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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서 탈영한 군사문화, 아직도…” 오홍근 저서 ‘펜의 자리, 칼의 자리’

1988년 8월 6일 아침 서울 강남 대로변에서 택시를 잡으려고 서 있던 오홍근 씨(당시 중앙경제신문 사회부장)가 칼부림 테러를 당해 쓰러졌다. 오 씨는 허벅지에 중상을 입고 병원에 실려 가 수십 바늘을 꿰맸다. 범인은 정보사령부 장성 두 명을 포함한 십여 명의 현역 군인들. 오 씨가 시사월간잡지 <월간중앙>에 쓴 칼럼 청산해야 할 군사문화에 불만을 품고 저지른 조직적인 범죄였다. 가해자들은 군에 대한 충정이라 판단한 군사법원에 의해 선고유예로 풀려났다. 반면 피해자인 오 씨와 그의 가족은 오랜 기간 심각한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그렇게 어언 30년이 흘렀다. 오홍근 테러 사건 발생 30년을 맞아 오 씨와 그의 동료후배들은 88 언론테러 기억모임을 조직하고 군사문화를 집중 조명한 책 <펜의 자리, 칼의 자리>를 펴냈다. 이를 통해 우리는 30년 전 오 씨를 테러한 국군 정보사령부, 촛불집회 계엄령을 검토한 국군 기무사령부 등 30년이 흘러도 반성하지 않고, 변하지 않은 군사문화를 목도하게 된다. 88 언론테러 기억모임은 오 씨와 역사학자인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정치권의 군사 전문가인 김종대 정의당 의원이 함께하는 3자 특별 좌담을 개최하고 그 내용을 기록했다. 오 씨가 칼럼니스트로 복귀해 2011년 8월부터 2018년 6월까지 인터넷신문에 연재한 칼럼도 복기했다. 재판 거래 의혹으로 검찰 수사 대상에 오른 양승태 대법원의 군사 문화 등 최근에 쓴 글까지 수록했다. 특별 좌담에서는 군사문화란 무엇이고, 우리 사회에서 군사문화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관해 다뤘다. 이와 관련해 오 씨는 군사문화는 기본적으로 승리하는 문화, 능률을 추구하는 문화로 공정함이나 정당함은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린다며 또 하나 중요한 건 졸(卒)을 사람으로 안 보는 것이다. 양승태 대법원 사태도 졸의 기본권을 무시했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다라고 꼬집었다. 이외 김 의원은 명령의 정당성에 대해 논할 수 없는 군사문화의 문제를 지적하고, 한 교수는 대학 내 군기 문화 등 일상의 군사문화를 없애 민주주의를 심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88 언론테러 기억모임은 특별 좌담을 하고 책을 출간하면서 우리가 내린 결론은 명확하다. 군사문화는 병영 안에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며 군사문화가 병영 밖으로 뛰쳐나와 민주주의를, 시민의 삶과 문화를, 나아가 한 나라 역사를 패대기치게 해선 절대 안 된다고 밝혔다. 김제 출신인 오홍근 씨는 1968년 동양방송(TBC)에 입사하면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1980년 TBC가 통폐합되자 중앙일보사로 옮겨 중앙경제신문 사회부장, 중앙일보 부국장, 논설위원, 판매본부장 등을 거쳤다. 1999년 국정홍보처장을 시작으로 대통령 공보수석비서관 겸 대변인, 한국가스안전공사 사장 등 공직을 역임했다. 저서로 <각하 전상서>, <대통령 복도 지지리 없는 나라> 등이 있다.

  • 문학·출판
  • 문민주
  • 2018.09.06 19:40

[불멸의 백제] (175) 9장 신라의 위기 11

잘 오셨소. 신라여왕 덕만(德曼)이 웃음띤 얼굴로 협려를 보았다. 50여 명의 장수가 들어찬 진막 안은 열기가 덮여져 있다. 감사합니다. 전하. 협려가 앉은 채로 허리를 꺾어 절을 했다. 앞쪽에 놓인 상에는 술과 안주가 가득 놓여졌는데 신라와 백제 장수들이 마주보고 앉도록 배치되었다. 여왕 좌우에는 대장군 김유신과 이찬 김석필이 앉았고 이쪽은 협력 좌우에 덕솔 연자신과 백준이 자리잡았다. 나머지 장수들이 서열 순으로 늘어져 앉아서 불빛을 받은 갑옷이 번쩍이고 있다. 여왕이 지그시 협려를 보았다. 태왕비께서는 건녕하시오? 선화공주, 의자왕의 모친을 묻는 것이다. 예, 전하. 협려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선화공주는 여왕의 동생이다. 지금도 말을 타시고 도성 남쪽 수렵장에 다니십니다. 그런가? 여왕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내가 선화를 못 본 지 40년이 넘었어. 지금 그대의 대왕 연세가 어떻게 되오? 예, 마흔넷이십니다. 그럼 45년이 되었네. 못 본 지가. 긴 세월입니다. 전하. 그렇소. 이제는 여왕이 한숨을 쉬었지만 진막의 분위기는 밝다. 여왕이 술잔을 들고 협려를 보았다. 당왕(唐王)이 짐이 여자라고 왕위를 유지하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는 거요. 그대도 들었소? 예, 주제 넘은 놈입니다. 어깨를 편 협려가 여왕을 보았다. 그자는 제 형, 동생을 죽이고 아비를 유폐시킨 후에 동생의 처를 데리고 사는 놈이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차별을 하다니요? 무시하십시오. 전하. 비담이 당왕의 사주를 받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오. 당왕은 안시성에서 눈 한쪽을 잃고 지금 장안성으로 도주하고 있습니다. 이제 비담만 죽이면 백제와 신라는 선왕(先王)들께서 염원하신 합병을 이룰 것입니다. 고맙소. 여왕의 얼굴도 상기되었다. 그때 협려가 고개를 돌려 김유신을 보았다. 장군, 건배를 하십시다. 좋소. 김유신이 웃음띤 얼굴로 술잔을 들었다. 양국의 합병을 위하여 건배합시다. 만세! 모두 일제히 술잔을 들고 만세를 외치자 협려가 다시 선창했다. 백제와 신라의 번영을 위하여! 만세! 여왕도 술잔을 들고 웃는다. 주연을 마치고 진막으로 돌아가는 협려에게 연자신이 말했다. 대장군, 김유신의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소. 나이가 들어서 지친 것 아닐까요? 아직도 정정하다고 들었어. 말 걸음을 늦춘 협려가 연자신과 말 배를 붙여 걸으면서 물었다. 조금 찜찜하긴 하네. 백제군이 온다는 말을 듣고 여왕이 김춘추를 왜국에 사신으로 보냈으니 말이야. 안심을 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며칠 기다렸다가 백제군을 맞아야 도리 아니겠나? 김춘추가 말이야. 여왕이 보냈다지 않습니까? 김춘추가 며칠 기다린다면 여왕이 잡지는 못했을 거야. 대장군은 생각도 많으시오. 연자신이 웃으면서 말했다. 협려는 지장(智將)이다.

