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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감 2022 시민기자가 뛴다] 상상하는 힘, 살아가는 힘

최근에 책방에서 하는 독서모임에서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었다. 우주에 대한 방대한 대서사시라 할 수 있는 ‘코스모스’는 읽는 우리들에게 ‘우주적인 시각’을 선물했다. 우주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지구는 작고 창백한 푸른 점에 불과하고 우리는 그 별에 사는 아주 작은 미물에 불과하다. 우주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우리가 겪는 매일의 사소한 일과들이 떠도는 먼지만큼이나 가볍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사소한 일과 속에서 우리는 매일 전쟁을 치른다. 어떤 이는 주식에 투자한 게 잘못되어 고통 속에 살고, 어떤 이는 아직 받지 못한 임금 때문에 투쟁을 하고 누군가는 뜨거운 태양 아래 깃발을 나부끼며 불평등을 이야기하고, 누군가는 거듭되는 실패 속에서 눈물을 흘린다. 우리는 왜 태어나서 이런 고통들과 마주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 삶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아름다워 보이는 밤하늘의 별들에게 질문을 던져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가 우주를 통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코스모스’책을 번역한 옮긴이의 말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우주인이 달나라에 발자국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현대 과학과 공학의 눈부신 발달 때문만은 아니라고 늘 생각해 왔습니다. 저는 달을 두고 노래한 시인들이 더 중요하고 큰 역할을 했다고 믿습니다. 우리네 삶에서 소망 없이 이루어진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따지고 보면 시인이 우리 가슴에 심어 준 꿈의 위력이 과학자들로 하여금 달나라 여행을 설계하게 했을 것입니다.’ 즉, 옮긴이는 우리에게 우주를 상상하는 힘이 없었다면 굳이 로켓을 쏘아 올리지도 달에 갈 일도 없었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 ‘상상하는 힘’은 결국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내일을 상상해야만 내일을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얼마 전 제주에 한 달 살기를 간다고 해놓고 결국 완도 바다에서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비극적인 가족이야기가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 가족들이 그 동안 어떤 고통 속에 살아왔는지 우리는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삶을 내려놓기까지 그들에게 ‘내일’은 어떤 존재였을까 생각해본다. 아무리 좋은 생각을 하려해도 결코 좋은 것이 상상되지 않는 ‘내일’이라는 것은 얼마나 그들을 지치게 만들었을까. 주변에 그 어떤 도움을 청할 사람도, 그 어떤 제도도 그들의 곁에는 없었던 것일까. 내내 마음이 쓰였던 가족의 마지막이었다. 아주 작게라도 희망을 상상할 수 있는 내일이 있다는 것은 우리를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되지만, 개인만의 의지로만은 안 된다. 우리가 속해있는 사회, 국가가 있는 이유도 그런 내일을 함께 만들어가기 위해서이지 않을까.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는 지구를 이대로 두고 볼 수 없기에 어떻게든 이 위기를 극복할 상상을 하고, 다시 확산되고 있는 코로나19에 대비해 우리는 다시 접종을 하고 마스크를 여민다. 그러나 우리가 감히 상상해도 안 되는 현실이 지금 시대에도 존재한다. 예를 들면 서울의 집값을 보자, 상상할 수 있는 금액을 넘어섰다. 금수저가 아닌 이상, 2030들에게는 그저 그림의 떡에 불과한 내 집 마련의 꿈이다. 그들의 상상 속엔 ‘서울에 집’은 없다. 이상한 나라다. 평생 열심히 살아도 집을 살 수 없는 나라. 그렇다면 내가 사는 전주의 내일은 어떤가. 어떤 상상을 하게 만드는가. 전주는 상상하기 좋은 도시다. 아직은 여백이 많아 보인다. 그만큼 어떤 면에선 낙후돼있다는 이야기도 된다. 그러나 최근 수많은 도서관들이 생겼다. 도서관을 반기는 시민들이 많아졌다. 먹고 사는 문제와 직결되지는 않지만, 상상할 수 있는 힘을 키워주는 곳임에는 분명하다. 덕진공원 안에 새로이 생긴 연화정도서관과 서학동 예술마을안에 새로 자리한 서학동예술도서관만 봐도 그렇다. 그냥 누구라도 들어갈 수 있는 공공의 장소가 훌륭하다.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게 반겨주는 곳이 돈 한 푼 없이도 갈 수 있는 도서관이며, 우리는 그 안에서 무한하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전주는 상상이 현실로 이뤄지는 데에는 시간이 많이 필요한 도시이기도 하다. 이제는 인문도시로서 질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주어졌으니 전주시민들이 함께 더 좋은 내일을 상상하고, 그 상상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다양한 판을 짜야 한다. 많은 일자리가 창출되는 상상, 좋은 기업이 들어오는 상상, 전주만큼은 모두가 내 집에서 사는 상상, 기후 위기에서 벗어나 에너지를 자력으로 만들어내는 도시가 되는 상상, 다른 도시와는 다른 개발이 이뤄지는 상상, 전주만의 모습을 가지고 자부심을 갖게 되는 상상. 전주에 살면서 이런 내일을 상상한다면 지금 하는 일이 조금은 버겁고 힘들더라도 버티게 하는 힘이 될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나에게 세상을 구할 수 있는 단 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55분은 문제를 정의하는 것에 사용하고 나머지 5분은 그 문제를 푸는 데 쓸 것이다’고 말했다. 답보다 문제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한 것이다. 전주 시민이라면 이제 전주의 문제를 파고들자. 어떤 것이 필요하고, 어떤 것이 불필요한지를 직시해야 한다. 문제가 뭔지 알면 해결도 쉽다. 그것이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지역의 내일을 보다 더 낫게 상상하는 힘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이지선 잘 익은 언어들 대표

  • 기획
  • 기고
  • 2022.07.06 17:17

[단체장에게 듣는다] 우범기 전주시장 “전주 바꿀 마지막 기회, 속도 내겠다”

