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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길을 찾다 - 성장동력 3대 어젠다

전북은 지난 20여년간 새만금을 제외한 대형 국책사업이 거의 없었다. 가뜩이나 어려운 살림에 많은 예산이 새만금에 집중되면서 상대적으로 문화, 관광, 농업, 탄소 등 많은 분야들이 소외됐다. 이는 지난해에도 마찬가지였다. 국가 예산 확보 신규사업 중 총사업비 1000억원 이상은 거의 없었다. 포스트 새만금으로 불리는 신성장 동력 사업을 발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이런 가운데 민선 6기를 맞은 전북도는 신성장 동력 사업으로 탄소, 농생명, 전통문화 등 3대 키워드를 제시했다. 전북은 탄소, 농생명, 전통문화 분야에서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분야다. 또 현 정부의 정책 방향과도 대체적으로 잘 들어맞고 있어 새로운 기대감을 갖게 한다.△탄소산업 앞으로 10년 중요= 탄소산업은 지난 2003년 전주 기계탄소기술원(현 한국탄소융합기술원)이 설립된 이후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그동안 수많은 기초연구가 이뤄져 고기능 탄소섬유를 양산하는 단계에 이르렀고 정부의 지원도 이끌어냈다.그렇지만 전북의 탄소산업은 이제 막 첫걸음을 뗐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이며, 판로 확대와 가격경쟁력을 확보해야 하는 등 수 많은 과제가 산적해 있다. 지난 10년도 중요했지만 앞으로 다가올 10년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전북지역 탄소산업은 지난 2009년부터 시작된 탄소밸리 구축사업 1단계가 마무리 되는 시점(2015년)을 맞아 새로운 전략이 필요한 상황이다.탄소밸리 구축사업 1단계에서는 모두 1991억원의 사업비가 투입됐다. 이 결과 한국탄소융합기술원, 전북테크노파크, 신기술연수센터, 한국생산기술연구원, 탄소융합부품소재 창업보육센터, 탄소기술교육센터, 나노집적센터 등 혁신기관들이 집적화됐다.또 탄소기업 33개사가 전북으로 입주했고, 특히 효성이 1조2000억원을 투자해 지난해 연간 2000톤의 고기능 탄소섬유를 양산할 수 있는 체계를 갖췄다.올해는 탄소밸리 구축사업 1단계가 마무리된다. 잠시 숨고르기를 할 틈도 없이 2단계 대형사업 발굴해야 할 시점이다. 현재 다른 지역에서도 탄소산업을 전략산업으로 내세우며 전북을 맹렬히 추격하고 있기 때문이다.실제 경북도는 최근 미래 신특화산업으로 탄소복합재 응용 부품산업을 집중 육성키로 했다. 구미 제5국가산업단지 구미하이테크밸리 내에 2016년부터 2020년까지 5년간 총 사업비 5000억원을 투입해 탄소 클러스터를 조성한다는 계획이다.그렇지만 전북은 아직 탄소산업과 관련된 대형사업 발굴을 확정하지 못했다. 지난해 11월 관련 용역을 발주해 오는 10월께나 최종 보고서가 나올 전망이다.용역은 탄소산업 4대 전략기지 조성과 관련된 사업 발굴에 제한을 두지 않고 탄소섬유를 활용한 중간재 등 다품종 수요창출을 위한 신규사업 발굴에 초점이 맞춰졌다. 탄소섬유를 활용한 버스 CNG탱크 시범사업 등 수요처 찾기에 방점을 찍은 모양새다. 여기에는 현실적인 계산이 깔렸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탄소산업의 안착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게 전북도의 설명이다.반면 전북도가 지난 2012년부터 구상한 초고강도 복합소재(T-1000급) 탄소섬유를 기반으로 하는 항공기용 탄소복합체 기술개발을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재 개발된 고강도 복합소재 탄소섬유(T-700급)의 판로 확대와는 별개로 전북도가 항공, 국방 등 특수 분야에 사용되는 초고강도 복합소재 개발을 통해 탄소산업을 선도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농생명 허브 프로젝트= 탄소와 함께 전북의 신성장 동력 산업으로 떠오르고 있는 농생명 산업은 구체적인 밑그림이 그려진 상태다.남은 과제는 농생명 관련 광역클러스터의 유기적인 연계와 이를 체계적으로 지원할 수 있도록 하는 기반 마련이다.농생명 허브 조성의 화룡정점은 전북연구개발특구 지정이다. 전북지역은 우수한 농생명 연구기반들을 바탕으로 창조형 산업생태계 구축을 가장 효과적으로 해낼 수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는 대덕, 광주, 대구, 부산 등 기존의 연구개발특구와는 분명 차별화 된 전략이며, 국가 성장거점 다변화와 지역 특화발전 차원에서도 전북연구개발특구 지정은 중요한 과제다.전북연구개발특구 지정을 위한 여건도 좋다. 수도권 이남에서 대전을 제외하면 가장 우수한 R&D 기반이 조성돼 있다. 전북 소재 정부 출연기관은 혁신도시 이전기관을 포함해 총 14개다. 또 농생명분야 연구기관은 대학 연구기관, 국가 및 정부출연 연구기관을 포함해 38개(국가연구기관 5개, 정부출연기관 9개, 지자체 연구기관 7개, 대학소재연구기관 17개)까지 늘어날 전망이다.이런 연구기반 만으로는 농생명 산업의 원활한 사업화를 이룰 수 없다. 네덜란드 푸드벨리 재단과 같이 연구기관, 대학, 농민 등을 연계해 주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필요하며, 이를 수행할 수 있는 게 바로 전북연구개발특구다.그러나 관건은 예산 확보다. 전북도는 농생명허브 프로젝트와 관련, 신규 사업을 발굴했지만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복지비 증가에 따라 재정 압박을 받고 있는 정부가 신규 사업에 난색을 표하고 있기 때문이다.△전통문화= 전북지역은 무형문화유산 전국 1위, 지정문화재 전국 2위, 전주한옥마을 등 수많은 유무형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전북도는 이를 바탕으로 도내 전통문화를 문화콘텐츠 제작하고 관광 자원화 할 계획이다.한지, 소리 등 전북의 전통문화자산과 IT기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융합해 사업화하고 이를 세계 시장에 판매한다는 전략을 짰다.또 전통문화를 기반으로 한 융복합 콘텐츠 제작을 통해 다양한 제품을 만들고, 관광 문화 지원기관의 협업을 통한 글로벌 마케팅도 강화할 방침이다.그렇지만 전통문화 분야에서도 대형사업을 발굴해야 하는 과제는 남았다. 현재 전북도가 추진하고 있는 한국소리 창조 클러스터 조성 사업은 아직 예비타당성 조사도 통과하지 못했다. 도는 2017년부터 2020년까지 모두 1500억원의 사업비를 확보,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인근에 국립한국소리 연구센터 설립, 한국소리산업 관련 기업 집적공간 등을 마련한다는 계획을 내놨다.전북지역 대표적인 전통문화 자원인 한식을 육성하는 방안 마련도 시급하다. 전북도는 한문화(K-Culture) 창조거점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추진하고 있는 K-푸드 콤플렉스 조성사업을 추진하고 있지만 난항을 겪고 있다.K-푸드 콤플렉스 조성사업은 2015년부터 2017년까지 전주 남부시장 일대에 국비 280억원지방비 90억원민자 20억원 등 모두 390억원을 투입, 한문화의 핵심 요소인 음식문화를 바탕으로 체험교육관광소비가 한 번에 이뤄지는 장소를 건립하는 사업이다.그러나 전통문화 자원이 고갈되면 이 모든 게 공염불에 그칠 수 있기 때문에, 취약한 도내 문화생태계를 살릴 수 있는 방안도 같이 제시돼야 한다는 게 도내 문화예술계의 의견이다.현재 전북지역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는 9명이다. 이들이 정부로부터 받는 지원은 매월 보유자 130만원, 전수교육조교 66만원, 전수장학생 26만 3000원이 전부다.전북도 지정 무형문화재의 현실도 별반 다르지 않다. 현재 도지정 무형문화재는 42개 종목 67명에 이른다. 보유단체는 12개다. 그러나 타 시도에 비해 전수활동비가 부족한 현실이다. 전수활동비 전국평균은 75만원이지만 전북도는 70만원을 지급하고 있다.

  • 기획
  • 김정엽
  • 2015.01.02 23:02

[새만금 내부개발 가속도] 올 핵심 기반시설 구축 본격화, 개발계획 골격 가시화

바닷물에 잠겨 있던 새만금 땅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지난 2006년 최종 새만금 방조제 물막이 공사가 끝난 이후 조금씩 바닥에서부터 쌓여오던 땅이 수면 위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지난해말 기준 드러난 부지 면적은 155㎢(4700만평). 새만금사업 지구 전체 면적 409㎢(1억2000만평) 가운데 계획용지 면적 291㎢(8800만평)의 53%에 달하는 규모다. 이는 서울시 전체 면적의 1/3에 해당되는 면적이다. 그리고 그 위에 지난 2009년부터 내부개발사업이 본격 진행되면서 눈에 보이지 않던 새만금의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올해는 새만금 내부 간선도로망의 동서 중심축인 새만금 동서2축 도로가 착공되는 것을 비롯해 새만금 신항만과 경협단지 특구 조성 등 새만금 핵심 기반시설 건설사업이 본격화될 전망이다. 올해 새만금사업 전체에 투입될 예산은 지난해 보다 400억원이 증액된 7445억원으로, 이 중 기반시설 구축에 1549억원, 용지 조성에 3042억원, 수질 개선에 2758억원, 투자유치에 96억원이 투입된다.● 기반시설은내부 첫 도로 동서2축 착공, 2017년 활용새만금 내부 기반시설은 크게 새만금 동서2축과 남북 2축도로, 신항만, 공항 등으로 나뉜다.이 가운데 새만금 내부중심을 동서로 관통하는 새만금 동서2축 도로(새만금 신항만김제 진봉)가 올 4월 착공된다. 새만금 내부개발사업의 첫 번째 도로로, 오는 2020년 완공 예정이다. 정부는 오는 2017년까지 필요 구간을 우선 개통할 계획으로, 2017년부터는 차량으로 새만금 내부까지 이동할 수 있게 돼 내부개발 공사가 속도를 내는 것은 물론 관광객 및 투자유치도 활성화될 것으로 전망된다.남북 2축 도로는 지난해 동서2축과 동시에 추진된다는 이유로 예산이 반영되지 않았으나, 올 공사가 발주될 예정이다.지난 2011년 착수된 새만금 신항만은 올해 건설비가 대폭 증액되면서 방파제 공사가 본격 진행되는 등 오는 2020년 4선석 우선 완공 계획이 차질이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신공항은 올해가 공항 건설여부를 결정짓는 분수령이 될 것으로 예상되며, 이에 전북도는 신공항을 올 하반기 발표될 제5차 공항개발 중장기종합계획(20162020년)에 포함시키기 위한 항공수요 조사 용역을 진행하고 있다.● 용지개발은농업산업관광용지 등 각종 공사 탄력△농업용지농업용지 조성을 위한 방수제 축조공사는 전체 11개 공구(총 68.2㎞)중 선도구간인 9개 공구(54.2㎞)가 올해 완공된다. 지난해말 기준 공정율은 80%이다. 나머지 2개 공구중 만경 6공구(5.4㎞)가 올해 발주된다. 방수제 공사가 막바지에 접어듦에 따라 올해부터는 농지조성을 위한 기반구축 사업이 본격 진행된다.농어촌공사는 2016년 말까지 방수제 공사, 2020년까지 농업용지 조성(85.7㎢7개공구)공사를 마무리한다는 계획이다.올해는 지난 2013년 착공된 농업용지 5공구(15.1㎢) 가운데 대규모 농업회사용지(7㎢)가 12월 준공될 예정으로, 이 용지에는 지난 2010년 투자협약을 체결한 3개 국내 대형 영농법인이 유리온실 등을 짓기 위한 시설공사가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4개 농업용지 공구에 대한 용지조성 및 저지대 매립공사가 올해 새롭게 진행될 예정이다.△산업용지새만금 4호 방조제 동측(군산 2국가산단 남측)에 조성되는 새만금 산업단지는 올해 공장 설립이 시작된다. 현재 전체 9개 공구(18.8㎢) 가운데 3개 공구(125공구)의 매립 및 기반시설 공사가 진행되면서 4.45㎢(23.8%)의 면적이 매립 완료됐다. 5공구는 지난해 매립공사가 시작됐다.지난해 매립 및 용지조성 공사가 마무리된 1공구에서는 OCI가 3월께 폴리실리콘 공장건립을 착공식을 가질 예정이다. 이어 매립이 완료된 2공구에서는 일본의 도레이사의 공장이 6월 준공을 앞두고 있으며, 솔베이는 6월께 타이어 소재를 만들기 위한 공장을 착공할 예정이다.△관광용지관광레저용지(36.8㎢)는 부안 새만금 초입의 복합도시용지에 조성되는 관광레저12지구(31.6㎢), 군산 신시~야미지구(1.9㎢), 고군산군도 지구(3.3㎢)로 구성된다. 올해는 새만금 방조제 명소화사업의 하나인 신시도 휴게시설 개발사업의 1단계 사업이 3월부터 진행된다. 오는 2016년까지 총 사업비 672억원이 투입될 이 사업에는 군산시 옥도면 신시도리 부지(5.6ha)에 전망대를 비롯해 숙박시설(118실), 복합휴게시설, 판매시설 등의 휴게타운이 조성될 예정이다.부안지역의 관광레저용지(1지구)는 게이트웨이 조성사업이 추진키로 결정됨에 따라 올해 실시계획승인 등의 후속 절차를 밟으며, 신시야미지구는 개발계획수립 등 본격적인 사업추진을 위한 준비작업이 진행된다.■ '논스톱 고군산군도' 연결도로 연내 개통올 연말부터는 자동차를 타거나 걸어서 고군산군도의 천혜의 비경을 감상할 수 있게 된다.지난 2008년부터 추진된 고군산군도 연결도로 공사가 올 연말이면 모두 끝나 연결도로가 개통될 예정이다.고군산군도 연결도로 건설사업은 총 사업비 2723억 원이 투입돼 새만금 방조제~신시도~무녀도~선유도~장자도로 이어지는 8.76km 구간을 도로 및 해상교량으로 연결하는 사업으로, 폭 15.5m 규모의 도로가 건설된다.총 3개 공구로 나뉘어 진행되는 공사 가운데 12공구는 올 연말 마무리될 예정이나, 3공구(무녀도장자도)는 시공사의 파산으로 공사가 지연돼 오는 2016년 말 이후에나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이 사업이 마무리되면 그간 배로 접근했던 선유도 등 천혜의 관광지를 차량으로도 접근이 가능해지면서 전북의 대표 관광지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여기에 지난해 7월 모습을 드러낸 국내 최초 1주탑 현수교인 단등교도 새로운 볼거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1주탑 방식은 2개의 주탑을 연결하는 기존 현수교 건설방식과 달리 1개의 주탑에서 지면으로 연결된 주케이블을 통해 상판을 지지하는 방식으로, 섬과 섬 사이가 좁아 두개의 주탑을 설치할 경우 선박의 통행에 지장을 주거나 해양자원을 훼손할 수도 있다는 점 등이 고려돼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시도됐다.이와 함께 지난해 새만금사업 지역으로 편입된 고군산군도(3.3㎢) 내부개발은 오는 2017년 실시계획승인 및 착공을 목표로 올해부터 본격적인 개발방안이 마련될 예정이다.

  • 기획
  • 김준호
  • 2015.01.02 23:02

[FTA 속 농촌 살아남기] "친환경 고품질 생산, 농가 소득보전에 활로 있다"