  • 문학·출판
  • 기고
  • 2018.09.06 19:40

최유라 시인 '인생을 축제처럼' 출간

암 투병생활 할 때 우연히 다른 환자 영상을 봤어요. 쉬는 시간에 신명나게 트위스트를 추더라고요. 운동을 위한 것도 있지만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마음을 다스리려는 의도였겠죠. 그때 생각이 들더군요. 내일을 고민 말고 오늘 나에게 허용된 시간을 기쁘고 즐겁게 보내자. 인생을 축제처럼 말이죠. 최유라 시인이 7년 만에 신간 <인생을 축제처럼>(도서출판 문화의 힘)을 펴냈다. 죽음의 문턱에서 가장 행복하고 나다운 것이 시 쓰기였다는 최 시인. 항암치료를 받으며 앉아서도, 누워서도 시를 썼다. 어제는 이미 흘러가버렸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고/ 단지 오늘만이 나에게 속한 시간인데/ 작은 새 한 마리 풀숲에 앉았다 날아가는/ 찰나의 순간인데/ 우리/ 인생을 축제처럼 살아요(표제작 인생을 축제처럼 중). 표제작을 비롯해 신작 70여 편이 수록된 이번 시집은 삶의 위기를 이겨낸 감사함과 긍정이 저변에 깔렸다. 호병탁 문학평론가(시인)는 최유라 시인의 작품은 난해한 단어와 흐름을 배제하고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하지만 감동과 깊이가 있다고 말했다. 깊은 사유에서 비롯된 기품과 같은 의연함은 삶의 가파름과 덧없음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거듭 죽고/ 거듭거듭 다시 태어나야만 하는/ 이 불가사의한 삶의 팔에 안겨// 오늘도/ 흘러간다/ 구름이 바람에 안겨 흘러가듯이(구름이 바람에 안겨 흘러가듯이 중) 시인은 삶이 곧 죽음이자, 죽음이 곧 삶이 되는 허무를 담담하게 표출한다. 하지만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빛뿐만 아니라 어둠도 가슴에 쩍쩍 금이 가는 아픔도 필요한 것(피할 수 없는 고통이라면 중)이라는 최 시인은 부정 속 긍정의 문학을 이어간다. 김제 출생인 그는 1987년 전북여성회관의 여성백일장에 당선되고, <전북문학> 회원에 가입하며 활동을 시작했다. 월간 <순수문학> 신인상과 지평선문학상을 수상했다.

  • 문학·출판
  • 김보현
  • 2018.09.06 19:40

[불멸의 백제] (174) 9장 신라의 위기 10

백제 대장군 협려는 40대 중반으로 거구다. 그동안 수많은 전쟁을 치른 터라 김유신과 휘하 장수들도 협려를 안다. 직접 협려와 전쟁을 치른 장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은 우군(友軍)으로 만났다. 진막 안으로 들어선 협려가 김유신을 보았다. 김유신은 이때 50대가 되었으니 협려보다 연상인데다 신라에서의 품위도 높았지만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대장군. 반갑습니다, 대장군. 협려의 수염투성이 얼굴에도 웃음이 떠올랐다. 오늘에야 대장군의 존안을 뵙게 되었습니다. 저야말로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서로 추켜올렸지만 어색하지는 않다. 그만큼 둘 다 명성이 높은 용장이었기 때문이다. 협려는 부장 연자신과 백준, 그리고 휘하 장수 10여 명을 대동했고 김유신 또한 10여 명의 장수를 모아놓고 기다렸기 때문에 진막 안은 장수들로 가득 찼다. 그때 협려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물었다. 김춘추 대감은 어디 가셨습니까? 여왕 전하의 명을 받고 왜국으로 가셨습니다. 김유신이 말을 이었다. 백제군이 왔으니 여왕께서 마음을 놓으시고 사신으로 보내신 것이지요. 아아, 그렇습니까? 비담이 백제군의 위용을 보고 잔뜩 위축되었을 것입니다. 김유신이 진막 바닥에 펼쳐놓은 지도를 손으로 가리켰다. 소가죽 위에 붉은색 염료로 정교하게 그려놓은 적과 아군의 배치도다. 비담의 진은 명활산성을 중심으로 10리 넓이로 펼쳐져 있었는데 김유신의 진에서 10리 거리였다. 김유신이 말을 이었다. 비담군(軍)의 전력은 아직도 막강합니다. 더구나 산성에 박혀 있어서 기마군을 활용하려면 끌어내야 합니다. 시간을 끌려는 것이군요. 물러나지 않고 결전을 하려는 것이오. 쓴웃음을 짓고 말한 김유신이 협려를 보았다. 저녁때 여왕 전하를 만나 보시지요. 백제군을 위해 여왕께서 주연을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 김유신과 상견례를 마친 협려가 진막을 나와 백제군 진영으로 돌아갈 때 부장(副將)으로 수행한 덕솔 백준이 말을 몰아 옆으로 다가왔다. 대장군, 김춘추가 여왕을 구해냈다고 들었는데 이 상황에서도 여왕의 심부름이나 다니고 있군요. 왜국에 가면 백제방부터 들릴 거야. 쓴웃음을 지은 협려가 말을 이었다. 이번에 우리가 신라 도성까지 진입해왔으니 백제방의 충왕자께 부탁을 하면 왜왕을 움직여 왜병을 끌어올 수 있을거야. 그렇군요. 그러면 신라는 완전한 백제와 합병을 하게 되는거지. 왜병은 백제의 동맹군이니까 말이네. 김춘추는 백제는 물론 고구려, 당, 왜국까지 가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백준의 얼굴에 감탄하는 기색이 덮였다. 신라에 김춘추만 한 인재가 없습니다. 여왕의 충신 아닙니까? 글쎄. 협려가 말고삐를 채어 말을 천천히 걸리면서 말을 잇는다. 뛰어난 인재지. 하지만 가슴에 무엇을 품고 있는지 아직 알 수가 없어. 웃음 띤 얼굴로 협려가 백준을 보았다. 대왕께서 나한테 하신 말씀이 있어. 김춘추를 가장 조심하라고 하셨는데 지금은 내 눈앞에 없군.

  • 문학·출판
  • 기고
  • 2018.09.05 19:42

[기고] 결코 무너질 수 없는 - 미륵사지에서

정양 시인우석대 명예교수 감자 캐던 마동이가 참말로 감자로 민요로 덫을 놓아 어여뿐 공주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금덩이를 돌덩이로 여기던 마동이가 참말로 서슬 퍼런 백제왕이 되었는지 그런 걸 다 딱부러지게 알 길은 없지만 이 연못에 미륵님을 모시고 싶다는 아내의 택도 없는 소원을 듣고 아내를 위해서라면 그까짓 금덩이쯤 맘 놓고 돌덩이로 여긴 지애비가 이곳에 엄청난 연못을 메우고 엄청난 절을 세웠더란다 동서로 남북으로 갈가리 찢어져 쫓기고 피 흘리고 빼앗기고 굶주리는 땅에 사람들이 참말로 사람답게 사는 황금빛 찬란한 평화를 평등을 화해를 터 잡고 싶은 어여뿐 아내의 어여쁘고 간절한 소원을 무왕인들 마동인들 그 누군들 어찌 외면했으리 천년 세월 무너져내린 절터에 결코 무너질 수 없는 어여쁘고 간절한 소원 하나 무너지다 무너지다 만 쓰라린 돌탑으로 남아 있었다 <시작 노트> 결코 무너질 수 없었던 백제의 꿈이 마침내 세월을 거슬러 복원되었다고 한다. 역대급 문화사적 쾌거다. 평화와 평등과 화해를 갈망하던 백제의 해묵은 꿈, 남북, 북미 정상회담들이 연이어지면서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자는 세상을 만나 어쩌면 그 꿈이 이 땅에 찬란하게 구현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무리 성공적으로 미륵사지석탑이 복원되었다 해도, 상처투성이인 채로 끝끝내 무너질 수 없었던 쓰라린 꿈, 그 마지막 모습은 우리들 가슴 가슴에 오래오래 남아 있을 것이다.