우범기 제40대 전주시장이 지난 1일 취임식을 갖고 본격적인 업무에 돌입했다. 우 시장은 취임식에서 “이제는 강한 경제가 이끄는 대변혁을 통해 전주가 다시 전라도의 수도로 우뚝 설 때”라면서 “전주의 큰 꿈, 전주시민 여러분과 함께 꾸고, 만들고, 나누자”며 전주의 대변혁을 피력했다. 민선8기를 시작하는 우 시장에게 포부와 시정 방향, 계획 등에 대해 들어봤다. 전주시장으로서 직무를 시작하셨습니다. 앞으로의 포부는. “전주는 강한 경제를 꿈꾸고 있습니다. 탄소, 수소, 드론 등 미래산업이 꽃피는 전주를 시민과 함께 만들어 가겠습니다. 과감한 규제 완화와 공격적인 투자유치는 꿈이 이뤄지는 속도를 앞당길 것입니다. 대학이 인재를 육성하고, 행정이 기업을 뒷받침해서 기업이 신바람이 나 적극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겠습니다. 전주의 일대 도약은 교통 중심지로 거듭나는 전주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천안, 아산, 세종, 전주로 이어지는 직선 철도를 꿈꾸고 새만금, 전주, 김천으로 이어지는 철도 역시 그리고 있습니다. 새만금, 전주, 대구, 포항으로 뚫리는 고속도로 등 전주가 전라북도, 특히 전북 동부권의 성장과 발전을 견인하는 교통 중심지로 거듭날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오랜 역사와 전통의 도시인 전주의 문화산업을 다른 산업과 연계해 무궁무진한 응용 영역을 만들어 문화적 자산이 실물경제의 흐름으로 이어져 문화적으로 부강하고 경제적으로 튼튼한 전주를 만들어 가겠습니다.” 민선8기 전주시정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가실 계획인가요. “민선8기 전주시정의 목표는 ‘전주, 다시 전라도의 수도로!’입니다. 세부적으로 ‘천년 미래를 여는 전주의 큰 꿈’, ‘시민이 부자 되는 강한 경제’, ‘글로벌 산업으로 우뚝 서는 문화’, ‘일상에서 누리는 신바람 복지’의 네 가지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전주의 대변혁은 시민의 명령이고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과제입니다. 4년 임기 동안 자리에 연연해 좌고우면하는 일은 결단코 없을 것입니다. 전주를 우뚝 세우겠다는 시민과의 약속을 가슴에 새기고 전진할 것입니다.” 일자리가 최고의 복지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앞으로 일자리 정책 방향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전주형 일자리 5만 개’를 창출해 떠나는 도시가 아닌 돌아오고, 찾아오는 도시 전주를 만들겠습니다. 대기업 유치, 금융공공기관 이전, 중소기업 육성, 전주만의 문화자산을 활용해 질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 나갈 계획입니다. 이를 위해 기업의 이전·창업 보조금을 지원하고 투자유치보조금 지원, 지방세 감면 등 다양한 혜택으로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겠습니다. 또 전주 입주기업에 대한 투자 확대 등을 적극 뒷받침해 지속적인 투자가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전주-완주 통합을 공약으로 내세우셨습니다. 어떻게 추진하실 계획이신가요. “전주-완주 통합에 있어 중요한 두 가지 시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왜 필요한가’이고 다른 하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입니다. 필요성에 대해서는 전주와 완주의 통합 없이는 전주와 완주뿐 아니라 전북의 발전이 어렵다는 말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도시의 팽창 과정을 겪지 않고서 제대로 발전한 도시는 없습니다. 광주광역시가 전라도 제일의 도시가 된 것은 광산군과 송정시를 통합해 개발했기 때문이고, 청주시도 청원군과 통합한 이후 인구 85만 시대를 연 데 이어 100만 도시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전주-완주가 통합되면 대기업 유치 속도가 상당한 탄력을 받을 것이고, 하나 된 전주-완주는 새만금과 함께 전북의 발전을 이끌 양대 축이 될 것입니다. 이 두 개의 축이 경쟁하면서 발전하는 과정이 진행되다 보면 자연스럽게 전북이 독자권역으로 성장해 나갈 것이고 그래야 타 시도와의 협상 또는 경쟁도 가능해집니다. 추진 방향은 전주의 통 큰 양보를 통한 두 지역의 상생발전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완주지역은 통합시청 건립을 비롯한 복합행정타운을 구축해 ‘강소형 세종시’ 모델로 조성하겠다는 구상입니다. 과감하고 속도감 있게 개발된 세종시처럼 완주지역을 통합시의 행정중심지로 집중 개발해 국제공항과 신항만이 들어서는 새만금의 배후도시로, 나아가 행정수도 세종시의 배후도시 역할을 할 수 있게 육성할 계획입니다. 현재의 전주시 청사 자리에는 융복합 초고층 빌딩을 건설해 전주 구도심의 랜드마크로 조성하고자 합니다. 이 융복합 초고층 빌딩에는 전주완산경찰서 등 공공기관을 이전해 입주시키고 아파트형 공장을 비롯한 창업과 창작의 공간, 문화예술 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입니다. 기업 유치도 통합 전이라도 기업의 입지나 요구가 완주지역에 적합하다면 전주나 완주를 가리지 않고 유치해 나가겠습니다.” KTX 천전선 노선 신설을 공약하셨습니다. “전주는 한때 5대 도시로 불렸지만 6대 도시, 다시 7대 도시로 밀렸고 지금은 도시의 순위에서 거론조차 되지 않고 있습니다. 7대 도시에서 순위권 밖으로 사라진 쇠락은 불과 40여 년 만에 진행된 일입니다. 이제 전주는 꿈을 크게 가져야 합니다. ‘천안아산~세종~전주’로 이어지는 천전선 KTX 직선 노선 신설 공약은 이런 맥락에서 나왔습니다. 현재의 KTX 전라선 노선이 오송역을 우회하면서 호남은 접근성과 비용 등에서 지속적인 불이익을 받고 있습니다. 천안과 세종, 전주로 이어지는 KTX 노선이 신설되면, 전주, 세종 간 30분 생활권이 실현됩니다. 여기에 서울과의 접근성도 획기적으로 높아져 관광객 유입, 기업 유치 등 산업성장의 마중물 역할이 가능해집니다. 인구소멸의 시대에서 KTX 천전선은 전주와 전북 동부권을 살릴 수 있는 대안입니다. 또한 KTX 천전선은 남원~구례~순천으로 이어지는 시발점이 될 것입니다.” 대한방직 부지와 전주종합경기장 개발에 대한 입장은. “이른 시일 내에 관계자들을 직접 만날 생각입니다. 비공식적인 만남이 아니라 공식적인 만남이 될 것이고 투명하게 논의를 진행하겠습니다. 기본적으로 민간이 투자하겠다는데 발목을 잡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특히 전주는 민간을 찾아다니며 투자해 달라고 해야 하는 상황인데 제재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얼토당토않은 수익을 챙기는 건 안 되지만, 기업이 투자했을 때 수익은 인정해 줘야 하고, 그 수익의 일정 부분은 시민에게 돌려줘야 합니다. 법적으로 기부채납 비율이 정해져 있지만 별도의 논의는 가능합니다. 그런 부분들까지 종합적으로 논의할 생각입니다. 대한방직 부지와 전주종합경기장 개발은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합니다. 이를테면 컨벤션을 각자 지어서 작은 컨벤션 2개가 전주에 있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종합경기장에 컨벤션이 들어서면 대한방직 터에는 컨벤션을 짓지 않아도 된다는 식입니다. 다만 광주의 김대중컨벤션센터 1관과 2관을 합한 크기만큼은 지어야 장기적으로 효용이 있습니다. 개발은 시민의 편의와 혜택을 보장하고 전주발전에 기여하는지를 종합적으로 판단해 진행하고자 합니다.” 규제완화와 재개발·재건축을 강조하셨습니다. “도시의 성장과 발전 과정을 보면 구도심에서 외곽으로 확장했다가 다시 구도심이 개발되는 패턴을 보입니다. 이를테면 구도심이 좁은 데 비해 땅값이 올라가면 행정과 민간이 도시 외곽을 개발하고 이 과정에서 도시는 확장되지만 구도심은 낙후하고 슬럼화됩니다. 또 외곽 확장이 한계를 드러내면 재개발, 재건축 과정을 거쳐 구도심이 다시 발전하게 되는 식입니다. 그런데 전주는 외곽 개발은 느리게 진행되고 있고 구도심의 재개발, 재건축은 시작도 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구도심이 층수 제한으로 묶여 있으니 기업은 수익을 낼 수 없어서 투자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처럼 놔두면 전주는 성장, 발전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규제완화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전주의 주택보급률이 110%니까 그만 짓자’고도 하지만 이는 시민의 욕구를 간과한 이야기입니다. 30년 이상 된 아파트, 작은 규모의 아파트에서 사는 사람은 큰 아파트, 새로운 아파트로 이사하고 싶은 바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재개발, 재건축은 미래형 주택으로 선순환하고 시민의 욕구에 부응하는 것입니다. 시장 직속으로 재개발·재건축팀을 꾸려 직접 챙기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시민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전주는 역사, 문화, 경제적으로 자랑스러운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산업화시대를 거치면서 30~40년 만에 낙후된 도시의 오명을 쓰게 됐습니다. 이제 우리는 20~30년 미래를 보고 전주를 설계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민주주의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이 있고 다양한 문화자산을 갖추고 있습니다. 지금 전주는 큰 그림, 큰 뜻을 가지고 미래를 준비해야 할 때입니다. 자치단체장도 임기 내에 할 수 없으니까 시도조차 하지 않는 자세를 취해서는 안 됩니다. 30년 안에 자랑스러운 도시, 전주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는 비전을 가지고 정진해야 합니다. 때로 생각이 다른 부분이 있으면 소통하고 협의하면서 한뜻을 모아서 전주를 발전시켜 나가겠습니다. 그 길에 전주시민들이 함께 해주시길 바랍니다.”