우리나라가 지난해 잇따라 타결한 자유무역협정(FTA)이 올해 발효됨에 따라 농축산업 분야의 피해가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특히 호주캐나다뉴질랜드와 체결한 FTA는 올해부터 당장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국내 유제품 수입의 30% 정도를 차지하는 뉴질랜드와의 FTA는 올해 상반기 중 정식 서명을 거쳐 국회 비준동의를 받으면 발효될 예정이다. 이들 국가는 쇠고기와 돼지고기 등 육류 수출강국이어서 특히 국내 축산업계의 타격이 우려되고 있다.세계 각국과의 FTA는 산업 분야에는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이지만 농식품 수입개방의 전방위 확대로 농업 분야에는 큰 타격이 우려되고 있다.특히 농도(農道) 전북은 농업에 대한 비중이 타 지역보다 높아 더 큰 위기감에 직면해 있다. FTA 속에서 전북지역의 농촌, 전북 농업이 살아남기 위해 나아갈 길에 대해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봤다.△강승구 전북도 농축수산식품국장 "직접지불 확대농생명수출농 육성"강승구 국장은 FTA시대 전북 농업의 활로를 정부의 직접지불 확대, 농생명 산업 육성, 수출농업 육성 등으로 꼽았다.강 국장은 FTA에 따른 농산물 수입물량 확대로 발생하는 농가소득 감소분을 정부가 직접지불 확대로 보전해 우리 농업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그는 농업에서 적정한 농가소득 유지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며 농업경쟁력 강화 사업과 함께 정부가 직접지불을 확대해 농가소득을 보전하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이어 전북도는 농가소득 보전 정책의 일환으로 자치단체가 주요 농산물의 최저가격을 보장해주는 제도를 도입할수 있는지 여부를 전국 광역자치단체중 처음으로 농민단체, 전문가들과 연구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수출농업 육성의 중요성도 강조했다.그는 한중 FTA로 중국의 수입관세가 낮아지고 동식물검역 기준도 완화되는 등 우리의 수출여건도 좋아질 것이라며 일본에 파프리카와 장미를 수출하고 있듯 중국에도 대량으로 수출할 수 있는 신선 농산물과 가공식품을 육성해 대중국 농식품 수출을 확대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정안성 전북대 농업경제학과 교수 "무역이득 공유하고 품질경쟁력 모색"정안성 교수는 한중, 한베트남 FTA가 전북 농업에 미칠 영향을 특히 우려하며 정부의 무역이득공유제 추진, 전북 농업의 품질경쟁력 향상 대책, 한국산 소스(양념) 산업 육성, 마을공동체 회복 필요성을 강조했다.정 교수는 FTA로 인해 혜택을 보는 산업분야가 피해를 보는 농업 등의 분야에 지원하는 무역이득공유제의 법제화가 반드시 필요하다며 지원자금 마련은 무역혜택 분야로 부터 조세의 강화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그는 또 농축산물 생산비가 우리의 20~30% 수준에 불과한 중국과는 가격경쟁력에서 뒤지는 만큼 힘들더라도 안전한 친환경 고품질 농산물을 생산해 품질경쟁력으로 승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정 교수는 후방 파급효과가 큰 소스 식재료 개발로 농축산물 생산을 유발하는 전략도 제안했다.그는 태국의 한 음식점에는 벽면 전체가 수십 종의 파스타 메뉴로 가득차 있는데 이는 소스만 다르게 요리한 음식이라며 익산국가식품클러스터 조성을 계기로 현재 불고기 양념장 정도에 그치고 있는 우리나라 소스 산업을 적극 육성해야 한다고 말했다.한류 열풍 속에 우리나라의 치맥이 중국에 까지 유행한 예가 있는 만큼 소스 산업으로 해외시장 개척에 나서야 하며, 소스 산업이 발전하면 고추마늘양파 등 양념채소는 물론 유채와 콩, 유지류 등의 생산유발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이민수 전북발전연구원 농업농촌연구부 연구위원 "농촌관광원예산업으로 적극 대처"이민수 위원은 친환경 축산 전환, 농촌관광산업 육성, 원예산업의 경쟁력 강화 필요성을 강조했다.이 위원은 미국은 물론 EU와 캐나다호주뉴질랜드 등 축산 강국과의 FTA로 전북농업의 40%를 차지하는 축산업이 큰 피해를 입을 것이라며 친환경 축산으로의 전환이 시급한 과제라고 말했다.그는 우리나라 축산업은 가격 경쟁력이 뒤지는데다 밀식사육은 물론 악취 등의 환경문제도 심각하다며 동물복지와 품질관리를 함께 생각하는 친환경 축산이 해결방안이라고 밝혔다.이어 과거 구제역으로 농촌이 초토화된 영국은 농림부를 환경농촌부로 개편해 친환경 축산에 주력하면서 농촌관광도 활성화시키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거뒀다며 농업부문의 소득감소를 농촌관광에서 회복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경종과 축산, 관광을 융합해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도록 고품질 농업과 관광을 연계 발전시키는 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유인봉 전북농협 경제사업부본부장 "규모화전문화연합화로 위기 넘자"유인봉 부본부장은 전북농업의 규모화전문화연합화를 FTA 극복 방안으로 꼽았다. 특히 자본력이 뒤지는 농촌의 현실을 고려해 농업과 기업이 함께 손잡고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유 부본부장은 우리나라는 땅이 좁은 만큼 고부가가치 농업이 필수라며 생산 농가를 보호하면서 기업자본이 선의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고 말했다.자본이 농업인들의 터전을 잠식하지 않고 상생할 수 있는 융복합 농업을 통해 고부가가치 농업을 창출해야 한다는 것이다.그는 농업 경쟁력 향상을 위해서는 규모화단지화기계화가 필요한데 대부분의 농업인들은 자신의 농지에 대한 애착이 커 농지의 유동성도 현실적 제약이 많다며 기업자본이 기존 농업구조를 흔들지 않는 범위에서 농업의 고부가가치화에 참여할 수 있는 정책적 방안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우리나라 FTA 추진 현황△FTA 발효= 지난 2004년 4월 칠레와의 FTA 발효를 시작으로 싱가포르(2006년 3월), EU에 참가하지 않은 스위스노르웨이아이슬란드리히텐슈타인 등 4개국으로 구성된 유럽자유무역연합(EFTA, 2006년 9월), ASEAN(2007년 6월, 상품), 인도(2010년 1월), EU(2011년 7월), 페루(2011년 8월), 미국(2012년 3월), 터키(2013년 5월), 호주(2014년 12월12일), 캐나다(2015년 1월1일) 등 모두 11건(49개국)의 FTA가 발효됐거나 발효될 예정이다.△FTA 협상 타결= 콜롬비아(2014년 4월 비준), 터키(2014년 9월 가서명), 중국(2014년 11월10일 타결 선언), 뉴질랜드(2014년 11월16일 타결 선언), 베트남(2014년 12월10일 타결 선언) 등 5개국과는 FTA 협상이 타결돼 후속 절차를 진행중이다.△FTA 협상 진행= 인도네시아와 한중일,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10개국과 한중일, 호주인도뉴질랜드 등 16개국의 역내 무역자유화를 위한 협정인 RCEP 등 12개국과 3건의 FTA 협상이 진행되고 있다.△FTA 협상 재개 여건 조성= 일본과는 2003년 12월 협상을 시작해 2004년 11월까지 6차 협상이 진행된 뒤 중단됐으며, 2008년부터 2012년까지 협상 재개 환경 조성을 위해 총 9차례 협의가 열렸지만 진전이 없는 상태다. 멕시코와는 2007년 12월 협상을 시작했지만 2008년 6월 제2차 협상 후 중단됐으며, GCC(사우디쿠웨이트아랍에미레이트카타르오만바레인) 6개국과는 2008년 7월 협상을 개시해 2009년 7월 제3차 협상 후 중단됐다.△FTA 협상 준비공동 연구= MERCOSUR(브라질아르헨티나우루과이파라과이) 4개국과는 2005년 5월~2006년 12월 정부간 공동연구를 완료해 2007년 10월 연구보고서를 채택하는 등 협상준비 단계이며, 이스라엘과는 2009년 8월 민간공동연구를 시작해 2010년 8월 완료됐다. 파나마코스타리카과테말라온두라스엘살바도르 등 중미 5개국과는 2010년 10월 공동연구를 시작해 2011년 4월 공동연구 보고서가 완료됐으며, 말레이시아와는 2011년 5월 한말레이시아 FTA 타당성연구를 시작해 2012년 12월 완료됐다.

  • 기획
  • 강인석
  • 2015.01.02 23:02

['전주 한옥마을'의 변화와 과제]'韓 전주' 정체성 찾아 관광객 1000만 시대 연다

삶의 질을 강조하는 ‘웰빙’과 치유를 의미하는 ‘힐링’이 우리 사회 키워드로 떠오르면서 한옥마을이 인기다. 전국 각 자치단체들도 잇따라 한옥마을 조성에 뛰어들고 있다. 한옥마을의 대명사는 단연 전주다. 전주 한옥마을은 사시사철 한국을 대표하는 관광명소가 됐다. 또 한국의 전통문화 원형이 담겨있다는 점을 인정받아 지난 2010년 국제슬로시티연맹으로부터 ‘슬로시티(Slow City)’로 지정되기도 했다.그러나 위기론도 나온다. 주차장과 숙박시설 등 급증하는 관광객을 수용할 수 있는 인프라가 부족하고, 지나친 상업화와 콘텐츠 부족으로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지적이다.전주시는 새해 이같은 위기를 극복, 향후 관광객 1000만 시대를 열기 위한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급증하는 관광객전주시 풍남동·교동 일대 29만8260㎡에 자리잡은 한옥마을은 1930년대부터 형성돼 현재 774동의 건축물(한옥 603동)과 함께 경기전·오목대·향교 등 문화재가 밀집돼 있다. 한옥마을을 찾은 국내외 관광객은 지난 2002년 약 30만명에서 2008년 131만명, 2010년 350만명에 이어 2013년에는 508만명으로 크게 늘었다. 또 2014년에는 600만명에 근접한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주말이면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다. 전주지역 관광객 중 한옥마을 방문객이 약 70%를 차지할 정도로 집중도가 높다. 전통 생활영역이라는 공간적 이점과 더불어 전주의 대표적인 문화자원이 집중돼 관광객 과밀화가 가중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또 주변의 관광 거점 부족으로 인해 밀려드는 관광객 압력 해소에도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상황이다. △ 지속가능한 성장 ‘위기론’전주 한옥마을이 한국을 대표하는 관광명소로 부상하면서 지속가능한 성장에 위기론도 나온다.우선 지나친 상업화로 인해 정체성을 잃고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상업시설이 우후죽순 증가하고 원주민 유출로 상주 인구가 감소하면서 전통 생활영역으로서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있다. 전주시에 따르면 한옥마을 인구는 2008년 2339명에서 2014년 1534명으로 감소했다. 반면 상업시설은 같은 기간 139곳에서 366곳으로 대폭 늘었다. 여기에 밀려드는 관광객을 수용할 수 있는 주차장과 숙박시설 등 인프라도 턱없이 부족, 한옥마을 여행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전통문화 콘텐츠도 부족하다. 한옥마을 내 전통문화 관련 공공 문화시설과 민간시설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는 있지만 대표적인 콘텐츠를 찾기 어렵고 관광 트렌드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체험형 프로그램도 부족하다. 특히 2015년 11월 국제슬로시티 재지정 평가를 앞두고 한옥마을의 정체성을 살려 지속가능한 공간으로 재정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 수용태세 개선 종합계획 마련한옥마을 위기론이 부상하면서 전주시가 최근 주민 정주여건과 관광객 만족도를 향상시키기 위한 ‘한옥마을 수용태세 개선 종합계획’을 내놓았다. 교통·숙박·위생·청소·건축 등 각 분야에서 문제점이 발생함에 따라 체계적인 관리 방안을 수립한 것이다.전주 한옥마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종합계획은 크게 △한옥마을 관리·운영체계 강화 △쾌적하고 안전한 환경 조성 △사람 중심의 교통환경 조성 △멋스러운 한옥관리 △전통문화 관광콘텐츠 확충 △지속가능한 슬로시티 조성 등 6개 분야에서 추진된다. 우선 한옥마을의 정체성부터 확립한다는 계획이다. 지나친 상업화로 주거공간이 상업공간으로 변하고 있다는 지적에 따라 행정지원 시스템을 구축하고 다양한 생활지원 프로그램을 운영, 주민 정주여건을 개선할 방침이다. 주민 삶의 질 향상을 위해 한옥마을 내 대규모 축제와 행사를 제한하고, 상징적 의미를 갖는 ‘한옥마을 촌장제’도 운영한다. ‘지구단위계획 운영 강화’대책도 내놓았다. 지구단위계획상 허용되지 않는 상가 입점을 제지하고 임의로 업종을 변경한 업소에 대해서는 행정지도와 단속을 강화하겠다는 계획이다. 쾌적한 환경 조성을 위해 쓰레기 수거시간 연장과 공중화장실 2개소 신축 및 24시간 개방화장실 확대, 금연구역 확대, 불법 노점행위 단속 강화 등의 대책을 마련했다.이와 함께 교통환경 개선을 위해 치명자산 성지 주차장을 비롯, 6곳에 총 5050면의 주차장을 추가로 조성하고, 전주역과 터미널을 경유하는 한옥마을행 전용 시내버스 노선을 신설할 계획이다. 조봉업 부시장은 “한옥마을 종합계획은 전주 관광산업의 기틀을 마련해 1000만 관광객 유치와 5000명 관광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한 과정”이라며 “지속가능한 명품 한옥마을 조성을 위해 다양한 의견을 반영, 세부 추진계획을 마련해 시행하겠다”고 말했다. △ 외연 확대, 관광객 분산전주시는 포화상태인 한옥마을 관광객을 옛 도심과 덕진공원을 중심으로 하는 북부권으로 확산시켜 지역경제 활성화를 이끌겠다는 청사진을 밝혔다. 이같은 구상과 맞물려 2014년 10월 말 개장한 ‘남부시장 한옥마을 야시장’은 일단 성공적으로 자리잡았다. 전주시는 또 덕진공원을 세계적인 도심 생태공원으로 조성하기 위해 오는 2019년까지 호수 수질개선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최근에는 공원 둘레길 정비사업을 마무리, 덕진공원 명소화 사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이와 함께 시는 한옥마을의 고즈넉한 정취를 인근 풍남문까지 이어가기로 했다. 새해부터 풍남문 광장에서의 대규모 축제와 행사 개최를 원칙적으로 제한한다는 방침이다. △주차난 해소 교통대책 추진전주시는 한옥마을에 대한 만족도 저하의 주요 원인이 주차장 부족에 따른 교통 혼잡과 보행 불편에 있다고 판단, ‘사람 중심의 교통환경 조성’계획을 마련했다. 시는 우선 주차난을 해소하기 위해 6곳에 총 5050면의 주차장을 확충하기로 했다. 먼저 치명자산 성지에 1000면 규모의 주차장을 조성하고 월드컵경기장 부설 주차장 800면을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이어 새해부터는 한옥마을 인근 대성동과 군경묘지 부근 등에 주차장을 새로 조성, 3250면을 추가로 확보할 예정이다.또 기존 한옥마을 내 공영주차장의 요금을 인상, 치명자산 성지 주차장으로 차량을 유도하고 기린로 및 전주천 서로에 유료 노상주차장을 운영할 방침이다. 한옥마을 차량 통제구간도 확대된다. 시는 주말 및 휴일 ‘차 없는 거리’ 운영을 은행로·태조로에 이어 한옥마을 전 구간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한옥마을 내 15곳에 차량 통제시설도 설치된다.한옥마을 주차난에 따른 불편을 시내버스와 셔틀버스 등 대중교통으로 해소한다는 전략도 마련했다. 우선 동물원에서 전주역과 버스터미널·시청 등을 경유하는 한옥마을행 전용 시내버스 노선을 개설, 새해 5월부터 운행한다. 관광객 수요에 맞춘 신규 노선으로 한옥마을의 특성에 맞는 차량을 별도로 제작, 명품 버스를 운행하겠다는 계획이다.이와 함께 새해 3월부터 치명자산 성지 주차장과 한옥마을을 오가는 25인승 규모의 셔틀버스를 본격 운행한다는 계획도 교통대책에 포함됐다.

