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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의 선비’ 보정 김정회 선생 시문학의 부활

出言以信(믿음 있게 말하라) 行己以潔(깨끗하게 행동하라) 御家以法(법도 있게 집안을 이끌어라)증자가 말하기를 새가 죽으려 할 때는 울음소리가 애처롭고, 사람이 죽으려 할 때는 그 말이 착하다라고 하였다. 아아! 내가 장차 죽게 되어 하는 이 말이 헛되지 않는다면 생사에 아무런 유감이 없겠다. -경술년 시월 상순 늙은 할아비가 보도산실에서 쓰다. 보정 김정회(1903~1970) 선생이 손자인 김경식 연정교육문화연구소장에게 남긴 유훈이다. 전북의 선비인 보정 선생은 명륜전문학원(성균관대 전신)에 들어가 당대의 석학들과 교유하며 북학 등 신구 문물을 두루 탐구하는 한편, 해강 김규진 화백을 사사해 서화에서 일가를 이뤄 시서화 삼절이라 불리기도 했다. 광복 후에는 극심한 좌우 이념 대립에 환멸을 느끼고 귀향해 도산서당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은거했다. 보정 선생이 타계한 뒤 8년만인 1978년 지기와 문우들이 뜻을 모아 선생의 유고문집 <연연당문고>를 출간했지만, 모두 한문으로 돼 있어 한문에 익숙하지 않은 후학들은 그의 학문과 예술을 접하기가 어려웠다. 이에 김 소장은 대학강단에서 정년퇴직한 뒤부터 조부의 문집을 한글로 번역해 2019년 완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첫 번째 결과물이 보정 김정회 선생 시집 <梅妻(매처)를 찾아가네>(감수 연정 김경식, 번역주해 호당 이정길)이다. 이 한글 번역본은 보정 선생이 쓴 260여 수의 시(詩)와 장문인 2편의 부(賦)로 돼 있다. 시의 주제는 다방면에 걸쳐 있는데, 백미는 금강산 절경을 유람하면서 지은 기행 연작시 23수(69~92번)이다. 전체적으로 먹물이 화선지에 배어들 듯 가슴으로 스며드는 한시의 운치가 느껴진다. 김 소장은 조부의 문집이 발간된 지 40년 만에야 비로소 그 일부분인 시부편의 한글번역본을 내게 되었으니 스스로 한없이 부끄럽기만 하다며 조부의 지극한 가르침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심정으로 유고문집 <연연당문고> 한글번역본을 완간하는 일에 몰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고창 출신인 김 소장은 전주고, 성균관대를 졸업하고 원광대 대학원에서 교육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군장대에서 정년퇴직했다. 1997년 월간 문예사조에서 수필로 등단한 수필가이기도 하다.

  • 문학·출판
  • 문민주
  • 2018.11.29 19:59

[불멸의 백제] (231) 12장 무신(武神) 7

그 시간에 백제왕 의자는 왜국의 백제방주 풍 왕자가 보낸 사신을 맞고 있다. 왕자 풍은 의자의 동생이니 형제간이 본국과 속국을 지배하는 셈이다. 의자는 동생 풍과 우애가 깊어서 부친 무왕(武王)의 칭찬을 받아왔다. 사신은 풍의 중신(重臣) 덕솔 백종이다. 풍이 직접 쓴 서신을 읽고난 의자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의자가 서신을 먼저 병관좌평이며 대좌평인 성충에게 건네주면서 백종에게 물었다. 이곳에서도 소문을 들었다. 무역선 선장들이 퍼뜨린 소문은 이미 남방(南方)으로도 번져나갔을 것이다. 백제(百濟)는 백가제해(百家濟海)의 줄임말이니 수많은 무역선단을 이끌고 대륙과 남방, 인도를 넘어 서쪽으로 해양 진출을 해왔다. 그래서 백제는 대륙과 서쪽에 22개의 속령인 담로를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왜국도 담로중의 하나다. 그때 서신을 다 읽은 성충이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대왕, 계백이 무신(武神)으로 명성을 떨친다니 대왕께선 무신을 거느린 천신(天神)이 되셨습니다. 옳지. 의자가 소리내어 웃었다. 좌평, 그대는 무신을 지휘하는 병관무신(兵官武神)이냐? 청안에 가득 모인 신하들 사이에서 웃음이 일어났다. 도성의 청은 웅장하다. 왕좌에 앉은 의자의 모습에서는 저절로 위엄이 풍겨져 나온다. 의자는 영명한 군주다. 나이 40이 넘어서 즉위한 터라 태자 시절부터 겪은 국정을 바로 실천할 수 있었다. 그때 성충이 말했다. 대왕, 이곳 도성에 계백의 처자가 있습니다. 계백이 왜국 영주가 되었으니 처자를 보내 주시지요. 계백이 처자를 두고 갔구나. 의자가 머리를 끄덕이더니 잠깐 성충을 보았다. 그러더니 백종에게 물었다. 계백이 왜국에서 소실을 두었느냐? 예, 대왕. 당연한 일이지요. 성충이 거들었다. 영지 네곳을 획득했으니 전(前) 영주의 처첩은 당연히 전리품이 됩니다. 으음, 좌평도 계백이 부러운 모양이구나. 예, 부럽습니다. 대왕. 다시 청에 웃음이 일어났을 때 의자가 정색하고 말했다. 계백의 처자는 이곳에 두어라. 예, 대왕. 머리를 숙여보인 성충이 의자를 보았다. 계백을 부르실 계획이십니까? 아직 아니다. 의자의 목소리가 청을 울렸다. 필요하면 부르겠다. 대왕, 계백이 공을 크게 세우고 있으니 품위를 올려 주시지요. 성충이 말하자 의자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지, 계백에게 달솔 품위를 하사한다. 계백을 대신해서 감사드립니다. 성충이 말하자 백관들이 입을 모아 소리쳤다. 황공합니다. 의자가 백종에게 말했다. 계백에게 줄 관복과 관을 가져가라. 예, 대왕. 왜국 소실들 한테서 자식을 많이 낳으라고 전해라. 예, 대왕. 백제계가 왜국으로 건너가 백가제해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이제 곧 신라를 합병하고나면 더 큰 세상으로 뻗어나가야 될 것이다. 예, 대왕. 대답을 백종이 했지만 백관들도 듣는다. 왕국에도 기세(氣勢)가 있다. 백제 왕국 왕궁의 기세는 가히 하늘을 찌를 것 같다. 바로 백가제해(百家濟海)의 기세다.

  • 문학·출판
  • 기고
  • 2018.11.28 19:50

[불멸의 백제] (230) 12장 무신(武神) 6

장군, 백제군은 방책도 쌓지 않았습니다. 기마군 진지 안쪽으로 보군 초소만 있을 뿐입니다. 장군 박길천이 말했을 때 김유신이 머리를 끄덕였다. 나도 보았다. 기마군으로 기습하면 승산이 있습니다. 네 용기가 장하다. 먼저 칭찬을 해준 김유신이 눈을 가늘게 뜨고 앞쪽을 보았다. 방금 선봉장 박길천이 직접 첨병대를 이끌고 적진을 염탐하고 돌아온 것이다. 박길천은 33세, 그동안 수십번 전쟁을 치른 용장이다. 주위에 둘러선 장수들이 김유신의 시선을 따라 앞쪽을 본다. 오시(12시) 무렵, 한낮의 햇살이 밝은 초가을이다. 이곳 신라 서쪽의 변방인 안산벌에서 신라군과 백제군이 대치한지 30일째, 백제군은 동방 방령인 달솔 의직이 이끈 3만5천, 그중 기마군이 1만2천이며 보군은 2만3천, 아주 적당한 비율이다. 이를 맞는 신라군은 대장군 김유신이 이끄는 3만2천, 기마군 8천에 보군 2만4천이다. 그때 김유신이 말했다. 달솔 의직은 명장이야. 성격이 급한 것 같지만 전장(戰場)에서는 교활하고 치밀하다. 내가 겪어보았다. 모두 숨을 죽였다. 진막 밖에 모여선 10여명의 장수들을 가을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곳은 야산의 중턱이어서 멀리 백제군의 보군 초소까지 다 보인다. 김유신이 손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저 숲이 비어있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백제군과의 중간에 위치한 숲을 가리켰다. 평지에 잔나무만 무성한 숲이다. 신라군이건 백제군이건 상대를 향해 나아가려면 숲을 돌파해야 한다. 그러나 평지의 숲이어서 백제군은 초소도 세우지 않았다. 기마군은 거침없이 돌파할 수 있을 것이다. 저 숲이 방책이다. 김유신의 목소리가 주위로 펼쳐졌다. 우리가 돌파하면 백제군은 기다렸다가 불화살을 쏠 것이다. 그 순간 서너명이 탄성을 뱉었고 박길천은 숨을 들이켰다. 숲의 넓이는 1리(500m)쯤 된다. 김유신이 말을 이었다. 이곳 저곳에 마른 풀, 나무가 늘어났구나. 백제군이 화공을 하려고 몰래 쌓아놓은 것이다. . 우리 기마군이 숲 안에 다 들어갔을 때 불화살을 쏘겠지. 그럼 절반은 타죽고 빠져나온 절반은 포위된다. 그 뒤를 보군이 따른다면 후퇴하는 기마군에 밟혀 몰사하겠지. 김유신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신라의 김유신은 오래전부터 신라인에게 무신(武神)으로 불리었다. 용병술이 뛰어난데다 한번도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백제의 뛰어난 무장들과 부딪쳐서 손색이 없는 것이다. 김유신이 주위를 둘러보면서 말했다. 명심해라. 후세에는 승자 이름만 남는다. 우리가 이기면 너희들 이름은 수백년, 수천년 뒤에도 이어질 것이지만 저기. 김유신이 턱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저기 있는 백제군 달솔 의직이란 이름은 우리가 백제를 멸망시킨다면 이름 하나만 남기도 어려울 것이다. 나무 걸상에 앉은 김유신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저기 백제땅, 백제 백성은 모두 신라의 장원이 되고 농노가 되겠지. 너의들은 백제땅을 나눠받은 지주 신분으로 백제인들을 농노로 소유하는 것이다. 역사는 신라의 위대함만 기록한다. 장수들의 얼굴에 생기가 떠올랐다. 이것이 김유신의 용인술이기도 하다. 장수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 그래서 장수들도 김유신을 따른다.