  • 기획
  • 강정원
  • 2022.07.04 16:47

[참여&소통 2022 시민기자가 뛴다] 스스로 선택하는 죽음

인간에게 죽을 권리(right to die)가 있을까. 생명의 주체인 인간이 죽음의 시기와 방법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논의는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그리고 인간의 수명이 길어지고 의학이 발달하면서 죽을 권리는 점차 폭넓게 인정하는 추세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오는 용어가 웰다잉, 호스피스 완화(또는 연명)의료, 안락사, 자연사, 존엄사 등이다. 최근 국회에 제출된 조력존엄사를 인정하자는 법률안도 같은 맥락에서 나왔다. 이를 정리하면 죽을 권리는 연명의료 중단 → 의사조력사(자살) → 자발적 안락사 등의 3단계로 진행되며 우리나라는 이 중 2단계 문턱에 와 있는 셈이다. 인간이 스스로 선택하는 죽음, 즉 죽을 권리는 자살의 권리, 연명치료 거부의 권리, 의사의 도움을 받아 죽을 권리 등으로 나눌 수 있다(문재완, 2020). 첫째, 자살의 권리다. 자살은 서구에서 일찍부터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닥쳤을 때 내릴 수 있는 이성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해 훌륭한 죽음으로 간주했다. 그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조력자살과 안락사를 사회적으로 용인된 평범한 행위로 본 것이다. 그러던 것이 기독교의 영향이 커지면서 자살을 살인과 마찬가지로 죄악시했다. 다시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들어 자살은 전적으로 개인 자유의 문제라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종결할 수 있는 권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히 향유하는 권리라는 것이다. 둘째, 연명의료(치료) 거부의 권리다. 흔히 존엄사 또는 소극적 안락사라 불린다. 여기서 연명치료는 의학적 관점에서 의료행위를 시행하더라도 환자를 치료할 수 없는 상황에서 환자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행해지는 치료를 의미한다. 연명의료 결정법(제2조 4)은 더 구체적으로 “심폐소생술, 혈액 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 및 그 밖에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의학적 시술로서 치료효과 없이 임종과정의 기간만을 연정하는 것을 말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연명의료에 관한 논의는 2009년 ‘세브란스병원 김 할머니 사건’에서 본격화되었다. 당시 76세의 김 할머니는 폐암 발병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검사를 진행 중 갑자기 의식을 잃었다. 소위 식물인간 상태에서 인공호흡기와 같은 생명연장 장치에 의존해 중환자실에서 누워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자 가족들은 평소 할머니의 뜻이라며 병원 측에 인공호흡기 제거를 요청했다. 하지만 병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법정소송에 이르게 되었다. 이와 관련해 대법원은 “환자가 회복 불가능한 사망단계에 진입하였고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환자의 의사를 추정할 수 있는 경우라면 해당 환자에 대한 연명치료를 중단 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이어 헌법재판소도 “연명치료 중단에 관한 자기결정권이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으로 인정되고, 이 권리에 입각하여 회복 불가능한 사망의 단계에 진입한 환자의 경우 무의미한 연명치료 장치제거를 허용한다”고 결정했다. 이후 존엄사법으로 불리는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이 2016년 제정되었고 2018년 2월 4일부터 시행되었다. 셋째, 의사의 조력을 받아 죽을 권리다. 이는 전문가인 의사의 도움을 받아 죽는 자살의 한 유형이다. 의사조력자살(physician-assisted suicide) 또는 의사조력사(physician-assisted death)라 한다. 의사가 회복 가능성 없는 환자에게 죽음을 초래하는 정보와 도구를 제공하고 환자가 스스로 죽음에 이르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의사는 도움을 줄뿐이기 때문에 형법 제 252조의 제2항 자살방조죄의 처벌을 받지 않는다. 지난 6월 15일 더불어민주당 안규백 의원 등 12명의 의원이 발의한 일명 조력존엄사법(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법률안)은 현행법이 임종과정만의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나 임종과정에 있지 않는 환자라도 회복 가능성이 없는 경우 이를 인정하자는 취지에서 제안되었다. 말기환자로서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는 환자의 경우 본인이 희망하면 담당의사의 조력을 받아 삶을 스스로 종결할 수 있도록 환자에게 삶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주자는 것이다. 이 법률안에서 조력존엄사를 희망하는 사람은 보거복지부 소속의 조력존엄사 심사위원회에 결정을 신청하도록 하고 있다. 또 대상자 결정일로부터 1개월이 경과한 후 본인이 담당의사 및 전문의 2명에게 조력존엄사를 희망한다는 의사표시를 한 경우에 한해 이행토록 하고 있다. 이에 대해 호스피스·완화의료 학회는 “‘의사조력을 통한 자살’이라는 용어를 ‘조력존엄사’라는 용어로 순화시켰을 뿐 치료하기 어려운 병에 걸린 환자가 의사의 도움을 받아 자살하는 것을 합법화한 것으로 생명경시 풍조를 유발할 위험이 크다”고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이들은 “현행법은 호스피스 돌봄 이용이 암 등 일부 질환에만 국한되고 이 조차도 21.3%에 그쳐 존엄한 죽을 위해서는 존엄한 돌봄이 선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70대 회원들로 구성된 ‘노년 유니온· 내 생애 마지막 기부클럽’은 한발 더 나아가 안락사법 도입을 촉구하는 성명을 냈다. 증가하는 연명치료 거부 우리나라 사람들은 안락사나 의사조력자살 합법화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질까. 이에 대해 지난해 3~4월 서울대병원 가정의학과 윤호영 교수팀이 국민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매우 동의한다’ 61.9%, ‘동의한다’ 14.4% 등 찬성률이 76.3%를 차지해 압도적으로 높았다. 2016년 50%에 비해 크게 높아진 것이다. 안락사나 의사조력자살이 국민적 공감대를 얻었다고 볼 수 있다. 세계적으로 의사조력자살 혹은 직접적 안락사를 허용하는 나라는 스위스·네덜란드·벨기에·스페인·룩셈부르크·캐나다·미국(10개 주)·호주·뉴질랜드·콜롬비아 등 10개국에 이른다. 존엄사법에 따르면 19세 이상 우리나라 국민은 누구나 등록기관을 찾아가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할 수 있다. 등록기관은 보건소와 의료기관, 비영리법인, 건강보험공단 지소와 국가생명윤리정책원 등 전국 567개소가 지정돼 있다. 이와 함께 지난해 12월 법 개정으로 올해부터 새롭게 노인복지관이 지정 대상에 포함됐다. 전북의 경우 전북대병원, 예수병원, 원광대병원, 대자인병원, 전주병원, 고려병원 등 19곳이다. 이 의향서는 연명의료 정보처리시스템의 데이터베이스에 보관되어야 법적 효력을 인정받을 수 있다. 또한 연명의료계획서는 말기환자 또는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요청에 의해 담당의사가 작성하며 종합병원 등 328개 의료기관이 지정돼 있다. 2022년 6월말 현재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자는 134만 8199명에 이른다. 등록 첫해인 2018년 말 8만 6691명에 비해 대폭 증가했다. 성별로는 여성이 69.0%로 남성 31%에 비해 두 배가 넘는다. 연명의료계획서는 9만 1673명이 작성했다. 전북의 경우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자는 전국의 6.0%인 8만 891명, 연명의료계획서 작성자는 3.0%인 2750명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조상진 전 전주시 노인취업지원센터장

  •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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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7.04 16:46

[지역 상생의 길 - KTX광명역세권에서 배운다] ⑫ 롯데프리미엄 아울렛이 들어온다고?