  • 기획
  • 김종표
  • 2015.01.02 23:02

진실로 스승을 삼다…전북이 먼저 행동하자

● 을미년 새 아침에-김병기 전북대 교수〈교수신문〉은 수 년 전부터 매년 그 해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한 마디로 요약, 표현할 수 있는 사자성어를 가려 뽑아 발표하곤 한다. 지난해에 뽑은 사자성어는 지록위마(指鹿爲馬)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한다는 뜻이다. 지록위마라는 말이 생겨난 내력이 떠올라 가슴이 섬뜩함을 느꼈다.폭군의 대명사인 진시황이 죽자 간신 조고는 거짓 조서를 꾸며 총명한 태자 부소를 죽이고 어리고 우둔한 왕자 호해를 2세 황제로 삼았다. 어린 호해라야 제 맘대로 다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고는 어리석은 호해를 교묘히 조종하여 승상 이사를 비롯한 여러 현명한 신하들을 다 죽이고 스스로 승상이 되어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조고는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을 가려낼 요량으로 어느 날 호해에게 사슴을 바치면서 말(馬)을 바치오니 받아 주시옵소서.라고 했다. 이에, 호해가 말했다. 승상은 농담도 잘 하시오. 사슴을 말이라고 하다니(指鹿爲馬). 그대들 눈에도 말로 보이오? 이때, 호해는 좌우의 신하들을 유심히 살펴 말이 아니라고 말하는 신하를 기억해 두었다가 죄를 씌워 죽여 버렸다. 그 후 궁중에는 조고의 말에 반대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게 되었고 결국 진나라는 망했으며 조고는 부소의 아들 자영에게 주살 당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지록위마라는 말이 2014년의 대한민국을 대변하는 말이라니 어찌 섬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2015년 새해가 밝았다. 2014년의 지록위마적 상황을 청산하고 새로운 희망을 설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진실을 회복해야 한다. 진실을 스승으로 삼아 진실을 말하고 진실을 행하는 세상이 되게 해야 한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우기고, 또 그렇게 우기는 사람들을 어쩔 수없이 추종하는 세상은 파국으로 치닫는 세상이다. 그런 파국을 타개할 수 있는 길은 이진위사(以眞爲師), 즉 진실로써 스승을 삼는 길밖에 없다. 대한민국 내에서도 인심이 좋고 정의감이 강한 고을로 유명한 전북. 우리 전북인이 먼저 나서 진실을 스승으로 삼는 생활을 한다면 세상은 차츰 밝고 맑아질 것이다. 그리하여,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하는 억지는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게 될 것이다.● 을미년, 양에 대한 모든 것하필이면 그날따라 몹시도 추웠다.주중인데다 한파까지 겹쳐, 지난 12월 19일 찾은 전주동물원에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양의 복슬복슬한 털이 그렇게 부러운 적이 없었다.전주동물원의 양은 모두 7마리로, 가장 크고 위엄 넘치는 8살 할아버지 양부터 3살 어린 양까지 저들끼리 모여서는 메에 메에 하고 있었다.그 중 한 마리가 혹여 간식이라도 있는지 잠깐 다가왔다가, 기자의 손이 비어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무리 가운데로 돌아가 버렸다.△양과 염소이상하게도 양 무리 사이에 털이 없는 것이 두 마리 끼어 있었다. 2013년에 태어난 염소였다.전주동물원 사육사 정완순 씨(48)는 자꾸 울타리 사이를 빠져나와서 저기서 논다고 말했다. 사육사들이 염소들이 있는 곳에 데려다 놓아도 금세 빠져나와서 양 무리에 낀단다.양은 솟과 양속에 속하는 동물이다. 전주동물원에는 양속 동물로는 면양과 함께 무플론, 바바리양, 염소 등 4종이 있다.우리가 흔히 양이라고 부르는, 털이 복슬복슬한 동물은 가축화된 양인 면양이다.면양은 지금으로부터 1만여년 전에 지중해 및 서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먼저 길들여진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시대에 금나라에서 처음 들여와 키웠다는 기록이 있다.수명은 10~15년이며, 대체로 몸길이 약 1m까지 자란다. 이 때의 몸무게는 약 100㎏ 내외가 된다.지금이야 양과 염소를 철저하게 구분하지만, 염소를 가리켜 양이라 부르던 역사가 꽤 길다.흔히 띠라고 일컫는 것은 중국 상나라 때에 해를 세기 위해 만들어진 천간과 지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90년대에 어린이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꾸러기 수비대라는 애니메이션이 바로 이 간지를 모티브로 했다.그런데 이와 같은 역법이 등장할 당시에는 아직 동아시아에는 면양이 없었다. 당시 양(羊)이라고 하면 염소를 가리키는 것이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오랫동안 그렇게 불러왔다.심지어 우리나라에서는 면양이 일제 강점기는 돼서야 가축으로서 대대적으로 길러지기 시작했고 그 전까지는 면양을 보기 힘들었으니, 양이라는 표현이 면양만을 가리키는 현상은 그 역사가 짧은 것이다.간혹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양띠 대신 염소띠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적어도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어린 염소 두 마리가 양 무리 사이에서 노는 것이 우연은 아닌 셈이다.△순하고 사람 잘 따르는 가축흔히 온순한 사람을 가리켜 양 같은 성격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양띠 사람의 성격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온순함이다.양 우리를 맡고 있는 정 씨는 이 같은 속설이 사실이냐는 질문에 사실이다면서 양은 순하고 사람을 잘 따르는 동물이라고 말했다.개 다음으로 가축화됐다고 할 만큼 가축으로서의 역사가 긴 동물이니 당연한 이치다.다만 정 씨는 번식기에는 돌출행동을 하기도 한다면서 서열싸움도 심한 편이라고 귀띔했다. 특히 스트레스를 받을 때, 짜증을 내며 울타리를 들이받곤 한다고. 과연, 군데군데 휘어 있는 울타리 봉이 작은 양을 화나게 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각인시켰다.복슬복슬한 털은 주기적으로 깎아줘야 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정 씨는 이를 부인했다.면양도 자연적으로 털갈이를 하기 때문에, 굳이 주기적으로 깎아줘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전주동물원에서는 다만 초여름에 지나치게 더워하는 개체는 털을 깎아준단다.△과자는 주지 마세요초식동물의 대명사답게 양은 풀만 먹는다. 뉴질랜드 현지에서는 겨울이 아닌 이상 푸른 풀을 그대로 먹이지만, 전주동물원에서는 그럴 여건이 되지 않아 건초를 먹인다.간식도 종종 먹는다. 양은 관람객이 과일이나 과자를 가지고 유인하면 100이면 100, 울타리에 달라붙은 채 입을 내밀곤 한다.하지만 정 씨는 바로 이 때문에 양들이 시름시름 앓곤 한다고 말했다.관람객들이 주는 걸 받아먹고 배탈이 나는 경우도 있고, 설사를 하거나 쓰러지는 경우도 있어요. 그걸 월요병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간식이 적은 양이면 큰 문제는 없지만 주말에 관람객이 몰리면 그렇지가 않으니까.관람객들이 양, 염소 등의 동물에게 뻥튀기를 먹이는 경우가 많은데, 이 같은 간식들을 먹다간 당뇨병에 걸릴 수도 있다는 것이 정 씨의 설명이다.동물마다 정해진 식단이 있는데, 간식 때문에 건강관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멸종위기에 놓인 희귀한 동물들은 이 같은 문제 때문에 반입에 제재를 받는 경우도 생긴다고.그래서 전주동물원은 조만간 관람객들이 먹이를 직접 주는 것을 금지할 계획이라고 정 씨는 말했다.△겁 많지만 간혹 돌출행동도양은 겁이 많은 편이다. 처음에 인류가 양을 가축화할 수 있었던 것도, 양이 개를 매우 무서워해서 쉽게 몰 수 있었기 때문이다.정 씨는 동물원에 있는 양들도 사육사가 빈손으로 다가오면 겁을 먹는다고 말했다. 먹이를 손에 들고 있어야 안심한다는 것.이날도 양 무리는 사육사를 피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카메라를 들이대면 또 카메라의 셔터 소리를 겁내 도망치곤 해서 그 얼굴을 가까이서 보기가 쉽지 않았다.겁이 많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소심하게 가만히만 있는 동물은 또 아니다.전주동물원에서는 종종 양이나 염소가 우리 바깥에 나와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울타리 봉 사이로 비집고 나오는 경우다. 염소는 울타리를 뛰어넘어 나오는 경우도 있다. 이 때문에 양 우리에는 이 같은 내용을 안내하는 팻말이 붙어있다.가끔 이처럼 돌출행동을 하거나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을 즐기는 습성 때문에 양띠 사람을 부정적으로 이를 때 경망스럽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하지만 애초에 야생의 양이 고원지대에 주로 서식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것이야말로 본능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글 사진=권혁일 기자● 양띠 사람들, 새해에 바란다- 1967년생 박병관씨 "희망의 빛줄기소망의 씨앗 주어지길"양의 해 중에서는 1979년이 기억에 남네요.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6학년 때로 기억합니다. 동네 사람들이 TV가 있던 우리 집에 와서 삼삼오오 자리를 잡더니 울었고, 우리 형제자매도 영문도 모르고 덩달아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거죠. 이후 시간이 지나 적지 않은 사실들을 접했고, 지금은 만감이 교차합니다.을미년은 청(靑)양띠라고 합니다. 새해에는 온순하고도 진취적인 청양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의 빛줄기와 소망의 씨앗이 주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우리 집 큰 아이와 작은 아이가 고등학생과 중학생이 되는데, 학업에 따른 스트레스를 멀리하고, 주변의 소외되고 상대적으로 약자인 사람들 편에 서서 인생의 소중한 가치를 차곡차곡 실천해 갔으면 하는 작은 소망을 가져봅니다.- 1979년생 최효정 씨 "좋은 책으로 아이들과 친해지고 싶어"양의 해는 항상 양처럼 순하다고 들었어요. 제 생각에도 조금 그런 기질이 있는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과 두루두루 잘 어울리는 건 장점이지만, 앞장서고 나서는 성격은 못 된다는 건 단점인 것 같아요.새해에는 뜻을 같이하는 분들과 해보려는 일이 있습니다. 유아부터 초등학생까지, 아이들이 책과 가깝게 지낼 수 있도록, 좋은 인문학 책들을 함께 볼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인데요.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책과 친해질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새해에는 바라는 일들이 잘 풀리면 좋겠습니다.- 1991년생 이정화 씨 "대학원 진학, 임상심리사 되는 게 꿈"태어난 해를 제외하고 겪어본 양의 해라면 2003년 밖에 없는데 굉장히 신나게 놀았던 기억뿐이네요. 초등학교 6학년 때였고 반장이었는데 반장이 제일 신나게 논다고 면박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생각해보면 그 때가 가장 행복했던 것 같아요.아무래도 이 또래 사람들 소망은 취업이겠죠? 취업한 사람이 주변에 많지 않은데, 저는 임상심리사가 되는 게 꿈이라서 대학원에 진학할 예정입니다. 어렸을 적에는 이 무렵에는 멋있는 어른이 돼 있을 거라고 상상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아직 갈 길이 한참 멉니다. 하지만 동시에 갈 길이 남아있으니 오히려 그래서 희망이 있는 것 아닌가, 아직 젊으니까, 이런 생각도 해요.- 2003년생 유다영 양 "책도 많이 읽고 가족과 여행 가고 싶어"양띠는 순한 것 같은데, 하고 싶은 게 생기면 열정적으로 하는 그런 면도 있는 것 같아요.새해에는 세계에 관한 책을 많이 읽고 싶어요. 또 다른 나라에 직접 가보고 싶어요. 뉴질랜드에 연수를 다녀온 적이 있는데, 직접 가보니까 새롭기도 하고 좋았어요. 다음에 가보고 싶은 곳은 캐나다인데, 유명한 것도 보고, 음식도 먹어보고, 또 사람들과 만나서 이야기도 해보고 싶어요. 또 새해에는 가족과 여행을 많이 가보고 싶어요. 바다 아니면 섬 같은 곳으로요. 배를 타보고 싶기도 하고, 텐트 치고 캠프를 해보고도 싶어요.

  • 기획
  • 전북일보
  • 2015.01.02 23:02

[탄생 100년, 미당 서정주] 전북이 낳은 큰 시인…'친일'-'시성' 경계에 다시 서다

작품만큼 삶이 논란이 되는 시인 미당(未堂) 서정주(1915~2000). 을미년인 올해는 그의 탄생 100년이 되는 해다. 전북이 낳은 큰 시인이지만 그를 기리는 움직임은 조심스럽다. 한국의 토속성을 언어예술로 녹여낸 미학적 성과와 함께 그를 따라다는 것은 일제와 독재에 부응했다는 꼬리표다. 역사의식의 부재는 순수시를 추구한 그의 성향과 맞닿아 있다는 해석이다. 그가 근현대 시사에서 보여준 문학적 업적과 영욕의 삶은 별개로 평가돼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이런 논란의 지속이 그를 바로 평가하고 조명하는 계기로 작용하는 만큼 더욱 필요하다는 지적도 잇따른다. 이에 그를 다시 조망한다.△문학관 발길 꾸준히 이어져지난달 27일 오후에 찾은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의 미당시문학관에는 방문객 약 20명이 미당의 생애와 작품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의 유품과 친필 원고 등을 비롯해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와 태평양전쟁유족회 고창지부가 2년 8개월간의 요청 끝에 얻어낸 결과로 지난 2004년부터는 친일친독재 작품 10여점도 같이 전시하고 있었다.이곳은 폐교된 선운분교 부지를 활용했다. 지난해까지 3억 원을 추가로 들여 시설을 보강하며 관람객을 맞고 있었다. 2004년부터 문학관 주변에 국화꽃밭이 조성되고, 이를 소재로 한 벽화가 인근 마을에 그려졌다. 일본 왕실 문장인 국화에 대한 논란은 뒤로하고 미당을 상징하는 꽃으로 매년 가을이면 만발해 관광객을 부른다.문학관은 지난 1997년 7월 미당시문학관 건립추진위원회가 창립된 뒤 2001년 11월 개관했다. 이후 국화꽃이 필 무렵 질마재문화축제를 열고 있다. 질마재문화축제는 동국대 한국문학연구소와 미당시문학관이 공동주최해 중앙일보 등의 후원으로 미당문학제, 백일장 등과 연계해 실시된다.문학관 옆에는 43억 원의 예산으로 지어진 질마재권역 문화센터가 지난해 완공해 자리를 잡고 있다. 앞으로의 활용 방안이 숙제인 곳이다.이날 미당시문학관을 지켰던 서동진 문화해설사(62)는 문인과 문학에 관심있는 단체 방문객을 중심으로 하루 150여명 가량 찾아 온다고 말했다.문학관과 인접한 개울을 건너면 미당의 생가가 나온다. 미당교와 생가 옆 모정 등이 지어져 있다. 모정 뒤에는 미당의 동생인 서정태 옹(93)이 귀향해 미당을 찾는 사람들과 교우하고 있다.미당에 대한 기념은 고향보다는 그가 주로 활동했던 서울에서 이뤄지고 있다. 중앙일보는 지난 2001년부터 1년간 나온 시 가운데 1편을 선정해 미당문학상을 시상한다. 미당이 1970년부터 2000년 타계할 때까지 봉산산방 (蓬蒜山房)이라 부르며 살던 서울 관악구 남현동 예술인마을의 자택은 서정주의 집이라는 기념관이 됐다.고창군청은 미당의 탄생 100년과 관련 별다른 계획이 없다. 문학관의 연간 운영 예산도 밝히기를 꺼릴 정도로 거론 자체가 버겁다는 반응이었다.고창군 관계자는 민족 단체의 반대 민원이 심해 미당을 이야기하는 게 매우 조심스럽다며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그는 이어 질마재문화축제 외에 별도의 행사는 없다고 밝혔다.△설화적 시의 근원은 고향미당은 1915년 5월18일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질마재에서 태어났다. 일본식 이름은 다쓰시로 시즈오(達城靜雄)다. 60여년간 15권의 시집과 1000여편의 시를 남겼다. 1941년 첫 시집 <화사집>에서부터 <귀촉도>(1946), <신라초>(1960), <동천>(1968), <질마재 신화>(1975) 이후 마지막 시집 <80소년 떠돌이의 시>(1997)까지 서정시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그는 고창에서 태어났지만 부안 줄포보통학교를 다녔다. 이후 인촌 김성수의 집안에서 세운 중앙고보 입학 시험에 낙방했지만 당시 인촌의 양부인 김기중의 농토를 관리하던 아버지의 정성으로 보결 입학했다고 전해진다.몸이 약해 병치레가 많았고 학교 성적이 좋지 않았던 미당은 1930년 중앙고보에서 광주학생운동 주모자로 퇴학당하고 이어 고창고보에서도 퇴학 처리가 된다. 이후 방황하며 서울 마포에서 넝마주이를 하다 동국대 전신인 중앙불교전문강원 교장 박한영 대종사를 만나 사제의 인연을 맺는다. 이후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으로 약관의 나이에 당선된다.1940년 만주의 양곡주식회사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귀국 뒤 1943~4년 시, 소설, 수필, 르포 등 친일작품을 발표하면서 오명을 새긴다.625 전쟁 중인 1950년 전주고에서 잠시 교편을 잡다 이듬해 조선대 부교수로 옮겼고 이후 서라벌예술대학과 동국대 등에서 강의를 하며 창작 활동을 병행한다. 이후 수많은 제자를 길러내며 한국 문단의 주류로 자리매김하다 2000년 10월 부인이 사망하자 곡기를 끊고 약 두 달 뒤에 작고한다.그는 자화상, 문둥이 등을 발표한 초기, 생명파로 불렸다. 이후 샤머니즘, 불교의 윤회, 신라 정신을 탐구하는 선운사 동구, 동천 등을 내놓는다.평소 그는 보들레르와 이백을 좋아했고, 김영랑 시인에게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느꼈다고 한다. 후기에 이르러 고향에서 글감을 찾았다. 줄포로 이사가기 전 서당을 다녀오는 길에 들렀던 외가에서 외할머니가 들려준 설화적 이야기를 작품화했다. 해일, 신부, 석녀(石女) 한물댁의 한숨, 단골 무당네 머슴 아이등이 그것이다.△친일과 친독재의 오점미당은 일제강점기 말기 1944년 태평양 전쟁을 찬양하며 오장 마쓰이 송가 등과 같이 조선인의 전쟁 참여를 독려한다. 이 시는 자살특공대가 돼 영미 항공모함을 뭄뚱이로 내려친 마쓰이 히데오를 찬송하는 내용이다.해방 전국에서 조선청년문학가협회에 참여하면서 좌파 진영이었던 조선문학가동맹에 비판의 화살을 날린다.미당은 현실 참여적인 경향 문학을 지양하고 순수시를 지향했다. 반공사회에서 순수시론은 문단의 중심이 된다. 하지만 순수시 또한 우파적인 경향 문학이라는 지적이 뒤따른다.미당은 친일에 이어 친독재라는 두 번째 오점을 찍는다. 1981년 당시 전두환 대통령 후보를 위한 텔레비전 지원 연설에 나섰다. 당시에도 거센 비난을 받았고, 이후 친일문학인으로 꼽히며 교과서에 실린 작품이 삭제되기도 했다.일부 문학평론가들은 시에서 보여지는 영원성과 신화적 세계가 소심하고 어린아이같은 미당의 도피처라고 해석했다. 권력지향성이 전라도 시인임에도 신라 바라기를 했다고 평했다.미당은 생전 국민총동원령의 강제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징용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친일문학을 썼다고 밝히기도 했다.언어의 정부(政府)로서 논술할 필요가 있다며 미당을 극찬했던 고은 시인은 미당 사후 2001년 미당 담론에서 스승을 두고 세상에 대한 수치가 결여된 체질, 시대에 대한 고소공포증에 가까운 굴복 등으로 행적 논란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서정태 옹은 한국 대표 시인으로 유명세 때문인지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보다 미당의 행적에 대한 논란이 두드러진다며 일제시대에 죽어도 그런 글을 안 쓰고 독립운동을 했으면 좋았을텐데, 당시 미당은 혁명가가 아니고 문학인이었다고 말했다.전정구 전북대 교수(국어교육과)는 개인과 시대가 떨어질 수 없다는 관점에서 이육사와 대비되지만 치욕의 역사도 역사인 만큼 친일과 문학적 업적은 다른 측면이다고 진단했다.그는 이어 해방이 도둑처럼 찾아왔다는 미당의 말에서 보듯 그의 인품이나 민중의식을 찾기보다는 픽션인 문학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 기획
  • 이세명
  • 2015.01.02 23:02