  • 문학·출판
  • 기고
  • 2018.09.04 19:32

[불멸의 백제] (173) 9장 신라의 위기 9

달솔 협려가 이끈 백제군 3만이 신라 도성 50여리 근처에 육박했을 때는 그로부터 사흘 후다. 전령이 기를 쓰고 달려왔지만 백제군과는 반나절 거리밖에 안 되어서 그야말로 비담 일당은 아연실색을 했다. 그만큼 백제 기마군의 기동력이 빨랐던 것이다. 5만 이라고? 되묻는 비담의 얼굴은 굳어져 있다. 예, 5만도 넘는 것 같소. 땀과 먼지로 뒤집어 쓴 전령이 비담을 보았다. 전령은 기를 쓰고 말을 달려왔지만 백제 기마군과의 거리를 떼어놓지 못했다. 더구나 왕국이 두개로 쪼개져서 비담에게 전령을 보내지 않은 성주도 있는 터라 뒤죽박죽이다. 전령이 말을 이었다. 백제군은 도중의 성을 치지 않고 곧장 이곳으로 직진했습니다. 여왕께로 간 것입니다. 신라 6백년 사직을 여왕이 백제에게 넘기는구나. 비담이 이를 갈아 붙이며 말했다. 이년, 기어코 김춘추하고 공모해서 신라를 백제로 넘기는구나. 대감. 이찬 염종이 비담을 불렀다. 진막 안은 전령의 급보를 듣고 나서 갑자기 물벼락을 맞은 분위기다. 모여있던 20여명의 장군들은 할 말을 잃고 눈치만 보는 상황이 되었다. 김춘추 김유신이 여왕을 옹위하고 도망친 후에 세력은 이쪽이 우세했지만 명분으로는 밀렸던 비담이다. 그런데 백제 기마군 5만이 순식간에 닥쳐왔으니 혼비백산할 만 했다. 여왕이 백제군 5만의 지원을 받는다면 우리가 전력(戰力)이 밀립니다. 일단 뒤로 물러나 군사를 더 모아야 될 것 같습니다. 염종이 말하자 장군 서너명이 동의했다. 현재 비담군의 전력은 그동안 더 불어나 기마군 3만에 보군 3만 5천가량이다. 여왕을 업고 있는 김춘추 세력이 기마군 1만 5천, 보군 3만 정도였는데 졸지에 백제 기마군 5만이 증원되었으니 이제는 이쪽이 열세다. 더구나 백제 기마군은 대륙을 석권한 최강의 기마군이다. 그때 비담이 눈을 치켜뜨고 염종에게 물었다. 이찬, 그대는 이번 전쟁에 명분이 없다고 보는가? 아니오. 당황한 염종의 얼굴이 붉어졌다. 명분은 대감이 품고 계시오. 여왕과 김춘추, 김유신 일파는 진즉부터 백제와 내통한 데다가 자력으로 왕국을 존속시킬 역량과 의지가 없었소이다. 김덕만을 여왕으로 옹립한 것부터 잘못된 처사요. 기회는 지금 뿐이야. 비담의 목소리가 진막을 울렸다. 신라의 자립을 위해서는 우리가 여기서 물러서면 안된다. 화백회의에서 결정된 대로 우리는 여왕을 폐위시키고 새로운 왕조를 세워야 한다. 옳습니다! 이번에는 10여명의 장군들이 소리쳤다. 김춘추는 이 기회에 가야를 신라에 바치고 신라에서 출신한 김유신의 전철을 밟을 예정이다. 그놈들의 행태를 누가 모르겠는가? 비담의 열띤 목소리에 대부분이 왕족들인 장군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군사를 더 모을수가 있소! 여기서 싸웁시다! 김춘추 좋은 일만 시킬 수는 없소! 백제군이 왔다고 해도 대적할만 합니다! 비담이 숨을 가누었다. 그렇다. 김춘추의 조부는 진지왕이었다. 그러나 그 진지왕은 화백회의에서 황음무도하다는 비판을 받고 즉위 4년만에 폐위되고 진평왕이 즉위했다. 그 후로 김춘추 가문은 진골로 격하되어 왕권과는 멀어졌던 것이다.

  • 문학·출판
  • 기고
  • 2018.09.04 19:32

[불멸의 백제] (172) 9장 신라의 위기 8

아씨, 손님이 오셨습니다. 밖에서 부르는 소리에 승만(勝曼)이 숨을 들이켰다. 깊은 밤, 자시(12시)가 넘었다. 그러나 승만은 침상에 오르지 않고 수를 놓는 중이었다. 이곳은 도성에서 북쪽으로 10리쯤 떨어진 저택, 그러나 담장이 높은데다 저택 안에 1백명 가까운 사병(私兵)을 고용하고 있어서 작은 성(城) 같다. 승만이 문도 열지 않고 묻는다. 깊은 밤에 누가 왔단 말이냐? 왕국이 둘로 짜개져서 전쟁을 하는 상황이다. 여왕파와 비담파로 나뉘어진 신라는 왕조의 운명이 그야말로 바람 앞의 촛불이다. 여왕파에는 김춘추, 김유신 등 신진세력이 가담했고 상대등이며 왕족으로 구성된 화백회의의 수장 비담 일파에는 염종 등 왕족들이 뭉쳐있다. 그때 밖에서 집사가 대답했다. 예, 이찬 김춘추 대감과 김유신 대장군이 오셨습니다. 무엇이? 놀란 승만이 벌떡 일어서자 수를 놓던 수틀이 방바닥에 떨어졌다. 일어선 승만은 거인(巨人)이다. 거녀(巨女)라고 해야 맞다. 6척이 넘는 키에 팔이 길어서 늘어뜨리면 무릎까지 손이 내려왔다. 그러나 미인이다. 승만이 다시 물었다. 무슨 일이라더냐? 바깥채 앞에서 뵙자고만 하십니다. 집사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숨을 고른 승만이 마침내 마음을 굳혔다. 내가 청으로 나갈테니 청으로 모셔라. 예, 아씨. 집사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졌고 승만이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문을 열었다. 승만은 현(現) 여왕인 김덕만(金德曼)의 사촌 여동생이니 곧 진평왕의 친동생 갈문왕의 딸이다. 김덕만도 진평왕의 맏딸인 것이다. 승만이 청으로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김춘추와 김유신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드렸다. 공주께서 놀라셨겠습니다. 김춘추가 허리를 굽히면서 말했다. 밤늦게 찾아와 죄송스럽습니다. 아니오. 그런데 웬일이십니까? 자리를 권한 승만이 앞쪽에 앉으면서 묻자 김춘추가 다시 허리를 굽혔다. 역적 비담의 무리는 곧 소탕될 것입니다. 승만이 머리만 끄덕였다. 비담이 신라왕이 된다면 승만도 현(現) 여왕인 덕만 일당으로 몰려 무사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때 김춘추가 불빛에 번들거리는 눈으로 승만을 보았다. 공주께 여왕 전하의 말씀을 전합니다. 전하의 말씀을 듣겠소. 전하께서는 만일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공주께서 신라국 왕위를 이어야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건 당치 않소. 놀란 승만의 목소리가 떨렸다. 여왕마마께 무슨 일이 일어난단 말이오? 그리고 나는 그런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공주. 김춘추가 두 손을 청 바닥에 짚고 승만을 보았다. 부릅뜬 눈에 흰 창이 더 커졌다. 신라 사직을 위한 여왕마마의 명령이십니다. 공주께서 여왕마마의 명을 어기시렵니까? 아니, 나는. 여왕마마께서는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시는 것입니다. 받아들인다는 약속을 해주시지요. 이찬, 나는. 약속을 받고 여왕마마께 전해드려야 합니다. 그러자 한동안 정적이 흐른 후에 승만이 입을 열었다. 알겠소. 여왕마마의 명을 받겠습니다. 김춘추와 김유신이 머리를 숙였다.