KTX 광명역세권의 롯데프리미엄 아울렛 입점은 광명시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복병이었다. 이케아는 KTX 광명역세권 부지 78,198㎡를 토지 소유주인 LH공사로부터 매입, 건물 2개 동을 신축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 가운데 1개 동 부지를 광명시와 사전 논의 없이 KB자산운용주식회사에 매각했다. KB자산운용주식회사는 이 부지를 매입해 롯데쇼핑주식회사와 장기임대 계약을 체결했다. 롯데쇼핑은 이곳에 롯데프리미엄 아울렛 매장을 입점시킬 계획이었다. 이런 롯데쇼핑의 계획은 입점 수순을 밟기 전에 언론에 보도되면서 알려졌다. 이후 2013년 12월 17일 이케아가 광명시에 건축허가 변경 신청을 하면서 관련 사실이 확연히 드러났다. 건축주가 이케아에서 이케아와 롯데쇼핑으로 바뀐 것이다. 이것을 시작으로 롯데쇼핑은 이케아 부지에 대규모 의류점포 매장인 롯데프리미엄 아울렛 입점을 본격적으로 추진한다. 당시 7호선 전철역 광명사거리역 주변에는 60여개의 패션의류매장이 밀집해 ‘광명 패션문화의 거리’를 이루면서 영업을 하고 있었다. 롯데프리미엄 아울렛 입점 소식이 전해지자 광명 패션문화의 거리에서 패션의류매장을 운영하는 중소상인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롯데프리미엄 아울렛 입점으로 직격탄을 맞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패션문화의 거리와 가까운 영등포역이나 가산디지털단지에 다양한 형태로 입점한 아울렛과 패션복합몰 때문에 매출에 타격을 입고 있던 터라 롯데프리미엄 아울렛 입점은 생존을 위협하는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이들 패션 의류 중소상인들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2014년 1월 23일, 광명시의회를 방문해 롯데프리미엄 아울렛 입점 반대 입장을 밝히면서 중소상인 보호와 대책마련을 요구했다. 또한 이들은 KTX 광명역세권 개발 업무를 담당하는 미래전략실을 찾아가 롯데프리미엄 아울렛 유치를 강력히 항의하기도 했다. 이때 롯데프리미엄 아울렛 입점 업무를 담당하면서 상생협상을 중재했던 김선태 당시 광명시 미래전략실장의 말을 들어보자. “롯데쇼핑이 직접 토지를 매입해 건물을 짓고 입점하려면 지역주민들의 엄청난 반대 때문에 입점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회적인 방법으로 땅을 임대해 건물을 짓고 들어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비교적 쉽게 진출할 수 있기 때문이죠. 다른 지역에서도 이런 방법으로 진출한 사례가 많다고 합니다.” 롯데프리미엄 아울렛 입점이 공식화되자 현황 파악과 함께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김선태 미래전략실장, 신세희 지역경제과장 등 관련 부서 공무원들은 롯데프리미엄 아울렛 이천점을 방문했다. 코스트코와 이케아 입점 때와 마찬가지로 중소상인들이 피해를 입지 않고 롯데프리미엄 아울렛과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기로 결정했다. 사실 코스트코, 이케아 입점 등의 대형 유통기업 관련 업무는 기업경제과 담당으로 신세희 과장과 민문식 팀장이 맡았으나 양기대 당시 광명시장은 롯데프리미엄 아울렛 입점 업무를 미래전략실로 배정했다. 업무 분담의 효과적인 측면을 고려한 것도 있지만, 김선태 실장 때문이기도 했다. 김선태 실장은 공무원으로는 보기 드물게 배짱이 두둑하면서 뚝심 있게 업무를 추진하는 스타일이다. 그는 옳다고 판단하면 어느 누구 앞이라도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밀어붙인다. 양기대 당시 광명시장은 김선태 실장이 중소상인과 롯데프리미엄 아울렛의 상생협상을 맡는다면 중소상인들에게 최대한 유리한 조건으로 협상을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이런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김선태 실장은 중소상인-롯데프리미엄 아울렛 상생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중소상인 편에서 탁월한 협상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상생협상을 진행하면서 롯데쇼핑으로부터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고 중소상인 편을 든다고 여러 번 항의를 받았습니다. 가장 절실한 건 중소상인들이죠. 그분들은 생존에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롯데프리미엄 아울렛 입점으로 영업에 타격을 받으면 생계가 어려워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상생은 많이 가진 사람이 적게 가진 사람에게 나눠주는 것인데 일방적으로 한쪽 편을 든다고 주장하면 안 된다, 내가 중소상인 편을 드는 건 당연하다, 많이 가진 쪽이 양보하는 게 맞다고 롯데 측에 말했습니다.” 김 실장은 이런 입장을 상생협상이 마무리될 때까지 바꾸지 않았다. 그는 뚝심과 소신을 갖고 중소상인들과 롯데쇼핑 협상을 중재했다. 김선태 실장은 롯데프리미엄 아울렛 광명점장에게 협상 실권이 없다고 판단, 책임을 질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임원이 협상 테이블에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여 관철시키기도 했다. 