 치르고 있다"고 말했다. 군대의 시간은 2년으로 끝나야한다. 군대의 논리가 평생으로 확장되고 타인에게 강요될 때, 자유와 평화를 위해 만들어진 군대로 인해 우리는 자유롭고 이성적인 사회를 상실한다. 앞서 말한 체육대회 축구 토너먼트에서, 회장이 속한 팀은 몇 년째 우승을 거머쥐고 있었다. 실력자들이 잔뜩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팀들은 절치부심하고 오랜 시간 훈련을 거쳐 이번해에 우승 트로피를 가져왔다. 군대 논리로 어그러진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긍정적인 신호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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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6.26 23:02

바람도 제 역할을 하는 것일 뿐

두껍던 옷을 하나하나 정리하고 이제는 얇은 옷들이 옷장에 가득하다. 언제 추웠나는 듯이 더운 날들 계속되어 달력을 보니 벌써 6월 중순이 지나가고 있으며 곧 7월이 찾아올 기세다. 2013년의 시작이 며칠전이었던 기분이 들지만, 그저 내 기분일 뿐인가 보다. 한 학기가 끝나는 마지막 기말고사를 남겨두고 이제 더 더워질 날씨를 걱정하고 있으니 말이다.며칠전 일이다. 주말이라 집 근처에서 기말고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조금 이른 시간에 찾은 이유에서인지 나 말고 다른 사람은 없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그 공간이 덥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단지 너무 조용하다는 기분만 가득할 뿐이었다. 한참을 앉아서 기말고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해가 더 높이 떠 있었고 창가자리에 앉아있던 나는 뜨거운 기운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에어컨에 의지할 정도의 더위가 아니었기 때문에 창문을 열기로 마음먹었다. 창문을 열고 자리에 앉자 주변의 소리가 더 잘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났는데도 답답함이 가시질 않았을 때 갑자기 서늘한 바람이 들어왔고 그 바람이 내 답답한 마음을 한결 부드럽게 만들어주었다. 바람이 불어온 뒤 사람의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 나만 존재하던 그 공간에 찾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답을 알았다. 답답한 마음을 누그러뜨린 바람이 불어온 이유는 그 사람이 창문과 마주보는 위치에 있던 문을 열고 들어왔기 때문이었다.조금은 웃음이 나왔다. 내 답답했던 마음이 다른 사람에 의해 해결되었다는 사실이 말이다. 나는 결국 문을 열고 나와 바람이 더 잘 부는 곳에서 쉬는 시간을 가졌다. 그 순간에도 나는 계속해서 헛웃음이 나왔고 그 헛웃음은 곧 작은 미소가 되었다. 마음이 가벼워졌다고나 할까? 기말고사라는 단어로 내가 나를 억압하고 있었던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들어가 하던 공부를 계속 했고 답답한 마음이 들 때 마다 바람이 잘 불던 그 곳으로 다시 찾아갔다. 답답함의 이유와 그 답을 알게 되어 한결 더 수월했던 하루였다. 겨울에는 그토록 미워했던 바람이 지금은 내 하루의 여유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올 여름을 보내면서 쉴 틈 없는 더위에 착한 바람이 계속 찾아오길 바랄 수도 있겠다. 겨울에는 차디찬 바람으로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으로 때마다 바람도 다 제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 역할을 할 뿐인데도 시간에 따라서 계절에 따라서 좋다고 말하고 싫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뿐이다.어쩌면 너와 내가 살아가는 것도 이와 같을 것이다. 어디선가 갑자기 답을 얻어 기뻐할 수 도 있고 문제의 원인이 나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할 일을 멈출 수 는 없다. 언제나 내 자리에서 내 할일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언젠가는 운수좋은날이 찾아오고 아닌 날들도 찾아올 것이다. 언제 어느 순간에 운수좋은날이 찾아올지는 내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있을 때 알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운수좋은날이 어디쯤인지, 답이 뭔지는 알지 못한다. 단지 내 자리에서 내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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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6.19 23:02

익숙해지기, 시간과 노력이 필요

나는 만년필과 잉크를 모으는 취미가 있다. 말만 들으면 무척이나 비싼 취미인 것 같지만, 사실 그렇게 비싸지는 않다. 그런데 가끔 만년필을 보다 보면, 이 녀석들이 사람과 비슷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브랜드나 라인에 따라서 모습이 현저히 다르며, 뚜껑을 여는 방식과 마감 처리도 각기 다르다. 펜촉도 각각 재질이 다르고, 같은 라인이라고 해도 색이 다르다. 똑같은 제조사의 똑같은 만년필이라고 해도 미묘하게 그립감이나 잉크의 농도가 다르다. 그러나 이렇게 서로 '다른' 만년필이라도 같은 점이 있다. 쓰면서 길들여야 한다는 점이다. 처음 만년필이 종이에 닿을 때는 특유의 사각거리는 소리가 심하다. 가끔씩은 펜촉이 종이를 긁어 파내는 것 같은 소리가 나기도 한다. 어린아이 같이 글씨가 원하는 대로 써지지 않을 때도 있다. 가끔씩은 잉크를 방울방울 흘리기까지 한다. 새 만년필이 마치 고장 난 것처럼, 혹은 헌 만년필 보다 안 좋게 느껴지는 것은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년필로 글씨를 많이 쓸수록 점점 긁히는 소리가 줄어들고, 글씨가 예쁘게 각이 잡힌다.내가 가지고 있는 라미 만년필들도 하나는 시집 한 권을 필사하니까 겨우 길이 들었고, 하나는 시집을 반 권 필사하기도 전에 익숙해졌다. 확실한 건 필사를 하면, 글씨를 쓰면 쓸수록 긁히는 것 같은 소리는 줄어들었고, 글씨가 튀지도 않았다. 만년필이 길이 든 것이다.어떤 일에 익숙해지는 것도 만년필을 길들이는 것과 같다. 처음 할 때는 어색하고 힘들더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시간을 들일수록 익숙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과를 처음 깎는다고 생각해 보자. 처음 사과를 잡았을 때는 분명 과육을 조각해놓았을 것이다. 너무 사과를 두껍게 깎은 나머지, 껍질에 붙은 과육을 그냥 먹어도 되겠다는 소리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일을 깎으면 깎을수록 점점 껍질을 얇게 깎을 수 있었을 것이다. 손때도 덜 묻고, 나름대로의 노하우도 생길 것이다. 이렇듯 중요한 것은, 자신이 잘 하고 싶은 그 일에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다. 생택쥐페리의 '어린왕자'에서도 길들이는데 시간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다. 여우는 '네가 장미꽃을 위해 소비한 시간 때문에 너에게 장미꽃이 소중한 거야' 라고 어린왕자에게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다. 길들이는 데에는 일정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어린왕자와 장미처럼, 그 일과 직접적인 대화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일에 마음을 주어야지 자신에게도 익숙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익숙해지려는 노력도 해보지 않고서 편법만을 찾으려고 하면 절대로 그 일을 잘 하지 못하게 된다. 만년필에서 나는 종이 긁는 소리가 싫다고 해서 부드러운 종이만을 찾으려고 해선 안 된다. 종이 위에서 잉크가 번지는 결과만을 낳을 뿐이다. 잘해보겠다는 가장 처음의 열망조차도 편법 위에서는 사라질 뿐이다.일 년의 반이 벌써 지나간다. 2013년을 시작하면서 잘 하고 싶었던 일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만약 아직 그 일을 잘 하지 못하고 있다면, 더 그 일에 시간을 쏟자. 남은 반 년 동안 그 일이 당신에게 온전히 길들여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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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6.12 23:02

여성은 군대이야기 싫어한다?