  • 문학·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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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9.03 19:55

[불멸의 백제] (171) 9장 신라의 위기 7

김춘추가 앞장 서서 마당 끝쪽의 나무 밑에 섰다. 주위는 어둠에 덮여졌고 10여보 떨어진 담장 밑에서 위사들이 대기하고 있다. 김춘추가 웃음 띤 얼굴로 김유신을 보았다. 전하께서 마음이 흔들리시는구려. 무슨 말씀이십니까? 조심스럽게 김유신이 묻자 김춘추는 한숨부터 뱉었다. 전에는 우리한테 하대를 하시던 전하께서 이제는 존대를 하시는구려. 그렇습니까? 자신감이 떨어지셨소. 어쩔수 없는 일 아닙니까? 대장군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김춘추가 묻자 김유신은 한동안 침묵했다. 묵묵히 김춘추를 응시한 채 입을 열지 않는다. 답답해진 김춘추가 다시 말을 이었다. 대장군, 전하께선 진즉부터 신라와 백제의 합병을 염두에 두고 계셨소. 그것이 신라 주도의 합병이건 백제 주도건간에 말이오. 압니다. 그것이 전하의 부친이신 진평왕의 염원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선화공주를 백제 무왕에게 보낸 것이지요. 이제 비담의 난으로 진평대왕의 꿈이 이루어진단 말인가? 전하께서 백제군을 맞으시면 합병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 백제 기마군 3만은 비담군을 깨뜨린 후에 신라에 계속 주둔하면서 합병의 지원세력이 될 것이다. 그때 김춘추가 머리를 들었다. 두 눈이 번들거리고 있다. 대장군, 그렇게 될 바에는 차라리 비담이 신라왕이 되는 것이 낫소. 김유신이 시선만 주었고 김춘추가 말을 이었다. 신라는 백제의 속국이 될 수가 없소. 말이 합병이지 신라의 왕족은 백제 치하에서는 7품 이상으로 오르지 못 할 것이오. 그때 김유신의 얼굴에 일그러진 웃음이 떠올랐다. 대감, 우리 가야 왕족의 경우를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소. 김춘추도 입술 끝을 비틀며 웃었다. 가야국이 신라와 합병하면서 가야 왕족도 같은 시련을 겪은 것이다. 시련이 아니라 수모다. 가야 왕족인 김유신은 그것을 극복하려고 온갖 수모를 겪고 마침내 대장군에 올랐기 때문이다. 만일 신라가 백제에게 합병된다면 김유신의 피눈물나는 성취는 허사가 된다. 김유신이 지그시 김춘추를 보았다. 대감, 백제 기마군 3만이 달려오고 있습니다. 어찌 하시겠습니까? 대장군, 먼저 약속을 해주시오. 나하고 생사를 같이 하시겠소? 이미 대감께 내 가문의 운명을 맡긴 사람입니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고맙소. 김춘추가 두 손으로 김유신의 손을 감싸쥐었다. 대장군, 방법이 있소. 말씀을 해주시오. 따르겠습니다. 백제군은 사흘 후에 도착하겠지요? 그렇습니다. 비담은 아직 백제군이 온다는 것을 모르고 있겠지요? 그렇습니다. 알았다면 전력을 다해서 이곳을 공격하겠지요. 김춘추가 숨만 쉬었고 김유신이 말을 이었다. 백제군이 오는 이유를 뻔히 아는 터라 비담은 대왕전하를 가만 두지 않을 것입니다. 김춘추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 문학·출판
  • 기고
  • 2018.09.02 19:29