만일 김선태 실장이 없었다면 중소상인들은 롯데쇼핑과 상생협상에서 만족할만한 결과를 이끌어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김선태 실장은 말한다. “롯데쇼핑과 협상을 중재하면서 저는 퇴직한 이후에도 계속 광명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중소상인들에게 유리하게 상생협상을 이끌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중소상인들에게 불리한 조건으로 상생협상이 마무리된다면 저는 평생 광명에서 살면서 원망을 들어야 하거든요. 그래서 롯데쇼핑이 중소상인들의 요구를 최대한 수용하는 게 진짜 상생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게 먹힌 거죠.” 양승조 광명 패션유통사업 협동조합 이사장은 김선태 실장 때문에 롯데프리미엄 아울렛에 맞선 광명 패션유통사업 협동조합에게 유리하게 협상이 진행됐다고 했다. “김선태 실장이 우리에게 유리하도록 상생협상을 이끌어낸 것은 저도 인정합니다. 전국에서 가장 유리한 조건으로 협상이 마무리된 것은 사실이거든요. 상생협약이 잘 지켜지는 것도 모두 광명시에서 적극적으로 나섰기 때문입니다.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중소상인들과 롯데쇼핑의 상생발전 협의는 6월 16일에 1차 협상이 진행됐으며, 2차는 8월 21일에, 3차는 9월 5일에, 4차는 9월 17일에 열렸다. 10월 31일에 열린 5차 회의에서 양쪽 의견이 최종 조율되면서 상생협상이 마무리됐다. 광명 패션유통사업협동조합과 롯데쇼핑의 상생발전 협약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광명 패션유통사업협동조합과 롯데쇼핑의 상생발전 협약 주요 내용 1. 롯데쇼핑(주)는 광명시 패션유통산업의 균형발전과 상생협력을 위해 광명패션유통사업협동조합 조합원이 롯데프리미엄 아울렛 광명점에 입점, 영업할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한다. 2. 롯데쇼핑(주)는 광명시 일자리 창출과 롯데프리미엄 아울렛 광명점의 광명시민 우선 채용에 적극 노력한다. 3. 롯데쇼핑(주)는 롯데프리미엄 아울렛 광명점에 광명전통시장과 상생하는 방안을 만드는데 노력하며, 사회복지 사업에 대한 참여 등 광명시 사회공헌 사업에 적극 참여한다. 4. 롯데쇼핑(주)는 패션문화의 거리 활성화 및 지역경제 발전 등을 위한 광명시 지역 협력 사업에 적극 참여한다. 5. 롯데쇼핑(주)는 광명시 관광사업 활성화를 위해 적극 노력한다. 롯데쇼핑은 상생협상이 마무리되자 광명시에 대규모 점포 개설 등록 신청을 한다. 하지만 이것으로 상생협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롯데프리미엄 아울렛 입점에 따른 상권영향평가서와 지역협력계획서를 검토하는 유통업 상생발전협의회가 남았기 때문이다. 2014년 11월 13일과 21일, 두 차례에 걸쳐 유통업 상생발전협의회가 열렸다. 1차 회의에서 롯데 아울렛 입점은 의류판매업 뿐만 아니라 다른 업종의 소상공인들에게도 피해가 갈 수 있으므로 광명시 관내의 중소상인단체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해 지역협력계획서를 제출할 것과 상생협약 내용을 패션문화의 거리 의류판매점에만 맞추지 말고 광명시 구도심 상권 활성화 차원으로 범위를 확대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2차 회의에서 상권영향평가서와 지역협력계획서 검토가 순조롭게 끝났다. 이로써 롯데프리미엄 아울렛 입점과 관련된 모든 상생협상이 끝나면서 롯데쇼핑과 패션유통 중소상인들의 갈등은 매듭이 풀렸다. 롯데프리미엄 아울렛 광명점 입점에 따른 상권영향평가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롯데프리미엄 아울렛 광명점 입점에 따른 상권영향평가서 주요 내용 * 롯데마트 미입점으로 광명시 전통시장에 영향은 크지 않겠으나, 약 6.7km 떨어진 패션문화의 거리 상권에 일부 영향이 예상되지만, 지역 협력 사업 계획의 성실한 준수로 지역 주민, 지역 내 중소기업 및 중소상인들과의 상생을 도모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 제1상권인 소하동의 인구가 증가하고 있지만 현대화된 집객시설이 부족하여 서울 서남권이나 안양 등의 인근 도시로 소비 유출이 일어나고 있으며, 롯데프리미엄 아울렛 광명점 입점은 외부 유출을 막고 인근 도시 주민의 유입으로 이어져 광명 KTX 역세권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지역 경제 규모를 확대시켜 지역 내 중소 상인들의 매출 향상 및 지역 주민들의 생활환경 향상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된다. * 기존 상권은 슈퍼마켓 등의 소매점, 생활용품 등의 기본 의식주를 주요 대상으로 하는 반면, 롯데 아울렛 광명점은 의류용품 구매, 아동 놀이시설 이용, 시네마 관람 등으로 동선이 이어져 쇼핑, 문화 향유와 즐거움의 요소가 복합된 공간을 활보하는 욕구 충족을 가능케 할 것이다. 여기에 기존 사업자인 코스트코, 이케아와 더불어 새로운 소비시장을 창출할 것으로 분석된다. * 롯데 아울렛 광명점은 지역 경제를 구성하는 일원으로서 지역경제 선순환을 유도할 것임. 신규로 창출되는 일자리는 지역민과 함께 하고 지역에서 발생하는 경제적 이익을 다시 지역으로 환원시켜 광명시 경제의 지속적인 성장에 기여할 수 있다. 패션유통사업협동조합과 롯데의 상생협약은 롯데프리미엄 아울렛 개점을 일주일 앞둔 2014년 11월 27일에 이루어졌다. 2014년 12월 5일 롯데프리미엄 아울렛이 개점되었다. 이로 인해 광명시민 500여 명이 일자리를 찾았다. 이 역시 상생협약의 효과였다. /양기대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경기 광명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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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7.03 18:10