수년전만 해도 방송국 프로듀서 사이에서 남성이 위주인 제작은 금기에 가까웠다. 시청률의 최대 고객인 여성 시청자의 공감을 이끌어내기가 쉽지 않아서였다. 드라마에서 백마탄 왕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신데렐라 여주인공 드라마가 세대를 걸러도 끊임없이 나오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 일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얼핏 보면 남성 시청자를 공략한 것 같은 콘텐츠지만 알고 보면 실제로 여성에게 더 인기가 많다. 호주 출신 샘 해밍턴. 요즘 그 외국인을 보려고 TV앞에 앉는 여성들이 꽤 많을 것이다. 푸른 눈에 하얀 피부, 외국 배우처럼 잘생긴 외모도 아닐뿐더러 펑퍼짐한 몸매다.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며 간혹 우스꽝스러운 행동으로 코미디언 빰치는 개그로 웃음을 선사한다. 최근 MBC '일밤-진짜 사나이'에 출연하면서 인기가 주목됐다. '진짜 사나이'는 군대에 가상으로 입대해 겪는 이야기를 보여주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000씨는 "외국인이 뽀글이(군대식 라면)을 먹으면서 '군대라면이 최고다'라고 외치며 행복해하는 모습이 신선했다. 남자친구나 동생에게 군대 얘기를 들을 때는 막연한 거리감이 있었는데 TV 프로그램으로 보니 군인들이 고생이 많구나 싶다"라고 말했다. 시청률 조사기관인 TNms에 따르면 이 프로그램의 1~3회(4월 28일까지 방문)를 가장 많이 본 연령대가 40대 여성(6.2%)이다. 20대에서도 여성 (4.1%)이 남성(3.8%)보다 많이 시청했다. '여성은 군대이야기를 싫어한다'는 고정관념이 깨졌다고 볼 수 있다. tvN 드라마 '푸른 거탑' 역시 이례적으로 군대를 배경으로 했지만 시즌2까지 제작되며 인기를 더하고 있다. 케이블 채널이지만 여성 시청자들의 입소문을 탄 것이다. 또한 입대를 앞두고 있는 20대 초반 남성들도 학습지침서처럼 이 프로그램을 즐겨본다고 한다.군대이야기야 말로 남성들의 고생담이라는 점에서 진정한 리얼 버라이어티의 연장선일 수 있다. 군대는 출연자들로 인해 바보스러움을 가장할 필요가 없다. 군대라는 특수한 사회는 일반사회와는 다른 언행방식과 지식체계를 요구하기 때문에 갑자기 그곳으로 간 사람은 바보가 될 수밖에 없다. 다 큰 성인이 말하는 법부터 다시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시청자들은 진짜 리얼리티를 좋아한다. 진짜처럼 겪는 상황에서 생고생하는 모습, 추레한 모습 등에 재미를 느낀다. 또한 군대에선 남자들의 진한 우애나 인간미도 느낄 수 있는 데, 이것이 바로 시청자들이 공감하는 또 다른 재미일 것이다. 군대란 부모나 스펙을 따지지 않고 군복을 입는 순간 모두가 하나가 되는 특수한 집단이다. 요즘사회에선 스펙으로 차별하고 무한경쟁을 시키는 살벌한 분위기에 군대의 집단성에서 인간미와 위안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 또한 남자들이 여자대학에 관심을 갖는 것처럼 남성으로만 구성된 집단이 주로 무엇을 하고 어떤 걸 좋아하는 지 궁금했을 것이다. 여성의 입장에서는 틈날 때 보면서 공감하거나 호기심을 채우고 즐기기에 적합하다. 쉴 틈은 없고 각박한 사회생활에서 호기심을 자극하는 군대이야기, 앞으로도 계속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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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6.05 23:02

용감한 청년에게 잔소리 대신 응원을

요즘 한창 '핫'한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은 인류와 인간을 잡아먹는 거인과의 싸움을 주제로 한다. 거인의 공격으로 멸망위기에 처한 인류는 거대한 삼중의 벽을 쌓아 100년의 평화를 누린다. 오랜 평화에 거인을 향한 인류의 창끝은 녹슬었다. 어린 아이인 주인공 '에렌'은 이를 지탄하지만 누구도 귀담아 듣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벽 밖의 세상을 탐구하는 자유가 주어지지 않는다. 에렌은 "이런 삶은 마치 가축 같다"고 일갈한다. 그러던 어느 날, 벽보다 더 큰 초대형거인이 나타나 벽을 무너뜨린다. 수많은 거인들이 벽 안으로 쳐들어와 인간을 잡아먹는다. 에렌의 엄마도 속수무책으로 잡아먹힌다. 에렌은 복수를 다짐하고 군대에 지원한다.대학언론은 오랜 세월 대학의 지원을 받으며 복지부동의 생활을 누려왔다. 기성언론사는 신자유주의의 물결에 휩쓸려 폐간하는 곳도 많았지만 대학언론은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대학본부에 편집권 자유를 특별히 요구지 않는 한, 운영하는 데에는 별다른 지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은 대학들마저 신자유주의라는 거인의 공격에 무너지고 있다. 기업식 구조조정이라는 구멍을 통해 들어온 거인에게 대학언론은 폐간 또는 예산삭감이라는 무자비한 난도질을 당하고 있다. 전북대신문에서 3년을 보낸 필자는 이에 대한 책임감을 통감했고, 그 문제의식은 지난주에 대학언론협동조합을 창립하는 것으로 이어졌다.대학언론협동조합은 대학언론사간의 교류 및 연대를 활성화하고 대학언론 위상 증대를 목표로 한다. 편집권 독립은 지상과제다. 지금 조합원으로 가입한 단위는 10개에 불과하지만 구두로 가입을 약속한 단위들을 포함하면 곧 20개가 넘을 예정이다. 대학언론협동조합은 소리 없는 수요에 따라 대학언론을 대표하는 공식 단체로 발돋움하고 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대학본부의 편집권 탄압에 대한 후속조치를 자문하는 전화가 연결 중이다.사실 이런 단체가 생겨난 것이 특별히 새삼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청년 사회 곳곳에는 에렌 같은 사람들이 광범위하면서도 미시적으로 퍼져있다. 청년 대안농업 협동조합 '파절이', 소외된 기능인을 돕는 동아리 '인액터스', 악동뮤지션 등을 발굴한 청년 뮤지션 매니지먼트사 '프로튜어먼트', 알바생 처우 개선을 외치는 '알바연대', '청년유니온' 등 수많은 청년과 단체들이 저마다 가까운 삶의 현장을 바꾸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많은 기성세대들은 청년들이 공공의 이익보다는 개인의 이익만을 챙긴다며 손가락질한다. 그래서 필자는 대학언론협동조합을 만들겠다고 하면 기성세대는 환호할 줄 알았다. 그게 아니었다. '뻘짓하지 말고 군대나 가라', '취업은 언제하고 결혼은 언제하냐', '그거 해서 되겠냐'는 둥. 앞서 말한 단체들을 이끄는 청년들도 수없이 들었던 잔소리다. 평화로운 시기, 군대에 지원한다는 에렌을 뜯어말리는 부모님의 모습이 오버랩됐다.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자서전 「미완의 시대」에서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직은 포기해선 안 된다. 세상은 결코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리의 미래는 사회를 개선하기 위해 분연히 나선 청년들의 손에 달려있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른들에게 부탁드린다. 취업준비 안하고 쓸데없는 짓 한다고, 빨리 철들라고 잔소리하는 어르신들. 걱정은 감사합니다만 굶어죽지 않을 자신은 있으니 응원하고 격려해주시면 더 감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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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5.29 23:02

