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속한 도시화로 유물·유적 등 물증 사라져 / 지난해 노송동 일대서 일부 성벽 흔적 발견 / 2018년까지 지하탐사 등 활발한 연구 계획
후백제의 왕도(王都) 전주. 잊힌 역사의 길목에 서 있던 후백제가 다시 숨쉰다. 전주의 역사적 뿌리를 ‘조선의 본향’만이 아닌 ‘후백제의 왕도’로 확장해 인식하고, 전라북도의 정체성을 ‘백제의 주변부’가 아닌 ‘후백제의 중심지’로 확립해야 한다는 인식 전환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후백제 견훤은 900년 전주로 도읍해 후백제의 공식적인 출발을 알렸다. 이후 936년 후백제가 멸망하기까지 전주는 36년 동안 후백제의 수도로 기능했다. 짧으면 짧고 길면 긴 시간 동안 후삼국기 견훤은 어엿한 일국의 군주로 후백제라는 국호와 정개(正開)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도읍을 건설하는 등 건국 군주에 걸맞은 건국이념과 통치 체제를 수립했다. 남중국(오월)과 북중국(후당), 일본 등과 다각적인 외교 활동을 펼쳤고, 930년 고창 전투에서 패전하기 전까지 후삼국 가운데 가장 강력한 국가로 자리했다. 후백제의 도성도 규모와 내용면에서 가장 뛰어난 공간을 구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1960~1970년대 이래 전주의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대부분의 후백제 도성 흔적은 파괴됐다. 도성의 위치에 대한 연구자들의 논의가 이어졌으나 결정적인 자료가 제시되지 않아 연구자에 따라 도성의 범위, 궁성의 위치, 산성과의 관계 등에 대한 논란만 지속돼 논의가 진척되지 못하는 양상을 보여 왔다.
△후백제 및 후백제 도성 연구의 필요성
전주는 후백제의 수도로 왕궁과 도성 체제를 갖춘 후삼국 최대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현재까지 동고산성 이외에 후백제의 유적으로 발굴 조사된 사례가 적어 후백제 것이라고 부를 만한 유물이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은 상황이다. 후백제의 중심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고 현장이나 기타 자료를 통한 물증의 제시가 여전히 미흡하자 후백제와 관련한 도자, 불교 조각, 산성 등에 대한 지역 연구도 함께 부진하게 되는 연쇄효과가 빚어지고 있다. 점차 후백제의 것으로 주장되는 유적이 많아지는 상황에서 후백제 문화의 핵심 공간인 도성의 실체를 밝히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해진 이유다.
‘조선의 발상지’ 전주와 ‘후백제의 수도’ 전주를 복원한다면 전통문화 도시라는 이름에 부합하는 위상이 확보될 것으로 보인다. 아직까지 전주가 후백제의 왕도였다는 점은 활용되지 못하고 있어 후백제 도성에 대한 관심과 체계적인 발굴 조사 등을 통해 후백제 왕도 전주의 면모를 확인하는 것이 요구되고 있다.
△후백제 도성의 연구 현황
후백제 도성의 실체를 밝히기 위한 연구자들의 논의는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그동안 후백제의 도성 위치와 관련해서는 반대산 일대의 고토성, 물왕멀 일대, 동고산성, 전주부성, 인봉리 일대 등 연구자들의 다양한 견해가 나왔다.
1940년 간행된 ‘전주부사’에서는 당시 전주역(현재 전주시청) 동쪽 길과 구동정리(전주고등학교 뒤 노송동) 연결 도로의 언덕에 후백제 견훤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토성지의 존재를 언급했다. 특히 물왕멀(현재 중노송동) 일대를 궁성지로 파악하고 이를 입증하는 증거로는 기와·자기편, 왕성건축의 초석으로 추정되는 1만여 개의 돌덩이 등을 제시했다.
고(故) 전영래 원광대 교수는 1980년에 실시된 동고산성 개괄 조사를 통해 ‘전주성’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연꽃무늬 수막새를 발견하고 1990년과 1992년 동고산성에 대한 발굴을 진행해 84.2m×4m의 대형 건물터를 찾았을 뿐만 아니라, 주위에 세워졌던 여러 건물터를 찾아냈다. 이를 통해 현재의 동고산성이 후백제의 왕궁터로 설정하고, 동고산성을 상성으로 내성과 중성, 외성 등을 갖는 반월형의 성으로 파악했다. 이 같은 인식은 동고산성 발굴을 통한 현장 확인이란 점에서 주목됐으며 이후 연구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장명수와 성정용은 전주부사의 입장을 유지하거나 재확인한 결과를 제시했다. 장명수는 전영래의 도성 체계를 거의 그대로 수용했으나 궁성을 외성의 동정리 일대로 파악했다. 또 성정용은 현지 조사를 통해 내성과 중성의 축조 사실을 부정하고, 고토성과 그 일대를 궁성으로 제시했다.