[전북 일가(一家), 이 사람] 손길환국악기연구소 손길환·손태백, 연구하며 몸으로 익힌 기술…40여년 외로운 길

처음 이야기의 시작은 '전북에 태평소 만드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었다. 태평소라니, 낯익은 단어다. 초등학교에서 3년여 피리와 태평소를 배운 적이 있었다. 이십여 년 만에 다시 듣게 된 그 '태평소'라는 말에 귀가 쫑긋했다. 게다가 아버지에 이어 아들까지 대를 이어서 태평소를 만들고 있다는 이야기에 더욱 관심이 생겼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태평소를 제작하는 곳이라는 이야기도 그때 들었다. 인터넷에 검색하면 나오는 그 수많은 '태평소'들은 무엇일까. 궁금증이 발걸음을 이끌었다. 우선, 태평소(太平簫)는 전통 관악기이자 국악기다. 나무로 만든 관에 여덟 개의 구멍을 뚫어, 아래 끝에는 깔때기 모양의 놋쇠를 달고, 부리에는 갈대로 만든 서를 끼워 분다. 농악이나 불교음악, 군중음악, 군영음악 등에 사용하는 악기 중 유일하게 선율을 연주하는 악기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서도 ‘태평소는 규격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음정과 음고가 일정하지 않다’고 적혀있다. 이 때문에 만드는 사람에 따라 분류가 달라지기도 하고, 표준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지난 6월 말 파란 여름 하늘에 해가 쨍쨍 내리쬐던 날. 전주에서 40여 분을 달려 정읍에 위치한 손길환 국악기 연구소를 찾았다. 손길환 소장(64)과 그의 맏아들이자 제자 손태백 대표(33). 유쾌한 사람. 첫인상이 그랬다. 취미로 시작한 일이 국내 유일 업(業)이 된 거죠. 언제나 그렇듯 시작이 궁금했다. 손 소장은 처음엔 취미였다고 말한다. 어린 시절 전라도에서 내로라하는 목수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나무 다루는 일은 눈에 익었다. 풍물패 활동을 하던 부친의 모습을 보고 자라며 자연스럽게 태평소를 접했다. 나이가 들고 직장, 아파트, 동네까지 가는 곳마다 풍물패를 만들고 패장으로 활동하다 보니, 내 태평소 하나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시작한 일이 지금까지 이어졌다. 이제는 아들도 함께한다. 연구하고 제작하기 시작한 것만 따져도 40년은 족히 넘는 세월이다. 손 소장은 태평소가 눈에 띄는 악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만들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국내에서 태평소를 전문적으로 제조하는 사람이 본인뿐이라는 것은 우연한 기회에 알게됐다. 지난 2018년 국립국악원이 '실내악용 태평소 특허기술'을 국악기 제작업체에 기술을 이전하면서다. 그곳이 손길환 국악기 연구소다. "우리보다 더 큰 곳들도 있을 텐데 왜 우리한테까지 왔을까 의문이었죠. 그런데 물어보니, 태평소 만드는 곳이 저희밖에 없대요." 국방부 군악대, 취타대나 국악원 등 태평소가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손 씨의 태평소가 있다. 모양뿐 아니라 소리만 들어도 자신이 만든 것인지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한다. 태평소는 '비밀'이 많은 악기입니다 태평소에 대해 설명을 듣다 보니, 자꾸 중요한 것 한가지씩이 빠져있는 느낌이다. 어떤 나무로 만드는지, 어떤 과정을 어떻게 거치는지. 손 소장도 대답은 하지만 모호하게 말한다. 손 소장은 "악기에는 비밀이 많이 숨겨져 있다"고 말한다. 인터뷰도 그동안 하지 않은 이유가 비밀이 많아서라는 이야기다. 태평소 하나를 만들기 위한 공정은 셀 수가 없다. 아니, 셀 수 있다고 해도 기간이 짐작이 안된다. 우선 태평소를 떠올릴 때 기둥으로 볼 수 있는 '관'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나무만 생각해봐도 그렇다. 각진 나무 하나를 둥글게 깎아야 하고, 옻칠과 구멍을 뚫는 작업도 해야 한다. 이 과정들이 몇 번씩 반복되고, 나무 자체를 깎고 쪄서 말리는 과정도 1∼2년에 끝나지 않는다. 나무 하나가 태평소로 만들어지기까지 7∼8년은 족히 소요되는 셈이다. "누군가 태평소를 만드는 것을 알려주는 사람이 있다면 좋을 텐데 아무리 물어봐도 없더라고요. 봉사 문고리 잡듯 힘들었습니다." 그 시행착오를 직접 부딪쳐가며 버텨왔다. 그래도 악기라는 게 나무는 특히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시간을 단축하려면 문제가 생기는 것. "나무는 기다려야한다는 겁니다." 지금도 인터넷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량 생산 중국산 제품들이 손 씨의 제품을 따라올 수 없는 이유다. 아버지와 아들 3대, 숱한 실패에도 애정 가득 손 소장은 "(태평소는) 아버님께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한다. 부친은 집 짓는 목수였지만, 손 소장이 열 살 무렵 군산으로 이사한 이후에는 장롱이나 찬장도 만들고, 탁자도 만들며 분야를 넓혀갔다. 아버지 옆에서 '가리'라고 하는 나무 깎는 기계를 구르며 눈에 익혔던 것이 지금의 자산이 됐다. 고등학교를 익산으로 진학하며 잠시 멀어졌지만, 군산 한국유리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만든 풍물패 덕분에 태평소와 다시 접점을 이을 수 있었다. 도립국악원 소속 박지중 선생과도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지금의 태평소 기틀을 다졌다. 배우고 만들고, 연구했지만, '돈'은 안되다 보니 직장 생활도 꼬박 25년을 채웠다. 눈부시게 화려하지는 않았어도 끈기 있고 성실한 시간이었다. "아들은 제가 꼬셨어요. 아깝잖아요. 인생은 돈으로 사는 게 아니라고 계속 꼬셨죠. 중학생 때부터" 맏아들이자 제자인 손태백 대표의 이야기를 할 때면 애정이 뚝뚝 떨어진다. 큰아들인 태백 씨의 재능은 악기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연주에서 빛이 났다.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했지만, 금세 예술고 학생들을 따라잡았고, 대학도 피리로 진학했다. 아들에 대한 말을 꺼낼때면 퉁명스럽게 이야기하지만, 하나하나 듣다 보면 어마어마한 칭찬들이다. "저한테는 없는걸 다 가지고 있어요. 음감도 있고, 욕심도 있고, 꼬라지도 있어서 대충하는 게 없어요. 검수할 때 마음에 안들면 하루 종일 붙들고 있습니다. 대충하는 법이 없거든요." 그래도 아들은 편할 거라 덧붙인다. 연구과정에서 얻은 숱한 실패들을 아버지인 본인이 했기 때문이다. 국악기는 참 외로운 분야입니다. 무척이나 아쉽죠. 아쉬운 것을 묻는 말에는 금방 답이 나온다. 연구소에서 만든 소책자에는 수상 경력도 쓰여 있는데, 가장 위에 있는 경력이 바로 '제1회 한국악기공모전 전통악기분야 차상(태평소)'이다. 그런데 공모전은 1회로 끝이었다고 한다. 국악기만 경쟁하는 곳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것. 전주 전통공예전국대전에서도 기타부문에서 동상과 장려상, 특성, 입선 등 수상을 하긴 했지만 국악기 부문이 아니라 기타 부문이다. 매듭, 인두화, 붓, 가죽, 유리, 캘리그래피 등이 함께 경쟁하는 부문이다. "전주라는 우리 지역에서 하는 전통공예전국대전이 그나마 전국에서 크죠. 2∼3년 간격으로라도 선을 보이고는 있습니다. 다만, 외롭죠. 기타 부문에서 악기를 두고 경쟁한다는 것이 아이러니 같습니다." 인연과 운명, 그리고 가족. 버틸 수 있게 해준 힘입니다. "어릴 땐 아버지 옆에서 돕는 게 참 지겨웠는데, 그런데 제가 어느 날 그걸 만들고 있더라고요. 이게 인연인가 싶기도 하고요." 손 소장은 모든 것이 '인연' 같다고 말하기도, '팔자'라고도 하며 섞어 부른다. 종교는 없지만 그런 마음으로 인생을 살려고 한다고 말한다. 앞으로의 목표와 같은, 상투적인 질문을 했더니, 금방 시큰둥한 말투로 바뀐다. "취미로 했고, 나이 들고도 돈이 되겠다고 해서 했지요. 악기 장인으로서 자부심 등 평생의 업으로 생각하고 그런 건 아닙니다. 하다 보니 이렇게 됐고요. 감사하게도 먹고사는데 지장은 없고요. 앞으로도 쭉 이렇게 했으면 좋겠어요." 대답이 겸연쩍었는지 말하고 크게 웃는다. 그러면서 '가족' 이야기를 덧붙였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악기는 만들었지만, 제대로 팔리지 않았다. 공연도 사라지고, 입문하려는 사람들도 줄었기 때문. 통상적으로 1년에 150개에서 200개가 팔리지만 지난 2년여 동안에는 뚝 끊겨 굉장히 힘들었다. 하지만 지치지 않은 것은 가족과 악기. 이것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악기를 물려줄 수 있다는 생각이 크다. "내가 힘 있을 때 열심히 만들어놓으면 100년 뒤에도 내 악기를 사가는 사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저는 게을러질 수 없어요. 재미있어요. 100년 뒤 제 손주가 직업이 없더라도 제 악기를 팔 수는 있겠죠. 그때는 35만 원(지금은 30만 원 남짓이다)은 받지 않을까요." 끝으로 손 소장은 한마디를 덧붙인다. "제가 좋아하는 말이 '뭐든지 30년 넘으면 좀 된다더라' 이거에요. 30년은 너무 기니까 눈 딱 감고 3년만 해보세요. 그러면 무엇이든 인생에 중요한 동반자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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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경석
  • 2022.07.03 17:46