서스펜디드 커피

그쪽이 기억하고 있는 서스펜디드 커피(Suspended Coffee)에 대한 기억이 있는지 물어보고 싶다. 한 동안 SNS 에 돌고 돌았던 서스펜디드 커피에 관한 사진 한 장은 나를 뜨겁게 만들었고 금세 차가운 얼음과 같은 마음으로 만들었다. 서스펜디드 커피란 하나의 운동이나 캠페인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돈이 없어 제대로 된 커피를 즐기지 못하는 누군가를 위해 커피숍에 커피를 맡기는 것으로 그 방법은 커피를 3잔이나 4잔 주문하고 "2잔은 마시고 2잔은 맡겨 논다."고 말하면 커피를 즐기지 못하는 누군가가 찾아와서 서스펜디드 커피가 있는지 물어보고 마시는 것이다. 작은 즐거움을 선물하는 것이다. 커피를 마시고 있는 사진 한 장이 모두의 주목을 끌고 여기저기서 자신들도 하고 싶다고 말하고 다니는 것은 서로가 경쟁의 구도에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경쟁의 관계 속에서 서로를 공격해야하고 나에게 돌아올 공격에 대비하고 준비하는 동안 사람들은 함께할 수 있다는 작은 즐거움을 잊고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나는, 너도 나도 동참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다른 방향에서 생각해 본다면 이미 경쟁구도의 관계에서 떨어져 흔히 말 하는 낙오자의 개념을 가진 사람들에게 건네는 위로의 한 잔으로 비춰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서스펜디드 커피라는 개념이 나눔의 의미에서 나오는 것이든 위로의 의미에서 나오는 것이든 커피 한 잔의 여유도 없는 사람이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에서 우리들이 그들에게 보여야 하는 태도는 어떤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서스펜디드 커피를 만들어야 했던 이유는 그들이 사회에서 멀어지기 전에 감싸주지 못했고 도움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서는 커피한잔을 사주는 것으로 그들은 자신의 잘못을 덮어버리는 것일 수도 혹은 도움을 주고 있으니 괜찮아 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도움을 주려면 확실한 도움을 주어야하고 내 입장이 아닌 상대의 입장에서 필요한 도움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정말 원하는 것이 커피 한 잔의 여유일지 생각해 봐야할 문제다. 새로운 모습의 캠페인이 커피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음식에서도 적용되어지고 있는데, 결국 그들의 문제에 대한 1차적인 해결일 뿐이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많다고 말하고 싶다. 그들에게 커피 한 잔이 아닌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길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우리들이 가지는 배움의 의미가 나만 잘 살아가면 된다는 의미에서 사회가 함께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바뀐다면 그래서 경쟁만이 존재하는 사회가 아닌 나눔 속에서 경쟁이 존재한다면 사진 한 장에 담긴 나눔의 모습에 감동할 이유가 사라진다. 그렇다고 서스펜디드 커피 문화를 나쁘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단지 감동이란 부분은 커피 한 잔을 나누는 것에서 느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더 이상 사회에서 멀어지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키워 나와 같은 사회라는 공간에서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느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커피를 마시며 친구들과 혹은 사랑하는 누군가와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혹시 커피를 맡겨두는 누군가가 있다면 봉사를 하고 있다거나 도움을 주고 있다고 자신을 포장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오히려 그 자신이 함께 성장하는 하나의 방법을 배우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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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5.22 23:02

스트레스는 꼭 풀어야 한다

바짝 날이 서서 모든 것이 짜증날 때가 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집으로 가고 싶을 때가 있다. 별로 먹은 것도 없는데 속이 더부룩하며 기분이 나쁠 때가 있다. 다른 사람을 볼 때 마다 화가 날 때가 있다. 말하는 사람의 입을 막아버리고 싶었던 적이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쉬고 싶을 때가 있다. 앞에서 말한 모든 걸 한꺼번에 느낄 때가 있다. 이런 모든 상황이 당신에게서 반복되고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증거이다.나는 스트레스를 '잼에 갇혀 있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고체도 아니고 액체도 아닌 잼이 병 안에서 허우적거리는 느낌처럼 답답해지기 때문이다. 빈 공간을 설탕과 과육으로 가득 채운 잼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주변의 진심어린 충고도 들리지 않는다. 빈 틈 없는 그 공간에서 허우적거리고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힘이 들고, 쉬고 싶다. 병과 잼으로 주변을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도리어 날이 서서 모든 일이 짜증이 나는 것이다. 이런 '잼과 하나 된 상태'가 계속 된다면 일의 능률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요, 자기 자신에게 지쳐버리곤 한다.그렇게 너무나도 지쳐서, 스트레스를 푸는 중이라면 남의 시선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스트레스를 그대로 방치하는 것이다. 스트레스를 받는 상태에서 정지해 있으면 안 된다. 스트레스는 당신이 주변을 신경 쓰지 못하게 만든다. 당신에게서 여유가 사라지는 것이다. 당신이 스트레스를 푸는 그 행동이 반사회적인 것이 아니라면, 당신은 당신의 활력을 깎아먹기만 하는 '스트레스 잼'에서 빨리 탈출해야 한다.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 둘러 싸여 있는 건 당신에게 좋지 않다.나에게는 B라는 친구가 있었다. B는 항상 잼 안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B가 스트레스를 받는 원인은 다양했다. 남자친구가 전화를 안 받았기 때문이었고, 하는 게임에서 남보다 좋은 장비를 얻지 못해서였다. 지나가던 버스가 자신에게 물을 튀겨서 스트레스를 받은 적도 있었고, 엄마가 동생을 돌보라고 했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적도 있었다. 이처럼 B는 다양한 스트레스들 사이에 끼어있었다. 항상 갇혀 있었던 것이다. B는 항상 답답해했고 사소한 것에서 화를 냈다. 그렇지만 B는 스트레스를 풀 줄을 몰랐다. 화를 내면서도 자신이 왜 화를 내는지를 몰랐다. 스트레스는 고양이 있는 집에 털이 쌓이듯 빠른 속도로 쌓였지만 그것을 해소하는 행동은 매우 미약했다. B는 제법 예쁜 편이었다. 그렇지만 웃지 않았다. B는 항상 힘들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쌓인 스트레스를 풀지를 못하니까 곱던 얼굴도 미워 보였다. B 곁에 가까이 있던 친구들은, B를 보며 점점 지쳐갔다. 그녀에게 말을 걸 때 마다 짜증을 냈기 때문이었다. 잼 속에 갇혀 있는 B는 스스로 그 뚜껑을 놓지 않았다. 결국 B의 잼 뚜껑은 열리지 않았고, B는 고립되고 말았다. 내 친구 B가 점점 고립돼 간 것처럼, 과도한 스트레스는 당신을 외롭게 만들 수도 있다. 자신에게 지쳐 있는 사람이 남에게 친절하게 대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 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뚜껑이 열리지 않는 잼은 언젠가 썩어버리기 마련이다. 차라리 방치해서 썩어버리는 것 보다는, 뚜껑을 밀어내서 잼을 여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언제까지나 잼 뚜껑을 잡고 자신을 닫아버리고 살아갈 수는 없다. 어서 뚜껑을 열어버리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 갇힌 공간에서 허우적거리며 살고 있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5월이다. '즐거운'날이 많은 만큼, 사람들과 마찰이 생길 일도 많을 것이다. 남들이 다 즐거운데도 짜증이 나는 날이 있을 것이다. 당신이 들어있는 병 안에, 차곡차곡 잼들이 쌓일 것이다. 그럴 때의 당신은 텔레비전을 봐도 좋고, 아이돌 콘서트를 따라다녀도 좋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써보는 것도 좋고, 시 한편의 여유를 가지는 것도 좋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잼 속'에서 탈출해야만 한다. 스트레스가 주는 상처에 익숙해지면 안 된다. 어여쁜 그대여, '잼'을 발라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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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5.15 23:02