  • 문학·출판
  • 기고
  • 2018.11.27 19:55

[불멸의 백제] (229) 12장 무신(武神) 5

당의 관복을 입고 당의 계급과 관습을 따르며 당황제를 모시면 어떻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김춘추도 당(唐)의 관복을 입고 있다. 어깨를 편 김춘추가 왕좌에 앉아 있는 여왕을 보았다. 여왕 김승만(金勝曼)은 사촌언니인 여왕 김덕만(金德曼)이 비담과의 전쟁 중에 피살되고 나서 왕위에 올랐는데 김춘추의 하인(下人)이나 같았다. 김춘추는 왕관만 쓰지 않았을 뿐이지 국정을 자신의 집안에서 처리했다. 김춘추가 말을 이었다. 6백년 사직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당에 사대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왕전하. 당황제가 고구려와의 전쟁에 패한 후에 사사건건 우리 신라에게 트집을 잡고 있소. 경은 무슨 방책이 있소? 여왕이 주저하며 묻자 김춘추가 쓴웃음을 지었다. 청안에는 30여명의 고관이 품계에 따라 서 있었지만 모두 숨을 죽이고 있다. 김춘추가 말을 이었다. 당은 지난번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거의 궤멸당했고 황제는 계백의 화살에 맞아 한쪽 눈이 빠졌습니다. 아마 몇 년 못살 것 같습니다. 여왕이 몸을 굳혔고 김춘추의 목소리가 청을 울렸다. 전하께서 수를 잘 놓으시니 비단에다 당황제를 칭송하는 글귀를 수로 넣어주시지요. 그것을 당황제께 보내면 좋아할 것입니다. 내가 말이요? 예, 정사는 소신에게 맡기시고 수를 놓아주시면 그걸 갖고 당황제께 가려고 합니다. 경이 말이요? 예, 그걸로 달래는 수밖에 없습니다. 알겠소. 여왕의 얼굴이 붉어졌다. 내가 오늘부터 수를 놓겠소. 왕좌에서 일어선 여왕이 청을 나갔을 때 김춘추가 헛기침을 하고나서 대신들을 둘러보았다. 대신들은 감히 시선을 마주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때 김춘추가 입을 열었다. 지금 신라는 적에게 사방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달려 있소. 김춘추의 목소리가 청을 울렸다. 서쪽은 백제, 동쪽은 백제의 속령인 왜국, 북쪽은 고구려에, 남쪽 바다는 백제 수군(水軍)에 막혀있으니 믿을 곳이라고는 대국(大國) 당 뿐이오. 모두 숨을 죽였고 김춘추가 부릅뜬 눈으로 대신들을 보았다. 김춘추가 임명한 대신(大臣)들이다. 비담의 반란을 계기로 비담 일당은 물론 반대파까지 모두 숙청을 한 터라 신라 조정은 모두 김춘추에게 충성을 바치는 인물들로 채워졌다. 왜국은 백제방의 권한을 더욱 강화시켜 여왕과 함께 직할통치령을 늘려가는 중이고 은솔 계백은 그곳의 대영주가 되어 무신(武神)으로 불릴 정도가 되었소. 이 상태가 계속 된다면 신라는 말라죽은 나무 꼴이 될 것이오. 소리치듯 말한 김춘추가 어깨를 부풀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눈이 번들거리고 있다. 당황제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대패하고 눈 하나를 잃었지만 고구려 백제 연합에 잠을 못자고 있을 것이오. 당을 이용해 원수를 치는 방법밖에 없소. 대감, 백제왕 의자가 동방(東方)에 대군을 집결시켜 놓고 있습니다. 벌써 한 달째인데 사신을 보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찬 김부안이 묻자 김춘추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자가 아직 합병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거야. 대장군에게 전권을 일임했으니 당분간은 막아줄 것이다. 대장군이란 김유신이다. 김유신과는 처남 매부 사이일 뿐만 아니라 서로 의지하는 수족 같은 사이다. 김춘추는 김유신이 없으면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될 것이고 김유신은 김춘추 없이는 진골 왕족들의 무시를 받고 하루도 견디지 못한다. 신라 왕성의 청안에 긴장감이 덮여져 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18.11.26 20:01

[불멸의 백제] (228) 12장 무신(武神) 4

타카모리의 영지 18만석까지 포함시켰으니 계백은 34만5천석의 영지를 소유한 영주가 되었다. 대영주다. 그리고 계백의 명성은 화살 한 대로 타카모리의 용장 아리아케를 사살함으로써 천하에 떨쳤다. 이곳은 계백의 거성(居成)인 이쓰와(五和)성. 계백은 아리타의 거성에서 이곳으로 거성을 옮겼다. 타카모리는 영지 서쪽에 있는 호안사(寺)로 들어가 중이 되었다. 타카모리를 따르는 가신은 한명도 없었으니 그야말로 화무십일홍이요 권불십년이다. 이쓰와성의 청 안에서 계백이 중신(重臣)회의를 하고 있다. 계백의 중신은 이또의 중신이었던 사다케, 타카모리의 중신 하세가와, 아리아케의 중신 노무라 등이었으니 구(舊) 영주의 중신들을 모두 받아들인 셈이다. 또 끝쪽에 타카모리의 용장 슈토의 모습도 보였는데 슈토는 대군을 이끌고 왔다갔다 하다가 투항했다. 넓은 청 안에는 1백여명의 가신, 장수들이 앉아 있다. 그중 일부는 계백을 백제에서부터 따라온 장수였지만 대부분이 왜국(倭國) 출신이다. 계백이 입을 열었다. 흥망성쇠가 빈번한 시대이니 주인을 잘 만난 신하와 백성은 안락을 누리고 그렇지 못하면 함께 지옥구경을 하지 않느냐? 계백의 목소리는 크고 우렁차다. 턱을 조금 치켜 든 계백의 용자는 위엄이 넘쳐흐른다. 앞쪽에 나란히 앉은 화청, 윤진, 백용문도 그 기세에 압도당한 듯 숨을 죽이고 있다. 이 셋이 영주 계백의 동지이며 측근이다. 셋은 제각기 이또, 아리타, 마사시의 거성을 근거지로 삼아 소영주가 되어 있다. 계백이 말을 이었다. 왜국은 백제의 속국이며 담로다. 백제계 왜왕이 백제방 방주와 함께 통치하는 체제인데 요즘 들어 지방 호족의 발호로 나라가 혼란에 빠져 있다. 어깨를 편 계백이 말을 이었다. 나는 백제방 방주 직속령을 통치하는 영주이며 백제국 은솔 벼슬의 무장이기도 하다. 나는 왜국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최선을 다하리라. 이것이 대영주가 된 계백의 소신이다. 그것을 가신들에게 알려준 것이다. 회의가 끝났을 때 야마토 성주 화청이 계백에게 말했다. 청에는 중신들만 남아 있다. 주군, 제가 야마토성에 대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주 급합니다. 무슨 말인가? 계백이 묻자 화청이 헛기침을 했다. 이또가 버리고 간 측실들이 넷이나 남아 있습니다. 그때 윤진과 백용문은 외면했고 사다케가 한숨을 쉬었다. 계백이 물었다. 그래서? 그러자 화청이 옆쪽의 사다케를 손으로 가리켰다. 저놈한테 물어보시지요. 계백의 시선이 사다케에게로 옮겨졌다. 사다케, 화청님과 무슨 일이냐? 네, 주군. 사다케가 다시 한숨부터 쉬었다. 사다케는 55세, 이미 장년으로 이또의 중신이었다. 그러나 화청이 누구인가? 65세의 노장(老將)이다. 40여년 전, 당왕 이세민이 태원유수 이연의 아들이었을 때부터 옆에서 보아 온 당의 장수 출신이다. 사다케로서는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 할 입장이다. 사다케가 입을 열었다. 예, 화청님께서 이또의 남은 측실 넷을 모두 측실로 갖겠다고 하셔서 제가 조금 기다려 보라고 했던 것입니다. 왜 그랬는가? 계백이 추궁하듯 묻자 사다케가 대답했다. 예, 아직 주군께서 측실을 다 정하지 않으셔서 그랬습니다. 이런. 어깨를 부풀린 계백의 시선이 윤진과 백용문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시시성을 물려받은 윤진이나 아리타성 성주가 된 백용문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모두 내실에 소실들이 남은 것이다. 계백이 중신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각 거성의 성주가 내실도 관리한다. 나는 상관하지 않겠다.