[후백제 왕도 전주] 견훤 왕궁·도성 복원, 전통문화도시 위상 다진다

후백제의 왕도(王都) 전주. 잊힌 역사의 길목에 서 있던 후백제가 다시 숨쉰다. 전주의 역사적 뿌리를 조선의 본향만이 아닌 후백제의 왕도로 확장해 인식하고, 전라북도의 정체성을 백제의 주변부가 아닌 후백제의 중심지로 확립해야 한다는 인식 전환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후백제 견훤은 900년 전주로 도읍해 후백제의 공식적인 출발을 알렸다. 이후 936년 후백제가 멸망하기까지 전주는 36년 동안 후백제의 수도로 기능했다. 짧으면 짧고 길면 긴 시간 동안 후삼국기 견훤은 어엿한 일국의 군주로 후백제라는 국호와 정개(正開)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도읍을 건설하는 등 건국 군주에 걸맞은 건국이념과 통치 체제를 수립했다. 남중국(오월)과 북중국(후당), 일본 등과 다각적인 외교 활동을 펼쳤고, 930년 고창 전투에서 패전하기 전까지 후삼국 가운데 가장 강력한 국가로 자리했다. 후백제의 도성도 규모와 내용면에서 가장 뛰어난 공간을 구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1960~1970년대 이래 전주의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대부분의 후백제 도성 흔적은 파괴됐다. 도성의 위치에 대한 연구자들의 논의가 이어졌으나 결정적인 자료가 제시되지 않아 연구자에 따라 도성의 범위, 궁성의 위치, 산성과의 관계 등에 대한 논란만 지속돼 논의가 진척되지 못하는 양상을 보여 왔다.△후백제 및 후백제 도성 연구의 필요성전주는 후백제의 수도로 왕궁과 도성 체제를 갖춘 후삼국 최대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그러나 현재까지 동고산성 이외에 후백제의 유적으로 발굴 조사된 사례가 적어 후백제 것이라고 부를 만한 유물이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은 상황이다. 후백제의 중심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고 현장이나 기타 자료를 통한 물증의 제시가 여전히 미흡하자 후백제와 관련한 도자, 불교 조각, 산성 등에 대한 지역 연구도 함께 부진하게 되는 연쇄효과가 빚어지고 있다. 점차 후백제의 것으로 주장되는 유적이 많아지는 상황에서 후백제 문화의 핵심 공간인 도성의 실체를 밝히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해진 이유다.조선의 발상지 전주와 후백제의 수도 전주를 복원한다면 전통문화 도시라는 이름에 부합하는 위상이 확보될 것으로 보인다. 아직까지 전주가 후백제의 왕도였다는 점은 활용되지 못하고 있어 후백제 도성에 대한 관심과 체계적인 발굴 조사 등을 통해 후백제 왕도 전주의 면모를 확인하는 것이 요구되고 있다.△후백제 도성의 연구 현황후백제 도성의 실체를 밝히기 위한 연구자들의 논의는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그동안 후백제의 도성 위치와 관련해서는 반대산 일대의 고토성, 물왕멀 일대, 동고산성, 전주부성, 인봉리 일대 등 연구자들의 다양한 견해가 나왔다.1940년 간행된 전주부사에서는 당시 전주역(현재 전주시청) 동쪽 길과 구동정리(전주고등학교 뒤 노송동) 연결 도로의 언덕에 후백제 견훤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토성지의 존재를 언급했다. 특히 물왕멀(현재 중노송동) 일대를 궁성지로 파악하고 이를 입증하는 증거로는 기와자기편, 왕성건축의 초석으로 추정되는 1만여 개의 돌덩이 등을 제시했다.고(故) 전영래 원광대 교수는 1980년에 실시된 동고산성 개괄 조사를 통해 전주성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연꽃무늬 수막새를 발견하고 1990년과 1992년 동고산성에 대한 발굴을 진행해 84.2m4m의 대형 건물터를 찾았을 뿐만 아니라, 주위에 세워졌던 여러 건물터를 찾아냈다. 이를 통해 현재의 동고산성이 후백제의 왕궁터로 설정하고, 동고산성을 상성으로 내성과 중성, 외성 등을 갖는 반월형의 성으로 파악했다. 이 같은 인식은 동고산성 발굴을 통한 현장 확인이란 점에서 주목됐으며 이후 연구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장명수와 성정용은 전주부사의 입장을 유지하거나 재확인한 결과를 제시했다. 장명수는 전영래의 도성 체계를 거의 그대로 수용했으나 궁성을 외성의 동정리 일대로 파악했다. 또 성정용은 현지 조사를 통해 내성과 중성의 축조 사실을 부정하고, 고토성과 그 일대를 궁성으로 제시했다.조법종도 앞선 연구자들이 제시한 공간적 범주에 도성과 궁성이 존재한다고 판단했고, 이경찬도 전영래의 도성 체계를 거의 그대로 인정했다.김주성은 물왕멀 일대가 후백제 도성의 중심 공간이라고 봤다. 궁성을 전주천변의 평탄 지대 전주부성 일대로 설정하고 옛 전주역, 전주천, 동고산성의 범위 내로 도성을 파악했다.이에 대해 곽장근은 전주부성 일대는 이미 신라의 공간으로 백제의 재건을 표방하고 나선 후백제가 도성을 두기에는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중노송동 인봉리와 문화촌 일대에 왕성을 두른 궁성 혹은 왕성으로 추정되는 흔적이 확인됐다고 밝혔으며, 현 전주정보영상진흥원 뒤쪽의 토축을 궁성의 서벽으로 제시했다.지난해 국립전주박물관은 전주시 노송동 일대에서 후백제 도성 성벽의 흔적을 발견해 후백제 왕궁 연구의 전환점을 마련했다. 일제강점기에 간행된 전주부사와 19151919년 지적도, 1938년 전주시 도시계획도, 1948년부터 최근까지의 항공사진 등을 종합적으로 비교분석해 후백제 도성 성벽을 확인했다. 이를 통해 후백제 도성의 형태와 구조, 성벽 축조 방식, 궁성의 위치, 도성의 규모와 방어 체계 등이 밝혀졌다.△향후 과제 및 계획그간 이뤄진 후백제 도성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고고학 자료를 통해 추가 보완해야 한다는 점에서 시론적 검토에 불과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후백제 왕궁 실체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주변 남고산성 등 산성 조사와 산지의 성벽 확인, 평지의 건물터와 성벽 확인 등의 추가 조사가 필수적이다.이를 위해 국립전주박물관은 후백제 역사문화 복원을 위한 조사연구 사업을 2014년부터 2023년까지 총 10년에 걸쳐 36억 원의 예산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국립전주박물관은 이번 사업으로 연구 역량 강화를 통한 지역 내 대표 문화학술기관의 위상을 강화하고, 후백제 왕도로의 전주 위상을 재고한다는 목표다.우선 2014년부터 2015년까지 후백제 조사연구 기반 구축에 나선다. 전주시, 군산대, 중국 소주박물관 등 국내외 관련 기관과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기초 학술 자료집 발간, 학술 세미나 개최 등을 차례대로 진행하고 있다. 2014년부터 2016년까지는 후백제 대외관계 연구를 주제로 학술 심포지엄을 열고, 국외 유물 특별전인 오월과 후백제를 개최할 예정이다.또 2014년부터 2018년까지 5차례에 걸친 지하 물리탐사와 전주정보영상진흥원 토축 시굴 조사, 도성 발굴 조사 등을 통해 후백제 도성에 대한 종합 연구를 실시한다. 이후 후백제 유적 종합 연구와 후백제 연구 성과 공유 등을 통해 후백제 왕도 전주의 위상을 다지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유병하 국립전주박물관장 "전라북도 정체성 후백제 중심지로"후백제의 문화유산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요. 우리 주변에 다 있습니다. 후백제 유적이라는 심증은 갖고 있지만 단정 짓지 못할 뿐이죠. 후백제 도성이라는 중심 문화를 찾아야만 후백제 관련 문화유산도 제 이름을 가질 수 있습니다국립전주박물관 유병하 관장은 후백제 문화의 핵심 공간인 도성의 실체를 밝히는 과정이 선행돼야만 고고학적 연구를 통한 유물, 유적의 재정립이 가능하다고 설명한다.실제 후백제 관련 유적은 완주의 구억리산성, 봉림사지를 비롯해 익산의 제석사지, 왕궁리석탑, 미륵사, 남원의 실상사, 진안의 도통리 가마 등 다양하다.유 관장은 후백제의 문화유산이 더 망가지고, 잊히기 전에 전주가 후백제의 왕도라는 사실을 인식해 후백제 열풍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급격한 도시화로 인해 후백제 도성 흔적이 대부분 파괴돼 고고학적으로 접근해 풀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이에 따라 국립전주박물관에서는 지하 물리탐사와 도성 발굴 조사 등을 통한 기반 조사를 실시하고, 시민들에게 도성 발굴 현장을 공개하는 시민 설명회를 갖는 등 후백제 역사를 전북의 자랑스러운 역사로 재정립할 방침이다.또 내년에는 후백제연구회를 창립해 관련 정보를 공유하고, 협력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내년 10~12월에는 국립전주박물관과 중국 소주박물관이 공동 주최하는 특별전 오월을 개최해 오월 불교 미술품과 청자, 비각 자료 등 150점을 전시한다.

  • 기획
  • 문민주
  • 2015.01.02 23:02

[전통시장 새길 찾기 - 전주남부시장] 한산했던 골목 북적북적…글로벌 명품시장 꿈꾼다

전주 남부시장은 전주시 전동 일대 약 1만9505㎡에 위치한 상인 1200명의 생업의 터전이다. 전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조선 3대 시장 중 하나며, 백제 고대가요 정읍사(井邑詞)의 시장이 전주 시장일 경우 이에 해당하는 유서 깊은 공간이다. 현재도 호남과 충청권 최고(最古)최대(最大) 시장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전주 남부시장은 주말이면 하루 1만2000여명의 인파로 북적이는 전주의 소중한 문화 자산 중 하나다.그러나 2000년대 들어 생겨난 대형 마트와 백화점, 전자 상거래 등으로 전주 남부시장도 타격을 입고 있다. 사람들로 북적이던 싸전과 어물전, 주단 등은 평일이면 더욱 한산하고, 장바구니를 들고 시내버스를 기다리는 어머니들의 모습도 예전처럼 많지가 않다.이에 따라 전북일보는 새해를 맞아 전통시장 새길 찾기라는 주제로 전주 남부시장을 조명해 본다. 전주 남부시장은 야시장과 청년몰 등을 도입해 시대의 변화에 대처하려 꿈틀대고 있어 최근 전국에서 주목 받고 있다.△야시장전주 남부시장 야시장은 2014년 10월 셋째 주와 넷째 주 금토요일 4일간의 시범 개장을 거쳐 그달 31일 정식 개장했다. 전주 남부시장은 지난 2013년 9월 안전행정부 주관 전통시장 야시장 시범지역으로 부산 부평 깡통시장과 함께 선정돼 경관조명과 전광판 설치 등 개장 준비 작업을 거쳤다. 전북도와 전주시, 남부시장상인회가 전주 한옥마을 관광객에게 밤 시간대 다양한 볼거리와 먹을거리를 제공하고, 전통시장을 활성화할 목적으로 추진한 결과물이 야시장인 것이다.야시장은 연간 500만명이 넘는 인파가 찾는 전주 한옥마을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있다. 시장 중앙통로에서 청년몰 입구까지의 110m 구간에 열십(十)자 모양 배치로 이동 판매대와 기존 상설점포가 각각 35개씩(총 70개) 들어서 있고, 경관 조명전광판입간판프로젝터 등으로 화려함도 가미했다.야시장에서는 콩나물국밥막걸리순대국밥 등 향토 음식과 수제소품잡화공예품짚공예품 등을 판매한다. 또 다문화 가정 주민이 만드는 베트남필리핀태국중국음식도 맛 볼 수 있고, 소규모 전시회와 음악회, 공연 등 문화행사도 열린다. 매주 금토요일에 운영되며 11월부터 3월까지는 오후 6시~10시, 4월부터 10월까지는 자정까지 문을 연다. 2014년 12월 기준 금요일 4000~5000명, 토요일 5000~7000명이 찾았다. 35개의 이동 판매대는 1일 200~300만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이동 판매대에서 비빔빵을 판매하는 강선자 씨(70여)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기분 좋다. 매대 생긴 이후 매출이 3배 많아졌다며 무엇보다 우리 같은 노인이 일할 수 있는 일자리가 생겨 더욱 좋다고 말했다.또 곱창을 파는 최준영 씨(53)는 음식이 떨어져야 줄이 끝날 정도다. 시간이 없어서 많이 못 팔지, 시간만 많으면 계속 팔 수 있을 거 같다며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관광객 주대현 씨(22서울)와 박윤예 씨(20서울) 커플은 연말에 한옥마을을 보고 싶어서 전주에 왔는데 근방에 이런 시장이 있을 거라곤 상상치 못했다며 처음 보는 광경이라 참 신기하다. 음식이 이색적이고 거리에 음악이 흘러나와서 나도 모르게 어깨가 들썩거린다고 말했다.하현수 남부시장상인회장은 주말 야시장에 몰려드는 인파로 인해 남부시장 상인들의 매출액도 10~20% 상승한 걸로 파악된다고 말했다. 이처럼 야시장은 상인과 관광객, 지역민 모두에게 즐거움을 주는 공간으로 발돋움 했다. 또 전국 지자체로부터 전통시장 활로 개척 모범사례로 주목받아 일주일이면 4~5개 시군 공무원들의 견학 대상지가 되고 있다.△청년몰지난 2012년 5월 9개의 조그마한 상점으로 시작한 전주 남부시장 청년몰은 2014년 12월 30개의 가게에 40여명의 상인이 입점해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청년들의 톡톡 튀는 콘텐츠가 전통시장에 입점한 성격 상 청년몰은 언론으로부터 꾸준한 주목을 받아 왔고, 2012년 대통령 선거와 2014년 64 지방선거 때는 청년 실업문제를 염두에 둔 정치인들의 필수 방문 코스가 되기도 했다.청년몰에서는 서울 옛 홍대거리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시끌벅적한 야시장에서 멀지 않은 곳 2층에 위치한 청년몰은 같은 전통 시장 안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요하고, 담소 중 입을 가리며 수줍게 웃는 아가씨들의 목소리만 나긋하게 들릴 뿐이다.김현상(31) 청년몰 반장은 청년몰이 계속 유니크(unique)한 특성을 이어가려면 1층 야시장과는 다른 차별성이 필요하다며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아닌 혼자 혹은 두 명이 와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는 마음의 안식처 기능을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청년몰에서 수제 쿠키점을 운영하는 이혜미(29) 사장은 임대료가 저렴하고 하고 싶은 사업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공간이라서 청년몰을 사랑한다며 야시장이 들어서면서 청년몰을 보러 오는 사람 수도 늘었다고 말했다.청년몰은 게임화분꾸미기체험재활용 디자인통기타 연주뜨개질 공방먹을거리 등을 통해 관광객들에게 색다른 문화체험을 선사하고 있다. 또 기존 시장 상인들과의 공존으로 새로운 시장문화를 창출해가고 있는 전통시장 혁신의 모범사례다.△맛시장 영화제전주 남부시장에서는 꼬불꼬불 맛시장 영화제가 열린다. 문화예술이 살아있는 전통시장을 주제로 한 이 영화제는 전주시의 문화행사 지원 사업의 일환이며 시장 2층 청년몰에서 열린다.2014년의 경우 11월 29일 1960년대 영국을 배경으로 맛과 향수를 느낄 수 있는 음식 관련 영화 토스트가 무료로 상영됐다.또 영화 상영 후에는 우쿨렐레 공연과 함께 갖가지 레시피의 토스트를 직접 만들어 볼 수 있는 음식체험 행사가 진행됐다. 음식체험 행사는 당일 현장에서 선착순으로 50명을 선정해서 진행했다. 따뜻한 음료와 함께 영화소감을 나누는 자리도 당연히 수반됐다.전통시장이 영화제를 통해 시민과 관광객 전 연령층을 아우르는 문화예술 복합공간으로 한 발짝 나아간 셈이다.● 하현수 남부시장상인회장 "상인들 생각 바꾸고 혁신적 콘텐츠 개발"살아남으려면 상인들의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전통시장에 대한 시민들의 애정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혁신적인 콘텐츠로 손님을 끌어들여야 합니다. 전주 남부시장은 2015년 정부의 글로벌 명품 시장 선정을 통해 더욱 날아 오를 것입니다.하현수(54) 전주 남부시장 상인회장은 지난 2012년 3월 26일 취임 이래 시장에 획기적인 변화를 몰고 왔다. 하 회장 취임 후 청년몰과 야시장이 들어섰고 시장 영화제가 시작됐다. 21세기 변화의 물결 속에서 전통시장인 남부시장이 작게나마 활로 찾기에 성공한 것이다.하 회장은 글로벌 명품시장 선정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전국 5곳에 조성될 글로벌 명품시장에 선정되면 3년간 50억원을 지원받는다. 호남충청권 최대 시장인 전주 남부시장은 분명 유력한 후보며, 남부시장의 글로벌 명품시장 선정은 전북에 있어서도 단비와 같은 소식이다.최근 서울고법에서 대형마트 영업제한을 위법이라고 판시했는데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논리에 모순이 있고 상생이라는 대명제를 고려하지 않았어요. 법을 개정해서라도 전통시장을 지켜낼 것입니다.하 회장은 대부분이 영세 상인인 전통시장을 한 번이라도 주의 깊게 들여봐 달라고 부탁했다. 무허가 건물에서 근근이 생계를 꾸려가는 이들에게는 금융 거래 및 재산권 행사 제한마저 서스름이 없다.글로벌 명품시장 선정, 야시장 확대 등을 통해 시장을 생동하는 걸작품으로 일구고 싶습니다. 한옥마을과 연계해 모든 세대의 벽을 뛰어넘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서의 전주 남부시장을 도민이 함께 만들어 갑시다.

  • 기획
  • 이영준
  • 2015.01.02 23:02

[새만금 주변 제대로 즐기기] 세계 최장 방조제 달리고 숨은 천혜비경 찾아볼까

새만금 방조제는 한반도 서해안의 지도를 바꾼 역사의 현장이다. 전북 부안군 변산면 대항리에서 시작해 고군산군도의 신시도야미도를 아울러 군산시 옥도면 비응도 바다 위에 방조제를 쌓은 과학과 기술 그리고 천혜의 자연환경이 어우러진 환상의 아일랜드다.방조제 총 길이는 33.9㎞로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길다고 알려진 네덜란드 주다치방조제 보다 1.4㎞가 더 길어 현재 세계에서 가장 긴 방조제로 기네스북에 올라있다.최장 방조제와 함께 곳곳에 천혜비경이 숨어있는 새만금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반하지 않을 수 없다. 2015년 을미년 양띠해를 맞아 풍성한 볼거리와 즐길거리로 가득한 새만금의 숨은 매력을 들여다보자. 새만금 일대에 펼쳐져있는 다양한 스토리텔링은 광활한 새만금방조제와 더불어 사시사철 즐거움을 100배로 느끼기에 충분한 관광명소임에 틀림없다.바다 위를 가로지른 방조제 도로를 달리는 드라이브의 느낌은 어떨까?도로 양측이 모두 바다로 외항은 파도가 치고 내항은 물결이 잔잔하다. 저녁 즈음 달리는 방조제 도로에서는 쉽게 해지는 노을을 감상할 수 있다. 바다가 삼키는 태양의 장관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삶의 여유도 함께 느껴보자.새만금 신시도 주변은 걷기 열풍의 새로운 진원지다. 신시도 33센터 옆 대형 주차장에서부터 출발하는 코스로 월영재 고개를 넘어 정상에 서면 발아래 펼쳐지는 서해 고군산군도의 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숲길, 둑길, 바닷길, 산길, 제방 길, 논길을 거쳐 몽돌해수욕장에 이르면 고즈넉한 겨울바다의 정취를 즐길 수 있다. 이름만큼 규모가 작은 미니 해수욕장을 지나 전망 쉼터와 해안데크, 옛 마을 터와 한전부지 등을 차례로 지나면 신시도 마을이 나온다.신시도 마을에서 지친 다리를 잠깐 쉬고 나서 은골저수지와 논 갈림길, 199봉 바닷길을 걷다보면 어느새 신시도 주차장에 도착하게 된다.신시배수갑문을 지나 33센터 맞은편 방조제 안쪽으로 조성된 자연쉼터는 잠깐의 산책코스로 적합한 곳. 아기자기한 편의시설 등이 갖춰져 있어 마치 바다 위를 걷는 듯한 느낌을 받기에 충분하다. 군산 쪽에서 부안 쪽으로 새만금 방조제 위를 달리다 보면 해넘이 쉼터를 시작으로 돌고래 쉼터의 바람, 소라, 너울 등 쉼터를 만나는 것도 또 다른 즐거움이다.자 이젠 새만금의 시작인 부안에서 시작해 새만금의 끝인 군산 비응도 인근의 볼거리를 찾아보자.△부안 새만금전시관새만금전시관은 1995년 8월 개관해 매년 평균 1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방문하고 있다. 전시관은 한국 간척기술의 발전사, 간척사업 추진 현황, 상류유역 수질개선대책, 호소 내 수질보전대책 및 환경친화적 개발, 우리나라 주요 철새도래지, 새만금지구 모형설명, 배수갑문 모형, 새만금 위성사진, 간척 이후 형성된 새로운 갯벌, 새만금지구 시대별 간척지, 방조제 표준단면, 주변 관광지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다.△변산반도 국립공원변산은 능가산영주산봉래산 등으로 불리며, 호남의 5대 명산으로 꼽힌다. 변산에는 의상봉을 비롯해 쌍선봉관음봉 등의 봉우리 중 최고봉인 의상봉(509m) 정상 바로 아래에 의상사터가 있으며, 내소사와 채석강 등 자연경관이 수려하다.△채석강채석강은 변산반도의 맨 서쪽, 격포항 오른쪽 닭이봉 밑에 있으며 면적은 약 13만㎡이다. 선캄브리아대의 화강암편마암을 기저층으로 한 중생대 백악기의 지층으로 바닷물에 침식, 퇴적한 절벽이 마치 수만 권의 책을 쌓아놓은 듯하다. 채석강이라는 이름은 중국의 이태백이 배를 타고 술을 마시다가 강물에 뜬 달을 잡으려다 빠져 죽었다는 채석강과 흡사해 지어진 이름이다.△내소사부안군 진서면 석포리에 위치하고 있는 내소사는 633년(백제 무왕34)에 혜구두타가 창건했고 일주문에서 천왕문까지 이어지는 600m 전나무 숲길에서 삼림욕의 상쾌함을 느낄 수 있다. 또 빛바랜 대웅보전(보물 제291호)의 모습에서 천년고찰의 기품과 고즈넉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계화도원래 면적 2.5㎢, 해안선길이 약 7000m의 작은 섬이었던 계화도(界火島)는 1963년 시작된 동진강(東津江) 하구의 대규모 간척공사로 육지와 이어졌으며 이 공사로 조성된 경지는 약 46㎢에 이른다. 계화도(界火島)는 1976년 9월 부안군 계화면 계화리가 됐다.△비안도(飛雁島)고군산군도의 여러 섬 중에서 최남단에 위치하는 섬이다. 면적 1.63㎢에 해안선의 길이 6.6㎞이다. 섬의 모양이 날아가는 기러기를 닮았다고 해서 비안도라 불린다. 섬에는 높이 191m의 노비봉이 있고, 이 봉우리를 덮고 있는 동백나무와 괴목나무 숲이 장관을 이룬다.△고군산군도고군산군도(古群山群島)는 군산시에서 남서쪽으로 약 50㎞ 떨어진 해상에 있으며, 무녀도선유도신시도방축도 등 63개 섬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중 16개가 유인도(20.3㎢, 4528명)이다.△고군산 8경제1경 명사십리(明沙十里), 제2경 평사낙안(平沙落雁), 제3경 망주폭포(望主瀑布), 제4경 삼도귀범(三島歸帆), 제5경 선유낙조(仙遊落照), 제6경 장자어화(壯子漁火), 제7경 무산십이봉(無山十二峯), 제8경 월영단풍(月影丹楓)이 있다.△비응도(飛鷹島)비응도는 매가 나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해 비응도라 불린다. 풍광이 매우 아름다운 고군산군도의 섬 가운데 하나이며, 매년 말이면 해넘이 축제가 이곳에서 행해질 정도로 아름다운 낙조를 볼 수 있는 곳이다.△새만금풍력발전소군산시 비응도동 군장산업단지 내에 있으며, 풍력발전기 10기(7.9㎿, 750㎾6기, 850㎾4기)가 있다. 이곳에는 현대중공업도 함께 위치해 있으며, 일제 강점시대 군산을 통해 쌀을 반출하던 아픔의 역사가 담긴 남방파제도 위치해 있다. 남방파제는 우럭과 돔, 주꾸미, 갑오징어 등의 어종이 풍부해 전국 낚시인들로부터 각광받는 낚시 명소로도 유명하다.△고군산도, 63개 기묘한 섬크고 작은 63개의 섬이 모여 푸른 바다에 섬의 성지를 이루고 있는 고군산군도. 재미있고 기묘한 모습을 하고 있는 대표적인 섬이다.야미도는 섬에 밤나무가 많아 밤섬으로도 불렸으나 새만금방조제 건설로 육지가 된 섬이다. 횡경도는 선유도를 중심으로 위치한 섬 중 유일한 무인도로 소횡경도와 횡경도로 나뉘며, 방축도는 고군산군도의 북서쪽에 위치해 방파제 역할을 한다고 하여 방축도라 불린다. 말도는 고군산군도의 끝에 위치하고 있는 섬으로 끝섬이라고도 불리며, 관리도는 울창한 소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져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으며,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무녀도는 섬의 형태가 너울너울 춤을 추는 무당의 모습을 닮았다해서 무녀도라 불리며, 신시도는 고운 최치원 선생의 설화가 깃든 새만금방조제 중앙에 위치한 육지화 된 섬으로 방조제를 통해서 차를 타고 갈 수 있는데 199봉, 월영재, 월영봉 정상, 대각산 정상, 122봉 등으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일일 등산길로 많은 사람들에게 각광을 받고 있다.