영화 '지슬'을 보고

독립영화 '지슬'이 관객 13만 명을 넘어섰다. '지슬'은 제주도 방언으로 '감자'를 뜻하한다. 이 영화는 흑백영화다. 한국말이지만 제주도 방언이 나오기 때문에 자막이 있는 영화다. 이 영화의 배경인 4·3 사건은 1948년 '섬 해안선 5㎞ 밖의 사람을 무조건 사살하라'는 명령으로 당시 제주 인구의 10분의 1이 희생된 사건이다. 해안선 5km밖은 사실 바다 밖에 없다고 한다. 즉, 제주도 주민들 대부분은 이념이 뭔지도 모르고 자본주의가 뭔지도 모른 채 그냥 죽으라는 소리다.영화에서 나오는 몇몇 대사 중에는 "밥 쳐 묵을라믄 폭도들 목을 따오라고!", "근데 폭도가 있긴 한거냐"에서 사람들은 무지한 채 삶과 죽음이 오가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갈등한다.마을 사람들은 동굴 속에 숨어서 군인들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감자로 버틴다. 이 안에서 오고가는 마을사람들의 대화 내용은 순수하기하다. '일제 총, 미제 총'을 두고 승강이하는 대목, 순덕이의 짝사랑 이야기, 제 목숨 위태로운데도 '홀로 남은 돼지 밥'을 걱정하는 원식이 삼촌의 대사에서는 웃음이 터지고 무동 어멍(어머니)이 불에 타 죽으면서 남긴 감자, 군인에게 유린된 순덕의 주검 옆에 놓인 감자를 보면서는 눈물이 흐른다. 제목이 '지슬'인 까닭이 여기 있을 것이다.왜 힘없는 사람들이 권력의 희생양이 되어야만 했을까? 라는 의문과 씁쓸함을 남기며 영화가 끝나고 제주 민요 '이어도 사나'가 엔딩곡으로 흐르지만 많은 사람들이 쉽게 자리를 뜨질 않았다. 아마 영화가 주는 가슴 저린 감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관중들은 무언가 여운을 가지고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4·3 사건을 생각했을 것이다. 인권보다 이념이 중요했던 시대, 순수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오직 목숨을 지키기 위해 도망을 다니고 죽음을 맞이했다.여기서 정말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의 거대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무고하게 희생당하는 수많은 민초들의 고통과 죽음이다. '지슬'에서 토벌대를 피해 산에 숨어든 사람들이 삶은 감자를 놓고 벌이는 갈등과 나눔은 진정 고통 받는 사람들의 모습을 박진감 있게 그려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 왜 이러한 문제들이 발생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생략돼 있음으로 인해 관람자들은 사실의 한 면만을 두드러지게 바라보게 된다.잘잘못의 가르기 시작하면 서로가 할 말이 많을 것이다. 더 깊이 주민들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4·3의 진실이 어두운 동굴 속에 갇혀 의문을 증폭시켜 나갈 때 한국현대사는 부당하게 왜곡되고 비참하게 희생당한 주민들은 다시 정치권력의 이용물로 전락했다. '지슬'은 담담하게 사실을 그려내려고 했다는 점에 감동적이다. 그러나 역사나 사실의 해석에서는 부분적이다. 투쟁할 힘도 이유도 모르는 사람들의 고통과 희생을 잊지 않고 역사에 기록해야 하는 것은 후대의 의무다. '지슬'은 남북분단으로 인한 정치적 분열과 통합의 과정에서 한국현대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짚어 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방향성을 시사한다. 이제는 말과 역사가 잊혀져가고 있다. 4·3과 감저(고구마)와 지슬(감자)이 모두 잊혀져 간다. '지슬'이라는 말에는 잊혀가는 '4·3'과 사라져가는 제주 사투리에 대한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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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5.08 23:02

고체가 된 대학생

"우리학교는 고시에 관심이 너무 없다. 다른 학교가 200명 지원해서 20명 합격한다면 우리학교는 100명 지원해서 10명 합격하는 꼴이다", "고시 유입인원을 늘려야 한다. 이것이 곧 학교 위상을 올리는 길이다." 한 대학 커뮤니티에서 발견한 글이다. 아마 이 글의 작성자는 고시 합격률이 높아지면 자신이 취업전선에서 이익을 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 추측해보건대, 이 글은 고시생이 쓰지 않았다. 고시생의 눈에는 합격생 20명, 10명보다 합격자 명단에서 자기 이름을 찾지 못해 망연자실하는 180명과 90명이 눈에 아른거리기 때문이다. 일부 기성세대는 대학생들이 보수적이고 이기적이라며 지탄한다. 근거 있는 비난이다. 비인기학과가 사라져도, 학교가 개입해 총학생회 선거를 무산시켜도, 대학언론사 예산이 삭감돼 제대로 된 학교소식을 듣지 못해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계산하기에 따라 오히려 좋은 일이다. 어떤 형태로든 대학평가 순위가 올라 취업에 조금이나마 도움 되겠거니 한다. 뭐가 됐든, 나한테만 피해 없으면 장땡이다. 예능 프로 「1박2일」에서는 이런 세태를 한 마디로 압축해서 풍자했다. "나만 아니면 돼!"53년 전 이맘때쯤, 이 땅의 대학생들은 부정선거에 저항한 혁명을 이끌었다. 수만 명이 동참한 시위에서 수백 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부상당했다. 홍안의 선배들이 목숨을 바쳐 투쟁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고려대 4·18선언문이 기록했다. "학생이 상아탑에 안주치 못하고 대사회 투쟁에 참여해야만 하는 오늘의 20대는 확실히 불행한 세대이다. 그러나 동족의 손으로 동족의 피를 뽑고 있는 이 악랄한 현실을 방관하랴."강산이 다섯 번 변했다. 세상은 진보했고 대학생은 보수가 됐다. 취업이 우선이라는 대학의 부채질에 끓어 넘치던 혈기는 차갑게 식어버렸다. 도서관 구석에 앉아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고 감동도 느끼지 못하는 고체다. 고체화된 청년들의 모난 가슴은 서로의 연대를 어렵게 한다. 어지간한 불의는 우리의 끓는점을 자극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어쩌다 전설처럼 전해지는 선배들의 투쟁기를 들으면 생각한다. '그땐 취업걱정 없었으니까!'심리학적으로 볼 때, 젊은 시기에 경제적 곤란을 자주 겪을수록 보수적 성격을 가질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한국 사회 대학생 다수는 등록금과 주거 문제에 시달리는 것이 일상이다. 취업률은 나날이 떨어져 간다. 당장 먹고 살 길이 요원하다. 투쟁이니 연대니 하는 단어는 토익 단어장에나 존재한다. 20대가 X새끼니 어쩌니 하는 어른들의 질타는 그들을 꼰대로 보이게 할 따름이다.한국 경제의 앞날은 '상상력과 창의력이 경쟁력이 되는' 창조경제에 달렸다고들 한다. 창조경제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두고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그 중심에 대학생이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창조경제는 창의력에서 시작한다. 창의력은 진보의 유의어다. 진보적인 대학생에게서 창조경제가 시작되는 것이다. 하지만 극소수의 대학생을 제외하곤 고체마냥 머리가 딱딱하게 굳었다.그들에게서 진보적이고 창의적인 말랑말랑한 생각을 끄집어내는 방법은 안정적인 복지정책에 달려있다. 브라질 전 대통령 룰라는 "왜 부자들을 돕는 것을 '투자'라고 하고, 가난한 이를 돕는 것을 '비용'이라 말하는가?"라고 말했다. 대학생을 향한 복지는 위험은 높지만 세상 무엇보다 수익이 큰 투자다. 그 투자만이 대학생을 사회 발전의 동력으로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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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5.01 23:02