  • 문학·출판
  • 기고
  • 2018.11.25 19:58

[전북작가회의와 함께하는 전라북도 길 이야기]자연과 감응하는 ‘정기용 공공의 길’ - 정기석

최근 무주를 떠나 순천으로 이사했다. 행정적으로는 이제 전북 도민에서 전남 도민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의 절반 이상은 무주에, 전북에 체류하고 있다. 중요한 숙제 하나를 미제로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미련 또는 사회적 책무로 따로 이삿짐을 꾸려 챙겨왔다. 바로 정기용의 길이다. 한마디로 정기용 건축가가 무주에 지어 놓은 30여 곳의 공공건축물을 복원재생하겠다는 계획이다. 무주의 산을 넘어, 강을 건너, 들을 헤치고 자연과 인간이 서로 감응하는 정기용의 공공의 길을 이어보려는 욕심이다. 무주군에는 말하는 건축가, 자연과 인간을 감응시키는 건축가 정기용이 설계하고 건축한 공공건축물들이 마을 곳곳에 산재해 있다. 사실상 국내에서는 전무후무한 공공건축 명소라 부를만하다. 건축을 공부하거나 직업으로 삼은 건축인들 말고도 일반인들도 찾아오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하지만 건축물들로 이끌고 안내하는 길도, 길잡이가 없다. 심지어 변형, 훼손된 곳도 있어 사실상 방치된 상태가 아닌가 오인된다. 심지어 무주군에서 나서 살고 있는 무주 원주민조차 존재조차 제대로 모르는 이가 허다하다. 하물며 정기용의 공공건축물이야말로 무주군의 품격과 무주 군민의 자긍심을 높여주고 지역 경제 활성화를 촉발할 소중한 지역 공유 자산이라는 가치는 동의받기도, 설명하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최근 그 가치를 충분히 공감, 통찰하고 있는 한국농촌건축학회가 나섰다. 이른바 정기용 무주군 공공건축물 재생프로젝트를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 무주군을 관류하는 남대천을 중심으로 산과 강과 들을 따라 정기용 공공건축물을 씨줄과 날줄로 잇는 산책로, 탐방로 등을 새로 조성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정기용의 공공건축물을 재조명․복원함으로써 공공이 공유하는 건축 자산으로서는 물론, 자연과 인간이 감응하는 농촌 공간 디자인의 혁신적인 사례로서 학술적 의미와 지역 브랜드 가치를 높이려는 목표다. 농촌다운 건축, 마을을 잇는 정기용 길 구체적인 재생 전략으로는 남대천을 따라 형성된 마을과, 그 마을마다 자리 잡은 공공건축물을 길로 엮고 잇는다는 그림이다. 남대천을 따라 물가에 자리 잡은 등나무 운동장, 무주군청, 농민의 집, 추모의 집 등은 하천에 가로놓인 다리를 산책로로 연결하면 모두 만날 수 있다. 기존의 무주 마실길과 연계하면 남대천이라는 수자원의 접근성과 활용도를 크게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오지 산골 지역으로 척박한 무주군은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최고의 지역 자산이다. 그 자연과 더불어 무주의 지역 정체성을 완성하는 건 산골 마을이다. 정기용은 바로 이 무주의 천혜의 자연경관, 그리고 인간이 모여 사는 마을들이 서로 조화롭게 감응하도록 공공건축물을 설계, 배치했다. 이러한 정기용의 공공건축물들은 그 자체로 사람들을 아름다운 무주의 산골 마을로 호객하는 최고의 스토리텔링 마케팅 자원이라 평가할만하다. 무주군과 업무 협약을 맺은 한국농촌건축학회는 한마디로 정기용 공공건축을 통해 농촌다운 건축, 농촌다운 마을의 모범적인 사례를 보여주겠다는 포부다. 정기용 공공건축의 철학과 기법이야말로 농촌 건축과 농촌 마을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최적의 사례지라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 원형을 복원하거나 발전적으로 리모델링함으로써 농촌다운 건축과 농촌다운 마을을 구현해보겠다는 것이다. 자연과 인간이 감응하는 공공성의 길 정기용은 남다른 건축가임에 틀림없다. 당장 겉으로 드러난 주요 이력만 몇 줄 훑어봐도 특별한 사람이라는 걸 금방 눈치챌 수 있다. 그는 애초 대학에서 건축학을 공부한 게 아니다. 학부에서는 미술을, 대학원에서는 공예를 공부했다. 당시 김수근 건축가에게 1년여 강의를 들은 게 건축에 입문하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 1972년 프랑스로 유학해 실내건축, 건축, 도시계획 등을 본격 수학하고 프랑스 정부 공인 건축사 자격을 취득했다. 귀국한 그는 잠시 절망했다. 새마을운동으로 농촌의 초가지붕을 뜯어내고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꾸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이다. "새마을운동은 삶과 역사를 부정하게 만든 문화적 학살"이라고 그는 비판한다. 이후 아예 몸소 농촌 경제와 농촌 문화를 공부하고 흙집 기술까지 익혔다. 이후 평생 "건축은 삶을 조직화하는 것"이라며 자연 환경과 주민의 본래 삶을 거스르지 않는 흙의 철학을 실천했다. 이 같은 정기용 건축 철학과 실천의 정점에 무주군 공공건축 프로젝트가 놓인다. 당시 무주군수와 정기용 건축가가 무주 진도리 흙토담 마을회관 일을 계기로 의기투합한 것이다. 1996년부터 2008년까지 10년 넘게 온갖 난관과 우여곡절에 굴하지 않고 프로젝트를 밀고 나갔다. 등나무로 스탠드에 그늘을 드리운 '무주 공설운동장', 천문대를 설치한 '부남면사무소', 면장실을 없앤 자리에 공중목욕탕을 새로 들인 '안성면사무소' , 세상에서 가장 밝은 납골당 추모의 집, 무주군 중심지를 한눈에 조망하도록 전망대를 갖춘 농민의 집, 서로 마주보며 기다리는 버스 정류장 등이 대표작이다. 오래된 풍경을 저장하는 시간의 길 순천, 진해, 제주, 서귀포, 정읍, 김해 등의 기적의 도서관도 정기용의 작품이다. "건축가가 한 일은 원래 거기 있었던 사람들의 요구를 공간으로 번역한 것이지 그 땅에 없던 뭔가를 새로 창조한 것이 아니다."라는 신념으로 도서관을 지었다. 2011년 3월,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정기용의 삶의 철학과 마지막 여정은 다큐멘터리 영화 <말하는 건축가>로, 그리고 『감응의 건축』 등 글 잘 쓰는 건축가로 세상에 이렇게 울림을 주고 있다. 건축가가 하는 일은 궁극적으로는, 공간이 아닌 시간을 설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공간은 수단에 불과하고, 시간은 건축의 목적이 된다. 세월이 지나면서 건축을 완성하는 것은 결국 시간이다. 무주에서 정기용의 공공건축을 잇는 공공의 길이 새로 만들어진다면 무주를 걷는 답사자, 산책자들은 뜻밖의 행운과 행복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정기용의 공공건축물을 잇는 공공의 길 위에서 그동안 각자 잃어버렸던 시간 또는 시간의 의미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정기용의 길은 이런 속성과 효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길은 풍경을 저장하고 있다. 홈 파인 레코드판이 소리를 저장하듯. 그래서 사회학자, 인류학자들은 이렇게 오래된 길들을 그림일기(figure journal)라고 부르는 것이다. 길은 반복적 몸짓으로 탄생하며, 반복된 몸짓은 생존에 요긴했던 '가까운 것', '친근한 것' 들을 엮어주면서 생겨난다. 부끄러운 자작시 정기용 씨를 기억하는 무주군민의 일상 및 일생에서 나는 이미 정기용의 길을 갈구하고 있음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지붕이 있는 버스정류장부터 공설납골당까지 / 이 모든 게 다 정기용 건축가가 지은 생사초월의 감응 건축인 걸 감사하리라 / 죽어도 산 유령처럼 무주의 일상을 영원히 즐길 수 있으리라 / 살아있는 무주군민들만 놀라지 않는다면 큰 문제는 없으리라고. 정기용은 여러분 감사합니다. 바람, 나무, 햇살, 모두 감사합니다.를 유언으로 남겼다. 나도 정기용 건축가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 감사합니다. 바람, 나무, 햇살만큼. *정기석: 2016년 『詩와 경계』 신인문학상 등단. 저서로 『농부의 나라』, 『마을을 먹여 살리는 마을 기업』, 『귀농의 대전환』 등. <마을연구소(Commune Lab)>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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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1.23 17:52