[전북작가회의와 함께하는 전라북도 길 이야기] 내 그림자

1 또래들보다 정신연령이 한참 모자랐던 나는 지금도 못난이 축에 낀다. 남이 하는 얘기를 제대로 못 알아듣고 남들이 다 웃고 난 뒤에야 폭소를 터뜨리는 경우가 심심찮았다. 길이란 단어도 마찬가지다. 국어사전에 나와 있는 여러 의미를 짚어보는 데도 힘이 부친다. 나는 지금 등하굣길을 쓰려고 한다. 이 길을 오가면서 나도 뭔가를 생각했을 것이고 뭔가를 확신했을 것이며 고개를 숙인 채 걷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행위와 길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편집 의도와 다르게 글이 쓰일지라도 기억 중의 한 토막을 적어봄으로써 이제라도 내 행위를 낮게 내려놓고자 한다. 2 학교 가는 게 싫었다. 숙제하기도 싫었고 선생님께 매 맞는 것도 지겨웠다. 멍청하면 꾀라도 있어야 한다는 말부터 가난한 집 아이는 영리하다는데 너는 도대체 왜 이러냐는 말까지 무밥처럼 싫었다. 멍청한데 어떻게 꾀가 생길 수 있으며, 가난한 것하고 영리한 것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지 선생님은 말해 주지 않았다. 4학년 때부턴가 목요일엔 특별활동반이란 게 있었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각자의 특기를 살리는 수업이었다. 그림그리기반 붓글씨반 베드민턴반 등등이 있었는데 그 속에 보이스카웃반도 있었다. 나는 저학년 때부터 이들을 유심히 봐왔다.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긴 양말을 신었고 그 위에 반바지를 입었다. 그들만 신을 수 있는 운동화며 그들만이 입을 수 있는 감청색 유니폼은 가히 내 눈알을 잡아 뺄 듯이 유혹적이었다. 그들 옆에서 생글거리던 걸스카웃들은 또 어떤가. 치마 입은 유니폼도 예쁜데 얼굴 생김이며 몸매는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보이스카웃반에 들어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방학 땐 캠핑도 간다는데 거기서 걸스카웃반 지지배들과 폼 나게 놀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김칫국부터 마신 꼴이었다. 그 반에 들어가려면 유니폼을 살 만한 경제력을 갖춘 집 자식이어야 했고 공부도 잘 해야 했다. 공부는 좀 못하더라도 경제력은 갖춘 집 자식이어야 한다. 나는 씨름반이 되었다. 왜 내가 씨름반이냐고 선생님께 여쭐 계제가 나는 못 되었다. 선생님 뜻이 곧 법이었으니까. 하지만 공부는 그만두고 유니폼을 살 만한 돈이 없어 보이는 집 자식이기 때문에 씨름반에 들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공부를 잘하는 부잣집 아들놈은 씨름반에 들 수 없나요? 이렇게 묻지도 못하고 학교 운동장 구석에 박혀 있는 씨름장에 갔다. 보이스카웃반에 든 애들은 특별한 사람들 같았고 나는 평생 샅바나 맬 수밖에 없는 사람일 것 같았다. 그때 마침 가방 손잡이가 떨어져나갔다. 잘되었다. 어머니가 논에서 돌아오기가 무섭게 새 가방 사내라고 떼를 썼다. 모레까지 가방을 안 사주면 학교에 안 가겠다고 억지를 부렸다. 하지만 대답은 이랬다. 지금은 모내기철이니 장에 갈 수 없다, 며칠만 책보에 책을 싸가지고 다녀라, 가방은 꼭 사주마, 옛날엔 모두 책보를 들고 다녔다, 뭐 이런 것이었다. 미안하지만 이런 대답을 듣고 학교에 갈 수는 없었다. 검정 고무신은 신었을망정 책보 들고 학교에 가는 학생은 전교생 중에 나 혼자일 것이었다. 그 이틀 뒤 아침 학교에 안 가겠다고, 못줄이나 잡겠다고 떼를 썼다. 보이스카웃반에 못 든 것 때문에 학교에 안 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가방 때문에 학교에 안 가겠다는 것으로 알고 아버지의 회초리가 사정없이 종아리에 감겼다. 그래도 버텼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작대기를 들고 오는 게 아니냐. 별수 없다. 매에는 장사가 있을지 몰라도 작대기질에는 장사가 없을 거니까. 회초리에 감겨 따끔따끔한 종아리를 끌고 손잡이 떨어진 책가방을 안고 등굣길에 나섰다. 그런데 책가방을 보퉁이처럼 안고 가야 한다는 게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학교에 가는 애들이 모두 나만 바라보는 것 같았다. 가방 살 돈도 없냐, 이러면서 나를 비웃는 것만 같았다. 가방은 아무 짬도 모르고 어미 품에 안긴 돌배기처럼 내 가슴에 찰싹 달라붙어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몸체에서 떨어져 덜렁거리는 끈은 아이 다리 같았고 반원으로 온전한 끈은 아이 머리 같았다. 젖 달라고 보채는 이것을 팽개쳐버리지 못하고 낑낑대는데 내 속내를 짐작한다는 듯 눈에 확 띄는 것이 있었다. 땅바닥에 나뒹구는 세 발 가웃은 너끈한 새끼줄이었다. 지체 없이 새끼줄로 책가방을 통째로 묶고 끈을 내어 어깨에 걸쳤다. 가방을 땅바닥에 내던져 질질 끌고 앞을 향했다. 자, 볼 테면 봐라, 학교는 이렇게 다니는 거다. 가방을 땅바닥에 질질 끌고 등굣길을 휘저었다. 건너물을 지나 닭똥 냄새가 지독한 내리배기를 얼른 지나 옥남 이용원, 이쁜네 술집, 꺼먹둥이 술집, 방앗간을 지나서 한참을 더 걸으면 노락쟁이가 나왔고, 공장에 다니는 형들 누나들이 자꾸 튀어나온다는 뽕밭이 나왔고, 아침밥 먹은 게 다 꺼진 학산을 지나면 팔복초등학교 후문이었다. 십 리가 넘는 자갈길, 논밭이 나를 응원한 길을 나는 가방을 질질 끌었고 학교가 파하면 그 역순으로 집에 돌아왔다. 또래들은 내 행동에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주 자랑스럽게 가방을 질질 끌면서 누구든 만나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학교를 좀 쉽게 다니자고 가방을 질질 끌었다. 또래들은 나를 똥 씹은 듯 바라봤다. 정말로 너 왜 이러냐고, 죽으려고 환장한 것 아니냐고, 사람 되기 벌써 글렀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일주일이 넘도록 이렇게 등하굣길을 휘저었다. 토요일이었다. 선생님이 나를 부르더니 아주 부드럽게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직감했다. 어떤 놈이 내 행동을 선생님께 꼰지른 것이다. 매품 팔러 온 흥부처럼 나는 기가 팍 죽었다. 몸으로 받아내야 할 것은 매가 아닐 것이다. 몽둥이찜질일 것이다. 선생님은 청소함 속의 몽둥이를 꺼내어 닥치는 대로 휘둘러댈 것이다. 자기 분을 못 이기고 슬리퍼를 벗어서 싸대기를 후려칠 수도 있다. 나를 들어서 창문 밖에 메다꽂을 수도 있다. 이렇게 조용히, 부드럽게,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부를 때는 곡(哭)소리가 나야 매타작이 끝났으니까. 그게 아니었다. 선생님은 가방을 왜 땅바닥에 질질 끌고 다니는지를 묻지 않았다. 어디 아픈 데는 없냐고 내 이마에 손을 갖다가 댔다. 이거 뭐가 이상하게 돌아가는데? 이 느낌이 드는 순간 선생님은 아주 다정스러운 목소리로 철둑 너머에 있는 호성초등학교로 전학을 가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어차피 걸어다는 거 뭐 이 학교나 그 학교나 다를 게 없다고, 조금 더 걸을 뿐이라고, 네가 학교 다니기에는 그 학교가 여기보다 백번 나을 거라고 했다. 아아, 호성초등학교. 나는, 전학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쫓겨나고 싶지 않았다. 팔복초등학교에 다니고 싶었다. 친구 한 명도 없이 어쩌란 말이냐. 무작정 무릎을 꿇고 다시는 가방을 땅바닥에 질질 끌고 다니지 않겠다고, 잘못했다고 싹싹 빌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요지부동이었다. 내 속이 타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선생님은 이젠 그럴 필요 없다고, 너는 왜 편하게 다닐 학교를 어렵게 다니려고 하냐고, 일이 다 끝난 듯 오히려 나를 달랬다. 그날 밤 종아리에 구렁이가 감긴 것처럼 아버지께 회초리를 맞았다. 어떤 놈이 또 꼰지른 것이다. 회초리가 부러지면 동생에게 다시 쪄오라고 하시면서 인정사정을 두지 않고 종아리를 불나게 했다. 회초리가 차악착 소리를 내며 종아리에 감겨도 나는 끝끝내 보이스카웃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일주일 넘도록 가방을 자갈길에 질질 끌었어도 나는 보이스카웃반에 들 수 없었고 새 가방도 생기지 않았다. 또래들은 내가 가방을 질질 끌고 다녔다는 행위만 중요했지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왜 내가 보이스카웃을 뽀이스카웃이라고 부르는지를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나도 보이스카웃반 얘기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나는 다시 호라발해져서 어떤 껀수를 잡을까, 골몰했다. 3 보이스카웃 핑계 대고 남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싶어서 가방을 질질 끌었던 길은 이제 없다. 논밭에 둘러싸여 어린 치기를 응원해주었던 꼬불꼬불한 길은 없다. 자갈길엔 아스팔트가 깔렸고 주위는 오죽잖은 공장 건물로 가득 찼다. 우두커니 서서 내 그림자를 바라본다. 욕망이 때로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버린다는 것을 알았어도 내 몸은 아직도 욕망의 집이 되어 있고, 잊을 것을 잊지 못하고 산다. 그래서 반편이 머리가 자주 무거운가 보다. *이병초: 1998년 『시안』으로 등단. 시집으로 『밤비』, 『살구꽃 피고』, 『까치독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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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8.30 18:48