'사랑도 청춘이다'

4월이다. 전주 동물원 야간개장이 끝났다. 연분홍색을 자랑하던 벚꽃 잎도 바람에 흩날리고 새싹이 올라오고 있다. 봄이라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우리 중 누군가는 외로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흔히들 '봄타나보다.'라고 말하는 그 외로움을 말하고 있다. 여기저기 커플들이 하나 둘 늘어나는 시기에 연인과 손잡고 꽃구경 가는 설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벚꽃이 떨어지는 시간이 왔다. 벚꽃을 다시 보기 위해서는 다음해 봄을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지금을 보내는 청춘들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떨어진 벚꽃 잎 마냥 다음해 봄을 기다린다는 마음처럼 흘러 보내버린다. 나는 이런 이유를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청년 실업률이 높아지고 상대의 마음보다는 서로가 가지고 있는 조건을 더 높이 바라보는 세상이 만들어졌을 때부터라고 말하고 싶다. 이제는 각자가 보여줄 수 있는 '조건들이 사랑의 기준이 될 수 있는 시대'라는 말이 될 수 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조건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이 서로 같을 때 더 빛난 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무런 계산 없이 마음이 움직이는 데로 행동했던 지난 시간들이 그리운 누군가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아직 충분히 계산 없는, 진짜 마음이 가는 사랑을 시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아직 '청춘'이라는 단어에 묶어져 있기 때문이다. 지난 한 해 청춘들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은 '아프니까 청춘이다.(저. 김 난도)'에는 청춘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표현했다. 청춘이란 '불확실성 속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시기'라고 말이다. 그렇다 청춘은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그래서 더 힘들고 어려울 것이다. 나는 이 구절은 사랑이라는 단어에 적용하고 싶다. 우리들은 청춘이기 때문에 모든 불확실성 속에서 미래를 준비해야하며 사랑 또한 이와 같다고 말이다. 내 앞에 서있는 그 누군가는 나와 같은 청춘을 보내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청춘에게 현재는 확신할 수 없는 미래의 조건들을 따지려 한다면 그것은 반칙이라고 말하고 싶다. 축구경기에서 반칙을 사용하면 경고를 주며, 반칙이 두 번 이상일 때는 퇴장을 당한다. 축구경기 뿐 아니라 모든 경기에는 규칙이 존재한다. 그렇다고 사랑에도 규칙이 존재한다는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반칙에 언젠가는 퇴장을 당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 퇴장이 상대에게서 나온 것일 수 있고 혹은 스스로 주는 것일 가능성도 있다. 결국 사랑이 아니라 사랑하는 척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청춘들이다. 완벽해진 상태가 아니라 자신의 완벽함을 만들어 가는 순간들인 것이다. 그 중 한 가지는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삶을 살아가는데 균형이 중요하듯, 청춘이 단단해지고 강해지기 위해서는 한 가지라도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다.그러니 떨어지는 벚꽃 잎을 그냥 보내지 말고 지금 사랑하고 싶은 누군가와 혹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내고 있다면 좋겠다. 벚꽃은 매해 볼 수 있지만, 때마다 공기와 날씨가 다르고, 꽃잎의 모양도 다를 것이며 꽃잎이 떨어지는 순간순간이 다르다. 지나면 알 수 없는 것들이 더 많기 때문에 나중이라는 단어를 선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청춘이기에 아름다운 사랑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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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4.24 23:02

고교생에게 문학 읽기를 허하라

'청춘예찬' 원고를 처음 의뢰 받았을 때, 나는 최대한 글을 일상적인 소재로 부드럽게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첫째는 일상의 작은 소재를 보고 독자들이 두근거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내가 내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께 탁 터놓고 강한 어조로 말할만한 급이 안 됐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원고는 조금 강한 어조로 '이렇게 하라'고 외치고 싶다. 그만큼 나에게 있어서 내 동생이 겪었던 일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내 동생이 다니는 고등학교는, 연합고사를 치러 들어가는 지금에도 지역 명문 소리를 듣고 있는 고등학교이다. 최소한 익산 시내에서 그 교복을 입고 다니면서 불이익을 받거나 자존심이 상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학생들도 착하고, 공부도 잘 하는 이미지의 학교이며, 내가 그 학교에 재학할 때도 논술 및 각종 대회에서 상을 타 오는 소위 명문이었다.내 동생은 그 고등학교의 사서 동아리 소속이다. 사서 동아리는 학교 도서실에 있는 책을 관리하고 정리하는 일을 맡아서 하고, 책을 신청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번 분기에 책을 신청할 때, 담당 선생님께서 시집과 소설책 목록을 보시며 이런 책들은 구입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런 책들은 이미 서가에 많이 꽂혀 있으며, 그런 책들을 보면 공부를 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였다. 과연, 과연 그럴까.독서는 마음에 양식이라는 말은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좋은 책은 많이 보고 꼭꼭 씹어 먹을수록 좋은 법이다. 한 권의 책은 사람의 마음을 바꾸고 인생을 바꾼다. 내 대학교 은사님께서는 괴테의 '파우스트'를 보고 힘을 내셔서 학문에 정진하셨고, 나도 고등학교를 다닐 때 읽었던 백석의 시집과 김형경 작가의 소설 때문에 문학의 길을 걷겠다고 결심했다. 세상에 책이 많은 만큼 사람의 인생을 바꿀 책 또한 찾기 어렵다. 그러기에 청소년-청년기에 끊임없이 독서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책'들로 지칭된 '문학'은 사람의 진로를 바꾸기도 하고 사람의 인생을 휘어잡기도 한다. 청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 가지 문학을 접하면서 자신의 세계를 세우는 것이다. 여러 자기소개서에서 감명 깊게 읽은 책을 물어보는 것도 그 이유라고 생각한다. 야자에 시달리는 고등학생들이 가장 책을 쉽게 접할 수 있는 곳이 도서실이기 때문인지, 모교의 도서실 담당 선생님의 말씀이 더욱 더 씁쓸하게 느껴진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청춘이란, 책을 읽어야 한다. 인생을 바꿀만한 단 한권의 책을 찾기 위해서 열심히 읽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언어영역 문제집에 밑줄을 쳐가면서 '역설적 표현.' '공감각적 심상' '비유적 표현' '주인공이 ~함을 암시.' 라고 적어놓을 게 아니라, 문학을 읽으면서 생각을 키워야 한다. 그런데 대학에 갈 공부를 할 시간이 없기 때문인지 수능에 나올 문학이 아니면 읽지 못 하는 건가 싶어서 맘이 아파온다. 그나마 언어영역은 국사처럼 선택과목이 아니라 참 다행일 뿐이다.괜히 마음이 텁텁해져서 같은 고등학교를 나온 친구에게 털어놓으니, 친구는 웃으면서 자신의 친구는 너무 책을 많이 읽는다고 교무실에 들어가서 상담을 하고 나왔다는 웃지 못 할 이야기를 해준다. 웃으면서 할 이야기를 입술을 깨물면서 하고 있는 꼴이다. 괜히 전화 받기가 퍽퍽해져서 매 달 독서토론에 나간다는 엄마가 형광펜을 치면서 읽고 있는 책을 떠들러보며 이야기를 들었다. 과연 책을 읽는 게 공부에 방해가 되는 걸까, 라고 말하는 친구의 목소리에 야자시간에 책을 읽다가 책을 뺏긴 경험이 어렴풋이 생각나는, 그런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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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4.17 23:02