[불멸의 백제] (227) 12장 무신(武神) 3

화살 1대로 타카모리의 용장 아리아케를 죽이고 영지를 차지했다. 계백의 군사는 부상자만 10여 명뿐인 대승이다. 아리아케가 끌고 나온 200기마군 중 1백여 명이 전사, 1백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던 것이다. 사기가 오르면 1당백이 되고 사기가 떨어지면 1천명이 1명을 당해내지 못한다. 그날 밤, 쿠로기성의 내실을 차지한 계백이 어젯밤까지 아리아케의 소실이었던 다나에를 품고 자리에 누워있다. 자시(12시)가 넘은 시각이다. 다나에는 스물세 살, 아리아케가 가장 아끼는 소실이었는데 오늘 밤 수청을 들 처첩을 고르려고 위사장 하도리가 나섰을 때 자원을 했다. 누가 모시겠느냐? 하도리가 처첩을 모아놓고 물었을 때 내가 모십니다하고 바로 대답했다는 것이다. 아리아케는 본부인 외에 소실이 6명, 그 중 자식이 있는 처첩이 셋이었는데 저녁때 셋은 자식들을 데리고 떠나갔다. 그래서 남은 소실 넷 중 다나에가 자원한 것이다. 다나에는 손안에 쥔 작은 새 같은 몸이었지만 뜨겁고 사나웠다. 성(性)의 쾌락을 아는 터라 죽을 것처럼 비명을 지르면서 매달렸다. 쾌락의 끝이 죽음이라도 달게 받겠다는 자세였다. 계백도 오랜만에 육욕의 만족감을 느낀 밤이었다. 가쁜 숨이 가라앉았을 때 계백의 팔에 안겨있던 다나에가 꿈틀거렸다. 땀에 배인 알몸이 미끈거렸고 따뜻했기 때문에 계백이 힘주어 끌어안았다. 그때 다나에가 더운 숨을 뱉으면서 말했다. 대감은 무신(武神)이 맞는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이냐? 성안에 소문이 퍼졌습니다. 이제는 몸에 익숙해져서 어려움이 덜어진 다나에가 볼을 계백의 가슴에 붙였다. 더운 숨결이 가슴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소문이 퍼져? 예, 대감이 무신이라는 소문입니다. 내가 신(神)이 아니라는 소문은 네 입에서 퍼져 나가겠다. 계백이 다나에의 젖가슴을 움켜쥐며 웃었다. 이렇게 인간으로 육정을 나누지 않았느냐? 아닙니다. 신이십니다. 다나에가 두 손으로 계백의 허리를 감아 안고 몸을 딱 붙였다. 인간이 아니신 것 같았습니다. 아니, 왜? 이런 쾌락을 주신 것은 대감이 처음입니다. 허어. 계백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네년이 이렇게 아리아케를 녹였느냐? 아닙니다. 아리아케는. 닥쳐라. 부드럽게 꾸짖은 계백이 다나에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알몸이 살아있는 낙지처럼 꿈틀거리며 몸을 붙여왔다. 대감은 무신이세요. 다시 숨이 가빠진 다나에가 허덕이며 말했다. 사흘 후의 한낮, 백제방으로 왜국의 섭정 소가 이루카와 그의 부친인 전(前) 섭정 소가 에미시의 행차가 들어왔다. 청에서 기다리던 백제방 방주이며 왜왕 죠오메이의 자문관인 왕자 풍이 둘을 맞는다. 풍의 격이 둘보다 높기 때문에 일어나지도 않는다. 앞자리에 나란히 앉은 둘이 인사를 나눈 후에 먼저 아비인 에미시가 입을 열었다. 전하, 이번에 장군 계백이 타카모리의 영지를 정벌했습니다. 외침을 일으켜 변란을 일으킨 죄값을 받는 것이니 이제 그 영지의 배분을 결정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래야지요. 선선히 머리를 끄덕인 풍이 둘을 번갈아 보았다. 지난번 말씀 나눈 대로 이와강 서쪽 땅을 소가 가문에서 가져가시지요. 계백에게 이미 그렇게 지시했습니다. 예, 그런데. 이루카가 풍을 보았다. 그곳에 2개의 성이 있습니다. 내 가신들이 들어가도 반항하지 않겠지요? 그것까지 확인을 받고 가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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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1.22 20:02

전·현직 기자, 전북 언론의 역사 ‘최초 집대성’

지역 언론은 결코 죽지 않고 살아있다. 그 역사는 만들어질 뿐이다. 이 책은 역사는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설파한 비코(G.Vico)의 시각에서 지역언론의 난국을 타개할 방책을 찾고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을 전망하게 해 줄 것이다. 특히 이 책은 취재현장에서 활동했던 전현직 언론인이 언론학 전공자로서 전북언론의 역사를 최초로 집대성한 것이기 때문에 학문적으로나 실무적으로도 평가될만하다. (머리말 중에서) 전직 기자 최동성 전북대학교 초빙교수와 전오열 전북일보 편집1부장이 함께 3년여 공을 들여 전북에 면면히 내려오는 언론정신을 체계화해 기록하고 자료를 집대성한 <전북언론사>(한국학술정보)를 펴냈다. 저자들은 이번 집필 작업과 관련 한국언론사라는 지도에 지역언론이 외면받는 이상한 현실을 지적하고 더 이상 늦출 수도, 거역할 수도 없는 시대적 소명이라는 언론인으로서의 절박한 현실 인식에서 출발했다고 밝혔다. 이 책은 전북언론의 맥, 전북 언맥(言脈)을 대의적으로 세우고 명분을 밝히기 위해 춘추필법의 정신에 따라서 꼼꼼하게 집필했다. 이를 위해 사료와 증언, 경험의 세 가지 입체적인 관점에서 철저한 학술적 고증과 언론인들의 진술, 그리고 디지털 자료와 종이신문을 일일이 열람해 사료를 채집하고 사실(史實)을 정리하는 작업을 거쳤다. 317쪽에 걸쳐 모두 10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전근대적인 언론 매체를 포함한 동학농민혁명기, 개화기, 일제강점기 및 미군정기, 각 공화국시대를 최근까지 연대순으로 엮었다. 각 장에서는 한국언론을 거시적으로 살펴보고 전북의 언론을 미시적 관점에서 통합적으로 분석했다. 일제강점기 이리(현 익산)에 라디오방송국이 일찍 설치된 배경과 전북 언론인에 대한 일제의 탄압 사례 등을 추적하거나 신군부의 강압적인 조치로 강제 해직된 전북언론인 32명도 언론사별로 소개하는 등 언론인과 지역사회가 한 때 겪었던 고초와 울분을 되돌아봤다. 또한 현재 전북지역 언론의 현황을 짚고 미래를 향해 지향해야 할 혁신 방안 등을 모색했다. 최동성 초빙교수는 전북대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언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전북일보 정치경제사회부장과 편집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전오열 전북일보 편집1부장은 전북대에서 언론학 박사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 신문방송학과 겸임교수로 강의하고 있다.

  • 문학·출판
  • 이용수
  • 2018.11.22 20:01

아버지 향한 그리움 담은 '나의 아버지 전기종'

전범석, 동석, 진희 세 자녀가 돌아가신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과 애틋함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나의 아버지 전기종>을 펴냈다. 책의 주인공 전기종 씨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대단한 일을 한 것도, 모든 사람이 알아볼 만큼 위대한 인물도 아니지만, 자녀들에게는 세상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일 것. 평범하고 개인적이라 할 수 있는 이야기 속에서 세상 모든 부모의 사랑과 자녀의 마음이 담겨있다. 자녀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3년 만에 자신들의 몸과 마음을 길러준 아버지의 은혜를 기억하고자 아버지 삶의 흔적을 모아 작은 회고록을 펴냈다고 밝혔다. 옳고 바른 삶의 흔적을 찾아서라는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자녀에게 엄격한 여느 아버지와 같은 모습이지만 올바르게 살아가기 위해 노력한 흔적들을 확인할 수 있다. 자녀들은 그러한 모습속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마음속에 큰 나침반이 돼 준다고 회상한다. 둘째 동석 씨의 이야기에서도 알수 있다. 아버님은 수업 전날 반드시 책을 한 번 보고 가셨다. 수십 년 동안 그토록 많이 강의를 했건만 한 번 보고 갈때와 그렇지 않을때에는 강의 내용에 차이가 있다 하시면서 참고서며 책을 떠들어 보곤 했었다. 익산에서 태어나 1959년 남성중학교에서 교직을 시작한 전기종 씨는 1994년 남성고등학교에서 정년퇴임할 때까지 제자들에게 그리고 자식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한 흔적들이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자녀들의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마음과 함께.