  • 기획
  • 이강모
  • 2015.01.02 23:02

[2015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하구(河口) - 박이선

봄은 봄이었다. 겨우내 볼을 얼얼하도록 몰아치던 바닷바람이 한결 부드러운 느낌이 들었다. 부두를 등진 월명산에도 연푸른 빛깔이 제법 진해지고 있었다. 이제 한 달만 있으면 하얀 벚꽃이 온 산을 뒤덮고 꽃구경을 온 사람들로 산이 북적거릴 터였다. 산을 내려와서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면 군산시내와 항구를 이어주는 해망굴이 보였다.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크지 않은 굴이다. 아니 굴이 아니라 터널이었다. 해망굴은 일제강점기 우마차의 통행을 위해 뚫어놓은 것이다. 굴속으로 들어가면 습기로 인해 서늘한 기분이 들었고 컴컴했다. 길지 않아서 입구와 출구를 번갈아 몇 번 바라볼 때쯤이면 벌써 밖으로 나오게 된다. 해망굴에서 이어지는 길 양편으로는 언제 지어졌는지 모를 집들이 허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신호등을 건너 쭉 걸어가면 내항이었다. 소쿠리에 생선을 널어놓고 말리는 생선가게가 이어지고 몇 마리의 개들이 쪼그리고 앉아서 도둑고양이를 지키고 있었다. 가게를 갖지 못한 아낙들은 좌판을 벌여 놓았고 노점이 끝나는 지점에 도선장(渡船場)이란 간판이 보였다. 군산항은 하루 두 번씩 밀물과 썰물이 들락거렸다. 지금은 물이 빠져서 부교(浮橋)가 저 아래로 내려가 뻘밭에 걸친 것처럼 보였다.요런 날에 죽치고 있을랑게 삭신이 뻐근허구먼.모자를 눌러쓴 노인이 도선장 대기실문을 열고 나오면서 하는 소리였다. 말을 마치고 그는 가래를 끌어올려 기세 좋게 뱉었다.황 선장님. 심심하시지라?경사진 부교를 오르느라 가빠진 숨을 내쉬면서 박 기사가 물었다. 그는 부교에 정박한 배들의 홋줄을 걸어주고 풀어주면서 소일을 하는 사람이었다.물이 찰라믄 얼마나 남았능가?벌써 들어오기 시작했구만요. 인자 네 시간이믄 물이 방방해질 겁니다.황 선장이라 불린 노인은 눈을 들어 멀리 장항을 바라보았다. 제련소의 높은 굴뚝이 우뚝 솟아 그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멀리 금강하구둑이 아스라이 보였다. 내항에 물이 완전히 찼을 때에는 어선이며 여객선이 부지런히 입출항 하느라 북적거렸다. 하지만 지금은 물이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움직이는 배가 보이지 않았다. 움직이는 배는 오직 한 척 뿐이었다. 그것은 퇴적토를 퍼 올리는 준설선이었다. 날이 갈수록 군산 앞바다에는 모래가 쌓여서 수심이 낮아지고 있었다. 그것을 퍼내지 못하면 선박의 입출항이 매우 힘들었다. 그동안 퍼 올린 퇴적토는 외항 쪽에 쌓아놓았는데 그로 인해 인공 섬이 하나 생겼다. 그곳을 여의도처럼 개발해서 쓴다는 말이 돌고 있었다.미쳤다고 물길을 막아서 저 염병을 허능가 몰라.황선장은 뿌연 봄기운속에서 희미하게 바라보이는 금강하구둑을 바라보면서 퉁명스런 말을 내뱉었다.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준설선에게도 한마디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안 혀도 될 일을 허느라 퍽이나 용쓰는구만.황 선장의 말에 박 기사는 피식 웃고 말았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하구둑과 준설선을 향해 악담을 퍼붓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 기사는 들고 온 통을 내려놓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선장님이 아무리 그려도 막힌 물길을 틀 수 없당게요.그는 담배연기를 천천히 내뿜으면서 황 선장을 바라보았다. 시커멓게 그을린 얼굴에 깊이 새겨진 주름이 소금기에 쩔어 살아온 인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도선장 문 닫은 것도 한참 지났지 않소. 나도 그 시절이 그립지만 한번 흘러간 세월은 돌아오지 않는 벱이지라.황 선장은 대꾸하지 않고 박 기사가 가지고 온 통을 뒤적였다. 부교에서 낚시로 잡아온 망둥어와 놀래미 몇 마리가 거품을 물고 퍼덕이고 있었다. 황 선장은 군침을 꿀꺽 삼키면서 박 기사를 재촉했다.가서 요기나 좀 허세.앞장서서 휘적휘적 걷기 시작했다. 박 기사는 담배를 집어던지고 황 선장을 따라갔다. 두 사람은 해주식당이라 쓰여진 문을 드르륵 열었다. 저녁손님을 받을 준비하고 있던 해주댁이 고개만 돌려서 눈인사를 했다.어서 오시요.여기 쐬주 한 병 주구랴. 안주는 요기 있응게 대충 끓여주고.마치 자기 안사람 부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황 선장의 이런 말투에도 해주댁은 불평하지 않고 박 기사가 내민 생선을 받아들었다.에구, 이렇게 작아서는 손질만 복잡헌디. 그냥 앉아계시요. 내가 탕 하나 끓여줄랑께.황 선장은 맥주잔 두개에 소주를 나누어 따른 후 내밀었다. 그리고 물마시듯 한 모금 벌컥 들이키더니 조개젓갈을 집어 오물거리면서 짭짤한 맛을 즐겼다. 그것으로 성이 차지 않았는지 다시 한 모금을 들이켰다. 연거푸 두 모금을 마신 다음 황 선장은 입을 썩썩 닦으면서 박 기사를 지긋이 바라보았다.자네도 여그를 떠나지 못하는구만.박기사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선장님이 똥 마려운 강아지 맨키로 여그를 뱅뱅 도는 것이랑 같은 이치 아니것소. 도선장에서 일해 온 것이 몇 년인디 갈 디가 어디 있것소.하긴 도선장이 문을 닫은 이후로 박 기사는 여러 일을 전전했었다. 어선을 타고 나가보기도 하고 부안까지 가서 염전 일을 하기도 했지만 얼마 버티지 못하고 다시 돌아왔던 것이다.선장님이 군장정기선을 몰고 운항헐 때가 봄날이었소.박기사는 눈을 지그시 감으면서 그 때를 떠올렸다. 황 선장은 군산과 장항을 오가는 정기선의 선장이었다. 금강하구둑이 생기기 전만 해도 하루에 56회씩 운항을 했었다. 아침저녁으로는 학생들이 많았고 군산으로 물건을 사러 오는 장사치며 장항제련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까지 모두 황 선장이 운항하는 정기선을 이용했다. 하지만 금강하구둑이 생기면서부터 이용객이 점점 줄어들더니 급기야 몇 년 전에는 도선장이 문을 닫고 말았던 것이다.그 때가 좋았재. 자네 맨키로 홋줄 잘 던지는 사람이 없었네.황 선장도 고개를 끄덕이며 박 기사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 때 군장정기선에서 조수를 맡고 있던 사람이 바로 박 기사였다. 사람들이 타고나면 고리를 걸어놓고 뱃머리로 쫓아가서 던질 채비를 했던 사람이었다. 파도로 들썩이는 뱃머리에서 홋줄을 돌돌 말아 한손으로 들고 힘껏 던지면 정확하게 부교에 박혀 있는 볼라드에 걸쳐지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파도가 거친 날 홋줄작업에 시간이 많이 걸리게 되면 그만큼 정박이 어려워지기 때문에 황 선장은 박 기사가 믿음직했다.인자 홋줄 던지는 일 보다 받아주는 일 밖에 없소.박 기사는 힘줄이 툭툭 불거진 주먹을 치켜들며 아쉬운 목소리를 냈다. 더 이상 배를 타지 않으니 홋줄 던질 일도 없었다. 부교에서 낚시를 하다가 정박하러온 배에서 던진 홋줄을 볼라드에 걸어주는 일이 전부였다. 간혹 안면이 있는 어선에서 건네준 생선을 들고 해주식당으로 달음질치는 모습을 볼 때 황 선장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하면서 술잔이 바닥을 드러내자 해주댁이 냄비 하나를 내밀었다.빈속에 술만 자시지 말고 요기라도 좀 허시요.이 펄펄 오르는 냄비속의 얼큰한 매운탕이 군침을 삼키게 만들었다. 황 선장이 군침을 꿀꺽 삼키는 것을 보고 해주댁이 토라진 표정으로 말을 덧붙였다.선장님. 세월만 이렇게 까묵고 내 고향엔 언제 데려다 줄 거유?황 선장은 뜨거운 국물을 맛보느라 입을 오리처럼 뾰족하게 내밀고 후후 불어가며 쩝쩝거리고 있었다. 해주댁은 대답을 기다리면서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어허, 조금만 기다려 보랑께. 세상이 변하믄 내가 데려다 준다고 하지 않등가.또 기다리란 말유? 그러다가 꼬부랑 할망구 되야도 안 되것네.시원치는 않았지만 그래도 대답을 들었으니 되었다는 투로 다시 도마 위에 놓인 생선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황 선장은 해주댁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해주댁이 식당일을 시작한 것은 황해도 해주에서 배를 타고 피난을 왔던 남편이 죽고 난 이후였다. 남편은 조선기술자여서 군산에 터를 잡고 부지런히 배를 만들었다. 아이들까지 여기에서 학교를 보내고 세상사는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을 때 선거에 올려놓은 배가 기울어지는 바람에 남편은 추락을 했고 몇 달 동안 끙끙 앓다가 세상을 뜨고 말았다. 해주댁의 나이가 서른아홉 살 때였다. 해주댁이 식당일을 시작한 것은 생활고와 군산항에서 출항한 어선들이 때로는 장산곶 앞바다까지 고기를 잡으러 가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돌아온 어선들을 통해서 고향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들려오는 소식이래야 북한경비정이 쫓아와서 간신히 도망을 쳤다는 둥, 북쪽 사람들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접근을 해서 고기와 술을 바꿔 먹었다는 이야기며, 누구는 정신없이 고기를 잡다가 월경을 하게 되었고 납북되었다는 소리뿐이었다. 그래도 해주댁은 그 때마다 귀를 쫑긋 세우고 바람결에 들려오는 고향소식에 애가 달았다. 황 선장은 도선장에서 군장정기선을 운항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주식당에 발길이 잦았다. 그의 아내가 다섯째를 낳다가 불귀의 객이 되어 홀로 살고 있던 시절이었다. 부모가 있는 강경으로 자식들을 올려 보내고 혼자서 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진작에 꼬부랑 할매가 돼부렀는디 무신 걱정을 저리 헐꼬.박 기사가 바닥에 남아 있는 술을 쭉 들이키며 빈정거렸다.글고 선장님도 그런 약조는 허지 마시요. 통일이 된다믄 모를까 워떻게 배를 몰고 해주까지 간단 말인게라.황 선장은 아무 말 없이 매운탕을 뒤적였다. 해주댁도 더욱 요란스럽게 도마질을 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이제 물이 웬만큼 차오른 모양이었다. 밖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많아졌고 어선에서 시동을 걸어 통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나가보세. 물 들어왔응께.모자를 푹 눌러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황 선장이 문을 열고 바다를 바라보니 어느새 물이 들어와서 뻘에 박혀있듯이 꼼짝도 않던 어선들이 둥실 떠올라서 좌우로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물이 차서 더욱 비릿해진 갯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황 선장은 코를 연신 벌름거리면서 성큼성큼 발걸음을 떼었다.이튿날 아침 일찍 박 기사는 도선장 대기실문을 열었다. 군장정기선은 더 이상 운항하지 않았지만 좌판을 열거나 하릴 없이 부두를 거니는 사람들이 들어와서 쉬는 곳이었기 때문에 난로를 피우기 위해서였다. 대기실벽에는 물때를 알려주는 조석표가 붙어 있었고 군장정기선의 운임이 적혀있는 안내판이 보였다. 색깔이 바래고 페인트가 갈라져서 떨어진 모습이었다. 박 기사가 작은 석유난로에 불을 붙이고 밖으로 나왔을 때 작은 배를 타고 돌아오는 황 선장이 보였다. 박 기사는 부교를 건너 달려갔다.또 통선문에 갔다 오는갑소잉?황 선장이 탄 배는 어선으로도 쓰지 못할 정도로 너무 작았다. FRP로 만든 배에 스크류만 얹어 놓은 것이었다. 바다가 잔잔할 때 낚시를 하거나 투묘하고 있는 큰 배에 물품을 전해주는 것도 벅차 보일 정도였다.통선문은 아무나 드나들 수 없당께요. 허가를 받지도 않고 무작정 따라간다고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란 말요.잔말 말고 단단히 묶어놔.차가운 아침바람에 얼굴이 새파랗게 변한 황 선장이 줄을 박 기사에게 건네주고 부교로 올라섰다. 삼월이지만 새벽 찬바람은 매서웠다. 부두에 서있기만 해도 눈물이 찔끔거렸을 것이다. 황 선장은 주르륵 흘러내리는 콧물을 소매로 쓱 닦아냈다. 뱃머리에 부딪힌 물보라를 뒤집어써서 비에 젖은 생쥐 꼴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박 기사는 혀를 끌끌 찼다. 대기실에서 황 선장은 윗옷을 벗어 놓고 얼어 있는 손을 녹였다. 소금물에 젖은 홋줄을 걸고 당기느라 투박한 손이었다.인자 그만 두시요. 허가도 없이 올라간다고 혀서 통선문을 통과헐 수는 없소.뒤따라 들어온 박 기사가 툴툴거렸다.그러다가 사고라도 나믄 꼼짝없이 죽을 것이요. 신새벽에 누가 바다를 쳐다보고 있기나 허간디.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박 기사는 온수통에서 물을 뽑아 황 선장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들고 황 선장은 홀짝이며 몸을 녹였다.자네도 알다시피 내 고향이 강경 아니던가베. 언제고 올라가야 헐 길이란 말여.아직 입이 풀리지 않아서 황 선장이 느릿하게 말했다.요새는 찻길도 좋은디 미쳤다고 통선문을 통과헐라고 그란다요. 백날 쫓아다녀봐야 허가를 안 해준당게라.알고 있네. 그려도 물이 차오르믄 가심이 답답혀서 견딜 수가 있어야재.황 선장이 새벽부터 배를 타고 다녀온 곳은 금강하구둑이었다. 하구둑에는 배수갑문과 물고기의 통행을 위한 어도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선박의 출입을 위한 통선문도 있었는데 50톤 규모의 작은 선박만이 통행하는 것이었다. 하구둑으로 금강의 민물을 가두어놓아 바닷물은 섞일 수 없었다. 하루에 두 번씩 밀물과 썰물이 반복되므로 통선문은 특수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바다에서 강으로 가기 위해서는 일단 농어촌공사 금강사업단에 통행신청을 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사업단에서는 선박의 규모와 목적을 보고 통선문의 출입을 허가했는데 군산에서 올라갈 경우에는 하부갑문을 열고 배를 도크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하부갑문을 닫은 다음 상부갑문을 서서히 개방해서 수위를 맞추는 것이었다. 금강에서 군산으로 내려갈 때는 반대로 갑문을 개폐했다. 이 절차가 복잡하고 수위를 맞추는 시간이 짧지 않아서 사실상 통선문을 이용해서 바다와 금강을 오가는 선박이 드문 편이었다.접 때도 큰일 날 뻔 허지 않았소. 무작정 앞서가던 선박을 따라가다가 갑문에 부딪혀서 뒤집힐 뻔허지 않았능가베.박 기사는 왜 황 선장이 통선문을 얼쩡거리는지 잘 알고 있었다. 금강하구둑이 건설되기 전에는 군산에서 강경을 지나 공주는 물론 부강까지 뱃길이 이어졌었다. 일제강점기에 군산에서 공주를 오가는 기선까지 두 척 운항될 정도로 항로가 좋았다. 황 선장은 고향 강경에서 배를 타고 군산을 오르내렸던 시절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그만 잊어부리시오. 코딱지만한 배 통과 시킬라고 통선문을 열어줄 리는 없응께.박 기사의 매몰찬 소리에 황 선장은 속으로 끙 소리를 낼 뿐이었다. 그도 모르지 않았다. 통선문은 손주들이 뻔질나게 드나들며 방문을 열어젖히는 것처럼 아무나 열 수 있는 문이 아니었다. 통과신청을 하면 사업단에서 검토를 하고 정해진 시간에 열어주고 있었다.열어주지 않으믄 지들이 워쩔 것이여. 언제부터 강을 오르내리는디 허가를 받아야 혔냐 그 말이시.고집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박 기사는 황 선장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입을 닫아버렸다. 다만 나이를 생각지 않고 부두에서 하구둑을 바라보고 있다가 통선문으로 다가가는 배를 발견했을 때 부리나케 배를 타고 달려가는 모습이 걱정스러울 뿐이었다. 박 기사는 황 선장이 도선장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통선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흐르고 있을 때 누군가 불쑥 들어왔다.아따 따숩네이. 뭐 헌디야? 밥 묵었어? 안 묵었으믄 같이 가자고.선외기 장사를 하고 있는 김 사장이었다. 수십 년간 황 선장과 인연을 맺어왔기 때문에 허물없는 사이였다. 김 사장은 조용한 대기실을 순식간에 떠들썩하게 만들어버렸다. 원래 수다스럽고 알맹이 없는 말을 많이 하는 편이었다. 김 사장은 두 사람을 끌다시피 해주식당으로 향했다.여그 뜨신 국물허고 밥 좀 내주시요.해주댁은 머리를 곱게 빗어 넘겨 비녀를 꽂고 있는 모습이었다. 웬만하면 미장원에 가서 긴 머리를 싹둑 잘라버리고 파마를 할만도 했지만 아침마다 머리 빗기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 일은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머리를 감고 말려서 참빗으로 곱게 빗어 넘긴 다음에 또아리를 틀어 비녀를 꽂아야 했다. 젊었을 적 해주댁의 고운 머리를 보고 황 선장이 이런 말을 했던 일이 있었다.댁네는 참 머리가 고우이. 보고만 있어도 먼저 가버린 안사람이 생각난당께.그 말 때문이었을까. 한 때는 황 선장이 못 잊어하는 아내 생각에 약이 올라 머리를 싹둑 자르고도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고운 머리를 바라보며 은근한 눈길을 보내며 지그시 눈을 감는 황 선장 때문에 머리를 자를 수가 없었다. 아마 황 선장이 아니었더라도 해주댁은 머리를 자르지 않았을 것이다. 남편도 자신의 길고 윤기 나는 머리를 얼마나 좋아했던가.꽃샘추윈가벼. 어제보다 겁나게 추워졌당게로.김 사장은 잡담을 늘어놓으면서 소주를 한 병 냉큼 집어왔다해장부터 술 자실라요?해주댁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걱정마시요. 우리가 하루 이틀 해장했간디. 황 선장, 안 그런가?황 선장은 아무 말 없이 술잔을 내밀었다. 