대학, 자연스러운 독서문화 조성해야

지난달 16일과 21~22일 원광대학교가 주최하는 '후마니타스 장학금' 장학생 선발이 끝났다. 올해 3회를 맞이했지만 처음에 시행됐을 때만큼의 열정은 사그라들었다. 원광대는 지난 2011년 11월 후마니타스 장학제도를 처음 도입했다. 학생들에게 인문학적 소양을 증진시키고 글쓰기 실력을 높이기 위한 이 제도는 '독서시험', '독서논술', '독서토론' 등 총 3개의 부문으로 나눠 시험을 시행하고 있다. 이러한 장학금 제도는 취지도 좋고 책을 읽고 장학금을 받을 수 있어 학생들에게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어딘가 조금 억지스러운 느낌이다. 대학생이 책을 읽어야하는 것은 당연지사인데 장학 제도까지 시행한다는 것 자체가 부끄럽지 않은가. 또한 이 제도의 취지가 무색하게 후마니타스 제도가 용돈벌이로 전락해버릴까 우려된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옛말이 무색하게 오늘날 대학생들은 자투리 시간에 책보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책을 읽으러 가기보다는 시험공부를 하기 위해 도서관을 찾는다. 학생들은 시험성적이 취업 성공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최근 국내나 미국의 유수대학들도 인문학적 소양교육의 강화를 위해 독서 장려에 팔 걷었다. 경희대의 경우, 지난 2011년 출범한 학부 교양교육전문 대학인 '후마니타스 칼리지'가 올해로 3년째 운영하고 있다. '후마니타스 칼리지'는 경희대가 문명을 성찰하는 교양인 양성을 목표로 출범했다. 경희대 학생은 후마니타스 칼리지에서 35∼56학점을 반드시 이수해야 한다고 한다. 성균관대의 경우, '오거서(五車書) 운동'이 있다. 오거서 운동은 성균관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독서 진흥 운동으로, 학생들은 정해진 날짜에 모여 자율적으로 책을 선정하고 토론한다. 더불어 '성균관대 오거서 홈페이지'에서 각자 책을 읽은 후 독서노트를 올리면 회원들이 서로 댓글을 남기며 글을 추천하고 추천 수가 많으면 '명예의 전당'에 오른다. 활발히 활동을 하는 회원에게 점수를 부여해 우수자와 열독왕 랭킹에 선정되면 장학금과 2박3일 여행의 혜택이 주어진다. 이밖에도 책을 읽고 팀별 발표를 하는 '독서PT대회'도 열린다. 미국의 세인트 존스 대학교의 경우, 의무화된 커리큘럼으로 '그레이트 북스 프로그램(Great Books Program)'이 있다. 학생들은 학교를 다니는 4년 동안 서양 문명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100여권의 저서를 읽고 토론을 하고 에세이를 작성해야 한다. 세미나 형식의 토론 수업은 보통 20여 명의 학생과 두 명의 독서 전문가가 함께 진행하며 전문가들은 학생들에게 가이드와 동료 질문자로서의 역할을 한다. 이외에도 독서 골든벨부터 힐링캠프, '독서졸업자격인증제' 실시까지 각양각색이다.대학의 독서 장려는 세계적 추세라고 한다. 원광대도 이러한 추세에 편승해 후마니타스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그러나 보다 자연스러운 독서문화 조성을 위한 구체적인 정책이 마련돼야 할 필요가 있다. 지금과 같이 독서를 장학금을 타기 위해 매개체로 이해한다면 독서에 대한 진정한 흥미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대학에서는 학생들이 독서의 소중함을 이해하고, 이를 생활화 할 수 있고 계기를 마련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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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4.10 23:02

영화 '지슬'과 대학생의 동병상련

오늘은 제주 4·3사건 65주기이다. 65년 전 제주도의 오늘을 주제로 한 독립영화 '지슬'이 화제다. 지난 1월 한국 영화 최초로 선댄스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아 작품성을 입증한 이 영화는 독립영화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누적 관객 6만 명을 넘겨 세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따르면 이 사건은 경찰·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남한의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한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의 무장봉기로 시작했다. 이후 1954년 9월, 한라산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이 희생당했다. 현재까지 신고된 사건희생자는 1만5100명으로 집계됐지만, 최대 3만 명가량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제주도 주민이 30만 명이었으니 전체 인구의 10분의 1가량이 사망한 것이다.'지슬'은 반공이념에 목숨을 빼앗긴 순박한 이들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해학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흑백필름에 담긴 영상은 마치 이분법에 가려져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시대상을 반영하는 듯하다. 개인의 삶보다 집단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냉혹한 전체주의를 지적하는 이 영화의 메시지를 단지 과거의 일로 치부하고 넘어가기엔 떨떠름한 감정이 떠나질 않는다.사실 전체주의의 망령은 지금도 우리 주위를 배회하고 있다. 특히 대학이 그렇다. 오늘날 대학은 효율성과 경쟁력을 자신의 이념으로 삼고 독단적인 행정을 일삼고 있다. 지난해 원광대는 재정지원 제한대학의 낙인에서 벗어나기 위해 취업률과 재정기여도가 낮은 6개 학과를 폐지하기로 했다. 윤정환, 김태영 등 스타선수를 배출한 동아대 축구부는 최근 3년간 성적이 좋지 않아 신입생을 뽑지 않기로 해 논란이 되고 있다. 부산외대는 학생 재적률이 낮다는 이유로 러시아인도통상학부를 통폐합시키겠다고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했다.수도권 대학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다. 연세대는 올해부터 강제로 신입생 수업을 국제캠퍼스에서 진행한다. 대학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해서다. 교육 환경은 기존 캠퍼스보다 상당히 열악하다. 연세대와 한국외대는 자율전공학부를 폐지하고 각각 융합학부와 언어외교학부를 신설한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의 의견 수렴은 너무나 당연하게 생략됐다.로스쿨이 생긴 대학의 법대는 신입생 모집이 폐지됐다. 각 대학은 최대 2017년까지 법대생들의 수업권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전공수업은 교수 대신 시간강사가 하거나 교양수업으로 대체되니 강의의 질이 좋을 수 없다. 게다가 지난해엔 교육과학기술부가 법대를 당장 폐지하라는 지침을 내려 물의를 빚었다. 위의 사례들은 최근 1년간의 일들이다. 시간을 거슬러 가기에는 지면이 벅찰 만큼 대학은 무소불위의 전체주의 체제를 즐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계란에 바위치기 같은 싸움을 이어오고 있다.'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과거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다. 제주도에서 반공이라는 이름의 총칼에 희생된 이들은 효율성과 경쟁력, 행정 편의성이라는 이름으로 권리를 빼앗긴 대학생들과 오버랩된다. '지슬'은 비극으로 막을 내리며 혼령들을 위로한다. 하지만 대학에게서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는 이들의 이야기만큼은 해피엔딩으로 끝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들을 통해 무고한 희생자를 필수로 동반하는 전체주의적 사고가 조금이나마 얇아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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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4.03 23:02