[불멸의 백제] (170) 9장 신라의 위기 6

그날 저녁, 여왕 선덕을 모시고 도성 위쪽의 황룡사로 왕궁을 옮긴 김춘추와 김유신이 선덕과 함께 모여 앉았다. 이곳은 여왕의 침전이 된 황룡사의 안쪽 객방 안이다. 거대한 황룡사는 9층탑을 중심으로 사방에 1백여 칸의 승방이 있는 데다 사찰 둘레가 10리 가깝게 되어서 여왕의 임시 왕궁으로 적당했다. 선덕이 며칠 사이에 핼쑥해진 얼굴을 들고 김춘추에게 물었다. 백제군이 오면 승산이 있겠소? 예, 마마. 김춘추가 웃음 띤 얼굴로 선덕을 보았다. 그리고 아직 비담은 백제군의 응원을 모르고 있습니다. 백제 기마군 3만과 합하면 전력이 비슷해집니다. 따라서 기습을 하면 승산이 있습니다. 선덕의 시선이 김유신에게 옮겨졌다. 대장군을 믿겠소. 예, 마마. 김유신이 머리를 숙였다. 김춘추는 여왕의 보호자가 된 것처럼 기세를 올렸지만 아직도 비담군(軍)에 비교해서 전력이 열세다. 상대등 비담은 여왕 다음의 위치인 데다가 왕족으로 구성된 화백회의의 수장인 것이다. 김춘추와 비교해서 월등한 지위와 권력을 장악한 상태다. 김춘추는 오직 김유신에게 의지하고 있었는데 백제군의 지원이 없다면 며칠도 견디기 힘든 상황인 것이다. 선덕이 물었다. 아군의 전력은 얼마나 되오? 기마군 1만에 보군 1만5천입니다. 비담군(軍)은? 기마군 2만5천에 보군 4만입니다. 선덕이 입을 다물었다. 비담군이 압도적인 것이다. 그때 김춘추가 말했다. 백제 기마군 3만이 오면 아군의 기마군이 우세합니다. 마마. 그렇소? 선덕이 다시 김유신에게 물었기 때문에 김춘추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자신을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마마, 신(臣)을 믿으시옵소서. 김춘추가 굳어진 얼굴로 말하자 선덕의 얼굴에 희미하게 웃음이 떠올랐다. 그리고는 머리를 끄덕였다. 경을 믿소. 황공합니다. 이 난리가 수습되면 선화를 부를 예정이오. 순간 김춘추가 숨을 들이켰다. 얼굴도 순식간에 굳어져 있다. 선화가 누구인가? 바로 백제 의자왕의 어머니인 선화공주다. 선덕의 동생인 것이다. 진평왕의 두 딸 중 장녀는 신라 여왕이며 둘째는 백제 의자왕의 어머니다. 선덕이 말을 이었다. 선화를 내 후계자로 선포하고 백제와의 국경을 개방하겠소. 선화가 내 후계자가 되면 이어서 제 아들에게 왕위를 넘기겠지. 그러면 의자가 신라, 백제를 함께 다스리게 될 것 아닌가? 선덕이 상기된 얼굴로 김춘추와 김유신을 번갈이 보았다. 두 눈이 반짝이고 있다. 다시 선덕의 말이 이어졌다. 이번 백제군의 지원이 그 계기가 되었어. 비담의 난이 신라와 백제의 합병을 당겨준 셈이 되겠구려. 마마, 피곤하실 텐데 쉬시지요. 김춘추가 부드럽게 말하더니 몸을 세웠다. 김유신도 따라서 허리를 굽혔기 때문에 선덕이 머리를 끄덕였다. 김춘추, 김유신의 본진은 황룡사 앞쪽 반월성에 자리잡았고 비담은 10여 리 떨어진 명활산성이다. 가까워서 상대방의 북소리 호각소리가 이곳까지 울린다. 선덕의 침전을 나왔을 때 김춘추가 김유신을 불렀다. 대장군, 상의 드릴 일이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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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8.30 18:48

소설로 만나는 몽골의 문화와 역사

몽골은 거친 대지와 양 떼를 모는 유목민 등 시야에 들어오는 형상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곳이다. 몽골의 역사와 문화, 종교와 신앙 그리고 과거와 현재를 망라해 형상화한 문학은 그런 몽골을 가슴으로 느끼는 좋은 방법이다. 김한창 소설가의 중단편 소설집 <사슴돌>, 한국동인지문학아카데미의 한몽 문학 제5호 <한국몽골 소설 선집>은 서사 문학인 소설로 몽골을 보여준다. 한국동인지문학아카데미 대표인 김한창 문학가가 중단편 소설집 <사슴돌>을 펴냈다. 지난 8년간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를 거점으로 옵스아이막, 알타이고비 등 소설과 관련된 지역을 오가면서 집필한 결과물이다. <사슴돌>은 사회주의 몽골에 불어닥친 유목민의 애환, 13세기 할하 부족과 차하르 부족의 300년 전쟁, 칭기즈칸의 몽골 통일 전쟁 등을 소설로 엮은 작품집이다. 그는 몽골의 전통 노래이자 서사시인 토올의 계승자가 되는 과정을 다룬 알탕호약(황금갑옷), 이념 분쟁으로 인해 몽골이 겪었던 역사적 질곡을 형상화한 푸렙앙흐체첵(목요일 처음 핀 꽃) 등 여섯 편의 중단편 소설을 통해 몽골의 역사와 몽골인의 생활상을 자연스럽게 나타낸다. 한국동인지문학아카데미가 내놓은 <한국몽골 소설 선집>은 한국 문학가 선산곡김한창정영신백종선, 몽골 문학가 서닝바야르냠일학와우르징한드촐롱체첵의 작품을 수록했다. 13세기 몽골의 부족 전쟁사와 유목 생활 속에서 파생된 가축과의 교감, 수많은 신화 속에서 발화한 모계사회 등을 중점적으로 다뤘다. 서닝바야르의 보름달 물결은 13세기 몽골 부족 전쟁사의 일면을 다룬 작품으로 몽골 부족 특유의 의협심이 돋보인다. 냠일학와의 소설 하이닥 암낙타는 새끼를 잃은 암낙타의 애절한 모성, 암낙타의 젖을 짜주는 할머니와의 교감에 관해 이야기한다. 촐롱체첵의 보고 싶은 어머니와 성직자 자식의 운명을 사랑한다는 어머니에 대한 신화적 발로로 모계사회의 근간이 짙게 깔려 있다. 강한창 문학가는 2010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몽골 문학 레지던스 소설 작가로 선정돼 2011년 몽골 울란바토르대 연구교수로 부임했다. 한국문인협회몽골문인협회 회원으로 장편소설 <솔롱고>, <바밀리온>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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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민주
  • 2018.08.30 18:48

[불멸의 백제] (169) 9장 신라의 위기 5

대감, 육기전이 어젯밤에 비담측에 가담했습니다. 장군 김정복이 김춘추에게 보고했다. 오전 사시(10시) 무렵, 도성 밖 본진에 머물고 있던 김춘추는 시선만 준다. 김정복이 말을 이었다. 육기전은 기마군 5천을 이끌고 왔는데 보군 1만7천은 사흘 후에 도착할 것이라고 합니다. 역적. 김춘추가 낮게 말했지만 진막 안의 장수들은 다 들었다. 육기전은 김춘추의 심복으로 대장군에까지 오른 무장이다. 백제와의 전쟁에서 여러 번 공을 세웠지만 김춘추의 지원이 없었다면 3품 잡찬 벼슬에 대장군으로 보기당 당주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김춘추의 옆에 서 있던 김유신이 쓴웃음을 짓고 말했다. 대감, 육기전이 비담에 가담했지만 전력화(戰力化)시키지는 못할 겁니다. 왜 그렇소? 비담은 의심이 많아서 육기전을 측근에 두지 않을 것입니다. 육기전이 대감과 내통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할 겁니다. 옳지. 김춘추의 눈빛이 강해졌다. 군사들에게 소문을 퍼뜨리도록 합시다. 육기전과 연합해서 밤에 비담을 야습한다는 소문이 어떻소? 그러지요. 세밀한 계획까지 꾸며서 퍼뜨리지요. 김유신이 말했을 때 진막 안으로 위사가 들어섰다. 대감, 경산성주가 왔습니다. 오, 들여보내라. 김춘추가 반겼다. 경산성주는 서쪽 백제와의 국경에 위치한 성주로 김춘추의 친척이다. 곧 경산성주 김대영이 들어섰는데 군관 복색의 사내와 동행이다. 대감,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김대영이 절을 하더니 김유신과 눈인사를 했다. 먼 길을 달려와 주었구나. 고맙다. 감동한 김춘추가 치하했다. 예, 기마군 5백을 끌고 왔습니다. 잘왔다. 대감, 주위를 물리쳐 주십시오. 김대영이 정색하고 말했기 때문에 김춘추가 머리를 끄덕였다. 대장군만 남고 모두 밖으로 나가라. 잠시 후에 진막 안에는 김춘추와 김유신, 김대영과 군관 복장의 사내까지 넷만 남았다. 그때 김대영이 군관을 눈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백제대왕께서 보내신 밀사입니다. 머리를 끄덕인 김춘추가 군관을 보았다. 30대쯤의 사내는 김춘추의 시선을 받더니 입을 열었다. 곧 백제 기마군 3만이 대감을 지원하려고 올 것입니다. 기마군 3만이라고 했소? 김춘추의 눈빛이 강해졌다. 그렇다면 내가 살았소. 이곳까지는 언제 도착할 것 같소? 엿새 후쯤 될 것이오. 엿새라, 엿새를 버텨야겠구나. 혼잣말을 한 김춘추가 김유신을 보았다. 대장군, 가능하겠소? 여왕을 모시고 서쪽으로 물러나 있는 것이 낫겠습니다. 그러면 비담은 우리가 도성을 포기한 줄 알고 마음을 놓을 것 아니겠습니까? 옳지, 그 계략이 신통하오. 그때 밀사가 말했다. 대왕께서는 비담 일당이 제거되고 신라와 백제가 우호국으로 서로 공존해야 된다고 말씀하셨소. 당연한 일이요. 김춘추가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고 김유신의 얼굴에도 웃음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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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8.29 19:56