꼴꼴꼴 술잔이 채워졌을 때 벌컥 한 모금 들이켰다. 그 때 해주댁이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생태탕을 내왔다.술만 자시지 말고 밥이랑 같이 드시요.황 선장을 보고 하는 소리였다. 그 말에 김 사장은 입을 삐쭉거리면서 해주댁을 곱지 않은 눈길로 쳐다보았다.돈은 내가 낼 것인디 호사는 황 선장이 다 누리네. 허허.쓰잘데기 없는 소리 말고 밥이나 드시요.해주댁은 찬바람이 일도록 휑 돌아서버렸다. 그래도 김 사장은 넉살좋게 웃음을 날리면서 개의치 않았다.아까 배가 들어 오든만 또 올라갔다 온겨?김 사장의 물음에 황사장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에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던 박 기사가 말을 받았다.신새벽부터 하구둑을 다녀올 사람이 누가 있것소.김 사장의 선외기 가게는 부둣가에 붙어 있어서 누가 오르내리는지 훤히 바라보였다. 아침에 가게 문을 열고 있을 때 위에서 내려오는 황 선장을 보았던 것이다.자네 고집도 엔간하네. 포기헐 때도 됐는디 기어코 물길을 따라 올라가것다고 고집을 부린당가.김 사장도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나뭇잎처럼 작은 배로 오르내리다가 무슨 사고라도 당하면 큰일이었다. 군산 앞바다는 천리를 달려온 금강이 몸을 푸는 곳이어서 넓었다. 예전에 배를 타고 장항까지 가는 데만도 15분 이상 걸리는 거리였다. 게다가 물이 들어왔을 때에는 오가는 어선들도 많고 금강하구둑에서 배수갑문이라도 여는 날에는 물살이 종잡을 수 없이 거칠어지는 것이었다.무담시 넘의 일에 간섭허지 말고 밥이나 먹세. 그 놈의 잔소리는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구먼. 죽어서도 제사상에 감 놔라 배 놔라 헐 것이여.황 선장이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는 소리에 해주댁이 피식 웃고 말았다. 이 모양을 보고도 김 사장은 화를 내기는커녕 황사장의 말이 반가운 듯 했다.하믄, 격식대로 혀야재. 내 성에 차지 않으믄 제사상도 받지 않을 것이네. 그려도 내가 자네보다는 오래 살 것잉게 아모 걱정 말드라고.그제야 황 선장도 웃음을 지으며 술잔을 들었다.한 잔 드세. 어김없이 봄이 오건마는 가버린 호시절은 왜 아니 올꼬.이제 부두에서 일하는 인부들이 아침을 먹기 위해 해주식당을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해주댁이 생선을 다루는 도마소리가 바빠질 때 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꽃피는 봄을 시샘하는 것은 바다에도 있었다. 시퍼렇던 물이 봄기운에 누런 빛깔로 바뀔 때쯤이면 거센 폭풍이 몰아치는 것이었다. 차가운 북서풍에 맞서 밀어 올리는 동남풍이 마주쳐서 바닷물도 한바탕 뒤집어지는 것이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겨울바다가 시샘한다고 했다. 월명산의 벚나무에서 새순이 귀엽게 돋아 오르고 있던 삼월 하순이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더니 바닷물이 부두까지 넘실거리고 있었다. 정박한 어선의 대나무에 메어놓은 깃발이 찢어지도록 나부끼고 사방에서 서로 어깨를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아무래도 내일까지는 날씨가 심상치 않을 것 같소.박 기사가 튀어 오르는 바닷물을 가리느라 한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부교를 뛰어오고 있었다. 정박해놓은 어선들의 홋줄을 보강해주고 오는 길이었다.제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오는 봄을 막지 못할 것이다.황 선장은 도선장 대기실 앞에서 박 기사를 맞이했다. 두 사람이 번갈아가면서 부교를 오가고 있었다. 선원들은 배를 정박해놓고 시내로 술추렴을 하러 갔든지 아직까지 여관방에서 늘어지게 잠을 자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부교에 정박한 수십 척의 배는 두 사람이 맡아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부교에서 배로 냉큼 건너뛰어서 홋줄을 던지고 두 겹 세 겹으로 보강을 했다. 만약 홋줄이 끊어진다면 거센 바다로 둥실 떠내려 갈 것이 분명했다. 선장들은 정박했다가 떠날 때 수고비를 대기실에 들러 내놓고 갔다.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해주었기 때문이었다.웬만치 했응께 들어가서 좀 쉽시다.박 기사는 얼굴에 묻은 바닷물을 옷소매로 쓱 닦아내며 대기실로 뛰어 들어갔다. 난로 위에서는 노란 주전자가 김을 뿜어대고 있었다. 황 선장은 박 기사의 말에도 불구하고 부두가로 몇 걸음 걸어갔다. 그의 눈은 하구둑에 고정되어 있었다. 저 멀리 배 한 척이 보였다. 서해의 거친 파도는 외항에서 성질을 부렸지만 인공섬에 부딪혀서 그 기세가 약해졌다. 그래서 파도가 내항에서는 앙탈을 부리는 정도였다. 내항에서 금강하구둑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물길은 굽어져 있었기 때문에 위로 갈수록 고분고분해졌다. 통선문을 통해 선박이 왕래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정도였다. 황 선장은 뚫어지도록 배를 바라보았다. 약간의 시간을 두고 바라보니 배가 투묘를 하거나 고기를 잡고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배는 통선문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확인한 황 선장의 눈에 광채가 돌았다. 그는 대기실로 뛰어 들어가서 두툼한 외투를 걸치더니 부리나케 달려 나갔다. 커피를 타고 있던 박 기사가 미처 물을 틈도 없었다.어어어.이 소리만 할 뿐이었다. 황 선장은 부교를 건너서 맨 안쪽에 메어져 있던 작은 배로 뛰어올랐다. 거침없이 엔진에 시동을 걸고 어선들이 빼곡히 정박해서 미로처럼 복잡한 곳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박 기사는 부두에서 그 모습을 얼빠진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렇게 급하게 가는 곳은 한군데 밖에 없었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박 기사의 마음이 급해졌다. 지금 바다는 거칠었다. 황 선장이 탄 배는 나뭇잎과 같아서 파도를 헤치고 가기에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박 기사는 부두에서 황 선장을 불렀다.선장님. 황 선장님.애타게 부르는 소리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황 선장은 내항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아마 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바람소리가 요란했고 엔진소리 때문에 박 기사의 외침은 전해지지 않았다. 박 기사는 큰일 났다 싶어 부교를 달려 내려갔다. 위아래로 심하게 들썩이는 어선의 갑판으로 뛰어올라 건너편 어선으로 다시 건너뛰었다. 몇 척이나 건너뛰었을까. 가장자리에 있는 어선의 후갑판으로 가서 박 기사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소리쳤다.선장님. 돌아오시요. 위험허당께요.그 때 황 선장은 기우뚱 거리는 어선들 사이를 빠져나와 위로 뱃머리를 돌리고 있는 중이었다. 바람결에 실려 온 목소리를 들었는지 그는 이쪽을 바라보았다. 뭐라고 입을 벌려서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박 기사는 계속 손을 흔들면서 황 선장을 불렀다. 황 선장도 손짓을 하고 있었다. 아무런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라는 것 같았다. 파도가 뱃머리에 부딪혀서 하얀 포말을 뿜어대자 황 선장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배가 뒤집힐 수도 있었다. 그렇게 황 선장의 배는 박 기사의 눈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축 늘어진 어깨로 박 기사가 부두로 올라와서 하구둑을 바라보니 작은 점이 되어 달려가는 황 선장의 배가 보였다.무슨 일 있는가? 소금절인 파 맨키로 왜 풀이 죽어 있어?김 사장의 목소리였다. 그는 시내에서 볼 일을 마치고 백년광장을 지나 돌아오고 있는 길이었다. 잔뜩 흐려 있는 날씨에다 저녁이 되어 벌써 어두컴컴해지고 있었다.선장님이 미쳤는갑소.박 기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 사장은 눈치 빠르게도 상황을 모두 파악했다. 키발을 짚고 바라보니 만조가 되어 물이 가득 찬 군산앞바다에 몇 척의 배들이 떠있었고 그 사이로 올라가는 작은 배가 보였다. 황 선장이 분명했다. 가운데로 나갈수록 파도가 거칠었는지 황 선장의 배는 사라졌다 나왔다를 반복하고 있었다.이거 큰일 나부렀네.김 사장은 도선장 대기실로 뛰어갔다. 그리고 낡은 책상위에 놓인 기관연락처를 뒤적여 전화를 걸었다.거기 금강사업단이요? 나는 여기 내항에 있는 사람인디, 네네, 그렇당께요.전화를 받는 상대방의 목소리가 답답했던지 김 사장은 화를 벌컥 내기도 했다.맞소. 접 때 그 황 선장이요. 이번에도 배를 타고 통선문 쪽으로 올라갔응께 통과시키든지 아니면 안전허게 붙잡아 달란 말이외다.통화를 마친 김 사장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황 선장이 부두에서 하구둑을 바라보다가 통선문을 통과하려는 선박을 보고 쫓아간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허가 없이 통과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금강사업단에서는 감시카메라를 통해서 누가 하구둑에 접근하는지 살펴보고 있었다. 그것은 하구둑의 안전과 접근하는 선박을 위해서였다. 갑자기 배수갑문이 열리면 엄청난 속도로 물이 쏟아져서 작은 배쯤은 단번에 뒤집어버릴 수 있었다. 그래서 일정구역내에서의 어로행위까지도 금지되어 있었던 것이다. 지금 황 선장은 통선문을 통과하려는 선박을 발견하고 부리나케 쫓아갔기 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할 수가 없었다. 황 선장의 생각대로 하부갑문이 닫히기 전 도크 안으로 들어간다면 금강 상류로 올라가서 강경까지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뿐더러 자칫하면 갑문에 부딪혀서 배가 파손될 수도 있었다. 김 사장이 조바심을 감추지 못하고 대기실을 들락거리고 있을 때 바지에 손을 넣고 엉거주춤 걸어오는 털보가 보였다. 그는 비응도에 살던 사람이었다. 김 사장과는 거래가 있어 친숙한 사이였다.여보게, 배 좀 띄우세.네? 요런 날씨에 무슨 배를 띄운단 말요. 어디 장항에라도 가실라요?그게 아녀. 여기 황 선장이 쪽배를 타고 올라갔다네.김사장은 아래턱으로 도선장 대기실을 가리켰다. 눈을 껌뻑이고 있던 털보는 무슨 일인지 대강 짐작하겠다는 듯 김 사장을 따라갔다. 날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벌써 외등을 밝힌 어선들도 있었고 부두의 가로등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부교에 내려가서 보니 털보의 배는 다른 어선들 사이에 있어서 빼내기가 쉽지 않았다. 박 기사가 건너편 어선으로 건너가서 홋줄을 걷고 다시 던지기를 몇 차례 반복하고서야 겨우 털보의 어선이 빠져나올 수 있었다. 혼자서 홋줄을 묶고 있던 박 기사는 옆으로 배가 다가왔을 때 훌쩍 올라탔다. 그 때부터 털보의 어선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통통통통 경쾌한 소리가 들리고 시커먼 연기가 뿜어져 올라 세찬 바람에 흩어졌다. 바다 가운데로 나갈수록 파도가 심했다. 배가 앞뒤로 사정없이 흔들리면서 파도를 헤치고 있었다. 뱃머리에 파도가 부딪힐 때마다 하얀 물보라가 튀어 올랐다. 그래도 김 사장과 박 기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뱃머리에 서서 황 선장이 간 곳을 바라볼 뿐이었다.미쳤당게로. 이렇게 파도가 험헌디 쪽배를 타고 가당키나 허것는가 그 말이여.이제 주위는 어두워져서 하구둑에서 장항으로 이어지는 가로등이 불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박 기사는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별 일이야 없것지요? 그려도 바다에서 살아온 양반인디.김 사장은 말없이 굳은 표정이었다. 하구둑으로 다가갈수록 파도는 약해졌다. 털보는 어선을 통선문이 있는 곳으로 몰아갔다. 거대한 하구둑의 콘크리트 구조물이 우뚝 서서 가로막고 있었다. 마치 개미새끼 한 마리도 용납지 않겠다는 듯 거만한 몸집이었다. 그들이 통선문에 이르러 살펴보니 이미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황 선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김 사장은 전화기를 꺼내들었다.워떻게 됐소? 황 선장이 안으로 들어갔소 아니면 못 들어갔소?김 사장은 상대방의 말을 듣고 힘없이 전화를 끊었다. 박 기사가 바짝 다가서며 물었다.뭐라고 허등가요. 선장님이 올라갔지요?박 기사는 황 선장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어 통선문을 통해서 올라갔다고 믿고 싶은 모양이었다.그게 아녀. 사업단에서 방송을 혀서 황 선장을 제지혔는디 기어코 통선문으로 돌진허드래야.그러믄 워떻게 됐단 말이요?이미 갑문이 닫혔는디 워떻게 허겄능가. 어느 순간 감시카메라에서 사라져 버렸다는디 찾아봐야재.그들이 통선문 주위를 뱅뱅 돌면서 황 선장을 찾고 있을 때 사업단에서 뛰어나온 근무자들도 둑 위에서 후레쉬를 비추고 있었다. 뒤이어 소방서에서 구조대를 보내오고 경찰이 도착해서 갑자기 시장바닥처럼 시끌벅적해졌다. 그렇게 황 선장을 찾는 일은 밤이 새도록 계속되었다.끝내 황 선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몸을 나른하게 만드는 봄바람으로 바다가 대야에 물을 떠놓은 것처럼 잔잔해졌을 때에도 실종된 황 선장을 찾을 수 없었다. 사흘 만에 수색은 사실상 종료되었고 해경에서 세 척의 경비정을 보내 어청도까지 찾고 있을 뿐이었다. 워낙 밀물과 썰물이 심하게 반복되는 곳이어서 물에 빠진 사람이 순식간에 먼 바다로 떠내려가는 경우는 흔했다. 황 선장이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볼 때 먼 바다로 떠내려간 것이 분명했다. 박 기사는 도선장 대기실에서 술추렴을 하고 있었다. 웬만하면 해주식당에 가서 요기라도 하였겠지만 황 선장이 실종되고부터 식당 문이 닫혔기 때문에 주린 배를 소주로 채우고 있었다. 박 기사가 쥐포를 난로위에 구어서 찢어발기고 있을 때 김 사장이 들어왔다.허구헌 날 술추렴인가? 가세. 밥이나 묵어야 몸을 건사허재.멀건 눈빛으로 올려다보는 박 기사의 팔을 잡아끌었다. 김 사장은 해주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흘 만에 해주식당의 문이 열려 있었다. 박 기사는 와락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우리 왔소. 뭐 먹을 것이나 좀 내주시요.해주댁은 수건을 쓰고 있었다. 평소 정갈하게 머리를 빗어 넘기고 아무 것도 쓰지 않던 모습을 생각하면 낯 설은 모습이었다. 박 기사는 자리에 털썩 앉아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로 해주댁에게 말을 건넸다.아주머니도 충격이 크셨을 것인디.김 사장은 수건을 쓴 해주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누군가 어젯밤에 부두에서 울면서 바다에 하얀 무명광목으로 무엇을 돌돌 말아서 던지던 해주댁을 보았다고 했다. 지금 보니 해주댁은 머리를 짧게 자르고 파마를 한 것이 분명했다. 수건으로 가렸어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어젯밤에 바다로 던진 것은 머리카락이 아니었을까. 김 사장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울적해졌다. 금방이라도 황 선장이 시커먼 얼굴을 들이밀고 나타날 것 같았다. 잠시 후에 상을 내오는 해주댁의 얼굴은 핼쓱해 있었다.벌써 부지런헌 벚나무는 봉우리를 틔웠다등만.김 사장이 말을 건네도 해주댁은 조용히 쟁반을 내려놓고 돌아섰다. 그동안 배가 고팠던 박 기사가 허겁지겁 밥을 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김 사장은 술 한 잔을 따라놓고 해주댁에게 말을 걸었다.나중에 월명산 꽃놀이라도 가볼라요?그래도 말이 없었다. 김 사장은 해주댁의 뒷머리를 바라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인자 황해도 해주 고향땅을 못 가게 돼부러서 섭허것지만 황 선장은 잊어뿌리시요. 그 사람도 그것을 바랄 것잉께. 나도 마음이 답답허요.평소 김 사장 답지 않은 넋두리였다. 차분한 말투가 수다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한참 동안 도마에서 칼질을 하던 해주댁이 돌아서며 말을 건넸다.나도 고향 밟을 생각은 버렸소. 그나마 위로해주던 선장님이 없응께 고것이 서운헌 것이재.알지요. 그 마음. 아마 선장은 강경으로 올라갔을 것이요. 살아서 못 가믄 죽어서라도 물고기들이 데려다 줄 것잉께.두 사람이 말을 주고받고 있을 때 밥 먹는 것에 열중하던 박 기사가 고개를 들었다. 이제 웬만큼 양이 찬 모양이었다. 그는 문득 창밖으로 쏟아지는 따뜻한 봄볕을 바라보았다. 강아지들이 젖꼭지 하나씩 물고 배부르게 젖을 먹은 다음 한가하게 어미 품에서 잠들어 있을 법한 날이었다.아따 봄볕이 좋구만이.박 기사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 말에 김 사장과 해주댁도 밖을 바라보았다. 백년광장에는 바람을 쏘이거나 관광을 하러 온 사람들이 한가하게 거닐고 있는 것이 보였다.곧 월명산에 꽃이 만발하렷다.김 사장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세 사람은 항구에 내려 쪼이는 따뜻한 봄볕에 잠시 넋을 빼앗기고 있었다. 〈끝〉