여행의 묘미

며칠 전 집에 내려가기 위해 전주역을 찾았다. 나는 전주역을 들릴 때 마다 꼭 챙겨보며 소소한 재미를 느끼는 작은 공간이 있다. '내일로' 여행을 하며 전주를 들러 준 소중한 사람들의 작은 이야기들. 예전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짐이 아쉬워 대일밴드 종이에 적어서 밴드로 그 이야기를 붙여놓은 것을 본적이 있다. 그 글을 보자마자 그들의 작지만 강한 사랑의 힘이, 그리고 아픔이 느껴졌던 공간이다. 많은 추억이 담겨져 있는 전주역에서 이번에 내가 발견한 것은 '기차를 놓쳤다. 어쩔 수 없지 이게 여행의 묘미, 더 좋은 추억을 만들다 가자'라는 글이었다. 나는 이 글을 보자마자 마음이 뭉클했다. 여행을 할 때는 예정된 시간에 타지 못한 기차가 추억이 된다. 그것이 여행의 묘미라는 사람들이 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는 그런 묘미를 즐기지 못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느 것 보다 즐겁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인생이라는 여행 속에서 정해진 시간과 정해진 과정에 급급해 진정한 인생의 묘미가 뭔지도 모르고 모두들 한 곳을 향해 달려가고, 사람들 모두 상처입기 두려운 것처럼, '이 정도면 안전해.' '이정도면 상처가 깊지는 않겠지.'를 당연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나도 안전한 것에 더 마음을 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을 하고, 올바른 판단을 하고 있다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라 판단한다. 그러면서도 삶은 늘 도전의 연속이라는 말을 듣고 산다. 어느 것에 도전을 해야 하는지, 누구에게 나의 도전을 존중받을 수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불편한 진실이 존재하지만 도전이라는 것은 늘 우리들 주변에 존재하여왔다. 아직 나 또한 잡아본 적 없는 도전이라는 단어를 어느 누군가에게 강요하듯이 던져주고 싶은 마음은 아니다. 역에서의 짧은 만남의 글이 나에게 '돌아보다'라는 단어를 선물해 주었다는 말은 해주고 싶었다. 사람들은 잠시 멈춰서는 것도 두려워한다. 그리고 뒤돌아본다는 것을 위험한 행동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앞으로 나가는 방법만 학습 받아왔고, 강요받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뒤돌아 내가 지나온 길을 조금 관찰해 볼 생각이다. 이러한 나를 혼내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나의 행동이 그 사람에게는 잘못된 행동이라는 판단이 들게 했다면 혼나면 된다. 그리고 혼난 만큼 도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 만큼 응원이 되어 줄 것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는 응원이라는 가뭄에 시달려 메말라가지 않았나 생각해 보기도 한다. 지금이 아닌 더 먼 삶에는 지금과는 다른 시간이 존재할 것이다. 세상은 변하고 있다. 과거의 시간에 어울리는 모습의 인생이 있다면 변화하는 시간에 어울리고 존재하는 인생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아직 그 시간을 살아본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고, 혹 예측 가능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단지 추측에 불과하다. 우리는 추측이 아닌 현실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미 만들어진 틀에 너무 얽매여서 자신을 만들어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들은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스로가 경험하지 못 한 것이기에 두려워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은 당연한 것이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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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3.27 23:02

나는 문득 머리카락을 자르고 싶다

날 처음 겪는 사람들은, 내 머리카락 색을 보고 나를 굉장히 튀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 뒤에 나를 살짝 간을 본다면 내가 상당히 얌전하고, 쓸데없는 걱정을 많이 하는 답답한 성격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나는 도박을 싫어한다. 결과를 내가 컨트롤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예비하지 않은 어떤 상황이 일어나는 것도 싫어한다. 쓸데없는 부분에서 완벽주의자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의외로 가끔씩은 충동적이고 계획 없이 움직이는 것도 좋아한다. 얌전한 평소 성격 때문에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다. 그래서인지 내 충동적인 행동은 대부분 '좋아하는 것'에서 나타난다. 그 중 가장 대표적으로 충동적이었던 에피소드를 말해보자면 인피니트 성규의 솔로 데뷔무대를 보기 위해서 갑자기 서울에 갔었던 일일 것이다.때는 바야흐로, 성규가 솔로앨범 'Another Me'를 발매했던 추운 겨울이었다. 집 안에서 인터넷 서핑을 하고 있던 나는 갑자기 성규가 노래하는 걸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성규 팬이었던 동생이 나에게 '뽐뿌질'을 넣고 있었고, 나는 당장 용산으로 올라가는 기차표를 예매했다. 다음 날이 공개방송 날이었기 때문이다. 익산에서 서울로 가는 일은 의외로 많은 체력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지방에서 서울로 공개 방송을 보러 가는 일은 대단한 체력을 필요로 한다. 아무리 심야 열차여행이라고 할지라도 새벽 한시 기차를 타고 용산으로 가서, 한 시간 정도를 지하철을 기다린 다음에, 그 지하철을 타고 최대한 빨리 방송국에 도착해야 한다. 여섯 시에 인원체크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하드한 스케줄을 감수하고도 성규 보기를 결정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의 '충동'이 필요하다. 본래 소심하고 쓸데없는 걱정을 많이 하는 내 성격으로는 절대로 연예인 하나 보겠다고 공개 방송을 뛰는 일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간간히 고개를 내미는 '충동'은 내가 여러 가지 경험을 할 수 있게 도와준다. 충동이 없었으면 바티칸전을 보러 서울로 떠나지도 않았을 것이며, 어벤져스 4D를 보러 광주로 떠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익산역에서 우리 집까지 걸어서 간 경험도 없었을 것이며 머리카락을 투톤으로 물들이는 경험도 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여러 가지 작법서를 읽어보면,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경험과 간접경험이라고 한다. 그 중에서도 경험해본 것이 있어야 글에 리얼리티를 불어넣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여러 가지 경험을 하기에는 성격이 매우 소심하다. 처음 하는 일을 할 때에는 심장이 너무너무 두근거려서 손을 움직이는 것조차 못하겠다. 여행을 갈 때에도 '혹시 모르니까' 라는 불안감 때문에 일단 내가 안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챙기고 본다. 불안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간히 나오는 나의 충동에 따라 행동할 때, 나는 갑자기 용감해진다. 산책을 할 때도 막 골목길로 들어간다. 나는 길치이다. 일 년 정도 정해진 길로 다녀야 겨우 길을 외우는 정도다. 그렇지만, 길을 잃더라도 다른 길로 가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 나는 이렇게 갑자기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상황이 좋다. 머리가 비워지고 신선해지는 기분이 든다.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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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3.20 23:02