[불멸의 백제] (168) 9장 신라의 위기 4

신라의 도성은 반으로 쪼개졌다. 외성 아랫쪽과 내성인 왕성은 상대등 비담이 점령했고 북쪽은 김유신, 김춘추가 점령한 것이다. 물론 여왕 선덕은 김춘추가 보호하고 있다. 그날 밤이 지난 후에 김춘추와 비담은 동조 세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당장은 군사력과 도성의 대부분을 장악한 비담이 우세했지만 김춘추는 여왕을 모시고 있다는 이점이 있다. 양대 세력은 도성 안에 성벽을 세우기 시작했고 주민들도 양쪽으로 갈라졌다. 신라의 정변은 사흘만에 백제 의자왕에게 보고가 되었는데 도성 안에 있던 첩자가 사흘 밤낮을 달려왔기 때문이다. 선덕이 시동 차림으로 빠져 나왔단 말이냐? 첩자의 보고를 들은 의자가 웃는 대신 한숨을 쉬었다. 비담의 손에 선덕이 죽었다면 신라와 병합이 더 어려워질뻔 했다. 그러나 아직 비담의 세력이 강합니다. 병관좌평 성충이 나섰다. 사비도성의 대왕청 안에는 백여명의 문무백관이 모여 있었는데 의자가 긴급 소집을 시켰기 때문이다. 성충이 말을 이었다. 대왕, 아직 비담의 세력이 막강합니다. 김춘추는 세력 기반인 대야주를 잃고 대야군주 김품석과 42개 성, 5만여명의 병력을 잃은 터라 비담에게 전력이 훨씬 뒤집니다. 머리를 끄덕인 의자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져졌다. 우리가 대야주를 차지하지 않았다면 비담이 이렇게 나서지도 못했겠지. 그때 내신좌평 흥수가 입을 열었다. 이제는 비담의 세력을 약화시켜야 할 때입니다. 대왕. 약화시키는 것보다 아예 말살을 시켜 놓는 것이 어떨까? 그러면 김춘추 세력이 급부상을 하게 됩니다. 흥수가 말을 이었다. 여왕과 김춘추가 신라를 완전히 장악하면 백제와의 병합 약속을 헌신발처럼 버릴 것입니다. 흥, 당장 병합을 압박하면 두 세력이 연합해서 대들겠지. 그렇습니다. 김춘추도 어쩔수 없이 백제에 대항해 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의자가 용상에 등을 묻으면서 말했다. 비담의 세력을 어떻게 약화시킬 것인가? 시급히 대책을 내놓아라. 신라와의 합병은 의자가 태자 시절에서부터 머릿속에 박아 놓은 목표다. 그것은 부친 무왕(武王)이 신라의 선화공주를 왕비로 데려왔을 때부터 내려온 소망이기도 하다. 의자왕은 그 선화공주의 아들인 것이다. 부친으로부터 합병의 대업을 물려받은 입장이다. 그때 동방방령 의직이 나섰다. 대왕, 동방의 상안성에서 비담의 주력군이 모인 신라 서부 오금성까지는 3백리 거리입니다. 동방의 기마군으로 오금성을 기습 격파하면 비담이 놀라 도성에서 빠져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비담 대신으로 김춘추를 견제할 대역을 은밀히 양성해야 될 것입니다. 옳지. 머리를 끄덕인 의자가 성충과 흥수, 의직을 번갈아 보았다. 동방과 친위군의 기마군 3만을 떼어가도록 하고 즉시 시행하라. 예, 대왕. 출전 장수는 대장군 협려가 낫겠다. 부장으로 덕솔 연자신과 백준이 따르도록 하라. 모두 허리를 굽혀 명을 받든다는 표시를 했다. 일사분란한 체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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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8.28 18:13

[불멸의 백제] (167) 9장 신라의 위기 3

쳐라! 김유신의 외침이 울리자 군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뛰어나갔다. 이곳은 외길, 비담의 1천 보군이 내성의 왕궁을 향해 소리 없이 다가가고 있던 참이다. 깊은 밤, 쌍방이 횃불도 들고 있지 않아서 함성만 일어났다. 와앗! 기습한 김유신군이 먼저 승기를 잡았다. 양쪽에서 뛰어나왔는데 비담군(軍)은 허리가 잘린 뱀처럼 꿈틀거리며 흩어졌다. 그러나 도망치는 것은 아니다. 모두 용사들이어서 금방 내성 앞 도로는 쌍방의 살육장으로 변해졌다. 와앗! 그때 뒤쪽에서 함성이 울렸기 때문에 김유신이 놀라 부장(副將)을 소리쳐 불렀다. 비담군이 2개 대로 나뉘어졌느냐? 모릅니다! 부장이 정신없이 소리치더니 어둠속으로 달려갔다. 함성은 더 커졌다. 뒤쪽이다. 와앗! 김유신이 소리쳤다. 형달은 5백을 이끌고 내 뒤를 따르라! 서둘러라! 예엣! 뒤쪽으로 돌아간다! 이제는 김유신이 장검을 빼들고 앞장을 섰다. 궁성의 문은 4개, 그중 서문으로 공격해온 비담의 주력군을 기습했던 것이다. 비담이 1개 군(軍)을 나누어 북문 쪽으로 진입시켰는지는 몰랐던 상황이다. 앞장서서 수염을 흩날리며 달리던 김유신이 소리쳤다. 놈들을 북문으로 진입시키면 안된다! 대장군! 나는 이곳을 맡겠소! 김유신의 등에 대고 김춘추가 소리쳤지만 곧 함성 소리에 묻혔다. 같은 시각, 왕궁의 침전에 있던 여왕 선덕이 놀라 침상에서 일어났다. 왕궁 안에서 함성이 일어나고 있다. 선덕은 대번에 사태를 짐작했다. 반란군이 침입한 것이다. 반란군 수괴는 상대등 비담, 마침내 거사를 일으킨 것이다. 마마! 침전 밖에서 위사장 박무가 소리쳤다. 마마! 반란군이 북문으로 진입했습니다. 어서. 그때 밖으로 뛰쳐나온 여왕이 낮게 소리쳤다. 내가 시동 차림을 하고 나올테니 잠깐 기다려라! 그러더니 잠시 후에 침전에서 시동 하나가 뛰어나왔다. 여왕이 시동으로 변장을 한 것이다. 머리에는 두건을 썼고 시동 복색을 했으니 위사장 박무도 지척에서 알아보기 힘들다. 마마. 박무가 더듬거렸을 때 여왕이 앞장서 달리면서 말했다. 멀리서 따르라! 바짝 붙으면 눈치챌 것이다! 선덕은 반란군의 침입에 당황해서 이쪽저쪽으로 내달리는 시녀 시동 사이에 끼어 동문으로 나아갔다. 북문으로 침입한 비담의 수하 화랑 석기수는 여왕의 침전까지 돌입했지만 허탕을 쳤다. 동문을 빠져나온 선덕이 달려온 김유신과 만났을 때는 왕궁이 완전히 비담에게 장악된 후다. 마마. 선덕 앞에서 눈물을 떨군 김유신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비담 일당을 기어코 소탕하여 신라 사직을 구하겠습니다. 대장군에게 맡기겠소. 시동 복색의 선덕이 흐려진 눈으로 김유신을 보았다. 북문 밖 거리에 여왕과 대장군이 서있다. 여전히 함성이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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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8.27 20:08