조법종도 앞선 연구자들이 제시한 공간적 범주에 도성과 궁성이 존재한다고 판단했고, 이경찬도 전영래의 도성 체계를 거의 그대로 인정했다.
김주성은 물왕멀 일대가 후백제 도성의 중심 공간이라고 봤다. 궁성을 전주천변의 평탄 지대 전주부성 일대로 설정하고 옛 전주역, 전주천, 동고산성의 범위 내로 도성을 파악했다.
이에 대해 곽장근은 전주부성 일대는 이미 신라의 공간으로 백제의 재건을 표방하고 나선 후백제가 도성을 두기에는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중노송동 인봉리와 문화촌 일대에 왕성을 두른 궁성 혹은 왕성으로 추정되는 흔적이 확인됐다고 밝혔으며, 현 전주정보영상진흥원 뒤쪽의 토축을 궁성의 서벽으로 제시했다.
지난해 국립전주박물관은 전주시 노송동 일대에서 후백제 도성 성벽의 흔적을 발견해 후백제 왕궁 연구의 전환점을 마련했다. 일제강점기에 간행된 ‘전주부사’와 1915·1919년 지적도, 1938년 전주시 도시계획도, 1948년부터 최근까지의 항공사진 등을 종합적으로 비교·분석해 후백제 도성 성벽을 확인했다. 이를 통해 후백제 도성의 형태와 구조, 성벽 축조 방식, 궁성의 위치, 도성의 규모와 방어 체계 등이 밝혀졌다.
△향후 과제 및 계획
그간 이뤄진 후백제 도성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고고학 자료를 통해 추가 보완해야 한다는 점에서 시론적 검토에 불과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후백제 왕궁 실체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주변 남고산성 등 산성 조사와 산지의 성벽 확인, 평지의 건물터와 성벽 확인 등의 추가 조사가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 국립전주박물관은 ‘후백제 역사·문화 복원을 위한 조사·연구’ 사업을 2014년부터 2023년까지 총 10년에 걸쳐 36억 원의 예산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국립전주박물관은 이번 사업으로 연구 역량 강화를 통한 지역 내 대표 문화학술기관의 위상을 강화하고, 후백제 왕도로의 전주 위상을 재고한다는 목표다.
우선 2014년부터 2015년까지 후백제 조사·연구 기반 구축에 나선다. 전주시, 군산대, 중국 소주박물관 등 국내·외 관련 기관과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기초 학술 자료집 발간, 학술 세미나 개최 등을 차례대로 진행하고 있다. 2014년부터 2016년까지는 후백제 대외관계 연구를 주제로 학술 심포지엄을 열고, 국외 유물 특별전인 ‘오월과 후백제’를 개최할 예정이다.
또 2014년부터 2018년까지 5차례에 걸친 지하 물리탐사와 전주정보영상진흥원 토축 시굴 조사, 도성 발굴 조사 등을 통해 후백제 도성에 대한 종합 연구를 실시한다. 이후 후백제 유적 종합 연구와 후백제 연구 성과 공유 등을 통해 후백제 왕도 전주의 위상을 다지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 유병하 국립전주박물관장 "전라북도 정체성 후백제 중심지로"
“후백제의 문화유산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요. 우리 주변에 다 있습니다. 후백제 유적이라는 심증은 갖고 있지만 단정 짓지 못할 뿐이죠. 후백제 도성이라는 중심 문화를 찾아야만 후백제 관련 문화유산도 제 이름을 가질 수 있습니다”
국립전주박물관 유병하 관장은 후백제 문화의 핵심 공간인 도성의 실체를 밝히는 과정이 선행돼야만 고고학적 연구를 통한 유물, 유적의 재정립이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실제 후백제 관련 유적은 완주의 구억리산성, 봉림사지를 비롯해 익산의 제석사지, 왕궁리석탑, 미륵사, 남원의 실상사, 진안의 도통리 가마 등 다양하다.
유 관장은 “후백제의 문화유산이 더 망가지고, 잊히기 전에 전주가 후백제의 왕도라는 사실을 인식해 ‘후백제 열풍’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급격한 도시화로 인해 후백제 도성 흔적이 대부분 파괴돼 고고학적으로 접근해 풀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국립전주박물관에서는 지하 물리탐사와 도성 발굴 조사 등을 통한 기반 조사를 실시하고, 시민들에게 도성 발굴 현장을 공개하는 시민 설명회를 갖는 등 후백제 역사를 전북의 자랑스러운 역사로 재정립할 방침이다.
또 내년에는 후백제연구회를 창립해 관련 정보를 공유하고, 협력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내년 10~12월에는 국립전주박물관과 중국 소주박물관이 공동 주최하는 특별전 ‘오월’을 개최해 오월 불교 미술품과 청자, 비각 자료 등 150점을 전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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