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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아름다운 사람] 방송 드라마의 산역사 유길촌

-영화진흥위원회 유길촌위원장 , "한국이 아시아영화의 중심이 되게 하겠다"

 

-2백여편 드라마 제작한 영원한 드라마 PD

 

-영화제작은 오랜 꿈, 이제 한국영화산업의 전성기 만들어내는데 열정 쏟겠다

 

 

스필버그의 영화 ‘주라기 공원’ 한편이 자동차 백만대 수출에서 얻어지는 수익과 맘멎는다는 이야기는 문화가 곧 산업이자 경제력의 중심에 들어섰음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그러나 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주라기 공원’의 상업적 흥행이 주는 상징은 이른바 새로운 세기에 영화산업이 가져올 엄청난 문화의 변혁, 바로 그 지형도를 제시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한국영화가 영화문화라는 역사를 쓰기 시작한지 80년. 채 1백년도 안되는, 결코 길지 않은 역사지만 한국영화의 오늘은 그 세월의 길이를 몇배, 몇십배 뛰어넘어 세계 영화시장과의 당당한 조우를 요구받고 있다.

 

문화관광부와 영화진흥위원회는 지난 3월, 영화산업을 21세기를 이끌어가는 핵심 콘덴츠 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해 2004년까지 2천2백81억원을 투자하는 ‘영화산업진흥종합계획’ 5개년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이 제대로의 과정을 거쳐 목표를 이룬다면 연간 한국영화가 1백50편 이상이 제작돼 한국영화의 시장 점유율 50%에 이르게 되는데 사실 털어놓고 이야기하자면 이 종합계획을 추진해나가는 과정 자체가 얽히고 설켜있는 한국영화계 환경에 비추어 추진해나가는 입장에서는 엄청난 ‘고통’일 수 밖에 없다.

 

이 노도질풍의 항해에 키를 붙잡고 있는 사람. 그이가 바로 영화진흥위원회 유길촌 위원장(60)이다.

 

“올해초 영진위원장에 임명되었습니다. 뜻밖의 중책이어서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지만 한국이 아시아영화산업의 중심이 되게하는데 모든 열정과 노력을 쏟을겁니다. 가능성은 충분히 엿보입니다.”

 

들떠있지 않은 차분한 목소리가 상대방에게 깊은 신뢰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올해로 만 60세. 화갑을 맞았지만 하얗게 밑으로 길러낸 수염만 아니라면 그에게서 나이를 읽어내기란 쉽지 않다. 적당히 권위적인(?) 인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장을 뛰는 방송인으로서의 느낌이 훨씬 더 짙게 풍기는 것은 드라마 PD로서 오랫동안 이름을 각인시킨 탓이 아닐까 싶었다.

 

우리나라 영화산업을 이끌고 있는 수장. 유길촌위원장은 올해초부터 각종 매체를 통해 얼굴과 이름을 드러냈지만 사실은 그 훨씬 이전부터 이미 우리에게 친숙해져있을수 밖에 없는 사람이다.

 

70년대초, 텔레비전이 널리 보급되기도 전인 당시, 엄청난 인기를 불러모았던 MBC TV드라마 ‘아버지’를 기억하는 시청자들이라면 ‘연출 유길촌’이란 이름 석자를 어렴풋이나마 기억할 수 있을 터이고, 80년 한해를 풍미했던 드라마 ‘장희빈’을 통해서도 유길촌이란 이름은 낮익을 터인데 혹시 그도 아니라면 80년대 안방극장을 장식했던 ‘113수사본부’조차 지나칠 수는 없지 않을까.

 

유길촌이란 이름은 그렇게 안방극장의 화면위에서 오랫동안 시청자들과 함께 세월을 났다. 세월로만 치자면 서른세해를 그는 방송인으로, 그중 30년 가깝게를 드라마 연출자로 보냈고 그런점에서보자면 그는 우리나라 방송드라마의 산역사에 다름아닌 셈이다.

 

“드라마 연출로만 오랜동안을 보냈지요. 지금까지 연속드라마로는 1백50편정도, 특집이나 미니시리즈 단막물까지 모두 합친다면 200편은 되지 않을까 싶은데 양이 문제겠어요. 얼마나 좋은 드라마를 만들었느냐가 중요하지요.”

 

65년 동양방송 에 입사, 69년에 문화방송으로 이적한 이후 98년 MBC미술센터 사장을 마지막으로 방송국을 떠날때까지 단한번도 눈길 돌리지 않고 방송으로 먹고 자고 생각해온 ‘방송맨’인 그가 늘 갖고 있었던 생각은 ‘좋은 드라마는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 이러한 확신은 영화에 비추어서도 한결같은 것이기도 한데 그동안 그가 만들어낸 드라마의 면면들을 보면 ‘나를 비추고 사회를 비추는, 인간의 이상까지도 비추어내는 것이어야 한다 ’는 연출자의 의식이 미치지 않은 것은 거의 없다. 방송이라는 매체가 끊임없이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환경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앞서 거론한 세편의 드라마만으로도 연출자 유길촌의 의식은 명료하게 드러나는데 노인문제를 사회적으로 환기시킨 ‘아버지’나 역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불러낸 ‘장희빈’, 반공드라마이면서도 인간성에 천착해 이념의 갈등을 담아내 관련기관으로부터 곱지않은 시선을 받아야했던 ‘113수사본부’등은 그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주는 대표작 아닌(?) 대표작인 것이다. 이런 그가 뜻밖의 표현으로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내의지와 관계없이 방송국의 야인으로 지내야했던 세월이 훨씬 길었다.”