새 학기, 자신만의 드라마가 시작됐다

모든 것이 새롭게 출발하는 모습이다. 국가에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하였으며, 북한, 미국, 중국, 그리고 일본 등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국가들도 새로운 정권에 의한 미래를 만들어 나아가기 시작하고 있다. 우리 학교도 신입생과 복학생, 그리고 얼마간의 방학을 마친 재학생 모두가 새 학기를 시작했다. 방학 중에 고요했던 캠퍼스가 새내기까지 더해져 더욱 활기를 띠고 있다. 우리대학의 자랑 캠퍼스 역시 싱그러운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대학교에 입학하였을 때, 고등학생 때와 달리 좀 더 자유로워지고 내가 진정한 시간의 주체로 살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 벅찼다. 그렇지만 세상은 언제나 우리를 그냥 놓아두지 않는다. 자기 결정권이 더 많아진 만큼 자기 책임 역시 커지기 때문이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늘어난 자유와 어떻게 보내야 할지 당황스러울 정도인 시간적 여유를 그냥 흥청망청 만끽하다 보면, 마냥 대학생일 것 같던 대학 시절도 흘러가버릴 것이다.계획을 세워 스스로를 제어하지 않는다면 졸업 후의 진로는 더욱 막막해질 것이다. 대학교 입학한 새내기에게도 지금부터 준비해보라고 조언해주고 싶다. 한 가지라도 목표의식을 갖고 다양한 활동에 참여해보자. 굳이 스펙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진로를 찾기 위한 방법은 주변에 무궁무진하다.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 학교에서 주최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이다. 아직 새내기라고 망설이고, 또 너무 늦었다고 주춤거리지 말고 말이다. 이제 신발 끈을 조이고 해답을 찾을 준비를 해야 한다. 이제 움직여야 만날 수 있고, 움직여야 배울 수 있다. 세상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그 속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면 많은 발전을 기대 할 수 있을 것이다.만약 공모전을 준비한다면 팀원과 머리를 맞대고 밤을 지새울 각오를 해야 한다. 새롭게 아이디어를 짜내고, 논리를 구성하고 밤새도록 제안서를 수정하고 작성해야한다. 공모전을 준비하면서 의견을 조율하고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터득할 수 있다. 대외활동에 지원했다가 떨어지면 어떤가. 떨어지고 좌절해봐야 내 안이 단단하게 다져질 것이다. 아프고 힘들어야 몸이 잊지 않고 제대로 배운다고 하지 않는가. 기자가 되어보면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배울 것이고, 국토대장정을 떠나보면 몸의 한계를 뛰어넘게 될 것이다. 지금 당장 수많은 기회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냉정한 인식과 끊임없는 노력이 남들과 차별화된 자기 자신만의 드라마를 만들어 줄 것이다. 새로운 시작에 있어 명심해야할 것으로는 커다란 꿈도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큰 꿈을 갖는다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이를 한 번에 이룰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다. 커다란 꿈일수록 그러하다. 꿈을 이루기 위하여 작은 일들을 정성껏 수행하여야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것들이 몸에 배여 능력으로 승화되고 작은 결과들로 쌓여 나아갈 때, 자신의 능력이 개발되고 주변의 신뢰가 쌓여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몽테뉴는 '어디로 배를 저어야 할지 모르는 사람에게는 어떤 바람도 순풍이 아니다'라는 말을 하였다. 모두가 자신의 꿈을 향한 새로운 출발선상에 있다. 그러나 이의 실현은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되며, 말이 아니라 행동이 근간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지속적 노력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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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3.13 23:02

질적 대학 평가의 필요성

전북대학교는 장애인을 배려한다. 여기에는 명백한 근거가 있다. 건물마다 휠체어 통행을 위한 경사로가 있으며 손잡이가 갖춰져 있다. 장애인화장실은 당연히 마련되어 있으며 엘리베이터는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장애인들의 교통 편의를 돕기 위해 길바닥에는 점자블록이 깔려져 있고 전용 주차장도 있다. 그들의 편한 생활을 위해 기숙사는 1층에 배치한다. 2011년도 장애대학생 교육복지 지원실태 평가결과에서 우수대학에 선정되기도 했다.전북대학교는 장애인을 배려하지 않는다. 여기에도 명백한 근거가 있다. 학습도서관은 경사로가 있지만 그 위에는 계단이 있다. 휠체어로는 독서실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갈 수 없다. 1층의 편의점만 이용 가능하다. 장애인화장실은 넓고 조용하지만 전구가 나가거나 변기가 막혀도 잘 고쳐주지 않는다. 인도의 보도블럭은 움푹 패이고 튀어 나왔다. 부서진 보도블럭에 휠체어 바퀴가 걸리면 휠체어에 탄 사람은 바닥에 나뒹굴기 때문에, 그들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팔걸이를 붙잡는다. 점자블록은 중간 중간 끊겨있는 곳이 많다. 장애인 전용실이 있는 기숙사는 자동문이 설치되지 않은 건물이다. 휠체어에 앉아서 문을 열려면 갖은 힘을 써야 겨우 열릴까말까 한다. 기숙사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 그 다음엔 계단을 내려가야 한다. 혼자 힘으로 내려갈 수 없다. 장애학생 도우미가 있긴 하지만 그들이 항상 곁에 있을 수는 없다. 있어도 불편한 것은 여전하다. 한 장애인 학우는 이렇게 말했다. "담당 직원이 휠체어 타고 학교 한 바퀴만 돌아봤더라면 절대 이런 식으로 안 만들었겠죠."그렇다면 전북대학교는 장애인을 배려하는 학교일까, 배려하지 않는 학교일까? 양적인 평가에 따르면 장애인을 배려하는 학교이지만 질적인 평가에 따르면 장애인을 배려하지 않는 학교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느 시각이 진실일까? 전북대학교의 당사자들은 후자에 입을 모으는 한편, 각종 대학평가와 언론에서는 전자를 바라본다.우리나라의 대학평가는 이렇듯 대부분 양적 지표에 치우쳐있다. 이에 최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서남수 교육부 장관 후보자는 임기 전반에 걸쳐 선진국 수준의 질적 평가 시스템을 갖추겠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서 후보는 "대학평가의 기준과 절차를 대폭 수정해야 한다"며 지금까지의 수많은 대학평가가 대학이 양적 평가지표를 높이기 위해 꼼수를 쓰도록 강요해왔던 현실을 꼬집었다. 특히 취업률 부풀리기가 가장 심각한데, 일부 대학에서는 취업률을 높이기 위해 학생들을 허위로 취업했다고 신고하거나 통계를 조작해 교과부 감사에 적발되기도 했다. 대학이 취업양성소로 변질됐다는 오늘날, 이 기능마저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것은 대학에 대한 양적 평가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일렬로 줄 세우기식의 대학평가는 반대하지만 부실한 대학을 가려내는 평가는 계속 되어야 한다. 학령인구가 감소하는 가운데 대학의 수도 줄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기준이 단지 숫자 몇 개로 정해지는 것은 안 된다. 숫자는 때에 따라 계속 변한다. 잠깐의 실수에 명문대도 부실대의 낙인이 찍힐 수 있는 것이 오늘날의 대학평가다. 양적인 평가와 더불어 질적인 평가도 함께 고려하는 대학평가가 만들어져 대학들 간의 선의의 경쟁이 이뤄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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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3.06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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