[전북 일가(一家), 이 사람] 손길환국악기연구소 손길환·손태백

처음 이야기의 시작은 '전북에 태평소 만드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었다. 태평소라니, 낯익은 단어다. 초등학교에서 3년여 피리와 태평소를 배운 적이 있었다. 이십여 년 만에 다시 듣게 된 그 '태평소'라는 말에 귀가 쫑긋했다. 게다가 아버지에 이어 아들까지 대를 이어서 태평소를 만들고 있다는 이야기에 더욱 관심이 생겼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태평소를 제작하는 곳이라는 이야기도 그때 들었다. 인터넷에 검색하면 나오는 그 수많은 '태평소'들은 무엇일까. 궁금증이 발걸음을 이끌었다. 우선, 태평소(太平簫)는 전통 관악기이자 국악기다. 나무로 만든 관에 여덟 개의 구멍을 뚫어, 아래 끝에는 깔때기 모양의 놋쇠를 달고, 부리에는 갈대로 만든 서를 끼워 분다. 농악이나 불교음악, 군중음악, 군영음악 등에 사용하는 악기 중 유일하게 선율을 연주하는 악기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서도 ‘태평소는 규격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음정과 음고가 일정하지 않다’고 적혀있다. 이 때문에 만드는 사람에 따라 분류가 달라지기도 하고, 표준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지난 6월 말 파란 여름 하늘에 해가 쨍쨍 내리쬐던 날. 전주에서 40여 분을 달려 정읍에 위치한 손길환 국악기 연구소를 찾았다. 손길환 소장(64)과 그의 맏아들이자 제자 손태백 대표(33). 유쾌한 사람. 첫인상이 그랬다. △ 취미가 국내 유일 업(業)으로 언제나 그렇듯 시작이 궁금했다. 손 소장은 처음엔 취미였다고 말한다. 어린 시절 전라도에서 내로라하는 목수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나무 다루는 일은 눈에 익었다. 풍물패 활동을 하던 부친의 모습을 보고 자라며 자연스럽게 태평소를 접했다. 나이가 들고 직장, 아파트, 동네까지 가는 곳마다 풍물패를 만들고 패장으로 활동하다 보니, 내 태평소 하나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시작한 일이 지금까지 이어졌다. 이제는 아들도 함께한다. 연구하고 제작하기 시작한 것만 따져도 40년은 족히 넘는 세월이다. 손 소장은 태평소가 눈에 띄는 악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만들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국내에서 태평소를 전문적으로 제조하는 사람이 본인뿐이라는 것은 우연한 기회에 알게됐다. 지난 2018년 국립국악원이 '실내악용 태평소 특허기술'을 국악기 제작업체에 기술을 이전하면서다. 그곳이 손길환 국악기 연구소다. "우리보다 더 큰 곳들도 있을 텐데 왜 우리한테까지 왔을까 의문이었죠. 그런데 물어보니, 태평소 만드는 곳이 저희밖에 없대요." 국방부 군악대, 취타대나 국악원 등 태평소가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손 씨의 태평소가 있다. 모양뿐 아니라 소리만 들어도 자신이 만든 것인지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한다. △ '비밀'이 많은 악기 태평소에 대해 설명을 듣다 보니, 자꾸 중요한 것 한가지씩이 빠져있는 느낌이다. 어떤 나무로 만드는지, 어떤 과정을 어떻게 거치는지. 손 소장도 대답은 하지만 모호하게 말한다. 손 소장은 "악기에는 비밀이 많이 숨겨져 있다"고 말한다. 인터뷰도 그동안 하지 않은 이유가 비밀이 많아서라는 이야기다. 태평소 하나를 만들기 위한 공정은 셀 수가 없다. 아니, 셀 수 있다고 해도 기간이 짐작이 안된다. 우선 태평소를 떠올릴 때 기둥으로 볼 수 있는 '관'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나무만 생각해봐도 그렇다. 각진 나무 하나를 둥글게 깎아야 하고, 옻칠과 구멍을 뚫는 작업도 해야 한다. 이 과정들이 몇 번씩 반복되고, 나무 자체를 깎고 쪄서 말리는 과정도 1∼2년에 끝나지 않는다. 나무 하나가 태평소로 만들어지기까지 7∼8년은 족히 소요되는 셈이다. "누군가 태평소를 만드는 것을 알려주는 사람이 있다면 좋을 텐데 아무리 물어봐도 없더라고요. 봉사 문고리 잡듯 힘들었습니다." 그 시행착오를 직접 부딪쳐가며 버텨왔다. 그래도 악기라는 게 나무는 특히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시간을 단축하려면 문제가 생기는 것. "나무는 기다려야한다는 겁니다." 대량 생산하는 중국산 제품들이 손 씨의 제품을 따라올 수 없는 이유다. △아버지와 아들 3대 손 소장은 "(태평소는) 아버님께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한다. 부친은 집 짓는 목수였지만, 손 소장이 열 살 무렵 군산으로 이사한 이후에는 장롱이나 찬장도 만들고, 탁자도 만들며 분야를 넓혀갔다. 아버지 옆에서 '가리'라고 하는 나무 깎는 기계를 구르며 눈에 익혔던 것이 지금의 자산이 됐다. 고등학교를 익산으로 진학하며 잠시 멀어졌지만, 군산 한국유리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만든 풍물패 덕분에 태평소와 다시 접점을 이을 수 있었다. 도립국악원 소속 박지중 선생과도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지금의 태평소 기틀을 다졌다. 배우고 만들고, 연구했지만, '돈'은 안되다 보니 직장 생활도 꼬박 25년을 채웠다. 눈부시게 화려하지는 않았어도 끈기 있고 성실한 시간이었다. "아들은 제가 꼬셨어요. 아깝잖아요. 인생은 돈으로 사는 게 아니라고 계속 꼬셨죠. 중학생 때부터" 맏아들이자 제자인 손태백 대표의 이야기를 할 때면 애정이 뚝뚝 떨어진다. 큰아들인 태백 씨의 재능은 악기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연주에서 빛이 났다.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했지만, 금세 예술고 학생들을 따라 잡았고, 대학도 피리로 진학했다. 아들에 대한 이야기에는 퉁명스럽게 이야기하지만, 하나하나 듣다 보면 어마어마한 칭찬들이다. "저한테는 없는걸 다 가지고 있어요. 음감도 있고, 욕심도 있고, 꼬라지도 있어서 대충하는 게 없어요. 검수할 때 마음에 안들면 하루 종일 붙들고 있습니다. 대충하는 법이 없거든요." 그래도 아들은 편할거라 덧붙인다. 연구과정에서 얻은 숱한 실패들을 아버지인 본인이 했기 때문이다. △국악기는 참 외로운 분야 아쉬운 것을 묻는 말에는 금방 답이 나온다. 연구소에서 만든 소책자에는 수상 경력도 쓰여 있는데, 가장 위에 있는 경력이 바로 '제1회 한국악기공모전 전통악기분야 차상(태평소)'이다. 그런데 공모전은 1회로 끝이었다고 한다. 국악기만 경쟁하는 곳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것. 전주 전통공예전국대전에서도 기타부문에서 동상과 장려상, 특성, 입선 등 수상을 하긴 했지만 국악기 부문이 아니라 기타 부문이다. 매듭, 인두화, 붓, 가죽, 유리, 캘리그래피 등이 함께 경쟁하는 부문이다. "전주라는 우리 지역에서 하는 전통공예전국대전이 그나마 전국에서 크죠. 2∼3년 간격으로라도 선을 보이고는 있습니다. 다만, 외롭죠. 기타 부문에서 악기를 두고 경쟁한다는 것이 아이러니 같습니다." △인연과 운명, 그리고 가족 "어릴 땐 아버지 옆에서 돕는 게 참 지겨웠는데, 그런데 제가 어느 날 그걸 만들고 있더라고요. 이게 인연인가 싶기도 하고요." 손 소장은 모든 것이 '인연' 같다고 말하기도, '팔자'라고도 하며 섞어 부른다. 종교는 없지만 그런 마음으로 인생을 살려고 한다고 말한다. 앞으로의 목표와 같은, 상투적인 질문을 했더니, 금방 시큰둥한 말투로 바뀐다. "취미로 했고, 나이 들고도 돈이 되겠다고 해서 했지요. 악기 장인으로서 자부심 등 평생의 업으로 생각하고 그런 건 아닙니다. 하다 보니 이렇게 됐고요. 감사하게도 먹고사는데 지장은 없고요. 앞으로도 쭉 이렇게 했으면 좋겠어요." 대답이 겸연쩍었는지 말하고 크게 웃는다. 그러면서 '가족' 이야기를 덧붙였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악기는 만들었지만, 제대로 팔리지 않았다. 공연도 사라지고, 입문하려는 사람들도 줄었기 때문. 통상적으로 1년에 150개에서 200개가 팔리지만 지난 2년여 동안에는 뚝 끊겨 굉장히 힘들었다. 하지만 지치지 않은 것은 가족과 악기. 이것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악기를 물려줄 수 있다는 생각이 크다. "내가 힘 있을 때 열심히 만들어놓으면 100년 뒤에도 내 악기를 사가는 사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저는 게을러질 수 없어요. 재미있어요. 100년 뒤 제 손주가 직업이 없더라도 제 악기를 팔 수는 있겠죠. 그때는 35만 원(지금은 30만 원 남짓이다)은 받지 않을까요." 끝으로 손 소장은 한마디를 덧붙인다. "제가 좋아하는 말이 '뭐든지 30년 넘으면 좀 된다더라' 이거에요. 30년은 너무 기니까 눈 딱 감고 3년만 해보세요. 그러면 무엇이든 인생에 중요한 동반자가 될 수 있습니다." 천경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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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경석
  • 2022.07.03 17:14