  • 문학·출판
  • 천경석
  • 2018.11.22 20:01

[불멸의 백제] (226) 12장 무신(武神) 2

오후 신시(4시) 무렵, 쿠로기(黑木) 성 동문 앞 1백보 거리에 긴 장대가 하나 꽂혔다. 20자(6m)가 넘는 대나무 장대다. 장대 위에 투구를 쓴 채로 아리아케의 머리가 꽂혔는데 눈 사이에 화살이 박힌 채다. 눈을 치켜뜬 아리아케는 도무지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딱 벌리고 있다. 놀란 표정 같기도 하다. 성벽에서는 아리아케의 얼굴까지 다 보였기 때문에 군사들의 시선이 모이지 않을 리가 없다. 군사들 사이에 낀 주민들도 보인다. 백제군은 5백보쯤 떨어진 거리에 정연하게 늘어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말은 옆에 세워놓아서 언제든지 출동할 준비는 되었다. 계백도 나무 걸상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고 있다. 갑옷을 입은 채다. 그때 옆에 선 윤진이 말했다. 장군, 성에서 누가 나옵니다. 윤진은 계백한테 장군이라고도 불렀다가 주위에 사람이 많으면 주군이라고도 부른다. 계백은 이곳 영주이며 윤진은 그의 신하가 된다. 계백은 어떻게 불러도 상관없다는 태도다. 머리를 든 계백이 성에서 나오는 3인의 기마인을 보았다. 앞장 선 기마군이 든 창에 백기가 달려져 있다. 사자다. 오래전부터 백기는 사자나 투항자의 표시가 되어있다. 윤진이 웃음 띤 얼굴로 계백에게 말했다. 노무라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이윽고 기마인은 아리아케의 머리 밑을 지나 군사들의 안내를 받고 계백 앞에서, 말에서 내렸다. 앞장선 장수는 노무라다. 노무라가 계백의 다섯 걸음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는 핏발이 선 눈으로 계백을 보았다. 아리아케의 가신 노무라가 계백 영주님을 뵙습니다. 노무라는 52세, 대를 이어서 아리아케의 가신을 지내고 있다. 마른 체격, 그러나 붉은 기운이 도는 눈빛이 강하다. 노무라의 목소리가 이어서 울렸다. 영주께 아리아케 영지를 바치려고 왔습니다. 계백은 시선만 주었고 노무라가 다시 외친다. 지금 입성하시면 가신들을 모두 만나실 수 있습니다. 처분을 맡기겠습니다. 그때 계백이 말했다. 투항자는 살려주겠다. 장졸은 모두 무기를 버리고 소집할 때까지 해산해라. 해산하란 말씀입니까? 눈을 크게 뜬 노무라가 다시 물었다. 집으로 돌려보냅니까? 그렇다. 집에서 쉬도록. 내가 다시 부르면 새 영주를 모시려고 모이는 것이다. 예, 대감. 모두 감복할 것입니다. 이마를 땅바닥에 붙였다가 뗀 노무라가 다시 계백을 보았다. 대감, 가신들은 모두 청에 모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야지. 아리아케의 처첩, 자식들은 어떻게 합니까? 내가 처첩으로 삼겠다. 바로 대답한 계백이 어깨를 펴고 노무라를 보았다. 아리아케를 모신 것이 무슨 죄란 말이냐? 내가 다시 처첩으로 삼을 테니 그리 알라고 해라. 예, 대감. 당황한 노무라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그러면, 아리아케의 자식들은. 제 애비의 복수를 할까? 감히. 나하고 같은 내실에 살기 거북할 테니 떠날 사람은 떠나도록 해라. 예, 대감. 그때 계백이 윤진을 돌아보았다. 그대가 노무라를 따라가 수습하도록. 윤진이 기마군 1백기를 거느리고 먼저 노무라와 함께 쿠로기 성에 입성했다. 새 영주 계백을 맞을 준비를 시킨 것이다. 이제 타카모리의 거성까지의 모든 성을 장악했다. 앞으로 타카모리의 거성이 남아있었지만 하세가와는 이미 전 가신의 서약서를 써서 백용문에게 건네주었다. 타카모리의 영지 25만석이 평정된 것이다. 그것도 기마군 5백도 안 되는 병력으로 정벌했다. 계백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왜국은 새로운 땅이다. 새로운 백제가 이곳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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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1.21 19:49

[불멸의 백제] (225) 12장 무신(武神) 1

쳐라! 아리아케가 장검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지금 아리아케는 윤진의 기마군을 향해 직선으로 달려가고 있다. 거리는 이제 300여보로 가까워졌다. 계백군(軍)의 기마군은 1백여기, 아리아케는 600기다. 와앗! 기세가 오른 군사들이 함성을 뱉었다. 땅을 울리는 말굽소리, 장수들의 외침과 함성, 흥분한 말떼는 콧바람을 불면서 네굽을 모아 달린다. 아리아케의 기마군과 250보 거리로 가까워진 순간이다. 지금이다! 윤진이 칼을 치켜들고 버럭 소리쳤다. 그 순간 한덩어리로 뭉쳐 달려오던 기마군이 두덩이로 와락 쪼개졌다. 절반씩 좌우로 나눠지더니 아리아케의 기마군 좌우 끝을 향해 비스듬히 달려가는 것이다. 정연한 행동이어서 단 1기도 어긋나지 않았다. 마치 통나무가 두 토막으로 탁, 쪼개지면서 좌우로 나눠진 것 같다. 앗! 앞장서 달려오던 아리아케가 저도 모르게 외침을 뱉었다. 손에는 4척이나 되는 장검을 쥐었는데 무겁다. 그러나 한칼에 말 목을 베어 뗄 수가 있다. 눈앞의 기마군이 탁 쪼개지면서 중심에는 가득 먼지만 일어나고 있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다. 거리는 2백보, 자, 양쪽으로 나뉜 적군을 따라 이쪽도 나뉠 것인가? 아니면 어떤 한쪽만 쫓은 것인가? 그 생각을 잠깐 하는 사이에 말은 20여보를 내달렸다. 그 순간이다. 와앗! 앞쪽에서 함성이 울리더니 먼지 사이로 1진의 기마군이 나타났다. 이 기마군은 이쪽으로 직진해오고 있다. 다시 아리아케가 숨을 들이켰다. 앞쪽 백제 기마군이 쪼개진지 숨을 두번밖에 내쉬지 않았다. 먼지를 헤치고 직진한 계백이 잔뜩 시위를 당긴 화살끝을 아리아케를 향해 겨누었다. 달리는 말 위여서 뛰어 오를 때를 기다려 살을 놓아야 한다. 백제, 고구려 기마군의 마상 사격은 뛰어났다. 기마술이 뛰어나야 해서 기마술부터 익히고 마상 사격을 배운다. 계백은 말이 뛰어오른 그 짧은 순간을 기다렸다가 살을 놓았다. 쌕! 소음속에서 살이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따르는 기마군은 계백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다. 거리는 이제 120보, 가깝다. 그 순간이다. 뒤쪽에서 함성이 울렸다. 와앗! 화살이 아리아케의 두눈 사이에 박힌 것이다. 갑옷으로 무장한 아리아케는 얼굴만 내놓은 상태여서 다 보인다. 화살에 맞은 얼굴이 먼저 뒤로 벌떡 젖혀지더니 이어서 상반신이 넘어졌고 곧 말위에서 굴러 떨어졌다. 와앗! 다시 함성이 울렸을 때는 아리아케군과의 거리가 7, 80보로 가까워진 상태다. 사기가 충천한 백제군이 다시 함성을 질렀다. 앞장선 아리아케가 장검을 내동댕이 치면서 말에서 굴러 떨어졌을 때 말은 말굽을 모으면서 10보쯤 뛰었다. 그동안에 아리아케는 화살에 맞은 채로 말 위에 실려 있었다. 그것을 뒤에 따르던 위사대가 다 보았다. 주군! 주군을 구해라! 이쪽 저쪽에서 외침이 울렸고 말 고삐를 채어 멈추는 소란이 일어났다. 그 서슬에 600기마군이 엉켰다. 말들이 부딪히고 넘어졌다. 마치 떼지어 달리던 마차들이 부딪혀 넘어지는 것 같다. 그때 백제군이 덮쳤다. 우왓! 함성, 이제 아리아케군은 주군 아리아케가 화살에 맞아 땅에 떨어졌다는 것을 안다. 제대로 칼을 쥐고 덤비는 군사가 드물다. 우왓! 다시 함성이 오르면서 좌우에서 윤진의 기마군이 치고 들어왔다. 그러나 뒤쪽 퇴로는 놔두었다. 도망갈 길을 터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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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1.20 19:49

[불멸의 백제] (224) 11장 영주계백 20

그 시간에 계백은 말을 달려 쿠로기(黑木) 성 앞으로 달려가는 중이다. 뒤를 따르는 기마군은 2백, 가을 햇살이 머리 위에서 비치는 맑은 날씨다. 2백 기마군의 말굽소리가 황야를 울렸지만 가끔 말울음소리와 말장식 부딪치는 소음만 울릴 뿐 기마군은 말이 없다. 이윽고 앞장선 선봉이 속도를 늦췄고 뒤를 따르던 본대도 속보가 되었다. 쿠로기 성은 타카모리 영지의 중심에 위치한 거성(巨城)으로 성주는 타카모리의 사촌 아리아케(有明), 37세의 용장으로 성 안에는 기마군 8백에 보군 1천이 주둔하고 있다. 아래쪽 가모성을 화청에게 맡기고 병력을 반으로 나눠 곧장 쿠로기 성으로 온 것이다. 이곳이 타카모리의 영지 중 중심이며 아리아케가 가장 반항적인 위인이었기 때문이다. 성에 깃발이 날리고 있습니다. 옆으로 말배를 붙여온 윤진이 성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얼굴에 웃음이 떠올라 있다. 예상대로 싸우려는 것 같습니다. 아리아케의 기마군은 천하무적이라고 했어. 계백이 3리(1.5km) 거리로 다가온 성을 향해 나아가며 말했다. 수적으로 서너배 우위에 있으니 나와 싸우려고 할 것이다. 참기 힘들겠지요. 윤진이 말고삐를 감아쥐면서 말을 이었다. 아리아케는 호승심이 강하다는 소문입니다. 제 사촌 일족이 몰사해서 분기가 충천해 있을까? 아리아케가 영주가 될 수도 있습니다. 윤진이 말을 받았을 때 성에서 북소리가 울렸다. 주군, 선두에 서지는 마십시오. 중신(重臣) 노무라가 말하자 아리아케가 입을 벌리고 소리없이 웃었다. 마당에 앉은 아리아케는 왜인치고 거인이다. 6척의 키에 앉은 키가 커서 군사들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크다. 은으로 만든 비늘갑옷을 입고 머리의 은투구에는 황소뿔을 좌우에 붙였다. 말에도 은갑옷을 입혔기 때문에 거대한 은덩어리가 움직이는 것 같다. 계백이 와 있는데 내가 숨겠느냐? 아리아케의 목소리가 마당을 울렸다. 출진 북소리는 아까부터 계속해서 울리고 있다. 마당에 모인 기마군은 6백, 넓은 마당이 기마군으로 가득찼다. 말고삐를 챈 아리아케가 군사들을 향해 섰다. 아리아케는 수염이 무성했고 얼굴이 붉다. 타카모리 제1의 용장이지만 단순해서 1만8천석의 영지 관리는 중신 노무라가 집사 역할로 관리하고 있다. 들어라! 아리아케가 버럭 소리쳤다. 우리는 타카모리님의 원수를 갚는다! 알겠느냐! 옛! 6백 기마군이 일제히 대답하자 흥분한 전마(戰馬)들이 발굽으로 땅을 찼다. 자, 나를 따르라! 장검을 빼든 아리아케가 다시 소리치면서 앞장을 섰다. 우왓! 다시 함성이 울렸다. 옳지 나온다! 속보로 다가가던 윤진이 성문에서 쏟아져 나오는 기마군을 보고 소리쳤다. 윤진은 1백기를 이끌고 본대의 앞에서 다가가던 중이다. 그때 앞에서 선봉장의 외침이 울렸다. 성주가 나옵니다! 윤진이 숨을 들이켰다. 성문과의 거리는 1리(500m), 윤진의 눈에도 성주의 문장이 박힌 깃발이 보였고 그 옆을 달려오는 은빛갑옷의 무장이 보인 것이다. 저런! 윤진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장관이구나. 햇살을 받은 성주의 은빛투구와 갑옷이 번쩍인다. 더구나 말까지 은갑옷을 걸쳤기 때문에 위풍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그때 윤진이 허리에 찬 장검을 뽑아 쥐었다. 자! 따르라! 짧게 외친 윤진이 말에 박차를 넣으면서 힐끗 뒤를 보았다. 계백이 이끈 본진 1백기는 1리쯤 뒤에서 따르고 있다. 하지만 다 보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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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1.19 20:34

