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의 인물명 도로, 정언신로 이야기
 김우영(전주교육대학교 총장) 전주의 인물명 도로에는 전주를 대표하는 인물의 시호 또는 이름이 명명되어 있다. 시호를 사용한 도로명은 충경공 이정란의 충경로가 유일하다. 과거에는 호 또는 시호를 사용하여 도로명이 지었졌지만, 그 의미를 일반인이 알기가 어려워 최근에는 이름을 직접 사용한 도로명이 많아졌다. 전주의 인물 도로명은 견훤로, 정언신로, 정여립로, 권삼득로 등이 대표적이다. 정언신로는 인후동 견훤왕궁로에서 아중리 동부대로에 걸쳐 있다.
정언신은 현재의 사람들에게는 생소하지만, 완산지에는 전주의 대표적 인물 중의 한 명으로 이미 기록되어 있다. 전주 출신으로 조선시대 과거급제를 통해서 우의정에 이른 사람이 여럿 있지만 그중에서도 선조 시대의 정언신과 숙종 시대의 이상진이 눈에 뛴다. 이상진은 충경공 이정란의 증손이기도 하다. 이상진은 청백리로 선정된 탁월한 문관이었다고 한다면, 정언신은 문관으로서만이 아니라 고위급 무관으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정언신은 1566년(명종 21년) 문과에 급제하여, 1571년(선조 4년) 호조좌랑을 거쳐,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1582년 함경도 두만강 이북의 여진족 니탕개가 난을 일으키자, 선조는 정언신을 우참찬으로 승진시키고, 함경도 도순찰사를 겸직하게 하여, 니탕개의 난을 진압하게 하였다. 정언신은 후일 임진왜란에서 활약한 신립, 이일, 이순신, 김시민, 이억기 등 무관들을 지휘하여 난을 성공적으로 진압하였고, 이어 함경도 관찰사를 맡아 북방의 방비를 정비하고 안정시켰다. 사헌부 대사헌을 거쳐, 1587년 병조판서로 승진하였고, 1589년 2월 우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우의정이 된 해, 정여립 사건으로 고초를 겪게 된다. 정여립의 모반 혐의에 대한 고변이 들어오자, 정언신은 처음에 이에 대한 조사를 맡는 위관이 되었다. 그러나 서인인 정철이 사주한 대간들이 정언신이 정여립과 구촌간임을 이유로 탄핵을 하여, 위관과 우의정의 직을 박탈하고, 하옥되게 하였다. 정철이 대신 위관이 되었고, 조사 과정에서 정여립과 종친으로서 주고받은 서신이 드러나 정여립의 일파로 몰려 남해에 유배되었다, 갑산으로 유배지를 옮겼다가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사후 그의 억울함이 드러나 1599년(선조 32년) 다시 복권되었다.
정여립 사건과의 연루로 중형을 받아, 과거엔 두드러진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최근 그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주목을 받고 있다. 정언신은 당시 북방 여진족들의 위협을 평정하였고, 북방의 방어를 안정시킴으로써, 그 여력을 몰아 여진족과의 전투에서의 경험을 쌓은 무관들을 남쪽의 방어에 재배치함으로써 환란에 대비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가 병조판서로 있던 1589년(선조 22년), 비변사에서는 신료들의 추천으로 유능한 무관들을 채용하여 전국 각지에 파견, 외적에 대한 방어를 준비하게 한 바 있다.
임진왜란의 영웅인 이순신은 당시 우의정이었던 이산해와 병조판서였던 정언신이 같이 추천하여 중용될 수 있었다. 임진왜란 초기 전주로 진입하려는 왜군들을 격파한 웅치전투에서 후퇴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 부하들과 함께 전사한 김제군수 정담도 정언신이 추천한 무관이었다. 임란 후 병조판서 황정욱은 군사 지휘의 경험이 풍부했던 정언신이 있었다면 왜적에게 쉽게 참패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탄식하였다고 한다. /김우영(전주교육대학교 총장)