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62)동학농민군 진압 관련 기록물 6건
 이번에 소개하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은 정부에서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한 뒤 수습하는 과정에서 생산된 기록물로서 『충청도목천현전소모진적산실수성책』 등 6건이다. 작성시기는 1894년 12월에서 1895년 2월에 걸쳐 있으며, 6건 모두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이를 통해 정부에서 동학농민혁명을 어떻게 수습하였는지 엿볼 수 있다. 특히 6건 가운데 3건이 1895년 1월에 나주에 있던 전라도 초토영 초토사 민종렬이 작성한 것으로, 나주에 머물며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일본군과 정부군이 서울로 올라간 뒤 나주 초토영에서 어떻게 잔여 동학농민군을 소탕하고 전라지역을 통제하였지를 알 수 있어 기록물로서의 가치가 크다. ︋ △『충청도목천현전소모진적산실수성책(忠淸道木川縣前召募陣籍産實數成冊)』 이 기록물은 1895년 2월에 목천현 전 소모진이 동학농민군으로부터 몰수한 물품의 내력을 정리한 자료이다. 크기는 21.9✕31cm이며 1책으로 되어 있다. 내용은 동학농민군 기포시 쌓아놓은 장소(복구정·작성산)에서 몰수한 물품목록, 처형된 동학농민군(22명)에게서 몰수한 물품목록, 석방하거나 도망한 동학농민군(13명)에게서 몰수한 물품목록으로 나누어 동학농민군 성명과 몰수한 물품을 정리해놓았다. 이렇게 몰수한 물품은 모두 벼 790석, 백미 121석 17두, 콩 1석, 소 11마리, 말 13필, 담배 1천파, 목화 70근이며 말미에 몰수한 물품의 사용내역을 기재하였다. 동학농민군의 소재지도 천안 목천 외에 진천, 충주, 음죽, 양성 등지에 걸쳐 있다. 이것으로 보아 이 기록물은 소모사 정기봉(鄭基鳳)이 소모진을 이끌고 활동하면서 동학농민군에게서 몰수한 물품과 그 사용처를 보고한 것이다. 자료 말미에 ‘관찰사겸순찰사 박’이란 문구로 보아, 1895년 2월에 충청도관찰사 박제순이 작성한 것이다. 이 기록물에서 말하는 소모진은 소모사 정기봉이다. 그는 9월 26일경 맹영재와 같이 기전소모관(畿甸召募官)으로 임명되어 민간의 포군을 모집해서 동학농민군 진압에 나선 인물이다. 그는 양성 포군 300명을 모집해 소모진을 꾸린 뒤 10월 19일 밤 천안 목천경계로 들어와 활동하기 시작하였으나, 10월 21일 이두황이 이끄는 장위영군이 먼저 세성산 동학농민군을 공격하였다. 10월 21일 세성산전투 이후 정기봉은 목천지역에서 무자비하게 동학농민군을 찾아내 처형하고 재산을 몰수하였다. 11월 15일에는 목천현감도 겸직, 11월 19일 부임하였다. 호서소모관으로도 임명되어 11월 15일 전후 청주, 진천, 충주 등지에서도 활동하였다. 이 과정에서 민간 침탈도 이어져 큰 원성을 산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기봉은 동학농민군 진압 공로로 동학농민군을 진압·토벌하는데 공을 세운 411명이 수록된 『갑오군공록』에 이름을 올렸다. 그에 관한 기록은 『갑오군정실기』에 자세하므로 비교 검토할 필요가 있다. ︋ △『소모관솔포군상경시양근군삼참공궤식상여소임전실수성책(召募官率砲軍上京時楊根郡三站供饋食床與所入錢實數成冊』 이 기록물은 1894년 12월에 경기도 양근군에서 상경하는 소모관이 이끄는 포군의 식비와 짚신, 담배 등을 마련하는데 소요된 비용을 각 참(站)별로 적어 놓은 자료이다. 자료 크기는 20✕24cm 1책이다. 양근군 읍참(邑站)에서는 소모관·중군·선봉과 포군 6백명의 두끼분 식사와 기타 비용을 지출하였다. 들어간 비용은 소모관 등의 술상 1상에 2냥 4전, 식비 1상에 6전, 포군 600명의 두끼 식사비 240냥 등 총 339냥 2전이었다. 그밖에 길을 가다 먹은 점심값, 두물머리에서 숙박할 때 식비, 담배, 짚신 등의 비용이 지출되었다. 양근군에서 총 지출된 비용은 엽전 768냥 2전이었다. 이 기록물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데 동원된 군인 등의 비용을 해당 지역의 군현에서 부담하였음을 알려줄 뿐 아니라, 군현에서 지원한 것들이 술상, 밥상, 담배, 짚신 등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당시 물가를 엿볼 수도 있다. 이러한 비용은 실질적으로 지역민에게 전가되어 주민들의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 『호연초토영각읍절의열행인성명성책(湖沿招討營各邑節義烈行人姓名成冊)』 이 기록물은 1895년 호연초토영이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농민군에 대항해서 싸우다 죽은 사람들 가운데 절의와 열행한 이들을 기록한 자료이다. 