 

드라마에의 열정을 묻어놓기에는 너무 일찍 현업에서 물러나야 했던 상황을 그는 지금도 아쉬워했다. 유길촌은 90년부터 드라마 연출가의 자리를 떠났다. 기획과 행정부서를 돌다가 92년에는 적자 운영이 빤한 미술센터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2회 연임을 하면서 5억자본금을 채우고도 5억 흑자를 이뤄냈다. 그리고 98년 방송사를 떠났다. 물론 그 이후에도 설날특집 등 한두편의 특집드라마를 의뢰받아 질긴 인연을 풀어냈지만 프리랜서가 된 그가 자신의 삶을 모두어 하고자했던 일은 정작 따로 있었다.

 

“나의 오래된 꿈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었다.”프리랜서로 돌아선 이후 동생인 유인촌의 권유로 유씨어터 대표를 맡고 있던 그는 극작가 송길한과 함께 영화 ‘서울만신’을 기획, 신인감독으로 데뷔를 꿈꾸고 있다가 영화진흥위원회로 불려나온 것이다.

 

방송에서 청춘과 장년기를 다보낸 그가 60대에 이르러 영화일에 들어선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오랫동안 영화 제작을 꿈꾸어온 그가 한국영화산업의 미래를 짐진 것은 고되지만 신나는 일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의욕에 찬, 그러면서도 신중하게 문화적 환경을 점검하고 분석하는 그가 풀어놓는 한국영화산업정책을 듣다보면 한국영화의 미래는 바로 눈앞에 와있다.

 

“할일이 너무 많습디다. 올해 아마도 70편 정도의 한국영화가 만들어질 것으로 예상하는데 이런 추세로 간다면 4년뒤에는 우리 영화시장의 50%정도는 점유할 수 있을 겁니다. 1백억원의 복지기금 조성, 영화인력 발굴을 위한 아카데미 개설, 스크린쿼터 문제 등 영진위가 해결해야 할일이 쌓여있지요.”

 

지난 5월 칸영화제에 ‘한국영화관’을 개설, 국제영화제 진출 및 영화수출을 위한 다양한 지원사업 모색을 시도하고 있는 유의원장은 내부갈등으로 파행을 거듭해온 영진위의 분쟁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지만 머지않아 영화계의 소모적인 갈등도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며 모처럼 웃음지었다.

 

◇ 유길촌 경력

 

유길촌위원장은 194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완주군 봉동면 성덕리가 고향이지만 부모가 서울에서 생활했기 때문이다.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 연극계에서 활동하다가 65년 동양방송의 스카웃 제의를 받아 방송국에 입사했다. 69년 MBC프로듀서로 자리를 옮겼고 25년이 넘게 드라마를 제작했다. 문화방송 TV제작국 부국장을 거쳐 92년 MBC미술센타 대표이사로 임명되어 두번 연임했다. 98년 퇴직후에는 동생인 유인촌씨가 운영하는 유씨어터 극장장을 맡아 활동했으며 방송인들의 모임인 미디어 포럼 부회장을 역임했다.

 

70년대 인기 절정을 이루었던 상대 방송사의 ‘아씨’의 시청률을 눌렀을 정도로 화제를 모았던 ‘아버지’로 안타(?)를 날린데 이어 ‘장희빈’ ‘113수사본부’와 ‘반민특위’ ‘최후의 증인’‘영산강’을 비롯 2백여편의 드라마를 연출했다.

 

◇ 취재뒷이야기 - 영화와의 인연은 깊습니다

 

“어렸을적부터 영화를 만드는 것이 꿈이었어요. 그리고 이런 꿈은 고향 봉동에서 지냈던 어린시절의 체험과 깊은 관계가 있지요.”

 

6.25때 다시 고향으로 피난을 가 완주중학교를 졸업한 유위원장이 기억하는 어린시절의 고향은 전쟁의 상흔으로 늘 처연한 기억속에 있다.

 

“낮과 밤으로 곡성이 끊이질 않아서 귓가에 그 곡성이 늘 들리는 듯한 이명을 안고 지냈다 ” 사춘기때의 그 체험이 특별하긴 하지만 초등학교시절 방학때마다 내려와 냇가에서 천렵하며 마주했던 빼어난 고향의 산과 바다의 풍광은 예외없이 정감있고 애틋하다. 그는 이 시절의 체험이 예술적 감성의 바탕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가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고등학교 시절이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부친의 영향이 있다. 당시 널리 이름을 알렸던 이강천씨는 부친 유탁씨와 가까운 친구사이였고 동향인 하반영씨와도 친분이 각별했다. 대학을 고려대 국문과로 택한 것도 영화와 관련있는 연극활동에 마음을 둔 선택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연극 연출로 소극장연극운동을 하고 있던 그는 방송사에 들어가면서 영화감독에의 꿈을 접어두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영화를 직접 만들어내진 않지만 영화제작을 지원하고 영화산업의 환경을 개척하는 중심에 서있다.

 

실제로 영화를 향한 열정과 진지한 애정이 있어 그의 추진력은 더욱 힘을 받는다.

 

“골이 깊은 영화계 내부적 갈등을 풀어내는 일이 사실 중요합니다. 이번 5개년계획도 공청회 등을 통해 영화계의 의견을 최대한 수렴하고 조절해 반영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동안의 영화정책이 관주도형으로 이루어졌다면 이번 계획은 현장 영화인들의 의견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실질적이고 진일보했다고 할 수 있지요.”

 

영화정책을 펴나가는 수장으로 더욱 분주해진 그가 이제 영화감독의 꿈을 버렸을까.

 

그는 “그 꿈은 아직 유효하다”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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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 kimej@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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