[불멸의 백제] (166) 9장 신라의 위기 2

저택에서 군사들이 나왔습니다. 달려온 군사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모두 보군으로 2천명이 넘습니다. 기마군을 쓰지 않군요. 부장(副將) 형달이 김유신 옆으로 바짝 다가섰다. 어둠속에서 두 눈이 번들거리고 있다. 이곳은 왕궁 서쪽의 군사 조련장이다. 짙은 밤이어서 황야는 어둠에 덮여 있었지만 소음이 들려왔다. 김유신이 모은 군사 1500명이다. 이쪽도 보군으로 구성된 군단이어서 은밀하게 움직이려는 의도다. 김유신이 바람에 날리는 수염을 움켜쥐었다. 바람이 센 흐린 날이다. 그래서 하늘에는 별 한점 보이지 않는다. 그놈들이 왕궁으로 오려면 두갈래 길이 있다. 아직 움직이지 말고 기다리도록 하자. 김유신이 말을 이었다. 내가 지금도 호곡성에 박혀있는 줄 알고 있겠지? 이렇게 나오신 줄 알았다면 비담이 움직였을 리가 없지요. 옆에 선 장군 김용무가 말했다. 비담 주위에 고관의 6할이 모여 있습니다. 대장군. 많을수록 좋지 않겠느냐? 김유신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졌다. 그 반역의 무리를 소탕하면 신라는 새로운 기운으로 덮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말장난이다. 고관의 6할이 모였을 뿐만 아니라 비담 일당은 신라군(軍) 전력의 8할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삼천당 등 주요 부대 지휘관 대부분은 비담에게 충성을 맹세한 무리로 채워졌고 대왕과 김춘추 무리로 분류된 장군, 관리는 변방으로 쫓겨났다. 지금 김춘추가 가 있는 신주(新州)만이 김춘추, 김유신에게 우호적이다. 그때 어둠속에 잠깐 동요가 있는 것 같더니 김유신 앞으로 한 무리의 사내가 나타났다. 그 중심에 선 사내가 김춘추다. 대감. 김유신이 다가가 김춘추의 손을 쥐었다. 무사히 오셨군요. 이틀 동안 달려왔습니다. 김춘추의 지친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성벽을 넘어오면서 도둑 무리 같은 내 신세가 한심했소. 이 난관만 지나면 신라는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자 김춘추가 김유신의 손을 움켜쥐고 흔들었다. 내가 가야 출신 대장군의 도움으로 신라 사직을 구하는군요. 김춘추는 김유신보다 6살 연하의 44세. 작년에 세력의 기반이었던 가야주 42개 성을 잃고 잔뜩 위축된 상태다. 가야주는 본래 가야왕족인 김유신의 세력 기반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때 김유신이 정색하고 말했다. 대감. 비담이 조금 전에 왕성을 향해 군사를 출발시켰소. 이제 우리가 그놈들을 급습할 차례요. 승산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군사 수는 적지만 기습을 하면 가능성이 있습니다. 비담이 직접 옵니까? 왕궁을 습격해서 여왕전하를 벨테니 비담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군. 머리를 든 김춘추의 눈동자가 흐려졌다. 이번 당의 고구려 침공은 실패할 거요. 그래서 당황제는 신라왕이 누가 되든 신경도 쓰지 못할 겁니다. 목소리를 낮춘 김춘추가 말을 이었다. 비담은 그것을 노리고 있지요. 그놈 뜻대로 되지 않을 것입니다. 김유신이 말했을 때 다시 전령 하나가 달려오더니 소리쳤다. 비담군(軍)이 장계신길로 꺾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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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8.26 18:12

[불멸의 백제] (165) 9장 신라의 위기 1

당(唐)과 고구려가 전쟁을 하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다. 비담이 눈을 가늘게 뜨고 앞에 선 화랑 유재와 석기수를 보았다. 신라의 사직을 지키려면 여왕과 여왕 일파를 몰사시켜야만 한다. 명심하고 가라. 이제 비담은 거침없이 말을 뱉는다. 깊은 밤, 자시(12시)가 넘었지만 비담의 저택은 열기로 덮여 있다. 넓은 앞뒤 마당은 소리죽여 움직이는 군사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밖에 모인 군사는 2천여 명, 비담의 호위군에서 골라 뽑은 용사들이다. 비담은 그들을 지휘할 장수들로 화랑 유재와 석기수를 임명한 것이다. 주위에 둘러선 장수, 대신들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다. 비담이 말을 이었다. 유재, 네가 궁성의 서문으로 진입해서 곧장 여왕의 침전으로 돌입해라. 예, 대감. 유재는 25세, 왕족이기도 하다. 상대등 비담과 먼 친척이 된다. 거구에 팔이 긴 유재가 어깨를 부풀리며 말했다. 반드시 여왕의 목을 베어 신라를 다시 세우겠소. 장하다. 비담의 시선이 옆에선 석기수에게로 옮겨졌다. 석기수, 네 역할도 크다. 너는 궁성 북문으로 진입해서 여왕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예, 대감. 이미 여왕의 퇴로까지 예상하고 있는데다 궁성에는 첩자들이 나가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비담이 머리를 끄덕였다. 자, 너희들 뒤를 우리가 따를 테니 어서 떠나라. 예, 대감. 소리쳐 대답한 둘이 몸을 돌리더니 청을 나갔다. 그때 잡찬 박명이 한걸음 나서서 말했다. 대감, 김유신이 호곡성에서 닷새째 나오지 않고 있지만 군사를 보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여왕부터 죽이고 나서. 비담이 웃음 띤 얼굴로 말을 잘랐다. 김유신 그놈을 지금 잡을 필요가 없어. 내가 왕위에 오르면 바로 내 발밑에 무릎을 꿇을 놈이야. 김춘추와 매부 처남 사이가 된 이유를 알지 않은까? 그때 옆쪽 장군들 사이에서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하나가 물었다. 대감께서 김유신과 격구를 하시겠습니까? 해야지. 비담이 웃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내가 내 손으로 옷고름을 뜯고 김유신의 누이한테 갈 수가 있네. 대감, 김유신은 이제 미혼인 누이가 없습니다. 이 사람아, 김춘추에게 준 누이를 데려오면 되지 않겠는가? 웃음소리가 더 커졌고 비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느덧 얼굴에서 웃음이 지워졌다. 오늘밤이 거사일인 것이다. 그동안 철저하게 준비를 해 놓았기 때문에 내일 아침이면 새 왕이 즉위할 것이다. 다만 경쟁 세력이 김춘추와 그의 심복인 김유신이 걸렸지만 김춘추는 지금 북쪽 신주(新州)에 있고 김유신도 40여리 떨어진 호곡성에 들어가 있다. 그리고 비담은 김춘추하고 떨어진 김유신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왕족인 김춘추와 인연을 맺기 위해서 격구를 하다가 일부러 김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떼고는 제 여동생한테 데려간 김유신이다. 그래서 김춘추와 인척이 된 김유신의 속성을 비담이 알고 있는 것이다. 청을 나오는 비담의 뒤를 장군, 대신들이 따른다. 신라 고관의 대부분이 모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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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8.23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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