  • 기획
  • 전북일보
  • 2015.01.02 23:02

[2015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소감] "주마가편의 상…문청 자세 잊지 않을 터"

작년에 시골로 이사를 해서 겨울이면 땔감을 장만하느라 바쁩니다. 아파트에 살 때는 현관문을 꼭 걸어 잠그고 토끼가 굴속에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시간을 보내도 뭐라 할 사람 없지만 시골은 자질구레 신경 쓸 일이 많습니다. 눈이 많이 왔을 때 깜빡 잊고 늦장을 부리면 이웃집 영감님이 깨끗이 치워놓으니 여간 미안한 것이 아닙니다.오전에 이웃집 영감님과 함께 복숭아밭에서 나이 든 나무를 잘라 땔감으로 만들고 돌아와 먼지를 털어내고 있을 때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든 전화기 너머에서 신문사라는 말과 함께 축하한다는 말이 들려옵니다. 순간 몸이 쩌르르 울렸습니다. 환호성을 질러야 할지 아니면 침착하게 응대해야 할지 혼란스러웠습니다. 헝클어진 정신을 가까스로 추슬러서 묻는 말에 간신히 대답을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처마 밑에 그대로 주저앉아 한참을 킥킥거리며 웃었습니다. 아마 누가 보았으면 저 사람이 실성했구나 싶을 정도로 그렇게 기쁨을 만끽했습니다. 행운은 예상치 못했던 순간에 찾아오는 모양입니다.그동안 소설을 쓴답시고 수차례 응모해보고 당선을 기다리며 당선되었을 때는 무슨 말을 할까 행여 속물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혼자 노심초사 마음의 준비를 해왔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했던 순간 기습적인 전화를 받고 보니 공들여 준비했던 말은 한 마디도 하지 못한 채 전화를 끊고 말았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차분한 마음으로 당선소감을 쓰고 있으려니 말문이 막히는 느낌입니다.이번 신춘문예 당선은 더욱 좋은 글을 쓰라는 의미에서 주신 주마가편(走馬加鞭)의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열심히 쓰는 것이 상에 보답하는 길이요 문청의 자세임을 잊지 않고 노력하겠습니다. 하늘의 어머니께 영광을 돌리고 졸작을 읽어주는 수고를 마다 않으신 심사위원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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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1.02 23:02

[2015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심사평] "노인의 꿈, '글과 서사' 참하게 다가와"

소설을 글로 듣는 이야기로 정의해볼까요? 그렇게 규정하는 순간, 소설이 마땅히 갖춰야 하는 두 눈꺼풀이 절로 열립니다. 글과 서사라는 양쪽 눈이 그것입니다. 예컨대 글이라는 것에는 눈썹이랄 수 있는 비유, 눈동자를 이루는 문장, 눈매로 상징되는 문체, 동공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 주제 의식 등이 있습니다. 서사 쪽 눈에도 구성, 갈등, 반전 등의 요소가 있을 테지요.출품작 집행은 이혼 자녀 집행관이라는 소재가 아주 매력적입니다. 글이라는 측면만 놓고 본다면 그 눈동자가 자못 선연한 부분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서사 측면의 눈초리는 분명치 않고 현실적으로도 매우 흐릿합니다. 특히 갑작스런 결말로 인해 독후감이 영 개운치 않았습니다.러브 터치는 청년 취업을 통해서 본 첫 세상 엿보기입니다. 헌데 비정규직 문제인지, 기업 스파이인지, 부업인 꿀벌치기에 대한 언급인지 어지럽습니다. 물론 그게 다일 수도 있는데, 그러려면 그 낱낱의 소재가 서로 유기적으로 녹아들어야만 하겠지요.이모의 죽음을 반추하는 달이 뜬다와 풀 수 없었던 사랑의 방정식을 추억하는 세상의 끝에서는 소품이라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런 류의 작품들이 흔히 극복하지 못하듯 이른바 이야기 너머의 그 어떤 것,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더 이상을 열어 보여주지 않았습니다.당선작 하구는 얼핏 보면 흘러간 가요처럼 고답적인 양식의 소설에 지나지 않는 듯합니다. 하지만 바닷가 폐선 같은 쓸쓸한 배경에 입혀진 삶의 풍경들, 힘찬 망둑어처럼 물길을 거슬러 오르려는 노인의 꿈이 잔잔한 선율과 어우러져서 무리 없게 읽힙니다. 문득 금강하구언을 찾아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 만큼, 비록 빼어나진 못해도 글과 서사 양쪽 눈매가 참하게 다가왔습니다. 정진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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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1.02 23:02

[2015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심사평] "가슴속 각인된 아버지 모습 형상화"

심사 대상작품은 총 열 명의 작품 25편이었습니다. 젊음의 숨결보다는 중년 이후의 원숙함이 자리 잡은 본심 작품들의 행간에는 일상의 소재를 다루는 만만치 않은 필력이 나타나 있었습니다. 후반부 생을 문학세계 속에서 아름답게 가꾸어 보겠다는 결의가 두드러졌으나, 젊은 열기를 느낄 수 없는 것이 아쉬움이었습니다.대부분의 응모작들은 일상적 삶과 밀착된 소재들을 다루면서 그것들로부터 느낀 감흥이나 회한, 또는 과거의 아련한 기억 등 다양한 개인의 경험을 기술한 것들이었습니다. 글쓰기의 숙련도에 초점을 맞추어 심사자는 읽기를 거듭했습니다. 상당한 문학적 교양이 반영된 작품으로는 창(窓)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유수한 작가들의 작품을 끌어들여 창을 매개로 펼쳐진 인간사의 풍경을 숙고했습니다. 생활 속에서 터득한 살림살이의 지혜를 통해 누름돌과 같은 역할을 하는 어른이 필요한 시대라는 점을 강조한 누름돌도 공감이 가는 작품이었습니다.옛 추억 속의 나와 부모님의 삶의 모습, 또는 시아버지의 속정 깊은 사랑에 대한 회고 등을 다룬 작품들 중 달천 참외와 무성영화와 못갖춘마디를 집중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생을 성찰하는 깊이와 넓이를 포용할 수 있는 수필문학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은 심사자로서 큰 기쁨이었습니다.그러나 개인당 2편이나 3편에 이르는 응모작들이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다시 고려하였습니다. 최종적으로 못갖춘마디를 당선작으로 결정했습니다.못난 아들의 삶을 통해 우리의 가슴 속에 각인된 아버지의 모습을 형상화한 점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못갖춘마디는 망자의 아들과 그 아들의 업둥이가 지내주는 제사 이야기를 서두에 제시하면서 부족한 자식을 끌어안고 마지막까지 신뢰를 보낸 부성애(父性愛)를 부각시켰습니다. 진솔하고 담담하게 엮어나간 망자(亡者)에 대한 추억과 병치된 못갖춘마디와 같은 큰 오빠의 생애가 조화로운 무늬를 이룬 점이 못갖춘마디의 미덕입니다. 압축과 절제의 함축미와 여운을 갖춘 문학의 길이 수필에서도 실현될 수 있다는 신념을 끝까지 밀고 나가기를 바라며, 당선을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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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1.02 23:02

[2015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소감] "숙명처럼 끝없이 글쓰기 되새김질"

지친 몸을 누이는 늦은 밤에도 외양간 소는 끝없이 되새김질을 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생존을 위한 그들만의 숭고한 삶의 방식인지도 모릅니다. 저 역시 숙명처럼 끝없이 글쓰기를 되새김질 했습니다.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꼭꼭 씹어 내면 깊숙한 위(胃)에 쌓는 그 일은 온전히 외롭고도 쓸쓸한 내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울컥울컥 목구멍을 넘어오던 그것들을 운명처럼 함께 품어가고 싶었습니다. 기약 없는 날들이었지만 그 기약 없음을 사랑했습니다.들꽃이 피는 계절에는 그 사랑 또한 아득했다가, 강물이 불어 가로수가 잠기는 계절이면 처연하기도 했습니다. 아픔이었고 때로는 고통이었지만 그 조차도 진득이 품었습니다. 아득한 빛을 향한 그리움으로 살아온 시간들. 그러고 보니 삶이란 겪는 사람의 것이지 밖에서 바라보는 이의 것은 분명 아닌 가 봅니다.수필을 짝사랑하는 내 사랑의 도량형은 어떤 형태일까?불안하고 초초했지만 그냥 온전한 그 사랑 하나만으로 행복하고 싶었습니다.남다른 삶을 살아오면서 겪어야 했던 고통들이 꽃을 피우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못갖춘마디 같은 그 한 시간 한 시간이 있었기에 오늘의 제 악보가 완성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되새김질은 시작될 것이고 또 아파해야 하는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냥 이 기쁨을 가만히 음미하려고 합니다.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과 영광의 자리에 이름을 올려주신 전북일보에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 손 잡아주신 김영식 선생님께 감사드리며 시거리문학 회원 여러분들과 이 기쁨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매일 밤 물그릇 들고 나가 기도로 마음을 보태준 남편과 지켜보며 응원해주던 가족에게 사랑한다는 말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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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1.02 23:02

[2015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못갖춘마디 - 윤미애

그분이 오셨다. 섣달 열여드레 시린 달빛 받으며 오신 모양이다. 서걱대던 댓잎도 잠든 시각. 제주가 위패에 지방을 봉하자 열린 대문사이로 써늘한 기운 하나가 제상 앞에 와 앉는다. 선뜻 들어서지 못하고 망설이다 들어온 걸음일까. 촛불은 병풍에 두 남자의 실루엣을 그리며 천장 향해 솟는다. 허리가 꾸부정한 제주가 한 순배 술을 올리고 용서라는 절을 하자, 고개 숙이고 있던 그의 아들은 신뢰라는 절을 한다. 망자의 아들과 그 아들의 업둥이가 지내는 내 아버지 제사 날이다.큰 오빠는 아버지에게 못갖춘마디 같은 자식이었다. 깨진 유리온실 속의 시들어 가는 화초 같은 아들이었다. 가슴여미는 아픔으로 무섭게 스치거나 소용돌이치다가 비워진 쉼표와 마지막 마디의 음표가 만난 후에야 완성되는 그런 존재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 자식 때문에 더 많이 아파야했고 더 많이 내어주고 보듬었는지도 모른다.자식 셋을 연이어 잃은 아버지의 상심은 컸다. 품에 안아보지 못한 자식들로 인해 외아들로 자란 아버지는 한동안 고통 속에서 살았다. 그 일로 쫓겨난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찾아 나선 걸음에 얻은 자식이 큰 오빠였다. 그래서 그랬을까. 태어나자마자 골골대며 잦은 병치레로 부모님의 애간장을 어지간히도 태웠다. 시오리 신작로 길 아버지의 자전거 뒤에는 콜록거리며 담요에 쌓여 병원을 오가는 오빠가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아버지 생의 여린내기 음반 위에서 불안정하게 구르고 있는 선율처럼 위태로워 보였다.그 후, 내리 아들 딸 넷을 더 얻어 여린내기로 시작된 아버지의 삶은 음역을 넓혔다. 가난했지만 자식으로 인해 마음만은 부자로 살았던 그때, 아버지의 인생연주라는 선율은 안정감 위에서 봄 아지랑이처럼 다복한 꿈을 꾸며 따뜻하게 피어올랐다. 그렇지만 할아버지의 무릎을 독차지하고 응석만 늘어가는 큰오빠 때문에 형제간에 엄살, 정 투정이라는 나지막한 외침들로 아버지의 악보선율은 그리 매끄럽지는 못했다.약해진 마음이 더 문제였다. 허약한 몸을 무기삼아 오빠는 동생들의 내리사랑까지 자신의 것으로 여겼다. 형의 도움을 받아야 할 오빠들이 되레 신발 안 돌멩이 같은 그의 가방을 메고 먼 등하굣길을 오갔다. 나와 여동생도 노는 시간이면 손톱 밑 가시 같은 오빠를 살피려 달려갔다. 또래들한테도 따돌림을 당해 외톨이가 되어가는 그를 보호하기 위한 우리 형제들의 노력은 가히 필사적이었다.어쩌다 미처 그를 돌보지 못해 다치거나 앓아눕기라도 하는 날이면 아버지의 호된 꾸지람이 날아들었다. 그에 상반되는 벌도 달게 받아야 했다. 보통빠르기의 4분의 3박자, 내림나장조인 아버지의 선율은 못갖춘마디로 인해 가사와 마디가 불일치해 자연스럽지 못했다. 부드럽지도 않았다. 그로인해 우리들은 일찍이 가족이란 청하지 않아도 내리는 눈비와 같다는 것을 알았다. 그 거역할 수 없는 섭리 앞에 작은 나를 느끼며 순응하는 법부터 배워야 했다.나이가 들어도 오빠는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점점 더 게을러지고 나태해져 갔다. 맏이로써의 책임감도 신뢰도 저버렸다. 어렵게 벌어 보내온 다른 오빠들의 돈마저 사업자금으로 탕진했다. 부도를 내고 도망자 신세가 되었을 때에도 아버지는 모든 전답을 빚쟁이들한테 내어주고 오빠를 찾아다녔다. 미덥지 못한 오빠보다 더 이해하기 힘든 건 아버지였다. 우리는 하나, 둘 아버지 곁을 떠났다. 나 또한 평생 자식 편애하는 아버지를 원망하며 앙칼지게 대들어도 봤지만 그를 향한 당신의 믿음에는 도돌이표도 쉼표도 없었다. 그래도 어쩔 것인가. 혈육 인데. 같이 가야지 하면서.오빠는 서른 중반을 훌쩍 넘기고서야 결혼을 했지만 생산을 하지 못했다. 그 원인이 당신 아들한테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아버지는 나오지 않는 헛기침 두어 번으로 아린 속을 달래는 듯 했다. 장손으로 조상보기 부끄럽다며 양자들이기를 권하는 일가친척들의 등살에도 아버지는 반응이 없었다. 부실한 몸에 가진 것 없는 오빠에게 양자 줄 사람 또한 없어 보였다. 세포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분열이라는 뜨거운 대립과 융화의 과정을 거쳐야 하듯, 마디라는 능선을 불협화음으로 숨차게 넘어오던 아버지의 연주는 절정에서 숨고르기가 필요해보였다.그해 시월, 삶은 완벽하지도 아름답지도 않기에 맞잡을 두 손이 필요했을까? 누군가 대문 앞에 놓고 간 업둥이를 오빠는 숙명처럼 거두었다. 그리고 그 업둥이를 안고 온 사람이 바로 당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서는 조금씩 변해 갔다.마지막에야 완성되는 사람이 있다. 그 무엇에 대해 절실한 결핍을 느끼면서 아주 느리게 성숙했던 내 오빠가 그랬다. 똑똑하고 건강했던 형제들 속에서도 결코 낙오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힘이었다. 즉흥적으로 벌하고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실수도 게으름마저도 껴안고 용서하며 기다려주었던 아버지. 헌신과 평범함으로 못갖춘마디의 빈틈을 아우르고 포용력을 보여줌으로써 사랑과 구원이라는 완성된 연주를 이끌어 냈다.다시 돌아갈 수 없는 게 우리네 삶이다. 때론 놓친 삶이라도 되돌이표로 되돌려 다시 갖춘 삶을 살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그럴 수가 없다. 연주자들은 말한다. 못갖춘마디를 연주할 때는 앞에 한 박자 쉬는 부분을 명확하게 느껴야 된다고. 그래야만 막판 셈여림의 조절이 가능하다고. 그렇다면 아버지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걸까. 놓친 한 박자도 한 번 더 믿어주고 보듬어 주면 마지막에는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진리를.아버지의 말년은 평온했다. 오랜 병상생활을 하면서도 영특한 업둥이로 인해 일생 다하지 못한 즐거움을 누리셨다. 큰아들의 늦은 성공으로 여유와 효도를 받으며 꼭짓점의 마지막 음표를 완성한 후에야 생을 마감하셨다. 누군가가 그랬다. 결코 갈대는 약한 식물이 아니라고. 속에서 자라나는 새끼 갈대가 바람에 깔리지 않고 자라기를 바라며 지켜주다 저 혼자 힘으로 버틸 수 있을 때가 되어서야 몸을 뉘인다고. 갈대가 여름까지 쓰러지지 않고 서 있었던 그 이유처럼. 그렇게 살다 가셨다.아버지가 보인다. 생각을 접어보면 그의 사랑과 좌절도 보인다. 아버지를 아버지라는 틀 속에 가둬 놓은 채 기대하거나 요구하기만 했던 지난날들. 이상하다. 아이 다섯을 키우고 이제 겨우 아버지를 이해했을 뿐인데 사랑하게 되는 것은 나 자신인 것이. 놓친 못갖춘마디의 첫음절을 붙잡고 마디마디 넘어오던 아버지를 기억하면 내 안에 내재되어있는 꿈이 일어나 춤을 춘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드리는 제사는 나 자신과의 교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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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1.02 23:02