[참여&소통 2022 시민기자가 뛴다] 대구 변호사 사무실 방화 참사를 애도하며…

2022년 6월 9일 오전 10시 55분경 대구 수성구 범어동 대구지방법원 옆 변호사 사무실 건물에서 방화로 보이는 화재가 발생해 방화 용의자를 포함해 7명이 숨지고 40여 명이 다쳤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처음 사고가 발생하고 나서 카카오톡 단체창에는 연이어 사고와 관련된 메시지가 올라왔다. 아직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 올라오기도 했고 다들 참담한 심정으로 속보를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는 하루였다. 그날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사건의 전말은 수억 원대 투자 반환금 소송을 했다가 1심에서 패소한 의뢰인이 상대편 변호사 사무실에 찾아가 사무실에 근무하고 있던 변호사와 직원들을 흉기로 찌르고 방화를 저지른 것이었다. 심지어 희생된 사람들은 그 사건과는 무관한 사무실을 함께 사용하는 변호사와 직원들이었다. 정작 가해자가 앙심을 품고 찾아간 변호사는 지방재판 중이어서 화를 면했고, 사망한 변호사와 직원인 사무장은 사촌 관계이고, 여직원은 이제 막 결혼한 신혼이었다는 사실까지 밝혀지면서 이번 참사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 커졌다. 테러에 가까운 방화가 애꿎은 희생자들을 만들었다. 경찰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대구 수성구 변호사 사무실 방화 사건 현장에서 정밀 감식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를 확인하고 나니 허탈한 마음과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인지에 대한 분노가 치솟았다. 그리고는 사무실에 앉아 최근에 나에게 불만을 가질 만한 사람은 없었는지 화재가 발생하면 지금 내 머리 위에 있는 스프링클러는 제대로 작동을 하긴 하는 것인지, 이제는 의뢰인뿐만 아니라 상대방이 나에게 보복할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생각하며 재판을 해야 하는 것인지 이러한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또한 이러한 위험을 막는 보다 확실한 방법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 보안요원을 채용하는 것은 비용이 너무 부담되는 것이 사실이고, 영업을 위해 출입 통제를 강화하는 것 역시 현실적으로 어렵다 보니 고민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로 이번 사건 이후 가스총이나 삼단봉 등 개인 호신용구를 구입을 권유 받기도 했는데, 대한변호사협회까지 나서서 호신용구를 협회 차원에서 공동구매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는 말도 들린다. 변호사업무를 하는데 이러한 호신용구까지 필요하다니 더 참담한 심정이다. 재판 결과는 대개 승패가 나눠지다 보니 패자는 억울함과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 나 역시 변호사로서 10년 정도 일 해오면서 이런저런 일들을 겪고는 했는데 법정에서 변론 후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에 상대 의뢰인이 ‘저런 사기꾼 편인 당신도 똑같은 사람’이라며 소리를 지르거나,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며 막무가내로 사무실에 찾아오기도 하고, 심지어 상대방 변호사가 나의 핸드폰 번호를 자신의 의뢰인에게 줘 개인번호로 전화가 오는 황당한 일이 있기도 했다. 변호사가 의뢰인을 대신해서 분쟁 상대방과 법리적으로 다투다 보니 어느 순간 당사자와 변호사를 동일시하여 적대감을 표출하는 사례들이 발생하는 것 같다. 심지어 소송과정이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시간이 걸리다 보니 그 과정에서 감정의 골이 더 깊어지기도 한다. 다른 동료 변호사들 역시 상대 측 의뢰인들의 폭언, 협박 등이 비일비재한 현상이라고 이야기 하고는 한다. 이렇듯 변론 과정에서 의뢰인뿐만 아니라 상대방으로부터 이런저런 곤욕을 치른 일들이 있다. 이번 참사가 더 큰 충격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변호사들은 실명과 사무실 위치까지 다 공개되어 있다 보니 위험에 상시 노출되어 있는 경우가 있고, 그렇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는 일이라는 점 때문이다. 미디어가 만들어 낸 변호사의 이미지를 생각한다면 누군가는 ‘변호사가 뭔가를 잘못했겠지’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주변의 변호사 누구를 봐도 이런 일을 겪어야 할 만큼 잘못된 일을 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변호사들은 의뢰인을 위해 판례와 논문을 뒤지고, 상대방 주장의 허점을 찾아 공격하며, 최대한 의뢰인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정리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고, 가끔은 공익활동을 하면서 사회에 기여도 하며 그렇게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다. 변호사는 그 사건을 발생시킨 당사자가 아니다. 변호사는 그저 당사자의 권익을 위해 변호·대리하며 맡은 업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더욱이 다른 어떤 이유가 있었다 해도 그와 같은 테러행위에 정당성을 부여 할 수는 없다. 이와 같은 사적 보복은 법치주의를 위협하는 행위이고, 우리 사법 시스템의 한 축인 변호사제도의 근간을 뒤흔드는 것이다. 상대방의 보복이 무서워 변론 활동이 제한된다면 이는 결국 실체적 진실 발견에 저해가 될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하여 잘못된 판결이 내려진다면 사법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서울지방변호사회는 ‘대구 변호사 사무실 방화 참사’ 재발 방지를 위해 변호사 대상 범죄를 가중처벌하는 법 개정안을 추진하고 있다. 발의안에는 △변호사 및 그 사무직원을 폭행하여 상해·중상해·사망에 이르게 하는 경우 △폭행·협박 등 방법으로 변호사의 직무수행을 방해하는 경우 △변호사 업무수행을 위한 시설·기물을 파괴·손상하는 경우 가중처벌한다는 내용이 담길 예정이라고 한다. 변호사가 그 직무를 성실히 수행했다는 이유로 도리어 범죄의 대상이 되는 사회가 정상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상적 변론 활동이 침해되는 일이 없도록 제도적 장치와 사회적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우아롬 법무법인 한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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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6.27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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