크기는 26✕37cm이며 1책(3장)이다. 절의한 사람으로는 홍주 유학 유기석, 덕산 전 도사 황종원, 예산 아전 김명황 부자, 서산 이방 송봉훈, 해미 유학 김상엽 등 홍주, 예산, 서산 등지에서 활동한 11명과 열행한 여성 2명이다. 홍주 향교를 지키려다 희생된 교생 6명도 포함되어 있다. 호연초토영은 1894년 10월에 홍주성에 설치되었다. 정부는 충남 내포지역 동학농민군 세력이 확대되자 10월 8일 홍주목사 이승우를 호연초토사(湖沿招討使)로 임명, 내포지역 동학농민군을 토벌할 수 있는 군사권을 부여하였다. 이 때부터 홍주성이 초연초토영으로 전환, 호연초토사 이승우는 관군을 동원하여 적극적으로 내포지역 동학농민군을 토벌하였고, 이 과정에서 유생 등으로 구성된 민보군을 조직적으로 활용하여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고 체포, 처형하였다. 이 자료는 그 과정에서 절의를 지킨 유생과 여성들의 명단과 활동상을 호연초토사 이승우가 1895년 2월에 정리하여 중앙에 보고한 것이다. 충남 내포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과 그에 대항한 유생·아전·여성들의 움직임을 엿볼 수 있다. △︋ 『전주부전전라도각읍상납중비류소탈전목미태구별성책(全州府前全羅道各邑上納中匪類所奪錢木米太區別成冊』 이 기록물은 1895년 8월 전주부에서 작성한 것으로, 전라도내 각군에서 동학농민군들에게 빼앗긴 전세(田稅)를 비롯한 각종 상납의 내역이 군별로 파악 기재된 책이다. 크기는 19.5✕31cm이며 1책(12장)으로 되어 있다. 내용은 전주를 비롯한 전라도 20개 군별로 동학농민군에게 탈취당한 상납물과 해당 연도의 세목(稅目)이 적혀 있다. 빼앗긴 상납물은 전세미태(田稅米太), 대동미, 호포전, 각종 군목(軍木), 군전(軍錢) 등 여러 종류에 걸쳐 있다. 특히 이 세액을 반씩 나누어 「감(減)」, 「실(實)」로 표기하였는데, 「감」이란 중앙에서 탕감해준 액수였다. 실제 상납액은 원래 상납액의 반인데, 권말에 기재된 탈취액의 총계는 전(錢) 113,887냥, 목(木) 227동 2필, 쌀(米) 1,815석, 콩(太) 291석이다. 이들 탈취액은 대부분 농민군이 군수 조달을 위해 각 읍에 있는 상납물을 수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전라도 20개 군에서 전개된 동학농민군의 움직임을 엿볼 수 있다. △︋ 『전라도각읍매사읍작통규모관사조약별록성책(全羅道各邑每四邑作統規模關辭條約別錄成冊)』 이 기록물은 1895년 1월에 호남초토영의 초토사 민종렬이 전라도 각 읍을 작통(作統)하면서 각 읍에 보낸 관사(關辭), 작통조약(作統條約), 작통 내용을 수록한 자료이다. 크기는 20✕34.5cm 1책(5장)으로 되어 있다. 내용은 관사와 작통 조약, 작통질(作統秩)로 나뉜다. 관사에서는 2차 동학농민혁명으로 인하여 각 읍의 수비체제가 극도로 문란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오가작통을 통하여 잔당의 토벌 및 긴밀한 협조체제를 강구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오가작통 조약은 4조로 되어 있는데, 4읍이 협조하여 작통하고 각 읍 간의 긴밀한 연락을 취할 것, 수성군(守城軍)의 상호 협조와 고을 경계를 넘어 생기는 민간 폐해 엄금 및 적을 토벌할 방략을 세울 것 등이다. 각 읍의 작통질은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를 제외한 52읍을 근접한 4읍 단위로 작통한 총 13통의 내용이 적혀 있다. 이 기록물은 전라도에서 동학농민군의 잔당을 소탕하고 지방의 수비태세를 공고히 하기 위해 작성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시 나주 호남초토영의 진압상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자료이다. 특히 나주에 머물던 일본군과 정부군이 서울로 떠난 뒤 나주 초토영이 어떻게 전라도지역을 통제하면서 생존한 동학농민군을 토벌하였는지를 알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 △『호남초토영참모관별군관천보성명성책(湖南招討營參謀官別軍官薦報姓名成冊』) 이 기록물은 1895년 1월에 호남 초토영 초토사 민종렬이 작성한 것으로, 민종렬이 참모관과 별군관을 추천·보고한 문서이다. 크기는 21.1✕35.9cm 1책이다. 참모관에는 전 현감 손응설과 전 전적 오학선을 추천하였고, 별군관에는 유학 현덕종과 부사과 전학권을 추천하였다. 민종렬이 이들을 참모관이나 별군관으로 추천한 것은 민보군을 조직하여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는데 공로를 세웠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