[2015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심사평] "밀도·울림 있어 신뢰할 만한 작품"

생명력을 가진 것들은 도태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도전하고 실험합니다.문학 역시 그러한 것은 생명체라는 증거일 것입니다. 독자들은 새로운 문학의 모습을 신춘문예 당선 작품을 통해서 발견하려고 기대합니다. 그 기대에 부응하려는 듯 올해에도 참신한 방향을 궁구하고 모색하려는 작품들이 많았습니다. 크게 환영할 만한 일입니다.그러나 무모하다 싶은 실험, 일체감과 통일성이 부족한 작품도 있었습니다. 안이한 타성에 젖어 있거나 목적의식이 두드러져 보이는 주제, 수사적 표현에서 독창성이 의심되는 작품들도 있었습니다.예선을 거쳐 올라온 아홉 사람 중에서 이정희 씨와 박복영 씨가 최종까지 남게 되었습니다.이정희 씨의 손이 만평이다는 여유 있는 호흡과 적절한 전환이 돋보이지만 처음 3행에 걸었던 기대가 아무런 암시도 없이 끝나버린 아쉬움이 컸습니다. 칼은 은유와 생략으로 간결미를 보인 반면 그만큼 추진하는 에너지가 부족했습니다.이에 박복영 씨의 갈매새, 번지점프를 하다가 최종 당선작으로 무난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박복영 씨의 다른 시들, 점묘화법, 소리의 걸음을 읽다 등도 비슷한 밀도와 울림을 보여주어 더욱 신뢰감을 갖게 되었습니다.내용도 없이 시끄럽고 현란한 작금의 세상에서 응답도 보상도 없는 문학을 사랑하고 추구하는 여러분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부디 여러분이 걸어가는 문학의 길에 눈부신 광명이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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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1.02 23:02

[2015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갈매새, 번지점프를 하다 - 박복영

아찔한 둥지난간에 올라 선 아직 어린 갈매새는 주저하지않았다.굉음처럼 절벽에 부딪쳐 일어서는 파도의 울부짖음을두어번의 날갯짓으로 페이지를 넘기고어미가 날아간 허공을 응시하며 뛰어내린 순간,쏴아, 날갯짓보다 더 빠른 속도로 하강하던 몸이 떠올랐다.한 번도 바람의 땅을 걸어본 적 없으므로 가는 발가락은 오므린 채 가려웠다.하강은 추락을 꿈꾸지 않는 법.가슴 깃털을 헤집고 파고드는 처녀비행의 속도는 두려움이 되지 않았다.끊임없이 밀려와 절벽에 부딪쳐 부서지는 파도소리를 꽉, 물고허공에 길을 찾는 갈매새가 잠시 수평선을 읽었다.굽은 부리에서 거친 파도의 현이 흘러나오자휜 바람줄을 따라 기우는 날개가 다시 팽팽해졌다.태어나서 처음 바람을 거스르는 동안 갈매새는 바람의 부피를 다 가늠할 수 있을까.포물선의 꼭지점에서 호흡을 가다듬었다.아슬아슬한 궤적이 허공에서 지워지고 바람줄을 따라가며바람이 풀어놓는 행의 단서를 찾는 동안 가슴 가득 차오르는 생의 씨앗들.의문들이 빠져나올 때마다 날개가 책장처럼 펄럭였다.갈매새가 날개를 당기며 내려다 본 벼랑 끝엔벗어둔 신발 같은 텅 빈 둥지 옆으로누군가 방생한 키 작은 해국들이코카콜라 병뚜껑 같은 머리에 노랗게 흰 뼈를 우려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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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1.02 23:02

[2015 전북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작] 엄마의 빨간 구두 - 최빛나

승아네 엄마도 삼 개월 만에 가출했잖아.가출이 아니라 돈 벌러 간 거라니까!그럼 소식조차 없는 이유가 뭔데?팽팽한 토크 배틀이 이어졌다. 외국인 엄마는 가출한다는 태수의 주장과 그럴 리 없다는 영호의 주장. 그 사이에 심판처럼 앉아있던 나는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모르는 비밀이 있다. 사실, 우리 엄마는 베트남 사람이다.성진아, 너는 어떻게 생각해?짐짓 심각한 얼굴로 영호가 물었다.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지만 머릿속엔 새엄마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게다가 어젯밤 있었던 일까지 떠오르면서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사물함의 교과서를 두세 권씩 집어 아무렇게나 가방에 챙겨 넣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야! 조성진! 갑자기 어디가?이따 축구하기로 했잖아!교실 문을 열고 뛰쳐나가는 뒤로 날 부르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답할 시간이 없었다. 정문 앞에 도착하니 시커먼 하늘에선 한두 방울 비가 떨어지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은 더욱 확실해졌다. 집을 향해 뛰는데 아이들이 말한 가출이라는 단어가 무섭게 쫓아왔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제일 먼저 신발장부터 살폈다.그 자리에 있어야할, 새엄마의 빨간 구두가 보이지 않았다. 안방에도, 부엌에도 엄마는 없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엄마를 찾아 뛰기 시작했다.안녕하세요. 나는 흐엉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커다란 갈색 눈동자를 굴리며 새엄마가 인사했다. 두 달 전, 처음 본 새엄마의 모습은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작은 몸집에 까무잡잡한 피부, 누런 치아. 눈에 들어오는 거라곤 촌스럽기 그지없는 빨간 구두뿐이었다.이 사람이 나의 새엄마가 된다니 머릿속이 깜깜해졌다. 언젠가 다문화 가정에서 태어난 진희에게 깜씨라고 놀렸던 일, 국제결혼 한 정태네 가족을 보고 아무 이유 없이 비꼬았던 일 등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갔다.아빠 정말 너무 하는 거 아니야? 친구들한테 보이는 내 입장은 생각해봤어? 내 생각을 조금이라도 했다면 이럴 수는 없는 거잖아!새엄마가 앞에 있는 것도 잊고 굵은 침을 튀어가며 흥분했다. 내 따발총 공격에 불같이 화낼 줄 알았던 아빠는 대답 대신 내 손을 꼭 잡아줬다. 다 이해한다는 아주아주 자상한 눈빛으로 말이다. 그건 담임 선생님의 백 마디 말보다 더 강압적으로 다가왔다. 에휴, 아빤 정말 고단수라니까. 나는 슬그머니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새엄마가 온 뒤로 좋은 점이라곤 아빠가 일찍 들어온다는 사실 한가지 밖에 없었다. 새엄마는 요리도 할 줄 몰랐고 한국말도 서툴렀다. 게다가 얼마 후 있을 운동회에 찾아올 생각만 하면 불안해 잠도 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베스트 영호에게만 살짝 털어놓을까 생각했지만 그 녀석도 백퍼센트 신뢰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친구들에게 차일피일 엄마 얘기를 미루고 있던 어느 무더운 여름날이었다.제대로 명중하겠는데?대박 재밌겠다. 일단 던져보자!친구들이 창가에 껌처럼 붙어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양손에는 빨갛고 파란 물풍선을 쥐고 있었다. 요즘 우리 학원에선 차가운 물을 볼록하게 채운 물풍선을 갖고 노는 게 유행이었다. 서로에게 던지거나, 지나가는 행인에게 기습적으로 떨어뜨려 골탕 먹이는 식이었다. 짓궂은 행동이었지만 무더위와 공부에 지친 우리에게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었다.뭐 재밌는 거 있어?나는 아이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아이들의 시선은 일제히 한 곳을 향해 있었다. 무심코 그곳을 바라봤다. 작고 검은, 익숙한 얼굴이 서 있었다. 새엄마였다. 그제야 학원 수업 마치고 새엄마를 치과에 데려다주라던 아빠의 문자가 번쩍 떠올랐다.물폭탄 맞으면 피부도 하얘지는 거 아니냐?충격으로 아프리카 갈지도 몰라.아이들은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태수의 손에선 물풍선이 떨어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새엄마를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물폭탄을 맞게 할 순 없었다. 나는 태수의 손을 황급히 잡고 소리쳤다.안 돼! 잠깐만!아이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뭐야? 갑자기 왜 그래?설마 네가 아는 사람이라도 되는 거야?태수가 좋은 먹잇감이라도 발견한 듯 눈이 매섭게 반짝였다. 평소 나를 라이벌로 생각하는 저 녀석에게 새엄마가 외국 사람이라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나는 말꼬리를 흐리며 대답했다.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태수가 물풍선을 힘껏 집어 던졌다. 퍽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은 황급히 창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나도 숨죽이고 몸을 웅크렸다.대박! 명중이야!아이들은 목표물이 홀딱 젖었다며 하이파이브를 하고 재밌어죽겠다는 듯이 배를 움켜잡았다. 하지만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차마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학원 수업이 끝나고 나올 때까지도 새엄마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에 젖은 차림 그대로였다. 아이들은 가지 않고 있는 새엄마를 보고 우릴 혼내려는 게 아니냐며 쑥덕거렸다. 어쨌든 나는 새엄마와 마주치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친구들 사이에 섞여 고개를 푹 숙이고 살금살금 빠져나갔다. 문밖으로 완전히 나오고 나서야 슬그머니 뒤를 돌아봤다.오 마이 갓! 새엄마와 정통으로 눈이 마주쳤다.으악! 걸렸다! 다들 튀어!새엄마가 나를 향해 손을 번쩍 들었다. 누런 이를 드러내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 모습을 본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도망쳤다. 멍하게 서 있던 내 손을 누군가가 잡아 당겼다. 얼떨결에 나도 뛰기 시작했다. 언뜻 새엄마의 실망스런 눈빛이 스쳤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여기서 뜀박질을 멈추면 나 역시 의심받을 거였다.집에 도착하자마자 새엄마가 왔는지부터 살폈다. 새엄마의 빨간 구두는 가지런히 제자리에 놓여있었다. 나는 새엄마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내 방으로 잽싸게 들어갔다. 생각을 떨치려 휴대폰 게임에 열중하기 시작했다.엄마 병원에 모셔드렸어?뒤늦게 온 아빠가 내게 물었다. 치통을 참아내는 엄마가 걱정된 모양이었다. 나는 통화하는 척 슬그머니 일어섰다. 아빠가 내 손에 들린 휴대폰을 빼앗으며 무섭게 말했다.엄마 병원에 모셔다드렸냐고!아빠의 이맛살이 구겨졌다. 아까 일을 사실대로 말하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어떡하지? 못 봤다고 잡아뗄까? 고민하는 사이 새엄마와 눈이 턱하니 마주쳤다. 커다란 두 눈 가득 걱정스러움이 가득했다.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사실대로 말하려는데, 그보다 더 먼저 새엄마가 이렇게 말했다.학원을 찾지 못했습니다. 흐엉 실수입니다. 미안합니다.내 심장이 쿵하고 떨어졌다.식사 시간, 음식을 씹지 못하는 새엄마의 얼굴이 보였다. 몸이 안 좋은지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차가운 물폭탄을 맞아서 더 심해진 것이 분명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평소에는 깨작거리고 안 먹던, 엄마가 해준 김치찌개를 보란 듯이 한 숟갈 크게 떴다. CF찍는 배우처럼 맛있어 죽겠다는 얼굴로 꿀꺽 삼켰다.하지만 새엄마는 나를 보지 않았다.몸이 안 좋습니다. 그만 먹겠습니다.새엄마는 이렇게 말하고 소파 위에 작은 몸을 웅크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데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따끔거렸다. 나는 당장이라도 새엄마에게 달려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새엄마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자신조차 없었다. 결국 그렇게 찜찜한 하루가 지났다.그리고 다음날 새엄마가 사라진 것이었다.엄마! 엄마!집안 곳곳을 다 뒤졌다. 거실에도, 안방에도, 그 어디에도 엄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급한 마음에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의 휴대폰은 꺼져 있었다. 엄마가 사라졌다고 문자를 남기는데 미처 닦지 못한 빗물이 휴대폰 액정 위로 뚝뚝 떨어졌다. 나도 모르게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엄마는 대체 어디를 간 것일까? 아이들 말처럼 정말 집을 나간 것일까?엄마를 찾으러 무작정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 사이 빗줄기는 더욱 굵어져 있었다.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내 눈은 빠르게 엄마를 찾았다. 언젠가 새엄마와 함께 지났던 익숙한 길이었다. 새엄마가 부끄러워 한 발짝씩 늘 앞서 걸었던 길. 이곳에서 나는 목이 터져라 엄마를 부르고 있었다.엄마 없어도 무섭지 않지? 성진이는 이제 다 컸으니까 어떤 두려운 상황이 와도 다 이겨내는 거다?친엄마의 마지막 얼굴이 떠올랐다. 시원한 에어컨이 나오는 피자집이었다. 최신형 게임기를 손에 쥐어주며 엄마는 마지막 유언처럼 내게 그렇게 말했다. 그렁한 눈빛으로 엄마가 나를 보는 순간에도 나는 새로운 게임에만 정신이 팔려 알지 못했다. 그것이 엄마와 함께 한 마지막 식사라는 것을. 그 후로 다시는 엄마를 볼 수 없다는 것을.무서웠어. 새엄마가 나를 떠날까봐. 내가 마음을 열면 또 다시 달아날까봐 두려웠던 거야. 바보같이.마음이 나에게 속삭였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속마음이었다. 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새엄마가 이대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하자 온몸에 힘이 빠졌다.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비에 젖은 온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그때였다. 터벅터벅 신발 하나가 눈앞에 멈춰 섰다. 익숙하게 보아온, 빨간 구두였다. 설마, 설마. 나는 터질 것 같은 심장을 꾸욱 누르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나의 새엄마가 서 있었다.비가 와서 우산 갖다 주려고 했습니다. 어떡해. 다 맞았습니까?엄마의 손에는 내 파란색 우산이 들려있었다. 새엄마는 황급히 손수건을 꺼내 비에 젖은 나를 닦아주었다. 호수처럼 깊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툭하고 울음이 터지더니, 어찌할 새도 없이 와르르 흘러내렸다.어느새 비가 갠 하늘 위로 무지개가 고운 다리를 놓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햇살에 비친 새엄마를 가만히 바라봤다. 새엄마가 나를 향해 해바라기처럼 수줍게 미소 지었다. 내 눈에 더 이상 새엄마는 타지에서 온 낯선 사람이 아니었다. 햇살보다 더 빛나고 아름다운, 나의 진짜 엄마였다.엄마는 내가 밉지 않아?엄마는 대답 대신, 다 이해한다는 눈으로 내 손을 꼭 잡아줬다. 언젠가 아빠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아주아주 자상한 눈빛으로 말이다. 칫, 누가 부부 아니랄까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그때였다.야! 조성진! 거기서 뭐하냐?멀리 나를 부르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축구를 끝내고 왔는지 태수의 손에는 축구공이 들려있었다. 그제야 축구 약속도 어기고 부랴부랴 집으로 뛰어갔던 내 자신이 생각났다. 새엄마는 친구들과 나를 번갈아보더니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숙였다.엄마 먼저 가겠습니다.작은 목소리로 내 귓가에 속삭였다. 나는 뒤돌아서는 엄마의 손을 황급히 붙잡았다.괜찮아!엄마가 놀라 나를 돌아보았다. 나도 엄마를 바라보았다. 나는 엄마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이제는 정말 괜찮을 것 같았다.야, 축구도 안 하고 거기서 뭐하냐?나를 부르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아이들이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엄마의 손을 꼭 잡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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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1.02 23:02

[2015 전북일보 신춘문예 동화 심사평] "독창· 참신성 아쉬워…동심의 시각으로 봐야"

신춘문예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독창성과 참신성입니다. 기존의 모습과 다른, 실험정신이 충만한 동화가 우리의 동화문단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그런데 올해 전북일보 신춘문예 응모 동화는 제재나 형식이 참신하지 못하고 고루하여 그러한 기대에서 다소 벗어났습니다.최종심에 오른 5편의 작품을 보면 정유나의 낮은 계단은 지체부자유자가 보행보조기를 타고 서른 두 계단을 극복하니 높게 버티고 있던 계단이 낮게 보였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보행기를 고철이라고 한다든지, 어머니가 집을 나가고 아버지가 경마에 빠지는 등 작위적 불행한 환경 도출은 극복의지의 당위성을 희석시켰습니다.하늘을 나는 백층이는 산동네에 백층이 넘는 계단을 비행기 그림으로 변신을 시켰더니 주인공을 태우고 밤하늘을 날았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동화에서 제목의 기능은 동화의 핵심인데 백 계단을 백층이라 한 것과 깔딱이란 별칭이 낯설고 계단과 주변의 애환이 조화를 이루지 못했습니다.엄마 인증제는 비록 엄마 인증 기준에는 미달되었지만 자녀 사랑은 특 1급이라는 내용인데 엄마 인증제 필요성의 당위성이 부족했습니다.꿀이와 별이는 꿀벌들에 대한 다양한 지식을 동화에 삽입시켰으나 과학 동화에 가까웠고 특히 동화 분량이 20매 내외인데 40매를 웃돌아 기준에 미달했습니다.최빛나 씨의 엄마의 빨간 구두는 그동안 많이 다룬 다문화 가정 소재여서 참신성은 결여되었으나 새 엄마로 들어온 외국인 엄마와의 갈등 해소 과정을 문장 및 화법의 간결함이나 짜임새 있는 구성을 통해 공감을 주었습니다. 팽팽한 토크 배틀 등 약간의 동화적 부적절한 언어가 거슬렸지만 가능성을 높이 사서 당선작으로 뽑았습니다.동화작가로 입문하려는 분들에게 고언을 하고자 합니다. 시대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정보시대로 바뀌고 있습니다. 따라서 동화의 패러다임도 바뀌어야 합니다. 힘든 현실의 배경을 작위적으로 설정하고 동심이 아닌 어른의 시각으로 무리하게 교시적 교훈을 주려는 태도와 가슴으로 감동을 주지 못하고 머리로 짜내는 캐릭터 설정을 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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