제31회 전북수필문학상에 김철규·박귀덕 씨 선정

전북수필문학회가 시상하는 제31회 전북수필문학상 수상자로 김철규, 박귀덕 수필가가 선정됐다. 1979년 발족한 전북수필문학회는 수필가뿐만 아니라 시인, 소설가, 평론가 등 회원 150명으로 이뤄진 문학단체. 4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1988년 전북수필문학상을 제정해 지난해까지 총 61명의 수상자를 배출했다. 올해는 문학상의 위상을 높이고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모든 회원을 대상으로 수상 후보자 추천을 받았다. 후보자는 총 4명. 전북수필문학상 심사위원회는 작품의 문학성, 전북수필문학회의 활동 실적 등을 평가해 수상자를 결정했다. 군산 출생인 김철규 수필가는 전북일보 논설위원, 제4대 전북도의회 의장 등을 지낸 언론인이자 정치인이다. 군산문인협회 회장, 전북문인협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수필집 <인연>, 칼럼집 <아니다, 모두가 그렇지만은 않다>, 시집 <바람처럼 살다가> 등 11권의 저서를 펴냈다. 전라북도문화상, 한국수필문학상을 수상했다. 박귀덕 수필가는 김제 출신으로 공무원으로 재직하다 정년퇴직했다. 행촌수필문학회, 전북수필문학회 회장을 지냈다. 수필집으로 <삶의 빛, 사랑의 숨결>, <잃어버린 풍경이 말을 건네오다>가 있다. 작촌문학상, 행촌수필문학상, 수필과비평작가상을 받았다. 시상식은 다음 달 21일 오후 5시 전주 바울센터 2층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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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민주
  • 2018.11.19 20:34

[불멸의 백제] (223) 11장 영주 계백 19

산요님이 오셨소. 오꾸보가 말하자 후다나리는 몸을 일으켰다. 한낮, 오시(12시)가 조금 지났다. 가모성의 청안, 가모성주 후다나리는 타카모리의 오랜 가신(家臣)으로 녹봉 5천석, 산요의 사위가 된다. 그때 청으로 산요가 들어섰다. 피곤한 표정이다. 후다나리가 다가가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산요님, 백제방 군사를 이끌고 오셨군요. 백제방 군사가 아니라 계백령지의 군사네. 산요가 수정했지만 후다나리는 시선을 떼지 않고 되묻는다. 같은 군사 아닙니까? 백제방 영지가 계백령 아닙니까? 아니야. 계백령은 아리타, 마사시, 이또 영지를 합한 것으로 왜국 관할일세. 이제 이곳 타카모리 영지도 포함이 되겠군요. 그때 산요가 먼저 자리에 앉았다. 청안에 후다나리의 가신 10여명이 모여 있었지만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성으로 백제방 기마군 2백여 명이 다가왔기 때문에 후다나리는 성문을 닫고 전투준비를 시켰던 것이다. 이쓰와성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가모성은 요충지다. 그리고 성에 기마군 3백, 보군 3백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백제군에 끼어온 산요가 후다나리를 만나겠다면서 먼저 성에 들어온 것이다. 그때 산요가 정색하고 후다나리를 보았다. 이보게, 후다나리. 지금 어쩔 작정인가? 그냥 성은 못 넘깁니다. 33세의 후다나리가 바로 대답했다. 죽은 주군의 원수를 갚고 죽겠습니다. 옳지. 산요가 머리를 끄덕였기 때문에 청안의 시선이 모여졌다. 후다나리도 산요의 반응이 예상 밖인지 눈만 껌벅였다. 그때 산요가 말했다. 잘했어. 장렬하게 싸우다가 죽게. 이기리라는 생각은 안했을 테니까. . 이 성에 군사 7백여 명, 주민 8천 정도가 있는 줄 알고 있네. 다 몰사하겠지. . 내가 죽기 전에 타카모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이라는 묘비는 세워주지. . 나는 자네가 투항하리라는 기대를 안했어. 내 사위 성품쯤은 아니까. 난세에 5천석 영지를 탐내어 정세 판단도 못하고 군사를 출동시킨 병신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대병신이라는 건 알지. . 그리고는 산요가 쓴웃음을 짓고 후다나리를 보았다. 밖에는 계백공의 신복무장 화청이 와 있어. 기마군 2백이지만 이 성안의 군사로는 당해내기 힘들 걸세. 대륙에서 당왕을 패퇴시키고 돌아온 백제군이니까. . 나도 여기서 자네하고 같이 죽겠네. 화청이 날 들여보내면서 그러더군. 한식경 안에 안나오면 같이 죽는 것으로 알겠다고. 쓴웃음을 지은 산요가 안쪽을 기웃거렸다. 내실이 저쪽인가? 가서 내 외손자들을 보고 있을 테니 자네는 나가서 싸우게. 한식경쯤이 지났을 때 성 밖에 군사를 주둔시킨 화청에게 후다나리의 전령이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장군께 말씀드리오. 말해봐라. 나무의자에 앉은 화청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전령을 보았다. 둘러선 무장들은 모두 백제식 가죽갑옷에 어깨에 깃털을 꽂은 무장도 있다. 당군(唐軍) 기마군의 장식인데 그것을 빼앗아 전리품처럼 꽂고 있는 것이다. 그때 전령이 말했다. 성주 후다나리가 장병과 함께 계백령에 투항한다고 합니다. 성문을 열어드릴 것이니 진입하시라고 했습니다. 그럼 후다나리가 나와야지. 화청이 흰 수염을 손으로 쓸면서 말했다. 갑옷을 벗고 칼을 풀고 걸어서 나와 맞는 법이다. 가서 그렇게 전해라. 그리고는 화청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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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1.18 19:35

[전북작가회의와 함께하는 전라북도 길 이야기] 천장 - 장용수

우리 그만해요, 이제! 그녀는 내 시선을 피하면서 말했다. 그녀의 어깨 너머로 붉게 노을이 타고 있었다. 나는 6개월째 무직자였다. 그녀는 내가 앞으로도 무직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녀는 직감 능력이 뛰어난 여자였다. 당시 나는 굶어 죽지만 않는다면 한동안 일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뭐라 변명조차 할 수 없었다. 물론 직장이라는 곳에 들어가 보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가 열심히 일을 하는 사무실 안에 앉아 있으면 서서히 어디선가 생고무 태우는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간신히 오전을 넘기면 생고무 탄 냄새 때문에 점심식사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속이 뒤집어졌다. 그 냄새 때문에 머릿속 뇌수들이 모두 회반죽처럼 걸쭉하게 변해 버려 이것과 저것을 가지런하게 구분할 수 있는 판단력도 사라져 버리곤 했다. 그쯤 되면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유일한 해결책은 응급조치를 하듯이 소주를 반병 정도 마시는 방법밖엔 없었다. 참, 어지간허다. 그런데 술 마시는 변명치고는 좀 시적이다. 이걸 글로 한번 써 보는 건 어때? 문청이었던 술친구의 제안. 그 친구의 제안 때문이라기보다는, 술을 좀 줄일 수 있는 대책이 필요했다. 불면에 시달리던 어느 날 친구의 말이 떠올라 뭔가를 쓰기 시작하기는 했다. 그 뭔가는 처음에는 넋두리로 시작되어 그녀에게 나의 상황을 설명하고 나를 이해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변질되었다가 청혼을 위한 로맨스가 되었다가 다시 신세 한탄이 되었다가 급기야는 신을 저주하는 울분이 되었다가 다시 자조적인 신세 한탄으로 추락하곤 했다. 그러나 글을 쓰고 정리하는 것에는 일정한 관점과 의도가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곁가지를 쳐내고 그녀에게 나의 상항을 설명하고 청혼을 하는 형식으로 글을 정리하고 있었다. 글의 마무리를 유예하고 있었던 것은 불면의 밤이 짧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나 자신조차 내가 원하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사랑하기는 하지만 결혼이라는 실제적인 생활은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를 포기할 만큼의 용기도 없었다. 그러니까 나를 이제 그만 좀 놔줘요. 난 그냥 평범한 남자 만나서 평범하게 결혼해서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 난 입안이 써 술잔을 거푸 마셨다. 그리고 결국 취해 버려서 그녀에게 추접스러운 간청을 하다가 화를 내보기도 했지만 그녀를 다시 만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마침내 일어났다. 그녀 어깨 너머로 바라다 보이던 흐릿한 세상이 깜깜해졌다. 블랙아웃! 맹렬한 추위에 눈을 떴다. 전주 덕진공원 벤치 위였다. 누가 덮어 주었는지 신문지 몇 장이 덮여 있었고, 어디선가 풀벌레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순간 울렁증이 일어 급하게 토하고 나자 벌떼 같은 추위가 엄습했다. 얼마나 웅크리고 잤는지 목과 허리는 굳어 버린 것 같았다. 돌덩이처럼 차가운 몸. 가을이 끝나가고 있었다. 다시 술이 생각났다. 그녀를 생각하자 다시 무딘 칼로 연한 살을 서서히 긁어내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집으로 돌아와 그녀에게 쓰던 편지를 찢어 버렸다. 그리고 오랫동안 계획했던 여행을 실행하기로 했다. 곧바로 비행기 티켓을 샀다. 중국으로 들어가 티베트를 거쳐 인도까지 갈 작정이었다. 다시 되돌아오는 여정까지는 생각지도 않았다. 중국의 거얼무에서 티베트로 넘어가는 천장공로는 아득했다. 그곳을 몇몇 일행과 함께 나는 랜드크루저를 타고 넘었다. 삼천과 사천오백의 고도를 넘나드는 산악의 길엔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았다. 나는 호흡을 고르게 하려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으나 날숨의 뒤끝은 간신간신했다. 고산증에 시달리느라 머릿속은 몽롱했고 문득문득 해독할 수 없는 이명이 들렸다. 문득 유년 시절의 고통이 너무 생생하게 되살아나 아이처럼 울고 싶어지기도 했다. 엄마, 도대체 왜 날 낳았어? 티벳은 이미 겨울이었다. 그리고 산악의 길들은 끝이 없었다. 벼랑을 돌아서고 계곡을 가로지르며 길은 끝없이 몸을 뒤틀었다. 정수리를 가르는 칼바람은 코끝에서 맵싸했다. 계곡을 훑으며 내려오고 올라가는, 아찔한 바람들은 문득 한 덩어리로 뭉쳐 산악을 후리치며 흩어졌다. 그 막막한 산악의 길을 몸으로 열어가는 수행자가 있었다. 수행자의 모습은 초라했다. 수행자는 오 척 단신의 몸에 누더기 같은 붉은 가사를 입은 채로 빙판길 위에 무릎을 꿇었다. 무릎을 꿇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번에는 길바닥에 배를 붙이고, 손으론 언 땅을 쓸어안으며 이마를 얼음이 뒤덮인 길 위에 밀착시켰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용해야만 가능한, 파충류의 그것과 유사한, 가장 더디고 정직한 길 읽기, 오체투지였다. 강렬한 자외선에 노출된 그의 피부는 그가 입은 붉은 가사보다 더 붉게 타들어가고 있었고, 그의 눈썹과 수염에는 땀방울 같은 고드름이 덜렁거리고 있었다. 그의 오체투지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기 위함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비효율적인 방식이었다. 그의 오체투지는 진화의 시간을 거슬러 가는 듯했다. 차창 밖의 산들은 만년설에 뒤덮여 있었다. 눈 덮인 산악의 길들이 이어지다가 믿을 수 없이 황량한 사막이 펼쳐져서 낯선 행성 같은 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 압도적인 풍경 속을 붉은 가사를 입은 티베트인 수행자들이 전설처럼 오체투지로 길을 열어 나갔다. 수행자들이 오체투지로 도달할 간절함의 끝이 어디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의 길은 그를 중심으로 순간 태어나고 순간 사라지는 것 같았다. 산악의 까마득한 산등성이 위에서 야크들은 칼바람을 맞으며 수행자를 묵연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가 탄 지프는 눈길 위에 타이어 자국을 남기며 수행자들을 앞질러 나갔다. 그렇게 산악의 길을 넘어 라사에 도착했다. 티베트 사람들은 늘 마니차를 돌렸다. 라사에서 티베트 사람들이 뱅, 뱅, 뱅, 돌리는 마니차를 볼 때마다 나는 어지럼증을 느꼈다. 마니차를 돌리기만 해도 불경을 읽는 효과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 그러나 마니차를 돌리는 두루뭉술한 대승불교의 원리가, 라사의 사원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오체투지를 하며 밀어 올리는 열망이, 그 간절함에도 불구하고, 무참한 중국의 총칼을 막아내진 못했다. 티베트 수도인 라사도 상권을 장악한 중국인들에 의해 허물어져가고 있었다. 영혼의 고향이라 일컬어지던 포탈라 궁 앞에는 중국인 혁명 기념탑이 서 있었고, 그 주변은 이미 중국의 환락가로 변해가고 있었다. 며칠 전에도 티베트의 자유를 외치며 승려 하나가 분신했다고 들었다. 벌써 100명째라고 했다. 문득 오체투지로 라사를 향해 간다던 수행자가 떠올랐다. 그가 길 위에서 얼어 죽지 않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되었다. 티베트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천창을 한다고 했다. 천장? 가이드가 그 단어를 처음 설명해주었을 때 그 단어에 매혹이 되어 버렸다. 무언가 숭고하고 아름다운 장례의 모습이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천장터는 사천고지에 자리한 사원의 뒤편에 있었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 가파른 천장터까지 시신은 가족에 의해 옮겨졌다. 풀 한 포기 찾아볼 수 없는 황량한 사천고지의 산 위까진 구름도 감히 오르지 못했다. 멀리 히말라야 산맥의 주봉인 신성한 초롱라마가 만년설에 뒤덮여 있었다. 가족들이 망자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그러자 라마 승려가 집착할 것 없는 짧은 생의 덧없음을, 그리고 모든 존재들이 돌아갈 근원의 자리인 공(空)의 세계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진언 소리는 날 선 바람이 토막을 내었다. 승려가 물러나자 천장사가 나섰다. 그는 도끼날로 두어 번 시신의 머리를 두드리며 곧 쇠 하나가 흙과 물, 불, 바람 사이를 가르며 지나갈 것임을 예고했다. 그리고 천장사는 고원지대의 희박한 공기층을 가르며 도끼를 날렸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머리와 팔, 다리가 몸에서 분리되었다. 관절을 제대로 파고든 도끼날에 팔은 한 번에 떨어졌지만 목과 다리는 몇 번의 수고가 더해졌다. 몸에서 떨어져나간 머리와 팔, 다리는 분해된 인형 그것처럼 느껴졌다. 천장사가 이번에는 칼을 질러 몸속의 장기를 하나씩 꺼내 놓았다. 묵직한 비린내와 함께 한 번도 개봉된 적 없는 순결한 속살들이 햇살 아래 꽃처럼 피어났다. 푸른 하늘가에는 피 냄새를 맡은 검은 새들이 모여들어 허공을 맴돌았다. 사신들이었다. 머리와 팔, 다리, 그리고 햇살 아래 드러난 장기들은 망자가 살아 있음을 유지하기 위해 씹어 먹던 야크나 산양의 그것과 다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천장사가 언덕을 내려오자 검은 새들이 흐벅지게 붉은 꽃들이 피어난 자리에 엉겨 붙었다. 지상의 것들을 먹고 키운 몸은 그렇게 검은 새를 따라 하늘로 올라갔다. 망자의 가족이나 승려들은 모두 돌아갔다. 시신의 살을 다 발라 먹은 검은 독수리들도 떠났다. 그리고 까마귀들 몇 마리만 망자의 부서진 뼈마디 사이를 쪼고 있었다. 나는 어쩐지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육신도 결국 이렇게 분해되어버릴 수밖에 없으리라. 그녀의 연꽃 같은 가슴도 저와 같이 분해되어 결국 흙과 물과 바람으로 흩어지고 말 것이었다. 가이드가 재촉하는 바람에 더는 천장터에 머물 수가 없었다. 티베트에는 나무가 없어 화장을 할 수도 없고, 시체를 묻어도 얼어서 썩지 않아서 천장을 합니다. 라사 맥주는 가공되지 않은 날것의 시원한 맛이었다. 천장을 안내해준 가이드, 그리고 같이 천장을 참관했던 노년의 영국 여인과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중국식당에 들었다. 술을 마시지 않는 가이드는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노년의 영국 여인과 나는 본격적으로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나는 입안에서 알 수 없는 비린 맛이 느껴져서 맥주를 계속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여비가 걱정이 되어서 그녀에게 서툰 영어로 양해를 구했다. 당신은 오늘 내 술값을 지불해 줄 수 있어요? 왜? 나는 배낭 여행자이고 인도까지 여행을 할 생각인데, 여유가 거의 없어요. 그건 네 사정이고, 왜 내가 너에게 한턱을 내야 하는지 설명을 해봐. 혹시 나에게 원하는 게 있습니까? 그럴 리가 없잖아. 너와 난 만난 지 하루도 되지 않았는데. 그녀는 말은 그렇게 해도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러니까 돈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럼, 내 손가락을 하나 팔게요. 별로 맛은 없을 것 같은데. 그녀는 웃었다. 시간의 건너편에서 그녀는 물질적으로는 부유했지만 시간 속에서 고독하게 사위어온 여자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얼굴 속에서 문득 그 사람의 일생이 보이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는데 그때도 그랬다. 눈가에서 곱게 흘러내린 주름살과 다르게 그녀의 눈빛은 깊고 어둡고 축축했다. 그녀는 내 주순에 맞게 쉬운 단어와 짧은 문장을 사용했다. 그리고 내가 이해를 하지 못하면 몸동작을 사용해서 요령 있게 자신의 의도를 전달해 주었다. 누군가를 가르쳐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나는 그녀의 말을 70% 정도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 정도면 대단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녀는 같은 영국인과 이야기해도 50% 미만으로밖에 이해하지 못하고, 30% 미만으로밖에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지 못하고 산다고 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도 한국에서 비슷한 상황이었던 것 같았다. 티베트에서는 남자 두 명이 한 여자와 결혼하는 풍속이 있는 거 알아? 그녀의 말에 의하면 티베트의 기후 환경 때문이라고 해다. 티베트는 긴 겨울과 짧은 여름 때문에 밀이나 보리 같은 작물밖에 재배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시골에서 농사만으로는 가족을 부양하기 어렵다는 것. 해서 남자 한 명은 식구들의 식량을 해결할 수 있는 농사를 짓고, 다른 한 명은 도시로 나가 장사나 다른 돈사는 일을 해서 아이들의 학비와 살림살이를 할 수 있는 돈을 번다는 것. 그리고 도시로 나간 남자가 일 년에 두어 번 집으로 돌아오면 나머지 하나는 잠자리를 양보하고 잠시 자리를 비켜준다는 것이다. 슬픈 이야기네요! 한국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네요. 아름다운 이야기지! 욕심 때문이지! 어쨌든 이기적인 인간들은 가족을 만들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해. 그럼, 나 같은 사람은 결혼하지 말라는 말이에요? 가족을 만들면 그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남자들은 무슨 짓이든 다 하잖아. 그게 미덕처럼 여겨지는데 그게 세상을 망치는 거야. 자기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아비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거야. 그럼, 남자들은 뭘 위해서 살아야 하죠? 바보같이 그걸 왜 나에게 물어? 2017년 여름, 덕진공원에 갔다. 그리고 20대 후반, 술에 취해 잠들었던 그 벤치에 앉아 보았다. 흔히 공원에서 볼 수 있는 나무 벤치였다. 여기 저기 칠이 벗겨진 자리가 까맣게 변색된 채 사위어 가는 벤치. 20년 전 그 벤치였는지 모르겠다. 아무려나, 오늘 밤 추억에 젖어 여기서 잠들면 모기들이 벌떼처럼 달려들 것이다. 이곳의 풍경은 언제나 주말 오후처럼 한가롭다. 연못 주변의 산책로를 따라 오래된 포플러 나무들과 아이스크림 판매대, 놀이터, 화장실, 기념비들이 늘어서 있어서인지 모르겠다. 난 중고등학교 때 이곳으로 소풍 나온 여공들을 꼬시러 오곤 했었다. 연못에는 연꽃이 피어 있었다. 그녀의 붉은 가슴 같은 연꽃. 그녀가 원하는 대로 성실하고 다정한 남자를 만나서 아이들 낳고 잘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그것이 정말 그녀가 원하는 삶일지, 아니면 이십 대의 초조함을 이기지 못해 결국 남들처럼 결혼으로 도피하고 싶어 했던 건지, 그도 아니면 단지 나를 피하고 싶어 했던 건지 알 길이 없다. 이제 나는 그녀가 세속에 환멸을 느껴 머리를 깎고 수도를 하다가 환속해서 술집 주모가 되었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나이가 되어 버렸다. 젊은 친구, 길을 갈 때는 바닥을 보지 마. 그렇게 걸으면 시간이 반대로 흐르거든. 가장 좋은 것은 그저 눈앞의 풍경을 즐기는 거야! 티베트에서 만난 영국인 할매가 헤어지면서 한 말이었다. 그녀는 나에게 백 달러짜리 석 장을 주었다. 그때로서는 거절할 엄두가 나지 않아 덥석 그 돈을 받았다. 그리고 티베트의 라싸에서 장무를 거처 네팔의 카트만두, 포카라를 찍고 인도를 갔다. 빳빳이 고개를 들고 걸어서. 그리고 마침내 인도의 바라나시에 도착했었다. 돌아올 계획이 없는 여행이었지만 어쩌다 보니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가 다시 떠나기를 반복하는 삶이 되어 버렸다. 지금은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의 골목길을 떠돌고 있다. 밥벌이는 하고 있지만 아직 생고무 타는 냄새를 완벽하게 극복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간섭과 경쟁이 덜한 일을 찾아서 그럭저럭 견딜 만해졌다. 그래도 견딜 수 없는 날들은 있기 마련인데, 그런 날이면 티베트의 고지대에서 만국기같이 나부끼던 타르초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 내 코끝을 간지럽히는 바람이 설산의 타르초를 읽고 온 바람이라는 느낌이 확연한 날은, 술을 마시지 않아도 기껍다. *장용수: 2001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소설필명 장용석) 당선. 현재 말레이시아 말라야대학교 아시아유럽어학과에서 한국어 교수로 재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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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1.16 16:57

[불멸의 백제] (222) 11장 영주계백 18

거성(居城)의 청에는 화청과 윤진이 와 있었는데 각각 5백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왔다. 계백의 거성에도 5백 가까운 병력이 있었으니 1천5백의 군사력이다. 그 중 기마군이 5백5십, 2백5십을 기반으로 3백을 늘렸다. 급조한 군사들이어서 허점이 많습니다. 쓴웃음을 지은 윤진이 계백을 보았다. 백제 기마군단 1개만 데려와도 거침없이 진군할 텐데요. 백제 기마군단은 2천5백으로 형성되었다. 대륙의 백제 담로에서는 1개 기마군단이 그 배인 5천이다. 대륙은 지형이 평탄한 데다 장거리 이동이 많아서 1개 군단이 움직이면 말떼가 2, 3만 필이 따른다. 예비마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화청과 윤진은 대륙에서도 기마군을 지휘했고 특히 화청은 멸망한 수(隋)나라에서부터 기마군이다. 그때 계백이 말했다. 나솔이 돌아오는 대로 이쓰와 성으로 진입한다. 이번에는 한낮에 국도를 따라서 가는 거야. 둘러앉은 셋의 앞에 지도가 펼쳐져 있다. 셋이 함께 가는 것이다. 화청이 손끝으로 국도를 짚고 이쓰와 성까지는 350리(175km), 도중에 타카모리 영지의 성 3개를 지나야 된다. 3개가 국도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 성 한곳에서라도 군사가 나오면 격전을 치러야 될 것입니다. 성 하나에 최소 5백 이상의 병력이 있을 테니까요. 계백이 머리만 끄덕였다. 이번에도 계백의 군사는 기마군 5백이다. 말은 3천필, 보군은 영지에 남겨놓고 전군(全軍)이 기마군이다. 그때 윤진이 말했다. 타카모리가 생포되면서 영지의 가신, 군사들이 공황 상태에 빠졌지만 일부가 결속해서 복수를 하려는 놈들도 있을 것입니다. 당연하지. 화청이 대답했다. 백용문이 하세가와의 어떤 대답을 듣고 오던 간에 25만석이나 되는 영지야. 지렁이만 있을 리가 없어. 오후 신시(4시) 무렵이다. 바깥 마당에서는 말 울음소리, 발굽소리로 소란했다. 출동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출동시간은 밤 술시(8시), 밤길을 달려 내일 이른 아침인 묘시(6시)경에 타카모리의 거성인 이쓰와 성에 진입하려는 계획이다. 그때 청 밖에서 하도리가 소리쳤다. 주군! 산요 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계백이 머리를 들었고 화청과 윤진이 자리를 고쳐 앉았다. 이루카 섭정에게 말 50필을 진상하러 왔던 타카모리의 중신 산요다. 말을 바치고 나서 돌아가려다가 이쓰와 성의 변을 듣고 아스카에 머물고 있던 산요를 하도리가 데려온 것이다. 곧 하도리와 함께 산요가 들어섰는데 비장한 표정이다. 왕성이 있는 아스카에서 이곳까지 2백리(100km) 가깝게 되었으니 강행군을 했을 것이다. 마치 포로로 잡힌 것 같다. 그때 계백이 말했다. 산요, 그대가 왕성에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았다. 그대 주군도 이곳에 있다. 계백 앞에 엎드린 산요가 머리를 들었다. 50대 초반의 산요는 지쳤기 때문인지 10년은 더 나이들어 보였다. 제 역할은 끝났습니다. 영지에 하세가와 님이 계시니 그분이 정리를 도울 것입니다. 그때 계백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 영주에 그 신하들이로구나. 너한테 영주네, 영지의 주민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산요의 시선을 받은 계백이 말을 이었다. 내가 나카모리의 일족을 몰사시켰다는 말을 들었겠다? 타카모리는 그 말을 듣고도 눈 한번 깜박하지 않고 영지 양도증에다 가신, 주민들한테 나한테 복속하라는 서신을 써 주더구나. 계백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타카모리 영지에 진입하면 네 일족도 쥐새끼 한 마리 남기지 않고 내 손으로 죽여주마. 그것이 군주, 신하들이 받아야 할 대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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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1.15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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